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복음의 열매(빌1;27-28) 2004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4. 20. 07:05
2020-04-19 12:38:06 조회 : 432         
   복음의 열매 200419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복음의 열매(빌립보서 1: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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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20-04-19 13:35 
복음의 열매 

2020년 4월 19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1:27-28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1: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시대를 보는데 있어 선지자는 역시 남다릅니다. 누가복음 3:5에서 세례요한은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날과 같이 개인적인 가치와 행복을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시대에서 선지자는 일체 비교 우위를 논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본인이 ‘살아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오늘날에서 동물과 인간의 경계선과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선이 제한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 중요한 사는 것과 죽은 것 사이의 경계도 모호해졌습니다. 이때 선지자의 말을 들어보면, 인간이 개인적으로 살아있는지 죽어있는 지의 구분은 소용없고 오직 메시야의 오시는 길과 주변 환경 조성용으로 활용될 뿐이라는 겁니다.

인간 세상에서 상호 비교하는 그것은 마치 산이 낮아지고 골짜기가 메워지는 변화 앞에서 무의미해지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제대로 메시야를 알아보느냐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유대인들은 신들에게 기도하기를, 자기네들을 구원해 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막상 메시야가 나타나기 그분은 자신들이 예상한 메시야가 아니었던 겁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들이 고대하는 다른 메시야를 보냈을까요? 그것은 어느 인간도 자신이 ‘이미 죽어 있는 자’라는 의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작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맞아죽었습니다.

이로서 인간 세계에서 신은 애초부터 ‘없었던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본인들이 신노릇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신 신은 죽여없애버렸다는 것은 곧 인간들에게 있어 참된 신은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없는 신’, ‘죽은 신’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여봅니다.

‘없는 신’을 믿는 자들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복음의 열매’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들이 기대하는 복음이나 삶이라는 것은, ‘자신들을 산 자’라고 간주하는 것을 시작점으로 한 것입니다. 즉 ‘살아 있는 내’가 보여주는 삶의 훌륭함과 거룩함, 이것들을 주워모아 신에게 바치면 신이 기뻐하는 줄 알았던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자신에게 합당한 삶의 열매’이지 ‘복음의 열매’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더욱 철저한 삶’뿐입니다. 인간 세계에는 그 어떤 예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은 ‘없는 신’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없음’에서 새롭게 등장되는 ‘있음’이 있을 때만 복음입니다. 그래야 인간의 정체가 만천하에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낯익은 낯섬’ 현상이 일어납니다. ‘내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사실은 지식으로 부인해도 생활이나 삶으로는 도저히 부인될 수 없는 기분입니다. 이점은 너무나도 당연한 설정이기에 그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지적할 수 없을 정도 낯익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이 점을 노리면서 지적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것이 바로 ‘낯익은 낯섬’의 등장입니다.

복음이란 최후의 일인자를 놓고 경쟁하면서 등장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최후의 1인자임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생겨먹은 것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악마가 인간 마음 속에 이런 앱을 깔아놓았습니다. 선과 악의 지식이, 그 지식을 아는 본인에게도 모든 가치를 몰아줍니다.

어린아이가 말하기를, “아빠 달이 나만 따라오는 것 같애”하는 것처럼, 인간은 어느 순간이든 자기 구심성을 제쳐둔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쉴새없이 자신을 관찰합니다. 과연 이 관찰이 옳은 관찰인지를 판정한 기준도 없습니다. 선과 악 사이에 본인이 판정내리고 그 판정은 본인보기에 옳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순수를 추구합니다. 마치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참된 신임’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 순서로 여호와가 주신 율법을 수행해내고자 실천에 옮기는 것과 같습니다. 즉 ‘믿음→율법 공부→실천=거룩’의 경로를 밟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알고 있는 복음과정은 로마서 1:17에 나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 보면 ‘믿음에서 믿음’에 이릅니다. 결코 ‘믿음에서 행함’으로 나아가는 게 아닙니다. 만약 어떤 이가 믿음에서 시작했다고 하면서 거기에서 행함이 나온다면 처음 믿음도 행함입니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개역한글)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개정개역)
17.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
     (공동번역)
17.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표준새번역)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돼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기록되기를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합2:4(우리말성경)
17.  For therein is the righteousness of God revealed from faith to faith: as it is written, The just shall live by faith.(KJV)
17.  For in the gospel a righteousness from God is revealed,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from first to last, just as it is written: "The righteous will live by faith."(NIV)
17.  For in it [the] righteousness of God is revealed from faith to faith; as it is written, "BUT THE RIGHTEOUS [man] SHALL LIVE BY FAITH."(NASB)
17.  神の義は、その福音の中に啓示され、信仰に始まり信仰に至らせる。これは、「信仰による義人は生き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ある。(구어역)
17.  福音には、神の義が啓示されていますが、それは、初めから終わりまで信仰を通して実現されるのです。「正しい者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신공동역)


참된 믿음은 이 인간계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람들이 죽여서 진정 신은 이 땅에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없는 신’으로부터 받은 믿음만이 진짜 믿음이기에 여기에 그 어떤 인간의 의도나 결정이나 행함이 개입될 수 없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행함을 동원해서 순수에 순수, 완벽에 완벽에 이르는 삶이 아니라 도리어 ‘순수한 차이’를 나타내는 삶입니다.

