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원천
2020년 5월 24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2:12-14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구원, 또는 구출이라는 단어를 뜨면 사람들은 곧장 자신의 미래상을 미리 그려보게 됩니다. 지금은 힘든 인생을 살지만 미래는 잘 될거라는 희망을 ‘구원’이라는 단어에다 담고 매력을 느낍니다. 하지만 구원의 원천은 ‘나의 존재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반대입니다. ‘나의 죽음’입니다.
즉 ‘내가 죽어 마땅함’을 분명히 하시는 그 조치에서만 구원이 나옵니다. 이것은 현 인간을 그대로 천국에 넣어줄 수 없다는 하나님의 단호함의 표현이기도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구원과 하나님이 말씀에 의해서 주어진 구원은 정반대의 성격을 보입니다. 이 정반대의 성격으로 인해 이 땅에 기이한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죽인 사건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씀드려서, ‘인간들이 살고자 하는 구원의지에 의해서 하나님의 죽임을 당하는 결과’를 낳은 사건입니다. 이로서 인간의 구원의지와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결코 같을 수가 없음이 분명합니다. 이 분명함이 진짜 구원의 원천이 됩니다.
예수님 살해 사건에서는 인간의 구원의지가 곧 ‘하나님 살해동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극한 집념이 결국 하나님마저 죽여버리게 했다는 겁니다. 마가복음 15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바라바’라는 살인자에 대한 사형집행을 겨냥한 일을 겹치게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사건의 성격을 살펴보게 합니다. 사람들이 ‘바라바’라는 인물을 죽이고 싶었던 것은 그가 같은 인간을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살인에 대해서 인간들은 분노하고 격분한 것이다. 그 격분의 동시는 인간들의 집단적 정의감에서 비롯됩니다. 즉 인간들에게는 근원적으로 ‘살해당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이 차있습니다.
왜 본인은 죽으면 안 되지요? 그것은 자신이 그만큼 정의롭고 바르게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즉 ‘죽을 만큼 죄인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스스로 자신을 평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을 향하여 ‘죽어 마땅할 정도로 악하다’는 마음이 근원적으로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 겁니다.
반성이나 회개는 하되, 그 반성과 회개만큼 악하지 않고 선한 것이라고 우기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일말의 고상하고 의로운 구석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겁니다. 이것을 증명하기라고 하듯이 바라바라는 강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사형집행’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끼어들게 된 겁니다.
“바라바가 살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예수가 죽어 없어지기를 원하느냐?” 본디오 빌라도는 그당시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그들의 정의의 칼이 궁극적으로 꽂히는 것은 바라바를 지나서 예수님의 목숨이었습니다. 그들의 일관된 정의감이 결국 하나님이 죽는 방향이라는 것을 의도해서 하나님께서는 일을 그렇게 몰아세우신 겁니다.
인간들이 자신을 ‘계속 살아할 가치가 있는 존재’로 규정하는 한, 그 사람은 예수님의 살인사건에 연루된 자입니다. 이로서 인간에게는 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인 것이 십자가 사건으로 분명해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폭력사태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구약 출애굽 때에 이 이스라엘 구원은 폭력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자기 백성을 데리고 나와 하나님께 경배케하려고 했고, 바로왕은 기어이 그 백성을 놔주지 않으려고 하니 폭력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폭력사태에 대자연까지 가담되어서 움직입니다. 강물이 핏물이 되고, 식탁까지 개구리가 올라옵니다. 온 애굽 산하에 메뚜기로 덮여서 사람이 먹을 곡물을 먹어치웁니다.
변함이 없다고 여긴 태양은 사흘 동안이나 빛을 잃어버립니다. 도대체 이런 난리가 왜 일어나는 겁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 이 인간 세상을 향하여 하고 싶은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지막 재앙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누구든지 약속된 어린양의 피가 묻히지 아니면 이미 죽은 자다!”입니다.
즉 인간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 마땅한 저주받은 자였던 겁니다. 출애굽기 4:6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여겼던 모세 입장에서,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것이 대외적으로 실시하기 전에 자기 내면을 아는 일로 시작됩니다.
모세의 손을 자기 품 속에 넣고 빼보니 저주받은 자였던 겁니다. 신체는 유한(有限)해 보이지만 실은 인간의 내면은 무한(無限)한 성질이 작용하는 자리였던 겁니다. 즉 구원이라는 것이 결코 인간이 기대한 그 구원이 아니었던 겁니다. 생노병사의 순환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순수한 행복을 갖는 것이 구원이 아니었던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구체화하는 것이 구원이었습니다. 이미 이 구원의 취지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12:1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알 수 없는 곳으로 가게 하십니다.
창세기 2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혈육의 자식인 이스마엘과 그 어미를 ‘내어쫓게’ 하십니다. 새로움이 기존의 것을 내어쫓는 겁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체험하지 않는 기억’이 들어옵니다. 오늘날 신약에서는 성도를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합니다. 즉 성도만이 십자가를 보면서 ‘자신의 최후’를 볼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최후가 자기 최후였던 겁니다. ‘죽음을 미리 경험’하는 겁니다. 이제 자기 안에 사는 다른 무한의 분이 사십니다.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갈라디아서 2:20) 구원이란 이로서 ‘나를 키우기’도 아니요 ‘나의 구원을 챙기는 것’도 아닙니다. 소위 구원의 서정이라고 알려진 ‘선택→소명→회개 →믿음→중생→칭의→성화→영화(영광)’ 순이 아닌 겁니다.
