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노선변경

아빠와 함께 2020. 7. 4. 13:55

강남-누가복음 2장 49절 (노선변경) 200616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2장 40절에서 52절까지 하겠습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점점 자라난다. 그 다음 구절은 12살 됐을 때의 일입니다. 절기를 맞아서 예루살렘에 부모와 같이 가게 됐는데 절기를 다 끝나고 난 뒤에 부모는 집으로 돌아왔지요. 하룻길을 걸어서 왔는데 한참 오다보니까 뭔가 빠진 분이 계시죠.


12살 먹은 예수님께서 빠져있었습니다. 화들짝 놀란 부모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명절날 유월절날 모였겠습니까. 무려 사흘 동안 허비하면서 찾았습니다. 사흘 동안 찾았는데 드디어 찾기는 찾았어요.


어디서 찾았느냐 하면 성전에 계시는 예수님을 찾았고 그 열두 살 먹은 아들 예수님을 만나고 부모들은 상당히 반가워했는데 반면에 예수님은 그 부모가 놀라는 것을 보고 도리어 의아해했지요. 그래서 대화 자체가 의미가 동일하지 않는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어떻게 너는 여기 있느냐? 라고 부모가 이야기했고 예수님 답변하기를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이상하게 여기십니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대화가 핀트가 안 맞는 거에요. 그러고 난 뒤에 같이 집에 내려와서 나사렛 동네에 다시 왔었습니다. 오고 난 뒤에 그 뒤에 52절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예루살렘이라는 동네가 여기 지중해가 있고 여기 갈릴리 호수가 있고 갈릴리 호수에 흐르는 물이 요단강 물이고 그 다음에 여기 사해가 있습니다. 사해는 갈릴리라는 호수보다 무려 10배나 더 큽니다. 10배 더 커요. 사해에서 갈릴리까지 100km쯤 되고 사해 여기 끝부분에 산으로 올라가는데 산이 있는데요 산 끝부분에 여기에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여기 예루살렘이 있어요.


여기가 갈릴리고 갈릴리 이쪽 동네를 가지고 나사렛이라고 이렇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나사렛 여기에 살았거든요. 태어나기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 여기 예루살렘의 남쪽의 8km 지점에 베들레헴이 있어요. 꼭 제가 가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제가 가봤습니다.


나사렛 동네에서 유월절 맞아서 무수한 사람들이 왔다가 다시 돌아가면서 예루살렘에서의 이 일이 12살쯤 되었던 그 때 일입니다. 이 본문에서 특정 지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부모의 혈연관계의 한계에서 벗어났다는 겁니다. 여기 40절에 보면 “예수님이 자라고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이렇게 시작했거든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지혜가 충족하다는 말은 부모하고 혈연관계가 이제는 결별수준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혜가 충족하다는 말은 혈연관계 쪽에 속하느냐 아니면 하나님 쪽에 속하느냐에 대해서 하나님 쪽에 속하는 인물로 뚜렷해졌다 분명해졌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첫 번째는 뭐냐 하면은 지혜의 충족, 지혜가 점점 더 커가는 것. 지혜가 충족된다는 말은 혈연관계의 한계점을 보여준다. 혈연관계의 한계점을 보여주는 겁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은 두 번째는 예수님이 부모를 찾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부모가 예수님을 찾았다. 부모가 먼저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이 부모 잃어버렸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았던 거에요.


예수님이 부모 없다고 서러워 찔찔 울거나 파출소에 연락하거나 그런 것 없었다는 겁니다. 부모 찾기 위해서 그렇게 아등바등 애를 쓰지 않았던 거에요. 이것은 바로 지혜가 자라나면서 예수님의 세계가 부모의 세계보다 더 우열하다, 더 크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세계가 부모의 세계보다 더 큰 거에요. 결코 예수님이 이런건 아니다 이 말이죠. 부모의 세계 안에 예수님이 종속되거나 속해 있지 않다 이런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부모의 세계의 단위가 이 단위가 있다면 예수님의 세계의 단위는 더 큰 단위, 이것은 상대적으로 부모의 세계는 작은 단위, 예수님은 큰 단위를 생각하는 거에요. 지혜가 자라나면서 예수님의 세계는 부모세계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더 증가하고 있어요.


특히 부모가 3일 동안 부모가 예수님과 떨어져있었거든요. 떨어져있는 사이에서 이 예수님한테는 부모는 없어요. 부모는 없는 존재에요. 그런데 3일 동안 떨어진 사이에서 부모한테는 아기예수가 12살 먹은 예수님이 계속해서 결핍된 자리를 메꿔야 된다고 생각한 그 세계를 부모는 고수하고 있습니다.


왜 내 세계에 너 하나 빠져서 나로 하여금 결핍을 느끼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네가 있어야 충족되는 이 세계에 네가 내 눈에 안보여서 빠져버리면 나는 결핍을 느낀다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전혀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부모를 부모로 생각도 안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우리 보기는 좀 되바라졌다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성경에서는 되바라진게 아니고 지혜가 충족됐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갈수록 지혜가 커졌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단위 또는 차원, 레벨. 인간 단위에서 주님이 그냥 신체적인 키만 몇 센치 더 큰 게 아니에요. 줄자 해가지고 애들 키 잴 때 이것만 하는게 아니고 우뚝 솟아버린 거에요.


인간들이 따라올 수 없는 인간세계에서 그냥 지붕에 빵구난 거에요. 그냥 뚫고 하늘까지 쭉 솟아올라간 거에요. 예수님이 갖고 있는 지혜가. 다시 한번 적을게요. 예수님에게 누가 없다? 부모는 없습니다. 없습니다. 몇일 동안? 3일 동안. 예수님에게 부모는 없는 거에요.


그러면 부모는 없다고 할 때에 이 부모는 어떤 관계냐 하면은 예수님을 어떻게 봤느냐 하면은 혈연관계로 봤지요. 핏줄관계로 봤다. 그냥 육의 관계 핏줄관계로 봤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지혜 앞에서 부모는 없다는 말은 이건 뭐냐 하면은 내가 없다에요. ‘내가 없다’. 앞에 뭐 하게 되면 나에게 내가 없다는 쪽으로 주님의 지혜가 가동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주님 저 여기 있습니다 할 때 주님은 너라고 하는 너는 너에게 없는 걸로 간주해요. 왜냐하면 나로 시작하는 그 어떤 것도 점점 내가 사라지기 때문에. 내가 없는 것은. 내가 없어져야 되는 것은 결국 끝에가서는 나의 끝지점에서는 나라고 여겼던 그저 꾸준히 나라고 여겼던 그 세월. 70이면 70, 80, 90, 100세.


결국은 내가 끝지점에 가면 내가 있어요? 없어요? 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없지요. 그래서 이걸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없다. 누가? 내가 없다. 나는 어차피 없는 거에요. 내가 아무리 시작해도 나라고 하는 것은 소실점을 갖는다. 또는 없음에 수렴된다. 사라진다 이 말이에요. 없어요.


서로가 남들 보기에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바라볼 수 있는 세월이 몇 년 되겠어요. 이웃집에 누가 산다. 나는 그 이웃집에 내가 있다. 둘이 바라보는 것이 40년 됐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까 이웃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한 15년 뒤에 나도 죽었다. 결국은 다른 장소에 제3자가 65년쯤 후에 가보니까 서로 이웃집 마주보던 그 두 사람 다 어디 갔습니까? 없지요.


서로 마주보면서 친하게 지내고 떡도 나누고 뭐 이렇게 사이좋게 지내는 두 사람 다 제3자가 보기에는 둘 다 그 현장에서는 65년 이후에 다 없어지는 거에요. 제3자도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고집부리는 것은 주님은 정말 참 웃기네 하시는 겁니다. 네가 있다니. 네가 어디 있지? 너는 없는 존재야.


보통 성경에서 내가 없다를 내가 없다고 표현하지 않고 네 이름은 없다 이렇게 합니다. 이 세상에 계속 가는 이름은 누구 이름밖에 없느냐 하면 주의 이름 밖에 없어요. 주의 이름만 있지 우리 이름은 없습니다. 내 이름을 걸고 이런 거 없어요.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이름과 상응되는 이름과 연결되는 어떤 몸체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들어오면 이름표를 달지요. 그런 노래도 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이름표를 붙여 내 가슴에. 이름표를 붙여봐. 그런 노래도 있잖아요. 네 가슴에 내 이름 들어가게 해라 이런 뜻이거든요. 확실한 사랑의 가사를 계속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이름은 그게 사라질 이름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영원한 이름이 따로 이렇게 찾아온 거에요. 그래서 뭐 이름이 있어야 내 이름으로 구원받지요. 이 세상에 그리스도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길이 없다. 부처? 없는데요. 공자? 없어요. 소크라테스? 없어요.


인간이 회상할 뿐이지 그 이름과 상응되는 존재는 어디 지금 가리봉동에 삽니까? 소크라테스가? 없잖아요. 없어질 이름은 없는 거에요. 그냥. 이순신 장군도 마찬가지고 윤동주도 마찬가지고 소위 뭐 김구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주님을 아는 사람은 본인이 없는 존재, 죽은 존재가 되는 거에요. 없는 존재가 되는 거에요. 어차피. 오늘 제목을 ‘어차피’ 할까?


어차피 없는 존재, 어차피 없어질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약간 앞당겨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내가 없는 존재라고 나 자신을 없다고 여긴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있다고 보겠습니까? 없다고 보겠습니까? 없다고 보는 거에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냥 뭐 귀신으로 보는 거에요.


왜냐하면 내가 나 자신을 뭉게구름 같은 귀신으로 본다면 인간은 내가 나를 보는 관점으로 내가 타인을 보게 되어 있어요. 내게 내가 없다면 너도 없는 거죠. 너도 없는 거에요. 어떤 남편이 막 술 먹고 와가지고 땡깡부리고 자기 아내한테 횡포질하면서 이렇게 할 때에 복음을 아는 아내의 적절한 조치와 태도는 너는 없어. 너는 없는 거야.


