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2020년 2월 16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6:21-24
(6: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6:22)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6: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이 두기고에 대해서 특별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대로 이 사도 바울의 마음을 교회에게 전달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두기고를 다른 사람보다 더 유난하게 부각하는 이유가 뭐지요? 그것은 그는 사도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개입을 같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이 세상은 인간들 끼리 꾸려나가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당연히 하는 것은 자기 몸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지고 유지해 가는 것이 이 세상의 상식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이 몸은 곧 나의 것’이다는 겁니다. 여기서 ‘나’란 실은 몸에서부터 나온 이미지입니다.
문제는 ‘몸’이 없어야 한다는 점에서부터 생각 못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즉 “이 몸이 없어야 하는데 왜 여기 있지? 무엇 때문에 있지?”를 생각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생각의 시점은 ‘내가 없을 때’부터가 아니라는 겁니다. 일단 ‘내가 여기 있고’부터 시작해서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몸이 있고 자아가 있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내가 태어나서 비로소 나의 일은 시작되고 죽음이 그 끝이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몸과 자아를 연결시키는 것에 문제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합니다. 사도와 두기고는 이러한 인류의 보편적 의식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겁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몸의 등장 때문입니다.
죽었던 그 몸이 되살아나셔서 지금 활약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활약의 결과로 인해 시작점이 내 몸 있기 전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의 몸으로부터 시작해야 모든 문제가 다 풀리게 된다는 겁니다. ‘내 몸이 여기 있다’가 아니라 ‘몸의 용도’가 밝혀지는 겁니다. ‘내 몸’이 아닙니다. ‘주님의 몸으로서의 용도’입니다.
기존의 몸과 새롭게 등장한 주님에 의한 몸의 용도 차이가 사도행전에서는 두 개의 감옥 사건으로도 알려집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는 베드로가 옥이 갇히게 되고, 사도행전 16장에서는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히게 됩니다. 사도행전 12:1-2에 보면,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그 인생의 끝이라고 여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이해해서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남을 죽이고, 혹은 남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몸의 용도의 다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히니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그 베드로의 몸을 옥 밖으로 끄집어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작점과 끝점이 수정을 해야 합니다. 없는 몸을 있게 하고, 그 몸을 다시 죽이시는 권한은 어디까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몸에서 비롯된 ‘자아=나’ 개념도 역시 수정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 죽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의견을 모았던 그 많은 자아들은 배후에 악마가 있어 기존의 ‘몸은 내 것’이라는 사상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채로 살아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아브라함 언약과 이삭 언약과 야곱 언약은 어떤 식으로 자아가 바뀌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아브라함 언약은, ‘몸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지고 그 ‘없던 몸’과 ‘있게 된 몸’ 사이에 무엇이 개입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즉 없어도 되는 몸인데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 있게 된 몸이라는 겁니다. 두 번째 이삭 언약은, ‘다툼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삭의 쌍둥이 자식은 태 중에서부터 싸우게 됩니다.
이 언약에 따라 야곱이라는 자아는 몸에 대해서 자기 것으로 충실하게 지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원래 몸의 주인을 얍복강에서 만나게 되니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의식이 곧 하나님의 원수가 갖는 생각이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형 에서와 싸웠던 야곱은 그때부터 자기에게 붙여진 ‘이스라엘’이라는 자아와 내부적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야곱 언약의 전개는 바로 ‘새로운 형제 만들기’와 관련 있는 내용입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하던 요셉이 형들로부터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 죽임을 당한 요셉이 도리어 형들을 살려내고 새로운 형제로 만들어냅니다. 즉 버림받은 자만이 자신을 버린 자들의 몸을 제대로 용도 있게 쓰게 합니다.
인간들의 옛 자아는 뭔가 소유하므로 서 자신이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6:19에 보면,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소지하는 자가 아니라 본인 자체가, 혹은 교회 자체가 교회의 열쇠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몸을 다루시는 주님의 방식입니다. 창세기 38장에서 유다집안에 다말이라는 며느리가 등장했습니다. 유다는 자기 집안에 속한 몸들을 하나님이 주신 법칙 즉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서 유지해보려고 했습니다. 맏이가 죽으면 동생들은 형수하고 결혼해서 죽은 맏이의 씨를 이어야한다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지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방 여인 다말은 유다로부터 추방당하게 됩니다. 그것은 원래 지키려는 자신의 자식들의 몸을 자기가 알던 방식으로 지켜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재앙을 불러오는 여인인 다말을 내치므로서 마지막 남은 자식인 셀라를 지켜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 다말은 다른 유다 자식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의해서 가차없이 추방당한 그 며느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진정한 언약 사족인 유다 가족의 대를 잇도록 했습니다. 며느리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그 낳은 자식으로 죽은 맏이 노릇을 마무리 짓습니다.