이것은 여전히 ‘나를 위한 나의 구원 논리’입니다. 그 마지막은 지옥행입니다. 주님의 구원작업은 우리 밖으로 우리의 잘남과 정의로움과 착실함이 배설물이 되어서 배겨나옵니다. 이런 성질들이 예수님의 몸을 찌르고 살해하고 배격케 한 겁니다. 더 이상 나를 리어커에 실고 질질 끌고 가서는 아니됩니다. 이미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괜찮은 자로 조작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강-빌 2장 12-14절(구원의 원천)2005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2장 12-14절입니다. 신약성경 318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2:12-14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이 구원이 그냥 나의 구원 같으면 살기 힘들고, 어렵고, 몸 아프고,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와서 빌고, 그것을 오직 구원인 것처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독적으로 나 혼자 있을 때는 얼마든지 그것이 구원인 것처럼 보이지요. 생로병사 이 질곡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서 나중에 죽고 난 뒤에는 보상받듯이 세상의 모든 고생을 능가하는 행복만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은 종교의 기본주제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주님의 뜻을 받들어 이야기하기를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안 찾아와도 우리는 구원이라는 것이 뭐라는 것을 대략 감을 잡는데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찾아와 버리면 내가 감을 잡았던 나의 구원과 나에게 찾아온 주님의 구원이 같지가 않아요. 이게 충돌을 일으킵니다.
하나님 저기 하늘에 계시고, 우리가 찾아가는 식 같으면 힘든 인생 빨리 끝내고 착한 일 많이 해서 보상받고, 이런 식으로 대충 그 내용이 구성이 되거든요. 그 구성된 내용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자질과 능력, 양심과 선행은 언제든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가, 누가 들어와 버렸다는 말이지요.
나는 지금 모자람은 있지만 아주 모자라지는 않고 얼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자부했는데 하나님께서 들어와 버리니까 하나님께 친히 행하고자 하는 그 구원에 대해서 우리는 굉장히 낯선 거예요. 생소한 겁니다. 나는 나를 키우고 나를 유지하기를 바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굳이 내 안에 들어오실 이유가 없는데 내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은, “너는 네 모든 정신구조가 너만 지키고, 너만 키우고, 너만 잘되기를 바라는 그것뿐이다. 그러니까 너는 끝까지 네 생각밖에 못하지.”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쑥 들어와 버리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받아주는 유일한 구원이 따로 있습니다. 그 따로는 뭐냐 하면, 십자가는 폭력사건과 관련된 일이에요. 우리는, ‘지금 참고 견디면 나중에 천국 간다.’ 아주 소박하게 평화롭게 있으면서 나중에 죽을 때는 좋은데 가기를 바라는 이런 마음가짐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정말 이 땅에 진짜 구원, 진짜 천국과 통하는 구원을 주시는 그 현장에서는 살인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폭력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난리도 아니었지요. 이 구원이라는 말, 우리가 지금 신약의 빌립보서를 보고 있지만 구약의 구원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출애굽기입니다. 출, 애굽, 애굽에서 탈출하는 것이 구원이거든요. 탈출할 때 조용하게 탈출하지 않았습니다. 평화롭게 탈출하지 않았습니다. 폭력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출애굽기 1장부터 폭력사태가 일어납니다. 바로왕이 히브리인들을 잡아 족치는데 딸 낳으면 살려주고 아들 낳으면 다 죽이는 이 자체가 폭력사태에요.
모세가 거기에서 맞받아치면서,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자기의 손으로 애굽사람을 쳤는데 그게 하나님에 협조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이 되지 않았고 그는 현상수배자가 되어서 애굽에서 탈출해서 고향 애굽과 그의 부모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출애굽, 애굽에서 탈출하는, 오늘 말로 하면 구원이지요, 구원하는 그 일에 대해서 왜 그리 요란스럽습니까? 그리고 출애굽에 보게 되면 그 구원에 뭐가 동원되느냐? 바다가 갈라져요. 태풍이 불어서. 그러니까 이것은 대자연까지 이 구원문제에 가담하고 있는 겁니다. 천지창조 못지않아요.
이 구원이라는 것이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과업, 그냥 갓바위에 올라가서 불교처럼 “한 마음, 정성된 마음으로 바르게 살겠습니다. 우리 아들 성적 좀 올려주세요.” 이런 게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성당에 앉아서, 마리아 상 앞에서 팍팍 가슴팍 찍는 식의 이런 것이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의 과업의 구원은 온 우주가 다 동원되는 거예요.
천체까지 다 동원시키지요. 고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 폭력사태의 진위가 신약에 등장하는데 뭐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죽인 이 살인사건, 인간이 하나님을 죽인 사건, 하나님이 인간에게 맥없이 살해당하는 사건, 그것이 구원이 근거요 유일한 원천입니다. 구원은 거기에 있는 것, 거기서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폭력사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지난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예수님을 재판할 때 그냥 예수님 불러다가 사형, 하면 끝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사형시키기를 허락하시면서도 곱게 그냥 보내지를 않습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님 사형 이전에 먼저 죽여야 될 사람을 등장시키지요. 바라바라 하는 살인자, 민란을 일으켜서 사람을 죽인 그 자를 살인자기 때문에 체포해서 처형하는 그 처형과 예수님의 죽으심과 겹치도록 하나님께서 유도했어요. 인간들이 바라바라 하는 살인자를 처형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끼어들지 않는 상태에서는 누구나 다 동의했습니다.
