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장 29절 (못난 자) 200519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장 16절부터 20절까지 제가 한번 읽어 보겠어요.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 하니라.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간단합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천사의 일이 예수님의 일로 확장됩니다. 예수님의 일로. 천사가 하는 일로 해서 물고를 트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일, 예수님께서 이어가는 겁니다. 여기 지난주의 예수님은 어른 예수가 아니고 아기 예수님이겠죠.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예수님이 서른 살 되어서 성년이 되어서 일한다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천사의 일에 의하면 아기로 계신 것도 예수님의 일이에요. 아기로 계신 것도. 여러분들이 목사님이 두 살 때 주의 일을 하신 거에요. 두 살 한 살 때도 이미 일이 된 거에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완료된 일. 완료된 일이 예수님께 계속 완료된 일로 되는 겁니다. 완료된 일과 이어집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비해서 이것과 대비해서 인간의 일은 뭐냐? 인간의 일은 인간의 일로 계속 가는데 이건 뭐냐 하면 미완료에요. 미완료.
미완료기 때문에 인간은 뭐를 찾느냐 하면 대체물을 두리번거리면서 늘 대체물을 찾습니다. 초등학교 애들에게 너 커서 뭐할래? 이게 대체물이거든요. 커서 뭐할래? 대통령할래? 야구선수 할래? 축구선수 할래? 연예인 할래? 뭐 할래? 대체물을 계속 찾는 거에요. 왜냐하면 미완료물이기 때문에 결핍이거든요. 결핍되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의 일은 계속해서 대체물 찾고 찾아 가면서 미완료에서 뭐를 추구하느냐 하면은 자기 마음에 만족스러운 완료가 될 때까지 평생을 세상을 헤매게 됩니다. 결혼을 해도 마찬가지에요. 결혼을 해도 아이 낳고 나는 행복 끝이라고 했는데 애 낳고 난 뒤에 보면 또 아니야 우리 애가 공부 잘해야 돼. 또 결핍을 느끼고 대체물을 찾고 있어요. 끊임없이 찾는 겁니다.
대조되죠. 대조가 돼요. 대비가 되는 겁니다. 천사의 일은 완료로 시작해서 예수로부터 그 완료에 대한 마무리가 지어지는 반면에 인간은 처음부터 완료가 아니고 미완료, 결핍된 존재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대체물을 찾고 찾고 계속해서 찾는데 결국은 뭐냐 하면은 자기만족에 이르지 못하지요. 자기만족에.
그래서 지금은 저한테 그런 이야기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만은 제가 옛날만 해도 노골적으로 저한테 이런 이야기한 사람 많아요. 목사님 저 뭐하면서 살까요?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요. 저 뭐하면서 살까요? 그냥 사세요. 이렇게 하지요. “그냥 사세요” 라고 하는 거에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 인간의 일은 나갔기 때문에 일단 보류하고요 그럼 천사의 일이 주님의 일 할 때에는 어떻게 일이 되는가? 이게 오늘 강의의 핵심부분이 벌써 시작되었어요. 천사의 일이 예수님한테 일을 할 때는 뭐냐 하면은 point 이동이에요. ‘point 이동’.
point 이동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만약에 우리가 천사를 따라가게 되면 천사의 일이 군데 군데 마치 전쟁 때 미군이 폭격하듯이 다 폭격하는 것이 아니고 중요 거점에 무기생산 공장에 이라크 전쟁할 때 그쯤 그쯤 할 때 오늘은 여기에 폭탄 터트리고 내일은 저기 폭탄 터트릴 때 사람들이 볼 때 관점이 어떻게 됩니까? point가 발생되지요? point가 발생됩니다. 이동하는거에요.
동방박사가 별 뜰 때는 동방박사 있는 point였는데 그 point 따라 별 따라오는 것은 그 point가 이동하는 것이고 그래가지고 어딜 가느냐? 바로 베들레헴에 이르지 않고 예루살렘에 거하지요. 그럼 예루살렘에서 뭐냐 하면은 뭐와 뭐가 만나느냐 하면은 완료된 천사의 일과 미완료된 인간의 일이 하나의 거기에 주목받는 일이 거기에 있는 거에요. 주목받는 일들이.
자, 여러분 기억나는가 봅시다. 미완료된 일이라는 것은 뭐를 찾게 되어있다? 대체물이죠 대체물. 완벽에 완벽을 나름대로 기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해요. 대체물을 찾지요. 그러면 천사가 예루살렘의 헤롯왕에게 왔을 때에 자기는 짐짓 동방박사를 대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뒤에서는 제거하라고 하지요.
왜냐하면 자기의 미완료를 완료로 하는데 전혀 방해가 된다고 하여서 동방박사를 제거해버리고 베들레헴의 두 살 애들도 다 제거해버리지요. 왜냐하면 자기의 희망하는 그걸 희구라고 ‘희구’, 희망 같은 뜻이에요. 자기가 희망하는 자기 자신의 만족한 대체물에 베들레헴 두 살 애들은 다 방해물이 되기 때문에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베들레헴에 아기 예수님 태어났을 때에 그 일에 다른 북극이나 남극에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다른 나라 다른 지역 또는 한국에서는 그때 삼한시대입니까? 삼한시대나 고조시대 나름대로의 뭔가 있었겠죠. 고조시대에.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 어디를 point잡습니까? 고조선 싸움 그거 그런데 관심 두는게 아니고 point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예루살렘에 point 두다가 그 다음에 베들레헴에 point를 두는 거에요.
이건 뭐냐 하면 이 세상이 미완료라고 폭로시키는 방식은 완료된 것과의 접선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접선으로만. 여러분들이 주일날 교회가고 월요일 되게 되면 여러분의 point는 어디로 바뀝니까? 직장으로 바뀌겠지요? 직장으로 바뀌면 이거 그대로 적용시키면 돼요. 직장에 가서 일한다는 말은 무엇을 갈구하는 거에요. 내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무엇을 갈구하는 거에요? 대체물을 갈구하는 거에요.
내가 두 달만 하고 때려치워버린다. 여기보다 월급 더 주는 데로 가야지. 이게 뭐냐 하면은 궁시렁 궁시렁 일하면서 대체물을 하는 거에요. 내가 과장 죽여버린다 이런 식으로. 나를 못살게 구는 과장 내가 손 본다. 마지막 사표내고 난 뒤에 너 한번 찾아간다 한다든지. 협박도 잘못하면 고발당하는 수가 있어요.
모든 일은 네가 뭔데 나한테 방해가 되느냐. 나의 이상적인 내 완벽한 내가 구상한 완벽한 직장생활에 네가 뭔데 네가 하느냐. 나에게 결핍을 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주일날 교회 가서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 듣다가 그 point는 날라가버리고 다시 자기의 대체물을 찾는데 허겁지겁 거기에다가 모든걸 몰두하지요. 그래서 말씀이나 복음을 멀리해버리면요 안돼요. 왜냐하면 미완료는 점점점 미완료로 나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과 항상 대하도록 접하도록 이렇게 되어야 돼요.
자, 그러면 방금 이 이야기를 여러분 잘 들으셨으니까 이걸 말로 다시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point 이동인데 하나님께서 point 이동합니다. point 이동인데 그러면 이 세상에서 인간이 태어났습니다. 목자도 마찬가지죠. 목자가 태어날 때 이게 본인이 선택한 겁니까? 아니면 본래적입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다보니 그렇게 된 본래적이죠. 본래적은 선택이 아니에요. 그냥 주어진 거에요. 주어진 것. 인간이 뭘 선택하고 자시고 할 거 없어요. 그냥 본래적으로 원천적으로 주어진 거에요. 본래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본인이 새삼스럽게 선택이라는 것은 사실은 여기는 해당사항이 없어요. 본래적으로 주어진대로 어떤 최선을 한다 그 정도 밖에 안되거든요.
목자가 만약에 오늘 본문처럼 아기 예수를 안 만나버리면 point 이동, 예수님과 관계없다면 목자는 열심히 돈 벌어서 자기 가정을 이루겠다는 그러한 새로운 지금의 사정보다 더 나은 사정을 대체물로 바꾸겠지요. 목자가 천사를 안 만났다면 여러분들이 성령을 안 받았다면. 그냥 세상 사람들과 똑같아요.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지금 이 형편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겠지 라고 하는 거에요.
여기서 인간들이 평소에 하는 의식 그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겁니다.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이거에요.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모르는가봐.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모르는가봐. 철들면 나의 대체물을 찾는데 수월하고 아직 철이 나지 아니하면 내가 세상에 고생을 더 해야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 대조된 point 없는 이 세상에 기껏 최선을 다하는 거에요.
김호중 씨가 불렀던 고맙소 라는 노래의 가사거든요. ‘고맙소’. 그것까지 여러분들이 알 필요는 없습니다만.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모르는가봐. 그러니까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모르는가봐 왜 썼느냐 하면 복음을 알면서도 지금 계속 미완료에 매여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제가 말씀드린 겁니다. 아 이 나이 먹도록 철이 없어. 다음에는 좀 완벽에 완벽을 기해야지. 그거는 완료가 아니에요. 여전히 미완료의 지하실에서 헤매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 예수님의 완료성을 좀 이렇게 좀 난해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미리 어려울 때는 결론을 미리 말씀 드리는게 좋거든요. 주님께서 이 완전한 일이 지상의 point 이동해서 지상의 모습은 어떤 것이냐? 지상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느냐 하면 대결장으로 초대하는 거에요 대결장으로. 이 세상과 이것과 완료와 미완료 대결장으로 초청하는 겁니다. 납득이 잘 안되지요. 대결장? 대결하는 것.
동방박사가 본인은 대결 안 하고싶어도 동방박사가 졸지에 본의 아니게 헤롯 권력과 대결장을 형성했지요. 그러니까 천사가 와서 동방박사를 딴 길로 빼돌려 살게 했잖아요. 대결장. 싸우는 장. 우리가 원하는게 아니에요. point 이동해서 완료가 오니까 여기서 한바탕 붙어가지고 누가 완료고 누구 미완료인지 그걸 하게하는 거에요.
목자로 하여금 여기 아기 예수에게 말하게 하니 이게 뭐냐 하면 대결장에다가 누굴 집어넣느냐 하면 목자를 집어넣는 거에요. 아기 예수의 출생 사건에 대해서 거기서 아무 연관도 없어 보이는 목자를 거기에다가 집어넣는데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네가 보는 것을 네가 천사에게 들은 것을 확인하라는 그런 업무가 주어진 거에요. 업무가.
업무가 주어지게 되면 후딱 이 동방박사는 그냥 보고 내빼야되지요. 할 수 없어요. 이거는 목자가 나쁜 짓을 했다는게 아니고 완료를 포기하고 난 뒤에 자기가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니에요. 여기서 뭐가 나타나느냐하면 바로 윤리와 도덕은 여기에 낄 자리가 없습니다. 윤리, 도덕 빼고 주께서는 초대합니다.
