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3강-에스더 강해(역사 검열) : 이미 탈출 (강의:이근호 목사)
사람들은 이 세상을 정직하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남을 속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정직이라 하는 것은 이건 위장이고 위선이거든요. 진짜 정직하게 사는 것은 자기 말을 하고 남이 듣고자 하는 말에 동조하지 않을 때 그게 진짜 정직하게 사는 거예요. 남의 비위를 맞춰줄 하등에 이유가 없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네가 유대인인 것을 말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소속이 다르다는 거죠.
소속이 다르다는 말은, 모르드개의 입장에서 이미 바사 나라, 이사야 44장 28절에 이야기했지요. 그 바사 나라로부터 이미 빠져나갔음을 알리는 역할로 지금 자기는 바사 나라에 살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미 빠져나간 거예요. 그런데 바사 나라 사람들은 빠져나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태어나면서부터 봤던 이 세상 이게 전부지요. 우리가 보는 현실이 전부에요.
모두(all), 전부라는 말은 빠져나갈 생각조차도 용납이 되지 않지요. 이게 전부인데 전부 바깥은 없잖아요. 여기서 빠져나간다는 말은 결국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이 말이죠. 여기서 빠져나갔다는 이 말은 결국 현실이 전부라고 여겼던 것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라는 이 생각은 빠져나간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죽으면 다른 나라, 극락이나 천국이 있겠지. 이거는 아직까지 안 죽어봐서 하는 이야기고 정말 죽기 전에 이미 빠져나간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미련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껏 거짓말을 하세요. 소속이 다르니까 너는 유대인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이 자체가 이미 그쪽 세계의 법을 나는 개무시하겠다는 뜻이에요. 나는 너희들이 살아가는 닫힌 현실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닫힌 현실에 있어서 바사 나라 이야기, 에스더 이야기에 주인공이 여럿 나오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하수에로 왕이죠. 그는 최고 권력자입니다. 여러분이 에스더를 읽어봐서 알겠지만 에스더 1장부터 나열된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바사 나라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걸 과시하는 식으로 소개되어 있어요.
에스더 1장부터 해서 잔치를 벌였는데 얼마나 먹을 게 많은지 영토부터 해서 인도에서 구스까지 1270도 치리하는 왕이다. 다리우스라는 선임 왕 때부터 커졌어요. 영토 커진 만큼 여러 가지 재물들의 마구마구 쏟아지게 된 겁니다. 무역하는 사람들에 관세를 때리니까 그만큼 수입이 많은 거예요. 수출을 해야 돈 벌지요. 그리고 잔치를 베풀고, 180일 동안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주 대단한 더 이상 천국을 탐할 필요도 없고 인간으로서 욕망할 수 있는 소망할 수 있는 최고의 극치의 모든 즐거움을 다 누리지요. 이게 인간이 소원한다는 끝, 그게 인간이 현실 속에 살면서 나는 그렇게 되고 싶다는 극단을 지금 에스더 1장에서 다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바사 나라에서 주인공 중에 한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이에요.
이 아하수에로 왕이 궁전에 살잖아요. 이걸 에스더가 접수합니다. 이미 장악해버렸어요. 아하수에로 왕은 이 권력을 소지하고 있지만 에스더는 이 권력을 장악하면서도 나는 이미 이러한 시답지 않는 권력에서 빠져나갔음을 알리고 있어요. 갖고 노는 겁니다. 이 세상 권력에 대해서, 에스더가.
에스더는(아하수에로?) 전부에 자기가 소유물이라고 여겼거든요. 따라서 전부를 장악하기 위해서 그물망처럼 법을 쏟아대요. 모든 법으로 쏟아댑니다. 이것을 현대용어로 하면 네트워크에요. 매트릭스 같은 거죠. 매트릭스를 보게 되면 이러한 선들이 교차하고 촘촘히 교차돼도 항상 교차되면 교차될수록 뭐도 같이 늘어나요? 빈자리가 더 늘어나는 거예요. 촘촘하게 한 것을 감추기 위해서 더 덮어도 세로줄, 가로줄 그을 때마다 여기에 새로운 가치가 그 세로줄, 가로줄 사이에 또 공백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네트워크는 무슨 현실이냐 하면, 가상현실이에요. 법을 따르기만 하면 나는 정직한 사람이 되고 법을 지키는 준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칭송받고 복을 받는 사람으로 대우받는다, 라고 수면 위에 고개 내밀면서 법의 세계에 충실하면서 밑에 법을 피해서 잠깐 내려가게 되면 여기는 총체적 난국이죠. 사는 게 중구난방이란 말이죠. 자기 집에 가서 법 지키는 사람 봤습니까? 안 지키지요. 자기 집에선 충실히 법을 안 지키다가 아침에 출근할 땐 충실하게 법을 지키죠. 그만큼 이중생활하고 있는 거예요.
