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읽기 십자가를 아십니까 5 십자가와 상급 곽진계
5. 십자가와 상급
이 책은 현대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나 친숙하고 당연시여기는 요소들을 성경적으로 추적한 책입니다. 성경적인 기원을 찾아서 구약과 신약을 가로지르면서 ‘십자가’로 중심이 모이는 구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 연구방법은 일반 독자나 신자들에게는 아주 유익합니다. 먼저 구약의 내용이 풍부해지고, 구약의 사건들이 어떻게 신약으로 연결되는지 ‘고리’를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신약의 사건들도 어떠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사건들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이 상호 소통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번 단락은 현대 교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너무나 왜곡되어 있는 ‘상급’의 문제입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피상적으로 ‘예배’라든지 ‘기도’, ‘헌금’, ‘주일성수’ 등을 알고 있었나가 탄로 나고, 얼마나 왜곡되어 있었나가 밝혀집니다. 하기야 왜곡되어 진 것이 한두 가지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 역사를 “왜곡의 역사”라고도 부르고 싶습니다. 역사의 현상들을 보면 수많은 사건들이 왜곡되었고, 지금도 왜곡되고 있습니다. 정치분야, 사회분야, 과학분야, 문화분야, 경제분야, 종교분야 등등..
그러면 왜곡의 주체가 누구이겠습니까? 인간이라고요? 당연히 인간이지요. 배후는 없습니까? 있습니다. 저는 마귀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동의하십니까? 성경은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만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진리는 하나님 소유고, 거짓은 마귀 소유란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거짓되다는 것이고, 마귀가 아버지고, 그렇다면 아들은 누구일까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이들도 인간이지요. 전체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거짓을 말합니다. 아비의 욕심(영어 성경에는 ‘욕망’이라고 함)을 따라 거짓을 말하고, 아비를 따라 아들도 그 행사를 합니다. 여기서 아비의 행사는 요한복음 8장 40절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들도 이를 따라 하겠지요.
왜곡 이야기를 하다보니, 너무 멀리 나갔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상급’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목사님은 ‘상급’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내용(창15:1)을 언급합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상급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 싶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 자신이 상급이고, 방패라는 것입니다. 방패가 등장하는 것을 보니 상급도(우리가 잘하면 상준다는 개념이 아니라) 전쟁에서의 전리품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 상급을 아무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은 이 상급을 받지를 못하고 ‘의인’만이 받는다는 것이지요.
전쟁에서의 상급. 그러면 전쟁 개념은 성경의 어디에서 처음 등장할까요? 당연히 창세기 3장 15절이지요. 아담의 범죄 후에 주어진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싸움입니다. 여기서 이 목사님은 범죄 후의 특징 중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기들끼리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여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하고, 죄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치마를 입었다는 것은 ‘한몸됨’의 관계가 깨어지면서 두 몸(각자의 몸)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고,(이 내용도 깊은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책임 전가는 자기 방어라는 것이지요. 죄를 지어놓고 자기는 죄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공격으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간의 전쟁을 이야기하십니다.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뱀 자신은 여자의 후손에 의해 정수리(머리)가 공격을 받는다는 것이고, 그 승리의 대가는 생명의 상급(생명나무)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이름이 ‘하와’(생명)로 바뀌게 됩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혀주신 것은 합당한 방비(인간의 자기 방비가 아닌)를 제공하고 죄책으로부터 멀어진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것이지요. “가죽옷에 이렇게 깊은 뜻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자기 후손 중에서 하나님(생명)이 태어나기를 바랐고, 그래서 처음에 가인이 태어났습니다. 그 후손인 줄 알았던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거절하심으로 생명이 달리 주어짐을 암시하셨고, 생명은 (인간들의) 죄 속에서는 죽음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벨이 죽습니다. 