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겨울수련회 에스더 제 4강(헤아림 : 이 근호 목사)
어떤 셈을 한다는 것, 또는 헤아린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너는 누구다’ 하는 것이, 주체가 분명히 밝혀졌을 때의 상황이에요. 주체는 뭐가 아니냐 하면, 자아가 아니지요. 자아는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주체는 어디서 오느냐? 주체는 무한, 최종성,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드러났을 때, 무한이 최종적으로 드러났다는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왔을 때 너는 누구였다고 알려주는 그 주체를 말합니다.
여기서 무한이라고 했지만 성경에서는 이것을 언약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즉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에 예속되고,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계열에 속한 사람,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건, 작용에 의해서 분명히 밝혀질 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헤아림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헤아림이 뭐냐? 바로 느헤미야 10장에 나오는 ‘인 맞은자’에요.
느헤미야가 에스더 앞에 있으니 찾아볼까요? 10장 1절에 “그 인친 자는……” 이렇게 시작해서 ‘헤아림’이 계속해서 나와요. 이 느헤미야는 그야말로 헤아림의 책이라고 볼 수 있어요. 계속 숫자 헤아리기 바빠요. 끊임없이 숫자를 헤아립니다. 7장, 10장, 11장. 7장만해도 성경을 매일 보는 사람은 따분해서 못봐요. 이것 몇 명, 몇 명, “목사님, 이거 다 외워야 됩니까?”
어떻게 이걸 다 외울 수가 있어요? 외울 의미도 없고요. 여기서 의미를 찾는다면 느헤미야 10장 1절에 나와요. 그 인친자는 이렇게 시작하지요. 인친자의 숫자를 세는 거예요. 숫자를 센다는 말은, 지난 시간에 한 것을 다시 복습하게 되면, 여기에 지중해가 있고 여기에 예루살렘이 있지요. 여기는 현재 이라크고, 여기는 이란이고, 터키가 여기에, 그리고 여기에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있고, 여기에 쿠웨이트와 바레인이 붙어 있고, 이렇게 있는데 이 바사나라에 있다가 성전 짓고 또는 귀환하기 위해서 간 사람들이 있어요.
처음에 스룹바벨에 의해서 4만 3천2백명이 돌아왔다고 했지요. 첫 번째 귀한. 이렇게 와서 예루살렘성에 돌아오자마자 제사를 드리고 20년 동안 성전을 짓는데요. 20년 다 걸릴 것도 아닌데 14년 동안 예루살렘 위쪽 지방의 사마리아사람들이 방해를 놨어요. 바사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성전재건을 중단시켜 달라고. “이스라엘사람들은 성전을 짓게 되면 또 반란을 꾀한다. 그 사람들은 여호와밖에 모르기에 반란을 일으킬 것인데 그렇게 되면 정치적으로 너희에게 손해가 아니냐?” 이렇게 강력하게 바사에 건의해서 중지를 시켜놓았는데 그렇게 14년 동안 중단되었지만 결국에는 다시 시작해서 6년 만에 다 지었어요.
이렇게 성전을 짓고 또 느헤미야가 445년에 와서 성전이 훼파된 것을 복원한다고 바사로부터 모든 예산을 다 받아서 법적요건을 충족한 겁니다. 여러분이 아까 다 배웠지요. 법이라 하는 것은 배후에 뭐가 있습니까? 전체가 있지요. 예외의 자리가 있지요. 거기서 법이 나왔다 했지요. 그런데 느헤미야나 에스더나 모르드개나 유대인들의 생각이 뭐냐 하면, 이것은 바사나라 너희가 한 것이 아니고 이사야 44장 28절에 의하면 바사나라가 그렇게 하도록 배후에서 누가 그렇게 했다는 말입니까?
다윗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멈추지 않는 작용, 작업, 자기가 낸 언약이기 때문에 알아서 착실하게 계속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한테는 쉬어가는 것이 없어요. 쉬어가는 타임이 없어요. 커피 한 잔 마시고, 그런 것이 없어요. 인간이 어떻게 하든지 꾸준하게 차질 없이, 줄기차게, 일관되게 열심히 일을 해오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모든 언약을 이루리라 했잖아요. 그 하나님에 의해서 여기에 도달했다는 말은 제 2의 출애굽과 마찬가지로 세상적인 권력에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이스라엘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바사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은 주님께서 작용했기 때문에 최종적인 무한, 최종적인 언약의 완성의 차원에서 주체가 여기서 지었다. 지었는데 그게 뭐냐? 다윗언약의 성취로서 성전이 복원되고 성전이 건축되었다는 말은, 이것은 성전인데 땅, 플러스 무엇이 인정받았다? 그 땅의 사람이 인정받고 사람이 인정받았다는 것은 거기서 그 국가가 인정받는 거예요.