동의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하나밖에 없어요. ‘살인자를 정의의 이름으로 사형시킴으로 말미암아 이 사회질서에서 우리의 정의를 구현하자.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정의감에 부합된다.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양심, 신앙심에 부합된다. 살인자는 죽여야 마땅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끼어들지 않는 상태에서는 바라바를 죽이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걸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죽일자를 죽임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참 정의롭구나. 네가 내 뜻대로 제대로 살아가고 있구나. 그래 내가 네 소원 들어줄게. 복 줄게.” 그러한 하나님의 관계에 하자가 없다고 이의가 없다고 여겼지요.
그런데 빌라도가 끼어들어서 뭘 하느냐? “너희들 관례에 의하면 명절에는 죽을 죄인이라도 하나 살려주는 관례가 있는데 너희들이 자꾸 억지를 부려서 죽이고자 하는 예수님을 살려주는 것이 어떠냐?” 하는 식으로 빌라도는 유대인들 그들의 정의감에 의심을 품지요. 마지막 테스트를 합니다.
“자, 너희들 유월절에는 한 사람 살려주는 데 두 사람이 있다. 사람을 죽인 바라바가 이 쪽에 있고 너희들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싫어하는 예수가 있는데 둘 중에 어느 것을 살리고 어느 것을 죽이겠는가?” 빌라도 입장에서는 그리스도를 자기 입으로 살려보겠다는 마지막 기회를 부여한 것이 돼요.
그렇게 하니까 의외로, 예상 밖으로 사람들은 누가 봐도 사람을 죽였으니 사형당할 만한 바라바를 사람들의 정의감에 입각해서는 반드시 이것은 풀어줘서는 안되는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예수라는 작자는 풀어주면 안됩니다. 죽여야 됩니다.”
심지어 “우리가 싫어하고 누가 봐도 죄인인 바라바를 풀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예수님을 풀어줘서는 안됩니다.”라고 하는 그런 결정에 대해서 빌라도가 깜짝 놀라버렸어요 ‘도대체 저들의 속마음까지 내가 알 수가 없네. 그렇게 예수가 밉나?’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어떤 처벌을 하고 죄수를 찾을 때는 그냥 죄이기에 밉다, 해서 처벌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정의로운가 하는 것을 티내고 싶은 거예요. 그것도 합세해서.
이 말은 인간들끼리 서로 통하는 것이 있어요. 너의 적이 곧 나의 적이고 우리의 적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어떤 공통된 적이 등장하게 되면 그 반대급부로 우리는 공통적으로 정의감으로 서로 통하는 정의로운 무리, 집단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하는 한평생의 모든 결정은 뭐냐 하면, 내가 얼마나 정의로운가, 내 결정은 얼마나 옳은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나보다 못한 적을 기어이 발굴하고 찾아내야 됩니다. 찾아내서 그 인간을 이구동성으로 잡아 죽일 때 비로소 ‘우리는 스크럼을 짜서 우리 모두가 계속 이 세상에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이것은 하자 없다. 우리가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주장이다.’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그 바라바가 있던 자리가 뭐냐? 인간의 정의로움을 증명할 수 있는 한계지점이에요. 그 한계지점에 누가 동원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끼어들어버렸어요. 예수님이 끼어들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나의 정의가 결국은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이라는 분을 죽이는데 모든 마음들, 생각이 똑같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생각이 똑같아요.
예수님을 살해하는데 어떤 이의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을 그 당시 사람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현장에 있던 사람이든 그 현장에 없었던 우리 같은 사람이든 똑같이 증명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인사건에 휘말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그 때부터 “너희들이 정의를 언급해? 너희가 선을 언급한다고? 너희가 천국과 지옥을 거론해?”
더 나아가서 “너희가 구원을 받겠다고? 이런 무지막지한 인간들!” 어딜 봐서 구원이 되어야 돼요? 도대체 어딜 봐서? 자기의 정의감, 자기의 양심, 자기의 의로움을, 자기의 선을, 그것을 포기를 못한 주제에 뭘 거론한다고요? 아들의 나라? 주님의 나라 가겠다고요? 그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의 정의가 나의 의로움이 우선되기에 그래요. 나의 잘남이 우선되는 입장에서, 그걸 스스로 포기 못하는 입장에서 결국은 최후의 지점, 그 한계치의 지점에서 우리는 나의 정의로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예수님의 십자가 카드를 우리는 버려야 되는 겁니다.
바로 어떤 인간도 이 폭력의 현장에서 무관하다고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주님께서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미 죽었던, 그렇게 해서 인간들에게 죽었던 분이 찾아오는 것이 구원이거든요. 그렇게 해서 그 한계치를 인간 쪽에서는 넘어설 수 없었지만 그 한계치를 주님께서는 넘어서서 다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우리 쪽에서 찾아가려면 마치 이미 죽은 사람 시체 붙들고 나를 살려달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서 시신이 되었는데 그 시신을 붙들고 “아버지 일어나소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그 시절이 좋아요. 아버지 죽으면 아버지 없으면 나는 살맛이 없습니다. 어서 살아서 나로 하여금 사는 행복과 사는 보람과 옛날 좋았던 그 시절을 다시 한 번 유지시켜 주세요. 아버지!”
아무리 불러 봐도 이미 차가운 시체가 된 아버지가 눈 뜨고 돌아올 수는 없는 거지요. 예수님, 하면서 살려 달라고, 예수님 시체 붙들고 “예수님, 예수님! 살려주세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서 이미 인간 곁을 떠났다는 그 말은 내 구원이 실패했다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여주는 거예요.
