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빌 2장 5-8절(마음교체)2005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2장 5-8절입니다. 신약성경 318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오늘 본문 앞에 있는 구절, 2절에 “마음을 같이 하여”라고 했습니다. 또 “겸손한 마음으로”라고 했고요. 마음을 같이 한다, 할 때 인간들은 제각각 자기 마음이 따로 있기 때문에 같이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다른 이유는 자기의 과거가 다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의 과거가 다르고,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바가 다 다르기 때문에 마음을 같이 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틀어지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그 마음이 제각기 다르다는 데에 사람들은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고 어쨌든간에 내 마음은 어떤 경우라도 유지해야 되겠다, 버텨야 되겠다, 내 마음을 나는 변경할 마음이 없다는 이런 생각이 더 큰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남에게 지기 싫다. 바로 그 마음의 내용이 뭐냐? 내 목숨을 놓고 끝까지 내 목숨을 지탱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마음의 최종점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자기목숨이 계속되는 거기에 최종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최종점을 두고 다른 사람의 최종점, 다른 사람의 목숨과 다투게 되어 있지요. 끊임없이 거기서 경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같이 할 수가 없어요. 어느 것이 내 목숨유지에 유리한 조건인가를 사람들은 생각하기 때문에 내 마음을 포기를 못하지요. 평생 살아온 모든 과거가 지금껏 내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살아왔는데 그 다음을 포기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지금껏 버텨온 내 목숨을 포기할 마음이 있다는 그런 뜻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런 마음가지고는 하나님의 성령의 교제라든지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의 마음에서는 부합되지가 못한다고 되어 있어요. 인간이 과거로 살아가면서 기억하는 것은 내 목숨위주로 살아가는 그 마음밖에 없는데 무슨 수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겠느냐? 5절에 보면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되어 있어요.
마음을 교체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마음교체가 되는 겁니다. 정신개조지요. 하나님께서, 성령께서는 인간의 정신을 개조하려고 하는 겁니다. 정신을 개조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교체가 되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의 모든 마음이 내 목숨위주로 나가다가는 천국까지 이르지 못하고 막혀버려요. 자기마음은 내 목숨지탱하고 부지하려고 평생을 나에게 헌신하고 충성을 다 했는데 주께서는 안 받습니다. 받지를 않아요. 막아놨어요. 그래서 연속성을 유지할 수 없어요. 내 마음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연속성, 불멸성이 보장되는 마음은 사도바울에 의하면 어느 마음밖에 없느냐 하면 예수의 마음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마음만이 아버지의 마음과 통하기 때문에 이건 불멸하고 천국까지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나 위주의 마음은 어디서 막히느냐?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지요. 내 마음이지만 이 마음가지고 예수의 마음을 믿으면 될 것이 아니냐, 예수님을 믿으면 되겠지, 하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온 것은 살과 피에요. 사람 대 사람이 친하게 지내듯 하면서 “주님 저 알지요? 나도 주님 사랑합니다.” 이렇게 대충 얼추 넘어갈 것 같이 하는데 예수님의 죽음은 갑작스런 죽음이라서 제자들에게 충격이었어요.
여러분이 성경을 보면서 이 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이점을 놓치면 하나도 이해를 못해요. 갑작스런 죽음이에요. 이 말은, 나 예수가 제자들 너희 손에 쥐락펴락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 우리와 한패 맞지요? 그지요? 주님 가신 곳에 가겠습니다. 넣어주겠지요, 그지요? 주께서 약속하셨지요, 그지요?”
자꾸 이렇게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아부를 떠는데, 오늘날 교인들처럼 주님한테 아부를 떠는데 그 아부 떠는 속셈이 뭐예요? 평소 나의 기억, 나의 옛날 상투적인 나의 삶의 방식, 그것은 바로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던 겁니다. 나 위주의 마음이 변동이 없어요. 계속 가겠다는 겁니다.
