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유치원 아이에게 유령 이야기책을 읽어 주었다. 귀엽게 생긴 유령들이 벽을 통과해서 집안으로 들어오고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롭게 관통하는 삽화가 나오자 아이에게 물었다. “유령들은 부딪치는 거 없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서 좋겠다. 그치?” 당연히 동조해 줄 거라는 기대감을 밀치며 아이가 대답했다. “그러면 아무것도 잡을 수 없잖아요. 가질 수도 없고...”
태어날 때부터 무의식중에 움켜잡는 쥐기 반사가 공중에 매달릴 정도로 강력한 신생아로부터 유아들의 소유 욕구까지만 봐도 인간의 생존에 대한 자기 정당성은 타고난 본능인 것을 새삼 생각하게 하시며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언급하신 소자에 대한 해석이 재정립되고 주님의 어린아이는 실상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천국 가는 육체가 발생하는 것이 불가능성임을 상기하게 하신다.
어린아이 같지 않은 어른들에게 언약이 장착된 글을 읽어 주는 경우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 나온다. 논문의 내용을 듣고 “기이하다. 어렵다. 잘 모르겠다”라는 말 대신 “일방적 주장이다, 이치에 안 맞다, 역사에 전통에 접촉점이 없다”라는 말을 하며 끝까지 인간의 노고와 행위의 정당성을 무시 받지 않으려고 자신들을 변론한다.
어찌 되었든 인간은 살 가치가 있다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부터 어른까지 땅에서 태어나 육을 위해 심고 썩어질 것을 거두는 모습이 만연할수록 심판과 멸망의 정당함이 더욱 동의 되고, 타인을 판단하는 나 자신 또한 심판에서 배제 시킬 수 없다는 십자가의 판단 안에서 복음의 부지런한 활동력에 휩쓸리게 하신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말이, ‘말끔히 청소하소서. 멸망시키소서’라는 마음이 불쑥 올라오게 하시면서 거기서 멈추면 좋으련만 속히 입을 치며 가슴을 치며 ‘미쳤어. 미쳤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라는 마음이 같이 올라오게 하시어 어찌하든 살고자 하는 본심을 감추지 못하게 하시고 주의 일의 훼방자요 방해꾼으로 규정해 패대기치시며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야 했던 궁극적 취지, 하나님이 분노하셔야 하는 이유만 선명히 남게 하신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의인은 한 명도 없음을 알려주시는 말씀의 작용이 쉼이 없다.
개별적 의미로 끝난다 생각했던 사건 사건들이 전체 의미와 연계되어 관련성을 맺고 있기에 나에게 집중되어 큰일 날것처럼 벌벌 하던 사건이 말씀의 주인공에게 집중되게 하시면서 너무 쉽게 풀리고 오히려 무언가가 자신의 속을 헤집어놓고 쑥 지나가듯 철저히 이용당하면서 행한 내가 아니라 당한 육이 남을 때 ‘주께서 하셨구나’만 남게 되니 세상과 관련된 모든 것이 사소해진다.
어느 쪽에 관련되어 있는지 관련성 여부는 마치 건강해지고 돈이 많아졌는데 기분이 날아갈 듯이 좋아지는 당연한 마음이 아니라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의외의 반응이 나올 때, 뜨거운 물체에 손이 닿으며 의식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손을 떼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손을 떼지 않고 있을 때 그 사람의 의지를 능가하고 본능보다 센 관계성의 움직임이 감지되며 결과적으로 소급적용된다.
관계성의 특징은 애써 노력하지 않으며 옳고 그름의 판단에서 벗어나 있고 이유를 알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기에 그 움직임과 관계된 분만 중요한 결과로 남을 뿐이지 자기에게 소유되는 것이 없다. 인간의 본능 밖의 일인 것이다. 나와 관련된 그분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관련되어 있어 움직이는 나이기에 내가 없게 되는 결과가 만들어지고 자신에게 남는 것은 ‘너는 원래부터 없어도 되는 존재’인 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손길뿐이다. 어리둥절하다 못해 어이없는 것은 이 거덜 내는 손길이 토닥거리는 따뜻하고 고마운 손길로 마음에 전달된다는 사실이다.
위상이 교차하기에 이 과정에서 겪는 현실착오는 주체성이 발휘되면서 갑자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답답한 마음이 올라오고 세상적 시스템에 농락당하며 이원구조적 해석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맘껏 죄를 발산하는 것조차 성도의 사명이기에 십자가 돌멩이가 날아와 깨지는 결과를 계속 선물로 받고 있다면 무엇을 해도 주저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깨지는 것이 아니고 늘 주님에게만 깨진다. 미국 경찰이 흑인 목을 짓누르듯이 주께서 정신 못 차리게 잘 밟아주신다.
마음의 교체가 일어나면 그 마음을 담은 장갑이 움직이고 표현하되 모든 것이 장갑 안에 손이 움직이는 뜻대로 움직이지 ‘내 맘대로, 나를 위해서’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장갑이 착각을 일으키고 쌩쇼를 하더라도 언약을 쥐고 계신 손의 목적대로 의도대로 움직임에 조금의 오차도 없다.
