주일설교

그러나

아빠와 함께 2020. 7. 13. 09:18

그러나

2020년 7월 12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3:7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사도가 개인적인 견해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이 사도의 고백과 동일한 고백을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사도의 고백마저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란 세상이 진행되는 원리와 원칙을 보여주는 겁니다. 즉 그동안 사도는 본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자신이 자신을 살리는 식으로 살아왔다는 겁니다.

이런 안목은 그리스도를 만나보지 못한 자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출생할 때 가지고 나오는 목숨이라는 것이 자아를 지옥가게 만드는 성질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서, “누구든지 나를 해롭게 하는 말이라면 결코 나에게 씨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라는 정신으로 태어난 겁니다.

이는 곧 인간 스스로 힘으로 자신이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의 고백은 인간의 각오와 결심으로 도출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 앞에 누가 등장하면서 기어이 그 사람 속에서 괜찮아 보이는 것을 끄집어내어 ‘나를 유익하게 하는 용도’로 소유하려고 합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했다는 그 소식마저도 인간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차용할 의도로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이런 상식을 뒤엎습니다. ‘나의 유익’으로 최종 낙찰이 나면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결과가 예수님을 모독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오늘날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종교를 대신하는 최종 진리체제로 등장한 이 마땅에서 과학이 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네 목숨을 그냥 어떻게든 부지하라!”입니다. 하지만 이점에 대해서 사도는 이미 공부한 바가 있습니다. 내 목숨을 보다 고상하고 경건스럽고 거룩하게 유지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이 오신 진짜 하나님을 욕보이는 짓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수준의 거룩과 완전함은 인간이 자기 양심이나 지키는 식이나 도를 닦는 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6:53에 나와 있는 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존 목숨을 견지하고 유지하게 되면 바로 그 목숨이 너를 지옥으로 데려가게 한다는 겁니다. 도중에 내 목숨은 그 무엇과 교체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바꿔치기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는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제과점에서 사 온 치즈케익에 정말 치즈가 들어있는 지 칼로 잘라봐야 합니다.

칼로 자르면 단면이 나오겠지요. 그 단면을 끝까지 내려가 보는 겁니다. 치즈가 나올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치즈가 없다면? 그것은 물건 잘못 산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드는 방식이 이러합니다. 인간들이 태어나면서 기어이 놓지 않으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목숨이요 거기에 모든 자존심이 다 모여있습니다.

죽고 난 다음에 자존심도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인간들이 기어이 간직하려는 목숨과 자존심의 실체를 드러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즉 인간이 곧 하나님의 적이었던 겁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을 다시 적어보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그리스도에게 해’가 되는 일이란 평소에 인간들이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여기는 바로 그 일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은 인간에게 가장 고귀하게 간직하고 싶은 그 영역을 침투해서 건드려버립니다. 다시 말해, 목숨을 잃는 일보다 더 심하게 아프게 하는 일을 발생시키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 인간에게 상처가 될 겁니다. 그 상처에 예수님의 피가 고이게 되면, 이것은 천국에서도 받아주는 치즈 케익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가장 안 쪽에 하나님의 십자가 피가 침투해서 거기에 자리를 잡는 겁니다. 노아 홍수 때, 노아가 방주를 만든 취지도 여기에 있습니다.

방주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생뚱 맞는 물건입니다. 그 시대에 전혀 필요치 않는 겁니다. 이는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방주 없이는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방주는 인간의 삶의 터전에 없는 겁니다. 그 바깥에 만들어진 겁니다. 노아는 바로 그 ‘땅 외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노아는 거기서 ‘흠없는 짐승의 죽음’을 만나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그것이 바로 방주 안에서 누구나 그런 식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오늘날 ‘예수 안’입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을 향하여 한 걸음 두 걸음 차츰 밟아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미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격입니다.

이 엘리베이터가 마련되면 주님께서 율법을 성도에게 제시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5:17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25-26에는, “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율법에는, 악마가 인간을 괴롭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괴롭게 하는 징벌이 따라옵니다. 악랄하게 자기 백성을 다루십니다. 냉혹하고 냉정합니다. 인간들은 어지간해서 자기 목숨을 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사랑이란 우리가 먼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요한 일서 4:10) 사랑이 없으면 고소당합니다. 성도는 미리 고소당한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자기 행함을 내세울 것이 없게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압니다. 복음을 말하고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의 솜씨나 열심히 아니라 기적을 받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기적으로 인해 이 세상의 말을 듣지 않고 주님의 말씀만 듣고 삽니다. 예수님을 이용할 생각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늘 ‘예수님께서 여기 있음’과 그 지시에만 듣게 됩니다. 이미 구원이 완성된 증거인 피, 이 피와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꾼 자들이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나의 상처에 예수님의 피와 살이 늘 고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1강-빌 3장 7절(그러나)2007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3장 7절입니다. 신약성경 320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사도가 하는 말입니다. 내게 유익한 것은 전부 다 그리스도에게 해악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나의 적은 그리스도의 적이 되고, 그리스도의 적은 곧 내가 그리스도의 적이 된다는 겁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 잘되기 위해서 내게 도움이 된다는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전부 다 잘라내고 없애기를 본인이 원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누구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것이 성도의 주된 관심사, 우선 관심사가 되어 있습니다.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우리가 이런 사도와 사귈 마음이 있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도와 사귈 맘이 있어요? 누구와 사귄다는 것은 공통점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겁니다.