천국가도 내가 아는 사람만 딱 천국 보내주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지옥보내기를 원하고요. 그 마음, 내가 천국가도 제일 1등이 되는 그 마음, ‘이런 마음을 예수님이 보장해줄 것이다.’ 하고 요새말로 하면 제자들이 열심히 교회 다녔다, 그렇게 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거예요. 시키는 대로 다 하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했으니 고생들을 얼마나 했겠습니까? 하지만 마지막에 예수님이 보여준 것은 살과 피였습니다. 12제자들뿐만 아니고 많은 사람들,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에 예수님이 이렇게 했습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
그럴 때 그 많던 제자 다 가버렸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그 많던 교인들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인력으로, 인간의 기존의 마음가짐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체가 일어나야 돼요. 정신개조가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못지않지요. 제자들도 자기중심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보고 묻지요. “너희들도 갈래? 갈 거냐?” 라고 물으시면서 예수님께서 해답을 내시지요.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주지 않으면 너희들도 마찬가지로 떠날 사람들이다. 내가 너희를 택했다. 선택했기 때문에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게 만들겠다.” 다시 말해서 필히 너희들에게는 내가 마음개조, 마음교체 시켜주고야 말겠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교체, 아버지와 연결되는 마음교체를 네 속에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자들의 기존의 마음, 성도들이 성도되기 전에 갖고 있던 기존의 마음, 내 목숨위주, 내 과거위주, 내 기억위주의, 나 중심위주의 마음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의 마음이 오게 되면 우리 마음은 죽은 마음이 되는 겁니다. 이게 뭐냐? 내 목숨에서의 최종성이 최종점일줄 알았는데 최종점이 변경이 되는 겁니다. ‘내가 죽으면 안 돼.’ 그 고집 때문에 내 목숨 부지를 최종점으로 여겼는데 최종점이 뒤로 물러가게 되면 ‘이제는 죽어도 괜찮아.’가 되어버려요.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것은,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내 목숨부지에 도움 되느냐, 불리하냐? 내 목숨가지고 천국 가는데 도움 되느냐, 불리하냐?’ 이것만 생각했다는 말이지요. ‘어쨌든 저쨌든간에 나는 잃으면 안 돼. 나는 죽으면 안 돼.’ 이런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그게 최종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최종점에 변경이 일어나는데 그 변경이 일어나는 이유, 원인이 뭐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구원방법이 우리에게 하소연하거나 설득하는 방식이 아니고 우리를 악마로부터 빼앗아오는 방식을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 29절에 보면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이미 악마한테 사로잡혀 있는, 완전히 거기에 갇혀 있는 자기백성을 데려오는 방법은 그 갇혀 있는 인간에게 호소하는 방법이 아니에요. 반군의 우두머리의 머리를 치고 그다음에 반군에 잡혀 있는 자기사람을 데려오는 방식 외에는 다른 구원방식 없습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구원받고자 시도해서 구원되는 방식은 백퍼센트 사기입니다. 백퍼센트 사기에요. 내가 움직여서 나를 건져내는 방법은 악마가 제시하는 방법입니다. 이거 할까요, 저거 할까요, 이거 하면 됩니까, 저거 하면 됩니까, 선교하면 됩니까, 봉사하면 됩니까, 어떤 방식을 소개받아서 그 소개받은 방식대로 열심히 해서 구원된다고 가르치는 집단, 그것은 예수의 마음이 아니고 악마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십자가의 효과를 가로막고자 하는 악마의 수법입니다.
죄라는 것은요, 십자가의 효능과 그 효과를 모독하고, 가리고, 예수님의 피의 효과, 내 살과 내 피의 그 효과를 완전히 가려버리는 그것이 악마 사기꾼의 수법입니다. 그런데 이 수법에서 예수님에 반항하는 반군에게 사로잡혔다는 의식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왜냐하면 홀딱 빠졌기 때문에. 인간에게 반대되는 인간세상은 없어요. 협력단결해서, 합심해서 신종코로나 이겨내자, 마음을 같이하지 인간이 인간을 반대하는 세계는 인간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여러분이 잃어보셨잖아요.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걸 포기하사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은, 인간세계가 본인이 어디에 잡혔는지 전혀 감이 없어요. 안 잡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협력하고, 내가 나를 설득하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의견을 모으게 되면 이 난관도 극복한다.
이 난관을 극복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내 목숨을 지금껏 부지해온 것처럼 오늘의 생활도 내 목숨 부지하는 것이고, 내가 생각하고 끄집어내는 모든 행위자체가 그 마지막 최종점이 뭐냐? 어떻게 하면 신종코로나에서도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느냐? 이태원의 술집에 안가고, 마스크 쓰고, 손 씻기는 30초 이상, 생일축하 합니다, 그 노래 두 번 부르면서 씻고, 그렇게 해서 하는 모든 노림수와 생각이 내가 최종점이니까 내가 죽으면 안 되니까 어떻게 그걸 버텨내느냐, 그 마음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마음자체가 악마에게 갇혀 있는 마음씨라는 것을 우리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뭐냐? 주님께서 레펠 타고 오시는데……, 여자분들 군대 안 갔다 와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지요? 저는 군에 갔다 왔어도 안 해봤습니다만, 절벽에서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뒤로 해서 밧줄 하나 의지해서 거꾸로 내려오는 것을 레펠 탄다고 하거든요. 헬리콥터에서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고요.