진짜 본심은 총체적 난국이지만 자기가 사회에서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촘촘한 법에 호소해서 나는 법 지켰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바로 이 법에 대해서 굴복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네트워크 가상현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에요. 가상현실이란 말을 하는 것은 아무리 법이라 해도 이 법 앞에 공백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이 법을 하면서도 유일하게 법에서 벗어난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이 누구겠어요? 그게 바로 아하수에로 왕이라 했지요. 예외를 두 가지 사람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왕이 예외에요. 또 하나는 누가 예외로 등장합니까? 여자가 예외로 등장합니다. 이 촘촘한 법을 누가 깨느냐 하면, 와사비가 아니고 와스디가 깨버리잖아요.
남편이 아내한테 온갖 것 다해줘요. 이 정도하면 내가 시키는 대로 다하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니가 이 정도하면 고분고분하겠지. 내가 이 정도 희생하고 퍼부었으면 이제는 내 하는 말에 따라오겠지. 그렇게 다했는데 이 여성은 그 자체로 돌출과 돌발 사태를 일으키는 겁니다. 충분히 넉넉하게 줬는데 원하는 대로 다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순간적으로 반기를 들어버리죠. 반발을 해버린단 말이죠.
그러면 남자가 이해한다는 것이 이만큼 충분히 했으면 다른 남자 같으면 내 남자후배 같으면 나한테 고분고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왜 고분고분할 줄 모르느냐, 하면 여자 쪽에서 하는 말이, “그건 남자가 당연히 할 것 아니냐.” 그러면 남자가 하는 말이, “여자여, 당신은 뭘 원하느냐?” “일단은 당연히 할 건 다 하고 내가 말할 자리는 따로 마련해도.” 그러면 남자는, “그럼 나는 뭘 얻을 수 있는데?” 그렇게 다해주고 얻을 수 있는 게 뭔데. 그러면 여자가 하는 말이, “당신은 모든 것을 당신 손아귀에 장악하는 자체가 나빠.” 모든 것을 시키는 대로 다해야 만족하는 그 남성형 자체가 나쁘다는 거예요.
남자의 특징은 뭐냐? 전면적으로 다 법으로 통제하고 자기는 어디 자리에 앉고 싶다? 그걸 내려다보는 예외의 자리에 궁극적인 신적 자리, 신의 시선으로 응시할 수 있는 그 자리를 남성은 추구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자리. 바깥에 직장에서 눌리고 직분상, 지위상 눌려있다고 가정에서만큼은 큰소리치고 싶은 것이 남자의 마음이에요. 그냥 하면 큰소리 못 칠까 싶어서 들어갈 때 치킨 사들고 가잖아요. 어린애들은 그것도 모르고 아빠 좋다고 달려들지요. 그럼 아내는 다른 메뉴 없나. 패턴 좀 바꿔라. 묵어도 많이 묵었다. 그것 말고 딴 거 없나. 이렇게 되는 거죠.
왕과 여자의 공통점은 예외의 자리를 자꾸만 만들어낸다는 거예요. 그래서 거짓말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법체계에 의해서 포착을 해서 판정을 내리는데 네트워크의 사회가 사실은 인간들로 하여금 네트워크 법을 준수하게 되면 나는 정당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점점 자기의 정당화는 따로 챙기고 수면 밑에 가서는 숨 쉬고 싶은 거예요. 남 소원 따라준다고 힘들어 죽겠다, 하고 집에선 퍼져서 눕는 겁니다. 너무 힘들어서. 남의 장단에 맞추려니 힘드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보통 여성단체라는 게 있잖아요. 여자의 할 일은 초치는 거기 때문에 미리 남성의 전면적인 통제되는 현실이 있어줘야 여자는 거기 들어가서 초를 치고 바늘로 찔러버리죠. 여자가 먼저 전체라는 건 없습니다. 그런데 여성단체라는 게 있는데 이건 여성단체가 아니고 전면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점은 모든 것이 남성성입니다.
