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3장 7절 (구원 시스템) 200707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3장 1절부터 하겠습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성경에서 이렇게 지명 나오고 또 사람 이름 나오면 살짝 골치아플려고 하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사는 동네가 아니고 그 당시 시절이고 지금의 정치적인 시스템도 아니고 고대 봉건사회에 있었던 정치구조이기 때문에 이걸 굳이 알아야 되는가? 이것 모르면 안 되는가 하는 부담을 느끼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왜 이렇게 지명이 나오고 이름이 나오느냐 하면 보통 하늘나라가 하늘에 있잖아요. 저 멀리 있다고 본거에요. 사람들은 하늘나라 가면 이렇게 전부 다 목을 이렇게 해서 쳐다보는 거에요. 위로 쳐다보는 식이라고요. 제가 어릴 때 버스에 보면 사고 나지말라고 옥색치마 원피스입은 아가씨가 손 모으고 이렇게 기도하는 사진 있어요. 소녀의 기도. 옥색이에요.
전부 다 쳐다보는 겁니다. 하늘에 있다고.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늘나라가 하늘에 있는게 아니고 지명이 있고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 지상의 하늘나라가 여기에서 증거를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멀리서 찾지 말고 지금 네가 사는 이 현장이 그 지점에서 하나님 나라와 접선되어야 된다.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 죽어서도 하늘나라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나라를 누가 만드는가? 하나님께서 지상을 상대로 만들지요. 만들 때 서양 장기 보면 말을 이렇게 옮기잖아요. 옮기듯이 하나님께서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앉았을 때 너는 배치를 이렇게 하고 있은지 15년해 A.D. 26년이거든요 이렇게 쭈욱. 그 다음에 본디오 빌라도 총독은 여기 배치, 여기 지점 유대의 총독으로 갈릴리 분봉 왕으로.
갈릴리라고 하는 것은 갈릴리 바다에 있는 헤롯 안디바라는 아들 헤롯이 죽고 난 뒤에 아들 세 명이 있었어요. 그중에 안디바라는 아들이 거기에 갈릴리 지방에 지역 왕으로 있는 겁니다. 지중해가 있고 여기 갈릴리 바다가 있는데 여기 사해 바다가 있어요. 10배 크다 했지요. 여기 중간에 요단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동네를 갈릴리 동네.
갈릴리 동네에 이 땅의 지역 왕으로서 로마에 의해서 지명 받은 사람이 헤롯 안디바라는 사람이에요. 여기에는 그냥 헤롯이라고 되어있는데 헤롯 안디바. 갈릴리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 동생 있지요. 이 동생 빌립이 이쪽에 있어요. 이쪽의 빌립이 이 쪽 땅을 또 차지하고 있어요. 그 다음에 여기 유다 이쪽 지역은 안 나왔는데 아켈라오라고 있어요. 아켈라오라고 있는데 그건 안 나와있고 그 다음에 마지막에 저 북쪽에 시리아, 그 당시는 아람이죠.
시리아의 루사니아라는 사람에게 분봉 왕을 주었고 그 다음에 왕은 그렇고 그 다음에 안나스와 가야바,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어른입니다. 안나스는 전임 제사장이고 후임이 가야바고 예수님 당시에 돌아가실 때 가야바한테 심문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재판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빈 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쪽을 말해요. 사막이거든요 광야거든요. 이렇게 사람들을 배치해놨다는 말은 분명히 하늘나라는 수직적으로 아는 건데 수직적이 아니고 뭐냐 수평적이라는 겁니다. ‘수평적’. 하나님은 어떻게 생겼는가? 궁금하다. 궁금하지만 옆에 있어. 바로 옆에 하나님이 있는거야. 바로 옆에.
만약에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 있다면 BBQ 미국에 프랜차이즈 치킨집 할아버지처럼 또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게 생겨서 또는 대구 지방에 있는 소주 금복주 그러한 영감처럼 사람들은 이 지상에서 쳐다보면서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 그림들 많잖아요 아주. 여러분 하나님 그림 그리면서 인상 드럽게 그린 거 봤어요? 아니지요? 예수님 치고 다 미남이에요. 그거는 인간이 자기가 되고 싶은 이상향을 그려서 이미지화시킨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계신 것이 아니고 바로 옆에 온 거에요. 그냥 옆에 와서 뿅! 하고 등장한게 아니고 사람들의 득살에 사람들의 여러 가지의 일가친척 그들의 군인들 아까 가야바 왕 정치구조 이 안에서 같이 움직이고 같이 당하고 휩쓸리고 정치적인 상황 속에 같이 놀아나서 그들과 함께 삶을 한다 이 말이죠. 인간들의 군중들 속에.
군중들 속에 주님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섞여버린 거에요. 그래서 찾아봐라. 네가 나 찾아봐라. 그중에 누가 하나님인지 찾아봐라. 이랬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찾아봐라가 되지만 세례 요한은 여기 빈 들에 나오는 광야죠. 2절에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세례 요한에게는 이것이 무대가 따로 나와있어요.
여기는 사람 사는 동네고 이 광야는 사막은 사람이 안 사는 동네에요. 요단강변에 있고 이쪽에 세례 요한이 있어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은 자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는 무엇이다가 아니라 나는 소리다. 나는 외침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주체가 없습니다. 주체는 내 뒤에 계시고 나는 그분의 마이크. 그분의 마이크로서 있을 뿐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분이 내 안에.
옛날에 박신양 나오는 드라마 있지요? 그 박신양이 하는 말이 “애기야 가자! 내 안에 너 있다”. 내 안에 너 있다 하잖아요. 내 안에 너 있다. 무슨 뜻이에요? 나는 너를 따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너는 내 안에 있어. 상대방 여자 그 이름이 뭐였지? 김정은. 김정은이 주춤하고 여자배우가 주춤하니까 박신양이 그러잖아요. “왜 내 남자라고 왜 말을 못해?” 그런 대사가 나오지요.
그럴 때 우리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뭘 느낍니까? 이걸 느끼는 거에요. 사랑이라는 것이 저런 관계라는 것을 알지요. 사랑이라는 관계를 느끼지요. ‘사랑’. 사랑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자기의 주체를 타인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넘겨버리는 거에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저 분 안에 내가 있다는 겁니다. 저 분 안에 내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어찌되든 나는 내가 내 인생을 따로 챙길 맘이 없다. 그 분만 잘되면 되지 내가 내 인생 따로 챙길 그런 생각은 없다. 그런 피곤한 생각을 왜 하느냐. 그분이 알아서 다 하는데. 사랑을 언급하면서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성도의 남자, 또는 남편으로 보고요. 성도는 뭡니까? 자동적으로 여자가 되지요.
여자가 된다는 말은 여자는 원래 처음부터 그냥 여자가 아니고 사람이에요. 일반 사람입니다. 사람인데 누구를 만날 때? 남자를 만날 때 사람이 여자가 되는 거에요. 이게 바로 이번에 수련회할 때 룻기에서 할 거에요. 룻기에서. 그래서 여자는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남자 안에 여자가 있으니까 남자가 그 여자를 대표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그걸 보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게 아니고 고맙게 생각해야 되지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따로 안 챙겨도 되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나를 잊어버리는 거에요. 나를 잊어버린다는 말은 뭘 잊어버리느냐. 목사님 저는 어떻게 구원받아요? 지금 이런 소리하면 안돼요. ‘나’가 없는데 무슨 구원이 있어요.
내가 내 구원을 생각 안 해도 되도록 주님께서는 군중 속에 오셨던 거에요. 내가 내 구원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도록. 옛날 팝송에 보면 ‘THE ROSE’ 라는 노래가 있어요. 장미라는 노래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어요. 사랑에서 상처를 두려워한다면 함께 춤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 가사가 나와요. 상처를 두려워한다면 춤출 수가 없어요.
그리고 사람이 죽는걸 무서워한다면 사람 사는 법도 배우지 못할 겁니다. 집에 가면 ‘THE ROSE’ 라고 한번 쳐보세요. 사랑은 강가에 있는 부드러운 갈대 같아서 날마다 강물이 와서 늘 쓰다듬어 준다는 거에요. 강물이 쉴 새 없이. 그리고 갈대는 이 쓰다듬어 주는 강물이 너무 좋아서 항상 만족스럽게 고개를 숙이죠. 강물이 와서 쓰다듬어 주니까. 아주 표현이 좋아요.
강물에 있는 갈대가 강물로서 대만족하는 것처럼 자기가 개별자로서 단독으로 인생 내가 이겨내리라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사랑이 오게 되면 나는 그 강물로써 족하다 이 말입니다. 가사에 그렇게 되어있는데 ‘THE ROSE’ 입니다. 잘 적어놓으세요. 그 다음의 가사가 뭐냐? 사랑은 또 양면성이 있어서 사랑은 면도칼 같아서 찔러버린다는 거에요.
그러나 사랑하고 난 뒤에 옛날로 못 돌아가요. 옛날에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어가지고 아이고 뭐 사람 하나 안 만난 것으로 하지. 그럴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을 그분한테 다 빼앗겼기 때문에 그 상처가 깊은 거에요. 그래서 그 상처에 대한 그 상처를 이겨낼려면 날 버린 남자 죽어야 돼요. 날 버린 남자가 죽어야 돼.
그야말로 오리도 안 가가지고 김소월의 시처럼 그냥 찔레꽃 진달래꽃 즈려밟고 가소서. 나를 죽이고 가라 이 말이죠. 이처럼 주님께서 오신 것은 사랑을 주러 왔기 때문에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 사랑이 오게 되면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일체 우리가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한평생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 일체 주님 앞에 책임지지 않습니다. 책임진다면 심판의 대상이 되지요. 사랑은 심판을 이겨야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사랑은 온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고 뭔가 가지고와요. 너에 대해서 책임을 일체 묻지 않겠다는 것. 일체 어떤 것도 너에게 일체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 그것과 더불어서 사랑의 선물로서 그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은 3장 2절까지 지금 3장 2절까지 하고 있거든요.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고 있는 그 소리. 그 소리가 어떤 소리냐 그걸 이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네 시간에서 벗어나라. 또 다른 말로 하면 시간 시공간 할 수 있는데요. 네 시간에서 벗어나라.
