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시체 재활용

아빠와 함께 2020. 6. 11. 07:11

강남-누가복음 2장 36절 (시체 재활용) 200602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장 36절부터 3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아멘.


여기 아셀 지파에 있는 안나라는 선지자 이야기가 등장하지요.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그 현장에 우리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현장에. 그 현장에 있으면 안나라는 할머니하고 같이 옆에 안나라는 할머니하고 꾸준히 같이 있었다고 봅시다.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밋밋한 일상이 주는 답답함. 이것을 사람들은 참 견디기 어려워요. 성경을 보면 대단히 요란한데 막상 우리가 현실 속에서 살게 되면 그 요란함이 없이 밋밋한 일상의 반복일 뿐이죠. 밋밋한 일상의 반복.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그 자기 일상을 신앙적인 일상 또는 믿음의 생활이랍시고 뭘 집어넣느냐 하면 자기가 거기에다가 계율을 집어넣지요. 나는 9시에 잘 때 나는 기도한다. 기도할 때 3분 기도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시편에 보면 새벽을 깨운다 했으니까 교회까지는 못나가고 집에서 새벽을 깨워서 나는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이 계율이거든요. 법령이죠.


법령을 감행하게 되면 얼추 신앙생활하는 것같이 느껴져요. 물론 갑자기 바쁘면 못하지만 그때는 하루에 성경 3장 읽고 주일날은 5장 읽는다. 그러면 1년에 365일 정하면 성경 다 뗀다. 그렇게 자기한테 숙제를 주게 되게 되면 그 다른 사람과 차별화된 나만의 신앙인 것처럼 차별화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 안나 할머니 이야기가 나오니까 우리가 이 사람이 칭찬받으니까 같이 그 현장에 내가 같이 있어서 그 안나 할머니가 하는 것을 우리가 지켜본다면 저절로 거기서 어떤 신앙적인 것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요.


옆에 그 현장에 할머니하고 같이 있어보세요. 지루하지요. 역시 밋밋해요.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획기적인 것이 없어요 어떤. 패턴이 멋있어 보이는데 하게 되면 이게 패턴화되가지고 별로 새로운 것이 없어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훅 불면 훅 날려가요. 견딜 수가 없어요.


분명히 하나님의 성도라면 매일 일상 뭔가 획기적이고 새로운 것이 터져야 신앙생활할 맛이 나는데 전혀 변화될 조짐이 보이지않을 때 참을 수가 없는 거에요. 산다는 것이. 구역예배 가가지고 전부다 돌아가면서 자기 신앙 자랑질하는데 나는 지난 화요일날 은혜 받았어요.


나는 목요일날 하나님의 기적을 느꼈습니다 이러고 있는데 그러면 집사님 차례는? 나 그때 코로나 마스크 사러갔어요. 일상의 이야기밖에 할게 내놓을게 그거밖에 없다 이 말이죠.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이 에이~~우~~ (속으로만). 우우~~~ 뭐 믿음 좋은 줄 알았더니만 전혀 하나님께서 은혜를 안주시는 모양이군요. (속으로). 속으로 그렇게 하지요.


그러면 소위 인도하고 지도한다는 전도사님이나 부목사님께서 집사님은 더욱 기도에 열중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짜릿한 은혜를 주십니다. 남들 보세요. 짜릿하잖아요. 그래 그 사람들이 짜릿한 것은 짜릿한 것을 본인이 억지를 부려서 그걸 규정해서 그래요. 여러분들한테 짜릿한 은혜를 제가 한번 방법을 알려드려요? 아침에 QT책 나오잖아요. 매일 그거 해가지고 일기 쓰듯이 쓰면 돼요.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니까. 얼마든지 조작하거든요.


신앙이라는 것은 다른게 아니고요 성경에서 안나가 여기에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이거 안나의 일상입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고 84년동안 주야로 금식하는 것 그걸 루틴, 패턴 자기 패턴이에요 그냥 일상이에요. 답답한 일상이에요. 주야로 금식하는 것도 일상입니다. 본인의 일상입니다. 그러면 뭐냐?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현장에 아무리 옆에 있어도 카메라 CCTV찍고 그 사람이 하는 것 그대로 24시간 다 CCTV 찍어도 찾을 수 없는 것이 포착된 거에요. 없는 것이. 현장에 부릅뜨고 눈뜨고 안나가 하는 모든 행동을 다 따라가면서 카메라를 찍어도 나올 수 없는 현장에 없는 것이 포착이 된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이 안나처럼 다른 사람 다른 할머니가 똑같이 한다고 해도 안나라는 할머니하고 똑같이 해도 새로운 것이 나오고 안 나오고는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습니다. 현장에 없는 것. 이 현장에 없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상하지 못한 것. 예단하지 못한 것. 생각지도 못한 것이 포착이 되어야 돼요.


그럼 생각하지 못한 것이 포착한다는 말은 아까 율례, 규례를 집어넣는다 했지요. 여기 이렇게 나오지요. 안나가 84년 동안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고 이걸 다른 사람이 흉내낸다고 되는게 아니거든요. 기도하고 금식할 때에 누구나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이렇게 기도하고 금식했기 때문에 성전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뭔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을 하는 겁니다.


그 예상한 것과 전혀 상상도 못한 것이 포착이 될 때 비로소 이 안나의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들어올 자격이 되는 거에요. 누가복음에 들어올 자격이 돼요. 그러니까 성경의 계시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얼추 예상, 나도 하면 되겠다는 것은 성경에는 일체 없습니다. 인간은 그냥 하란 말이야. 네가 평소에 하던대로 하라 이 말이야. 금식을 하든지 아니면 뷔페에서 음식을 더 많이 잡수시던지 맘대로 하세요.


하는데 그 하는 행위와 주께서 주는 것과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 있어줘야 이 성경에 담기게 되는 겁니다. 그래야 인간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전에 개혁주의 신학회라는 그 교수들 모아놓고 제가 논문을 발표할 시간이 있었어요. 앞자리에 오용희 목사님 앉아계시고 반응들 보고 막 화내고 있었어요.


그 논문에 머리말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쓴 책이 아니고 반대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기 위해 쓴 책입니다라고 썼어요. 머리말에. 분위기 쎄~~했어요. 벌써부터. 그들의 신학들이 모조리 다 소용없게 되어버렸어요.


어떻게 하면 성경 가지고 원어 해석하고 조직적으로 논리를 끄집어내서 사람에게 딱 갖다드리면 사람이 그걸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는다 지금 그거 하겠다는 것이 소위 신학 박사들이나 목사들이 하는 일이 그 일이거든요.


성경은 사람을 구원하는 책이 아니고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책입니다. 왜그러냐 하면 이미 인간들이 자기 구원을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 것을 인간들이 전부다 누구나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기대가 만약에 꺾여버리면 그 동안 그 목표,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 그 목표가 좌절되어 버리면 그 생각만 좌절되는 것이 아니고 평생을 살아왔던 모든 인생도 허송세월한 거에요. 허송세월. 허송세월 무슨 뜻인지 아시죠? 허송세월. 헛발질했다 이 말이에요. 헛발질. 허송세월한거에요. 허송세월하게 되면 본인을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살아도 소용없네 이렇게 되겠지요. 살아도 소용없네를 줄여서 이야기하면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죽은 자라는 뜻이에요. 나는 죽은 자란 뜻이에요. 죽은 자가 돼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효과를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라는 것은 일단 죽어야 돼요. 살아서 깝죽대면 안돼요. 살아서 이거하고 저거하고 금식하고 성전 왔다갔다하고 이러면 안돼요. 일단 죽어야 됩니다. 물론 성전 안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건 아니고.


성전에 다니고 84년 동안 주야로 금식하되 안나가 느꼈던 것은 내가 하는 행위와 그리고 내가 맞닥뜨리게 된 상황이 이게 매치가 되지 않아야 돼요. 그래야 내가 하는 모든 행위의 집대성 집어넣어도 주께서는 거절해줘야 그래야 내가 있으나마나한 죽은 자가 됩니다. 시체가 되어야 돼요. 복음을 이야기하려면 둘 다 시체가 돼야 둘 다 복음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쪽은 시체인데 한쪽이 멀쩡하게 살아있으면 복음 이야기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서 이것저것 했다. 이것저것 했다가 나와버려요. 그러면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복음적 대화가 될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가 설교할 때는 죽으려고 해야 돼요. 이미 죽었는데 또 죽을 어떤 타이밍을 또 허락하셨다.


그래서 설교할 때 이 설교에서 내가 이미 죽은 자로서 또는 죽으려고 죽은 자인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서 죽으라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허락했다고 생각하고 설교를 해버리면 설교자가 어떤 예상을 할 수가 있느냐 하면 내 설교 듣고 몇 명 은혜 받았느냐 생각이 그게 안 나올 거잖아요. 설교하고 죽었는데 그 뒤에 몇 명 은혜 받았는지 자기가 그거 알아서 뭐할건데.


이미 죽었는데. 귀, 코, 눈 전부다 막혀버렸는데 죽어버렸는데. 내 팬이 몇 명이고 그런거 생각하겠어요? 안하지요. 그런데 설교하고 난 뒤에 몇 명 은혜 받았는가 그거 계산하고 전도사 뒤에 시켜가지고 오늘 몇 명 왔는가 다 숫자 세게 하고 전도사는 또 사회성이 있어요. 200명 왔는데 또 250명 해줘야 그다음 계약 때 계약이 다시 재계약이 가능해요.


곧이곧대로 200명하면 이건 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거 헤아려서 뭐할건데? 죽은 자가 무슨 구경할게 있다고. 그러니까 죽는다는 말은 설교자가 억지로 죽는 것은 이건 또 연기하는 거구요. 주님에게 관심을 둬버리면 다른데 관심 둘 여력이 없어요.