그 국가는 뭐냐? 사람의 숫자를 헤아리면 다수가 되더라도 궁극적으로 국가는 단일체계가 되는 거예요. 성경에서 복음의 마지막은 뭐냐 하면, 딱 두 개에요. 아담의 계열이냐 아니면 새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계열이냐,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걸 아담에 속했느냐, 아니면 주님에 속했느냐, 곧 주 안에 있느냐의 그걸 보는 거예요.
‘주 안에 있느냐, 주 밖에 있느냐?’의 그걸 보는 거예요. 주 밖에는 빈자리가 아니고 ‘아담 안’을 말합니다. 기존의 육체에 의해서 육으로 나서 육으로 사는 그걸 주 바깥에 있는 삶이라고 보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영생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영생이 있기는 있고, 천국이 있기는 있는데 왜 사람들은 그걸 얻지를 못하는가? 본인들이 육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육에서 벗어나면 되지 않겠느냐? 벗어날 재주는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육은 육대로, 자기의 본성대로 지옥으로 가야 되는 거예요. 그것을 첫째 시간 제목으로 뭐라고 했습니까? 추락이지요. 추락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떨어지면 완전히 떡이 되는 겁니다. 지금 사람들은 본인이 추락하고 있는 것을 몰라요. 강력한 지옥의 힘에 끌려가서 지옥에 골인, 하는 그 순간을 모르지요. 모르면서 중간에 떠들고, 웃고, 신나고, 그런 거예요. 네가 이겼나 내가 이겼나, 하고 있는 겁니다. 추락하는 것도 모르고.
그러면 추락을 누가 방비할 것인가? 인간의 힘으로 추락하는 것을 자기가 알아서 공중 두 바퀴 제비 돌고 그렇게 해서는 되지 않고 뭔가 출렁, 하고 서커스 할 때 치는 안전그물 있잖아요. 성전이 와서 탁 받쳐주게 되면 출렁, 하지요. 망이 헐거워서 중간에 그냥 빠져서 떨어진다든지 그런 것은 없어요. 그리스도가 주신 그 망은 너무나 촘촘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주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살린다고 했어요.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오지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어? 걸렸네? 이게 충격이잖아요. “어? 누구세요? 제 인생대로 놔두지 않고 왜 이렇게 저를 싸잡아서 포로 잡아가시는데요? 성령으로 왜 그렇게 하시는데요?” “너는 살았어. 이미 살았어. 이미 빠져나왔어.”
이무거운 지옥의 필드, 지옥의 중력장에서 네가 벗어난 거예요. 그래서 이미 빠져나왔기에 우리는 충분히 이 세상을 얕잡아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한 겁니다. 그걸 가지고 흥, 칫, 뽕이라고 하는데요. 흥, 칫, 뽕! “당신은 내 아내라서 내 왕후로서 당신의 미모를 전국에, 내 영토가 이만큼 넓어졌다는 내 위신을 만천하에 공포하는데 당신도 미모로서 나에게 보여줘.”
“흥, 칫, 뽕! 안가!” 이게 빵꾸난 거지요. 구멍난 거지요. 이렇게 건너왔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지금 하나님이 일하고 있다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일하고 있음,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일하셔서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주체를 부여받았습니다, 하면서 하나님의 헤아림으로서 인 받은 사람을 숫자로 헤아리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1장을 찾아봅시다. 22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설명을 들으니까 아, 추락하는 것을 염두에 두니까 이해가 되시지요. 가만있으면 그냥 지옥으로 가는 거예요. 왜? 옛 아담에 속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가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고 남을 사기 쳐서 그런 것이 아니고 아담에서 태어났다는 그 자체가 이미 지옥에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입장이에요.
그런 것을 전제로 할 때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은 현찰 같은 것 없어요. 인간의 욕망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와 늘 충돌하시는 거예요. 특히 여기에 보면 ‘우리를’ 해놓고는 그 다음에 ‘너희와 함께’라고 해서 연합체가 되지요.
이 다수의 인치심으로 결국은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 단일집단이 돼요. 그래서 구원은 집단구원인 거예요. 개인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이 되는 거예요. 개인구원에서 머물지 말고 더 나아갈 데가 있어요. 우리는 똑같은 하나님의 출렁이는 그물에 사로잡혀서 그 그물 때문에 구원받은 겁니다.
