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구체성
2020년 4월 12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1:25-26 (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1: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가 일방적으로 빌립보교회에 자신의 입지를 가지고 들이대는 것이 실례처럼 느껴질 겁니다. 특히 요즈음 세상에서는 그렇게 간주됩니다. 누구든지 초대하지 아니하면 자신을 그 사람의 영역 속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요즘 세상에 통하는 윤리입니다. 오랫동안 인간들은 오로지 본인만의 안일을 위하여 살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불편하고 더러운 환경이라고 간주하면 곧 짐 챙기고 피신할 태세입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들의 일생이란 탈출하고 또 탈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날 때 홀로 태어났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도 쓸쓸하게 홀로 죽게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의 인간 다루심은 개인적으로 다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집단화 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다”고 하면 안 되고 “나는 인간류에 속한다”고 해야 맞습니다 따라서 옆사람이 죽으면 나도 죽는 겁니다. 페스트 병균을 옮기는 숙주가 쥐이기에 쥐만 잡으로 잠잠해진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까운 친구나, 식구나 일가 친척이나 교우가 병균을 옮기는 숙주라면? 곧 인간을 죽여야 인간이 사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점에 대해 인간들이 섭섭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래부터 인간은 없는 존재였습니다. 없는데서 살았다면 그 산만큼 남은 겁니다. 이처럼 인간은 결국 ‘순간’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절벽 위에 두 사람이 코 앞에 있는 검푸른 바닷물을 보면서 다이빙합니다. 그러면 그 다이빙 하는 궤적을 보이겠지요. 하지만 물에 입수하는 순간, 보이는 것은 잠시 물방울 튕기는 현상을 보일뿐입니다. 이처럼 일생이 참으로 지겨울 정도로 오래보이지만 아무리 수명을 길게 가져가도 죽을 때는 물방울 튕기는 그 순간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건’입니다. 긴긴 일생은 한 순간으로 압축이 되면 ‘사건화’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가 함께 하는 것이 너무 기쁜데 너희도 나처럼 기쁘지 그지?”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듣는 빌립보 교인들 중에서 난감해 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도 바울은 21절에 분명히 이렇게 자신을 언급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곧 사도 바울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이런 인생관을 같이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빨리 죽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 되기 전에 ‘사울’로 살았던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하고 저주받기 위해 마땅히 죽을 자다”라고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인간들에 의해서 ‘버림받은 자’입니다. 사울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소식이 들려오고 그 황당무계한 말을 진짜로 믿는 자들이 등장하니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으로 충만한 사울이라는 청년은 이런 사기적 사태를 두고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한 나사렛 예수다” 사울은 본인을 평가하기를 ‘율법이 흠이 없는 자’라고 여겼습니다.(빌 3:6) 즉 사울은 본인이 본인에게 결정을 내린 겁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에 대한 배제로 이어진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사울은 본인의 결정만이 문제가 아니라 모든 보편적 인간류가 다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울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제대로 선택된 분’으로 밀어닥친 겁니다. 선택이란 곧 나머지를 배제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므로서 다른 쪽으로 저절로 배제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분이십니다.(눅 9:35) 이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을 배제한다는 뜻입니다.
이 선택과 배제의 작업은 구약 때, 하나님께서 국가 대 국가 사이에도 실행하셨습니다. 곧 이스라엘은 선택하셨고 자동적으로 이 선택으로 인해 이방민족은 배제되었습니다. 배제당한 이방민족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과의 차이성을 드러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세상 민족은 그 가운데 탁월한 영웅을 앉히고 그 영웅을 세습화시켜 왕국을 이어나갑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만큼은 그렇게 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6-7)
왜 그런고 하니 출애굽기 33:20에,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로서 도저히 다룰 수 없는 분이 모세를 통해 지상에 인간 세계 속으로 들어오시기 된 겁니다. 그러니 그 자리에는 그 어떤 인간이 들어 설 수가 없습니다.
비워놓아야 하는 겁니다. 이 비워있는 자리에서 주어진 율법에 의해서 유지되는 나라가 이스라엘인 겁니다. 바로 이 구조가 ‘선택받은 나라’의 구조입니다. 이는 곧 인간이란 ‘공허한 형식’으로 쓰여진다는 말입니다. 내용은 오직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가 주어지는’ 선택의 취지가 관권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나라의 형식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본인들이 사건이 되기 싫어하고 존재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경우에, 한 가운데 계시는 보이지 않으신 분이 존재라면 그 주변을 둘러싼 백성들은 사건으로 다루어지는 겁니다. 하지만 이방민족에게 있어 모든 것이 존재입니다.