즉 내가 행하는 것과 주님의 행하심을 결코 겹칠 수없다는 겁니다. 나의 행함을 긍정하기 끌어오는 율법은 도리어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보복하고 복수하는 방편으로서만 사용되어집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자’임이 드러날 뿐입니다.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오직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인간으로는 감히 손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성이 성령을 통해 선물로 주어지면, 그 어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에서 끊어지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롬 8:35) 이 관계에 의하면 인간은 당연히 율법 앞에서 복수와 보복의 대상입니다. 이번에는 인간들이 당할 차례입니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이 보복과 복수가 미리 주어지게 됩니다.

십자가로 함께 죽이시므로서 성사시키시는 겁니다. 즉 ‘나의 행함’을 아예 없게 하시는 겁니다. 행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이 사람들은 행위책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 20:12에 보면,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이 행위책에 기록된 자들이 예외없이 지옥불에 들어갑니다. 이는 하나님쪽의 마땅한 복수조치입니다. 구원받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의 생명책에 명단이 있기 때문이요 그 명단따라 하나님쪽이 찾아오신 덕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곧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기에 이것을 그대로 선물로 주신 겁니다. 그 관계성을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시행되는 하나님의 강력하고 무서운 복수극은 ‘그냥 내어버려 두시는’ 조치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추수 때 알곡을 모으듯이 자기 백성을 놓치지 않는 주님의 섬세한 손길을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20-04-19 19:49 
9강-빌 1장 27-28절(복음의 열매)2004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1장 27-28절입니다. 신약성경 317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1:27-28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사도바울이 멸망이라는 말을 굳이 이 대목에서 집어넣어야 되는지 우리 인간입장에서 섭섭함이 있습니다. 모든 것에 대해 멸망을 아예 없게 하시는 것이 진짜 사랑의 하나님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겁니다. 백 프로 다 재난지원금 주는 것이 좋지요. 70퍼센트로 제한하지 말고 다 주는 것이 정치지도자의 자비하심처럼 느껴지는데 사도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멸망이 필히 꼭 들어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 복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이 복음, 그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는 것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이해했던 거예요. 하나님은 계시는데 우리 인간들이 사는 형편이 너무 딱해서 하나님이 자비로움으로서 “고생 많이 했다. 이제부터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이런 메시아, 이런 복음, 이런 기쁜 소식을 예수님 당시에도 많이 고대하고 지금도 교회가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이 복음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음과 달리 하나님이 죽었다는 거예요. 신이 죽었다. 신이 이 땅에 왔지만 인간들의 공격 때문에 죽었고 결국 신은 인간의 공격을 피해서 다른 곳에 가버렸다. 어찌 인간입장에서는 이게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인간에게 이것은 복음이 아니지요. 신이 죽어버렸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신이 죽었다는 사실, 그것을 복음으로 알아듣는 희한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겁니다. 오순절 날 성령 받고 난 뒤에. “하나님이 안 죽었으면 우리는 지옥가야 했다. 그런데 참 모순되게도, 희한하게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맞아죽음으로서 신이 없다는 것, 신이 없다는 그것으로 인하여 인류는 처음으로 내가 누군지를 비로소 알게 된 상황에 직면했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겁니다.

