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1 12:47:14 |
조회 : 79 |
복음의 기쁨 200301 |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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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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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 13:37 |
복음의 기쁨
2020년 3월 1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1:3-6
(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1: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1: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립보 교회는 사도행전 내의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기쁘게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 마지막 때에 어떤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지를 알게 된 겁니다.
즉 인간들이 스스로 힘으로 자신을 개조해서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애쓰는 그 모든 시도가 다 헛것임을 알았던 겁니다. 요한복음 13:36에서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자기 목숨까지 걸고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각오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단호합니다. “너는 내 있는 곳에 올 수 없다”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에 가신 겁니다. 그리고 그곳만이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단 하나의 방법뿐입니다. 주님이 그 사람에게 찾아오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순절날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겁니다. 이것은 성령받기 전에는 도저히 예상 못한 겁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이 성령이 오시므로서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사실을 알았던 겁니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즉 ‘구원’이라는 것이 인간 자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임을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착한 일’을 시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며 그 일하는 장소가 바로 복음을 아는 성도 속이라는 겁니다. 당연히 이 ‘착한 일’은 바닥부터 시작해서 하늘에 까지 도달됩니다. 따라서 자신이 이미 바닥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내세우는 ‘착한 일’과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1:8에 보면,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일을 시키시는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성도 개인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복음을 들어서 안다고 우기는 자들은 곧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래 맞습니다. 저는 뭘해도 죄인이며 무가치하고 아무 쓸모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가만히 놔두세요”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꼼수입니다. 자기 것을 지키고, 지키고, 지키고, 버티고, 버티고, 버티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방어적 윤리, 수세적 윤리’라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이 애굽이며 소돔임을 드러내기 위해 성도를 ‘십자가 사건’이 발생되는 장소로 삼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7에 보면, 십자가 사건으로 이 마지막 때의 지붕으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벌리시는 ‘착한 일’은 개인용도로 장착되는 착한 일이 아니라 성도로 하여금 이 상황을 통과하게 하므로서 성도 내부에 그 정보가 남게 만드십니다. 쉬운 예를 들면, 소세지의 질은 그 길이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면을 끊어보는 겁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단면에 어떤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 흔적은 바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흔적’입니다.(요 5:24) 요한복음 5장에서 베데스다 못이 나오고 거기에 38년 된 병자가 나옵니다. 그는 죽음과 생명의 경계선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자비로우신(베데스다) 주님이 오셔서 그 사람의 병을 낫게 했을 때, 본인이나 주변 사람들도 그것을 예수님으로부터 얻을 것 다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38년된 병자 본인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업무를 주님이 시키십니다.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바리새인들이 지켜 보는 것 앞에서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자기 몸에 붙어있는 스파이크와 숙주가 되어야 될 인간 폐의 모세혈관에 있는 ACE2 효소 세포 리셉터와 결합해서 제대로 인간 내부에 습격해서 스스로 복제하는 현 상황과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악마의 숙주입니다. 악마가 인간에 기생해서 자체적으로 악마의 마음을 다른 인간들 속으로 전염시키고 있습니다. 그 정신이 바로 ‘어떤 어르신네에 의해서 인간이 응시당하는 상태’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인간들은 누군가에 의해서 계속 감시당하고 응시당합니다. 그 응시의 기준은 선과 악을 알고 있는 지식에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기를 독촉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이 어르신네(악마)의 지시에 충동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공포가 생깁니다. 이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복음의 인물들과 판이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헌금을 하면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성령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 형편을 두고서, “사람을 속임이 아니라 성령을 속였다”(행 5:4)고 말해줍니다. 이 말씀은 곧 성령 앞에서 인간의 형편을 두고 말합니다. 인간은 이미 악마의 숙주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인간의 빠져 나올 길이 없습니다.
성령이 없는 자들의 특징은 얼굴이 어둡다는 겁니다. 그리고 야심이 가득차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왠 무섭고 두려워서 자꾸만 십자가 복음 앞에서 숨어 들어갑니다. 인간은 숨는데 귀재입니다. 걸핏하면 피하고 숨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악령에 사로잡힌 인간을 가지고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활용하시고자 성령을 주시고자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사적인 실익을 얻고자 합니다. 자꾸만 천국가고자 시도하고 구원받고자 시도합니다. 이게 바로 야심이요 이게 바로 탐심이요 우상숭배입니다.(골 3:5) 구약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리자 이런 본심을 그대로 엘리사 선지자에게 걸려 다 토해냅니다.
자기 건강만 챙기기에 더러운 물에 몸을 씻는 식의 치료법을 거부합니다. 이처럼 인간 속에서 복음에 대해서 극렬한 반항기를 드러납니다. 하지만 나아만 장군이 병고침을 받고 난 뒤에,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다 여호와의 하신 일임을 받아들입니다. 비록 자신이 림몬 종교에게 기도하더라도 자신의 행위를 여호와의 행위하심으로 받아들여달라고 합니다.
