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분리(빌1;7-11) 2003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3. 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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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리 200308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분리(빌립보서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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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20-03-08 13:26 
분리 

2020년 3월 8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1:7-11

(1: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1: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주님이 직접 하시는 모든 일은 자기 백성을 십자가로 데려가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현 인간들의 본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인이 예수님의 심장을 가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말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못에 박히고 옆구리에 창을 찔리면서도 예수님은 그 어떤 도움도 받지를 못했습니다. 즉 모든 이로부터 버림받은 겁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님의 이러한 처지와 자신도 처지도 동일시하는 자들이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심장을 공유하는 사람입니다. 심장을 공유한다는 말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과 심장을 공유한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서로 사랑하기에 여기에는 주님과 성도만이 아는 비밀이 이야기되는 겁니다. 마치 구약 아가에서 남녀가 서로만 아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 사이의 이야기는 남들은 몰라도 되는 자기들만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사랑이란 세상과 단절된 상황에서만 가능합니다. 단절됨을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즐겁습니다. 왜냐하면 기적입니다. 사도 바울이 소개하는 자신의 입장, 곧 “나는 예수님의 심장을 가졌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귀신이 오히려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행 19:15) 즉 악마는 압니다. 성령받은 자와 그렇지 않는 자가 누군지 너무나도 잘 압니다. 성령 받지도 못한 자가 사도 바울의 흉내를 내니 귀신은 가차없는 그 인간을 억제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인수를 늘이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그 일을 사도바울이 계속하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숨겨진 주의 백성이 여전히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 18:10) 참된 백성인지 아닌지를 따질 수 있는 기준을 사도 바울은 자기 설교 안에 늘 담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사도행전 17:3입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즉 사람들이 원하고 있고 바라고 있는 기적의 내용을 사도 바울은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본디 인간이란 죄인이라고 하나님에게 버림받아도 마땅하다는 겁니다. 즉 단절과 인간의 무능함을 언급하는 겁니다. 이는 곧 이 세상에 구원도 없고 행복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참으로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님의 사랑 앞에서 자신이 사라짐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을 찾아 헤매지만 기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자신이 책임질 일이 애시당초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복음의 변명이요 확정함’입니다.

성도는 세상에 그 어떤 일에 흔들릴 필요가 없는 이유는, 복음의 확정함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귀한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가리는 두꺼운 옷들을 한꺼풀 두 꺼풀을 벗겨 납니다. “어디보자, 너의 제일 깊숙한 곳에 무엇이 들었나?‘라고 관찰해보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평소에 인간들의 삶과는 다른 삶으로 성도에게만 분리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심장에 들어오기 전에 인간들은 자기 심장으로 살아갑니다. 그 안에는 조상으로부터 물러 받은 ‘선악 의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일평생을 두고서 ‘선-악’ 사이에서 놀이를 하게 됩니다.

즉 내가 어느 정도까지 선할 수 있고 어디 정도까지 악에서 멀어졌는지를 늘 탐색하면서 그것으로 자기 정당성으로 삼게 됩니다. 남에게 자랑거리가 될 만한 것들로 자신을 변호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놀이는 늘 인간 자신을 위축시킵니다. 하나님께서, 혹은 주님께서 부재(안 계심)한 상태에서 믿을 것은 자기 자신의 행함 뿐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5장에서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자비를 받고서는 그동안 자신이 의지했던 담요를 들고 답니다. 이는 자신과 담요의 분리를 보여주는 겁니다. 세상과의 이별이며 본리됨을 증거하는 겁니다. 구약 창세기 9장에서도 동일한 취지가 나옵니다. 다같이 방주 안에 있으면서 홍수 심판을 면제받은 한 식구들이 지상 생활에 돌입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 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 본문에서 우리는 평소에 인간들이 자신이 선함을 증명하려는 놀이를 평소대로 하고 있는 입장인 것을 먼저 고려해야 합니다. 노아는 자식과 손자에게 저주를 퍼붓는데 과연 함과 가나안에서 저주를 줄만한 자격이 있는 정당한 존재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술 먹고 하체를 드러낸 주책바가지 태도를 위한 것은 아버지인 노아가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자기 잘못을 자식에게 먼저 사과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노아 안에 축복도 있고 저주도 함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노아 안에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자들이 천국갈까요?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모습이 곧 자신들의 본모습인 것을 인정하는 자들이 천국갑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통해서 살려주신 그 취지를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하체를 덮어주는 것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은 아버지의 수치스러움과 자신을 따로 책정한 겁니다. 그만큼 자기 정당성 놀이에 마음이 빼앗긴 겁니다. 이런 자들이 지옥갑니다.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덮어씌움을 입은 자는 이처럼 저주받은 세상과 자진 격리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님, 복음의 확정함에 근거한 주님과의 사랑으로 족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20-03-09 08:31 
3강-빌 1장 7-11(분리)2003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1장 7-11입니다. 신약성경 317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1:7-11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의 편지의 내용이 무슨 말인지를 하나도 못 알아듣습니다. 지금 중요한 내용을 여기에 꾸역꾸역 담아놓은 것 같아요. 평소에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그런 투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을 듣게 되면, 사도바울에게는 뭔가 중첩이 되어 있고, 이 말을 듣는 우리는 달랑 내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본인이 갖고 있는 그 세계, 영역, 그 영역에 대해서 사도바울 본인은 다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고 나는 밥 먹고 사는 그것밖에 모르고. 그래서 임팩트 있게 확 다가올 때 해석자체가 성립이……, 해석하겠다는 그 자체도 우리한테 무리하기 짝이 없는 일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7절에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할 때 우리는 시비 걸고 싶습니다. “당신이 뭔데 ‘마땅하다, 안하다’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느냐? 나는 평소에 ‘마땅하냐, 안하냐’를 내가 결정했어. 네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야.” 이런 반발이 탁 튀어나오지요.