이 말은 시간이 사람을 주눅들게 만들고 괴롭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들어요. 가정주부들이 늘 신경쓰는게 뭐냐 하면은 오늘 저녁에 반찬 뭐 할까? 저녁 먹고 난 다음에는 내일 아침에 밥은 뭐 해먹지? 가정주부들. 혼자 살면 식빵사서 먹으면 되는데 가정주부들. 큰 애들 있지않습니까.
어떤 여자분은 남편이 미역국 좋아한다 해가지고 6개월 동안 미역국만 먹였는데. 6개월 동안 미역국 먹였어요. 편하거든요. 제가 요령 하나 알려드릴께요. 홈쇼핑에 가면은 국부터 해서 반찬부터 해가지고 전부다 다 주문하면 다 됩니다. 반찬 걱정할 필요 없어요. 여러가지 해가지고 육개장하고 냉면도 있어요. 북한에서 넘어온 거 있어요.
그 냉면부터 해가지고 바꿔치기하면 돼요. 바꾸면 돼요. 지금 재첩국도 있는데 재첩국은 벌써 끝났어요. 하동의 재첩국 진짜 맛있어요. 벌써 끝났어. 시간이 왜 자꾸 힘들어하느냐 하면은 미래의 내가 뭐 될 것인가가 지금 나를 주눅들게 만들어버립니다. 미래의 내가.
내일 뭐 할거냐? 모레 뭐 할거냐? 그것도 늘리면 한 달 뒤에 일 년 뒤에 십 년 뒤에 나는 뭐가 되어있지? 십 년 뒤에. 주식을 할 때 매도해야 뭐 되는가 이런 거. 투자할 때 펀드를 어디에 뭘 들지?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시간이 나를 그렇게 힘들게 만들어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네 시간에서 벗어나라. 이것은 뭐냐 하면은 하늘의 시공간, 시공간이니까 천국이죠. 하늘의 시공간이 인간의 시간, 시공간 이것을 완전 뭉개버리기 위해서 오신 분이 계시다 이 말이죠. 시공간 그러니까 내일 뭐할까 모레 뭐할까 이러다가 내가 나중에 늙어서 노후대책 되겠나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사람들이 힘들어하신다는걸 알아요.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기존의 자기 시간에서 벗어나서 오시는 예수님의 시간으로 편입시키고 집어넣는 작업을 지금 세례 요한을 앞장세워서 보여주는 겁니다. 세례 요한을 앞장세워서 보여주는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시간 밖으로 끄집어낼 때는 기존 시간에서 주님의 시간으로 넘어갈 때 넘어가는 그 연결 고리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바로 죽음 현상이 일어나요. ‘십자가 죽음’. 죽음이라는 것은 이것은 특수한 죽음이거든요. ‘특수한 죽음’. 참 이게 굉장히 특수한 죽음이에요. 특수한 죽음이 어떤 죽음이냐 하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 사람에 대한 재판, 심사, 최후의 심사, 평가 이거 이미 종결한 걸로 보는 것이 특수한 죽음이에요.
네가 몇 살 되서 몇 살에 죽던 간에 너에 대해서는 패스가 되는 거에요. 이미. 심사나 평가나 이런 것이 생략이 되는 거에요. 그것을 그 사람한테는 치루지 않아요. 무시험 패스에요. 무시험 패스가 가능하게 하는 겁니다. 여기까지 여러분 쉽게 아시겠지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시험 내용이 뭔데 그냥 통과시키느냐. 시험 내용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의미라는 거에요. ‘의미’. 인간은 있으면 인간은 항상 뭐를 묻느냐 하면은 의미를 찾게 되어있어요. 내가 왜 살까? 이걸 하는 것이 옳을까 그를까? 전부다 의미입니다. 전부다 하나의 의미에요. 인간은 그냥 보지를 않아요. 전부다 의미를 가지고 보는 겁니다. 하나의 의미를 띄고 보는 거에요. 의미를 띄고 볼 때는 나와 관련성을 지으면서 의미가 생기지만 나와 관련성이 없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에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어느 출판사의 직원이 그냥 일하고 있는데 앞에 꽃이 있다 이 말이죠. 그냥 꽃인데 어느 날 가만히 보니까 그 꽃이 갑자기 자기한테 부각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시를 지었어요. 네가 그냥 꽃병에 꽂혀있는 꽃이었는데 내가 꽃이라고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너는 내게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경북대학교 교수 김춘수라는 사람 그 사람이 지은 시가 꽃의 의미라는 그거죠.
사람은 눈에 띄게 되면 이거는 내게 필요한 것 필요없는 것 구분해가지고 필요한 것은 전부다 의미를 부여해요.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기가 거기에다가 기대를 걸지요. 기대를 거는데 그 기대가 마음대로 안되면 속상한 겁니다. 속이 상한 거에요. 의미를 주면서 내 소유가 되고 내 소유가 내 뜻대로 안되면 내가 망가지는 부분이 망가지는데 내 전체가 다 망가지는 겁니다.
일부가 망가지더라도 내 전체가 다 속이 상하는 거에요. 그 환경이 뭐냐 하면은 시간이라는 환경입니다. 시간이라는 환경 또는 그걸 시간을 범주라고 이야기하는데 ‘범주’. 범주라는 말을 누가 했느냐 하면은 유명한 철학자 칸트가 이야기했지요.
칸트는 세상을 볼 때에 인간이 속한 모든 세상을 볼 때에 오성이 먼저 들어가고 이성이 아니고 오성이 먼저 들어와서 그냥 본 것을 편집을 하는데 뭘로 편집하느냐 하면 이성으로 편집해가지고 그것을 사물로 인식한다. 하나의 의미로 인식을 한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를 어떤 인간도 제대로 볼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자기가 타고난 자기의 과거의 의식가지고 모든 것을 자기에게 의미를 주는 것이지 똑같은 꽃이라도 사람마다 의미가 다 다르고 다 달라요. 이것은 뭐냐? 개별 자신이 개별 안에서 자폐적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쪽으로 사는 거에요. 의미가 있다는 말은 의미를 자꾸 갖춘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뭐냐? 한번 적어볼께요.
나는 어떤 경우라도 안 망가져야 한다. 독한 마음을 더욱 더 갖게 돼요. 나는 어떤 경우라도 안 망가져야 된다. 그런데 이런 인간에게 주님께서 심사를 해버려요. 마지막에 심판, 심사를 해버리면 망가질 수밖에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본인을 위해서 한평생 살아왔기 때문에 전체 우주가 요구하는 것, 전체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과 영 맞지를 않아요.
나한테는 되게 좋고 나한테는 행복했는데 너만 행복해야 되겠어? 왜 너만 행복해? 네가 창조주야? 네가 하나님이야? 너 편하고 너만 행복하고 너만 팔자 편하면 그럼 너는 천국 가? 천국은 너 좋아라고 있는 곳이 아니거든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야 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뭐다? 모든게 좋아야 되는데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 의만 챙기면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요구에 미흡한 거에요. 충족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왜 오셨는가? 왜 군중 속에 오셨는가?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망가지라고 온 거에요. “너는 망가져”. 충분히 망가져 버리란 말이죠. 주저앉아라 이 말이죠. 네가 남한테 안 질려고 애를 쓰지말고 그냥 무너져버려라. 무너져버려라. 왜? 너는 오늘 제목을 이걸 할까 싶은데 너는 뭐냐 하면은 ‘비정상’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 아니에요.
정상이 아닌 인간이 계획을 세운다? 어떤 이벤트를 한다? 어떻게 뭐 남한테 잘해보인다 그런게 전부 다 목적이 원래 인간이 비정상 같으면 목적도 정상이 아닙니다. 비정상이에요. 제가 지난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사람들이 자꾸 정신 차리라고 하는데 그러지 마시고 정신 차리지 마시고 아예 미쳐야 된다고 했지요.
정신을 차리면 차리는 족족 피곤이 밀려옵니다. 지켜야 돼. 버텨야 돼. 버텨야지. 여기서 무너지면 안돼. 쓰러지면 안돼. 본인이 정상입니까? 마치 그것은 이런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은 정신병 환자가 의사 선생님 앞에서 의사 선생님 저 버텨야됩니다. 정신 차려야 됩니다.
의사 선생님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이고 많이 미쳤구나. 얘가. 아이고 병세가 심하네.” “의사 선생님 빨리 고쳐가지고 정상으로 돌아오게 해주세요.” 정신분석학에 그런 이야기하지요. 의사 선생님한테 정상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건 그건 이미 그게 정상이라고요. 환자가 그런 소리 안해요. 나 이미 정상입니다 우기는게 문제지.
“나 문제 있는데요 나 죄인인데 고쳐주세요” 이런 것은 환자 아닙니다. 그건 정상인데요 하는거고. 진짜 미친 인간은요 “아 나는 모르겠어 나는 멀쩡한데 식구들이 자꾸 가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이러는 거에요. 가보라고.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도 아니기 때문에 정상도 아닌 비정상적인 의미를 자꾸 뽑아내요.
그런데 자기도 약간 알아요. 이 세상이 내 맘대로 안되는걸 알거든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내일로 미뤄. 그래 오늘 내가 참는다. 한 달 뒤에는 내 뜻대로 될거야. 한 달 되도 안되면, 그래 2년 뒤에는 내가 보란 듯이 성공하고 말리라. 2년 뒤에 안되면 10년 뒤에 한번 봐. 나보고 뭐라 한 인간들 내가 성공해서 당당히 보여줄게. 그런 식으로 살아가요. 시간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어요. 시간이. 시간을 자꾸 미루고 지연시키는 거에요. 자꾸.
사람이 사기당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안 망할려고 하니까 사기 당하는 거에요. 안 망할려고. 보이스피싱도 마찬가지고. 술 친구, 담배 친구가 와가지고 사기를 치는 거에요. 당신 이렇게 하면 앞으로 당신 월급보다 훨씬 낫다고 자꾸 그런 소리하는 이유가 우리가 평소에 안 망할려고 지금보다 오늘은 내일보다 모레는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사기가 자꾸 들어오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이유도 안 망할려고 하기 때문에 이단에 빠지는 거에요. 그래서 결국 인간은 시간 속에서 안 망할려고 하는데 안 망한다고 하는 만큼 그 만큼 망할까봐 두렵다는 거에요. 두려우니까 이 두려움 자체가 이미 사람 비정상이에요. 무슨 일이 안 나도 벌벌 떨고 쫄고 늘 쪼는 거에요. 벌벌 떨면서.
