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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과 해결책(빌1;19-21) 20032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3. 30. 08:31
2020-03-29 12:42:19조회 : 591         
   덫과 해결책 200329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덫과 해결책(빌립보서 1:19-21)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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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20-03-29 13:32 
덫과 해결책 

2020년 3월 29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1:19-21

(1: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예수님이 지상에 육신으로 계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싫어버린 바 했습니다. 그래서 버렸습니다. 차버렸습니다. 지구 밖으로 밀어내었습니다. 곧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쁘다는 것은 전혀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필요치 않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유익’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필요치 않는 존재로 배척하느냐 하며는, ‘본인이 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인간들에게 있어 숨길 수 없는 본성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본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철칙이 작용합니다.

‘본인의 살아남기’라는 본심이 작용하는데 ‘왜?’라는 이유조차 필요치 않는 공리같은 겁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라고 우깁니다. “왜 나는 죽지 않고 꼭 살아야 하지요?”에 대해서 본인으로서 아는 바 없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살아 있다’라는 사실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생명’을 혼돈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주님이 살아 있음’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 생명 안에서 조건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에게 버림받은 그 주님”으로서 살아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이 아니라면 죽음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에 그들은 덫에 걸린 겁니다.

먹을 때는 자율적으로 먹은 것 같은데 막상 원상회복이 되지를 않는 거예요. 마치 옷을 입을 때는 골라 입어놓고 막상 벗을려고 할 때는 그 옷이 벗겨지지 않는 겁니다. 죽음은 이와 같습니다. 사람이 숨이 끊어져 죽는다고 해서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죽음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인간을 관리합니다.

이 죽어 있는 상황이 되니, 그 세계의 주인인 악마가 인간을 평생 다구칩니다. “너만은 살아남아야 돼. 어쨌거나 저쨌거나 살아있는 것이 남는 것이다”고 계속 인간을 부추하고 호소하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경우와 같습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오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본인은 그것이 죄인 줄을 몰랐습니다. 병들지 않았던 그 시절이 자기로서는 정상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나타나니, 자신의 지금까지 모든 소행이 다 죄가 되는다는 것으로 들통나 버렸습니다. 즉 예수님이 사라져버린 이 세상 환경에서 여전히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어디까지나 자기 위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일찍이 빠져 나가신 영역임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소원은 예수님처럼 자신도 이 세상에서 발을 빼는 겁니다. 이는 생각은 ‘자기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미워한 그 예수님이 진정 여전히 살아계심을 드러내기 위한 조치로 자신이 여기 있음을 압니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사도 바울은 ‘자기가 살기 위해’ 그 어떤 시도도 하지를 않습니다. 자신이 천국가기 위해 ‘예수 믿기’를 시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서 진정 제대로 살아계신 분은 본인이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의 이러한 세상 살기 태도는 예수님처럼 사람들로부터 밉상받기 십상입니다. 

사도는 이 본인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결말을 미리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 동안의 과정과 절차를 다 삭제해버립니다. 바로 이것이 ‘해결책’이라는 겁니다. 악마의 덫에 빠진 인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부정하고 제거하는 작업이 모순됨을 압니다. 자신의 요령으로 ‘자기를 부인하라’라는 말씀을 지켜낼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했다는 측정하고 판단하는 그 자기는 여전히 부인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살리는 방편’으로 매개를 찾게 됩니다. 중간매개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서 예수님 덕분으로 자기를 살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사기(詐欺)입니다. 악마가 그냥 놔주지 않습니다.

가짜 그리스도를 믿게 하므로서 탈출로를 차단시켜버립니다. 인간은 매개를 찾아서 자신이 살고자 할 때에 필히 악마는 매개역할을 하면서도 결국에는 그 인간에 대한 지배자로 본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문제는 바로 ‘내가 살기 위해서’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본인을 사는 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죽은 자’로 봅니다.

그동안 이 죽은 자가 살아온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이랍니다. 이렇게 되면 그 어떤 과정과 절차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묻지 않는 겁니다. 참으로 험한 인생살이를 하면서 위로받고 싶은 말들이 많겠지만 성경대로 하면 이 문장 뿐입니다. “죄 짓는다고 수고했다”를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듣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동안 나를 살리기 위한 나의 인생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살면’ 그 사람은 지옥가는 사람입니다. 지옥에는 이런 사람들로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천국가는 사람은 ‘주님이 계셔서 주님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구약 민수기 35장은 ‘도피성’에 대해서 언급해 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은 서로 단호하게 다른 특이성을 보이는 민족입니다. 이방민족들은 ‘나는 어쨌든 살아야 돼’라는 원칙을 두고 자체적으로 치열하게 경쟁하며 움직이는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뜻’이 유일하게 담긴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의 투쟁은,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치열하게 일어납니다. 그 담겨 있는 뜻의 핵심이 ‘도피성’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도피성’은 제사장이 상주하는 지역입니다. 이 도피성은 고의에 의하지 않고 남을 죽인 사람이, 죽은 자의 가족의 복수심으로 또 살해되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 피신하는 곳입니다.