사람들의 기존의 자아관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그쪽이 부활함으로서 새로운 형제가 ‘주 안’에서 탄생하는 겁니다. 다말은 유다집안을 제대로 언약대로 잇고자 해서 투입된 ‘하나님의 개입’이었던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개입으로만 성도는 주 안에서 한 형제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몸이 없어도 상관없음에도 매사를 생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3강-엡 6장 21-24절(형제)2002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6장 21-24절입니다. 신약성경 315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6:21-24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찌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
‘특별히’ 저희에게 보낸 사람, ‘진실한 일군’ 두기고, 어떤 인간을 특별하게 사도가 부각시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과 우리사이가 어떤 차이가 있기에 두기고라는 사람에게 ‘특별히’라는 말을 언급하면서 등장시키는가? 우리가 알기는, 모든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주어졌기에 똑같은 몸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몸을 가졌는데 똑같은 몸을 가졌으면 거기서 똑같은 인간의 자아성, 나라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사람은 몸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각자 그 몸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자아가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몸을 보여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 앞에 나설 때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자기자신을 나타내는 식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똑같다고 우리는 간주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두기고에 대해서 ‘진실하다.’는 표현을 했어요. 그냥 일군이 아니고 진실한 일군 두기고. 두기고에게 무슨 특별함이 있어서 진실이라는 말을 붙이는가? 그 다음에, 내가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다른 사람은 안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두기고에 대해서는 내가 믿을만하고, 진실하고, 두기고에 대해서는 사도바울이 전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다 알 수 있다. 아주 제대로 된 통역관을 내세운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왜 두기고가 특별하냐? 많은 형제도 있는데 왜 두기고가 특별하냐? 그것은 두기고가 뭘 아느냐 하면, 사도바울의 모든 말 속에 있는, 죽었다가 살아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그 복음의 내용을 두기고라는 사람이 사도바울과 함께 체험을 한 사람이에요
사람은 몸이 있다. 몸이 있으면 그 다음에 자아가 있기 마련입니다. 자, 몸이 있다. 그리고 자아가 있다. 그것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과 두기고는 말합니다. 몸이 있다. 그리고 몸이 있으니까 내가 있다. 천국가자. 안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데 그 변화는 뭐냐? 네가 갖고 있는 몸이 실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몸이라는 거지요.
‘죽어 마땅한 몸을 가졌기에 거기에 같이 나타나는 나도 죽어 마땅한 나라는 인식을 실제로 체험하는 자만이 비로소 사도바울이 말하는 그 진실됨을 고스란히 남들에게 증거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이 두기고가 사도바울과 함께 일을 했다는 것은 사도바울이 겪는 죽음을 같이 겪어다는 말입니다. 이 두기고에 대한 내용은 사도행전에 나오지요.
사도행전 20장 4, 5절에 보게 되면,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일단의 사람들, 어떤 그룹이 어느 지역에 있다가 어느 지역으로 다니고 있다는 그 이야기가 왜 하나님의 계시인 사도행전에 포함이 되어야할 중요한 이야기인가? 여럿이 모여서 여행가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 일인가, 라고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사도바울과 함께 다니는 이 사람들은 뭘 아느냐 하면, 인간이 몸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말이지요. 여러분, 내가 몸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집니까? 내가 손이 있고 발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집니까? 이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 아니에요? 너무 당연하고, ‘원래 있는 거잖아.’라고 하는데 원래 있는 것은 뭐든지 없어요.
시작점이 있어요. 사도바울이 알고 따라다니는 이 사람들은 어디부터 시작하느냐? 시작점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의 몸은 왜 있느냐? 인간의 몸은 어느 용도를 위해서 있느냐는 그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시작점이지요. ‘자기 몸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왜 내 몸은 여기 있지? 그리고 이 몸은 왜 움직이지? 희한하네.’
자기 몸을 기계라 여기면 이 기계가 움직이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기계가 막 움직일 때 ‘밧데리가 안에 들었나?’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기계가 움직이는 것도 신기한데 그 몸이라는 기계가 생각을 한다는 것은 더더구나 신기한 일이지요. 자기 몸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다시 원초적으로 캐묻고, 그 원초적인 시작점으로 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 몸과 다른 몸이 등장했기에 그렇습니다.
그 다른 몸이 뭐냐? 예수라는 분의 몸이에요. 사도행전의 주제는 뭐냐? 사람들이 죽인 그 몸이 우리의 상식으로는 그냥 죽어 있어야 돼요. 사람을 사형시키면 그냥 죽어 있어야 돼요. 우리가 아는 그 지식의 한도 안에서는 그래야 돼요. 돌아가신 증조할머니가 다시 돌아다닙니까? 그렇지 않지요.
우리 집 바로 앞이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집인데 가끔 저녁이 되면 이런 생각이 막 드는 거예요. ‘또 돌아다니지. 또 돌아다녀.’ 보게 되면 안 돌아다녀요.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돌아가시게 되면 움직이는 기계로서의 그 명을 다 한 거예요. 그게 다른 몸과의 특별한 차이가 없이 우리가 가진 몸의 공통점이라고 보는 거예요.
인간은 몸이 있었는데 죽으면 그 몸은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고 멈춘 기계가 되어서 움직임도 생각도 없다. 그냥 처리하면 된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주제는 그것이 아니고 우리하고 똑같이 생긴 몸이 도로 살아났다. 그리고 활동을 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리고 왜 그런지를 사도바울 일행은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몸이 있다.’가 아니라 왜 몸이 있어야 되느냐의 그 이유부터 알게 된 겁니다. 근원적인 이유부터 알아챈 거예요.
