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무한의 폭격

아빠와 함께 2020. 5. 31. 08:51

눈에 블라인드를 하고 시각장애인 안내견의 가이드를 받으며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체험을 한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고 참 쉬워 보이던 것이 막상 눈이 가려지고 손에 개 줄이 쥐어진 채 걷기 시작할 때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내가 이 개를 믿고 내 목숨을 맡겨야 하는가?’ 개랑 가다가 그 개가 멈추면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주변을 탐색한다. 앞에 블록이 튀어나오거나 계단, 신호등이 있을 때 개는 일단 멈춘다. 20분 정도의 거리였던 거 같은데 왜 이리 멀게 느껴지고 겁이 나는지. 하도 오래전이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지하철 계단에서와 신호등 앞에서와 보도블럭 앞에서 등등 개가 주인에게 보내는 신호가 다르도록 훈련을 받고 그 개는 훈련받은 대로 충실하게 나를 안내해주었는데 나는 그 개 따위를 믿지 못하고 결국 중간에 블라인드를 벗고 기권했다.

나는 시각장애인인 척은 할 수 있었지만, 생명의 위협이 감지됨 앞에서 너무도 잘 보인다고 확신하는 두 눈을 믿고 싶지 아무리 스페셜한 훈련을 받았던들 자신보다 하등한 개를 의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말씀이 아무리 나에게 보지 못하는 장님이라 외친들 자신이 정상이라고 믿는 것을 스스로 철회할 수 없으며 개든 사람이든 신이든 누구에게도 자신을 맡길 수 없고 이 세상에 믿을 자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만이 유일한 현실임을 인정하는 자리가 주님의 작업이 느껴지는 시작점이다. 그 유일한 믿음의 대상인 자기 자신이 무너지는 사건들을 통해 진짜 하나님은 자기 존재증명의 증거물을 만들어가신다.

‘나는 더러운 창기이기 세리이고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 더럽다는 걸 지식으로 인지한 것과 말씀에 연루되어 자신이 상실되고 무가 된 것과의 차이를 알게 하시는 상황은 정말 자신이 더러운 상황에 놓여있고 그 더럽다는 개념과 판단은 우선적으로 선악적 관점을 거치며 일어난다.

내가 코로나에 걸려 누구의 집에 방문했다고 가정해보면 서로 모를 때는 웃고 이야기했지만 주책맞게 자신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말이 나왔을 때, 자신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우연히 나왔거나, 코로나바이러스가 더럽다고 느끼지 못하고 말했거나, 우리는 모두 코로나 걸려도 마땅한 자임을 동의한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편하게 말했거나 그건 중요치 않고 그 셋팅을 어떻게 활용하시는지 계시의 활동성에 집중하게 해주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왜 이렇게 되었고 무엇을 잘못했고 어떻게 선방할지 궁리하고 반성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말을 좀 더 이어가 보면 누군가 ‘더럽다’라고 말해줄 때 갑자기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라”라는 주님의 말보다 더 세게 다가오는 선악적 정죄에 걸려든다. ‘내가 더럽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올라오는 감정은 ‘너는 얼마나 깨끗한데’라는 반발과 방어 자세가 올라오며 순간 자신의 마음속에 들보가 있기에 상대의 티를 잡아내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이 모든 현상의 이면에 나는 깨끗하고 선하고 정당해야 한다는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고 건들어지면 욱하고 반응할 수밖에 없는 작용들이 꿈틀댐을 느끼게 하신다.

나는 세리고 창기고 문등병자라는 고백이 부끄러운 사기극이었음이 발각되고 누가 나를 문등병자 취급하면 죽이고 싶은 마음을 들킨다. 나병 환자들이 사는 섬에 가서 자신이 전염될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돕고 심지어 그 씻긴 물을 마실 때 그들 안에 어떤 관점이 자리 잡았는지 들키게 하심이 주의 은혜임을 알게 하신다. 굳이 섬까지 가지 않아도 자기 자신을 포함한 가족이 있는 집안에서나 옆집에 그리고 밖으로 몇 발 나가면 어느 하나 문등병자 아닌 자가 없는데 섬까지 가서 그들을 돕는 그 마음 안에 나는 깨끗한데 당신은 문등병자라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음이 들통난 것이다.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를 증명할 대상을 찾아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과 정의감으로 그를 처단하고 싶은 한계점에는 선악적으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죽어 마땅한 바라바 같은 죄인이 배치되고 자신의 자랑스러운 정의감을 극치로 보여줄 수 있는 그 상황 안으로 예수님이 뛰어들어 주실 때 인간의 선의 기준을 벗어나 바라바를 자신들 쪽으로 끌어당겨서라도 한통속이 되어 죽이고 싶은 대상이 누구인지가 밝히 드러난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하는 예수는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서 살인자보다 더 죽어 마땅한 대상이 되었다. 하나님을 섬기며 믿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자신들 안에 정당성을 유지하는 최후의 근거였고 선과 악을 판가름하는 기준조차도 하나님에게 부여받은 선한 양심에서 나온 것이기에 자신들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을 신성모독과 결부시켰고 예수를 처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일이라고 확신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앞에서 그들은 어떤 힘에 이끌려 하나로 통합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결국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멸시받는 보편적 죽음의 두려움으로 뭉쳐진 단일신체가 특수한 죽음을 유발하는 현장이 발생했다. 이 죽음은 죽은 분은 있는데 죽인 자가 없는 죽음, 말씀에 연루된 죽음이다. 언약대로 스스로 이루어진 죽음이 강력한 증거가 되어 이 세상에 육을 입고 있는 어느 한 사람도 이 죽음 유발자에서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지옥 가 마땅한 저주의 증거가 자신들 안에 삽입되어있음이 들통났기에 인간이 이루어가는 구원은 망상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누구도 진짜 믿음을 사람의 힘으로 가질 수 없기에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는 확신이 구원받고자 하는 마음이나 시도가 말씀에 상처를 내고 죽이는 행위이다. 예수님의 특수한 죽음으로 뭉쳐진 주님이 던지신 십자가 돌덩어리가 날아와 깨진 자만이 이미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고 그 자리는 여인을 대신해 여인과 함께 주님이 계시는 자리이기에 타인의 정죄가 사라진 자리이다.