십자가를 안다는 것, 십자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 십자가를 찾아왔다는 것, 십자가를 만나게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지상생활의 그 최후가 곧 나의 최후요, 나의 한계치고 내가 생각했던 나를 위한 구원은 저쪽 주님의 나라로 건너갈 수 없음을 십자가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던 겁니다.
내 죽은 시체 붙들고 건들지 말라는 거예요. “네 쪽에서 나를 흔들든, 꼬집든, 내 시체 앞에다 제사를 지내든, 대추 사과 배 놓고 바치든, 십일조를 바치든, 이미 죽은 나는 네 원대로 살아나지 않는다. 네 식대로는 살아나지 않는다. 죽은 시체를 왜 자꾸 흔드느냐? 무슨 의도로 흔드느냐? 왜 흔드느냐? 왜 붙잡느냐? 만지지 말라. 네가 만질 위인이 아니다. 나 이용해서 네가 뭘 원하느냐? 네 구원 얻으려고 했잖아. ‘이 땅에서 힘든데 죽어서는 좋은데 가자.’ 너 그걸 원하려고 나 붙들었지. 결국은 네가 아직도 너 잘난 체 하는 그걸 못 버렸잖아.” “남은 몰라도 나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지금 그거 우기고 있는 거예요.
구원이 인간에게 없는 이유가, 다시 말씀드려서 출애굽에 보면 완전히 폭력사태가 벌어져요. 이것은 구원을 시키겠다는 주님의 고집과 절대로 구원 못시키겠다는 바로왕의 고집이 정면충돌했기 때문에 곳곳에 폭력사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놔라” “못 놔주겠습니다.” “놔라” “못 놓겠습니다.” “놔라” 그 싸움입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기 전에 목적이 있어요. 목적이 뭐냐?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하나님께서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목적으로 자기 백성을 나에게 데리고 오라는 거예요. “내가 함께 갈테니까 데리고 나오라.”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바로왕의 태도는 강력합니다. “여호와가 누군데?” 요즘말로 “주님이 누군데? 예수가 누구야? 예수고 뭐고? 주님이 뭐고? 하나님이 뭐길래 나의 행복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있단 말인가? 그런 것은 없어. 나의 행복보다 나의 잘남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없어. 그거 누구야?” 라고 바로가 이야기했지요.
바로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주님께서 하는 말이 “바로, 이제 너는 죽었어. 네가 행복을 논하고, 네가 너의 번영을 논하고, 네가 너의 소유된 국가를 논해? 그게 어떻게 작살나는지 보여줄게.” 열 가지 재앙으로 작살났습니다. 아주 박살냈어요. 요란스러워요 구원이라는 게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그 구원과정 속에 출애굽기 4장 6절 같은 대목은 굉장히 심오한 하나님의 뜻을 모세에게 담아줬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
모세의 신체는 그냥 유한한 신체지요. 키가 몇 센티고, 키가 얼마고, 그렇게 제한된 신체입니다. 제한된 그 신체, 자기 손을 그 품에 넣으니까 여기서 유한이 아니고 무한이 나온 거예요. 문둥병이 나온 겁니다. 유한한 육체 안에, 신체 안에 무한한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었고 질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문둥병, 저주지요. 저주가 담겨 있었던 겁니다. 자기 유한한 몸 안에 무한한 저주가 담겨 있을지는 모세가 상상도 못했습니다. 모세가 깜짝 놀랐어요. 자기는 기적이라 하니까 나를 괜찮게 해주는 기적인지 알았는데 기적의 방향, 기적의 화살표가 바깥에 나오는 그것은 나중 문제고 진짜 기적은 뭐냐 하면, 내 안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 기적이에요.
구원의 원천이, 천국이 저기 있고 그 천국에 내가 가는 그것이 내 구원이 아니라, 나 자신의 어떤 더러운 것들, 그것도 끄집어 내도 끄집어 내도 끝도 없는 무한한 더러움과 저주의 원천이 내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 유한 안에 무한을 파악하는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찾아오기 전에 내가 스스로 이 몸 고생 많이 했으니까 천당 가서 호강해보자, 하는 식의 구원하고는 족히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걸 키우라는 거예요. “이 무한을 키워라.” 네 유한, 나 구원받았다는 유한한 너를 자랑질 하지 말고 무한한 것이 계속 무한 되게 나오는 것 끄집어내도 또 끄집어내도 또 나오는 죄, 이 저주스러움. 모세는 놀라버렸지요.
이게 잘난 자가 못난 자를 징벌하는 차원이 아니라는 겁니다. 애굽에 대한 이 징벌이. 어딜 유한이 그게 전부인 줄 알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그게 다라고 하는 이 제국에, 이 나라에 하나님은 무한한 의미를 거기에다 폭탄처럼 퍼부어버립니다. 한두 번 폭격이 아니에요. 무한한 폭격, 폭탄을 터트려버려요.
“저주 받을 자가 그동안 밥이라도 먹고 산 것만 해도 이것은 감지덕지해야 된다, 이 인간들아!” 하고 이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 구축했던, 애굽의 모든 자기 나름대로의 존재의 원천이라고 우기는 것들을 원천적으로 다 폭파시키지요.
갑자기 메뚜기 떼가 오고, 개구리 떼가 날뛰고, 자기들이 믿던 그 태양신이 갑자기 사흘 동안 까맣게 되어버리고. 신이 날라 가버렸어요, 신이. 그 태양신이 날라 가버렸어요. ‘태양은 멀쩡하겠지.’ 천만에 태양이 시커멓게 빛을 잃을 줄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그 하나님이 대자연까지 총동원시켜서 박살내고 그 박살된 모든 것이 대체 뭘 이야기를 하려고, 대체 하나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고 싶어 해서 이렇게 요란스럽게 이런 징벌이 주어졌는가, 이런 신종코로나가 주어졌는가, 다 같이 징벌 받는가, 그것은 단 하나 어린양의 피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게 출애굽기에요.