사도행전에 있는 두기고와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세상 사람들은 자기 몸의 변화에 신경 써서, 태어났다, 몸집이 커졌다, 젊어졌다, 서서히 늙어간다, 죽었다, 이 이야기가 끝이에요. 사람들은 자기 몸의 변화에 치중하고 그것에만 신경 쓰지요.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은 뭐냐? 몸의 변화가 아니고 우리가 늘 젊고 싶고 늙기는 싫어도 이 몸의 변화가 다른 변화에 상응해서 다른 변화를 보여주기 위한 몸의 변화라는 겁니다. 그게 뭐냐? 복음이라는 것이 없을 때와 복음이 이 땅에서 활동할 때, 예수님께서 일을 안 할 때와 예수님이 일을 하시면서 일어나는 변화가 이 몸의 변화를 유발시켰다는 것으로 사도바울과 일행은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이런 해석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과 어떤 차이가 나느냐? 모든 인간의 시작점은 내가 여기 있다, 로부터 출발해요. 여기 내 몸이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것부터 출발하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과 그 일행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님에 의해서 없어야 될 몸, 이것이 중요해요, 안 태어나도 될 몸,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없어도 되는 몸이 이 땅에 태어났다고 보고 그 몸이 어떤 변화를 일으킨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죽음까지 자기 몸의 변화를 시도하는데 시작을 내 몸이 없을 때부터, ‘그 때에 어떤 분이 계셨다.’부터 시작이 된다면 이것이 우리 몸이 죽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는 이야기에요. 나는 누구 집안에서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돈 벌었고 늙어가고 죽는다. 그걸로 이야기가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몸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생각한다는 그것도 신기하지만 이 몸이 어떤 것에 반응을 나타내면서, 관련지어지면서 죽음으로 내 몬다는 것,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 이것은 그동안 사람들에게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해답이 없었어요. 왜 그런지.
그러나 사도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인간위주가 아니었다. 세상은 예수님의 복음위주로 형성되어지고 변화되고 굴러간다고 생각한 겁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던 이 세상에 죽었던 자가 되살아났다는 이 소식을 사도행전에서 또는 성경전체에서 뭐라고 하느냐? 이걸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나왔지요. 에베소서 6장 19, 20절에.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내가 몸이 묶여있든 갇혀 있든 관계없이 복음은 묶이지 않고 계속 전파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너희는 쉬지 않고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너희들과 나는 생각이 같으니까. 세상의 비밀에 대해서 같이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지금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두기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바울, 이들이 여행을 하면서 외쳤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이 인간세계에 대한, 인류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모욕, 모독하는 것. 가혹하게 인류사에 대해서 모독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어느 정도로 모독하느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순종치 아니함으로 순종케 하신다.
순종 못하게 만들면서 순종이 되도록 하는 겁니다. 나는 주님의 복음에 순종 못하는데 그 못한다는 그것을 재료로 삼아서 순종이 되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복종한 셈이 되게 하는 거예요. 그것은 왜 그런가?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이 인간이 아니고 그 배후……, 인간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허수아비나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 누구의 노리개감 밖에 안된다는 그것을 몰라요.
배후에 악마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인간을 모독하는 이유가, 사도바울이 보기에 인간들은 인간들끼리 다 일처리하면 그만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배후에 악마가 있고 악마의 방법은 뭐냐? 예수를 믿게 함으로서 예수를 못믿게 하는 방식으로 이 세상은 진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못 믿는 것이 정상인데 마치 믿는 것이 정상이라고 가르치는 거예요.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인데 순종했노라, 하고 자랑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편지를 통해서, 왜 그런 악마의 술책에 넘어가서, 속임수에 넘어가서, 왜 사람들은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다고 우기고,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순종한다고 자꾸 우기는 이유가 뭐냐?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진짜 몸에 속한 사람은 나라는 것이 내부적으로 싸우게 되어 있어요. 나가 하나가 아니고 기존의 이 몸은 내 몸이라고 우겼던, 전에 악마에 속아 넘어갔던 그 나와, 그리고 성령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제공한, 전에 나에게 없던 나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거든요.
그런데 성령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뭐든지 평소에 하는대로 내가 다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하나밖에 없는 나를 주장하면서 계속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나가 교체되지 아니하면 이것은 속아 넘어가는 그것을 계속 유지하게 된다는 겁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여행을 하면서 사도일행이 맞닥뜨리는 모든 사람의 특징은, 그들이 자기의 몸에 대해서 묻지 않고 몸에서 파생된 나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사도에게 나오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고상하다. 나는 이렇게 의롭다. 나는 이렇게 율법대로 살았다. 계속 나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도는 그걸 알지요. 그러니까 일괄적으로, 전체적으로 세상을 모독하고 그 사실을 폭로시키는 겁니다. 제가 어느 노래의 가사를 좀 길지만 그 전체를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내 인생의 종말이 가까이 왔습니다. 최후의 커튼을 닫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친구들에게 분명히 밝혀두지만 나는 의심없는 사실을 밝히겠습니다. 인생을 만족하게 살아온 나, 내 인생을 바쁘게 살아온 나, 지금보다 더욱더 내 인생을 마음껏 달렸습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미련도 없습니다. 별로 사랑을 몰랐던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내가 꼭 해야 될 일만 했습니다. 보이는 것은 다 해봤습니다. 천하에 이름난 길을 걸어볼 심사였습니다. 지금보다 더욱더 나는 내 인생을 힘껏 달렸습니다. 나는 내가 베풀수 있는 기회보다 내가 빼앗긴 어려운 시절도 있었습니다. 내가 살아온 이 반평생을 생각해 보면 시련이었습니다. 나는 사랑도 했습니다. 웃기도 했습니다. 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눈물을 거두었습니다. 내 마음은 한없이 흐뭇합니다. 이 모든 것이 오히려 재미있었습니다. 돌아보면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었습니다. 나는 오직 나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마음껏 내 길을 걸어왔습니다. 남자이기에 남자답게 행동했던 나. 남자는 느낌대로 다 말해서는 안되는 법입니다. 레코드를 뒤집어 놓듯이 그렇게 쉽게 행동해서는 안되는 법입니다. 나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내 길을 갈 것입니다.”
