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선(빌1;12-14) 2003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3. 16. 09:16
2020-03-15 12:41:53조회 : 53         
   선 200315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선線(빌립보서 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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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20-03-15 13:36 
선(線)

2020년 3월 15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1:12-14

(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사람들은 각자 하는 일을 통해서 본인들의 제대로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복음의 일은 이런 사고방식과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적인 안목이 아니라 보편적인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한 나’를 견지한다면 복음과 상관없는 겁니다. 복음, 즉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님께서 친히 벌리시는 일의 일관성과 관련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요 1:3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겠다는 겁니다. 주님이 주시는 분이라는 받은 자들이 있겠지요. 그 중의 한 분이 사도 바울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이익과 영달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①보편적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내가 옥에 갇히고 매인 몸이 된 것이 복음 진보에 도움된다’는 겁니다.

내게 이익이냐 손해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묶인 몸으로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이 상태가 하나님께서 나를 무시함이 아니라 도리어 중요하게 보시는 증거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위한 분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사도 바울을 매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 받은 사도는 매여 있는 몸이라는 점에서 매우 분주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의 일관성과 관련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선(線)을 넘었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선악을 아는 과실을 먹었습니다. 인간은 이로서 인간 앞에 그 어떤 선(線)도 없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하나님께서 선(線)을 넘어오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에게 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선이 있기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線)은 임의로 넘을 수 없는 라인입니다. 왜냐하면 ②인간들은 죽을 수는 있어나 수치스러운 것은 넘을 수없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는 결코 거지 나사로를 따라가서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본인들에게 지극히 수치스럽고 거부하고 싶은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리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싶어도 인간들이 자진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이유는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수치스러운 양상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죽음보다 더 싫은 것은 수치스러운 겁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선과 악을 아는 과실을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선(善)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하여 자신이 기본적으로 선한 존재임을 반영한다고 인간들은 자부합니다. 선(善)을 아는 바로 그 일로 인해 자신이 선한 존재가 될 가능성을 늘 열려있다고 믿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생각은 다릅니다. 아예 선과 악을 몰라야 되는 그런 세계를 원한 겁니다. 그곳이 바로 생명나무의 세상입니다. 따라서 선과 악의 지식으로 살던 자가 성령 세례를 받고 생명나무의 세계로 옮겨가게 되면 여기서 선(線)이 발생되는 겁니다. 천상과 지옥 사이에 라인이 생겨나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이 라인 너머 가셨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그 라인을 넘고 싶어도 그것은 죽기보다 더 싫은 상황인 자신이 지저분하고 쓸모없고 시시한 존재임을 만천하에 알려지는 그 상황을 겪어야 하기에 자진해서 나설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대로 나타나는 그 현실상에 자신이 맞춰나가는 식으로 자신을 정립하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 배색에 유사한 삶이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안 수치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 수호와 자기 방어 자세로 살아갑니다. 이게 바로 개인적인 안목으로 세상 보기입니다. 자신이 어느 정도나 정당하고 잘났는지를 줄기차게 지키려고 합니다. 비난과 욕을 얻지 않는 사람이고 싶어합니다.

이러니 보편적 안목을 갖출 리가 없습니다. 아예 선(線)이 없이 뭐든지 하고 싶어하면서 여전히 정당하고 옳게 보이는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성경에서는③ 이 선(線)의 기능을 ‘제물’로 보십니다. 창세기 22:9에 보면,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는 이 시대에 있어 하나님에게 드리는 산 제물이 됩니다.(롬 12:1) 제물이 되어 묶이게 되면 이는 곧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이 정지됩니다. 무의미하게 됩니다. 마치 깁스 안에 놓인 발목과 같습니다. 아무리 간지러워서 꼼지락거려봤자 밖에서 긁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정지된 상황을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는데 그것이 바로 ‘비유’입니다.

‘비유’ 안에는 시간과 공간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연기자로서 캐스팅된 겁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천국에 대한 비유’로서 포도원 일꾼 비유‘가 나옵니다. 즉 “천국은 이와 같다”는 겁니다. 포도원이 있고 그 마음에 ’놀고 있는 자‘들이 나옵니다. 주인은 아침 10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 일꾼을 부릅니다.

왜 한꺼번에 부르지 않느냐 하면, 개인적 안목이, 천국이라는 보편적 안목을 어떤 식으로 훼방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모든 일을 마치고 품삯을 주는데 제일 나중에 온 사람부터 줍니다.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어른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제일 나중에 온 사람, 곧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도 하루 치 품삯을 전부 주니 처음 온 사람의 기대를 커겠지요.

하지만 동일하게 품삯이 주어지자 소위 상대적으로 노동이 많이 자들 쪽에서 불만이 터져나왔습니다. 개인적 안목이 발동하는 순간입니다. 일꾼들은 원래부터 놀고 있던 자들입니다. 누구에게 얼마나 약속했으면 그 약속대로 시행한다”라고 주인은 말씀하십니다.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

즉 ‘천국은 이와 같으니’는 동시에 ‘지옥은 이와 같으니’와 같은 말입니다. 이 비유에서 ④주인은 철저하게 품꾼들의 사적 안목을 배제하십니다. 자기 가치를 자기 의미를 자진해서 철회할 자는 없을 겁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천국과 지옥의 선(線)을 넘을 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통해 이미 넘은 자들은 곧 그들이 천국있음을 보이는 라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한 일로 평생을 허비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20-03-16 07:50 

4강-빌 1장 12-14(선線)2003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1장 12-14입니다. 신약성경 317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1:12-14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사도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데 사도가 하는 일이 세상 발전에 도움이 되느냐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자기의 사적인, 개인적 영달에 본인이 하는 일이 과연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을 물을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사도는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기적을 받은 사람이지요. 사도자체에 주어졌던 이 성령, 그것은 사도가 성령을 받기를 원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 중에 성령을 받게 된 겁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에 보면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함께 있을 때 그가 본 계시를 우리에게 알려준 바가 있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연속적 그 다음 행보가 뭐냐 하면, 성령 주시는 일을 예수님께서 주님 오른편에서 하시는 거예요. 주님은 성령을 줬다, 하고 이 땅에 성령 받은 사람은 없다, 하면 이것은 말이 안되지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성령주시는 분으로서 있다면 그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받은 자도 나타나야 되지요.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야 성경의 하나님의 일이 일관성이 있으니까요.