사도가 이런 말, “내게 이익 되는 것은 다 그리스도에게 해가되는 체험을 나는 했어.”라고 말을 했을 때 그분과 사귀려면 “나도 그래. 나도 지금 그런 형편이야.” 라고 공감이 되어줘야 돼요. 그래야 사귐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 사도바울이 그냥 사람이나 사귀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는 지금 그리스도와 사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귀는 사람은 다들 이와 같은 고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내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본성이 나온다, 그것은 우리가 인정하겠다, 하지만 그 나를 위해서 이익 되게 했던 그 모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안목에서 보게 되면 그리스도에게 해악이 되는 것이다, 라는 것도 아울러 이제는 내가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교회라는 것은, 성령을 통한 교회라는 것은, 이것은 인간들이 예상 못한 새로운 연대를 이루는 겁니다. 연대, 연결되는, 서로 통하는 단체나 집단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연대는 어떻게 만드는가? 옛날 국민학교 적 미술시간에, 공작시간에 하는 것이 있지요.

도화지에 칸을 열여섯 개로 나눈다 합시다. 줄을 그어서 열여섯 개의 칸을 만들어서 그 좁은 칸의 중심마다에 똑같이 구멍을 뚫으려고 하면 어떻게 뚫겠느냐, 하고 선생님이 숙제를 내지요. 도화지는 하나인데 칸이 열여섯 칸, 그 칸마다 중심지점에 구멍을 내려면 너희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어, 라고 문제를 내면 보통 아이들은 자를 가지고 좌우 대칭 맞춰서 점 찍어가면서 하는데 여기서 천재들은 좀 다르지요.

종이를 접습니다. 둘로 접고, 넷으로 접고, 여덟로 접고, 그런 식으로 네 번만 접으면 열여섯 개의 칸이 되잖아요. 거기에 한 개의 구멍만 뚫어놓고 도로 펼치면 열여섯 개의 칸의 중심에 똑같이 구멍이 뚫리는 겁니다. 사도바울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 사도바울과 어떻게 연대를 이룰 것인가? 사도바울이 하는 이 고백이 어떻게 나의 고백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을 똑같이 보고 예수님을 앞장세워서 하나님이 예수님에다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구멍 뚫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뒤에 사도, 그 뒤에 성도들, 다 뚫립니다. 천국 가는 사람들은 바비큐처럼 다 뚫려버린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에게 있었던 그 일이 동일하게 일어나는 사람들의 집합, 그게 바로 천국 가는 교회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멀쩡하게 왔지만 십자가라는 구멍이 뚫렸습니다. 그러면 그 구멍과 동일한 구멍이 나야 돼요. 사도바울은 물론이고,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고, 성도들도 마찬가지고 동일한 십자가라는 구멍이 뚫려야 돼요. 십자가라는 구멍은 무엇을 뜻하느냐?

바로 인간이 그동안 나 위주로,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나의 유익을 위해서 제일 중앙에 자리 잡은 그 자리가 주님에 의해서 이것은 해악이 되기 때문에 천국 가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되고 방해가 되기 때문에 주님의 성령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끝까지 내 것, 이것만은 쥐겠다는 그 지점에 구멍을 뚫어버려요.

구멍을 뚫어버리면 거기에 나중에 무엇이 보이게 되느냐?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찢겨진 살이 그 구멍 안에 고이게 되는 겁니다. 그게 내 안에, 내 가장 중심점 그 안에 있어줘야 그래야 사도바울과 이바구가, 대화가 된다고요. ‘나를 지키려고 하는 그 모든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주께서 이 것 때문에 돌아가셨구나.’ 하는 것을 늘 확인하는 겁니다.

그런 구멍이 뚫려 있어야 돼요. 그러면 우리 안에, 내 안에 가장 깊숙한 곳에 상처를 입겠지요. 그 상처에 대해서 자꾸 때우려고 하지 마세요. 그 상처는 오히려 더 키워야 돼요. 상처를 키우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지금 우리를 당장 죽여도 되는데 왜 주께서 우리를 안 죽이시는가? 우리 안에 상처를 키우기 위함입니다.