여성단체는 여자의 모임이 아니고 사실은 남성의 것을 흉내 내고 그걸 갖고 싶어 하는 모습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남성의 것을 너희만 좋은 것 가지냐 우리도 갖자 해서 여성협의회 단체를 만드는 거예요. 이거는 이미 남성의 법적인 네트워크에 말려든 셈이에요. 여성단체나 또는 여왕이 있다든지 여자가 총리가 된다든지 그거는 여자로 보면 안 됩니다. 남성성 중에 일부라고 보면 돼요. 제대로 된 여성성을 보이질 못하지요.
그래서 하만과 모르드개 남성들의 권력 싸움에서 중간에 에스더가 끼어들지만 에스더는 남성과 여성을 지배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어요. 지배하면 본인이 남성이 되니까. 여성투사가 아니에요. 전면적인 이 전체를 허물어뜨리는 겁니다. 그것을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뭐로 만드느냐? 가상현실인 것을 노출시키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아느냐? 내가 이미 빠져나갔으니까 안다는 거예요.
이미 빠져나갔으면 그것도 전면적인 소속이 될 텐데 어디 소속이 되어있느냐? 그것은 하만과 모르드개의 의견충돌로 알겠지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모르드개는 이미 빠져나간 것을 알리기 위해서 바사 나라에 있는 거예요. 이미 바사 나라의 소속이 아니기에 바사 나라에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하만은 뭐냐 하면, 신이 있고 신의 대행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권력을 주었다는 이런 입장이에요. 하만의 입장을 쓰게 되면, 신은 존재하나 나타나는 것은 인간이다. 또는 인간의 권력이다. 이게 하만의 생각이에요. 모르드개는, 신은 존재하지 않으나 신은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존재하지도 않는데 나타나기만 했단 말이죠.
그럼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르드개의 뜻은 뭐냐 하면, 기존에 하만의 생각 전체가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소유하려는 그런 의식이거든요. 모든 걸 다 끌어 모아야 성에 차요. 남성의 세계는 모든 다해야 모든 것의 모든 것 다해야 돼요. 그런데 모르드개는 유대인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어떤 민족이냐 하면, 지난 시간에 했죠. 여성성 민족이에요. 이스라엘 이름 자체가 싸우는 민족이에요. 싸운다는 말은 먼저 덩치 큰 상대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상대자가 있고 나중에 공격하는 식으로 그들의 허점을 허물어뜨리는 입장에 이스라엘 여성성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하만은 신이고 뭐고 신이 있다. 왜? 우리가 여기 있잖아. 우리가 신의 하청업자로 있단 말이죠. 우리한테 대드는 것은 곧 신에게 대는 것이다. 왜? 신은 존재하고 신의 모든 일은 우리한테 맡겼기 때문에, 라는 것이 하만의 생각, 남성적 생각이에요. 그러나 모르드개는 이 세상을 지배하거나 소유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온 세상을 기독교로 정복하라는 것이 복음의 뜻이 아니에요.
온 세상을 기독교로 정복하겠다는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 선교단체에서 주장하는 겁니다. 선교단체에서 지도 펴놓고 너는 리투아니아, 너는 이란, 너는 북한, 조각조각내서 너는 브라질 전감 기도일꾼, 너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전담 기도일꾼, 너는 체코슬로바키아 일꾼, 이렇게 해서 간절히 기도하게 해요. 선교단체에서 뭔가 하는 일이 있어야 후원금이 나올 게 아닙니까. 놀면서 후원금 받을 순 없지 않습니까. 너, 후원금 받고 뭐하노? 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세계기독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오냐. 후원금 줄게. 뭔가 주고받는 게 거래가 형성되잖아요.