윤리, 도덕 다 버리면 뭐냐 하면은 이거는 세상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되니까 윤리, 도덕 가미해가지고 미완료된 나를 현재 형편을 더 낫게 해보자는 그러한 시도는 이 세상에서 하거든요. 세상에 이 나이 먹도록 철도 없이 앞으로 바르게 살아야지. 이런 것은 완료가 아니고 미완료에요. 그건 노림수가 있다고. 이것보다 더 좋은 환경에 대체물로 내가 탈바꿈되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희망을 갖는 거에요.
그러나 목자가 온 것은 뭐냐 하면 그 완료된 것이 그냥 침투하는 겁니다. 네가 아기 예수 바톤을 천사에서 아기 예수께 바톤을 아기 예수께 넘겨버리는 겁니다. 넘겨버리면 아까 이라크 폭격하듯이 군데군데 낯설기 짝이 없는 특이한 사건들이 팍팍 터지지요. 우리는 여기서 박수치고 싶은데 너 와. 초대해요. 우리는 가기 싫은데 네가 와서 목격자 해.
그러니까 우리의 삶 자체가 정리해 봅시다. 성도는 성도의 삶 자체가 이동하면 이동할수록 나는 나 구원받기 위해서 주께서 찾아온 줄 아는데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어떤 대결장을 형성하는데 네가 거기 가담하라고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시는 거에요. 인도한 거에요. 본의 아니게.
그러니까 이게 상당히 난감하죠. 난감한데 기쁜 것은 바로 그러한 현상이 있거든 우리가 완료되었음을 구원의 완료되었음의 소속이다 하는 사실을 도리어 기뻐해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잠시 스스로 예를 상상할 경우가 있어요.
여러분들이 어떤 기차를 타고 역에 내렸는데 아무리 봐도 기차역 내린 그곳이 생소하고 생전 처음 보는 도시, 마을에 내렸어요. 내려가지고 보니까 내가 타던 승용차 저기 있고 또 승용차 보니까 내가 보던 성경책 차 안에 들어있어요. 차 문은 마침 안 잠겨가지고 열고 승용차를 타고 그 다음에 기차역에 내리니까 어느 집에 가야해요? 우리 집에 가야죠. 우리 집에.
우리 집에 가야 하는데 생전 처음 보는 도시라서 우리 집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있어도 어디 있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여러분 어떤 식으로 해야겠어요. 이런 경우에. 전부다 낯설어요. 생전 처음이에요. 전혀 기억나지를 않아요. 이게 기억상실증 걸렸는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간에 모든게 하나도 생소한 도시다.
그러면 거기에 네비게이션을 딱 트는 겁니다. 하게 되면 제일 먼저 뜨는게 우리 집 뜨지요. 제가 왜 이런 예를 드느냐 하면은 우리 집을 하고 네비게이션 시키는대로 가보세요. 가보면 모든게 생소해요. 한번도 안 가본 길이에요. 왜 그럴까요? 이 땅이 나의 선택이 아니고 본래적이죠. ‘본래적’, 처음부터 있었던거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나라 이 천국이라는 것이 이게 또 역시 본래적이에요. 이 출신이어야 이 나라에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줄곧 태어나서 어디서 살았느냐 하면은 우리가 내가 다루었던 이 세상에 살다보니까 천국 가는 길이 전부다 생소합니다.
그래서 여기 뭐냐? 대결장으로 초대될 때 여기 조건이 있어요. 뭐냐? 현재 내가 변화된다는 조건하에 초대되는 거에요. 현재 내가 변화된다는 조건하에. 변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가 없는 겁니다. 변하지 않으면. 그래서 가보니까 다음 500m앞에서 오른쪽으로 가세요. 오른쪽 가봐도 모든 건물 처음 보는 건물이에요. 모든게 생소하고 처음이란 말이죠.
생소하고 처음이니까 뭐가 동원할 수 없습니까? 내 판단과 내 선택과 내 결정은 무용지물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것이 바로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지금 우리가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유 목사님 요즘은 우리가 주께서 말씀하시면 알아서 갑니다 하는데 그거는 내가 변화되기 전에 그 의식으로 내가 천국 가는 방법을 고집하기 때문에 변화 안 되도 천국 간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기존의 내 방식, 내 구원 방식 자체가 변화 돼야 돼요. 어제 알았던 구원방식이 오늘 되면 이게 취소가 되고 무용지물 돼요. 어제 알았던 거 가지고 오늘 내가 조심 있게 가겠습니다. 안돼요.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에요.
왜냐하면 완료는 포인트 이동은 천사와 주님이 알아서 하기 때문에 어제 알았던 것은 어제 것 알던 내 고장이고 내 마을이고 나 아는 사람이고 저 약국은 전에 내가 가봤고 저 목욕탕은 전에 12번도 더 가봤고 하는데 막상 딱 주께서 딱 조치를 하니까 없고 약국도 없고 내가 알던 것은 없어져요. 내가 알던 것.
그러면 어떤 상태가 되느냐 하면 지금의 나의 본래적이라는 이 자체가 이게 개선되야 되고 본래적은 주님만 아시는 거에요. 어디? 네비게이션 안에. 주님만 아시고 내가 알던 것은 전부다 내가 알아서 취소 시켜 버려야 돼요. 주여 이 동네가 내가 살아야 될 동네가 아니군요. 그저 시키는대로 300m 앞에서 좌회전하시고 그냥 이끌어만 주시옵소서. 이끌어만 주시옵소서. 가게 될 때 우리는 어디에 골인되는가?
시편 23편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방금했던 이게 중요한데요 제가 왜 이런 예를 드느냐 하면은 오늘 새벽꿈이 이 꿈이었어요. 하 놀랍게도. 차는 빨간 차 내 차 맞는데 성경책을 안고 들어갔는데 보니까 그 동네가 우리 집이 어딘지를 모르겠어요. 그래서 꿈속에서 내가 치매 걸렸나? 벌써 치매 걸릴 나이인가?
그러면서 우리 집을 하니까 네비게이션이 인도하는 곳 마다 생소하고 생전 처음이에요. 하면서 생각나는게 시편 광야 생각나고 불과 구름기둥 생각나고 시편 23편 생각났어요. 23편 보게 되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방금 이걸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한번 들어보세요.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지요?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지요. 이게 인도한다는 말은 나의 선택을 완전히 묵살하는 거에요. ‘묵살’.
그리고 내가 선택했다면 절대로 4절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안갑니다. 안 가는데 주께서 가게하세요. 안 가는데 가게한다고요.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런 고생하려고 내가 예수 믿는거 아닙니다. 우리는 손사래 쳐도 소용없어요. 가야돼요. 이 땅이 생소해야 돼요. ‘생소’.
내가 살던 이 꽃피는 산골이고 뭐고 간에 복숭아 꽃 펴도 소용없어요. 내가 이 세상 삶을 살 때 익숙한 고향이지. 이 곳에 내 고향이 없어요. 그러면 어디로 가느냐? 그건 몰라요. 몰라야 돼요. 믿습니다 하지 마세요. 우리는 아예 믿습니다 하면 안 되고 몰라야 돼요. 믿습니다 하면 내가 자꾸 내가 요령을 부리고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아서 가겠습니다 이렇게 된단 말이죠.
윤리, 도덕과 내가 아는 믿음과 경건 신학 교리 복음 다 동원해가지고 내가 나를 끌고가려고 하는 거에요. 이거는 시편 23편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내게 상을 베푸시고 그 다음에 뭐냐 하면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마지막에 내가 어디에 거하리로다? 내가 어디에 골인해요? 여호와의 집. 여호와의 집은 우리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 우리 힘으로 못 찾아갑니다.
지금 내가 좀 복음 아는데 알려만주시면 찾아서 가겠습니다. 안돼요. 지금 네 모습은 내가 안 받는다. 네 모습. 항상 같이 있던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들이라도 주께서 point 이동이 되게 되면 그 아들과 자식과 아내와 남편이 생소해야 돼요. 생소해야 돼요. 심지어 누구십니까 이럴 필요는 없지만.
“어제 알던 당신하고 오늘 보니 좀 다른거 같아.” “어떻게 다른데?” “어제 같으면 같이 천국 갈 거 같았는데 오늘 보니까 갈 길이 다른거 같애.” 라든지 “당신 변했구나.” “그래 변했어. 내가 변한게 아니고 이상하게 변했어.” “우리 애가 하는 생각이 전부다 마귀 생각 같애.”
이상하게 모든게 마땅히 당연히 내 사람이고 함께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때까지 나의 박힌 교리로 무장된 조작된 자아. 자아의 조작. 거기에서 너무 익숙해지려고 애쓰다보니까 있는 거지 막상 주님께서 성령으로 임할 때는 뭐냐 하면 날마다 이겁니다.
주께서 날마다 생소하라. 어차피 이곳에 네 집 아니거든. 이곳이 네 집 아니라면 이곳이 네 집 답지 않아야 되는게 정상 아니냐 이곳이. 그렇게 정들고 원한관계 또는 사랑관계 애증관계 있더라도 어차피 다 손 떼고 가야 된다 이 말이죠.
목자가 그냥 양 치는게 적합해요. 하지만 목자가 예수님을 알고 양치는 것과 모르고 양치는 사이에 세상도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지만 본인도 본인이 예상 못하게 다른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일까요?
아니에요. 계속해서 목자는 계속 달라질 거에요. 달라지게 되면 아까 이야기한 미완료 대체물 그게 얼마나 헛방이고 쓰잘데기 없는 쓸데없는 기대치를 내가 노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되고 싶은 나, 내 결핍을 마저 해소시키는 내가 되기 위해서 그동안 신학과 교리, 복음, 윤리, 도덕 가지고 얼마나 거기에다가 투자의 투자를 했습니까?
이 정도 하면 구원의 만족스러운 구원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는데 그거 다 과거지사입니다. 다 옛날 이야기에요. 아 옛날이여. 아 옛날이여. 어제만 해도 옛날이거든요. 다 옛날 일. 다 부질없는 이야기에요.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잠을 자도 주께서 은혜를 주시면 모든 것이 확달되어 있습니다. 전에는 감사거리도 아닌데 이런거 작은거 하나 전부다 고맙고 감사해요.
고맙소. 진짜 고맙고 감사해요. 김호중이라는 가수가 깡패 될 때는 자기 선생한테 고맙소 라는 소리 안했지요. 자기가 가수되고 난 뒤에는 찾아가가지고 고맙다고 안동예술 고등학교 가서 공연 한번 하고 고맙소 라고 이야기했지요. 자기가 성공하고 난 뒤에 뒤돌아보니까.
비로소 시편 24편이 이게 내가 달성하는 나의 대체물이 아니라 주님의 완료, 주님이 스스로 길을 만드는 주님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길을 만드는 작업에 우리가 휘말려들어간 거에요. 목자같이. 목자가 한 게 뭐 있다고 구경만 했지. 아기 예수 구경만 했지. 저 아기 예수와 나와 관련성 있다는 거에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인식의 변화입니까? 단군의 아들도 있고 이성계의 아들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저 먼 나라 이스라엘 남의 나라 수천킬로 떨어진 남의 나라 하늘의 아들하고 그분 예수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있어요? 무슨 관계있어요? 아무 관계없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관계가 있는 거에요.