문 열어달라고 하면 실례지만 누구세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없는 존재기 때문에. 누구세요? 그러면 너무 없다고 한다면 그러면 여기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혼자 유월절 갔고 혼자 그 성전에서 성경도사들과 이야기했고 혼자 집에 돌아왔다 이렇게 돼야 되는데 여기에 왜 부모가 등장하느냐?


그것은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과 판단의 차이입니다. 사실과 판단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지식과 이해의 차이에요. 지식과 이해의 차이인데 지금 그 예수님이 부모를 보는 것, 예수님이 우리 자신을 보는 그 이해와 판단 그것은 우리가 모르죠. 모르는데 여기에 우리를 대표해서 누가 등장하느냐? 이 판단 자리에. 예수님의 부모가 등장해요.


부모가 등장해서 부모가 12살 먹은 자기 아들 예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판단을 할 게 아닙니까?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느냐. 내가 너 찾기 위해서 사흘 동안 헤맸다. 난 여태까지 네가 따라온 줄 알았더니만 하루 길 지나서보니까 안 따라와 가지고 다시 빠꾸해가지고 back 해가지고 예루살렘에 다시 왔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찾는다고 애먹었다라는 구구절절 이야기를 할 때 그거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부모가 갖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판단에서 나오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인간의 이해와 판단보다도 어디 있느냐 하면은 사실, 진리. 무엇이 실제냐에 관심이 있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가 아버지 집에 함께 있을 줄 몰랐습니까?” 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것이 예수님의 자신이 하는 행위가 사실이 사실대로 진리가 진리대로 마땅히 할 일을 내가 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그런데 이 부모의 판단과 그리고 예수님의 사실과의 딱 이 무대에서 만나고 보니까 이 성경 대목을 보는 모든 인간들은 누구를 이해하고 싶어요? 누구 편에 서고 싶습니까? 예수님의 말이 쌩뚱 맞고 너무나 낯설고 예수님의 저 발언을 어떻게 이해해야하지? understand해야 하지? 오히려 예수님께서 정말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거 같아요.


적어도 나이가 12살 먹고 지혜가 시근나고 경상도 말로 시근나고 철이나게 되면 어머님 아버님 죄송해요. 제가 잘못되었어요. 제가 제 생각만 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했는데 부모님 생각을 했더라면 걱정 끼쳐 드리는걸 미처 생각못했습니다 하면서 생각의 의자에 앉아가지고 아버님 어머님 잘못했어요. 절 때려주세요.


뭐 이렇게 해줘야 부모가 하는 생각의 편에 서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게 진짜 지혜가 자라는 거고 철이 나는 거고 나이가 12살이나 먹었으니까 시근있다고 생각하는데 12살 먹을수록 갈수록 이상하게 완전히 다른 길로 가는 거에요. 사춘기인가요? 어긋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제가 이미 답을 드렸어요.


뭐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한테는 인간은 없는 존재, 없음이에요. 부모가 결핍을 느껴서 있어야 되는데 있을게 없고 없는 것을 내가 전에 있었던 갈 때는 분명히 부모와 3명 올라갔는데 올 때, 일가친척 같이 갔겠지요. 오는데 보니까 뭔가 허전하더라 이 말이죠. 있음이 제대로 충족되지 못해서 그 있음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거꾸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찾으러 갔지만 예수님은 홀로 아버지 집에 있음으로 이미 충족된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부모들은 자기 이해에 근거해서 실제와 현실과 사실을 지식을 사실을 일방적으로 이렇게 결정짓고 있다는 거에요. 주님 생각은 전혀 주님 생각으로 건너가지를 못하고 있어요. 못 건너가고 있어요. 기존의 혈연관계에 있어서 줄곧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생각, 많은 사람이 같이 동의하는 생각 그게 옳고 진리인줄 알고 있었단 말이죠. 부모가.


그리고 그 진리 속에 예수님도 같이 동의가 되는 줄 알았죠. 왜? 내 자식이니까. 내가 키웠으니까. 아직 어린애니까. 동의 될 줄 알았죠. 예수님의 지혜가 총기가 더 자란다는 말은 그 생각이 무슨 의미인줄 몰랐던 겁니다. 전에보다 부모한테 더 효도하는 줄 알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부모한테 효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누가복음 2장 이 본문 어떻게 설명할거에요? 효자같은 소리하고 있네. 두 번 효자했으면 이제는 아버지 팔아먹겠다. 이게 무슨 효자에요? 아버지 걱정도 안하는데. 무슨 효자. 아버지를 없는 존재로 자기만 있으면 그만인데 이게 무슨 효자에요.


48절에 보겠습니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곧 때찌라도 할 태세에요. 맴매할거 같애요.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부모가 근심하는거 알 그 정도 철이 들 나이는 되었잖아. 지금 마리아가 예수님보고 나무라고 있는 중이에요.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엄마 아빠 집이 내 집입니까? 아니면 성전이 내 집입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과격하게 나옵니다. 내가 내 집에 와 있는데 지금 엄마 아빠 생각하는 집하고 내 집하고 달라요. 어머님. 마리아 같으면 아이야 네가 미쳤나? 갑자기 멀쩡하게 네 집 놔두고 여기 와서 네 집이라고 하느냐? 이렇게 되겠지요.


어차피 내가 태어난 것은 아버지 집에 거하는건데 내가 태어난 것은. 아들이 아버지 집에 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데 아버지 집에 가지마라 이런 식이에요. 참 이해가 안 될 예수님하고 아버지의 이 대화. 이 대화를 통해서 다시 40절에서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이 의미가 흔히 세상 살면서 자기 앞가림 자기가 한다 알아서 철났다 부모한테 효도한다 그런 윤리 도덕적 관점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러한 태도를 통해서 결국은 우리는 뭐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2장에 28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시므온은 현재 누구와 함께 있어요? 성령이 함께 있지요. 아 나 걱정했네. 누구와 함께 있어요 할 때 혼자 있잖아요 이렇게 나올까봐. 성령은 지금 성령 안 보인다고 빼고 이런 거 없기. 성령 안 보인다고. 성령은 어르신입니다. 이 어르신 화나게 하지 마세요. 성령이 함께 감동해 있다 이 말이죠.


자,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죠.


여기서 시므온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사람이 성령의 목표가 말씀에 이끌려서 살아간다는 것. 말씀에 이끌려서. 지금 시므온이 보고 있는게 뭐냐? 아기예수에요. 아기예수가 되면서 말씀에 이끌린다는 말은 그러면 잘 이해가 안 되고요. 이렇게 해야 이해하기가 쉬워요.


시므온과 뒤에 나오는 안나. 둘 다 공통점이 뭐냐 하면 노선변경. 제목을 이걸로 해야겠다. ‘노선변경’. 노선변경이 일어나는 겁니다. 노선변경. 노선변경.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부모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부모가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존재했으면 예수님 쪽에서 찾아야 돼요. 어?! 아버지 어디 가셨지? 내가 너무 모른척 했구나. 아버지! 아버지! 찾아야 되는데 지금 누가 찾느냐 하면은 예수님은 찾을 생각도 없어요. 없고 부모가 예수님을 찾아가도록 그렇게 현실이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이거는 예수님한테 부모는 있다? 없다? 없는 존재지요.


그러면 아기예수 앞에 시므온은 있다? 없다? 없는 존재에요. 내가 없어도 내 대신 누가 있으면 되는 노선, 그러한 인생, 그러한 노선이니까 way, 길이죠. ‘길’. 성령께서 가져다주는 뭐가 되느냐 하면 가져다주는 자리. ‘자리’. 자리가 중요해요 자리가. 지금 제가 의도적으로 뭐하고 뭘 구분하느냐 하면은 내 신체하고 내 몸하고 이 자리를 구분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들이 계시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여러분들의 자리에요. 그 자리가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육의 열차 자리 또는 객차, 육의 기관차, ktx, 육의 ktx에서 한 좌석들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 노선은 옛날 죽었던 조상들과 동일한 방향으로 가는 동일한 영역 안에 있어요.


그런데 시므온같은 사람은 선지자거든요. 구약의 선지자의 특징은 성신이 함께 있습니다. 성신이 구약의 선지지는 시므온과 함께 있을 때는 무엇과 무엇을 보게 하느냐 하면 기존의 현실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신체 또는 이 세상 이것만 보이는 그 세계에서 그걸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자리죠.


눈에 보이는 이 자리. 이 자리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 다른 말로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노선으로 옮겨타기를 선지자는 성신을 통해서 그걸 보여준 거에요. 옮겨타기를. 그 당시의 모세도 마찬가지고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옮겨타게 되면 얼굴 신체로 보게 되면 신체 몸이죠. 제가 강조하는 것은 신체가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자리죠.


몸이 자리를 깔고 앉은 거에요. 자리는 안보여요. 몸이 자리를 깔고 앉은 거에요. 자리는 안보이고 몸만 보이는 겁니다. 몸만 보이는 거에요. 결혼할 때 몸과 몸이 만나서 결혼하잖아요. 둘이 사랑한다고 만져봐야 그거는 자리를 만드는게 아니고 몸을 만지는 거에요. 몸을 만지는 것. 그런데 제가 강의할 때 이 두 몸은 나중에 어떻게 된다? 사라지지요.


주님께서는 인간들을 보고 너희들은 몇 년을 살든 100년을 살던 100년 살다 없어지는 그 몸은 주께서 신경도 안 써요. 왜냐하면 없어지고 난 뒤에 그 자리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 자리는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영원한 죄의 저주의 자리, 멸망의 자리에요. 지옥으로 통하는 자리다 이 말이죠. 자리를 보는 거에요. 육의 자리.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1,2,3,4,5,6에서 6이 아니고.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그 육은 육이고. 또 하나 더 붙일까요? 그 육은 육이고. 계속 육, 육, 육 같은 기관차에 1호실 2호실 8호 객차라도 앞에 다 달려 있잖아요. 그 육은 육이고 뒤돌아 이민 가봐야 육이고 어디 가도 육이고 독일가도 육이고 미국가도 육이고 전부다 육이에요. 북한가도 육이고. 북한에서 남한에 탈북해봐야 육이고 풍선 날려봐야 육이고.


