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읽기 십자가를 아십니까 4 십자가와 주일성수 곽진계
4. 십자가와 주일 성수
‘십자가’와 ‘헌금’ 부분이 너무 길었는데, 그 만큼 하고 싶은 말씀이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현실교회에서 생명같이 여기는 것이 이 헌금(십일조)하고, 지금부터 이야기할 주일성수라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따갑도록 듣는 말이 “십일조하고 주일성수하는 것이 교회생활의 기본이다.”라는 말인데, 이 말이 현실교회의 실태를 말하면, 기본이고, 주님의 진정한 교회를 말하면, 기본도 안되는 말인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를 나가고 싶어도 십일조나 주일성수가 부담이 되어서 못나가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많이 봅니다. 죄인들이 용기 내어 가야할 곳이 교회가 아니라, 의인들이 다니는 곳이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주일성수’에는 어떤 비복음적인 내용이 들어있는지를 이 목사님을 따라 추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목사님은 시간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해가 뜨는 때부터 해가 지는 때까지를 ‘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일은 사회적인 관습에 따라 1주일 중 하루를 쉬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하고는 관련이 없다고 이 목사님은 말씀합니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도 ‘가상’의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부터 조금 어려운데, 시간이 가상이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철학계에서도 많은 논란이 된 주제 중 하나인데, 이 목사님의 시간관은 어떠한지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이 목사님은 시간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고, 우리의 관념상의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른다.”라고 표현은 하지만, 이것은 언어상으로 표현할 뿐 실재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치 상상의 ‘용왕’이라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듯이. 그러므로 과거도, 미래도 실재하지 않고 오직 육신만이 실재한다고 합니다. 시간느낌은 육신이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은 무엇일까요? 시간은 자연의 변화를 보고 그 전후의 차이를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인식 본능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연의 변화가 없으면 시간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맞지 않는가요? 자연이 변화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차이를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이 자연의 변화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죽더라도 자연은 움직입니다. 왜 움직일까요? 성경은 노아언약 때문이라고 말합니다.(창8;22) 그래서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고 교체되고, 인간은 이것을 보고 시간이 흐른다, 라고 표현을 하면서 시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창1:14)
‘일자’를 이루는 것이 태양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 변화를 포착하고 이것을 계산하여 시계를 만들어내는데, 시계는 자연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히브리인들도 순환하는 천체를 통해 시간 관념을 가지게 되는데, 선지자들은 이러한 천체가 붕괴하는 시점이 온다고 여겼습니다. 먼저 창조된 세계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로 채워진다는 것이지요. 무엇이 그렇게 한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목사님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항상 무시간적이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이 목사님은 안식일은 자연의 변화에 주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셨지 시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시간까지 창조하셨다면 시간 타락 혹은 시간 구원이라는 가설이 성립될 수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자연을 구원하시지 시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목사님의 시간관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옛날에 논란이 되었던 부분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중요한 내용임에는 확실합니다.
지금 이 목사님의 주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하나님이 시간도 창조하셨다.”는 내용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오직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이고, 하나님은 시간을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 목사님이 ‘구속사신학’을 비판할 때 핵심 개념입니다. 이 목사님은 하나님은 시간을 의식하지 않는데, 왜 인간들은 시간과 결부된 구원을 이야기하는 지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지금 이광호 목사님의 ‘구속사신학’에 대한 이 목사님의 서평으로 논란이 되었는데, 제 생각에 이 목사님은 ‘구속사신학’에 포한되어 있는 역사(시간)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역사를 파악해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건’으로서 온다는 것입니다. ‘사건’은 중요하고 복잡한 개념이지만 아무튼 ‘십자가’ 사건은 일회적이지만 그 사건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십자가 안’에서 그것을 계속 체험하는 것이구요. 시간하고는 상관없이. 제가 이 목사님의 시간 개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파악하였고, 또한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시간’ 개념은 철학자나 신학자에게는 중요한 화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시간성에 놓여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왜 시간과 결부된 구원관을 펼치는가? 그것은 시간을 자연의 일부로 여겨 외부 요소에 구원을 기대하는 비계시성 구원관 때문이라고 하는데, 즉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시간이라는 자연이 인간에게도 구원이라는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상당히 어렵죠? 저도 어렵습니다. 오독할까봐 상당히 조심스러운데 이 목사님의 취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서의 구원은 시간하고는 상관이 없이 오는데도 인간들은 이 은혜로서의 구원을 시간과 연계하여 자연의 일부로서 받아드린다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미래의 시간에 의해 어떤 변화가 생기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의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현재의 빈곤성만 드러내게 되고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미래를 미리 취하는 것(선취)이라고 합니다. 미래를 선취하게 되면 미래는 이제 완성이기 때문에 ‘아직’이 아니라 ‘이미’가 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구도는 원인은 제공되지도 않았는데 결과부터 상상하며 즐거워하는 자기 암시일 뿐이라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이러한 시간 개념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내용으로 하는 계시와 연결해야지, 그렇지 않고 마치 자연 속에 실제로 시간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해서 인간을 시간의 노예로 만들어서는 안된다.”(p125) 이것은 인간이 범죄 후 인간 중심적으로 변질된 사고에서 나온 철학적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계시와 연결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구약(의 역사)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 자체를 계시로 보는 사람은 성경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이 역사를 해석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어떠한 해석도 가미하지 말자.’라는 주장은 그때 예수님께서 이미 계신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함임을 모른다고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 목사님은, 예수님을 겨냥하지 않은 사실은 계시가 아니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목사님은 자연스럽게 안식일도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는 것과 연결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이지요.(마12:8) 안식일은 시간적 차원이고 예수님은 한 인물인데, 시간이 어떻게 인물로 변할 수 있느냐가 안식일 해석의 관건이라고 말합니다. 시간과 인물 사이의 연결고리는 직접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준수하는 인간의 행위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계속 이 목사님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있다고 합니다. 처음 창조 때의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자의에 의한 것인데, ‘안식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안식일의 제정자요 주체라는 것입니다. 안식하신 이유는 창조의 완성이였구요.