제가 하는 말은, “성령 빼고 이야기합시다.”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성령 빼고 이야기합시다. 성령 받고 안받고, 그 이야기를 제키고 이야기합시다.” 이러면 안되는 거예요. 주님의 하시는 일의 일관성에 의하면 성령 받은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있고, 그 성령 받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자기 일을 하고,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대해서 우리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지요.

그것이 바로 빌립보서의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 곧 사도바울은 어떤 말을 하든지 일을 할 때에 개인적인 말이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는 겁니다. 개인적의견이 아니고 보편적 안목, 개인의 영달이나 이익이라든지 ‘내 인생 조졌다, 혹은 내 인생 성공했다.’ 이런 것은 사도바울에게는 없어요.

사도바울이 우리의 가슴을 툭 치면서 “당신 요즘 뭐하고 다녀?” 이렇게 물을 수 있잖아요. “당신 요새 뭐하고 다니는 거야?” 물으면 사도바울이 “나 보편적 일을 해.” 그러면 우리가 “그게 무슨 말인데?” “당신이 개인적인 일에 몰두하는 식으로 나에게 질문하지 마.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한다는 그러한 것이 전제가 되어 있는데 그 전제로 나에게 윽박지르지 마. 나에게 그 전제를 강요하지 마. 나는 보편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다.” 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쉬는 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 만희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제가 이 만희 편을 들었습니다. 인기 있는 연예인이나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우리보기에는 굉장히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고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되면 좋을 줄 알지만 그 사람들은 사적인 일을 전부 다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바보 같아요.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심지어 내 구두, 옷, 신발, 모자까지 기자들이 따라다니면서 셔터를 누르고 팬들이 “오빠! 오빠!” 하면서 따라다니는 그것이 얼마나 번거롭고 힘든 일입니까?

참,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남한테 유명인사 되는 그것이 굉장히 철없고 사적인 안목에 의해서는 좋아 보이지만 이게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진 겁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그냥 두지를 않아요. 허 경영도 그렇고 이 만희도 그렇고 계속해서 와~, 하고 팬이라고 몰려오는데 무시할 수도 없고, 그래서 자기사적인, 개인적인 일이 없어요.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서 내가 남보다 앞서보겠다는 꼼수를 부렸는데 나중에 보니 사람들의 종이 되어 있어요. 조금 불친절하면 막 욕을 해대고. 그래서 인생이라 하는 것은 묘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환경이 나를 가만두지를 않아요. 밀어붙이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데. 다만 우리가 너무나 사적인 것에 있다 보니 늘 눈물 흘리고, 분노하고, 원망하면서 “너 때문에 내 인생 조졌다.” 맨 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중에 한 예가 혼인입니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혼인생활이 있어요. 그러나 결혼을 하는 순간 혼인생활은 마감되었습니다. 없습니다. 그걸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목표하는 그 지점에 갔더니 내가 목표할 때는 뭔가 있는데 막상 그 지점에 가니까 그곳에 내가 목표하는 것은 없는 거예요.

유명한 서양의 작가가 지은 <큰 바위 얼굴>이라는 작품이 교과서에 나왔던 것이 기억납니다. 마을을 융성하기위해서 마을사람들이 어떤 전설을 믿는데 장차 어떤 귀인이 와서 이 말을 크게 부흥시킨다는 겁니다. 어떤 모습이냐 하는 것은 그 마을 뒤편에 있는 큰 바위가 있어요. 석양의 노을이 지면 그 바위가 사람 얼굴로 변하면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어요. “저 얼굴처럼 생긴 사람이 우리 마을을 방문하게 되면 우리 마을은 크게 부흥한다.”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어릴 때부터 그 소리를 들었던 당사자가 나이 60이 넘어서도 큰 바위 얼굴의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기의 후배들이 노을빛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당신이 바로 메시아다. 우리 마을을 구원할 사람이다.” 그렇게 된 거예요.

호손(Nathanier Hawthorne, 1804-1854)이라는 유명한 단편작가가 왜 그 글을 썼느냐? ⑤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목표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거예요. 인생에는 사적인 어떤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세워도 거기에 일체 어떤 해답을 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사적(私的)을 위한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일은 일방적으로 성령을 주시는 거예요. 성령을 받기 전에는 개인적인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어요. ‘나는 이렇게 하면 행복하겠다. 인기를 얻겠다.’ 그러나 성령이 때려주는 순간 ‘아, 그게 바로 악령의 앞잡이의 생각이구나. 내가 나 혼자 행복하고 편하게 살겠다는 이 자체가 성령받기 전의 인간이 악마의 앞잡이가 되어서 엉뚱한 관점으로 살아왔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바울을 툭 치면서⑥ “아저씨 뭐해요?” 하게 되면 “나는 사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편적인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우리에게 말을 할 겁니다. 그러면 당신이 말하는 보편적인 일은 뭐냐? 내가 매여야 복음이 전파된다는 거예요. 내가 매여야. 이게 굉장히 모순되잖아요. 내가 매이는 그것이 복음전파에 진보가 되고 발전이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12절에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내가 당한 일로 인하여 복음은 죽죽 앞으로 나갔다는 거예요. 복음이 더 전파된다는 겁니다. 아, 이거 설명하려면 굉장히 어렵지요. 지금 이 사도바울의 말의 뜻을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문제는 사람들이 사도바울에게 뭔가 기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기대감이 잘못된 거예요. 사도바울이 있어야 복음이 전파된다는 이 잘못된 전제. 사도바울이 만약에 자가 격리가 된다든지 묶여버리면 복음은 전파되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자체를 지금 사도바울의 하나님은 문제 삼습니다. 왜 문제 삼느냐? 세상의 모든 일은 인간 대 인간으로 소통하고 주고받으면 된다는 그 사고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 대 인간끼리……, 이것은 대구강의에서 이야기했는데요, ‘인간 대 인간을 통해서 문화가 발전하고 세상이 진보한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어떻게 잘 될 것이냐 하는 것은 사람 하나 잘 만나면 된다.’라는 생각이 성령을 받지 않은 사고방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은 사고방식은 뭐냐? 복음전하는 사도바울이 묶여 있다는 것,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복음이 널리 전파된다.”는 사실이에요. 무슨 이런 모순이 다 있습니까?