이는 곧 자신이 하나님의 노비가 됨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이처럼 누구 눈치보지 않고 자유롭게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행 1: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로 주님과 함께 쓰임받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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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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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2 08:01 |
2강-빌 1장 3-6절(복음의 기쁨)2003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1장 3-6절입니다. 신약성경 318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1:3-6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착한 일이라고 나오지요. 갑자기 구미가 확 당기는 말 아닙니까? ‘아, 내가 착해질 수 있다.’라고 매혹적인 단어를 사용했는데 왜 착한 일에 대해서 구미가 당기는가? 우리의 상식에 의하면 ‘천국은 착한 사람이 가지 못된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기본적인 양심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가 쓰이기 위해서는 사도행전이 먼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빌립보교회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교회가 만들어진 겁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 인물들에 있어서의 그 착한일이 뭐냐? 아주 생소해요. 평소에 착하고 싶어서 아주 환장한 사람들이 아니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착한일이 뭐냐 하면, 자기 목숨보다 더 뛰어난 것이 착한 일이에요. 자기 목숨보다 더 뛰어난 것.
그 착한 일 때문에 더 이상 자기가 지킬 것이 없는 것, “이 목숨도 가져가세요.” 이정도 돼야 착한 일이에요. 인간은 착해지고 싶어요. 고대의 모든 윤리와 철학을 보면 그래요. 인간은 착해지고 싶어요. 그러나 빌립보서 1장 3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시작하는 그 착한 일 말고 따로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출발하는 착한 일이 있어요.
그 착한 일의 특징은 뭐냐 하면, 하늘까지 통한다는 겁니다. 지상에서 멈춰지는 착한 일이 아닙니다. 제대로 하나님까지 연결되는 착한 일이에요. 예수님이 돌아가실 즈음에 베드로가 이런 오해를 했지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했을 때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내가 가는 곳에 너는 가지 못한다.” “너는 코로나나 걱정해라.” 너는 내가 가는 곳에 가지를 못해요. “코로나도 못 이겨 너는.”
베드로가 수제자입니다. 자기는 어느 정도 되느냐 하면, 자기목숨까지 내놓았어요. 판돈을 내놓은 거지요. 내 목숨 콜! 목숨 내놓고 가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베드로가 자기 목숨 내놓은 것을 가상히 여기지 않습니다. 쓰레기 같은 목숨을 어디에 써요? 천국에 그 목숨 아무 쓸데가 없어요. 그 쓰레기 같은 목숨. 우리한테는 귀하지만 하늘나라는 그 목숨을 쓰레기로 봅니다.
목숨 내놓은 그것 쓰레기 내놓은 거예요. 나대지 말라, 그 말입니다. “네가 천당 가려고 나대지 말라. 내가 너에게 올게. 내가 너에게 가면 되잖아. 네가 착한 사람 되어서 올 생각하지 말고.” 착한 일은 주님부터 시작된 일이 착한 겁니다. 그래서 주님부터 시작된 그 착한 일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빌립보서가 사도행전의 교회니까 사도행전부터 보게 되면 착한 일은 끝에서부터 시작됐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말이 모순되지요. 끝이면 그냥 끝나야 되는데 사도행전에서 오순절에 오는 것은 구약 예언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 오는 영이에요. 사도행전 2장에 그게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6절에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말세가 뭐냐? 끝 날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끝 날에 성령이 오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직까지 종말이 안 왔다고 우기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온 사람에게는 더 이상 역사의 진척이 의미가 없어요. 단기, 서기, 이런 것이 의미가 없다고요. 앞으로 2021년, 2022년이 의미가 없어요. 의미 있음과 없음의 결정, 스케줄대로 가는 것, 3월이나 4월, 캘린더 넘기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왔으면 그 사람은 이미 종말에 포함이 된 사람이에요. 이미 착한 일이 그 사람 속에서 시작, 개시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올해는 은혜 받겠지.’ 혹은 ‘내년이 되면 은혜 받겠지.’ 계속해서 시간을 미룹니다. ‘3년 후에는 은혜 받겠지’ 그 시간을 자꾸 유예해봐야 소용없어요. 사도행전을 보세요. 오늘 본문 빌립보서 1장 4절에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기쁨이라는 말이 나와요. 사도행전의 인물들 특징이 뭐냐? 기뻤어요. 왜 기쁜가? ‘내가 이런 것을 다 알다니!’ 그래서 기쁜 거예요. 예상 밖의 착함, 하나님의 착함, 하나님의 의를 주신 거예요. 사도행전 사람들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아주 신이 났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아주 신바람이 났어요. 목숨을 구걸한다든지 자기 목숨 지키려고 하는 모습을 안보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스데반집사거든요. 스데반집사보고 사람들이 돌을 던지니까 “잠간만, 잠간만! 내가 좀 심하게 이야기한 것 같다. 일단 돌이나 놓고 이야기합시다. 왜들 이러십니까?” 이렇게 했습니까? 그 때 스데반집사가 어떤 얼굴이었는가? 사자성어로 ‘천사얼굴’이었습니다. 4자 성어까지 갈 것도 없지만 천사얼굴이에요.
사도행전에 보면 재미있는 것이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간편하게 설명 드릴게요.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기뻤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자유롭다, 기뻤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얼굴이 밝다. 아까 천사 얼굴 이야기했지요. 반면에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얼굴이 어두워요. 갑자기 제가 지금 얼굴을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얼굴이 어두워요. 바들바들 떨고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따로 있어서 바들바들 떨면서 얼굴이 어두운 것이 아니라 하루, 9 to 5, 아침 9시까지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하는 그 하루, 하루 웬 종일 얼굴이 어두워요. 사회적으로 무슨 일이 있기 전에도 얼굴이 어두워요.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착한 일의 예수님의 성령이 있는 사람은 주춤거리지를 않습니다. 주춤주춤하지를 않아요. 머뭇거림이 없어요.