이것은 결국 자기의 소유욕망을 본격화시킨 거예요. 인간의 소유욕망을. 인간의 육체에서 자아가 나오는데 육체에서 자아가 나왔기 때문에 자아는 육체를 다스릴 수 없어요. 육체가 메인이고 자아는 서브거든요. 메인에서 본체에서 중간에 하나의 성격으로 나온 게 자아란 말이죠. 자아가 육체를 다룰 수 없어요. 자아가 우리 몸을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자아가 만든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자아는 육체를 내 것이라고 자꾸 끼어들면서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인간의 육체는 자아의 말 듣지 않고 육체대로 그냥 설치게 돼있어요. 배고프면 밥 먹게 돼있고 어린애들 보세요. 아프면 울잖아요. 그걸 욕구라 하고 욕구가 생기니까 엄마한테 요구를 하게 되지요. 욕구와 요구가 잘 들어지지 않을 때 인간은 욕망이 되고요. 육체에서 욕구가 생기니까 요구를 하게 돼있고 요구가 만족스럽지 않으니까 그 빈틈이 욕망이 되고 이 욕망이 뭘 만드느냐? 틈이 안 됐지만 참자, 하고 생기는 게 뭐냐 하면, 환상이 되고 환상이 허구로 되고 허구의 집합이 사회가 되는 겁니다. 여기 환상이 아까 이야기한 가상현실이에요. 세상은 전부 다 참고 지내야 될 허구의 세계입니다. 숨이 막히는 세계에요.
돈만 있으면 바깥에 나가지 않고 놀면 돼요. 돈이 없기 때문에 돈을 벌어서 자기 육체의 욕구대로 살려는데 돈이 모자라거든요. 그런데 이건 개인의 문제고요. 집단의 문제는, 사회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고 여러 사람이 있지요. 여러 사람이 각자 뭘 요구하고 있습니까? 각자 자기 나름대로 어떤 기대를 가지고 같이 취직한다든지 회사를 세우든지 농사를 같이 짓기 위해서 협동조합을 만들든지 하지요.
그 욕망을 어떤 사람은 기타 들고 나온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그림 그리는 사람 있을 때에 나는 저 환상이 멋있어. 나는 이제부터 그림 그릴 거야. 남은여생을 낚시할 거야. 이 욕망이 새롭게 욕망으로서 자아에게 자꾸 강요하게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나은 욕망이 오기 전까지 지금 일시적인 욕망을 즐기다가 만약에 남이 어떤 다른 욕망을 갖고 있으면 갈아타기를 하는 거예요. 카드 돌려막듯이. 갈아타기를 하게 돼있어요. 갈아타기 하다가 또 시답지 않으면 다른 걸로 갈아타기 하겠지요.
그러니까 몸은 하나인데 자아는 변덕이 하루에도 열두 번이라. 그래놓고 하는 말이, 기분 상. 한 결 같지 않고 기분에 컨디션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요. 새로운 욕망이 오는 그때까지 자기가 나라고 우기는 자기정체성이 새로운 욕망과 어떤 친구를 만나게 되면 이게 또 완전히 달라지지요. 아무리 몸부림쳐도 뭘 못 벗어난다? 이 죽어가는 주께서 다루시는 육체, 옛 아담의 몸, 이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나머지 여기서 여기까진 다 환상이에요. 꿈꾸고 있는 겁니다.
장윤정이라는 유명한 트로트 가수가 있잖아요. 그 아들이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하는 말이, “우리 엄마, 장윤정이다.” 그러니까 그 애에게 환상은 자기 엄마가 최고인 거예요. 우리 엄마 콘서트 하는데 오세요. 또 어떤 아이한테 아버지가 기독교적인 이름을 지어줬어요. “나는 홍잠언이다!” 폼 내면서 노래 불러요. 잠언은 왜 잠언이냐? 잠언에 보면, 내 아들아 어미의 말을 들으라. 잠언서 1장, 2장, 3장 나오거든요. 그래서 부모가 전도하는 방법으로 아들 이름을 아예 잠언으로 지었어요. 전도하는 방법도 희한하죠.
나는 무엇이다, 우리 엄마는 무엇이다. 이게 자아에요. 자아는 없는 겁니다. 인간의 몸이 있고 욕망이 그때그때마다 다른 자아로 나타날 뿐이지 인간은 없는 거예요. 인간사회가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자아가 동행해서 따라가게 되면, 나는 구원받았다. 죄를 채굴하기 전까지. 뭐냐 하면, 새로운 지식을 확보했다는 거거든요.