그걸 봉합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이 남에게 안 들키려고 하지 마세요. 그 상처부위가 점점 더 커져야 돼요. 커져서 나중에 그 상처의 면적이 내 몸의 전부가 되어야 됩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기 위해서 버티고 있는 이 육신이다, 라는 고백이 절로 나와야 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스캔하지요. 우리가 생일에 케이크 자르듯이. 케이크 사게 되면 “치즈 케이크 주세요.” 하잖아요. 치즈 케이크 겉으로 보면 치즈가 하나도 없어요. “치즈 어디 있습니까?” 하면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집에 와서 케이크를 그 단면을 자릅니다. 단면을 자르는 이유가 무엇을 조사하기 위함이냐 하면, 과연 치즈가 들어 있는가를 조사하기 위함이지요.

우리가 한평생 사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가 감추고 ‘이것만큼은 내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다치게 하기 싫어요. 이것만큼은 상처 나기 싫어.’ 하는 그것을 단면으로 잘라버리면 그 안에 예수님의 피가 들어 있는지, 십자가의 피가 들어 있는지를 조사하는 겁니다. 그 조사하는 방법이, 이미 조사당한 사도바울이 눈치 없이 그냥 오늘 본문 7절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제목이 ‘그러나’ 인데 7절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라고 자기 자신의 가장 깊숙한 면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요. “나라고 하는 것은, 나라는 인간의 육신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지옥 갈 몸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몸은 내 이익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 왔었습니다. 율법에 흠이 없도록 애썼고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었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잘 믿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나는 내안에 천국갈 수 있는 어떤 요소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치즈가 없어요. 그 안에 분명히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은, 표면으로는 티를 냈는데, 거룩의 티를 냈는데 안에는 거룩이 들어있지를 않았어요. 주께서 안 받는 육신을 내가 아까워서 계속 쥐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받지도 않는, 천국에서는 받지도 않는 이 인생을 그게 그렇게 아까워서 쥐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 6장을 죽 보면 노아 홍수이야기, 방주이야기 나옵니다. 노아가 어디에 들어가요. 홍수가 온다는데 어디에 들어가요. 어디에 들어가느냐 방주 안에 들어갑니다. 들어간다는 이것이 참 어려운 말인데요. 그냥 그 땅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살면 되는데 노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아니야, 여기서 그냥 태어난 대로 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고향에서 태어나서 고향에서 살면 안 되고 어디를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어디로 들어가느냐? 미국, 그리스, 아프리카, 태국, 아니 그거 아니에요. 이 땅에 없는 곳에 들어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노아방주의 의미에요. 이 땅에 없는 곳. 그게 뭐냐 하면, 주께서 노아로 하여금 자기 손으로 방주를 만들게 했습니다.

방주 안에서 뭐가 기다렸느냐? 정결한 짐승의 죽음이 기다려요. 창세기 8장 20, 21절에 보게 되면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노아가 방주 안에서 만나야 될 대상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깨끗한 죄 없는 제물, 대신 피 흘려 죽고 번제를 바쳐야 될 그 짐승과 만나는 장소에 노아는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노아가 들어가서 정결한 짐승의 희생제물을 만났을 때 그 희생제물 쪽에서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겠습니까? “노아님, 이 방주 안에서는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나 잘나서, 내가 방주 잘 만들어서 구원받았다.’ 그런 소리해서는 안 됩니다. 정결한 짐승의 희생을 만나서 그것으로 당신의 인생과 대체해야 바꿔야 됩니다. 바꾸기 해야 됩니다. 내 인생 말고, 내 목숨 말고, 지옥 갈 이 내 목숨 붙잡지 말고 바꾸기 해야 됩니다.”

그것을 노아방주에서부터 이미 가르친 거예요.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친 거예요. 지금 교회 나오든 말든 간에, 또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 신종코로나 때문에 벌벌 떠는 이유는요, 내 목숨을 바꿀 그것이 없어서 그래요. 내 목숨을 바꿀 어떤 대체되는 대상물이 없어서 그래요. 쥐고 있어봐야 이 목숨이 나를 지옥으로 이끕니다. 지옥으로 이끄는 삶이에요.

그러면 그 전에 바꿔야 되거든요. 이 목숨, 이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타나면 후딱 바꿔야 돼요. 이거 안 바꾸고 코로나 있으면 그 코로나 대비한다고 어떻게 하고, 이것보다 더 한 것 나오면 또 그것 대비한다고 하고, 폐렴이 퍼지면 또 폐렴에 대비한다고 하고, 전부 다 평생을 사는 것이 발발, 벌벌 떨면서, 두려워하면서 자기 것 지키는데 연연하는데 해봤자 나중에 칠순, 팔순, 구순 되어봐야 그것은 애초부터, 처음부터 지옥가게 된 치즈 없는, 예수님의 피와 살이 없는 그 육신이고 그 몸이기 때문에 언약 없이 지옥갈 수밖에 없지요.