제사 한 번 드리고 죽은 아벨! 이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란 죽음 속에 들어있는 생명인 것입니다. 생명의 역설! 왜 생명이 생명으로 등장하지 않고 죽음 속에서 등장할까요? 저는 생명됨이 죄로 인해 파괴되었기 때문에 죽음 속에서 등장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뱀과 여자의 관계는 죄와 생명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가인 계통과 아벨 계통의 투쟁으로 연결되는데, 가인 계통은 지상에서의 생명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아벨 계통은 죽음 속에서 생명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지상의 생명은 생명을 포장한 죽음임이 드러난다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이를 나타내는 것이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지상에서의 생명 추구는 물로써 멸망당하였고, 아벨 계통인 노아의 생명은 방주 안에서 보호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는 왜 보호를 받았을까요? 아벨 계통이라서? 그 말도 맞지만 구체적으로 방주 안에는 정결한 짐승도 동승하였는데, 이 짐승의 희생제물의 죽음을 통하여 노아가 보호를 받은 것이라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계속된 역사 속에서 다시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합니다. 함과 가나난 계통이지요. 이들은 바벨탑을 쌓았으나 하나님은 이들을 흩으시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가나안 민족을 정복하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방패요 상급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얻은 전리품은 모두 하나님의 희생의 결과입니다. 아브라함은 실제 롯을 구출하는 전쟁에서 이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을 챙겨오면서도 도대체 이해가 잘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318명의 사병으로 5개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가 있었겠습니까? 나중에 멜기세덱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이지요.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14:20) 그 유명한 하나님의 ‘붙이시매’ 전쟁입니다.(하나님께서 붙여주시니 승리를 한 것입니다. 이후의 모든 하나님의 전쟁은 ‘붙이시매’ 전쟁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통해서 원수의 성문의 얻을 것이라고, 승리를 예견하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삭의 아들인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도 그 약속을 이어가십니다. 그러나 이 두 형제가 리브가의 뱃속에서부터 싸우고, 태어나서도 싸운다는 것입니다. 이들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장자권을 두고 이삭과 리브가도 싸운다는 것입니다. 가문의 위기?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외삼촌집으로 도망가는 광야에서 야곱은 하늘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천사들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네 자손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것이고, 이를 위해 하나님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창28:13-15)
하나님의 떠나지 않으심, 이것을 박영선 목사님 버전으로 하면 ‘너 이제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할 수가 있고, 이근호 목사님 버전으로 하면 언약의 이루심, 열심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 언약을 자기가 이루려고 속임수와 열심으로 평생을 삽니다. 피곤한 삶이지요. 실제로 일과 아내들 때문에 피곤하였습니다. 밤늦게까지 외삼촌 라반의 양떼를 돌보아야 하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면 두 아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야곱의 두 아내(레아와 라헬)는 서로 남편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심으로 인해 아들 11명을 낳았습니다. 몸종까지 동원해서. 이것은 싸움입니다. 아들의 이름들에는 그러한 경쟁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이 목사님은 야곱의 탐욕도 담겨있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이제 외삼촌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 야곱의 일행 앞에 천사들(마하나님, 하나님의 군대)이 나타나는데, 옛날 벧엘에서 나타났던 그 천사들이 확실합니다. 왜 나타났을까요? 하나님의 적들과 싸우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지요. 야곱은 이 하나님의 적이 에서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적은 야곱 자신이였습니다!
에서가 자신을 죽이러 온다는 소식을 접한 야곱은 재산과 자식들을 나누어 얍복강을 건너게 한 후 자신은 홀로 남았고 밤은 깊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사람이 야곱에게 달려들어 싸움을 하면서 자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야곱은 결사적으로 그 사람과 싸웠고 그 사람은 야곱을 힘으로 이기지 못함을 알고 날이 새려고 하여 떠나고자 합니다.
