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가을이 되면 벼 추수가 끝나고 콩과 깨 추수를 할 때 마당 가득 커다란 비닐 매트를 깔고 콩을 널어놓고 바짝 말리는 작업을 한다. 속이 여물었어도 잘 말리지 않으면 콩 껍질과 콩이 잘 분리가 되지 않기에 며칠을 잘 말리고 난 후, 때가 되면 긴 막대기를 들고 엄마와 아빠께서 콩을 사정없이 타작하기 시작한다. 콩이 껍질에서 분리되어 이리저리 튈 때 매트 밖으로 떨어지는 녀석들이 껍질이 아니고 알맹이라면 반드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줍는다.
긴 장대로 바짝 마른 콩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칠 때 콩이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알았다면 ‘왜 아무 잘못 없는 나를 때리세요? 아파죽겠어요. 억울해요’라고 아우성을 치지 않았을까. 그렇다 한들 어린 나조차도 그 매트라는 자리를 벗어나 전체적 관점으로 콩을 바라보니 그 콩이 왜 맞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콩이 껍질 없이 태어났다면 그냥 깨끗하게 씻어서 먹었을 텐데 하필 껍질을 갖고 태어나서 분리작업을 위해 타작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매트 위에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 바라보며 너나 나나 다 같은 콩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 당연한데, 타작 매트 밖에서 일하는 분의 뜻을 타작 매트에서 얻어터지는 콩에게 알게 하시고 알맹이를 품고 잠시 매트 위에 포함된 콩과 매트에 속해 혼연일체가 되어 삶을 마감하는 쭉정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더이상 ‘왜 때려요? 아파 죽겠어요’라는 말은 고사하고 진짜를 가리는 환상이고 허구인 껍질을 그럴싸하게 유지하려는 노력보다 껍질과 알맹이를 분리해 알맹이를 드러내게 하시려는 주님의 타작 작업에 집중하게 되는 것은 무척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다.
껍질이 조금 벌어져 그 틈으로 삐져나온 낯선 과거가 공유되었다고 해서, 그런 고백을 한다고 해서 타작을 멈추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껍질과 분리되어 오롯이 예수님의 고통과 상처의 열매인 피만 드러날 때까지 타작은 계속되어야 하고 정하신 때까지 지옥 생활 지옥체험은 유지되는 것이 마땅한 조치이다.
야곱의 껍질이 벗겨지고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이 모든 것을 장악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혈육과 정과 사람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환경에서 예상치 못한 난데없는 상황으로 이끌림을 받으면서 노선변경이 일어날 때 있는 그대로 다른 환경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주체가 쪼개지고 자아가 분열됨을 동반하면서 주님이 주의 것을 회수하기 위해 육의 문을 쪼개고 난입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내 몸의 구원을 의심치 않고 동일성을 유지하며 내 시간이 만들어가는 순조로운 역사의 흐름을 낯선 시간이 침투해서 혈과 육에 얽힌 내 기억을 내 과거를 조각조각 파편으로 만들 때 토막 난 시체가 살아있다는 망상을 불러일으키는 악한 시스템의 면역체계가 가동되면서 혼돈을 질서로 바꾸려는 반발이 거세게 일어난다.
그 시도가 무색하도록 압도적인 주님의 과거 격침에 어느새 피의 반석 위에 옮겨져 심겨있는 진짜 현실 안에서 저주와 심판의 위력을 맛보고 모든 책임을 박탈당한 채로 주관자의 이루심에 전심을 다 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한량없는 은혜라고 말한다.
주님의 침노를 받아도 여전히 세상적 방식이 너무 상식적이고 자연스럽다는 관성의 법칙은 적용되고 누구도 자신을 망하게 하고 가족을 죽이고 더 나아가 자기를 죽이려는 현상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은혜라고 순순히 말하지 못한다. 이미 형성된 이념과 판단 기준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개그나 코미디 영화 같은 상상을 해본들 아니면 억지 납득을 하며 ‘그렇다 치고’를 되뇐다 한들 저 무의식 세계에서 떠돌던 농담이라는 단어가 서서히 의식 세계로 부상하는 결과를 막을 수는 없다.
개그적 상상을 해보면 어떤 엉뚱한 부부가 무인도에 고립되어 아이들을 낳았는데 아이들과 소통하는 언어의 의미와 개념을 완전히 뒤집어서 사용했다고 해보자.
죽음을 생존으로
행복을 망함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뒤바꿔서 언어를 정립시켰다면 그들의 주고받는 대화는 “건강하게 오래오래 죽어라~, 엄마는 너희들이 오늘도 망하기를 바란단다~, 신이 저주가 임하기를~”이라는 말이 웃으며 오갈 것이다. 이 가족이 무인도에서 구출되어 정상적 일상적 삶에 합류되었다면 대혼란이 일어날 듯하지만 잠시의 혼돈은 금세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재정립해서 질서체계를 만들며 적응할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았겠지만, 여자는 태어나면서 이미 ‘신부’라는 정체성을 경험하기에 성경 말씀에서의 예수님의 ‘신부’라는 의미가 더 쉽게 이해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남자들은 본인들이 신부가 아닌 신랑이었기에 주님의 신부라는 말씀의 의미가 공감되기 쉽지 않다고. 그때는 일리 있는 말처럼 들렸는데 지금은 ‘과연 그럴까’로 변한 것이 이상하다.