저주와 심판의 대상, 노아가 살던 때 그 땅의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 땅의 사람으로 저주받아서 죽습니다. 방주가 없는 거예요. 그 땅에 없는 다른 요소, 내가 들어갈 곳이 없이 그걸 만나지도 못한 채 평생을 살다가 그냥 그 땅에서 저주받고 지옥 가는 겁니다. 갈아타라, 그 말입니다. 네 안에 살지 말고 예수 안에 살라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 안에 있다면 더 이상 나의 유익된 것은 도리어 이 예수 안이라는 환경을 모독하고 공격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에 나는 오늘 본문에서 내게 이익 되는 것은, 버려야 될 나를 스스로 지키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해를 끼치는 일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할 테니 여러분 저와 사귈 맘이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겁니다. 저와 연대할 맘이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거예요.

안양모임이 있는데 거기 어떤 성도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지난 3, 4월 한창 서울에 코로나가 번성할 때 자기 남편이, 물론 그분은 모임에는 안 나오지만 그 분이 하는 말이 “여보, 지금 코로나 번창하고 있는데 성경모임 하는 거 당신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그 모임에서 코로나 다 들어와도 우리 다 같이 죽을 테니까 당신은 코로나 때문에 주저주저 하지 말고 마음껏 성경공부 하라고 남편이 격려를 해줬답니다.

그래서 내가 쫄아서 모임 안하고 처음으로 동영상 찍어서 올린 거예요. 제가 쪼는 사람은 그런 사람밖에 없어요. 제가 주눅 드는 사람은 그런 사람밖에 없어요. 살려고 모임참석 안하는 사람한테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아요. 그것은 지옥 갈 목숨을 바꿀 데가 없어서 그냥 쥐고 있는 사람이에요. 버리면 되는데 그냥 쥐고 있는 거예요. 이 참에 버리면 되는데 살려고 그냥 쥐고 있는 겁니다. 살아봤자 사는 게 지옥에서 사는 거거든요.

그런데 강남모임의 어떤 집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강남모임에 참석했다가 집에 들어가니까 남편이 하는 말이 “당신 모임에 참석했는데 이제부터 14일 동안 격리다.” 물론 그 남편이 농담으로 그런 소리 했겠지요. 처음부터 격리해서 각방 쓰고 있었는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요. 남편이 자기를 싫어하는 마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거예요.

자, 14일 동안 격리하라. 이거 무슨 뜻입니까? ‘내가 태어나서 지금껏 유지해온 내 목숨은 어쨌든 간에 내가 안 지키면 누가 지키나? 나 지키고 싶다. 나는 이 나이에 죽기는 싫다.’ 그런 뜻이거든요. 목숨의 질이 지옥 갈 질인지 천당 갈 질인지를, 그걸 대조할 수 있는 기준점을 그 남편은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거예요. 지금껏 살아온 그 버릇대로 그냥 가는 거예요. 뭔가 도중에 바꿔치기 해야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두 남편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우리 집에 코로나 바이러스 완전히 범람시켜.” 이것하고, “14일 격리. 나만 살겠다.” 하고 얼마나 차이 나는 거예요? 우리 힘으로서는 바꾸지를 못해요. 주님께서 바꾸게 하시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이 목숨이라는 것은 얼마나 귀한지요? 절대로, 어떤 경우라도 이 목숨만큼은 버티려고 해요.

주님께서 강제로 바꿔주는 방법은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사랑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고소하는 거예요. 사랑했으면 고소 안 당했을 겁니다. 사랑하지도 않는데 껄떡대니까 고소당해서 죽어버리잖아요. 우리가 사랑 없는 사람의 그 말로를, 사랑받은 적이 없는 사람의 말로를 우리가 성경에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가룟유다에요. 가룟유다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 양심대로 살았습니다. 오늘 기도하신 분의 기도에 나온 것처럼 양심대로 살았어요. 전형적으로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가족 중에서 둘러보세요. 한 두 명 다 그런 사람이 있어요. 오히려 그 사람들보기에 우리가 이상해요.

사람이 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그동안 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동원된 것들이 있어요. 그게 윤리와 도덕입니다.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붙잡았어요. 물론 치즈는 하나도 없고요. 예수님의 피도 없고, 예수님의 찢겨진 살도 없어요. 없지만 이만하면 남들이 인간성 좋다 하더라, 인간다운 인간이더라, 그것 붙들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바로 고소를 해버립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 보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율법이나 선지자를 이제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이제 완전케 한다.