프랭크 시내트라가 불렀던 <마이 웨이>의 번역입니다. 거기에 ‘나’가 21번 나옵니다. 사도는 묻습니다. “나냐 진리냐? 평소 관심사가 나에게 있느냐, 아니면 진리에 있느냐?” 이 <마이웨이>에서 이제 내 인생이 종말이 가까웠다는 겁니다. 나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생각하는 기계니까, 생각이 끝날 때까지 그걸로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도는 시작점을 가지고 마지막 점으로 다 바꿔버려요.
인간이 모르는 시작점을 가지고 세상에 외치니까 세상은 모든 것이 종말이 되고 만 거예요. 개인적 종말이 아닙니다. 죽음이 종말이 아니에요. 전체적인 종말이에요. 충분히 이 세상에 대해서 모욕하고 모독해도 괜찮아요. 성도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 새로운 몸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몸이 갖고 있는 그 한계, 이성과, 지성과, 감성과, 윤리도덕의 한계, 그것을 사도바울은 ‘웃기네’ 하면서 일괄적으로 다 저주해버립니다.
“예수는 우리의 현재 내 몸을 위한 이 자아로서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분이다.” 예수는 믿을 수 없는 분이에요. 그리고 순종할 수 없는 분이에요. 사도행전 마지막이 그렇게 끝납니다. “순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이 복음을 전한다.” 그러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두기고라는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사도바울 본인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베드로는 어떻게 구원받는가?
사도행전에 두 가지의 사건, 같은 취지의 사건이 나와요. 사도행전 12장의 사건은 베드로가 옥에 갇힌 사건이에요. 그리고 16장은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힌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2장 1,2절에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라고 되어 있어요.
지금껏 제가 설명한 것을 다시 한 번 유념해보시기 바랍니다. 헤롯왕이 야고보라는 사도를 칼로 죽입니다. 몸을 없애는 거예요. 이것이 이 세상 권력이 할 수 있는 마지막이에요. 사람의 몸을 죽이는 거예요. 이걸 누구에게 자행했느냐 하면, 예수님 몸한테도 그렇게 자행했어요. 예수님을 체포해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인간의 시작은 탄생하는 것이고 인간이 끝나는 것은 사형당하거나 늙어죽거나 죽음이 끝이라고 본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인간 본인이 알고 있는 행세를 그대로 한 겁니다. “너 나에게 까불면 죽어.” 그것으로 끝이에요. 그것이 인간이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그 다음에 베드로를 잡아서 옥에 가둡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세상은 죽음이 끝이고, 태어나서 몸을 가지고 그 다음에 죽는 것이 끝이라면 이 세상은 별다른 것이 없지요. 그렇고 그런 생활을 하고 있지요.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그것.
그런데 사도행전 12장과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두 감옥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직접 이 감옥에 개입을 해요. 주님이 개입을 합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는데 거기 천사가 방문해서 베드로의 수갑을 풀어주고, 친히 이끌어냅니다. 잠자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서, 급히 일어나라고 독려하고, 옷까지 입으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천사가 앞장서서 베드로가 따라갔지요.
따라가다 보니 옥문이 저절로 열렸으며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알고 있는, ‘나는 이 몸이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이 몸과 이 몸은 내 것’이라고 여길 때 나오는 그 나와 이 사이에 주님이 개입해버려요. 그러면 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이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이라는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예요.
이 몸이 내 것이라는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본인이 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개입하고 하나님이 개입할 때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아, 그동안 근원적으로 이 몸에 대해서 나부터 잘못 생각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가르쳐줍니까?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요.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다 깨져버려요. 베드로의 경우에는 천사가 인도했지만 16장의 바울과 실라는 얼마나 배포가 좋은지 감옥이 다 부서지고 옥문이 열려도 안나가요. 나가지를 않습니다.
간수가 죽으려고 했지요. 죄수가 탈출했으니 대신 자기가 죽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기가 죽으면 자기가족이 걱정이 되겠지요. 그럴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지금 예수를 믿으라고 이야기하는 바울과 실라도 자기 몸과 자아 사이에 연결이 안되고, 이 나, 자아는 내 몸에 대해서 죽어 마땅한 엉터리 자아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간수한테 충고를 하는 거예요. 주 예수를 믿으라고.