주께서 거꾸로 뒤집어서 내려오시는 거예요. 이건 뭐냐? 인간세계, 내가 있는 환경자체가 반대라는 것, 하나님보시기에 반대가 된다는 생각을 어느 인간도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거꾸로 오시는 거예요. 이미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인간세계는 하나님 앞에 노출되었습니다. 이걸 아셔야 돼요. 하나님 앞에 노출되었다는 말은, 좋게 노출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세계의 움직임은 하나님이 하는 일에 반대, 반항하고 대드는 식으로 움직이고 있음이 노출된 겁니다.
특히 하나님이 하신 일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대표적인 것이 이 땅에서 인간들이 신을 만드는 거예요.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寶化天尊)’ 이것이 신 이름입니다. 도교에서 나오고 증산교에서 나오는 신이에요. 그 종교를 가진 사람은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이라는 그 이름만 외우면 만사가 다 형통이 돼요. 참 편하지요.
그 신에 대해서 증산교나 도교에서 뭐라고 설명하느냐?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寶化天尊)’은 어떤 신인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아버지이며 만령의 스승이므로 하늘의 재난이나 행복,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다스리고 탄생과 성장의 열쇠를 쥐고 있다. 따라서 위로는 천황이나 아래로는 지옥의 장관에 이르기 까지 그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일을 집행할 수 없다.” 이게 신이에요. 이름도 길어요.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
‘남묘호렌게쿄’랑 똑같은 거거든요. 모든 인간의 기존의 마음에서 이렇게 신을 규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입니다. 심지어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이라는 이 말을 내가 괄호를 치고 여기에 예수, 하나님, 여호와, 삼위일체 집어넣어보세요. 내용은 똑같아요. 내 목숨 살려주는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에요. 그뿐이에요. 반대방식이라는 것은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너는 죄인이야, 라는 그런 내용이 없어요. “너는 지옥가야 돼. 딴 소리하지 마. 구원은 없어.”라는 말이 여기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신,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에는 없고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수, 하나님, 여호와에도 그 내용이 없다니까요. 거기서 거기에요. 똑같은 사기집단에 걸려든 거예요.
그게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아담류’에서 ‘새아담류’로 바뀌거든요. 아담류, 아담이 한 아담이 아니고 아담이 숫자가 많아요. 개체수가 많아요. 오늘날 77억입니다. 아담류에서 새아담류로 바뀌면서 개인이라는 것은 날라 가버립니다 개인구원이 날라 가버려요. 내가 소멸된다고요. 내 기억이 소멸되고 내 과거가 무시되고 없어지는 거예요. 사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이라는 신, 악마가 만든 신은, 네가 잘돼야 그게 좋은 신이라고 우리에게 설득을 해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이 세상에서 규정된 신의 내용과 나의 내부와 서로 통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반군, 악마지요, 악마가 우리 안까지 접수를 하고 점령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탈출을 안 합니다. 탈출 안하고 좋은 세상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어요.
불교의 부처의 자비 그리고 유교의 조상숭배가 왜 이렇게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쉽게 받아들여집니까? 드라마에서 십자가 이야기하는 것 봤어요? 나오면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제사는 드리고 부처 이야기는 하거든요. 그건 뭐예요? 오늘날 매스미디어가, 신문이나 방송매체가 세상을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정신을 대변하거든요.
인간을 부정하는 어떤 것도 우리 대장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으니까 방송 내보내지 말라는 거예요. 심지어 기독교방송에도 안 나와요. 기독교방송은 인간이 어떻게 구원되느냐 하는 이야기에요. 사람들은 들을 때 개인적으로 들어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로 들어요. 그러나 성경에는 인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세계는, 인간이 있으니…… 이것은 제가 이스라엘 갔을 때 유대교대장하고 이야기하면서 분명히 확인을 받은 거예요.
유대교가 뭐냐? 인간은 있다. 왜 있느냐? 신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이 있다. 신이 있다. 세상이 있다. 세상에서 사명 감당하자. 이게 유대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냐? 예수님이 나타났다. 아버지 계시다.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았어요. 없어요. 아버지는 숨어계시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은 다 가짜였던 거예요. 예수님이 나타났다. 신이 계시다. 죄인이 있고 세상은 망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없고요. 인간의 이미지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반군이 만든 것이고 인간은 없어요. 이 세상은 죄인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없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은 하나님이 오늘 본문에 의하면 뭐로 나타나느냐? 십자가 살과 피를 흘리는 그 분으로 오신 거예요. 인간이 찾는 하나님, 오늘 몇 번을 말하는데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 이런 신은 없어요. 진짜 하나님이 인간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쳐들어 오셨거든요.
