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아십니까

다시읽기 십자가를 아십니까 3 십자가와 헌금 곽진계

아빠와 함께 2013. 1. 20. 09:09

 

다시읽기 십자가를 아십니까 3 십자가와 헌금 곽진계

3. 십자가와 헌금

이제는 성경적인 ‘예배’와 ‘기도’에 대해서 감이 좀 잡히신가요? 처음 들은 사람들은 생소한 내용에 어리둥절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틀린 말이 있던가요? 제가 성경을 전부 인용하지 않았지만 이 목사님은 성경을 근거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목사님처럼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연구의 범위와 깊이는 대단하십니다.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성경의 상식들을 뒤엎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전복성’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 목사님의 글들은 어렵습니다. 모든 주장은 십자가로 수렴되는데, 그 과정이 세밀하고 우리에게는 낯설기에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자주 접하다보면 감이 잡힐 것입니다.

오늘은 ‘십자가’와 ‘헌금’입니다. 헌금은 돈이기 때문에 현대인에게 엄청 중요하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없이 살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이 헌금의 문제에 대해서 이 목사님은 어떻게 풀어 가는지 따라가 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도 섬기고 재물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귀의 전략은 재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합니다. 아니, 아예 돈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여기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현실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현실교회에서 이 돈 때문에 복음전하는 사람을 핍박합니다. 안식일문제, 십일조문제 등으로 복음전하는 사람을 핍박하는 이유는 이것이 모두 돈으로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선한 이는 한 분이시니라”라고 대답하시면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라고 하니, 그 부자 청년이 근심하여 갔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 목사님은 돈이라는 주인을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자 청년이 근심하여 갔다고 말합니다. 영생을 얻고 싶었으나, 얻지 못한 것이 고통이였지만 돈을 버리고 산다는 것은 더 큰 고통이였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부자청년이 가지고 있는 ‘선’의 개념도 돈의 노예된 상태에서의 선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은 인간세계에서 핍박받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그 청년은 몰랐다고 합니다. 즉, 선이란 돈에 의해 감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헌금’을 설명하시면서 ‘땅’에 대해서 먼저 언급을 하는데, 아마 ‘복’의 개념을 설명하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땅의 축복상태는 땅이 소산물을 낼 때이나, 땅이 저주를 받으면 소산물을 끊어지게 되어있다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래서 가인은 땅의 축복을 염원하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인의 후손들은 이 땅을 자기들의 영원한 도성으로 삼고자 하였고, 셋의 후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악이 관영하는 땅은 심판의 대상이기에 노아홍수가 있었고, 그후 이 땅은 하나님의 은혜성을 품게 되었습니다. 땅은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 소산을 내고 충만하여야 하지만 인간의 죄 때문에 이 창조의 원칙을 고수하시기 위해서 ‘의인의 희생’이라는 차원으로 이 땅을 계시하였다고 말합니다.(아벨의 희생, 홍수심판 후 정결한 짐승의 희생이 먼저 있었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것도 그 언약 안에 ‘의인의 희생’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22:17)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창24:60) 여기서 공통되는 것은 원수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수는 어떤 사람일까요? 이 목사님은 아브라함의 ‘의’와 반대되는 성향을 지니고 땅 위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의’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면서 쪼개진 제물사이로 지나가신 것에서 볼 수 있는데, 제물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계약 성취를 위해 하나님 자신이 희생물로 제공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의’만이 악을 징벌할 수 있는 ‘의’라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인간의 ‘의’는 설 자리가 없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였습니다. 인간의 혈통 자체를 끊는 것인데, 혈통을 타고 내려오는 죄에 대한 원천봉쇄라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할례를 받은 자는 이삭이고, 따라서 혈통의 자식이 아니고, 약속의 자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삭에게는 ‘의인의 희생’이 담겨있고,(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가나안땅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에게만 해당되고 이방 민족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 민족은 원수입니다.

이러한 ‘의’가 없는 원수의 성문은 함락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함락되었지요. 이제 가나안땅은 약속의 땅(하나님의 약속을 이룬 땅)이기에 말씀대로 살면 복이 오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저주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신28장) 그래서 이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레25:55) 이스라엘 민족은 이 땅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고백을 하여야 하는데, 그 신앙고백이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땅 소유자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지요.

