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빌 1장 1-2절(복음의 재료)2002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1장 1-2절입니다. 신약성경 318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1:1-2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요즘 사태 보면 성경 보는 자체가 정말 수치스럽다 하는 정도로 우리의 마음가짐을 확 뒤집어놓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이라 하는 것은 ‘죄 씻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죄를 씻음 받았습니다. 그러면 끝난 이야기 아니겠어요? 죄 씻음 받았으면 이 세상이 발악하면서 죄 씻음을 무효시키기 위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게 뭔데요, 그게?
죄 씻음 받았으면 아무 일 없잖아요. 호들갑을 떨어요. 지옥의 호들갑을 떤다고요. 죄 씻음 받았잖아요. 그런데 왜 살고자 하는 겁니까? 그동안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고 요령 부렸어요, 요령. 요령부리니까 주께서 탁, 건드리니까 소동이 일어난 겁니다. 요령부린 것이 티가 났어요. 주님은 전혀 믿은 적도 없고요. 복음 안적도 없고요. 죄 씻음 인식도 못하고 있고요. 오락했어요. 교회 놀러 다닌 겁니다.
1, 2절 오늘 본문이 간단한 말씀인데 사람과 관련해서 세가지용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바울 나오고, 디모데 나오고, 크게 잡아서 빌립보라는 교회 나와요. 그 세 가지가 어디에 묶였느냐 하면 예수 안에서 예수님께 묶여 있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분에게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이 묶여 있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은 뭐냐? 묶여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 묶임, 이 관계성, 이거 변치 않고 더 부각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 혼자 사는 것 아니다 그 말이지요. 이걸 영어로 미러클이라 하는 거예요. 기적이지요. 사도가 이 편지를 로마에서 썼습니다. 빌립보교회라는 것을 대상으로 삼을 때 사도의 1차, 2, 3차 전도에서 2차 때의 전도에 빌립보가 있었거든요. 그렇게 전도할 때 생긴 교회가 빌립보 교회에요.
빌립보교회를 보게 되면 이것은 처음부터 기적으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가 빌립보에 갈 때에 누가 관여하느냐가 재미있어요. 악마가 관여합니다. 악마가 관여하고 주의 영이 또 관여해요. 터키 쪽, 그리스 쪽이 아니고 터키 쪽으로 가려고 하니까 주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는지라. 따라서 사도바울이 환상을 보고 드디어 지금의 터키에서 바다를 건너 그리스 쪽으로 옵니다.
사도행전 16장 18절에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빌립보 교회라는 것은 없어요. 없는데 없던 이유가 뭐냐? 마귀가 인간의 영혼을 장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인간에게는 탈출구가 없었다 그 말입니다. 악마 때문에 탈출구가 없었던 거예요.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닙니다. 신천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공중권세 잡은 악한 귀신, 영들과의 싸움이에요.
영들과의 싸움에서 사도바울이 제시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거예요. 복음을 다시 말씀드릴까요? 세자로 죄 씻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죄 씻음이라는 말은, 죄가 있었고 이 죄에서 어느 위인도 어느 영웅도 죄에서, 악마의 위력에서 벗어날 위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오기 전까지는 어떤 인간도, 인간 쪽에서 어떤 종교적인 노력을 해도 구원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빌립보교회 자체가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기존의 교회를, 우리교회까지 포함해서 교회라고 하지 맙시다. 교회는 없는 거예요. 신천지 교회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일을 누가 해야 되느냐? 주님이 일을 해야지요. 미러클, 기적으로. 흉내 내는 것 때문에 문제가 돼요. 남들이 교회 세우니까 우리도 교회 세우고. 교회 세워봤자 코로나가 탁 치면 다 날라 가는 거예요. 얼마나 헛방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허상들이에요. 무슨 노회가 있어요. 노회가 왜 있어야 됩니까? 무슨 교단이 있고. 교단 그게 왜 있어야 돼요? 교단이 죄 씻어줍니까? 교회나 교단이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해줘요? 인간이 세운 단체가 그걸 해낼 수 있습니까? 없어요. 적어도 성도라면 tv 뉴스보다 더 압도적인 것이 있어야 돼요. 뉴스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지간에 더 압도적인 것, 더 강력한 세계, 그것이 우리의 소속이어야 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했습니다. 너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데 하늘에 안 있는 것 같아요. 우리의 목숨은 하늘에 있어요. 골로새서 3장 3절에. 그런데 벌벌벌, 떨고 있어요. 오늘 이 자리에 안 왔다고 해서 제가 닦달내는 것은 아니고요. 다 깊은 의미가 있지요. ‘나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남을 배려해서 안 나왔다.’ 그런 이야기를 다들 해요. 그런 마음을 제가 모를 리가 있습니까?