쉽게 말해서 “네가 살았다고 하는데 정말 따져보자. 정말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아니면 죽어 있는 거야?”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를 하나님은 지금 모세를 통해서 보고 있는 겁니다. 진짜 산다는 것은 어린양의 피가 안에 들어온 사람이 산거예요.
피의 의미가 들어온 사람이 산 것이고 어린양의 피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이것은 산자가 아니고 죽은 자에요. 죽은 자가 무슨 구원이 됩니까? 죽을까, 하는 것은 모르지만 이미 죽은 자는 죽은 자여야 되지 죽은 자가 슬금슬금 또 구원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가 안 죽었다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바라바 이야기 다시 하게 되면 바라바라는 것이 만인의 공통의 적으로서 죽어 마땅하다고 바라바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전부 한 패가 되고 말았어요. 그 한패라고 결속된 자리 앞에다 바라바하고 같이 뛰어듭니다. 너희들이 정의의 빛이라는 것이 결국은, 정의의 끝이라는 그 뾰족한 창이 바라바를 뚫었는데 그 창이 어디까지 뚫었느냐 하면, 예수님의 심장까지, 예수님의 옆구리까지 뚫어 놓았어요.
“세상은 이러면 안 돼. 세상은 바르게 해야 돼.”라고 우겼던 그 정의감이, “바르게 해야 돼. 바르게 해야 돼. 그래야 이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이 되고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나라가 되는 거야.”라고 계속했던 그 자체가 그게 주님의 살해 동기라는 사실을 누가 알겠어요? 그 창끝과 칼끝이 주님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이 세상, 이 괴로운 세상에 살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구원을 희망하고 있어요. 힘들지만 미래는 장래는 어떻게 해야 되겠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구원을 이루라고 하니까 자기 미래 이야기인줄 알고 생각하는 거예요. 미래 이야기가 아닙니다. 폭력사태가 원인이 뭐냐? 그 원인에 대해서 네가 계속 까발리라는 이야기에요.
이 땅에 있었던 그 폭력사태. 전에는 애굽과 히브리인이라는 그 사이의 폭력사태지만 신약에서는 바로 주님과 나 사이의 폭력사태입니다. 기어이 나의 판단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구약부터 그런 예가 없었는가? 구약부터 물론 있었어요. 있었는데 자기 구원에 미쳐서 그게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거예요.
창세기 12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분명히 이게 구원이거든요. 요즘 인간은 안 떠나려고 해요. 지금까지 살아온 이 식대로 계속 밀어붙이려는 생각이 있지 떠난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아브라함은 지시받는 내용이 뭐냐 하면 “떠나라.” 떠나라, 가 좀 더 나아가면 나가라, 가 돼요. “나가버려, 이 인간아!”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창세기 21장 10절에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그런 마음을 줬고 또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했어요. 아브라함에게 육신의 아들 이스마엘이 나왔습니다. 물론 자기 아내가 임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종을 통해서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서 아기를 낳았거든요.
그런데 그 씨가 아버지의 씨, 아브라함의 씨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저게 내 아들이다.’ 씨받이 용도로 사용했지만 역시 아버지는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내 아들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아들로 여기지 않습니다. 내보내라, 그 말이지요. 그것은 구원과 같은 노선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반대노선이에요. 인간의 혈육으로 난 것은 구원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혈육은 그냥 곱게 살면 괜찮은데 혈육이 곱게 살 위인들이 아니거든요. 원천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그런 동기가 의지가 가득하게 저주의 양상으로 계속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그저 나는 코 꿰고 입 다물고 가만있을게요.” 입 다물고 가만있는 위인들이 아니라니까요. 나를 지키는데 평생을 다 보내는 게 우리 자신들입니다. 내 귀한 내 것 지키려고. 교회 오는 이유가 뭡니까? 내 것 지키려고 오잖아요. 나 구원받으려고.
그래서 신학자가, 사기꾼들이 만든 것이 있어요. 구원용으로 만든 것이. 그게 뭐냐? 선택, 회개, 소명, 믿음, 중생, 칭의, 성화, 영화. 이걸 구원의 서정이라고 해서 신학교마다 다 가르치는 거예요. 빨리 해서 못 알아들었으면 다시 할게요. 선택 다음에 소명, 소명 다음에 회개, 회개, 회개 다음에 믿음, 믿음 다음에 중생, 중생 다음에 칭의, 칭의 다음에 성화, 성화 다음에 영화. 목사가 신학교에서 배웠거든요. 신학교에서 배운 것 교인들에게 교리공부에서 다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면 교인들은 어디까지 왔나, 해서 지금 그 단계를 지켜보면서 그걸 구원의 서정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교리가 나온 지 2천년 되었어요. 선택, 소명, 회개, 믿음, 중생, 칭의, 성화, 영화, 그 다음에 지옥입니다. 왜냐? 그쪽 방향이 지옥 가는 방향이에요. 이것은 나를 지키는 거예요. 천국가고 싶은 이 나를 지켜주고 나를 정당화하는 거예요. 나의 의로움을 계속 쌓고 쌓게 만드는 교리가 그 교리에요.
