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6 12:41:37 |
조회 : 464 |
십자가 증거 200426 |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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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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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6 13:29 |
십자가 증거
2020년 4월 26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1:28-30
(1: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사도는 친절을 다하여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아본 자들은 사도가 자신을 향하여 욕하고 있음으로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멸망’이라는 단어를 사도가 집어넣고 편지를 섰기 때문입니다. ‘멸망’이라는 단어 자체가 인류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집니다. 인간은 같은 인간에 대해 동지의식을 지니게 됩니다.
어떤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그 아이는 점차 ‘자기 가정’ 내부에 동질감을 갖게 됩니다. 거의 무조건적으로 자기 가정을 수호하려고 합니다. 남의 가정에 대해서 ‘멸망’이라는 말은 할 수 있지만 ‘자기 가정’을 향하여 ‘멸망받는다’고 한다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가 교회에다 편지를 한다면, 좋은 말로 시작해야 그들을 구슬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멸망’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사람의 작품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능력으로 만들어내는 교회를 사도는 용인할 수 없습니다.
본문 29절에 나오는 ‘은혜’라는 말이 그런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주지 아니하면 여기에 없는 그 무엇이어야 합니다. 자체적으로 제작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은 교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어야 합니다. 멸망받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멸망의 길로 가야 하고 그 사람이 친한 친구라면? 가족이라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사도의 편을 두둔하겠습니까 아니면 친구나 가족을 도리어 옹호하겠습니까? 인간들의 삶이란 혼자만이 아닙니다. 여럿이 마음 맞쳐가면 살아가게 됩니다. 이 ‘마음 맞춤’에 온갖 희생과 노력이 그동안 투입된 겁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도가 와서 내 친구나 친지나 가족에게 “너 지옥간다”라고 한다면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동안 사이좋게 지내던 주변 사람도 같이 격분할 겁니다.
그래서 ‘사도의 말’은 누구에든지 욕설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여럿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 사람을 치는 것은 곧 나를 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사도가 ‘멸망’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그 이유를 알아야합니다. 로마서 9:11-1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에 보면, 구원의 방식에 있어 두 방식이 서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행위’ 곧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 달름박질하고 원하는 바’가 등장합니다. 다른 하나는 ‘말씀이 말씀대로’ 그냥 시행되는 방식으로 구원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인간에게 맡기지 않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가 자신을 어떻게 다루고 있음도 알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고귀한 존재로 여기면서 모든 생각을 시도한다는 겁니다. 히브리서 2:14-15에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악마 요소를 모른척만 한다면 인간들은 이유도 모르는채 죽을 때까지 자신을 ‘고귀한 존재’로 여깁니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 ‘비난해서도 안 되는 존재’로 행세합니다. ‘나보다 멸망한다, 지옥간다’라는 소리를 한다면 그것은 욕설로 간주하겠다는 의식으로 무장된 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러했던 사람이 야곱과 에서입니다. 창세기 27:36에 보면,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서는 평소에 자신이 장자가 된 것이 ‘자신을 위한 축복’이라고 여겼습니다. 즉 자신의 고귀함에 부합되는 위상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그런 에서는 동생 야곱의 역습을 받았습니다. 장자 직분을 동생에게 빼앗기게 된 겁니다. 이점을 창세기 관점말고 로마서 9장의 관점에서 보면,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동생에게 필히 넘겨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형 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미움받게 되어 있고, 동생 야곱은 이유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멸망과 구원을 가름하는 최종 기준입니다. 이 기준 외에 다른 것은 이 기준에 의해서 멸망되는 기준으로 노출될 뿐입니다.
그런데 장자의 명분을 얻었던 야곱은 이번에서 하나님에게 역습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야곱’이어서는 아니되고 ‘이스라엘’이어야 했습니다.(창 32:28) 즉 야곱 조차도 고귀한 존재가 아닌 것이었습니다. 야곱이나 에서는 뿌리가 한 뿌리입니다. 그런데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이 주어지자 그 절단면이 매끄럽게 노출됩니다. 일체 에서에게 돌아갈 여분의 축복은 ‘남아 있지’ 않아야 한 겁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행함으로 구획되는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한다고 해서, 다름박질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구원이 아니라, 구원은 오로지 주님의 말씀 그 자체의 작업의 결과로만 주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시작은 ‘나의 고귀함’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는 이미 죽은 존재로 드러납니다. 세 번째는, 주님은 죽은 존재에 말씀을 꽉 차게 집어넣습니다. 네 번째로 그 말씀이 발현되는 십자가라는 기준을 발하게 됩니다. 즉 “이제는 나 저주받은 에서 안 하고 야곱될래”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에서의 요소와 야곱의 요소가 다 같이 있어야 합니다. ‘나 구원받았음’을 자랑질하는 것은 여전히 ‘나의 고귀함’이 안 죽어있다는 뜻입니다.
오로지 말씀의 증거만이 나와야 합니다. 에서에서 야곱으로 장자가 이동하는 경로가 도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이런 자가 바로 예수님과 동질성을 이루는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멸망의 증거와 구원의 증거가 동일함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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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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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6 20:33 |
10강-빌 1장 28-30절(십자가증거)2004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1장 28-30절입니다. 신약성경 317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1:28-30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사도바울이 이런 편지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냈을 때에 이것은 인간에 대한 일종의 욕설입니다. 욕설이라는 말은, 그렇게 살려거든 때려치우라는 말이에요. 인생 그렇게 살아가지고는 살아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가 설교단에 서서 이 본문을 이야기하게 되면……, 사실은 빌립보 교회도 없어지고요, 우리교회도 없어지게 됩니다.