그 그물이 다윗언약의 완성, 성전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그물, 하나의 네트워크. 이 네트워크는 허망한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 무한이 되는 겁니다. 다윗언약은, 우리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해서 다윗언약을 위반해도 다윗언약을 먼저 제시하는 분이 솔선수범해서 알아서 다윗언약의 성취성과 그 결과를 성전 복원하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라고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은 아니었고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이다. 일 단계, 우리의 하나님은 아니에요. 2단계는 뭐냐?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이다. 3단계, 그 하나님 때문에 생긴 새로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은 맞다. 그 말이에요. 인간의 언어가, 아담 쪽에서 보느냐, 아니면 예수님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동일한 단어가 두 개의 개념으로, 언어로 항상 분리가 되기 때문에 성도가 말할 때도 성도가 아닌 사람은 그걸 곡해해서 들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해석될 수밖에 없어요.
이 주체라는 것은 기존에 있는 모든 자아를 부수는 주체거든요. 내가 구원받았다, 내가 영생 얻었다, 나는 천당 간다는 이런 것을 다 부숴버려요. “그것은 너의 하나의 욕망이야.” 뭔가 나 자아에서 주체가 되려면 이처럼 이스라엘자체가 아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필이 우상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다른 나라에 포로 잡힘을 통해서 그걸 하나님이 스스로 증명해 내는 거예요.
언약이라는 것을 퍼마시는 것은 네가 숟가락질을 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숟가락으로 언약을 퍼먹으려고 들면 빼앗아버려요. “어딜 감히 육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고? 네가 어딜 죄의 자식이 어떻게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율법은 오히려 네가 죄의 자식인 것을 증명하는 거야. 모든 율법은.” 네가 의롭다 하는 것은 바로 예수 안에서의 의로움이지요.
예수님이 일하심의 그 결과 생기는 새로운 주체자로의 의인이 되는 겁니다. 이런 과정들이 필요해요. 그 과정을 구약 이스라엘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를 통해서 계속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성전이라 하는 것은 인치심, 숫자 하나하나를 인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헤아림의 결과로 오늘날 우리가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첫 시간에 이야기한대로 이것은 역사적성전이에요. 그런데 에스더의 내용은 뭡니까? 역사적이 아니고 비역사적이에요. 여기는 헤아림이 없어요. 없고 그냥 바로 집단이 되고 맙니다. 역사적인 헤아림이 생략되고 바로 집단화가 되어버려요. 지금 역사적인 인침이 되어버리면요 이 성전이 자칫하면 뭐가 되겠어요? 우상이 될 공산이 크지요. 역사적이기 때문에.
자, 역사적이라는 것, 왜 역사라는 말이 복음을 이해하는데 적절치 않느냐, 부정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이유가 뭐냐? 역사라는 것이 뭐로 구성되어 있느냐 하면,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과거에 하나님이 큰일을 하셨다,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다 한다면 이것은 아무리 그것이 대단한 큰일이라 하더라도 현재에는 그 일이 역사적으로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없으니까 이것은 날라 가버려요.
날라 가버리고 중요한 것은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중요하다.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과거는 하나의 기억으로 남고요. 없어진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줄 수가 있느냐? 그것은 없는 거예요. 과거는 없어지니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영향력이 없고요. 오직 현재밖에는 없으니까 현재의 다급한 사태에 대해서 누가 문제를 처리하느냐? 내가 알아서 문제를 처리해야 되는 거예요.
자, 에스더 성경을 읽고 있다. 갑자기 부엌의 수도관이 터졌다. 그러면 성경 읽으면 저절로 수도관이 봉합됩니까? 수도관한테 가서 에스더 1장 읽으면 갑자기 물이 새던 것이 멈춥니까? 얼른 수도꼭지 잠가서 멈춰야 되지요. 멈추고 수리공을 불러야 될 것 아닙니까? 수리하고 난 뒤에 성경을 보든 말든 하겠지요. 그러면 내가 성경 읽는 것과 수도관 터진 사건하고 관련성이, 어떤 영향성이 전혀 없는 거지요.
이게 바로 역사적상황이에요.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러나 오늘에는 내가 있다. 십자가 아무리 기억하고 아무리 믿습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내가 구원받는데 그 옛날 십자가가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현재에 역사적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역사적 존재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말은, 내가 예수님이 옛날에 십자가를 졌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예요.
기억해 버리면 그 십자가는 주님의 십자가인데 내가 기억하는 십자가는 나의 십자가가 되어버려요. 나의 십자가는 나를 구원하지를 못해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십자가가 눈에 보인다고 할 때 그게 나의 십자가입니까, 너의 십자가입니까? 그 십자가는 역사를 초월해서 늘 반복하시는 주님의 십자가사건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역사적인 주체인 내가 나를 포기 안하려고 한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의 지식으로 머물 수밖에 없어요. ‘십자가를 지고 내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아이고, 고마워라.’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고마우면 뭐가 되는데? ‘아이고 고마워라.’ 하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면 아이고 고마워라, 그런데 화장실에 가야 되겠다. 고맙고 뭐고 화장실에 가기 바빠요. 그러다가 갑자기 애가 아프다고 하면 그 고마운 것이 어떻게 돼요? 언제 고마웠는지 다 날라 가버렸지요.
