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듣고 있는데 내부에서 자동 분류 현상이 작동한다. 가능성과 불가능성
그리고 가능한 것을 하나씩 배제 시킨다. 강의 듣기, 말씀 듣기, 기도하기, 말씀 보기, 밥 먹기, 잠자기...
가능과 불가능을 가려보다가 어느 한 경계선으로 와 있다. 경계선을 기준으로 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한 쪽에 있었던 적이 있었음을 상기한다. 단지 안 할 뿐이지, 아직 훈련이 덜 돼서 그렇지,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이번엔 운이 없어서 그렇지,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안 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허락하시지 않으면 아침에 눈을 뜰 수도 없고, 밥을 먹을 수도 없고, 누군가를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고, 그렇게 쏙쏙 들리던 말씀도 귀가 아프고 눈에 통증이 오게 하시면 들을 수도 한 줄 글을 읽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쪽에 와 있다.
강의나 설교를 하다 보면 제일 안 되는 것이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설교자가 말한다. 감각을 고스란히 느끼는 움직이는 육신 안에서 내부에서 자아를 부정해주고 죽었다는 통보를 무시로 해주시는 말씀들이 작동하지 않으면 어찌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겠는가. 죽음 통보를 받는 불가능성을 기준으로 그 이전은 모든 것이 가능이었고 그 이후는 모든 것이 불가능이다.
의미 없는 가정을 해보자면 아등바등 용써봤지만 결국 이루어진 거 없이 평범한 삶을 살고있는 나와 대통령을 앉혀 놓고 당신의 이름은 주의 이름의 기능을 하다가 역할이 끝나면 폐기처분 될 이름이라고 할때 둘 다 ‘아멘’했다면 어느 쪽이 더 불가능처럼 보일지 여전히 잔존하는 선악적 습성으로 가치를 매기며 판단이라는 것을 하며 너무도 쉽게 납득이 가는 너무도 쉽게 말씀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동의하는 자신을 의심한다. 잃을 것이 없으니 무엇도 다 괜찮은 것은 아닌지 자포자기식으로 막사는 것을 신앙이라 믿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기준점으로 돌아오니 태어나기 이전부터 환경을 비롯한 육의 조건들 그 어느 하나 내가 관여한 부분이 없다. 아니 더 나아가 태어날 이유도 없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결코 잊을 수 없는 생생한 한순간이 있다면 복음을 듣고 인간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누구를 위해 어떤 목적으로 이 세상에 잠시 존재해야 하는지 나라는 육신이 왜 이 세상에 있는지 알게 하셨을 때 천국 가네, 구원받네, 지옥 가네, 그런 말이 싹 날아가고 이런 상황을 벌이시는 분이 너무 궁금해졌다. 꾹꾹 참다 입이 근질근질해서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발설을 했고 어느 하나 이 말씀에 동조하지 않았을 때 기쁨은 고통으로 이미 삼켜서 뱉어낼 수 없는 쓰디쓴 독한 약으로 변했다. 그리고 자아의 자존심의 극을 발하는 말을 한다. ‘죽고 싶다’
그때 이후로 늘 말씀을 듣고 있는 마음의 방향성은 이 말씀을 듣게 하시는 영향력으로 그 주인공으로 집중되는 것과 함께 자신이 신자가 아닌 이유, 자신이 존재할 이유가 없는 이유를 알아가는 찾아가는 것이기에 무언가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욕구는 없었다.
췌장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서 한 달을 채 살 수 없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과 월요일의 또 다른 한주의 패턴은 반복될 것이라는 예측 속에서 주말의 달콤한 휴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의 고백은 상식적으로는 같을 수 없다. 절박함의 변수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조금은 다른 양상으로 고백이 나오겠지만 결과적으로 같은 대답이다.
췌장암 말기 아들에게 그래도 마지막 해줄 수 있는 것이 편히 세상을 떠나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남자의 아버지는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을 모시고 아들이 입원한 병원에 갔다. 목사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침묵하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애가 타서 한마디 했다. “이제라도 예수님 믿음으로 영접하고 죽어서 천국에 가야지” 아들이 대답했다. “저도 미치겠어요. 그런데 정말 안 믿어져요...” 복음을 들어본 아버지라면 말을 좀 바꿔서 다그쳤을지도 모르겠다. “저는 지옥가도 마땅한 자입니다”라고 고백하라고. 어느 쪽이든 의미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일요일마다 수요일마다 습관적으로 교회에 가고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의심해 볼 기회도 없이 아이 같은 순전한 믿음이겠지 자신을 격려하며 이 정도면 괜찮다 자평하며 신앙생활 하다가 뒤늦게 자신의 신앙을 진지하게 점검하게 되는 때는 갑작스런 죽음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죽음을 직면할 때가 대부분이다.