다만 tv 뉴스보다 더 쇼킹한 것이 매일같이 나를 장악하지 않았다는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복음을 이런 소동가운데서 우리가 다시 볼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언급하시는 거예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하는 것이 빈말이 아니거든요. 실제로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이미 죽은 자에게 문제 삼지 말라는 말이지요. 제가 복음의 비밀을 알려드릴까요? 당연히 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지만. 인간은 죽은 채로 태어나요. 인간은 죽은 채로 태어납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을 때 이미 죽었어요. 그 죽음자체가 양산되는 겁니다. 새끼를 자꾸 깐 거예요. 인간의 몸은 죽음의 운반체에요. 죽음바이러스의 운반체.
“생일축하 합니다.” 하는 것은 죽음의 운반체 하나 등장한 거예요. 새삼스럽게 지옥의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주님의 관심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은 놈이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뭘 했기에, 그리고 무슨 영향을 줬고, 효과를 줬느냐, 는 그게 바로 복음이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내가 뭘 얼마나 설치고 싸대는 것이 아니에요.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은 탈출구가 없다는 뜻이거든요. 탈출구가 없으니까 인간은 피하기 바빠요. 피한다고 탈출이 됩니까?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던가요? 태어날 때 숨 쉬니까 산 것으로 여겼어요. 산 것으로 여기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어서 이스라엘 속에 두 개의 죽음을 심어버렸어요.
하나는 목숨 살아 있는 것을 두고 살아 있다고 우기는 그 목숨. 그러나 그 목숨은 광야를 통과할 때 아무짝도 소용없는 목숨이었습니다. 다니엘 세 친구를 통해서 보여준 것은 우리가 목숨이라고 아는 것, 생명이라고 아는 그것이 다가 아니고 다른 생명이 있다는 겁니다. 벌써부터 골치 아픕니까? 예수님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를 보세요. 사도바울은 ‘십자가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했어요.
그 십자가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두 종류의 목숨, 생명이 있고 두 종류의 목숨이 분리되기 시작한다. 이게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의 목숨과 예수님 빼고 다른 사람의 목숨의 차이점을 보라는 겁니다. 예수님 목숨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목숨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로마군병들 그리고 도망친 열두제자나 바리새인들은 뭐냐? 목숨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이거 잃어버리면 다 잃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 따르면 죽기를 무서워해서 벌벌 떨지요. 악마의 종노릇해서 죽기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 거예요. 목숨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하나밖에 없는 이 목숨을 길게 연결시킬 생각만 하는 거예요.
목숨을 버리면 보이는 것이 영생인데 이 목숨을 쥐고 자꾸 접붙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예수님은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새포도주는 옛부대에는 안된다는 겁니다. 새생명을 담을 수가 없어요. 기존의 몸하고는 안 맞아요. 옛부대가 찢어져버려요.
옛부대라는 말은 뭐냐? 평소에 내가 내 몸건사하려고 애썼던 그 모든 삶의 방식과 시도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노력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런 소동을 준 것은 평소에 네가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왔는가를 다 폭로시켜 버린 겁니다. 네가 평소에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가? 다시 말해서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영생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지키는데 열중해서 그것으로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공포심이 절로 나올 밖에 없지요. 공포심을 못버리지요. 복음 안다, 복음 안다, 실컷 우리교회에서 배워놓고는 막상 실습 들어가니 하나도 못하는 거예요. 학원에서 짜장면을 어떻게 만들고, 짬뽕은 어떻게 만든다. 다 배워서 집에서 해보니 완전히 엉망진창 다 되었어요. 아무것도 안되는 거예요. 실습 들어가 보니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십자가는 십자가만 만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십자가 안에 들어 있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석의 s극과 n극이 만나듯이, 십자가는 십자가에만 턱 들러붙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흉내를 내봐야 그것은 요령에 불과해요. 나를 지키기 위한 요령에 불과한 겁니다. 빌립보교회를 제가 지금 살펴보는데 교회라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성도거든요, 성도라는 것은 인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들이에요. 주님의 통제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 대목이 좀 난해할 수 있는데요.
사도행전 16장 11, 12절에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라고 되어 있어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교회는 없습니다. 없는데 사도바울이 어떤 일을 행하니까 거기서 교회라는 것이 발생되었어요. 제가 이 말을 강조하는 것은 교회는 인간들이 자기의 소원을 모아서 만들어낼 수 있는 조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이 소원을 모아버리면 거기에는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의도가 거기에 섞여 버려요.