오셨을 때 사람들을 보니까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리고 있었던 거예요. 다른 신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자들에게도 쇼크였어요. 제자들도 솔직하게 말해서 나 저분 모른다고 하면서 한결같이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예수 안 믿는 것이 인간답고요, 죄인답고, 예수 믿는 것은 솔직하게 기적입니다. 이것은 기적이에요.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는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이에요. 가짜예수입니다. 나 자체가 없어요. 내가 사라져야 돼요. 내 기억이 사라져야 돼요. 만약에 천국가게 되면 주님이 물으십니다. “너 무슨 일이 있었어?” 하면 천국에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요. 아무 일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뀌었다는 것, 기존의 내 마음, 내 사적인 욕망, 내 살고자 하는 그 마음과 교체해서 들어갈 때 내가 보기에 내가 선택하고 판단하기에 괜찮은 마음이 와서 교체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역겨워하고, 내가 거부하고, 내가 무서워서 도망치는 살과 피, 십자가의 마음이 나한테 쳐들어온 거예요.
따라서 내가 내 목숨 부지하는 것이 최종점이 아니고 이미 악마 속에 있을 때는 뭐가 최종점인지도 몰랐지요. 이쪽에 있을 때는 몰랐어요. 예를 들어 금붕어가 어항의 물속에 있을 때는 자연스럽잖아요. 그러나 그 금붕어를 어항 속 지점에서 어항 밖 지점으로 내놓게 되면 이건 죽어라고 펄떡펄떡 뛰지요. 물 없다고 난리잖아요.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는 나는 괜찮은 존재에요 살만큼 살았고, 배울 만큼 배웠고, 인품이나 인격도 모자람이 없고, 예의범절 바르고, 교회 와서도 남에게 싫은 소리 안들을 정도로 착실하게 살았고, 부모 효도할 줄 알고, 자식 잘 키울 줄 알고 괜찮은 존재인데 주님에 대항하는 이 세상에서 빼내져서 나와 보니까 천하에 죄인이에요, 천하의 죄인. 죽은 존재에요.
마음이 천국에 갈 마음이 없이 지옥에 갈 마음가지고 우리는 괜찮다고 본 거예요. 이정도 하면 인간답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 인간다운 것 없어요. 빼내 보니까 지옥에 부합하는 합당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여러분, 이미 죽은 자만이 충분히 자유로울 수가 있어요. 자기가 사적으로 살았다고 하면 그것은 자유가 없습니다. 늘 불안불안 합니다. 남한테 욕 얻어먹을까 싶어서. 심지어 최종점 내 목숨 죽을까 싶어서.
그래서 성경에서는 로마서 5장에서, 아담에서는 다 죽었다고 본 거예요. 사도바울 통해서 이야기했어요. 아담 안에서는 다 죽은 거예요. 죽었는데 이것은 단체로 아담류, 아담의 종류가 다 죽은 거예요. 뭐 부자고 가난하고 그런 것 필요 없어요. 내가 부자였다, 내가 가난했다, 그런 기억도 소용없어요.
성경에 분명히 나오거든요. 전도서 2장 15, 16절에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똑같다. 부자나 가난한자나 똑같다. 과거에 내가 잘나갔다, 못나갔다. 결국은 똑같은 거예요. 왜? 기억자체가 차이가 나더라도 기억자체가 제거가 되어버리니까, delete가 되니까 천국가면 주님께서 “너 무슨 일 있었나?” “아무 일 없었어요.” “그렇지.” “여기가 좋사오니” 끝나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쪽, 어항 속에서, 세상에서 끄집어낼 때는 기억을 제거시키기 위해서, 모든 기억, 모든 과거를 다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맨 날 과거 때문에 살지만, 과거의 그 일을 보상받기 위해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해서 몸부림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이러한 몸부림 같은 것은 자아가 형성한 것이기 때문에 자아자체를 없애버립니다. ‘자아’라 하는 것은 기억의 다발을 자아라고 하거든요. 기억의 다발. 자아가 남하고 왜 싸웁니까? 내 기억하고 네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싸워요. 부부가 왜 싸워요? 자기 어릴 때 기억과 살아온 방식이 배우자의 것과 다르기 때문에 싸우는 겁니다.