목사가 교회를 하는데 자기 부인하고 자기 아들하고 교인이 두 명밖에 없어요. 그런데 마태복음 18장에 나오지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 라고 했을 때 두 세 명이 있는 교회와 5천명이 있는 교회가 어느 것이 교회답냐, 라고 세상 사람들은 묻게 되겠지요.

그런데 성령 받은 목사님 가정은 말하기를, ⑦“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고 주님이 함께 있다는 그것이 주의 일관된 일입니다. 나는 그 일관된 일에 말려들었습니다.”라고 그걸 아주 개운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람은 살면서 뭐든지 개운하게 일을 해야 돼요. 속에 가스차서 있으면 안되고 사이다 마시듯이 개운하게, 그걸 아주 당연한 것처럼.

‘당연한 것 아니야? 성경에 나오잖아. 그게 뭐가 어려워?’라고 개운하게 하루하루 인생을 살아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적인 안목이 아니고 보편적인 안목을 가질 때 가능한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교회에 두 명만 줬다는 거예요. 어째서? 그게 뭐? 주께서 두 명밖에 안줬는데. 주와 함께 있으면 교회지요.

참, 이게 정말 모순되지 않습니다. 성경대로 하면 모순되지 않지요. 그러면 우리는 약간의 기대 같은 것이 있지요. 어떻게 하게 되면 우리가 사적인 안목에서 벗어나서 보편적인 안목으로 넘어갈 수 있느냐? 그것은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꽉 차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네가 묶여버려라. 복음에 묶여라.” 복음에 꽁꽁~, 복음에 꽁꽁~, 하는 노래 혹시 여러분, 기억납니까? 제가 개사한 겁니다. 제가 가사 바꿨는데요.⑧ 복음에 묶인 그것을 가지고 제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로마서 12장 1절에 나오지요. 너희는 이 악한 세대에 산 제물이 되어라. 제물로 사용하는 거예요.

로마서 12장 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제물이라는 것은 로마서 15장 16절에 또 나옵니다. 하나님의 복음으로 내가 이방인들을 제물로 드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사도바울 본인도 빌립보서에 보면 나오는데 2장 17절에, 나는 제물의 마지막 포도주 관제가 된다고 했어요.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라고 했어요. 자기 ⑨인생이라 하는 것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내가 얼마나 행복하냐, 잘 먹고 잘사느냐를 보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 안목에 접어들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나실인처럼 제물이 되게 하시는 그 자체를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나실인이라는 것은 바친다는 뜻인데 민수기 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 가지를 조심해야 되지요. 머리카락 조심해야 되고, 포도주 조심해야 되고, 자기 몸을 구별해서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 시체를 가까이 말아야 되는 이 세 가지를 조심해야 되거든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삼손인데 삼손을 통해서 매였다는 의미, 산채로 제물 되었다는 의미를 삼손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어요.

삼손은 그냥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적인, 개인적인, 즉 하나님의 성신을 받지 못한 그 집단, 민족에 의해서 둘러 싸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삼손을 체포해놓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 말이 맞는가를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사람은 두 눈을 빼게 되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그게 성경에도 나오지만 다른 고대역사에도 나와요.

포로 된 자 중에서 아직도 고집이 안 꺾이는 사람에게는 포로를 잡은 장수가 제일먼저 뭐부터 하는가? 두 눈알을 빼버려요. 이것은 마치 차 앞면을 완전히 가리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여기에 상당히 깊은 철학적 논리를 집어넣으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어떻게 구성하느냐? 눈에 뭐가 들어오는 그것으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겁니다. 눈에 들어오는 그것으로. 예를 들어서 “아무도 없다.”라고 이야기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의 존재가 인식이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아무도 없다’라는 인식을 하는 그것이 바로 나기 때문에. 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곧 내가 되는 겁니다.

어릴 때 제가 대구 비산동에서 살았는데 비산동에 고개가 많았어요. 지금은 반듯한 포장도로가 났지만. 아침에 창문을 열게 되면 애들의 비뚤비뚤한 이빨처럼 집들이 포개져 있어요. 사람들이 그 집들에 옹기종기 세도 들어 살고, 대구 근교의 촌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서문시장 근처에서 복닥복닥 살았다고요. 그러면 나는 뭐냐 하면, 내 눈에 들어오는 그 환경에 의해서 내가 거기서 규정이 돼요. 정리가 된다고요.

내가 눈으로 보는 그것으로 인하여 나는 어느 정도냐, 내 위치가 정해집니다. 아저씨들이 혼자 있을 때는 점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예비군복 입혀서 자기들끼리 모이게 되면 눈에 뭐가 들어오느냐? 똑같이 군복 입은 자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본인의 행동이 갑자기 돌변해서 달라지게 돼요. 그 환경에 맞춰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리고 일주일전만 해도 조폭, 깡패, 양아치 하다가도 만약에 대구의 큰 교회, 우리교회 말고 아주 큰 교회, 예를 들면 서현교회 같은 큰 교회에서 웅장한 성가대, 여자 분이 지휘하는 그 성가대 앞에 수천 명이 모인 그 자리에 앉아버리면 찬송가 잘 따라해요. 어제까지 조폭노릇 했으면서도 옆 사람 봐가면서, 위에서 아래로 해병대박수로 칠까, 옆으로 칠까, 다 따라한다고요. 절로 신자 다 되어버렸어요.