고마워라, 하다가 띵, 하도 받쳐버리면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하고 탄식한다고요. 역사라 하는 것은 육이 계속해서 육의 자식을 낳는 육의 연속성을 말합니다. 역사라는 것은 육의 연속성을 의미해요. 따라서 역사적 성전, 이것은 성전을 복원해도 나중에 황폐해지고 말지요. 옛날 개성의 도읍지를 한필의 말로 돌았다 하는 내용의 시조가 있잖아요.
“어떻게 이 성읍이 황폐해졌는고.” 여러분이 옛날 여기서 수련회를 했어요. 그 때 요한복음 했어요. 그 때의 사진도 제가 갖고 있어요. 그 당시 이 앞에 아파트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냥 휑했어요. 그런데 지금 지금 와 보면 어떻게 이 산천이 이렇게 변했는지. 그게 바로 역사적인식이에요.
과거에 자기가 젊었을 때 카페 창가에 앉아서 커피 한잔 마시면서 바깥 낙엽 지는 것 보며 ‘나중에 나도 돈 벌면 여기에 카페 차려서 이 큰 창으로 밖을 보면서 낭만적으로 다리 꼬고 앉아서 얼마나 인생을 우아하게 보낼 수 있겠느냐’라고 생각해서 나중에 퇴직해서 돈 넣어서 카페 차리게 되면 8590원 최저생계비에 걸려서 폐업하게 되어 있어요.
그 낭만 다 날라 가버리고 알바 쓰기도 곤란하고요. 자기가 카페 차려서 돈 좀 번다 싶으니 옆에 카페가 또 생겼네요. 벌써 50퍼센트 빠져버렸는데요. 이것은 현실적인 문제에요. 다리 꼬고 낭만 생각할 때는 손님이었지요. 지금 자기는 주인이라니까요. 앞치마 하고 손님맞이하고 거기다가 진상손님 만나면 ‘내 이러려고 인생 살았나?’ 싶지요.
육은 항상 육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역사적 존재는 육을 벗어날 수 없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육을 영의 나라로 그냥 가지 못하고 죽여 버린다는 말이지요. 너는 왜 네가 죽은 유령인 것을 모르느냐,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미 그 육의 세계에서 빠져나왔음을 왜 모르느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몸만 빠져나온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그 추억과 기억도 함께 다 작살난 거예요.
우리의 모든 아름다운 과거, 그것을 이렇게 하면 돼요.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이미 죽었다고 치고 다시 되돌아오는 겁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살았던 그 동네에 다시 오는 거예요. 이미 죽은자로서. 그러면 산자 +(플러스) 뭐가 되느냐? 죽은자가 되지요. 이것을 비성도하고 성령 받은 성도가 섞여 사는 그러한 형국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화가 안되지요. “너 거짓말 왜 하느냐?”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어요? 거짓말을 한적 없다 이 말이지요. “뻔뻔스럽구나.” 그래 뻔뻔스러워요. 네 소속과 내 소속이 다르게 되어 있어요. 이게 인치심의 효과입니다. 스데반집사처럼. 성도는 일종의 미친 사람이에요. 제정신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에요. 제정신으로 하려고 하면 기껏 나오는 것이 뭐냐? 교회운영하기 뿐이에요,
이 사람들은 제정신이에요. 물론 지옥가지만. 이 사람들은 제정신이에요. 기도하면 이런 효과가 나오고, 아침에 다니면서 껌이나 커피 한잔씩 돌리면서 전도하게 되면 감동받아서 ‘야 교회는 사랑이구나. 교회는 이렇게 사랑이 많으니까 어려울 때, 내 인생 힘들 때 찾아가서 기도해야지.’ 그것은 무당집이지요. 아쉬울 때 기도하는 것은 무당집, 장소 제공하고 돈 받아 챙기는 그것이 교회지요.
철야기도, 수요기도, 그리고 도망갈까 싶어 협박 공갈하는 거예요. 한번 왔다 빠지면 지옥 갑니다, 해서 벌벌 떨게 만들고, 돈 빼내고, 거기다가 “목사 잘 안섬기면 저주받습니다.” 해서 또 벌벌 떨게 만들어요. 원래 무당들이 뒷말에 책임을 안져요. 돈만 빼내면 되기 때문에 무당들은 책임을 안진다고요. 그 무당이나, 신학을 한 무당이나 같은 무당이에요.
헤아림을 받을 때 역사적으로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에스더에서는 헤아림이 없고 그냥 하나의 집단이 되는 겁니다. 금식하는 단체, 하나의 집단으로 변해요. 헤아림은 무슨 헤아림이냐? 이 헤아림은 하만이 하지요. 하만이 헤아리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다 조사해. 그들의 목숨과 재산을 다 빼앗아라.” 헤아리는 거예요. 헤아림이에요.