‘십일조’까지 오는데 서론이 너무 길었죠? 하지만 이 목사님을 따라오다 보니 십일조의 전제가 된 사건들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고, 동시에 성물이 됩니다.(레27:30) 땅에서 곡식이 나온다는 것은 아직도 축복이 존속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그들이 축복을 받고 있다는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은 중요하므로 그대로 인용해보겠습니다. “이 축복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고백을, 십분의 일을 드림으로 실행하라는 명령이 곧 율법이다. 그러니 십일조를 낸 사람이 복의 제공자가 되는 게 아니라 십일조를 받는 편에서 복을 빌어주어야 비로소 축복이 가능하다. 십일조는 복의 계통을 세우기 위함이다. 십일조를 해야 비로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 속에 놓여 있는 자가 이 복의 출처를 인정하면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p91)

그러면, 이 십일조는 어디에 사용되었을까요? 십일조는 우선 레위인들의 생존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레위인들은 땅이 없습니다.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줌으로써 나머지 십분의 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고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그네, 고아, 과부에게도 십일조가 쓰였습니다.(신26:12) 이들의 특징도 땅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후견자이고 구원자라는 것인데, 이것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도 이러한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 전에는 땅없는 자, 나그네, 고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월절 희생양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라는 측면에서 십일조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린 양의 희생 덕분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차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의인의 희생’을 반복하기 위해서 뽑혀나온 자들이 레위인이고, 십일조가 그들에게 향한다는 것은 십일조의 실체가 결국에는 희생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의 실체가 점점 드러나고 있지요?

레위인은 ‘의인의 희생’을 날마다 제단 위에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복은 어디서부터 옵니까? 레위인의 노동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기리는 제단에서 나옵니다.(출20:24)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 정착하면서부터 이러한 십일조의 정신을 잊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방 민족의 고유 종교 때문이고, 레위인들은 이방 종교에 봉사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사사기에 보면 나옵니다. 여호와의 언약이 이방 종교로 변질된 것이지요.

언약의 붕괴는 레위 지파의 대표성의 붕괴로 이어지고, 급기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 지파에게 기대를 걸기 보다는 사사와 왕을 원하였고, 왕 체제가 구원의 중심으로 들어서면서 십일조가 왕의 몫으로 돌아갑니다. “그(왕)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삼상8:15) 다윗이후에는 왕은 백성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고 백성은 왕 가문을 책임져야 하며, 레위인들도 왕 수하에 들어가게 됩니다.(대상16:4-6)

그러나 왕들은 힘을 가지려고 하였습니다. 주변의 나라처럼 힘만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여기고, 이방 민족의 성전을 모방하여 유대 나라에 세우게 됩니다. 형식에 의해 힘과 복이 주어진다는 발상은 이방화한 사고방식이라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성전은 형식적으로 변해가게 되었습니다. 우상숭배가 나라의 보존과 번영을 가져준다고 생각하였으며, 여호와와 우상을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호13:2,10:2)

그러나, 참된 이스라엘은 참된 왕과 하나님의 종을 기다리는데, 그 왕은 ‘의’로 통치하시는 분이고,(사32;1) 참된 종은 자기 백성을 위해 제물이 되시는 분이십니다.(사53:5) 선지자들은 참된 왕과 종을 기다리면서 자기 시대의 타락상을 비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 나라에 포로가 되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시키기 위함이였고, 성전의 회복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방 나라의 왕을 메시야 역할을 하게 하여 성전을 회복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본토로 돌아오게 하셨으며, 다시 성전제사가 드려지게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다시 제사장 중심체제로 전화시키시며, 십일조가 레위인에게 돌아가도록 하였습니다.(느10;37) 제사장은 이제 고위층이 되었으며, 제사장들은 죄악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는데, 품꾼의 삯을 억울하게 하고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말3;50)

이들을 학대한다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제사장이 불의하니 율법이 천시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은 유대 나라를 심판하고, 생명과 평강의 레위 언약을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십일조를 보시고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라고 책망하시면서 진정한 율법의 정신을 이야기하십니다. 의와 인과 신이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방식으로 십일조를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고 율법에 의미를 부여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 분이시고, 십일조도 내야 하는 분이 아니라 십일조를 받아야 할 분이십니다. 율법이 향하는 최종 도달점, 그 지점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드러내셨는데, 그것은 약속 성취입니다.