그 다음에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우리가 언제 사도바울 개인의 사적인 일에 참여했습니까? 참여한 적 없거든요. 그리고 7절에 “나의 매임과” 사도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옥에 갇혔는데 우리가 같이 갇혀야 되겠어요? “그건 당신 일이잖아. 당신이 옥에 갇혔고 나는 옥에 갇히기 싫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옥에 갇힌 것처럼 너희들도 옥에 갇혀 있는 심정이지 그지?”라고 묻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더 놀라운 사실은, “복음의 변명함과 확정함” ‘확정함’이라고 되어 있어요. 확정함이라는 말은 뭐냐? “더 이상 달라질 것 없는 최종이 너희 안에 깊숙이 담겨 있지 그지?”라고 묻는 거예요.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런 일은, 세상일의 모든 것은 시시한 일이라고 할 정도로 무게감 있는 그 내용이 너희 안에 깊숙이 들어 있지? 그지? 그러니까 너희는 내가 옥에 갇혀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너희들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지? 그지?”라고 지금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쑥 들어온 거예요. 그냥 훅 들어온 거예요. 우리가 매일같이 생각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도바울 본인이 알고 있는 그 세계 가지고 “너 나하고 같은 패잖아. 같은 편이잖아.” 하고 훅 들어오는 겁니다.

특히 “복음의 변명함”이라는 것은 뭐냐? 사도행전에 나오듯이, “내가 세상에 돌아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부활한 이것이 최종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너희들이 어떤 철학을 동원하고 과학을 동원해도 최종적인 진리는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이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나는 변명했는데 너희도 똑같이 나처럼 변명했지? 그지?” 라고 묻는 겁니다.

잘 이해 안 되시지요? 사도행전 17장 2,3절에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사도바울이 모든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의 핵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고난 받는 거지요. “그리스도가 해(고난)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것을 증명하고”

이게 사도바울의 설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그 효과가 있는 사람이 여기에서도 있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물론 기적적이지만 사도바울 본인이 기적을 받았기 때문에, 삼층천에 올라갔기 때문에, 기적 받았기 때문에 이 기적 받은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있을 수가 있는 거예요.

이게 오늘 본문에서 복음의 변명함입니다. 복음의 변명함이고, 그리고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복음의 확정함이고. 사도바울이 말을 던질 때 그 안에 함축된 뭐가 있어요. 쉽게 가겠습니다. 등록교인이 한 백 명 있다 합시다. “등록된 백 명 가운데 그 중 신자 하나 있으면 횡재한 줄 알아라.” 이 말이에요. 등록교인이 백 명 있는데 그 중에 신자가 한명 있다면 ‘웬 기적? 세상에 이런 기적을.’ 그렇게 생각하라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 오는 것은 가능한 일이에요. 그냥 걸어오면 돼요. 그러나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 그런가? 구원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행복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행복도 없고, 구원도 없어요. 행복도 없고, 구원도 없고,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도 없고요. 그것은 다 인간들이 조작한 거고 전혀 없어요.

없는데, 사도바울은 있다고 지금 계속 강변하고 있어요. 있다는 거예요. 없는게 분명한데 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어떤 조건으로 그렇게 말하는가? 8절에 나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게 심정이 아닙니다. 심장입니다. heart, 심장. 원뜻이 그래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노라.”