그래서 세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을 이렇게 봅니다. 비틀거리는 세상. ‘비틀거리는 세상’. 전부다 모든 가정 모든 사람 전부 다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문제 하나 낼게요. 모든 인간이 비틀거리면서 술 취하듯이 비틀거리면서 방향도 없이 사는데 그러면 신종 코로나, 하나님께서 신종 코로나 19의 바이러스를 준 이유가 뭡니까?
답변을 요구한 내가 나쁘지요. 이겁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신종 코로나 19죠. 이걸 왜 주느냐 하면은 세상은 어떻게 살아도 무효다. 이 세상 어떻게 살아도 무효다. 네가 어떻게 살든 세상이 어떻게 살든 이 세상은 다 부질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에요. 소용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신종 코로나가 눈에 보이는 나노 크기의 바이러스가 아니고 신종 코로나가 어떤 괴물처럼 생긴 멧돼지같은 멧돼지라면 사람은 그 멧돼지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온 힘을 다하여 활을 쏘고 총을 쏴가지고 잡아버리겠지요. 그러면 잡기 전에는 내가 멧돼지한테 당했지만 잡고 난 뒤에는 내가 기어이 이겼잖아요.
그러면 나한테 나는 안 망해도 되고 내가 저 멧돼지를 잡는게 의미있는 행동이 돼요. 왜? 내가 안 망해도 되는 의미있는 행동을 우리는 힘을 단결해서 그 못된 병을 옮기는 멧돼지를 잡을 수 있지만 혹시 여러분 신종 코로나 체포한 사람 봤습니까? 바이러스를? 그 작은 나노 크기를 어떻게 체포해요.
그리고 온 모든 72억의 모든 인구가 아무리 지혜를 짜내고 일년 내에 백신이고 치료제 없어요 지금. 기대하지 마세요. 치료제 없습니다. 백신 없어요. 일 년 뒤에 보자 자꾸 미루는 거에요. 그 말은 뭐냐? 이미 졌어요. 졌다 이 말이죠. 신종 코로나 이전과 이후가 신종 코로나 이전까지는 인간이 못 할 일이 없어요.
인간은 생각하고 힘 단결하면 뭐든지 해낼 수 있는 거에요. 왜? 적들이 만만하니까. 뱀 같으면 잡으면 되니까. 만만하니까. 그런데 신종 코로나는 미국이고 이태리고 영국이고 간에 중국이고 간에 어떤 것도 신종 코로나를 이길 수가 없어요. 심지어 원자력 핵폭탄 개발하고 우주선 날리면 인간은 못할 것 없다고 자부한 인간이 그 코로나 우한에서 번진 그 코로나한테는 이게 너무 작아서 그런지 이길 수가 없어요. 해결책이 없어요.
그리고 이게 또 변종을 하네. 변신을 잘해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게임오버, 게임 끝난 거에요. 어떻게 끝났어요? 인생 어떻게 살아도 이거는 부질없는 것. 부질없는 것. 아무 소용없는 것. 내년은? 내년이 의미가 없어요. 신종 코로나가 없어지지 않는데 무슨 내년이라는 시간 자체가 의미가 없다니까요.
그래서 신종 코로나는 뭐냐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을 절단내버렸어요. 미래를 절단, 미래가 짤려나간 거에요. 인간에게 미래가 없는 거에요. 과거에 얼마나 인간이 대단했다. 원자력까지 원자폭탄 만들었다. 그 과거도 다 소용없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인간은 신종 코로나와 같이 사는데 기죽어 산다. 심지어 복음 안다고 우기는 저도 여기 마스크 있어요. 중국산이라 떨어졌어요. 마스크 있어요. 이게 뭡니까? 진 거에요 제가. 이게 뭐냐 하면은 져버리라 이 말이죠. 지면 이기는 거에요. 지면 이기는 거에요. 그리고 신종 코로나 특징은 얼마나 착하냐? 얼마나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일체 고려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바르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 교도소에 있느냐? 아니면 청와대에 있느냐 일체 묻지 않고 코로나는 진짜 천사와 같아가지고 사람이 어떻게 행했느냐는 것을 일체 계산에 넣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은 신종 코로나 옮기는 숙주며 그 다음부터는 거리 띄우기 아니고 마음 띄우기로 갑니다. 마음들이 침 튀지마세요 가까이 오지마세요.
전부다 인간 대 인간의 협동이라든지 협조 가족 다 부질없는 것. 다 인간의 사랑, 우애, 의리, 책임감 신종 코로나 앞에 아무짝 소용없는 거에요. 소용없어요. 그동안 잘해줬잖아. 소용없어요. 잘해줬잖아 하면서 오게 되면 “오지마라 너! 너 숙주다”. 이렇게.
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세례 요한의 시작이 주님의 시작입니다. 주님을 신종 코로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오늘 본문은 아주 어려운게 없어요. 주님 자체가 바이러스에요. 주님 자체가 바이러스. 마지막 심판 오기 전에 미리 무너져라. 미리 망해버려라. 그래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내용은 해답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나옵니다. 성경에 그렇게 구성되어 있지요.
잠깐 귀찮지만 신종 코로나에 죽을 때 죽더라도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에베소서 2장 한번 봅시다. 2장 보시고 제가 한번 슬쩍 읽어볼테니까 누가 한번 설명해보세요. 이게 무슨 뜻인지를. 에베소서 2장 5절 찾아 보셨습니까?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거 과거, 현재 완료입니다. 이미된 거에요.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방금 여러분 강의 들으면 알겠지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를 어디 안에서 어디 밖으로 끄집어낸다? 시간 안에서 뭐로? 시간 밖으로 끄집어내지요. 여기 보면 함께, 누구와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이미 앉혔다는 거에요. 현재완료에요. 이미 끝났어요 이게. 앞으로 그렇게 될거야가 아닙니다. 죽으면 천당 간다는 뜻이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
구원에는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미래라는게 필요 없어요. 구원에는 없어요. 지금 이 순간입니다. 내가 말하는 지금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지금이랑 달라요. 우리가 하는 현재 지금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지금이지만 제가 말하는 지금은 뭐냐? 과거 현재 미래 그 현재를 넘어서는 현재.
주님에 속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그러한 상황을 저는 현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게 아니고 에베소서 2장 5절에서 5절 6절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미 하늘에 앉혔다는 거에요. 이미 구원되었다는 거에요. 구원될 것이 아니고 구원된 거에요. 앉힌 거에요. 이게 바로 사도 바울 편지 안에 있습니다. 이게 해답 정답이거든요.
문제는 어디서 찾는가? 바로 마태 누가 요한 마가에서 제안하죠. 오늘 우리가 마가를 보고 있는 거에요. 마가를 보면서 우리는 뭘 끄집어내는가? 이미 정답은 어떻게 됐습니까? 정답은 알았죠. 정답을 알고 정답은 도대체 우리가 어떠한 자리에 있었기에 정답이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만 제시되야 되는가?
열심히 해라 바르게 살아 왜 이런 정답이 아니고 이미 너는 이미 살았다는 거에요. 너는 이미 살고 너의 생명은 주님과 함께 생명을 공유하고 있다. 공유란 말 알지요? 같은 영생이 있는 생명나무, 영생이 있는 곳에 함께 살고 있다. 네가 목숨 끊어진다고 해서 영생이 취소되는 게 아니다. 끊어지든 네 목숨이 100살까지 살든 관계 없이 영생은 지금 14살 아이라도 영생이다.
영생이 그대로 작용하고 있다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결론을 제시하는 거에요. 그 결론을 좋다고 할 것이 아니라 도대체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뭐가 문제인데 왜 결론은 우리하고 단절되어 있어. 우리가 사는 의식하고 단절된 채 엉뚱하게 저렇게 주어지는지 알아야 되겠지요. 그래서 누가복음 공부가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겁니다.
이왕 성경 찾은거 한 구절 더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8장 7절 이건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요한복음 8장 7절. 보시고 평생토록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본문 말씀을.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인간은 다른 인간을 평가할 수 없다. 이 말은 더 나아가서 내가 나를 평가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나를 평가하지 말라는 거에요. 인간이 한 평생이 고생길이다 지옥이다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를 알려줄까요? 본인이 본인을 평가해서 그래요. 본인이. 본인의 실력과 본인 스스로 자책하고 너무 들뜨게 만들고 또 자책하고 좌절시키고 또 이렇게 격려하고 본인 노름에 본인이 놀아났어요.
몸은 늙어가면서도 자꾸 자기는 젊었다 젊었다 하면서 본인을 격려하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은 본인에 대해서 선호하고 이걸 지킬려고 하겠지요. 그럼 지킬려면 이왕 지키는 것은 저주받기 위해서 지킬 필요 없잖아요. 복 받기 위해서 지키겠지요.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본인이 뭐가 됩니까? 죄 없다고 자꾸 억지를 부리는 거에요. 본인한테 죄 없다. 신종 코로나 나한테 오면 안돼. 나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착한 사람한테 코로나 때찌! 저리 가. 하나님이 설마 나한테 아프게 안 할거야. 본인이 그렇게 아프게 안 할거야 본인이 생각한다는 자체가 그만큼 올까봐 지금 무서워 떨고 있는 거에요. 그런 생각한다는 자체가.
강의 처음부터 새로 할까요? 박신양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 속에 너 있다.” 했지요. 손 잡고 뭐라고 합니까? “애기야 가자!” 하지요. 애기야 가자. 김정은은 혼자 있다고 생각하는데 박신양이 말합니다. 네가 혼자 있는게 아니야. 내가 피아노 앞에서 노래 한번 불러줄까? 너는 혼자 있는게 아니야.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왜 말을 못해?” 혼자 있는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자꾸 본인은 혼자 있었기 때문에 내 인생은 내가 아니면 해결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걸 가지고 오늘 제목입니다. ‘비정상’. 쉽게 말해서 미친놈. 비틀거림. 다들 그렇게 살아요 다들. 목사님 무슨 해답이 있습니까? 하는데 해답이 있습니까? 묻는 그 자체가 왜 그런 질문을 합니까? 안 미칠려고 하는 거에요. 정상인 될려고 버티는 거에요 지금. 망해도 되는데 자꾸만 버틸려고 하는 거에요.
