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십자가와 기도 요즘 출판계에서 유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요? 고전이나 훌륭한 작품들을 우리나라 저자가 다시 읽은-리라이팅-내용을 책으로 출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것은 잊혀진 고전들을 발굴하여 다시 상기시키는 역할과 일반 독자들에게 쉽게 설명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목사님의 책들과 논문들 중에서 정말 훌륭하고 복음적인 내용들이 많이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일반 교인들에게-물론 출판 당시에도 많이 안 읽혀졌겠지만, 원래 복음이 그런 것이 아닌가요?-잊혀지고, 어렵다고 외면하면서 너무나 귀중한 내용들이 잘 읽혀지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제가 다시 읽은 내용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면서 저도 새롭게 정리할 수가 있고, 여러분들은 전에 읽었던 내용들을 다시 상기할 수가 있어, 서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목사님이 쓰신 책들 중에서 이 책은 조금 쉽게 쓰여졌습니다. 정말 어려운 책은 ‘복음의 회복’인데, 제가 처음으로 읽은 이 책은 읽다가 중간에 다 못 읽고 1년인가 지나서 다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들도 다시 읽으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단락에서 ‘십자가’와 ‘기도’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이 목사님은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기도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맞는 말 같죠? 인간이 급할 때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천지신명님 등 온갖 신들을 다 들먹이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을 주위에 많이 보았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매한가지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배를 원하면 예배하고, 헌금을 원하면 헌금하고, 금식을 원하면 금식하고, 자기 희생을 원하면 자기 희생까지 감수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코미디 프로의 “안 되겠니?” 정신이지요. “대한민국에 안되는 게 어디 있니? 다 되지!” 구하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 목사님은, 인간이 사탄의 유혹을 받은 후, 누리는 존재에서 더 요구하는 존재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나서 겪게 되는 결핍에서 나온 고통의 표현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최초의 계시에서, 가인의 기도(제사)는 듣지 않고, 선택되어 희생된 자인 아벨의 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기도의 응답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계시가 노아에게서는, 정결한 짐승의 희생에 의해 부정한 짐승이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총의 상징이 무지개인데, 땅에 대한 하나님의 계속되는 축복은 선택한 자의 기도에 근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란 하늘에 있는 은총의 실현태로서 ‘의로운 자의 희생’이 지상에 계속 등장하기를 간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기도론’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요? 새로운 내용입니다. 계속해서 이 목사님은 아브라함의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어 복의 근원으로 삼습니다.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겠다고 하셨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잡혀간 조카 롯을 구하는 장면에서도 나오고, 소돔성이 멸망할 때 롯이 구출받는 장면에서도 나옵니다. 특히 창세기 19장에는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누이동생으로 여긴 사라와 동침하려고 했던 아비멜렉 왕의 닫힌 태가 아브라함의 기도로 열리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기도란 복의 중개인이 그 복을 제3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러한 복의 전달체가 개인에서 이제는 민족과 국가로 이어지는데,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아브라함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출애굽기 2장에 나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신 것이라고 이 목사님은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와 아론 때문에 고역이 더욱 늘어났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판단하여 달라고 기도하였던 백성들이기 때문에, 이들은 전혀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편안함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는 방식으로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물근성을 폭로케 하는 고통이 수반되어야만 하였다는 것이지요. 출애굽 경험은 이스라엘 백성이 대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경험이고, 이러한 구원의 의미를 재현하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율법이라고 이 목사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기의 의로움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심으로 구원을 받았고, 이것은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는 하나님의 구원방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데, 가나안땅에서 긍휼이 사라지고, 고아와 과부가 그 억울함을 기도하면 저주가 내려지는 것이 모세언약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국가에서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유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에 동화되고, 힘을 축적하고자 하며, 왕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런 때에 ‘한나’는 가난한 자는 부요하게 되고 부요한 자는 가난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참다운 의는 항상 억압받는 형태로 등장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상황을 완전히 뒤집어서 의인을 위해 보복하시는 방식으로 실현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함으로 이제 왕이 율법을 이행하므로 나라 전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통치 방식이 시작되었는데, 이 왕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야 하고, 의인의 희생을 체험한 왕이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열왕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되고, 북쪽은 아예 기도의 통로를 잃게 되고, 그래서 금송아지를 섬기게 됩니다. 이때 엘리야는 하나님의 언약(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가나안땅에는 저주가 임하게 됨)대로 비가 내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여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엘리야의 기도가 진정한 기도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언약대로 시행하여 달라는 기도를 여러분은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엘리야 선지자는 후대 참된 선지자의 모델이 된다고 이 목사님은 말씀합니다. 그러면 당시 거짓 선지자들은 어떻게 기도하였을까요? 그 한 대목을 성경에서 인용해보겠습니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 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미3:10,11) 여기에서 다른 자들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거짓 선지자들이 돈을 위하여 예언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2,700년의 세월의 격차가 있지만 지금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은가요?