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빌 1장 15-18(있음의 초과)2003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1장 15-18입니다. 신약성경 317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1:15-18
“어떤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사도바울은 자기의 구원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어떤 다른 사회현상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옥에 매여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가 중지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분명히 그리스도를 전파했는데 그 그리스도와 유사그리스도, 본인이 전하지 않는 내용을 담았는데 겉으로 포장되기는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이 유행되기 시작한 거예요.
그리스도가 뭐냐 하면, 하나님 오른편에 계시지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오른팔입니다. 오른팔이라는 말은 대행자라는 겁니다. 대행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버리면 이것은 예수님만 빠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체가 나타나지 않아요. ④예수님 하신 일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 바로 나아가는 길은 없습니다.
반드시 대행자를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기전까지는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논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번성한 사회였습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교체되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없더라도 인간들은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문제는 그 하나님이 진짜냐 가짜냐를 판정할 기준이 없었던 거예요. 조물주, 이것은 우리나라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조물주가 있잖아요. 조물주, 천지를 만드신 절대자. 인도의 힌두교나 심지어 불교마저 그런데 불교의 미륵이 신이에요. 미륵의 세 종류가 있는데 그게 삼위일체 신이에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이래서 자기 나름대로의 신을 구성하고 그 신이 인간과 어떻게 교류할 수 있는가? 그걸 인간들은 끄집어낼 수 있어요. 인간의 악마적 지혜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신이 있고 그 신은 보이지 않으니까 신과 인간 사이에 왔다 갔다 하면서 연락책으로 할 수 있는 어떤 또 다른 절대적인 신이 있을 것이다, 라고 불교에서 만들어냈어요. 그게 바로 미륵이고 그 미륵중의 하나가 부처가 되는 겁니다. 석가모니가 되는 거예요.
이런 삼위일체적 아이디어는 인간들이 지적 능력, 악마의 능력이죠, 그 악마의 능력가운데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신을 믿는데 다양하게 믿었어요. 네 종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사두개인, 두 번째는 바리새인, 세 번째는 쿰란공동체, 네 번째는 열심당원, 이렇게 네 분파가 있었어요. 예수님 당시입니다.
사두개인은 뭐냐? 눈으로 보고 있는 성전 있으면 이 성전에 반드시 메시아가 온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에는 금촛대가 있거든요. 제가 이스라엘 갔을 때 ‘메노라’라고 해서 황금촛대를 만들어놓았어요. 제가 촬영해서 우리교회 게시판에 올려놨잖아요. 그 거대한 촛대를 만들어놓은 이유가, 메시아가 황금돔에 두 발 딛고 오신다는 거예요. 스가랴의 예언에 의하면 감람산에 두 발을 딛고 서는 거예요. 그냥 로봇 태권 v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로봇태권v가 버티고 서는 것처럼 스가랴 예언에 의하면, 메시아가 감람산에 서게 되면 그 감람산이 두 조각이 나면서 그 때가 마지막 때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다시 모든 나라의 제사장나라로 만든다고,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유대인들은 황금촛대부터 해서 사전에 메시아 오기를 준비하는 것이 있었어요. 구약성경에 보면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니까 설마 하나님이 자기 집을 포기할 리가 없다. 따라서 이 성전에, 이 지점에, 이 장소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구름타고 오신다.” 라고 이야기한 것이 사두개인의 주장이에요.
따라서 그 사람들은 어떤 경우라도, 나라는 망해도 성전만 안 망하면 괜찮다고 한 겁니다. 그게 사두개인입니다. 지금 총 네 가지를 말씀드릴 겁니다. 두 번째가 뭐냐? 바리새인이에요. 바리새인은, 성전이 있다고 해서 메시아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우리 맘속에 내면화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실천해야 되지 입으로 주절주절 외운다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했으면 실질적으로 실천에 옮겨서 말씀의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이거 바리새인입니다. 요거 바리새인이지요. 많이 들어봤지요. 한국교회에서. 요거 바리새인입니다. 철저하지요. 그 사람들은 아주 철저해요. 자기를 학대하듯이 내가 지금 말씀대로 잘 지키고 있는가, 그걸 검토하는 거예요.