이것은요, 성경에 나오는 선택, 소명, 곧 부르심, 회개, 이 모든 용어들은 어떤 용어냐 하면, 쉽게 말해서 십자가라는 사건의 표면에 있는 타일 같은 거예요. 몸체가 있는데 예수님이라는 십자가사건을 바깥으로 표현하는 증상들이에요. 예를 들면 감기 들리면 콧물 나오지요. 기침 나오지요. 오한이 들지요. 열나지요. 이걸 증상이라 하거든요.
콧물을 사랑하고, 기침을 사랑하고, 그러면 안 되지요. 사람들이 선택이라 하면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나의 선택, 나의소명, 그 다음에 나의 회개, 나의 믿음, 나의 중생, 나의 칭의, 나의 성화, 전부 다 앞에 ‘나’를 다 붙여버리는 겁니다.
이게 원래 주님께서 하신 십자가의 일이기 때문에 주님의 선택, 주님의 소명, 주님의 회개, 주님의 믿음, 주님의 중생,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주님 자리에 나를 다 바꿔치기 해버린 거예요. 워낙 교인들이 천당 가고 싶어서 교회 오기 때문에. 절에 가서 극락 가고자 하는 그 심보를 그대로 가지고 교회 왔거든요.
이것은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이걸 쫓아내야 돼요. 구원은 쫓아내는 거예요. 떠나는 거예요. 주님이 들어오고 나는 쫓겨나야 돼요. 주님의 구원이 들어오면 나의 구원은 쫓아내야 돼요. 나의 구원을 버려야 된다는 말이지요. 나의 가치를 버려야 된다 그 말입니다. 언제까지 내가 나를 질질 끌고 갑니까?
동네 언덕배기 보면 할머니들이 폐지 실은 리어카 질질 끌고 가게 되면 젊은 사람들 저절로 그거 끌어주고 싶지요. 할머니가 폐지 실은 리어카 끌고 언덕배기 올라가는 그 모습은 오늘날 우리 인생을 스냅사진으로 찍어놓은 것 같아요. 평생을 나라는 것을 가지고 질질 끌고 가요. 아…….
‘오늘은 나를 교회 가게 만들어야지.’ 교회에 나를 리어카에 싣고 질질 끌고 가요. 앞에서 내가 끌고 내가 또 거기에 담겨 있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게 아니라고? 주님께서 앞에서 끌고, 주님께서 끌고 가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가벼운 십자가복음을 끌고 갔고, “이미 너는 죽었다.” 무게도 나가지도 않는 귀신을 가지고 담아서 같이 끌고 가는데 우리는 귀신이 안 죽었다 생각하니까 그 귀신이 무게가 왜 그리 많이 나가는지.
나 자신이 너무 무거워요. 무거운데 갑자기 비까지 오면 축축 처져가지고 나라는 인생이 너무 무거워요. 그래서 맨 날 교회 오면서 교인들은 말은 안하지만 목사한테 묻는 것이 그거예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내가 천국 갑니까? 어떻게 믿으면 되겠습니까? 어떻게 믿으면 그게 믿음이겠습니까? 어떻게 헌금해야 되고 어떻게 봉사해야 되고…….” 그것만 물어요. 자기를 자기가 구원하려는 거예요. 자기를 가꾸고 키우려고 하고.
그래놓고 하는 말이 대들기를, “성경 빌립보서 2장에서 구원을 이루라고 했잖아. 그래서 구원을 이루는데, 성화를 하고 있는데 뭐가 나쁘냐?” 맨 날 이렇게 대들고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기억될 수 없는 기억이 쳐들어오는 거예요. 내가 한 기억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기억은 내가 체험한 거거든요. 주님만 체험하고 우리는 체험하지 못한 주님의 십자가 체험이 그것이 기억이 되어서 우리에게 개입한 거예요.
‘아, 내가 이렇게, 예수님 십자가 죽었을 때에 그 때 현장에 있던 인간들만 나쁜 것이 아니고 나의 의, 나의 정의로움, 나의 착함, 나는 신실하고 착실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또다시 찔러 죽이는 창끝이다.’ 왜, 우리는 정의로워야 되고, 왜, 우리는 착해야 됩니까, 왜 그런 발상이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내가 안 죽고 멀쩡히 살아있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단절이에요. 구원의 힘이란 단절의 힘이 우리에게 밀려들어온 겁니다. 스며들어온 거예요. 너는 죽었어, 라는 것을 반복하는 거예요. “죽은 인간이 나대지 말고, 촐싹대지 말고, 미꾸라지처럼 펄쩍거리지 마라. 조금 아프다고 아프다 하지 말고, 좀 좋다고 좋다고 하지 말고.”
이게 감정이라 하는 것이 단어를 반복해서 그 이름을 부른다고 똑같은 감정이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기쁘다, 하는 것은 감정이 이미 일어난 것을 결과적으로 뒤에 붙이는 단어에요. 예를 들어서 기쁘다, 그러면 기쁨을 새로 시작합니까? 아니지요.
‘기쁘니까 이걸 뭐라고 하지? 옳지 기쁘다고 표현해야지. 슬퍼서 눈물이 났다. 이걸 뭐라고 하지? 아 슬프다.’ 이렇게 감정이 먼저 일어나고 단어는 뒤에 붙이는 거예요. 이것은 사랑도 마찬가지고요. 사랑하고 있으니까 사랑하는 마음을 뭐로 표현하나? 사랑이라고 뒤에 붙이는 겁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에요. 구원은 벌써 손대기 전에 주님의 십자가 기억이 이 안에 들어와 버렸어요. 죽은 시체에 새 생명 씨앗이 시작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구원 말고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거예요. 내 안에 들어온 주님의 구원 그걸 키우라, 이 말이지요. 그걸 드러내라, 그 말 아닙니까? 구원을 이루라는 말이. 네 구원은 버리고, 날마다 나의 구원은 버리고. 안정이라는 말을 하면 안정됩니까? 아니거든요. 너무나 그동안 교회 와서 신앙이라 한다면서 너무나 헛발질을 하고 있었어요.