이 말은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지 않으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므니다.’ 그런 뜻이에요. 나처럼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은 사람이라고 쳐줄 수가 없다는 그런 뜻이에요. 이 말은 예수님과 같은 심장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같이 못박힌 동기동창생이라 그 말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십자가에 꽂힐 때 너 나하고 같이 죽었잖아. 같은 심장을 가졌잖아.”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못 박혔지요? 옆구리는 창에 찔렸지요. 그 때 예수님 누가 도와줬습니까? 아무도 안 도와줬지요. 그게 바로 예수님 내 모습이고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그 상황이 그대로 예수님과 똑같이 예수님 못 박힐 그 때 그 심장, 또는 예수님의 마음가짐, 예수님의 아픔을 동일하게 공유하고 있는 사람, 그게 바로 너희들이라는 거예요. 성령 받은 너희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복음전할 때 교인 모으려고 복음 안전했어요. 기본 자체가요, ‘신자는 없다. 없지만 주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신자는 없어요. 인간은 불가능하니까. ‘신자는 없는데 주께서 주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아직까지 주께서 재림 안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내가 주님과 같은 심장을 가졌기 때문에 나처럼 또 성령 받아서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 사람이 누굴꼬?’ 하고 찾아갈 때에 그 찾아가는 그 내용이 뭐냐?

확정된 내용이 네 속에 있는 사람만이 내말을 알아듣는 거예요. 확정된 것, 세상이 어떤 난리를 쳐도 그게 아무문제 아니에요. 확정된 것. 그것을 에베소서 3장에서는 ‘비밀’이라고 하는데요. 같은 심장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과 그 비밀을 공유할 수가 있어요.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성경이 이렇게 두껍잖아요. 이렇게 두꺼워도 아주 간단히 말씀드려서 이렇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받아요? 어떻게 하면 천국갈 수 있습니까?” 이렇게 초조하게 떨지 마시고요. 딱 하나만 생각하면 돼요.

“우리 사랑하잖아.”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사랑한다는데. “우리 같은 심장 가졌잖아. 우리 둘이 이야기 통하잖아. 너 나하고 이야기 통하잖아. 십자가가 어떤 내용인지, 부활이 뭔지 내가 성령 줬잖아. 내 마음 줬잖아. 내 마음이 너에게 가서 십자가 부활이 뭔지를 알잖아. 우리가 사랑하면 되잖아. 전염병이 어떻고 신종코로나가 어떻고 그런 것 생각하지 말고, 다른 교인들이 나보고 뭐라고 욕하든지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목사가 나보고 뭐라고 욕하든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우리 가족이 뭐라고 나를 헐뜯든지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주님이 말합니다. “너 나하고 우리 사랑하는 사이잖아. 그러면 되었잖아.”

미움 받는 사이 아니거든요. 주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이 사랑을, 주의 심장을 떼 준 거예요.서로 이야기 통하게 전화기 준 거예요. 주님 전화기, 갤럭시 10, 주께서 자기가 쓰던 전화기를 우리 속에 집어넣어 버린 거예요. “자, 이야기 통하지? 대화 되지, 그지?”

무슨 교회가 왜 필요합니까? 교단이 왜 필요해요? 더 나아가서 목사가 왜 필요합니까?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함이에요. 기적이 되려면 차단되어야 돼요. 어떤 인간의 노력도 천국 못가게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 차단의 흔적이 뭐냐? 십자가였어요. 모든 인간은 예수님 죽이는 그것이 가하다 했습니다. 차단되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구원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세상에 다니는 이유가 사도행전 18장 10절에 보면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다시 말해서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가 있을 것이다(행 13:48). 나는 누군지 몰라요. 하지만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 그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찾는가? 십자가와 부활 그 이야기만으로 찾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인간의 능력으로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빌립보서에서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사모하고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고 언급하는 것, 그걸 세상말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나의 관찰자가 아니라는 거지요. 최후의 관찰자는 따로 있고, 그분은 늘 내려다보시고, 세상이 인간의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분이 세상을 관찰하고 계시는 거예요.

모든 일의 시작점이 바로 십자가에서부터 새롭게 출발하는 겁니다. 그분이 관찰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왜 사도바울이 인간들에게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면 사람을 구원시킬 것’으로 이야기 안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사도바울이 하는 모든 일이 사도바울 본인의 능력이 아니에요. 그게 사도행전 19장에 나옵니다. 거기 보면 사도바울이 하는 일이 인간의 일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어요.

11, 12절에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그런데 이걸 어떤 사람이 보고 자기도 해보겠다고 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하는 것을 봤거든요.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가라” 하니까 그걸 유념해서 봤던 거예요. 그래서 자기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가라, 라고 사도바울처럼 같은 톤으로 했다는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하니까 귀신이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스게와의 일곱아들도 그렇게 했더니만 15절에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예수와 바울이 한패 먹고요, 그 외 모든 사람은 악마에 속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사도가 되어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지시에 의해서 복음을 전하게 되면 귀신이 물러가면서 뭐라고 하느냐?