그제야 일상생활에 치어 뒷전이었던 신앙이 믿음이 어느새 사고 난 후 보험 약관 꺼내보듯 뭘 보상받을 수 있는지, 얼마나 든든한지 체크 해보듯 점검에 들어간다. 막연히 ‘믿는다 치고, 그렇다 치고’라고 넘어갈 부분이 아니었음이 뒤늦게 드러나지만 그렇다 한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정말 안 믿어져요”라는 말 외에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끝까지 이 마음 부인하며 그래도 믿는 거 맞을 거라고 자기 확신 두둑하게 하며 생을 마감한들 모두 한결같이 외적이든 내적이든 대답은 동일하지 않을까. ‘안 믿어져요’
믿음은 사람 소관 아니라는 것을 앞당겨 토하게 하시고 왜 믿을 수가 없는지, 왜 천국을 소망할 자격이 없는지, 더 나아가 지옥 가 마땅한 자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와 그 역할이 무엇인지를 통보받으며 이미 죽은 자임을 누구의 대신 죽으심을 힘입어 확인받았는지 십자가의 관문을 통과시키며 가르쳐주실 때 이 말씀을 듣도록 귀를 열어주신 그분이 누구신지 찾게 하시는 그 현상에 이끌려 잠시 자신을 잃어버리는 그것이 뜨거운 지옥 세상에서 맛보는 시원한 바람이고 잠시 목을 축이게 하시는 생명이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호10:12)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살 수밖에 없는 죄를 생산하는 시스템 안에서 스스로 참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음을 아시기에 친히 찾아와주시고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고후6:2)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만 있었고 그 계획을 이루신 타이밍이 세상에 빗방울처럼 떨어질 때 부딪쳐 한쪽에서는 저주의 사건이 다른 한쪽에서는 의의 사건이 일어나면서 결국 한데 모여 이때를 만드신 분 앞으로 흘러갈 뿐이지 애초에 인간이 기다리는 ‘언젠가’도 없고 인간이 이루어 낸 ‘그때는, 한때는’도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자가 되셔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사람의 아들이 되셔야 하는지 물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죽음의 경계선을 통과하기 전까지 나의 모든 의문은 나에게 관심을 두고 하는 질문들이다. 아니 나에게만 관심이 있기에 질문이 나온다.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을 닮으셨고 고난을 받는 하나님으로 인간의 고통을 모두 아시는 함께 겪으시는 하나님으로 오셨다.
온전한 의인으로 고난을 받으신 유일한 인자 앞에서 이 세상에 진짜 인간은 없고 허울 좋은 명분과 이름이 벗겨지고 육신이라는 허무한 외피만 덩그러니 남게 하신다. 죽은 자들 쪽에서 나오는 개념이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개념과 섞일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 사람이라 착각했기에 어찌하든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경의 말씀을 이성적 판단력으로 이해해보려 했던 시도가 얼마나 망상이었는지 그렇게 부추김을 받는 떠미는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는 말씀에서 말씀으로 연결되는 흐름이 낯설다. 분명히 말씀에 대한 조롱과 무시와 분노로 일관했던 이전의 내가 있었고 그런 태도와 마음이 익숙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육신 안에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느끼고 있다고 착각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고 그 마음이 자극될 때마다 자신이 주인공의 자리로 옮겨지는 악의 자극을 끊임없이 받는다. 이대로 내어버려 두심이 마땅한데 이 상태로 두지 않으시고 성령의 책망으로 자극하시어 절망의 자리로 옮겨주고 곤고한 자리에서 늘 잊어버리는 진짜 주인을 인식하게 하신다.
주가 주를 부르며 주의 이름을 통해서만 드러나시고 아들과만 일하시는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성이 이루는 결과만 있다고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하실 때 마주치는 절망, 죄인, 심판, 완전배제, 이런 말들이 부정어가 아니고 긍정어이고 슬픔이 아니고 기쁨과 고마움이다.
누군가를 자신의 인생에 태클 걸도록 보내시어 본인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자신의 이름과 정당성을 위한 조작질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고 주의 이름을 대체하려고 함을 들키게 해주면서 당신이나 나나 우리는 멸망 받아 마땅하고 구원받을 자격 없다고 다시 한번 상기해 주는 손길에 불편한 마음은 순간이고 자신을 돌보지 않고 주만 바라보는 분을 통해 다시 유일한 주인공의 활동하심으로 방향 틀어 주시는 주님께 드리는 감사는 깊고 길다.
아무 쓸모 없는 죽은 이름으로 자칭 선한 행위라고 착각하며 끝까지 행함을 멈추지 못하는 죄인을 대신 값 치르심의 십자가로 끌어당겨 더러운 이름 폐기해주시고 주님의 이름으로 덮어 이미 완료된 주님의 운명 속에 함몰되게 하신 것이 기쁜 소식이 되게 하시고 참 고맙고 고맙다는 말만 생산하는 스피커가 되고 싶은 마음 가득하게 하신다.
뒤돌아서면 금새 기쁨이 날아가고 바쁜 일과에 쫓겨 ‘이것만은 제발, 이것만은 제발’이라는 자신의 이름 지키기에 급급하며 말씀에 소홀해지는 자책이 올라올 때조차도 이미 완성된 불가능성 안에서 자신이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그저 연습 인생일 뿐이며, 세상일에 치이게 하시는 때와 말씀을 보고 강의 듣고 치이게 하시는 때는 오직 주님의 소관이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떤 것을 통해서든 모든 것을 통해서 항상 힘쓰고 계시는 주님의 공로만이 발산되고 있음을 알리는 말씀이 밤은 낮에게 낮은 밤에게 전달하며 영원히 울리게 하심을 바란다.
“정말 안 믿어져요. 아버지!” 병 들어서 곧 죽어가는 아들이 여전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인정한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믿음이 있을까? 죽는 순간이 찾아와서 관계는 여전한 것이다. 아버지는 이 관계유지에 감격해야 한다.
이처럼 ‘관계’란 내가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고, 내가 얻고자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게 믿음의 성질이다. 따라서 성도의 삶이란 관계가 끊어질 만한 모든 경우를 맞이하는 삶이다.
악마는 말한다. “이래도 믿을래?” 성도는 말한다. “내가 굳이 믿을 필요가 없게 된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