그 바리새인의 후손들이 현재 유대 이스라엘의 약 15퍼센트를 차지하는 정통 유대족속이라 해서 펭귄같이 생긴 옷을 입고 절기마다 지킵니다. 이것도 제가 사진 다 찍어서 올려놨습니다. 그들이 그 일을 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은 군대도 안갑니다. 나라세금으로 살면서 군대도 가지를 않아요. 이스라엘은 율법대로 살아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 번째가 뭐냐? 쿰란 공동체인데 이것은 수도원, 수녀원입니다. 거기는 세상의 모든 국가로부터 절단시켜서 우리끼리 하나님의 세례를 받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겁니다. 세례를 받아 의롭게 됨으로서 우리끼리 숫자를 채우면 되는 거지요. 하나님의 정해진 택한 숫자. 쿰란공동체는 뭐냐? 택한 숫자가 강조돼요. 이것도 어디서 많이 들어봤지요. 그 숫자만 차면 메시아가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는 것을 빨리 당기려면 우리가 빨리 정신 차리고, 세속의 모든 생활을 끊고, 그냥 기도에 전념하고, 바깥의 어떤 것과도 끊고 자체적으로 노동해서 자급자족하면서 수도원생활 해보자.” 물론 된장이나 고추장 같은 것도 자체적으로 만들지요. 수녀원에서 된장이나 참기름 만들잖아요. 여러분, 수녀원에서 만든 참기름 써봤잖아요. 그처럼 협동조합 만들어서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생활하는 이것이 쿰란공체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고요.
네 번째는 뭐냐 하면, 혁명입니다. “민중들이여 궐기하라.” 메시아의 뜻은 뭐냐? 이 정치적인 압제에서 무력봉기를 일으켜서 뒤집어버리는 거예요. 뒤집어버리려면 이스라엘에서 힘깨나 쓰고 무기를 조달할 수 있는 사업가나 자금을 많이 확보해서 언젠가는 전 국민이 군대가 되어서 로마에 승리하게 되면 이 약속의 땅이 진짜 여호와를 섬기는 ‘전국민의 신자화’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맨 날 기도만 하면 될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정치적인 세력을 규합해야 되고 연합해야 돼요. 조찬기도회를 하든 뭘 해가지고 하여튼 정치세력을 우리 메시아, 유대교중심으로 뭉쳐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열심당원입니다. 그 열심당원이 마사다 전쟁에서 로마에 완전히 몰살당했지요. 정치적으로 하나님이 도와준다고 했다가 나중에 3천명 남았는데 다 죽었어요. 애들 몇 명 남고 다 몰살당했습니다. 이것도 게시판에 올려놓았어요.
그러니까 메시아라고 하는 이 개념에 대해서 메시아는 분명히 단어는 하나인데 다양한 종류의 메시아가 마구마구 등장하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가 안고 있는 ‘나’라는 이 스스로의 자기대상에다가 개념을, 대상을, 나를 분석하고 거기서 끄집어낸 원리를 가지고 메시아라는 성경에 나오는 개념을 억지로 일치시키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벌써 접근했다고 보시면 되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유행을 하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에 대해서 내 속을 내가 헤집어보는 거예요. 그러면 내 속에 내가 뭔가 요구하는 것이 있을 거예요. 원하는 것이 있을 거예요. ⑤인간은 날 때부터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상처는 뭔가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문제는 그 요구가 완전한 보상이 안된다는 것이 문제에요.
상처를 얼추 추슬렀다고 생각하는데 약간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다른데 상처가 또 덧나 있어요. 이 상처 치료하니까 다른 상처가 또 도지네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뭔가 분노, 또는 상처가 계속 내부에서 올라오는 겁니다. 그러면 이걸 내 능력으로서는 해결이 안되니까 누구한테 하소연해야 됩니까? 새벽기도를 하든지, 교회 문 열고 들어가든지 해서 신에게, 내가 원하는 신에게, 절대자에게 그걸 하소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억울한데 하나님은 이렇게 입 다물고 그냥 계시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은 뭐하십니까? 저 같은 인간 안도와주시고?”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개념 앞에서, 진짜 예수님 앞에서 내가 어떤 모습인가를 비춰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분석해서, ‘나는 어떤 것이 아쉽고 어떤 것이 모자라고, 이럴 때는 이렇게 커버해주고 저 럴 때는 저렇게 지켜주면 좋겠다.’를 끄집어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개념에다 그 내용을 채우는 겁니다.
껍데기는 예수 그리스도인데 안에는 자기의 요구사항이 들어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옥에 갇혀 있을 때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우리가 어떤 상대를 볼 때 “하나님은 누구시지? 인간은 무엇이지?” 이렇게 보통 묻잖아요. “목사님,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또는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라고 묻고 싶지요.