이건 결국 욕구, 욕망이니까 나는 구원받았다는 것이 정확하게 정직하게 풀이하게 되면, 나는 구원을 소유했다가 돼요. 이게 구원파잖아요. 구원파라 해서 따로 구원파가 있는 게 아니라 한국교회가 전체가 구원파니까. 나는 천국을 소유했다, 나는 구원을 소유했다, 나는 영생을 소유했다. 앞에 뭐가 붙습니까? 가짜가 붙어요. 나라는 자아가 가짜거든요. 가짜를 붙여놓고 나는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이런 엉터리가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이거는 아직도 뭔가 소유가 작용하다는 것은, 내가 나를 못 버리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이 육체에 누가 작용했느냐? 악마가 작용한 거예요. 첫 번째 아담의 속성이 잘못했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았다. 그래서 안심한다. 그렇게 합니다. 그래 놓고 나중에 나는 기도의 대장이다. 나는 기도의 은사를 받았다. 그래서 내가 기도하게 되면 말기 암도 낫는다. 그런데 아홉 번 나았는데 한 번이 틀어졌어요. 뭔가 잘못된 거예요. 안 되게 되면 그 다음부터 기도발이 모자랐나. 좀 늘여볼까, 이러고 있단 말이죠.
자기 자신이 자아가 허상이 아님임을 계속 감추기 위해서 어디에 호소하느냐? 성경 법에다 호소하는 거예요. 성경을 계속 읽고 백독하고. 네비게이토라는 단체 있지요. 그게 그 짓하는 거예요. 인공지능처럼 맨날 성경만 외우고 성경시험만 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합리화하고 자기최면을 거는 겁니다. 성경 몇 장 읽었어요? 모이면 지도자 되는 장로가 시험 쳐요. 그 스트레스를 우에. 맨날 시험 치는 거예요.
시험 쳐봐야 나이 육십, 칠십 넘으면 감감해서 기억 안 납니다. 저도 옛날에는 교회에서 하라 해서 로마서 8장을 다 외웠어요. 상도 받고 했어요. 지금 로마서 8장 못 외웁니다. 어떤 것은 간단한 시편 23편은 외우는데 젊을 때 외우지요. 늙으면 안 외워져요. 왜? 육체가 망가지거든요. 육체 망가지면 뭐도 망가진다? 자아도 망가지고 모든 것이 다 망가지게 돼있어요. 내가 무엇을 갖고 있는 것만 허물어지는 게 아니고 갖고 있는 주인공 자체도 갖고 있는 손도 떨려요. 정신이 없어요. 뭔가 좋은 걸 가질 수 있는 바탕 자체가 완전히 붕괴돼버린단 말이죠.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첫 번째 아담 계통이 아니고 두 번째 아담 계통, 예수 그리스도의 계통에 속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계통은 특징이 뭐냐 하면, 이러한 존재 계통이 아니고 그걸 사건 또는 성경대로 하면 바람이죠. 바람이 임의로 불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지만 육에서 나온 새로운 영, 아담의 몸에서 나온 두 번째 몸 또는 두 번째 영은, 이것은 바로 시간의 후패와 부패와 소멸에 말려들지 않고 거기에 속하지 않는 겁니다.
이 사실을 모르드개와 그리고 에스더가 에스더서에서 미리 보여준 거예요. 너희들이 생각한 거짓말과 내가 생각한 거짓말은 이것이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거예요. 기생 라합이 거짓말한 것,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죽이는 것, 다 마찬가지에요. 기존에 옛날 아담에 속한 인간들의 남성형 위주의 법의 네트워크에 전혀 말려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가상현실은 매트릭스처럼 촘촘한 법이 있지요. 법에서 빈자리 생기지요. 그을 때마다 빈자리가 몇 개씩 더 생겨요. 갑자기. 아무리 전면적으로 덮으려고 해도 덮으면 덮을수록 빈자리 가능성은 점점 더 노출되는 겁니다. 여기서 튀어나오는 거죠. 빈자리에서 공백.
이 튀어나오는 자리가 바로 와스디가 한 예상 못한 남성의 인도부터 이집트까지 전 영토를 다 장악하고 통치하고 있는 대단한 남편을 내가 봐도 내가 대단한데 사랑하는 그런 모든 혜택을 같이 누리고 있는 아내라면 내가 대단함을 같이 느끼겠지, 라고 아내에 대해서 나름대로 충분히 인식한다고 해서 당신이 다른 사람한테 내 영광을 높이는 자리에 나와 볼래, 라고 제시한 거예요.