심리적으로 그 안에 있음으로서 눈에 들어오는 그것으로 내가 일치되려고 애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아의식이라 하는 것, 눈에 들어오는 그것이 인간을 만들기 때문에 인간은 사적인 안목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여자는 한복, 남자는 신사복을 입고 그것도 맨땅에 앉아서 강대상에는 그야말로 메주를 눌러놓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어떤 영감쟁이, 이 만희죠, 그 이 만희가 앞에 있고, 그 앞에서 똑같이 하면서, 그 사람들이 전부 다 세상에서 나름 교육깨나 받은 사람들인데 왜 거기서 미친 짓 하고 있습니까?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집단최면에 빠진 거지요.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신천지에 적합한 새로운 자아상을 그 현장에서 자기가 조작해내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교회에서 열 번도 더 이야기했어요. 아멘, 하지 말라고요. 왜 아멘을 하지 말라고 하느냐 하면, 아멘을 하게 되면 목사가 미쳐버려요. 자기가 설교 잘하고 있는 줄로 착각을 한다니까요. 한 사람은 해도 괜찮아요. 한 사람정도는 해도 괜찮은데 다른 사람은 할 필요 없어요.

목사가 신바람을 내요. 뭔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대단한 사람처럼. 조작된 성령이지요. 그게 악령인데. 사적인 안목에 머물고자 환경을 몰아세워 갑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 다니는 것이 죄지요. 어떤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는 이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성령 받게 되면 교회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왜? 보편적 사고, 보편적 안목을 갖게 됩니다.

그 보편적 안목에서 사도바울은, 나는 매였다는 거예요. 매였다는 그 대목, 창세기 22장 9절에 보면 누구의 신체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매여 있습니다. 22장 9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그 아들을 결박했습니다. 결박해야 주의 일이 돼요. 매여야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사도바울이 매여야 복음은 주님이 주인이지 사도바울이 주님이 아님이 복음이 새로운 색깔, 복음이 더 깊은 본질을 가지고 전파되게 되는 거예요. ‘어? 사도바울이 매였네. 그런데 복음은 더 전파되네. 도대체 복음의 주인공이 누구야? 사도바울이야 아니면 다른 분이야?’

다른 분이지요. 성령이지요. 전도 성령이 하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도 어떤 집사님이 이야기하는데, 가만히 있는데 자꾸 누가와요. 전도할 생각도 없는데 자꾸 누가 와서 묻고 꾀이려고 다가오고요. 애쓰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꾸준히 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도 안 묶이고 춤추듯이 같이 하면 더 유리하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겠지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묶일 이유가 있어요. 인간의 사적인 견해, 다시 말해서 ‘내가 전도를 했다. 저 사람 구원받았다. 내가 전도해서 저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이 사적인 안목은 우리 힘으로 빼낼 수가 없어요.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이런 속성이 있기 때문에 나를 부인한다, 했지만 나를 부인하는 그 나를 내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묶어 놓는다는 말은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가 스스로 산제물이 되었다는 의미를 점점 더 사도바울 선에서 보편적으로, 사도바울 다음에는 성도겠지요, 성령 받은 성도를 통해서 ‘도대체 하나님의 일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진척이 되는 거야?’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환경을 하나님이 조성해 가는 겁니다.

그 환경조성에서 창세기에 되었던 내용까지 나오는데요. 제가 창세기 3장을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을 때 인간이 따먹었지요. 이것은 이런 이야기가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그것을 하나님의 복음전파의 새로운 환경으로 도입하게 됩니다. 그걸 간단히 말해서 선을 넘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먼저 선을 넘었기 때문에 하나님 쪽에서 선을 넘고 인간에게 오신 거예요. 그러면 중요한 것은 그 라인, 선이 있잖아요. 그 선이 있어야 선을 넘었다, 안 넘었다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매이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도바울 본인을 그 시대의 라인, 선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선을 넘어야 돼요. 선악과가 작용하는 이 세상에서 생명나무쪽으로, 선악이 적용되지 않는, 율법이 적용되지 않는 쪽으로 선을 넘어서야 돼요. 성령께서 하신 일은 선악가지고 인간을 지배했던 악령의 세계에서 악마의 세계, 사탄의 세계에서 사탄이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영생이 있는 곳으로 선을 넘어선 것으로 구원이라 이 말이지요.

그러면 말로만 하지 말고 진짜 선을 넘었는지 안 넘었는지 그 라인, 선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선 역할을 하는 것이 누구냐? 사도바울이라 그 말이지요, 사도바울. 군에 가본 남자들은 다 알아요. 유격훈련 받게 되면 네모나게 구덩이를 팝니다. 약 가로 10미터, 세로 10미터의 구덩이를 파놓았어요. 유격훈련장안에.

거기에 군인들 청군과 백군으로 나눠서 한 스무 명 집어넣습니다. 게임을 하는데 집단씨름이에요. 파놓은 선 밖으로 상대방을 빠른 시간 내에 한명도 남기지 않고 다 들어내는 겁니다. 다 들어내면 이쪽편이 이기게 되어 있어요. 방위 나온 사람들은 그런 것 모를 거예요. 유격훈련 받아봐야 알 수가 있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겼다, 졌다. 구원 받았구나, 안 받았구나.’ 하는 그것을 확인하려면 혼자서 우기지 말고, “나는 구원받았어.”라고 침 튀기면서 우기지 마세요. 신종코로나 때문에 침 튀기면 안돼요. 선이 있어야 돼요. 본인이 선의 기능을 해야 돼요. 본인이 넘었던 선자체로 활동하고 움직이는 그것이 보편적 사고방식입니다. 선을 넘기 전까지 인간은 아예 선이 없어요. 왜냐하면 선악과까지 따먹었기 때문에 본인이 신이에요.