그 질문자체가 뭔가 빠트렸어요. 이렇게 묻는 겁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반대질문이 들어오지요. “너는 신이 어떤 신이고 싶어 해? 너는 인간이 어떤 인간이고 싶어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이게 정직한 겁니다. “신은 어떤 분입니까?”라고 묻지 말고 “너는 어떤 신이고 싶어 해? 신이 어떠했으면 좋겠어?” 자신의 감추고 있는 상처를 덮어달라는 그러한 기대치, 이런 것으로 인간들은 자꾸 감추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⓺로마서 10장에서는 이걸 자기의, 자기정당성이라 하는 겁니다. 인간은 평생을 통해서 자기알리바이를 모으는데 집중을 다 해요. ‘나는 정당했다. 나는 그럴 만 했어. 인생을 살면서 어쩔 수 없었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나보고 탓하지 마. 주여, 저보고 탓하지 마세요. 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이런 날 보고 너무 탓하면 난 자빠지고 넘어져서 못 일어섭니다. 그러니까 내가 신을 제대로 알면 신이 원하는 것을 해줄 테니까 신도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세요. 우리 협의합시다. 협상합시다.’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옥에 갇힌 사도바울의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드는 일이라고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네가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내 괴로움을 더한다고 17절에 나와요. “옥에 갇힌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하는구나. 이 사이비 다른 예수를 전하는 인간들아!”라고 하는 겁니다.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예수를 전하면서 무슨 시기와 분쟁이 왜 일어나느냐, 그 말이지요. “시기와 분쟁을 곁들이면서 예수를 전하는 그런 예수, 나는 그런 예수를 이야기한 적도 없는데 왜 그런 예수가 유행을 하고 있지?” 이것은 진실이라는 것, 진리라는 것은 ⑦진리가 드러나는 현장에서 가짜진리도 겸해서 드러나기 마련이에요. 빛이 있어야 어두움이 어두움의 티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빛이 비추지 아니하면 어두움이 어두움인줄 몰랐지요.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왔으매 비로소 어두움이 자기정체를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노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숨겨진 악마의 일, 너무나 세속적인 일도 겸하여 나타나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 두 가지 예를 들면 그중 하나가,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해방하려고 할 때 모세는 혁명가 하나님인줄 알았어요.
자기가 애굽사람을 주먹으로 침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해방의 지도자격인 영웅적인 인물로 부각시켜서, 즉 열심당원이나 마찬가지죠, 이 애굽의 강한 권세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따로 뽑아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계획 파토 났습니다. 현상범 되어서 애굽에서 쫓겨났지요. 모세는 두 번 다시 주의 일 안한다고 삐져서 양치는 목부일 했고요. 반드시, ⑧그 실패의 절차가 필히 있어야 돼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지고 오병이어로 사람들에게 떡을 주니까 사람들의 반응이 아주 적나라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 그 대목을 제가 읽어볼게요.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임금 삼으려고 한 거예요. ‘야, 저 정도 능력자 같으면 우리가 믿을 만 하고 섬길 만 하다.’고 그들이 판단을 한 겁니다. 평가를 내린 거예요. ⑧예수님을 임금 삼겠다고 평가를 내리는 그 자체가 이미 인간들 속에는 은근히 본인이 원하는 메시아이기를 기다린 그 기저, 그라운드가 있었던 거예요. 마음바탕이 있었던 거예요.
뭔가 억눌린 것, 상처받은 것을 보상해주는 메시아기를 사람들은 간곡히 고대했던 겁니다. “메시아여 어서 오시옵소서.” 순수해 보이지요? 순수하지 않습니다. 어떤 메시아를 원했어요? 자기의 한풀이, 한을 풀어주는 메시아를 원했지요.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인, 성전중심이죠, 바리새인, 성경말씀 실천해서 성화해서 구원받겠다는 그것, 그 다음에 쿰란공동체, ‘세속은 더럽다. 하지만 우리끼리는 깨끗하다.’ 이것이 쿰란공동체. 네 번째, 눈에 보이는 실적을 남겨야 된다, 엎어버리자, 혁명으로.
대선이 있는데 그냥 대선 하지 말고 예수당 만드는 거예요. 예수당을 만들든지 안 그러면 한나라당을 신천지처럼 밀어주든지. 어쨌든간에 기독교를 옹호할 수 있는 당을 앞장세워서 나라자체가, 온 나라가 기독교화 되는 것을 추진하겠다는 의도, 그게 열심당원이에요. 왜 그런 메시아이고 싶어해요? 왜 그런 메시아이고 싶어합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살고 싶다는 악마의 정신이 우리를 이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고 싶다는 겁니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 편하게 밥먹고 살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창세기 1장부터 죽 보세요. 처음에 사람은 고기를 못 먹게 했어요. 식물, 그러니까 채식을 하면서 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채식하면서 살게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홍수 이후에는 채식이 아니라 육식도 허락했어요. 다만 피만 먹지 말라고 했지요.
구약성경의 이러한 발전은 뭐냐? 사람은 천하 누구라도 밥을 먹어야 산다는 그것이 구약에서 계속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어떻게 사느냐?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고 했어요. 기절할 노릇입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지 아니하면 너희속에 생명이 없다는 요한복음 6장. 교회 50년, 40년 다닌 것 소용없지요?