성신께서 또는 신약의 성령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리가 육의 자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몸은 전혀 달라지지를 않았어요. 달라지지 않는데 뭐가 바뀌었어요? 성령을 통해서 자리가 바뀌었죠. 자리가. 그 자리가 바뀌었죠. 지금 아기예수가 딱 왔을 때 시므온이 뭘 봤느냐 하면 자기 자리를 본거에요 아기 예수한테. 이 자리 말고 저 자리.


왜냐하면 성령이 아니면 그걸 알 길이 없어요. 그냥 저 자리가 탐난다가 아니라 내 자리 아니라는 것부터 이야기해야 돼요. 이 자리는 아냐. 내 자리는 죽을 자리에요. 나를 파탄시킬 자리고 나는 지옥 갈 자리에요. 저는 지옥만 생각하면 그런 생각 드는데 우리가 어떤 분이 저한테 다음 주 예배하는데 기도 순서라고 참고적으로 기도문 한번 써달라고 해가지고 써줬어요. 누구라고 말은 안하겠습니다. 안하는데 다 알지요.


첫마디가 그거였어요. 난데없이 잘난 사람하고 못난 사람하고 관계없이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벌을 주십니까? 그게 첫 문장이에요. 신종코로나 이야기입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교회 가고 안가고 왜 단체로 벌을 주십니까 주님. 단체로 왜 벌을 주십니까?


그러니까 시므온도 마찬가지에요. 시므온이 오늘날 살아도 신종코로나 때문에 마스크해야 된다 이 말이죠. 이것은 개인적으로 얼마나 잘났느냐 훌륭했느냐 착실했느냐 경건했느냐 따지지를 않습니다. 제가 지옥 생각하면 그런 거에요. 뭐냐 하면은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 때문에 매를 맞아요. 매를 맞는다고요.


어떤 분은 하루 아프고, 죽으라고 아프고 또 하루는 깨끗해요. 그 다음날은 또 아파요. 이게 예외도 없이 그래요. 그 하루씩 건너뛰어서 하루는 죽으라고 아프고 하루는 또 걸어다녀요. 또 하루는 못 걸어 다녀 너무 아파가지고. 그런데 제가 그분한테 이런 이야기했어요. 하루쯤은 쉼을 주잖아.


하루쯤은 쉬는데 지옥가게 되면은요 사람이 매를 맞아도 60대 같으면 언제 위로되느냐 하면은 58대 맞을 때 위로가 돼요. 2대만 더 참으면 되잖아요. 아무리 매를 맞고 아무리 욥처럼 몸이 아파도 언제 끝날 때가 있어요 끝날 때. 그러니까 성도의 좋은 점은 뭐냐 하면은 죽음이 해방의 날이라는 거에요.


죽음이 무시무시한 날이 아니고 죽는 날이 군대생활 끝나는 개구리복 벗는 날. 제대하는 날이에요. 목사님 군대 갔다왔지요? 방위 아닌가? 군대 갔다왔지요? 군에서 제대할래요? 아니면 개인 독방에다가 냉방병 있다고 해가지고 개인적으로 우대 받을래요? 목사님 아버지가 신용 대기업 부회장 되가지고 아들이 공군부대 들어갔다고 합시다.


혼자서 특별대우받고 혼자서 군에서 특별대우받을래요? 안 그러면 제대할래요? 묻는 내가 나쁘지요. 군에 간 남자들의 소원이 있다면 맛있는 밥을 먹는다. 아닙니다. 잠을 푹 잔다. 아니에요. 뭐냐 하면은 빨리 제대하고 싶다가 희망이고 꿈입니다. 빨리 제대하고 싶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제대할 자리가 없어요. 안에서 해결해야 돼. 안에서.


착해야 되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라 난리도 아니에요. 나라에서 교회 오지 말라고 하니까 기어이 와가지고 할렐루야 하다가 다 걸리고 목사님부터 다 걸리고. 기어이 내 쪽에서 하지 아니하면 구원 없다. 내 쪽에서 하지 아니하면 구원 없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천국가도 자기 방석을 어떻게 합니까? 갖고 가요.


어느 바보가 식당가면서 집에 자기 깔고 있던 방석 들고 식당에 가는 사람 어디 있어요? 식당가면 식당 자리 따로 있잖아요. 자기 방석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바보 아니야? 진짜 오늘날 교회들이 바보같애. 버리고 가야하는데 이 땅에서 헌금한 것, 기도한 것, 선교한 것 전부다 다 버려야 돼요.


왜? 그 짓이 찬양한 것부터 다 버려야 되는데 왜 버려야 되는가? 사람이 그걸 하게 되면 자기가 한 것이 기억돼요. 기억이 어디에 들어가느냐 하면은 내 이름 창고에다 이게 누적되어요. 내가 한 멋있는 것 쌓이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기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못 바꿔요. 내 이름을 버리고 주의 이름을 못 찾아요.


주의 이름 찾으려면 주의 이름은 뭐만 소복히 들어있느냐 하면 피만 들어 있어요. 피만. 피만 들어 있어요. 참 이빨 두 개 뽑는데요 병원에서 두 시간만 꽉 물고 있으면 됩니다. 두 시간 믿었지요. 오후 1시에 가가지고 피가 멈춘 것이 밤 10시에 멈췄어요. 9시간 동안 계속 났어요. 엄청나게 나왔어요. 그래서 가가지고 피 계속 나오더라 하니까 염증이 많은 사람 피가 많이 나온다는 거에요. 그럼 진작에 이야기해주지.


예수 이름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키가 몇 센치고 몸무게가 얼마고 꿈에 예수님이 멀쩡한 인물로 수염 덥수룩하고 도포 입고 나왔다. 이게 예수가 아니라 그냥 피에요 ‘피’. 피와 물과 성령이 예수님이 나타났다는 증거입니다. 요한1서 5장이라고 제가 오늘 십자가 마을에 답변해놨지요. 질문 답변에. 예수 인물 훤하데~ 이런게 예수가 아니에요.


사람이 예수님을 신체로 보는 것은 내가 나를 평소에 나를 신체로 보고 그것이 있음, 예수님은 부모가 없음이 되는데 자기는 계속해서 있음을 고집하고 있는 거에요. 이 있음에다가 MSG 인가? 자꾸 종교적인 조미료를 치는 거에요. 있음을 멋있는 있음으로 만들기 위해서 계속 감미료를 계속 치는 거에요.


양념을 하고 요리를 하고 내가 보기에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계속 자기가 하는 거에요. 자기 역사가 이정도로 괜찮은 역사라는 것을 티내기 위해서 계속 해 온 겁니다. 그러나 계속 해봤자 그 안에 자기 이름을 버릴까요? 못 버릴까요? 자기 부인됩니까? 안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피 흘린 십자가라면 너도 나처럼 십자가 지고 피 흘리라 이 말이죠.


우리 인생을 압축기에 집어넣고 눌러버리면 나오는게 달랑 피에요. 피란 말이죠. 내 안에 해보니까 피가 나와요. 그게 내 이름이에요. 피가 내 이름이에요. 나중에 죽게 되면 나중에 화장터에 뭐가 남습니까? 가루가 남지요. 흙이죠. 그게 내 이름이에요. 또 흙에서 내 이름 찾는다고 찾아보세요. 내 이름 없어요. 그게 나에요. 나는 없음입니다. 나는 없음이에요.


괜히 마귀가 자꾸 있음으로 바꾸니까 기존의 있음에 대해서 미련이 남는 겁니다. 애착이 가는 거에요. 다른 있음하고 내 있음하고 자꾸 대조가 되고 비교가 되고 저 있음은 왜 저렇게 행복하고 잘 사는지. 애 낳고 해가지고 밤 되면 하하호호 뭐 재미난 일이 있는지 웃고. 그걸 창문으로 보면서 나는 둘이 앉아가지고 나는 뭐하는지.


남은 더 행복해 보이고 더 이상적으로 보이는 그런 것들이 보일 때 우리는 갑자기 자기 인생이 서글퍼지지요. 그러나 제대가 있잖아요. 제대. 제대 날짜가 다가오지 않습니까? 이 땅에 살면서 앞으로 어떤 매가 올지 몰라요. 매가 치고 한숨 넘어간다고 또 매가 안오는게 아니에요.


이 땅에서 때린 매도 매지만 죽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타작에 들어갑니다. 오죽했으면 타작마당이겠습니까? 오죽했으면 타작마당. 한번 상상해보세요. 앉아있는데 옆에 천사 있는데 천사 이름이 망나니라. 막걸리 한잔 먹고 와가지고 칼에다가 푸우~~~~.


칼에다 막걸리 뿌려놓고 혼자서 춤을 추는데 칼은 무거워가지고 춤을 추는데 그 망나니가 단칼에 베면 나는 속이 시원한데 이 망나니가 초짜가 되가지고 이게 아프기만 아프고 안 죽네. 아 이거 미치지요. 미치는 겁니다. 그 마당이 무슨 마당? 타작마당인데 타작마당에 대해서 그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렇게 망나니 나타나는게 아니고 위에서 밟는 걸로 되어있어요. 밟는 걸로.


지금 요근래 설교 강의에서 밟는 거 이야기 몇 번 하는지 모른다. 백인경찰이 흑인 그 전과 7범이거든요. 마약소지자고 도둑놈이고 경찰의 체포에 도망간 놈이고 성질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뻔히 알잖아요. 그런데 밟은 거에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요한계시록 17장인가 나오는 그게 뭐냐? 밟는데 어디까지 밟느냐? 피가 나올 때까지 터질 때까지 밟아버려요.