그래놓고 오늘 본문 빌립보서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한 마음을 품으라? 한 마음이 되라고? 무슨 한 마음이 돼요? 한 마음 마트는 있다만 무슨 한 마음이 됩니까? 한 마음이 안돼요. 기억이 다르고 살아온 과거의 모습과 버릇이 다른데 어떻게 한 마음이 됩니까? 한 사람은 잔소리하고 한 사람은 기죽고, 그렇게 살지요. 그래야 가정의 평화가 되지요. 양보하는 것이지 무슨 한 마음이 됩니까?
한 마음 되는 방법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교체가 될 때 그것은 단체로 교체가 돼요. 예수님이 새아담 또는 마지막 아담인데 성령을 통해서 새 아담으로 교체를 시켜버립니다. 교체를 시켜버리면 우리가 뭐가 되는가? 나의 기억은 없고 예수님의 기억,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 다 주께서 이끌어주신 덕택입니다.”라고 어떤 경우든지 주님의 기억으로 되돌려줄 수 있는 마음, 성도들끼리, 교인들끼리 만날 때 그 마음으로 한 마음이 되는 겁니다.
“당신은 무슨 수로 빠져나왔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효과였습니다.” “당신은?” “나도 그 효과 받았지요.”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은 거예요. 그 효과를 나의 쓸데없는 기억 가지고 방해하지 마세요. 제가 자세히 보니까, 사실 자세히 볼 것도 없는데 자세히 보니 ‘빼빼로’ 과자에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그냥 반들반들한 빼빼로, 초콜릿만 코팅한 것이 있는 반면에 또 하나는 땅콩 부스러기를 넣고 초코로 코팅한 빼빼로가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효과로 우리는 거저 구원받은 거예요. 아무 예상도 못했는데. 친구들이 생일 닥치면 깜짝 파티 하지요. 서프라이즈, 하잖아요. 깜짝 놀라잖아요. 주께서 예수님의 피의 효과로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이렇게 깜짝, 구원받을지 생각도 못했지요.
이것은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악마가 자꾸 땅콩부스러기를 갖다 붙여놓습니다. 구원받았으니 봉사도 해야 되고, 헌금도 해야 되고, 과거에 네가 착했느니 마니 자꾸 인간의 행함을, 땅콩 부스러기를 붙여 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분명히 예수 믿고서 기뻤는데 그 다음부터는 뭐가 없어졌느냐? 기쁨이 없어요. 너무 달라붙었어요. 나 다시 옛날처럼 사적으로 너보다 더 잘난 사람 되고 믿음 더 좋은 사람 되기 위한 땅콩부스러기가 너무 많이 달라붙었어요. 주께서 탈탈 털어버리죠.
그러면 또 아프다고 난리입니다. “주여, 이거 가져가면 나는 더 이상 교회 못나옵니다. 이것 가져가면 나 삐져서 교회 안 나옵니다.”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 보고 싶은 것은 십자가 피의 효과가 보고 싶은데 이것은 자기 행함의 효과, 그 행함의 효과를 자랑질 하고 싶어서 난리도 아니에요.
마태복음 8장에 유명한 대목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풍랑 만난 그 대목이 십자가 이전에 주께서 일을 어떻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풍랑 속에서 제자들은 홀로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풍랑 속에서 불쌍한 제자들만 홀로 있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은 풍랑을 비켜서서 산 위에서 제자들이 고생하는 것을 희희낙락하면서 지켜만 봤다.’ 그게 아니에요.
마태복음 8장에서 갈릴리바다에서 풍랑이 일었을 때 그 풍랑 속에서 제자들과 예수님이 함께 있었던 겁니다. 함께 있으면서 제자들은 뭘 봤느냐 하면, 풍랑을 본 거예요. 저 풍랑이 나의 최종점, 내 목숨을 죽인다고, 내 목숨을 죽이려고 달려든다고. ‘저 풍랑에 의해서 물이 배에 차거나 배 뒤집어지면 우린 완전히 골로 간다. 내가 살아온 보람도 가치도 의미도 다 날라 간다. 그러니까 나는 살아야 돼.’ 라고 풍랑 속에서 감출 수 없는 자기본색이 드러난 거예요.