확 일 저질러버립니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어요. 왜? 자기 목숨 다 놔버렸으니까. 자기 스케줄이 없으니까 이제부터 자기 안에서 시작된 스케줄은 내 스케줄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스케줄을 천국까지 통하는 스케줄로 짜서 천국으로 잡아당기거든요. 베드로 보고는 오지 말라고 해놓고는 주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네가 하지 못하는 것을 주님이 해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굴이 안 밝을 수가 없지요. 신났다니까요. 같이 신나야 되는데…….
제가 토요일에 산책을 하는데 저 아래 봉무교회가 있어요. 정부시책에 따라서 문을 닫았어요. 새벽기도를 안 하고 문을 닫았다고요. 입구를 쇠사슬로 묶어놨어요. 돌아오는 길에 보니 어떤 우체부가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굳게 닫힌 그 봉무교회당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간절히 빌고 있어요. 우체부가요. 우체부는 온 곳에 돌아다니잖아요. 토요일에도 일하는 것 같아요.
여기서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할 수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나로 인하여 코로나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를……. 그래서 제발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고. 종일 다니면서 이 택배 다 돌려야 되는데 제발 사태가 나로 인해서 커지지 않도록, 내가 전파자가 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비는 그 기도, 문이 잠겨서 못 들어가니까 입구에서 그렇게 하는 것 같아요.
그 때 내가 사진기가 있어서 그 장면을 찍어서 조선일보에 보냈어야 되는데……, 그 간절함. 첫 번째 경우는 그럴 수가 있고요. 두 번째는 경우는 거의 희박하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주여, 잘하셨습니다. 진즉에 전염병이 퍼져서 요한계시록대로 3분의 1을 작살내야지요. 주여, 잘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니 제가 속이 다 시원합니다. 신난다!’ 하는 식으로 기도하는 것.
두 번째 경우는 거의 없어요. 내가 장담합니다. 두 번째 기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거예요. 복음을 알아야 두 번째지요. 성령을 받아야 두 번째 기도가 나와요. ‘잘 하셨습니다. 대구 인구 반 날려버립시다. 차도 시원하게 타고 오도록.’ 모든 주의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면서 그게 성도한테는 마지막 때를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아주 신나는 소식, 네 자로 기쁜소식이 되는 겁니다. 그 전염병이.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다른 교인들도 마찬가지지만 “목사님, 교회 문 엽니까?”라고 질문하지 마시고 “문 엽시다.”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문 엽니까?”라고 하지 마시고 “문 엽시다.” 해야 돼요. 우리 교회 문 열어야 될 이유가 뭐냐? 우리교회가 얼마나 필요가 없는 단체라는 것을 이 참에 다 보여주는 거예요.
보세요. 교회 필요 없잖아요. 교회가 다급한 것이 아니었지요. 여러분 집구석과, 여러분 가정과, 여러분의 직장이 더 중요하지 교회 다닌다는 이것은 배부른 소리거든요. 사치라는 말이지요, 결국은. 나한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거예요, 교회가.
지금 내가 화를 내고 있나요? 밝은 얼굴을 해야 합니다. 절대 화내는 것 아닙니다. 아주 밝은 얼굴이에요. 평소에 인간은 자기 몸뚱이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만 살면 그만이고, 자기만 건강하면 그만이에요. 물론 내가 와서 혹시 다른 사람에게 전파될까봐서 걱정이라고 하는데 그런 걱정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 앞에서 그런 오지랖은 안 떨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모이기에 힘쓰라고 하면 좋은 환경 주고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 참에 죽을 수가 있지. 이런 좋은 기회를……. 나보다 복음이 더 중요합니다.’를 실감나게 해주는 이런 기회가 우리 한평생 가운데 또 언제 오겠습니까? 다니엘 세 친구 이야기가 다니엘 3장에 나오거든요. 이게 남의 이야기라. 다니엘 세 친구는 말씀대로 드디어 불속에 들어갔다. ‘옛날에 그랬겠지.’ 이게 옛날이야기입니까? 주의 말씀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저도 마찬가지지만, 사도들의 설교내용이 뭐냐? 너희들이 기어이 예수님을 미워할 때까지, 예수님을 싫어할 때까지 설교하겠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너희들이 예수를 믿어? 개가 웃겠다. 절대로 너희들은 예수를 안 좋아해. 미워할 거야. 내가 믿게 만들겠어. 그래도 네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것은 너의 종교적인 열심히 아니라 성령이다.” 성령께서 착한 일을 네 속에서 시작해서 너의 착한 일과, 나 자신이 착해지는 그것과, 진짜 주님이 벌이시는 착한 일과 얼마나 대조적인가를 보여주시고자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이런 말씀 나오지요. 28장 26절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사도바울이 설교할 때 이걸 목표로 설교한 거예요. “너희들은 몰라. 너희들이 믿는다? 거짓말이야.” 너희들은 네 몸이 더 중요하잖아요. “내 앞에서 어딜 거짓말을! 성령 받은 사도 앞에서까지 거짓말 할래?”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한다고 들고 나왔을 때 자기들은 안 들킬 줄 알았지요. “하나님, 제가 정성을 다하여 헌금을 가져왔습니다.” 그럴 때 베드로한테 들켜버린 거예요. “네가 나를 속인 것이 아니고 네가 성령을 속임이다.”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아직도 악령의 조종을 받고 있구나.”