존재란 곧 나만 잘되면 그만인 방식으로 삶이 이어집니다. 자기 존재의 영원성과 불멸성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점이 악마로부터 농락당하고 있는 모습니다. 존재는 결코 ‘공허한 형식’으로 남기 싫어합니다. 나의 것으로 나의 내용을 채우고자합니다. 그게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극단으로 자신을 이끌었음을 인정합니다. 그는 이미 주님으로 인해 조기 죽었습니다. 그 극단에서 비로소 세상 어느 곳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을 얻게 된 겁니다. 죽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기쁜 겁니다. 살고자 하는데서 오는 공포를 능가하는 그 기쁨이 환란가운데서 있는 빌립보 교회에도 있기를 바라서 이런 편지를 보낸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해 계시니 모든 것이 주님이 일으킨 사건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빌 1장 25-26절(은혜의 구체성)2004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1장 25-26절입니다. 신약성경 317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1:25-26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자기로 인하여 빌립보 교회가 기뻐할 것이고 또 빌립보교회를 통해서 본인이 기뻐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편지에 그렇게 써 보냈습니다. 이 말은 뭐냐? “빌립보 성도들아! 이 사도바울이 자랑스럽지? 그지?”라고 묻는 거예요. 다짐을 하듯이 묻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있음에 너희들이 기쁘지? 그지?”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근거가, 나는 개인적으로는 빨리 죽고 싶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안 죽이시는 이유가, 너희들을 위하여 너희들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 아직 나를 세상에서 안 데려간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따라서 너희들이 정말 성도고, 너희들이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또 참된 교인이라면 나라는, 이 사도라는 존재가 새삼 어떤 것보다 귀하게 여겨져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오늘날 자칭 예수 믿는다고 우기는 사람들에게 사도의 이런 자신만만함이 때로는 교만처럼 여겨질 수가 있을 겁니다.
“나는 예수 믿지 사도바울 당신 믿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할 수가 있지요.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죄인인데 우리는 예수 믿지 당신 안 믿어요.”라고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당신이 일방적으로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말라. 나는 당신 초청한 적 없다. 나는 당신 이용해서 예수만 믿으면 되지 당신까지 건사할 마음은 없다.’고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상상할 수 있어요. 본인이 상상해놓고 자기가 상상한 예수님을 진짜 예수님이라고 믿게 하는 방식을 인간의 이성으로도 언제든지 만들어낼 수가 있어요. 예수그리스도를 자기가 고안해 낼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고안한 예수, 내가 억지로 만들어놓고 ‘예수님이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해서 만들어진 예수와 진짜 살아계신 예수는 어떻게 구별하고 어떻게 차이를 드러내는가? 그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한 것을 귀담아 들어야 됩니다.
“내가 여기 있음에, 사도 내가 여기 있음에 너희들에게 참 기쁨이 되지?”라고 할 때에 그 사도가 어떤 사도냐? 지난번에 했는데 21절에 나오지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다. 그래서 죽는 것도 나에게는 유익이 된다. 주님이 원하는 대로 죽는다. 바로 그런 사도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사도는 “안에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내가 죽는 것도 상관없어. 괜찮아.”라는 사도를 하나님이 사도로 인정한다는 말은 바로 ‘그 사도한테 복음을 듣는 우리 빌립보교회도, 나도 사도처럼 되고 싶어용~. 나도 사도처럼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아, 사도는 참 좋겠다. 죽고 싶어 환장을 한 사도가 왜 그리 부럽지?’라고 공감을 할 때 그게 바로 상상한 예수, 추상적인 예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은혜의 구체성입니다.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가짜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혹독하게 느껴야 돼요. 교회가 가짜에요. 살고 싶어서 온 군상들이 가짜들이에요. 사도는 우리가 초청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누굴 초청할 때는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고 해서 초청하잖아요. 사도바울을 당회장으로 한번 세워볼까요? 오늘부로 우리교회 목사님으로 한 번 세워볼까요? 몇 명 남을지 모르겠습니다.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나를 본받으세요. 나처럼 빨리 죽읍시다.” 이러고 있는 그 인간을 교회 목사로 세워놓게 되면 그 앞에서 사적인 욕구나 욕망 이런 것은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거 용납 안합니다. 사도바울이 용납할 리가 있겠어요? “교회 부흥합시다.” 이런 요구를 사도바울이 들어 줄 수 있어요? 절대로 안 들어줍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본 적이 없어요. 사도바울은 부활을 본 사람이에요.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대화했던 사람이에요. 살아계신 주님과 누구십니까, 라고 대화했던 사람이고 삼층천에 올라갔던 사람입니다. 신종코로나 무섭다고 벌벌 떠는 그런 인간류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람은 평생을 두고 탈출과 탈출을 거듭하는 존재입니다. 도망치기 바빠요. 좀 무슨 일이 있다 하면 이사 가고 이민 갈 생각 먼저 하고요. 사도바울은 지금 도망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망치기에 급급해요. 그런데 그 둘이 만남이 된다? 안되지요.
오늘 본문 내용은 이겁니다. “내가 있음에 너희 기쁨이 되었지? 그지?”라고 묻는 거예요. 이 말은, 사도바울이 갖고 있는 그 기쁨, 이 기쁨과 같은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나는 너희를 성도라고 간주 못하겠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옛날 유럽에 패스트라는 전염병이 번졌을 때에는 숙주가 쥐였어요. 쥐가 병균을 날랐기 때문에 쥐만 죽이면 그 전염병은 스톱이 되지요. 그러나 오늘날 신종코로나의 숙주가 뭐냐? 사람이에요. 사람을 죽여야 사람이 살아요. 옆에 귀찮은 사람 죽여 버려야 돼요. 그래야 내가 살아요. 쥐 한 마리 잡는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가족? 처나 자식이나……. 원수가 집안 식구에요. 콜록콜록, 집안에 원수가 있어요.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그러나 지금 죽는다고 해서 우리가 손해 보는 것 아닙니다. 왜냐? 처음부터 인간은 없었던 존재거든요. 없었던 존재가 죽을 때까지 살았으면 그만하면 남는 장사입니다. 그만큼, 그 폭만큼 살았잖아요. 원래 없던 것인데, 손해 보는 것이 없어요.