이 ‘도피성’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것이 ‘내가 알아서 내 인생을 살려왔다’는 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인 것을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의 생존 여부와 자신의 목숨 부지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여기 살아 있는 것’이 하등 중요하지 않고 ‘대제사장이 살아있음’으로 인해 본인이 살아 있는 조건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도가 할 기도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대제사장 되시는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나를 통해서 발현되게 해달라는 겁니다. 비록 내가 살인자가 되는 경우라도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직 주님에게만 유익되는 일이 우리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20-03-30 07:59 
6강-빌 1장 19-21(덫과 해결책)2003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1장 19-21입니다. 신약성경 317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1:19-21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사도바울이 세상 살아가는데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 해결책이라 하는 것은 딴 것이 아니고 이미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외 다른 해결책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의 이런 말을 들으면 사도바울은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나쁜 남자에요.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고 그냥 죽어도 괜찮다는 이것이 대책입니까? 그 당시 목회자, 목사가 교인들에게 이게 할 소리겠어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가정이 화평하고 내 몸이 건강하게 됩니까?” “그냥 죽었습니다.” 이게 무슨 대책이 되고 해결책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교인들이 “당신은 나쁜 사람이야.”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정말 사도바울은 나쁜 사람이에요. 마치 누구와 같이 나쁜 사람이냐 하면, 예수님과 같이 나쁜 사람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함께 있다면 정말 몹쓸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또는 교회가 오해합니다. 예수님이 안계시니까 환상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예수님은 참 좋으신 분이라고. 누구한테 좋은데요? 사람들의 이 환상, ‘예수님은 좋은 분일거야. 하나님 편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누굴 보내도 사랑의 주님을 보냈을 거야.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보게 되면 사랑할 만할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주님의 영을 받고 우리에게 등장한 사도는 말하기를, 해결책이라고 제시한 것이 정말 우리의 모든 기대를 와해시키고 무너지게 만드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처럼 살면 됩니다.” “어떻게요?” 죽든지 살든지 신경 쓰지 말라고. 결국은 성경에서 도달되는 것은 결론이라는 것은 “어차피 죽을 인생 그걸 주께서 앞당겨 주심에 대해서 감사합시다.” 이게 해결책이거든요. 어차피 죽을 것. 죽는다는 말은, 길이 없다는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우리의 결말을 미리 보여주게 된 거예요.

사도바울은, 죽든지 살든지 내 몸에서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사니까 우리가 어떤 고민이나 걱정을 한다는 그 자체도 사치이며 이것은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성립이 안 되는 질문을 왜 나에게 해요? 고민을 해도 그리스도의 고민이 나타나야 되고, 걱정을 해도 그리스도의 걱정을 해야 되고, 어떤 목표가 있어도 그리스도의 목표여야 되지 네가 왜 중간에 나서고 네가 왜 거기서 왜 나와?” 하는 것처럼 “네가 왜 중간에 끼느냐, 네가?” 그 말이에요.

쉽게 말해서 “너는 왜 아직도 네가 살아 있다고 여기는가?” 이렇게 묻는 거예요. “네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아직도 너는 살려고 하느냐? 그렇다면 그것은 지옥에나 가라.” 그 말이에요. 지옥에나 적합하다는 겁니다. 천국에서는 뭐냐? 예수님이 날 살려주는 방식으로 사는 게 천국 가는 사람이고요. 지옥은, 내가 이 덩치, 이 덩어리,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은 지옥에 갑니다.

벌써 내가 나쁜 사람 다 되었어요. 사도바울이 얼마나 세상사람 보기에 나쁜 인간이냐? 더 이야기를 길게 이어볼게요. 결말을 먼저 이야기해 버립니다. 어차피 주님이 우리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거든요. 문제 삼지 않고 네 안에 그리스도만 쳐다보고 있는 입장이 결말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길이 없다고요. 길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마감, 도착지점이에요. 막혔어요. 다 왔어요. 끝나버렸어요. 더 이상 길이 필요치 않아요. 종착점에 와 버렸다는 말이지요.

결말에 와 버렸으니까 사도바울은 어느 정도로 나쁜 사람이냐 하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갑니까, 하는 그 과정을 마감, 결말을 딱 제시하고 그 중의 모든 과정을 삭제, delete, 전부 삭제시켜 버립니다. 모든 과정을. 어디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완전히 그걸 지워버려요. “네가 어떻게 인생을 살았는가? 내가 묻지 않을게.”

참, 이 험한 세상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는 말을 원하잖아요. 어떤 사람은 그런 격려의 말을 못 들어서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려서 자살하기도 하는데 사람들이 어떤 말을 듣기를 원하고 모든 문제를 한 마디에 완전히 잠재울 수 있는, 깔끔하게 정리가 될 수 있는 그런 말이 없는가를 찾고 있습니다.

힘든 인생 살면서 고민도 많지만 제가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게 뭐냐? “그 동안 수고했어. 그동안 죄 짓는다고 수고했어.” 죄짓는다고 수고했다며 어깨 토닥거립니다. “네가 원하지도 않는데 태어나서 네가 원치도 않는 인생 이렇게 힘들게 살았는데 참 수고했어. 수고했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를 죽여줄게. 네가 힘들고 어려운 이유는 평소에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살다보니까 어떤 수법, 과정, 어떤 원인과 결과, 이런 논리가 나에게 무거운 짐으로 적체가 되어 있었어요. 변비가 된다 할까, 위장장애를 일으켰어요. 꽉꽉 차버렸어요. 이게 빠져야 되는데.

‘내가 이렇게 해서 이렇게 살아왔지. 그러면 오늘도 이렇게 살겠다.’라고 잘 살아보려고, 이왕이면 행복해보려고 그 모든 적체된 것, 어떤 식으로 ‘나는 이렇게 한 번 살아 보겠다.’ 하는 거기에 필요했던 요령, 노하우, 이것을 사도바울은 완전히 지우개로 지우듯이 지워버립니다. 결말을 딱 이야기해 버린 거예요. 그동안 네가 산적은 없었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다는 겁니다. 네가 너를 살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너를 살려줬다는 거예요.