그래서 그러한 사도행전의 분위기속에서 빌립보서를 다시 봅시다. 다시 읽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제 이해되십니까? 이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 이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요. 하나님께서 다 추려내는 거예요. 성령 받지도 않았으면서 흉내 내는 사람들 다 추려내는 겁니다. 세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조정되기 때문에 가지 못할 사람을 떨어내는 거예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해서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문 닫힌 봉무교회 앞에서 “주여, 잘 하셨습니다. 나는 차라리 전파자가 되겠습니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정식 명칭이 코비드19(COVID-19)이라 하는데 이것이 꼭 마귀를 닮았어요. 왜 그런가? 바이러스는 꼭 살아있는 세포를 습격해서 스스로를 복제하거든요.
인간이 숙주가 된다는 말이에요. 바이러스의 특정이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선에 있어요. 무생물 같으면 영향을 안주는데 이것은 영향을 주면서 막상 생물체인 우리에서 찾아보려면 이게 없어요. 원래 코로나 바이러스는 정글 속에, 숲속에 살던 세균이에요. 그런데 인간이 벌목을 하고 벌초를 하니까 숲속에 숨어 있던, 정말 마귀 같은 바이러스와 인간이 접촉을 하게 된 겁니다. 박쥐같은 동물을 통해서.
원래 이 바이러스는 동물에게만 전파되지 인간에게는 전염이 안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게 전파가 되려면 인간은 단백질로 되어 있어서 그 단백질의 변형이 일어나야 되는데 변형이 일어나면 DNA인자에서 그 다음에 RNA, 메신저RNA에서 트랜스 RNA로 해서 리보솜을 만나서 아미노산, 단백질로 갑니다. 이건 그냥 참고로 들어두세요.
그런데 이 코비드19, 이 세포는 DNA바이러스가 아니고 메신저RNA 바이러스가 되어서 가닥이 두 개가 아니고 한 가닥이에요. 한 가닥은 변형이 일어나기 쉬운 거예요. 세포질 속에 리보솜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걸 DNA 코돈이라 하는데 그 코돈과 접목해서 이것이 폐 속의 모세혈관의 효소인 ACE2라는 게 있는데, 코비드19에는 스파이크가 있거든요, 축구화의 바닥면에 박힌 못처럼, 선인장 가시처럼 붙어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과 인간숙주의 세포속의 ACE2와 만나는데 그때 단백질이 변형을 일으키면 돌연변이로 변형을 일으켜서 숙주로 들어온다는 그 말이지요.
박테리아는 하나에서 둘, 둘에서 네 개가 되지만 이것은 하나가 들어가면 10만개로 폭발하듯이 퍼지게 되어 있어요.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인간은 단독적으로 자기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님을 이 차에 우리가 알자는 거예요. 이 세상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 같은 바이러스가 인간보다 약한 것이 아니에요. 인간을 오히려 이용한다니까요. 악마가 오히려 인간을 이용해서 악마의 정신을 전파하는데 인간자체를 숙주로 사용해요.
악마가 인간 속에 parasite, 기생충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기생해서, 인간을 숙주로 해서 전파하는 거예요. 악마의 정신을. 인간은 약하거든요. 약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저항할 수가 없어요. 방어할 수가 없다고요.
방어를 누가 하느냐? 그 방어하는 방법이 빌립보서 1장 3-5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그 다음에 무슨 단어가 나오느냐?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 안에 있는 바이러스를 우리가 못 끄집어내듯이 숙주 안에 있는 악마를 우리가 못 끄집어내요. 마귀가 더 세니까 못 끄집어내는데 “끄집어내지마. 가만있어.” 내가 마지막 때에 요엘선지자에게 예언한대로 복음을 우리에게 집어넣어요. 잘 들으세요. 사람은 자꾸 피하면 된다고 하는 것, 인간은 주특기가 숨는 것이 주특기라. 자꾸 피하고, 도망가고, 숨고, 그게 다에요.
“목사님, 저는 아무 가치 없고, 쓸모없는 인간입니다.” 그래놓고 숨어버려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꼼수인데요. ‘나는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아무 가치 없다.’를 그 사람은 마지막 가치로 붙잡고 있는 거예요. ‘복음 아니까 건드리지 마세요.’ 이거예요. 주님께서는 지금 마귀 들린 우리를 가지고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끄집어내는데 우리는 자꾸 마지막 단계에서 밀치는 거예요. 자꾸 주님보고 가라는 거예요. 복음 이야기하지 말라고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방어적 윤리’라고 합니다. 방어적 윤리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나름대로 바르게 살려고 최선을 다했으니까 제발 나보고 닦달내지 말라’는 자기 수세적 윤리, 방어적 윤리에요. 그걸 누가 잘하느냐? 바리새인들이 잘했던 거예요.