사도바울이, 내 안에 사는 이가 그리스도라, 내가 죽기를 원한다, 는 말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존재였습니다. 어려운 말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자기가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존재였는데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자기가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 되고 만 겁니다.
존재가 사건으로 변한다는 말은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30미터 절벽에서 두 사나이가 서 있다가 푸른 바다를 향하여 다이빙을 합니다. 다이빙을 하게 되면 어떤 궤적을 그리겠지요. 떨어지는 모습이 보이겠지요. 아무리 모습이 보여도 결국 그 두 사나이가 사라지는 지점은 퐁당, 퐁당, 하는 그 순간적인 하나의 점, 물이 튀는 점, 그 순간에 그 사람이 살았던 모든 인생은 축약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인간은 순간이고 인생은 사건입니다. 아무리 90을 살고 80을 살아도 막상 죽을 때 되면 인생이라 하는 것은 한 순간, 그것을 사건이라 하거든요, 한순간에 지나지 않아요. 퐁당, 퐁당! 점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가 인생이라고 여기고 하나의 긴 인생, 자기존재는 이러한 존재였다고 존재를 주장하다가, 예수님 만나고 난 뒤부터는 예수님의 십자가죽음과 그 부활의 관계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 존재로 보지 않고 사건으로 본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하나의 순간, 순간으로 보는 것,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보신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지요. 이 말은, 하나의 점이다, 또는 하나의 사건이다,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없어도 되는 존재다. 인간이라는 게 없어도 되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없는데 사도바울은 왜 있느냐?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내가 없어도 되는데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하실 일 때문에 거기에 차출된 겁니다.
사람이 존재라고 보게 되면 사람은 뭔가를 하게 되어 있어요. 하게 되면 남 따라 하게 되어 있어요. 사람은 가만히 놔두면 뭔가 하는데 그 하는 행세를 가만히 cctv나 몰래카메라로 지켜보게 되면 하는 행세가 다 남을 따라 해요. 애들부터 그래요. 두 살 먹은 애가 자기가 살아 있거든요. 살아 있으면 어떻게 살아 있는가, 두 살 먹은 애를 관찰해 보면 주변을 살펴요. 주변에서 지금 뭐하는 분위기인가를 파악합니다.
tv에서 요가를 한다. 그걸 보면서 엄마 할머니가 따라하게 되면 두세 살 먹은 꼬맹이도 같이 엎드려서 요가를 한다고요. 방송에서 “발가락을 ……”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저도 남들 하는 것을 보면서 발가락을 움직이면서 요가를 따라한다고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주변을 따라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의 부활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의 일상입니다.
평소에는 남 따라하게 되어 있어요. 남을 따라할 때 그 남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모방의 대상으로 타인을 생각하는 겁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인간은 이 땅에 홀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홀로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과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쌍둥이 아닌 이상은 홀로 태어나지요. 그러나 인간은 결코 홀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태어나면서 건사해주고 돌봐줄 사람들이 부모라는 이름으로 다 있어요.
인간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보고 네가 자기를 부정하라, 부인하라고 하면 인간은 절대로 자기부정, 부인이 안 됩니다. 언제 인간이 자기를 부인하고 부정하는가? 바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따라 죽고 싶지요. 왜? 자기에게 붙여진 남, 타인, 이웃, 그 타인이 부정되면 나도 같이 부정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성경을 보면서도 그것을 자꾸 놓치는데요. 성경을 보면서도 단독적으로, 독단적으로 성경을 봐서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참조한다고 자꾸 성경을 보는데,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나는 인간이 아니고 ‘인간류’에 속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너만 인간이 아니고 네 옆에 같은 인간류가 있어서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네가 따라 하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서 살고 그들이 망하면 너도 같이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나’가 아니고 그냥 보편적이에요. 보편적인 인간류의 하나의 일부로서 내가 있는 겁니다. 성경이 이야기할 때는 집단을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야, 인간들아!”라고 복수를 사용합니다. 복수를 사용해서 인간들아, 라고 하는데 우리는 나보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거예요.
물론 그렇게 하게 된 원인은 마귀가 자기밖에 모르는 개인주의적인 의식으로 조작했기에 그런 겁니다. 나밖에 모르면서도 살아가는 것은 남 흉내 내면서,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남에게 나쁜 일이 있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본인만 살 궁리를 하면서 탈출과 탈출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겁니다. 개인이라는 것은 틈만 나면 탈출을 시도하는 그게 개인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덜렁, 개인밖에 모르는 그 사람들을 향하여 허락도 없이, 초청장도 없이 일방적으로 쳐들어와 버립니다. 사도의 침범이지요. 사도가 딱 침범을 해서 뭐라고 하느냐? “빌립보 교인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너희의 기쁨이 되는 것 맞지? 나 되게 기쁜데. 나는 너희들과 함께 있는 것이 기뻐. 내가 이렇게 기쁜데 너희도 기쁘지? 그지?”라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거예요. 들이대고 있는 겁니다. 그게 하나의 계시가 되는 거지요. 봉사하겠다고 들이대는 거예요. 초청하지도도 않았는데.
결국 사도가 침범한다는 것은 곧 무엇을 말하는가? 나의 개인적인 의식의 붕괴를 의미하는 겁니다. “사도 저분이 필요하기는 해?” 사도 쪽에서 필요하대요. “빌립보교인들아 내가 꼭 필요해.”라고 들이대거든요. 들이댈 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나는 예수 믿는데. 당신이 꼭 필요는 없는데. 나는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예수 믿을래. 당신이 필요하다고 당신에게 사정하고 구걸할 마음 없어.”라고 하는데 막상 빌립보서 1장 25절 26절의 계시에 의하면, 내가 없는 너희는 없다는 거예요.