그러면 누가복음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사도 바울 편지까지 이어지는가. 이게 뭐냐 하면은 시스템 재편성하는 거에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사람들이 그대로 이 세상 시간 그냥 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인간 시간에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님도 인간 시간에 적용받고 인간도 인간 시간으로 그냥 갑니다.
그냥 가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한테는 예수님이 제자들 통해서 예수님 뭘 보여주느냐 하면은 이 시간이라는 시스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면 그 일 또는 사건을 통해서 전에 알았던 그 의미 체계가 그 일을 통해서 재편성돼요.
재편성이라는 말은 기존에 내가 알고 있었던 인생관 그거는 어제까지 써먹었던 인생관인데 오늘 일이 터져버리면 ‘아 내가 세상에 대해서 잘못 봤구나. 이렇게 조성돼야 이게 아구가 맞아’ 하고 사건 터지면 그 사건을 집어넣어서 전체를 다 바꿔버려요. ‘아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돼. 이렇게 살아야 돼’ 이렇게 되거든요.
예를 들면 어떤 친구가 있는데 선입견이 인상이 좀 더럽고 성격도 더러워가지고 저 친구를 만나면 분명히 나한테 폭력적이고 나쁘게 할 것이다. 인상도 험악해가지고 이렇게 있으니까.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 사람한테 우연히 도움을 받고 혜택도 받고 심지어 예상도 못한 친절과 그렇게 도움을 받게 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 사람을 볼 때 어떻게 됩니까?
아 사람을 인상을 보고 사람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되겠구나 라고 그 사건 이전까지와 이후까지의 자기 의식이 어떻게 돼요? 재편성되게 되겠지요. 그 재편성을 말합니다. 재편성을 하는 방법은 재료가 있어야 돼요. 재료가 뭐냐 하면은 인간의 육이 재료가 됩니다. 인간의 육이 재료가 되어서 재편성에 들어가게 돼요.
육이 있어야 되는 이유는 인간은 육은 아까도 말했지만 자기 의미, 자기 체제, 자기 단독적인 나만의 인생, 나만 편하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니까 육 중심으로 자기 편의 위주로 이익 위주로 살게 되어있어요. 육과 육이 만날 때 내가 이렇게 해주면 뭐 해줄렵니까? 내가 이렇게 양보할 때 당신은 나한테 뭐 해줄건데?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은 내 위주거든요.
그런 생각을 왜 하느냐?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관이 그런 식으로 편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과거에 사기를 한 서너번 당한 사람은 두 번 다시 그런 제안 한 사람한테 사기를 내가 옛날에 당해봤어. 안 속아 이러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진짜 진정으로 해준다는 것을 자기 본의 아니게 강제적으로 혜택을 입었다면 아 내가 저 인간이라고 다 사기꾼이 아니구나. 내가 이거 감안해야겠네. 그렇다면 그걸 감안해서 재편성하겠지요. 이걸 가지고 경상도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근났다. 또는 보통 말로 철이났다. 철났다 이렇게 하지요.
인간은 인생을 살면서 시간을 가면 갈수록 점점 철이 나는 거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김종환이 그런 말을 했지요.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익어가는 것이다. 임영웅이 불렀어요. 임영웅이. 익어가는 것이다. 뭐냐? 성숙해 간다는 거죠.
그걸 교회에서 그거 따오지요. 교회는 뭡니까? 여러분 예수 믿는다고 천국 못갑니다. 뭐해야 됩니까? 익어가야 됩니다. 숙성해야 됩니다. 숙성하다 폭발하는 수가 있습니다. 메탄가스 나와 폭발하는 수가 있는데.
성경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익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멀어지는 거에요. 익어가는게 아니고 점점 더 멀어지는 거에요.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고 점점 더 빠이빠이하는 거에요. 이 과정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주님께서 아까 요한복음 8장 7절 뭡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이 말은 네 죄가 살면 살수록 너는 무너졌고 너는 비틀거리고 너는 비정상이고를 네 속에 있는 네 죄가 너를 증명할 것이다. 그걸 바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예수님과 사건을 유발시켜서 그것을 우리한테 통보해주죠. 순간순간.
그러면 성도가 세상살이 한다는 것은 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갈수록 자기가 죄덩어리인 것을 알지요. 나는 침착하면서도 내가 할 것 안 할 것 가려가면서 철이 나가지고 실수를 줄이고 점점 누가 보기에 인격이 인품이 우아해지고 고상해지고 완전에 다할 정도로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다 순종해 실천에 옮겨서 천사같이 안됐지만 천사같이 될려고 주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라고 하겠지요.
그게 바로 누가 했느냐 하면은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 흠이 없다고 우겼던 사울이 바로 그 짓한 거에요. 사울이. 율법을 가지고 자기를 숙성되게 만들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거 가지고 모잘라가지고 이왕이면 더 충성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서 나섰잖아요. 사도 바울이.
바로 여기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군중 속에 있지요. 군중 속에 있는 거에요. 많은 군중이 따라갔습니다. 따라다녔습니다. 여러분 돼지갈비나 돼지갈비 이야기하니까 요새 한참 돼지갈비 먹고 있는데 누가 주셨는데. 돼지갈비 뜯을 때 뼈를 닭도 마찬가지고 뼈를 뜯어내는걸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발라낸다 하지요. 발라낸다.
많은 군중들 있잖아요. 12제자 포함해서 70인 군중부터 해서 많은 군중들이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이쪽에 누가 있느냐 하면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권력자 있어요. 권력자가 예수님한테 들러붙어가지고 나 예수님하고 한패 천당갈거야 하는 사람들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전부다 발라내요.
예수님은 뼈거든요. 예수님은 뼈에요. 뼈에서 뼈에 붙지도 못할 인간들을 자기 딴에 예수님 좋다고 온 거에요. 우르르. 제자 삼아달라고 또는 제자라고 우기면서 온 거에요. 주께서 어떻게 합니까? 다 발라내지요. 베드로는 어느 쪽으로 갔습니까? 누구 편에 붙었어요? 결국 권세가 무서워서 다 했지요. 남는 건 뭐냐? 남는 건 피만 남았지요. 피만 남은 거에요.
이 피가 보이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내가 있던 관계가 주님과 나하고 친하게 지내고 뭐 사랑의 관계인줄 아는데 사랑의 관계가 아니고 피흘려야 될 관계에요. 우리가 원수에요. 주님을 죽게 한 피흘리게 만든 원수로써 우리는 모르고 우리는 정상인줄 알고 인간관계에서 좋게 지내는 것처럼 예수님하고도 좋게 지내면 되는 줄 알고 그냥 들러붙었는데 주께서는 보여준 것은 뭐냐?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에게 영생이 없다.” 사람들 다 가버렸어요.
“왜 너희들도 가지?” 하니까 안 갔잖아요. 말씀이 계시는데 누가 가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붙여주니까 안 간 거에요. 예수님이 뼈라면 뼈에 달라붙어있는 것은 전부다 가짜입니다. 진짜는 뭐냐? 피에 의해서 붙어야 진짜에요. 피에 붙을려면 우리는 뭐가 돼요? 잘난 사람 되야 돼요? 죄인 되야 됩니까?
피흘림이 필요한 요소가 우리가 한 평생 살아가면서 그 부분이 발각되야 되고 발견되야 돼요. 우리 안에서. 아 이것 때문에 피흘렸구나. 저것 때문에 피흘렸구나.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왔다가 죽기 위해서 오신 거에요. 우리는 살기 위해서 예수님 붙들었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피를 보여주면서 피흘림 없이는 역사함이 없다고 이야기했고 요한일서 같은 경우에는 너희 중에 죄가 없다 하면 네가 너한테 사기친 거다. 피를 보면서도 죄 없다 하면 말이 돼? 피 보고 죄 있구나 생각하라. 이게 요한일서 일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의 편지죠.
일단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3장 7절 (구원 시스템) 200707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어디서 찾는가? 하나님을 어디서 찾는가라는 질문을누가복음에서는 사람을 어디서 찾는가? 참된 사람을 어디서 찾는가? 참된 사람. 아버지로부터 인정받는 유일한 사람을 찾아라. 이 말은 사람을 찾는다는 말은 나는 일단 아니고를 전제로 하지요.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이는 진짜 사람은 어디 있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되기 때문에 그런거죠. 그럴 때 우리는 말을 이렇게 바꾸면 됩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 있는가? 같은 말이에요. 참된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라는 이 말은 세상 사람들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어디에서 사는가?
세례 요한같은 경우에는 광야에 나와있지요. 세례 요한이 훌륭하다 생각하지 마세요. 세례 요한은 실체가 없다고 생각하고 배후에 주님이 계시거든요. 주님의 마이크니까. 한번 적어보겠어요. 방금 한 질문을.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 지옥 갈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하지말라. 같은 뜻인데요 지옥 갈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라. 이재용같은 사람. 지옥을 앞두고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라.
그러면 이런 것이 다 될려면 일단 나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도 마찬가지고 자꾸 예수님께서 두려운 쪽으로 제자들을 몰아가요. 풍랑 일어도 “아이고 무서워라.” 뭘 해도 “저 사람들이 저 권세자들이 우리를 체포하면 어떡하겠습니까” 하고 겁을 내고. 주님께서 성도의 인생을 몰아가는데 꼭 우리 힘으로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그런 사태를 자꾸 부딪히게 만들어요.