신이 죽었다는 거예요. 신을 기다렸는데, 복음을 가져다주는 그 신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신이 죽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타날 때는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죽으심을 몰고 나타나요. 자신의 죽으심을 몰고 나타날 때에 그것은 진정 신이 죽은 것이 아니고 곧 인간이 죽은 거예요. 인간이 살았다 하지만 사실은 죽은 자였다는 것이 발각이 되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이 아닌 것은, 내가 살았다고 여길 때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내가 죽어 있음을 제대로 알 때 이게 복음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뭔가 해야 돼요. 살아 있기에 더 살기 위해서 뭔가 자꾸 움직여야 되고, 노력해야 되고, 자꾸 애써야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죽어 있는 사람한테는 더 이상 노력하거나 애쓸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죽은 사람이 뭘 해봐야 그것은 죽은 것이니까. 죽었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편하고 자유롭게 만드는지 몰라요.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욕심마저 죽어버렸을 때 그게 진정 욕심 없는 상태가 아닐까요? 욕심마저 없을 때, 욕심을 내도 그게 욕심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 그게 진정 욕심 없는 상태거든요.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복음을 통해서 많이 언급을 했어요. 최근에 신종코로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이 없어졌어요. 동물이 걸리는 바이러스가 인간에까지 넘어왔으니까 이것은 차이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바이러스는 생물인지 무생물인지 그 경계선이 모호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생물이 아니고 무생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하루에 몇 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숫자는 의미 없어요. 벌써 다 죽었어요. 다 죽었는데 새삼 숫자를 헤아릴 이유가 없습니다. 건강해도 나이 들면 결국 다 죽습니다. 이미 인간은 죽은 세상이에요. 그걸 요한복음에서는 어둠이라고 하는 겁니다. 빛이 안 오니까 나름대로 빛과 어두움 규정을 했지만 참 빛이 딱 오니까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아 어둡구나.’ 이미 하나님보기에 관계가 끊어진 상태, 그게 버틴다고 해서, 9백년 산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9백년보다 더 셈을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 잠간 살려주는 거예요. “네가 아무리 9백 년 동안을 살아도 너는 죽음을 못 이기지. 그지? 죽음이 대세야. 죽음이 지배하고 있다고. 네가 죽음을 이기고 있는 것이 아니야.” 해독주스 먹는다고 네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신종코로나 피한다고 해서 네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그 이야기를 성경에서는 여러 대목에서 언급을 해 왔습니다. 누가복음 3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외쳤던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거지요. 이 사람은 여론을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들이 대세가 뭐라고 하더라는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이게 뭐냐 하면, 구찌를 걸치고 샤넬을 입어도 전부 다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 말입니다. 전부 다 평탄하다. 산들은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지고. 인간들끼리 누가 이겼다, 누가 졌다, 민주당이 이겼다, 통합당은 졌다. 만원내기 그런 게임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모든 것이 평평해져 버렸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평평하게 되게 하는 그 이유가 더 중요합니다. 그게 뭐냐? 인간세상이라는 것은 메시아가 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한 용도로 활용될 뿐이지 자기들끼리 누가 잘났냐, 못났냐, 씨름 붙이려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인간끼리 서로 이기고 지고 그런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왜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들은 나 낮아지느냐 하면, 보라는 거지요. 누가 오는지를. 그렇게 평평한 거기에 대로를 따라서 누가 오는지를 보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메시아에요. 메시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중요하지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피조물이라서 하나님의 오심을 선전하고 알리기 위해서 인간들이 있고 피조물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고, 하나님 앞에서 노래하라고 인간들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미하라고 인간들이 있는 겁니다. 인간들의 개별적인 자기 자신 챙기고 자랑질 하라고 인간들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너를 이겼다,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에요. 인간이 할 일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이야기한 것은 모든 것은 평평하다, 높낮이가 없다, 똑같다, 어떻게 살든지, 가난하게 되든지 부자가 되든지 그거 별로 중요시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나라 의, 하늘나라가, 하나님이 계획한 그 나라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지를, 스며오는지를 보라는 겁니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그 외침에 따라서 오신 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복음은 인간을 동일하게 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복음이라는 것은 최후에 오거든요. 최후에 제대로 하나님다운 하나님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복음은 최후의 하나를 놓고 인간과 악마와 경쟁하겠지요.

경쟁에서 하나님은 마치 인간에게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에게 맞아죽었으니까요.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하나님을 죽였으니까. 왜 그렇게 하나님이 인간에게 맞아죽게 하느냐 하면, “일단은 너희 패를 까라.” 네가 생각하는 메시아, 네가 생각하는 구원, 천국, 네가 생각하는 기쁜 소식, 네가 생각하는 지상천국, 그것이 얼마나 가짜고 그것은 죽은 자의 아이디어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그런 아이디어가 나왔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관계가 끊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 패를 먼저 까게 하시는 거예요.

그것을 먼저 까게 하시는 쪽으로 주께서 오셨는데 저는 그것을 ‘낯익은 낯섦’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굉장히 낯선 분인데도 그분이 하는 일은 낯익어요. 그게 뭐냐 하면, “너희들이 원래 하나님이잖아. 본인이 하나님이면서 뭘 하나님을 찾느냐? 하나님보다 너희들이 최우선이잖아. 하나님 없이도 우리 인간들끼리 살 수 있잖아. 너무나 당연한 설정 아니냐?” 그 당연한 설정을 예수님 쪽에서 계속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낯익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는 지적들이 낯익은데 그 지적들을 하시는 분은 정말 낯선 지적이다, 그 말이지요. 인간은 인간위주고 인간에게 최후의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에요. 나를 위한 하나님이고 나를 위한 예수거든요. 그러니까 최후의 것이 내가 이미 하나님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걸 새삼스럽게 지적하고 확인시키니까, 낯익은데 이게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 겁니다.

신은 마땅히 이 땅에 와서 죽어 없어져야 돼요. 신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곧 신이기 때문에. 이것은 오늘날 인간들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았다고 자부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복 받은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뭘 끌어 모았느냐? 재산과 자기목숨을 끌어 모았지요.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요새말로 하면 복음의 열매, 또는 하나님의 신자다운 열매, 성도의 열매라고 여겼는데 그 야곱에게 얍복강에 누가 나타났느냐?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 야곱의 본성은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건들지 마라. 나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는 존재다.”

누가 이겼느냐? 야곱이 이겼어요. 천사는 야곱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고. 야곱을 제대로 꺾지를 못했어요. 오히려 야곱의 야곱다움을 더 부각을 시켜버립니다. 그리고 천사는 새벽이 되어 자기 세계로 떠나려고 했을 때 야곱은 비로소 하나님하고 싸웠다는 사실을 새벽에야 알고는 야곱은 처음으로 내가 하나님의 적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한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하나님이 직접 야곱을 만났을 때 야곱이 느꼈던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원수로 살면서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 치장을 했구나.’ 그 순간 야곱은 자기의 부끄러움이 노골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수치가 드러났다는 것이 사실은 성도로서는 축복입니다. 자기의 수치가 안 드러나게 되면 계속 자기자랑만 늘어놓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수치가 다 드러나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예수 자랑만 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다고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 또는 지난번에 나왔던 그 “믿음의 진보” 진보라 하면 자꾸 청송 위에 있는 진보가 생각나요. 믿음의 진보, 또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 이걸 본사람, 이걸 들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고 전 세계적으로 아마 수억 명이 봤을 거예요.