타인이 없는 네가 없다는 거예요 개인이라는 자체가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홀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류, 같은 인간집단으로 왔기 때문에 네 옆에 누가 있는가를 봐서 너를 알라는 겁니다. 사적으로 내가 마귀에게 속아서, 마귀에게 농락당해서 나밖에 모르지 사실은 어디에 가도 남을 자꾸 붙들고 남을 이용하려고 해요. 인간이 남을 만난다는 것은 배신할 준비를 하고 만나요. 그 사람을 배신하고, 이용하고, 나중에 값 떨어지면 치워버릴 용도로 남을 만난다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누굴 초청했을 경우에는 그렇고요. 초청하지도 않은 사도의 입장에서는 우리를 난처하게 만들어요. 지금 몇 번 이야기합니다만, “나는 너희 보고 기쁜데 너희도 나 보고 기쁘지? 그지? 너희는 나와 꼭 함께 있도록 할게.”라고 나오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이야기에요. 여기서 사도가 들이댈 때 우리 마음속에서 만약 거부감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여전히 개인주의입니다.
“내가 사도 초청했습니까? 사도가 와서 부흥회하라고 했습니까? 우리교회에서는 그런 결정내린 적 없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부르기 전에는 가만 계세요.” 이런 식으로 사도 따로 나 따로 나온다면 그 사람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전혀 이해 못하는 사람입니다. 구약을 천 독 만 독을 해도 구약 이스라엘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통해서 성경해석 어떻게 하는가, 다시 한 번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해석은 이스라엘부터 시작이 돼요. 이스라엘은 죽음의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인데 죽음의 공동체. 개인 아니에요. 이스라엘, 죽음의 공동체 자체를 집단화시켜서 그걸 하나님께서 ‘내 아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죽음의공동체가 되는 이유는 그 안에 빈자리가 있어요. 어려운 말입니다. 보통 열 명이 있을 때 나란히 두 줄로 다섯 명씩 있을 수도 있지만 그냥 강강술래 하듯이 또는 MT가서 모닥불 피워놓고 둘러앉듯이 그렇게 했다고 보세요. 원탁회의 하듯이 둘러앉아버리면 그 안에 중심지점이 있을 거예요. 이스라엘의 특징은 그 중심지점에 어떤 자도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들어가면 죽어요.
그게 출애굽기 33장 19절 20절에 나옵니다. 지금 제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모세 보고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없는 존재가 있는 존재에게 지시를 하는 식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 모세와 하나님의 관계고요. 이 모세와 하나님관계, 없는 존재인데 지시만 있는 그 양상을 그대로 산 위에서 산 밑으로 끌어당긴 자가 모세입니다. 그래서 산 밑에는 누가 기다리고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모든 것은 허구적인 형식이 돼요. 이스라엘에서는 인간자체가 허망한 형식만 있어요. 내용은 누가 채우느냐? 보이지 않는 분이 그 내용을 채우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분, 하나님이지요,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을 경우에는, 인간을 존재라고 본다면 그 분은 하나의 우연적인 사건이 되어버리고, 그분이 만약에 여기 계신다, 가 되어버리면 여기 있는 형식들은 하나의 사건이 되고 마는 겁니다. 하나의 점이 되지요. 물방울 튕기듯이. 아까 설명했지요.
아무리 구십 다섯까지 살아도 죽을 때는 한순간에 죽어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의 사건이지요. 내가 언제 태어나서, 무슨 대학 나오고, 누구하고 결혼하고……, 이게 뭐냐 하면, 사건의 연속, 이어짐, 또는 사건의 다발이 되는 거예요. 내가 결혼하고 난 뒤에 아파트를 샀다면 결혼한 것은 사건이고, 아파트 산 것도 사건이고, 그 사건과 사건에 보이지 않는 분이 도와주신 거예요.
첫째 애가 태어나고 둘째가 또 태어났다. 그것은, 첫째 아이 태어난 것도 사건이고, 둘째 아이 태어난 그것도 사건이고, 그 사건과 사건을 이어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주님이 개입하는 겁니다. 허망한 형식뿐인, 껍데기밖에 없는 인간들을 중앙에 있는 하나님이 율법이라는 것을 통해서, 율법의 현실화, 사건화로 엮어주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목사님, 설명을 왜 그리 어렵게 합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옛날에 이스라엘이 있었거든요.”이러면 존재가 되어버려요. 존재가 되면 존재는 어디에 휩쓸려 가느냐? 과거와 더불어 휩쓸려가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아, 옛날 옛적에, 구약의 옛날 옛적에 그런 사건이 있었구나.’ 그렇게 되어버려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거든요.” ‘아,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십자가 지셨구나. 그러면 이것은 옛날이야기. 지금은 뭐냐? 부활의 새 생명.’ 오늘은 뭐 기독교에서는 부활절 예배로 한다면서요. 부활하신 분 제사 드리는 날인데.