질서와 안정감을 위해 신앙을 믿음을 이론으로 무장하려고 애쓸수록 주님에게 속한 진리에 더 반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있고, 내가 속한 이념이 있고, 내가 판단하는 개념과 조건이 있고, 이 속에서 표현되는 어떤 언어도 주님의 의도를 벗어날 수밖에 없고 자신이 기껏해야 하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살인자인 것을 자폐적으로 노력해서 알 수 없으며 그러하기에 내가 그 역할을 해보았다고 해서 ‘신부’가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그 ‘신부’가 아닌 것이다.
이웃이 누구냐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 이웃은 우리가 기존에 아는 이웃이 아니기에 이웃이라는 언어를 속을 파내고 텅텅 비워진 채로 주께 물어야 한다. ‘제게는 이웃이라는 의미가 없는데 이웃이 무엇입니까?’ 그래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의미를 가진 이웃이 고스란히 빈 곳에 채워진다. 그러므로 내가 경험해보고 안다는 것이 독자적으로 최종적 의미가 나에게 수렴되는 한, 주님의 말씀과는 합치되지 않고 경쟁한다.
주님의 의미로 채워진 언어는 나에게 소유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없는 것이 있게 되는 상황은 쪼개짐을 동반하며 그 사이에서 나오기에 소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다. 있다고 착각한 존재가 파편이 되어버렸고 거울이 있을 때야 뭔가가 비치고 그 비치는 것이 ‘나’라고 상상하고 조작하고 믿을 수 있지만, 그 거울이 깨져버렸다면 더이상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없다. 사라진 것이 아니고 원래 없었음을 그제야 안다.
우리는 싫어서 미워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였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버림받으신 순간 세상은 빛을 잃었다. 빛이 반사되지 않으매 뭔가가 있다 한들 거울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으니 허깨비 같은 우리의 실체가 들통났고 애초부터 ‘나’라는 착각만 있었지 진짜 ‘나’라는 것은 없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성령의 빛으로 다시 찾아오시고 주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빛을 비춰주실 때, 그 거울에 비치는 것은 자신이 아님을 이미 알게 하셨기에 그 거울은 주님의 과거만 비치는 거울이고 거울 속 진짜 주인공은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무시로 증거 해 주신다. “너는 죽었고”
빌립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 했을 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세상에 통용되는 유전자적인 닮음을 상상하는 것이 나만 해본 오류일까.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시며 보이는 육체를 말씀하시지 않고 육체에서 예수님 안에 거하는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 관심을 옮겨 주셨다. 그리고 말씀이 곧 하나님임을 믿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셨다.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능하고 뜻대로 이루어짐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것을 발산하고 계시 예수님의 기능을 보았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임을 가르쳐주시고 아직도 자신의 역사와 눈을 의지하면서 해석하는 행위를 책망해 주신다.
더이상 자신을 포함한 눈에 보이는 누군가를 믿을 필요가 없어지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주의 이름의 기능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고 이미 시체라면 그 사람의 작은 몸짓, 말 한마디라 한들 그 자체가 복음의 해석이고 움직임이다.
홍해 없는 자신은 자신을 모른다. 죽음을 만나지 않은 자는 자신을 모른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자들에게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자리로 옮겨진 자들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일지는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확정된 진리를 품고 있다고 해서 너무 기뻐 항상 쉬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가. 기쁘고 슬프고 당당하고의 마음 자체가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게 하실 때 당당을 뛰어넘는 자유라는 선물을 허락받는다. 그 자유는 가볍고 멍청하고 실없고 헤프고 무모하다. 결코 멋지게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빠져나갈 수 없는 갇힌 자리에서 콩 볶듯 지지고 볶고 쑈를 하면 산들 하나님 앞에 한낱 콩 껍질들의 아귀다툼이다. 고마운 것은 주께서 택한 자들을 반석이신 예수님을 치고 죄 없는 예수님이 장대에 높이 들릴 수밖에 없는 광야 같은 매트 위로 마음을 돌려주시고, 주의 타작의 손길이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만 바라보게 하신다.
십자가 작대기에 주님의 고통과 상처의 무게를 실어서 내리치시며 주님의 희생과 용서의 알맹이가 튀어나올 때까지 죽게 하시려고 아직도 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장대에 높이 목매달려 고통당함이 마땅한데 어떤 사랑이 떠받치고 있기에 어떤 은혜 위에 살고 있기에 아직도 이렇게 멀쩡하게 주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죽은 자라는 미래적 사실을 벌써 통보받고 있는지 이 은혜의 눈이 다 녹아버리기 전에 주님의 과거로만 공유되고 꽉 채워지기를 바랄 뿐이다.
이근호 “노선변경이 일어날 때, 다른 환경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꽂혀 있는 현실에서, 십자가에다 자신을 비쳐봐야 하는데 매일 거울만 찾는 우리의 본성이 얄궂고 잔인하게 뒤틀여져 있다.
누구는 십자가에 매달리고, 누구는 그 밑에서 구경한다.
제발 ‘같은 환경에 속했다’는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구나”(아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