어떤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 노래 듣기 위해서 전화를 천통 2천통 하는 거예요. 2천통 해봐야 울리는 것은 자기전화기에서만 울리지 저쪽에서 “예, 여기는 사랑의 콜센터입니다.” 하고 안받아줘요. 아무리 전화해도 사랑의 콜센터에서 안 받아주게 되면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 이 찬원, 임 영웅 가수 노래 못 듣습니다. 들을 수가 없어요. 연결이 안돼요.
그저 나의 선택, 나의 소명, 나의 회개, 백날 해도 그것은 전화가 연결이 안돼요. 그냥 해보는 거예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주께서 나를 가지고 일을 벌이십니다. 출애굽기 4장 7절에 보면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모세가 생각하기를 내 품은 껍데기 이 신체가 유한하니 안쪽도 아마 유한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걸 아시고 유한에서 무한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보니까 자기가 문둥병 되었지요. 문둥병 되었을 때에 모세의 평소 소망이 문둥병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것은 별개 아닙니까? 자기소망하고는 예상 밖의 별개라는 말이지요. 자기 안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었어요. 내 감정 내 마음 이것은 나와 동떨어진 다른 분이 관장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분이 내 마음, 내 뜻, 내 기쁨, 내 감정을 주관하고 있는 거예요. 보니까 모세가 저주, 문둥병이 된 거예요. 껍데기는 멀쩡한데 속은 저주받을 존재, 주님은 모세를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모세보고 다시 그 손을 확인시켜주고, 자 오늘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 거예요, 그렇게 확인을 시켜주고 다시 품에 집어넣으라고 했어요. 다시 집어넣었다 빼니 멀쩡한 거예요.
멀쩡할 때 처음부터 나는 멀쩡했다는 이것을 포기하는 겁니다. 나는 처음부터 괜찮은 존재였고 처음부터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사람이라는 그 자기생각이 바로 저주받을 생각에서 나온 생각인 것을 비로소 하나님의 기적이 와서 아는 거예요.
기적은 뭡니까? 내 마음 바뀌는 거예요. 내 마음이 아담의 마음에서 새로운 예수의 마음으로 바뀌는 겁니다. 십자가지신 마음으로 바뀌는 겁니다. ‘너 그런 인간밖에 안되었어.’라는 것을 너만 몰랐지 하늘나라 천사는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너한테 다 속아 넘어가지요.
인간은 자기를 조작하고, 자기를 위장하는 그 재주로서 자꾸 고급진 것을 가지고 자기를 포장하는데 그것은 유한이 유한으로 무한을 틀어막는 것밖에 안돼요. 억지스러움이에요. 그런 마음가짐 가지고 자기를 포장하는데 익숙해졌으니까 마치 구원받는 것을 뭘 로 생각하느냐 하면, 유원지 게임장에 가면 이런 것이 있지요.
총 쏘아서 인형 타는 것 있잖아요. 저기 구원 있네, 하면 믿음이라는 총을 가지고 믿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하고 자꾸 인형들을 모으는 것처럼, 선택을 모으고, 소명을 모으고, 칭의를 모으고, 자꾸 괜찮은 것을 끌어 모아서 이 모아진 것이 나를 구원할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본인이 누군지를, 본인의 속이 썩어서 이미 죽은 자인 것을 계속 끊임없이 감추는 거예요.
그렇게 감추다 보니까 골로새서 3장 1절 같은 말씀은 생뚱맞은 겁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 너희가 이미 죽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너희가 이미 죽었고.
이 말이 교회 오래 다녀도 다시 봐도 생뚱맞게 느껴지는 겁니다. 지난번 했던 에베소서 5장 14절 마찬가지에요.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잠자는 가운데서 일어나라. 하나님의 구원방법은 이미 들어온 것으로 구원이 되어버린 거예요.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추수 이야기 나옵니다. 구원은 뭐냐? 그냥 줍는 거예요. 광야에서 만나 줍듯이. 내가 뿌려놓은 생명을 네가 눈으로 보고 줍게 하는 거예요. 오, 생명은 여기에 있네, 줍게 하는 겁니다. 줍게 할 때 뭐냐? 나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어요.
그 다음부터는 뭐냐? ‘내가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한 것도 없는데 나는 왜 이미 구원이 되어버렸지?’ 그걸 조사해보니까 주의 성령으로 와서 알게 하시니까 비로소 내가 아담으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그 자체가 이미 내 안에 다른 원천, 예수님을 살해하는 악마의 속성을 품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슬퍼할 필요는 없어요. 왜냐?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구원받은 입장에서 왜 주님의 구원만이 구원이고 내구원은 구원이 아닌지를 발견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까발릴 때 여기서 뭐가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커지느냐 하면, 왜 사랑이 사랑이냐 하는 것이 커집니다.