주님에게 꽂혀버리면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가 어디까지 퍼졌나 그것도 신경 안 써요. 한곳에 꽂혀버리면 다른 곳은 필요치 않잖아요. 죽어도 좋다고 되는 죽어도 좋을 정도가 되는 뭔가가 있다면 나머지 것은 신경 쓸 그러한 필요치 않지요. 비교 대상이 안 되니까.


만약에 다른데 신경 쓰고 또 교회 와서 주님에게 신경 써버리면 이거는 어떻게 되어버리느냐 하면은 내가 진짜 신경 쓰고 싶은 것이 잘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한 셈이 되는 겁니다. 그거는 보험사기죠. 보험사기에요 그거는. 차에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부딪힌 척하는 이유가 보험금 타내려고 그렇게 하잖아요.


내가 예상하는 나의 구원이라는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서 교회 와서 은혜 같지도 않은데 주여 하고 눈물 흘리고 따라하구요 부흥회해가지고 주여 주여 해가지고 침 다 튀어가지고 바이러스 다 날리고. 왜 그렇게 모방 짓을 하고 남 흉내를 내느냐? 주님이 좋은게 아니고 자기가 원래 목적하는 바가 있어요. 목적하는 바가.


믿음으로 구원받고 살아서 기도해서 복 받고 이런 목적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목적한 바가. 이것은 결국은 구원받는 것도 일단은 내가 살아있어야 된다는 전제조건하에 구원이고 복 받는 것도 복을 받을 수임자가 복을 얻을 자가 남이 아니고 나여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기 때문에 그래요. 실컷 기도했는데 옆에 사람이 복 받았다. 그거는 미치지요.


주님이여 행정착오가 있었습니다. 주님보고 따질 거에요. 십일조를 내가 냈는데 왜 십일조 내지 않는 김집사가 왜 복을 받습니까? 이거는 뭐 잠깐 서류 좀 봅시다. 뭐 행정착오 잘못된 거 아니에요? 30, 60, 100배 저 사람한테 왜 가느냐 하는 식이죠. 결국은 이거는 죽지도 않으면서 죽은 체하면서 하나님을 상대로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본인이 사기치는 거에요.


자, 그러면 이렇게 인간이 사기 치는 이유 그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미리 말씀드리지만 어려워요. 어렵다고 벌써 수백번 해도 어렵다 해도 하나도 안 어렵더라라고 여러분 했는데 좀 어렵습니다. 생각을 ‘사유’라고 합니다. 사유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가 이게 같지 않아요. 달라요. 같다고 본 사람 있었습니다.


누구냐 하면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여러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적 있지요? 존재한다고 생각했어요. 생각과 존재를 같이 본겁니다. 왜냐하면 이 데카르트 이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과학자였어요.


과학자의 특징은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 관찰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어디 있지? 여기 있네. 이게 과학이에요. 내가 어디 있지? 여기 있네. 내가 보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보는대로 내가 여기 있다고 하는 거에요. 여기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 그러면 나는 곧 있는 것이다 ‘존재’, 나는 여기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굉장히 일리 있어 보이지요?


이 주장을 누가 거역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제가 오늘 강의하면서 뭐라고 하던가요? 그 현장에 없는 것을 포착하라고 했지요. 그 현장에 없는 것. 이 데카르트 생각, 이 과학적 생각에 대해서 어떤 철학자가 강력하게 반대했어요. 반대한 철학자 이름이 네 자입니다. 독일 철학자인데 누구냐 하면 하이데거라는 사람이에요. 하이데거라는 사람. 이 사람이 뭘 봤느냐 하면 데카르트가 과학자를 대표한다고 보면..


별을 볼 때 망원경으로 별이 보지이죠. 달이 이동하면 혜성 이동하면 보이지요? 혜성이 언제쯤 지구와 충돌할 것인가 연구하지요? 관찰이죠? 눈으로 보고 있다 이 말이죠. 이동한다. 우주로켓을 쏴 올렸다. 뜬다. 그걸 컴퓨터로 보고 다 보는 겁니다. 가고 이 땅에서 보인단 말입니다. 여기서 그게 거짓이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이데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 과학자는 이 데카르트는 뭐를 몰랐냐하면 존재자와 존재를 이게 차이난다는 것을 몰랐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제가 아까 어렵다 했지요?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을 못해서 이런 주장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이데거 이 사람의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존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것을 인하여 우리 자신이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입니다. 내가 생각한다 할 때 내가 생각함으로써 여기 있다 할 때에 그건 내가 있는게 아니고 내 생각해보니까 거울로 보니까 마주 보니까 뭐가 거울 앞에 내 모습이 보이니까 저기 있다고 그거는 내 생각이 그렇게 생각, 내 생각으로 생각 속에 있는 그러한 존재라고 여겼던 겁니다. 잠시 침묵..


지금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사람이 왜 죽음을 생각 못하느냐 하는 이야기죠. 나는 죽는다. 고로 나는 죽는다. 이렇게 되는거 돼요? 안 되지요? 내가 죽는다고 하게 되면 이건 죽는 겁니까? 살아있는 거죠. 왜? 죽는다는 생각을 하는 자체가 살아있다는 것.


그러면 사유와 존재가 같으면 내가 죽는다하면 내가 없어져야지요. 또 없어지게 되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되지요. 그러니까 이게 죽음 앞에서 이게 맞지가 않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미운데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 이쁘다 이쁘다 하면 그 사람이 이뻐집니까? 안 미워져요?


말만 해가지고 다 이뻐질 거 같으면 다 이 세상에 가정법원 있을 필요 없고 법원 자체가 있을 필요가 없지요. 내 땅을 남의 땅이라고 한다. 그런 나는 너를 나는 용서한다하면 용서가 되던가요? 집사님 용서되던가요? 안 되지요? 안 되지요?


생각한다는 것은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생각한다는 것이 누구를 자꾸 옹호하고 누구를 응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생각하면서 목적이 있어요. 나는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거 있잖아요. 나는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라는 그 상상한 것을 자기가 독려하고 격려해요. 너무나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그리고 하이데거 이야기하기를 네가 다른 사람 있는데 네가 보태준거 있어? 없어? 없지요.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간섭한다고요.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이 있다. 내가 있다. 개가 있다 존재의 일반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다로 모든게 쏠리게 되어있어요. 내가 여기 있다. 그러니까 내가 있다는 이 존재자에요.


존재자라 하는 것은 나만 여기 있는 걸 존재자라 합니다. 그리고 여러 모든 다 있음을 합쳐서 존재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하이데거가 그런 이야기해놓고 하이데거는 현상 또는 실존주의자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뒤에 나온 사람들이 방금 하이데거의 반박을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어디서 가져오느냐? 그것은 사람이 언어를 생각하면서 생각이라는 것이 굳어졌다. 그런데 언어는 어디서 나왔는가? 언어는 바로 타인에서 나왔다. 남에게 나왔다. 그런데 타인, 언어, 생각 이 모두가 뭐냐 하면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 느껴지는 것, 귀로 들려지는 것이라고 본 거에요.


그렇다면 인간에 있어서 남들이 요구하는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인간은 어떠냐? 내가 생각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그런 충동같은 것 내가 생각 못한 욕망같은 것이 살아가면서 생각하지도 못한 욕망이 계속 나오게 되어있어요. 생각하지도 못한 욕망이.


그 전에 어떤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2살 3살 된 애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니까 자기는 치마입는게 소원이라는 거에요. 그러면 애가 갑자기 나는 휴대폰 사주세요 그러면 이건 두 살 애가 할 이야기가 아니지요. 하지만 애가 치마 입혀주면 그걸로 끝나는게 아니에요.


세월이 지나가면 계속해서 뭐가 생겨납니까? 바로 휴대폰 갖고싶어요 이러다가 서른살 넘으면 아빠 엄마 집 사주세요 이게 막 나오지요. 아빠 엄마. 무슨 집? 아파트 사주세요. 분당에. 뭐 이런 식으로 막 나온다 이 말이죠. 4살 먹은 애가 분당에 아파트 사주세요 이런거 봤어요? 없지요? 몰라요 조숙하면 모르겠지만.


자꾸 집 사달라고 하면 네가 알아서 사라. 돈 모자라요. 돈 보태주세요.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이거는 본인이 예상 못한 거에요. 자기가 예상 못한건데 어디서 왔어요? 왜 아파트라는 말을 이게 언어잖아요. 언어. 단어를 어디서 들어봤으며 아파트라는 언어와 일체되는 그 있음, 눈에 보이는 아파트는 그 아이가 누구한테 배운 거에요? 남들에게 온 거에요. 남들에게.


아파트 20층짜리 50층짜리 세워놨는데 우리 주변에 내가 아는 사람이 500명인데 어느 누구도 아파트에 들어간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면 아파트 사주세요라는 말을 본인이 그런 욕망을 안 해요. 아파트 30층 50층 있는데도 왜 안 들어가느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걸어서 50층까지 걸어서 올라가야 된다. 그러면 아무도 안 들어가겠지요?


관리비가 한달에 500만원입니다 하면 누가 들어가겠어요. 안 들어간다 이 말이죠. 아파트 지어놔도 안 들어가잖아요. 아파트 엘리베이터 해놨는데 정전되가지고 걸어서 올라간다. 거기에다 물건까지 있다고 해봅시다. 양쪽에 바케스에 물 들고 올라간다 해봅시다. 평양에 모란봉인가 평양에 그 거리에 아파트 지어놨는데 정전되서 엘리베이터 가동 안되면 그 아파트 누가 살겠어요? 살다가 아파트 무너지면 누가 살겠어요?


이건 뭐냐 하면은 타인의 욕망, 남들의 욕망이 우리에게 뭐로 전달됩니까? 말로 대화로 전달되는 거에요. 대화로 전달되니까 내가 생각하지 못한 여분의 생각이 계속 유입되는 거에요. 나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저 사람 되고 싶어. 저 사람 되고 싶어 그게 뭐냐 하면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게 존재가 아니고 존재자가 되는 겁니다. 계속 남 따라가는 거에요. 남 따라.


