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의 이름(빌2;9-11) 2005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5. 19. 12:50

주의 이름

2020년 5월 17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2:9-11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모든 일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마무리 되었습니다. 왜 다른 이로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을까요? 다른 이나 다른 신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타남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이 먼저이고 그 다음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이름은 일단 이 세상에 태어나고 난 뒤에 이름을 부여받은 겁니다.

따라서 ‘주의 이름’의 기능이 완료가 되면 자연적으로 소실될 이름입니다. 우리네 이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름이란 ‘운명’입니다. 곧 ‘확정된 운명’을 말합니다. 이름이라고 해서 다같은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이란 ‘거기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이미 ‘거기 있게 된 자’라고 할지라도 악마에 의해서 달리 간주됩니다.

사도행전 19:15에 보면,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귀는 인간들 사이에도 차이나는 인간들이 생겼음을 간파하고 있었던 겁니다. 악마는 제대로 현실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악마의 수작에 의해서 완벽하게 현실성과 괴리되어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악마는 부지런히 일합니다. 어떤 일을 할까요?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3-4)

악마는 가진 모든 시도를 퍼부어서 예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하나님께 영광되는 구조를 완성시켰다는 사실을 인간들로 하여금 눈치 채지 못하게 합니다. 따라서 그 어느 인간도 이 악마의 세력권을 자력으로 뚫고 진실된 현실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은 ‘주의 이름’의 일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한 일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성경책 들고 옆에 끼고, 자신이 예배당 안의 좌석에 앉고, 자신이 노래부르고, 자신이 기도하고, 자신이 성경공부에 참석하고, 자신이 헌금하고, 자신이 전도하고 봉사합니다. 모두 자기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만 유지되고 지속되기에 그것은 결코 악마의 세력권 밖으로 나아가서 ‘주의 이름’의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주의 이름의 일’이란 이미 이 땅에 하강하여 오실 때부터 그 어떤 인간도 따라올 수없도록 십자가 죽음으로 통해서 사라져버렸습니다. 따라서 ‘주의 이름에 의해 모집된’ 자들은, 악귀도 알아주는 것처럼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즉 불가능한 일 → 불가능한 일→불가능한 일의 연속입니다.

인간 이름에 내세우는 가능성은 철저하게 배제됩니다. 이미 하나님께 영광이란 오로지 주님의 이름으로 완료가 되어버렸습니다. 인간 이름이 새삼 나서서 거들 일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여전히 인간이 거들 일이 남아 있다면 이것은 ‘확정된 운명’이라는 이름의 성격과 맞지 않습니다.

존재란 선행된 이름의 그 완성(이름다움)을 위해 투입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의 일은 더 이상 남아 있을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상하신 현실은 오로지 ‘하나님 영광’으로 완료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소망이 필요치 않는 겁니다. 만약에 여전히 소망이 필요하다면 이는 우상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인간들의 기대치를 동요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에게 있어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사무엘 본인의 이름으로 여긴다면 사무엘에게는 어떤 기대치가 남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3:6-7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되어 있습니다.

엘리제사장은 분명히 말입니다.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사무엘을 부른 겁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일하시는 겁니다. 사무엘에 붙여진 ‘주의 이름’대로 이제 사무엘은 기능하게 될 겁니다. 결코 사무엘의 가능성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늘 불가능성을 접하게 됩니다.

이점은 아담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했을 때, ‘아담’을 자기 이름이라고 여긴 아담은 흙이 되어야 합니다. 그 흙이 바로 ‘아담’이라고 불리는 원칙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아담’이라는 주의 이름과 ‘아담’이라는 흙의 이름을 함께 있게 된 겁니다.

이것은 ‘주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 곧 ‘악마의 권세 아래에 있는 이름’과 경쟁하면서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110:1-2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이름, 곧 인간의 운명은 이미 악마의 권세 안에 놓여서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을 못보는 처지에 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봅시다. 마태복음 16:16-18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곧 반석이라는 이름은 주님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시몬의 이름, 곧 악마의 권세에 놓인 이름은 어떤 기능으로 드러납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체포되었을 때에, 그 현장에서 예수님을 저주하고 모른다는 태도를 보여주므로서, 그 본색을 드러낸 겁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3년 동안에 같이 하면서 배워도, 인간의 가능함으로는 악마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즉 인간이 주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이름은 애초부터 죽은 이름입니다. 따라서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인간은 이 땅에 망하라고 태어난 겁니다. 불행하기 위해 태어난 겁니다.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더 생존하거나 혹은 자기 이름을 가지고 천국까지 가겠다는 것은 망상입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자기 이름의 구원방식을 뽑아낼 생각하지도 마세요. 어림도 없습니다. 인간은 사는 것도 사치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저주받을 자가 예수님의 이름의 생명책이 기록되므로 구원되는 것은 놀랄 일이요 당황스러운 사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유는 이 세상에 널려 있는 신들의 다수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오로지 참된 하나님만이 다음과 같은 취지로 나타나시는 겁니다. “내가 갈 때에 언약된 피를 문설주에 발라라. 그래서 유일한 원칙을 세우자!” 예수님만이 이 원칙을 세우신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같이 이미 확정된 우리 자신의 신분이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사된 일인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강-빌 2장 9-11절(주의 이름)2005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2장 9-11절입니다. 신약성경 318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이미 완료를 나타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에 대해서 실수나 차질이 없었다고 단언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하나님만이 아셨고, 하나님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추진하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이 땅에 보내셔서 다시 주의 자리에 앉게 하시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영광에 모자람이 없어요.