욕설도 어느 정도껏 해야지 사람을 완전히 개무시하면서, 사도라고 하면서 주의 종이라는 권위로서 사람을 무시해도 이렇게까지 무시할 수 있느냐, 그런 것을 듣고 있으면 계속 앉아 있다는 것이 정말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왜 사도의 이 본문이 욕설로 이해되어야 하느냐? 28절에 보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라고 되어 있지요. “멸망받을 자는 이런 식으로 세상 살아간다. 그 증거가 저희들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저희들이라 했으니까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여기서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어느 누구도 남들보고 “너 멸망 길로 가고 있어.”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 가족보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없을 거예요. “너 지금 한참 지옥가고 있구나.” 이걸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 그것도 화내는 것도 아니고 웃으면서 “요새 지옥 간다고 바쁘지, 그지? 수고한다.” 이런 식으로는 대놓고는 이야기 못하지요.
그런데 그것은 굉장히 기분 나쁜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아요. 대구에 있는 19세 그 애, 확진자지요. 그 코로나 확진자가 놀고 싶어서 부산의 나이트클럽에 갔다는 겁니다. 놀다가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는 거지요. 그것이 사회적으로 공포감을 조성하는 겁니다. 공포감을 조성하는 이유가 뭐냐? ‘너는 바이러스 걸리더라도 나는 안 걸린다.’가 아니라 ‘너 걸리면 나도 걸릴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모든 인간은 바이러스 앞에서 똑같다.’가 되는 겁니다. 그걸 ‘동질성’이라 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봅니다. 똑같이 봅니다. 사도바울이, 저희들은 멸망으로 가고 있다는 그 말은, 똑같다는 거예요. “너희들도 멸망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너희들만큼은 지금 알고 있지 그지?”라고 묻는 거예요.
본문에 “저희들은 멸망으로 가고 있는 증거고 저희들은 지옥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은 구원을 받고 있다.”는 그 말을 잘 새겨들어야 돼요. 인간은 똑같아요. 인간은 한쪽이 바이러스 걸리면 같이 걸리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예수 믿는다고 안 걸리고 그런 것 없어요. 저 사람이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그 말이 뭐냐? 나도 지옥으로 가고 있었었는데……, 여기 28절 끝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당연히 지옥으로 가야 되는데 너희들만큼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만큼은,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은 너희들만큼은, 그리고 다른 말로 내 복음을 알아듣는 너희들만큼은 구원받는 증거가 됩니다, 라고 편지를 보낸 거예요. 사도가 하는 이 말을 굉장히 좋은 말로,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말로 들으면 안돼요.
왜 그러냐 하면, ‘어? 저 사람하고 나하고 똑같은데, 저 사람과 내가 친구인데 사도가 손가락질하기를 저 사람은 지옥가고 나는 천국 간다고?’ 나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닌 거지요. 저 사람과 내가 친구로 있으면서 차이남을 전혀 느끼지를 못했거든요. 차이나지 않으니까 친구사이잖아요. 차이남이 없으니까 생각하는 것이 똑같다는 말이지요.
똑같은데 주님께서 지목해서 “저 사람은 지옥 간다.”라고 했을 때 자기 천당 가는 것이 기분 좋으려면 뭐부터 경유를 해야 되느냐 하면, ‘내 친구는 왜 지옥가지? 내 친구는 왜 멸망당하지?’ 그 이유를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 이유를 안다는 것, 그 이유를 알았을 때 과연 친구 편에 설까요, 사도 편에 설까요?
친구가 남의 친구가 아니고 내 친구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누굴 변호할까요? 대신 나서서 누굴 방어하려고 할 겁니까? 내 친구니까 “내 친구는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 그렇게 죄많이 지은 사람 아닙니다.”라고 방어하면서 나서겠지요.
그 순간 사도가 우리를 향하여 일괄적으로 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사도가 주제넘게, 건방지게 같은 인간이면서도 인간을 향하여 욕설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추방당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욕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본이 뭐냐?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물이 여기 있다. 두 번째, 그 인간은 고귀하다.
딱 두 가지입니다. 고귀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거룩하게 될 수 있다. 인간은 성화할 수 있다.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 천국갈 수 있다. 이거였습니다. 인간은 있다, 에서 더 나갑니다. 인간은 고귀하다. 인간이 고귀하다는 것, 인간이 고귀하다는 말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내가 최종적으로 고귀하다가 담겨 있어요.
복음적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로마서 3장 10절의 말씀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그 소리를 나보고는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고귀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의로울 수가 있다는 뜻이고, ‘나는 지금 당장 죽으면 안 돼. 나는 가치 있으니까.’ 그런 뜻이 다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사도를 대할 때, 물론 우리가 그 현장에 있고 예수님 여기 계시지만, 우리가 그 현장에 있고 사도가 있을 때 인간이 마음속으로 사도나 예수님한테 부탁하는 것이 있어요. 제발 그것만은, 하고 말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제발 멸망이라는 말, 지옥이라는 말, 나보고 지옥 간다, 멸망 받는다, 너는 저주받는다, 심판받는다, 제발 그 말은 좀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같이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 이야기를 안했으면 좋겠다는 것을 신신당부하고 싶은 거예요.
제가 아는 노래 중에 그런 것이 있어요. “제발 그 음악은 틀지 마세요. DJ……” 그 가수가 나하고 나이가 동갑인데요. 그처럼 그거 들으면 내가 이 자리에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 사람의 부정적인 면을 왜 자꾸 들추나 하는 겁니다. 긍정해도 모자랄 판에. 애들 보고 “잘한다, 훌륭하다. 너 큰사람 될 수 있어. 너는 착해. 너는 대단해. 너는 우리 집안의 자랑이야.” 그런 긍정적인 말만 하지 왜 “너 지옥 간다. 너 멸망당한다. 너 심판 당한다.”
