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빌 2장 1-4절(겸손)2005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2장 1-4절입니다. 신약성경 318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2: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사도바울이 교회한테 부탁한 것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마음을 같이 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남의 일을 돌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기 알기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이미 구원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미 구원이 되었는데, 더 구원받을 것이 필요한 것이 없는데 또 사도가 목덜미 붙잡고, 우리의 바짓가랑이 붙들고 하는 말이, 그냥 가지 말고 겸손하게 살아야 된다고 부탁하는 근거가 뭐냐, 그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 되지 또 여기서 추가적으로 어떤 율법처럼 사람들에게 “서로 마음을 같이 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돌보라.”라고 우리한테 지시를 했을 때 우리 마음속에 대체 어디까지 겸손해야 되고, 몇 번을 겸손해야 되고, 겸손을 안하게 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겸손을 많이 하게 되면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옵니까, 이런 것들이 머릿속에 막 새로 들어오는 거예요.
십자가 복음으로 기뻐하라, 했더니만 추가적인 율법조항 같은 것이 들어와서 부담이 싹 되는 거예요. ‘예수 믿는데 겸손하지 않았을 경우에 나는 천당 가겠는가, 지옥 가겠는가?’ 그게 또 고민거리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1절에 보면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령의 무슨 교제라고 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종마감을 눈에 보이는 사람들보기에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이 끝이 아니고, 성령님은 눈에 안보이지요, “눈에 안 보이는 성령님의 일이다. 내가 사도로서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일하고 계시는 성령께서 요구하는 바다.”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분까지 계속 이어지게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겸손이라는 것이 나온다는 이야기거든요. 성령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 만약에 성령과 연결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남들 보기에 되게 겸손한데 그것은 성령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신자라고 간주하기가 곤란하고 마음을 같이하기도 곤란하다, 그런 뜻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지금 일하고 계신데 그 모양새가 겸손으로 나온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과 연결이 안 된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겸손은 뭐냐? 그것은 성경에서 교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겸손이 뭐냐 할 때 겸손 아닌 게 뭐냐, 와 비교를 해야 확실하게 개념이 섭니다. 겸손하지 않은 것이 교만입니다. 그러면 교만은 뭐냐? 그것은 겸손 아닌 게 교만이다. 이렇게 되면 말이 안 되잖아요. 은행이 어디 있습니까? 미장원 옆에. 미장원은 어디 있습니까? 은행 옆에. 그것은 길 알려주나 마나에요. 그것은 길 제대로 안 알려주는 것이 되거든요.
교만이 뭐냐에 대해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뒤에 제일먼저 등장한 것이 교만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4장에 교만이 나옵니다.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이 나오는데 성경을 여러분이 수백 번 수천 번 봤을 게 아니겠습니까? 이걸 보면 볼수록 이해가 안되는 것을 저도 느끼고 여러분도 같이 느꼈을 거예요.
형 되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다. ‘이건 누가 봐도 나쁜 짓이다.’라는 것에 동의하실 겁니다. 문제는 형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이 대목입니다. “하나님이 없다. 난 하나님 안 믿는다. 난 하나님께 제사하고 예배하고 그런 것 없다.” 그러면 우리는 ‘아, 교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교만이구나.’ 하고 간단하게 결론이 나와요.
그런데 가인이 받은 소출을 추수감사제로 드리면서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렸어요. 누가 봐도 이것은 ‘야, 참 하나님을 인정하다니. 누가 봐도 겸손한 사람이다.’라고 그렇게 우리가 제 3자 입장에서 성경을 보면서 단정을 했는데 일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제사는 드렸는데 그 다음에 그 사람의 행세가 약 오른다고 동생을 쳐죽여 버린 거예요. 살인을 한 겁니다. 너는 없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래서 우리가 이해 안 된다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정성을 다해서 헌신하는 그 마음씨와, 동생을 질투해서 동생을 쳐 죽이는 마음씨가 같은 마음에서 나왔다는 점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안 믿고 죽이면 우리가 납득이 되는데 하나님 앞에서 껌뻑 엎어져서, 그것도 복달라고 예배드린 것이 아니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해놓고는 동생이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치 않아서, 성질나서 죽인 거예요.