지금은 관계가 있다면 그 자체가 이미 완료고 그 완료 노선에는 어느 집? 여호와의 집은 깜깜 무소식 우리는 몰라요 우리는 찾아갈 수가 없어요. 그냥 네비는 여호와의 집으로 인도하는데 매일같이 인도해. 네비 고장나면 큰일난다 이 말이죠.
여러분 일사각오라는 영화 혹시 보신 적 있으십니까? 일사각오. 제목 들어보신 적 있어요? 아주 뭐 비장하지요. 이게 1925~1944년 사이에 주기철 1944년 11월달인가 그때 죽었으니까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에요. 이 사람이 47살에 죽었거든요. 그때 13살 때 교회 다녀가지고 평양 산정현 교회에 다니고 제목도 아주 비장해요. 일사각오. 죽기로 각오했다.
들어보니까 어떻습니까? 뭔가 수상한 냄새 안나요? 자칫하면 일사각오 주기철 목사가 누구를 대체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 했던 인도하심을 자칫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은 눈에 안보이고 주기철 목사 역사적이니까 주기철 목사처럼 되겠다고 하는데 되겠다고 할 경우가 굉장히 큰 거에요. 왜? 신사참배를 하는데 본인이 나서서 신사참배를 거부했어요.
그 당시의 모든 목사들은 노회를 만들어서 합동해서 전부다 신사참배하기로 했는데 주기철 목사만큼은 신사참배를 안했어요. 그리고 그동안 신사참배 안한다고 해서 일제시대 때 다른 교회를 봐주는게 아니고 형사들이 와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먼저 덴노이까라는 일본 천왕 신에게 세 번 절을 하는 순서부터 묵도합시다 하는 그 시간에 세 번 절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목사가 본격적인 예배하도록 형사들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목사가 먼저 자 다같이 일어서서 천왕님이 계시는 동쪽을 향하여 절합시다라고 목사가 이야기하는지 안하는지를 형사가 같이 예배 참석해가지고 형사는 믿음 좋았을거야. 하도 예배 참석하니까. 형사가 그걸 조사를 해서 목사가 그대로 하는지 안하는지를 지켜보는 거에요.
그러면 만약에 지금 그 시대가 지금 이 시대라고 한다면 지금 이 시대 그 시대지만 한다면 목사님 어떻게 대처하겠어요? 우선 천왕에게 절을 하면서 감사의 예를 드려야 돼요. 천왕한테. 우리가 얼마나 미완료인지를 이런 환경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우리가 충분하게 죄인인 것을 죽어 마땅한 것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면 옆에 있는 형사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형사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거든요.
그러니까 감사하다는 말 들으니까 야 우리 편 아니냐 할거란 말이죠. 하여튼 주기철 목사는 요령이 없어. 복음을 이야기하지만 정치적이야 내가 보기에는. 자꾸 독립운동하고 예수하고 자꾸 결부를 시키는 거에요. 아 참 그 영화 보면서 나 얼마나 답답했다고요. 아 누가 옆에서 복음 이야기하는 사람 없나. 그렇게 훌륭한데 복음을 몰라. 복음을 몰라.
범사에 감사하라 했잖아요. 범사에. 일본이 아니고 공산당이 와도 괜찮아요. 감사하면 돼요 공산당이 오더라도. 주기철 목사의 가장 나쁜 점은 뭐냐 하면은 바로 본인이 선택했다는 거에요. 자기가 출애굽기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20장에. 그것을 근거로 해서 선택을 한거에요. 여호와 믿으면 우상이 아니고 일본천왕 덴노이까 그거 믿으면 우상이라고 본인이 선택했단 말이에요. 본인이 왜 선택합니까? 본인의 결핍 때문에. 결핍. 결핍 때문에.
이건 중요한 순간이야 이건 만약 우상숭배하게 되면 나는 지옥이다. 자기 여호와의 집을 본인이 찾아가는 거에요. 본인이 윤리와 도덕과 정결함과 단호한 일사각오의 신앙 가지고 들이미는 거에요. 멋있는 자기를 대체물로 앞장 세워서. 그거는 미완료입니다. 그래서 일사각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아 정말 이것이 최고의 한국의 모범적인 목사라고 한다면 정말 한국에 문제 있다. 뭘 모르느냐 하면은 십자가를 몰라요.
십자가 안에 결여의 자리를 만들어놓고 결여한 자리란 미흡함 빠져있는 구멍 이런 뜻이에요. 빵꾸난 것. 결여예요. 모자람의 자리를 만들어놓고 우리보고 여기에 들어가게 합니다. 못난 놈 있잖아요. 못난 놈. 못난 놈 누가 이야기했어요? 이순재. 예이~ 못난 놈. 세리, 창기 여기 다 집어넣거든요.
이 자리가 우리는 완벽에 완벽을 기하여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갖은 교리와 신학과 성경지식을 동원해서 내가 알아서 완벽을 채우려고 하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은 새로운 point 이동을 통해서 그 생소한 환경에서 지금껏 내가 익혔고 노하우라고 여겼던 모든 남들 이기는 그러한 신앙적인 노하우가 새로운 환경을 줌으로써 맹탕, 아무 짝도 소용없게 만들어요. 써먹을 데가 없어요. 써먹을 데가. 써먹을 데가 없게 만들어요.
그럼 졸지에 써먹을 데가 없으면 난 졸지에 뭡니까? 무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쓸데 없는 자 그래 그거 좋다. 그걸 집어넣어 빈자리에다가 이 구멍에다가 집어넣는 거에요. 빈자리에다가. 빈자리를 뭐로 포위한다? 십자가 피로 포위하는 거에요. 십자가 피로.
제가 주일날 설교했지만 이 세상에 많은 신들이 있는지를 몰라요. 인간은 신은 같은 신인 줄 알아요. 천주, 이슬람 신은 다 같은 신인 줄 아는데 주께서 딱 오실 때 그 신들은 하나의 신들이 아니고 사람마다 각자 각자의 신 다신의 세계인 것을 알려주는 거에요. 알려주고 거기에서 진짜 신은 뭐냐? 주일날 설교했잖아요.
나 간다. 단 하나의 원칙만 만들자. 피 준비해라. 피 발라라. 나 갈게. 우리 이래서 진짜 하나님의 원칙을 죄인을 통해서 우리가 수립하자. 그게 진짜 하나님입니다. 그게 역사적, 애굽의 맏이 다 죽었으니까. 애굽의 맏이 다 죽었지요. 그리고 point 이동해서 베들레헴 두 살 아들 다 죽였지요. 다 죽였지요.
여러분 한번 물어보겠어요. 사람이 죽인 인간이 많습니까? 하나님이 죽인 인간이 많습니까? 노아 홍수 보세요. 노아 홍수. 이거는 다 죽였어요. 하나님은 신종 코로나 병균처럼 만들었어요. 모든 인간. 아이고 김목사 오셨습니까? 네 이장로 오셨습니까? 실제로 뭐냐? 병균체 오셨습니까? 마스크 하세요. 지금은 신종코로나 때문에 전부다 마스크를 하세요. 무슨 뜻입니까?
“나는 당신을 병균을 옮기는 숙주로 간주하겠습니다 김장로. 이집사님.” 말은 이집사인데 안에 뭐가 있느냐? 당신은 나에게 병균을 옮겨가지고 나의 결핍을 조장할 수 있는 내 꿈을 당신은 훼손시킬 가능성이 있는 그러한 이집사님 안녕하세요 이런 거에요. 누가 그렇게 했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병균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숙주로 만들어 버렸어요.
하나님이 죽인 자가 사람이 죽인 자보다 더 많아요. 그래도 좋다고 사랑의 하나님? 무슨 사랑의 하나님이에요. 다 죽이는 하나님이에요. 조폭의 하나님 해도 모자라는데. 십자가는 여기에 결여, 일종의 참새 어미가 참새 알 품을 때 나무 위에 집을 만들잖아요. 그때 참새는 없고 계란은 자기 몸에 있지요. 계란 아니죠. 자기 알을 낳게 되면 그 집에 보금자리에 속에 담기잖아요. 그게 바로 그 자리에요.
없음의 자리에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기 스스로 설 수 없는 갓난 새끼 새들을 여기에 딱 담아 버리는 겁니다. 이게 twelve 거든요. 12. 12제자 아닙니까. 12제가 딱 담아버려요. 그런데 뭘로 합니까? 하나의 원칙. 십자가 피와 살. 피와 살이 생명이에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 마지막 만찬 할 때 뭘 부탁했어요? 뭘 하라 했습니까? 없지요. 기껏 하라하면 이거에요. 먹으라. 먹으라. 하나밖에 없는 내 살과 내 피를 나누어먹어라. 나누어 먹게 되면 공통적인 요소가 결국 예수님께로 전부 회수가 되겠지요. 똑같은게 갔으니까.
너 잘났다 나 잘났다 할 수가 없어요. 똑같은걸 먹고 똑같이 구원받았기 때문에. 나의 것, 이 어설픈 나의 것이 추가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한 예수님의 그 point 이동도 우리들 입장에서는 생소하기 짝이 없어요. 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책임지기 때문에 이게 익숙한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바보 등신 만들어가지고 죄인 만들어가지고 네 자리 여기 있다 하고 십자가에다가 여기 안전벨트하자. 안전벨트해놓고 못난 놈. 여기 못난 놈 다 집어넣는 거에요. 나는 잘난 놈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못난 놈 부르러온 거에요. 못난 놈. 병든 자를 부르러온 거에요. 병든 자. 죄인, 병든 자.
그러니까 십자가는 병든 자 해놓고 앞에서 십자가로 둘러치는 거에요. 마치 암탉이 새끼를 품은 것처럼. 이게 진짜 하나님이에요. 이 원칙 외에 다른 원칙 추가하게 되면 그게 뭐 예수고 하나님이고 전부 다 가짜입니다. 전부 다 가짜에요. 문제는 이거에요. 문제는 본인이 못난 놈 하면 되는데 평소의 우리의 삶이 잘난 체 맨날 잘남을 보거든요.
아까 유투브 첫 번째 강의 있잖아요. 거울 보면서 거울 볼 때 뭐냐 하면은 못난 거 확인할려고 거울 봅니까? 이만하면 잘 빠졌지. 잘난 거 확인하기 위해서 거울 보잖아요. 거울을 볼 때에는 첫 번째 할 때 뭐가 없다 했습니까? 타자가 없죠 ‘타자’. 남이 없지요. ‘남’. 남이 없이 혼자는 잘났어요. 그런데 계십니까 하고 누가 일가친척 특히 시어머니 나타나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못난 놈 되는 거에요. 빨리 저거 갔으면. 남이 등장하면 안돼요.