그냥 나라는 존재를 구원하기 위해서 과거의 어떤 교훈 따위, 어떤 정보 같은 것을 나라는 존재를 살리기 위해서 지식으로, 이론적으로 흡수하면 나는 구원받는다는 전략이 여기서 형성이 돼요. 이것이 잘못된 거거든요. 이게 잘못된 겁니다! 주도권이 나한테 있어요. 나 천당 가기 위해서 예수 믿는 이것은 말이 안돼요. 이것은, 이 주장은 마귀에요. 나라는 것을 지칭할 존재가 없어요.
사도바울이 그걸 알게 된 거예요. 사도바울은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가 상상한 하나님이 있지요. 그 상상한 하나님과 자기 사이 그 중간에 율법이 있으니까 그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빌립보서 2장에 보면 나옵니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하는 그런 발언을 왜 합니까?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누구 좋으라고?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내가 천당 가야 그게 남는 것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사도가 사도되기 전의 그 모습이나 오늘날 우리 모습이나 다를 것이 뭐가 있습니까? 전부 다 개인적으로 악마한테 농락당한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개인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무리로, 뭉치로 따진다고요. 주님이 찾아와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무리로 만드는 그것을 위해서 모세를 불러올리는 겁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아요. 내 얼굴 보면 죽는다.
얼굴 보면 죽는 존재면 우리는 그 앞에서 이미 죽은 존재에요. 죽은 존재는 점이고, 죽은 존재가 살아 있다면 그 자체가 사건이지 존재라고 하면 안돼요. 우리가 존재 같으면 주님이 사건이 되고, 주님이 존재 같으면 우리는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누가 모르느냐? 이방민족은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뭐라고 하느냐? 선택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했다는 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방민족은 배제했다는 겁니다. 선택이란 다른 말로 결정이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결정했다는 것은 곧 남을 배제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배제한 이방민족의 구성을 보자는 말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그들 구성체 가운데 가장 뛰어난 hero, 영웅이지요, 싸움 잘하는 사람, 노래 잘하는 사람만 영웅이 아니에요, 싸움 잘하는 그 영웅을 왕으로 세웁니다.
왕을 세워놓고 그 주변에 백성들이 포진되어 있는 거예요. 내가 이런 말 하면 머리 좋은 사람들은 사무엘상 8장이 탁 떠올라야 돼요. 사무엘상 8장에서 백성들이 하는 말이, 우리도 왕을 주옵소서. 그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한테 왕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이방민족이나 할 주장이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교회에 목사를 주시고 목회자를 주옵소서, 하는 소리는 이방민족, 절간이나 하는 소리다, 그 말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요한1서 2장에서 주께서 목회자를 세우는 것은 이용하라고 한 거예요. 왜? 각자 성령 받았기 때문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했어요. 이 이야기 하려니 벌써 세월이 많이 지났네요. 30년 전에 ‘시찰회’를 할 때 일입니다. 시찰회라 하는 그것은 그 지역의 목사장로들의 모임을 시찰회라 합니다. 시찰회로 모이면 보통 예배부터 하거든요. 나에게 시키지도 않는데 순서가 돌아와서 어쩔 수 없이 했어요.
그 때 본문이 요한1서 2장이었습니다. 27절에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시찰회 할 때 이 내용을 전한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놓을 것 없거든 사표내세요. 더 나올 것 없거든 사표내세요. 옛날에 한 것 자꾸 써먹으려고 하지 말고. 노트 들척거리지 말고 나올 것 없거든 사표내세요.”
그것은 누가 주인인지 누가 종인지 교인들에게 헷갈리게 만들어요. 교회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사도바울서신에 교회는 없어요. 그저 노닥거리는 친목단체지 교회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했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이방민족과 달라야 된다는 그 말은, “너희들 가운데 스타가 있고 왕이 있고 영웅이 있는 그런 백성을 천국백성이라고 내가 생각한 적도 없고 그런 것을 인정한 적도 없다. 그러나 너희는 다르잖아. 너희는 중앙이 없잖아. 없는데도 움직이잖아. 사건으로서. 하나님이 없는데, 안 보이는데 그 없는 분에 의해서 지시받아서 움직이잖아.” 이게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에요. 그 없는 분이기 때문에 없는 분에게 아부를 떤다든지, 재롱부린다든지 그건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요. 뭐만 있어야 되느냐? 하나님의 선택하심만, 계속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선택하심. 그런데 하나님의 보내신 이스라엘은 자기가 하나님의 율법이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의 사울이라는 사람이 생각했던 그것과 똑같았어요.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자기들에게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독생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결정했습니다. 이스라엘 전 공동체가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기. 예수님을 버리기로 선택했어요. 예수님을 배제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은 분이에요. 과연 예수님은 버림받을 그런 분일까요? 누가복음 9장 35절에 보니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예수님만이 선택을 받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버림받았습니다. 여기서 역공들어갑니다. 역운동이 들어가요. 버림받은 분 예수님을 통해서 반대로 버림받은 자가 비로소 등장한 하나님의 유일한 선택받은 자로서 자기를 버린 쪽으로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예수님의 부활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을 하나의 죽은 존재로 봐서 버릴자를 당연히 버렸다고 자부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예수 믿는 자는 무조건 이단이다. 왜? 예수님은 죽은자인데 죽은 자를 살았다고 하니까 그런 사기가 어디 있어요? 완전히 사기지요. ‘내가 이런 사기를 그냥 두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된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도 이런 사기꾼을 잡아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생각한 것이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의 사울생각이에요.