교회에서 찬송 부르고 은혜로우면 그걸 눈으로 봤잖아요. 눈으로 봤으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 찬송 부를 때 조용하게 안해요. 갑자기 그 사람 따라한다고요. 복면가왕이라는 그 프로그램에서 사회자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는 사람이 마지막 점수 공개할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이렇게 한다고요. 여러분 그 프로 안봤지요? 후딱 한번 보니까 그런게 있어요.


“바로~~~” 하니까 거기 참석한 사람들이 그거 다 따라해요. “바로~~~” 다 따라해. 만약에 그 사회 보는 사람이 이름 뭐지? 김성주 그 사람이 바로 안하고 그냥 바로 했으면 다 안해요. 혼자 열 내서 “바로~~~~~” 하면 다 “바로~~~” 하잖아요. 인간은 본인도 모르게 옆사람한테 행동이 전염받게 됩니다. 오염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개성 있지만 그게 다수가 되게 되면 그걸 일반성이라고 하는 거에요. 개인적으로는 개성 있어도. 하나 하나 놔두면 개인적으로 다 개성 있어요. 집에 개들 보면 개들마다 개성 있지요? 하지만 우리나라 등록할 때는 개로 등록해요. 전부 똑같은 개입니다.


한국에 행정관에서 개로 등록했다면 하늘나라에서 우리 인간을 볼 때에 뭐로 보겠어요? 하나의 개성을 살려서 보겠습니까? 적을 때 뭐라고 보겠습니까? 아담에 속한 자. 끝나는 거에요. ‘아담에 속한 자’. 아담 봤습니까? 안 봤지요? 아담 안 봤지요. 눈에 띄지 않잖아요. 눈에. 아담 안 봤는데 하나님께서는 무슨 언어를 사용합니까? 너는 아담에 속했다는 언어를 사용하지요.


그러니까 성경의 언어는 우리를 구원받으라고 하는 거에요? 우리를 존재자가 구원받는 것을 밀어내고 존재가 구원받는 것을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겁니다. 이 존재자를 우리 개인으로 보고 이 존재를 유일한 존재가 누구냐하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모든 성경은 누굴 증거한다? 예수님 증거하는 겁니다. 예수님 증거하는 거에요.


그러면 말씀이 살았다는 말은 죽은 자에게는 계시나 말씀과 매치되는게 안 나와요. 우리가 십계명을 못 지키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우리가 십계명 출제위원이 아니기 때문에. 출제위원이 아니에요. 모세가 십계명을 하나님과 머리 맞대고 이건 조항에 넣읍시다. 아 저건 빼야 되는데 안돼요. 이렇게 의논해서 십계명 만들었습니까? 일방적으로 부여받은거죠.


자기는 하나의 택배기사 하나의 전달자에요. 하늘의 뜻을 땅에 전달하는 전달자에 불과하단 말이죠.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지난 낮 설교하면서 세례 요한을 ‘소리’라고 했지요. 그냥 소리라는 말은 주님 앞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내 존재를 내세울 수가 없어요. 내가 주님하고 상대해서 구원받는 그런 법은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그런 법을 준 적이 없어요.


예수님은 하나의 대상이 되고 나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성경에 용납을 할 수가 없어요. 주님의 존재되심, 주님의 존재되심에서 분출된 그 계시에 의해서 흡수, 통합될 때에 구원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가 시체 되어야 돼요. 시체 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능력이 뭡니까? 죽은데서 살리는 능력이죠.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니까 죽은 예수도 성령에 의해서 죽은데서 살아났지요. 로마서 8장 9절에서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에게 임하면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죽은 너희 몸도 살리죠.


그럼 우리는 어떤 상태가 돼요? 죽은 몸이 되어야 돼요. 죽은 자가 되어야 돼요. 죽은 자가 될 때만 복음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죽은 자가 될 때만. 목회자가 설교한다는 것은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를 설교해야 된다는 그러한 타이밍 때문에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설교라는 일을 맡겨주게 되면 그 목사는 그 설교를 통해서 내가 살았다가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 주님이 살아 여기 계십니다를 증거하고 설교 끝나고 난 뒤에 꼴까닥 죽으면 되지요.


설교하고 꼴까닥 개거품 물고 죽었는데 목사님 상담 좀 합시다 하면 깨서 다시 부스럭 부스럭 일어나가지고 합시다 하고 또 일어나고. 이게 살아있는 눈에 보이는 그 현장 이거는 내 생각에서 나온 겁니다. 내 생각에서. 눈에 보이는대로 내가 여기 있다고 하는 거에요.


그러나 그 나는 나의 전부가 아니에요. 내 전부가 아니다 이 말이죠. 내가 여기 눈에 보이면 거기에다가 무엇을 채우느냐하면 남들은 어떻게 살았지? 남들이 살아가는 모든 재료를 가지고 나에게 전부다 퍼부어버려요. 혹시나 될까싶어서. 혹시나 그렇게 될까싶어서. 다 퍼부어버린다고요.


자, 지금까지 여러분 어려운거 해서 잘 모르겠지요? 그럼 새로 다시. 두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생각에서 나오는 나. 생각에서 나오는 나와 그 다음에 무슨 나라고 했던가요? 존재에서 나. 생각에서 나온 나는 이거는 눈에 보이는 타자 또는 타인.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나왔던 그것이 언어를 통해서 나한테 다 모아지는 거에요.


그러면 나를 쪼개면 전부다 누구 생각이 들어있어요? 어릴 때부터 부모 생각부터 누구 생각? 남들의 생각입니다. 남들의 생각이 내 안에 그대로 다 들어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생각에서 나온거죠. 생각에서. 그러면 내가 태어나서 생각하기 이전에 생각하기 이전에 알 수 없는 누구의 생각에 의해서 지금의 내가 된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되느냐 하면은 결국은 그 물음표. 누구에게로 소환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자, 여기에 하나님이 주신 언어가 있지요. 그 언어를 가지고 말씀 또는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 자, 이 계시하고 흔히 눈에 보이는 이 문자로 된 원어 히브리어 헬라어 막 우기면서 어떤 사람은 막 공부하는데 오늘 아침 뉴스 보니까 어느 기독교 집회에 신부도 참석했데요. 신부가 왜 참석하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원어 연구하는 곳. 원어 연구해가지고 코로나 15명 걸리고.


세상에서의 원어 연구 헬라어 히브리어 연구해서 성경 문자 공부합시다. 해서 뭐하는데요? 문자 공부하는 것은 이게 목적이 뭐에요? 내가 생각해놓은 내가 이상적인 내가 목표하는 이상적인 바른 목회자 상 되겠지요. 주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성도. 하여튼 뭐 어떤 것을 상상해도 내가 생각하는 상상으로 향하여 전부다 다시 여기에다가 쏠리는 거에요.


그럼 이것은 성경 보면서 이미 예상이 돼요? 안돼요? 예상이 되겠지요? 성경에 나오는 오늘 본문에 안나 나오지요? 나도 안나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안나처럼 됐으면 좋겠다. 뭐 이런다고요. 왜? 안나가 성경에 나오니까.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누구였습니까? 안나 말고 시므온. 아 성경에 시므온처럼 됐으면 좋겠다. 시므온처럼 됐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전에는 누가 나옵니까? 마리아. 마리아처럼 되겠다. 마리아처럼 되겠다. 마리아처럼 임신 한번 해볼래요? 예? 그것도 결혼 안한 사람이 한번 배불러봐야 정신차리겠습니까? 그다음에 아 나도 세례 요한, 세례 요한 아버지는 완전히 말도 못했는데요. 벙어리 되었는데요.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의도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목표로 한 나답기 위해서 이 성경이라는 이 문자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성경 문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러나 이쪽에 내려오게 되면 나는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나는 뭐가 되는 조건하에 구원돼요? 나는 뭐가 됩니까? 내가 시체가 되겠지요.


아담에 속한 모든 자는 존재가 아니고 존재자에요.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자가 여기서 말씀 위에서 뭐가 됩니까? 시체가 되지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인자가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이 하나님이 데리고 성신에 의해서 데리고 어디로 가지요? 어떤 골짜기에 가지요.


아골 골짜기에 가니까 그 골짜기가 뭐만 소복이 있습니까? 해골만 소복이 있어요. 6.25 전쟁이 일어났나? 해골만 소복이 있는 거에요. 해골만 소복이 있는 거기 가서 그 하나님이 에스겔에서 묻습니다. 에스겔아 이 자들이 살겠느냐? 이렇게 이야기했다고요. 이 자들이 살겠느냐?


그 해골 그 구석진 곳에 우리가 거기에 해골로서 거기에 같이 이렇게 뒤엉켜있다고 섞여있다고 비좁은데 같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이미 우리는 죽은 자에요. 죽은 자는 내가 어떻게 됐다는 뭘 못하느냐 하면은 사유, 생각을 못해요. 나는 이런 인간이 되어야지. 이런 남자가 이런 여자가 되어야지 이런 가정을 꾸려야지.


이런 행복을 꿈꿔야지 나는 이렇게 해서 우리 애가 공부 잘하고 뭐 어떻게 잘되고 나라의 일꾼이 되고 교회의 일꾼이 되는 그런 자식을 낳아야지. 교육시켜야지. 그런 생각 자체 없다니까. 그런 생각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제가 어제 주일날 낮 설교하면서 끝부분에 이런 이야기했지요.


주의 말씀은 탄력성 공처럼 공을 한번 튕겨놓고 내 키를 훌쩍 넘어가버려요. 눈치코치도 없어. 훅 넘어가가지고 나는 주의 말씀이 나 유리하라고 나 이익 달라고 오늘도 눈 이렇게 뜨고 있는데 그 공이 무슨 공인지 테니스공인지 튕겼다가 키를 훌쩍 넘어가요. 나는 너하고 안 논다는 식으로. 그럼 목도 같이 돌아가야 돼요.