그걸 가지고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해서 포도를 포도주 틀에다가 위에서 짓밟아버리는 겁니다. 아야~아프네 살살하세요 소용없어요. 그냥 피가 나올 때까지 밟아버립니다. 죽으라고 밟아요 죽으라고 밟아버리죠. 신종 코로나같은 이것은 마스크 쓰면 좀 낫지 이건 그것도 아니에요. 그냥 밟아버려요. 지옥에 가장 지옥다운 것은 뭐냐 하면 더 이상 제대가 없다는 거에요.


요한계시록 14장이에요. 천사가 낫을 망나니 천사가 낫을 가지고 막걸리 하나 푸우~~뿌려놓고 땅에 휘둘러서 땅에 포도원을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도 이 틀을 밟으니.


자,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횡포를 그 가녀린 인간을 상대로 이렇게 횡포를 부리십니까? 왜 그렇게 하는 거에요? 그것은 인간은 원래 살다가 없어져야 할 존재인데 그 배후의 인간 배후의 악마가 자꾸 인간을 가지고 자꾸 깔짝깔짝 대들라고 인간을 앞장세워가지고 예수님 십자가 복음을 모욕했거든요. 귀싸대기 때렸지요 옷 벗겼지요.


그럴 때 그 로마 군병이나 그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뭐로 보겠습니까? 나 여기 있음으로 보겠지요.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 2장에서 시므온과 안나는 어떻게 자기를 어떻게 봅니까? 나에 대한 생각은 없어요. 내가 이만큼 신앙생활 했습니다.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뭐만 보입니까? 아기예수 보는 순간 자신의 근본적인 뿌리요 자리가 되는 거에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놓는 것을 성령께서 하게 해주시니 이제 내 종의 마음을 편안히가 아니고 이게 좀 길어야 돼요. 편안~~~~~~~~히. ‘안’ 하고 ‘히’ 하고 좀 많이 떨어져야 돼요.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는군요. 이제는 내 이름으로 살지 않고 누구 이름으로 산다? 주의 이름으로 아기예수 이름으로 오는 거에요.


아기예수는 아직 아기이기 때문에 12살도 안됐고 33살도 안됐잖아요. 하지만 안됐어도 이미 시므온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완료된 상태를 보는 거에요. 완료된 다 이루었다를 볼 수 있는 거에요. 시므온이. 만약에 시므온이 예수님을 몰랐다면 자기 쪽에서 있음이잖아요. 자기가 있지요. 신체가 있지요.


자기는 모르고 자기는 누군지 모르고. 내가 여기 있다. 내 몸뚱아리가 있다. 손, 발이 있다. 이 손, 발 가지고 뭐하겠어요? 기도도 할 것이고 전도할 것이고 예배할 것이고 헌금할 것이고 뭐 하겠지요. 선한 일을 하겠지요. 사지가 멀쩡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가지고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옮겨갈 수 있습니까?


아기예수가 딱 등장하니까 히브리서 10장의 말씀처럼 모든 율법을 이루는 것은 누가 전문가다? 누구 몫이다? 책에 기록된 대로 이루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두 분 보냈습니까? 세 분 보냈습니까? 네 분 보냈어요? 누굴 보냈어요? 단 한명을 보냈어요. 단 한명을 보냈어요.


단 한분으로 충분해요. 만번의 제사, 천번의 대제사장의 제사보다도 양의 제사보다도 오직 한분으로 충분하다 이 말이죠. 이걸 성령을 통해서 시므온과 안나는 알았던 거에요. 안나같은 경우에 과부된 지 84년 그 세월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어차피 그 세월이야 내 있음을 보여주는 세월이기 때문에 항상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걱정할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러나 아기예수를 딱 보는 순간 내가 어떤 존재고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상관없이 그냥 이미 주님의 자리로 건너간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시므온이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에요. 한가지 더 있어요. 지금까지 시므온이 이 성전에서 여기에 보면 26절에 보면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를 볼 때까지 계속 왔던 그 모든 작업은 자기 작업이 아니고 아기예수 그 자리에서 스케줄, 그 자리에서 시행된 인생으로 살아온 겁니다. 아기예수를 만나고 성령을 만나고 아기예수를 만나보니까 소급해서 지난날의 모든 것이 내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 됩니까? 주의 일이 되는 거에요.


주의 일이 된다는 것은 주를 증거하기 위한 일을 주의 일이라고 해요. 나를 증거하는 일은 무슨 일이죠? 너무 쉬운 질문인가. 나를 증거, 나 이 정도야를 증거 하는 것이 나의 일이고 찬양하든 뭐든 마찬가지에요.


나를 증거하면 나의 일이고 주님 증거하면 주의 일인데 주님 앞에서 나는 나를 보고 편안히 놓아주는게 아니고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더 이상 나 같은 것은 결국은 내가 사라져야 된다는 것이 제대를 해야 된다는 것이 이게 주의 계획 잡힌 일이라는 사실을 하게 되는 거에요. 아 내가 그런 행동하는게 아닌데 그 짓을 내가 하다니 그 추잡하고 더러운 짓을. 이런 생각은 아직까지 자기 자리를 자기가 붙들려고 하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제일 힘든 것이 뭐냐? 내 몸 아픈 것도 힘든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남을 대하는 일이 제일 힘들어요. 남을 대하는 일. 집에 누구 손님 온다고 해보세요. 갑자기 스트레스 받지요. 스트레스 받는다고요. 남을 대하는게 제일 힘들어요.


지금 오늘 본문에서도 부모가 12살 먹은 아이 예수님을 편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예수님이 키가 크고 성전에서 말도 안하고 혼자서 행동할 때 부모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타인이 내 속에 들어오는 것이 정말 이게 힘든 일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이건 뭐냐 하면은 뭐를 전제로 하느냐 하면은 나의 파괴를 전제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의 파괴를.


탤런트에 김일우라는 탤런트가 있어요. 1963년생 58. 만으로 57인데 이 사람이 결혼을 하겠다 하는 나이가 언제냐 하면은 서른 몇 살 때부터 결혼한다고 했어요. 아직 총각이거든요. 이 사람 얼굴을 내가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옛날에 박사교회에 있을 때 거기 하양에 목사 얼굴하고 똑같이 생겨가지고 내가 기억하는데.


그 사람이 58인데도 아직 결혼하고 싶다는 거에요. 그러면 결혼하고 싶은데 왜 결혼을 못했느냐? 결혼을 안 한게 아니고 늘 보지요. 저 사람은 이래서 안돼. 혼자 생각하는 거에요. 누구랑 선보는게 아니고. 저 사람은 아 저 사람은 저래서 안돼. 저 여자는 저래서 안돼. 계속해서 뭐가 안된다 안된다 하는 거에요.


그런데 뭐가 안된다 안된다 하는 순간 본인이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은 내가 어떤 인간인 것을 알아가는 순간이기도 한 것을 본인이 알아들어요. 본인이 얼마나 까다로운 인간인지를 타인을 만나면서 아는 거에요. 아 나 저 인간 안돼. 아 저 사람은 여자가 너무 방송에 나오는데 교만해서 안돼. 이런 것.


저 사람은 몸이 너무 튼튼해서 안돼. 저 사람은 몸이 약해서 안돼. 저 사람은 친정에 식구가 많아서 안돼. 저 여자는 너무 돈 너무 밝혀가지고 자칫하면 김구라처럼 돈 다 날릴 수가 있어. 저 여자는 또 사업을 너무 크게 해가지고 송대관처럼 마누라 500억 날라갈 수가 있어.


그러니까 도대체 내가 어떤 여자를 원하냐는 것은 곧 내가 누구냐를 아는 거에요. 그러면 평생을 살아가면서 뭐냐? 인간은 자기를 발견하는 시간이 인간입니다. 아직 결혼 안했어요.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2장 49절 (노선변경) 200616b-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아기예수죠. 바라볼 수 있는 것. 부모가 아기예수를 그냥 자기가 바라보는 대로 이해했죠. 그 이해하는 것. 이것을 뭐냐 하면은 인위적이다. 인위적이다.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인위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에요.


내가 안 봐도 내 옆에 있는 친척이 봐도 누가 봐도 아기예수는 내 아들이다. 지금 누가 봐도 아기예수는 빠져있다. 그러니까 빨리 아기예수를 찾아가자. 친척들도 같이 간지 안 간지 모르지만 같이 와가지고 찾을 수 있을 거다 이 말이죠. 친척들과 만약에 그 예수님의 부모와 예수님 빼놓고 다른 가까운 이웃사람과 대화할 때에 전혀 문제를 느낍니까? 느끼지 않습니까? 전혀 문제를 느끼지 않지요.


그런데 이것이 인위적인 이것을 뭘로 보느냐 하면은 주님께서는 이걸 환상으로 봐요. 환상으로. 이 환상을 뭐라고 하느냐 이데올로기라고 해요. ‘이데올로기’. 우리말로 하면 이념, 관념. 이 말은 인간이 이념을 가진다 관념을 가진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미 확보된 이념이 자기에게 덮쳐져있다. 덮쳐져있는 거에요.


모든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국가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이념이 다 덮쳐져있어요. 이념 중에서 가장 거대 이념이 뭐냐 하면 거대 이념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천국 지옥까지 포괄한 이념을 가지고 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 ‘종교’.


그런데 이 이념 또는 이 환상 이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는 이유는 이미 친숙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념이 녹아져 들어간 겁니다. 환상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뭐가 되느냐 허구가 돼요. 허구. 허구체제, 허탕체제. 환상은 허구다 이 말이죠.