어떤 때는 속상하지요. 제발 좀 나를 건드리지 말고 제발 나도 좀 숨 좀 쉬고 삽시다. 숨 좀 쉬고. 힘들어서 못 살겠습니다. 그 정도 밟았으면 그만큼 백인이 흑인을 8분 40초 동안 밟았으면 이젠 좀 놔주면 될텐데 하나님은 8분 40초도 아니고 평생을 우리 모가지를 밟고 힘들어 하니까 이제는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괴로워 못살겠다. 나 좀 삽시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주께서 이렇게 압박을 가하고 강박을 가하고 지옥 갈 사람을 괄호에 넣어버리고 그냥 사람으로 보는 거에요. 사람. 저 사람이 나 싫어해. 저 사람은 너무 부러워. 지옥 간다는 이 사실을 자꾸 괄호에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는 거지요. 일종의 이거는 판단 중지가 되어 버리죠. 판단 중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 안하고 무조건 사람들이 뭐라고 한다면 수군거리면 오들오들 발발 떨어요. 자기만 떠는게 아니에요. 애들보고도 집에 아내나 남편 보고도 당신 말조심해. 말조심해라. 차타고 가다가 남편이 운전하다 좀 다투면 조수석에 앉은 여자들이 할 일이 뭡니까? 여보 그냥 갑시다. 벌벌 떨면서 그냥 가자고 하잖아요.
물론 반대되는 사람도 있어요. 에이그 쪼다 한마디도 안하고 뭐 이런 부인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가자~ 미쳤다 생각하고 그냥 갑시다 이렇게 하지요. 모든 것이 비틀거리거든요. 그 공포에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매일같이 벌벌 떨면서 사는 겁니다. 그 대책은 뭡니까?
계속 착한 짓, 착한 짓, 이쁜 짓, 이쁜 짓으로 자기 방어 체제를 갖추는 거에요. 이만했으면 설마 안 좋은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 그런데 주께서 이렇게 압박을 가하는 이유는 우리의 정신을 둘로 쪼개기 위해서, 두 갈래. 우리의 정신을 두 갈래로 나누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도에요. 성도는 완전한 자도 아니고 실수 없는 자도 아니고 세상 삶을 초월한 사람도 아닙니다. 아니고 뭔가 다른 정신이 와버렸어요. 그러니까 성도가 아니라면 인간적으로 처리할건데 성도이기 때문에 더 센 힘이 인간들로 하여금 그 성도로 하여금 난관이 있으면 뒤돌아서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병합함을 뚫고 지나가게 하는 겁니다. 뚫고 지나가게. 난관을.
멀리서 보면 난관인데 가까이서 보니까 그냥 허망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들오들 발발 떨었는데 막상 그 일을 겪어 보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에요. 마치 운전면허 시험처럼. 뭐 대단하게 뭐 이렇게 해야되느니 하는데 막상 쳐보면 그냥 차 모는 건데요. 내가 너무 쉽게 이야기 했나? 뭐 저 같은 사람은 한 번에 된 줄 아는데 7번 떨어졌어요.
7번 만에 됐고 우리 집사람은 한 번만에 됐고. 7번 떨어졌는데 그래도 또 갔지요. 그거 떨어졌으면 필기도 무효될 뻔했어요. 마지막에 됐어요. 그러나 뭐든지 지나고 나게 되면 아이고 뭐 별거 아니네 이렇게 되지요. 그게 별거 아니네 하면서 또 내일 되면 또 숙제로 주어지게 되면 또 바들바들 떨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일부러 상황을 우리 힘이 아무 소용이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려요. 어떤 노력도 어떤 시도도 무용지물로 되는 상황 속에 우리를 몰아세웁니다. 대표적인 것이 아까 이야기했지요. 신종 코로나. 이건 뭐 대통령 잘 뽑아도 소용없어요 이거는. 옛날이 좋았다. 옛날이 좋아도 참을 수가 없어요.
20대 아가씨들 취직해가지고 돈 모아가지고 북유럽 놀러갈라고 준비 다 해놨는데 어떤 친구는 벌써 갔다 온 사람 있는데 올해 계획 해가지고 다 해놨는데 코로나 해가지고 올해 계획 다 막혀 버렸어요. 이게 사람 마음대로 됩니까? 안되지요.
자, 아까 그 문제 계속 해봅시다. 하나님을 어디서 찾는가? 이걸 다른 말로 뭐라고 합니까? 참된 하나님의 의해서 연결되어 있는 인간은 어디서 찾는가? 하나님을 찾지 마세요. 참된 인간을 찾아야 돼요. 여기 4절에 봅시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했잖아요. 여기 4절 5절 보시면 여러분 이거 생각하시면 돼요. 택지 개발 생각하면 돼요.
택지개발. 못사는 동네 울퉁불퉁 뭐 어떤 잘사는 집도 있는데 불도저하고 포크레인하고 한 12대 동원해가지고 개발할 때 어떻게 합니까? 한 달 전에 어느 집 있었지? 없어요. 싹 갖다 밀어버리죠. 높아진 것 낮아지고 낮아진 것 높아지고 전부다 평토, 평탄하게 만들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움직이는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하면 모든 세계를 일괄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신 그 분을 찾으면 되지요. 목사가 됐든 장로가 됐든 헌금을 하든 말든 기도를 2시간 3시간 하든 안하든 예배를 몇 번 참석하든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몇 살이 됐든 90이 됐든 10살이든 1살이든 관계없이 똑같이 밀어버리는 사람. 그렇게 선언해 버리는 사람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그것이 오늘 본문의 이사야 말씀이라면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여러분들 중에 머리 좋은 사람은 알거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는 말은 네가 스스로 택지개발 당해라 이런 뜻이겠지요. 울퉁불퉁이 다 평평해지니까. 이건 뭐냐 하면은 나를 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거에요. 말씀을 주는 것은 나로 하여금 포크레인 불도저 밑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주는 것이 바로 주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예를 들면 베드로에게 “네가 고기 잡는 사람이 되지 말고” 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물고기 잡는다는 말은 물고기 나는 이만큼 잡았기 때문에 나는 이만큼 잡는 사람이라고 남들이 그렇게 평가하고 저 사람은 10마리 나는 100마리, 저 사람은 100마리 나는 10마리 나는 저사람보다 못하다 또는 잘났다 벌써 이게 높낮이가 생기겠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제는 고기 잡는 사람 되지 말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할 때에 나는 두 사람 세 사람 이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주의 말씀은 내가 10명을 전도하든지 2명을 전도하든지 아니면 한명도 전도 못하는 것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 동등하다. 모든 것이 동등한 거에요. 그렇게 외치는 사람을 만나면 돼요. 그렇게 외치는 사람을.
아까 요한복음 8장 7절을 여러분 외우는 사람은 외우잖아요. 간단하잖아요. 돌을 치되 “죄 없는 자가 돌을 치라.”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인간은 죄 있다는 점에서 어떤 인간도 주님 앞에 손 들고 나올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 어떤 사람도 남을 평가할 수 없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그 자신의 죄에 대해서 너는 죄 더 졌고 나는 더 많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에요.
왜? 택지개발해서 다 없애버려요. 모든 인간은 죄. 끝. 죄로 태어났으니까 끝이에요. 깔끔하지 않습니까. 나는 속이 다 시원한데요. 이걸 지금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친다하니까 “아아 마이크 테스트 아아아” 이렇게 하면서 “전부다 다 똑같은 인간들아 똑같이 나오너라.” 외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똑같이 하는 방법은 뭐냐? 유니폼을 입힌다? 아니요. 그럼 잉크물을 뒤집어씌운다? 아닙니다. 그럼 세례 요한 옷 양털 한도 모피, 모피 옷을 입힌다? 아닙니다. 그럼 다같이 공동체 훈련해서 사막에 공동체 해가지고 전부다 조그만 집 지어가지고 공동체 생활한다? 아닙니다. 뭐냐 하면은 모두 다 앞으로 요단강 물속에 들어가. 다 처넣어버립니다. 물속에 들어가죠.
자, 이게 요단강 물 수면입니다. 여기 요단강에서 들어갑니다. 들어가는데 현재 요르단에서 들어가는 방법 있고 이스라엘에서 들어가는 방법이 있는데 어느 방법도 괜찮아요. 여기 요르단이고 여기 이스라엘인데 요단강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잖아요.
그럼 사람 들어갈 때 무릎만 들어간다? 어떻습니까? 무릎만 들어간다? 아니겠지요. 그러면 허벅지까지 들어간다? 아닙니다. 그러면 가슴 어깨까지 들어간다? 아닙니다. 어떻게 돼야 돼요? 다 들어가야 돼요. 왜냐하면 이 요단강이 뭐냐 하면 바로 홍해의 재편성. 아까 했지요.
누가 마가 요한복음은 인간을 육으로 재료로 해서 그 시스템을 재편한다. 항상 재편한다. 세례 요한님 저는요 착했어요. 그거 재편되야 돼요. 착한 거 없어요. 다 집어넣었어요. 자, 홍해의 특징은 뭐냐 하면 그 60만 이스라엘 남자만 60만 그 많은 사람이 홍해가에 섰을 때에 그중에 박태환 있었습니까? 있었겠지요. 박태환. 아 내가 헤엄쳐서 갈게. 이렇게 했습니까?
어떤 인간도 홍해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럼 홍해를 못 넘어선다는 말은 하나님이 약속한 그 나라에 그 의에 들어갈 수가 없지요.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 나라의 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못 들어간다는 이야기이에요. 들어갈 수가 없다는 이야기에요.
그럼 무슨 작업이 일어나느냐 평토, 택지개발하는 작업이 일어줘야 돼요. 좋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조리 전부다 뭘로 만듭니까? 죄로 만들어버려요. 죄로 만들었다는 말은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없다? 없어요. 윤리 도덕으로 아무리 남한테 구제를 하고 봉사를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해도 그것으로 요만큼의 자기의 가치가 늘어나지를 않아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인간의 시간은 항상 뭘 한다? 항상 지연이 되어버리면 나중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는 항상 미흡해요. 지금 착하기도 착하지만 내일 착한 일 더 해버리면 오늘의 착한 일은 그만큼 어제는 내가 철이 없어서 모자라서 내가 인생을 재편성 제대로 못했어.
내가 기껏 그 정도 알아놓고 인생을 다 알았다고 까불었어. 오늘 살아보니까 어제 산 것은 내가 너무 철없는 짓이었었어. 하지만 모레 되면 또 오늘과 똑같은 소리한다 이 말이죠. 똑같은 소리 할 거 아닙니까. 어른들이 젊은 사람들 보고 하는 소리 가운데 실속 없는 충고가 뭐냐 하면은 나도 젊을 땐 다 그랬어. 뭐 어쩌라고. 네가 청춘이니까 아프다.