그런데 그 풍랑 속에서 예수님은 주무시고 있다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사실은 도대체 제자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마음이 바뀌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자기 살 궁리에 급급하다 보니까 제자들이 주님을 어떻게 활용하고 이용하느냐? 잠자는 주님을 깨웁니다. 깨워서 자기들 살려 달래요. 살려달랍니다. 그래놓고 그게 훌륭한 믿음인양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기서 책을 한 권 소개하고 싶은데요. <할미꽃 엄마가 쓴 쪽지일기>라고 되어 있어요. 이 책에 제가 지금까지 본 어느 책에도 없는 것이 있어요. 나이가 84세 되신 할머니가 하루하루 쪽지 일기를 썼는데 그 할머니의 글씨체 그대로 한쪽 면씩 다 담아놓은 책은 제가 처음 봅니다. 옛날 분의 글씨라서 잘 못 알아보겠어요.
그리고 다른 한쪽 면에는 깨끗한 인쇄글자로 넣어놓았는데 이 할머니가 남긴 일기 51페이지에 보면 찬미가, 할머니 어릴 때의 우리나라 교회 초창기의 찬미가 전문이 실려 있어요. “천하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는 못 바꾸네. 세상 허욕에 마음 빼앗기지 말라.”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엄청 길어요. “고향진미 진수성찬 먹고 놀 때에 우리 문밖 거지 나사로 술 한 잔 안주네. 혼자 먹고 즐기면서 놀던 이 내몸 지옥 가서 고생할지 누가 알리요.”
이런 식으로 옛날 신앙생활 했던 모습이 순박하게 다 나와 있습니다. 돈 안 받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교인들한테 한 가정 한권씩 나눠주기로 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 초창기, 일제시대 때, 희망 없을 때 이들은 예수를 어떻게 이해했고, 어떻게 신앙생활 했는지 옛날로 돌아가서 한 번 보라고요. 돈은 이미 다 지불했으니까 여러분은 따로 안내도 됩니다.
풍랑이 일 때 왜 주님께서는 사전에 풍랑을 잠잠케 안했는지, 그 이유가 뭐냐? 지금 주님이 계시잖아요. 주님의 마음이 있어요. 그리고 주님의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끌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마음과 대조되는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자들을 선택했거든요. 제자들은 호들갑을 떨고 있어요. 풍랑 속에서.
예수님께서 누구부터 꾸짖는가? 풍랑을 꾸짖는 것이 2순위고, 제자들보고 꾸짖는 것이 1순위입니다. “내가 여기 있잖아, 얘들아!” 다시 말해서 나 예수가 옆에 있어도 무서워한다는 말은 현재 네 마음하고 나 예수의 마음하고 불합치하다는 뜻이에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네가 천국 가고자 하는 그 방식과 내가 천국 보내는 방식이 합치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게 같지 않다는 뜻이에요.
인간의 최종점은 자기 목숨부지하고 천당 가서 자기 목숨 영원히 보장하는 그것밖에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이는 겁니다.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그것조차 기억이에요. 이것은 나의 존재가치와 의미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에 막혀버려야 돼요. 막힌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실컷 살았는데 “오지 마, 끝! 끝이야. 그 식은 여기서 스톱. 여기서 다 막혔어. 안 돼. 하나님이 안 받아.” 그런 뜻이거든요.
그동안 하나님이 안 받는 방식으로 천국 가겠다고 나서는 것, 얼마나 이게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지역화폐는요, 백화점에서 안 받습니다. 자, 그렇다면 지금부터 어려운 내용을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서로 아는 사이가 된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모세가 엘리야를 알고 엘리야는 모세를 알아요. 왜냐하면 거리가 약 6백년쯤 텀이 있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알아보느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 둘은 새로운 새아담류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같은 아담, 세상에서 인간이라 하니 인간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서로 공통점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도 살고 싶고 나도 살고 싶으니까 이 참에 우리가 힘을 합해서 신종코로나 이겨내고 살자.’ 할 때는 그 목적 하에서 서로 의견이 맞고 통하는 것이 있어요.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마음이 통하는 것은 기존의 아담류가 아니고 새로운 아담류,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로 인하여 서로 둘은 아는 사이가 되고 통하는 사이가 되는 겁니다. 그 마음이 뭐냐? 아담의 마음이 아니라 새아담 마음, 예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그게 성립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마음은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창세기 30장 37절에서 39절에 보면요. 기니까 제가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야곱이 삼촌 집에 취직해서 품삯을 받는데 품삯은 따로 없어요. 양이나 염소나 가축이 새끼를 낳게 되면 그 중 일부를 먹는 식의 계약을 해서 무려 20년을 야곱이 삼촌집의 직원으로 있었던 겁니다. 계약조건이 뭐냐? 몸에 무늬가 있는 양들이 나오면 네 것으로 하고 나머지는 삼촌이 먹는다. 그렇게 되었어요.