살려줬는데 왜 네가 네 식으로 살려고 부질없는 추가적인 발악을 하느냐는 그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늘 설교제목으로 굳이 정한다면 이거예요. 사도바울은 뺄셈이에요. 덧셈이 아니고 뺄셈입니다. 하루를 지내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빼버렸느냐? 아침에 눈 뜨면서 잠들 때까지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를 도외시하고 “나가, 인간아! 인간도 아닌 것이.” 이렇게 뺀 채로 살게 하셨는가?

자기를 뺄셈으로 간주해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자기가 자기에서 빠졌다는 겁니다. 내가 나에서 빠진 거예요. 만약에 내가 내 속에서 빠지지 않으면 나중에 4월이나 5월, 6월 되어서 신종코로나 조용해지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요. ‘야, 이 무서운 질병에서 내가 무사히 살아남았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았구나.’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이게 빠진 겁니까, 그대로 있는 거예요? 이게 빠진 것이 아니에요. 어떤 애가 기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 아내 폰으로 화면이 나오는데 말도 더듬거리면서 “하나님 아버지, 이 악한 병균에서 저를 구원해서 교회도 가게 해주시고 우리 가족들도 다 가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에요.

지금 그 애는 덧셈을 하고 있는 거예요. 현재 내가 비록 두 살밖에 안되었지만 내가 사는 방식을 이미 익히고 있어요. 그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자처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 때 그 방식은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이미 해답이 나왔습니다. “내안에 나 없다. 내안에 그리스도 있다.” 이게 사도바울의 해결책입니다.

아, 정말 사도바울은 나쁜 사람이에요. 사도바울이 나쁘다는 말은 실제로 우리가 예수님과 그 당시에 있었다면 정말 예수님은 나쁜 사람이에요. 우리가 원하는 것, 요구하는 것 전혀 그것을 아주 개무시합니다.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완전히 원천적으로 개무시해 버리니까 예수님을 버릴 만 하지요. “예수님을 죽일까, 살릴까?” 할 때 그 당시 로마식으로 (엄지가락 밑으로 향하면서) “죽여 버려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요즘 그리스도가 왜 그리 유행하는지 이것도 신종코로나 같아요. 그 그리스도 가짜 같아요. 실제로 성경의 해결책은 ‘너는 죽어버리면 된다.’는 그것이 해결책인데 교회가 이야기하는 그리스도가 다른 예수 같아요. “이렇게 하시면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결국 끝에 “당신이 살고 싶지요? 살려줄게요. 하나님께서 기도하고 예수님께 도움 얻어서 살려줄게요.” 결국은 ‘살려줄게요.’니까 이것은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그 복음이 아닙니다. 진짜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아요.

보통 목사님들이 설교하잖아요. 설교할 때 신학동원하고 성경구절 동원해서 은혜롭게 하는데 또 어떤 목사는 이런 사람도 있어요. 무당만 공략해서 30명 전도한 목사가 있답니다. 무당만 공략해서 스스로 무당제단 박살내고 교회로 개종하게 하는 일을 하는 그런 목사든지, 일반교회 목사든지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거예요. “그래서 네가 살고 싶으냐, 죽고 싶으냐?” 그걸 묻고 싶은 거예요.

아는 신학 다 동원해서 뭐가 어떻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를 해서 본인이 죽겠다는 거야, 살겠다는 거야?” 그 목사한테 물어보세요. “그러니까 내가 좀 살아야지요.” 이러면 그 것은 대국민사기극입니다. 가짜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러지 않았어요. 사도바울은 자기 하는 일로 인하여 자기가 진즉 죽어야 되는데, 교회 핍박했으니까 죽어 마땅하지요, 진즉 죽어 마땅한 인간을 꾸역꾸역 주께서 아직까지 안 죽이고 계속 쓰시는 이유가, 바로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진즉에 결말이고 마감이었고, 주님이 살아 있음을 주님의 자기과정, 주님 자기의 작업,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일하고 있음”을 지금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기쁨이라 하는 것, 다음 시간에 하겠지만, “내가 사느냐, 죽느냐?” 이게 햄릿한테는 문제가 되지만 사도바울한테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사느냐, 죽느냐?” 이 중에서 나는 죽는 것이 기쁘다는 거예요. “나는 막 죽고 싶어.” 그 ‘죽고 싶어’라는 이것이 밑에 깔린 채 편지를 쓰고, 죽는 것이 기쁜 채로 설교를 하고, 생활을 하고 전도를 한 겁니다.

죽는 것이 너무 좋아서 몸무게가 가벼워요. 죽게 된 것이 아주 온 몸이 가벼워요. 그래서 지난 금요일에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죽음이 올 때 장렬하게 대처할 것이 아니고, 죽음은 공손하게 받아들여야 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세상에 이런 고마울 데가, 이게 조기제대거든요, 군대생활 해본 사람은 알지만 졸지에 제대한다는 것은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이제 제대하면 고향으로 돌아가니까. 우리의 하늘에 있는 본향, 시민권이 하늘에 있으니까 하늘로 가는 거예요. 주님 품 안에서 사는 겁니다. 물론 이 벚꽃도 좋고 목련도 좋지만 하늘나라 영광에 비할 바가 못 되지요. 그곳으로 가는 것이 너무 즐거운 거예요. 그래서 목회자가 설교할 때는 “이 좋은 것, 이 좋은 해결책 여러분들도 같이 누리기를 바랍니다.” 하는 그런 가벼움이 없으면 그 설교는 사기치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위로를 받더라도 주님한테 위로를 받아야지 교인들이나 다른 사람한테 위로받을 이유는 없어요. 주님한테 위로받아야 됩니다. “그동안 설교라는 것은 통해서 사기 친다고 수고 많이 했다. 하지만 편히 쉬게 해줄게.” 사도바울이 제시하는 이 해결책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전혀 그건 고려하는 바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남을 의식해서 어떤 행동을 하지 않고 주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욕을 하는 것은 곧 주님을 욕하는 것이니까 그것을 충분히 기쁨으로 감수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사도바울 자신이, 인간이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이 이미 주님께서 사라진 환경이라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이 점이 중요해요.