교회에서 하는 주제가 이거거든요. “믿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에 합당한 진보를 보이시고 성도다운 합당한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성화하셔야 됩니다. 그래야 하늘나라의 준비된 상을 받습니다. 성화되지 못하면 여러분은 중도에 탈락됩니다. 믿는 것에 멈추지 마시고 더욱 매진해서 몸과 마음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서 헌신하시고 교회를 위해서 충성봉사하시기 바랍니다.”

들어보니 상당히 낯익은 낯섦 아닙니까? 낯익은 이야기지요. 그런데 복음은 로마서 1장 17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믿음으로 행함에 이르게 하나니, 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거예요. 만약에 믿음으로 시작했는데 그 믿음이 행함으로 관심이 기운다면 이것은 처음에 있는 믿음이 믿음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행함에 속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선악에 대해서, 그 지식에 대해서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지요. 그 때부터 인간은 마음속에 앱을 깔아놨습니다. 인간은 뭐가 깔린지도 몰랐지요. 뭐가 깔린지도 모르고 모든 것은 자기의 결정대로 산다고 생각했지요. 그것이 가인에게 있어서 동생을 평소에는 안 미워했는데 갑자기 동생이 미워지는 거예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여 버립니다. 이게 마음속에 앱이 깔려서 그래요. 악마의 앱이 뭐냐? 그걸 압축파일로 했는데 풀어버립니다. 풀어버리면 거기서 행함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제가 제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책임을 물으니까 하는 말이 “제가 동생 지키는 자니이까?” 쉽게 말해서 “내 행함에서 나름대로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 행함을 문제 삼으면 곤란하지요, 하나님!” 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그 깔린 앱을 무슨 수로 내가 삭제시킬 수가 있습니까? 삭제 못해요. 인간에 깔린 행함이라는 그 압축파일, 처음에는,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잘 모르다가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그 압축파일이 분석이 돼요. 분석이 되면서 계속해서 행함의 절정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게 뭐냐? 순수함의 추구, 백 프로 순수한 성화, 순수한 성도되기, 순결의 극치, 그 한도까지 가보자는 겁니다. 이 앱은 멈추지를 못해요. 이건 미친 거예요 정말. 끊임없이 선과 악을 따져가면서 완벽에 완벽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리 되려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하느냐? 자기 자신을 본인이 관찰하게 돼요. 본인이 본인을 대상으로 삼아서 관찰하고, 닦달내고, 성경말씀 빌립보서 1장 27절, 신앙의 진보, 이런 구절 도입해서 하는 말이, 교회에서는 그걸 가지고 복음의 열매라고 이야기하고 신앙의 열매라고 우깁니다.

제가 알기에는 신앙의 열매라 하는 것은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 말이 아니고 마태복음 3장 12절에 나오는 세례요한의 이야기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여기에 쭉정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겉으로 보면 모르는데 안에 보면 아무 실 내용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쭉정이냐, 아니면 알곡이냐’ 하는 것은 성령이 와서 판단하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부터 시작하는, 선과 악에 대한 윤리도덕으로 시작하는 어떤 것도 이것은 쭉정이가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최후의 1인자, 예수님이지요, 예수님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면 이것은 복음의 열매가 아니에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아닙니다. 인간이 신을 죽여 놓고 죽지 않은 자기부터 시작해서 어떤 열매 같은 것을 생산하고자 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말한 알곡은 뭐냐 하면, 인간 손에 죽어버린 없는 신으로부터 새롭게 열매가 차일 때 그것을 알곡이라고 이야기해요. 없는 신으로부터.

그러니 있는 나는 빠져야 되지요. 그게 바로 믿음에서 시작했으면 끝까지 행함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해서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거예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내 믿음은 추가할 것이 많지만……, 중요한 겁니다.

내가 믿게 되면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도 있어야 되고, 사랑도 소망도 있어야 되고, 또 여러 가지의 온유와 화평과 자비를 팔레트처럼 다 끌어 모아야 돼요. 마트의 물건 바구니에 집어넣듯이. 내게 있는 것부터 출발하게 되면 할 수 있는 행함은 다 끄집어내야 돼요. 바쁘지요. 그래서 교회가 바쁘잖아요. 새벽기도회 나와야 되고, 구역예배 나가야 되고 바쁘다고요. 계속 마트의 물건 담아야 되니까.

그런데 주님의 믿음은 신이 없어요. 이 세상은 인간이 신이에요. 인간밖에 없어요.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이론상 당연하지 않는데 생활실천상 당연해요. 머리로서는 신이 계신데 행동하는 것 보면 신은 뒷전이에요. 신은 없어요. 하나님 위주가 아닙니다. 나 위주에요. 출발점이, 스타트가 나라니까요. 나의 선택, 나의 결정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리고 후회해도 자기한테 후회하고.