여기서 철저히 인간은 배제됩니다. 따라서 인간을 배제하시고 하나님과 아들만 통해서, 물론 성령께서 보조하십니다만,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 돌리는데 차질이 없었다는 것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모든 일은 마무리 지은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 돌리는 그 방식에 대해서 인간으로서는 상당히 낯설지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불가능으로 시작해서 불가능으로만 유지되면서 마지막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인간의 가능성이 끼어들 자리는 전혀 없습니다. 그 이유가, 인간이 갖고 있는 이름은 주님의 그 이름에 비해서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이름은 허구고 헛방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이름을 가지고, 그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을 위해서 살아왔던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그 가능성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 이름에 상처가 되지 않고 훼손되지 않는 방법에서 움직이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이 하는 일도 주의 일에 끼어들 수가 없지요. 인간의 일은 주의 일을 할 수가 없다. 불가능함, 불가능성이에요. 왜 불가능성이냐?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이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산다는 그 자체가 현실하고 안맞기 때문에 그래요. 현실하고 맞지를 않아요.

여기서 이름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름이라는 말이 한 두 번 나오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럴 때 이 본문 보면서 우리가 굉장히 낯설지요. 이름이 왜 그리 중요하냐, 그런 감이 오지요. 그래서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름이란 뭐냐? 운명의 다른 표현입니다. 운명이 이름이에요. 이름이란 곧 운명이다. 확실하게 말해서 이름이 먼저고 창조는 나중이라는 말이지요. 이름이 먼저 있었고 그 이름을 위해서 그 다음에 창조된 거예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인간이 창조된 거예요.

그런데 인간에 악마가 끼어들어서 인간을 위해서 인간이 존재하고 창조된 것처럼 인간들은 곡해했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나를 위해서 하는 모든 일이 현실하고 안 맞아 떨어지도록 하나님께서는 배제시켜 놓은 거예요. 옛날 어릴 때 제가 대구 비산동에 살았어요. 비산동이 지대가 높아요. 대성국민학교 그 앞에 제가 살았는데 동네가 언덕에 있어서 서문시장이 보입니다. 대구시내가 보이지요.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서문교회가 보이고 그밖에 많은 교회들이 보이지요.

어릴 때 생각했어요. 저 교회가 뭐하는 곳이냐? 제가 어릴 때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교회란 사람들이 성경책 들고 예배당에 참석해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리고 주일학교 애들은 거기서 성경배우고, 그리고 정기적으로 서문시장이나 사거리에 다니면서 전도하고, 그게 바로 교회가 하는 일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전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한다, 뭐 한다 할 때 사람들이 기도하고, 사람들이 성경책 끼고,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예배에 참석하고, 물론 사람들이,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예수 믿으라고 사람들이 전도하고, 사람들이 성경공부하고, 사람이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애들도 사람이 그걸 배우고, 모든 것이, 지금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사람의 일이에요. 그리고 사람의 일이고 가능한 일이에요.

그런데 제가 성경을 보니까 이 세상은 사람의 일이 현실이 아니고 주님이 하시는 일이 현실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당 다니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성경공부를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으로 소환되는, 인간 자기이름으로 소환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인간의 일이고, 그 인간의 일의 특징은 뭐냐?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된다는 거예요. 백날해도.

제가 성경을 보면서 정말 쇼크 먹었습니다. 한국교회를 보고. 교회가 이렇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주께서 저를 신학교 보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광도 되지 않고 아무짝도 소용없는 짓을 줄곧 150동안 계속해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모든 주인공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절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그것은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현실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이름으로 소환돼요. 내 이름으로 돌아온다고요. 내가 기도했습니다, 내가 전도했습니다, 내가 성경공부 했습니다, 내가 예배드렸습니다, 내가 헌금했습니다.