직분 받은 그것 아무 소용없어요. 목사된 것 아무 소용없습니다. 왜 갑자기 점프했지요? 밥을 먹고 유지될 수 있는 목숨은 목숨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목숨이 내가 유지할 가치가 없는 거라는 거예요. 요즘 이런 사태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적절한 성경구절이 하나 있어요. 교회 문 열면 3백만 원 벌금 낸다는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가정 적절한 구절이 뭐냐?
고린도후서 5장 15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할 말 없지요? 할 말 없지요. 교회요? 누구 좋으라고 교회에요? 뭘 원해서? 예수를 위해서 죽겠다고, 예수를 위해서 …….
그동안은 나를 위해서 죽겠다고 죽으라고 살았어요. 뭔가 죽으라고 내 목숨까지 다 던지면서 살았던 그 목표가 뭐냐 하면, 나였다는 말이지요. 그 나를 예수로 바꿔버리라는 말이지요. 나를 위해서 내 목숨을 아끼지 않은 것처럼 내가 귀했던 시절이 있었더라면, 이제는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나를 위해서 살던 그 시절은 옛날 시절이에요. 주님께서 내가 예상 못한 다른 나를 우리 속에다 집어넣었어요. 그러면 그 나가 두 개가 되는데 그 새로운 나는 내가 붙잡을 수 없는 나에요. 내가 따라가 잡을 수 없는 나입니다.
나는 나와 헤어져야 돼요. 밥을 먹고 나 밥 잘 먹었다고 자기 알리바이를 증거하는 밥 잘 먹었다는 그 나와, 예수의 살과 피로 새롭게 만든 나와 결별해야 됩니다. 이별정도가 아니라 결별해야 돼요.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그런 대담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어요. 사람마다 예수가 다 다르니까 다른 사람들이 사도바울보고 시비 안 걸었겠습니까?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아는데 너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아? 네가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나는 어디서 배웠는데 너는 어디서 배웠어?” 이렇게 나올 거지요. 그걸 염두에 두고 갈라디아서 1장 12절에 보면, 내가 아는 예수, 다시 말해서 12절에 보면,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야……, 이거 짱이네, 짱! 일진입니까, 일진? 이거 짱이지요. 내가 누구한테 들은 것이 아니고, 사람한테 배운 것도 아니고, 어디 신학교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나는 예수님께 직접 받았다는 말이지요. “직접 받았어. 됐냐? 게임이 되겠어? 직접 받았는데. 나라도, 심지어 천사라도 하늘의 그 유명한 천사라도, 심지어 나를 따르는 우리들이라 할지라도 내가 받은 계시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받은 계시는 뭘 유발하느냐 하면, 저주를 유발할 수 있는 계시고, 지옥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능력을 가진 계시가 지금 사도바울이 받은 계시고 사도바울이 아는 예수 그리스도에요. 누구하고 협의합니까? 누구하고 의논해요? 짱인데요 뭐. 이게 사도 아닙니까? 이게 사도라는 말이지요.
이걸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존재의 초과. 사도바울을 보게 되면 보통 인간이에요. 그러나 초과하는 것이 있어요. 사도바울도 존재하고 나도 존재해요. 사도바울도 있고, 나도 있고, 집사님도 있고 다 있어요. 그런데 초과되는 것, 초과되는 것이 있어야 돼요.
사도바울이 자기가 성도냐 아니냐, 할 때는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눈으로 보기에 있다는 그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것과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해서 뭔가 그 사람 ‘있음 + 초과’되는 것, 도저히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인간에게서 생성될 수 없는 것이 초과적으로 나와야 그게 바로 성도에요.
왜? 사도바울이 그랬으니까! 사도바울이 그랬으니까요. 나라가 교회 문 닫아라, 그런 소리 하더라도 내가 내 알리바이나 내 정당성 보호하려고 한다면 교회 문도 닫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일조차도 그런 일을 통해서 내가 생각하는 나 말고 초과된 나가 따로 있는 거예요. 주께서 새로 만들어준, 살과 피에서 나온, 밥으로 사는 나하고,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만들어진 나 사이에 밥으로 먹고 사는……, ‘오늘도 밥 먹어야 돼. 점심 먹어야 돼.’ 오늘도 점심 한다고 수고했습니다만, 이것과 이별을 해야 돼요.
그런데 이별을 못하고 있으니까 주께서 줘 패는 겁니다. 주께서 신종코로나를 보내서 줘 패는 거예요. 이별할 때 그냥 못하고, 주의 십자가라는 것은 뭐냐? 우리에게 사망선고를 내리는 겁니다.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너는 죽었어.” 그러니 이게 뭐냐? 마치 총 맞은 것처럼. 총 맞으면 구멍 생기잖아요. 총 맞게 되면 옛날 밥으로 먹고 살면서 ‘나 이정도야’라고 했던 그것, 그 추억이 흘러나와. 그 구멍에서 추억이 흘러나와요.