“나는 예수님이 누군가를 알뿐더러 그리고 사도바울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아는데 너는 나하고 한패인데 네가 왜 나를 쫒아내?”라는 이야기가 사도행전 19장에 나옵니다. 이 말은,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의 힘으로 교회를 하겠다든지 설교를 하겠다는 것은 귀신이 콧방귀 뀔 일이라는 말이지요.

어떤 사람이 사람 모은다고 해서 그걸 흉내 내면 안된다는 그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성령이 하시는 일은 사도바울조차도 성령보고 명령할 권한이 없습니다. 왜냐?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성도는 그 어떤 책임감도 질 필요가 없어요. 애당초 이 세상은 인간이 책임질 일을 하나님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일에 대해서 인간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은 세상에 일어난 일로 인하여 인간이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걸 오늘 빌립보서 1장 8절에서는 ‘확정되어 있다.’ 즉 ‘나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내 안에 담겨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9절, 10절에 보면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죽 나오거든요.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른다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에 목적이 있는데 본래 하나님의 목적이 뭐냐? 하나님이 하시는 그 최종적인 목적은 무조건이에요. 아까 이야기한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최종적이고 확정된 그것은 사랑이에요.

주님과 사랑의 교제에 있으면 더 이상 아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재명 경기지사가 이런 발언을 해서 제가 오늘 낮설교에 참 도움 된다 했어요. 자기가 지금 고민 중에 있는데 모든 교회의 예배를 강제로 다 문 닫게 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강제로 한다는 것은 경찰을 보낸다는 뜻이겠지요. “강제로 교회 문을 닫게 만들고 싶다. 말해도 안 들으니까. 교회부터 해서 말 안 듣는 나이트클럽, 이 모든 것을 강제로 문 닫게 하겠다.”고 한 겁니다.

그게 오늘 설교에 정말 도움 되는 이유가, 이 세상이 강제적입니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하니까 뭔가 내 자유가 허용되는 것처럼 생겼지요? 그러나 위기상황에서는……, 수요일에 제가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인간의 최고 등급은 국가라고요. 북한 보세요. 북한의 최고등급은 김 정은이잖아요. 서른일곱 먹은 김 정은이 그게 최고등급이에요. 존엄한 이름, 태양의 아들 존엄한 이름이에요. 위대한 영도자, 지도자에요.

경기지사가 “경기도에 있는 2천 7백여 개의 교회를 강제로 다 문 닫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좋은 생각이 있거든 알려주세요.”라고 했거든요. 무조건적이에요. 그게 왜 기쁘냐 하면, 구원받는 것도 무조건적이에요. 예수님이 이 재명 도지사에요. 무조건적이에요. 무조건 천국 와야 돼요, 무조건! 토 달지 말고 무조건 와야 돼요. 지옥구경 못합니다. 지옥은 이 땅에서 구경하면 돼요. 지금 아비규환 아닙니까? 우리 동네만 청정지역이지 우리 동네 빼놓고는 전부 다 아비규환이에요. 난리도 아니라니까요.

왜 사람들이 힘드냐 하면, 본인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산다고, 내 자유를 만끽한다고 했는데 갑자기 전염병이 일어나고 강제조치가 들어오게 되면서 전부 다 강제로 그야말로 마스크 안하면 안 되도록 했어요. 내가 얼마전에 마트에 갔는데 마스크 안하고 들어갔거든요. 대번에 직원이 “아저씨 마스크 하세요.” 얼른 “예, 처음 알았습니다.” 강제조치에 들어가는 겁니다.

세상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우리는 악마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어요. 이게 우리의 원래모습이에요. 주님께서 하는 작업은 우리의 원래모습을 찾는 작업이에요. 성경자체가. 네가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강제조치로 천국백성이 된 겁니다. 여기에 토 달고 이의 달고 그런 것 없어요. 그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내가 사랑한다잖아 내가! 내가 사랑한다잖아!”

사람이 자꾸 옷을 걸치는데,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가 하면, 심판이라는 것이 딴 게 아닙니다. 우리가 걸치고 있는 그 여러 겹의 옷을 하나 둘씩 벗겨내는 것이 심판이라는 거예요.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안 받아도 돼요.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 주셨거든요. 은혜 주신 것, 너무 겹겹이 쌓인 옷 때문에 우리 자신의 모습이 가려져 있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하나 둘 은혜를 걷어내는 거예요. 그동안 주신 것 걷어내게 되면 우리의 발가벗은 모습이 뭐냐?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찔리고, 아무 도움도 없이 완전히 정육점의 고기처럼 축 늘어져서 피를 뚝뚝 흘리는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 버림받은, 예수님 자신의 모습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예수님이 대신 보여줬거든요. 그 자리가 출발점이에요.