“하나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천당 보내주세요.” 이런 의도가 섞여버려요. 섞여버리면 아무리 교회에 속해서 계속 내 안에서 핵심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뭐냐? ‘나는 살아야 돼, 나는 살아야 돼. 하나밖에 없는 이 목숨 어떻게든 부지해야 돼.’라는 식이 되어버려요. 새로운 것이 없고 기존에 있던 옛 구닥다리부대에 예수님이 주신 그 피, 새생명을 담을 수가 있어요? 담을 수가 없어요. 이게 찢어져서 쏟아져버린다고요.
아까 장로님의 기도대로 몸이 두 개인데 하나의 몸을 포기해야 돼요. 기존의 내 몸 말고 내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몸이 있어요. 그 몸이 바로 주님의 작품이어야 돼요. 그런데 기존의 몸은 누구 작품이냐? 내 작품이 된다고요. 내가 계속 붙드니까. 계속 신경 쓰고, 해독주스 먹고, 오메가3 먹고, 계속 신경 써야 될 내 몸이라는 말이지요. 계속 신경 써야 될 내 몸하고 주님의 기적하고는 안엮이거든요.
히브리서 6장에 대해서 저에게 수백 명이 질문한 것이 있어요. 히브리서 6장 4-6절,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 대목에서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이 “목사님, 한번 예수 믿고 성령받고 난 뒤에 다시 타락해서 지옥갈 수가 있습니까?” 다음에 또 질문은 해도 좋은데요. 정리 하고 넘어갈게요. 신데렐라동화가 적당한 예에요. 신데렐라가 왕자의 무도회에서 춤을 추다가 밤 12시 전에 집에 와야 되기 때문에 급하게 돌아오다가 신발 한 짝을 놔두고 왔다고요.
왕자가 무도회에서 본 자기 맘에 들었던 그 여자를 찾아서 남겨진 신발 한 짝을 들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맞춰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신데렐라가 사는 이 집에는 언니들이 많아서 한 명 한 명 신발을 신어보게 해요. 신어본다고 해서 자기신발 아니에요. 십자가 들어온다고 내 십자가 아닙니다. 십자가 제조하신 것은 하나님 쪽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생주기로 작정한 자냐 아니냐를 맞춰보기 위해서 신발을 내 민 거예요.
언니들은 왕자라고 하니 탐이 나서 이 참에 신분상승 한 번 해보겠다고 잘 보이려고 맞지도 않는 신 억지로 끼운다고 피만 날 뿐이지요. “발 빼라. 네 신발 아니다. 네 신발 아니야. 다음 사람!” 신겨보고는 네 신발 아니라는 거예요. 네 신발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 영양제 주사 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은 영양제주사가 아닙니다.
하나의 씨를 뿌리고 뿌리가 박혀서 열매가 맺히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열매를 따서 확 잡아 당겨버리면 우리의 내장까지 다 뽑힙니다. 내 것이 아니니까. 씨앗도 내 것이 아니고 자라게 한 그것도 내 것이 아니에요. ‘항상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인데 항상 내 속에 뭐가 들어온 기적은, “‘이것은 내 것, 내가 원했던 것, 나 천당 갈래’ 그것하고 관계 없어.” 주님이 주님의 것을 양산하기 위해서, 자기백성 만들기 위해서 씨앗을 뿌리고, 키우고, 열매 맺게 했고, 나중에 가져갈 때는 옛몸인 우리의 몸과 주님의 새로운 몸이 분리되기 위해서 확 빼버리는 겁니다.
다 뽑히지요. “나는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그런 따위 것 필요 없어요. 주님이 하신 그것만 도로 회수할 뿐이에요. 주님이 들어오셔서 ‘나는 정말 주님이 하신 것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다. 주님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 그 미안한 것이 믿음이에요, 그 미안한 게. 사람이 미안할 때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당당할 때는 믿음이라 하면 안돼요. ‘죄송합니다.’ 고개를 못들 때 그게 믿음이에요.
“싸스를 보내든 코로나를 보내든 하나님 맘대로 하세요.” 그 정도로 미안할 때 그걸 믿음이라 하는 거예요. 피하기는 뭘 피해요. 피할 데가 어디 있는데 피해요. 대구 봉쇄해버려라. 안 피해도 돼요. 안 피해도 된다고! 주님의 작업이 마귀가 막아놨다고 주께서 못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라는 동네는 있어요. 그런 동네는 있는데 교회는 없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터키로 가지 말고 빌립보로 가라고 한 겁니다. 왜? 없는데서 교회 만들기 위해서 가라고 한 거예요. 멀리서 전화해서 제 안부를 묻는 분들이 있는데 안부를 물을 때 전염병 돈다고 안부 물으면 안되고요. “사탄의 세계에서 잘 계십니까?” 평소에 그런 안부를 물어야지요. 악마의 세계에서 잘 계시냐, 그런 안부를 물어야지 새삼스럽게 전화를 해서 “목사님, 너무 돌아다니지 마세요. 물론 성경에 죽으면 죽으리이다, 있지만 그렇다고 막 돌아다니지 마세요.” 이렇게 하거든요.