그럴 때 야곱이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 가지를 취해서 껍질을 벗겨놓고는 양이 물 먹을 떼 그 앞에 두니까 유전자 변이가 일어났는지 거기서 새끼를 배면 얼룩얼룩한 것, 점 있는 것, 아롱 진 것을 새끼로 낳았다는 겁니다.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창 30:37-39)
실하고 비실비실한 양이 오게 되면 살구나무 가지나 신풍나무 가지 치워버려요. 뭔가 값나간다 싶으면 그 앞에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 가지 껍질 벗긴 것을 세워두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품삯을 넉넉하게 주기 위한 특혜를 베푼 거예요. 야곱은 이것을 복으로 이해한 겁니다. 복이 뭐냐? 양이 계속 새끼를 치고 또 치는 그것을 복으로 본 거예요.
그랬던 야곱이 창세기 32장에서 소와 양떼와 나귀와 노비를 많이 거느리고 오면서 이제 자기는 ‘복을 몰고 왔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다. 그래서 나는 복된 사람 맞다.’ 이렇게 자부하고 30장에서 떠나서 32장에 옵니다. 32장에 오게 되면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면서 야곱이 죽어요. 야곱이 죽고 그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조건하에 삽니다.
아담류에서 새아담류로 바뀌게 돼요. 그러면 아담류, 기존의 아담에서 내려오는 복은 복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면 뭐가 복이냐? 새아담류에서는 야곱이 자식을 하나 낳는 것이 아니고 열두 명을 번식해야 돼요. 마치 양 새끼를 번식하듯이. 그 열둘이 새 아담류에서는 또 열둘을 번식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택한 숫자가 찰 때까지 계속 번식하는 번식의 과정을 숫자로 표현한 것이 요한계시록 7장의 14만 4천입니다. 12×12, 그 다음에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숫자 1000을 곱하면 14만 4천이 나와요. 이것은 누구작품이냐? 이스라엘작품입니다. 야곱의 작품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야곱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이 이스라엘이거든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되어서 예수님 스스로 자기 새끼를 까는 거예요. 마치 전에 아담이 육으로 자기새끼를 77억이나 까놓았듯이 지금 예수님께서 택한 백성이 숫자에 찰 때까지 자기 백성을 계속 까는 겁니다.
깔 때 원칙이 있어요. 아담계통에는 아담의 새끼를 까잖아요.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다고요. 그래서 자식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자식이 생겨나요. 그런데 새아담류는 뭐냐? 아들의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거꾸로 가는 거예요.
이삭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운명이 바뀌어요. 이삭으로 인해서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된다고요. 아브람이라는 남자가 아브라함이 되는 이유는 안에 뭐가 잠복되어 있느냐? 이 땅에 아담노선이 아니고 새아담류에 속한 구원받는 새백성의 요소가 그 안에 잠재되어 있다는 조건하에 미리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하십니다.
아브람에게서는 자식이 없어요. 이스마엘이 있어도 그것은 자식 아니에요. 썩을 인간, 썩을 자식이고 아브람에서 장차 새로운 노선으로 바뀌면서 천국에 갈 백성의 자식을 미리 예견하고, 예견된 것과 아브라함이라는 존재가 연결될 때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복잡하지요.
다윗에게 아들이 있었어요. 아들이 많았는데 그 많은 자식가운데 솔로몬은 형이 없어요. 세상적으로 보기에는 솔로몬에게 형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아들을 줄 때 어떤 아들이냐? 솔로몬에게만 다윗의 왕권을 줘요. 다윗은 기존의 육의 여인들과 혼인한 것이 아니에요. 소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인간하고 결혼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죄인됨을 알려줄 여자와 혼인하고, 그럼으로써 여자도 죄인 되고, 다윗도 죄인 되고, 솔로몬도 그 죄인됨을 극복했다는 징표로서, 증표로서 자식이 태어나는데 그 자식이 솔로몬입니다. “다윗아, 밧세바야, 나는 네 죄를 용서했다.” 그 증거물로 솔로몬이 나와요.
그래서 이것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원래 주의 이름은 누구 이름이냐,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입니다. 그 주의 이름이 사도행전 8장에서 사울이 만난 그 주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그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주의 이름이 돼요.