그리되면 어떤 교회냐 하면 가능성 있는 교회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제가 사도행전 19장 15절에서 알고 있는 교회라 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만들 수 없는 교회에요. 뭐라고 되어 있느냐?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그 다음에 귀신이 하는 말이 참 명언입니다. “너희는 누구냐”

너는 이 악마입장에서 볼 때 무슨 짓거리를 해도 이 악마의 나라에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활동에 불과하다고 보는 거예요. “너 뭐야? 뭐 이런 게 있어?”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이것은 우리에게 납득이 돼요. 예수님은 뭐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 다음에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악마가 같은 인간 가운데서 인간이 할 수 없는 불가능의 일과 접속되어 있는 그 바울이라는 사람과 그 나머지 사람을 악마 쪽에서 이미 분류하고 있고 간파하고 있고 파악하고 있다는 거예요. 악마의 관점을 놓쳐버리면 이것은 50년 60년 교회 다녀도 헛수고 한 거예요. 그냥 친목단체 놀러간 겁니다. 잡담이나 하면서 마음 풀려고 모인 거예요.

그렇다면, 이 악귀가 이야기한 것에 근거하게 되면 현실이라 하는 것은 누가 안다? 예수님이 알고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도바울이 현실에 부합되게 외치고 있다는 거예요. 현실에 부합되게 외치고 있는데 악귀가 너는 누구냐, 했으니까 그 외에 여기 등장하는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어떤 활동을 해도 그 활동은 현실에 맞지 않는 허구를 향하여 몸부림치는 일의 반복이었던 겁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모르는데 세상에, 악마가 그것을 간파하고 눈치를 채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 또는 예수님 입장에서 진짜 교회라 하는 것은 뭐냐? 불가능한 집단이어야 됩니다. 등록해도 소용없고, 등록을 해도 등록이 안 되는 교회 이어야 하는 겁니다.

기도해도 소용없고, 전도해도 소용없고, 헌금해도 소용없고, 예배참석해도 소용없고, 예배참석해도 소용없고, 성경공부해도 소용없고, 이러나저러나 그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의 집합, 집단, 그게 악마도 알아주는 진짜배기 현실적인 교회에요. 악귀가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에 대해서 이렇게 예민해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악마가 지금도 뭔가를 일을 해요. 악마가 그냥 놀지 않고 부지런히 일을 하는데 악마의 일이 뭐냐? 고린도후서 4장 3, 4절에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악마가 지금 바빠요. 악마가 지금 쉴 틈이 없습니다. 악마는 일주일에 52시간 이상 일합니다. 부지런히 일해서 불가능한 그 세계가 지금 가장 현실적으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걸 가리고 감추기 위해서 악마가 열심히 지금 노력하고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는 복음의 광채대신 뭘 로 대체하느냐 하면, 교회의 광채로 복음의 광채를 대체해버렸어요. 영광스러운 교회로. 왜? 그건 가능하니까요. 돈 내면 예배당 짓는 것은 가능하니까. 사람들 끌어 모으는 것도 가능하니까. 교회는 어떤 식으로든 못 파고 들어가요. 파고들어갈 수가 없어요.

왜 그런가? 악마가 진짜 숨어 있는 현실을 현실로 알 수 없도록 악마의 전력을 다하여 가로막기 때문에. 인간이 무슨 힘으로 악마를 이깁니까? 못 이기거든요. 그래서 어떤 인간도 그냥 그 대용으로, 구원의 대용 또는 천국의 대용으로 이 땅에서 교회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할 수 있으니까요. 성경 펴세요, 찬송 몇 장 부릅시다, 특송 하세요, 헌금, 매미채 돌립니다. 이것은 다 할 수 있는 거거든요. 할 수 없는 불가능. 그래서 이 땅의 가짜교회들은 항상 뭘 주장하느냐 하면, 소망을 주장해요. 교회도 소망교회가 있잖아요. 이 명박 대통령 다니던 소망교회. 소망이라는 것은 곧 우상이라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진짜 교회는 소망이 있을 필요가 없어요. 불가능을 뚫어놔 버렸는데 무슨 소망이 남아 있습니까? 소망이 없어요. 진짜 교회는 소망 없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소망이 있을 필요가 없는 교회. 그게 바로 악귀가 말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 겁니다. 우리 교회 이름 바꿀까요? 소망 없는 교회. 사적으로 어떤 기대를 갖고 있고 소망을 갖고 있다 하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을 우상시 하고 그 악마가 노는 대로 놀아나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 9절부터가 인간으로서는 납득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다.” 그러면 납득이 돼요. 이것은 가능성 있어요. “저보다 더 높으신 주님이여.” 충분히 우리가 그런 고백정도는 할 용의가 되어 있어요. 천당 보내준다면 무슨 짓이든 못합니까? 할 수 있어요. “주님은 우리보다 위대하십니다.” 기꺼이 그 자백과 고백은 무릎 꿇고 해 드릴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인간이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아직도 자기 이름에 미련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코스는 하나님이 이미 정해놓고 그 코스는 완료가 되어 있습니다.

