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에스더 강해(역사 검열) : 예외 (강의:이근호 목사)
여성이 왕과 대결상태에 들어갑니다. 남성의 보편성에 균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왕과 여성이 대결하는데 공통성이 있어요. 왕은 예외적 존재에요. 법을 이야기하되 자기는 법을 지키면 안 돼요. 왕은 법에서 벗어난 예외적 존재입니다. 자기는 초법이 돼야 돼요. 초법을 현실화시킬 때 등장하는 이게 누구냐? 폭력이 되는 겁니다.
에스더에 보게 되면 왕이 폭력을 행사합니다. 황후, 왕비를 자기 말 안 들었다고 바꿔치기하는 것, 그리고 왕의 허락 없이 왕의 아내라 할지라도 나타나면 죽여 버리는 것. 폭력으로 둘둘 감아놨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폭력이라 하면 깡패, 막돼먹었다는 이런 인식이 있는데 교재에 있는 것처럼 그런 폭력적인 지도자를 사람들이 과연 좋아할까하는 생각이 들지요. 너무 좋아해요.
인간 자체가 폭력에 체질화됐기 때문에 그래요. 폭력을 행하되 내가 할 수 없는 폭력을 대신 해주면 그분의 폭력에 대해서는 박수를 치는 게 인간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폭력. 다시 말해서 인간이 법을 지키지만 사실은 법이라는 것은 표면에 지나지 않고 부글부글 내부에서는 폭력이고 싶어요. 왜 인간은 폭력적이냐 하면, 인간에게는 복수심이라는 게 잠복돼있습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한이 맺혀있는 거예요.
이 폭력을 일단은 법에 호소하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잖아요. 판사, 변호사 다 귀찮고 아파트 위층에서 아이들 퉁탕거리게 되면 오함마 들고 가서 스마트키 박살내고 들어가서 애들 아버지, 엄마 머리 깨줘야 속이 다 시원한 거예요. 그걸 완화시키는 것이 뭐냐 하면, “거기 파출소지요. 너무 시끄러워서 못 살겠어요. 와주세요.” 이게 굉장히 완화된 거예요. 사실은 죽이고 싶은데 내가 인간성이 워낙 좋기 때문에 기존의 법에 호소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법에 호소한다는 말은 자기의 폭력성을 위장하는 거예요. 이 폭력성 이것을 현실화시켜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낌없이 그 사람에게 복종할 용의가 돼있다. 그 관계가 왕과 보편적인 모든 백성들에서는 예속관계가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이 전제군주, 성경에 나오는 폭력적인 왕이 정복 의지에 미쳐서 땅을 넓히는 그러한 왕, 군사적인 성향을 지닌 국가 말고 지금 세계는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 지금 세계는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밑에 인간 없다. 모든 생명이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우리는 차이가 나지만 차별하지는 않는다는 이 원칙에 의해서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헌법에다 박아놓고 우리는 민주공화국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옛날 조선시대나 폭력적인 바사나 바벨론, 앗수르나 그렇지 지금은 그런 것 해당됨이 없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정치를 몰라도 너무 몰라요.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이미 자기가 노리고 있는 공격 목표가 있어요. 그게 바로 군주입니다. 왕 있고 귀족 있고 그런 거예요. 여기에 금융이라든지 자본주의에서 돈벌이하는 부르주아들이 권력이 너만 차지하면 안 되잖아. 우리가 같이 나눠먹자고 해서 생긴 게 민주주의에요.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군주, 귀족, 성직자, 양반들이거든요. 이 사람들이 몇 퍼센트냐 하면, 프랑스에서 2.5%밖에 안 돼요. 조선시대에 양반이 3%에요. 조선시대에 흔히 말하는 상놈이 있지만 반 이상은 노예입니다. 왜 노예들이 가만있느냐? 그들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문자, 말은 있지만 언어가 없어요. 언어가 없으면 정보가 자기한테 쏟아지지 않습니다. 공부를 못한 거예요. 뭘 알아야 말을 하지요. 모르면 동물과 다를 바 없어요. 먹을 것 주면 고마울 뿐이에요.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언어를 해독할 능력이 있어야 되고 그 정보를 남한테 펼칠 수 있어야 되는데 교육을 차단시켜버렸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들은 그냥 짐승 같이 배운 사람들한테 3%한테 97%한테 예속될 수밖에 없지요. 그래도 그 사람들에게 반항할 수 없습니까? 반항은 없어요. 이미 예속이란 말이 뭐냐 하면, 이건 육체적으로 예속됨을 말하는 게 아니고 그전에 이미 정신적으로 예속된 거예요.
머슴이 반란을 일으키면 누가 분개하는지 알아요? 머슴이 반대해요.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고 주인을 어떻게 무냐? 네가 개냐, 하고 머슴이 나서서 머슴을 말려요. 우리 이러면 우리 동질성이 깨진다고.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이죠. 아무 소리 말아야 밥이나 먹고 사는 이 상황이 얼마나 행복하냐 말이죠. 태양 같은 위대한 지도자 동지 때문에 잘 먹고 잘 산다 이 말이죠. 백두산 정기 받은 지도자 동지 있잖아요. 백마 타고 가다가 힘들어서 눈밭에 앉아있던 사람 있잖아요.