저게 어디로 가는거야? 가보니까 나의 날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날로 간다고 했잖아요. 그리스도의 날로 가버려요. 성경 말씀은 나를 위한 말씀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가게 하는 거에요. 튕겨 올라갑니다. 그러니 결국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주의 일에 누가 방해자다? 바로 내가 방해자 되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는 불러줬지만 사실은 뭐냐? 주의 일의 방해자로 태어난 거에요.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부질없는 인간, 아무 헛짓하는 인간, 뭘 해도 아무 소용없는 인간으로 만들어서 우리의 기대나 목적 자체를 완전히 작살내버리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시체와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내 행함이 주의 일과 연결이 않도록.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결론 내리면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밀어내는 구원받지 말라고 밀어내는 책이 바로 성경책입니다.


성경을 네가 상고해봐라. 거기서 네가 영생을 얻는다는 그 대목이 디모데후서 3장인가? 3장 16절인가 나오지요(15절)?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성령에 의해서 되는 거에요. 성령에 의해서. 왜냐? 성경은 성령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성령은 어디서 어떤 경우에만 나오느냐 하면 내가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만 성령이 비로소 성령 활동이 느껴지는 겁니다. 내가 죽어 있을 때.


죽어 있을 때는 못 느끼고 죽었는데 성령이 와서 그만 자고 일어나라 툭 두드리죠. 에베소서 5장에 잠자는 자여. 뭐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잠자는 자여 이렇게 할 수도 있고요. 잠자는 자여 깨어서 일어나라. 그걸 죽은 자가 그 말씀을 자기가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옮기잖아요. 나중에 깨어나 보니까 깨어나서 사후 일이 처리되고 보니까 내가 죽은 시체라는 것을 아는 거에요.


다시 에스겔 이야기해서 에스겔 골짜기에 보면 뼈다귀가 있는 거에요. 이 데카르트 과학적 이론에 의하면 과학적 사고방식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창조, 모든 생물의 창조 이 모든 창조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이 지구상에 뭔가 축축한게 있었다고 본거에요.


축축한게 있어가지고 그 축축한 것에서 자동복제가 되는 DNA의 원시적 원래 DNA가 하나 나와서 DNA가 DNA를 복제해가지고 그래서 오늘날 이렇게 우리 인간이 되고 해파리가 되고 지렁이가 되고 코끼리가 되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그 존재자의 가치와 이상을 그걸 그 포부를 갖고있으니까 과학을 해도 항상 누구 위주에요? 누구 좋아라고 누구 긍정하라고 과학을 하는 거에요? 인간 좋아라고 과학을 하는 거에요. 어떤 분이 저한테 글을 보내 왔어요. 목사님 이 글이 맞습니까하고 보내왔는데 그 사람이 뭐냐 하면 신학교 교수가 쓴 글인데 자기한테 보내줬다는 거에요.


신학교 교수가 무슨 글을 보여줬느냐 하면은 코로나 문제가 신종 코로나 문제가 그 사람 신학교 교수에요. 소위 스스로 신자라고 자부하겠지요. 그 사람이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지켜줘가지고 쉽게 말해서 이 악마 같은 코로나에서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습니다라고 이런 식으로 쓴 거에요. 그래서 그 글을 받은 집사님이 아무리 봐도 수상하거든요. 뭐라고 반박해야 되느냐. 뭐라고 대꾸해야 되느냐.


저한테 물어가지고 제가 답변을 해줬어요. 인간이 쓰레기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님께서 코로나를 보냈다는 것. 인간이 죽은 존재라는 것. 살 가치가 없다는 것으로 보냈다는 것으로 왜 이 세상을 볼 줄 모르느냐? 왜 인간 위주냐 말이죠. 신학을 했다면서도 계속 인간위주에요. 그러니까 코로나가 뭐냐? 악마같은 존재가 되어버리죠.


그러면 코로나 누가 만들었습니까? 코로나 누가 만들었지요?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주님이 만들었잖아요. 주님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결국은 또 인간에서 핍박을 또 받네. 신자라는 입을 통해서 또 예수님께서 또 핍박을 미움을 받아요. 잘해보자는데 왜 코로나 보내십니까? 이러고 있단 말이죠.


참 인간 위주로 생각하는게 참 이게 뭐냐? 자신이 시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살아있는 인간을 더 멋있게 자기의 소원대로 살고 하다보니까 계속해서 이천년 신학이 교회 설교가 다 전부다 그런 식이에요. 여러분 좋게 해줄테니까 그냥 돈이나 교회에 내세요. 지금 이런 식이에요. 예수가 하나의 상품화되고 말았어요. 좋은 예수가, 사랑의 하나님이.


남양주에 가면 허경영이란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이 강연을 하는데 강연할 때 입장료가 10만원이에요. 10만원 주고 강연 들으러 오는데 아마 제주도에서도 오고 비행기타고 오고 그렇게 다 온답니다. 끝나고 난 뒤에 그 사람하는 게 기를 부어가지고 병 치료하는 그걸 해요.


끝나고 나서 상담을 하는데 질문자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저 허경영 총재님 지금 우리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질문자체가 이래요. 보통 우리 질문은 뭐냐? 우리 아버지가 언제쯤 퇴원하겠습니까? 이게 보통 하는 질문인데 그 사람은 이렇게 해요. 언제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돌아가시겠습니까?


하니까 허경영 답변하기를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안 되는 이유가 아버지가 지금 막고 있어서 그렇다. 아버지가. 이렇게 하면 아버지 빨리 돌아가신다. 그렇게 상담을 해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허경영 입장에서는 그 아버지 본적도 없고 자기한테 온 고객 아닙니까. 고객은 돈 빼내면 되는 거지요. 뭐 다른 목적이 아니라 돈만 빼면 되는 거에요.


교회가 돈을 빼내면 되는 거에요. 목사님 어떻게 기도하면 우리 애가 공부를 잘하겠습니까? 기도 빡시게 하세요. 마치 동네 내과 병원에서 환자 오게 되면 처방전 써주는 거에요. 이 약 하시고 앞에 가서 약 받아가시고 식후 30분 후에 하루 3번 일주일 잡수시면 됩니다. 처방전을 원하는 거에요.


인간들이 처방전을 왜 원합니까? 누구 좋아라고 원합니까? 예수님 좋으라고 원합니까? 내게 이익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에요. 내게 이익이 없으면. 그러니까 성경을 보면서 이거는 성경을 보는 그 자체가 죄가 되버린 거에요. 주님이 하시는 일을 진짜 마귀 종이 되가지고 막는데 일조를 하고 있어. 일조만 하면 말을 안해. 이조 삼조. 계속해서 하는 거에요.


왜냐? 주님 이용해서 나 살기 힘든 이 세상을 더 한번 멋있게 씩씩하게 한번 살아보자는 겁니다.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고 십자가의 복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우리가 일단은 무슨 자다? 일단은 죽은 자가 되어야 돼요. 죽은 자가 된다는 말은 내가 어떤 짓거리 선교, 전도, 헌금, 예배 참석, 무슨 찬양 뭘 해도 이게 아무 하나님의 일이 되지 않는 그런 상태로 네가 놓여 있음을 알려 주는게 성경이에요. 놓여 있음을.


제가 이렇게 하면 어떤 분은 이렇게 해요. 그러면 아무것도 안하고 놀까요? 놀아도 안돼. 놀아도 안돼요. 가만히 노끈가지고 묶고 가만히 있어도 안돼요. 왜? 생각하니까. 심지어 노끈 묶었으니까 천당 가겠지. 이런 희한한 생각을 한다니까요. 아무것도 안했으니까 복 받겠지 이런 생각한다고요. 자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이거에요. 일반성, 일반성에서 따로 하나를 뚝 하나를 뽑아내요. 그 뽑아낸 것이 오늘 본문에 여기에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36절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지요? “선지자”.


일반성을 다 묶어놓고 선지자도 일반성에 포함됩니다. 그렇고 그런 사람이에요. 백날 패턴대로 금식하고 철야하고 성전에서 머물고 철야해봐야 그거는 남들이 얼마든지 흉내낼 수 있고 남 따라하는 것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요. ‘일반성’.


할 수 있는데 선지자라는 것은 주님의 일반성의 반대말, 보편성의 반대말은 특수성이고 일반성의 반대말은 다양성이라 했지요. 주께서는 이걸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보는데 주님께서 이걸 보편적으로 봐버리면 선지자는 특수성이에요.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죠.


성령의 능력으로 이 안나를 뭐로 보느냐? 이 안나를 죽은 자로 봐요. 죽은 자로 봐놓고 안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안나의 일이 아니고 이거는 예상 못한 살아계신 주님께서 안나로 하여금 선지자 되게 하시는 작업을 주께서 친히 하시는 겁니다. 이게 선지자의 기능입니다. 그 선지자의 기능의 근거는 뭐냐? 하나님의 약속에서 계약에서 언약에서 나오는 거에요.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2장 36절 (시체 재활용) 200602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혹시 잔디밭에 앉았을 때에 마침 여러분 눈에 네잎크로바가 보이면 기분이 어때요? 아 오늘 기분 진짜 굉장히 안 좋다. 더럽다. 찝찝해. 이렇게 생각듭니까? 아니면 이게 왠일이야. 네잎클로바가 왠일이야 하고 굉장히 반기지요. 행운의 네잎클로바라고.


자, 왜 네잎클로바하고 세잎클로바하고 그렇게 차이를 주는 겁니까? 그거는 모든 우리가 아까 주위에서 들어왔던 모든 것은 네잎클로바가 행운을 가져다준다. 행운. 행운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우리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일반적인 것을 뽑아낼 때 선지자가 자기의 기능을 합니다. 일반적인 것이 전부다 세잎클로바라고 합시다. 세잎클로바. 그럼 선지자가 뽑아놨을 때 이건 네잎클로바, 드문거니까 네잎클로바 한다면 이것을 사람들은 기분 좋게 하겠어요? 기분 싫게 하겠어요?