누가 나를 건드리면 화내게 되어 있어요. 본인이 신이기 때문에. 선이 없어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겁니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내가 복음 전하는 사도지만 내가 매여 있어도 갇혀 있어도, 지금 옥에 갇혀 있으면서 보내는 편지니까, 옥에 갇혀 있더라도 복음은 매이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은 이미 내가 주체가 아니고 내가 하나님 일의 주인공이 아니고 주인공이 따로 있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본인은 선이니까, 나는 그쪽 세계에 속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온 거라는 말이지요. 내가 뭘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내게 일어나는 모든 변화와 일들은, 이것은 주님의 일관된, 계속 하고자 하는 일이 나에게 그냥 덮쳐진 것이지요. 내 인생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지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뜻입니다.


봉 준호 감독의 <기생충> 영화의 예고편 보게 되면 왜 그 장면이 예고편에 나왔는지 그 영화를 다 보고 나온 사람들도 잘 이유를 모를 거예요. 하도 영화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에. 거실 통유리 두 장을 붙여놓은 거기에 세로선이 발생되는 거예요. 선이 발생되고 그 다음에 그 통유리 창 너머로 정원의 모습이 내다보입니다.

그 통유리 창으로 그 집 정원의 풍경이 내다보이는데 그 세로로 나 있는 선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그 집 하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원피스를 입고 서 있고, 선의 오른쪽에는 동그란 테이블이 놓여 있고 거기에 그 집 안주인이 엎드려서 졸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럴 때 “사모님!” 하고 부르는데 엎드려 졸고 있어서 못 들어요. 그러니까 그 집 가정부가 여주인의 머리 위에서 손뼉을 탁 치는 장면이에요. 손뼉을 탁 치는 그 순간 선(통유리 창에 그어진 그 선)을 넘어버려요. 그게 바로 기생충영화의 주제가 시작되는 겁니다.

넘지 말아야 될 선을 넘어버린 거예요. 혼합이 되었다는 것. 인간이 먼저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왜냐? 선(line)자체를 없애기 위해서. 네가 신과 같이 되리라, 했습니다. 선이 없어요. 하나님이요? 인간이 조작한 거예요. 조상숭배가 신이 된 거예요. 역사적으로 보는 사람들로서는, 사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한테는 뭐든지 내가 얻기 위해서 세상은 전부다 의미와 배치를 하기 마련이거든요. ‘이런 배치를 하면 나에게 이익일까, 아니면 이렇게 조정해서 현실을 보게 되면 나에게 행복할까?’

항상 자기를 주인공으로 했기 때문에 넘지 못할 선은 없어요. 그런데 그런 인간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뭐냐? 죽음이라는 말이지요. 왜? 죽음만큼은 못 넘었으니까. 그런데 성경은 한수 더 뜹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그러한 악마적 생각을 넘어서요.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죽는 것이 무서우냐, 매이는 것이 무서우냐를 물어요.

죽는 것보다 매이는 것이 더 무서워요. 왜? 죽을 때는 뭔가 장렬하다는 짓만 하면 되거든요. 장렬하다는 것, ‘사형당해도 나는 장렬하다.’ 내일 사형 당하는데 앞에 있는 목사님이 “당신이 죽고 나면 당신의 뼈는 당신의 고향에 묻힐 겁니다.” 사형수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날 밤에 꿈을 꾸는데 그 꿈을 꾼 내용의 노래가 라는 톰 존스의 노래에요.

목사님이 “당신의 뼈는 당신 어릴 적 그 고향에 묻힐 것이다.”라고 한 것. 죽으면서도 자기 정당함과 나는 행복하기를 원하는 소망을 죽는 순간까지 포기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사적중심, 내 중심이니까요. 그러니까 맨 날 깨어라, 하고 여호와의 증인이 내미는 책자 그림을 보세요. 골프장이에요, 골프장. 저 푸른 초원위에 분수가 있고 그것 가지고 여호와의 증인은 사람들을 꾀이는 겁니다.

“죽고 나면 천국은 이렇게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게 뭐예요? “당신에게 개인적인 이런 소망이 있지?” 있지요. 왜냐하면 악령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나밖에 모르니까. 나의 행복이 전부니까. 내가 편하게 사는 그것이 전부잖아요. 보편적 안목이라는 것은 성령 받지 않고서는 없어요. ‘내가 보편적 안목에 의해서 나는 마땅히 제물이 되어야 됩니다.’ 하는 그런 생각은 없어요.

하나님이라는 것은 나를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겉으로는 안하지만 속의 내 본심을 감출수가 없어요. ‘하나님, 예수님, 다 나를 위해서 있다. 나는 그것 때문에 교회 나왔다.’ 이걸 어떻게 숨깁니까? 무슨 수로 숨깁니까? 숨길 수가 없지요. ‘하나님, 예수 믿고, 교회 다니고 내 인생 좀 편했으면 좋겠다.’ 그걸 어떻게 숨깁니까? 기도해보면 다 아는데. 기도하면 다 나오는 거잖아요.

‘주여, 복음을 위해서 매이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 안 나옵니다. 오늘 본문 같은 기도 안 나오지요. 성경에 이런 것이 나오니까 이렇게 하지요. ‘하나님, 내가 복음을 위해서 매이겠습니다. 그 대가로 자식만큼은 편하게 살게 하옵소서.’ 반드시 실컷 희생하는 것 같은데 보면 딴 보상을 원하고 있는 이 본성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돼요? 이걸 지울 수도 없고.