무엇을 해도 소용없고 계속 얽혀 있고 떨궈지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 이루어지는 상황을 통제하려고 애를 써보다가 실패를 한다면 거기서 멈추지 말고 끝까지 실패를 반복하는 역할을 하게 하시는 것도 주의 뜻이다. 죄로 벌겋게 타고 있는 자신이 뜨겁다고 그 몸을 스스로 뒤집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더 큰 문제는 죄로 자신이 타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스스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화덕 앞에 서 계신 주님이 뒤집어주시어 죄로 입은 상처를 드러내시고 그 상처를 피로 채워 주시는 부지런한 움직임 속에서 자신의 수치는 아무 의미도 없어지고 태초의 유일하고 온전한 사랑에 감싸있음을 아는 잠시의 순간이 모든 것을 잃어도 놓치고 싶지 않은 귀한 선물이다.
야곱이 7년의 고생을 7일로 생각할 만큼 설레고 사랑하는 여인과 하나 될 수 있는 순간이 얄궂게도 밤이었다. 대낮처럼 밝은 시간에 만났으면 그 사람이 라헬이 아닌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겠지만, 어둠 속에서 마치 일이 계획대로 잘 된다고 꿈이 이루어졌다고 착각하고 헤매는 것은 야곱의 몫이고, 자신이 받은 약속과 주님이 그 약속을 준행하시는 방식이 다름을 알려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시고 성실하심이시다. 언약 성취를 위해 육을 쓰시되 아무리 선지자라 해도 자신의 육의 해석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하시며 주님만 홀로 남게 언약이 완성되고 지금도 십자가 안에서 그 방식은 무한 반복된다.
밤에 인간이 할 일이라곤 잠자고 꿈꾸는 것뿐이다. 그게 아닌 줄 알면서도 인간의 습성이 죽으라고 눈에 보이는 것만 찾게 되고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마음 뺏기고 의지하게 되는 것을 질리도록 반복하게 되고 결국 그것이 다른 것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그 눈의 주인인 자신을 최종적으로 의지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정작 밤이기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사건의 끝에 상대방이든 자신이든 사람을 주목하거나 판단하거나 탓할 수 없는 공간에 이미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이미 꿈에서 깨어났음을 알게 하시는 순간이다.
주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증상이 육을 통해 계속 발산되는 것을 탓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현상을 인지하지 못함에 대한 죄를 물으신다. 그러나 그 인지하는 것도 결국 허락하셔야만 가능하고, 보지 못하는 자였음을, 듣지 못하는 자였음을, 깨닫지 못하는 자였음을 알 수 있는 것도 그러하기에 참된 전도는 ‘당신은 들어도 모릅니다’라는 말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사람에게 설득하기 위한 말들을 주절거리기보다 보이지 않게 활동하시는 주님께 감사가 먼저 올라오고 ‘우리는 그분을 믿을 수도 없고 믿을 자격은 더욱더 없다’라는 마음이 늘 새로움인 이유는, 한때 나에게도 말을 하며 상대에게 믿게 하고 싶은 마음, 그래서 말에 행동에 실수 안 하고 더 세련되고 합리적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이 결국 주님의 활동하심보다 나의 능력과 행함이 두드러지기를 원하는 나를 위한 마음인 것을 주님 모독하는 죽어 마땅한 마음인 것을 알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너를 보니 교회 안 다니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해진다. 하나님 믿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라는 말에 억울함과 자책이 올라오며 나 때문에 예수님이 욕먹는다는 되지도 않은 생각으로 세상에 휘둘렸던 과거가 있었다.
마치 예수님 걱정하듯 하며 결국은 자기 정당성을 지켜주지 않는 주님을 무의식중에 원망하고 있는 꼴이었고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라는 행악자이고 비방자였으며 그저 물이었던 육이 분명했는데 “우리는 우리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라는 말씀이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으니”라는 말씀이 떠오르며 쓰레기 같은 자신과 함께 고통에 참여해 주시는 이 분이 계신 곳에 함께 있는 그곳이 낙원임을 고백하게 하시고 그 고백의 주인이 자신이 아님을 자신은 단지 물일 뿐이지 포도주가 아님이 마음에 새겨져 있는 것이 기적이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구나”라는 말씀이 꿈인지 현실인지 더이상 혼동하지 않고 생생한 현실로 영원히 지속되기를, 이 역할 종료되고 관계성의 줄이 완전히 감기어 줄에 끝에 계신 그분 안에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듯 생생하게 주님의 뜻을 알게 되는 끝에 끝을 고대한다.
이근호
요셉은 자기에게 찾아온 꿈으로 말미암아, 그 당시 유일한 '현실 해석자' 역할을 해야 했듯이, 오순절로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등장되는 성령받은 자의 출현은 지옥과 천국에 대해서 입을 다물 수 없다.(행 2:17-19) 땅이 멸망해야 징조 자체로 출현된 자, 그들은 꿈만 이야기하는 꿈꾼들이다.(행 2:19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