뭐가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럽느냐 하면 이 허구가 벗겨지게 되면 그건 고통이 되는 겁니다. 왜? 평생을 친하게 지냈으니까. 평생을 그 체제 가운데 그 이념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다른 이념이 왔을 때는 난감하기 짝이 없어요. 황당하고. 격렬하게 반발하고 반항하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이념과 무엇과 결부시키느냐 하면 이념과 환상 또는 허구 다 같은 말이에요. 이념과 환상 이 테두리 친숙하고 안전해 보이는 안전빵이죠. 안전해 보이고 아까와같이 이웃끼리 서로 통할 때 말이 통하고 언어가 통하는 그 사이에 내가 벗어나면 남는게 뭐냐 하면은 너는 죽는다가 돼요.


그래서 예수님 아기예수님께서 또는 예수님께서 하는 것은 이념을 벗기 위해서는 이념의 제일 가장자리 인간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그 죽음의 자리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버립니다. 마치 아사셀 양을 광야에 보내듯이. 끝까지 가봐라. 사람들이 저기 가면 지옥이 있다는데 그래! 그 지옥에 먼저 가봐라. 과연 지옥이 있는지 아니면 과연 천국이 있는지.


인간들이 이쪽 세계에서 세트장 같은 이쪽세계에서 옹기종기 서로 끌어안고 절대로 이 바깥을 넘으면 안돼 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다짐의 다짐을 하고 교육에 교육을 시켰습니다. 이 이념을 인간들에게 주입시키고 실어나르는 그 도구가 뭐냐? 그 수단이 뭐냐? 전달매체가 뭐냐? 이게 바로 언어라는 겁니다. 말이라는 거에요. ‘말’.


모든 말은 개념이 이게 허구에 실려서 말이 전달되게 되어있어요. 이 언어 중에서 제일 그럴싸하게 보이는 언어가 뭐냐? 헬라어 히브리어 아람어에요. 성경언어라 하니까. 허구에 빠져 있는 인간이 성경을 원어로 분석한다? 그러면 그게 실제 환상의 세계에서 구조에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어요?


벗어나기는 커녕 오히려 더 확실히 하지요. 나 원어로까지 아니까. 구약은 히브리어고 신약은 헬라어까지 내가 파악할 줄 아니까 더욱 확실의 확실, 다짐의 다짐을 하는 거에요. 얼마 전에 서울의 어느 동에서 그 어떤 조그만 모임이 있었다는데 그 모임에 있었다가 코로나 걸린 사람가운데서 목사도 있었다는데 신부도 있다는 거에요.


어?! 목사도 있고 신부도 있고 도대체 뭐하는 뭐했던 장소였지? 하고 보니까 원어 연구하는 원어성경 연구하는 단체 되가지고 교인들한테 이거 써먹어가지고 유식한 척 할라고 써먹으려고 모였던 모양이죠. 언어를 파면 그게 허구에서 벗어난 다른 세계가 있을 줄 알고 있는 거에요.


그러나 다른 세계에 가버리면 고통스럽습니다. 이거는 인간 힘으로는 견딜 수 없는 세계에요. 그게 십자가 가는 세계, 십자가 속의 세계, 그게 좁은 길이에요. 인간의 힘으로는 갈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나 12제자나 그 사람들은 어떻게 그 길을 가게 되었는가?


이 뽑을 때는 그냥 뽑으면 못 견뎌요. 특히 이 뽑을 때도 아프지만 빼기 시작할 때 쫙쫙 갈라질 때 더 아프죠. 이 뽑을 때 그냥 뽑으면 안 되겠지요. 그럼 정신없이 뽑을려면 뭘 해야됩니까? 마취제를 놓는 거에요. 마취제를 꾹 놔버립니다. 요새는 마취제도 모자라요. 수면, 그냥 수면내시경 비슷해가지고 잠자고 나면 끝났어요 이런 거. 그런 것 한답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한테 아플거 같으니까 전에 너무 아팠거든요. 그래서 해달라고 하니까 그건 애들한테 해준다고 어른한테는 안 해준다고. 참 어린아이같이 되야 되겠구나. 마취라 하는 것은 일단 프로포폴 있잖아요. 프로포폴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그 순간만큼은 단절이 일어나는 의식의 단절이 일어나요. 죽었던 거에요. 죽은 거에요.


물론 어떤 사람은 프로포폴 좀 잘못 처방해가지고 이런 예가 있답니다. 분명히 마취된 줄 알았는데 마취 덜 되가지고 의사가 환자 욕하는걸 다 들었답니다. 완전한 프로포폴에 들어가버리면 나중에 수면내시경하면 처음에 있던 장소가 아니라 엉뚱한 장소에 침대가 이동해가지고 옆방에 와있어요. 회복실에 와있다고요.


나중에 깨보니까 천국이라. 완전 거저먹었어. 구원 거저먹은 거에요. 구원 거저먹었어요. 주께서 성령으로 죽여 놓고 깨보니까 천국이라. 물론 단순히 구원받는다면 죽여 놓고 천국 가겠지만 주님께서는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 증거하는 사명이 우선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사명이 우선이거든요.


이미 마르다, 마리아 오빠 이름 뭐지요? 나사로죠. 나사로가 구원이 목적 같으면 나흘만에 되살아나지 않았어요. 이미 제대했는데 왜 갑니까? 이미 향토예비군 됐는데 왜 오겠어요. 누이동생 때문에 다시 재통보 받은 거에요. 군대생활 두 번 한 겁니다. 진짜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복음이 먼저이고 우리는 나중이에요. 복음으로 이끌림을 받는 거에요. 복음 때문에 우리가 있는 거에요. 복음 때문에.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사는 이유, 내가 사는 이유가 이 복음 때문에 있는 겁니다. 성도에게 제일 큰 복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게 아니에요. 이 땅에 태어났을 때 태어난 이유, 사는 이유를 알게 된 것. 그것도 확정된 거에요.


이거 알다가 이건 모르고 이게 아니고 이거는 죽을 때까지 확정된 이유를 미리 챙긴게 제일 큰 복입니다. 사는 이유가 있어요. 그거는 뭐냐? 복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 증거 하기 위해서 사는 거에요. 이 사명이 이 복음이 얼마나 대단한지요. 내가 죽는 것보다 내가 천당 가는 것보다 내가 지옥 안가고 천당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 이 문제가.


이거는 개인 이기주의적 구원하고 구원을 뛰어넘어요. 나 구원받았다를 뛰어넘는다고요.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나 구원받는게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까지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복음이 살아있기에 내가 살아있는 거에요. 내가 살 복음 덕을 보자는게 아니라 복음이 먼저 살아있고 먼저 있는 그 복음을 위해서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그 말씀에 이끌리는 또는 복음에 이끌리는 삶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왜 제대를 하지 않고 있고 왜 이 세상은 지금 이대로 돌아가야 되는가? 바로 그 가운데서 예수님이 살아오던 삶을 재탕하게 돼요. ‘재탕’. 재연하는 겁니다. 그걸 예수님의 영인 성령께서 그걸 일부러 시켜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주께서 시켜서 하는 거에요.


어떤 분이 발을 다쳤다는 거에요. 발을 다쳤다. 그런데 그러면 우리 향미집사님이 막 주여 오늘 발 다치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까? 주여 발 다치게 하옵소서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지요. 인위적이 아니지요? 지금 제가 인위적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위적이 아니고 뭐냐 하면 인위적의 반대말이 비인위적이 되거든요. ‘비인위적’.


지금 성도가 자기를 증거하려면 인위적이에요. 그러나 주님을 증거하려면 모든 인위적인 것을 다 제껴보자 이 말이죠. 다 옆에다가 하나하나 찾아가지고 따로 한번 놔보자. 남는게 뭐가 있어야 돼요. 남는게. 그게 시므온 같은 경우에는 뭡니까? 아기예수가 남아요. 세상에 이 아기예수는 비인위적이에요. 생각도 못했습니다. 쌩뚱맞게 온 거에요.


그리고 누가복음 2장 초반에 광야에서 들판에 양치는 목동에서 비인위적인게 뭡니까? 누가 나타났어요 그 현장에? 천사가 나타났지요. 천사가. 천사는 엔젤이죠. 엔젤들이 나타났어요 천사가. 천사가 나타나서 이야기하는 이거는 비인위적이에요. 세상에 인위적이 아니고 비인위적인 천사가 나타났는데 이 찬스를 놓치지 않고 목동이 와가지고 천사님 최저생계비 좀 올려 달라고 주님한테 얘기해주세요. 이러지 않지요.


왜냐하면 최저생계비 해가지고 살기 힘듭니다 하는 것은 어느 계통이냐 하면 인위적 계통에서 나온 거에요. 인위적 계통에서. 우리 엄마가 몸이 아픈데 기도해서 이게 전부다 인위적에서 온 거에요. 인위적인 것을 다 제껴버리고 비인위적인 것이 있어줘야 이게 성령 받은 티를 내는 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조작된 거고 흉내내기고 연출한 겁니다. 연기하고 있는 거에요.


성령 안받아보니까 너무 답답해서 뭔가 하고자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게 되게 되면 시므온같은 경우에는 또는 안나도 마찬가지지만 만약에 시므온이 안나가 만약에 커피집에 가서 커피에 빨대는 꽂는다면 커피, 아기예수 여기만 빨대를 꽂지요.


다시 말해서 모든 내가 사는 이유와 방향과 목표와 목적은 오직 예수님에게 정향되어져요. 정향. 방향지어져있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시므온에게 일을 시킬거고 과거도 시켰고 앞으로도 시킬거고 죽을 때까지 시킬거고 주로부터 시작한 일이 이게 뭐냐 하면은 지시로 주어져요. 이게 뭐냐 하면은 비인위적이죠. 비인위적이라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비인위적이 딱 왔을 때는 이로 인하여서 모든 인위적인 것은 무의미로 날라가버려요.