부모는 차마 그 말 못하지요. 지나가는 아저씨가 그 말 하게 되면 그 아저씨는 이제 죽었어요. 그 아저씨가 만약 사도바울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 아저씨가 예수님이라면 여러분은 그래도 예수 믿겠습니까? 제가 설교 시작할 때 한 중요한 이야기는 뭐냐? 인간은 같다. 동질성. 이 동질성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어떤 동질성이냐? 모든 인간은 고귀하다. 이 고귀함만큼은 건드리지 마라.
집에 세 식구가 있더라도 “우리 아버지 참 훌륭하고 우리 어머니도 훌륭합니다.” 그런 말을 내뱉더라도 너무 좋아들 하지 마세요. ‘아버지 훌륭하고 어머니도 훌륭하지만 그것보다 더 고귀한 것은 나입니다.’ 하는 것이 기저에 깔려 있어요. 내가 더 훌륭해요. 내가 더 훌륭하고 내가 더 소중한 겁니다. 이건 타고 났어요.
타고난 그것을 가지고 로마서 5장에서는 모든 아담은 죄 가운데 있다는 짧은 멘트, 짧은 문장으로 적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고귀한 거예요. 고귀한데 막상 예수님이 오고 나니 그게 안 고귀해요. 예수님만나기 전에는 나도 고귀하고 너도 고귀하고,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인간이 고귀하고 존엄하다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바거든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사도가 인간에게 욕설하기 전에는 그런 줄 알았지요. 그러나 히브리서 2장 14, 15절에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브리서는 사도가 썼다고 보는데 사도바울이 히브리서 2장을 쓰면서 인간을 뭘 로 보느냐? 그냥 홀로 있는 존재로 보지 않고 악마에 사로잡혔다고 보는 겁니다. 악마에 사로잡힌 그 증거가 뭐냐? 죽기를 무서워하는 거예요. 왜 죽기를 무서워합니까? 죽기를 무서워하는 여기에 대해서는 일체 예외가 없다는 거예요. 동질성. 모든 인간, 교회 다니나 안다니나 모든 인간은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가 이런 소리하기 전까지는 죽음을 무서워하는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아무 이상이 없다고 여겼지요. 그러나 히브리서 2장을 딱 들추니까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은 원래 하나님이 만든 인간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런 인간을 만든 적이 없다는 거예요. 코로나 걸려서 죽기를 무서워할 때 이것은 정상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께서 안받아주는 것을 가지고 인간들은 자기가 고귀한 존재라고 지금 우기고 있는 거예요. 그건 인간들끼리 통하고 목사들이나 교인들 간에 통하는지는 모르지만 사도한테는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사도는 그런 것 안 봐줍니다. “네가 존재하는 것이 멸망, 지옥이 있다는 뜻이고 너는 지옥가고 있는 거야.” 이 동질성에서 발 못 뺍니다. 뺄 수가 없어요. 무슨 힘으로 뺍니까?
이미 세력이 있는데요. 그 세력은 악마의 세력이고 악마의 세력은 죽음을 가지고 협박하고 공갈치고 있어요. “너 그러면 죽는다. 지옥 간다.” 이런 이야기를 못 듣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못 들어요. 엎어져서 자든지 하지 이런 이야기를 무서워서 못 들어요. 욕설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멸망이라는 이야기 제발 그 말은 좀 빼달라는 거예요.
“그냥 우리 식대로 덜 죽으려고 애쓰는 것을 좀 봐주세요. 약한 인간이 그럴 수 있는 문제지 그걸 닦달내면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우리는 극구 사도를 향하여 밀어내고 또 밀어냅니다. 모든 인간은 동질성, 똑같습니다. 교회 40년, 50년 다녀도 죽는다 하면 인생 실패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빌립보서 1장에서 죽고 싶어 환장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사도의 일방적주장이고 일반인들은 살고 싶어서 환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안다는 거예요. 복음을 보고 있다는 거예요. 이거 왜 봅니까? 그냥 덮지요. 덮어버려야 돼요. 어디서 문제가 되느냐? 인간의 한평생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어떤 경우, 어떤 대목에 오게 도면 저게 곧 나야하고 확 잡고 싶은 겁니다.
청소년들에게 “너 커서 뭐할래?”하고 물으면 애들 앞에 좍 후보감이 지나가지요. 오디션 보듯이. 손 흥민도 지나가고, 야구선수 양 준혁도 지나가는데 ‘어 저거!’ 하고 방탄소년단을 붙잡지요. 이것은 애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어른들도 그래요. 살아가면서 20대, 30대, 40대, 계속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내가 딱 집어서 저게 되고 싶다는 거예요.
방송 보는데 어떤 가정에 가훈을 적어놓았어요. “가늘고 길게 살자.” 액자로 만들어놨어요. 제 눈에 크게 들어온 것은 제일 뒤에 있었습니다. “살자” 살자가 가훈이에요. 살아서 뭐할 건데?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닌데 살아서 뭐할 거예요? 왜 혼자 고집을 그렇게 부리는 거예요? 왜 죽으면 안 되는데? ‘난 고귀하니까.’ 너보고 고귀하다고 하나님이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네가 고귀한 존재고 남은 죽어도 너는 안 죽어야 되는 고귀한 존재라는 것은 성경의 어느 근거에서 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근거 없어요. 동질성. 모든 인간이 다 마귀의 세력에 잡혀 있으니까 이쪽 말 참고로 들어보고, 저쪽 말 참고로 들어보고, 학교에서 배우고, TV에서 봐도 다 똑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존엄하다. 고귀하다. 죽으면 안 된다. 인간의 이상형은 뭐냐? 네가 편한 것 골라잡아라. 그게 한평생 사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거 외에 우리가 아는 게 뭐예요?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지금 떠나고 싶다. 지긋지긋하다 이 세상. 그만 떠나고 싶다”는 그 빌립보서 1장 23절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이런 고백, 그것도 웃으면서, 정말 즐거워하면서, ‘내가 이런 인간되었다니. 아 감사해라.’ 그런 마음으로 1장 23절을 이야기를 안 하잖아요. 그래서 지금 빌립보교회가 없어요. 이 편지를 받은 빌립보교회가,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한군데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없어지라고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교인이나 교인 아니나 동질이니까, 똑같으니까.