“나는 간음한 적이 없다.” 하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 방어막을 뚫어버립니다. “네가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다.” “나는 살인한 적이 없습니다.” 하니까 “네가 형제를 미워한 것도 살인죄다.” “저는 죄지었지만 나름대로 죄를 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어느 손으로 죄를 지었나?” “오른 손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그 오른 손 잘라버려라. 왼손이라면 왼손을 잘라버려. 네가 보고서 죄를 지었지? 그렇다면 그 오른 눈을 빼버려라.” “제가 구제를 했습니다.”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
마태복음 5장에서 바리새인 이야기부터 하거든요. 바리새인들은 방어적 윤리를 가지고 천국을 뚫으려고 한 거예요. 그걸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대로 하고 있어요. 착한 것을 많이 모으면 하나님도 천국을 열어준다는 거예요. 그런 복음은 없어요. 복음은 전제가 뭐냐? 우리가 마귀에서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마귀에서 못 벗어나는 특징이 뭐냐 하면, 우리가 얼굴이 밝지가 않다는 거예요. 그리고 수심이 가득하고 또 특징이 뭐냐? 항상 공포에 휩싸여 있어요. 의사들이 청진기 가지고 사람 보잖아요. 청진기를 가슴팍에 대는 것은 얼마나 목욕 잘했나, 그걸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체가 통입니다. 그 통 안에 있는 여러 형편을 알기 위해서 바깥에서 청진기를 사용하잖아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이 청진기를 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뭘로 했느냐? 말을 했어요. 말을 함으로서 그 사람이 답변하는 말 속에서 얼마나 부들부들 떨고 있는가를 살피는 겁니다. 제가 얼굴 밝은 우리교회 교인들에게는 심방도 안가잖아요. 얼굴 밝은데 왜 갑니까? 그런데 벌벌벌, 떨고 있을 때는 전화하고 싶어요. “날씨 좋습니까?” 하고 아무 말이나 던져요.
하면서 그 사람 말 중에서 뭔가 지키려고, ‘지켜야 돼, 지켜야 돼, 지켜야 돼. 버텨야 돼, 버텨야 돼, 버텨야 돼.’ 하는 그게 공포스러운 거예요. 그 공포감. 부들부들 떠는 그 공포감. 그 떨림. 뭔가 자꾸 감추려고 하는 것. 감추는 귀신들린 거예요, 인간들은.
뭔가 일이 있으면 목사한테 전화하시라, 그 말이지요. 결과가 문제가 아니에요. 전화가운데 목소리가 들리는 그 분이 지금 얼굴이 밝은가? 종말에 신바람이 나서 사는지, 안 그러면 자기 것 강제로 지키기 위해서 바들바들 떨면서 살아가는가? 그것이 전화음성 속에서 다 들려요. 인간은 숨는데 귀재기 때문에, 감추는데 귀재기 때문에, 도망치는데 귀신이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귀신이거든요. 교회 못 나오시면 메일로 하든지 전화를 하든지 해주셔야 돼요. 생중계 들으면 안 됩니까? 지금 교회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신종코로나를 통해서 당신을 지금 목회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목회하고 있는 중입니다. 네가 지금 신종코로나 전염병에 대해서 활짝 웃고 있는지를 보는 겁니다.
‘그럴 줄 알았어. 대구 인구의 한 반쯤은 죽어야 돼. 아주 잘 하셨습니다. 이제 종을 편안히 놔주시는군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주께서 그걸 들춰서 보게 하시는 겁니다. 되도 않는 자존심 챙긴다고 하는데 그 자존심이 이 땅에서는 통하지만 천국에서 통합니까? 통하지도 않는 자존심을 뭘 챙깁니까?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제가 비유로 하겠습니다. 주님의 소시지가 있을 때 소시지 길이를 측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도행전은 소시지의 단면을 끊어버립니다. 소시지의 단면을 끊어버리면 거기에 뭐가 나오느냐? 마귀 들린 인간이 주께서 주신 복음으로 인하여 어디서부터 어디로 건너왔는지를 보여줘요. 그게 요한복음 5장 24절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보고 “나 죄인입니다.” 그런 소리 들으려는 것이 아니에요. 죄인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 고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저 이렇게 처신 했습니다.’ 내가……, 주어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이렇게 처신했다는 것, ……을 했습니다, 를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주님이 네 안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를 이야기하라는 말이지요. 네가 행동을 어떻게 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네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너로부터 어떤 일을 벌이시는가를 보여주면 돼요. 그게 뭐냐? 두자로 기쁨이라는 겁니다, 기쁨. 헬륨가스 마시면 사람이 실없이 계속 웃는답니다. 허허, 허허. 그것은 헬륨가스가 들어가서 그래요. 성령이 들어가니까 그 사람이 신바람 나고 웃고 있는 거예요. 얼굴이 밝은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기쁨이 나오잖아요. 기쁨과 복음이 서로 만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요한복음 5장에서 제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그 단면을 이야기 했으니까 그러면 그 단면에서 요한복음 5장에서 등장한 인물이 있지요. 그게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입니다. 베데스다못가의 38년 된 병자는 38년이나 병들었어요.
이것은 뭐냐?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선에 있어요.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38년 동안 병들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는 자비로운 못이지요. 여기서 누구를 만났느냐 하면,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복음입니다. 왜냐? 예수님은 하늘과 통하기 때문에. 38년 된 병자에게 와서 병을 고쳐주거든요.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감당해야 돼요. 어렵습니다. 병을 고쳐줍니다. 병을 고쳐주니까 38년 된 병자는 ‘아, 내가 건강할 만한 권한, 자격이 있어서 사랑의 주님이 와서 내 병을 고쳐줬구나.’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아닙니다. 38년 된 병자를 가지고 어디에 활용하느냐 하면, 안식일 날, 그것도 월요일 말고, 화요일도 말고, 안식일 날 담요 들고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그곳을 지나가라고 이야기해요.