그 코스는 뭐냐? 자기 아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내셔서 자기 아들을 다시 주의 자리에, 이 땅의 주의 이름으로 오신 이가 주의 자리에 앉음으로서 이미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았어요. 이걸 가지고 하강된 자만이 상승을 받을 유일한 자격자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이름은 하강된 적이 없어요. 이 땅에 그냥 살고 있는 그냥 이름이에요.

그래서 우리 이름은 하강된 적이, 내려온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은 임시이름이고 소멸될 이름이어야 되고 가짜이름이에요. 가짜 이름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위한 조치는 가짜 이름을 폐기하고 그 가짜 이름 말고 진짜 이름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높임으로 말미암아 천국 갈 자기 백성을 그 이름 하나의 동일한 이름으로 다수의 이름이 되게 하는 방식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하나의 이름으로 통용케 하는 거예요.

하나의 이름으로 통용케 한다면 기존의 이름은 삭제대상이 되는 거예요. 우리 이름은 용납이 되지 않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성경전체에 보면 이름이 먼저 있어요. 하나님의 이름이 먼저 있거든요. 하나님의 이름이 먼저 있고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그 다음에 창조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이름은 뭐냐 하면, 이름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아담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아담의 이름을 지어준 거예요. 이것은 한시적이에요. 일시적이라 그 말이지요. 있다가 없어질 이름이라는 말이지요. 그 아담 이름이 원래 아담이름이 아니에요. 누구 이름이냐 하면 이게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이걸 아셔야 되는데 아담 이름이 아담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 이름이에요.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 새 아담 예수님 이름이에요. 아브라함이름은 아브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름은 예수님 이름이에요. 이스라엘 이름은 야곱의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 이름이에요. 이름은 운명입니다. 어떤 운명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번에 이게 있어요. 확정된 운명, 운명자체가 확정된 거예요.

빼도 박도 못해요. 변경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지옥에 간다?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아담이 지옥 간다. 있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지옥 갈 이름은 따로 있기 때문에 이미 아담 자체가 천국의 이름이라면 아담 본인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지옥갈 수가 없어요. 천국에 가야 될 이름이기 때문에 천국에 가야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고, 엘리야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 그리고 저와 여러분도 그렇고. 말해놓고 나니 부끄럽긴 합니다만.

사무엘상 3장에 보면 거기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릅니다. 세 번을 불러요. “사무엘아!” 어린 사무엘은 자기 스승 엘리제사장이 부른 줄 알고 갑니다. 그럴 때 엘리가 하는 말이 있어요.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했다.” 그러면 누가 불러줬습니까? 누가 불러줬어요? “사무엘아, 사무엘아!” 누가 불러줬습니까? “내가 부르지 아니했다.”

마르다 마리아 하고 오빠 나사로 3남매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빠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늦게 오셨어요. 죽고 난 뒤에 오셨어요. 그 “나사로야 나오너라!” 고 누가 불러줬습니까? 누이동생이 불렀습니까? 여동생이 불렀어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누가 불렀습니까? 내가 부른 이름은 내가 불러요. 이것은 가능한 거예요. 내가 찬송가 들고 내가 교회가고, 내가 기도하고, 찬양하고, 이것은 내가 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망상이에요. 왜? 세상은 주의 이름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나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자꾸 나를 독촉해요. 억지를 부려요. ‘내가 너를 지켜주마.’ 미쳤어요? 내가 뭔데 나를 지켜요.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예수님이 무덤에 동산지기처럼 앉아 있는데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서 세 명의 마리아가 찔찔 울면서 ‘주님 어디 가셨나?’ 해요.

이 마리아가 주님 보고 울면 안돼요. 인간이 운다는 말은 아직도 자기 이름에 대해서 측은하게 여기고 연민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강의나 설교하면서 제일 안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제일 인정 안하려고 해요. “살아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내가 살았는데 이 살아 있는 내가 기도를 몇 시간 해야 되고, 기도는 어떻게 해야 되고……, 자꾸 본인을 살았다고 기정사실로 하는데 우리 이름은 죽을 이름이에요.

죽었다고 부를 이름이고, 부르다가 죽을 이름이고, 우리는 죽다가 결국 죽을 이름이에요. 죽는 이유는 현실과 안 맞는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죽이시는 겁니다. 현실과 핀트가 안 맞는 거예요. 세상은 내 맘대로 되고 싶은데 현실은 예수님 내 맘대로 되니까 핀트가 맞을 리가 있습니까? 안 맞지요. 그런데 고집부리고 내 영광을 그렇게 부르짖습니까? 이름과 현실이 안 맞아요.