자, 이 헤아림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논리를 좆아 계속 가봅시다. 숫자를 헤아린다는 것, 1, 2, 3, 4, 5, 6……, 이렇게 헤아리게 되면 이것은 유한에서 비롯된 무한으로 가는 거예요. 5767, 이렇게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계속 ‘+a’가 계속 남아요. 계속 미지의 것이 붙어 있다고요.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유한에서 시작된 무한이라 해서 그 무한은 유한에서 시작된 가짜 무한이기 때문에 이걸 수학에서 ‘가무한’이라고 합니다.
가무한, 끝없는 연속성을 갖고 있어요. 가무한의 특징은 유한과 무한이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89억 얼마, 이렇게 나가면 굉장히 숫자가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마지막 끝자리의 현장에 가보면 ‘+1’만 하면 또 숫자가 나오거든요. 아무리 나가도 유한의 객차에 차량만 하나 더 달아버리면 굉장히 무한해 보이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보면 전혀 무한하지 않지요.
한 달 수입 150만원 받는 청년이 ‘내가 재벌처럼 재산이 한 15조, 20조만 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15조, 20조 그 집구석 어떻게 사는지 한 번 가보세요. 김치찌개 먹는다니까요. 그렇게 잘 산다는 의미가 행복하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지금껏 자기가 모은 유한을 지키려고 들면 그만큼 스트레스가 더 많은데요? 스트레스가 많으면 몸이 또 아프지요.
여러분이 아플 때 소원이 뭐였던가요? 아플 때 병원에 누워서 창밖을 보면서 이 다리만 나으면 뭐든지 하겠다, 하지요. 퇴원해서 나와 보세요. 그 다리 가지고 할 것 뭐 있는지. 할 거 뭐 없어요. 앞에서 보면 저게 멋있어 보이고, 신비롭게 보이고, 뭔가 행복이 저절로 굴러오는 것 같지만 막상 그 현장에 가보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린애들 꿈들이 이런 거예요. 기타를 치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아, 나도 기타 좀 잘 쳤으면 좋겠다.’ 기타 한 번 잘 쳐보세요. 기타 잘 쳐서 어디 가서 공연도 하고 그러거든요. 사람들이 ‘기타 잘 치네.’ 하고 끝났어요. 그리고는 누가 또 불러줘요? 안 불러줘요. 왜 안불러 줍니까? ‘너만큼 기타 잘 치는 애들이 후배 중에 많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되고 싶은 것, 정작 현재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돼.’라는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는 뭘 놓치는가? 사람은 기본적으로 돈이 있어야 산다는 것을, 깜빡 미처 철이 없어서 그걸 몰라요. 진짜 이 세상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뭘 로 바뀌어야 되느냐 하면, 내 노동력이 돈으로 바뀔 때 비로소 돈이 우리의 현실감을 확 제공합니다.
‘아, 이게 돈이구나.’ 돈이구나, 알 때는 이미 벌써 거기서 새로운 무한이 시작돼요. 1, 2, 3, 4, 5, 6의 나열, 이것을 자연수라 하거든요. 여기에 곱하기 2를 해봅시다. 곱하기 2를 하게 되면 1은 2가 되고 2는 4가 되고 3은 6이 되고 4는 8이 되겠지요. 그러면 이 자연수가 많을까요, 곱하기를 했으니 이것이 더 많을까요, 라고 여러분이 생각할 때 우리 상식으로서는 곱하기 한 것이 더 많다고 여길 거예요. 곱했으니까.
하지만 1 대 1의 대응이라는 것이 있어요. 1대 1로 대응을 해버리면 아무리 이 세상의 유한이 많아도 일 대 일로 대응을 해버리면 전부 다 동일해 버려요. 똑같이 되어버린다고요. 그래서 유한에서 나오는 무한은 가무한이 되지만 이 가무한 또는 유한에서 절대로 접근하지를 못하고 단절되어 있는 무한을 가지고 무슨 무한이라고 하느냐? 이걸 실무한이라 해서 수학에서는 가무한과 실무한을 나눕니다.