그게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전면적으로 다 안다고 여겼던 겁니다. 거기에 빵꾸가 날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안 가요. 이것은 도대체 내가 너한테 뭐가 부족해서 아니요, 가 나오느냐. 와스디 입장에서는 부족한 게 아니고 니가 나를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남편이 이러면 화나지요. 나는 모든 것을 안다는 거예요.
이런 걸 해보세요. 남자성은 전면적이다. 모든 것을 다 커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말은, 이렇게 하면 진실들이 잘 드러나지 않고 이걸 바꿔야 돼요. 전면적인 것을 다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것은 남자든 여자든 뭐가 됐든 그것은 바로 남자다. 여자가 되어서 통치하고 싶다면 그건 여자가 아니고 남자에요.
하여튼 남자라 하는 것은 전면적으로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봐야 되고 그래서 나는 더 뛰어난 예외의 자리에서 어떤 초월적인 신처럼 자유를 누리는 것이 남자의 목표입니다. 자아의 목표에요. 육체는 썩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꼴랑 남자라고 그런 자아는 있단 말이죠. 어지간해서 만족하지 않아요.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사업은 도박이거든요. 판돈 좀 땄다고 해서 판을 더 키우려고 하지요.
바사 나라가 그래요. 항상 영토에 집착해요. 영토 넓히는 데 집착하고 침략 본성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남성의 나라지요. 바벨론, 바사, 특히 알렉산더. 나이 삼십 밖에 안 된 인간이 미쳤지. 왜 남의 나라까지 다 쳐들어가고. 니 동네나 잘 살지. 뭐 때문에 남의 나라 쳐들어옵니까. 여성적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는 이게 미친 짓이에요. 니나 잘하세요. 남의 나라 침략하지 말고.
그런데 남성 자체가 갖고 있던 욕망은 육체적인 악마적 욕망은 옆에 내 소유가 없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저게 내 소유에서 누락돼있다는 자체가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거예요. 작은 기업을 잡아먹든지 이게 바깥 사회 나가도 마찬가지지요. 애들은 언제 우느냐? 얻어맞으면 울어요. 어른들은 언제 우느냐? 돈 없으면 울어요. 중요한 건 좀 받아 적으세요.
여자는 언제 우느냐? 자기를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없을 때 울어요. 나를 보호하는 사람 없을 때 보디가드 없을 때 울어요. 돈은 기본이고 내 뜻에 기분 다 맞춰주는 사람 없을 때. 그걸 여자들은 뭐라 하느냐 하면, 사랑이 떠나면 운다는 거예요. 그놈의 사랑, 얼마나 돈을 쳐발라야 사랑이 되는지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야. 이게 인간의 욕망이거든요.
여기서부터 여러분들의 감당하기 힘든 논리가 시작됩니다. 뭐냐 하면, 빈자리라 했지요. 빈자리가 여성성이 나오는 자리입니다. 완전히 초를 쳐버리는 거예요. 다 알고 있다는 걸 빵꾸 내버리는 거예요. 아는 것 좋아하네. 말 쉽게 할게요. 이 빈자리는 없는 자리입니다. 내가 당신의 마음에 그런 뜻이 있는 줄 몰랐다. 그러니까 나는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안다는 범위 내에 당신이 없네. 이렇게 되거든요.
이 빈자리에서 여성적인 발언이 나옴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리는 무한에서 유한으로 바뀌어요.
무한, 한계가 없다고 여긴 모든 걸 다 섭렵했다고 여겼는데 졸지에 빵꾸나면 갑자기 유한으로 바뀌어요. 유한으로 바뀌면 무한이 가만있겠어요, 유한으로 달려들겠습니까? 새롭게 등장한 유한을 포섭하거나 장악해서 다시 모든 걸 가진 자이고 싶어 하는 본성을 남성이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끊임없는 투쟁이 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싸움의 장, 다툼의 장이라 할 수 있어요.
집에 하루 세끼 정도 먹을 것 있고 화장실에 샤워할 수 있는 뜨거운 물 나오는데 관악산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어요. 참. 남자들은 이해합니다. 남자한테는 가오라는 게 있어요. 얼어 죽을 가오에요. 가오가 오기지요. 자존감, 자존심, 이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 육체가,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은 제발 거지가 되어 살라는 뜻이에요. 날마다 거지, 한 달 수입 천오백만원 되는 거지, 아파트 한 80평 되는 거지.
80평에 살든 많은 수입이 있든 간에 그 마음의 자리, 마음은 어떤 태도다?