그럼 인위적인 것과 뭐와 결부되어 있느냐 하면은 자기의 역사, 자기의 과거 역사와 관련되어 있어요. 인위적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은 말씀에 이끌려야 되는데 우리는 자신의 과거에 끌려가는 거죠. 과거에 끌려가는 그 과거가 뭐냐?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이데올로기 이념이라는 환상 또는 허구에 친숙한 허구에 그 안에 우리가 놓여서 그것이 굉장히 친숙하니까 친숙하다는 것은 편안하다는 뜻이거든요. 몸이 편하고 자연스러워지고 뭐 그런 겁니다. 그런데 그 이념이라고 하는 것은 전달하는 그 수단이 뭐라고 했습니까? 말 또는 언어라고 했지요.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한 것 같은데 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그런 강의했는지 강원도 할머니가 감자 캐고 있는데 아들이 와가지고 프로야구 이야기했다는 이야기, 여기서 했습니까? 할머니 할머니~ 하고 다급하게 왔다 이 말이지요. 그럼 왜 왔느냐? 드디어 한화가 18연패에서 벗어났어요.


좋아하고 또는 뭐 내가 응원하는 우리나라 축구팀이 일본한테 졌어요. 예를 들어 졌어요 했을때에 할머니가 해야 될 말의 정답은 뭐냐 하면은 쓸데없이 야구 축구 네가 왜 알았느냐? 그걸 안게 문제다. 뭐든지 알면 이게 아는게 언어가 돼요. 관심사가 되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골프에 관심이 있다. 그러면 골프대회에 관심이 있겠지요. 만약에 여러분이 바둑을 둔다. 바둑을 두게 되면 바둑대회에 관심이 있을 겁니다. 바둑대회도 국내 바둑대회는 별 관심이 없지요. 그러나 중국 사람하고 바둑을 둔다. 그 바둑 두는 것도 그 한판 결승 한판이 3억. 우승하면 3억 준다 3억. 그러면 바둑 두는 팬들은 지금 거기 신경 쓰는 거에요.


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어떤 산부인과 의사가 바둑을 너무 좋아하는 거에요. 환자가 지금 애기가 나올려고 하는데 막 나올려고 하는데 애 받을 생각은 안하고 지금 바둑 누가 이겼는가 보다가 귀싸대기 얻어맞았답니다. 남편한테. 그 환자 남편한테. 애를 봐야하는데 지금 바둑 누가 이겼는지 궁금한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새로운 이념이 나를 덮치는 겁니다. 이걸 이제 알튀세르라는 철학자가 있는데요. 여러분 이건 상식이니까 상식적으로 알아두세요. 두 사람만 이야기할게요. 간단하게 이야기 할게요. 한사람은 마르크스와 알튀세르라는 사람이 있어요.


있는데 마르크스는 뭐냐 하면 이 이념이라는 것은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종교고 철학이고 국가라고 해도 밥먹고 살아야 한다 이게 중요하다. 노동해서 직업을 얻어서 직장을 얻어서 노동해야 돈 생기고 돈 생겨야 단백질 탄수화물 양식이죠. 양식을 얻어먹어야 내가 산다 이것이 기본적인 구조, 기본적인 경제다.


경제에서 인간은 모든 역사는 모든 가치는 여기서 나온다. 배부를 때는 예수니 종교니 국가니 뭐 정치하지만 배고프면 하루 일하고 하루 벌기 바쁜 사람한테 정치고 종교고 이런 것 관심 하나도 없다. 이게 딱 완전 찐이야. 이게 현실이야. 다른거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마. 이것보다 더 확실하고 찌릿찌릿한 현실은 없어.


모든 종교 모든 단체 모든 명분, 어디 명분 찾아? 명분이 어디 있어. 명분 캐보면 전부다 뭐 때문에 삽니까? 돈 벌기 위한 명분. 돈을 벌기 위해서 위안부가지고 위안부 단체도 만들고 이렇게 정의기업연대. 전부다 돈 때문에 움직인다 이게 마르크스의 이야기에요. 그래서 골고루 잘 먹고 잘 살면 인간은 행복하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행복한게 뭐냐? 양식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거에요. 양식만 있으면. 짐승도 아니고. 쌀밥에 육개장 소고기국만 있으면 잘 사는게 북한의 이데올로기에요. 이 밥에 쌀밥만 있으면 여기에 이제 물론 옥류관 냉면 한 그릇까지 더 있으면 좋겠지요.


알튀세르는 뭐라고 하느냐. 사람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환상이 있다. 다른 환상이 뭐냐 하면은 나 이뻐? 우리 바둑 중국한테 이겼어? 우리 축구 잘해? 내 연고지의 야구는 또 이긴거야? 예쁜 가방? 이런게 있어줘야 사람은 산다는 거에요. 이런게 있어줘야.


예를 들어서 연금 타는 모델이 뉴욕에 고급 아파트 살다가 자살했다. 왜 자살했느냐? 내가 옛날처럼 잘 나가는 모델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서러워서 죽어버렸지요. 서러워서. 자기의 살아온 명예 이거 없으면 죽어버리는 거에요. 종교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알튀세르는 이걸 가지고 하나하나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심급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마르크스는 돈만 있으면 된다. 알튀세르는 돈만 있는게 아니고 각자 자기가 살아온 취향이 있는데 그 취향이 하나의 여러 가지의 이념들 한 개의 이념이 아니고 다수의 이념들에 둘러싸여서 산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비록 돈은 없더라도 마지막 캔버스에다가 그림을 그리는 거에요. 심지어 정신나가가지고 자기 귀를 베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정신을 그냥 캔버스에다가 뭉뚝한 유화로 찍어바르듯이 불타는 자기의 신념을 터트려야 되는 거에요. 누구에요 이게. 빈센트 반 고흐 아닙니까. starry starry night~~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자살했잖아요. 뭐 자살설도 있고 누가 죽였다는 소리도 있지만 자살했다 이 말이죠. 왜 자살합니까? 여러 가지 환상이 있는데 몇 가지 환상이 없으니까 환상이 없으면 누가 아니다? 내가 아닌 거에요. 결국 인간은 뭐냐 하면은 종교를 믿든 예수님을 믿든 결국 종착점은 뭐냐 하면은 나, 내가 의미의 최종 종착점이 나예요. ‘나’. 모든게 나 때문에 있는 거에요.


그 나의 집합체. 나의 집합체. 나나나나나. 이 나. 이 나에서 주님께서 다 나를 거부하니까 이 나가 벌떼같이 해가지고 예수님을 죽여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죽여버렸어요. ‘나’가 예수님을 죽여버린거에요. 낭떠러지에 밀은거에요. 내가 제일 가기 싫은 곳. 지옥, 저주가 있는 곳, 죽음이 있는 곳에. 너나 가라 해가지고 예수님을 떠밀었다 이 말이죠.


떠밀어보니까 이게 뭐였느냐. 이게 바로 환상이었고 인간은 허구였습니다. 예수님의 환상, 허구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께서 인간이 쓰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을 인간들이 아는 개념, 이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따로 떨어진 개념이 아니고 전체 개념과 서로 거미줄처럼 섞여있어요.


그래서 어떤 개념에서 개념들은 항상 다른 개념으로 바꿔치기 교체가 가능해요. 너 나 사랑한다. 사랑하나? 에이 질린다. 그럼 말 바꿀게. 좋아한다. 좋아한다 말 말고 다른 거 없나? 내 모든 것 다 드릴게. 그거 괜찮네. 이처럼 같은 말이라도 계속 말을 바꿀 수 있다는 옆에 것과 교체되는 거에요. 끊임없이.


교체되고 모든 단어는 전부다 이게 하나의 정확하게 그 실체를 못 끄집어내요. 전부다 은유고 환유입니다.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아요. 비유.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그걸 사용했잖아요. 하늘나라를 설명하는데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아무 소리도 안하고 인간의 나라의 언어를 이야기하면서 못 알아듣게 하는 겁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하면서 뭐를 하느냐. 먼저 전제를 하지요. 네가 듣기는 들어도 못 알아들을건데. 내가 이야기할 때 너 못 알아들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위해서 내가 비유로 이야기한다 하면서 농부가 씨 뿌리는 이야기하니까 듣는 사람은 분명히 이거 다 아는 이야기잖아요. 농사 안 지어봐도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씨를 뿌리는데 뭐 바위에 던졌고 길 위에 던졌고 가시밭에 던졌고 어떻게 어떻게 했는데 나중에 옥토에 던져 수확을 이루었다. 그거 모르는 사람 누가 있어요? 그거 모르는 사람 있는데 모르겠는 거에요. 도대체.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환상을 환상에 갇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써 주님께서 이 성경책을 준거에요. 이 성경책의 글자를 준거에요. 이거는 어제 대구강의에서 했어요.


성경을 준 것은 여기서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겨냥해서 준건데 성경책을 보는 100이면 100 전부다 뭘 보느냐 하면은 자기 천당 갈려고 성경책을 보는 거에요. 자기 복 받을려고. ‘나’ 라는 자체가 환상 속에 있는데요. 이미 이념에 친숙하고 이념의 한 덩어리처럼 움직이거든요.


그래서 세례 요한도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외칠 때에 너 누구냐라고 환상 이데올로기에 속에 있는 단어 속에서 너는 누구냐? 너라는 단어를 끄집어내서 너는 누구인가? 문장을 만들어가지고 너는 무엇인가?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너는 누구시냐 라는 말을 내가 묻는 저의에서 대해서 너는 세례 요한 너는 알겠지? 우리 다같이 인간이니까 알겠지 라고 했을 때 세례요한의 답변은 그들이 모르는 식으로 답변했어요.


나는 외침이다. 다른 말로 나는 비명이다. 점잖게 말해서 나는 소리다. 이것이 나에게서 난 소리가 아니에요. 나에게서 난 소리가 아니고 권투하는 사람들 취취취~ 이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고 다 이야기하잖아요. 가만있으면 되는데 취취취~~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입에서 소리 막 하잖아요.