칸토르라는 사람이 이걸 주장했다가 그 당시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취직도 못하고 미쳐서 죽어버렸어요. 아무도 안알아주니까. 무한은 가무한밖에 없어야 돼요. 그 당시는 기독교 사회기 때문에 인간에서 출발해서 어디로 간다? 신의 세계로 간다. 이것만 통하기 때문에 실무한, 인간이 갈 수 없는 신과 신끼리의, 무한과 무한끼리의 연결은 수학에서 다루면 안된다. 그것은 신을 노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부당한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는 말이 오늘날 기독교에서 용납되지 않듯이. 그 당시에 수학적으로도 신을 옹호해야 되는데 실무한을 이야기하니까 이게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실무한을 증명해 버렸어요. 1, 2, 3, 4……, 이런 자연수가 있는데 이것의 부분을 따로 만들어요. 1이 있고{1}, 2가 있고{2}, 3이 있고{3}, 4가 있고{4}, 이것만 부분이 아니고, 1과 2를 합친 것{1,2}, 3과 4를 합친 것{3,4}, 이렇게 부분집합을 따로 만들어놓고, 공집합까지 포함하는 전체의 집합에 포함되지 않는 그 나머지의 모든 부분집합을 가지고 진부분집합이라 합니다.
이 진부분집합이 뭘 낳느냐? ‘결국은 하나를 낳는다. 남성들이 추구하는 전체를 만들어내더라.’ 이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뭘 빼돌렸어요? 바로 공백을, 빈자리를 빼돌린 거예요. 그럴 때 인간은 정신적으로 안정성을 얻는 거예요. ‘이게 다야.’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전체의 다야.’ 뭘 빼버린 거예요. 왜 빼느냐?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세계이어야 세계가 참되고 맞다고 보는 거예요.
내 손으로 다룰 수 있는 것, 이걸 뭐라고 하느냐? 처분 가능한 것만 의미 있음으로 보는 거예요. 이게 아하수에로 왕이에요. 이게 하만이에요. 그런데 와스디가 뭐라고 했습니까? ‘안 돼’라고 했지요. 그러면 처분 가능한 여기에서 빵꾸가 나면서 그게 사건이 되는 겁니다. 사건은 빵구가 나는 거예요. 예상 밖의 일, 내가 처분 가능한 그 것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말 잘 듣고, 공부 잘하고, ‘쟤는 서울의대 갈 것’이라고 했던 그 애가 가출해서 드럼 친다 해보세요. 이것은 부모입장에서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잔뜩 기대를 했는데, 그 애 미래까지 예상을 다 해서 ‘저 애는 커서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모든 부모는 애 다섯 살 때 다 천재로 여기잖아요. 천재가 그렇게 많아요.
그런데 애가 거기서 벗어났을 때 아 엄마로서는 굉장히 실망스럽지요. “네가 노래하겠다고? 연기를 하겠다고? 그러지 마. 호적 파내겠어. 나는 너를 자식으로 인정 않겠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헤아림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겠습니다. 등록이라고 하겠어요. 제가 어느 날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유원지에 놀러간 아빠 엄마 애 둘이 삼겹살 구워먹을 때 누가 봐도 그것은 유원지에 놀러가서 삽겹살 구워먹는다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본인들이 국가에 등록되었다는 사실을 삽겹살 구워먹고 있을 때 알까요, 모를까요? 갑자기 좋은 자리 맡았다고 좋아들 하고 있는데 옆에서 대통령이라든지 또는 북한 같으면 김 정은이 찾아와서 자리 비키라고 하면 비켜야 되겠지요.
이게 뭐냐? 왕은 치외법권, 법에서 예외적인 조치기 때문에. 이럴 때 그 네 식구는 뭘 느끼느냐? 여기서 무능성을 느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세 살 먹은 애가 이 아빠의 위치를 모르고 “아빠 뭐해? 싸워. 이거 우리가 먼저 차지했잖아.” ‘이놈아 네가 세상을 모르는구나.’ “아빠 저 사람(대통령) 쳐버려. 저 사람이 왜 우리 자리를 빼앗는데?”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란다.”
그러니까 예외의 자리가 덮쳤다는 것은 나의 무능성을 파악하는 겁니다. 나의 무능함, 무능성을 노출시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구원 받는데, 천국 가는데 우리가 아담에 속했다는 이유 때문에 완전히 무능한 존재임을 반복적으로 까발리는 겁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믿고 천당 가라는 말이 아니고 너는 구원에 무능하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 성령 받아서 이 세계에서 빠져나온 사람만이 ‘너는 무능하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 무능해요. 무능하기 때문에 천국백성이에요. ‘탕자기 때문에 천국백성, 아버지아들 맞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믿지 않아서 구원받는 거예요. 소망이 끊어지고 사랑이 없기에 구원받는 거예요.
등록되었다는 것이 뭐냐?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에게 반지를 받았는데 그 반지는 나중에 하만에서 넘어가서 모르드개가 끼어버려요. 꼭 소설 같지요. 진짜입니다. 하만이 반지를 끼고 정권을 이양 받을 때 법의 네트워크 안에서 모든 인간은 이미 등록된 거예요. 그러면 어디까지 등록되었는가? 하만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밝힐 그 때 유대인마저 자기 수하에 있고 자기 헤아림의 일부로 본 거예요.