어떻게 완전케 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5장 25, 26절에 보면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사과)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써, 이미, 미리 우리를 고소하고 있었던 겁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저주를 받을 찌어다. 그 말씀을 하기 전에 먼저 선행해서 율법으로 모든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차원에서 거룩하고 거룩하고, 흠이 없고 흠이 없는 차원에서 우리를 말씀으로 고소하고 있었던 겁니다.

요한복음 5장 45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에게 주어진 모든 율법이 미리 우리에게 고소한 거예요. 그 고소의 정도는 어느 정도냐? 그것은 출애굽 첫 번째 유월절에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유월절에 집집마다 방문해서 그 집의 맏아들을 다 죽이는 그 천사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하나님의 거룩에 의해서 그냥 아무생각 없이 냉혹한 집행자들이에요. 킬러, 냉혹한 집행자들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때 ‘악마는 참 악랄하다. 참 나를 힘들게 한다.’ 하는데 그 말은 잘못된 겁니다. 악마보다 더 악랄해야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악마보다 더 심하게 나를 다뤄야 돼요.

네가 상상할 수 있는, 악마가 나를 집적대고, 괴롭히고, 나의 가진 것 나의 인생을 뭉개버리는 그 이상의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에게. 왜? 악마는 안 거룩하지만 주님은 거룩하기 때문에. 지금 제가 생각해도요,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이것도 얼마나 큰, 이런 기적이 다 있나 싶어요. 세상에 이런 기적이 다 있습니까?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지금 경찰이나 나라가 봐주고 있잖아요. 우리는 이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 그동안 몰랐지요. 당연히 복음을 전하면 그런 여건이 되는지 알았지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복음전하면 저 3백만 원, 장로님도 3백만 원……, 다 3백씩 내야 돼요. 3백만 원, 3백만 원, 다 내야 돼요.

그러면, 3백만 원 안내려고 교회 안 나오면, 그러면 그 사람은 돈이라는 것……, 돈이 왜 중요하냐 하면 내 목숨을 살리잖아요. 돈이 지향하는, 그러니까 그 내 목숨 태어날 때부터 지옥가기로 되어 있는 그 내 목숨을 내가 지키기 위해서 복음 전하는데 못 있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 왔잖아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빌립보서 3장 7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이 복음내용을 이야기할 때, 그 당시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저도 마찬가지지만 그 이야기할 때 무슨 이야기도 왕왕왕, 귀에 들리느냐 하면, “몰라도 되는 이야기를 왜 해야 되는가? 안 들어도 되는 이야기를 왜 해야 되느냐? 때려치워라. 듣기 싫다.” 하는 소리도 같이 왕왕왕, 들려와야 돼요.

이 환경이 그런 환경입니다. 용기를 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복음을 펼치고 전하고 볼 수 있게 틈 없는 틈에 틈을 내준 것도 하나님의 성령의 큰 은혜라는 것도 우리가 감사히 받자는 거예요. 당연하게 복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도행전 보시게 되면, 진짜 여러분이 성경 잘 안보시기에 그런 현상들이 있는데, 사도행전을 보시고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상황이 일어났는가를 제가 몇 구절 뽑아서 말씀드릴게요.

사도행전 23장 14절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는 상황이에요. 복음 전한다는 그 사도바울 죽이기 전에는 밥도 안 먹겠다는 거예요. 여기 대제사장과 장로들이라 하니 자꾸 옛날이야기로 생각하는데 지금의 질병관리본부장이나 정 세균 총리부터 이 정권이 하는 말이, “교회가 이 땅에 눈에 띄는 것 꼴 보기 싫어서 밥 안 먹겠다, 할 정도로 꼴사나워서 못 보겠다.” 지금 그런 상황이에요.

“너희들에게는 복음이 중요하지만 우리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교회 안 중요해. 문 닫아버려라, 인간들아!” 이거라니까요. 그 환경이라니까요. 교회당 3백이 아니고 두당 3백만 원이에요. 지금 대체 3백만 원씩 몇 명이에요. 3백만 원 벌금이에요. 오지 마라, 교회 없애라, 그 말이거든요 지금. 소규모 모임 없애고, 십자가수련회 없애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요. 이것만 교회가 아니고 모임도 교회에요. 안양모임, 강남모임, 수련회, 다 교회입니다. 소모임이 아니고, 그것은 저쪽에서 하는 이야기고,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곳이 교회입니다. 아이고, 일요일에 모이자. 월요일에 모이면 일요일에 모인 그 과거는 벌써 사라졌어요. 월요일이 교회에요. 화요일에 모이면 화요일이 교회에요. 일요일 지켰다고 화요일에 교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제발 자신을 좀 악랄하게, 마귀보다 더 악랄하게 다룰 줄 알아야 돼요. 우리의 양심, 윤리도덕 아무짝도……, 물론 이 땅에서는 필요한데요. 이 땅에서는 성추행 당한 사람에게 고소당해버리면 양심껏 죽어버리면, 대단한 성인군자로 봐줄 줄 모르지만 천국에서는 그런 것 없어요. 성추행 때문에 고소당했다고 자살해요? 저는 안 믿습니다. 성추행 정도가 아니에요. 이것은 정치적 문제라서 입을 다물겠습니다. 무슨 성추행정도 했다고 해서 고소를 당했겠어요. 더했겠지요. 더 한 것이 있겠지요.

