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천국의 틈

아빠와 함께 2020. 8. 8. 09:21

천국의 틈

“니, 나한테 반했나?” “반했다!” “뭐 볼 게 있다고 반했나? 생긴 꼬라지도 그렇고 가진 것도 없고...” “그만 씨불이고 그 낯짝 좀 저리 치워봐라. 자꾸 가리지 말고...”

몸이 발산하는 언어에 사로잡혀 나도 없고 너도 없는 말씀의 움직임 속에 빠져든다. 너의 망하는 모습, 고통 하고 슬퍼하는 모습 속에서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하는 슬픔의 자리 고통의 자리를 깨닫고 낯선 언어를 주고받으며 이런 현상 속에서 느낄 수 없는 존재자의 움직임이 느껴지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답을 찾아 헤매는 것이 욕망의 또 다른 모습이며 돈을 벌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모습도 율법을 장착해 고상함을 유지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도 결국 ‘나’라는 굴레에 갇힌 사망의 형상임을 지적하는 말이 발산되는 육에 시선이 향하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몸을 휘두르는 말씀에 마음을 빼앗긴다.

나와 너의 말이 아닌 대화를 통해서 몸과 몸을 관통하며 주님이 주님에게 전하는 말씀인 것을 감 잡게 되고 이제는 말씀을 보고 이해하고 습득하려는 ‘나’로 율법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율법 스스로 이루신다는 말씀의 편지를 담고 날아가는 편지봉투가 되게 해주시는 것이, 율법의 운동력 안에서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축복이라는 메시지가 수련회라는 길목을 통과해 지나간다.

어떤 만남이 이루어질 때 너의 신과 나의 신을 담고 맥락이 다른 각자의 소견대로 너의 법과 나의 법이 담긴 몸의 만남이라면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하나라는 말이 구라로 들통나는 건 순식간이다. 이미 땅이 있고 연고가 있고 이름을 지어주는 아버지가 있는 개인들의 집합체가 세상 흐름에 몸을 맡기고 힘을 키우고 자신의 이름 높이기에 전력을 다하면서 아버지의 속성을 추구하는 보편성으로 한통속이 되어 진짜 원천인 말씀을 가로막고 적극적으로 대들기까지 하는 행위를 ‘나 있음’이 막을 재주는 없다. 육체가 있고 나보다 더 센 힘이 본능과 본성대로 가도록 조종하기에 ‘있음’ 그 자체로는 구제 불능이고 회복 불가다.

뱀의 유혹으로 아담이 말씀을 삼켰을 때 첫째 아담은 원래 자리인 흙으로 돌아가야 했고 아담 속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뜻하심이 있어 잠시 흙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말씀은 말한다. 그런데 이미 죽은 인간이 좀비처럼 움직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관찰하는 ‘나’라는 자아가 있다는 것이 수상하고 율법 앞에서 심히 발작하며 삼켜버리든 죽여버리든 해서 스스로 시작점이 되려는 악한 세력에 휩싸여 있음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죽음 앞에 분명히 나타났으며 창세 전 계획하신 대로 친히 하나님의 죽음으로 이루신 율법의 완성으로 새 창조의 문을 여셨다.

룻기의 말씀이 우리를 다시 이끌어 십자가 노선을 따라 하나님과 아들의 계약만 살아서 운행하시는 시원적 속성으로 인도하신다. 원래 없던 약속의 땅에 존재하지 않던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이 나라는 아니고, 그래서 이 세상은 아니고’를 증거 할 사명을 부여하시며 대제사장에 종속되어 희생물의 죽음 덕분에 원래 없음이 잠시 있음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그 죽음을 통해 밝혀지는 하나님 대적자의 실체를 드러내고 이 세상에 속한 구원 방식을 완전 부정시키시며 희생물에 담긴 율법이 약속을 구현해 가는 새로운 방식, 세상이 알 수 없는 방식을 펼쳐주신다.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라는 있음을 개무시하고 쳐들어가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 만들어내신 없음을 대변하는 나라이며 하나님 아들의 형상을 비추어야 할 실루엣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있음의 나라와 똑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되고 소유자가 아닌 품꾼으로 오직 보이지 않는 분이 그분의 뜻대로 시행하심을 증거 해야 할 책무를 담보로 약속의 땅을 허락받았다. 이런 증거물 역할을 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잘 먹고 잘살아서 혈통을 보존하려는 있음의 나라들과 같이 되어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면 언제든 이방 나라처럼 제거되고 쫓겨나는 것이 마땅함을 보이는 본보기인 것이다.

약속의 땅에서 여전히 과부와 고아를 생산하시고 나라 인근에 이방 나라를 배치해 주신 것은 자신들이 한때 과부와 고아였고 나그네였음을 과거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늘 현재로 그 마음을 가지고 살게 하시고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가난한 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그들을 보며 누구 덕분에 누구를 의지해 살고 있는지 그 보이지 않는 후견자를 잊지 않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개입이고 섬세한 배려이다.