그러나, 범죄후의 안식일은 인간을 부정하고 죽이는 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식을 훼손하면 심판하여 죽게 됩니다. 출애굽이후에는 거룩이 추가가 되어 거룩을 보여야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은 노동을 하면 안 되는데, 그 이유는 안식 자체가 인간의 노동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또 이 날은 성회로 모여야 하는데, 안식일이라서 성회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성회이기 때문에 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레23:7) 이것은 안식일 자체가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날에 해야 하는 내용에 주도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이후의 안식일 계명은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합니다.(신5:15) 유월절은 성회이고, 성회는 안식일입니다. 모든 제사는 이 유월절의 재현입니다. 처음에 번제로만 드려진 제사는 화목제가 추가되는데,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도 죽지 않게 된 상태를 뜻하고, 나중에 속죄제가 추가되는데, 이스라엘 자체에는 ‘의’가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안식일은 제사하고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최초의 율법인 유월절의 시간적 배경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메시야가 언약을 완성할 때 안식일의 완성도 포함되는데, 안식일의 완성은 제사의 완성시키면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제사는 영원하고 더 이상 성전과 안식일이 필요없게 됩니다. 성전이 헐리면 제사도 필요없고, 레위 지파도 필요없고, 안식일도 필요없게 됩니다. 영원성이란 시간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상당히 중요한 말이지요.(시간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시간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말은 피조세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인데, 시간은 피조세계의 움직임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이 영원성을 위해서 영원한 나라에 계신 분(이를 ‘묵시적 존재’라고 하지요)이 지상에 오시는데, 이를 ‘인자같은 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옛언약을 영원한 성취 상태로 만들려면 제사제도를 완성하면 됩니다. 모세 율법은 제사이고, 제사의 완성은 제물과 제사장이 영원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영원한 제물이 되시고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히7:11-25, 9:23-26)
그래서 안식일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노동하는 것은 안식법에 저촉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제사장의 노동 덕분에 백성들이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보다 크고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비를 원하는데, 그 자비는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다는 것입니다.(마12:5-8)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느라”(갈4:10-11) 날을 지키고 예수님도 믿으면 서로 좋은 것이 아니라 날을 지킴으로 예수님의 자비가 헛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행위는 예수님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지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골2:16) 안식일 때문에 비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일 안 지키면 비난해도 되는가요? 주님이 의롭다 하셨는데, 누가 비난합니까?
이 목사님은 역사도 허구라고 합니다. 오직 실재하는 것은 인간이 만든 문화와 문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역사에 대해서 몇 장에 걸쳐서 구속사를 인정하는 측과 인정하지 않는 측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비껴가겠습니다. 결론은 구속사 측은 전통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주일성수’라는 것이지요. 초대교회의 전통(?)
그러나 초대교회의 전통이 주일성수가 맞을까요? 당시 신약의 성도들은 안식일에도 주로 모였는데,(행13:14.27,42) 이유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고, 안식일 다음날에도 모였는데,(행20:7) 안식일을 벗어난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정한 날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저 모이기를 힘썼을 뿐인데, 교회전통은 이를 왜곡하여, 유대인의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보여주듯이 예수님의 부활한 날인 안식후 첫 날이 멋진 계시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 주일 첫날에 갈 터이니 연보를 준비하라는 말도(고전16:2) 왜곡하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롬14:5) 믿음이 연약한 사람한테 하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주일’이 없습니다. ‘주의 날’만이 있을 뿐인데,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는 말은 시간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말도 지상의 시간 계산과 상관없이 주의 날이 이 세상에 개입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날’은 ‘날’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날은 주되심이 드러나는 날, 심판의 날입니다. 주의 날이 부활기념일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주의 날’을 미리 보았습니다. 심판주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다니엘이 보았던 모습입니다. 이런 분 앞에서 사도 요한은 죽은 자 같이 엎드려졌습니다. 인간은 공간과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다고 이 목사님은 말합니다.(성령의 사역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아야할 내용인 것 같습니다.
사실이 이러한 데도 왜 오늘날 주일성수라는 율법의 들러리로 성경구절이 왜곡되는가? 여기서 이 목사님의 말씀을 인용하겠습니다. “민중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천국가는 방법론을 제시하라고 다그친다. 그들은 아담노선이다. 그래서 율법과 규칙밖에 모른다. 천국도 어떤 규칙을 준수함으로써 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다 하겠으니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것이다. 민중들은 천국 가는 규칙을 제시하지 않으면 하나둘 씩 떠난다.‘ 민중들의 욕망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앞의 내용과 같습니다.
요약하면, 안식일을 설명하기 전에 시간관을 먼저 언급을 한 후 안식일의 개념이 변천되는 과정을 거쳐서 이것이 제사제도를 통해서 예수님에게 완성이 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어려운 부분이 좀 많았죠? 개인적으로 이 목사님의 시간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