원래 그래야 돼요. 그래야 되는데 은혜를 너무 많이 줬어요, 은혜를. 은혜를 너무 많이 주다 보니까 그걸 당연하다고 여긴 거예요, 그동안. 이게 마태복음 6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31-33)고 했다고요.

그 나라와 의. 하늘나라와 너와 연결되어 있다는 그 연결성, 그걸 찾으라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뭐냐? 주님께서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기 때문에 하나 둘 씩 뽑아낸다는 거예요. 다 벗겨내는 작업을 통해서. “잘 벗겨내십니다. 그저 내 모습이 십자가에 죽어 마땅함만 알게 하신다면 더는 큰 행복이 없습니다. 내가 내 본모습을 아는 이것이 바로 사랑이군요.” 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바로 주님의 사랑만 감사하는 사람이에요. 우리교회 어느 집사님이 아침마다 로마서를 읽고 있답니다. 내가 그 소리 듣고는 ‘아, 아직도 그런 분이 계시는구나. 아침마다 성경을 보다니. 돈도 안되는데 그걸 왜보지?’ 로마서를 보면서 느낀 점이 있답니다. 아무리 봐도 로마서 9장, 물론 1장부터 9장까지 다 그렇겠지만, 로마서 9장을 봤는데 “목사님, 아무리 봐도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거예요. 내가 믿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래야 주님의 기적으로, 생생하게 기적으로 덮여있고, 은혜로 덮여 있고, 사랑으로 덮여 있음을, 주님이 하신 일이 비로소 눈에 뜨이는 거예요. 내가 나의 관찰자가 아니라 관찰자는 따로 있고 그분이, 주님이 너보다 더 월등하게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그것에 눈뜨는 것, 그게 바로 기적 아닙니까? 딴 것이 뭐가 기적이겠어요? 우리는 우리자신밖에 모르는데.

어떤 소설에 이런 것이 있어요. 캐나다 작가가 썼는지 잘 모르겠어요. 미국사람이 사립탐정을 보고 예수님이 한번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어요. 재미있는 아이디어지요? 자꾸 교회는 왜 예수가 있다고 하는지 자기보기에는 예수가 없는데. 그래서 사립탐정을 고용해서 예수를 한 번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찾아보니 사립탐정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을 찾기는 찾았는데 찾는 도중에 본인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본인이 사라진 거예요. 이 말은, 내 자서전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 주님이었지 내 자서전 안에서 내가 사라지는 것, 이게 성경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누구나 찾으려고 하고, 천국을 찾으려고 해요. 그러나 주님의 능력이 와버리면 내가 어떠함이, 내가 어떻게 정당한지, 이런 것이 다 무의미해져 버려요. 이게 소멸되어 버린다고요. 내가 얼마나 기도했고, 내가 얼마나 헌금했고, 내가 얼마나 뭘 하고, 이게 다 소멸되어 버린다고요.

그래서 지난 금요일에 그것을 두고 ‘갉아 먹는다’는 표현을 했어요. 주님의 시간이 내 시간을 갉아먹는다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안 찾아오면 어떻게 하는가? 안 찾아오게 되면 인간은 자기 인생을 가지고 놀이를 벌이는데 어떤 놀이냐?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었기 때문에 내가 어느 정도 선할 수 있고 덜 악하냐를 가지고 놀이를 하는 거예요.

이 놀이에 대해서 프로이트라는 정신분석학자가 인간의 정신을 분석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돌을 좀 지난 어린 애가 있는데, 18개월쯤 지난 애 같은데 엄마가 장에 간다고 애를 집에 두고 가버렸어요. 애가 죽어라고 울지요. 엄마보고 가지 말라고. 그런데 엄마는 장보러 가야 된다고 하면서 갔습니다. 그 때 혼자 남겨진 애를 관찰했어요. 엄마가 부재한 상태에서 애는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봤어요.

실패를 가지고 노는데 실패를 던지니까 실패가 또르르 하고 저쪽으로 굴러가지요. 그러니까 애가 다시 실을 잡아 당겨서 실패를 자기 쪽으로 가져오는 거예요. ‘실패가 여기 있다. 어? 여기 없고 저기 있네.’ 저기 있는 것을 잡아당기니 ‘여기에 있네.’ 엄마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계속 그 놀이를 하는 거예요. ‘포르-다(fort-da)’라는 놀이인데요. 있다, 없다, 있다, 없다, 있다 없다, 를 계속 실패 가지고 던졌다 잡아 당겼다, 다시 던졌다 잡아당기면서 논다 그 말이지요.