그러면 간수는 뭐냐? 사도바울과 같이 이 자아는 시작점에서 보면 당연히 엉터리 자아라서 죽어 마땅함을, 그 지진이 일어난 감옥을 통해서 공히 같이 체험을 한 겁니다. 죽는 체험을. 자아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된 거예요. 하나님이, 내가 생각 못한, 주님이 준비해 놓은 자아가 따로 있고, 기존에 악마에 의해서 속았던, 이 몸은 내 것이라는 것, 내 자존심을 위해서 있어야 될 몸이라고 했던 그 나, 나가 두 개가 되어버린 겁니다.
사도가 사도행전에서 또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세상에 대해서 일괄적으로 모독할 수 있고 저주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죄의 위력, 죄의 힘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담이 지었던 선악과 따먹은 그 일로 인하여 이 세상은 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로마서 5장에서는 죄가 왕이다. 왕을 무시하지 말라는 거예요. 죄라는 것이 우리를 전면적으로 다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그 왕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인은 없는 거예요.
죄의 위력을 알기 때문에 인간들이 좀 잘났다고 깝죽대고 까불어대도 그것도 죄에요. 죄의 왕노릇이라는 것은 죄 밖으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벗어날 수가 없어요. 못 벗어나면 결과가 뭐냐? 그것은 죽어야지요. 죽는 거예요. 이 몸이 늙어 죽는 것은 이 몸을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것이 그게 가짜라는 겁니다. 애지중지하는 나가 죽어가는 몸을 살릴 수가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공을 들여도, 아무리 애를 쓰고, 아무리 힘을 쓰고 하나님께 뇌물을 바쳐도 내가 하는 행동과 생각이 죽어가는 이 몸을 살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그게 바로 이 몸 자체가, 악마가 장악하고, 죄가 장악했기 때문에 인간이 개인적으로 자기자신에 대해서 공들여도 다 헛수고고 소용없는 짓거리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복음 알고 아주 신이 났어요. 일괄적으로 저주하는데 아주 거침이 없어요. 이 세상을 모독하는데, 모든 인류역사를 다 모독하는데.
거기에 대비해서 악마는 역사 안에서 복음 지우기에 나섭니다. 복음대청소. 어떤 경우라도 복음이 역사에 끼어드는 것을 악마는 역겨워하면서 다 긁어내지요. 이 세상 신이, 고린도 후서 4장 4절에서 이 세상 신이 복음의 힘을, 다른 말로 합시다, 죄의 반대가 의거든요, 의의 능력을, 의의 힘을, 의에서 나오는 은혜의 능력을 관심두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걸 귀담아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수단은 이 세상에서 다 부립니다.
그 전쟁터에 사도와 두기고는 활동하고 있었던 겁니다. 과연 인간은 자기의 변화가 전부냐? 아니면 그 배후에 있는 복음의 변화, 어떻게 복음이 만들어졌고, 그 복음의 끝은 어디냐? 그 복음의 변화가 우선이냐? 아니면 내 몸이 아프다, 늙는다는 그것이 우선이냐의 싸움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두기고라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할 때 재산관계라든지, 형제가 몇 명이고 부모가 누구며 어디 출신인지 그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진정으로 두기고가 전달하는 것은 옛날처럼 ‘내 몸은 잘사는 사람, 부자 몸이다.’ 그것이 아니라 그 몸의 시발점 되시는, 처음 이 몸이 없는데서 생기게 한 그 분의 몸에 돌린다면 이 몸을 사용하시는 그분이 준비한 새로운 그 무엇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형제라고 하는 겁니다. 형제라는 것이 있어요.
기존에 육의 형제들은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같은 부모에서 태어나면 형제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말하기를, 내 형제 두기고는 주 안에서 형제라고 했어요. 그러면 기존의 혈육에서, 인간의 육신에서 나오는 형제하고 주 안에서 형제의 차이점이 뭐냐? 육신의 형제는 그냥 성관계에서 태어나고, 부모에 의해서 수정이 되어서 태어나면 형제에요. 같은 부모에서 태어나면 형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태어난 형제는 그 사람이 몸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용도가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보면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것이 베드로의 용도입니다. 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천국의 키, 천국의 열쇠를 준다는 말은요,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가진다는 말이 아니고 베드로 자체가 천국열쇠다 그 말이에요. 천국열쇠를 내가 소지해버리면 기존의 몸과 기존의 이 세상에서 말하는 몸에서 나오는 자아는 모든 것을 소유함으로서 내가 나를 관리하고 나를 가꾸려고 하고 다듬으려고 해요. 이 몸을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천국의 열쇠를 기존의 나에게 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제가 이야기했듯이 몸과 우리가 알고 있는 자아는 엉터리에요. 이것은 가짜라는 말이지요. 이 몸은 주님이 주신 몸이기 때문에 몸에 필요한 자아는 주님 쪽에서 준비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이 몸이 천국열쇠 되게 하시는 겁니다. 열쇠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열쇠 되게 하는 거예요. 천국열쇠가 되려면 기존의 자아와 주께서 준비한 자아 사이에서 이게 끊어져야 되는데 기존의 자아가 새로운 자아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기존의 인격에 새로운 인격이 덮치는 거예요. 사도행전에 오순절에 성령을 받는데 성령이라 하는 것은 어떤 힘이 아니고 어떤 인격이거든요. 나는 나다. 이 몸은 내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던 나에게 다른 인격이 덮쳐버립니다. 이것은 흔히 우리들이 아는 무당이에요, 무당. 귀신 씌인 거예요. 물론 귀신은 악한 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씌인 거예요. 예수님의 인격이 기존의 내 몸이라고 여긴 것을 주님께서는 “그것은 네 몸이 아니고 내 몸이야.”라고 이 몸의 주인님이 오셔서 이 몸을 주님의 몸으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행전 해석은 안되는 것이 물론이고 로마서, 갈라디아서, 성경의 어떤 것도 전혀 해석이 안돼요. 성령으로 쓴 성경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않은, 다시 말해서 주님의 인격으로 덮쳐지지 아니하면 성경해석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어떤 주님입니까? 이 땅에서 마귀에서 속한 인간들에게 버림받은 주님이잖아요. 죽임을 당한 분이잖아요. 죽임을 당하고 되살아난 주님이잖아요.