이게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경배하고, 교회 나와서 충성 봉사하는 것이 네 눈에 겸손으로 보이냐? 그러나 그것으로 단정 짓지 말라. 동생을 죽인 것 봐. 동생을 죽이는 그 정신으로 인간은 얼마든지 하나님과 상대할 수 있는 존재다.’ 그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그것은 겸손 아닙니다. 그것은 교만인데 가인이 왜 그런 짓을 하느냐 하면, 바로 가인보다 더 센 것이 있어요. 악이 가인을 덮치기 때문에 가인은 악, 어떤 종류의 악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대변자로서 하나님 앞에 경배했고, 하나님 앞에 관계를 이어갔고, 그 동일한 마음으로 동생을 죽인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을 볼 때 주의할 것은 뭐냐? 사람을 세워놓고 “너 겸손하냐? 아니면 교만해?” 그렇게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사람을 정지시켜놓고, 사람들을 스톱시켜놓고 “네 속에 지금 겸손한 마음이 드는 거야? 아니면 교만한 마음이 드는 거야? 한번 내봐.” 그런 식으로 물을 수는 없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겸손이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여럿이 모였을 때 티가 나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혼자서 도 닦는다고 겸손한 게 아니에요. 여럿이 모였을 때 티가 나는 거예요. 혼자가 아니고 남이 있을 때, 그대가 있을 때, 타인이 있을 때 진짜 내가 겸손한지 아니면 교만한지, 진짜 성령과 연관된 일이 나오는지, 아니면 성령과 끊어진 가인처럼 악에 받쳐서 나오는지, 그게 오늘 본문으로 판정이 될 수가 있어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교회에서 보통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믿습니다, 라고 해서 받아들일 것이 아니고 ‘나는 오기가 넘칩니다. 나는 한 오기 합니다.’라고 일단은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참 악랄해요. 왜냐하면 페이크(fake), 발음 조심해야 되지요, 속이는 것, 속이는 짓을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악마가 인간만 건드리거든요. 속이는 것, 거짓말하는 것이 악마의 주특기라면 그것이 그대로 인간에게 반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만있을 때는 너무나 점잖아요. 한번 건드려보자. 자극이지요. 건드려봤을 때는 그 사람이 진짜 교만한지, 진짜 겸손한지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티 나?” “확 나.” 티가 확 나요. 건드려 보는 거예요. 누구나 자기 자신을 스톱시켜놓고 자기가 자신을 측정하고 판정할 수가 있어요. ‘주님, 이정도 겸손하면 되었지요?’ 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사람 옆에 다른 사람을 붙여서 나를 건드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이해하는 말로 천불난다, 하지요. 요즘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르지요. 천불난다, 화난다, 그 말입니다. 하늘까지 화난다. 천불나는 일이 발생됩니다. 그 때 인간은 결코 가인이지 아무도 아벨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티가 확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이 교회 다닌다는 것은 뭐냐? 페이크(fake)지요. 속임수입니다.
타고난 인간의 주특기가 속임수 쓰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진짜 성령과 맞닿은 겸손인지, 성령에서 나온 겸손인지, 아니면 네가 조작해낸 겸손인지를 아는 방법으로서 여러 관계, 다른 사람들, 타인들과 같이 있어보라고 요청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움직여서 자기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일하게 만드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자 여기에 일하는 모습이 나오지요. 그 사람 본인이 본인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평소에 일하는 모습이에요. 일하는 모습이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좁은 골목에 두 덩치가 가는데 방향이 같으면 부딪힐 일이 없지요. “내가 앞에 설게 네가 뒤에 서라.” 그러면 나란히 골목을 빠져나가면 돼요. 그런데 두 덩치의 인물이 서로 방향이 다를 때는 반드시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눈에 보이지 않는 소립자, 작은 입자, 이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입자를 눈으로 잡기 위해서 입자가속기를 만들어요. 우리나라도 있어요. 미국에도 큰 게 있고 프랑스 리용의 것은 더 크고요.
지하의 입자가속기를 돌리는데 중성자를 가지고 원자를 치게 만듭니다. 그러면 원자가 다 깨져서 거기서 전자도 나오고, 양자도 나오고, 중성자도 나오고 다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입자가 움직여서 충돌을 일으키면. 그러니까 그 사람이 정말 성령을 받았는지, 아벨인지, 아니면 가인인지 계통은 둘 중 하나인데 아벨계통이냐 가인계통이냐 그 두 계통 외에는 없어요.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이냐 뱀의 후손이냐, 그 두 계통으로 이미 규정이 되어졌기 때문에 본인이 거울 앞에 점잖게 서서 멋있다, 이것은 소용없는 겁니다. 본인이 본인 평가하거나 자기를 스톱시켜놓고 남들보고 자기를 평가하라고 요청하는 것, 그 심사기준은 의미 없는 거예요. 사람이 일할 때, 움직일 때 그 움직인 것이 방향이 어느 쪽이냐 하는 겁니다. 주님 쪽이냐, 아니면 내 쪽이냐를 보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 쪽과 내 쪽이 골목에서 부딪히면 이것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숨어 있는 자기본색이 확 티 나게 되어 있습니다. 확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혼자 도 닦지 말고 만나라는 말이지요. 교회 나오시라, 그 말이지요. 교회 나오셔서 뭘 하느냐 하면, 자극을 받아야 되고, 정말 천불나는 일을 맞닥뜨려야 되는 겁니다. 시기와 질투, 이런 것을 다 경험해야 돼요.