김 보배. 보배지요, 보배. 여자 프로골퍼에 보배가 둘이나 있어요. 김 보배. 지금은 물론 골프 잘 쳐요. 보배같이 잘 쳐요. 하지만 나이 80되어서 쳐보세요. 못 치잖아요. 그때도 보배입니까? 임 영웅. 한국의 영웅, 임 영웅 맞아요. 영웅, CF 찍고, 1억 타고, 코란도 타고, 엄마 미용실 하다 그만두게 하고, 정말 영웅이에요.

그런데 언제까지 영웅입니까? 언제까지? 내가 지금 살아 있으니까 자꾸 기대를 갖고 있어요. 내가 내 이름에 기대를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나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누구 맘대로요? 그것은 내 이름을 포기 못하기 때문에 뭘 자꾸 꾸역꾸역 주장하느냐 하면, 내 영광을, 내 이름의 영광을 못 버리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 이름의 영광은 누구하고 경쟁 붙느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주께 영광이 된다는 그 주님의 현실성 속에서 우리는 비현실적으로 발악을 하고 있는 겁니다.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엘리 제사장이 부르지를 않았어요. 내가 너를, 사무엘을 안 불렀다는 것이 중요해요.

그러면 사무엘을 누가 불렀는가? 사무엘 이름을 부를 때는 사무엘이름이 아니고 하나님 자기 이름이에요.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야기하시는 그 모든 일은 장차 진짜 숨겨진 이름, 사무엘이라는 몸체 내부에 숨겨져 있는 주의 이름의 기능을 위하여 앞서 사무엘을 인형처럼 하나의 모델로 써서 움직이는 겁니다. 아담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사무엘도 마찬가지고, 에녹도 마찬가지고, 엘리야도 마찬가지고.

에녹과 엘리야를 사람들이 상당히 선호해요. 왜냐하면 안 죽고 하늘나라 갔으니까. 그 에녹과 엘리야 이야기하면서 은근히 사람들은 자기 기대사항까지 결부시킵니다. 나도 안 죽고 어떻게 하늘로 올라가는 방법이 없을까? 나도 불수레 좀 타보자, 그렇게 나오는데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이 현실이 주의 이름중심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의 생존중심 자기의 이름의 그 죽은 이름에 대해서 아직도 미련 갖고 자기 이름을 에녹처럼 구원하겠다고 구원에 욕심이 있어서 ‘성경에서 너 되는데 나 안 될 리가 뭐가 있느냐’ 하는 식으로 자기 이름을 건지려고 성경을 백 독 천 독하고 있어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내 이름이 천당 가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이름은 중간에 가위로 잘라버려야 돼요. 내 이름으로 구원되지를 않습니다. 사무엘을 하나님이 세 번 불러줬다고 그걸로 사무엘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사무엘 이름을 부를 때 사무엘이라는 어린애 몸체가 있지요. 그 몸체에, 사무엘이라는 이름에 주의 이름이 하나의 기능으로 덮쳐버리면 그 기능 안의 이름은 운명이에요.

사무엘은 빼도 박도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동참하고, 흡수 통합되고, 거기에 같이 휩쓸려 들어가는 겁니다. 성경을 보는 이유는 내 생존에 유리하라고 보는 것도 아니고요, 그것도 가위표, 그 다음에 내 이름 천당 가는 것도 아니고요, 주의 이름에 합세하라고 성경이 있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 이름을 고집해 버리면 이것은 악마가 좋다고 합니다.

내 이름이 따로 있으니까, 내 이름이 살아 있다고 여기니까 살아있는 이름이 두 개가 되어버려요. 내 이름도 살아 있고 주의 이름도 살아 있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 이용해서 내 이름 살려보겠다는 그런 시도를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그냥 내 이름의 대용품이 되는 겁니다.

예수 이름을 그렇게 백날 불러도 내 신체 본심에 마음에 가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떻게든 내 이름이 영광 받는데, 내가 잘되는데 거기에 온통 신경을 다 쓰고 있으니 예수 이름을 백날 불러 봐도 그 예수는 인형 같은 예수, 내 이름의 변형체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주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거예요. 보내시고 어떤 인간도 가능함으로 따라 붙이지 못하도록 십자가로 사라져버렸어요. 십자가로 사라져버린 겁니다. ‘아마 저 예수하고 가까이 붙어서 교육받은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붙이겠지.’ 아닙니다.