추억이 흘러나오는데 손으로 막아도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와. 그래서 기가차서 그냥 웃음만 나와요. “그냥 웃었어 그냥.” 백지영이 부른 <총 맞은 것처럼>의 가사입니다만. 총 맞은 것처럼 구멍이 뚫렸으니까 죽었지요. 밥으로 살던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그 나는 죽었어요. ‘나 월급 얼마다. 내가 번 월급으로 우리 가족 이렇게 살았다.’ 나는 그것이 나의 훈장 같고 자랑스러운데, 빵! 총으로 빵, 쏴버렸어요.
그렇게 쏘니까 내 잘난 맛에 살았던 그 모든 추억들이 마구마구 배설물로 똥오줌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이게 부끄러워서 막아도 손가락사이로 빠져나와요. 왜 자꾸 노래가 나오는데……, 그렇게 빠져나와요. 살과 피로 내가 된다. 정말 미쳤어요? 사람은 밥으로 살고 정육점의 고기는 먹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살과 피는 어디서 구합니까? 어느 정육점에서 팔아요, 그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이게 뭐냐? 내 존재가 할 수 없는 초과적인 내용이 사도바울에게 예수님의 성령의 계시로 주어진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 ⑨예수 그리스도안에는 일체 시기나 분쟁이 있을 수 없는 이유가 똑같은 입장이기 때문에, 다 같은 입장이거든요. 전부 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상처받고 태어났고, 누가 줬는지 모르지만 이상하게 상처가 있어요. 그 상처를 보상받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 다녔고, 거기서 예수라는 소리를 들었고, 예수님이 나의 모든 한풀이와 상처를 보듬어줄 줄 알았어요.
위로하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그 사랑의 하나님은 내 상처를 덮어줄 줄 알았지요. 나보고 총 쏠 줄은 몰랐지요. 나보고 사망선고 내릴 줄은 몰랐다는 그 말이지요. 나는, 우리는 밥 먹고 사는 이것을 유지하면 이것으로 천당 가는 줄 알았지요. 이것만 유지하면. 자꾸 이별하라고 하는데, 붙잡지도 못하는데 자꾸 붙잡으려고 해요. 이젠 놓으라는 말이지요. 이제는 결별하라는 그 말이지요. 옛날의 너와.
예수 그리스도의 범람과 다양성, 이걸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각축장시절이라 합니다. 사도가 열 두 명이나 되니까 나는 누구 계열, 누구 파라고 해서 열두 제자 아래 전부 다 그리스도가 다 달라요. 사도들이 나서서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성경을 기록하니 나중에 신학자들이 나서서 이것은 사도요한 파, 이것은 마태 파, 이것은 바울 파, 신약성경은 사도에 따라서 해석을 달리 해야 된다, 사도에 따라서 성경을 다 찢어야 된다, 이렇게들 주장하는 거예요.
베드로 파 따로 있고, 바울 파 따로 있는 거예요. 게바 파가 따로 있는 거예요. 교회에 그런 파들이 생긴 겁니다. 각축장이 되었어요. 드디어 초대교회 지나고 난 뒤에 이게 독점되는, 그리스도가 하나로 통일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게 바로 천주교의 등장입니다. 삼위일체부터 시작해서 신앙고백서라는 것을 만들어서 문구로, 신앙을 하나의 언어로 만들었어요.
말이 언어지, 말로 사도신경도 만들어놓고 딴생각 다 갖고 있어요. 그것은 모르지요. 이걸 제가 ‘독점그리스도’라고 독점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요, 어떤 사상이 들어오게 되면 그 사상은 처음에는 각축장이에요. 인간이 예수님을 세워놓고 오디션을 보는 거예요. “다음 예수님 나오세요.” 해놓고 ‘저거 마음에 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좍 세워놓고 골라잡는 거예요.
무대 뒤에, 백스테이지에 예수님을 세워놓고 마네킹처럼 하나씩 불러내서 어느 예수가 마음에 드는가를 자기가 집는 겁니다. 마치 사창가의 여자들을 남자가 고르듯이. 왜 그런데요?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느냐 하면, 내가 예수 믿겠다는 그 자체가 그게 마귀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아까 기도하시는 분이 복음의 핵심을 이야기했어요.
십자가마을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누구 칭찬하면 그 사람은 칭찬받는 그 날부터 망한다고. 의인을 통해서 영광 받는다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에요. 그러나 영광은 의를 가지고 영광 받는 것이 아니고 죄를 가지고 영광 받아요. 죄를 지어야 영광 받아요. 그게 핵심입니다. 포인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자기 알리바이 같은 것 좀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은 밥이나 먹던 시절이에요. 밥으로 유지되는 내 목숨이었습니다. 제가 아까 고린도후서 5장 말씀드렸지요. 전에는 어떻게 살았다? 나를 위해서 살았어요. 교회 다니는 것도 예수 믿는 것도 날 사랑한다니까 믿은 거예요. 나를 위해서.