성도끼리는 어떤 식으로 서로 대화가 되어야 겸손을 보일 수 있느냐?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논리가 복잡하기 때문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성도끼리 만나게 하시는 것은 서로 죽이라고 만나게 하시는 거예요. “제발 저를 쳐 죽이세요. 제발(please) 저를 죽여주옵소서.”
이러한 마음을 바탕에 깔고 대화하지 않으면 성도끼리 만날 이유 없습니다. 안면 트려고? 안면 터서 뭐할 건데요? ‘내가 나를 못 치니까 당신이 나를 쳐서, 나를 천불나게 만들어서 내가 주의 일의 훼방자고 방해자인 것이 티 나게 하옵소서.’ 그것을 가지고 두 자로 겸손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주의 일을 방해하는 장본인인 것을 고백하는 것.
내 안에 십자가 있는데 그 십자가하고 내 원래 있는 육의 아담의 속성과의 내분에서 입자가속기를 통해서 충돌됩니다. 충돌되면 내가 튕겨져 나오겠지요. 튕겨져 나온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악마의 마음입니다. 악마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없다, 하잖아요. 있어요.
또 하나의 쉬운 예를 들면, 우리가 누굴 사랑한다 하는데 그 사랑의 근거가 출발이 뭐냐? 내가 일순위에요. 가장 사랑하는 대상은 나에요. 사랑의 대상이 나기 때문에, 날 사랑하는 것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인간을 만나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나를 위해서 사랑의 목적이 이미 정해져 있어요. 사랑하는 근거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요.
‘내가 나를 사랑한 만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제야 내가 마음 열어줄게. 받아줄게. 그렇지 않는 한 나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 못하겠다.’ 이게 바로 가인의 마음이에요. 출발을 가인의 마음부터 해야지 아벨의 마음은 생각하지 마세요.
창세기 4장에서 주께서 주목하는 것은 ‘가인의 마음은 이렇다.’ 아벨의 마음은 착하다, 가 아닙니다. 착해서 아벨이 구원받은 것 아니에요. 아벨은 얻어맞아 죽어서 구원받은 거예요. 죽임 당했다는 역할을 해서 구원받은 것이지 아벨이 가인보다 더 착한 것이 아닙니다. 그 엄마에 그 아버지에서 나올게 뭐가 있겠어요? 자기 엄마 아버지가 이미 범죄 했는데, 나올게 범죄밖에 없는데 아벨이 무슨 구원을 받겠습니까?
다만 역할이 죄인이지만 당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아벨은 구원받는 겁니다. 형이 죽일 때 ‘그래, 쳐죽어라.’ 그 역할을 아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하지요. 복음이 뭐냐? 십자가가 뭐냐? 누가 이야기하라면 이렇게 답변하세요. “복음이 뭐냐?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 십자가 하는데 나에게 간단히 설명해 봐라. 길게 하지 말고. 짜증나니까.” 십자가가 뭐냐? 구원의 근거가 나에게 없음이 십자가에요. 구원의 근거가 나에게 없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구원된 사람은 그걸 확실히 하는 겁니다. “주여, 내가 구원받을 이유가 없는데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이것은 생소함인데요. 이것이 생소함이거든요. 저는 이것을 언제 주일 낮 설교에 ‘초과’(超過)라고 했어요. 초과, 넘쳐나는 것. 이 초과는, 초과된 이 마음은, 겸손이지요, 초과된 이 마음은 나 위주로 사는 마음에서 나온 마음이 아니기에 이게 이상해요.
그래서 구원에 대해서 의아해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령과 연결된 사람이에요.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굉장히 본인이 낯설어 하고 본인이 이상하게 여겨요. 내가 구원받고자 아주 애를 쓰는 그 열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거든요. 그것은 교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고 오늘날 한국교회가 하는 짓이기 때문에 그것은 엉터리고 가짜입니다. 속임수에요.
그래서 이 의아해하는 마음, ‘이상하다. 나 같은 것이 왜 구원받지? 나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 나밖에 모르고, 모든 의미가 나로부터 나와서 나에게로 회수가 될 때에만 나는 만족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내가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데 이런 나를 왜 구원했지?’ 이것을 저는 네 자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유령출몰.