하나님께 매인다는 것은 그냥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데 매인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겁니다. 왜 수치스러우냐? 매인다는 것은 타인에 의해서 다뤄지기 때문에 이것은 죽는 것보다 더 싫은 상황입니다. 내가 자살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자유입니까? 내가 번개탄 피우고 죽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너 번개탄 피우고 자살할래, 안 그러면 검찰청에 묶여 갈래?” “나 차라리 그냥 죽을래. 죽을 때 좀 장하게 죽었다는 소리 듣고 싶어.” 이게 바로 인간 속에 있는,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공통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세당하는 것, 남한테 놀림당하는 것, 이것은 죽기보다 더 싫은 거예요.

부모자식 간에, 부부간에 전부 다 이러한 의미를 담고, 전제를 깔고 대화합니다. ‘네가 나가서 죽더라도 네 아버지가 나란 소리는 하지 말아라.’ 항상 자기 수치스러운 것부터 먼저 계산하지요. 연세 많은 사람에게 늙어죽는 것이 고민이 아니라 비참하게 죽는 것이 고민이에요. 내가 우세스럽고 정신이상자로 죽는 그것이 더 부끄럽지요.

예수님께서 혼자 산속에서 동맥 끊어 죽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발가벗고 공개적으로, 모든 모독과 수치는 혼자 다 당했어요. 심지어 피조물한테 뺨까지 얻어맞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사돈끼리 상견례 하면서 팬티 입고 나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집안에서 뭘 입든 벗든 관계가 없어요. 그러나 제발 상견례만큼은 온 집안, 가문을 다 짊어지고 가는 거예요.

‘남은 몰라도 나는 절대로 수치 당해서는 안 된다. 악플 달리면 나는 우울증 걸려 죽을 거야.’ 그래서 악플 달렸다고 죽은 연예인들 많잖아요. 안보면 되는데 그걸 왜 보나 말이지요. 제가 요즘을 사는 삶에 대해서 팁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편하게 살 수 있는가? tv 안보면 돼요. tv 안봐도 꽃은 피고요. 새는 짹짹거리고요. 아무 일 없어요. 이태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요. 독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요. 서울에서 신천지니 구천지니 몰라요.

tv만 안보면 돼요. 임 영웅이가 1등을 하든, 영탁이가 2등을 하든……, 그거는 봐야 되겠다마는. 미스터트롯 그것은 보지만 딴 것은 아무것도 볼 필요 없어요. 쓸데없이 보고 화내고 벌벌 떨고, 공포심에 잠기고. ‘죽으면 안되는데…….’ 하면서. 인간은 죽는 것보다 수치스러운 것이 더 힘든 거예요. 인간은 참을 수가 없어요. 참을 수 없는 것이 라인을 그어 버립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모든 라인을 다 넘어가도 자기가 스스로 수치스러운 라인만큼은 못 넘어요. 못 넘는 그 너머의 세계가 뭐냐? 생명의 세계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다른 것은 참아도 내가 악하고 내가 정당하지 않다는 그 소리만큼은 못 견딥니다. 악마의 약점이 곧 인간의 약점입니다. 부끄러운 것은 참을 수가 없어요. 잘나고 싶으니까. 매일같이 잘나고 싶으니까. 남보다 잘나고 남 이기고 싶어요. 지기 싫어요. 늘 비교해서.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되 십자가를 뺀 예수를 믿어요. 부활된 예수, 영광스러운 예수를 믿지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믿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합세할 생각도 없어요. “딴 것은 다 참겠습니다, 목사님. 하지만 내가 비참하게 되고 내가 웃음거리 되는 이것은 저는 못참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진정 내 모습이라고 하신다면 성도라고 규정하고 싶어요. 바로 지난 수요일에 거지나사로 이야기할 때 이렇게 했잖아요. 부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거지나사로를 붙잡을 수가 없다고. 왜? 수치스러워도 너무 수치스럽기 때문에. 부자청년이 예수에게 와서 영생 얻으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 그 부자를 수치스럽게 만들었어요.

“네가 가진 것 다 버려라.” 그러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부자 아니거든요. 부자 아닌 존재가 된 채 나를 따를 수 있느냐를 묻습니다. 부자가 “미쳤어요? 내가 따라다니게?” 바로 이처럼 그 선은 내가 한 게 아닙니다. 성령 받아서 ‘내가 마땅히 수치스러워야 돼.’라고 규정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나 자체가 라인이 되는 겁니다. 나 자체가 어떻게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 쓰이는 라인이 되는 겁니다.

“나처럼 부끄러운 존재가 없음을 내가 압니다.”라고 고백하는 라인, 이걸 두자로 제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제물이라 해가지고, 파키스탄 가겠습니다, 손들고 아프가니스탄 가겠습니다, 이슬람권에 가서 내가 순교자, 희생자 되겠습니다, 해서 가가지고 괜히 2십만 불 물어주고, 좀 그런 짓 하지 마시고요. 선교, 전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전도자가 아니라 있는 자리에서 나라는 인간이 죽기보다 더 심한 것은 내가 초라하게 되는 것, 시시하게 되는 존재, 정말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의미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그게 바로 복음전파입니다.

왜? 더 이상 자기정당성이 자기말 속에 섞이지 않기 때문에. 나 변명하고, 나 잘났다가 없어요. 마귀가 하는 일은, 항상 눈만 뜨면 나를 보호하고 나를 사수하는데 진력을 다하고 몰두하는 그것이 악마가 우리한테 시키는 일입니다. 심지어 문제는 교회에서 들었던 지식, 모든 복음이 나를 지키고 나를 사수하는데 소모되고 있다는 거예요. 활용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주께 쓰이는 그 선이 아니거든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악을 아는 세계에는 선(line)이 없어요. 본인이 신이에요. 악마가 신이니까. 그런데 선악을 안다는 것은 뭐냐? 나는 선악 중에서 선(善)을 아니까 정당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선악을 아는데서 생명나무로 건너갈 수가 없는 이유는 선악자체가 생명나무에서 쫓겨난 원인이 되고 요건이 된다는 것을 본인이 수용할 수가 없거든요.