사도행전 2장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아들의 이름이 아버지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아까 이야기했지만 이 땅의 아들이 유일한 하나님으로 등장해야 비로소 그 때 뒤따라서 아버지가 아들 안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더불어서 그 아버지를 ‘아바아버지’라 부르면서. 성령이 아니면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가 없어요.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아버지를 부를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자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내 기억과 내 과거가 죽은자가 될 때만 비로소 우리는 ‘아바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겁니다. 내가 없다는 조건하에.
그래서 성도가 라면 하나 끓여 먹든, 무슨 행동을 하든지, 테니스를 치든지, 여행을 가도, 누구 앞에서 연설을 하고, 설교를 한다 할지라도, 글을 쓴다 할지라도 이것은 죽은 자가 되살아나서 하는 설교요, 글이요, 행동이요, 라면을 끓여먹는 겁니다. 라면이 좀 퍼졌다 해서 실망하지 마세요. 어차피 죽은 귀신입니다. 죽은 귀신이 진라면인지, 신라면인지, 그것 따지면 안 되겠지요.
“내 인생 왜 이 모양 이 꼴이냐? 내 인생 왜 말아먹었느냐? 왜 꼬이느냐?” 그러지 마세요. 이미 죽은 귀신입니다.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그냥 아담에서 죽고 새아담에서 살아난 거예요. 그 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겁니다. 내 몸을 만지지 말라는 그 말이지요. “네가 만질 몸이 아니다. 인간아. 성령받기 전까지는.”
요한복음 20장 17절의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같은 류가 아니에요. 이거 기적 아니면 못 알아들어요. 이거 팩트입니다.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냥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 믿으려면요, 십자가 죽고 부활할 필요 없어요. 주님 앞에 말씀대로 잘 지키면 돼요.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이러면 돼요.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아니에요. 사랑 있다는 내가 죽어야 되고, 믿음 있다는 내가 죽어야 되고. 성도 입장에서 볼 때 믿음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이 골치 아파요. 차라리 믿음 없이 살면 편한데 꼭 자기 믿음 자기가 유지하려 하니까 이것은 유지하지도 못할뿐더러 이게 가짜거든요. 가짜입니다.
죽은자에게 무슨 믿음이 필요합니까? 그 관계가 믿음이지요. 죽은 자에게서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원하지 않아요. 주께서 주신 그 관계 선물이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집에서 오늘 아침에 일어나게 되면 문 앞에, 아담에서는 전혀 안 오던 선물, 택배가 안와도 새아담한테서는 택배가 이만큼 쌓여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오늘도 너 죽지 말고 또 살아야 돼.” “주여, 언제 데려가십니까?” “기다려 봐, 기다려봐. 이제부터 너 사형당해야 돼. 네 것 없는 것 알지?” “없는 것 압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너를 죽을 때까지 다룰 거야.” 계속 다뤄지는 거예요.
새아담 세계에서, 천국백성세계에서는 아버지와 통하는 마음, 아버지와 끊어지지 않는 마음, 연속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이것을 지난 시간에 겸손이라 했고 오늘 이 시간에는 바로 예수님의 위에서 거꾸로 레펠 타는 마음, 거꾸로 처박는 마음이에요. 십자가 죽으시기까지 복종하신 거꾸로 처박는 마음이에요.
이거 예수님의 기억입니다. 예수님의 과거사에요. 따라서 나의 과거사가 예수님의 과거사로 교체되고, 나의 기억이 주님의 기억과 교체되는 겁니다. 집에서 앨범 보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고 앨범 보세요.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내가 참 이맘 때, 20대에, 살려고 밥 먹고, 살려고 호강해 보겠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으이고, 쓸데없는 짓, 아담류에 속한 짓, 그걸로 천국 가겠다고 또 얼마나 충성 봉사했는지. 주께서 복줄 줄 알고, 취직시켜 줄줄 알고, 내 맘에 드는 여자 만날 줄 알고 얼마나 충성 봉사했는지.”
이것은 나의 기억입니다. 이것은 빼빼로에 붙어 있는 땅콩 부스러기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식으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빼앗아내는 것, 빼앗아내서, 금붕어 어항에서 나와서 옛날 어항, 귀신이 되어서 다시 들어가 보게 되면 우리의 자유는 충분하고, 어떤 경우라도 신종코로나 아니라 뭐가 와도 우리의 기쁨은 넉넉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방식이 아니었고 주님에게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을 우리가 몰랐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내가 엉터리로 살아왔고, 악마한테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이제는 나의 생활이 아니라 주님의 살아 있음을 증거 하는, 주님의 십자가의 효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을 만끽하며 증거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