내 안에 유령이 돌아다니고 있는 거예요. 유령의 특징, 초과된 것의 특징은 뭐냐 하면, 기존의 질서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목사가 화내면서 명령해도, 누가 명령해도, 사도가 명령해도 다루어지지 않는 거예요. 성령님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그 성질을 다루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내 구원에 관리가 안돼요. 그런 요소가 있어야 돼요. 그래야 성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초과적인 것, ‘내 맘 나도 몰라.’ 그런 요소. 사람이 자기위주로 살게 되면 한시도 멈추지 않고 갈등과 번민이 생깁니다. 그리고 남을 만나면 변명의 변명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가인계통이기 때문에, 아벨은 특이한 상황이고 다 가인계통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와 그 엄마에서 태어난 자식들, 죄가 부모의 육을 통해서 계속 전달 전달되기 때문에 우리는 가인의 자손이라고 보면 돼요.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은 페이크(fake), 속임수고요. 그것은 형식이고 소용없습니다. 그렇게 줄곧 가는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과 충돌한다는 것, 맞닥뜨린다는 것, 두 덩치가 막다른 골목에서 서로 비키라고 하는 다툼이 있게 되지요. 그 다툼의 증거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증거로 나와야 돼요. 동일하게 나와야 됩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개인은 부분인데 놀라운 사실은 그 부분을 통해서 전체가 나온다는 것. 부분을 통해서 전체가 나와야지요. 개인을 통해서 전체가 나와야 되는데 개인에서 개인이 나오게 되면 자기의 개성, ‘나는 너와 달라.’ 자꾸 이런 쪽으로 정리가 된다는 말이지요.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얼마나 반갑습니까? 고마운 거지요.
성도끼리 만나서 “나 인간 안 되는 것, 나를 천불나게 만들든지, 나를 아주 죽이든지 하세요.” 그러면 “나도 그런 마음입니다. 다 같은 입장입니다.” 하면 얼마나 그 교회가 화기애애한 교회가 되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신종코로나 때문에 몇이, 2백 5십 명인가 죽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신종코로나 탓으로 다 돌려요. 내가 신종코로나라도 진짜 억울하겠어요.
왜냐하면 내가 그 사람 죽이기 전에 이미 인간은 늙어죽도록 되어 있거든요. 교통사고로 이미 죽은 사람, 음주운전 차에 치여서 밤중에 이미 죽어 있는 사람, 시체가 된 사람을 자전거로 자기도 모르게 밟고 지나간다고 나에게 살인죄를 적용시킬 수 있습니까? 이 예가 좀 희한한 예라는 생각이 들지만 인간은 이미 죽었어요. 이미 죽었는데 신종코로나 때문에 죽었다고 하니 신종코로나는 억울한 거예요 .
그러면 너는 안 죽나? 신종코로나 아니면 안 죽어요? 늙어죽잖아요. 죽음이 죽이는 거예요.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 죄라는 것, 악마가 인간을 죽이는 거예요. 악마가 뿌린 씨앗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죽게 되어 있어요. 어떻게 죽느냐는 그것은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고요. 따라서 왜 죽느냐만 알면 되지 자기 죽는다고 해서 신종코로나만 닦달내면 안 된다는 그 말입니다
여러분 악마는 본사가 없어요. 우르르 몰려가 데모할 10층 건물, 그런 본사가 없다고요. 그러니 인간은 사는 이유도 몰라요. 내가 천불나는데 항의할 곳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왜 사는지를 모르고 있어요. 왜 사는지, 왜 죽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하나님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말하는 겸손이라는 것은, “여럿이 모여 봐라, 옛날 이스라엘이 집단이거든요, 집단으로 여럿이 모여 봐라. 그러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 있다는 것을 네가 알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혼자서 말쑥하게 차려 입고 거울 앞에 서서 “나 이정도면 괜찮지. 오늘도 내가 나쁜 짓 안했지?” 백날 이야기해봐야 남이 와서 건드려보게 되면 들통 다 나게 되어 있습니다. 숨어 기어들어갈 생각하지 마시고요. 타인 앞에, 남들 앞에 나타날 때 우리 자신이 얼마나 페이크(fake), 나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 남들 앞에 등장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실감나도록 하게 하시는 겁니다. 충돌시키는 겁니다.
김 정은이 죽었으면 남한 사람들은 전부 다 점잖은 사람들 되었을 거예요. 멀쩡하게 살아나니 천불이 난 거예요. 죽어야 되는데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니니까 천불나지요. 너는 죽어도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그것이 노골화되었잖아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왜 세상은 내 맘대로 안 되느냐?’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어야 된다는 그게 바로 교만인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움직여라. 뭔가 행동을 보여 다오. 방향이 어딘지. 방향이 네 쪽인지, 너를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성령을 위하여, 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십자가를 위해서, 너 말고 다른 분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지를 네가 본때를 보여라. 보이게 되면 결국 네 미래가 방향성으로 확정될 것이다. 하나는 썩어진 것 하나는 영생.”