그 말이 실없는 소리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아프다도 정도가 있어요. 20대 아픈거하고 30대 아픈거 하고 40대 아픈거하고 달라요. 제가 설교 때 그런 이야기 드렸죠. 여자들이 결혼하고 난 뒤에 보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인줄 알았지요? 결혼 하고 난 뒤에 결혼하고 난 뒤에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아픔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육을 재료로 재편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육을 재료로 자꾸 재편하는 거에요. 그래서 시간에서 빠져나와야 돼요. 시간에서 빠져나와야 됩니다. 못 빠져나오지요. 빠져나오는 방법을 제가 말씀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힘으로 못 빠져나와요. 마치 우리 힘으로 요단강을 못 건너는 것처럼.
그러면 우리는 결론은 뭡니까? 결론은 에베소서 2장 5절 이미 하늘에 앉혔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이 뭐냐? 이미 구원시켜 놓고 우리를 구원된 우리 육을 재료로 해가지고 내가 구원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주께서 어떻게 해내셨느냐를 우리 인생을 통해서 계속해서 그걸 드러내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야 내 자랑 안하고 주님 자랑만 할 게 아니겠어요. 주님 덕분입니다. 이 소리가 나올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그냥 주님께서 계속 지연시키면서 생을 연장을 시켜주는 거에요. 코로나 기침하고 환자 옆에서 한다고 되는게 아니고 그냥 주께서 계속 살려내게 되면 코로나가 아니라 뭐가 와도 더 살게 되어있어요. 죽고 싶어도 못 죽게 되어있다니까요.
유럽 사람들이 사망자가 많은 이유는 이렇습니다. 왜냐하면 늙어서 그냥 사는 것보다도 죽는게 안 낫겠나. 나 마스크 안 쓴다 이래서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죽는 거에요. 아이고 나 더 살라고 애 안 쓴다. 차라리 외로운 것보다 사는 것보다 덜 고통스러운게 죽음이다 이래가지고 많이 죽는 겁니다. 말 안 들어서 죽는 거에요.
그래서 코로나 있고 난 뒤에 공기가 맑아졌다. 미세먼지가 없어졌다. 그것만 없어진 게 아니에요. 거리에 노인네들도 없어졌어요. 지하철 분위기가 확 좋아졌어요. 약간의 위로, 긍정적인건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전부다 계급장 다 떼고 나이 다 떼고 전부다 물속으로 다 입수. 다 들어와. 다 들어갔지요. 그러면 홍해 재현이기 때문에 홍해는 일단 홍해는 길을 내고 들어갔지만 이게 바다의 길이 났다는 것은 참 희한한 일이죠. 하여튼 진짜 희한한 일인데 그게 길이 물속에 있다고 봅시다.
물속에 있다고 본다면 전부다 다 들어오겠지요. 그럼 다 물속에 빠져 죽었지요. 죽음 안에 길이 있습니다. 죽어야 길이 있어요. 죽어야 길이 보입니다. 우리가 정신 차리면 길이 안보여요. “아 진짜 이런 일이라면 미쳐버린다.” 미쳐 버린다 하지 말고 그 경계선을 넘어 그 문턱을 넘으세요. 차 타면서 턱 있지요? 그냥 넘어서면 돼요 그냥.
문턱을 넘어서버리면 진짜 미쳐버리면 그렇게 편해요. 안 미쳐봐서 그래요. 진짜 미쳐버리면 내 관리, 내가 스스로 나 착하게 관리했다는 것이 얼마나 그동안 악마한테 속아 넘어갔는지 악마가 미워 죽겠어 정말. 결국 내가 착할 수 있다는 이게 악마가 준 마지막 미끼였다는 것을 발견해요. 너는 더 착해질 수 있어. 착하면 복 받는거야.
이거 뭐 주위에서 목사부터 해가지고 전부다 구라를 치니까 그래 착하면 복 받아. 내 자식이라도 복 받고 내 가정이라도 복 받겠지. 이번 일은 내가 나쁜 짓해서 우한이 있었는데 빨리 착해져서 빨리 원상회복하는거야. 본인이 마귀한테 속아서 그렇게 속아가지고 하는데 아까 그 말은 자기를 정상으로 본다? 비정상으로 본다? 계속 자기를 정상으로 보는 거에요.
정상으로 보면서 내가 착해질 수 있어 복 받는 것을 하나의 목적으로 하니까 비정상이 비정상 목적을 세운 거에요. 마귀는 좋다고 그거 갖고 노니까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그런 인간을 가지고 노니까 참 재미있지요. 자기가 알아서 기어들어오니까. 나쁜 짓하면 그냥 기도하다가 갑자기 꿇어앉아서 기도해. 주여. 그냥 기도해도 되는데 밥 안 먹고 기도하고 이렇게 나를 낮추고 이렇게 했는데 더 심하게 안하겠지요 주여. 애 만큼은 건강하게 해주십시오 이런 식으로.
하는 그 수법이 바리새인 같은 수법 그대로 따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누가복음 3장에도 나오지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 나오네. 누가복음 3장 7절에 나오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데 누가 나오느냐 하면은 여기 무리가 나오는데 세례 요한은 이렇게 봅니다. 세례 요한이 보는게 아니고 예수님이 보는거죠.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이게 한국말로 번역하면 이렇게 하면 안돼요. 개새끼. 이게 개새끼에요. 독사의 새끼들아가 개새끼야. 욕을 평소에 해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대로 독사의 새끼들아. 같은 이야기에요. 사람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정상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백성만 넣어주는 곳에 너희들은 겁도 없이 낄라고 그렇게 오느냐 이 바리새인들아. 너희들 잘하는 거 있잖아. 너희들 잘하는 거. 말씀 지켜서 복 받는 거 잘하는 거 있잖아. 왜 그거 하지 왜. 여기 온 사람들은 그런 착한 사람 아니야. 인생 포기한 사람들이야. 잘난 네가 왜 와. 잘난 네가.
이렇게 하면서 도끼 있으면 도끼로 찍어버려. 도끼로 찍어버린다 마태복음 3장에 그렇게 나오지요. 도끼로 찍어버린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엑스레이를 통과하고 있다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통해서 세례 주는 그것이 하나님 안보이니까 그냥 어떤 인간이 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건강검진 보통 1년에 한번씩 하라고 하는거 뭡니까?
건강검진하는 그 기계를 통과하는 거에요.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는거에요. 그런데 너희들은 와보니까 뭐였다? 독사의 새끼로 판정난거에요. 이게 하나님을 하나님 찾지 말고 바로 지금도 말씀 속에서 내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런 평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사람들이 자기가 정상적이면서 싫은 세상에서 지옥 갈 사람들의 평에 대해서 바들바들 떨고 있잖아요. 이게 무슨 정상입니까? 이게 무슨 정상이에요?
그리고 지옥 갈 사람들을 그렇게 부러워하고 나도 그렇게 평생 돈 못 벌어서 미안하고 뭐 이런 그런 생각 들고 지옥문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말라고 했잖아요. 제가 어느 설교에는 그런 표현했어요. 지옥문을 앞두고 사람들은 전부다 차례가 있는 거에요. 발발 떨면서. 그럼 천사가 아주 냉혹하게 이야기하지요. 다음 분. 그 다음에 다음 분. 전부 다 지옥 갈 사람들은 그렇게 가는 거에요.
그런데 천국 갈 사람들은 뭐 잘한게 있어요? 뭐 착한 일 했습니까? 다른 사람 지옥 갈 사람하고 똑같아요 하지만 어디로 불러옵니까? 미리 엑스레이 찍고 미리 CT 촬영하고 미리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이벤트 있잖아요. 이벤트.
그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요한복음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은 요한복음에서 특히 물을 강조한 것은 요한일서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물을 강조한 것은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이 물세례 할 때 성령 세례를 약속한 곳이 바로 요단강 물세례줄 때 왜 그렇게 중요하냐 하면은 똑같은 엑스레이 기계이기 때문이에요.
물세례도 엑스레이 건강검진 기계고 십자가, 아까 발라낸다고 했지요. 다 뜯어지고 예수님이 당했던 십자가를 예수님의 불세례라고 해요. 내가 받을 불세례 남아있다. 물세례 다음에 그 다음의 CT촬영이 뭐라고요? 불세례지요. 불세례인데 사람들 다 떨어져요.
불세례가 뭐냐 하면은 바로 이게 십자가를 불세례라고 합니다. 내가 받을 화끈한 것. 화끈한 저주를 말해요. 모든 저주를 받는 저주세례가 물세례라고 해봐야 뜨듯한 물 물속에 잠기는 하지만 어푸하고 빼내면 되니까. 그런데 이 저주 세례는요 저주를 옴팡 받기 때문에 그냥 저주를 받는 거에요. 버림받는 거에요.
나 너하고 같이 있지 않겠다. 함께 있지 않겠다. 제일 무서운 저주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제일 무서운 저주가 나 너하고 같이 있지 않겠다. 영원히 같이 있지 않겠다. 이게 제일 무서운 거에요. 남편에 있어서 제일 아내가 무서운게 뭐냐 하면 밥 안 해주고 그런게 아니고 밥 안 해주면 사먹으면 되잖아요.
난 너하고 같이 살지 않겠다. 이게 제일 무서운 거에요. 하나님이 같이 있지 않겠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같이 있는다면 네가 이 땅에서 거지가 되도 고마운 줄 알아라 너는. 함께 있는 거 되면 더 이상 다른 거 바라지 말아라. 함께 있다는데 거지 되는 것도 주의 뜻 아닙니까?
그러니까 함께 계신 분이 중요한 거에요. 물세례 때에 불세례 있는데 물세례 때 누가 들어옵니까? 지금 이게 문제인데. 대중탕, 남자 대중탕에 남자가 10명 정도 있거든요. 10명 정도 있다 이 말이죠. 요새는 목욕탕에 그런 거 없지만 우리 어릴 때 대중탕에 거기서 노래 부르고 우끼지도 않아요. 왜 목욕탕에서 노래 부릅니까? 자기 혼자 기분 좋으면 요즘 그런 사람 없습니다만은.
