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아십니까

다시읽기 십자가를 아십니까 6 십자가와 전도 곽진계

아빠와 함께 2013. 1. 20.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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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9 11:31:31 조회 : 4855         
다시읽기 십자가를 아십니까 끝 십자가와 전도 이름 : 관리자 (IP:122.47.57.66)

 

다시읽기 십자가를 아십니까 끝 십자가와 전도 곽진계

6. 십자가와 전도

이제 마지막 단락입니다. 다시 읽는다는 것이 상당히 힘에 부칩니다만 새로이 정리할 수가 있어서 많은 유익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새로운 내용들을 많이 알았습니까? 이 목사님의 해석에 동의를 할 수가 있는가요? 이 목사님은 성경 전체를 사유합니다. 어떤 용어를 설명할 때 구약부터 신약까지 모든 구절들을 놓치지 않고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흔히들 ‘성경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지요. 그러나, 이 목사님은 줄기차게 성경의 통일성을 이야기합니다. ‘언약’과 ‘십자가’, 그리고 ‘선택’이 성경의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이 목사님의 ‘언약’은 다른 목사님들이 이야기하는 ‘언약신학’과 많이 틀립니다. 성경의 중심 내용 중 하나로서의 언약이 아니라 성경의 중심 내용인 것입니다. 사실 이 목사님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나중의 책들이나 강의들에서 반복되거나 확대거나 보충됩니다. 그래서 이 책은 이 목사님의 생각들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전도’는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흔히 버스터미널 같은 데서 2명씩 다니면서 “도를 아십니까?”라고 말하는 그런 사이비 ‘도’가 아닙니다. 전도의 ‘도’는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전한다는 것은 인간의 죄를 낱낱이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섰을 때 자기의 죄를 회개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새로운 계약으로 삼으셨습니다. “저녁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20)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실 때 약속을 통하여 구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고 난 후의 약속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 안’과 ‘세상’을 분리하는 기준이고, 전도는 서로의 세계가 차단되었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발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대로 메시야가 오기를 소원했는데, 이 메시야는 이 지상에서 이상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가 옛날 다윗 왕국처럼 번창하고 안정된 나라가 되기를 바랐는데, 선지자들의 예언에 의하면 이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이 다시 온다는 것입니다.(겔37:24,25)

민중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닌 것은 이렇듯 자기를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구원하실 메시야로 여겼기 때문이였습니다. 폭풍을 진압하시고, 귀신을 축출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분을 메시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인가를 놓고 다투고, 베드로는 올바른 신앙고백을 한 후 예수님께서 자신이 고난을 받아야 된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결코 죽으실 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마16:22)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여러분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그 메시야되심을 제대로 이해를 하였을까요? 유대인들은 과거에 핍박당한 선지자들의 비석을 보면서 자기들이 그 시대에 살았다면 선지자들을 핍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선지자들이 예수님을 예언하였는데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히 자기가 속한 민족이나 국자를 중심으로 사고하였다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자기 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 편이십니다. 사람들은 ‘악’이라는 것이 자기와 자기 영역을 공격하는 실체로 파악하지만, 실제로 ‘악’은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공격하는 실체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거꾸로 된 인식 체계를 가지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요18:36)라고 말씀하시니 예수님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찬송하던 그 무리들이 며칠 만에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변덕쟁이가 아니었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일관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는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고 ‘성령의 나라’입니다. 바로 이런 차이가 십자가 사건의 동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면서 오직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악에서 구출되는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그 하늘나라가 세상나라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요즘도 이런 십자가를 믿고 따르는 자가 있다면 예수님과 동일한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낯선 개념이라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전도란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멸망당할 자인지 구원받을 자인지 가려내기 위한 증거를 바닥에 까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구원의 증거가 될 것이요 어떤 사람에게는 멸망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빌1:28) 전도란 예수님 밖에 있는 존재에게 예수님 밖에 있다고 말해주는 일입니다.

‘예수님 안’과 ‘자기 안’이라는 상반된 입장은 관계 맺음으로 형성된 결과입니다. ‘자기 안’의 관계는 옛 아담과의 관계로 이루어지고 ‘예수님 안’의 관계는 예수님과의 관계로 이루어졌습니다.(롬5:11-21) 아담 계통은 단순한 존재의 영속성이 아니라 ‘죄있음’의 영속성입니다. 사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볼 때 그것은 확실합니다. 모든 인간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아담의 슬픈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담 안’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담 안’의 관계성은 ‘예수님 안’의 관계성과 동일하다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성경에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말씀합니다.(롬5:14) “오실 자 즉 예수님을 목표로 해서 아담은 이 땅에 태어났다.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죄가 그 개인에게 왕이 되고 더 나아가서 그의 후손에 대해서도 왕이 되었던 원칙이 이제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도 똑같이 적용된다.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예수님 안’이라는 세계 안에 있는 모두에게 영생이 지배한다.”(p.203)