본인의 이러한 결정과 선택은 옳았다고 봤거든요. 그런데 분명히 버린 돌, 버린 패, 인간들이 그렇게 버린 분이 도리어 선택이 되어 버렸으니까 사도 안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버렸던 분이 되레 나를 선택했다는 요소가 이제는 사도라는 새로운 조건을 구성하게 된 겁니다. 나는 공허한 껍데기에요. 형식에 불과한 거예요.
전에는 내가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것이 나의 내용이었습니다. 왜? ‘나는 내 구원에 대해서 내 결정에 따른다. 내가 메시아를 선택하고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서 나는 구원받는다. 왜냐? 이것은 내 결정이다.’ 내 결정을 철석같이 믿었던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그냥 추가적으로 거기다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고요,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추가적으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고 내 결정도 옳지만 주님도 괜찮은 분, 해서 숟가락 하나 더 얹은 것이 아니고, 지금껏 살아왔던 모든 결정이 사적으로 내가 잘되기 위한 모든 결정이었던 거예요. 하나님 믿고, 교회 다니고, 성령 믿습니다, 하고 삼위일체 믿는 것,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따져 가면 전부 다 악마의 전략에 놀아난 거예요. 나만 잘되면 된다는 거예요. 나만 코로나 안 걸리면 된다는 식이에요.
그런데, 부활하신 주를 만났는데 그냥 밀고 들어온 겁니다. 뭐냐? “사울아, 사울아! 너 참 고생이 많구나.” 쉽게 말해서 “너 언제까지 그렇게 지저분하게 살래?” 그런 뜻이지요. “네가 선택하고, 네가 결정한 인생, 내가 보기에는 더럽고 추잡하고 지저분하다.” 이게 인간의 트라우마가 됩니다.
사람이 사적으로 나의 개인이라는 이 존재를 내가 계속 꾸역꾸역 월급 받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연출하면서 ‘살았으니까 계속 더 살아야 돼. 살았으니까 살아야 돼. 나만 살아야 돼.’ 이것이 인간에게 트라우마로 다 누적되는 거예요.
여자들은 모릅니다. 남자들의 꿈에는 평생을 가도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이 있어요. 군대생활이 꿈속에 나타나요. 군대생활은 추접하고, 힘들고, 더럽고, 불편하고요. 그야말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그 군대생활이 또 나와요. 트라우마거든요. ‘아, 탈출하고 싶다.’ 깨어보니 이마가 흥건하게 젖어 있어요. ‘나 제대 했잖아.’
제대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군대통지서 받아보세요. 싸이라는 가수 군대 두 번 간사람 있잖아요. 기가 막힙니다. 그렇게 홀로살기가 전부라고 여겼던 그것이 사울이었는데 주님이 자기한테 쳐들어와서, 밀고 들어오면서 “너 참 고생 많다. 내가 너 해방시켜줄게. 이제는 네가 사는 것이 아니고 네가 살던 그곳에 내가 살게.” 보이지 않는 분이 치고 들어오니까 이게 바로 이스라엘 되어버렸어요.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내가 공허한 형식으로 빈껍데기가 된다는 이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이 놀라운 기쁨, 나만 기쁩니까? 빌립보 교회가 성령을 받았으니까 “나만 기쁜 것이 아니고 너희도 기쁘지요, 그렇지요?”라고 묻는 거예요. 오늘 본문 내용이. 해방감입니다, 해방감. 치고 들어온 거예요.
사는 것이 주님의 혜택이고 은혜인줄 이제 안 거예요. 그동안 그 혜택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안에 마귀가 들어있어 가지고 자꾸 밀어낸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계속 밀어낸 거예요. ‘그래야 내 존재라도 남는 것이 있지.’ 이런 식으로 밀어낸 거예요. ‘예수 믿기 위해서 내게 뭐가 필요하지? 십자가 믿을까? 십자가 믿지 뭐. 언약? 언약도 알고. 성경내용 달달 외우고.’ 오늘 본문 같으면 “믿음의 진보와 기쁨……” ‘아, 성숙하라고 하는구나. 성장하자. 그래, 예수 십자가는 믿었고, 그것은 과거지사고, 이제부터 나는 성장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면 되겠지.’
이렇게 되어버리면 사도는 이들에게는 아무짝도 소용없는 인간이에요. 왜냐하면 사도는 내가 나 살고자 하는 그런 시도하고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사도는 “내가 죽는 것이 소원이다. 내가 죽다니,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니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느냐?” 혼자 좋아서, 혼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요.
사도바울이 그걸 모든 성경에 다 담아놨는데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지금 사도바울의 이 이야기 할 때 사망과 한판 붙자는 거지요. 사망이 권투글로브를 끼고 나를 때리려고 온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사도는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거든요. “때려봐. 때려 봐!”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사망아, 한 번 때려봐. 때려봐. 어퍼컷 날려봐. 신종코로나 보내서 날 죽여 봐. 죽여 봐.” 그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사망아. 네가 지금 뭘 겨냥하느냐? 네가 겨냥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율법을 겨냥해서 십자가로 이미 나를 죽였어. 네가 겨냥하기 전에 십자가가 나를 죽여 버렸다고.” “너는 죄인이야. 에잇, 죽어.” “죽겠나이다.” 그걸로 그 많은 그 무거운 짐이 해방을 얻었어요.