내가 대상인데 예수라는 개념을 대상에 억지로 연결시킨 거예요. 내 존재를 붙드는 거예요. 초과하는 것이 없어요. 빵, 하고 나를 쏴서 사망선고를 내리고 실제로 나를 죽여주시는 그 어떤 분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라도 붙들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19세기, 1840년도에 마르크스 당시 공산당혁명이야기가 이렇습니다. ‘생산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궁핍해진다. 왜? 당신이 일한 대가를 누가 가져가는지 알아? 부르주아가, 자본가가 다 가져갔어.’ 이렇게 해서 혁명을 일으켰어요. 이게 1기 공산주의라 합니다. 또는 1기 자본주의. 자본가들이 서로 각축을 벌여서 노동자를 착취했던 시절.
제 2기자본주의가 뭐냐? 독점자본주의. 자본가가 자본가를 잠식해서 그야말로 재벌이 되는 독점자본주의. 중세의 독점그리스도와 똑 닮았어요. 세 번째가 후기자본주의가 뭐냐 하면, 국가가 자본에, 경제에 개입하는 것, 이걸 후기자본주의라 해요. 처음 공산주의 할 때는 뭐라고 했느냐? “세상이라 하는 것은 정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피땀 흘린 대가가 여러분이 보는 현실을 구축합니다. 역사를 이뤄갑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추상적인 것 말고.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신, 예수, 교회, 정치, 윤리, 도덕, 이것은 뭐냐? 그것은 허위의식, 거짓된 의식입니다.” 해서 그걸 이데올로기라, 이념이라 하는 거예요. 그건 허위의식이에요. 1기가 지나고 2기, 3기가 되면서 허위의식이라고 여겼던 그것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느냐 하면, 모든 대중들 속에 다 스며들었어요. 지도자들이 어떻게 하루 일과를 보내느냐가 못사는 사람들, 자기들의 소망이 되어버린 겁니다.
허위의식이라서 날려 보내야 될 것인데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스며들었어요. 지배층의 정신, 살아가는 그 모습을 아래층의 못사는 사람들이 닮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도 저렇게 하면 잘 살수 있다고.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물질을 제공하는 자가 정신마저 장악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질을 제공하는 자가.
모든 국민들에게 백만 원 씩 위로금을 줄 때 주는 쪽의 평소의 사상이 모든 국민들에게 다 스며들게 되어있다는 그 말이에요. 그것을 가지고 생명정치라 하는 겁니다. 생명정치라 하는 것은 사람을 살려주겠다는 정치를 하는 것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는 정치입니다. 죽이는 것이 아니고 살려주는 정치. 트럼프는 120만원씩 준다고 하잖아요. 우리나라는 백 만원 준다고 썰을 냈지만 그게 뭐냐? “사람들을 살려줄 테니까 너희들은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라.” 이게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권력을 잡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목숨이 밥으로 유지되는 목숨이에요. 그것은 존재의 초과가 아닙니다. 우리는 거기에 얽매여서 살고 있어요. 바들바들 떨면서 살아왔어요. 언제부터 나라가 교회를 그렇게 생각해줬습니까?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지 나라가 아니에요. 나라는 적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빌립보서 3장 20절에 나오잖아요.
밥으로 먹고 사는 인간은 이미 쓰레기에요. 결별이에요. 살과 피로 되어가는 생명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후기자본주의는 뭐냐? 사도요한의 1서, 2서, 3서에 나옵니다. 너희 안에 기름부음이 있으면 교회라는 것이 따로 필요 없다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 다 날라 가버립니다.
교회 만들고자 하는 노력자체가 요한일서, 요한계시록에 가면 그 자체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교회가 있는데 왜 교회를 만들지요? 교회가 있잖아요. 성령의 공동체가 교회잖아요. 왜 굳이 교회를 만들려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예배당 지어서 대한예수교 간판 걸고, 왜 그런 짓을 하느냐 이 말이지요.
원래 과학이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전체로 보기 때문에 1로 봐서 과학은 그 1에 접근하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과학은 수학에서 공식을 만들어놓고 하거든요. 집을 하나 지어도 중력의 법칙을 이겨야 집이 안 무너지니까 중력의 법칙 공식 들어가고요. 이왕 중력을 이기는 거 가장 헐값에, 제일 싼 재료로도 어떻게 안전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경제적인 효용까지 수학적인 계산을 해놓고 그 다음 거기에 따라서 설계해놓고 설계에 따라서 업자들이 집을 짓잖아요.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공식을 따라가는데 그 공식이 뭐냐? 절대적인 하나를 눈으로 보고 싶다는 거예요. 방법은 쪼개는 겁니다. 숫자를 마구마구 쪼개놓고, 그렇게 쪼개면 그게 직선이 아니고 모든 변화고, 막대모양으로 올라가는 그 모든 변화를 아주 잘게잘게 쪼개면 잘게 쪼개진 그 하나가 직사각형이 되거든요.