일단은 네잎클로바는 기분 좋지만 여기에 선지자 뽑아낼 때 사람들은 기분 좋은게 아니고 기분 굉장히 나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만약에 선지자가 동원된다면 어떻게든 일반적에서 선지자까지 어떻게 연결돼야 돼요. 계속해서 단절이 없이 나도 그렇게 되면 필히 동일한 결과를 내줄 때 여기에 희망이라는 것이 성립이 된다 이 말이죠.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은혜 받았다. 어떻게 은혜 받았어요?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새벽기도 나오고 성경 다 읽어서 써가지고 성경 일년만에 한번 다 쓰니까 갑자기 하나님께서 복주셨다 한다면 그게 아무리 힘들더라도 고되고 참 하기 힘든 노동이라고 할지라도 희망이 있는 이상은 악바리같이 악착같이 그렇게 하기 마련입니다. 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안나라든지 시므온이라든지 이 사람들을 성경에 나온 이 사람들을 가지고 자꾸 분석해가지고 본받으려고 해요. 특히 어떤 점을 본받으려 하느냐 하면은 여기 36절에 보면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7년 동안은 남편과 함께 살았습니다.


살다가 남편이 죽고난 뒤에 과부된 지 몇 년이라고 했습니까? 84년이죠. 이 84년은 출가한지 7년 됐으니까 포함 91년이죠. 그런데 결혼을 만약에 옛날에는 결혼을 젊어서 했으니까 18세에 했다 합시다. 18세에 했다 하면 이 안나의 수명이 109세에요. 109세. 자기가 송해입니까? 우와. 109세 된 거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세상에 과부되도 재혼을 안했다는 거에요. 재혼을. 오직 주님만 섬긴다고 바빠 가지고 재혼을 안했다는 거에요. 이게 이런 설교 나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과부도 재혼하지 말고 그냥 교회 와서 새벽기도 밤낮으로 기도하게 되면 나중에 누구 만난다? 예수님 만나는 쪽으로 그렇게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목사 본인은요. 사모님 죽어보세요. 6개월도 안 되서 선봐가지고 전부다 다 갑니다. 6개월도 안돼서. 말도 안 되는. 이 안나라는 사람이 84년 동안 재혼을 안 한 이유가 믿음이 좋아서 안 할 수도 있지만 인물이 안 되고 돈이 안 되니까 뭐 전문직업이 없으니까 아무도. 특별히 몸까지 아파버리면 삼위일체. 아무도 찾지를 않아요. 부담되어서 찾지를 않아요.


주께서는 이런 사람을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성경에서 이걸 선지자가 아니고 쓰레기로 봅니다. 쓰레기입니다. 쓰레기에서 복음 나와요. 쓰레기에서. 그러니까 이 안나라는 사람이 그걸 알아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별 희망이 없어요. 희망은 오직 선지자이기 때문에 오직 대대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약속을 쳐다보는 것 외에는 다른 낙이 없습니다. 어떤 낙이 없어요.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쓰시는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에코산업이다 이렇게 해요. 에코백. 쓰레기 재활용. 쓰레기더미에 옷 천 끄집어당겨가지고 그거 가지고 가방 만드는 것. 당나귀를 알아요? 참깨를 짜야 참기름이 나온다고요. 참기름이. 참깨를 짜야.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나대면 안돼요. 우리 하는 그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참깨를 짜버립니다. 그럼 우리는 찌꺼기가 돼요. 찌꺼기인데 찌꺼기에서 이게 나올 수가 없어. 복음이 나올 수가 없다고 했는데 이게 우리의 예상인데 내가 뭐 말씀을 지킬 수가 있어요. 어느 하나. 죽은지 7년 동안 뭐 그런거 할 자신도 없지요.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차단시켜버려요. 어떤 것도 하고 싶지를 않아요. 성경에 나온 사람들. 소경되었는데 실로암 강가에 가서 진흙가지고 바르니까 소경이 눈을 떴다. 멋있어 보이지요? 한번 소경되어 볼래요? 그러면? 아이고 사양하지요. 믿음 좋은 사람한테 가세요. 저는 안 됩니다.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38년 된 병자. 그것도 1,2년도 아니고 38년 된 거에요. 하지만 예수님 만나서 뭐 나중에 걸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은 뭐냐 하면 아 처음부터 걷지. 처음부터 걷지 왜 병 주고 약 주느냐 딱 그런 식의 조치가 내가 소망하는게 아니에요. 내 코스에는 그런 원함이 없어요. 나의 소원에 그런거 없어. 나의 희망에 그런게 없다 이 말이죠.


내가 생각하는 그 보따리에 주께서 들추어보시고 “아 이걸 원해?” “예.” “이걸 희망해?” “예 이걸 희망합니다.” 그러면 이 희망없는거 내가 할게 해가지고 다 조사해가지고 수색해가지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줘버려요. 원하지 않는걸. 그래야 우리가 쓰레기인 것을 인정하지요. 내가 한 모든 것이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자, 여기서 또 여러분들이 필히 또 알아야 될게 있어요. 오늘 강의는 이거 하나만 알면 돼요. 갑자기 부담이 확 줄어들죠. 일반자에서 선지자 끄집어내죠. 일반자에서 선지자 끄집어냅니다. 선지자 끄집어내니까 선지자는 개인이잖아요. 개인을 이걸 집단화시킵니다. 방향이.


일반자에서 선지자 끄집어내고 선지자 끄집어낸 것을 집단화시키면 이게 바로 이스라엘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일반자, 일반인들에서 선지자 끄집어낼 때 그 원칙을 여기에다가 집단의 원칙에다가 그대로 제공해 버립니다.


그러면 여기 선지자는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 능력으로 된 거 아니지요? 아기 예수가 언제쯤 온다하면 그거는 안나가 알았어요? 몰랐어요? 사전에. 사전에 아기 예수가 있는지 몰랐지요. 안나가 84년 동안 성전에 있게 하신 것은 누가 있게 하셨느냐 하면은 아기 예수님께서 안나를 그렇게 만든 거에요. 기다리라. 기다리라 내가 갈께가 아니라 그 기다리는 자 되게 한 거에요.


선지자 되게 해서 선지가 값 되도록 선지자라는 그 값에 맞도록 아기 예수님께서 그렇게 조정을 하신 거에요. 그 당시에는 아기 예수님보다는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다하는 것이 누가복음에 맞아요. 왜냐하면 시므온도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 있지요 27절에. 성령의 감동으로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이제 종을 평안히 놓아준다고 했지요.


그러면 시므온이 사전에 어떤 치밀하게 개입하거나 계산된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시므온이 성전에 가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할 수가 있거든 남편 사별하고 난 뒤에는 그냥 줄곧 새벽기도 해가지고 이 제단, 교회를 지키고 더 교회에서 기도해야 된다라고 목사들이 자꾸 그런 식으로 이걸 적용을 하는데 그러면 코로나 있을 때는 교회 와야 돼요? 말아야 돼요? 코로나 왔을 때는.


코로나 왔어도 손 씻고 마스크하고 이렇게 이렇게 해가지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그 교회에 7868명. 다닥다닥 붙어앉아가지고. “네가 네 집에 가라.” “아냐 내가 부름 받았어.” “내가 시므온이야.” “아냐 내가 시므온이야.” 싸우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안되겠지요.


어떤 경우도 예상 못해요. 예수님을 언제 느끼느냐 하면은 예상 못할 때 느껴요. 뭐와 동반해서?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그 느낌과 같이 동반해서 나타나는게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죽은 자라고 해가지고 숨 안 쉬고 그런게 아니고 너 쓸모없잖아. 너 나 만나기 위해서 한 게 있어? 없어? 아무것도 없지? 라는 생각과 동반해서 같이 나타나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의 효과 내가 금식의 효과를 노린다면 그것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하면은 가짜 예수, 악마죠. 마귀를 부르는 소리하고 똑같은 거에요. 그거는. 그저 훤칠한 키에 인물 잘생긴 그런 예수죠. 거기에 아우라까지 왕왕왕~~ 해가지고 그 성화보면 나오지요. 동그라미 있잖습니까. 동그라미 뭔가 휘황된 아우라와 함께 있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은 거에요.


또는 그 눈 덮인 곳에 사진을 우연히 찍으니까 예수님의 그 털보사진. 예수님이 무슨 털이 났어요? 예수님은 털이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예수 사진은 전부 털이 나와 있다고요. 털보. 미남은 얼마나 미남인지. 내가 생각하는 모든 예수님의 성화는 그레고리 펙 닮았어요. 약간의 턱이 빠져가지고 양악수술 했나. 이빨은 얼마나 가지런한지. 교정받은거 같애.


자꾸 주변에서 했던 그걸 해가지고 자기가 억지로 신자이고 싶어하는 거에요. 왜? 그게 사유니까. 내 생각이 그거니까. 나는 내가 원하는 그 이미지가 나이고 싶어. 그걸 포기를 못해요. 그래야 남 앞에 나는 이런 은혜 받았습니다. 이렇게 나는 신자입니다 라고 꼭 남한테 으스대고 싶은 충동 때문에 그런 거에요.


죽은 자한테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 찔러보세요. 죽은 자 찌른다고 깨어나는게 아니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는 죽은 자로 간주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에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에 의해서 깨워질 때 알아요. 성령이 임해가지고 깨보니까 아 내가 이미 죽은 자구나. 진짜 쓰레기 재활용하듯이 나는 에코백이구나라고 보니까 로고가 있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거는 내가 생각 안 했는데 쓰레기에다가 십자기를 박아놔버린 거에요. 그리스도 어린 양의 인을 거기에다가 박아논거에요. 일방적으로. 본인이 갈 때마다 십자가의 능력이 나오게 되어 있지요. 그게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보고 남들 보기에 걷게 했지요. 아까 우리가 공부한 것에 의하면 첫째 시간 이야기한다면 사람들은 본다. 관찰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어린애들이 보면 지능은 발달하지 않았는데 완숙된 상태의 기능이 하나 있어요. 그거는 뭐냐? 눈이 본다는 거에요. 눈은 애들이나 어른이나 오히려 어릴 때 눈이 더 좋아요. 엄마는 그냥 지나가는데 애는 요만한 것 티끌하나 다 끄집어내서 엄마한테 보여줘요. 엄마 방에 가시 있어요. 다 보여준다고요.