그래서 자꾸 현대인들은 홀로 있고 싶어 해요. 홀로 있고 싶은데 또 외로울 때 있잖아요. 외로울 때 보충하기 위해서 여기에 멋진 매개체 하나 들어갑니다. cat과 dog. 개와 고양이 들어갑니다. 개와 고양이 빈 데 있는, 들어가서 말 잘 듣거든요 그거는. 내 잘남에 훼손하지 않습니다. 내 잘남에. 남이 오면 후딱 보내버리고 심심했쬬~~얼른 개 끌어안고 합니다.
이런 말은 뭐냐. 나는 나로 완벽하고 싶어. 나는 나로 자족하고 싶어. 만족하고 싶어. 전혀 완전이 없고 결핍을 나름대로 해소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거에요. 그런데 이거는 노골적인 결여가 아니고 결여를 오히려 내부적으로 감추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꾸 미완료가 되어버려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첫째 시간 마치기 전에 정리해보겠어요. 주님의 십자가로 다 완료되어 있지요. 자기 백성 건집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완료 우리가 알고 있는 십자가 완료만 생각하는데 제가 전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십자가 하나였어요? 세 개였어요? 세 개였지요? 하나의 세트다 세트.
다시 말해서 이 결여의 자리 강도죠. 강도의 못난 놈 강도의 자리까지 세팅되서 완료가 되는 겁니다. 이 전체가 완료에요. 십자가도 완료고 옆에 죄인이 붙어있어야 완료가 되거든요. 그 완료를 베드로한테 보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보내주는 거에요. 우리에게도.
그러면 우리가 여기 있는데 우리는 미완료에서 완료로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성령이 와버렸다. 성령이 와버리면 우리 안에 이 십자가와 세팅된 프레임이 액자, 틀. 틀이 그대로 우리에게 이미 도착을 해버리면 나는 내가 좀 더 나아지고 싶은데 이 성령으로 인하여 나아지기는 커녕 점점 더 못난 놈이 되는 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내가 가만있으면 못난 놈 안 되는데 왜? 익숙해져있으니까. 나로 하여금 갑자기 너는 이제 저 세종시에 가가지고 취업해서 살아라. 그럼 세종시 그 동네는 내가 생소한 동네 아닙니까. 지금까지 여기서 경남에서 할머니들하고 친해가지고 인기 짱이었는데 거기가면 또 인기를 새로 모아야 돼. 모든 것을. 결혼도 마찬가지고 하는 모든 일이.
그래서 결혼하고 난 뒤에는 맨날 친정가고 이러잖아요. 친정가고. 요새 여자분들은 결혼하고 집 얻을 때 아빠, 엄마 아파트. 전에는요 빌라나 아파트 옆동을 샀대요. 요새는 그렇게 안한답니다. 아래층을 산데요. 아니 윗층을 산대요. 그래야 쿵쾅거려도 자기는 놀러다니고 엄마, 아빠가 돌보고 자기는 놀러다니고 이제. 옛날에는 그래도 양심 있어가지고 옆에 요새는 양심이고 뭐고 그것도 귀찮아. 바로 윗층에다 바로 한답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놀던 가닥, 옛날에 나를 모든 착함을 동원해가지고 못난 놈이 아니고 갈수록 더 잘난 놈이고 싶어 하는데 여기 상황을 그런 딸을 주께서 어디로 보내느냐 갑자기 남편이 베트남이나 아니면 저기 라오스나 이런 쪽으로 보내서 아 도대체 이거는 밥 먹고사는 것도 힘들게 되었어요. 그럴 때 진짜 내가 못난 놈 맞구나.
상황이 point 이동이 상황이 바뀌면서 우리로 하여금 대결자, 어떤 대결자? 완전함과 미완료가 충돌된다. 이 세상에 충돌점을 갖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결장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겁니다. 자, 이럴 때 도대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하잖아요. 첫째 시간 마지막으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에베소서 3장. 완료의 내용은 쉿 비밀이에요. 미리 알려줘버리면 내가 자꾸 대처하려고 해요. 그런데 에베소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3장 9절에 보면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함을 드러내게 하사”.
간단하게 믿음은 믿음의 내용은 쉿! 비밀이에요. “아이고 목사님 저 압니다.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잖아요.” 하잖아요. 그 십자가를 보게 되면 내가 아는 내가 현재 이 상태에서 아는 십자가하고 내일되고 모레되고 주께서 친히 인도하는 십자가가 폭이 달라요. 내용이 달라요. 십자가 맞아요. 예수의 피로 구원받는거 맞습니다.
그러나 피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는 내일 되 봐야 내일치 또 준비되어 있어요. 여호와의 집에 갈 때까지 계속해서 인도하니까. 오늘 십자가는 치킨과 더불어 먹을 수 있는 십자가인데 내일 되니까 교도소 가서 치킨 맛도 못 보는 십자가. 그런데도 십자가에요. 그 비밀을 어둡고 침침한 십자가와 밝은 십자가 그런데 십자가는 한결같거든요. 왜? 완료기 때문에.
완료인데 여기서도 완료고 저기서도 완료인데 우리는 어디에 익숙해졌느냐 하면은 내가 익숙한 십자가 감당할 수 있는 완료만 내가 완료라고 기분 째지면서 입 찢어지면서 기분 좋아했단 말이죠. 주께서는 그렇게 안해요. 이런 지경에서도 네가 완료함에 초청받은걸 네가 인정하느냐? 그걸 묻지요.
그러니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간단해요. 비밀이에요. 비밀인데 바깥에 표현할 때는 십자가. 합치면 십자가 안에 담겨 있는 비밀. 어떤 비밀? 십자가를 스스로 풀어내시는 하나님의 프레임. 세팅된 것이 안에 들어와서 십자가를 높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높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못난 놈 되게 하시는 그 열심. 그 쉬지 않는 주님의 충실하심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은혜 받은 상태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내가 못난 놈 되거든 은혜 받으신 거에요. 돈이 몇 푼 날라가고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잘난 놈 되거든 그거는 마귀가 한 7마리 마귀가 찾아왔다고 보시면 돼요. 내가 잘난 사람 되면.
특히 전도해서 먹힐 때 우리가 얼마나 대견한지 몰라요. 전도를 하든 헌금을 하든 뭘 하든간에 결과적으로 아 내가 이 정도까지 대단하구나 하면 그건 마귀 들은 거고 내가 천하의 쓸데없는 인간이고 이 결여의 자리가 빈자리가 빵구난 자리가 내가 딱 적합한 자리, 딱 적합한 자리.
그저 도움만 필요한 도움만 쳐다봐야 될. 새집에 새끼 새가 아무 염치도 없이 그냥 엄마 부리만 바라보면서 입을 쭉쭉 벌리면서 지렁이 달라고 외치는 그 보금자리 있잖아요. 새 보금자리 그 안에 그 둥지에 들은 것. 둥지 하니까 노래 생각나네. 내 품에 이건 다른 이야기고. 둥지. 주님 안에 있는 둥지. 그 안에 있어서 못난 자가 되는 거에요.
못난 자가 되면 어떤 점이 좋으냐 하면 못할게 아무것도 없어요. 못난 놈이 뭘 해도 못난 놈인데 내가 이건 됩니다 이건 안 됩니다 아이고 뭐 그럴 필요 없어.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요. 모든 것을. 어떤 것도. “너 교회 그만둬.” “예.” “나가 죽어.” “네.” 못났는데. 모든 걸 다 할 수 있죠. 모든 걸.
엄마 또 나 수학 0점 됐어. 나 대학 안가고 노래할래. 아이고 잘했어 잘했어 내 아들. 물론 아직까지 그런 경지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자식은 내 잘남의 표상이기 때문에 내 못난 나의 부족분을 자식이 채워주기를 항상 노리고 있거든요. 보람이 그건데. 나는 못나도 너는 잘나야 된다. 그런데 엄마 나 방탄소년단 이러면 골치 아프거든요. 방탄소년단 그게 몇 명인데 몇 명 되지도 않는데 얼마나 많은데 자기가 된다고 하겠어요.
그래서 주께서는 환경을 새롭게 해서 우리에게 심적 변화가 일어나게 해가지고 지금껏 내가 잘도 했다는 것은 다 내가 잘나기 위해서 시험 들어가지고 내가 얼마나 멋있는가를 표내기 위해서 내가 자아를 조작했던 엉터리같은 그런 나였구나.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대조적으로 알려주는 겁니다. 십자가는 옆에 무슨 자리가 있다? 결여의 자리, 빠져있는 자리, 빈자리, 강도의 자리, 세리의 자리, 창기의 자리가 항상 마련 되서 이게 있을 때 다 이루신거에요.
강남-누가복음 2장 29절 (못난 자) 200519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처음 한 것 여러분 기억이 안 나시겠지만 제가 말하면 기억날 거에요. 누가복음 처음하면서 이 세상은 공동묘지라고 했어요. 공동묘지에 잔디밭이 있지요. 보라돌이 뚜비 나나 뽀오~ 텔레토비에 나오는 사총사. 그들이 잔디밭을 뛰어놀아요. 그런데 전부 그 안에 죽음 공동묘지 위에 뛰어노는 거죠. 공동묘지 위에.
누가복음은 뭐냐 하면은 성령 받은 자가 이 세상을 공동묘지로 보고 맘껏 뛰어노는데 그게 주님께서 만들어놓은 새로운 질서죠. 질서체계. 질서라고 하는 것은 규모가 있다. 짜임새가 있다는 뜻이에요.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모든 얘기가 예수님께서 만들어나가는 질서체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질서를 잡아가는데 그 조건이 아까 조건이 뭐냐 하면은 공동묘지. 공동묘지에서 보라돌이 뚜비 여러분 외울 필요없습니다만은 시험에 안 나옵니다. 나나, 뽀. 이들이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공동묘지에서 나왔던 자거든요. 나왔을 때 여기 누가복음 1장부터 나온 겁니다.
구약은 반드시 성신인데 누가복음은 시작부터 뭐냐? 성신이 아니고 성령이에요. 성령 받은 자는 어떤 안목을 갖고 어떤 눈을 가진다? 세상 전체가 파란 잔디로 덮여있는 공동묘지로 덮여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보라돌이, 뚜비, 나나 얘들이 텔레토비 사총사 특징이 뭐냐 하면은 거칠게 없어요. 본인이 선택한게 아닙니다.
주께서 맘 놓고 밟으라고 모든걸 나의 질서, 주님의 천국질서를 위해 필요해서 내가 너를 성령 줬기 때문에 네가 거리낌 없이 어딜 가도 네가 마음 놓고 뛰어놀아도 괜찮다. 밟아도 괜찮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본인이 그렇게 할 용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게 할 용기 없어요. 왜냐하면 사는 동네가 세상에서 사는 동네이기 때문에 마음 놓고 한다고 해서 마음 놓고 할게 못되지요.