인간이 평생 하는 놀이가 뭐냐? ‘나는 선하냐? 나는 악하냐? 나는 선하냐? 악하냐?’ 이 놀이를 평생토록 하고 있어요. ‘내가 어느 정도로 정당해야 천당 갈 수 있는가? 혹시 내가 여기서 미끄러지면 지옥가지 않는가? 여기에 내 착한 것이 있다. 어? 나는 착하지 않네. 나쁜 짓을 했나? 어떡하지? 오, 나는 착하네. 어? 또 내가 나쁜 짓을 했네.’

선악을 따먹었으니까, 모든 인간은 선악을 따먹은 그 후손들이니까 갖고 노는 놀이가 ‘나는 선할까, 나는 악할까’의 그 놀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평생토록. 그리고 선한 순위를 매겨요. 순위를 매기고 거기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제가 그 순위에 아무 이름이나 붙여볼게요. 1등, 임 영웅, 2등, 이 찬원, 3등 영탁, 아무 이름이나 붙이는 거예요. 4등, 정 동원, 5등, 김 호중, 6등, 장 민호, 7등, 한 희재.

지금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붙인 거예요. 그러면 7등에 있는 사람은 어딜 보는가? 1등 임 영웅, 이름도 어려운데 그 1등에 따라 붙이려고 노력을 하겠지요. 1등해야 1억 상금을 타니까. 2등 이 찬원은 어떻게 하든 임 영웅을 따라붙으려고 애를 쓰겠지요. 그걸 보고 있는 34퍼센트 시청률의 그 시청자들은 그걸 쳐다보면서 ‘이 신종코로나 시대에 역시 믿을 것은 tv조선밖에 없다. 네가 나를 기쁘게 하는구나.’ 미스터트로트만 쳐다보면서 위로를 받는 겁니다.

내가 미는 인간이 1등을 하는지, 이 찬원이가 역전해서 우승을 하는지. 1등 그것이 선한 것이니까. 그게 인생이고 인생은 놀이입니다. 인생은 그저 노닥거리는 것이 인생이에요, 그냥. 내가 어디까지 선할 수 있고 어디까지 착할 수 있는가? 그것은 주님의 심장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가 부재한 상태에서, 엄마가 없는 상태에서, 신이 없는 상태에서 내가 나하고 노닥거리는 거예요. ‘착하니까 천당 보내주겠지’ 그렇게 하면서. 진리를 믿으며 순수를 지키며.

그러나 진리를 믿고 순수를 지키는 그것이 자기가 자신을 얼마나 위축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렇다면 성경내용을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되면 성경은 뭐냐? 첫 자리, 십자가 자리죠, 도대체 인간의 어떤 자리에 있었기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되는가? 그걸 같이 보여주기 위해서 일단 분리를 해야 돼요.

첫 번째, 원심분리기를 가지고 진짜 내 모습을 찾아가야 됩니다.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 5장 이야기를 했는데 그 5장의 이야기를 다시 해 보겠어요. 5장 8절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거기 보면 38년 된 병자가 낫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게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지금 38년 된 그 병자와 그리고 무슨 자리? 옛날 자기가 의지했던 담요하고의 분리를 일으켜요. 오늘 설교제목을 정하라면 ‘분리’입니다. 분리하는 거예요. 이 자리, 담요에 의지해서 살던 나가 더 이상 이담요하고 관계없는 거예요. 저는 그런 경험 없습니다만 세상 사람들, 직장인들 회식할 때에 술집에 가서 “건배!” 하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난 뒤에 바닥까지 비웠다는 뜻으로 빈 술잔을 자기 머리 올려서 붓는 퍼포먼스를 하지요? 원 샷 하고 그렇게 하지요.

분리했다 그 말입니다. 여기 술잔에 담겼던 그 소주를 마셔서 이제는 술잔하고 분리했다 그 말이거든요. ‘나는 이 술 마셨다.’ 하고 탈탈 털면서. 다 예수 믿으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고. 사도바울이 “나는 예수님의 심장을 가졌다” 하는 그 말은 이 세상과 분리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이 신자들아! 네가 달라도 달라야지, 불신자하고는. 불신자하고 달라야지.”