십자가가 들어올 때 그 십자가 안에 율법으로 받아야 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그 심판이 이미 일어난 조건하에 우리가 되살아난 겁니다. 존재에서 존재로 살아난 것이 아니고 존재에서 사건으로 되살아난 거지요. 이제는 나는 없고 주께서 부리는 하나의 작은 물방울, 물방울의 튕김으로 되는 겁니다. 그런 자들의 모임, 옛날에는 구약 이스라엘이라 했었고, 물론 그들은 못했지만, 원래 이스라엘의 취지가 그런 취지였어요.
그리고 오늘날 진짜 교회가 그런 교회입니다. 마치 쉽게 말하면 빨래건조대에 양말이 주렁주렁 달렸잖아요. 건조대는 하나인데 온갖 양말이라는 사건이 다 붙어 있는 상태, 이게 교회입니다. 그리고 체육관에 보면 아줌마들이 운동하다가 던져놓은 훌라후프 모을 때 작대기 하나 중간에 놓고 거기에 걸어서 다 모으잖아요. 하나의 중심 되는 작대기에 모든 훌라후프를 다 집어넣듯이 빌립보 교회는 사도중심으로 전부 다 정리정돈이 되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어려운 이야기인데 사실은 이미 했던 이야기에요. 에베소서 2장 11절에서 16절을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걸 설명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택했다, 했어요. 이것은 ‘아담이냐, 마지막 아담이냐?’ 거기서 마지막 아담을 택한 거예요. 여러분이 설교를 주의 깊게 들었다면, 택함이라는 것은 곧 뭐다? 배제다. 한쪽을 택했다는 것은 한쪽을 배제하는 겁니다.
그냥 한쪽은 남겨두는 것이 아니고, 한쪽을 택했다는 것은 다른 한쪽을 배제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배제당한 인간가운데 인간 같은 인간은 아무도 없고요. 그것은 죽어 마땅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하나의 점으로, 순간으로 그냥 날라 가버려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죽어야 될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하는 결론으로서 날라 가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디 있느냐? 교회는 어디 있느냐? 택한 받은 예수님부터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피가 생명이니까. 기존의 생명은 생명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생명이라고 선택했다는 말은, 우리가 갖고 있는 목숨은 목숨이 아니라고 배재했다고 보시면 돼요.
우리 인간들 보기에 예수님을 배제했어요. “네 목숨은 네 목숨 아니니까 우리가 함부로 다루겠다. 미안하다. 예수야.” 하고 죽여 버린 거예요. 인간이 자기생명을 생명이라고 우기면서 나온 인간의 결정의 결과가 뭐냐? 예수님을 배제한 겁니다.
그 배제가 역공한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역으로 치고 들어오는 겁니다. “네 목숨이 목숨이 아니라 내 생명이 생명”이라고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든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 왔다 갔다 한다고 교인 아니에요. 교회 왔다 갔다 하면서 정치 이야기나 하고 그게 무슨 교인이에요. 투표 누구 찍을래? 누구 찍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배제했지요. 그 다음에 국가 대 국가에서 선택된 국가와 배제된 국가가 뭐냐? 선택된 국가는 이스라엘이고 배제된 국가가 이방민족이에요.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선택했다 하는데 교회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어떤 특정인간을 모집해서 예수님 자기중심으로, 자기 피 중심으로 만든 것이 교회입니다. 그게 에베소서 2장 13절에 나오지요.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예수님의 피 중심으로 새로 구성하는 거예요.
“피 중심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저에게 묻는다면 간단히 설명해서 이렇습니다. 더 이상 나를 지적할 대상자체가 나에게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율법으로, 십계명 들이대면서, 성경 들이대면서 “이러니까 너는 죄인이야.”라고 들이댈 수 있는 대상자체가 없는 거예요. “목사님, 우리 죄인 맞잖아요.” 죄인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준해서 죄인 되는 거예요.
만약에 아직도 우리가 율법에 의해서 죄인 될 것 같으면 율법을 지켰다고 여긴 부분이 있을 것이고 율법에 세세하게 관여하지 못한, 율법 말고 다른 것, 예를 들어서 내가 책을 들어서 내린다. ‘이거 죄 입니까 죄 아닙니까?’ 할 때, 이런 것은 율법조항, 그물에 안 걸리기 때문에 ‘이것은 중립적인 것이라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니고 그냥 책 들어서 내린 거야.’ 이렇게 될 가능성이 많아요.
여러분이 아까 교독문 읽었지요. 시편 51편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여러분이 보셨습니다. 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내가 죄악 중에 출생했다. 이게 바로 개인이 아니고 보편이에요. 모든 인간은 죄악 중에 출생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살아 있는 것이 죄라는 홍수 안에 잠겨 나옵니다.
주님이 위에서 보면 아래에 죄 밖에 안 보이는데 주께서 그 안에 들어오게 되면 죄로 출생한 구더기 같은 인간들만 있어요. 그게 바로 지옥이지요. 에베소서 2장 1,2절에서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이렇게 보편적으로 규정을 해버립니다.
“나 잘했어요. 나 죄지은 것 기억이 안나요.” 이러지 마시고 주께서는 보편적으로 다룬다는 말은, 주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도 보편적으로 다루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존재를 위해서, 예수를 증거 하는 사건으로서 너희는 지금 하나님의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만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개인적인 개성은 사도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나는 부자니 가난하니, 나는 목사니 장로니, 이런 것도 사도 앞에서는 다 소용없는 거예요. 사도 본인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내가 만난 것처럼 너희들도 성령 만났으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게 돼요. 그러니까 사도가 하는 말이, “우리 둘 다 극단적으로 가자.” 극단적으로, 갈 때까지 가보자~. 하는 것 있잖아요. 갈 때까지 가보면 무엇이 나오는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그제야 나와요.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나는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다. 나보고 투명인간이라고 말해라, 이런 것. 갈 때까지 가보게 되면 뭐가 사라지고? ‘나도 착해야 되는데. 나도 신앙이 성장해야 되는데.’ 이런 것이 다 날라 가버려요. 갈 때까지 가보면. ‘나는 천국까지 살아남아야 되는데.’ 그것까지 더 밀어붙여버리자는 말이지요.