주님의 용서만 빛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가 애굽이고 이방인이고 아담의 육체에 속해있음을 알리는 곳을,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님은 죽이고 싶은 죄의 올무에 걸리는 곳을 허락하신다. 모세에게 자신의 손을 품에 넣었다 빼도록 하시어 자신의 저주받은 실체를 보게 하셨을 때 나중에 정상의 손을 본들 자신 안의 무한한 저주의 속성만을 인정하게 된다.

저주를 품은 본질을 들춰주시고 죄를 생산하는 재료로 쓰이게 하심을 사명이라고 해주시고 아무것도 아닌 죄인에게 주님의 체험이 주님의 기억이 채워져, 주 안에서 죄인이 의인 됨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주의 긍휼하심을 통해서 부어진다. “너를 정죄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약속의 목적 자체가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일 때 그 움직임의 선두에서 주님이 직접 줄을 잡고 계신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해도 상관없는 건 내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줄에 꿰여서 줄이 움직이는 대로 당기는 대로 갈 수밖에 없기에 계획할 필요도 꾀를 낼 필요도 없고 더 나아가 이런 결과가 답답함이나 두려움이 아니라 가벼움이 되게 하시니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언제나 구멍을 뚫고 빈자리를 만들어 일하시는 주님이시기에 채워짐을 허락하실 때도 짓밟아 비워지게 하실 때도 그 증상들로 호들갑 떨며 기뻐할 필요도 죽을상 하며 슬퍼할 필요도 없게 하시고 주님이 이동하시는 경로를 따라 항상 주님 계신 곳에 끌려가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있게 하시는 것이 은혜이다.

말씀이 내는 고랑을 따라 흘러가며 가짜 기억에서 떠나게 하시고 언약에 의해 이스마엘의 요소들이 쫓겨나게 하시는 성령의 책망을 통해 자아를 장식하는 오물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갈수록 있음이라 착각한 내가 무가 되고 부재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더 선명히 드러날 것이고 이런 사건들은 인간의 무지와 무능, 예상 밖, 예측 불가를 통해 만들어지기에 벌어지는 어떤 일도 ‘내가’를 넣을 수 없고 그래서 자랑도 자책도 후회도 있을 수 없다.

무엇을 해도 자기완성을 위해 채우고 정체성 확립과 목숨 부지의 욕망만 가득한 자에게 줄 잡고 따라오라고 하신다면 수천 번도 더 손을 놓을 것이다. 잡고 따라오라는 줄이 수퍼히어로가 끌어주며 절망의 구덩이 나오면 하늘을 날아서 구해주는 줄이 아니다. 사람 눈으로 아무리 봐도 나보다 못한 개가 끌어주는 줄 잡고 가는 느낌이고 헛발 디뎌 계단에서 구르면 같이 구르고 진창에 빠지면 같이 빠져야 하는 믿을 구석 하나 없는 줄인데 무슨 재주로 잡고 따라가겠는가.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줄이 우리를 관통해서 끌어주시기에 끌려가고 가는 길에 발생하는 각양 증상들에 마음 쓰는 것이 아니라 줄 잡고 계신 주인님만 바라보고 사모하는 마음을 늘 공급해 주시기를 바란다.

 

이근호 

“죽인 자가 없는 죽음” 곧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홀로 책임 질 수 없는, ‘내가 죽였다’고 나설 수 없는 ‘하나님 살해 사건’의 파동 위에서 일상이 같이 움직인다. 인간은 뭔가 두려워하기에 예수님을 밀치고 밟고 매일 죽이는 것이다. 맹인 안내견을 맹인 본인이 학대하고 죽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악마가 뒤에서 매일 그렇게 시킨다. “혼자 해내야 너답다!”   ‘인격완성’이 궁극적인 미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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