불신자들은 세상이 전부에요. 자기가 의지했던 담요 껴안고 있는 거예요. 이 담요라도 의지해야 네가 산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까 38년 된 이 병자는 담요하고 빠이빠이 했어요. “없다. 끝났어. 예수님의 자비로서 사랑으로서 끝!”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신약의 내용은 구약에도 나오는가? 나옵니다. 창세기 9장 20절부터 27절, 길지만 여러분이 들어보면 다 아는 이야기에요.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교회 왔으니까 이제 창세기 1장부터 성경 보겠다고 보는 사람들이 창세기 1장부터 8장까지 잘 나갔어요. 잘 나가다 9장의 노아대목에서 계륵처럼 딱 걸려버렸어요. 하나님이 말이 안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냥 통과를 못하겠어요. 무슨 말인지를 알아야 될 것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어떤 취지로 이야기를 했는지 알아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잘못은 누가 했느냐? 아까 제가 인생이라 하는 것은 한평생이 선악을 가지고 놀이하고 있다 했지요. 자기가 얼마나 잘난 존재고 선한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성경을 보면서 자기도 성경 봤으니 잘난 존재로 자부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런데 지금 노아가 술을 먹었거든요. 아주 나쁘게 먹었지요. 처먹은 거예요. 어쨌든 술을 마신 거예요. 술을 마시고서는 주책바가지처럼 자기의 하체를 드러냈잖아요. 고추를! 우세스럽게 내놓은 거예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선악적인 구조를 봐서는 노아가 백번 잘못한 겁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뭔가 책임을 져야 돼요. 아무리 술 때문에 그랬다 해도 그것이 변명이 안됩니다. 아버지가 잘못한 거지요. 그런데 여기에 자식 세 명이 두 패로 나뉘어집니다. 가나안은 함의 아들이니까 노아의 둘째 아들과 그 손자와 한패 먹고, 첫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이쪽으로 패가 갈리지요.

노아의 언약 안에 축복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저주도 함께 들어 있었다는 것이 이 본문을 통해서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퍼트릴 때 천국만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고 필히 지옥도 꼭꼭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을 지금 운영하고 계신 거예요. 지옥이라는 것은 어디서 생기는가?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노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노아의 생각과 다른, 노아가 갖고 있는 예수님의 심장과 다른 심장을 가진 사람은 필히 노아에 대해서 오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노아가 술 먹고 벌거벗고 있으니까 첫째와 둘째 아들은 뒷걸음질을 쳐서 그 모습을 안보면서 그 수치스러움을, 하체를 담요로 덮어주었습니다.

원래 노아의 모습은 술 처먹고, 수치 드러내고, 주제파악도 못하는 수치스러운 존재, 이게 시작점이에요. 시작점인데 여기서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천국을 갈 아들의 행동이, ‘아버지가 수치스럽다는 것은 곧 수치스러운 아버지의 자식인 우리도 수치스럽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 수치스러움을 드러내시고 그것을 덮는가 안 덮는가를 지켜보시는 하나님, 나 자신이 십자가의 푸줏간고기처럼 매달려야 그게 내 진짜 모습이다. 하지만 그걸 덮어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가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통해서 그게 있는 사람은 천국가고 없는 사람은 지옥간다.’는 거예요.

큰 아들은 덮어줘요. 수치스러움을 담요로 덮어줍니다. 그런데 이 셋째아들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은 ‘얼레리꼴레리’ 한 거예요. ‘아버지꼬라지 좋~다.’ 이렇게 한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나 자신의 정당함, 자기가 그 아버지의 자식으로 낳아지고는 뭐라고 하느냐? 갑자기 자아가 발생된 거예요. 자아가 발생해서 ‘나는 저렇게 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그런데 아버지꼬라지 하고는! 역시 아버지보다 내가 더 낫다.’ 선과 악을 가지고 지금 자기 인생을 걸고 놀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누구보다 더 낫고, 누구는 7등이고, 나는 1등이다. 나는 임영웅이다. 나는 이찬원이다. 나는 1등이 되고 싶어. 누구한테 지기 싫어. 왜? 나는 나니까. 내가 가장 소중하니까.’ 덮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 지옥 갑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지실 때요, 우리 모습을 주님이 대신 보여준 겁니다.

여러분이 장에 가서 미꾸라지를 사서 비닐에 담아보세요. 미꾸라지가 살아보려고 비닐 안에서 푸드덕거리지요. 이 세상 인간들의 하는 모든 짓거리가 죽음의 얼굴들이고 모습들이에요. 골프 치는 것도 죽는 일이고, 고상하게 꽃꽂이 하는 것, 다도 하는 그것도 죽는 일입니다. 화투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일이 푸드덕거리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비닐 안에서 못빠져 나와서.

심지어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죽음의 현상이에요. 푸드덕거리는 거예요. 자기가 선함을, 정당함을 보여주는 게임, 오락을 즐기는 겁니다. 평생을 그렇게 산 거예요. 나 잘난 맛에 산거예요 그냥. 뭔가 덮어줌이 있어야 돼요. 자체적으로 내가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무의미하고 소용없는 인간이에요. 사랑 안해도 돼요.