①주님에게 얻어먹는 거지로 사는 거예요. 거지로 살아야 뭐가 없느냐 하면, 쓸데없는 자존감, 가오라는 것이 없게 돼요. 자, 이렇게 거지로 산다는 말은 뭐냐 하면,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나는 예속돼있는 것이 나는 감사해요. 이런 뜻이거든요. 무한에 예속돼있습니다.
여기서부터 후딱 할 테니까 여러분들이 이해할 사람은 이해하시고 따라올 사람은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무한의 일부가 부분이 되는 겁니다. ②이 부분은 무한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느냐 하면, 무한의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③그런데 이 부분이 착각해서 전체라고 우기게 되면, 남성성이죠. 우기게 되면 뭐가 사라지느냐 하면, 무한이 사라지고 유한이 돼버립니다.
④유한이 되면 전체를 가졌으니까 자기를 뭐로 보느냐? 무한으로 여기겠지요.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거짓말인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 다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다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대표적인 이런 것이 천문학 하는 사람이에요. 천문학 하는 목표가 있어요. 이 우주에 지구와 똑같은 외계인을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 그게 목표에요.
천문학 하는 사람들이 커서 천문학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릴 때부터 영재발굴단 나와서 소원이 뭐고? 나는 이 별들의 세계를 알고 싶어요. 여섯 살 먹은 아이가 천문학 책,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공부해요. 주위에서는 천재 나왔다고 난리지요. 그렇게 공부하는 목적이 뭐냐? 나는 이 지구 밖에 지구와 똑같이 생긴 외계인을 발견해서 노벨상 타고 싶어요. 노벨상 이것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노벨상이 욕망의 대상이 돼버린 겁니다.
항상 욕망은 그 욕망의 대상을 접수하면 안 돼요. 항상 뒤따라가는 쪽으로 해야 돼요. 욕망 자체를 욕망하기 때문에 욕망의 대상을 놓쳐버리면 그 다음부터 지는 살 이유가 없어져요. 욕망은 완성된 욕망이 오더라도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욕망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뭘 원하는데? 몰라. 뭘 원하는지도 몰라요. 무조건 욕망하고 싶어. 왜? 몰라. 미친 모양이지.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서 아가 강해 작년에 했지요. 아가 강의 첫째 시간에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사랑과 충동으로서의 사랑을 분명히 제가 구분했습니다.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사랑은 자기 쪽에서 조건을 만들어요. 자기 욕망을 다 끄집어내서 이십 대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키는 170이상 되고, 학교는 대학 나와야 되고, 그리고 공직에서 따박따박 월급 타는 그런 공무원이나 약사, 교사 정도면 좋겠습니다.
어디서 들은 것 있어서 결혼할 때는 구체적으로 기도하라. 얼굴에는 점이 없게 해주시고, 뭐 어떻게 구체적으로. 가정은 전부 다 목사 가정 내지 장로 가정으로 우리 가정을 위해서 합심해서 빠지지 않고 매일같이 기도할 수 있는 그런 든든한 배후가 있는 가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특히 장남은 안 됩니다. 넷째 정도. 아버지는 가진 재산 있어서 나중에 도와달란 소리 안 하고 오히려 도움 받을 수 있는 시아버지, 시어머니였을 좋겠다고 기도한단 말이죠.
그렇게 해서 기적적으로 진짜 기적인지 아니면 뭔지 그래서 결혼했다 칩시다. 욕망 끝이 났습니까? 인간은 잘 사는 시가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늘 욕망을 갖고 있다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멈출 수 없고 그것을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욕망하는 나.
그러면 충동은 뭐냐? 충동은 이제 계약직으로 와서 커피 심부름하고 있는데 마침 계단 올라가다가 허우대 좋은 남자와 부딪쳤는데 보니까 그가 재벌 3세다. 그런데 막 입사한 계약직 아가씨를 보고 반해서 허걱 저 사람은 진정 나의 사람이야. 이게 충동이에요. 이유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원인도 몰라요. 그냥 훅 찾아오는 게 충동이란 말이죠.