그들이 살아가는 것은 바로 “지옥이 있다, 저런 인간이라서 멸망한다.”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 땅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관심 두는 것은 “주여, 기준이 뭡니까?” 여기서 그런 질문이 나와야 돼요. 사도보고 우리가 화내고, 성질내고, 욕설하기 이전에 “그렇다면 기준이 뭡니까? 당신이 우리가 아는 기준하고 다른 기준을 적용시키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두고 멸망이라는 말을 끄집어내는 것은 멸망과 연계되어 있는 어떤 기준이 있을 것인데 그 기준이 뭡니까?” 이렇게 되겠지요. 사도는 이렇게 합니다. “그 기준, 인간세계에서는 그 기준을 구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셔야, 기준자체를 은혜로 주셔야 비로소 기준을 압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하는 질문은, “은혜를 받았다, 와 안 받았다는 그것과의 차이점이 뭡니까?”라고 한다면 사도가 하는 말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동질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29절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온 거예요.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라고 할 때 그 고난은 밥 먹고 산다고 애를 먹는 그것이 고난이 아닙니다. 재해생계비 받으려고 서류 꾸민다고 고생하는 그 고생 아니에요. 예수님과 동일성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얻어먹었던 그 욕설, 그 핍박, 미움, “너는 인간도 아니야. 저리 가. 죽어버려.” 하는 그러한 비난, 그것을 공통적으로 체험하는 그것이 바로 고난이에요.
사도가 이것을 받았고 그리고 스데반집사도 이걸 받은 거예요. 성령으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을 같이 누리게 되는 겁니다. 악마가 가만있을 악마가 아닙니다.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악마가 자꾸 부추기는 거지요. ‘너는 고귀해. 다른 사람은 못해도 너는 성공해야 돼.’ 이런 식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서 계속 긍정적인 마음을 심어주는 거예요.
그 시초가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시작을 해야 돼요. 악마는 십자가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너는 고귀하다. 고귀한 존재기 때문에 너만큼은 천국가야 돼. 너는 구원받아야 돼.’라고 계속 부추기는 겁니다. 그러면 고귀한 존재가 천국가려면 천국의 커트라인에 합격할 정도로 더욱 고귀해야 되겠지요.
여기에 투입되는 것이 뭐냐 하면, ‘행함’이라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했지요. 설마 한 주 지났다고 잊지는 않았겠지요. 믿음에서 믿음으로 가야 될 텐데 믿음에서 행함으로 가버려요. 왜냐하면 그 믿음이 이 세상에 없는 믿음인데, 십자가에서 나온 믿음인데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고귀하고, 자기 결심과 결정과 자기선택이 고귀하니까 이 고귀한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있을 수 있다고 자기열심이 자기최면을 거는 겁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고분고분합니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저는 선교사로서 죽기까지 내놓겠습니다.” 그런 말을 내뱉는 이유는 뭐냐 하면, ‘나는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상실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기어이 어떻게든 버티겠습니다. 나는 구원받고야 말겠습니다. 왜? 그 정도로 나는 고귀하니까. 나는 가치 있으니까.’ 그걸 밑에 깔고 하는 이야기에요.
그러니 이 말씀이요, 은혜라는 것도 들리지 않아요. 하나님이 주신다는 그것도 들리지 않아요. 현재 내가 갖고 있는 것 중에서 선한 요소가 무엇인가, 계속 그것을 추려보는 겁니다. 선한 것이 뭐가 있을까, 고상한 것이 뭐가 있을까, 성경에서 나오는 온유와 화평 그런 것들이 내 안에 얼마나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을까, 그런 것을 계속 윤리 도덕으로 끄집어내서 그것을 모아서 하나님 앞에 “이만하면 되겠습니까? 이 정도 드리면 나름대로 성실한데 이러면 천국에 골인되겠습니까?” 그것을 자기의 기준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준을 몰라요. 사도바울이 그런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그런 것은 내가 다 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도사야. 율법으로 흠이 없다는 점에서 나는 남에게 안 져. 나는 남에게 진다는 자체가 싫어. 선함과 완벽함과 철저함에서 나는 남에게 밑지지 않는 사람이었어.” 사도는 사도되기 전 사울시절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문둥병자가 발 씻은 물 내가 마신다. 대단해 보이지요. 어떤 수녀가, 아주 고상한 천주교 수녀가 문둥이의 발을 씻은 물을 자기가 마셨어요. 그거 보고 들은 사람들이 박수를 막 칩니다. “저게 바로 이웃사랑이고 희생이 아니면 뭐냐?” 장애자가 주눅 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나도 당신과 같은 장애자입니다.’ 그걸 보여줘서 남에게 부담 느끼지 않도록 하기위해서 그런 식으로 한 거예요. “야,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신부는 ‘비켜, 비켜. 다 비켜. 뭐 그런 더러운 물 마셨다고?’ 그 사람은 아예 문둥병자가 되었어요. ‘자, 이래도 내 앞에서 수녀 깝죽댈래?’ 더러운 물 마시는 그것이 더 고귀한 희생입니까, 같이 문둥병 된 것이 더 희생적입니까? 그 신부가 데미안이라는 신부에요. 실화입니다.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정신병이라, 이걸 정신병이라 하는 거예요.