그걸 예외로 볼 어떠한 근거가 없는 거예요. 하만이 그렇게 행사를 할 때에 모르드개가 자기 입으로 발설하기를 “나는 유대인이다.” 그렇게 밝혀버립니다. 에스더한테는 ‘입 다물라’ 해놓고는 자기는, 나는 유대인이라고 밝혀버립니다.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고하였더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왜 갑자기 유대인임을 밝히느냐? 에스더보고 유대인임을 밝히지 말라고 한 것은 아직까지 저쪽에서, 바사나라 쪽에서 시비를 안걸었어요. 오히려 누가 이용하느냐 하면, 이 모르드개가 그 비어 있는 왕비의 자리에 자기의 사촌동생을 집어넣기 위해서 입을 다물라고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그 빈자리는 바사나라에서 여성이라는, 여성성의 예외의 자리로 인하여 사건이 터져서 비어있는 자리에요.
그 비어있는 자리에 자기의 사촌누이동생이 들어가지요. 그러면 그것은 같은 바사나라에 호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을 적어보면 이렇습니다. 이미 이사야 44장 28절에 의해서 바사나라는 유대인들에게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그냥 호텔 서비스맨처럼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오히려 서비스해야 될, 보조해야 될, 도와줄 나라로 간주해버립니다.
고레스라는 선왕이 유언대로 그렇게 한 거예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박해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자기의 종교를 찾아서, 신을 찾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 돌아가게 해주라는 선언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조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조치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바사나라 의 고레스왕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그 일을 하기위해서, 다윗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님께서 고레스왕을 성립시켜서 나라를 갖추고 그 일을 하도록 조치했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이 이미 인정한 거예요.
‘당신과 우리는 적이 아니다. 당신은 서비스맨이이고 우리는 서비스받을 대상이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 등장했습니까? 하만이 등장했지요. 하만은 결국은 비언약적요소에요. 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도와주고 있는 바사나라에서 비언약적, 언약에 대드는 요소가 나올 때에 여기서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은, ‘네가 감히 이미 정복된 것도 모르고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렇게 정복의 대상이 아니고 이미 정복된 나라라면 이 바사나라가 하나님에 의해서, 또는 유대인에 의해서 헤아림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 다윗언약을 위해서 존재하는 이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너를 새로운 주체자로서 내가 헤아릴 수 있는 권한이 유대민족에게 있다고 본 거예요. 보니까 다 이해하는 것 같아서 제가 기분이 좋습니다.
이 세상나라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정복당한 나라에요. 우리는 이미 빠져나왔다니까요. 이미 빠져나온 것을 알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나라가 어떻게 정권이 바뀌고 어떻게 체제가 바뀌더라도 그것조차 하나님의 그리스도 몸을 섬기기 위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열심 있는 차분한 하나님의 계속되는 일로 간주할 수 있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는 겁니다.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육적인 관계를 배신하라 했잖아요. 그렇게 배신하는 거예요. 거기에 상관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육으로 죽은 자니까. 다시 말해서 이 무능한 하만이 자기의무능성을 알지 못하고, 권력을 갖고 있고……, 여기서 하만이 갖고 있는 권력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것을 가졌다는, 즉 유한하면서도 어떤 체를 합니까, 모든 권력을 다 가졌다는 무한한 체를 하고 있지요.
거기에 대해서 이미 모르드개는 이미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비밀은 내가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에스더 2장에 나옵니다. 19절에 보면 “처녀들을 다시 모을 때에는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더라.” 그리고 20절에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명한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고하지 아니 하니 저가 모르드개의 명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좇음이더라.”
그 다음에 보세요.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 지킨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왕을 원한하여 모살하려 하거늘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고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한지라 사실하여 실정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의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고 되어 있지요.
이게 2장이에요. 이 사실은 왕의 궁중일기에 기록되었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에스더와 모르드개, 특히 모르드개가 그걸 알고 에스더를 통해서 조치하도록 했지요. 그렇다면 모르드개 입장에서, 내가 대궐 문에 앉아 있을 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바사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 유대민족을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인 것을 알고 그 유대나라에 난데없이 예상 밖의 충돌이라 할 수 있지요, 예상 밖에 사건이 터진 거예요.
그 사건을 누가 아느냐? 모르드개 본인만 알고 있는 거예요. 모르드개 본인은 이미 바사나라의 모든 정권 위에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시각에서 보는 거예요. 바사나라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고 이미 정복을 한 나라에요. 그 나라의 핵심 되는 비밀을 누가 갖고 있는가? 모르드개가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3장에 보면 그것도 모르고 촐랑대면서 하만이 등장해서 “내가 전부다 내가 최고다 내게 절하라.”고 하니까 이것은 뭐, 바사나라자체의 허점도 모르면서 제일 중요한 비밀도 모르면서 마치 전부를 다 아는 양 설쳐대는 그 꼴이 참 우습지요. “나에게 절하라.” 자 절한다는 말은, 등록된 사람은 내게 갖고 있는 권력에 정복되었음을 고백하라는 그 말이거든요.