예를 들어 이제 마리아. 마리아가 꼭 내가 메시아를 임신하고 싶다 뭐 그런 생각 없지요? 그런데 마리아한테 허락을 안 받았어요. 일방적이에요.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데 이거 진짜 너무나 터무니없이 마리아가 임신을 해버렸잖아요.
마리아만 임신했는가? 갈라디아서에 보면 마리아만 임신한게 아니에요. 우리도 임신했어요. 모든 성도가 다 예수 그리스도 임신했어요. 모든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임신했는데 그것은 뭐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 네가 네 힘으로 잉태치 못하기 때문에 하늘나라 질서에 딱 적합하다는 거에요. 잉태치 못하기 때문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영이 안 나와요. 안 나오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해요. 왜? 이거는 내 능력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최적화된 존재들이거든요. 최적화된 존재들. 뭐 어떤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있는게 아니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바로 내가 누군지를 알려줍니다. 내 힘으로서는 못 빠져나왔다는 것.
이렇게 마음 놓고 뛰어다닐 그런 용기나 자신감이나 도대체 없는 것을 분명히 인식시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임신해서 애 낳다고 해서 막 뛰어노는게 아니죠. 누가복음에 3장에 보면 오히려 3장입니까? 2장 끝에 보면 부부가 마리아하고 그 남편 요셉이 아기 예수님 보고 소년 예수님 보고 막 나무래잖아요.
아버지한테 말도 안하고 너 어디 돌아다니느냐. 내가 사흘 동안 찾느라고 얼마나 애쓴지 아느냐. 오히려 나무래요. 나무랄 때 오히려 예수님께서 도리어 아빠 엄마에 대해서 가족들에 대해서 생소하게 없는 다른 이야기를 해버려요. 내가 아버지 집, 아까 했지요 우리 집.
내가 아버지 집에 먼저 가야되는데 쉽게 말해서 엄마 아빠는 우리 집 알아요? 이 말하고 똑같은 말이거든요. 우리 집도 모르면서 지금 우리 집에 가자고 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이 있는걸 몰랐습니까? 아빠 엄마가 들으면 이게 천재인지 돌았는지 그 말을 들으면. 아빠 엄마로서 키워준 사람으로서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어떤 13살 먹은 아이가 트롯트 노래 불러서 성공을 했어요. 그러니까 방송국에서 다 누구 덕입니까? 하면 아빠 엄마는 아빠는 돌아가셨지만은 아빠 안 돌아가셨구나 생사람 잡겠다. 있어 가지고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이렇게 도와주고 이렇게 나와야 될건데 아빠 엄마 살아 있는데 우리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나를 키웠다.
노골적으로 정동원이가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해버려요 노골적으로. 방송을 통해서 나는 아빠 엄마 없이 할아버지가 날 키웠다. 색소폰하고 전부 다 노래 가르쳤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럼 엄마 아빠 막 쥐어박고 싶지요. 그게 용기입니까? 자신감입니까? 아니면 본인이 본인의 솔직함입니까? 솔직함이죠. 솔직함이죠.
지금 여기에 성령께서 뛰어놀게 되면 내가 잘나서 이렇게 내 믿음 좋아서 그런 소리 안하겠지요. 그래서 누가복음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누가복음의 point 이동을 쭉 보게 되게 되면 난처하기 짝이 없는 쪽으로 성령께서 자기 백성을 계속해서 군데군데 퍽퍽퍽 일을 만들어요 자꾸.
제발 안 찾아왔으면 좋겠는데 찾아와버려요. 그 생소함, 믿음의 그 비밀, 숨겨진 그 비밀을 내가 있는 장소가 포인트가 있는 장소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주께서 만들어내는 내용이 누가복음 전체의 내용이에요. 간단하지요.
마치 그 들판에 불이 튀면 불꽃이 여기 튀고 저기 튀는 것처럼 종잡을 수 없이 툭툭 불꽃이 튀는데 튀는 곳마다 거기서 완전과 불완전이 계속 뚜렷하게 경계가 나누어지는 일이 벌어지는 거에요. 그러면 누가복음이 오늘날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이거는 뭐냐 하면 바로 우리 이야기되는 겁니다.
매일같이 우리는 생소함을 접하는데 그 생소함을 접했다 안접했다는 어떻게 아느냐 하면은 내가 역시 잘난 체하지만 역시 나는 못난 사람 맞습니다를 되새기기 위해서 주어진 내 인생과 내 상황이 그 남들 보기에는 어렵고 힘들지라도 나는 그 일에 대해서 짜증내거나 개의치 않고 이것도 과분합니다하고 후딱 그 일을 할 수 있게 되요. 감사와 기쁨으로.
에이 이거는 더러운거 안 해 이게 아니라 아이고 또 주께서 일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맘으로 받아 주는 거에요. 그 중의 한 예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천사가 고관대작을 찾아 가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훌륭한 성직자를 찾아 가는 것이 아니고 천사가 누굴 찾아갑니까? 목자를 찾아가죠. 아주 비천한 직업의 목자를 찾아가는 겁니다.
목자를 찾아가고 아기 예수가 궁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목자가 바로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면서 아 주께서 일 시작했네. 일 시작했어. 보라돌이 일 시작했어. 목자가 보라돌이 되는거에요 이제. 마리아도 보라돌이. 뚜비 되고 뽀 되고 본인도 보기에 본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나와 관련성이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는요 옆에 강도가 누가복음 거기만 나와 있어요.
오늘밤의 네 영혼 오늘밤에 너와 낙원에 가리라 누가복음에만 나와 있거든요. 그것도 하나의 point 이동입니다. 그 말대로 하면 강도는 필히 뭐가 돼야 돼요? 강도 안되고 싶어도 강도 돼야 돼요. 강도 어릴 때 공부 잘해가지고 천재가 되가지고 UN에서 활동 하던지 안 그러면 외교관 국회에서 하더라도 결국 강도 돼야 돼요. 코스가.
결국은 강도는 강도 돼서 못난 놈 돼야 돼요. 그리고 자기한테 절망해야 돼요. 나 자신의 어떤 가능성에 절망해버립니다. 이게 본인이 보기에도 일부러 절망하고 싶어서 절망하는데 일부러 절망케하는 이것이 자기한테 생소하고 자기한테 생소하면서 지금껏 살아온 그 세계가 나의 고향이 아니었었음을 다시 한번 그 순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자, 왜 이렇게 이런 이야기를 공동묘지 이야기 텔레토비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여기 그 이야기가 불꽃처럼 툭툭 튀어나왔기 때문에 어디로 튈지 모르게 튀거든요. 21절에 보면 천사가 왔던 것을 예수님이 바톤을 이어받습니다. 바톤을 이어받으면 예수님한테는 완전 완료형이 돼요. 완료형이 되면서 23절에 주의 율법이 이제 빨리 나갑니다. 주의 율법이 어디로 모이느냐 하면은 예수님한테 율법과 아기 예수가 만나요.
이거 설명해야겠죠. 율법과 아기예수의 만남. 율법의 화살표가 있다면 그 화살표는 어디를 간다? 예수님을 겨냥해서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을 겨냥해서 율법이 주어진다. 예수님에 의해서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인간들이 말하는 선과 죄는 다 엉터리, 정답이 아니에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이 말도 맞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없다가 돼요. 죄를 알아야 죄를 짓지요. 죄를 알아야 죄를 짓지. 내가 지은 것이 죄라는 것을 이걸 죄라고 규정한 것은 그건 엉터리 개념이에요. 인간은 죄를 모르기 때문에 정작 죄 아니라고 하는 것도 죄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몰라요.
세상에 어느 인간이 물 마시는걸 죄라고 하겠어요. 방금 목말랐습니다. 이게 죄가 돼요. 왜냐하면 자향성, 의도. 천사가 와서 하는 말이 너 그 물 왜 마시느냐? 목말라서 마셨습니다. 대답하지요. 왜 목 안 말라야 되는데? 살고 싶어서요. 그게 바로 죄잖아요. 네 목숨을 사랑했잖아. 그러니까 이게 책잡힐라하면 책 안 잡힐게 없어요.
모든 것이 나한테로 모든 일이 나한테로 집약해놓고 율법 보면서 나한테로 초점이 맞는 모든 일, 이걸 잘한 일로 율법아 그렇게 옆에서 오냐오냐 동조를 해달라는 거에요. 그런데 제가 모든 율법은 어디로 갑니까? 나한테 가요? 어디로 갑니까? 예수님이라고 해도 되고 나 아닌 분. 나 아닌 분. 아 이거 성질나거든요.
세상만사가 비가 왔다. 왜 비 왔습니까? 예 예수님을 위하여. 정답이지만 그걸 좀 더 정답하려면 나 조질려고. 나하고는 상대 안할려고 비가 온다는 거에요. 오직 주님하고 상대한다는 말은 나는 나하고 상대 안하는 거에요. 나하고 상대 안해요. 상대 안해놓고 왜? 비왔으면 좋겠어? 세상이 구름이 너하고 상대했으면 좋겠어? 예!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네가 그런 마음 자세 가지고 물을 마셔도 그게 뭐가 되겠어요? 죄가 되겠지요. 정리합시다. 죄란 모든 율법이 예수님께 쏠림으로서 예수님이 규정해야 죄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죄 지어 놓고도 죄인줄 모르는 채 자기 정당성을 옹호하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공동묘지죠 그냥. 죽은 거에요.
그러고 난 뒤에 뭐하느냐 여기 율법을 이렇게 삽입합니다. 비둘기 몇 마리지? 어린 비둘기 두 마리를 제사해가지고 드리죠. 그때 25절에 시므온이라는 드디어 이제 천사, 아기 예수하고 난 뒤에 첫 번째 등장한 불꽃. 보통 촛불집회 하면 촛불 가지고 옆에 사람 촛불 없으면 옆에 사람 불꽃 이렇게 전달해주죠. 그러면 갈수록 점점 더 파급되면서 그 천지가 환하게 되지요.
첫 번째 성령께서 이렇게 전달하는 첫 번째 사람이 시므온이에요. 시므온. 26절에 보면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그다음에 무슨 지시입니까? 성령의 지시죠. 성령의 지시죠. 제가 이렇게 26절 이렇게 시므온과 성령 나온 것을 설명하면서 행여나 여러분이 역시 시므온은 훌륭해 이러시면 안 됩니다.
결여의 자리, 결여. 빠진 자리를 염두해두시기 바랍니다. 세팅된 그 십자가와 결여의 자리를 지금 어디에다가 집어넣는다? 시므온 자리에다가 성령을 통해서 집어넣는 거에요. 시므온 훌륭하다 믿음 좋다 시므온처럼 살자 이러지 마세요. 그러면 안돼요.
성령이 오니까 그 다음에 27절에 초반에 보면 무엇의 감동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왜 자꾸 시므온이 뭔가 자기 빨래할 줄 알고 신발 갈아신을 줄 알고 옷 갈아입을 줄 알고 양치하면 치카치카하는데 왜 자꾸 성령이 등장합니까?