이건 어디서 나온 소리냐 하면은 나보다 앞서 계신 분, 내가 있기 전에 계신 분의 소리인데 지금 그 분은 나보다 뒤에 나타나는 식으로 앞섬을 표현한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와 진짜 어려워요. 나보다 앞서면 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야 되는데 반대로 세례 요한이 6개월 먼저 태어났어요. 이 말은 6개월 먼저 태어났으니까 누가 봐도 세례 요한이 선배고 예수님은 후배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은 너희들의 환상 이데올로기라는 환상, 시간이라는 환상, 그리고 시간을 논하는 그 언어의 환상에 빠져놓으니까 실제가 안 보이는 거에요. 제가 첫째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무엇과 무엇 사실 그다음에 뭡니까? 판단. 그 판단이 엉터리 판단이에요. 우리의 모든 판단이. 이념에 환상에 빠져있는 판단. 인간들 판단은 서로 통하는 판단이죠.


서로 통해서 한통속을 이루었기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에 죽었는데 어느 누구도 말릴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제자들까지. 아무도 못 말렸습니다. 왜? 전부다 이쪽은 다 한통속이기 때문에. 한통속이 된다는 말은 납득이 된다는 말이죠. 납득이. 예수님께서 그렇게 대들은 것은 죽을만해서 죽는다. 죽는 것은 하등 이상한게 아니야. 왜 세상 권력에다가 대드느냐. 대들면 죽지 하잖아요.


자, 세상 권력에 대들면 죽지요. 그렇잖아요. 여기서 이 점을 알아야 돼요. 제가 한번 물어보겠어요.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둘 중에 어느 것이 맞는가 보세요. 내가 동의할 때 권력이다. 두 번째는 내가 동의하지 않아도 권력이다. 몇 번입니까? 2번이 정답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소위 헌법을 따지고 법을 따지면서 마치 내가 동의한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사법체제 대한민국이 내가 동의한 것처럼 착각들을 하고 있어요. 착각들을 하고 있다고요. 심지어 부모 자식관계도 마찬가지에요. 이럴려면 엄마 왜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나를 태어나게 하지 말지 왜 태어나게 해가지고 나한테 그렇게 섭섭한 소리합니까?


“나가라!” “나갈 거 같으면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지금 자식이 뭐를 착각하고 있느냐 하면은 태어남에 대해서 마치 자기가 동의를 받고 태어난 것처럼 순간적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순간적인지 본인의 이념인지 모르겠습니다만은. 동의라는 것이 없어요. 동의 없음. 동의없음이라는 다른 말로 예속됨에서 못 벗어남. 예속됨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것을 구약에서 보여주는 것이 뭐냐 하면은 바로 요셉에 의해서 애굽 나라 강해졌고 요셉의 후예들이 어디 갔습니까? 애굽 나라에 살았지요. 그런데 출애굽기 1장에 보면 요셉을 모르는 바로 왕이 등장하면서 핍박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인들이 자기가 원해서 동의해서 애굽에 내려갔습니까? 아니면 자기 이전의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그냥 애굽에 살던 거에요? 애굽 나라에 살았지요. 부강한 나라에. 그래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불어났거든요. 60만, 남자만 60만 불어났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구원이 뭐냐 하면 이미 예속되었다는 말은 이미 사고방식도 거기서 이 범위 내에서 벗어난 사고방식은 있을 리가 없는 거에요. 있을 수가 없어요. 이걸 에베소서 5장에서는 이걸 잠잔다 이렇게 해요. 죽었다. 죽은 거에요. 죽은 세상에 같이 죽어있는 거에요.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벌어진게 구원이에요. 내가 꿈꾸는 구원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건 또 하나의 조작이고 환상이고 속임수에요 그게. 이 환상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을 내가 주인공으로 다 바꿔놨어요. 개념을. 권력이 없으면서도 마치 권력이 있는 것처럼. 권력을 내가 행사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거에요.


북한의 김정은 밑에 있던 그 부하들 있잖아요. 훈장을 무겁게 달고 옷이 축축 늘어지도록 무겁게 달고 36살 37살 먹은 애한테 막 비비면서 신천지도 그런 신천지가 없지요. 세상에 이만희는 좀 늙어서 보기 덜 꼴사납지만 이건 젊단 말이죠. 젊은데 모습은 또 어떻습니까? 참 홍잠언 처럼 똥똥해가지고. 홍잠언은 노래나 잘하지. 무슨 이런 종교가 다 있어. 종교단체에요.


대구의 신천지 병 걸린 사람들 수천명 되잖아요. 단 한명도 혈장 내놓는 사람 단 한명도 없습니다. 이만희가 아직 명령을 안 내렸거든요. 이게 이데올로기에요. 이게 이데올로기입니다. 이만희 때문에 삽니까? 아니에요. 본인이 14만 4천 들어가기. 내 자신을 위해서 이만희를 이용하고 있는 거에요. 내 구원받기 위해서 사는 거에요. 내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구원받겠다는 자체가 구원받지 못한 증거에요. 구원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르게 되어있는데 안다는 것 자체가 지금 악마한테 속았기 때문에 안다고 여기는 겁니다. 내가 아는 구원은 내가 시도할 수 있는 구원이에요. 내가 헌금한다든지 기도한다든지 십일조한다든지 내가 방법까지 안다는 것은 이미 엉터리라는 뜻이에요. 그런 건 없어요.


무슨 시므온과 안나가 내가 금식하면 구원될거야. 내가 금식하면 아기예수 만날 거야. 그런 안나가 어디 있어? 아무리 봐도 없는데. 목자가 양 치면서 지금쯤 천사가 올 때 됐는데. 이런 목자가 어디 있어요. 이런 목자가. 없어요.


그래. 아이고 아들 어디 갔지? 아 아들 지금쯤 자기 아버지 집에 갔을거야. 예수님의 아빠 엄마가 그렇게 했습니까? 우리는 집에 가자 집에 가자. 찾아올거야. 이랬습니까? 이 부모가? 예수님 부모가? 얼굴 새파랗게 돼서 애 잃어버렸다고 그것도 사흘동안 찾아다녔어요. 삼일동안. 그것도 빼고 이틀통안 찾아다녔지요. 삼일동안 찾아다녀가지고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그런데 12살 먹은 예수님은 표정이 응? 무슨 일 있어요? 이래요. 오늘 강의 식으로 한다면 아버지 어머니 어떤 이데올로기에 빠졌습니까? 이런 식. 아버지 어머니가 이데올로기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엄마 아빠가 아는 이데올로기 세계에서는 어떤 구석에도 없는 요소에요.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 어떤 언어로도 실어 나를 수 없는 그런 비인위적 사실이에요.


놀랄 일이 여기서 멈추는게 아닙니다. 계속 돼요. 계속 돼. 놀랄 일이. 동영상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아빠 엄마 찾아오니까 예수님께서 정말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끼리 있는데서 그런 소리하면 상관없지만 사람들 있는데서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 내 패밀리다 내 동생들이다.


예수님께서 또 혼인잔치에 갔는데 예수여 포도주 떨어졌습니다. 여자여 그게 나와 무슨 상관 있습니까? 내가 양조장 주인도 아니고 이 땅에 포도주 만들러 왔을까요? 포도주 만들러 온 게 아니거든요. 그러나 포도주라는 기본 개념은 뭐냐? 붉은 액체이며 마시면 기분이 좋다.


저는 포도주를 먹어본 적이 없어요. 포도주스를 먹어본 적이 있는데. 포도주는 붉은 액체로 되어 있고 마시면 감미롭고 어떻고 어떻고 그게 포도주에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개념이나 원리가 아니고 뭐가 포도주냐? 나 죽을 때 죽고 난 뒤에는 더 이상 포도주 필요 없다. 예수님 자신의 피가 붉다는 그 피가 포도주의 붉은 색깔 인용해서 그 포도주는 내 피를 말한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걸 누가 알아듣겠어요?


십자가 지고난 뒤에 성령이 오고난 뒤에 내 자리 내 ktx 노선 말고 저쪽 노선으로 이동했을 때 나는 이미 죽은 자고 하늘에 내 생명 있음을 아는 사람에게 비로소 하나님의 언어, 하나님의 단어의 개념은 십자가의 개념이 덧붙여져서 다시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제대하게까지 쏟아낸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제2, 제3의 예수님의 증인들을 계속해서 확장시키고 퍼트리는 거에요. 그걸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부터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예상한 구원은 구원이 아니고 막상 구원받고 난 뒤부터는 순서가 뭐냐? 말씀에 이끌리는 거에요.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커피에 빨대를 오직 빨대를 꽂아야 플라스틱 컵 안에 있는 커피만 마시듯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빨대를 꽂는데 예수그리스도의 복음만 뽑으라고 뽑아서 그걸 퍼트리기 위해서 이 땅에 사는 겁니다. 그런다고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전도하고 그런 뜻이 아니고 전혀 제가 말한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런 뜻이 아니고 사후적으로 깨닫는 거에요. 사후적이란 말 소급해서와 같은 말인데. 사태가 일어난 그 후에. 이것을 사후적이다. 사건이 일어난 그 후에 다시 여기 새로운 개념으로 덧입혀지는 현상들이 자꾸 일어나는 거에요. 자꾸 일어나는 거에요.


그럼 이걸 어떻게 표시하느냐하면 이렇게 표시해요. 역사가 흘러갑니다. 그런데 역사의 종착점은 뭐냐? 점이죠. 선에서 스탑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 자신에 대해서 복음으로 본다는 것은 이미 복음에서는 다 이루었어요. 역사의 끝에 안가봐야 이미 역사의 끝날에 오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젊은 사람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뭐 나오지요? 늙은 자들은 꿈을 꿀 것이요. 이게 뭐냐? 종말의 이야기거든요. 성령입니다. ‘성령’. 종말의 영. 역사가 더 이상 진척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만드는 그 최종적 사건 사고에서 나온 영. 그 영이 예수님의 증인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와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했잖아요. 사도행전 1장 8절. 이거 모르는 사람 없을 거에요.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을 덧입게 되게 되면 우리의 신체 몸은 전혀 달라지지 않아요. 달라지기는커녕 그냥 후패한 몸은 그냥 후패한 데로 가는 거에요. 마치 예수님처럼 똑같아요. 예수님께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변화산에서 변했지요. 다른건 마찬가지거든요. 식사하시고 그냥 다 한다 이 말이죠.