다른 기능은 완숙되지 못했는데 눈은 태어날 때부터 왜 그렇게 눈이 시력이 좋은지. 그래서 과학자들은 상당히 신기해하는 거에요. 보니까 보여지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고 그 이미지는 차곡차곡 안에 계속해서 창고 쌓듯이 계속 누적되는 거에요.


누적되니까 나중에 커서도 소원이 뭐냐 하면 백마 탄 왕자같은 남편 만나야지. 백마 탄 왕자 그런거 네가 언제 들었어? 백설 공주 동화책에. 옛날에 본 동화책이 누적 되서 자아와 이미지와 동일시되는 겁니다. 결국 자기는 죽은 자가 아니에요.


결국은 주님께서 성령이 임하게 되게 되면 주님은 죽은 시체를 재활용한다는 식으로 주께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사용하실 때 선지자라는 이 개념, 이 개념은 성경에 나오는 개념이지만 일방적으로 안나라는 사람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서 안나로 하여금 84년 동안 결혼하지 않고 성전에 출입하면서 금식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안나가 “나 금식 안했다”가 아니라 하게 해도 “내가 한게 아니다”. 내가 한게 아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헌금해서 죽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는 차라리 헌금을 안했으면 더 살았을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한 푼도 안냈으면 괜찮은데 괜히 어줍잖게 반 내다가 걸려 죽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헌금하다가 반 낼려고 하거든 아예 하지 마세요.


아나니야와 삽비라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은 헌금을 본인이 했다고 여기는게 문제점이에요. 이게 그래서 죽여버린 거에요. 네가 죽은 자라는 그 규정을 위해서 내가 했다는 요소를 주께서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 원칙을 여기서 집어넣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두 번째 시간 어려운거 하나 해봅시다. 어려운거 또 나옵니다. 하게 되면 계시와 뭐와 반대가 되느냐 하면은 역사가 반대가 됩니다. 계시와 역사가 반대가 됩니다. 여기 누가복음 2장 31절, 32절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라고 되어 있지요.


지금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어 아기 예수 여기 있네 끝나는게 아니고 아기 예수를 안고 무엇을 지금 소개하고 있느냐 하면은 이사야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하여튼 성경에 여러 군데 구약에 있는 이 이야기를 하는 거죠. 이 이야기를. 이야기를 할 때 시므온이 이 이야기를 할 때 우리가 보기에는 뭐로 보느냐 하면은 하나의 역사로 보인다면 이것은 잘못이에요. 역사가 아니고 계시의 실현이고 완성입니다.


왜 이게 역사가 아니냐 하면은 계시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예수님에게서 나와요. 계시는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존재니까 우리는 존재자고.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계시가 되지만 역사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인간의 이성에서 나와요. 인간의 이성에서. 합리적 구조에서 나온다고. 인간의 시간의식에서 나와요.


인간의 시간의식은 중지가 없어요. 촘촘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걸 지속이라고 하는데. 시간이 끊어집니까? 안 끊어집니까? 시간은 안 끊어지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뭐냐? 강물이라고 해요. 강물. 강물은 칼로 쪼개면 잘라져요? 안 잘라져요? 안 잘라져요. 잘라지게 되면 또 잘라진 그 부분에 강물이 또 흐르기 때문에 시간이란 이처럼 중지됨이 없다고 보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는 뭐냐 하면은 이 하나님의 계시를 다른 말로 언약이거든요. 이 언약은 인간의 역사를 기본으로 해서 이걸 중지시켜버립니다. 더 어렵게 이야기할게요. 아담의 속한 일이 먼저 선행되어야 그 다음에 주님의 일이 여기에 개입하는 식으로 또는 공격하는 식으로 주의 일이 나타나는 겁니다. 아담의 일이 먼저 시작 되어야 돼요.


그럼 아담의 일은 뭐냐 하면은 범죄 일이죠. 선악과를 따먹게 해놓고 그 다음에 일이 된다니까요. 선악과 따먹게 해놓고 그 다음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는 약속 있지요?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먼저 따먹어줘야 돼요. 따먹어줘야 그 다음에 뭐가 의미가 있느냐 하면은 여자의 후손보다 뱀의 후손 다툼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인간이 먼저 일을 저질러줘야 돼요. 죄를 지어줘야 돼요. 죄 짓기 전에 주께서 일 안합니다. 죄 딱 지어놓고 누가 이랬어? 하고 들어가는 거에요. 누가 이랬어? 그래서 인간의 죄가 필수적이에요. 주의 일에. 그 죄를 여기서 뭐라고 했습니까? 역사죠. 인간의 역사가 필수적입니다.


한번 정리해봅시다. 계시는 역사와 단절됐다. 역사가 이렇게 엿가락처럼 또는 저는 엿가락이라는 표현보다도 소시지. 길다란 소시지를 한다면 계시는 뭐냐? 역사를 끊어버려요. 끊고 들어갑니다. 끊고 들어가요. 처음에 들어가는 것 노아 언약. 노아 끊어버리죠. 그 다음에 노아 언약 다음에 무슨 언약입니까? 아브라함 끊어 들어가고 이삭 끊어 들어가고 야곱 끊어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게 뭡니까? 모세 언약 끊어 들어갑니다.


노아 언약 때 방주에 있는 사람과 그 나머지 사람들이 구분되지요. 나머지 사람한테는 무슨 의식이 있습니까? 시간의식이 있지요? 그들은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있지요. 그들에게는 시간이 흘러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뭐가 없느냐? 뭐를 못 느끼느냐 하면은 종말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느끼는 겁니다. 종말? 시간이 있는 이상 종말은 없다. 계속 간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그때 사람들이 물이 임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했잖아요. 사람들은 홍수 나서 멸망한다는 것은 그들의 과거시간의 체험과 누적된 지식체계에서는 물로서 홍수난다는 것이 그 당시 사람들한테는 이런 정보가 유투브 어떤 정보에도 이런 정보가 없어요. 아무리 유투브를 찾아도 물로서 홍수난다. 그 당시 유투브 없었지만.


아무리 서로서로 연락취해 봐도 물로써 망한다는 소식은 그들에게는 나올 수가 없어요. 왜? 그들은 믿는 것은 뭐만 믿느냐. 역사와 전통을 믿습니다. 역사와 전통은 개인적으로 어디서 나오느냐? 습관과 습성에서 나옵니다. 관습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이걸 뭐냐? 관습은 어디서 나오느냐? 머리 기억이 아니고 몸의 기억.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대로 그냥 자연스럽게 무심코 막 나와요. 무심코.


그 착하고 착한 그런 노인네들 평생에 평소에 한번도 나쁜 소리하지 않는 그 어머니께서 늙은 어머니께서 나중에 치매 걸리니까 욕이 막 나오는 거에요. 자식이 다 놀래는거야. 우리 어머니 평소에 욕한 적이 없는데 왜 욕이 나오지?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듣고 본 모든 것이 몸으로 기억해가지고 이게 저절로 두뇌기능이 약화되니까 저절로 막 튀어나오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될지 몰라요. 얼굴 보니까 목사님 욕이 뭐에요? 전혀 못 느끼고 있는거 같은데 이게 건드리면 무슨 욕이 나올지 모르겠어요. 얼마나 놀랬는지 본인이 놀래요. 내가 이런 이야기 들어본 적이 없는데 생뚱맞은 금시초문인 욕이 막 나온다 이 말이죠. 일반성이에요 일반성. 아담에 속했거든요. 역사와 전통에 의해서 누적된 거죠. 이것 가지고 미래를 개발하는 겁니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한 사람이 지었습니까? 여러 사람이 지었습니까? 일취단결해서 같은 생각이 있기 때문에 쌓아올린 거에요. 그 같은 생각이 뭐냐 하면 언어가 통한다는 말은 언어의 의미가 통한다는 뜻, 뜻이 하나가 됐다. 뜻이 한통속이란 뜻이에요. 언어를 그 한통속을 강제로 언어의 다양성으로 전부다 갈라서 온 세상에 다 흩어지게 만든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래서 인간의 종말에서는 이 바벨탑 쌓는 이유가 다시는 물로써 멸망되지 않기 위해서 탑을 쌓되 탑 높이를 어디까지 높이느냐 하면은 하늘높이까지 쌓아올리는 거에요. 얼추 이 정도 해도 세상에 물차도 이정도 되지 않겠다. 세상에 불이 올 줄 아무도 몰랐어요. 한번 물로 하면 다음에도 물로 하는 줄 알았는데 이번엔 불이다. 그래서 불에 대비하면 불 아니고 다른 것도 준비해놨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오직 믿는 구석은 뭐냐 하면은 인간의 경험과 체험, 자신의 지식과 정보, 인공지능, 누적된 인간들의 지혜, 믿을 것은 오직 그것밖에 없어요. 공부가 제일 쉬워요. 무슨 뜻입니까? 남들이 알고 있는 지혜 습득하는 것이 나한테는 그렇게 쉬운 일이란 뜻이에요. 수학 정석 1,2 쉬워요. 정석 영어 성문영어 그게 쉽단 말이죠.


그런데 쉽다는 애한테 복음 이야기해보세요. 어렵도다. 누가 믿겠느냐. 이게 성경 그대로에요. 무슨 말인지 몰라요. 무슨 말인지. 그걸 원어, 헬라어 한다고 알아듣는게 아닙니다. 맨날 복음 이야기하고 나면 끝나고 난 뒤 하는 이야기가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왜 어떻게를 할려고 해. 왜 어떻게를. 죽은 시체가 뭘 해. 죽은 시체가.