그러면, 세로 곱하기 가로를 계산하면 넓이가 나온다고요. 쪼개진 그 숫자가 n부터 무한대까지 가요. 쪼개는 것을 ∑(시그마)라고 하고, 그것을 lim(limit)라 해서 n부터 ∞(무한대)까지 하고, 그걸 지렁이같이 ∫(인테그랄)이라 해서 총 집합이 되어버리면 그게 합치되는 거예요. 절대적인 1이 나오는 거예요.
그걸 인간은 실험했고 성공했습니다. “이 세상은 절대적인 1을 만드는 것이다.” 이게 바로 과학입니다. 그러면 철학은 뭐냐? 철학은 진리를 생각하는 거예요. 생각하고, 논리를 따지고, 가장 정확한 말로 따져보니까 나중에 이게 공백,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뭔가 따라잡았다고 생각하는데 가보니까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파랑새가 예뻐서 파랑새를 잡아보니 이게 똥냄새가 나요. 행복의 파랑새를 잡았는데 막상 잡고 보니까 똥냄새가 나는 거예요. “세상에 이렇게 헛되고 헛된 것을 얻으려고 평생을 헛된 짓을 했는가?” 이게 철학입니다. 그러면 종교는 뭐냐? 종교는 신의 내용을 내가 채우는 겁니다. 신은 뭐냐? 나의 화신이에요. 나의 외형체가 신이 되는 겁니다. ‘너는 신이 될 수 있다. 너는 신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복음은 뭐냐?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거기 보면 복음은 뭐냐? “나를 만지지 말라.” 이게 복음이에요. “나를 만지지 말라. 어딜 시건방지게 나를 만져? 네가 나를 잡아서 네 욕구를 채울 수 있다고? 아니야. 내가 찾아갈 거야. 내가 찾아갈 거야. 너는 평생 죄만 지어. 내가 찾아갈 거야.”
너의 죄는 뭐냐? 그동안 인간들이, 아담에 속한 인간들이 힘을 합해서 하나님을 재판했고, 복수했고, 하나님을 저주했거든요. 오신 예수님을. 죄용서가 무슨 죄용서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학했고 복수했습니다. 그 복수한 죄를 용서받는 거예요. ‘나는 진짜 하나님이 너무 싫어. 내 인생을 이렇게 꼬이게 만든 주님을 죽이고 싶도록 너무 미웠어.’ 그 죄에 대해서 용서받아요.
그래야 우리가 할 말이 없지요. 분쟁이나 시기가 없는 거예요. 다툼이 없는 거예요. 같은 입장에 있기 때문에. 복수가 먼저 있고 용서는 그 다음에 있어요. 복수를 실컷 하게 만들어놓고, 주님께서 실컷 얻어터지게 만들어놓고, 실컷 뺨 때리고 짓밟히게 만들어놓고 “자, 다 때렸나? 다 조졌지? 나를 아주 죽였지? 내가 이제 너 복수할거야.” 할 때 우리가 복수당할 만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각인할 때 우리는 나의 자아와 헤어지고 이별하게 됩니다.
그 복수, 우리가 주님을 왜 그렇게 미워했던가요? 밥으로 만든 목숨이기에, 돈으로 만든 내 목숨이기에. 나 하나 살기 위해서 어떤 짓도 감수하고 다 했던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치었던 사람이 누구냐? 예수님도 같이 치인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기뻐하는 이유는 뭐냐? 네가 너희에게 그리스도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누구에게 그리스도를 줄 수 없어요.
주는 것이 아니고 이렇습니다. “내가 받은 것 너도 있잖아.” 확인시켜 주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 받았거든. 어디에 주님을 넣어놨더라? 아 이 주머니에 넣어놓았네. 거봐!” 네 안에 있음보다 초과되는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내가 밥먹고 살려고 하는 이것을 아주 개무시하는 새로운 생명, 살과 피에서 나온, 십자가에서 나온 생명을 이렇게 받았다는 말이지요.