로마서 9장은 이런 내용입니다. 왜 로마서 9장이 어려우냐? 토기장이가 진흙덩어리로 그릇을 만들었는데 일방적으로 한 사람은 진노의 그릇, 또 한사람은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21)

이게 어떻게 인간의 지력으로, 재주로 믿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못 믿어요. 믿을 수 없어요. 자기 자율권이 완전히 박탈당하기 때문에. 일방적이거든요. 다시 창세기 9장의 노아로 갑시다. 지금 노아가 술을 먹고 벌거벗어서 하체를 드러냈다. 이게 참 주책스러운 짓이지요. 마치 노아의 벌거벗은 것은 예수님이 벌거벗고 십자가에 매달린 것과 똑같은 현상입니다.

그 아버지 노아가 벌거벗은 것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거예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럴 때 자식들은 아버지에게만 국한된 일로 보면 안돼요. 본인의 진짜모습을 아버지가 대신 보여줬다고 생각해야 돼요. 아까 그 사도행전 17장 이야기를 했지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것은 고린도전서2장 2절에 나오는 이야기고요.

나는 십자가외에는 알지 않겠다는 말은 십자가, 바로 우리의 본모습이 늘 한결같이 십자가뿐이에요. 우리는 아무리 부자가 되고 아무리 잘나도 십자가에 달린 그 모습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옷을 너무 많이 입었어요. 세상 옷을 너무 많이 껴입어서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인줄로 아는데 그걸 다 회수를 해버려요. 은혜를 회수를 해버리면 우리는 그 나라 그 의,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뭘 입을까, 먹을까, 하는 그런 고민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같이 죽으면 그것처럼 큰 복이 없습니다.

팝송에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라 하는 것이 있어요. 엘튼 존의 노래. “이 세상에 미안하다는 말보다 더 하기 어려운 말이 없다.” 그런 내용이거든요. 유명한 노래에요. 이 세상에 미안하다는 말보다 하기 더 어려운 말이 없는 이유가 뭔지 알겠어요?

미안하다고 하면 본인의 선악놀이가 잠시 중지가 되어야 된다는 뜻이거든요. 남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저리 가! 나는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못났는지 그 놀이만 하겠어.”라는 이 놀이를 잠시 멈추고 “이런 놀이를 해서 미안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위해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내가 당신에게 관심을 받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 슬프다 너무 슬프다. 이 낭패를 어떻게 하면 좋아?(What have I got to do to make you love me? What have I got to do to make you care?…… It's sad, so sad).” 엘튼 존이 부른 노래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야 나를 원하겠어?(What I got to do to make you want me?).” 인간의 한계를 말하고 탄식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노력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같은 심장을 공유한 거예요. 예수님의 심장, 십자가에 달릴 때 그 심장, 하트에요. 그 심장의 원뜻은 애타는 마음, 이렇게 되어 있고 또 사랑이라고 되어 있어요. 애타는 심정, 우리끼리만 아는 심정.

구약 아가서 주제가 뭔지 압니까? 저희끼리만 아는 노래를 하고 있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들끼리만 알면 된다는 거예요. 사랑받은 자만, 사랑하는 사람끼리만 이야기하면 되지 세상에 코로나가 있든 말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요. 대수롭지 않은 겁니다.

이제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주객이 바뀌어야 돼요. 우리가 누굴 평가하고 관찰할 수 없어요. 재판장이 누구냐? 예수님이 재판장이고 우리는 뭐냐? 피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사람들이 본인들이 재판장이 되었고 누가 피고가 되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피고가 된 거예요. 누가 그 짓 했는가? 내가 그 짓 한 거예요, 내가! 내가 함과 가나안 짓을 한 거예요.

얼렐리꼴레리, 한 거예요. 내가 그 아버지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아버지에게서 나온 자식인줄도 모르고, 아버지가 주책을 부린 것은 우리도 못지 않게 주책바가지라는 것을 인정 못하고 우리는 아버지부터 놀린 거예요. 저 주책없는 아버지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노아홍수, 방주를 통해서 주께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저런 아버지도 사랑을 입어서 복을 받았잖아요.

그렇다면 그 셈과 야벳은 우리가 방주타고 온 우리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를 아버지의 하체를 우리가 덮어주는 사랑으로, ‘너나 나나 똑같아.’ 덮어주는 사랑으로, 이 사랑이 비로소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린 그 취지와 동일한 심장, 동일한 마음에서 나온 동일한 생각인 겁니다. 그 작업,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달린 내 모습의 그 작업, 그리스도의 날까지 주께서 친히 우리 속에 들어와서 그 작업을 벌인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뭘 했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에게 무슨 일을 벌이시고 있고, 또 하셨느냐를 돌아보게 하옵소서. 나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증거 되기 위해서 주께서 원래의 자리까지 늘 돌려보낸다는 사실을, 도리어 이게 바로 복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