보통 정신병은 두 종류로 나누는데 보통 정신분석학에서 그렇게 합니다. 신경증과 정신병 이렇게 둘로 나누는데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산이 있잖아요. ‘저건 꼭 산 같아.’ 이건 신경증세를 갖고 있습니다. ‘저건 산이다.’ 이러면 정신분열증 환자에요. 참 이상하지요. 산보고 산이라고 하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하는데 그게 정신병환자거든요.
이 말은, 모든 인간은 현실에 대해서 오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유가 뭐냐?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도 모르면서 산은 산이라고 우기고 있으니까 그게 정신병 현상이라는 겁니다. 정작 본인이 누구냐는 몰라요. 왜? 바꿔야 되니까, 이상형을 바꿔야 되니까. 집에서 중3이 되기까지 의사 되려고 공부 하다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는 뭐하느냐? 드럼 치고 있다고요. 왜? 드러머가 되고 싶은 것이 나의 이상형이라고 다시 잡았어요.
어떤 애는 공부를 잘해요. 수학도 잘해요. 그런데 고등학교 들어가자마자 뭐 하느냐? 베이스 기타 배운다고 둥둥거리고 공부는 치웠어요. 내 욕망은 결핍이 있기 때문에 욕망하는 거예요. 욕망은 만족시키면 안돼요. 계속해서 바꿔치기, 자리바꿈이 계속해서 나와요. “우리 애는 공부가 제일 쉽다고 해요.” 하지만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몰라요.
인간은 말을 내뱉어요. “어머니, 군대 갔다 오면 반드시 취직하겠습니다.” 그 말 믿지 마세요. 군대 가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몰라요. 회사 들어 간지 6개월 만에 뛰쳐나올지도 모르고, 이 사업하다가 저 사업하고 저 사업 하다가 이 사업 하고 그게 오래 안가요. 또 뭘 할지 몰라요.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모든 것이 세상과 본인에 대해서 오해하면서 살아간다니까요. 누가 잡아주는 정답이 없어요. 성경말씀 외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나는 팩트만 채집한다고. 현실을 현실대로만 분석한다고.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습니다. 유일한 현실, 최종적인 현실은 하나밖에 없다고.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그 외에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그게 주께서 제시한 마지막 정답이에요. “내가 죽음으로 너희는 죽었다.” 네가 죽어 있는 그것이 현실이에요.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네가 멸망당하도록 태어났다는 그것이 현실이고 예수님만나지 않으면 이것은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저 자기의 고귀함에만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 사도바울이 인간을 두고 멸망의 빙거, 증거라는 것……, 또 말씀드려야 되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동질이다.
따라서 같은 인간은 서로 통하도록 되어 있어요. 네가 걸린 바이러스 나도 걸리게 되어 있어요. 서로 같아요. 모든 아담이 동일하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저쪽이 멸망의 증거라 한다면 곧 이것은 내가 멸망의 증인, 곧 지옥사람이다, 라는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너는 지옥가고 나는 천국 간다는 그 기준……, 이것은 논리적으로 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멸망당하는 인간의 논리와 내 논리가 동일하다면 저 사람이 멸망 받는 기준에 대해서 내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왜? 동일하게 때문에. 친구가 있는데 “친구야 이리와 봐라. 사도가 있는데 너보고 지옥간대.”
그러면 친구가 하는 말이 “너는 그 말 듣고 가만있었나? 네가 나를 지켜줘야지. 너 나하고 생각이 같잖아.” “글쎄 너보고 지옥 간다는데 나도 그 이유에 대해서 모르겠어.”라고 나온다면 사도가 “너도 지옥 가. 왜? 이유에 대해서 모르니까.” 저 멀쩡한 사람이 지옥 가는 이유를 모른다는 점에서 너도 모른다면 구원받는다고 아무리 내가 우기고 싶어도 나도 같이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그 기준을 모르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네가 스스로 이 본문 듣고 예수 믿고, 하라고 하는 대로 다 해도 그 기준에 대해서 동의하지 못한다면 네가 하는 고생은 주님의 그리스도를 위한 고생도 아니고, 네가 바로 곧 지옥 가는 사람의 증인이 된다는 겁니다.
성경을 왜 봅니까? 본인이 고귀한 존재고, 그 존재를 천국으로 올려 보내기 위해서 성경을 보잖아요. 교회 왜 와요? 천당 가려고 교회 오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기준이 예수님 기준이 아니고 내 기준, ‘나는 고귀하다’가 예수님 기준보다 먼저 선행된 기준이 된 거예요. 내가 1순위고 예수님 십자가 지신 것은 2순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어떻게 사도바울을 바꾸는가 하면, 여기서 멸망이라는 것을 빼기 위해서 뭘 하는가?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이야기해버려요. “여러분, 여러분이 죄 많아서 구원 못 받지요. 하지만 주께서는 여러분 죄를 대신 씻어줬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이 기다리고 있는 부활의 새생명, 천국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마시고 여러분을 스스로 긍정적으로 생각하셔서 기쁘게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 뭔가 빠졌어요. 기준이 빠졌어요. 처음에 ‘나는 고귀하다. 이 고귀한 존재를 천국에 어떻게 보내지? 옳지. 참고할 것은 성경에서 찾으면 되겠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니까 거기 정보가 가득 들어 있겠지.’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자기 필요한 것 끄집어내 보니까 ‘예수님이 죽었다(이것은 작은 글자로)가 살아 나셨다(이것은 큰 글자로)’가 오지요.