이 사람의 정체는 누구일까요? 이 목사님은 이 사람을 ‘밤의 사나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멋지죠?(우리나라에서 ‘밤의 대통령’은 누구일까요?) 즉 낮이 되면 떠나야 하는 존재란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과 상관하면서 밤에 나타나는 존재는 누구입니까? 바로 이전에 벧엘에서 나타났던 천사들 중 한 명인 것입니다. ‘자신을 축복하기 위해서 나타났던 그 천사가 왜 지금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을까?’ 야곱의 생각이겠지요. 그것은 야곱이 바로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복의 근원을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힘으로 살아가려는 그 자세, 살아남으려는 그 자세는 뱀의 후손 계통인 것이죠. 아벨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희생을 통한 승리인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뱀의 후손과 어떻게 전쟁을 벌이시며 또 승리를 이끌어내시는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그 야곱의 힘의 근원지인 환도뼈를 쳐서 위골시키십니다. 이제 야곱은 힘없는 자가 되어서 평생을 살아가야 됩니다. 야곱은 자신의 상대가 지상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죽음을 느꼈습니다. 야곱은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합니다. 천사는 야곱을 살려주기는 하되 여자의 후손의 속성이 담긴 모습으로 살려주는데,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과거와 앞으로의 운명이라고 합니다. 이 운명 안에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과 기능이 담겨있습니다. 야곱은 이제 새로운 싸움꾼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잠깐. 야곱이 애걸복걸하였다는 내용이 창세기에는 잘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근호 목사님의 해석이 맞는지 의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얍복강 장면을 이렇게 해석하시는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부터는 이장우 목사님의 창세기설교 내용입니다. 얍복강 사건을 흔히들 야곱이 기도하여 축복을 받아내었다고 이야기하는데, 기도하지 않았고 싸웠습니다. 호세아 12장 4절에 보면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다고 나옵니다. 천사와 싸운 것이 맞지요. 그런데, 이겼으면 기뻐하여야지 왜 웁니까? 여기서 간구하였다는 것은 살려달라고 빌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저는 이 대목에서 놀랐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았습니다. 내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겠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낮아지심, 희생도 나타납니다. 정말 놀라운 내용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복을 받는 것이라고,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복이 야곱을 소유한 것이라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것만이 축복의 대상이고 야곱은 축복의 대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복을 드러내고 언약을 이루어내시겠다는 것이지요. 이제는 힘을 의지할래야 할 수 없는 야곱을 통해서 뱀의 후손을 이기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펼쳐집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의 희생이 담겨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야곱에게 져주신 내용이 앞으로의 언약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더 이상 힘에 의존하지 않고 장차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다가오는 희생에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에게 참으로 하나님은 방패가 되시고 상급이 되실 것이라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복은 섬김과 희생으로 전달된다고 합니다.
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여호와의 군대’라고 하십니다.(출12:41) 거룩한 군대입니다. 이 희생정신을 나타내어야 할 이스라엘은 단순히 존재하기 위한 국가가 아니라 일하기 위한 국가입니다.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정신을 이해 못하는 이스라엘이나 이방 나라는 모두 하나님의 적이고 뱀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뱀 같은 애굽 나라와 대결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뱀의 기적을 행합니다.
그러나, 부름받은 모세조차도 할례언약을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지만,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려냅니다. 애굽의 장자들은 죽지만 하나님의 장자는 하나님을 만나도 죽지 않는데, 원래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례받은 장자들의 구원의 근거가 희생에 있음을 마지막 재앙 때 드러납니다.