10명 앉아 있는데 여기 수건 들고 한명 들어와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물속까지 들어온 거에요. 그럼 물속은 어떤 동네다? 죽었지요? 죽었잖아요. 물은 잠수시키는 죽여버리는 거에요. 너는 사나 죽으나 살아도 비정상인데 죽어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죽었는데 죽음의 동기, 동창생 되어버린 거에요. 누가? 예수님이. 이게 하나님이 만든 구원의 장치입니다. 홍해를 재현시킨 거에요. 요단강 홍해를 재현시킨 거에요. 왜 이렇게 요단강에서 재현시켰느냐 하면은 원래 광야 끝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오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개판됐다고요. 개판되었으니까 재편한다고요. 새로 다시! 다시! 다른 의미로서 이제는 사막에서 들어온 겁니다. 전에는 요단강 건너서 약속의 땅에 들어왔지요. 지금의 세례 요한 때의 요단강은 뭐를 배제합니까?
독사의 새끼들은 배제하고 이거는 산 채가 아니라 물속에 죽은 채로 끄집어내는데 우리 같으면 물속에 들어갔다가 어푸~ 하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 하고 나오면 되잖아요. 뭐 그럴 수도 있는데 물속에 있을 때 다시 말해서 죽어 마땅한 죄 속에 물속에 같은 말이에요. 죽어야 마땅한 죄 속에 물속에 다 같이 있을 때에 예수님이 같이 죄 속에 같이 들어와요.
같이 들어온다면 세례 요한이 그런 일은 없지만 내가 일부러 꾸민다면 내가 물속에 또는 목욕탕 속에 10명 들어갔다 합시다. 어떤 사람은 답답해서 먼저 뛰어나올려는 사람도 있는데 세례 요한이 붙들어요. 아저씨 가만, 나오면 안돼. 나오면 안돼. 나오면 안돼. 자, 내가 신호줍니다. 하나 둘 셋에 같이 나오는 겁니다.
하나 둘 셋 하면 예수님도 따라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나오겠지요. 그걸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된 사람’.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는 경력이 이 육적인 재료에 하나의 코팅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코팅이 되어버렸어요.
이 몸은 어떤 몸이냐? 이미 죽은 몸이에요. 이미 죽었다는 말을 우리가 쓰는 시간 과거 현재 미래로 계산하지 말고 아까 에베소서 5장의 말씀처럼 영원한 현재로 계산해버리면 우리는 영원히 죽었기 때문에 영원히 산 사람이 되는 겁니다.
몸이 늙어간다는 것은 뭐 별로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언제까지 살지도 모르고 아무리 90을 살아도 되돌아보면 나는 하루를 산거에요. 95세를 살아도 다 산 것은 다 없어지고 지금 내가 느껴지는 것은 오늘 내가 살았다. 오늘 아침에 미역국 먹었다 그것만 기억에 남고 나머지는 다 없어지는 거에요.
마찬가지로 100세 산다고 기분좋은게 아닙니다. 지나가고 보면 늙은 얼굴이 한스럽고 사진 찍기도 싫고 몸이 이렇게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조그만 뭐하면 허리 아프고 아침에 일어나면 찌뿌둥하고 허리 아프고 잠도 안 오고 그러한 현재적 육의 컨디션 그것만 남지 과거의 튼튼했다. 지금 와서 왜 과거 이야기 꺼냅니까. 과거에 안 튼튼한 사람 어디 있어요. 다 튼튼하지요.
과거에 토실토실 피부 좋았다. 두 살 애들 두 살이고 한 살 애들이고 다 피부 좋아요. 아이들 다 피부 좋아요. 얼마나 피부 좋은지 할머니 이마까지 긁어가지고 상처내고 자기 맘대로에요. 어린애들은 책임을 묻습니까? 안 묻습니까? 안 묻지요. 책임을 묻는 것은 어린애들처럼 되지 못해서. 세상에서 그렇게 같은 도둑놈들이 책임 물어서 그렇게 된 거에요.
죄 없는 자가 뭐하라? 돌로 쳐라. 우리가 남을 평가하고 죄 없다는 게 아니에요. 다 같이 죄 있다 다같이. 택지개발 똑같아요 똑같애. 똑같기 때문에 내가 너보다 낫다는 소리하지 말고 똑같이 일괄적으로 처리하시는 일괄적인 처리에 CT촬영, 엑스레이 촬영 그걸 믿어야지. 그걸 믿어야지요. 그게 바로 물과 성령으로 어떻게 난다? 거듭나는 거에요. 거듭나는 거에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거에요. 한번 더 나는 거에요. 그것도 죽고 한번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다시 태어난 자만이 물의 의미가 무엇이며 영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겁니다. 자, 아까 이야기한 요한복음 3장 해봅시다. 그러면 이 불세례가 무슨 세례입니까?
이제 예수님께서 뼈가 되가지고 다 발라지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 다 도망갔지요. 누구만 남았습니까? 예수님만 남았지요. 저주로 인하여 예수님이 뭘 얻습니까? 피가 생산되지요. 피가. 피가 생산돼요. 이제부터 어려운 것은 뭐냐? 이 피가 누구 피냐 하면 예수님 피에요. 예수님의 개인적인 피죠.
어떻게 개인적인 피가 남의 죄를 씻을 수가 있습니까? 이거는 진짜 난감하기 짝이 없어요. 어떻게 어떤 특정 사람의 피가 다른 사람의 죄를 씻을 수가 있느냐 말이죠. 어떤 사람의 고름이 그 사람의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다. 이게 바로 그 면역체 아닙니까. 면역. 주사잖아요. 백신 이잖아요. 이거는 되잖아요.
이거는 되는데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우리의 죄. 병이 아니고 죄. 병은 눈에 보이지만 죄가 안보이잖아요. 죄의 증상은 의외로 상당히 낯설죠. 왜냐하면 죄의 증상은 죄가 있다는 증상은 뭐냐 하면 자신을 멀쩡하게 본다는데 있어요. 그게 정신병이죠. 아까 정신병자 이야기했지요. 죄가 있는 특징이 뭐냐? 남은 죽어도 나는 안 죽어야 되고 남은 걸려도 나는 안 걸려야 된다. 왜냐하면 나는 가치 있으니까. 이게 바로 증상이 보통 증상이 아니에요.
그게 바로 여기 7절에 나오는 “독사의 자식들아.” 원뜻은 독사의 새끼들아 되어있어요. 독사의 새끼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려 하느냐.” 그러면 장차 올 진노를 피하려 하느냐 하는 말은 이건 독사의 자식들끼리 이야기한 거죠.
그러면 이 진노를 그 역사 속에 세례 요한이 그 현장 속에서 뭘로 하느냐 하면은 물세례를 통해서 그걸 보여주는 거에요.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는 봐주는거 없다. 죄 있거든 그냥 다 죽어도 마땅하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 죽어도 마땅한데 라고 하는 그 현장에 누가 들어왔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왔지요.
어떻게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이걸 이제 그림을 그리면 쉽지요. 물이 있습니다. 물속에 10명의 장정이 들어갔다 칩시다. 여기에 예수님이 들어왔어요. 들어왔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개개인을 상대하지 않고 뭐하느냐 하면 이것. 물의 시스템, 심판의 시스템을 상대해요.
이런 것 보면 생각하면 됩니다. 그 물건 이름을 잘 모르겠는데요. 장식품인데 플라스틱으로 딱 고정시켜놨는데 그 안에 조개도 들어있고 빨간 산호도 들어있고 옛날에. 요새는 그런 장식품 없는데 산호하고 뭐 이렇게 조개같은 거 만들어 놓고 그걸 압축해서 플라스틱 만들어가지고 책상위에 놓으라고 딱 놓지요. 상당히 딱딱해요. 싸움할 때 그거 던져버리면.
그걸 뭐라고 합니까? 왜 그걸 예를 드느냐하면 인간들 여기에 완전히 그 딱딱한 플라스틱에 고정되어 있어요. 인간이 설친다고 죄 되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는다고 죄 안 되는게 아니고 설치든 고정하게 하든 이 시스템은 우리하고 상대를 하는게 아니에요.
우리하고 상대하는게 아니고 주님께서 이 시스템을 인간으로 하여금 죄인 만들게 된 이 시스템이 있어요. 이게 누구냐 하면 바로 악마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죽게 한 죄짓게 한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게 한 그 악마를 상대로 해서 하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하고 상대를 안해요. 착해라 훌륭해라 말씀 들어야지 우리하고 상대 하지를 않습니다. 주께서 우리보고 잔소리하는 것은 네가 아무리 해도 네가 지킬 수 없고 왜 지킬 수 없냐 하면 네 배후에 누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원수가 있기 때문에 너는 지키면 지킬수록 기껏 해봐야 진노의 자식, 바리새인 밖에 안 되는 거에요. 그걸 염두에 두고 주께서 친히 악마와 상대하시는 겁니다. 악마와 상대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쯤 되가지고 악마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짓을 했는지 그걸 아셔야 되겠지요. 알아야 되겠지요. 누가복음 4장 봅시다. 3장을 건너뜁니다. 4장에 보면 거기에 성령께서 예수님께서 일하기 전에 성령께서 예수님을 부릅니다. 불러가지고 예수님을 떠미는 거죠. 어디로 미냐. 악마가 있는 쪽으로 살짝 밀어요. 살짝 밉니다.
그럼 예수님은 등 떠밀어져 가보니까 그게 광야고 거기서 40일 동안 금식하는데 그걸 누가 맡느냐 하면은 여기에 마귀한테 시험을 받는다 했지요. 자, 아까 배운거 얼마나 아는지 복습해봅시다. 육적인 시간에서 육적인 인간한테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존재한테는 시간이 있어요? 없어요? 시간이 없어요.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악마도 마찬가지고 영원히 그 현재밖에 없어요. 현재밖에 없으면서 시간이 현재로만 있을 때 등장하는게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은 이게 등장해요. ‘관계’ 또는 ‘관계성’. 아까 제목을 뭐라고 한다고 했습니까? 제목을 잊어버렸다. 아! ‘비정상’. 제목 좋으네.