그래서 속으로 내가 그랬어요. 내가 전화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 모이기에 힘쓰라는 그 말씀은 무슨 말인데?’ 모이기를 힘쓰라는 그 말은 무슨 말이에요? ‘무슨 일이 있거든 모이지 말라.’ 그런 뜻이에요?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죄 씻음이라는 그 자체가 내가 노력해서 죄 씻음 받은 것이 아니에요. 이런 전염병을 뚫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잖아요.
우리가 그 선물을 받았으면 그 뻥 뚫린 구멍을 쳐다볼 줄 알아야지요. 아, 나는 내 목숨 하나 살리는데 급급해서 살길만 찾아가지고 이 하나밖에 없는 목숨 어찌 부지하느냐는 그것만 위해서 피할 길만 생각했는데 하늘에 구멍이 뚫렸어요. 내가 뚫지 않은 구멍이 뚫렸습니다. 그 뚫린 구멍 속으로 ‘네가 살려면 네 몸 포기해라. 천국에서 그 몸 안 받는다. 속사람 받지 그 사람 안 받는다. 버려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살아온 것이 이 한 몸밖에 없는 내 목숨 천당 보내려고, 그냥 요령부리고 꼼수 쓴 거지요. ‘이캐요? 십일조 할까요? 봉사할까요?’ 내가 하는 일에 고민을 한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잊어버리는 순간입니다. ‘하, 그 때 내가 그런 행동 안하는 건데. 그 때 그런 나쁜 짓을 하다니.’ 자기 행한 일에 대해서 아직도 미련이 있고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주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다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인지 그럴 거예요.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마태복음 27장에 죽 나와요. 성경이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39절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41절에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자, 모욕했습니다. 희롱했습니다. 왜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희롱하고 모욕했습니까? 그들은 인간의 목숨은 단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여러분도 그래요?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목숨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바울은 십자가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교회 세우는 것이 무슨 기적이에요? 십자가가 기적이지요. 죄 씻어줬다는 그걸로 이미 종결되었다는 사실, 죄 씻음 받은 생명자체, 천국갈 수 있는 깨끗한 목숨이 되었다는 이 자체가 이게 기적 아닙니까?
교회 얼마나 돈 내서 이런 기적 받았어요? 수천 만 원 냈다고 이 기적 오는 것이 아니거든요. 자기 가정생활에 얼마나 충실했다고 이런 기적을 받습니까? 충실했다고 기적 받는 것이 아니에요. 평생을 다 퍼부어도 이런 기적으로 교환되지 않습니다. 아까 언급한 히브리서 6장 그 대목을 두고 사람들이 질문을 할 때 제 답변은 이겁니다.
히브리서 6장 4-6절,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그냥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고 뺏는 방식으로 십자가를 구현하십니다. 성도든 성도 아니든 누구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라고 해서 십자가 주고 계속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든 성도가 아니든, 성도라는 자체가 우리 몸에서 연결하는 연결선이 전혀 없어요. 우리 몸은 행함만 주장하기에 연결선이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줬다 빼는데서, 줬다 빼는 그 과정을 통해서 그 과정에 부합되는 새로운 몸, 주님 쪽에서 준비된 그 몸과 결부를 시킴으로서 우리는 혈과 육에 속한 몸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광의 몸을 입게 되는 겁니다. 문장이 좀 길었지요. 미안합니다. 줬다 뺏는 과정 속에서 내 몸은 부질없다는 것, 내가 평생토록 교회 봉사한 것이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 내가 바르고 반듯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그 사태 자체가 다 옛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인식시키는 거예요.
아, 십자가와 합치되는 몸은 따로 있다. 따로 있는데 십자가가 들어오고 나가는 과정 속에서 없던 새몸이 십자가와 더불어 세팅되어서 세트로 만들어지는 거예요. 주님께서 새몸으로 만드시는 거예요. 그 새몸을 만들기 위해서 주께서 하시는 멋진 방법이 뭐냐? 우리로 하여금 늙어 죽게 만드는 겁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신종 코로나 때문에 죽으나 감기 걸려서 죽으나 결과는 똑같습니다. 감기 걸리면 약간 오래살고 신종코로나 걸리면 좀 유난을 떤다는 그것뿐이지 나에게 주어지는 결과는 동일하잖아요.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떱니까? 교통사고 나서 죽으나, 신종코로나로 죽으나 어차피 인간의 시나리오는 죽는 시나리오에요. 그 죽는 시나리오가 우리 몸에 박혀 있는 것을 여러분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주님이여, 이 몸 죽여주셔서 고맙습니다. 죽어가는 몸에 미련두지 않게 하옵소서.” 그게 우리의 기도제목이어야 돼요.