예를 들어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 결혼식장에 가면 보통 주례는 “자, 우리 신랑신부, 선남선녀 만나서 잘 사세요.” 하겠지만 만약 그 가운데 성령 받은 성도가 하객으로 앉아 있다면 지옥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만나서 혼자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둘이 함께 지옥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살겠다는 그 자체가, 행복하게 살겠다는 자체가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는 악마의 살해의지로 무장된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혹시 어떤 사람의 돌잔치에 갔다. 생일축하 노래 부르면서 애 예쁘다고 할 때 ‘아, 지옥갈 애가 또 하나 태어났구나.’ 방향이 달라요. 모든 사고방식의 방향이 지금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라, 하는 이 말씀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본인이 실습을 보여주는데 그 원천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지요. 십자가를 보이는 원천이 뭐냐? 갈라디아서 2장 20절 하도 많이 해서 여러분이 다 외우겠지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나는 이미 먼저 죽었나니. 먼저 죽은 거예요. 먼저 나의 최후를 먼저 눈치 챘으니, 간파했으니, 나는 죽고 주께서 마중을 나오신 겁니다.
죽은 시체에 생명의주님이 부활하신 부활의 영을 가지고 마중을 나오신 거예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니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이 현상들은 주께서 주님의 구원을 알리기 위해서 벌어진 현상들로 그런 안목을 지니게 되는 겁니다.
그 시범이 바로 빌립보서 3장 8절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배설물로 여긴다. 구원이 나타나는 증상이 뭐냐? 계속 배설하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저주의 찌꺼기, 죄의 찌꺼기를 계속 바깥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빠져나오게 하는 거예요.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니까, 나는 죽었고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니까.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지옥 가는 몸을 받은 사람의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그걸 탓할 필요는 없어요. 진짜 여러분에게는 애들 가르치듯 말로 가르치고 싶어요. “나 따라 하세요.”라고 하고 싶어요.
뭐냐? “나의 실수는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 일이다. 나의 실수는 내가 실수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 일이다.” 주께서 손대게 하신 거예요. 왜 그런 느긋한 마음이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좀 뻔뻔한 것 같아요.’ 그 뻔뻔함을 이기세요. 그 뻔뻔함을 이기라고요. 그 뻔뻔함을 이기지 않으면 본인은 아직도 잘난 존재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그 잘난 존재는 결국 바라바를 택해요. 예수님을 택하지 않고. 왜 바라바를 택해야 상대적으로 난 잘난 존재가 되니까요. 그래야 나의 위장술이 남에게 안 들키잖아요. 나의 양심이 얼마나 고급진지, 얼마나 평소에 나한테 선에 충실한지.
그게 배설물인데. 그게 바로 주님을 죽게 한 정의로움 나의 의인데, 그게 저주거리인데. 그게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거든요. 이삭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삭이고, 이스마엘은 우리하고 같은 류에요. 나를 내쫓아야 돼요. 내 잘남과 내 우수함을 내쫓아야 돼요.
그러면 뭐 죄인이라고 동네방네 자랑질 해야 되는가?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너무하고요. 살다보면 자연적으로 욱,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욱, 욱해요. 화나고 욱, 하고, 성질나고. 착한 내가 이렇게 성질 급해야 되느냐, 하고 욱,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부끄러움이 드러나는 거예요.
광주강의 가니까 사모님이 동료선생님에게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줘요. 요새 초등학교가 ‘줌’이라는 현장 동영상으로 수업하는데 선생님에게는 스물 남짓한 애들이 한 화면 안에 조각조각 타일처럼 학생들 각자가 나타나요.
그걸 보고 수업하는데 선생님이 가만 보니 애 하나가 하체가 드러난 거예요. 그래서 음소거하고, 소리를 다 죽이고, 다른 애들 못 듣게 하고 “야 아무개 너 지금 어디 있니?” 하니까 지금 화장실에 있답니다. 화장실에서 스마트 폰 들고 선생님하고 수업하고 있는 거예요. 휴대폰의 각도가 잘못 되어서 화장실에 앉아 있는 것이 다 보였던 겁니다.
지금 주님께서 줌 교육하고 있어요. 그 때 그 때 드러나는 우리의 성깔을 우리는 못 죽입니다. 왜? 태생이 그러니까. 그런데 그걸 자연스럽게 여기세요. 아, 이거 복음인데 정말. 우리가 욱하고 불뚝 성질내는 그것, 아, 맞아, 이게 내 속에 있는 내가 못 고치는 점인데 이걸 부질없이 고쳐보려고, 이걸 성화해 보려고, 회개해서 반성하려고, 사기꾼한테 속아가지고.
왜? 왜 그래야 되는데? 남들이 혹시 신앙이라고 이야기할까 싶어서. 목사님이 신앙이라고 간주할 까 싶어서. 그런 짓은, 나도 지금 당도리하기 바쁜데 어딜 남 걱정을 해요. 그런 짓은 하지 마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거 위해서 주께서 십자가사건 유발했습니다. 십자가 믿는 것 잘했다, 가 아니라 죽은 시체한테 잠자는 자여, 깨나보니 “너 벌써 죽은 것 알지?” 죽은 것 알면서 거저 받은 것은 추수한 것, 주님이 그냥 추수한 거예요. 그냥 주께서 씨앗 줘서 주께서 열매되게 하신 거예요. 이 사실을 그동안 나의 잘남과 나의 구원이 가로막았으니까 이것을 벗겨내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기어이 나에게 집착과 미련이 고집스럽게 있어서,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면서 잘난 체 살지 않았습니까? 남 시선 의식하지 않았습니까? 못난 자가 못난 것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고, 죽은 자가 죽은 자, 지옥 가는 티를 내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주님의 그 십자가 피에 의해서 우리의 모든 것들이 바깥으로 쫓겨나는 기쁜 현상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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