악마하고 예수님하고는 관계가 원수지간이에요. 원수지간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는 것을 부추겼기 때문에 원수가 된 거에요. 선악과 따먹은 취지는 여러분 잘 아시지요? 잔소리들을 때는 잔소리하는 자체를 없애버리면 더 이상 누구한테 지적받지 않을 수 있다는 이 악마의 사고방식, 악마는 자기를 지적하는 그것을 없애버림으로서 자기가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누구도 나한테 잔소리하지 마. 이게 악마의 모습이에요. 관계성이다 이 말이죠.
관계성인데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통해서 악마까지 다스릴 수 있는 모든 지배권을 예수님한테 다 주는 거에요. 예수님께 다 줘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게 주 되심이다. 주가 되심이에요. ‘주’. 하나님의 악마부터 해가지고 모든 천국 지옥 다 다스리는 그 권한을 예수님에게 주시고자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주가 될려면 여기 반드시 뭘 거쳐야 되느냐 하면은 전쟁을 해야 돼요. 악마하고 전쟁을 해서 승리자가 될 경우에만 주가 되시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가 못돼요. 요한계시록 12장에서. 그러면 지금의 악마는 뭐냐 하면은 주의 자리가 아들에게 주기로 되어 있는데 악마는 이게 싫어서 자기가 권세자가 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악마가 인간세계의 주인공, 이 세상의 신이라고 하는데 그 주인공할 때 모든 써먹은거 있잖아요.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악마의 모든 수법 있잖아요. 수법. 그 수법을 그대로 그 무기를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전부다 그 똑같은 수법을 거기에다가 다 적용시켜버리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못 이겼던 것.
첫 번째가 뭐냐 하면은 바로 40일 동안 굶게 한 것. 성령님께서 8장을 이렇게 보시는 거에요. 보시게 되게 되면 그 광야 40일 금식 그 곽구. 곽구란 말 알아요? 곽구. 케이스. 액자 안. 곽구. 그 곽구 안에가 마치 격투기할 때 철조망 쳐놓고 두 사람 넣어놓고 나머지는 관람 구경하잖아요. 그 곽구. 그 안쪽, 그 테두리 안쪽은 세상의 축소판이 됩니다. 세상의 축소판.
그동안 지금의 세상의 지배자, 악마. 악마 있고 저쪽에는 뭐냐 하면은 인간을 이 시간 속에서 데려가야 될 메시아, 자기 백성을 데려갈 메시아가 있지요. 그러니까 격투기에요. 양쪽 다 집어넣은 겁니다. 선제공격을 누가 합니까? 선제공격을 악마로부터 먼저 선공에 들어갑니다. 원래 선빵 때리는 거죠. 선공이 들어오죠.
어느 인간도 자신의 육체가 있는 한 굶고는 못산다. 먹고 싶은 욕망을 어느 인간도 이긴 적이 없다.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선공에 들어오죠. 그러면 이것을 누가복음 4장에 있지만 이걸 평소에 우리의 모습으로 돌아봅시다.
우리의 모습으로 돌아보게 되면 명예도 좋고 사랑도 좋고 다 좋지만 역시 귀한 것은 뭡니까? 돈. 제가 설교시간에 했지요. 부부가 이혼 못하는 것은 비용 문제 때문에 이혼 못한다고. 비용이 많이 드는 거에요. 가장 부부의 결혼의 기본은 돈입니다. 돈이에요. 이걸 뭐 신앙으로 포장하지 마세요. 다 발라내야 돼. 뼈다귀 다 발라내야 돼.
다 발라내면 피가 아니고 피 때문에 결혼 안했어요. 돈 때문에 한 거에요. 돈 때문에. 집사님은 아닌 것처럼 하는데 모든 부부가 다 그래요. 모든 부부가. 돈 때문에 하는 거에요. 돈 있으니까 사랑하고 이런 거에요. 여자 입장에서 볼 때 여자입장에서 가장 기본은 뭐냐 하면은 말은 안하지요. 자존심 상해서 말은 안하지만 무조건 남편아 너는 나를 먹여 살려야 한다.
그게 기본 중에 기본이에요. 먹여 살려야 돼요. 너 뭐 이쁘다고 내가 먹여 살려. 무조건 너는 나를 먹여 살려야 돼요. 나는 놀아도 되는데 너는 놀면 안돼. 네 자식 있잖아. 너 자식. 여자들이 보통 남자들보고 네 새끼 어떻게 할래? 하지만 사실은 자기 새끼에요. 네 새끼 해놓고 네 자식인데 무책임하냐 이렇게 한다고요.
돈입니다. 그거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모두 다 나는 돈 있어야 살아요. 이 비정상! 그렇게 욕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 이미 악마에 물들었기 때문에. 악마가 그렇게 가르쳐놨기 때문에. 따라서 교회 와서 사람들이 예수님 부르는 것은 돈 달라는 거에요.
그것도 돈 안주면 떼를 쓰고 주여! 주여! 노골적으로 돈 달라고 하면 되는데 그걸 우회해가지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면 되던데. 이렇게 기도하면 응답되던데. 자꾸 이런 식으로 하는데 딱 까놓고 이야기하면 돈 주세요, 돈 없이 못 살겠습니다. 예수고 뭐고 나는 돈이 우선이고 돈이 있으면 섬기지 말래도 섬기고 십일조할테니까 일단 돈 주세요.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니까 어느 인간이 마귀의 권세에서 못 벗어납니다. 불가능이죠. 불가능할 때는 그냥 주저 앉으면 돼요. 이게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거에요. 그래 나 죄인이다. 그 한마디에 마귀는 그 다음 답변이 막혀버렸어요. 착해 착해 착해야 복 받아 착해야. 선한 자에게는 복을 주신대. 성경 봐라. 선한 자에게 복 주신데 이렇게 되야 먹히는데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 말씀 앞에서 나는 아무도 나를 내가 남을 평가할 수도 없고 또 남이 나를 평가해도 평가받고 싶지도 않다. 왜? 죄 있는 주제에 뭐 잘났다고 나한테 평가해. 우리는 모두 택지개발이라 똑같애. 평탄해. 높아지고 낮아지고 전부다 주님 앞에서 완전히 전부다 죄인 되었어.
그 앞에서 마귀가 할 말이 없습니다. 할 말이 없어요. 유혹거리가 없다는 거에요. 유혹거리. 시험이거든요. 유혹거리가 없다고.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이번 주일 낮에 제일 중요한 포인트를 찾으라 하면 이거에요.
내가 있고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먼저 있고 내가 있어요. 이 한마디에 게임 끝났습니다. 게임 끝났어요. 말씀이 먼저 있고 내가 있는 거에요. 사두개인 중에 사두개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그거는 내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 일할 때는 바리새인이었죠.
그러나 주님 찾아오고 난 뒤에는 주님이 주님 되시기 위해서 내가 있는 거에요. 내 아픔 내 고통 내 인생 엉망진창된 거 이게 우선이 아니고 주의 말씀이 우선이에요. 말씀이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늘 우리에게 내 힘으로는 구원이 안 되는 불가능한 요소로 계속 오는 이유는 이미 우리가 구원됐기 때문에. 이미 구원됐기 때문에.
제가 아까 동영상 찍을 때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욥기 이야기했지요. 하나님께서 이미 욥을 구원시켜놓고 그 다음에 뭡니까? 마귀로 하여금 흔들기 들어간다 했지요. 똑같은 거에요. 마귀의 임무가 흔들기에요. 흔들 자에게 흔들어보는 거에요. 그러나 그 흔드는 것과 주님의 확정됨 어느 것이 우수합니까? 주님의 확증이 우수한 거에요. 주님의 확증이.
그래서 예수님께 찾을 것은 뭐냐? 예수님께 찾을 것은 예수님의 피하고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는 거에요. 예수님이 들어가셨던 물하고 내가 무슨 상관있어요? 우리는 물에 안 들어가고 물에 들어간 예수님 보지 말고 예수님 들어갔다면 수장됐다면 우리는 어디 가야 됩니까? 같이 어디가야 돼요? 물속에 예수님을 만나야지요. 내가 죽어야 되는데 예수님이 같이 죽었단 말이죠.
그래서 세례 요한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님이 세례 받을 필요 없습니다 할 때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로서 우리는 아버지의 의를 이루어야 한다.” 아버지의 말씀을 이뤄야 된다. 왜? 마귀는 아담한테 선악과 따먹으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선악과보다도 네가 우선이니까 따먹으라고 했고 주님은 말씀이 완성되기 위해서 네가 태어났다고 이야기했으니까 말씀되시는 주님이 먼저 물속에 계시고 그분이 먼저 떠오르면 다 같이 떠오르는 거에요.
예수님의 코스대로 우리가 밟아나가는 겁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했지요 그 다음에 뭡니까? 우리도 죽었다가 부활한 것. 예수님이 갔던 그 경로를 똑같이 밟아가도록 주께서 말씀으로 이끄시는 거에요. 방법은 “나 죄인이다. 나 비정상이다. 나 무너졌어.” “그런데 이만큼 사는 것은 다 주님의 과분한 선물보따리다.” 그렇게 사시면 되는 거에요.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누가복음 3장 다시 돌아가봅시다. 9절 이거하고 마치겠습니다. 8절. “너희들이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 돌들로도.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너희들은 뭐다? 너는 돌보다도 더 못한 돌. 죽음보다 못한 죽음이라고 했지요. 돌보다도 더 못한 돌. 돌은 잠잠히 있기나 하지. 왜 고함지르고 잘난 체는 어떻게 하는지 돌보다도 더 못한 돌.
그래서 여기에 “이미 도끼가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좋은 열매는 알곡을 말합니다. 예수님으로 파생된 가지들. 예수님으로 뻗어 나온 가지들. 출발이 예수님이고 출발이 내가 아니고 출발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에게 뻗어난 가지는 그 관계성이 말씀으로 늘 이미 확증된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은 내가 먼저가 아니고 나의 본체에 있는 말씀의 완성, 십자가가 먼저고 십자가에서 뻗어나온 것이 이 땅에 몇 년도 태아나야 했다. 그래서 어느날 우리는 십자가를 알았다. 다 인간들 비켜라. 나는 피만 보겠다. 그렇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바들바들 떨며 살지 말게 하옵소서. 아직도 우리한테 미련두지 말게 하옵소서. 있는 그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와 연결되어 있는 피의 증인인 것을 우리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