이제 진짜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실감하는 스케줄에 포함이 된거지요. 아담과 하와가 아기를 낳는데 아담이 하와를 통해서 아기를 낳았다고 아담이 주장할 때 하와는, 그것이 아니고, 나는 아담 네 자식을 낳은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자식을 낳았다고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자식을 낳았다. 여호와의 자식이 하나이어야 되는데 둘로 갈라져요. 둘로 갈라져서 두 자식이 나오는데 가인과 아벨입니다. 정녕 죽으리라 했던 그 죽음의 내막이 중첩되어 포개져 있거든요. 죽음의 내용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에요. 두 개기 때문에 가인이 죽는 죽음과 아벨이 죽는 죽음을 하나님께서 구별하시는 겁니다.
가인이 죽는 죽음은 자기 몸이 죽는 거지요. 그런데 아벨이 죽는 죽음은 몸이 죽는 죽음 그 이후에 있는 생명을 이 땅에서 보여주기 위한 죽음인 거예요. 제가 어렵다고 했지요? 아벨이 죽는 죽음은 의도된 죽음인데 그것은 뭐냐? 가인이 죽는 죽음이 그냥 늙어죽는 것이 아니고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나 살기 위해서 내 몸 하나 간수하고, 내 자존심 하나 간수하기위해서 필히 누구에게 살인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그 요소가 가득 차 있는 몸이 모든 아담의 몸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다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가인의 죽음입니다.
가인은 살아 있어도 정녕 죽은 자에요. 태어날 때부터 정녕 죽은 자입니다. 아벨도 물론 인간이기에 죄인 맞습니다. 하지만 인간 속에 죄밖에 없음을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서 하나의 재료로서 죽는 죽음이기 때문에 그 죽음을 통해서 아벨 안에는 죽어도 다시 사흘 만에 사는 영생이 아벨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죽음을 아벨은 보여주는 겁니다.
문장이 길어서 죄송한데 쉽게 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의 재료라는 말입니다. 무슨 재료냐? 복음을 보여주는 재료라는 거예요. 복음을 보여주는 재료인데 이 세상의 지옥 가는 인간들은 복음을 위한 재료로 보지 않고 본인이 복음이라는 영양주사를 맞아서 자기가 자꾸 살려고, 재료가 주인공노릇하고 있는 거예요.
아벨이 되기 싫어하는 거예요. 너무 억울하다는 겁니다. 세리 되기 싫고, 강도 되기 싫고, 창녀 되기 싫다는 겁니다. 누구의 재료인데 그게 아니고 자꾸 예수님이 날 살려달라는 거예요. 영양제주사라는 말 표현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라는 영양제, 복음이라는 영양제를 가지고 주사 꽂아서 나를 살려달라는 거예요. 주님은 주사를 주는 것이 아니고 썩어가는 이 몸에다 주님께서 복음의 씨앗을 뿌려서 썩어가는 죄 속에서도 어떻게 해서 영생의 열매가 맺히는가, 그걸 보여주는 재료로 우리를 활용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두 종류의 몸이 있습니다. 두 종류의 재료가 있는 거예요. 모두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보여준다는 말은, 십자가는 두 가지를 보여주는데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십자가, 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십자가가 있잖아요. 너는 십자가의 의를 보여주는 인간이냐, 아니면 네가 십자가에 예수를 죽이라고 함으로서, 죄를 극대적으로 보여주는 재료로서 쓰이고 지옥 가는 인간이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 인간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뻔 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몸을 만드신 분이 주님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죽은 자에 대해서 문제 삼지 말라고요. 호들갑 떠는 사람에게 문제 삼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자기 몸 지키는 것밖에 없어요. 교회와도 주님을 자기 살리는 영양제주사로 여긴다니까요. 주님을 시다바리로 여긴다고요.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하나의 노림수지요.
열왕기상 18장 16, 17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아합과 엘리야가 만나는 대목입니다.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아합왕이 엘리야보고 하는 소리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것이 너냐?” 엘리야가 하는 말이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18) 두 종류의 인간이 있는데 한쪽이 다른 한쪽을 서로 밀치는 거예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한다. 아합왕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따라서 평소에 내가 나를 살리고 싶어요. 그런데 엘리야가 등장하니까 “너는 내가 나를 살리는데 방해꾼이야.”라고 지금 욕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엘리야가 말하기를, 제가 풀어서 하게 되면 “아합왕이여, 당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당신 자존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당신은 악한 역할을 해야 될 사람입니다. 당신 그거 몰랐지요? 몰랐는데 내가 등장하니까 벌써 당신은 입을 뗐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라고 당신이 그런 소리 하는 것 봐서 당신은 평소에 당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살릴 생각만 하는 것이 티가 나고 들통이 났습니다.”