그럼에도 진짜 존재자의 의미를 증거 하는 본분을 버리고 나는 내 혈육은 내가 지킨다는 악한 본색이 나오고, 알고 있는 율법조차 세상 보편성에 합류되지 못해 생긴 결핍을 메꾸는 수단으로 이용하며 욕망을 따라 움직이게 됨을 거부할 수 없을 때 이런 인간 재편과 대조를 이루며 율법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만드시며 참된 왕이 나타나실 최종점을 향해 움직이는 율법 자체의 재편이 이루어진다.

율법의 재편은 인간의 요소가 한 톨도 섞이지 않도록 오직 하나님의 개입하심만이 나타나는 식으로 이루어지기에 아비도 없고 자식도 없고 아무 연고가 없는, 오직 죽음에서만 만들어지는 없음의 아들이 나타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없음의 아들이 기존의 있음을 부인하도록 하면서 그 노선은 유일한 존재자 한 분이 계신 곳까지 향한다.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상사인 것을 알지 못하고 내가 나에게 보내는 편지만 있었지 내 역사를 뚫고 들어온 낯선 말씀이 적힌 편지를 받지 못했다면 여전히 요지부동 마이웨이 하는 먼지 같은 개체들이 잠시 쌓여있다가 자기 자리 사수하고 다시 먼지로 사라지는 의미 없는 만남이 뻔한데, 죽음의 근거를 보여주는 율법을 담은 몸들의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그건 서로가 서로를 넘어지게 해주는 사건의 부딪침이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나를 괴롭게 하는 자로다’라는 본색이 자궁 속에서 외계인이 배를 뚫고 나오듯 역겨운 정체가 율법을 통해 발각되고 본래의 죽은 모습인 흙덩어리를 미리 경험하고 그 흙과 결합 된 율법만 생생히 드러나도록 성도는 서로를 침범해서 밀치는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지시받는다.

때로는 서로를 물어뜯고 때로는 칭찬하고 위로하고 때로는 오해하면서 잘도 넘어지게 해준다. 속고 속이는 치열한 싸움, 자신을 방어하는 경계태세, 오해하기도 하고 당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잡다한 일들을 복잡한 인간사로 여기지 않고 주님이 허락하심에 당하고 허락하시지 않기에 아직은 문제없이 지내고 있다는 주님의 역사이고 주님의 기억으로 여기며 나의 안정성과 우상성을 깨부수며 무장해제 시키는 손길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결과만 남겨진다.

서로 넘어지며 생긴 틈에서 나를 사수하기 위해 희생당한 예외적인 존재를 느꼈을 때 그 공백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보다 더 생생하고, 있음이었던 ‘나’를 없음에서 나오는 ‘소리’로 바꾸시며 ‘나는 괴로움 당하는 것이 마땅하고 망해야 하는 자입니다. 피해자는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었군요. 우리는 늘 가해자일 뿐이며 오직 율법만 옳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둘 다 그 틈만을 주시하고 가리키도록 하신다.

초과적 무언가로 하나 된 보편성 안에서 나타나는 기이한 일은 저 사람의 마음에 있는 말이 입에 있는 말이 내 안에 내 입에 있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 신기한 동질성을 통해 원래부터 내가 없었다는 것이 더 확실해지고 사람대 사람의 만남이라는 착각이 쪼개지면서 율법이 율법답게 이루신 완성체로 귀속되는 현상의 반복을 통해 우리의 왕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연쇄 고리를 죽음으로 끊어주시고 값없이 주신 혜택에 힘입어 그분의 의가 되게 하심에 대한 찬양이 ‘정말 고맙습니다. 죽여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소리들이 합창이 되어 퍼진다. 이들은 몸은 여전히 세상에 있지만 이미 천국의 틈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하늘에 있는 본향을 꿈꾸는 자들이다.

 

이근호  “오직 죽음에서만 만들어지는 없음의 아들이 나타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룻은, 씨가 없어 더 이상 대를 이을 수 없어 몰락하는 ‘죽음의 가족’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 룻이 이스라엘이 진입하면서 하나님께서 기존 이스라엘의 ‘씨’가 아닌 ‘다른 씨’는 곧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씨’을 시작하셨다. 이로서 이스라엘 전체가 몰락한 이스라엘임을 공고한다. 후견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등에 업고 등장한 씨가 이스라엘 왕의 자리다.

몰락한 가문과 율법 없는 이방여인의 만남에서 천국의 틈이 생겼다. 율법 없어 보이는 틈을 통해서 율법이 완성되었다. 드디어 등장한 왕. 율법 스스로의 솜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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