유원지에 놀러가서 삽겹살 구워먹고 있다가 대통령이 나타나자 그만 놀던 자리 비워줬다는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나보다 더 높은 상위의 계급에 종속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자기 집에서는 큰소리치는 가장이라도 대통령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고 허겁지겁 먹던 삽겹살 얼른 먹고 다른 데로 빨리 가줘야 되는 겁니다.
북한의 김정은이 백마 탄다고 해서 같이 백마 타면 이것은 폭탄으로 즉결처분 받습니다. 북한의 어떤 장군은 차를 타고 가는데 김정은이 탄 차보다 빨리 갔다고 해서 사형 당했어요, 교재에도 나와 있지만 그 당시의 왕이 술 먹고 횡설수설 하는 것 조차 법이 되기 때문에 거기에 토 달면 죽어요. 술 먹고 주정하는 것도 법이 된다면 나라꼴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데 그래야 나라꼴이 돼요.
법을 넘어서는 것이 있어줘야 백성들이 신적인 안정을 얻어요. 왜냐 하면 신과 같은 존재거든요. 신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신은 왕으로 나타났고, 신은 직접 나타나지 않고 신은 존재한다고 되어줘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일자, 마지막 최후의 절대자를 말해요. 일자, 하나밖에 없는 자. 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뭐냐? 바로 가무한에서 나온 거지요. 실무한이 아니고.
있음에서 없음을 연결시키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현재 유한에서 무한을 어떻게든 연결시켜 보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 인간의 종교적인 노력의 결과입니다. 참 기독교가 이렇게 가짜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발견하셔야 돼요. ‘내가 뭘 하면 구원 받겠습니까?’ 이 자체, ‘내가 믿을까요? 행함이 아니고 믿으라고 하니까 믿습니다.’ 백날 해봐야 그것은 믿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믿었으니 바르게 살겠다.’ 백날 바르게 살아봤자 이것은 그 추락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추락을 멈추는 것은 인치심을 받아야 돼요. 인치심이라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차분하게 행하신 그 일의 결과로서 나에게 그리고 우리주변에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사건은 뭐냐 하면, 내가 이 세상에 등록된 사람이 아니고 다른 곳에 등록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 모르고 있는 비밀을 이미 내가 지니게 되었다는 그 사실, 그 사실을 품고 있는 사람, 그것이 참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는, 성령이 함께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지요. 겁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더 3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은 존재하지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그 하만의 눈앞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사건화 된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은 모르드개가 앉아서 꿈쩍도 안해요. “나에게 절을 하라.” 절 안합니다.
“절해라.” 여러 번 했지만 절하지 않습니다. 하만이 자기의 전면에 빵꾸가 난 것을 참을 수가 없지요. 내 권력에 구멍이 난 것을 참을 수가 없는 것처럼 에스더 1장에 나오는 그 아하수에로 왕이 자기아내가 부를 때 초청에 응하지 않은 것이 화가 나는 것처럼 이것이 바로 권력자라고 자처했는데 그것이 찌그러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무너지는 거지요.
남자로서의 가오가 깨지는 겁니다. 그 자리, 그 빈자리, 와스디가 있던 그 빈자리를 에스더가 앉아 있으면서 얼마나 세상나라의 한계, 인간의 허점, 그걸 목표로 하지는 않아요, 다만 그 허점을 노출시킵니다. 그걸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뒤엎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다만 여성이라 하는 것은 정복을 해서 그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이미 빠져나왔음을 알려주는 주님의 증인으로서 끝나야지, 증인을 했으니까 이 땅은 다 내꺼다,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선교나 전도라는 것은 오래 거기 있지 말고 하고 나서는 빨리 빠져나와야 되지요. 오래 머물러 있어버리면 그 자기의 땅이 자기의 소유가 되어버려요. 자기가 그걸 지키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처음에 목사가 올 때는 “여러분, 저는 빈 손들고 아골골짝 빈들에 가오리다.” 해놓고는 10년 20년 있다가 교인수가 많아지니까 ‘이제는 내 교회다. 내꺼다.’ 갑자기 권력욕을 발산하지요.
그러면 “목사님, 처음 이야기할 때와 다르지 않습니까?” “그 때는 틀리고 지금은 옳다.” 이렇게 된다니까요.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이게 누구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자신이 이야기에요. 그러한 죄를 오늘도 점심 먹어가면서 발굴 혹은 채굴하세요. 마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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