신은 인간 손에 죽었다니까요. 이게 복음이에요. 최후의 내용은 그거예요. 신이 죽었다는 것. 죽었는데, 신이 없는데 나에게 신이 계시다는 소식이 들려온 거예요. 그러면 최후의 1인자를 두고 내가 최후의 1인자냐, 아니면 죽었던 그 예수님이 최후냐를 두고 경쟁에 돌입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은 알지요. 경쟁할 잽도 못 된다는 것을 알지요. 역시 최후는 주님이 전부다, 하는 것을 압니다. 주님이 전부였어요. 인간은 죽였지만 주님은 죽은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제는 네 속셈, 너희들 하는 행세, 너희 결정권, 다 들통 났다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스럽다 그 말입니다.

인간은 밟았으나 하나님은 죽은 신을 살려낸 거예요. 지금 신종코로나는 관심 밖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가 더 중요한 관심사에요. 그분이 나타났을 때, 성령이 나타났을 때 성령은 그냥 맨손으로, 빈손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준 거예요. 그러면 그 선물이, 그 믿음이 믿음이거든요. 그 믿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끝나는 거예요.

없다고 여겼던 그분이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우리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것을 계속, 새로운 것을 우리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온유와 화평, 자비, 양선, 사랑, 믿음, 소망, 이게 전부 다 우리가 손댈 수 없는 거예요.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이익을 취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 쪽에서의 사랑은 이것이 성립이 안 되거든요. 자기 이익을 취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최종적인 존재인데요. 그런데 이 안에 생겨버렸어요.

그래서 성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딴 게 아니고 없으신 분이 예상도 못한 분이 나에게 뭘 집어넣어줄 때 그 집어넣어준 것과, 지금 육신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내 몸이 남아 있으니까 내 몸에서 잘난척 하면서 내 결정으로 만들어낸 것과의 그 차이, 그 차이가 순수하게 차이만 있을 때 그게 바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에요.

내가 생각한 나 위주의 복음은 가짜였고 진짜 복음은 바로 나로 인하여 죽었던 분이 죽었음으로 더 이상 너에게는 손댈 것이 없음을 알려주는 그 두 가지의 관찰, 두 가지의 시선의 그 차이만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살아 있을 때 그게 순수한 차이이에요. 그게 우리 안에 잠복되어 있을 때 그게 성도입니다.

‘아, 이것은 아닙니다. 주여. 이것은 아닙니다. 내 행함을 강조하는 이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악마가 깔아놓은 앱입니다.’ 이 앱을 깔아놓으니까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계속해서 압축파일이, 우리가 행동을 하면 버릇처럼, 당연히 육신이 있으니 버릇처럼 뭐가 나오는가? ‘내가 이번에 잘했을까 못했을까, 또 튀어나오는 거예요. ’잘했을까, 못했을까? 역시 나는 잘했지. 잘했으니까 벌 안 받을거야. 내 뜻대로 잘 될거야. 왜? 착한 일 했으니까.‘ 이게 자동적으로 나온다고요.

그것만 나오면 안돼요. 정말 성도,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것과 그것 때문에 바로 하나님은, 예수님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다른 반대편이 같이 겸하여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뭐냐? 구약의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돌판입니다. 돌판은 시내산 밑 지상의 백성들이 만든 것이 아니에요. 돌판공장이 없어요. 돌판공장은 하늘나라뿐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이 친히 돌판에 새겨서 줬거든요. 인간의 현실, 인간세상 그 외부에 있는 것이 돌판이에요. 그 외부의 것이 돌판이라는 모양새를 가지고, 구체적인 물질성을 가지고 인간세계 속에 들어온 겁니다.

그 돌판을 요약한 것이 마태복음 22장 36-39절에 보면 나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질문한 중에서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돌판에 담긴 내용을 두자로 말하면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인간은 빠집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되는 예수님사이의 관계가 율법의 완성입니다. 인간은 빠져요. 인간은 이 관계에서 끊어졌습니다. 이미 선악과 따먹었으니 그 관계에서 끊어졌어요.

그 관계가, 돌판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더 이상 우리는 그 관계 말고 최후의 독자적인, ‘나는 이정도의 열매를 끌어 모았습니다.’ 하는 것은 하늘나라에 용납되지를 못합니다. 관계가 중요한 겁니다. 관계가 중요해요. ‘나는 이정도 실력이 됩니다.’가 안돼요. 내가 나에게 점수를 매기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면 모든 관계가 결국은 끊어지고 최종적으로 나에게 모든 것이 쏠리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한평생 살았는데 점수가 76점이다.’ 그런 것. 혹은 ‘나는 95점이다.’ 그런 것. 이것은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본인만의 독점입니다. 본인이 시인한 것을 자인하는 겁니다.

관계가 되려면 나는 거기에 없어야 돼요. 관계라 하는 것, 하나님이 인정하는 관계란 뭐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만 인정하는 겁니다. 성령님이 주신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그 관계를 집어넣는 거예요. 믿음은 뭐냐? 소망은 뭐냐? 사랑이란 뭐냐? 아버지와 아들사이,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관계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그것을 선물로 낯설게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사로 주신 거예요.