‘내가 선과 악을 안다는 자체가 이것은 생명나무열매를 먹을 자격이 못돼.’라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내가 언뜻 수용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교회 와서 자기 잘난 체를 하는 겁니다. 교회가 그걸 또 부추기고. 누가누가 헌금 많이 하나, 누가누가 기도 오래 하나, 누가누가 전도 많이 하나, 해서 전도 상주고.

나는 묶인다는 말은, 시간과 공간이 정지된다는 거예요. 내가 설치고 꼼지락 거려도 의미 없다는 거예요. 마치 깁스를 해놓았는데, 근지러워 죽겠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몸부림쳐도 두꺼운 깁스 안에 들어 있어요. 그게 바로 묶여 있는 거예요. 인간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쳐봐야 자기잘난 것 밖에 안 되니까 주께서 그걸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문제는 깁스 그 자체가 바로 복음전파가 된다는 거예요. 나는 아무 일도 못하도록 묶여도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마치 사우디아라비아에 취업했다면 오랜 만에 전화 걸어서 “여보, 당신 몸도 아프고 더운데 어떻게 지내?” “나 괜찮아.” 이렇게 하잖아요. 나 괜찮아, 하고 전화하듯이 성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괜찮아, 하고 개운하게 이야기해야 돼요.

왜? 더 이상 자기를 사수하거나 지킬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좀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인간이 매였다, 하는 것은 인간이 죽을 때 “나는 죽는다.”가 아니라 “나는 매인 채 죽는다.”고 자식들에게 유언하세요. 나는 죽는다, 하면 그것은 사적인 안목이 되고 나는 복음에 매인 채 이제 눈을 감는다, 라고 자식한테 이야기하세요.

집 건물은 큰 아들 주고, 둘째는 …… 주고, 이야기를 하되 먼저 “내가 죽는 것은 내가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내 죽기 전에 벌써부터 라인으로 살아생전에 이미 라인이 되었어.” 이미 선(line)을 넘었다 이 말이지요. 내가 뭘 함과 상관없이 주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제물로 사용했다는 것, 그것을 유언으로 남겨야 돼요.

이렇게 되면 이것은 뭐냐? “나는 묶여야 되고, 묶임에도 불구하고 구원하는 모든 일은 보이지 않는 성령께서 다 하셨다.” 주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묶인다는 것은 정지화면, 또는 모든 것이 완료되었다, 스톱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끝!

그 스톱된 내용을 마태복음은 뭐라고 하느냐? 모든 것이 완료되고 정지된 것을 비유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비유 안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습니다. 제가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 비유 안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고, 하나님께서 라인으로 사용할 때 “너는 아무것도 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가게 되었는가?” 그 내용은 우리를 깁스로 스톱시켜 놓고 그 안에 비유가 우리에게 와요.

그 비유 중에서 제가 오늘 인용할 대목은 마태복음 20장의 비유입니다. 제 마음에 드는데 제 맘에 들 필요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천국은 이와 같으니.”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해서 여호와증인처럼 골프장 그려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은 이와 같으니,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지옥은 이와 같으니, 와 같은 말입니다.

이걸 설명하기 전에 지옥이라는 것은 뭐냐? 자기방어, 자기사수를 늘 강요받고 쫓김 당하는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자기사수, 자기정당성, 나는 옳았다, 에 늘 쫓기는 것, 사적인 안목에 머무는 것. 그러나 보편적 안목이 되어버리면 선악을 아는 나는 죽었기 때문에 나를 죽게 한 그 보편적 안목, 주님이 선을 넘어왔잖아요, 주님이 선을 넘어와서 우리를 죽여 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갈 수 없는 세계, 생명나무에 계시는 분이 일을 이렇게이렇게 진행했다 하는 것, 십자가지시고 성령 주셨다, 하는 그 일을 우리에게 담아내는 겁니다.

그 원칙이 마태복음 20장에 나옵니다. 포도원이 있는데 사람들이 다 놀고 있어요. 포도원 주인이 놀고 있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아침 10시에 한 사람 불러냈어요. 참 이상하지요. 여러 명 한꺼번에 부르면 되는데 아침 10시에 한 사람 불러내고, 그 다음 사람은 12시에 불러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오후 3시에 불러내고 네 번째 사람은 오후 5시에 불러냅니다.

제가 다시 언급합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해서 천국은 이와 같음을 표현하는 출연진들, 영화배우들을 초청하는 거예요. 출연진을 캐스팅 하는 거예요. 아침 10시에 캐스팅, 12시에 캐스팅, 오후 3시에 캐스팅, 오후 5시에 캐스팅 합니다. 여기서 사적인 안목은 날라 가버려요. 누가 구원받느냐의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아침 10시에 구원받았는가, 오후 5시에 구원받았는가, 그런 것은 없어요. 사적인 것은 없고 보편적인 안목만 있어요. 주님은 이렇게 일을 하신다는 그 말이에요. 하는데 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십니다. 다 놀고 있는 사람이에요. 쓸모없는 인간입니다. 뽑아줘도 그만이고 안 뽑아줘도 그만이고. 문제는 뽑아줬다는 것이 문제에요.

뽑아줬을 때 거기서 천국은 뭐냐? 천국은 이렇다, 라고 주님께서 하지 않고 천국은 이와 같은 것과 다른 세계니라, 라고 표현합니다. “먼저 된 자가 먼저 되는 세계는 결코 천국이 아니니라. 그것은 바로 지옥이니라.” 그것은 성령받기 전의 악령의 지배를 받는 세계, 1등한 자가 천당 가는 그런 세계,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왜 1등하고 싶을까요? 그것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자기의 정당성, 가치와 의미를 자기가 포기 못하는 겁니다. 나 잘난 맛에 살아가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고. ‘우리교회가 좋냐, 너희 교회가 좋냐? 우리교회가 구원받는 교회인가?’ 그런 문제는, 그런 사적인 안목은 용납이 안돼요.