개인을 병 낫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하나 건강한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내 몸 하나 챙기는 그것이 목적이 아니에요. 주님 앞에 쓰임 받아야 되거든요. 쓰임 받는 그 관계를 가지고 착한 일이라고 하는 거예요. 착한 일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아는 사이가 되는 그것이 착한 일이에요. 주님에 의해 쓰임 받는 그것이 착한 일이라는 말이지요.
안식일이라는 율법의 체계 앞에서 율법의 위반자로 가게 만들어요. 이걸 설명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 속에는 악마가 들어 있어요.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못 뺍니다. 빠질 수가 없어요. 악마가 인간을 숙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빠질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악마라는 것이 이 땅에서 어떤 모습이냐? 어떤 어르신네라고 보시면 돼요.
악마가, 다른 말로 어르신네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날마다 우리를 응시합니다. 응시한다는 말은 우리는 감시당하고 있다는 겁니다. 바라봄을 당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늘 악마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겁니다. 주시하면서 뭘 이야기하느냐? 율법을 앞장세워서 안식일을 지켜야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의인이 되어서 구원받는다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설득시키고 세뇌하고 그걸 조종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마귀가 들린 인간에게 있어서 선악을 알거든요. 선악을 안다는 말은, 내가 악을 온전히 버리고 온전히 선하지 않으면 내가 구원을 받지 못하니까 내 일평생 추구하는 목적이라 하는 것은 내가 선한 사람 되고 착한 사람 되는 것이 목적이라 하는 것이 이미 장착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그걸 갖고 있었어요.
제가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이 다른 사람에게 죽은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에게 죽었다고요. 이 점을 좀 감안해주세요. 천하에 못된 인간에게 죽은 것이 아니고요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고 할 만큼 그렇게 자부하는 그 바리새인에게 죽임을 당했거든요.
그러면 복음은 어디에 있느냐? 바리새인과 대조가 되고 정 반대의 위치에 복음이 있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가지고 “네 병 나았다. 천당가거라.” 그것이 아니고 그 38년 된 병자를 가지고 바리새인 앞에 통과시키는 거예요. 바리새인들 안에는 악마가 들었어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너희 아비는 악마니까.
악마가 뭐라고 하느냐? 안식일을 지켜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구원받는 하나님의백성이 된다고 알려주는 겁니다. 그럴 때 38년 된 병자가 병 낫고 난 뒤에 바리새인 앞에서 통과할 때 바리새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잡아다가 “너 안식일 위반하라고 누가 그렇게 시키더냐?” 이렇게 나왔지요. 중간에 끼어있는 38년 된 병자는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동안 악마의 숙주가 되었다가 이제는 예수님의 숙주가 된 거예요. 로마서 6장에서는 죄의 종이었다가 이제는 의의 종이 된 겁니다.
종이라는 말을 노비로 바꿀까요? 전에는 죄의 노비였다가 지금은 주님의 노비에요. 주인이 아니고 노예라 그 말이지요. 노예인데 주님께서 이기고자 하는 그것,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하는 그것을 보란 듯이 위반자로 38년 된 병자로 하여금 그들 앞으로 지나가게 해서 예수님 자신을 너희들 안목에서, 악마의 안목에서 보면 이것은 백퍼센트 율법의 위반자로 주님이 자처하는 것, 이게 바로 복음이다 그 말이에요.
주님은 다 계획이 있어요. 다 계획이 있습니다. 이걸 모르고 교회 와서 “주님, 어떻게 하면 천당 갑니까? 예수 믿으면 갑니까? 예, 복음 앞에서 내가 무가치합니다.” 이래가지고 숨어 들어가면 그거 어떻게 할 거예요?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 나옵니다. 두 증인이 나오는데 하는 일이 뭐냐? 복음 전하는데 구체적으로 그 내용은 안 나타나 있지만 복음 전하다가 잡혀 죽어요. 잡혀 죽을 때 8절에 보면 “저희(두 증인)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두 증인 천당가라고주께서 오신 것이 아니고 두 증인을 사용해서 네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네가 정들었던 이 세상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고 이 세상이 애굽이라는 사실, 그리고 네가 복음전하는 그 현장이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십자가는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반복이 돼요.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님께서 창에 찔린 그 십자가를 주님의 백성인 종을 통해서 현장화 시키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증인노릇하게 한 거예요. 성령주신 겁니다. ‘구원받았으니까 숨겠다.’ 그게 아니에요.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의 사도들은 신난 거예요. 사도바울의 마지막을 여러분이 아시잖아요. 감옥에 갇혀서 결국 죽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목 베어 죽었다는 전설이 있거든요. 스데반집사 돌 맞아죽은 것은 아까 설명했고 사도바울은 어떻게 죽었습니까? 하도 흔해빠진 단어가 순교라서 순교라는 말도 하기 싫어요. 너무 흔해빠졌어요.
성도는 죽어야만 순교가 아니고 살아 있는 것도 순교에요. 성령을 받게 되면. 왜냐하면 세상은 애굽이고, 소돔과 고모라고, 내가 있는 것은 나 구원받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있는 이곳이 십자가 예수님이 죽었던 현장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해 주시는 겁니다.