이거 알아야 되는데……. 이 관계를 주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앱으로 깔아버렸어요. 앱이 두 가지가 되어버렸어요. 내가 얼마나 우수한 존재가 될 수 있느냐? 내가 얼마나 착해질 수 있느냐? 얼마나 선할 수 있느냐? 우수 직원이 될 수 있느냐? 그것은 악마가 깔아놓은 거지요. 행함이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내 행함이 주저하지 않고 달려듭니다. 믿는다는 행함을 해버렸어요. 믿는다는 행함을. 믿는다는 행함을 하니까 “하나님, 믿음 가지고는 모자라겠지요? 아무래도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니까 여기에 행함을 더 보태야 되겠지요.” 해서 그 다음부터는, 믿음으로 출발을 했는데 믿음에서 믿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서 행함으로 가버린 거예요. 그 일을 선배들이 이미 했습니다. 그 선배가 유대인들입니다.

그 유대인들이 로마서 2장에 보면, 자기들이 여호와를 믿는다고 자부하고 그 믿음에 의해서 믿음에 합한 행위를 율법에 의해서 실천에 옮겨야 된다고 그들은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 여호와가 하나님이라는 믿음, 여호와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면서 율법도 함께 받아들여서 ‘지금 내가 율법대로 사느냐, 아니냐’를 분석에 들어가고요. 그걸 분석하려면 율법을 공부해야 되겠지요.

지혜를 통해서 하는데 그냥 머리로만 하면 안 되겠지요. 바리새인은 실천을 강조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만 율법이 의미가 있고, 율법을 지켜서 그걸 실천에 옮겨놓을 때 그 모든 과정에 관찰을 누가 하느냐? 본인이 관찰해요. 본인이 관찰한다고요. 본인이 관찰하니까 예수님은 신이 아니에요. 그냥 또라이였지요. 자기가 관찰자가 되는 겁니다.

30센티 자가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30센티가 넘는 것 같아 보여요. ‘아니야. 이것은 30센티에서 모자라.’ 자를 두고 다른 외부인이 자에 대해서 길다느니 짧다느니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30센티 자 자체는 결코 본인이 30센티 자라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입증할 수가 없어요.

내가 지금 율법대로 했다, 안했다는 본인으로 입증이 안되는 겁니다. 나는 지금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입증이 안돼요. 내 신앙의 진보가 있는지 없는지 확증이 안 된다고요. 안되는데 왜 교회에서 그런 소리 하느냐? 사람들은 자기가 신인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교회 왔기 때문에 그래요.

최종적인 인물은 본인이에요. 하나님도 시다바리라니까요. 자기에게 봉사하는 종의 관계에요. 관계는 없어요. 나만 최종적이지 관계라는 것이 없어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남에게 말을 하잖아요. 상대방에게 말을 할 때는 조사 중이고 탐색중이라고 보시면 돼요. 말을 많이 할 때는.

강력계 형사들이 피의자를 앞에 두고 말을 계속 한다는 것은 지금 조사중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남들에게 말을 많이 할 때는 지금 조사중입니다. 형사의 말이 끝나는 지점이 언제냐 하면, 검찰에 송치될 때, “검찰에 넘겨.” 이럴 때는 말을 끝내지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말을 많이 하고, 또 남에게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 존재인지를 탐색한다고 말을 많이 하는 거예요.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마치 연막전술이에요. 저쪽에서 틈을 노리고 내 약점을 찾아낼까 싶어서 “어어어어……!” 하는 식으로 말을 많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보통 부부생활을 오래 하게 되면 말을 안 하잖아요. 이미 조사 끝났으니까. 오히려 친구하고 이야기를 많이 하지요. 말이 끝난 지점에 딱 두 가지 남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든지 안 그러면 그 사람을 사랑하든지.

정말 사랑한다면 할 말을 잊어버리지요. 할 말을 잊습니다. 사람이 주님의 십자가의 영을 제대로 받아버리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시렁구시렁, “봐주세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때는 신종코로나 때문에 교회 못나왔습니다.” 이런 소리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할 말을 잊어버려요. 할 말을 잊었다 하니 생각나는 노래가 있습니다.

“당신의 고운 눈매에
 할 말을 잊었지만은
 냉정히 돌아선 무정한 사람은
 눈물을 모르겠지요.”(잃어버린 정/김수희)

이런 노래도 있지만 할 말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무슨 말을 더 합니까? 욥처럼 재를 뒤집어쓰고 할 말을 잊어버려요. “제가 죽였습니다. 내가 최종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죽여 버렸습니다. 죽여 버렸는데 그 중 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나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더라도 나는 티 잡히지 않게 나는 최선을 다해서 순수에 순수를 더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당신이 주신 말씀이라도 내가 하나도 어기지 않고 다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이고, 오늘날 인간들의 사는 모습이에요. 건들지 말라는 거예요. 최선을 다한다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고 로마서 2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께서 자기죽음을 근거로 복수와 보복에 나서는 겁니다. “너 나 건드렸지. 이제는 네가 죽을 차례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마지막 심판이 나오는데 마지막 심판은 달랑 두 종류밖에 없어요. 자신의 행함을 여전히 유지하는 쪽과 그리고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쪽, 달랑 두 종류밖에 없어요. 예수 믿고 바르게 산 사람, 그런 것은 전부 어느 쪽이냐? 행함에 다 속해버립니다. 예수 믿고 바르게 산 것, 예수 믿고 예수님처럼 산 것 전부다 행함책이에요. 지옥 가는 사람들이에요.