고귀한 나에게 뭘 하느냐? 죄씻음도 집어넣고 부활하는 것도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남아 있느냐? 고귀한 나는 계속 고귀한 채로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그 말씀을 실천에 옮깁니다. 실천에 옮긴 사람에게는 보너스를 준다는 교회들이 대부분이거든요. “이왕 구원은 받았고, 바르게 살고 봉사하면 보너스를 주니까 그래서 나는 기쁘다.” 왜? 구원받아서 기쁘다는 거예요.
왜? 처음부터 1번, 2번, 3번, 4번, 1번, 나는 고귀하다. 이걸 지우지 않고 2번, 성경말씀을 통해서 구원받을 정보를 얻는다. 3번, 실천에 옮긴다. 4번, 그래서 나는 구원받았다. 구원받았다!(손을 쳐들어 만세를 한껏 부르면서) 그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오랜만에 운동했습니다. 뭐예요 이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와 함께 고난 받는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주님과의 동질성입니까? 아담의 동질성이지요. 멸망 받는 사람과의 동질성이지요. 이게 뭐예요 이게?
김 지하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운동권에서 유명한 사람이고 박 정희 정권 때 싸우다가 교도소에 갔는데요. 그 사람이 나름대로 개과천선했다는 거예요. 교도소 독방살이 하는데 창틀에서 풀이 자라는 것을 보고, 또 운동 나갔다가 교도소 붉은 벽돌담 위에 어떤 씨앗이 날아와서 거기서 꽃을 점점이 피운 것을 본 거예요.
그걸 보고 ‘아, 인간이라 하는 것, 이 자본주의의 모든 모순은 계급투쟁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야 된다. 그렇지 인간은 그동안 자연을 너무 정복의 대상으로만 봤지 친하지 않았다.’ 그래서 김 지하는 교도소 갖다오고 난 뒤에 운동권 때려치우고 자연주의로 바뀌었습니다.
자, 뭐가 문제냐 하면, ‘나는 고귀하다’는 지워지지 않았어요. ‘나는 고귀하다’를 계속 유지하면서 ‘그동안 계급투쟁해서 사회주의로 만드는 것이 고귀한 줄 알았는데 교도소 와보니 그것도 다 부질없는 것이다. 자연과 함께 자연과 더불어 자연친화적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진짜 인간다움이다.’ 교도소 나와서 그 때부터 자연주의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고귀함은 그대로 살아 있는데. 그게 멸망의 증거지요. 김 지하의 그런 태도나 교인들의 교회 오는 태도나 다를 바 없습니다. 똑 같아요. 전교조 예를 들어볼까요? 애들에게 “여러분, 인간은 존엄합니다. 고귀합니다.” 그게 1번. 2번, “왜 이 세상이 이렇게 힘들고 특히 젊은이들이 살기가 힘든가? 그것은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을 독점해서, 그걸 다 장악해서 이윤을 추구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모든 노동력을 강탈해갑니다. 따라서 우리가 계급투쟁을 해서 바꾸게 되면, 혁명을 하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때 1번, 나는 고귀하다. 2번, 내고귀한 노동력을 누가 착취하나? 자본가들이다. 3번, 노동자들이여 단결해라. 뒤집어엎자. 4번,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지상천국을 이룰 수 있다. 1, 2, 3, 4번. 신문만화처럼 딱 나오잖아요. 딱 나온다고요 이게. 고귀함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게 뭐냐? 대순진리회도 그렇고요, 통일교도 그렇고요, 신천지도 그렇고요, 그리고 우리나라 19세기의 동학혁명도 그겁니다.
“하늘과 땅과 인간은 조화롭게 유대를 해야 행복한 지상천국을 만들 수 있다.” 원불교도 그렇고요. 대승불교도 그렇고요. 모든 종교, 천주교는 물론이고요. 여러분, 자연친화라는 것을 생각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 뚜레주르가 생각나요. 거기 빨간머리앤 복장을 하고 아줌마가 자전거 타는 그림 나와요. 모르십니까? 제과점이요. 프로방스의 이태리 풍의 자전거 타고 가는 그림이 굉장히 목가적이잖아요.
이게 인간 속에 있는 동화적 요소에요. 자연과 더불어 편하게, 아무 구애받지 않고, 돈에 구애 안 받고 평화롭게 전원생활 하는 모습, 그 시골풍. 그 바탕에는 뭐가 있느냐? “왜 그렇게 살아야 됩니까?” “우리는 고귀하기에.” 내가 중요하다. 1순위로 내가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본문에서 멸망의 증거라고 할 때 그들에게는 이 말이 먹혀 들어가지도 않지요.
안 먹혀 들어가는 겁니다. 성경 천 독을 해도 소용이 없어요. 여기 30절에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이 말이 지금 안 싸우고 있는데 같은 싸움이 있다고 사도바울이 윽박지르니까 빌립보교인들에게 사도바울의 편지가 잔소리처럼 들리고 부담으로 느꼈겠어요? 본인이 살아가는 실제현실에서는 29절, 30절의 내용이 전혀 먹히지를 않고 있는데 사도는 지금 윽박지르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했어요. 이것은 완전 욕설이다. 사도가 욕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먹히지도 않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자, 그러면 사도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여기서 사도가 제시하는 기준을 생각해 봅시다. 28절에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 말을 할 때 사도본인의 의견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부터 내려오는, 즉 구약부터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원칙이 이겁니다. 로마서 9장 11절부터 16절까지에서 너무 길기 때문에 중요한 대목만 보게 되면, 11-13절을 먼저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그들이 이 땅에 태어나기 전에, 그들이 무슨 운동을 하기도 전에, 그들이 아예 생겨나기도 전에, 그들이 엄마에게서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한쪽은 사랑하고 한쪽은 미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게 기준이에요. 그 기준이 뭐냐? 사람의 행위가 아니고 오직 말씀대로 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이 기준이에요.