주님께서 품삯을 주는데 제일 뒤에 오는 사람 먼저 줍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부터 먼저 줘요. 나중 된 사람에게 품삯을 줍니다. 나중 된 사람에게 품삯을 얼마를 주느냐 하면, 이것은 일방적으로 주인이 정했던 품삯을 줘요.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2절에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약속한대로 한 데나리온을 오후 5시에 와서 달랑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줘버려요. 나머지 오후 3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전 10시에 온 사람은 신이 났지요. 계산하기 바쁩니다. ‘자 한 시간 일했는데 한 데나리온이라면 나는 도대체 몇 데나리온인가? 오늘 횡재했구나.’

그런데 제일 나중 온 사람부터 동일한 품삯을 줘버립니다. 오후 3시에 온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 12시에 온 사람도 한 데나리온, 오전 10시에 온 사람도 한 데나리온.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 천국은 개인적인 역량이나 이런 것을 일체 보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노동력에 따라서 상급을 정하는 그런 천국은 없어요. 그것은 인간들이 지어낸 겁니다. 교회가 지어낸 거예요.

천국에는 역량에 따라 주어지는 그런 상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약속한대로 줘요. 풀장이 있는데 풀장에 문이 네 군데 있다는 말이지요. 동쪽에서 오는 문이 있고, 서쪽에서 오는 문이 있고, 남쪽에서 오는 문이 있을 뿐 들어가면 동일한 풀장에서 수영하기 마련이에요.

천국을 어떻게 왔느냐? 천국에 고생고생하면서 왔느냐? 아니면 편하게 느긋하게 왔느냐? 그것은 이에요. 왜? 둘 다 라인이니까요. 어떤 라인이든, 놀면서 왔든 힘들게 왔든 내가 힘들었다는 공로로 온 것도 아니고, 놀았다는 태만 때문에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태만이냐 힘들었느냐와 상관없이 이것은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천국갈 수 없습니다.’를 보여주는 라인이라는 말이지요.

라인이라는 것은 건널 수 없는 라인이 있었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신의 세계마저 손아귀에 쥐었는데 예수님이오고 보니까 아하, 신이라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창고가 되어서 갇혀 있는 꼴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창고 너머의 세계는 하나의 라인이 쳐져 있는 거예요. 복음의 세계가 있는 거예요. 복음의 세계 이쪽은 뭐냐? 나의 세계에요. 사적인 안목입니다. 내가 구원받느냐의 세계에요. 내가 구원받는데 어떻게 할 거냐를 계산하는 세계입니다.

나는 수치스럽지 않고 싶어요. 나는 지옥 가는 수치스러움을 안당하고 싶어요. 어쨌든 천국 가고 싶어요. 왜? 나니까. 내가 수치스러우면 안 되니까. 그게 바로 악령의 세계에요. 이게 지옥의 세계라고요. 누가 거기서, 이러한 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나지요. 성령의 일관된 오심으로서, 성령의 오심으로서 “너는 쓰일 뿐 너의 사적인 계산 하지 마라.”

주께서는 성령을 주신다니까요. 주시기 때문에 오른편에 가 계시는 거예요. 세례요한 이야기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성령을 주시는 분이라고. 그러면 받는 사람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받는 사람은 사도바울이에요. ‘나는 옥에 매였다. 그러나 복음은 복음대로 전해진다.’ 이게 바로 선 넘은 사람들의 안목이에요. 보편적 안목이에요.

내가 하나 안하나 관계없이 복음은 복음대로 잘 진행되고 있어요. 굳이 내가 나설 이유가 없다는 말이지요. 주님은 사도바울을 갇히게 함으로서 사도바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을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사용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한다는 그 자체가 네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거예요. 모순되지요. 교회에서 설쳐대야 중요한 인물인데 그게 아니고 아무것도 안해도 중요한 인물이라는 겁니다.

우리교회 다 해당돼요. 속으로 지금 아멘, 아멘, 하고 있어요. 포도원주인이 그렇게 품삯을 주니까 드디어 잠잠했던 지옥의 침 튀기기가 난리도 아니었어요. 주인 멱살 쥐고 막 흔들었겠지요. “이런 불공평함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몇 시간 일했는데?” 주님이 “너 놀았잖아. 너 놀고 있는 자였잖아. 너 본래의 자리, 너의 처음자리를 왜 잊어버렸어? 너 놀고 있는 자였어. 내가 안 불렀으면 지금도 놀고 있는 자야. 내가 일시키기 위해서 불렀다. 그런데 왜 네가 나대?” 그것은 지옥이지요. 천국이 아니지요.

주님께서 선을 넘어와서 이 땅에서 천국은 뭐냐, 왜 이곳이 지옥이냐, 그걸 설명하면서 천국을 대비해서 설명하는 겁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것이 바로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얼레리꼴레리’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수치를 덮어주는 거예요. 따라서 수치스러운 것은 주께서 성령 주셔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덮어줘야 되지 수치스러운 것을 내가 비겁하게 변명하거나, “착한 일 많이 했잖아. 주의 일도 많이 했잖아.” 이런 시시한 변명들을 할 필요 없어요.

십자가를 모독하는 겁니다. 악령의 일은 뭐냐? 오직 십자가를 모독하는 거예요. 그 공로를 모독하는 것이 악마의 노림수입니다. 거기에 말려들 필요 없지요. 그걸 어떻게 하느냐? 성령을 받아서, 사적인 안목에서 벗어나서, 내가 보편적으로 주의 일에 말려들고 쓰이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하나의 제물로서 마땅히 묶여야 되고 제물로서 사용되어지는 가운데서 왜 주께서 친히 일에 나서야 하는가를, 우리의 못나고 부족함을 통해서 더욱더 밝히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