바로 엘리야가 십자가라고 생각하세요. 십자가가 우리 속에 꽂히게 되면 그 동안 감추고 있었던, 평소에 내가 살고자 하는 그 모든 욕구, 욕망과 구원의 희망, 이런 것들이 얼마나 악마적이고, 복음적이 아니라 하는 것이 들통이 다 나요. 십자가 앞에서.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피해가 버립니다. 그 십자가 뒤에 있는 부활을 원하고 있어요. 자기 잘되는 구석이 거기에 있다고 보는 겁니다.
십자가를 피해버려요. 십자가를 피해버리면 자기가 주인공인데 십자가 피해가니까 피해갈 때도 주인공이고, 부활되어도 주인공이고, 그런 식으로 천국가면 천국 가서 누가 주인공입니까? 본인이 주인이에요. 건드리면,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라고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피해가지 말고 십자가속에 들어가 버리면 뭐가 바뀌느냐 하면, 내가 평소에 살기는, 내가 내 한 몸 버티고 살기 위해서, 내 가정, 내 교회 부흥되기 위해서, 네 체면 살리기 위한 그 모든 것이 십자가 앞에서 거짓이었고 죄라는 것, ‘아, 죽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그것을 십자가 앞에서 폭로당하는 겁니다. 그걸 관통해버리면.
그래서 복음은 줬다 뺏는 거예요. 줬다 뺄 때 “왜 가져갑니까?” 하면 신자 아니고요. 성도 아니고요. “잘 가져갔습니다.”라고 해야 성도에요. 왜? 십자가는 새로운 몸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존의 내 몸에 더 이상 미련두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이거 했습니다. 기도의 은사가 있습니다. 또 무슨 은사가 있습니다.” 그거 다 쓰레기로 버려버리세요. 다 버릴 수 있어야 돼요.
오늘 본문에 디모데가 나오는데 사도바울 그리고 디모데, 다시 합니다. 바울과 디모데와 교회, 세 그룹의 인물들이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 예수 안으로 묶여 있어요. 이 말은 세 분 다 뭘 보여주느냐 하면, 예수님이 지금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재료로서 활용되고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는 없는 거예요. 없는데 살아계신 주님께서 주의 영께서 그것도 무시로, 터키 가지 말고 그리스로 가라고 명령, 지시가 떨어졌어요. 그 지시 따라 빌립보라는 동네에 갔지요. 교회는 없으니까. 빌립보 동네에 갔는데 거기서 어떤 일을 사용했느냐 하면, 사도바울의 설교와 사도바울의 행동을 통해서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라는 아줌마, 서문시장 포목집 아줌마에요, 그 루디아아줌마가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보면 마음을 열었대요.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마음을 열었다. 아, 이거! 제가 어떤 분 보고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목회 하시다가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열거든 목사님 추구하는 것 헛된것 아닙니다. 99마리 양 생각하지 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라도 있으면 당신의 평생을 재료로 사용한 것 다 투입해도 보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연다는 이것은 미러클이에요. 이것은 기적이에요. 홍해 갈라지는 기적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천지창조의 그만한 힘이 들어가야 마음이 열려요. 마음 열린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그때부터 더 이상 나와 내 주변의 상황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거예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열면 그 안에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된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 스며들어옵니다. 계속 스미니까 내 처지와, 내 신세와, 내 요령과, 내 다음 태도, 내가 뭘 결정할지의 내 선택, 내 계획, 내 기대감, 이 딴 것은 생각도 안해요. 어차피 내 몸이 내 몸이 아닌데 내가 왜 신경을 씁니까?
죽은 아벨 쪽에서 가인을 보자 이 말입니다. 죽은 아벨은 이미 영생을 얻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어느 자리에 가느냐? 죽은 아벨 쪽에 서는 거예요. 아벨 쪽에 서서 가인을 보게 되면 뭘 이해하게 되느냐? 가인은 왜 아벨을 죽였을까? 다른 말로 하면 가인은, 세상은 왜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라고 욕을 했을까? 그 이유가 드러나요.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들춰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도를 사용하신다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는……, 오늘 몇 번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빌립보에는 교회가 없어요. 없는데 마음을 여는 순간 이것은 주님이 교회를 세운 거예요. 그래서 교회의 머리는 당회장 목사가 아니고 주님이에요. 주님이 교회를 세운 거예요. 마음을 연 거예요. 마음을 연 사람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주께서 하셨습니다. 끝!”