아담이 태어난 이유는 예수님을 겨냥해서라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중요한 말이지요. 모든 성경의 내용이 예수님과 그 은혜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데, 거기에 아담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사신학’하고 결정적으로 틀린 부분입니다. 이광호 목사님을 포함한 ‘구속사신학’은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의 영광이 결정적인 훼방을 당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이광호, 『에세이 산상수훈』p.31 참조) 그래서 창세전에 선택하신 자기 백성들을 멸망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고자 은혜를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 ‘역사적 성취’로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들은 내용입니다. 이광호 목사님은 지금 ‘인간중심’의 신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 구원이 ‘역사’를 통해서 성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의 영광이 결정적으로 훼방을 당하였을까요? 오히려 이 아담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성과 예수님의 사역이 더 빛을 발하지 않는가요?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인간이 생각하는 ‘사후약방문’식의 처방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광호 목사님은 창세전에 선택하신 자기 백성들을, 멸망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으려고 예수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선택했는데, 어떻게 멸망합니까? 모순이지요. 제가 이광호 목사님의 책(산상수훈)을 전부 읽지는 않았지만,(전부 읽을 계획입니다.) 곳곳에서 역사(구속사)를 강조합니다. ‘역사’, ‘경륜’의 낱말이 곳곳에 등장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의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의 ‘때’도 ‘구속사의 때’라고 합니다.(p.32) 마치 하나님의 구속사역도 역사에 종속되는 느낌이 들지 않은가요? 이 ‘때’는 하나님의 ‘때’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성경을 보는 ‘전제’가 정해져 있습니다. ‘인간구원’중심으로 보니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근호 목사님은 전제가 없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그것은 ‘예수님’중심이요, ‘십자가’중심이요, ‘언약’중심입니다. 박영선 목사님은 ‘하나님’중심이요,(칼빈도 여기에 포함될 것임) ‘성화’중심입니다. 그러면, 어떤 중심으로 보는 것이 맞을까요? 물론 여러분들이 판단할 문제지만, 구약과 신약을 정말 정직하게 살펴본다면 그 답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하지만.

잠시 곁길로 갔습니다만 중요한 내용이라서 언급을 하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계속하여 예수님 안의 세계는 아담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아담이 지니고 있는 사망의 왕노릇에서 벗어나는 분이 바로 ‘오실 자’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린 분은 예수님입니다. 아담 안에서의 죄의 확산은 육체가 지닌 유전의 법칙에 따라 전염된 것이 아니라 죄 자체의 세력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죄를 싫어한다고 해서 죄의 통치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가 제공된 것은 ‘은혜’가 왕노릇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자는 더 이상 자기 육체를 자랑하지 않습니다.(고전1:29) 왜요? 은혜가 왕노릇하기 때문입니다. 전도도 이 은혜의 일부입니다. ‘전도해서 은혜를 받는 게 아니라 전도하는 것 자체가 은혜라는 말입니다.’ 정말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구약 때의 전도방식은 어떠하였을까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6:9,10)

이것은 종말을 내다본 전도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기회를 부여하는 전도가 아니라 이미 모든 기회는 상실되고 다만 완악한 자에게 주어질 심판만을 대기하라는 일방적인 통고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그대로 예수님과 사도들에게도 연결됩니다.(마13:14, 행28:26) 단절을 이야기합니다. 은혜성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파멸과 대조되면서 등장합니다. 이러한 파멸은 현실 교회 내에서도 재현됩니다. 교회는 날마다 종말을 체험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적인 전도란 종말의 상황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걸림돌의 역할을 합니다. 전도란 예언을 되살리는 작업입니다. 세상에 멸망이 왔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여”(롬10;15) 왜 아름다운지를 이 목사님은 묻습니다. 여러분, 한 번 대답해보세요. 왜 아름다울까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악마대로 실체를 드러내고 긍휼을 입은 택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확연히 드러나게 하는 것이 말씀의 위력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냐고 하십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할 자를 철저히 배척하는 능력의 복음이니 그 성취성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합니다. 구원받지 못할 자를 철저히 배척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이것도 ‘능력’이 될 수 있을지 우리도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이 목사님의 결론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그 사랑 안에 거하는데, 그 사랑은 희생제물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이 사랑은 ‘율법 외에 한 의’입니다. 법의 체계가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의 체계는 끊임없이 전도, 기도, 예배, 헌금, 주일성수 등을 반복합니다.

인간은 자기 탐욕으로 인해 괴로워합니다. 억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서 인생은 피곤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은혜는 그냥 뭔가 받는다는 차원의 은혜가 아니라 필히 십자가를 드러내는 계기로 작용한다고 합니다. 예배를 통해 십자가만 남고 기도를 통해 십자가만 남고 연보를 통해 십자가만 남고 전도를 통해 십자가만 남게 하는 은혜입니다. 이 목사님은 이 책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 이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그 기적을 유발시키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어떻습니까? 참으로 길었죠? A4 용지로 28쪽이나 되는 분량입니다. 저도 이렇게 길게 리뷰를 작성해 보기는 처음입니다. 되도록 쉽게 쓰려고 하였으나 본의 아니게 어려운 내용도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을 통하여 이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이 목사님 말마따나 ‘기적’일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이 기적이 일어났다면 여러분도 ‘십자가’를 알 수가 있을 것이고, 평생을 이 ‘십자가 안’에서 사실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 ‘십자가’를 욕망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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