마태복음 16장 17, 18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의 권세.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이름이 음부의 권세, 악마의 권세에 놓였다는 사실을, 악마가 자꾸 우리 마음을 혼란케 했기에 내가 악마의 권세아래 놓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악마가 하는 일은 어쨌든 주님이 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세뇌해서 심어주려 하는 거예요.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하는 것이지 남이 네 인생 네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야. 네 인생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거야.” 계속 이런 식으로 가르친 거예요. 악마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름을 시몬이라는 이름에서 뭘로 바꾸는가? 베드로로 바꿉니다. 이름을 바꿨다는 것, 베드로 이름은 누구 이름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 이름이에요. 예수님 하는 일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베드로라는 이름이 바로 주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베드로에요. 주의 이름이 아브라함이고, 주의 이름이 엘리야고, 주의 이름이 에녹이에요.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운명의 한 부분들을 차지하게 될 거에요. 이름은 운명이니까. 모든 운명위에 뛰어난 운명을 주사, 다른 말로 하면, 모든 확정된 가운데 뛰어난 확정중의 확정이 되사, 하나님께 영광되기로 확정되었느니라. 우리가 할 것이 없어요. “목사님, 제가 제 이름을 치겠습니다.” 치지 마세요. 호들갑을 떨고 유난 떨기는.

그 이름 치겠다는 의도가 뭐예요? 자기 이름 쳐서 쥐포 만들어서 쥐포 된 내 이름 천당 보내려고요? 아브람 이름은 아브라함 앞에 소실되듯이, 야곱은 이스라엘 이름에 소멸되듯이, 베드로라는 주의 이름을 위해서 시몬은 시몬의 끝장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 잡혔을 때 시몬은 말하기를 “나 저 사람을 저주한다. 모른다.”

주께서 유도하신 거예요. 악마가 장악하고 있는 그 프레임, 악마의 그 경계를 예수님 가까이에 있는 수제자라 할지라도 자력으로, 인간의 가능성으로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베드로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있어요. 주의 이름이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기어이 이름을 붙여주신 그 베드로를 주의 이름의 세계, 천국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좋아하지 마라. 네 이름이 나의 생명책에 이 예수님의 생명책 명단에 있는 것을 더 기뻐하라. 내 명단에서 호적에서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누가복음 10장 2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그 주님의 명단은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의 이름이 이마에 새겨져 있다는 겁니다. 정중앙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따라서 몸은 아담의 죄악 된 육체고 몸이지만, 그것은 악마에 사로잡힌 몸이지만 유일하게 악마의 권세를 이긴 분이 박혀 있는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내 이름이라는 것이 악마의 권세를 깨트리고 건져낼 자를 건져낸다는 것을 마음껏 자랑질 하시기 위해서 기어이 이름이 있는 사람, 명단에 있는 사람은 놓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확정된 겁니다. 이름은 확정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확정된 운명입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아침에 라면 끓여먹는 것도 어쩔 수가 없어요. 오다가 차 빵구난 것도 어쩔 수가 없어요.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된 일은 뒤돌아보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성도라면 찾아내야 되는데 어떻게 찾아냅니까?” 하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뽑아서 한쪽으로 치워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 이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것도 할 수 있는 것이고, 할 수 있는 것을 다 뽑아내면 남는 것이 할 수 없는 것만 남을 거예요. 그게 바로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 그러니까 “내가 예수 믿는다.” 이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거거든요. 할 수 있는 것은 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믿음도 빼세요. 그동안 3, 4십년 교회 다닌 것도 빼세요. 이거 다 헛짓 한 거예요. 소용없는 짓 했어요. 다 빼세요.

그러면 불신자는 어떤 느낌이 드느냐? 이것 빼고 저것 빼고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예, 축하합니다. 불신자입니다. 불신자로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얼레리꼴레리, 불신자 된 거예요. 모든 것이 내가 했던 거예요. 내 이름을 걸고. 말로는 주의 이름이라 했지만 그것은 핑계고. 모든 것이 나에게 이익 되도록 했던 겁니다. 내 이름 천당 가도록, 내 이름이 탈락되지 않도록. 그게 바로 시몬이 한 거예요.

그런데 그 시몬이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배신하는 겁니다. 하, 여러분 이걸 자랑해야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죄짓는 것을 잘합니다. 이걸 정말 감사함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 부활하실 때 예수님이 동산지기로 앉아 있었지요. 앉아 있을 때에 그 마리아가 예수님 없다고 울면 안돼요. 울지 말고 황당해야 돼요. 두려워해야 돼요.

실제로 성경 요한복음에 보면 두려워했다고 했어요. 왜? 뭐든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다. 예수님 찾아가는 것도 내가 하고, 예수님 걱정하는 것도 내가 알아서 해요. 이것은 내 이름을 위해서 과거로부터 줄창 내가 살아왔던 내 환경이거든요. 뭐든지 내가 알아서 했으니까, 내가 시작해서 내가 끝낸 일들로 그만큼 먹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데 그 마리아들, 세 명의 마리아에게 본인이 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겁니다. 기쁜 것이 아니고 놀라자빠진 거지요. 두렵고, 무서워했고, 놀라 자빠졌어요. ‘나는 내 것이 아니다. 아, 나는 내가 다룰 물건이 아니다.’ 내가 다룰 물건이 아니었어요. 사무엘 세 번 부를 때 엘 리가 부르지 아니했다는 말은 드디어 사무엘이 하는 모든 일에 엘 리와 사무엘의 관계에서 엘 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 엘리의 요소가 현재 우리한테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라면 사무엘 요소가 우리 안에 들어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뭐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내보이고, 기도, 전도, 온갖 것 다 하면서도 “주여, 이것가지고 구원된 것은 아닌 것을 믿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끄집어내서 이것 때문에 구원되지 않았다는 것. 왜? 이것은 내가 다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불가능이 아니고 가능한 거거든요.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내 이름을 밟고 다른 이름이 눈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내 이름은 항상 밟혀야 돼요.