그래서 충동은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찾아가면 욕망이 되니까 마주 와서 충동은 충돌을 일으켜요. 충돌을 일으키면서 나는 완전히 지금껏 욕망으로 다져온 나의 정체성 자아성은 그 사랑 앞에 허물어집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I’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이 좋다면 나는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며칠 갈지 모르겠습니다만 며칠 갈지 그건 묻지 맙시다. 나중에 충동이 욕망으로 바뀌기 때문에. 기도했다든지 조건 다는 그런 게 없어요. 그냥 찾아오는 거예요. 그냥 찾아오게 되면 나의 기도가 응답했다. 이건 뭡니까? 나는 욕망의 화신이라는 뜻이에요. 나는 하나님마저 내 욕망을 충족시키는 시다바리로 사용했다는 그런 뜻입니다.
다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보겠습니다. 무한을 사람들이 뭐로 바꾸느냐 하면, 그걸 전체로 바꿨기 때문에 이 세상에 무한은 없어요. 눈에 보이는 천문학 같으면 별 저 뒤에 계속 연구해서 하루에도 수십 개씩 새로 생기는 별들을 조사해서 거기에 뭔가 지구와 똑같은 생존 조건에 맞는 별이 있을 것이고 그들에서 보낸 보이저 2호가 벌써 태양계 바깥으로 나갔거든요. 가출해버렸어요.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서 전 세계 말로 해놨어요. 한국말로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지구인입니다. 외계인이 있거든 응답하라, 오버.” 영어로도 하고 남자, 여자 모습도 담아서 계속 시그널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다 찌지직 하면 외계인이 뭔가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완전히 소설을 쓰고 있어요. 천문학자들은 자기 욕망의 화신이 되었어요. 이거는 과학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욕망이 달성되면 감사로 바뀌는 게 아니고 허무로 바뀌거든요. 왜? 그 욕망을 달성하는 순간 내 욕구의 지시가 악마가 새로운 지시를 내려요. 그것으로 성에 안 차잖아. 이것까지 해야지. 새로운 지시를 받게 됩니다. 전체가 곧 무한으로 여겼는데 새로운 돌발사태 또는 충동 또는 공백에서 어떤 낯선 소리가 튀어나오면 졸지에 유한으로 바뀌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유한으로 바뀌면서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의 주인공은 누구냐고 따지게 됐어요. 왜 자꾸 유한에서 무한으로 현재 부족한 나에서 저 별들의 별세계, 별보다 더 깊은 세계,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느냐? 자꾸 이런 생각, 처음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지요? 선악과 안 따먹었으면 어떻고, 심지 않았으면 되잖아요. 계속 무한에 대한 이미 확보된 것은 안다고 치고 그 확보된 것에 여분의 남아 있는 무한의 세계를 가게 할 때 그때 그런 나는 누구냐? 주체 문제 등장했어요.
이 주체 문제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나는 셈하기, 다른 말로 헤아림. 헤아림으로써 내가 거기에 연결이 돼요. 하나, 둘 헤아리는 거예요. 헤아림으로써 왜 인간은 유한에서 무한을 자꾸 내다본다는 이유가 숫자 헤아림으로 성장하는 거예요. 차분차분 1, 2, 3, 4, …… 계속 나가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면 1을 헤아린다는 말은 무한을, 무한이란 유한에 없는 게 무한이죠. 무한을 헤아릴 때 1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수학에서는 이걸 무한 헤아림 중에서 모든 성격이나 성질을 다 갖다버리고 오직 헤아림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서 수학에서 나온 것이 집합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다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다는 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0이 아닙니다. 이걸 1로 봐요. 내가 없을 때 있을 것이다. 그게 0이 아니고 1이 돼요.
다시 말해서 내가 여기 있는 건 분명한데 내가 여기 있기 위해서는 뭔가 내가 없을 때가 있어야 되잖아요. 태어나기 전이라든지 우주가 없다든지 그 없다는 것을 누가 헤아린다? 내가 헤아릴 때 그 헤아림의 시작은 1이 돼요. 아무것도 없는 이게 1이 되고, 그러면 2는 뭐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포함해서 이제부터 서서히 뭔가 시작해보자, 라고 할 때 0에다 1을 집어넣을 때 2가 돼버리는 겁니다. {0,1}=2
아무것도 없다는 이걸 0이 아니고 ∅공집합이라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집합. 이렇게 헤아린단 말이죠. 헤아리고 셈하기를 하는 거예요. 왜 갑자기 여기서 성경이야기하다가 셈하기, 집합이야기가 나오느냐? 그거는 10분 뒤에 다음 시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