여기서 이 목사님은 모세의 지팡이에 깊은 의미를 둡니다. 이 내용도 처음 들어보는 내용인데, 먼저 하나님께서 모세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니, 지팡이가 뱀으로 변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무서워 피합니다. 다시 하나님은 그 뱀을 잡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뱀의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로 변합니다. 이것은 애굽이라는 뱀이 모세의 손에 잡혀있다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모세가 잡은 뱀의 손이 문둥병에 걸리나 다시 손을 품에 넣으니 깨끗이 낫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구원해야할 이스라엘의 위상(문둥병에 걸린 부정한 자)이고 저주의 대상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십니다.(출15:26) 즉 모세의 지팡이는 뱀의 후손에 대한 공격과 자기 백성에 대한 치료라는 두 가지 사명을 보이는데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모세와 아론은 애굽에서의 10가지 재앙때 지팡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이 없다고 원망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치라고 하십니다. 이 반석은 보통의 돌이 아닙니다.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출17:6) 하나님께서 서 있는 반석입니다. 전에도 보았던 성경구절이였는데, 왜 그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요? 이스라엘이 맞아 깨어져야 할 것을 하나님 자신이 깨어지신 것입니다. ‘므리바’의 뜻은 ‘다투다’인데, 모세와 다툰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다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나라와 전쟁하여 승리한 것은 모두 하나님이 ‘붙여주신’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쟁은 ‘진멸’ 전쟁입니다. 이것을 현대인들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전쟁의 신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다, 등등 온갖 말들을 하는데, 지금까지의 논의로 이러한 말들이 성경의 개념하고는 틀리다는 것을 알겠지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도 언약에 위배되면 죽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언약만을 가지고 이야기하십니다. 언약정신에 위배되는 것은 그것이 이스라엘이든, 이방 나라이든 진멸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지는 상황은 하나님이 전면적으로 세상을 진멸하는 시점입니다. 상급은 반드시 보응에 대비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사62:11) 이것은 중요한 말입니다. 계속해서 이 목사님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저쪽에 보응이 있다면 진멸 전쟁에 참전한 자에게는 상급이 주어진다. 그 상급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전쟁을 벌일 때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자는 상이 없다. 그래서 신약에 와서 ‘상이 없다’라는 말은 ‘심판받는 신분’이라는 뜻이고 ‘상이 있다’라는 말은 ‘심판에서 제외되는 사랑의 대상’이라는 뜻이다.”(p.177)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류에 대한 파산 선고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는 쪽은 기존의 인간세계에 전혀 기대를 걸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는 옛날 선지자처럼 핍박을 받으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선지자들처럼 하늘의 상이 크기 때문이지요.(마5:12)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비참한 대우를 자초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하늘나라는 하늘나라다운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구제를 해도, 기도를 해도, 금식을 해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에는 하늘나라에 상이 없습니다. 이들은 율법으로 상을 차지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행위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상이란 상을 주는 쪽의 취지가 계속 남아 있어야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을 받는 자에 대한 판단과 결정은 상을 주는 쪽의 권한입니다. ‘주려고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치국물부터 마신다.’는 속담도 있지요.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9:41)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의 일을 제대로 구분하고 그 일을 행하는 자에게는 상이 주어집니다. 상급의 차등은 없습니다. 이런 개념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상급에 차등을 둔다는 내용인데, 이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생각들은 ‘선악체계’에서 나옵니다. 착한 일 하면 상 주고, 나쁜 일 하면 벌준다는 생각은 아담이 죄짓고 난 후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이것도 중요한 내용입니다.
오직 선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선입니다. 이것을 위해 인간을 애초부터 선과 악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배제시키셨습니다. 오직 선하신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마19;17) 인간은 착한 행위로써 선을 축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상급)을 받으려고 하지요. 이러한 기준으로는 창기나 세리들은 축적된 선이 없기 때문에 이들은 지옥에 가야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먼저 천국에 갑니다. 예수님은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인들이 구원받는 것은 자기의 행함이 아니라 외부에서 ‘의’가 그 속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의’의 외부성!(정말 중요한 말이지요. 인간 내부에서는 절대 ‘의’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계속하여 이 목사님은 신약의 성경구절을 가지고 상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중요한 내용만 간단히 언급하면, 모든 상은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다고 합니다. 은사를 받지 않은 성도는 없기 때문에 상을 받지 않은 성도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상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이기 때문에 상의 차등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구약에서부터 이어져온 하나님의 전쟁의 최종 승리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그 전리품인 상을 우리가 받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골로새서 3장 24절의 ‘유업의 상’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내용이 완성될 때 생기고,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레위 지파의 기업도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수13:33) 그래서 우리는 아들의 나라를 상속받게 되는 것입니다.(골1:13) 이 상은 썩어질 상이 아니고, ‘상이 크다’는 것은 이 지상의 고난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도 엄청나다는 말입니다.(롬8:18)
우리는 하나님의 상을 받았지만 최종적으로 이 상은 주님께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4: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