에코 사람인데 쓰레기로 살면 되지 그걸 뭘 쓰레기가 손댄다고 이게 건전한거 되는거 아니잖아요. 시체 아닌게 아니라 이 말이죠. 역사와 전통이죠. 노아 이건 물로써 끊어버립니다.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되느냐? 역사가 물로써 작살나지요. 그러면 역사가 새롭게 시작돼요. 역사가 새롭게.


아브라함 때는 인간의 육에서 나온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다. 참 이거 쌩뚱맞는 이야기죠 아브라함 언약. 육에서 나온 자식은 내 자식 아니다. 만약 어느 집에 애가 3명 나왔다. 3명이라고 하면 또 누구라 하겠다. 4명 나왔다. 4명 나왔다. 그중에 내 자식 한명도 없어요. 그러면 왜 낳게 하느냐? 인간이 먼저 일을 저질러야 돼요.


아담이 먼저 선악과를 따먹듯이 인간이 먼저 퍼질러야 돼요. 죄가 뭔지 퍼질러야 돼요. 자식을 낳을 때 이건 수련회 때 하는건데 미리 여러분한테만 특별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자식을 낳는데서 자기의 성욕과 사랑에 넘쳐서 자식을 낳는 경우 하나 있고 기계적으로 자식을 낳는게 있어요. 미국에 미드, 미국 드라마 보면 이런 드라마 있어요.


장로교로 미국을 다스리는 가상적인 그 드라마 세계에 보면 여자는 절대로 욕정이나 성욕이 있어서 남자를 하면 안된다. 이거는 여자는 애 낳는 기계다. 그 기계가 되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여자 관계할 때 되면 수술대와 마찬가지로 하얀 모포로 다 덮어놓고 남자 얼굴도 못 보게 만들고 하체만 내 놓고 일 끝내고 애 키우는 기계. 룻기에 보면 이런게 나와요. 지금은 상세하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때 계시가 또 따로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 언약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의 인간으로 태어났느냐? 나는 사람으로 보지 않겠다 이 뜻이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연관된 자식만이 내 자식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 원칙이 뭐냐? 잉태치 못해야 내 자식이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잉태치 못하는데 어떻게 자식이 생겨요? 잉태치 못한 자식이 내 자식이다. 그런 자식만 받아준다. 이게 아브라함 언약.


이삭 언약은 거짓말을 해야 내 자식이다. 황당. 거짓말 안해야 뭐 착하다 윤리적 도덕적으로 하나님께서 성스럽다 이렇게 하는데 거짓말하지 않는 자식은 내 자식 아니다. 그래서 야곱의 형 에서는 거짓말 안 해가지고 어디 갔습니까? 지옥 간 거에요. 거짓말 안 해서 지옥 간 거에요. 쉽게 말해서 나쁜 짓 안 해서 지옥 간 거에요. 더 심하게 이야기할까요? 나쁜 짓 할지 몰라서 지옥 간 거에요.


이 땅에 인간이 태어났다는 것은 내가 왜 죄인인가를 알기 위해서 태어나야 되는데 너무 나쁜 짓을 너무 안했어. 누가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다. 이게 다 미친거에요 정말. 나쁜 짓을 할 줄 몰라서 지옥 간 거에요. 지옥 가서 뭐라고 후회하겠습니까? 이렇게 나쁜 짓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줬건만 본성 자체가 나쁜 짓 덩어리의 본성을 가지고 얼마나 내가 나를 조작했던가. 위선자가 위선을 떨었던가. 이게 바로 이삭이에요.


야곱 언약은 뭐냐 하면은 내가 바로 내가 받은 복은 곧 저주였다 이거에요. 내가 받은 복은 저주였다. 쓰레기였다. 쓰레기 끌어모아 복 받았다고 형한테 이겼다고 좋다고 하다가 복을 원하던 그 내 목숨이 지저분한 목숨인거에요. 주께서 안 받아먹는 불결한 목숨이에요. 얼마나 더러운 목숨이기에 세상에 양과 소와 가축과 자식 번성에 거기에 신경써가지고 그것을 노리면서 살아왔던 거에요. 그게 바로 야곱이였던 겁니다.


이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살아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내가 내 저주를 알고 죽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축복된 사람이 아니다. 이게 야곱 언약입니다. 진짜 이거는 와 왜 이런 노아나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이 사람을 왜 내세웠습니까?


그동안 인간들 역사 가운데서 자기를 더 잘살게 하고 자기의 마음에 좋게 좋은 이미지 천사 같은 이미지에 맞는 메시아를 그들의 역사 속에서 꾸역꾸역 고대하고 희망했던게 문제가 된 거에요. 역사가 원하는 것은 스타가 등장하는 거에요. 내가 참아내지 못한 나의 이상적인 이미지와 모델을 등장하려면 우리는 아낌없이 그분을 메시아로 삼겠습니다 하는 그런 의도가 역사 안에 살아있었어요.


왜? 그 역사의 주인공은 마귀기 때문에. 악마가 내세우는 메시아가 따로 있어요. 악마가 메시아 모르는게 아니고 악마가 메시아를 내세우는 거에요. 물론 가짜 예수, 가짜 성령, 가짜 복음이지만 그게 먼저 그 일부터 먼저 퍼질러야 돼요. 그게.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유대인들이 다른 예수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줘야 진짜 예수님의 십자가 살해당할 수 있어요. 살해당해야 그 피가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의 본래 모습을 지적질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바로 피가 되는 겁니다. 피를 흘려줘야 이 피가 왠 피냐고 할 수 있지. 피를 안 흘리면 우리는 메시아 섬기는데 바빠가지고 이 섬기는 자체가 죄 아니겠지 이렇게 한단 말이죠.


그러나 뭔가 인간의 죄가 집대성되어 있는 어떤 증거물 피라는 증거물이 나타나줘야 그것부터 해서 거꾸로 역순해서 우리 자신을 내가 몰랐던 나를 그러니까 내가 몰랐던 나, 아까 그 현장에서 포착되지 못한 진짜 존재인 나, 죄인으로서의 나가 십자가를 통해서 알려지는 겁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역사 긴 역사 가운데서 여러 차례 언약이 와서 투입됩니다.


모세같은 모세가 보여준 그것은 뭐냐? 모세의 지팡이가 지시하고 찌르는 데마다 거기서 역사가 종말을 맞이하는 종말의 흔적을 남기는 거에요. 그게 열 가지 재앙입니다. 모세는 권총 들고 설친게 아니고 그건 보안관이고 모세는 지팡이 들고 설치는 거에요. 지팡이 가지고 슬며시 강물에 한번 담궈볼까 보니까 그 강물이 RH+A형 되버린 피가 되버린 겁니다.


지팡이 가지고 모든 것을 지팡이 가지고 해요. 홍해도 지팡이 가지고 간 거에요. 물 없다? 사방을 둘러봐도 물이 없지요. 아까 데카르트의 과학은 뭐로부터 한다 했습니까? 본다는 거에요. 망원경으로 보든지 현미경으로 보든지 뭔가 보임으로서 있음이 되는 거에요. 보임으로서.


그런데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아무리 봐도 누가 봐도 그건 뭡니까? 뭐로 보입니까? 지팡이로 보이지요? 일개 지팡이에요. 그냥 흔한 지팡이. 낡은 지팡이 쓰레기같은 지팡이에요. 쓰레기같은 지팡이에요. 그런데 그 지팡이를 던지니까 뭐가 되어버려요? 뱀이 됐다 했지요. 주께서 하시는 기능의 내용이 나온 거에요. 주님이 꾸미는 드라마의 각본이 나온 거에요.


지팡이 안에 주의 일의 각본이 거기에 꽉 응축되어 있다 이 말이죠. 지팡이 속에. 그런데 외형으로 보면 그냥 흔한 지팡이에요. 하나님께서 모세 만날 때 떨기나무 만나지요. 누가 봐도 떨기나무에요. 그냥 보통 일상의 떨기나무, 시내산에 있는 그냥 떨기나무의 한부분이에요.


그런데 불이 붙었는데 계속 타요. 119 전화해서 불꺼주세요. 꺼도 안돼. 꺼지지를 않아요. 계속 타요. 유한 속에 뭐가 있다? 유한 속에 뭐가 있겠어요? 무한이 있는 거에요. 우리는 유한 속에 유한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유한 속에 무한이 있는 겁니다. 초라한 예수님 안에 누가 들어있어요? 하나님이 들어있는 거에요.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이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라고 했습니까? 이 작은 자에게 물 대접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다? 주님한테 한 것이다. 여러분 그게 보입니까? 목사님 한번 보자. 예수님 계신가. 보여요? 해부 한번 해볼까요? 


제가 주일날 설교하면서 그런 설교했거든요. 서양동화 이야기하면서 거위가 금계란을 낳으니까 처음에는 한 개 낳으니까 이게 처음에는 좋았는데 감질나거든요. 사람이 생각한게 금계란 낳았다는 말은 안에 금덩어리 들어있으니까 그래서 금덩어리 낳을 것이다 하고 거위 배를 째봤어요. 째보니까 그냥 보통 거위였습니다.


왜 째볼까요? 왜 거위배를 보고 싶어 합니까? 본다니까.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어 해요. 내가 볼 것을. 내가 예상한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거에요. 그게 과학이에요. 과학의 실험 방법이에요. 측정방법. 수천번 수만번 실험해서 알아낸 거에요. 지금도 코로나 백신한다고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경쟁적으로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시행착오. 전부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거죠.


내가 믿을 것은 내가 먼저 눈으로 확인하겠다 이게 인간의 역사 아닙니까. 인간의 역사. 그래서 이걸 무슨 역사? 간증의 역사. 간증의 역사. 기도하면 응답받는다 말은 좋지요. 교인들이 말합니다. 목사님 보여주세요. 내가 누구를 보고 믿을 만하면 믿고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다 믿겠습니다. 뭔가 실적과 업적이 있으면 믿겠습니다.