죽음 저 건너편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분이라는 말이지요. 시초적으로 보면 죽는 이유는 선악과, 선악을 아는 지식 때문에 인간을 죽인다고 주께서 언급을 했고, 그 선악 말고 새로 발생된 내 자아는 선악에 기초한 자아가 아니라 생명, 거저주시는 생명에 의해서, 용서에 의해서, 사랑에 의해서 준비된 자아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알아먹을 것 같으면 제가 설명을 안합니다. 몰라요. 이래서는 모릅니다. 그래서 구약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언약이라는 것은 없던 자식이 새로 생기는 것, 없음에서 있음으로 바뀐 것이 아브라함 언약이에요. 그 다음에 아들, 이삭언약은 뭐냐? 천국 갈 인간과 지옥 갈 인간이 자궁 안에서부터 싸우는 거예요. 다툼이에요. 다툼에 관한 언약이에요.
다툼의 언약이라는 것은 기존의 나, 마귀가 심어준 나와 주님이 준비한 나와 어느 쪽이 천국 갈 나인지를 다투는 거예요. 그게 이삭언약입니다. 세 번째 야곱언약은 뭐냐? 그게 한 사람이 아니고 그 체험으로 인하여 형제가 발생되는 것, 12형제가 발생되는 것이 야곱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던져진 그 언약을 자기가 앞서서 던진 언약을 본인이 홀로 나서서 다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진짜 하나님입니다.
언약을 왜 던졌느냐? 인간들은 마귀에 속해서 자기 몸이 누구 것인지도 모르고 이 몸은 내 것이라고 우기면서 악마에게 조종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거든요. 그냥 버티려고 하는 거예요. 몸은 죽는데 자기는 안죽으려고 해요. 몸은 죽고 자기는 불멸성으로 남아서 불멸의 존재로 천국에 간다고, 천국은 그런 곳이라고 사람들에게 거짓말로 천국 이야기를 한 겁니다.
영육혼, 가운데서 육은 떨어져 나가도 혼과 영은 남아서 천당 간다고 가르치는 거예요. 육영혼, 삼분설 이야기하면서. 챙길 것은 챙기라는 말이지요. 네가 교회 나오는 이익이 있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 너라는 것이 가짜인데, 잘못된 너인데, 그 너를 교체 없이도 그냥 간다는 거예요. 그 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아브라함 언약, 이삭언약, 야곱언약이에요.
야곱은 태중에서 형 에서와 싸웠습니다. 그 싸우는 언약을 왜 줬겠어요? 첫 번째는 형과 싸우고 두 번째는, 얍복강에서 하나님 만날 때는 본인하고 새로운 나, 이스라엘, 몸은 하나인데 이름은 두 개가 되어서, 기존의 이름은 야곱이고 새로운 이름은 이스라엘, 몸은 하나인데 기존의 야곱이 그 몸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다가 그 야곱적 속성에 의해서 하나님하고 대판 싸우게 되었다는 어떤 현상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보여줬어요.
“네 몸을 네 것이라고 우기는 한 너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이 인간아.” 그게 야곱언약입니다. 야곱이 자기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복 받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런데 그게 다 가짜라는 거예요. 내 구원받기 위해서 가짜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믿을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왜 그렇게 교회에서 믿는 것을 쉽게 남발하는지. 예수는 못믿게 되어 있습니다.
무당처럼 어떤 다른 인격이 와서 나의 인격을 눌러버려야 돼요. 나 말고 다른 인격이 와야 돼요. 얍복강에서 야곱이 혼자 승리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야곱 말고 다른 인격, 이스라엘이 야곱을 덮쳐버려야 돼요. 덮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바로 자기가 사랑하는 요셉이 죽습니다. 요셉이 누구한테 죽는가? 형제들한테 죽어요.
요셉언약의 특징은 형제하나가 죽어야 새로운 형제가 언약에 의해서 발생된다는 겁니다. 죽기 직전에 빠져나왔지만 사실은 형들은 요셉을 자기형제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형제로 간주 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자가 새로운 형제, 육에 속한 형제 말고 하늘에 속한 형제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 그것을 요셉이 보여줍니다.