구원받는 사람, 천국 가는 사람은 인간에 대해서 묻지를 않아요. 단지 생명책에 네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은 천국 가는 겁니다. 예수 믿고 행함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지옥 가는 거예요. 행함의 열매 그런 것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냥 믿음에서 믿음으로 가는 거예요.

벌써 초반 한 이야기 다 잊어버렸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내게 없는 겁니다. 내게 없었어요. 왜냐하면 나는 이미 믿어요. 나를 믿기 때문에. 나의 희망을 믿고 나의 기대를 믿습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나를 믿어요. 그래서 계획 세우고 스케줄 짜고 하는 겁니다. 다 나를 믿기 때문에,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기에 그렇게 믿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가 알곡이 된다는 것, 복음의 열매라는 것은 그게 아니라, 바로 이렇게 나만 믿고, 나만을 위해서 내가 남 앞에 나쁜 소리 안 듣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참 순결하게 살아왔다는 그 자랑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 모든 것이 쭉정이, 정말 악마가 심어놓은 앱에 따라서 쭉정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그게 주님의 열매요 복음의 열매입니다. 주님 자체가 열매에요.

주님께서는 나를 보면서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그것을 뽑아내고자 하는 겁니다. “네가 어떤 짓을 하든지, 어떤 행동을 하든지 네가 예상치 못한 믿음을 내가 선물로 주었다. 내가 준 선물을 나는 끝까지 쳐다본다.” 그 선물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생명책에 기록된 자에게만 이런 선물이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

이게 거짓말인 듯 보일 것 같아서 제가 ……, 요한계시록 20장 12절부터 보면 책이 달랑 두 가지 책밖에 없어요. 하나는 어린양의 생명책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책만 보는 거예요. 명단에서 빠지면 끝나는 겁니다. ‘나중에 책 찾아보지.’ 하지 마세요. 책의 명단에 있으면 미리 성령이 와서 네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알려주니까 죽어서 “책 한번 봅시다.” 할 필요도 없어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 안에 낯선 것이 들어와요. 이것은 내 결심과 행함과 상관없이 ‘내가 바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내가 차버렸고 죽였습니다.’ 하는 그 사실을 발각되게 하는 그 관계, 오늘 몇 번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그 관계, 주님과 나의 관계, 그 관계가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자에게만 허락이 된 거예요.

그렇다면 그 관계는 어떤 환란과, 곤고와,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심지어 신종코로나가 온다 할지라도 그 관계는 손상이 가지 않아요. 이게 끊어지지 않아요. 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게 되면, 나중에 치매 걸리면 다 끊어지고 말아요.

그리고 성질나면 다 끊어져요. 뭐 “민주당이 이겼다고? 에이 성질나서…….” 다 끊어져요. 내 목적과 기대가 같이 다 끊어지면 화가 나는 겁니다. “네가 나를 배신 때려? 나에게 죽었어.” 이러면 다 끊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왜 인간이 행함으로 안 되느냐에 대해서 로마서 2장에서 율법을 줬고 그 율법은 무엇을 겨냥하느냐? 마지막에 진노의 날,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다 죽인다는 진노의 날을 미리 대비했다는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율법대로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대로 살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여러분, 강매하는 구원은 율법이에요. 믿쑵니까, 믿쑵니까, 쌍시옷 쓰면서 손들라 하는 것은 강매인데요. 강매는 율법이 들어온 겁니다. “여러분들의 결정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성경말씀도 여러분의 행함으로 여러분의 결정으로 지킬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것이 하나의 미끼상품이 된 거예요. 교회에 낚인 거예요, 여러분. 물론 우리는 관계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복수하고 보복할 때 그것을 진짜 믿음의 사람은 당연하다고 여겨야 되고, 하나님께서 죽었으니까 인간전체에 대해서 보복하고 복수하는 거예요. 그거 당연한 거예요. 보복과 복수를 먼저 받아들이세요. “주여, 저를 향하여 복수하시옵소서.” 그게 로마서 1장에 복음이야기하면서 그게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겁니다.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복음 외에 어떤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울 짓, 수치스러운 짓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그러나 복음만큼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가 자랑한다. 내 행함 이런 것은 부끄러운 것이지만 이 복음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 그 복음 앞에서 나는 먼저 선점해서 복수당하고 먼저 보복을 당했기 때문에. 이미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쭉정이인 것을 내가 알기 때문에.

충분하게 매를 먼저 맞은 거예요. 먼저 얻어터진 거예요. “주여 저를 향하여 복수하옵소서. 내 인생이 어떻게 꼬이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망가져도 상관없습니다. 주님의 정당한 복수이십니다. 지금 오늘 죽어도 그것은 잘하신 겁니다. 주여. 주께서 인간 속에 맞아죽었으니 이제는 우리차례고 우리가 주님한테 맞아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그것을 성령이 오면 알 수 있어요. 그러면 진정 무서운 것이 뭐냐? 하나님께서 로마서 1장에서 내어버려 두시는 것, 하나님께서 그냥 제켜놓은 것, 이게 제일 무서운 복수에요. 참 무서운 복수입니다. 누가복음 4장 25, 26절 “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참 이게 무서운 말이거든요. 그 많은 가난한 과부가 있었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오직 한 사람,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만 갔다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누구를 하나 선택했다는 것은 누구를 배제했다는 겁니다. 내어버려 둔 거예요.