이스라엘백성들이 유월절에 나와서 홍해에 들어갔을 때에 뒤에는 애굽군대가 따라왔고 앞에는 홍해 물가가 넘실거렸습니다. 빼도 박도 못한 상황이지요.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우리보고 죽으라는 이야기인가?”

교회 문 열면 1인당 3백만 원 벌금 때려버리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통해서 너희들이 말하는 그 복음이 하나의 은유의 범람에 지나지 않은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지, 진짜 십자가 피까지 그 뿌리가 박혔는지를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통해서 보게 하는 겁니다.

겉으로는 복음이고 교회인데 한번 케이크 단면으로 잘라보자. 그 안에 피가 있는지. 내 목숨 있는 자리에 예수님의 피가 고여 있는지 한번 보자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교회로서는 진퇴양난이에요. 동영상 보는 그것이 무슨 연대입니까? 그게 무슨 사귐이에요? 주고받는 겁니까?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2장 13절에서 사도바울본인도 깜짝 놀랄만한, 본인도 너무 놀라서 하는 이야기가 고백되어 있어요. 지금 사도행전 그 시대와 똑같은 시대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그러니까 “너희들은 사람의 말을 묵살할 수 있는 인간들이구나. 세상에 이런 놀라운 일이 다 있느냐?” 벌금 3백만 원 이걸 그냥 인간의 말로 듣는 거예요. 묵살해도 괜찮은 상관없는 말로. 그런데 사도의 말은 뭐냐? 사람의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에게 유익되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게 해가 된다.” 그 말은, “사도의 사적인 견해나 사도의 개인적인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내가 깜짝 놀랐다.” 그 말이에요.

“어째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느냐?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 봐라. 남 이야기 들으면 다 사람의 이야기가 우선이고 하나님은 안보이니까 무슨 소리해도 완전히 묵살하고 오직 사람의 이야기나 눈치보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데 너희들이 내 말, 사도의 말을 들을 때 사적으로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잖아. 그러니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게.’ 이것이 아니라 ‘저분에게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어떻게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열렸느냐? 나는 놀라워라.”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에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예레미야 36장 22절에서 23절에 화롯불 하나 등장합니다.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여후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작은 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예레미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예언을 두루마리가죽에 적어놨어요. 그걸 펴서 죽죽 읽어주니까 그 읽어준 대목을 칼로 째서 화롯불에 다 집어넣었어요. “그래, 여호와 하나님이 이런 소리 했다고? 난 불에 집어넣는다. 오, 그래? 불에 집어넣어.” 다 집어넣는 거예요.

화가가 열심히 그림을 그렸는데 사주는 사람이 없지요. 대구 화가들이 화가 나서 불을 피워놓고, 동료화가들의 그림까지 돈 주고 사서는 불피워놓고 그 그림을 다 불속에 집어넣었어요. 어제 대구에서 그런 이벤트, 삼덕 아파트인가 거기서 그런 이벤트를 벌였습니다. “이 코로나 지경에 그림 안 팔리면 우리 손으로 그림 태운다. 너희들 우리가치를 안 알아줬잖아.” 하고 불에 태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상적인 것이고, 이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이 지옥 갈 목숨, 지옥가려고 나온 이 목숨이 얼마나 대단한 목숨인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쫄지 않습니다. 겁먹지 않습니다.” 그런 세계입니다. 이 세상이. 그리고 우리도 똑같은 목숨으로 이 땅에 지니고 태어났어요.

그래서 지금 이 말씀, 본문 빌립보서의 이 말씀, 내게 이익이 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 해가 된다는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만약 믿으신다면 이것은 여러분이 성령 받으신 거예요. 이것은 나의 결심이나 오기가 아닙니다. 거의 미친 거예요 이것은. 눈앞에 3백만 원 그것이 아깝지요. 전혀 이것은……, 눈앞의 3백만 원 그것이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사도의 말은 진짜 개떡으로 보이는 거지요.