요셉에 우호적인 사람이 등장하는데 형제 중에서 유다입니다. 창세기 32장에 유다이야기가 나오는데 아주 상당히 신비로운 기적이 나옵니다. 제가 아까 사도행전에서 두 가지 기적 이야기를 했지요.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온 것, 그리고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지진 일어난 것, 그것을 여러분은 기적이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기적도 아니에요. 최고의 기적이 나와요. 그것은 뭐냐? 시아버지가 며느리하고 동침해서 애기 낳는 거예요.
창세기 38장 1-5절에 보면,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유다가 3형제를 낳았어요. 엘, 오난, 그 다음에 셀라. 이렇게 형제가 세 명 생겼습니다. 오늘 설교 핵심은 형제에요. 주 안에서 형제가 어떻게 발생하는가, 탄생하는가를 설명합니다. 그걸 설명하기 전에 육의 형제부터 먼저 시작해요. 엘과 오난과 셀라 세 사람의 형제가 있는데 유다는 자기가 언약을 받았기 때문에 언약적인 형제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결말을 내린 거예요.
요새 기생충 영화가 이슈잖아요. 기생충 영화 포스터에 보면 사람들마다 하얀 손으로 배우들의 눈을 가린 것이 나옵니다. 잔디밭에 죽은 여자의 몸체와 다리부분이 나와 있는 영화포스터를 보셨을 겁니다. 저택 앞에 사람들이 송 강호부터 죽 서 있는데 전부 다 눈을 다 가려놨지요. 왜 눈을 가린 포스터를 썼을까?
감독이 그 점에 대해서 몰라요. 감독이 포스터를 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그 영화의 주제와 합치가 되는데 결말보류에요.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의 결말이 보류되는 겁니다. 해답이 없어요. 정답이 없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자식 셋을 낳았으니까 이 형제가 천국 가는 형제라고 결말을 지었습니다. 이미 형제가 있으니까 어떻게 해서 이 가족을 건사하면 끝나는 거예요. 나하고 그리고 이 세 아들과 함께 살게 되면 나중에 약속대로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도중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된다는 생각을 감히 못했지요.
자, 몸이 있고 이 몸에 대해서 자아가 있습니다. 이 자아가 몸과 결부해서 그대로 천국까지 골인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다의 큰 아들을 죽입니다. 엘이 죽고 난 뒤에 유다가 하나님의 법을 따라요. 하나님의 법, 모세의 율법 이전에도 계시를 줬습니다. 형이 죽고 나서 형수가 남잖아요. 남은 형수는 다른데 시집가면 안되고 시동생도 다른 아가씨 만나서 결혼하면 안되고 반드시 형수와 결혼해야 돼요. 물론 형수는 신상이 아니고 중고지만 하여튼 그 형수와 결혼해야 돼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모든 재산은 형이 다 갖고 동생들은 형의 일군으로 참여한다는 점에서 부모님이 주신 축복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농경시대에는 장자가 모든 것을 갖고 차자부터는 형의 품삯을 받으면서 ‘형 때문에 우리는 살아’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될 자들이 동생들입니다.
여러분은 로마서 8장의 그 비슷한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로마서 8장 29절에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라.” 에서와 야곱이 피터지게 싸우는 이유가 맏이가 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왜냐? 맏이는 모든 재산을 다 가져요. 반 나눠주는 그런 것이 없어요. 아버지가 갖고 있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이 맏이를 통해서만 연결되지 다른 동생들은 소용없어요. 동생이 생명을 맛보고 싶으면 형의 식구가 되어야 돼요.
그래서 유다에게 주신 생명력……, 표정들을 보니 잘 이해가 안되는가 본데 다시 합시다. 여러분, 몸이 있다는 것, 이 기계가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생명력이지만 생각하는 것도 생명이잖아요.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이 몸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요, 이 몸이 움직이는 것도 신기하고요, 몸이 생각하는 것도 신기해요. 왜냐? 하나님의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서 몸을 줬다고 보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 민족에게는.
지금 유다가 그걸 믿어요. “하나님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 때문에 생겼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하나님의 법을 작동시키면 된다. 하나님이 법을 줬다. 형이 죽었다. 그러면 형수는 누구하고 결혼하는가? 동생들은 형수하고 결혼해야 돼요. 형수하고 결혼하는데 둘째 아들이 오난이에요. 오난이 형수하고 동침을 하는데 있어서 사정을 바깥에 해버립니다.
만약에 사정을 해서 아기를 낳게 되면 동생의 자기자식이 안돼요. 형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자식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해요. 삼촌으로 불러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기운이 대대로 오직 맏이 계통으로만 통한다는 하나님의 율법의 원리가 이 지상에서 살아나게 하기 위함인 거예요.
그런데 오난은 형의 자식 만들기를 싫어하고 자기 맘에 드는 아가씨와 결혼하겠다는 식으로 나온 거지요. 하나님께서 오난을 죽여 버렸습니다. 자, 몸이 있는데 오난은 죽기 싫어요. 그러나 죽어야 돼요. 왜냐하면 몸과 자아는 가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몸이 죽는다면 동시에 자아도 날라 가버리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걸 모르고 내가 내 몸을 부지해야 나는 겨우 산다는 잘못된 사고방식, 악마에게 속은 사고방식으로 자기가 자기 몸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자아가 하나밖에 없으니까 붙들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난의 몸을 죽여 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 유다의 생각이었습니다. 아직 셋째 아들 셀라는 어려요. 어린 애를 다말이라는 며느리에게 주기가 싫어요. 자기잘못은 생각 못하고 이방 여인 다말에게 무슨 액운이 끼어서 다말에 붙었다 하면 다 죽어버리니까 ‘재수 없는 여자가 우리 집안에 들어와서 우리 집안의 씨를 다 말려버린다’고 여기지요.