사도바울은 우리를 존재가 아니고 움직임으로 만들어요. 흔들어서 움직이게 만듭니다. 움직일 때 그냥 움직이지 못하지요. 남들이 와서 나를 움직이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 남들이 누구냐? 성경 특히 신약성경 편지 보게 되면 성도들이 홀로 곱게 도 닦으면서 산속에서 기도나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계속 현실의 시장바닥, 재래시장에서 만나고, 움직이고, 부딪히고, 끊임없이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여기 속인다는 말이 나오지요. 세상 사람들은 일단 자기위주로 산다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속여 나가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과 마주쳐야 세상 사람들보고 너 속이는 자, 라고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이 가만있습니까? “너나 나나 똑같잖아.”라고 반격이 들어오겠지요.
반격 들어오면 우리는 천불이, 화가 나겠지요. 우리가 화난다는 그 자체가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내가 나를 그동안 지독하게 속여 왔다는 그 속임수가 발각되는 순간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와서 나를 꼬집어주고 나를 공격해 줘야 돼요. ‘목사님, 왜 꼭 그래야 됩니까?’ 라는 의문이 들겠지요.
복음 안에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식으로 해볼게요. 구약을 통해서 어린양이 되시고 제사가 있음으로서 그 피로 이스라엘이 죄용서를 받았습니다. 7월 15일에 일괄적으로 용서를 받았어요. 그리고 신약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했습니다.
율법을 던져놓고 그 율법을 예수님 본인이 성취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지시게 된 거에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그 다음 반응은 뭐냐? 당연하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피 때문에 용서받아서 너무 고마워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고 저희 집으로 쏙 들어가 버려요. 자기가 평소에 하던 대로 돌아가 버립니다.
‘고맙다고 해줬잖아요. 내가 정말 주님은 귀한 분인 것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죄인이니까 내가 어떤 죄를 지어도 그냥 눈감아주시고 고맙다는 것만은 잊지 않겠습니다.’ 하고 쑥 가버려요.
그런데 그 다음차례, 성령이 하시는 것, 그 주님이 양이 된다는 그 과정을 놓쳐버렸어요. 주님이 양이 되셨다는 사실……, 다시 할게요. 아까 못들은 것처럼 표정을 하고 있는데요. 양이 주님이 되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주님이 되셨어요. 그게 1과정이라면 2과정은 뭐냐? 그 주님이 양이 되시는 과정이에요. 이 말은, 높아진 주님이 낮아지는 과정, 예수님한테는 이미 그걸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을 받은 사람도 과정 1과 과정 2가 다 같이 안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눈치를 채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지만 어린양이 되셔서 오셨다. 그리고 어린양이 드디어 주님이 되셨잖아요.
그러면, 그 과정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주님이 이미 어린양이 되셨는데 이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연속적인 일, 주님의 일입니다, 우리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연속적인 일은 뭐냐 하면, 구원받은 사람이 쓰레기처럼 걸레처럼 살 수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정말 감사하다면, 정말 양이 주님이 되셨다면 주님이 되신 분이 양이 되었다는 그 마음이 너를 통해서 나올 수가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지금 빌립보서 2장 4절까지만 봤잖아요. 다음 시간에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9절까지의 내용이 그 내용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유명한 거예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낮췄으니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의 마음이니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 지금 이게 되냐고 묻는 거예요. “나는 예수 십자가를 압니다. 예수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았잖아요. 내가 모를 리가 있습니까? 압니다.” 값싼 입으로 이야기하지 말고 네가 세상 속에서 타인과의 만남, 남과의 만남에서, 그들 앞에서 쓰레기가 될 용의가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쓰레기 되어야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이미 구원받았어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 가인 이야기를 다시 해 봅시다. 가인은 지금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으로 추수가 잘된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사 드렸습니다. 그 가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동생 쳐 죽였습니다.
이러한 사달이 났는데 그 사람은 하나님께 경배할 때 자기가 겸손한 줄 알았겠지요. 겸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교만한 거였습니다. 질투심이 발동해서 동생을 죽이고 싶은 거예요. 그 사달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성도한테는.