그리고 그 기준이요, 그 말씀대로 다 이룬 것이 십자가사건이었어요. 부활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이에요. 사도바울이 보는 현실이 뭐냐 하면, 십자가전과 십자가후를 나누고 십자가전과 후에 있던 그 십자가의 현실장(現實場)은 그 십자가가 옴으로 말미암아 전과 후로 나뉜 그 기준을 현실장으로 반복해서 되풀이하는 그걸로 구성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야 십자가로 모든 것이 연결되기 때문에 그래요. 일어난 모든 일, 신종코로나 그 일도 십자가와 연결될 수 있도록 십자가의 기준으로 봤던 그 세상과, 악한 세상이지요, 십자가 이후에 생긴 세상, 어떤 세상, 한쪽은 지옥으로 그리고 한쪽은 천국으로 가는 그 세상, 그 두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그 기준점이 십자가에 있다는 그 사실만큼은 우뚝 드러내기 위해서 현실은 그런 식으로 이끌려간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이 빌립보서를 쓴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자기 고귀함이라 하는 것은 다 탈락이지요. 다 툭툭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나 위주가 아니에요. 내 고귀함 위주가 아닙니다. 십자가사건위주라니까요. 말씀위주에요.
그래서 로마서 9장의 기준이 뭐냐? 사람의 행위가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그게 15, 1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이라 하는 것은 뭔가 반대쪽이 있어야 되는데 반대쪽이 뭐냐 하면, 원하는 자, 달음박질하는 자, 행함입니다, 열심히 원해서 달음박질해서 그 달음박질과 원했던 그 결과로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으로 인하여 핍박받는 그 사건이 십자가사건이라는 말이지요. 바로 그 사건이.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요.” 이런다는 말이지요. 아무것도 안하는 그것도 열심히 노력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하는 그것도, ‘1번, 내가 고귀하다’가 유지되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안 해도 지옥가요. 내가 고귀하다는 것.
그러면 주님의 십자가사건은 어떤 특정인을 예외로 두지 않아요. 동질성이니까, 모든 인간은 똑같으니까. 십자가로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다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인간의 고귀하다도 같이 없어져 버려요. 1번이 십자가지, 그 1번에, 나는 고귀하다가 들어가지를 못한다 그 말입니다.
창세기 27장 36절에, 제가 방금 말씀드렸던 에서와 야곱이야기가 구약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마지막이 중요하기에 다시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에서하고 야곱은 뿌리가 같아요. 한 뿌리입니다. 동질성이에요. 둘 다 똑같아요. 둘 다 동일한 인간이에요. 동일한 인간인데 하나님의 기준이 와서 복과 저주를 잘라버리거든요.
독일치즈 덩어리 자를 때, 칼로, 작두로 자른다는 그것이 좋아요, 작두로 딱 잘라버리면 남는 것은 단절면이 남겠지요. 매끈한 단절면, 텍사스 전기톱으로 자르는 그것보다 더 매끈하게 잘라버리는 거예요. 같은 것을 매끈하게 잘라버렸습니다. 잘라버리니까 뭐가 되느냐 하면, 복과 저주, 저주와 복 사이에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내가 고귀함을 기대하는 어떤 기대치도 완전히 잘려나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예요. 주님이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그 기준은 어떤 것도 그 절단면이 매끈해서 내 관행상, 습관상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았던 모든 것도 단칼에 전부 다 날라가 버리는 거예요. 나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어떤 요소도 복 안에는 그것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에서가 장자거든요. 에서가 장자인데 이 에서가 장자인 것을 기분 좋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동생의 역습을 받았습니다. 동생의 역습을 받아서 지금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여서 아버지의 유산을 강탈했거든요. 뒤늦게 형이 헥헥거리면서 와서는 아버지 모든 복을 동생에게 다 줬습니다. “하지만 저를 불쌍히 여겨서 저에게 남길 수 있는 복, 저를 위해서 빌 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묻는 대목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전혀 없다”고 하시는 거예요. 전혀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기쁘지 아니합니까? 복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뭉그적거릴 수 있는 어떤 근거나 이유도 일체 남기지 않았다는 거예요. 성도냐? 그러면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기대와 미련도 깔끔하게 없어지는 거예요. 정말 이건 인간이 아니므니다. 이건 기계입니다.
이건 기계에 해당되지요. 모든 인간은 동일합니다. 야곱이 형의 장자권을 빼앗은 것, 야곱이나 에서나 똑같아요. 한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고귀하기 때문에 형의 고귀함을 빼앗아서 자기 고귀함으로 바꾼 겁니다. 하나님께서 보는 것은 야곱이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장자가 형에서 나와서 동생으로 나오는 그 경로를 통해서 얼마나 복과 저주가, 장자의 명분의 이동경로가 얼마나 깔끔하게 정리되는가를 보는 거예요.
그 장자가 신약의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기준이 된다면 이 야곱조차도 안에 무슨 요소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에서의 요소가 있어야 되고 그 에서의 요소가 어디서 깨지느냐? 하나님 만나서 역습당하면서 깨져버리지요. 에서는 동생한테 역습당하고, 야곱은 하나님한테 역습을 당합니다.