그걸 소시지 길이로 재지 마시고 소시지 단면을 칼로 끊어버리자는 말이지요. 우리 단면을 끊으면 그 단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겼기에 가능한 일이에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미 생명 있는 사람을 가지고 욕하고, 저주하고, 해봐야 우리의 마음은 흔들릴 이유가 없지요. 밝은 얼굴이 어두운 얼굴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뭔가 벌벌벌, 떨고 무서워할 이유가 없어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거든요.
그 옮긴 흔적 같은 것, 자국 같은 것을 우리의 영혼, 마음의 단면에 주님께서 새겨 넣기 위해서 주께서 38년 된 병자로 하여금 안식일 위반자로서 통과하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38년 된 병자가 황당해 가지고 ‘내가 병 낫고자 한 것도 아닌데 병 나아서 욕만 실컷 얻어먹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 속에는 어르신네가 있는데 어르신네 명령은 뭐냐? 바르게 살아야 천당 간다는 거예요. 거기다 성경말씀 들어오면 이제는 ‘바르게 산다’에 뭐가 보태져요. ‘말씀대로 살아야 착하고, 착해야 영광 돌리고 너는 천당 간다.’ 악마가 그런 짓을 한 겁니다. 십자가 없지요. 복음이 없어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 벌벌 떨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캐요? 이보다 더요? 이보다 더 열심히 할까요? 기도는 더 오래하고? 헌금은 더 많이 하고? 예배참석은 더 철저히 하고? 이렇게 할까요?” 얼굴이 벌개져서 바들바들 떨고 있어요. ‘지키자, 지키자. 그동안 내가 신앙생활 한 것 지키자, 버티자. 지금까지 내가 공들인 것 여기서 깨지면 나만 손해야. 버텨야 해.’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기쁨도 아니고 복음을 아는 사람들의 모습도 아니에요. 종말이라는 것은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이미 죽은 거예요. 이미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잖아요. 지금 제가 여러분을 힘들게 하기 위해서, 혹은 약 올리기 위해서 성경에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여러분은 아니겠지만 여기 성령 안 받은 사람 같으면 이렇게 저보고 욕을 할 겁니다. ‘그만해라. 많이 먹었다. 나도 안다.’ 그 말 하는 것이 기쁘지도 않고 신나지도 않아요.
열왕기하 5장 18절에 나아만 장군이 나오는데 이 사람도 뭔가 통과하고 있어요.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들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큰일 났다는 겁니다. 이제 네 인생 조져놨다는 겁니다. 자기도 절망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계통과 연관되어 있는 소녀 하나가 “우리나라에 엘리사선지자가 있는데 일단 한 번 만나보시지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렇게 나왔던 거예요.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그 엘리사가 자기의 병을 고쳐주는지 알았어요. 병고쳐주는 줄로 알았기 때문에 병을 고쳐줬다고 치고 그래서 엘리사에게 선물을 가득 준비한 거예요.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께 내가 어떻게 쓰인다는 생각은 안하고 문둥병에서 건강해진다면 나는 땡잡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자기의사적인 이익, 실익만 있으면 좋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떻게 쓰인다는 그것은 생각도 못하고. 뭔가 경과하고 통과해야 되는데 그것은 생각 못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잘해주면 내가 하나님께도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그것뿐이에요. 머리 돌아가는 사고방식이.
그래서 선물 잔뜩 준비했지요. 엘리사가 만나주지도 않았습니다. 벌써 개무시하지요? 개무시했다고요. 이래 뵈도 군대장관인데. 그것보다 더 무시하는 것은 뭐냐? “네가 요단강물에 일곱 번 들어가라.” 하는 거예요. 이것은 나아만 장군이 병 고치러 오면서 남들은 모르지만 자기 안에 악마의 숙주로서의 악마의 뜻이 있었던 거예요.
뭐냐 하면, 깨끗한 것이 나를 깨끗하게 한다는 공식이 있었던 겁니다. 깨끗한 것이 나를 깨끗하게 한다. 뭐가 틀렸느냐? 목적이 틀렸어요. 나를 깨끗하게 한다는 그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안됩니다. ‘나는 병 고칠 자격도 없어.’ 그렇게 되어야지 나는 혼자 사는 줄로 알고 ‘나는 깨끗하게 된다면 땡 잡았다.’ 이걸 목적으로 삼았다는, 그걸 희망과 기도로 삼았다는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신천지의 잘못은 딱 하나입니다. 그들이 야심가들이에요. 14만 4천에 들어가야 천당 간다는 겁니다. 딱 하나밖에 없어요. 신천지 보게 되면 이 만희 연설할 때 수만 명 모아놓고 한마디 했어요. 한마디 하니까 “아멘!” 해요. 아멘을 왜 합니까? 그게 아멘 할 내용이에요? 지금 신천지 교인들은 이 만희를 이용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달라는 거예요. 이 착하고 착한 나를 천당 보내 달라는 거예요. 이 만희 당신이 마지막 메시아라고 주장하니까.
그러니까 이 만희도 생각 못했어요. 악마의 바이러스가 이만큼이나 전파될지 상상도 못한 거예요. 자기는 한마디만 한 거예요. 14만 4천에만 들어가면 합격. 안 들어가면 불합격. 이거 한마디만 하니까 본인의 속에 있는 야심이 본인을 열정적으로 만들었어요. 말리지도 못해요. 자진해서 전도하고요. 14만 4천에 들어가야 되니까.