신체 몸이 아니고 여기에 있는 하늘의 자리가 와요. 성령의 자리. 이 자리를 예수의 자리라고 하는데 성령의 자리와 이 역사의 기존의 이데올로기 관념의 허상의 자리와 이 경계, 접점 지점에서 성도를 여기서 주의 뜻대로 살릴 때까지 계속 살립니다. 이 자리. 두 자리의 차이점.


그러면 살아가면서 성령께서 지배하지요. ‘성령의 지배’. 성령의 지배는 이게 비인위적이죠. 비인위적은 어떻게 오느냐 하면은 인위적인 것을 해놓고 사실이죠. 그다음에 사실 다음에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판단과 이해가 단지 내가 해놓고 이 일을 누가 한 일로 봅니까? 이게 주의 일로 그렇게 보도록 성령께서 의미를 주님의 안목으로 바꿔줍니다. 주님의 안목으로.


그러니까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감사와 고마움이 나와요. 감사와 고마움이 나와요. 내가 이런 기쁨 얻을려고 한 게 아닌데 성령이 오니까 어떤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내가 이만큼 했다 다시 나로 돌아오면 안돼요. 나로 돌아오면 인위적이 되어버려요. 내가 한 게.


아무것도 모르는 개코도 모르는 나를, 아무것도 아닌 나를, 허접한 나를 사용하시사 주께서 비인위적인 일을 드러나게 하셨군요. 주님이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을 주께서 이 세대에 살아계시다는 것을 나타나게 하셨군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어제 대구강의 마지막 대목에 그렇게 했지요. 제목이 “어디 갔지?”죠. 사실은 존댓말 쓸려고 어디 가셨지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가지고 ‘어디 갔지’로 했는데 그 제목에 부합된 결론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 죽고난 뒤에 부활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니고 언제까지 이어지느냐하면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있겠다 에요.


그러니까 제자들이요 옛날에 몇 년 전에 부활했어. 맨날 부활만 이게 지식이죠. 지식. 내가 인위적으로 지식을 해가지고 사람들 설득시켜서 복음 전해서 주의 백성 만드는게 아니고 주께서 함께 있다 보니까 함께 계시기 때문에 이것이 그 사람에게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향수로 구원 못 받을 사람에게는 악취 나는 이야기로 그렇게 쓰여지는 거에요.


누가 로마서 10장 한번 찾아보세요. 로마서 10장 13절에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되어 있지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게 사도행전 13장 31절에 보면 간수가 바울과 실라를 가두었던 간수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어떤 형편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습니까?


자기가 뭐 느긋하고 멀쩡하고 기분 좋을 때 주의 이름 불렀어요? 어떻게 불렀어요? 이미 자기는 사형 당하기로 확정되었지요? 왜? 간수가 탈출했으니까 자기 없는 거에요. 없는 상태에서 내 이름이 없는 상태에서 비로소 주의 이름이 보이는 거에요.


자꾸 인위적이고 내 생각해버리면 주의 이름이 아무리 입으로 백번 천번 해도 주의 이름은 주의 이름으로 다가오지를 않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되지 않아요. 그러면 목사님은 가정에 큰 우환이 있고 가정 형편 어려워야 됩니까? 아니요. 간단해요.


내가 여기 없어야 되는데 내가 여기 왜 있지? 이것만 생각해도 주의 이름이 절로 나와요. 내가 없어야 되는데 내가 왜 있지? 내가 왜 있지? 아 소급해서 보니까 사건으로 보니까 주께서 꽂아 넣었구나. 주께서 있게 하셨구나. 있게 하신 분이 없어지게도 할 수 있는 권한은 주님에게 있는 거죠.


오늘도 있게 하셨고 내일도 뜻이 있으시면 내일도 있게 하실 거고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반드시. 다음 월요일날 이거 실밥 푼다는데 그 때까지 주님 재림 좀 늦춰줘야 돼요. 실밥 풀려고. 이게 인위적이거든요. 자꾸 신체와 몸이 있고 이걸 나라고 한다면 이건 하나의 이데올로기 자꾸 환상에 나와요.


인위적인 환상으로 자꾸 거기에 되돌아가고 거기에 친숙하니까 자꾸 그걸 그쪽으로 미끄러져 가는데 그럴 때마다 말씀이 와가지고 우리에게 지적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은 나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닌 쪽에서 시작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더 이상 내 이름에 대해서 기대하거나 믿을 것은 나한테는 일체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그러한 경우와 더불어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있어요. 그게 이제 로마서 10장에 보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가 있기 때문에 주의 의를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그 말이 뭐냐 하면은 나 잘난 맛에 산다면 그건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름을 어찌 믿으리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럼 예수님을 전파하면 되지 않습니까 할 때 성경은 아니요 그 뜻이 아니고 그 다음에 보세요. 여러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15절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한다. 이게 비인위적이에요. 만약에 제가 젊었을 때 교회도 안 나오고 있었는데 군에 가서 어떤 사람한테 전도 받았거든요. 그런데 어떤 고참이 그것도 전라도 고참이 와서 교회가자 해가지고 나는 밥 먹는다고 좋다고 따라갔지요. 교회고 뭐고 관계없이.


따라 갔을 때 그 고참병장이 곧 제대할 날 얼마 안 남은 고참 병장이 나를 했을 때에 만약에 내가 인위적인 구원을 생각하고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천당 가야지 이렇게 생각한다면 누가 전도했어요? 고참 병장이 전도한 게 돼요. 그러나 성령이 와버리면 고참 병장이 한 게 아니고 주님께서 고참 병장 보이지도 않아.


우리는 인위적인 것은 모두 보이는 것부터 시작하거든요. 보이는 데서 언어와 단어를 사용하고 보이는 데서 일을 한다. 그런데 고참 병장은 안 보여. 성령을 안 받으면 고참 병장이 다 가려버려요. 고참 병장 저 사람이 나를 구원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나도 남한테 전도할 때 바로 이 관계를 염두에 두고 전도해요.


내가 전도해야지. 내가 이번에는 5명 우리교회 데려와야지. 자꾸 이렇게 돼요. 고참 병장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조그맣게 그려버리면 덩달아 나는 뭐가 됩니까? 나도 극히 지극히 작은 소자가 되어버려요.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자가 뭐냐? 뒤에 주님이 함께 계시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보냈기에 나한테 왔듯이 나도 누군지는 모르지만 미지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주님이 나를 보내시게 된단 말입니다. 이것을 처음에는 이만큼 나도 커요. 처음에는 잘난 체하면서 내가 전도해야지 하다가 이게 풍선 바람 꺼졌어. 내 뜻대로 안돼요.


교회 보낼라고 봉투 5만원 줘도 떼먹고 오지도 않고 교회 보낼라고 점심 약속 다해도 점심만 맛있게 먹고 그 다음부터는 또 안 나오고 하여튼 뭐든 내 뜻대로 자기 남편 전도하기 위해서 일부러 교회 안 나오고 등산 가봐야 그 다음부터는 약속 있다고 다른 데로 빠져버리고.


자식들한테 교회 나오면 스마트폰 사줄게. 스마트폰만 챙기고 교회 안 나오고. 지금 나 자고 있다. 문 잠그고 자고 있다. 아침에 일찍 못 나온다 핑계대고 안 나오고. 전부다 뭐냐 하면은 이런 경우가 생기는 이유가 그 사람에게 문제가 아니고 우리도 그랬어야만 했고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인 것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에요.


저 사람이 왜 이렇게 복음을 전해도 왜 설득을 안 당하는가? 본인의 이름이 너무 커서 그래요. 옛날 성령 받지 않았을 때 우리 모습처럼. 내가 어려울 때 나중에 병 걸리면 교회 갈게 이런 식으로 자기가 시나리오를 또 짜. 그게 아니고 그냥 작아지는 거에요. 그냥 작아지는 정도가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거에요.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데 살려줬기 때문에 내일은 보장 못하고요.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니라 주님이 여기 계시다가 더 중요하다는 거에요. 주님이 여기 계시다. 주님 계시기에 해 뜨고 달 뜨고 다 하잖아요. 주님 계신 것이 큰 비밀도 아니에요. 세상 움직이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신종 코로나 오라고 교회에서 철야 기도한 것도 아니잖아요.


비인위적인 것이 자꾸 쳐들어오잖아요. 비인위적인 것. 친구라서 돈 빌려주니까 사기해먹고 이게 전부다 비인위적이잖아요. 자식이 10명 있는데 10명 다 괜찮다고 보는데 벌써 9명이 다치고 아프고 해보세요. 모든게 비인위적이에요. 내 뜻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어요.


예레미야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네가 걸어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천상을 본 사람이에요. 하나님을 안 사람이에요. 발걸음 하나도 네 마음대로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발 다치면 못 움직여요. 못 나온다고요.


그러니까 여러분 걷는 것이 나같은 인간이니까 당연하다. 이 세상에 당연한건 없습니다. 모든게 은혜고 모든게 비인위적입니다. 이제 오늘 부모가 아들한테 당했으니까 오늘 우리도 주님한테 늘 난감한 상태를 늘 당하시더라도 오히려 그것을 이데올로기를 벗어났다는 깨우침을 구원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특혜인 것을 복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는 이유, 사는 목적을 제대로 확정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복음이 먼저 있고 그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있었사오니 우리가 사나 죽으나 복음을 위해 주를 위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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