이렇게 하든지 아니면 스스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70일째 기도하고 있습니다 금식하고 있습니다. 뭔가 보여주세요. 보여주세요. 내 기도가 응답되고 따라서 나는 신자 맞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자꾸 볼려고 하는 거에요. 볼려고 하니까 금식기도 70일이 뭐가 되어버렸어? 두자로 뭐가 되죠? 역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역사가 계속 이어지는 거에요.


그러면 내 70일 역사로 보겠다는 이것이 시체가 되는 순간 무엇과 무엇의 난입? 무엇의 침입입니까? 십자가의 침입이 되어버리면 주께서 의도적으로 나로 하여금 70일 동안 금식기도 하게 하신 거에요. 뭐와 매치하라고? 주께서 준비해 논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 이런 쓰잘데기 없는 짓을 주께서 먼저 일을 벌리신 거에요. 인간의 죄를 퍼질러놓은 거에요.


그래서 십자가 알고 난 뒤에는 내 병 낫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천하 몹쓸 죄라는 것을 알게 되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시체로 보는데 내가 싫어. 내가 시체 싫고 난 몸 건강하고 싶어.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못되처먹은 사고방식입니까 이게. 얼마나 못된 사고방식이에요.


주께서 규정한 성도가 있는데 그건 주께서 규정한 성도는 싫어. 내가 나를 내가 성도 만들어 내고 싶어. 내가 생각하는 성도되고 싶어. 그러면 내가 생각하는 성도 안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내가 성도되기 위해서 이런 모진 고생했다는 그 자기의 놀라운 희생과 아픔과 찬란한 역사가 다 들어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제가 주일날 설교하면서 십자가 설명한 그 표현방법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이 영광스러운 그 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이 영광스러운 비극. 이게 십자가 아닙니까. 되게 영광스러운데 이 지상에서는 뭘로 보인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지요. 그래서 이걸 제가 세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무모함’. 무모함. 정말 이거는 무모함.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있다는 것. 죽어있다는 말이 우리는 자꾸 숨 안 쉰다는 말은 내가 나를 사유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할 때 죽은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과 생각해보니까 공동묘지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수목장에 지금 재 뿌리고 있는 사람은 산 사람이고 우리가 그렇게 구분하는데 그거는 내가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일방적으로 죽음과 삶을 규정한거고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가 들어오게 되면 주님께서는 시체 재활용이에요. 죽은 자에게 나는 그리스도와 이미 함께 이미 죽었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 죽었고 그 안에서 누가 살아있다?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거에요.


그래서 아까 설교자가 죽으려고 하지 않으면 설교 할 수가 없다고 한게 그것 때문에 한거에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설교하는 자체가 죽은 자이기 때문에 나오는 설교가 돼야지 내가 살아있어서 설교한다는거 같으면 그거는 그 설교는 해도 소용이 없고 설교해도 죄만 더 지을 뿐이에요. 물론 그 죄를 짓게 하시는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가 누가복음 2장 쭉 시므온, 안나보면서 자꾸 우리는 뭐로 보느냐 하면은 역사로 보는 경향이 우선이에요. 먼저 역사로. 아 참 시므온은 세상에 좋겠다. 아기 예수 알고 종을 편안히 놓아준다는데 나는 맨날 집에 베개만 들고 자고 있는데 편안하지 않아. 베개에 아기 예수 써서 해도 될까? 또는 어떤 사람은 남편 사별해가지고 예수님 만났다 하는데 나도 남편 사별한지 벌써 2개월 됐는데 아기 예수 소식도 없고.


여러분에게 희망줘서는 안되지만 여러분들이 바로 시므온이고 여러분들이 안나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주어지게 되면 일반성에서 그 다음에 뭘 끄집어낸다고 했습니까? 개인성, 개인적인 것을 끄집어내지요. 이 개인을 뭐로 봅니까? 확대하지요.


따라서 안나의 확대가 시므온의 확대가 오늘날 우리가 된 겁니다. 사실은 시므온과 안나는 기껏 아기 예수님만 만났지요. 우리는 뭐냐 하면 십자가 다 이루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안나나 시므온보다 우리가 더 평안해야 돼요.


시체가 됐으면 이미 우리는 도달할 데 종착점에 다 왔기 때문에 편안 안 할래야 편안 안 할 수가 없어요. 오늘밤에 주무실 때 시체다. 다시 죽은 자가 다시 죽은 자의 폼새로 돌아가는  거에요. 죽자. 안 죽을 수가 있기 때문에 편안하게 이불 피고, 요 덮고 죽자.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는 거에요. 살아남는 것을 정상으로 보지 말고 죽는 것을 낼 아침에 깨지 않는 것을 정상으로 보자 이 말이죠.


오히려 내일 아침에 눈 뜨면 어 왠일이야? 왜 내가 눈을 떴지? 이렇게 생각하셔야 돼요. 이렇게. 여러분 좋아라고 눈뜨게 하신게 아니고 주께서 또 죄 퍼지르라고 죄를 퍼질러야 십자가 빛나니까. 또 오늘 하루 살면서 또 내 역사 주장하면서 몸에 있던 습관, 더러운 습관 쏟아내라고 하루 살게 하신 거에요.


그리고 감사한 것은 저녁때 오늘 또 시체로 죽는구나. 날마다 시체로 죽는 거에요. 주기도문에 나오지요. 주기도문에. 주기도문 혹시 여러분 외운 사람 있습니까? 혹시 외운 사람 있어요? 거기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에게 무슨 양식 달라고 합니까? 그냥 양식 아니고 무슨 양식입니까? 일용할 양식. 하루치의 양식. 주여 하루치의 양식을 주시옵소서. 하루치의 양식을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낮에 뷔페가면 저녁 먹지 말란 말입니다. 괜히 살만 찌지. 하루치의 양식을 주옵소서. 주옵소서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내가 지금 든든한 직장이 있기 때문에 이번 달 월급 나온다 뭐 이게 아니라 하루치의 양식을 달라는 말은 지금 내가 무슨 상태입니까? 죽어있는 상태. 양식을 달라고 할 권한이 없는 상태.


우리가 뭐했다고 죽은 자가 뭐했다고 양식 달라고 합니까? 주께서 뜻이 있다면 원하신다면 살려주실겁니다 라는 믿음. 주께서 일할 몫이 있다면. 안나로서 또는 시므온으로서 어떤 다른 후배들에게 안나나 시므온이 되려면 그러한 개인적으로 주께서 다루고 있다면 그 일이 필요하다면 주께서 양식을 주실 거에요.


그래서 그 양식을 보통 먹게 되게 되면 그것은 누구 위하여? 주를 위한 양식이지 죽은 시체 살리려고 준 양식이 아니고 나를 위한 양식이 아닙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먹는데 취미가 들어가지고 온 동네 맛집은 다 돌아다니면서 다 먹고 그걸 글로 쓴다 합시다. 그 사람의 직업이 되겠지요. 직업이 되지만 그 먹은 것은 직업이기 때문에 양식은 아니에요. 양식은 뭐냐 하면은 내가 죽어 마땅한데 주께서 살린다에 관한 그럴 때만 그게 양식으로 규정이 되는 겁니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걸 글로 적는다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알 필요가 없다.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시므온과 안나가 가진 태도입니다. 인간은 나 자신에 대해서 알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지난 역사를 꾸역꾸역 계속해서 그걸 delete 지우지 않고 계속해서 우려먹는 식이거든요. 자기가 사골입니까? 계속 우려먹고 우려먹고.


이중에 다들 술 입도 안대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술 취해보세요. 했던 소리 또 하고 했던 소리 또 하고 잠자는 애까지 다 깨워가지고 했던 소리 또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걸 아침에 하면 되지 왜 자기가 와가지고 다 깨워서 그걸 하느냐 이 말이죠. 뭐냐하면 이 식구들아 내 역사 자랑에 좀 동참해줘. 호응해줘. 그 말 아닙니까?


술을 왜 먹어요? 안 죽으려고 술을 먹는 거에요. 직장 가서 상사한테 얻어터져가지고 이건 나는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 되거든요. 꾸지람 들으면요 갑자기 왜 사느냐 싶을 거에요. 차라리 빌딩에서 뛰어내려 죽어버리자. 죽는 대신 퇴근하고 1차 2차 술 먹는다고요. 안 죽었다 이 말이에요. 살아있네 살아있네 안합니까. 그 말이거든요. 객기를 부리고 허세를 부리고 꼬장을 부리고.


이게 뭐냐 하면은 나는 화려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거에요. 이게 죄가 아니고 뭐에요. 이게 죄에요. 이거는 어디 직장에서만 그렇습니까? 교회가면 안 그래요? 교회에서 장로 기도하면 기도하는거 들어보지요. 역사와 전통이 있는 우리 교회를 주께서 지켜주시옵시고 어린아이들부터 당회장까지 주께서 축복해주시고 온갖 남북통일부터 해가지고 이야기 다 하지요.


왜 그런 기도합니까? 우리 교회는 뭐가 있는 교회다? 역사가 있는 교회다. 교회란 죽은 시체의 집합체. 죽은 자에요. 주께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또는 말씀으로 살려주게 되면 지금 내가 사는 것은 주의 은혜요 선물이고 뜻입니다. 그게 될 때 이미 시작한 천국생활이에요. 죽어서 천국이 아니고 지금 시작해야 돼요.


죽은 나를 늘 이렇게 십자가의 은혜로 살려내시는 주님의 활동이 살려고 하는 나의 활동보다 더 우세한 것, 더 먼저 된 것, 더 강렬한 것, 더 힘이 센 것. 나의 역사를 덮어버리고 주님의 살아계심이 내 지저분한 내 역사 자랑을 입을 틀어막을 때 우리는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양식 주신 것이 나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고 주님 살아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을 이제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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