성령이 등장해야 양치질을 하게 되면 아 이건 진짜 해야 돼. 양치질하는게 왜 죄가 되야 되느냐 하면은 양치질이 왜 죄 되느냐 하면은 양치질을 몇 초간 최소한 몇 분 해야 하느냐 하면은 3분하도록 되있어요. 치과에서. 맞습니까? 최소한 3분하게 되어 있어요. 물론 치과에서도 이렇게 하는 치과 의사 없어요. 없는데 자기는 안하면서 다 가르쳐요.
내과의사가 술, 담배 하지마라 하면서 자기는 술, 담배 다 하거든. 양치질 3분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2분 59초 하게 되면 이건 뭐가 돼요? 죄가 되지요. 3분 5초 하게 되면 뭐가 됩니까? 죄가 되지요. 그러면 양치질하면서 뭐를 봐야 되느냐? 시계를 봐야 되겠지요. 가난해서 시계 없다면 이거는 죄 짓는 겁니다. 양치질할 때만 죄 짓는 거에요.
사람이 양치질이 죄라는 것은 인간이 행함 하나 벌리면 와락 어디서 날파리들이 법의 날파리, 선악의 날파리들이 공격용 드론처럼 웽~ 하고 달라붙어가지고 내가 본인을 그걸 조정해요. 지금 나는 2분 59초 드디어 3분이다. 신종 코로나 할 때는 손을 씻을 때 몇 초하라고 했습니까? 이거 모르는구나. 30초 흐르는 물에 씻으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생일 축하합니다 두 번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그럼 어떻게 하느냐.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분명히 생일 축하합니다 두 번 했는데 끝나고 보면 8초 내지 15초. 후딱 해치워버려요. 왜?
모든 행동에 뭐가 달라들기때문에? 이 양심, 내가 그동안 걸쳤던 율법이라는 그 모든 법이 먼데 있다가 뭔가 행동할려고 하면 이것 할려고 하면 다 달려들어요. 이거 흘리지말고 다 마셔야 돼. 이거 다 마실거야? 1/5 마실거야? 되도 않는 고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5분의 1남기든 4분의 1 남기든. 하지만 1/4 하면 찝찝하고 1/5 하면 이게 익숙해졌던 거에요.
지금껏 내가 나름 나의 완벽을 추구했던 그 습관과 습성이 법이 되가지고 나를 잘난 것을 남한테 타인에게 증명해줄 법의 보조적인 법들로 둘러쌓인 나의 자아. 나의 자아가 법들도 둘러 쌓였어요. 마치 그것 하나면 징크스처럼 뭔가 벌 받을 것처럼 뭔가 하늘에 벼락 떨어질 것처럼 그렇게 하는거에요.
내가 이런 짓을 했으니 벼락 맞아도 싸다. 벼락은 여러분 나쁜 짓했다고 오는게 아닙니다. 그럼 세상사람 다 죽어야 돼요. 벼락은 왜 치느냐? 모든 중심은 누굽니까? 예수님께서 예수님 알리기 위해서 벼락치는 거에요. 우리하고 아무 상관없어요. 벼락 안 맞아도 이미 죽은 자에요.
벼락 안 맞고 지옥 갈 사람이 한두명이 아닙니다. 벼락 안 맞고 지옥 갈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고 공부 잘 하고 지옥 갈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에요. 집안 행복하고 하하 웃으면서 지옥 갈 사람이 죽을 때 까지 지옥 가면서도 웃고 있어요. 삐에로처럼 웃고 죽을 때까지 웃고 있으면서 지옥가요.
그러면 웃는게 죄입니까? 라고 물으면 안돼요. 지옥가고 천당가는건 누구 소관이냐 하면은 텔레토비 사총사를 공동묘지에서 끄집어내는 누구의 것이다? 성령이 주님의 영이 주체가 된다. 그래서 27절에 봅시다. 무엇의 감동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보세요. 네비게이션 아닙니까? 몰라요. 지금 시므온이 지금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싶지만 어느 쪽으로 어느 것이 우리집인지 아무도 몰라요.
다만 여기에 네비게이션에 우리집으로 되어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성령이 와서 찾아 오는 거에요. 시므온 착한 사람이다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성령이 찾아온 사람이지 착한 사람 아니에요. 찾아온 사람이에요. 그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 말하기를 목사님 안 찾아오면 어떻게 합니까?
성령이 시므온은 찾아갔는데 나한테 안 찾아오면 어떻습니까? 라고 묻는데 그 해답이 또 누가복음 4장에 나와 있네요. 누가복음 4장에 4장 25절, 26절 제가 읽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죠. 많은 과부.
그것도 수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그 다음에 엘리야가 그 한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엘리야는 성신 받았지요. 시키는대로 하는 겁니다.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여기 시돈 땅에 있는 텔레토비. 보라돌이 같은거. 그에게만 갔다는 거에요. 가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완료성은 이 땅에서 나타날 때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은 예외적으로 나타나죠. 예외적으로. 왜? 아무도 보이지 않고 그 사렙다 과부에게 왔기 때문에. 그러면 예외적이니까 이건 예외적인 것은 인간에서는 이것은 예견 못한거죠. 예견될 수 없는 거죠. 그게 바로 이 세상에 대한 고발의 방식이에요.
이 세상 보고만 한다고 하지 말고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에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가 예견을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예상 못하는 방식으로.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은 만약에 예상을 하게 되면 여기서 걱정 근심이 와요. 걱정, 근심. 대구강의를 좀 해보면 대구강의에서 했던 것.
예상이 되면 걱정, 근심이 되는 이유가 예상을 해버리면 선악구조 때문에 뭐냐 하면은 잘 될 때 망할 때를 필히 되지도 않았는데 미리 본인이 걱정하고 있다고요. 그럼 잘 될 때는 뭐하느냐? 잘 될 때는 받쳐주기 위해서 여기 윤리와 도덕과 착함과 교리와 성실함과 착실함을 여기에다가 잘 될 때를 총동원해요.
동원하면 동원할수록 이것은 무엇이 점점 더 두렵다는 거에요? 이것 다 때려붙여도 망하면 나 어떡해? 가 점점 더 강렬해지는 거에요. 청군이 와~하면 백군도 같이 와~하는 거에요. 한쪽이 기 죽는게 아니고 절대로 이 망함에 기 안 죽어요. 실패에 대한 예감이 하여튼 슬픈 예감은 피해간 적이 없어요. 반드시 강렬하게 떠올라요. 내가 더 고집을 부릴수록.
그러니까 대구강의에서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지옥생활이라고 했어요. 지옥생활. 천국생활해도 시원찮은 우리에게 시간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시간이 지옥으로 가득 차는 거에요. 안되면 어떡해 자꾸 걱정하는. 예상을 한다? 안한다? 예상을 못하게 만들어요. 예상을 못하게 만든다.
신종코로나 누가 예상했습니까? 예상 없습니다. 그럼 예상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예상하게 되면 피해간다. 예상하게 되면 피해간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게 뭐냐? 이게 뭐냐 하면은 아까 이야기한 대결장에 초청하는 거에요. 대결장. 완료와 미완료를 대결하게 하는 거에요.
그렇게 해서 피해감으로서 내가 나한테 손댄다고 예상한 결과 안 나온다는 사실을 미리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한테는 어떤게 좋으냐 하면은 거봐 나한테 성령 왔잖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본인 입에서 그 말이 안 나오지요. 오히려 반문하지요. 저 사람들 안 왔는데 왜 하필 나를 찍었습니까?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나의 선택은 날라가버리고 주님의 선택이 강렬하게 작용해 버립니다. 그러면 그동안 내가 찍기 전에 내가 예상한 모든 나는 낯선 나, 그런 나하고 선택되고 난 뒤에 매일 어떤 상황 속에 point 이동된 상황으로 올 때 어제의 나는 이거는 갖다 폐기처분해야 될 나예요.
날마다 나를 폐기처분하는 거에요. 하루치 써먹었으니까. 일회용이거든요. 써먹었으니까 폐기처분하고 쓰고 또 그날 폐기처분하고 그냥 처분이 아니고 폐기처분. 에이 꺼져버려라. 폐기처분하는 거에요. 없애버리는 거에요. 그냥 놔두면 자꾸 예상을 해서 걱정, 근심을 일곱 마귀가 자꾸 들어와서 안돼. 매일같이 선택되고 매일같이 간택되는 겁니다. 매일같이.
그럼 주님께서 나를 선택 안해주면 어떻게 됩니까라는 선택이라는 말을 할 때는요.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는 예상은 나의 선택의 기준에서 주님의 선택을 언급했기 때문에 그 선택은 구라입니다. 거짓말입니다. 낯설게 예상 못했을 때 선택이 되야만 선택이 돼요. 그러면 우리는 아낌없이 어제 했던 모든 얘기는 다 실없는 짓이었구나를 감사함으로 오지요.
따라서 감사 나오면 성령의 일. 억지가 나오면 악령의 일. 뭐 이런 논리가 다 있어. 이건 예상 못했잖아요. 이건 성령의 일. 성령의 일. 내가 만약 길을 가는데 어떤 주머니가 있더라. 있어 가지고 무슨 사람이 신문지를 버려놨어. 딱 보니까 오만원짜리 100장 500만원 들었어요.
그때 우리 어떤 마음 듭니까? 아 이런 은혜를. 이렇게 하겠지요. 그런데 만약에 오늘이 아니고 어제 뭐라고 예상했느냐 하면 만약에 나한테 500만원 있다면 나는 파출소에 갖다 준다. 이게 어제 예상이에요. 어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은 오늘이 안 되어봐서 몰랐어요. 오늘 딱 현장감에 집어넣으니까 파출소 같은 소리하고 있네. 주여 이걸 막 간증을 할 거에요.
하필 더도 말고 딱 500만원이 필요한데 주께서 500만원 주셨다. 주여 할렐루야 하면서 갖다 드리면서 주께서 살아계신 것 증언하고 싶다. 갑자기 이런 소리 나와요. 파출소 이야기 쏙 들어갔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지요. 와가지고 혹시 돈 못 봤습니까? 못 봤습니다. 결여.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주께서 못난 놈~~~.
주께서 못난 놈 들추기 위해서 일렬의 적합한 시퀀스, 그러한 무대장치와 시나리오를 짠 거에요. 결국 돌고 돌아 못난 놈 되어버리는건 마찬가지. 27절 봅시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감에. 성전에 들어가게 하신 거에요. 전에 성전에 들어갔을까요? 안 들어갔을까요? 들어 갔지요. 그때 감정이 달라요.
딱 들어갔을 때 마침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자, 여기서 아까 다시 해봅시다. 목자가 누굴 만났습니까?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 만났지요. 아기 예수 만났지요.
목자가 올 때 아기 예수가 응애 응애 하면서 손 싹 내밀었어요? 안 내밀었어요? 안 내밀었지요. 그때 아기 예수가 그냥 누워있는 그 시점의 그 역할은 목자가 보는 역할이에요. 그 다음에 목자 자리에 시므온이 들어갑니다. 아기 예수가 좀 컸어요? 안 컸어요? 컸지요. 아기예수가 요만할 때 목자가 아니고 시므온이 들어가는 거에요. 완료형에.