주님이 이 땅에 왔다가 갔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어떻게 살고 있느냐? 인간이 그동안 어떻게 살면서 그들의 운명을 일구어 왔느냐, 라는 것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학교에서 배워요. 인류문명사를 배웁니다. 그걸 역사라고 하지요. 세계의 역사, 한국사를 배우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초점은 뭐냐? ‘우리나라 만세’에요. “우리나라 대단하다. 우리 민족, 한민족 대단하다.” 그걸 목표로 해서 역사가 진행되거든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이 세상과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늘에서 누가 오지 않았으면 우리는 그럴 뻔 했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전부고, 이 세상만이 이 세상이고 다른 세상은 없다고 여겼던 우리였는데 고맙게도 이 세상외곽, 바깥에 있는 어떤 분이 오셔가지고 이 세상을 다녀가니까 이 세상이 아무것도 가질 필요도 없는 헛방 같은, 허망한 세상인 것을 알려준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감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먼지 나는 세상에서 더 이상 산다는 것이 고역이지요. 살 이유 없지요. 교인 3백 명, 5백 명, 천명 필요 없어요. 그냥 가고 싶어. 수천 명 목회 필요 없고 그냥 가고 싶어. 두 시간 뒤에 가게 된다면 너무 좋아서, 비행기 표 꺼내 보면서 확인할 거예요. ‘이제 한 시간 반밖에 안 남았다.’ 그런 식으로. 그게 해결책입니다. 그게 성도에게만 들려지는 이 세상에 대한 해결책이에요.


고마운 것은, 주께서 ‘우리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그 과정에 대해서 주께서 입을 다문다는 거예요. 일체 거기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문제를 따지는 것은 행위 책에 속한 사람들이에요. 어차피 그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도저히 머리에서 떠오르지를 않으니까요.

주께서 꾸역꾸역 살려줘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것을 미련 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어떻게 하면 내가 나를 계속 살려낼 것인가, 하는 그 문제에 몰입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지옥생활을 죽은 뒤에 가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시작했어요. 그런 사람들만 옹기종기 거리 띄우기도 안하고 딱딱 붙어서 전부 다 지옥생활 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나쁜 사람으로 밀려서 결국 인간들에게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좋은 사람 같으면 살리려고 했겠지요. 안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기에 죽였잖아요. 예수님하신 말씀이 인간들의 허점, 한계점을 자꾸 노출시켰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마태복음 16장의 경우 대표적인 예가 나오는데 24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그 말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역설이에요. 본인이 본인을 부정한다. 또는 파괴시킨다. 본인이 본인을 파괴시키면 그 파괴된 것을 보고 ‘음, 파괴되었네.’라고 결론을 내릴 나는 안 파괴 되었거든요. 부서지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어요?

예수님께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어요. 이게 얼마나 모순되는 겁니까? 오른손 왼손이 다 내 머릿속에 있는 의식인데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느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근본적으로 내 식대로는 이게 실천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거북스러운 말씀을 하느냐 하면, 평소에 인간이 그냥 빈공백이 아니라, 말씀이 쏙쏙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게 한다는 기존의 방식이 이미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 방식과 예수님말씀과 매치가,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을 때 인간들은 자유의지로 자율적으로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따먹을 때는 자기 맘대로 따먹었는데 따먹고 난 뒤에 무르지를 못하네요. 마치 어떤 동화에 나오듯이 옷을 입을 때는 자기 맘대로 옷을 골라 입었는데 옷이 마음에 안 든다고 벗으려고 하니까 이게 벗겨지지가 않는 난감한 상태에 빠진 거예요.

성경에서, 선악과를 따먹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서 인간은 죽음을 따먹은 거예요. 죽음을 먹은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죽음이 얼마나 저주스러운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이 땅에 계속 살게 하면서 자식까지 낳게 만들어버립니다. 너만 고생스럽지 말고 네 자식까지 이 땅에서 고생스럽다, 그 말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따먹지 말라 했잖아.” 따먹은 것을 토할 수도 없어요. 무효가 안돼요. 도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비가역적이에요. 이게 우리의 팔자고 운명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구원받는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이야기에요? 나를 부인해버리면 구원받고자 하는 시도자체가 없어져야 되는데, 그러면 나에게 돌아올 어떤 이익이 없는데 나중에 계산해서 ‘역시 나를 부인하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다.’라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살아남았다면 그 나는 어디서 또 툭 튀어나온 나입니까? 그게 앞뒤가 말이 안 되거든요. 인간은 모순돼요.

인간이 모순된다는 말은, 어떤 해결책이 없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계속 해결책이 없다는 말을 하는데 해결책이 없어요. 이미 죽음은 따먹었지요, 죽음은 나보다 더 셉니다. 내가 죽음을 조절할 입장이 안돼요. 그래서 인간은, 해결책 없는 티를 안내기 위해서 사람들이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매개를 요청합니다.