그 때 야곱이 하는 고백은 “나는 죽었다.”입니다. 깔끔하게 죽었어요. 야곱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름 바꿔야 돼요. 야곱의 이름은 빠이빠이 해야 돼요. 이제 그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절단면이 깔끔해요. 다시 말해서 어떤 인간도 자기의 고귀함으로 천국을 넘볼 수 없다는 말이지요.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 때문에 천국 못갑니다.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어요.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세기 3장 24절의 이야기에요. 두로 도는 화염검을 가지고 생명나무로 가지 못하게 막아놓았다는 주님의 그 취지를 놓치지 마세요. 그걸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매일같이. 상기해야 돼요. “나를 위하여, 내가 즐겁고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이 남겨준 복은 없습니까?” “없다.” 에요. 없어요.
오늘 본문 29절도 마찬가지에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든 거예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거예요. 은혜를 주실 때 나 행복하라고, 고귀한 나 천당 가라고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함이에요.
이 이야기를 복잡하게 길게 했는데 짧게 하면 이렇습니다. 만두피가 얇은 만두가 요새 새로 나왔답니다. 저는 안 사먹어 봤는데 만두피가 너무 얇아서 투명하게 속이 다 보이는 만두에요. 이미지를 보니까 그래요. 하나님께서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십자가 기준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부활은 미끼상품이에요. 그것은 생각하지 마세요.
부활은 뭐냐? 십자가의 부활이에요. 십자가의 부활이지 나의 부활이 아니에요. 십자가의 부활이 되려면 주님의 십자가가 먼저 찾아와야 돼요. 1번, 주님이 십자가 져야 되고요. 2번이, 찾아와야 돼요. 찾아와서 내 속을 다 긁어내고 거기다가 창세전에 주님이 계획한 것, “하나님이 누굴 사랑하고 누굴 미워했다. 그 기준은 십자가.” 그 말씀이 그 속을 꽉 채워야 돼요.
속이 꽉 찬 남자?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속이 말씀으로 꽉 차 들어가야 돼요. 말씀으로 꽉 차 들어가 버리면 그 말씀으로 꽉 차 들어간 것을 어떻게 아느냐? 절단면을 내버리면 그 안에 말씀만 소복이 들어있는 거예요. 말씀만 들어있기 때문에 그 말씀이 어떤 말씀이냐 하면, 너는 구원받았다는 말씀이 아니고 그 말씀이, 왜 너는 구원 받아야 되고 왜 저 친구는 지옥가야 되는지, 그 기준이 들어 있는 말씀만 나오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 안에 “에서는 멸망되고 야곱은 사랑받았다.”가, 둘 다가 우리 안에 들어와야 됩니다. 어려운 대목이지요. “에서는 저주받았으니까 죽고 야곱은 구원받았으니까 나 이제는 에서 안하고 야곱 될래.” 하는 식으로 에서를 빠이빠이 할 수가 없어요. 그 빠이빠이 에서가 내 안에 들어 있다니까요.
왜냐하면 에서를 빠이빠이 해버리면 구원받은 내가 고귀해져버려요. 그러면 나는 누구의 증거냐 하면, ‘내가 구원받았다’의 증인이 되어버립니다. 구원의 증인이 아니고 나를 집어넣고 ‘내가 구원받았다’의 증인이 되어버린다고요.
그러면 사람들이 교회 올 때 어느 누구도 자기 지옥가려고 오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1번, 나는 고귀하다. 2번, 나는 성경말씀 이용하겠다. 3번, 성경말씀 실천에 옮긴다. 4번, 나는 진짜 천당 간다. 천당 가는 나는 인생 성공했다.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1번을 십자가로 집어넣어버리면 ‘1번, 나는 고귀하다’가 십자가 지게 한 원인이 되어버려요.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버린다고요. ‘내가 고귀하다’를 포기 못하기 때문에 주께서 십자가 지셨잖아요. 그런데 ‘주께서 십자가 졌다’가 되면 내 안에서 경쟁이 되어버려요. 십자가지심이 들어와 버리면 그 때부터는 나는 이미 죽은 자가 되어버립니다. 죽은 자가 되면 주께서 마음대로 활용할 수가 있어요.
죽은 자로 해놓고 그 안에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달음박질도 아니고, 네가 원함도 아니고, 살아 있으면 달음박질이 가능하고 원함도 되는데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달음박질도 아니고, 원함도 아니고, 내 고귀함도 아니고, 오직 창세전의 말씀이 차고 들어와 버리면 그 말씀 안에 뭐가 섞여 들어오느냐? 바로 에서가 들어와요. 에서가 같이 섞여 들어와요.
그러면 그것은 뭐냐? 어떻게 에서에서 야곱으로 달라졌는가, 라는 사실이 결론적으로 거기서 증거 된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용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에서에서 야곱으로 옮기면서 뭐가 옮겨지느냐 하면, 거기에 장자의 명분이 옮겨졌거든요. 장자라는 분의 경로, 과정, 그 절차를 증거 하는 사람이 바로 성도가 되고 그 성도는 그 절차, 말씀에 의해서 예수님과 함께 고난도 같이 받게 되는 경우를 당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를 전후로 따져서 있는 십자가중심의 새로운 현실장, 필드가 형성되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고 난 뒤에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드러나는데 그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나는 멸망당해야 될 자요, 에서, 곧 ‘내 즐거움과 내 행복을 남길 복은 없습니까?’ 지금도 매일같이 예수님을 향하여 빌고 있는 에서 같은 요소, 멸망과 저주의 요소를 품고 있기에 우리는 더욱더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마음껏 활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걸 지난 시간에 그 순수한 차이를 좁히지 말고 에서와 야곱의 그 차이점, 오직 기준점,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해와 오해로 살아왔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가르쳤고,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졌고, 관행이었고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사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적당히 주님 이용하면 천당갈 줄 알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멸망의 증거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쁘게 받아들여서 멸망되어야 될, 그리고 구원되지 못한다는 그 자체가 구원의 증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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