마치 여의도 일곱 배 면적의 유채꽃 단지를 트랙터로 밀어버려요. 노란 유채꽃 단지를 트랙터로 밀어버리면 마치 어떤 아줌마가 30년 키운 긴 머리를 바리캉으로 밀어붙이는 것과 똑같은 거거든요. 그 기분 아시지요? 한 맺혀서 여승될 거라고 머리 다 밀어붙이는 그 기분.
그동안 내가 연출했던 그 모든 쌓아놓은 것, 내게 유익되고 도움 된다고 여겼던 모든 것, 내가 곱게곱게 쌓아온 그 모든 사적인 그것, 그것가지고 여차하면 탈출하겠다고 여력을 모아놓은 그것, 사도바울의 기쁨은 트랙터입니다. “이것도 기쁨이라고? 웃기고 있네.” 하고 기존에 내가 즐겁고 기쁜 것 다 밀어버립니다.
우리 아들 사법고시 합격했다. 이 유채꽃 밀어버려요. 다 밀어버려요. 나 이번에 건강검진 받았는데 나이 70이라도 병원에서 하는 말이 “꼭 40대 같습니다.” 하는 그것도 밀어요. 다 밀어버려요. 그러면 우리가 할 것은 뭐냐? 우리는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의 선택된 자와 ……, 여기까지 딱 하면 여러분이 알아요. 주님에 의해서 배제된 자, 그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건으로 다뤄지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할 것은 없어요. 구원은 내 선택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내 결정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믿음이요? 내 믿음도 선물입니다. 내가 만든 믿음을 바리캉으로 밀어버린 거예요. 트랙터로 밀어요. 내 소망, 내 사랑, 다 밀어버리고 존재 자체가 아무것도 없이, 존재가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극단,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버린 것, 그것보다 더 극단은 없습니다.
극단적이에요. 모든 사고가. 사도바울에게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이게 얼마나 극단적인 발언입니까? 만약에 사도바울이 국회에 가서 연설하면 다른 국회의원이 “야, 내려가! 마이크 내려놓고 나가!” 이렇게 하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내가 말한 것은 그리스도니.” 이게 얼마나 이게 극단적입니까? 아내가 설거지 하다가 와장창 비싼 그릇 다 깼어요. “당신은 칠칠맞게 설거지도 하나 제대로 못하나” “내가 한 것은 그리스도니” 얼마나 극단적이에요?
이 극단적인 그들에게 주께서는 이미 할 일을 줬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개와 돼지가 있음을 네가 말씀을 증거함으로,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서, 누가 개고 돼지인가, 누가 선택받은 자고 누가 배제된 자인가를 남은 인생을 가지고 우리가 보여주라는 겁니다.
나쁜 개는 없다고요? 나쁜 개는 없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세상이 다 개입니다. 모든 게 개에요. 저주받을 개 같은 존재입니다. 저희들도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극단으로 몰아세우셔서 그 개를 조기에 죽게 하셨어요. 조기에 하나님이 심판하셨어요.
내 얼굴을 보면 죽는다는 그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에 죽음으로서 우리 안에 내가 관리할 수 없고 내가 소유할 수 없는 분, 오히려 우리가 소유당해야 될 분이 이스라엘구주가 되어서 그분이 복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우리에게 지시를 내리고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는 그 지시와 명령이 살아 있는 한, 형식적이나 우리도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이 기쁨은 얼마나 큰지 비록 지금 사도가 옥에 갇혔어요. 그리고 이 빌립보교회의 특징이 뭐냐? 환란가운데 있어요. 환란가운데 기뻐하라고 합니다. 전체 다 읽어보세요. 환란가운데 기뻐하라. 그냥 ‘환란 없으니 기뻐하는 것 맞지.’가 아니라 환란 집어넣었는데 환란보다 더 세다는 거예요. 기쁨이.
그게 뭐냐? 극단을 넘어서 버린 거예요. “아무도 너희를 정죄할 자 없다. 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 값없이, 한 것도 없이 의로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 사도, 어떻게 이 사도를 초청하지 않았다고 배제할 수 있습니까?
그 사도가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말씀을 주실 때 사도의 기쁨이나 우리의 기쁨이나……, 나는 사도를 오늘부터 1일로 치겠다. 남이 아니고 하나의 같은 사도류, 같은 이웃, 우리에게 붙여준 형제, 이웃으로 함께 주님의 십자가 건조대에 양말처럼 달랑달랑 붙어 있읍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엉뚱한 것 가지고 기쁨을 얻고자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내 욕구, 내 욕망 달성되면 기쁘다고 짐작했고 미리 생각했던 그것이 악마의 농락당한 모습인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가리고, 십자가를 가리고, 주님의 살아계심을 가려버리는 악마의 아바타로 살았던 것을 후회하면서, 주께서 날마다 저희들을 극단으로 몰아줘도 우리에게는 기쁨이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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