“잘 뒤져봐. 너도 받았어.”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나도 받았는데 너도 받았을 거야. 안 받았으면 할 수 없고.” 안 받았으면 주께서 안준 모양입니다. 하지만 “내가 받았듯이 너도 받았을 수가 있어. 한번 뒤져봐. 있지? 그러니까 우리는 한 형제잖아.” 이게 교회고 이게 바로 전도 아닙니까? 내가 뭘 누굴 가르쳐요?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이 뭘 가르치고 누가 뭘 줄 수가 있어요? 못줘요.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 39절, 40절에서 아주 굉장히 심오하게 이야기했습니다. 39절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양이 되어서 오른편에 있어서 천국가게 된 사람이 도리어 예수님에게 반문합니다. “예수님이 나그네 되었을 때나, 헐벗거나, 주리거나 할 때 언제 제가 드렸습니까?” 하고 오히려 반문하잖아요.
반문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다시 말해서 주님이 우리한테 줘놓고 주님은 말을 바꿔요. 주님이 우리한테 줘놓고, 받은 네가 나에게 줬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있는 거예요.
이걸 모르면 성경해석 하나도 안됩니다. 주님이 먼저 줬어요. “잘 뒤져봐. 안쪽 주머니나 혹은 쓰레기통에 던져놨던지 하여간 있을 거야.” 주님이 먼저 자기 살과 피를 우리에게 줬어요. 살과 피가 없으면 영생이 없으니까. 줬다는 말이지요. 줘놓고 하는 말이, 뭐라고 바꾸는가? 왜 저에게 주십니까? 할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예수님 자신은 여기서 빠져버리는 거예요.
그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냐 하면, 어린애가 아니고 지극히 작은 자란 새로운 나가 발생된 사람이에요. 새로운 나는 밥으로 사는 내가 만들어낼 수가 없고 내 능력 밖의, 내가 할 수 없는, 내가 불가능한, 내가 해내지 못한 그걸 근거로 해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놓았어요.
그 새로운 나의 특징은 뭐냐? 주님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놓고 그 인간이 남에게 무심코 한 그것을 예수님이 도로 회수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해석을 가하게 되는 그러한 대상자로서의 새로운 나, 예수님만 증거하고,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음을 증거하게 하셔놓고 내 형제라고 보듬어 주시는 대상, 그것이 바로 내가 분석한 내가 아니라 주님이 스스로 우리에게 살과 피를 주신 새롭게 등장한, 없는데서 새롭게 등장한 주의 형제에요.
그러니까 베드로전서 4장에도, 누구든지 봉사하려거든 네 힘으로 하지 말고 주께서 주신 힘으로 하라는 말이 그 말이에요. 10, 11절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아하, 내가 형제한테 한 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셨구나.’를 아는 겁니다. ‘주께서 하셨다. 그런데 그 주께서 하게 하신 나는 옛날 밥으로 먹든, 내 자존심 챙기던 나가 아니고 나에게 새로 생성시킨 나이기에 주께서 새로 생성시킨 나, 주 안에 있는 나, 주를 위해서 있는 나, 그 나’에 대해서 마태복음 25장은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교회 오는 것도 주께서 오게 하셨고, 오고 싶어도 못 오게 하는 것도 주께서 하셨기 때문에 ‘온 것이 잘했다.’ 혹은 ‘못 온 것이 잘못했다.’ 그런 시비나 다툼이 있으면 안돼요. 옛날 밥으로 먹고 사는 인간은요, 경쟁밖에 없어요. 왜? 경쟁해야 내가 상대적으로 자기의가 생기고 자기 정당함, 알리바이가 성립되기에 그렇습니다. 알리바이 가지고 뭐하느냐? 자기의 알 수 없는 상처를 그런 식으로 자꾸 덮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도 나는 잘났어. 그래도 나는 잘난 거야. 나는 별 잘못이 없어.’
주님께서 새로운 자아를 미리 다 만들어놨어요. 주님께서는 다 계획이 있습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양 준일이라는, <레베카>라는 노래를 불렀던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시들어버린 화분에 아무리 물을 줘도 한번 시든 것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복음적으로 들리는지요.
교회 다니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예배참석하고, 성경공부하고, 아무리 내가 나에게 물 뿌리고, 해독주스까지 뿌리고, 아무리 해도 시들어버린 화분은 절대로 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포기하세요. 포기하세요. 나를 포기하고 결별하세요.
그게 나를 떼 내는, 아프더라도 그게 사도바울에게는 뭐냐? 오늘 본문에, “이러나저러나 이게 내 소관이 아니고 주님소관이다. 나쁜 것이 있어야 옳은 것이 나오고, 어둠이 있어야 빛이 나오니까, 죄가 있어야 의가 나오니까 나는 어떤 경우라도 그리스도만 전파된다면 나는 그 자체가 기쁘다! 내가 할 일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주께서 주셨겠지.” 그게 누굴까요? 윤 복희……, 여러분! 여러분의 누가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게 여러분이 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지금도 쉬지 않고 지금 이 순간 일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주님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내 소유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만지지 말라는 그 말씀, 우리가 새겨들어서 주께서 우리를 만졌다는 사실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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