본인이 천당 가야 된다는 그 야심이 본인을 신천지 교인으로 만든 거예요. 이 만희가 말려도 안돼요. 이 만희는 4천억 돈만 챙기면 그만이고 지금 신천지 교인들은 돈 그까짓 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요한계시록 말씀대로 14만 4천에 들어갔다. 합격이다.’ 그것만 챙기면 되는 거예요. 그런 야심은 우리한테는 없습니까?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구원될 자격 없어요. 베드로가 구원될 자격 없습니다. 복음이 올 때는 예상 밖이에요. 얼마나 예상 밖인지 신났어요. 너무 신났어요. 코로나, 이 뜻은 왕관이라는 뜻인데 모양새가 스파이크가 붙어서 어디에도 딱딱 들러붙는 거예요. 그러나 뭐가 와도 괜찮아요. 목숨보다 소중한 거니까.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이런 기회가.
그래서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 물에 들어가라고 했는데 나아만 장군은 계산을 했거든요. ‘깨끗한 물이면 나를 깨끗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생각한 것을 이미 아시기 때문에 더러운 물에 들어가게 한 거예요.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도로 내 나라로 가자” 했어요.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사도행전에 있는 성도들은 왜 기쁘냐 하면, 막이 형성되어가고 있음을 기뻐했어요.
죽기 전부터 이 세상에 이미 천국과 지옥사이의 막이 형성되었다는 그 막, 성령이라는 막이 실재로 형성된 것을 보고 그렇게 좋은 거예요. 소속이 성령에 소속되고 보니까 ‘저쪽이 악마의 소속이다.’ 그게 눈에 한꺼번에 보이니까 이것보다 더 신나는 것이 없어요. 그들이 뭘 했습니까? 아무것도 한 것도 없어요. 그냥 성령이 바람같이, 불같이 내려온 것뿐이에요. 말씀을 통해서 성령이 내려온 것뿐입니다. 자기가 한 것 없어요. 바리새인처럼 착하자, 착하자, 지키자, 지키자, 그런 것이 없었어요. 참, 신바람 이 박사에요.
그래서 기쁨이라 한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놀라요. “빌립보교인들아! 내가 놀랐다 야! 너희들 진짜 복음을 사랑하네. 복음 안에서 교제하고. 나 예상도 못했는데 진짜 주님께 찬미한다.” 이렇게 된 거예요. 누가 말립니까? 환란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 어떻게 주님이 주신 사랑을 말릴 수가 있습니까?
나아만이 삐져서 자기 나라로 돌아가겠다, 할 때 옆에서 종이 말렸지요. “이왕 온 것 그냥 시키는 대로 요단강에 들어갑시다.” 열왕기하 5장 17, 18절, 나아만 장군이 내가 병 나았다는 여기서 벗어났어요. “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오직 한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가 병 나았다 안 나았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일, 우리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고, 림몬당이 되었든, 부처가 되었던, 동화사 대웅전이 되었든 관계없이 내가 어디서 절을 하더라도 여호와의 종으로 절함을 엘리사께서 알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되는 거예요. 처음에 올 때는 내 병만 나으면 된다고 여겼는데 자기 병 나음이 아니고 그 병 나음까지 넘어서 버렸어요.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창세기 6장 7절에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쓸어버릴 것을 하나님께서 뭐 때문에 만들어놓았나?’ 이렇게 반박하고 싶지요. 그게 성경말씀이 유도하는 거예요. “너 나 싫지 그지? 하나님은 좋지만 십자가 졌다는 그 자체가 싫잖아. 네가 싫어할 때까지 내가 이야기할 게.” 성경은 계속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20장 22절에 제자들이 예수님하고 같이 있을 때 천국 간다고 좋다고 들떠 있었어요.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내가 마시는 쓴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제자들은 쓴잔 마시는 그 타이밍에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이 빌립보교회에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나는 천당 가야지 하는 그 야심이 있잖아요, 그 야심, 욕심, 그것을 들어주기 위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예수의 증인이 되라고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이 착한 일은, 인간이 착한 일을 시작하게 되면 경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 시작한 것 말고 주님이 너희 속에서 시작한 그 착한 일 만이 천국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착한 일입니다.
그러면 그 착한 일 말고 다른 착한 일은 뭐냐? 그걸 욕심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골로새서 3장 5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탐심이 뭐냐? 3장 3절에 “너희가 죽었고” 너희는 이 땅에서 죽었고 너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것. 제가 여러분에 이렇게 말씀드릴 때 “압니다. 들은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기쁩니까?”라고 묻고 싶어요. “이게 즐거운 일입니까? 이미 죽었고, 우리는 이미 죽은 자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이것이 신나는 일입니까?”라고 묻고 싶어요.
지난 금요일에 광주강의 생중계를 했는데 첫 번째 강의가 그거예요. 진리라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고 ‘내가 여기 죽어 있다’는 것이 진리라는 겁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계속 나옵니다. 앞으로도 나올 것이고 계속 나와요. 듣기 싫더라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리어 감사하게 하옵소서. 범사에 감사하라, 하는데 이것 빼고 저것 빼고 감사할 것만 감사한 것이 아니고, 기분 좋은 것만 기분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집어넣어준 그 복음이 있기에 우리에게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머뭇거리지 말고, 주춤하지 않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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