그런데 이 세상에 인간이 태어나서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데 누가 내 이름 욕하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내가 누구 이름을 짓밟는다면 나의 원수로 간주할 거예요. 어떤 사람이 우리교회 욕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이단이라고 막 욕할 수도 있어요. ‘어떤 교인이 우리교회를 욕해? 이단 아니야?’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본능적으로 우리는 내 이름이 밟히는데 대해서 참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 이름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얼마나 내가 애썼는데?’라는 자기의 할 수 있는 것이 완전히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꾹꾹 눌러 담겨져 있거든요.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 구원에 대해서?

에베소서 2장 6절에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하나님께서 하늘에 앉혔다는 거예요. 성도를. 우리가 키가 얼마나 커야 하늘에 앉을 수가 있습니까?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까?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에 왜 하강해서 상승을 하느냐? 주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모든 이 세상의 신들의 다수성을 박멸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신들, 한둘이 아니고 얼마나 많은 신들이 있는지 알려주시고, 그 모든 신들은 각자 인간들이 자기 자신 좋으라고 신봉했던 신들인 것을, 그 정체를 폭로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가 참된 신이다, 알리는 방법은 뭐냐? 그것은 출애굽 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 내가 갈 테니 너는 문설주에 피 발라라.” 내가 갈 테니, 살아계신 참된 유일하신 하나님이 갈 테니까 네가 거기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내가 드린 제물의 피를 내서 문지방과 문설주에 바르는 거예요. “이래서 우리는 하나의 원칙만 세우자. 너는 그 일에 참여되었느니라.”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주님의 세우신 원칙 하나 때문에 모든 다수의 신들은 다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제가 서울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성경에 뭐 하지 말라는 내용이 나오니까 사람들은 그 본문 보는 순간 자기 자신을 건전하게 그리고 우수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 항목들을 평가해요. 어느 것이 음행이고 어느 것이 음행이 아닌가를 분별해서 음행인 것은 피하고 음행 아닌 쪽으로 빠져나오면 나는 우수한 존재가 된다, 라는 생각을 딱 보면 하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제가 예를 들기를 장대비, 대나무처럼 소나기가 온다면 어느 누가 그 촘촘한 소낙비 사이사이를 빠져나가서온 안 젖고 집에 올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걸 시도했거든요. 유대인들의 법은 하라, 하는 것이 248가지, 하지 말라는 것이 365가지. 아주 촘촘하게 깔아놨어요.

그리고 그들이 그 법을 세웠다는 말은 그들이 그 법 사이사이를 다 빠져나갔어요. 손 흥민이 드리블하듯이 다 빠져나갔어요. 주님께서 그 바리새인에게 말하기를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해서 일단 바리새인을 최우수 장학생으로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산상설교를 통해서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라고 박았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들은 빠져나가고 싶었는데, 내 이름을 우수한 이름으로 참한 이름으로 하나님도 고개 끄덕일만한 대단한, 내 품질이 우수한 품질 만들기 위해서 온 평생을 거기에 다 집어넣었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틈새를 다 막아버렸어요. 아무도 자신의 가능성으로 구원받을 사람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그 말씀은 뭐냐 하면, 시작이 내 이름과, 나라는 인간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과 현실적으로 이게 안 맞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해도 맞지를 않아요.

그래서 대책은 하나밖에 없어요. 내 이름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기 이름을 포기하면서 익숙해진 구하고 나옵니다. 마태복음 21장 8, 9절에 나옵니다.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게 유대인의 구호고 희망이거든요. “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확정한 모든 계획과 언약 계약의 완성이지요. 운명이니까 그 이름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그 이름은 제가 아까 아브라함, 모세 다 이야기했지요, 그 이름은 해야 될 일이 있어요. 시편 110편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주님의 자리가 무슨 자리냐? 싸움하는 자리입니다. 세상의 모든 잡신들과 세상의 모든 이름, 예수 이름 빼놓고 나머지 모든 이름과 싸우는 일을 하시는 것이 주의 이름이에요.