“하나님덕분에 구원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쳐 죽일래.” 이렇게 되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께 감사할 때는 아직도 개인이 살아 있어요. 개인, 나라는 것이 살아 있는 거예요. 나라는 것이 살아 있으면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의미와 가치와 사랑, 믿음, 소망, 사랑이 나의 잘남을 위해서 출발이 되고 그것이 ‘역시 나는 잘난 것이 확인 되었어.’ 하고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라는 것은 뭐냐? 이미 우리 속에 예수님 이용해서 내가 천당 가려는 욕심이 있어요. 이게 교만이거든요. 이것은 신앙이 아니고 악마의 마음이라는 말이지요. 예수 믿고 천당 가려는 이 마음이, 믿음으로 구원받겠다는 마음이 성령의 마음이 아니고 악마의 마음이에요. ‘누구 하나 나 건들기만 해봐라. 그 사람 믿고 나를 영원히 살려내겠다.’ 이게 악마의 마음이라는 말이지요. 악마의 마음은 우리가 처리 못해요. 왜냐? 모든 생각과 사고방식, 행동, 판단, 모든 결정과 선택이 나 좋으라고 나오기 때문에 내가 나를 없애지 못하는 한 이게 없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이 하나님이면서도 양이 되신 그 능력이 이걸 뚫고 지나간다고요, 뚫고! ‘뭐가 지나갔나? 구멍이 뚫리면서 뭐가 지나갔는데?’ 보니까 내가 어떻게 이런 요령을 부리면서, 어떤 수작을 부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신앙 있는 티를 내야한다는 모든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것이 중간에 뭔가 뻥, 하고 구멍이 뚫렸어요.
보니까 주님이 스스로 하신, 스스로입니다, 주님이 스스로 하신 그 자비하심이, 내가 구원받겠다는 모든 나의 치밀한 계획을 중간에 뻥, 하고 구멍을 뚫고 지나가 버린 겁니다. 예를 들면 개척교회 하는데 다른 사람은 천 원짜리 푼돈 내곤 하는데 그 사람은 특화된 실력이 있어서 십일조를 월 3백씩 한다. 제 희망사항은 아닙니다. 그냥 예를 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 교회 목사는, ‘우리교회가 바른 교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팍팍 뒤에서 힘 실어주는구나.’ 하고 되게 좋아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헌금하다가 무슨 말에 삐져서 교회 안 나온다, 할 때 그 교회 목사에게는 교인 하나가 빠지는 것이 아니고 3백만 원이 빠진 것이 되지요. 안에 구멍이 뻥, 뚫려버렸어요.
결국 그 목사는 뭐가 문제냐? 이 교회가 친구 교회가 아니고, 동창생교회가 아니고, 문제는 내 교회라는 이것이 사달이 난 거예요. 그게 화근입니다. ‘이게 내 교회다. 내가 당회장목사고 내 교회’라는 내 자존심과 엮여져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것은, 그 목사 자체가 초과적인 것이 없어요. 유령이 출몰 안했어요. 내 교회 잘 키워서 내 친구 목사보다 교인 수 더 많고, 헌금 더 많아지기를 기다리면서 페이크(fake), 이게 가인이거든요, 가인, 하나님께 경배하면서도 속내는 뭐냐? 나는 역시 잘났다는 것을 매일같이 스스로 확인하는 거예요.
‘나는 역시 살만한 가치가 있어. 나는 훌륭해.’ 이걸 쉬지 않고 확인하는 거예요. 매일같이. 썩어진 것만 거두는데 자기를 위해서 계속 목회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걸 제가 목회라는 예로 들었지요. 여러분 가정으로 예를 들어봅시다. 교회 나왔다. 우리 애까지 교회에 불러냈다. 고3인데 공부 안 시키고 교회 나오게 했다. 결국 그 목적이 뭡니까? 내 가정 잘되기 아닙니까?
그 목사의 내 교회 잘되기나 우리의 내 가정 지키기나 그것도 가인이고, 나도 가인이고, 둘 다 가인이에요. 모든 것이 가인입니다. 가짜다 그 말이지요. 속이고 속이는 세상 속에서 살아야 돼요. 우리가! 살면서 우리는 같이 천불나면서 속이는 그 인간이나 안 속으려고 하는 나나 그 나물에 그 밥 똑같은 겁니다.
그러면서도 사는 것이 힘들어서 ‘죽을 때는 편하게 죽어야 하고 천국은 가야지.’ 자기 자신이 문제 있다는 것, 가짜라는 것을 모르고 이 맘 가지고, 이 몸 가지고 천당 가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복음 들은 풍월은 있어서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데 “내가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게 죄인이 됩니까? 그것은 하나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지요.