그래서 우리가 미리 완료형을 예상 못해요. 오늘 기도빨 될 때 주님 오셨으면 좋겠다. 아니에요. 이건 우리가 예상한 완료형이고 교도소 갈 때 완료형일지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우리가 병이 나서 누워있을 때 완료형일지 그거는 예상 못해요. 다만 소급해 볼 때 이런 환경 예수.
그러나 공통점은 뭐냐? 예수님 만나기 위해서 주께서 무슨 일도 다 벌리신다. 모든 일을 거기에 맞추어서 우리 하나 예수님 만나기 위해서 예수님과 우리가 관련성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온 우주와 천사와 모든 권세를 다 동원해서라도 자기 백성 놓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시므온이 가로되 주여 이제 말씀하신 대로 종을 어떻게 놓아줍니까? 납작하게 놓아준다. 신나게 놓아준다. 어떻게 놓아줍니까? 평안하게 놓아준다. 이게 오늘 제목을 이걸로 정합시다. 이게 뭐냐? ‘결연’. 빈자리 만드는 거에요.
십자가 자리 옆에 우리 자리 있지요. 우리한테 올 때는 누구 자리? 아기 예수의 자리 주님의 자리가 뻥하고 구멍이 뚫리도록 하시는 거에요. 누가? 성령께서. 성령께서 우리가 스스로 노력으로 윤리와 도덕과 착함으로 이게 마저 메워지도록 하지 않고 항상 여기에 틈이 생기게 만드는 겁니다. 주님은 다 계획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와야 딱 맞는 십자가만 와야 딱 맞는 그런 계획이 있는 겁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 안 왔지요? 그럼 3년 6개월 동안 비 안 왔는데 그 많은 과부가 있는데 사렙다 과부한테는 자의로 자기 능력으로 온 능력으로 해도 메꿔지지 않는 빈 결여의 자리가 빈자리가 있어요.
그 빈자리에 누가 와서 채워졌습니까? 엘리야. 엘리야가 와서 채워줬잖아요. 엘리야가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요. 아마 그렇게 못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밥이 먹히더라도 마지막 자살하기 직전에 먹는 마지막 만찬을 뺏어가버리잖아요. 독약으로 먹으려면 독약까지 뺏어가버리고 내가 먹을련다 이런 식으로. 죽는 것도 못 죽게 만들었죠.
그러니까 그 사렙다 과부가 그 미팅, 엘리야 미팅 만나는 순간은 어떤 지경까지 내려가야 되게 되느냐 하면은 절망의 절망, 끝의 끝. 더 이상 내 힘으로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끝났습니다. 남은 것은 얘야 끌어안고 자살하자 죽자. 이제 끝났어. 가뭄 들고 우리 살만큼 살았다 하고.
이러면 안돼요. 살만큼 살았지만 이런 생각 갖는데 혹시 한번 봐라. 혹시 뒤에 택배 천사가 왔는지 이거 없어요. 뒤에 혹시 봐라 없어요. 그냥 생각을 마음을 닫아 버려요. 한계에 이르게 인간의 한계. 그것도 또 이 이야기 듣고 한계라 치고 옆에 또 뭐 왔나? 한계라고 치고 천사가 뭐 줬나 확인하지 마세요. 그런 꼼수는 안 통합니다.
왜냐? 우리가 예상한 것은 주께서 예상을 빗나가기 때문에. 예상한 것은 예상을 빗나가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항상 기도하니까 바깥에 택배가 와서 나와 있더라. 예를 들면 주기철 목사 영화라고 하면 목사가 목사 잘리고 난 뒤에는 먹을게 없거든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가면서 담벼락으로 막 던져요. 그러니까 그 부인되는 오정미 사모님은 맨날 가가지고 아침에 만나 줍듯이 주워오는 거에요. 그럼 그 다음날 아침에 뭘 기대하겠어요? 기대할거 아닙니까? 그게 예상이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주기철 목사 인생이 그런데 만약에 예상을 해가지고 아침에 밥을 주는게 아니고 그날 밤 새벽 2시 20분에 갑자기 금덩어리가 이만큼 생겼다고 해보세요.
주기는 주되 예상 밖에 주지요. 이처럼 십자가는 예상 밖에 와야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에요. 신학 공부해가지고 십자가 예수님 피로 연구하고 막 성직자 이런 십자가는 이거는 내가 예상하는 십자가라서 엉터리 십자가에요. 그건 몰라도 된다는 말은 아니고 알아도 오히려 방해가 될 경우 있지요.
나로 하여금 사업 망하는게 아니라 사업 잘 되도 마찬가지죠. 사업이 망하고 자식 잘 되더라도 내 자신을 볼 때 아무래도 이렇게 사는 것은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이 주께서 세팅하기 위해서 일부러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환경을 같이 매치가 되도록 딱 조성을 해놓고 그 다음에 성령께서 다 작업을 해놓고 십자가를 집어넣게 되면 정말 기쁨이 폭발해버립니다.
그야말로 나 지금 죽어도 좋아요. 그리고 나는 진짜 나쁜 짓해서가 아니라 그냥 죄인되었음이 오는 그 황홀함, 내가 의인되었음의 황홀함이 아니고 신학에서 루터가 이야기한 거고 진짜 복음은 뭐냐? 내가 의인되어서 기쁜게 아니고 그건 황공스럽고 죄인 되어서 기쁜 거에요.
뭐든지 할 거 같애 이제는. 남이 나한테 돌 던져도 좋을 거 같애. 돌 던져도 기쁨으로 막 웃으면서 맞을 거 같애. 그 정도로 자기가 그냥 아무것도 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되었다. 이걸 시편 50편에서 날 때부터 나는 모친의 죄에서 내가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 다윗이 얼마나 기뻤겠어요. 진짜 이루 말 할 수없이 기쁘지요.
그렇게 연구해도 몰랐던 나 자신을 성령이 오니까 알았잖아요. 나는 죄인이라고. 그게 바로 성도라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헌금도 아니고 재물도 아니고 뭘 원한다? 심령도 그냥 심령이 아니고 앞에 붙지요? ‘상한 심령’.
만약 여러분들이 만약에 우리 집사님께서 트롯트 대회 나갔다. 아 결승에 올라가야 될텐데 초장에 박자 놓쳐가지고 초장에 탈락했을 때. 탈락과 더불어서 너는 죄인이라고 하는 합격 일등한 것보다 기쁘지요. 돈 1억 타는 것보다 더 기쁠거에요.
그게 그거해봐야 그것뿐이지 다음날 되면 또 개조되야지요. 그게 숨겨진 비밀, 창세전부터 예정된 비밀이에요. 결여의 자리. 여호와의 집에 가려면 개조되지 않으면 못가고 변화되지 않으면 절대로 이 몸 가지고 안갑니다. 광야에서는 광야 변화가 아니라 내 변화하라고 광야가 있는 거거든요.
세상은 내 변화와 달라져야 돼요. 의인 추구에서 뭐 추구? 죄인임을 아는 그것으로 달라져야 돼요. 그러니까 지금 시므온은 안에 뻥하고 구멍이 뚫리면서 그 구멍을 누가 메꿨어요? 예수님이 메꾸니까 그 구멍, 성령께서 구멍나게 하고 주님이 메꿨으니까 더 이상 자기가 더 보탤게 있어요? 없어요? 아무것도 보탤게 없지요.
보탤게 없으니까 종은 어떻게 돼요? 그냥 영어로 peace 평화죠. 평안한 거에요. 내가 보탤게 없으니까. 내가 더 할게 없으니까. 주일날 설교한 것처럼. 불가능이 이미 쳐들어왔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가능으로 더 추가, 뭐 도와드릴까요? 할 필요 없어요. 그 예수님 박힌 채로 살아가면 되니까요. 나는 물론 죄인으로 십자가 자체가 죄인으로 바뀌겠지만.
그런데 시므온이 목자와 달리 뭐를 더 고백하느냐 하면은 이스라엘 역사가 바로 지금 이 때를 위함이다라는 거에요. 목자는 그냥 아기 예수 쳐다보고 아기 예수 태어났다고 그냥 그 역할이고 시므온 역할은 뭔가 이야기를 해야 돼. 이게 이스라엘에 나오는 그대로 구약의 예언을 시므온이 성경을 아니까 그것에 해서 그 십자가의 비밀이 보다 넓혀졌겠어요? 목자보다는 더 풍성해졌겠지요. 목자보다는 더 풍성해진 거에요. 목자보다는.
참 이거 드라마를 연기하는 연기자는 연출자들이 연기를 너무너무 잘해서 욕을 많이 얻어먹는 경우가 많아요. 연기를 너무 잘해서. 국민밉상 박태준. 부부의 세계. 자기가 나쁜 짓 해놓고 탓을 아내 탓하고 있는 그 드라마 이야기에 그 박태준이라는 이 사람이 전에 아저씨라는 드라마에서는 너무나 성스러운 스님 역할로 나왔거든요.
정말 너무나 성스러운 천사가 있다면 저 사람이다 할 정도인데 그 천사가 이 드라마에서는 국민밉상 되어버렸어요. 국민밉상. 아이고 얍삽한 인간. 모든 탓을 남 탓으로 돌리는. 시므온 역할은 뭐냐 하면은 그가 알았던 그 이스라엘 역사, 시므온이 학자니까 시므온이 알고 있던 그것이 전에는 그냥 안다는데 주님이 오심으로서 그걸 뭘로 바꿨습니까?
십자가를 증거하는 용도로 바꾸는 역할을 목자는 아니니까 목자는 목자 역할하고 시므온은 시므온 역할한 거에요. 그렇다면 오늘 모든 교인들이 하는 일이 다 달라요.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왜 그렇게 다양하느냐 하면은 각각 맞춤 역할이 있어요. ‘맞춤 역할’.
이 말은 남의 신앙을 흉내내지 마세요. 남의 신앙을. 그 사람은 그 사람 역할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본받아라. 일사각오? 그 주기철 목사 그런거 흉내내지 마세요. 만약에 일제 강점기 때 나보고 신사참배하라고 하면 나는 미국 밀양 간다. 미국 배타고 하와이로 가버려. 하와이 사탕수수 공장 갈 거에요. 쓸데없이 왜 싸우는데? 싸움되지도 않는데. 총들고 나간다고 순사를 이깁니까? 아니죠.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일본군인이 50만명 들어왔어요. 50만명. 우리나라 인구가 2000만명이거든요. 2000만이 50만 못이기는 거에요. 나라를 팔아먹어가지고. 어떤 건물 지어도 2000만명 있어도 100만명 있어도 10층 짜리 건물을 못 지어요. 왜? 기술자가 일본기술자 나카무라거든요. 일본기술자 들어와가지고 건물 하나 못지어요. 숫자 많다고 나라되는거 아니거든요.