이제부터 잘 들으셔야 돼요. 매개, 매개체를 요청한다. 안되니까 나대신 해줄 사람을 찾게 돼요. 그분이 누구냐 하면, 사람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 힘으로 구원이 안 되니까 그 매개체를 요청해서, 그 매개체를 통해서 내가 원하는 천국 가는 것, 영생을 얻고자 시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성경적일까요? 제가 묻는 취지를 아시겠지요. 성경적이 아닌 것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부정이 안 되니까, 구원은 받아야 되겠고, 스스로 나를 낮추고 낮춰도 낮출 재주도 없고, 또 낮췄다고 자랑질하는 내가 또 떠오르니까, 이것마저 내가 어떻게 제거시킬 수가 없으니까, 이 한계에 갇힌 나를 해결하기 위해서 매개를 요청하는데 그 매개가 예수 그리스도일거라 여기고, 교회 와서 예수님한테 믿습니다, 라고 말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사도바울의 자기에게 주어진 이 상황과는 도리어 배치가 되고 정반대적인 시도에 불과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어떻게 주님을 원한다, 할 때 머리 좋은 사람은 벌써 눈치 챘을 거예요. 시작점이 잘못되었다는 것. 시작점이 뭐부터 시작했습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 그게 잘못된 시작점이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했던 것이 서양역사에서는 꾸준히 교회를 통해서 “여러분 살려줄게요. 교회 오세요. 예수 믿으세요.” 이렇게 해서 서양역사에서 시작이 되었고 그것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거기에 반대해서 “교회는 가거라. 교회는 아편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모든 진리는 추상이고 관념이 아니라 물질을 어떻게 생산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실질적으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공산주의를 외쳤던 마르크스거든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쓰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매개를 원했던 겁니다. “인간이 잘되기 위해서는 스스로는 안되고 어떤 힘을 모아야 되고 단결을 해야 된다.”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것은 뭐냐? 기본적으로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뭘 해야 된다는 거예요. 뭘 해야 되는가? 사람은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노동을 해서 노동이 모아진 그것이 상품이 되고, 상품의가치가 되고, 그게 상품의 가격으로 매겨진다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마르크스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경제가 제일 중요하다. 왜? 내가 사는 것은 경제활동으로 사는 것이니까. 그래서 시장에 내놓게 되는 것이 가치인데 그 가치가 무슨 가치냐? 사용가치라. 이렇게 어려운 단어를 갖다 붙였어요. 그러면 ‘사용가치’에는 내 노동한 10시간의 가치가 그 상품에 있는데 그 상품을 사가는 사람은 5시간의 가치밖에 안쳐주고 사가는 거예요. 그러면 노동은 10시간을 했는데 가치를 도둑질당한 거지요.

나는 10시간 투자했으니까 백만 원을 받아야 되는데 50만원밖에 못 받았으니 나머지 50만원은 도둑질 당했다. 그렇게 상품을 사가는 가치, 시장에서 형성된 그 가치를 ‘교환가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뭐냐? “여러분이 애쓰고 노동시간만큼 힘들었던 것을 도둑질하는 그 도둑놈을 잡아야 여러분이 행복해집니다.” 그게 바로 공산주의 사회의 계급이론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들어보니까 “공산당은 싫어요.”라는 마음가짐으로 보면 싫은데, 말하는 것을 들어보게 되면 공산당은 누구 편인가, 하면 내 편이에요. 평소에 내가 살고자 하기 때문에 어쨌든 살아남아야 하는데, “여러분은 지금 자본가한테 손해보고 있으니까 뒤엎어버려야 됩니다.”라는 소리가, 공산당은 싫다고 교육을 받기는 했는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게 되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지요.

살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되는데, 빼앗긴 돈도 마저 챙겨서 내가 잘산다면 그것이 내가 본래 이 땅에서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 그대로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 돈을 찾든지, 공산주의 공부를 하든지, 아니면 자본가를 하든지, 아니면 노동자로 데모를 하든지, 어쨌든 간에 ‘살기 위해서’가 출발이 된다면 그것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하나님 보시기에 거기서 거기다, 그 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돈 벌어서 나를 살리든, 예수 믿어서 살리든 내가 사는 것을 출발점으로 한 이상은 전부 다 사이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안 받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방식에 대해서 내가 포기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죽으면 되는데 왜 살고자 하느냐?” 이것은, 그 죽음을 먹을 때가 되면 숨 끊어져 죽는다는 그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 안에 하나님이 노린 것이 있어요. 어떤 괴물이 있어요.

선악과 따먹으라고 꾀었던 그 괴물이 우리의 정신을 장악하니까 자꾸 그 괴물이 우리를 후원하고 격려하는 거예요. ‘살아야 돼. 살아남는 것이 남는 거야. 딴 것 생각하지 마. 예수를 믿든 하나님을 믿든 무조건 네가 살면 돼.’ 이런 식으로 자꾸 뒤에서 부추기는 거예요.

오늘의 사도바울의 해결책은 뭐냐 하면, “살고 자시고 할 필요 없어. 우리는 이미 도착지점에 와 있어. 내게 사는 것은 내가 아니었었었어! 그리스도가 살았어. 계획 잡아서 몇 년 몇월 며칠에 태어나게 했고,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동안 전부 다 그리스도가 널 그렇게 몰아넣었어.” 다른 선택지는 없어요. 그냥 몰아넣은 거예요.

그런데 공산당이고 자본주의고간에 세상에서는 뭐냐?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너 죽으면 안되잖아. 무섭잖아. 죽으면 너는 끝이야. 죽으면 안 돼. 남은 죽어도 너는 살아남아야 돼. 코로나에서 너만은 살아남아야지.’ 자꾸 그런 식으로 악마가 나에게 후원하는 거예요. 자꾸 독려하고 격려하는 거예요.