그 약속이 무엇입니까? ‘의인의 희생’이지요. 율법의 완성은 ‘의’의 산출이고, ‘의’의 산출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의인이지만 죄인처럼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아야 하는 그 괴로움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의인의 희생’은 아버지의 일관성 있는 약속의 본질인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는데서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과 공의가 완성된다(롬8;32)고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다 이루었다!”는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십일조하고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히브리서 7장의 내용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자는 멜기세덱인데,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 지파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멜기세덱으로부터 복빎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림으로 복이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복을 받았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말인데, 이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이 십일조를 율법화한 것은 레위 지파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나, 예수님의 등장으로 이 레위 지파 계통의 복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왜 완전하지 않았을까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레위 지파 자체도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가 완전하였으면 예수님이 레위 지파로 오시지 유다 지파로 오시지 않았습니다.(히7:14-16) 따라서 율법은 이제 폐지된 것입니다. 율법에 속한 십일조도 마땅히 폐지되었구요.

이제는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맹세에 대한 확실한 보증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히7;22)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모형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10;5)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더 이상 원하지 않습니다. 이제 복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히7;14-20) 아직도 복이 십일조를 통해서 온다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사와 예물을 대신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율법은 완성되었기에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근거로써 사용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라고 주신 율법을 인간이 ‘권력체제’로 만든 것이 이스라엘의 패망 이유라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지금은 어떠한가요? 그때 인간이나 지금 인간이나 다같이 아담의 노선에 있기 때문에 꼭 같습니다. 구약의 예물과 십일조의 법을 자신이 소속된 교회의 재정확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만 그렇습니까? 민중들(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의 보장을 위해서 ‘십일조’를 이용합니다. 그들이 욕망하니 목사들도 따라갑니다.

이러한 사실이 사회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는데, 간단한 예를 하나 들면, 독일 나치 치하의 히틀러 정권때, 대중들은 강압이나 억압에 의해서 히틀러의 정권에 동조하였다는 것이 지금까지 역사학에서 정설이였습니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대중들이 히틀러 정권을 욕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대중들이 히틀러에 속아서 정권을 내어준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들의 욕망에 의해 히틀러에 동조하고 동의하였다는 것입니다. 나치는 단지 그 대중의 욕망을 이용하였을 뿐이구요.(임지현, 『대중독재』1, 2권, 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참조)

이 사실을 이 목사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민중들의 호감을 살 만한 상품을 개발하는 것은 종교사업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민중들은 무엇을 원할까?..... 인간교에 속한 종교사업체들은 시장조사에 나선다. 조사해 본 결과 민중들은 두 가지를 원하고 있었다. 하나는 죽어서 천국 가는 것과 살아서 축복받는 것이다.”(p109)

계속하여 이 목사님의 탄식을 들어보겠습니다. “교회가 세상이 되어버렸다. 세상적인 복으로부터 탈출한 자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 축복을 그대로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다. 복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복의 멍에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교집단으로 변해버렸다.”(p113)

성경의 멧세지는 전혀 틀립니다. “구약의 복 내림은 중심을 갖고 있다. 중심되는 그 인물에 관심을 가진다. 그 인물은 여타의 인간들과 다르다. 그 인물 속에서 은혜의 정체가 점차 드러난다. 하나님은 인간됨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해주시려 한다. 다시 생명나무 곁에 있어도 될 만한 존재로 새로 창조하시려 한다. 무죄 상태가 아니라 아예 적극적인 의인으로 삼으려 하신다. 자기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자 속에서 사시려고 한다. 성도를 자신의 궁전으로 간주하시려 한다.”(p113)

너무 길어지지만, ‘연보’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하겠습니다. 연보란 오직 예수님만이 복의 완성인 것을 보이는 은사라고 합니다. “연보는 은사다” 이 말은 이장우 목사님도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연보는 돈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고, 주님의 계시가 전달되기를 바라야 되고, 이웃사랑을 나타내어야 하고, 자발적이야 하고, 일률적이서도 안되고, 본인이 느끼는 은혜의 폭만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돈의 노예가 된 상태에서 나오는 헌금 정신은 무엇인가? 라고 이 목사님은 질문합니다. 그것은 십일조하면 복받고 감사헌금하면 더 복받는다고 여기는 우상종교 교리의 극치라고 자답합니다. 왜냐하면 탐심이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엡5:5)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과 흥정하려는 심보인데, 이런 사람들은 연보하지 않아도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끝으로, 이 목사님은 “복이란 이미 완성된 복이 되신 주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연보란 이미 그 완성된 복을 누리고 있음을 사랑의 형식으로 내어놓는 것이다. 이것이 제물의 완성이다.(빌4:18)”라고 하면서 마무리를 합니다. 저도 더 이상 코멘트 달지 않고 이 장을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