그렇다면 사도행전에서 사도바울이 무슨 소리를 했기에 그 사람들이, 나 사도바울 죽이기 전에는 밥도 안 먹겠다고 ……, 밥 먹지 마, 먹지 마, 그렇게 결심을 했는가? 사도행전 26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거예요.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지금 여기 계신다는 겁니다. 새로운 나라의 왕으로서, 방주안의 새로운 제국의 왕으로서 이 땅에 계시다는 단지 그 이야기를 했어요. 죽었다가 살아났다. 인간이 죽였는데 하나님이 그분을, 인간이 죽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전체를 죄인으로 간주하기 위해서 그분을 살려냈다, 라는 단지 그 이야기했어요.

인간이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떤 짓을 하고 교회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주께서 일체 무시해버리고, 오직 예수님이 말씀대로 살아났다는 그 이야기를 하니까 그 당시 그 이야기를 듣던 아그립바왕이 하는 말이, 네가 짧은 말로 나를 신자 만들기 위해서 애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8절)

이렇게 자신이 갖고 있던 기존의 목숨을 본인이 지키겠다고 튕겨버립니다. 이걸 보면서 ‘이 아그립바 왕이, 사도바울이 진짜 귀한 진리 감추어진 진리를 이야기했는데 왜 버티냐? 진짜 아그립바 왕이 지옥가야 되겠네.’ 라고 여러분이 분노가 치미십니까? 그러면 우리 자신을 한번 봅시다. 그 사람보고 분노할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은요?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나보다 더?

마태복음 18장 6절 보게 되면, 사도행전의 사도바울이 당했던 것,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당했던 십자가, 그것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그 상황이 그대로 열두 사도에게 똑같이 되풀이 되고, 그리고 성령 받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똑같은 상황이 유발되고 똑같이 되풀이되는 겁니다.

복음에 대해서 설명해보라 .그러면 두 시간 세 시간씩 그냥 막 설명해요. 복음에 대해서 강의해보라. 서너 시간 강의 죽죽 나옵니다. 그런데 본인은? 강의는 잘하는데 그 뿌리가, 자기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고 싶은 그 자기의 목숨자리, 자기의 자존심 자리까지 예수님의 뿌리가 거기에 와 닿지를 않은 거예요.

와 닿지를 않으니까 어떻게 되느냐? 붕 뜬 거지요. 붕 떠서 살아가요. 이 말씀에서 붕 떠서 살아가요. 말씀에 박혀야 되는데 안 박혔어요 기초공사가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가지고 3백만 원, 3백만 원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천만 원, 그러면 쉽게 다 넘어가요. 다 넘어간다고요. “예, 복음대로 안 살겠습니다. 마귀님, 살려주세요.” 하고 손들고 항복 선언하고 기어 나오는 거지요.

버티라는 말씀을 제가 드리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래, 나도 사도바울처럼 버텨야지.’ 버텨봤자 이거 며칠 가겠습니까? 몇 개월 가겠습니까? 더 센 풍랑이 오게 되면 휘딱 넘어가는데요. 신천지가 교육할 때 예상되는 온갖 환란을 미리 맛보게 하는 겁니다. 신천지교회 말고 또 다른 교단의 교회가 교인들은 이 마지막 환란에서 이기고 남기 위해서 먼저 시범조로 훈련시킨다고 온갖 더러운 오물 먹게 하면서 다 했지요.

신천지도 마찬가지거든요. 훈련시킨다는 말이지요. 예상 상황을 사용해서. 그런데 신천지가 중국 우한에 교회 세우려고 하다가 좌절되었어요. 그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주께서 열어줘야 복음을 안다는 사실을 까먹고 마지막 남은 자기오기 있잖아요. 내가 복음 안다, 내가 예수 믿는다, 내가 목사라는 그 오기, 오기, 의리, 그것가지고 버티다가 마귀가 바보입니까, 왁, 왁, 하고 고함지르니까 깨갱, 하고 다 주저앉지요.