여러분, 코로나가 나쁜 거예요, 아니면 내가 나쁜 거예요? 내가 나빠요. 나의 적은 나지 코로나가 아닙니다. 나라에게 교회보고 문 닫으라, 하는데 국가가 나쁜 거예요, 아니면 교회가 나쁜 거예요? 교회가 나빠요. 적은 국가가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의 적이에요. 교회가 목적이 뭡니까? 주님? 아니지요. ‘교회는 무조건 살아남아야 돼.’ 역시 거기에도 살아남아야 된다는 원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겁니다.

마치 ‘내가 살아남아야 돼.’ 내가 포기 못할 죽음이, 악마가 집어넣어준, 괴물이 집어넣어준 그것처럼. 여기에 대한 탈출로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찾아와야 ‘아하, 내가 사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정신 차려서 내가 살아온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려줬구나.’ 하는데 그 사실을 우리가 주님에게 요청할 수는 없고, 이미 주님이 찾아왔다면 찾아왔을 때 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그 변화가 바로 성경에 죽 깔려 있어요. 처음부터 너를 살렸다고 하면서 주어진 변화, 그러니까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겠습니다. 예수를 믿든 하나님을 믿든 믿어도 내가 믿겠습니다.’ 하는 거기서 ‘아니야. 너는 네가 믿을 것도 없고 할 것도 없고 내가 너에게 준 그 선물, 선물이 곧 믿음이고, 선물이 곧 소망이고 그 선물이 곧 사랑이야.’라고 일어나는 그 변화가 마태복음 9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거기 중풍병자가 나와 있어요. 중풍병자가 있었는데 친구들이 새치기해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이 계셨던 그 집 지붕을 뚫고 내려오지요. 예수님한테 접근을 못하니까 그렇게라도 왔습니다. 왜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왔느냐? 중풍병자가 잘못된 생각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첫째는, 자기가 중풍병이 걸렸다는 거예요. 이게 잘못이에요. 중풍병 걸렸기 때문에 곧 죽을병이 걸렸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간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는 행동을 합니다. 그게 새치기였어요. 지붕 뚫고 들어가는 겁니다. 살기 위해서 무슨 짓도 다 하는 거예요. 어떤 정당성도 보장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 생각 안하고 혼자 살겠다고 지붕 뚫고 들어온 거예요.

과격한 행동을 한 겁니다. 이 말은, ‘내가 과격하다.’가 아니라 나를 지배하는 죽음은 그만큼 이 땅에서 나를 과격하게 만들었어요. 좋은 사람 없습니다. 인간의 자기죽음 앞에 착한 사람 아무도 없어요. 죽음이라는 괴물이, 악마가 그렇게 착하지 않습니다. 나만 살겠다는 데서 우리는 눈에 뵈는 것이 없습니다.

나만 살겠다는, 내 교회만 살겠다는데 눈에 뵈는 것이 없고, 나만 이단 아니라는 점에서 눈에 뵈는 것이 없고요. 모든 것이 나만 살리는 방식, 이 방식은 내가 익힌 것이 아니고 내속의 괴물이 나에게 준 거예요. 옷은 입었는데 벗을 수가 없어요. 사는데 주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이지요. 차가 오든 말든 좌회전 막 해버리는데요 뭐. 내가 알아서 나 살겠다는데 뭐. 다른 사람은 간섭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우리의 깊숙이 감추어진 이 본심은 감췄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노골화되지요 나중에, 급할 때. 중풍병자가 들어왔습니다. 들어왔을 때 취지가 뭐냐? 남 제치고 내 병 낫게 해달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래. 무슨 병이 걸렸느냐?” 진찰하고 그런 것 없습니다. 주님께서 한마디 딱 하시지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죄가 나에게까지 오는 경로가, “‘나는 병 안 걸려야 되는데 중풍병 걸려서, 내가 예수님 찾아서 병 낫게 해달라고, 예수님이 이용가치가 있다, 하고 여기 왔습니다.’ 하는 그 모든 발걸음자체가, 그게 바로 죄가 너에게, 귀신이 뒤집어 씌듯이 뒤집어 씌었다.”는 겁니다.

너의 어떤 결단이 너를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는 끝까지 너 자신에게 속아서 네가 너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병 나으면 정상이다.’ “아니야. 너는 병들었을 때나 안들을 때나 정상 아니었어. 병 없을 때도 너는 정상 아니었고 병 나아서도 죄인이었고.” 다만 네가 어떤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나를 만났을 때 비로소 증상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나는 병 나았다는 이 생각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고, 나는 누구의 증인이어야 하고, 누구의 증상이어야 하는 것은 바로 죄사함을 받고 난 뒤에 일어난 변화라는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나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증인 만들기 위해서 나를 택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차이가요, 지옥과 천국차이에요.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나왔다.” 그거 고쳐져야 됩니다. “천당 가기 위해서 교회 나왔습니다.” 그거 고쳐져야 돼요. 그건 아직 변화 안 된 거예요. ‘주께서 주의 증인 되게 하기 위해서 나 천당 가야 되겠다고 나오는 죄를 짓게 하셨구나. 내가 예수님 이용해서 죄씻음 받으려는 꼼수를 부리게 하셨구나.’를 깨닫는 순간 그 사람은 소급해서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그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 때 가끔은 죽는 것이 무섭잖아요. 그 때만 죽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이미 잠재적으로 죽음이 우리보다 셌습니다. 죽음이 우리보다 세요. 그래서 행동하게 되면 깜짝 놀라잖아요. 신종코로나에 공포를 느끼고. 그것이 잠재적인 것처럼 다른 잠재가 성도한테 있었던 거예요. 그 죽음보다, 우리가 벌벌 떠는 그 죽음보다 더 세게 우리의 문제를 이미 해결한 그 분이 이미 우리 안에서, 태어나게 하고, 우리 안에서 살아계셨던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평생 동안 죄짓는다고 수고했어. 네 죄를 사해주노라.” 죄가 뭡니까? 내가 아는 방식으로 내가 살겠다는 것이 죄잖아요. 그것은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에요. 창세기 3장에, 마귀가 우리한테 집어넣은 거예요. 집어넣다 보니 너무 친숙해지고 그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던 거예요. 마귀하고 한통속이 된 거예요. 그게 정답인 줄 알고 있어요. 내가 내식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매개라는 이야기를 아까 제가 했는데 그 매개라는 이야기를 왜 언급했느냐? 자본주의, 공산주의 그 이론에서 매개이론이 나와요. 처음에는 자본가들이 서로 경쟁하듯 싸우다가 나중에는 국가가 개입하는데 국가가 개입하는 그것을 매개체라 해요. 국가가 개입할 때 어떻게 개입하느냐? 은행을 통해서 개입하는 겁니다.