“저 뭐할까요?” 그런 것 없어요. “주께서 하셨습니다. 끝.” 그것뿐이에요. 시간을 초월하는 겁니다. 내가 나이 몇 살을 살고, 그런 것은 무의미해요. 몇 살 사니, 그런 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6학년 5반, 7반, 그런 것 필요 없어요. 끝이에요. 제가 어떤 명단을 불러드릴 테니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세요. 이거 알면 진짜 미러클이다.
“블루 1, 흥모란 3, 카후스 1, 설비령 1, 아파트 6, 방충망 6, 지하 3, 미소 3, bm*1” 북한 간첩들 암호도 아니고 이게 뭐냐? 이들의 공통점을 아시겠어요?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나오는 백반 집 단골손님 장부를 적을 때 이렇게 한 거예요. 방충망이라는 손님이 6번 다녀갔다 그 말이에요. 외상값이죠. 단골손님 장부를 적어놓은 거예요.
지하 3, 미소 3, bm*1, 손님 중에 bmw타고 온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bm*1, 이게 무슨 뜻인지를 아시겠어요? 교회가 그런 거예요. 교회는 십자가에 마음 열린 사람에게만, 십자가 이야기만 하니까 다른 교인들이 하는 말이 “너는 뭐 했는데?” 자꾸 행함을 묻는 사람에게는 이게 암호처럼 들리는 거예요. 내가 뭘 행한 것이 아니라니까요. 재료에요, 재료.
몇 년을 살든, 90을 살든, 60을 살든 평생을 재료로 산 것 뿐이에요. 자꾸 공통점을 엮이게 하지 마세요. 마음을 열어버리니까, 이게 기적이거든요, 이 기적 속에 오니까 주님의 십자가가 들어오면서 “너는 이미 영생 얻었기 때문에 태어날 때는 죽은 채로 태어나라.”라는 소식도 기쁜 소식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기쁜 소식, 복음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아, 나는 죽기 위해서 태어났구나. 아, 기분 되게 좋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뭐로 죽일까? 코로나로 죽일까, 감기로 죽일까? 연탄가스로 죽일까, 차사고로 죽일까?’ 그것은 주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고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배고파 죽일 것인지, 배 터져 죽일 것인지는 알 수 없어요. 어떤 사람은 배 터져 죽은 사람이 있어요. 너무 많이 먹어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에서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2절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다시 해볼게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씀인지요. 제가 두 번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안 들어오잖아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의 눈금자처럼 단선, 어려운 말로 선형이라고 하는데, 단선 같으면 한쪽이 밀면 한쪽이 나간다, 그렇게 돼요.
어릴 때 작은 이불 주고 형제간 한 5명이 자라고 하면 겨우 자는데 큰형이 이불 확 당겨버리면 막내는 저쪽으로 튕겨나가거든요. 단선, 단면 같으면 그런 식으로 되는데 그것이 아니고 제가 아까 설명한 것처럼, 새로운 씨앗이 들어오게 되면 있는 것조차 완전히 뽑아서 다 거덜 낸다는 뜻이에요. 중복되어 있는 거예요.
선이 아니고 성령을 받게 되면 두 몸이 중첩되어 있는 거예요. 예수님 몸과 내 몸이 같이 있는 거예요. 이게 미러클, 기적이고 이게 교회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로 온, 죽었다가 이미 영생을 얻은 그 몸이 우리 안에 오게 되면 무엇과 싸우냐? 기존의 우리의 몸은 뭔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뭔가 소유가 있어야 그걸로 내가 산다는 거예요. 벌벌 떨면서.
이걸 완전히 거덜 내는 거예요. 새로운 십자가가. 지금 죽어도, 네가 그동안 살아온 것은 네 덕이 아니고 내가 살려 와서 살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게 같이 있어줘야 공포심이 없어요. 내가 나를 방어를 안 한다니까요. 내가 나를 수비를 안해요. 어떤 분이 글 쓴 것에 대해서 제가 댓글을 이렇게 달았지요. 자기방어선이 뚫린 글이라고. 그리고 그 밑에 덧붙여서, 복음으로 최종 마감한 사람은 복음이 안 나온다고요.
“자기 방어막이 뚫린 글 - 복음은 너덜너덜해진 자아의 뚫린 구멍을 통해서 나온다. 매번 복음으로 봉합되고 매끈하게 마감처리가 된 자아에서는 결코 복음이 나오지 않고 복음은 자아 잘남을 유지하려는 의도에 의해서 내부적으로 질식당하고 있다.”