마태복음 18장 6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주께서 진짜 이것은 마귀, 악마가 우리보고 하는 것보다 더 심한 말을 했어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여기 있는 어린아이, 소자 하나 무시하게 되면 차라리 네 목에다 연자 맷돌 매서 두 번 다시 떠오르지 말라고 바다 깊숙이 집어넣는 게 차라리 낫다고. 사람이 자살해도 너무 끔찍하게 자살해요. 얼마나 독했으면 맷돌을 가지고, 그냥 강물정도가 아니고 깊은 바다, 시체도 못 찾게,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게 연자 맷돌, 그 무거운 맷돌, 대한민국 맷돌 아니에요, 이스라엘 가면 연자 맷돌이 커요, 그 무거운 바위를 목에 매고 깊숙한데 집어넣을 마음준비가 다 되어있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주님께서 구원하겠다는 사람에 대해서, 너희들이 거기에 대해서 훼방하게 되면 거룩한 율법이 너희를 철저하게 따라 붙여서 너희를 저주하듯이, 내가 마음 열어줘서 복음이 예수님의 피와 살이 닿은 사람을 너희들이 함부로 인간적으로 해석하고 평가한다면 그 인간을 나는 연자 맷돌로 매서 깊은 바다에 집어넣는 악랄한 방법을 사용하겠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이 말은 뭐냐? “이 불신자들아 제발 떠오르지 마라. 이 세상에서 내가 저주를 해서 묻히게 하거든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꼴 보기 싫다. 떠오르지 마라.” 그 자체가 지옥이 되는 거예요. 갇히게 되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 세상에 갇혀 있어요. 율법에 갇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대로 율법에 갇혀 있는 거예요. 갇혀서 사람 말 듣고 연대를 이루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세상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구멍이 뚫리고, 그 뚫린 구멍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땅에 자신의 생명의 피와 생명의 살, 십자가를 남겼다는 그 구멍을 발견했다는 이 사실이 우리의 목숨을 백번을 바꿔도 바꿀 수 있는 충분한 진리입니다. 아깝지 않아요. 절대로 아깝지 않습니다. 우리 목숨의 열배를 갖다 바친다 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너무나 소중한 거예요. 너무나 귀중한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 당시 자신을 비난한 사람들에게 웃습니다. “네가 율법을 논하고 여호와가 어떻고 계명이 어떻다고? 나 그거 도사야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고 율법에 대해서 나보다 더 아는 사람 없어. 나 그거 다 해봤어. 양심대로 바르게 살고, 시키는 대로 살고 다 해봤어. 그러나 악마가 더 세.” 악마다 우리보다 더 세다고요.

사람은 자꾸 율법주고 “이거 지키면 여러분……” 하면서 자꾸 뭘 하게 하는 거예요. “기도하세요. 헌금하세요.” 자꾸 뭘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세요.” 내가 어떻게 뭘 할 수 없는데 자꾸 율법처럼 주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이겁니다. 천국의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 그냥 있는데 엘리베이터 안 예수 안에 갇혀 있다 보니까 계단이 필요가 없네요. 양심대로 자살할 필요도 없고, 뻔뻔스럽지만 그냥 버티고 살면 돼요.

‘나 원래 그런 강도야. 그런 세리고 창기야. 나는 돈밖에 몰라.’ 그렇게 살면 안 되겠습니까? 그게 뭐냐?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고 그리스도 앞에서 해가 된다는 사실에 눈이 떠서 그걸 알게 되었으니 나는 이런 고백과 같이 연대할 사람 오세요. 누구십니까?”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나와 연대할 사람, 구멍 뚫린 사람.

이제 마지막으로 방법 말씀드리고 끝내겠습니다. 이가 좀 아프다 싶으면 이빨을 빼세요. 이빨 뽑으시면 됩니다. 안젤리나 졸리라는 키가 커다란 미국의 여배우는 외가 쪽 유전자가 유방암을 유발할 확률이 70퍼센트라는 소리를 듣고 멀쩡한 자기의 가슴을 암 걸리기 전에 다 절제했습니다. 이게 미리 다 고소당하는 거예요. 주님한테.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성경 봅시다. 보면서, 여러 가지 구절이 있지만 잘 아는 구절이 있지요. 네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그런 것 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이 미리 고소하는 거예요. 네가 돈을 사랑하지 말고, 그런 것도 있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 힘으로 그 말씀을 못 지킴을 고소당하는 겁니다.

고소당하는 벌이 악마가 주는 벌보다 더 악랄해요. 인정사정도 없습니다. 냉혹합니다. 즐깁시다, 그걸. 그 냉혹함을.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에요. 아주 작살내러 온 겁니다. 바로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이,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내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또 주님 사랑했다고 내자랑하기 때문에 그것도 주 앞에 해가 돼요.

그냥 사랑은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는 것을 아는 사람, 아는 사람, 계단 말고 엘리베이터, 이미 그리스도안 방주 안, 거기서 내가 만날 분은 나를 위해서 미리 죽으신 그 흠 없는 희생제물 되신 그분, 그동안 우리는 당연히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놈의 3백만 원 때문에 갑자기 새로워지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그래 가져가라 내 목숨, 지옥 갈 목숨, 안 그래도 이것 처분 못해서 걱정이었는데 잘됐다. 가져가.’ 3백만 원에서 더 올리면 천만 원, ‘그래, 가져가.’ 나중에 더 올리면 ‘다 가져가, 다 가져가. 여기서 끝내자.’ 제 설교도 끝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만사가 말씀대로 되는데 우리는 말씀을 이용할 생각했습니다. 이 얼마나 마귀적인지요. 예수님 십자가 이용하고 부활 이용해서 나 살려고 하는, 나에게 이익이 되고자 하는 얕은 요령, 수작, 이제는 그것을 버리고 주님이 왜 계신가, 왜 저는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 서 있는가? 주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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