은행을 통해서 개입하게 되면 은행이 매개체가 되는 거예요. 지금 돈이 없어도 은행의 신용을 통해서 나중에 갚되 일단 이자만 받을게, 해서 은행이 든든하게 나라의 신용을 보장하게 되면 우리는 계속 살 수 있는 겁니다. 제가 광주에서 사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어떤 분이 말하기를 “그러면 지금 삼성전자 주식 사지 말고 은행주식 사면됩니까?”

국가가 보장하거든요. 그게 매개체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날 위해서 매개체가 되었는데 나중에는 매개체 자체가 지배자가 돼요. 우리의 지배자가 된다고요. 우리는 그것이 익숙해졌습니다. 교회 없이는 천당 못가는 줄 알고, 나라 없이는 우리가 못사는 줄 알고요. 이미 거기에 충분히 익숙해졌어요.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데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나만 살고 그리스도를 이용만 하면 되고, 국가를 이용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를 이용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귀가 바보입니까? 마귀가 인간보다 더 지혜로운데요?

마태복음 9장에서 주께서는 중풍병자를 통해서 새치기를 했든 뭘 했든 묻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주께서 새치기 하게 하신 거예요. 죄사함의 대상이 된다면 어떤 짓을 해도 묻지를 않는 거예요. 그게 구약에는 이미 나옵니다.

구약 민수기 35장 11-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으로 도피성이 되게 하되 세 성읍은 요단 이편에서 주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서 주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여기 도피성이라는 것이 왜 있는지 그걸 아셔야 됩니다. 도피성이라는 것이 왜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과의 차이를 먼저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뜻이 있고 이방민족은 하나님의 뜻이 없어요. 되었지요?

그리고 이방민족은 하나님의 뜻이 없는 가운데서 그들끼리 서로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 자체적으로 투쟁을 하고 전쟁을 벌여요. 자본가와 노동자가 투쟁하듯이 이방민족은 그 안에서 어떻게 내가 살기 위하여 서로 끊임없이 투쟁합니다. 되었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이스라엘 내부에 하나님의 언약과 그리고 외피가 되는 그 인간, 아담에 속한 이스라엘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끊임없이 투쟁이 벌어집니다. 고유한 투쟁, 낯선 투쟁. 되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이방민족은 각자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 없는 가운데서 어떻게 인간은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해서 그들 나름대로의 우상을 섬기면서 힘을 모으기 위해서 싸웠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싸움은 뭐냐?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오해하는 이스라엘 민족과의 고유한 그들 나름대로의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스라엘 내부에 46개의 도피성을 만들어요. 도피성은 뭐냐? 기존의 인간이 내가 아는 살아가는 방식과는 너무나 판이한 방식의 원칙이 도피성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도피성이라는 구역과 그 외의 구역을 이스라엘 내에서 구분하는 거예요.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을 전세계적으로 구분합니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내부에서, 도피성에서 일어나는 일과 도피성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분하는 거예요.

어떻게 구분하는가? 도피성은 누가 상주하느냐 하면 거기에 제사장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또는 제사장이 상주하고 있어요. 상주하고 있으면서 그 제사장이 하는 일이 뭐냐? 사람이 스스로 살기 위한 것, 내가 사는 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연출을 해버립니다.

어떤 사람이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찍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지면서 공중에서 두바퀴 반을 돌면서 다른 사람의 뒤통수를 때렸어요. 약간의 부상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누구의 의도와도 상관없이 도끼가 날아와서 사람을 죽게 하시는 그것, 주께서 연출하신 거예요. 주님의 무대니까 주께서 연출하신 겁니다.

그러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 주께서 그 사람 죽이는 시점이 되어서 죽였구나.’ 이렇게 받아들일까요?”라고 주님이 우리한테 묻습니다. 주님이 묻는다고요. 우리가 다 성도들이니까 내가 발을 들어서 당신을 때려도 ‘아 저 사람은 날 때린 것이 아니고 주께서 저 발을 들어서 내 가슴팍을 때리게 하셨구나.’ 그래서 “당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 당신은 신경 쓰지 마세요. 나를 친다고 수고했어요.” 이렇게 되는 겁니까? “왜 때려요?” 이렇게 되는 겁니까?

아무리 이론상 복음을 알고 뭘 해도 인간이 무엇에 contact, 접촉되는 순간 숨어 있던 나는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은 모른다.’가 팍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게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나를 살리는데 얼마나 공들였습니까? ‘이 공들인 것을, 네가 나의 명치를 쳐서 내가 숨도 못 쉬게 해? 내가 책임을 물을 거야. 내가 죽으면 내 자식이 책임을 물을 거야. 멱살 쥘 거야. 내가 당한만큼 너도 한번 고통 당해봐.’ 분명히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한 희생양이라고 해도 전부 다 빈말이에요. 아무짝도 소용없고, 이미 내 본성은 내가 내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주님께서 살려줬다는 것은 이론으로 와서 그냥 공중에 날아가는 헛방입니다. 진솔하고 진실한 것은, 내가 사는 식, 여기에 변함이 없습니다. 아주 고집스러워요. 아주 인간은 독합니다.