이게 복수에요. 하나님이 하시는 복수는 뭐냐? “놔둬버려. 놔둬 그냥. 예수 몰라도 놔둬버려.” 이게 무서운 거예요. 왜? 불구덩이에 같이 무너지거든요. 샤넬을 걸치고 구찌를 달고 다녀도 결국 그것은 불바다에 갈 수밖에 없는 팔자라는 말이지요. 그냥 방치, 나둬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27절에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 뿐’이라는 거예요. 뿐이고, 뿐이고. 나아만 장군 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그냥 내어버려 두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단체로 전부다 하나님께서 이미 복수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복수당해야 되고, 멸망당해도 되고, 주께서 안와도 되는데 찾아오셨다는 거예요. 친히. 이 소식 전하려고, 신이 없다는 소식 전하려고, 신이 없으면 나도 없는 거예요. 이게 천국의 특징입니다. 천국의 특징은 합창단이지 개인 소프라노 자랑하는 것이 합창단원의 사명이 아닙니다. 꾀꼬리 같은 내 목소리 합창단원에게 그것 필요 없습니다.

합창단은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는 거예요. 관계입니다. 더불어 있는 관계에요. 내 주장, 나는 이렇게 착실하게 살았으니 나는 95점, 너는 75점, 이런 비교자체가 성립 안돼요. 성령을 줬다는 것은 같은 예수님의 같은 믿음을 분배한 거예요. 밀가루를 다 배급했는데 내 밀가루가 더 곱다는 이런 소리 하면 안 된다니까요.

인간은 어릴 때부터 얼마나 악마적인지요. 다섯 살 먹은 애가 이런 소리 했답니다. “아빠 왜 저 달은 나만 따라와?” 얼마나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입니까? “아빠 왜 저 달은 나만 따라오는데?” 이게 벌써 어릴 때부터 자기위주입니다. 자기가 최종적인 거예요. 이미 악마의 앱이 깔렸으니까 하나님도 뒷전이에요. 내가 하나님이 노력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진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이면서도, 참 추접하게도 자기를 조작하면서도 신이시여, 라고 가증스러운 기도와 가증스러운 헌신과 노력을 다한 거예요.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잘남에 있었는데. 기도할 때의 태도를 보세요. 웅크리잖아요. 이렇게 웅크리잖아요. ‘제발 내 것은 건드리지 말라.’

이런 것은 너무 오버하는 해석입니다만. 어쨌든 웅크린다는 말은, 안 다치겠다는 평소의 행동, 평소의 대인관계에서 했던 행동을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똑같이 하는 거예요. 날 잡아가소,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게 아니고 꽉 움키는 거라니까요. ‘제발 이것만큼은, 제발 이 여자만큼은 ……, 고백합니다, 주여! 제발 우리 가정만큼은, 다른 집안 애는 아파도 괜찮은데 제발 우리 애는 신종코로나 안 걸리고 그냥 넘어가게 해주옵소서.’ 이게 순수함입니까? 주님의 공격타깃이지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예수님이 사도요한에게 나타났는데요. 15절에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파도소리라고 보면 되지요. 파도의 큰 소리.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 앞에서 내 개인적인 소리는 내지 말라는 뜻이에요. 내봤자 많은 파도소리, 물소리에 다 묻혀 버립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주께서 건지는 그 성도도 밀레의 이삭줍기 하듯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추수하듯이 알곡이 누군지를 쭉정이가 누군지, 그것은 우리가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성령 준 사람을 통해서 알곡이라고 스스로 자기를 찾아내게 되어 있어요.

그 찾아내는 과정이 뭐냐? “주여, 저는 주님 앞에 공격받아야 마땅하고 보복당해도 마땅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그 복음만을 기뻐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저의 열매입니다.” 내가 이렇게 훌륭하다가 아니라 “주님이 이렇게 하게 하셨습니다. 적절하게. 지금껏 주께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 나라 의를 바라보는 그 모습, 그게 바로 복음의 합당한 열매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은 그런 자에 한해서 특징을 이야기했어요. 참 어려운 특징인데 그것도 인간에게는 불가능해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두려움이 없다는 거예요. 아, 너무 많은 짐을 우리에게 부여하는게 아니겠습니까? 두려움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자기 자신이 주님의 관계로 인하여 나의 소리는 그냥 작은 소리고 주님의 파도소리가 크게 여러분 속에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제켜놓고 자기 살 궁리만 했던 저희들. 하나님, 하나님, 부르면서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하기를 원했던 우리들, 그것이 바리새인이고 그것이 가짜 신인 것을 받아들여서, 이제는 그것 말고 나로 인하여 죽으신 십자가지신 주님이 찾아오셨다는 또 하나의 앱이 열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