어떤 분의 글에 그런 것이 있어요. 사과의 씨를 헤아릴 수는 있어도 씨 속에 있는 사과는 볼 수 없다고. 아주 그렇게 심오한. 다말은 시아버지에게 “셀라를 나에게 주세요.” 하기 전에 시아버지가 다말을 추방시켜 버렸어요. 재수 없는 여자 때문에 셋째 아들까지 다 죽이겠다 싶어서. 그 책임을 다말에게 지웁니다. ‘다말은 뭔가 죄가 있는 여자다 문제가 있다. 유다 자기는 야곱에게 속했기 때문에 복이 있는데 저쪽은 저주받은 씨다.’ 해서 셀라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를 대면서 다말을 친정에 보내버립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말이 창녀로 변장했고 시아버지 유다는 본의 아니게 그 창녀와 동침을 하게 되고 거기서 다말이 잉태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언약의 백성에게 추방된 자가 언약의 백성을 죽음에서 부활시키는 겁니다. 목숨 잃는다고 죽음이 아니에요. 인간들의 육의 한계를 넘어서, 인간이 알고 있는 육의 모든 사고방식에서 버림받은 자가 도리어 부활이라는 기쁜 소식을, 영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는 것을 다말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다말이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은 바로 이 원칙에 준해서만 일한다는 거예요. 기존의 몸과 나와 연결된 것을 끊어버리고 그 끊어버린 그 자리에 주님의 다른 인격이 들어오는 거예요. 이 몸은 네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다. 어떤 주님이냐? 이 몸은 이 땅 모든 인간에게 버림받은 그분의 것이다. 버림받은 분의 인격이 새로운 자아의 자리를 만들어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천국의 열쇠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가질 자아가 없다니까요, 천국의 열쇠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천국의 열쇠가 돼요. 주 안에 있는 사람이 돼요. 그걸 주 안에서 형제 된 두기고라고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의 일행이 실제로 하나님의 개입을 같이 체험한 거예요.
에베소서는 사도바울이 로마에서 썼거든요. 두기고는 사도가 로마에서 쓴 골로새서나 에베소서를 이야기할 때 유일한 통역자로서 먼저 선교했던 교회들에게 하나의 통역관, 진실한 통역관, 진실한 통역관으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형제라는 그 위치가 여기서 ‘시형제결혼법’과 매치되면서 시형제결혼법은 눈에 보이는 형수와의 결혼정도가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개입하고 찾아온 사람에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수님과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로마서 8장에 형제가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같이 고난을 받는 겁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실제적으로 다말에 의해서 새로운 형제가 발생되지요. 그리고 그 원리에 의해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이유 없는 고난과 죽음을 겪게 됩니다. 이 몸에 대해서, 자아성과 끊어버리고 새로운 자아성으로 관여하게 되지요. 그러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야곱은 에서와 싸우고, 또한 본인과 본인이 싸워요. 야곱인 나와 이스라엘 나와 싸우러 나오는 겁니다.
그 싸우러 나오는데서 ‘나는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내 이 몸을 다루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이 나올 때 이미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사도바울이 되고, 두기고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라는 인생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나를 제치고 대표해서 죽었다가 살아난 새로운 몸이 있음을, 주님의 영광된 몸이 있음을 이 인생을 통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형제들과의 교제는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교제하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드는 겁니다. 남을 낫게 여기라 할 때 그 말이 뭐냐? 내가 상대방을 낫게 여기는데서 오는 나의 우월감에 대해서 상대방은 모독으로 반응을 나타낼 의무가 있는 거예요. 그 둘 사이가 형제지간입니다.
내가 남을 낫게 여길 때 상대방은 기뻐하지만 내가 남을 낫게 여겼다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우월감을 느끼게 합니까? ‘사람이 이렇게 달라졌나? 내가 이렇게 겸손하지?’라는 그 우월감에 대해서 상대는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 ‘너 잘난 체하지 마!’ 하는 식으로 나에게 퇴박을 줄 때 그 둘 사이가 형제가 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래야 어느 누구도 이 몸은 내가 알아서 관리한다는 그 선이 끊어짐을 확인할 수 있는 관계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가 두기고를 추천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두기고 너 최고!” 그게 아니에요. 주 안에서 두기고를 그렇게 사용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을 그렇게 사용하는 겁니다. 우리도 서로가 마찬가지에요. 주께서 그렇게 사용하셔서 이 몸의 시작점을 봐야 돼요.
‘이 몸이 있고, 나 잘났다.’가 아니라 ‘이 몸이 없어야 되는데 왜 있지?’라는 그 정보에 대해서 서로 주고받을 때 그게 바로 부부고, 그게 형제고, 그게 교우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몸이 우리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오니, 죄 값으로 죽어야 되고 의로 인하여 부활될 몸이오니 주님의 이러한 작업이 주께서 친히 주신 손길인 것을 깨닫는 동시에 우리 옛사람,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그것과 치열한 다툼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