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행태가. 이런 거짓 선지자 때문에 핍박당하는 것은 참된 선지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기도하였습니다.(왜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어떤 기도였을까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그들이 바라본 것은 ‘여호와의 날’의 도래인 것입니다. 언젠가는 메시야가 오셔서 기존의 모든 거짓된 것들을 심판하시고 오직 약속만을 믿는 의인들만 구원하리라는 그 날을 하늘에 호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은 핍박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지금도 약속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달리 방법이 없게 만드십니다. 이러한 핍박받는 자들의 기도(원한)는 예수님의 비유 중 ‘불의한 재판관’에서도 나오고, 요한계시록 6장의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당한 영혼들의 피에 대한 신원을 하여달라고 하는 내용에도 나와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이러한 핍박받는, 고난받는 통로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구약의 성전을 향한 기도는 예수님을 향한 기도로 바뀌어야 하고-예수님이 성전이시니까- 복의 통로, 기도의 통로도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오직 긍휼과 사랑의 실현인데, 하늘의 용서가 이 땅에 적용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뜻은 거부됩니다. 인간의 뜻은 무엇일까요? 자기 생존을 위한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인간의 뜻은 미완성적이고 비긍휼적이고 비언약적인데,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께서 몰고온 아버지의 완전한 뜻에 대한 인간들의 거부의 몸짓이였다고, 이 목사님은 진단합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대신하고 완성하였고, 모든 율법이 당신을 겨냥해서 부여된 것이라는 주장에 유대인들은 격노하면서 예수님을 단지 율법해석자로만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손으로 율법을 준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가능성을 버리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기도도 하나의 방편인데, 자신들이 율법을 준수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인식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는 말씀을 하셨고, 유대인들은 이런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의 충돌이 발생하였고, 그 충돌로 인해 십자가 사건이 발생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오직 예수님의 기도 외에는 그 어떤 기도도 듣지 않으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도는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기도하는 것에 대해 무지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탄식하는 기도가 필요하고, 지금도 하늘보좌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목사님은 ‘주의 이름’과 ‘기도’와의 관계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우리도 잠시 주목하고자 합니다. 구약에서의 율법은 ‘주의 이름’의 능력을 지상에서 보존하고 확인하는 작업에 동원되었는데, 제사장이나 왕은 희생제물을 근거로 해서 ‘주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축복과 구원을 보장해 주셨구요. 즉, 주의 이름은 구원의 방식이였습니다. “누구든지 주(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2:32) 여기서 ‘주의 이름’은 다른 나라의 왕을 대신하여 부르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왕은 백성들의 지배자이기도 하지만 그 나라를 구원하는 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이 하나님의 이름을 두기 위한 장소는 따로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제물과 제사하는 방법도 지정하셨구요. 그 장소는 한마디로 기도하는 장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소는 필히 구원의 권능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장소라야 하는데, 그러나 그 공간이 범죄로 물들었을 때 특정 가문으로 이동하였고, 그 가문은 다윗 가문이라고 합니다. 이 가문에서 ‘주의 이름’으로 등장하실 분이 계시다는 것이 ‘다윗언약’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언약에 의하면, 왕이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긴밀한 계약관계에 놓인 존재이고, 이 왕은 백성을 대표하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왕이 온전한 의를 행하면 그 백성들도 구원이 주어지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을 학수고대하였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의인의 희생’을 ‘왕’의 자격으로 치러내어야 하는데, 그때 예수님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주의 이름’의 자격으로 한 예수님의 기도의 목표점이자 종결점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 뜻을 따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이구요. 여러분, 놀랍지 않은가요? ‘주의 이름’과 예수님의 기도에 이런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당연히 주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야 하는데, 이는 ‘주님’으로서의 사역의 영속성을 위한 것이라고 이 목사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가 되신 예수님의 자리는 구약에서 여호와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뜻대로 구하여야 하는 단서조항이 있지만. 예수님의 기도 중 대표적인 기도가 하나 더 있는데,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의 기도로서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약하면, 아들을 통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여 달라는 것이고, 영화롭게 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붙여준 자들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서 입니다. 즉,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성령께서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서 과거에 발생한 십자가 사건이 성도 안에서 현재화되어 나타나고, 성도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소는 오직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단호하게 ‘예수 안’이 ‘십자가 안’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내 안’은 없습니다. 조금 길어졌는데, 어떤 내용도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 없어서 불가피하게 길어졌습니다. 이제 기도에 대해 정리를 해봅시다. 이 목사님은 ‘기도’를 가지고 구약에서부터 신약까지 살펴보면서 결론으로 십자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도는 본능이고, 자기를 초월하려는 몸짓이지만 참된 기도는 자기 기도를 죽이는 기도라야 된다고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한 발자국도 이탈되지 않고 늘 십자가에 자신이 매달리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기도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도 성령께서 탄식하며 기도하여 주시고, 예수님께서 하늘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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