영생을 위해서 심는 사람, 정말 썩어진 것이 아니고 영생을 위해서 심는 사람을 구경 좀 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저만 그런 생각이 드는가는 모르겠습니다만. 진짜 영생을 위해서 심는 사람, 성령을 위해서 심는 사람이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4장 4절에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내가 자책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라고 하면서 9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약간 긴데요. 인내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그 다음 11절에 보면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쓰레기처럼 취급당했다는 겁니다. 주가 양이 되는 모양새를 사도와 그 일행이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런 현상이 빌립보교회에도 찾아왔다는 겁니다. 왜? 빌립보교회가 지금 핍박받고 있으니까. “핍박받을 때 오히려 고마워해라.” “하나님 믿는데 왜 형편이, 살림살이가 왜 이렇게 힘듭니까?” 라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러한 환란이 왔을 때에, 그런 부딪힘이 있을 때에 평소에 내가 내 육체를 위해서 살았는지 아니면 성령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살았는지 티가 확 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표시가 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겸손하면 구원받겠지.’ 그러나 그 겸손은 주님의 겸손과 경쟁하게 됩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주의 일밖에 없어요. 내 일이 없어요. 겸손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속이 주님의 초과된 마음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게 갈라져요. 갈라져서 균열이 일어나게 되거든요.
균열이 일어나면 이것은 최악상태입니다. 그 최악상태에 이를 때 우리는 우리자신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하나의 사물이다.’ 또 ‘하나의 기계다.’ 라고 이해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사물의 특징은 천불날 자격도 없고요, 성질낼 권한도 없어요. 왜? 기계는 쓰일 뿐이니까. 주를 위해서.
주님이, 우리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관통할 때 우리는 자기가 점잖고 괜찮은 인간인줄 알았지요. 뭐 때문에 십자가 피가 나를 관통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그 자비하심으로만 구원되는 이유를 우리는 잘 몰랐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과의 부딪힘 다른 사람과의 부딪힘과 소위 형제라는 사람과의 부딪힘과 싸움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주님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참혹한 처단과 처벌을 받는 대상인 것을 우리는 그동안 몰랐던 거예요.
주님께서 햇빛 주시고, 공기주시고, 심장도 뛰게 하고, 뚱뚱한 몸으로 뒤뚱거리면서 걸으니까 자기가 잘나서 살고 있는 줄로 알고 있는데 주님이 찾아오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가혹한 처벌만 남아 있을 뿐이고 그 외에는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 없다, 라는 것을 우리가 미처 몰랐던 겁니다.
모르니까 그 모르는 바를 예수님께서 대신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아버지한테 버림받으신 거예요. 저주받은 거예요. 십자가의 그 고통 속에서 죽으신 겁니다. 우리는 남의 일로 생각하지만 우리가 한번 당해보세요. 감당 못합니다. 어느 정도로 하나님께서 대하셨느냐?
예를 들면 어떤 돈 빌려준 사람이 “돈 갚아라. 빨리 돈 안 갚으면 네 신체포기각서 써라.” 그 정도로 돈 갚으라고 닦달내서 한 3년 돈 모아서 빚 갚았다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아이고 수고했네. 돈 모아서 갚는다고. 내가 그동안 돈 갚으라고 닦달내서 미안하오.” 이렇게 나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채권자가, 돈 빨리 갚으라고 닦달 내던 그 사람이 옆에다 불 피워놓고 “잘 받았습니다. 이젠 갚을 것이 더는 없습니다.” 하고 그렇게 내가 공들여 애써 번 돈을 불 속에 다 집어넣어서 보는 면전에서 쓰레기로 다 불태운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네 찬미, 네 헌금, 네 봉사, 네 성의, 네 기도, 내가 안 받는다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라는 거예요. 십자가 믿고 봉사하고, 예배하고, 헌금하고, 이거 아니에요. 전도하고, 그거 아닙니다. 그거 해야 구원받는 것 아니에요. 그게 마땅히 찢어져야 되고 아무리 헌금과 기도가 하나님 무서운 저주를 대신할 수 없다는 그것이 실감나는 거예요.
그 실감하는 방법은 뭐냐? 혼자서 도 닦는 것이 아니고 남을 만나게 하는 거예요. 남을 만나게 되면 혼자 믿음 좋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것 나중에 타인 만나니까 이게 페이크라, 전부 다 내가 내 안에서 조작한 거예요. ‘이정도 하면 신앙인 맞지요?’라고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조작한 거예요. 화날 때는 화가 나야 되는데 안 나는 척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전부 다 가짜, 나 자신이 가짜인 겁니다.
그냥 기계면 되는데 그 기계가 되기까지 너무나 우리가 성질이 많아. 너무나, 내가 나한테 공들인 것이 너무나 많아요. 평생을 나한테 공들였거든요. 뭔가 남에게 의미 있고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요. 이런 것은 장점이고 이런 것은 단점인데 단점을 줄이면 장점이 많아지는 줄로 알았지요.