그 주의 이름이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8편을 여러분이 아실 거예요. 1, 2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의 이름으로 원수를 쳐부순다 했어요. 주의 이름입니다. 활이나 칼이나 그리고 말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가 승리하는 것은 오직 주의이름뿐입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8)

이 말은 칼 들고 설치고, 활 들고 설치는 것은 현실에 안 맞아요. 주의 이름중심으로 하나님께서 돌리겠다는 그 체계, 시스템에 오직 주의이름의 승리만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그 영광의 보상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지 내 이름이 설치는 것은 현실에 맞지가 앉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슬퍼하지 마세요. 눈물 찔찔 짜는 것도 짜증나요 정말. 눈물 흘리는 그것도 아직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거예요. “아이고, 어머니 왜 돌아가셨습니까?” 이 말이 무슨 뜻이에요? “내 이름을 위해서 어머니는 아직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섭섭합니다.”

왜 어머니가 죽으면 안 됩니까? 본인이 이야기했거든요. 내 이름을 위해서, 내 기쁨을 위해서, 내 행복을 위해서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아담의 이름은 이미 하나님의 이름이 된 이상 그 아담의 이름은 흙이어야 돼요. 흙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흙은 빠지고 아담은 천당 가야 되고.

흙이 된다는 것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망해야 되는 겁니다. 망해야 돼요. 나이 먹는다고 어른 되는 것 아닙니다. 내가 망해야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어른 아니라도 어른이라고 고개 막 숙입니다. 나는 망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돼요. 그게 제일 시건 있는 사람입니다. 그게 제일 시건 있는 사람인 거예요.

우리는 불행하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그거 안 됩니까? 나는 되던데. 행복이요? 그거 착각입니다. 불행은 기정사실이에요. 딴 맘먹지 마세요. 허황된 야망 기대갖지 마세요. 불행은 우리의 속성이고 우리 이름과 잘 조화가 돼요. 우리 이름에 딱 맞는 성질이 뭐냐? 인생은 뭐냐? 불행이고, 망하는 것이고, 죽는 거예요.

그래서 그 죽는 것을 미리 눈치 채자, 그 말이지요. 나는 이미 죽었어요. 죽어야 될 인간이 죽는 그것이 뭐가 그렇게 섭섭하고 그게 울어야 될 일입니까? 우리가 할 것은 놀라야 될 일이에요. ‘죽어야 되는데 내가 왜 구원을 받지? 주님, 당황스럽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된다고요.

주님, 아무리 따져도 ……, ‘자, 내가 헌금을 했다, 기도했다, 예배 참석했다, 성경 공부했다, 성경 천 독 했다, 신학공부해서 목사 했다, 다 따져보자. 그런데 그게 있으면 내가 구원받는다.’ 그러니까 모든 내가 하는 일은 손가락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결국 내 구원 쪽으로 돌아와요. 그러니 이것이 가짜인 거예요.

내 쪽에서 주님 쪽으로 가는 그것이 이미 끊어진 상태니까, 내가 쏜 화살이 갈 데가 없으니 내 잘남으로 다 돌아오는 거예요. 여러분, 움직인다고 이게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자체가 죽은 세상이에요. 아무도 모르는데 세상에 사도바울이 그걸 알아챘잖아요. 그러니까 악귀가 놀라버렸어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은 내가 안다. 왜? 이미 내 손아귀에서 벗어났으니까.

바울의 이름은 자기 이름 아닙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어요. 원래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거예요. ‘작은 자’라는 이름으로 바뀐 거예요. 주께서 쓰시는 종의 이름으로 바뀐 거예요. 사울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구원받은 거예요. 왜? 주의 이름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게 두 번째 아담의 노선으로 포함이 된 거예요.

하나의 이름이 주의 성령에 의해서 다수의 이름으로 또는 공통된 동일한 이름으로 퍼진 겁니다. 천국가면 전부 다 똑같은 이름이에요. 전부 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어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내가 준 적이 없다는 확언, 그 확실한 것을 달성해서라도 기어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광, 우리의 자부심, 우리의 자존감을 주께서는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가만두지 않고 짓밟아버립니다.

“울지 말라. 차라리 놀라버려라.” “주여, 아직도 제가 숨을 쉰다는 것이 저에게 과분한 조치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것이 사치입니다.” 정말 죽을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사치에요. 하지만 주의 뜻이 있어서 주의 일 더하라고 우리를 아직도 주께서 살려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을 이름 가지고 뭘 하겠다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착실하게 살기도 해보고, 나쁘다는 것은 다 피해보기도 하고, 저주받을 짓은 다 안 해보기도 하고, 그것이 악마의 짓인 것을 몰랐습니다. 가능성 가지고 천국을 따내려는 이 악마의 하수인의 노릇을 이제 그만두게 해주시고 하지 못할 놀랄 일이 우리에게 덮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