기술 없으면 마땅히 굴복해야지요. 직장상사가 기술도 개코도 없으면서 하는 것은 그거는 욕 얻어먹지만 전문가면 욕하고 싶어도 욕 못해요. 그 전문가이기 때문에. 뭐 존경까지는 할 필요 없지만 뭔가 자꾸 배워야 내가 그 직장에 버틸 수가 있거든요. 그러면 한수라도 뭘 아부해가지고 뭘 하든지 빌든지 빼내야 되잖아요. 빼내야 된다고요.
여러분들이 다른 성도들 만나고 다른 사람 이야기할 때 남 가르칠 생각하지 말고 본인부터 실력부터 키우세요. 나는 이렇게 하면서 이렇게 깨졌고 이렇게 절망했다. 이렇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면 나는 된 줄 알았는데 주님께서는 전혀 그런 인간 안 받더라 하는 그것을 그것 이야기 하라고 계속 여러분 자리에서 계속 살게 하는 겁니다. 실패하라고. 성공한 예가 없도록.
뭘 해도 나는 항상 못난 놈이고 제목을 이상하게 바꾸고 싶네. 뭘 해도 못난 놈이고 뭘 해도 불평하고 걱정부터 먼저하고 근심부터 망할까봐 벌벌 떨고 지 주제파악도 못하면서 이걸 놓치지 말고 하나하나 담아가지고 남한테 그렇게 이야기하라 그 말이죠. 예수님 알고 나는 비로소 내가 실패해도 마땅함을 알았습니다 이게 바로 결여에요 ‘결여’. 빠져있는 거에요. 시므온이 하는 거에요.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뭐했어요? 33절에 그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뭐했어요? 기아하게 여기더라. 또 기이해. 하나님이 하신 일은 맨날 기이해. 예상을 벗어나요. 맨날 기이하데. 기이하다는 말을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거리가 또 생겼다. 감사거리가.
이거는 감사할거 아니지. 아니 감사. 똑바로 물을 마시는게 이게 무슨 감사야? 나중에 제가 중풍 걸려가지고 이거 보세요 물 다 튀고. 평소에 그때 2020년 5월달에 이렇게 얼마나 감사한지. 내가 항상 물 이렇게 똑바로 먹는다는 보장 어디 있어요.
벌벌벌 떨면서 물 다 쏟고 옆에서 아빠 진짜 미쳤는가 보다 해가지고 그런 날이 오더라도 그건 뭐 못난 놈 마땅히 그래야지요. 그러니까 이거는 우리의 바닥을 몰라요. 우리가 어디까지 바닥인지 모르는데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바닥이 없을 정도로 못난 놈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주님의 비밀, 나는 아직도 그걸 인정 못하지만 주님은 벌써 인정하고 모든 일을 그런 쪽으로 몰아간다는 거에요.
그럼 우리는 구원받는데 뭐 할 거 없잖아. 그 역할이 구원받는데 할 거 없는 그 역할이 하고 있는 거에요. 그 역할을. 주께서 point 이동시켜가지고 그 자리에서 바로 그 고백하게 하는거에요. 나는 아무것도 할게 없습니다하는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그게 다른 사람 보기에 뭐로 보겠습니까?
아 참 너 이상하다. 사람 바뀌었네. 맨날 네 자랑하더니만. 너한테 기이한 이야기가 나오느냐. 며느리가 시어머니 오시면 전에는 주고받고 칭찬하고 하는데 내 죄를 알고 난 뒤에는 그냥 해드렸지만 부모가 얘 너 눈빛이 다르다. 전에는 억지, 뭐 빨리 안 죽나 이런 눈빛이었는데 지금은 네 눈빛 보니까 네가 이상하게 눈빛이 어질어보인다.
그거는 뭐 엄마가 잘못 착각해서 그런 모양인데 그것은 바로 의식하면서 남을 의식해서 잘하면 잘해주고 내가 못하면 망하겠지 자꾸 계산하지 않고 그냥 이 주어진 환경이 감사해버리니까 평을 다른 사람들이 평을 그렇게 해주는 거에요. 기이히 여기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그 다음 34절. 자, 목자가 한 것을 시므온도 했어요. 그다음에 아까 목자가 한 것을 시므온이 했고 그중에 부모, 예수님의 부모가 기이히 여기는 그 부모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시므온이 누구를 가르쳐요? 아이를 낳았던 부모한테 뭐를 가르칩니까?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뭐하게 한다? 드러내려 함이니라.
인간의 생각은 주체가 되어있고 신체가 되어있고 자아가 되어있고 타자가 되어있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어렵죠. 주체가 큰 원이라면 이 원 안에서 신체가 포함되어있고 자아가 포함되어있어요. 그리고 타자, 타자가 남이 나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바깥에 나와있으면서도 그 타자를 응시, 그 타자가 보는 것을 내가 응시하는 거에요.
따라서 이 주체는 어떤 주체냐 하면은 불완전한 주체에요. 불완전한 주체거든요. 불완전한 주체이기 때문에 그 타자가 요구하는 것을 내가 만약에 탈선한다면 더 이상 타자가 걸친 타자가 아니고 나는 타자의 것을 만족시키기 때문에 온전한 주체가 되겠지요. 온전한 주체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불완전함을 결핍을 느껴서 불완전하니까 완전을 추구하고자 하는 이 생각이 인간의 생각이 있음을 누가 들추어낸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 엉터리 그래서 어설프게 완전을 추구하는 이것을 완전히 폭로시켜버리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 주체자 신체는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멸망할 이 세상의 작품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을 뺑뺑 돌면서 갇혀있는 이상 이 세상 안에서만 돌게 되어있어요. 이 세상 안에서만. 제가 대구강의 할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사우나 예 한 거 기억나십니까?
사우나 이렇게 들어가면 처음에는 어~ 좋다 하면서도 2분지나면 5분 지나면 나오고싶지요. 제가 그런 지옥을 설명하면서 사우나는 들어갔다가 자기가 문 열고 나오면 되는데 성경에 보면 닫으면 무슨 자가 없다? 열 자가 없어요. 이게 미치는 거에요 이거는.
왜 태어났는가 싶어. 태어나보니까 지옥이야. 문제는 바깥에서 열어줘야 천국 시원한 바람부는 천국으로 빠지는데 이게 잠그니까 열 사람만 열거든요. 사렙다 과부에게만 열어주거든요. 예외적인 사람. 그걸 닫아주니까 할 수없이 이 사람들은 이 안에서 자체적으로 뭘 추구해야 돼요? 이래도 날 구원 안해줘? 자체적으로 완전을 추구하는 일을 하겠지요.
그 완전을 추구하는데 조사를 해봤지요. 정신분석학에서 철학에서 조사를 해보니까 여기까지는 주체, 신체, 자아 / 타자 이 네가지로 구성이 되어있어요. 주체는 전체니까. 음성듣는 사람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그림을 봐야 돼.
주체가 뭐냐 하면은 우선 신체가 먼저입니다. 신체가 응애응애 애가 먼저 태어났지요. 애 태어나면서 애하고 애는 엄마하고 동일시하는 거에요. 엄마하고 자기를 동일시하는 거에요. 아이에 있어서 자아라고 하는 것은 엄마가 울면 자기도 울어요. 왜? 엄마와 자기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런데 좀 크다보면 뭐냐 하면은 엄마 따로 나 따로 돼요. 신체 따로 주체가 따로 자아가 생기죠. 하나가 되었다가 분리된 줄 모르고 그냥 한 몸인 줄 알다가 자아가 생겨요. 자아가 생겨가지고 내 신체가 나다. 거울 보면서 저 신체가 나다 라고 여겼는데 여기서 옆에서 타자, 아빠 엄마가 잔소리를 해대죠.
잔소리를 해대니까 아빠 엄마가 요구하는 것은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네가 함부로 오줌싸고 똥싸느냐고 나무라니까 아빠 엄마는 뭘 원하느냐? 똥싸고 오줌싸고 함부로 하지 않고 알아서 네가 알아서 화장실에 가서 네가 용변을 보는 그런 사람이 되어라 하는 이게 주체에요.
그럼 주체는 뭐가 섞이느냐? 자아가 걸치고 들어온다고 자아가. 여러분 이해하기 쉽지요? 자아 속에 뭐가 있습니까? 그동안 내가 성장, 가정 환경이 들어 있어요. 가정 환경이. 사회에서는 가정 환경 나쁘면 인간 안 된다고. 가정 환경이 그만큼 잔소리가 들어온 거에요.
이게 뭐냐? 응시에요. 두고 볼거야. 네가 나이 30, 40, 50되면 어떻게 사는지 두고 볼거야. 이분 누구야? 너 모르겠어? 저 안동 고씨의 사돈팔촌이다. 줄곧 내가 너 어떻게 사는지 지켜 볼거야. 큰집에 가니까 못 보던 하얀 영감들이 등장하는 거에요.
누구냐 하니까 나하고 만난 기억이 없는데 지켜보고 있는 거에요. 응시. 네가 안동 고씨 집안에 네가 우리집에서 판사된 건 처음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네가 출세해가지고 대통령 비슷한거 해라 이런 식으로 계속 기대를 나한테 기대를 하는 거에요. 기대를.
이 주체는 남녀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자. 주체는 그들 주체는 뭐냐? 우리끼리 좋아하면 그만이다. 사랑은 국경 없다해서 갔는데 가보니까 여기에 시누이가 있고 시동생이 있어. 시누이, 시동생이 있다고요. 누구십니까? 시누이야. 시누이인데 시댁 아빠 엄마가 모든 돈을 우리 남편한테 안주고 시누이한테 여동생한테 다 줘버렸다.
그러니까 우리 남편하고 나하고 달려들어서 제사 드리고 있는데 줘패가지고 징역 1년 살았지요. 재산을 오빠한테 안주니까 오빠 아내가 큰 며느리가 와가지고 80먹은 노모를 패버린거에요. 재산 안준다고. 그런데 걸려가지고 한사람은 집행유예 아들은 징역1년 6개월 받았어요. 어제 나왔어요.
이게 뭐냐? 주체 때문에 그래요 주체. 계속해서 내가 원하는 주체, 네가 성공하기를 원하고 부자되기를 원하는 그 주체가 나를 힘드는 거에요. 주체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이 뭘 바꾸느냐 하면은 타자를 바꿔. 타자를 바꿔가지고 나는 너하고 말고 다른 남자하고 새로 살래.
타자를 바꾸면 자기가 원하는 욕망을 충족하는 거에요. 이게 뭐냐? 이것이 바로 미완성된 인간의 현재 현주소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어떻습니까? 시므온한테 이런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전체가 뭐났어요? 죄로 규정받고 빵꾸나버렸어요. 빵꾸났다는 것은 없어지지 않고 주여 저는 이정도 밖에 안됩니다 하는 못난 놈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 이걸 누가했다? 시므온이 착해서 했어요? 누가 했어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왜 성령이 와야 되고 왜 우리 착함과 선함으로 백성 되지 못하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성령 받은 사람을 통해서 선배들을 통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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