그만큼 죽음이, 악마가, 괴물이 호락호락하지 않고 셉니다.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져 놨다.” 평소에 얼마나 그런 소리 나옵니까? “중국 우한 때문에 우리 조졌다.” 그런 소리 나올 거예요 앞으로. 우한 때문이라고! 물론 그 다음에는 문 선생 때문에 우리나라 조져놨다고 그렇게 되겠지만.

그럴 때 주님께서 도피성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살인사건을 유발시킵니다. 그 원인자가 주님이에요. 살인사건에 대해서 그 가족들이 ‘너 잡히면 죽는다.’ 해서 복수하려고 하니까 도피성으로 도피를 하는 거예요.

그렇게 도피된 사람이 뭘 아느냐 하면, 그동안 그러한 사건에 빠져들지 않는 순간이라도 제사장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제사장이 하는 제사의 효과, 혜택을 입어서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던 겁니다. 도끼사건 없던 시절에도, 어떤 경우도 주께서 다 살려준 거예요.

지난 설교에서 했듯이 내가 나를 살리는 이것은 밥으로 사는 목숨에 불과합니다. 목숨이지 생명은 아니에요. 주님께서는 그 목숨을 뭐로 바꾸느냐? 지금 생명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바꾸려고 한다면 목숨은 내 목숨, 목숨 앞에 ‘내’자가 붙은 ‘내 목숨’이에요. 나의 목숨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이 내 목숨이에요.

그걸 쥐고 있는 한 우리는 생명하고는 관계없습니다. 내 목숨 내가 쥐겠다는 것이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이에요. 이게 중풍병입니다. 못 고칩니다. 내 힘으로 고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뭘 발견하느냐? 제사장의 존재의 이유를 알아요. 제사장은 제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희생제물의 피가 생깁니다. 피에서 나온 것이 생명이에요. 우리는 생명이 아닙니다.

따라서 생명이 이 피 안에 들어오게 하는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본의 아니게 살인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나쁜 짓을 한 것은 내 책임 아닙니다. 마귀가 그렇게 한 거예요. 우리 조상 아담이 그렇게 한 거예요. 내 책임 아니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한테 책임을 안 묻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과의 선악원리를 차단시켜서 네가 못나서 저주받는다고, 네가 착하게 살면 저주 안 받을 것을 네가 못나고 나쁜 짓을 해서 지옥 간다는 식으로 계속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님한테도 마찬가지에요. 네가 예수 믿으면 천국가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거예요. 믿고 안 믿고는 너 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율권이 없다는 사실을 악마가 전력을 다하여 완전히 차단시키는 거예요. 우리한테는 어떤 선택권이 없다는 것. 선택권이 없는데 그런데 악마는 선택권이 있다고 계속해서 우리를 부추겨요. ‘행동하는 것은 너 하기 나름이다.’

요한복음 8장에서 바리새인이 주님께 간음한 여인을 붙들어왔지요. 이것도 도피성의 연출과 똑같은 거예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데려와서 이 사람을 어떻게 할까, 하고 따지려고 왔어요. 그 때 예수님께서 땅 바닥에 글을 써버렸습니다. 글을 쓰니까 바리새인들, 간음한 여인을 고소하는 사람들이 다 가버렸어요.

그 글, 그 글이 뭐냐? 주님이 쓰신 그 글을 가지고 율법이라고 해요. 율법 앞에서 모든 인간은 남을 탓하고 평가할 수 없는, 본인도 같이 당할 수밖에 없는 한통속인 것을 알려주는 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게 율법의 기능, 도피성의 기능이에요.

도끼가 날아와서 이유 없이 맞아 죽었다. “도끼질 하던 그 인간 잡아 죽이자.” “아니야. 똑같아. 도끼날에 맞아죽은 네 아버지나 네 아버지 죽인 그 인간이나 똑같아.” 모든 인간은 똑같다는 겁니다. 사람이 이스라엘에 사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을 조심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이름으로 이스라엘이 된 거예요.

우리 안에 뭐가 있느냐? 그리스도가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율법대로 일하지 우리 시키는 대로 일하는 분 아니에요. 우리가 기도할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의 뜻이 나를 통해서 발현되게 하옵소서.’ 그 기도 외에 다른 기도 할 것 없어요. 주의 뜻,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여, 원래 갖고 있던 율법적 뜻 있잖아요. 완성의 뜻, “‘수고했다. 네 모든 죄를 용서하마.’의 그 사랑이 나를 통해서 발현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발현되게 해줄게. 이제 너 사람 죽일 거야. 네가 사람 죽이고, 폭행하고, 네가 어떤 짓을 해도 그것은 내가 그런 행동을 통해서 사나 죽으나, 살아서 무슨 일을 하나, 죽을 때 무슨 일을 했나, 그걸 문제 삼지 않고, ‘이걸 하나 저걸 하나 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외치는 해결책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속아야 또 속을 것이 남아 있겠습니까? 내가 나를 속였습니다. 마귀한테 속았습니다. 하지만 그 속음조차도 돌이켜 보면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음을, 주님의 노동이었고 주님이 주신 절차였음을 우리가 기쁘게 받아들여서 사나 죽으나 내안에 계신 이 그리스도인 것을 알아서 주와 함께 만나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