하나의 딱딱한 사물, 기계, 그것은 나한테는 최악상태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건드려도 꿈적도 안 해요. 이것은 죽은 자니까. 그 정도 되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 남들에게 속임을 당하고, 얻어터지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실망을 해야 그렇게 되겠습니까?
어떤 꼬맹이 가 있는데 친구한테 선물 주겠다는 소리를 듣고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지요. 친구가 뭘 주겠다고 했느냐 하면, 우리 집에 무선 이어폰이 많다는 거예요. 무선 이어폰이 10만 원 이상 하거든요. 그냥 이어폰은 다이소에서 2천원만 주면 사는 건데 무선 이어폰을 주겠다고 해서 “왜 그리 비싼 것을 나에게 선물을 다주나?” 하니까 우리 집에 많다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아홉 살 먹은 그 꼬맹이가 뭘 몰라서 그런 소리 한 거예요. 무선 이어폰이라 하니까 유선 이어폰의 그 선을 가위로 잘라버린 거예요. 그러면 무선 이어폰이 되는 줄 알고 흉내를 낸 거예요. 교회 와서 흉내를 낸 거예요.
남이 찬송하면 찬송하고, 예배하면 예배하고, 전도하니까 전도하고 선교비 내고, 봉사하면 같이 봉사하고, 기도하면 또 같이 하고 흉내를 낸 거예요. 사실은 고장 난 거거든요. 홍 잠언 이야기입니다. 이게 전혀 관련성 없어요. 이것은 성령 아니에요.
설교를 마치면서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뭐가 문제인데 그렇게 인생사는 것이 힘들어요? 힘드니까 변명하고 짜증내고. 내 선택은 옳지 않았다고 스스로 반성하고. 반성해봐야 소용없어요. 안 받습니다. 받지를 않아요.
우리 기도를 찢어버리고, 우리의 헌금을 불태워버릴 때 비로소 내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그 저주의 무게, 악마의 무게를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이유도 없이 그냥 빠져나온 거예요. 그 외에 우리가 달리 증거 할 거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남들과 만나야 돼요. 만나서 ‘너 잘난 것 못지않게 나도 잘났다.’ 그렇게 버티는 겁니다. 주님의 희생 앞에 트릭 쓰지 마세요. 그거 천사가 안 속아 넘어갑니다. 주님도 안 속아 넘어가요. 사람은 속아 넘어가요. 목사는 속아 넘어가지만 주님한테는 안 통합니다. 트릭 쓰지 마세요. 적어도 이 정도 돼야 돼요. “너 무슨 재미로 사나?” “나 죄짓는 재미로 산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죄짓는 재미로 살아야 돼요. 남들 보기에는 전혀 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기는 죄래요. 이게 초과적입니다. 이게 유령 출몰한 사람이고 본인이 생각해도 본인이 의아해해요. 이것은 본인의 합리적인 선을 넘어서요. 이것은 자기가 예상한 인생도 아닙니다.
망했다고 해서 아직 인생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사물이 되기 전까지는. 기계가 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에요. 바닥 쳤다고요? 아직 바닥 남아있습니다. 인생이 불행하다고요? 개코같은 소리. 아직 불행 구경도 못했어요. 더 있어요 더, 더 있다고요.
사도바울 보세요. 만물의 쓰레기 되었잖아요. 걸레 되었잖아요. 그래도 사도바울은 삼층천 본 사람입니다. 초과적인 것이 있어요. 그럴 때 주의 사도는 자기의 사도됨을 자랑질 한 것이 아니고 자기 구원받은 것을 자랑질 한 것이 아니고 주님만 증거하는 사람 되는 겁니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되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버림받은 세상에 태어난 것이 잘못입니다. 신종코로나 잘못이 아니고 태어난 자리가 망하는 자리, 멸망의 자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성령 받고 뒤돌아보니까 비로소 그게 보이는 거예요.
따라서 주께서 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과 더불어서 그분의 영이 찾아왔다는 말은, “이제는 포기할 것은 포기하라. 제발 네 인생 쥐고 있지 말고.” 너무 쥐고 있으면 목 졸립니다, 그냥 쥐고 있지 말고 우리 인생 놔버리세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주님 보다 덜 고생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혼자서 도 닦는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만나게 해준 각양각색 사람들을 통해서 얼마나 우리가 아벨이 아니고 가인인가를 티 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안 지려고, 남한테 이겨보려고, 내가 근사하게 산다는 것을 티내보려고 그게 우리의 목적이 되지 않게 해주시고, 성령을 위해서, 영생을 위해서 다뤄지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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