왜 그러냐 하면, 복음 이용해서 자꾸 나 잘났다, 나 잘났다, 하니까 복음이 안나와요. 그래서 복음이 질식당하는 상태에 있어요. ‘나 예수 믿는다. 복음 안다.’ 이러면 복음 모르는 거거든요. 이론이에요. 실습 아닙니다. 자아방어선, 마지노선이 뚫려서 그 안에 자아가 너덜너덜해져야 돼요. “나 개판이다. 나 창녀다. 내가 세리고 내가 강도다.”
그게 있어줘야 복음이 나오는 겁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먹던 맛있는 사탕이 있었어요. 그 사탕 안에 초콜릿이 들었어요. 그 초콜릿을 맛보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사탕을 빨아야 됩니다. 여러분, 기억나지요. 액체로 되어 있는 초콜릿을 고체사탕이 둘러싸고 있거든요. 주님께서 이 딱딱한 것을 다 끄집어내는 겁니다. 십자가 끄집어내기 위해서.
이리 흔들어보다가, 코로나로 흔들어보다가, 부도나게 만들었다가, 아파트 값이 떨어지게 만들었다가, 주식 값 폭락되게 했다가, 또는 반대로 세상에서 잘되니 더 잘 되어보겠다고 만들었다가……, 계속 흔들지요. 그것은 옥토가 아닙니다. 이미 가진자는 모든 없는 것까지도 싹 다 쪼가리 내버리고 있음이 있음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네 안에 이런 것, 십자가 들었다 이놈아! 이게 중요한 거야.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는 이 중요한 것을 모시는 가마고 재료고 하나의 포장지였어. 이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죄 씻음. 끝!” 이것은 어떤 전염병도 방해하지 못합니다. 막아설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빌립보교회가 감옥에서부터 시작된 것 아시지요. 빌립보 초대교회의 시작이 감옥의 간수입니다. 안 믿은 사람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있을 때에 갑자기 옥문이 열렸잖아요. 사도바울이 안 나갑니다. 왜? 전도는 주님이 하시지 본인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께서 자기를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본인이 전도를 할 리가 없습니다. 목사가 구원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어요. 주님이 자기 백성, 영생주기로의 작정은 주님이 알아서 합니다. 신데렐라 신발 신겼다가 뺏고 하는 거예요.
간수가 죽으려고 했을 때, 뺏고 빼앗길 때, 예수를 믿음으로서 뺏긴 상태에서 다시 새로운 것이 들어왔지요.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16장 31절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 유명해요. 길거리 버스정류장에 많이 붙어 있습니다. 가까운 교회에서 붙인 것들이지요. 백날 보니 뭐합니까? 빼앗기는 것이 있어야지요. 빼앗기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대구는 빼앗기는 아주 좋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내 몸을 어떻게 피해보려는 그 모든 시도는 소용없습니다. 끝으로 마태복음 2장을 보겠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줬다 뺏는 거예요. 마태복음 2장에 동방박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2장 2, 3절,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아주 큰 소동이 일어났어요. 소동이라는 말을 다시 정리하면 갇혀있다. 이 세상은 탈출구가 없다. 따라서 소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오지랖을 벌이고 소동이 일어난다는 것은 평소에 하늘로 통하는 구멍이 없다는 뜻이에요. 불안불안하게 그냥 자기 몸 하나 손해난다 싶으면 피하듯이 살아왔다는 그 말입니다. 평생을 내 몸 내가 지키는 양식으로 살아왔다는 그 말이거든요.소동이 일어났어요. 그 소동을 하나님께서는 확장시킵니다.
마태복음 2장 16절,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죽음의 확장이지요. 헤롯왕이 신천지입니다. 완전히 죽음의 운반체에요. “죽는 거 무섭지? 그지?” 죽음의 바이러스를 다 전파하도록 이 세상, 중국부터 해서 이 세상 모든 국가가 어떤 역할이 있어요. 뭐냐?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인간은 자기 몸만 챙기고, 인간에게 가장 절박하고 중요한 것은 자기 몸뚱이밖에 없음을 분명히 하는 역할을 눈에 보이는 세상나라를 통해서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소동을 일으키고, 소동한다는 것은 평소에 이 세상에 탈출구가 없는 가운데 살아왔다는 것의 티를 내게 만들었어요. 참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이런 기적적인 상황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생중계가 있으니 교회 문 닫을 일은 없지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복음은, 내 몸이 있고 복음을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와서 우리를 빼앗아 버립니다. 뺏고 그 다음에 우리가 너덜너덜해져서 “맞습니다. 나는 탈출구가 없습니다. 저는 천국과 안 맞습니다.” 할 때 십자가를 집어넣어 버립니다. 십자가를 위한 구원이지 내 몸을 위한 구원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과 디모데와 빌립보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살아계셔서 일하시는 주님, 그 일의 실정을 저희들이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평소에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되돌아보면서 주님한테 미안한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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