정신적으로 예속돼있기 때문에 반항이나 반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에요. 사람이 언제 행복하냐?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 상황이 돌아갈 때 행복해요. 자기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게 되면 이건 불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사 나라의 모든 백성은, 아하수에로의 군사정권이거든요. 나중에 헬라 쳐들어갔다가 나는 관대하다고 까불다가 삼백 명한테 깨져서 온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이에요. 그때부터 몰락하기 시작하는데 이 아하수에로 왕에 의해서 모든 것이 예속이 될 때 왕을 위해서 백성들이 존재하는 겁니다. 짐이 곧 국가에요. 왕이 정신병자든 왕이 헛소리를 하던 술 먹고 어떤 짓을 하던 간에 이 자체가 진리가 되고 법이 되는 거예요. 교재에도 나와 있지요. [반항하지 못하는 백성들]
여기에 전제군주정치가 2페이지 위에 보면, ‘공포’라고 하는데 공포라고 하는 것은 예속됨에 대해서 거기서 빠져나올 때는 공포지만 그렇지 않고 예속 그 자체를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사람한테는 찬미가 되지요. 감사가 되고. 고마운 분이에요. 그러면 2페이지에 보면, 왜 백성들은 반항하지 않는가? 반항을 왜 합니까? 그들이 아는 게 그게 전부인데요. 그 당시에 무슨 민주주의가 있었습니까.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것은 그 자체가 허구에요. 민주주의라는 것은 허구고 껍데기가 그 바탕에는 자본주의가 있기 때문에 국가체제 민주주의라는 것은 다 환상이고 허구라고 해서 이걸 옛날의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를 빗대면서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헛빵빵 밖에 없는 이념들, 그걸 이데올로기라 하는 겁니다. 실제로는 껍데기고 뚜껑 열어보면 그 안에는 경제원칙, 자본주의 돈이 돈을 버는 그 구조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민주주의는 그런 경제위에 껍데기만 씌워놓은 게 민주주의라니까요.
정치하는 사람들은 자본가와 결탁이 되어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위해서 많은 법령을 제정해주게 되면 자본가는 돈을 더 벌지요. 자전거는 달릴 때 쓰러지지 않는 겁니다. 우리나라 잘 산다. 퍼주자. 올해 장사하고 그만할까요, 그러면? 오늘 진짜 시마이 여러 번 나오는데 올해 시마이하고 여기서 다 갈라먹기하고 나라 끝낼까요, 그렇게 할까요? 어느 단체든 조직이든 간에 미래를 예비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힘들어도 못 살아도 참아야 되고 인내해야 된다 이 말이죠.
이 부르주아들이 의회를 만들었거든요. 의회는 뭘 하느냐? 법을 제정해요. 그러니까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고 실제 내막은 가진 자본가들 부르주아들의 의회독재국가에요. 그러면 의회를 따져봅시다. 의회를 보면 다수당이 있고 소수당이 있지요. 더 나가면 다수당이 횡포부리는 나라, 이게 민주주의입니다. 싫으면 국회의원 수 많이 확보하든지. 밖에 나가서 쓸데없이 광화문 돌아다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투표하든지.
4년마다 국회의원, 5년마다 대통령 뽑는다고 그렇게 해봤자 민주주의라는 게 없고 전제군주정치고 중앙집권제 어차피 그렇게 될 건데 뭐 형식상 인간 대 인간의 평등과 인권을 주장한답시고 하지 말고 아예 한 사람이 줄곧 가도록 하자. 그게 바로 북한의 유교사회주의 아닙니까. 지도자를 아버지로 여기는 유교적 분위기를 갖고 있는 사회주의. 북한의 특이점이죠. 종교단체지요. 마치 통일교에서 문선명을 뭐로 모십니까? 어버이로 모시지요. 신천지도 마찬가지고요. 나의 영적인 어버이로 모실 때 그게 국가가 아니고 종교단체가 됩니다. 북한주민들은 새로운 종교단체의 신자입니다. 문제는 저들은 그게 안정돼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어렵게 이야기한 게 뭐냐 하면, 그들은 왜 반항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개인의 몸이 바깥 세계에서 스며든다는 거예요. 개인의 몸은 바깥에 돌아가는 사회적 습관에 의해서 스며드는 거예요. 하비투스라 하는데 습관에 의해서 스며들게 돼있어요. 스며들게 되면 스며든 권력을 귀족적인 높은 계층이 있는데 자본이 축적된 위 계층이 갖고 있는 습관을 헤게모니라 하고 헤게모니가 이데올로기의 구체적 내용이 되는 거예요. 현대사회에서.
왜 이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이상하게 정권이 바꿔도 살림살이가 나아지지 않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체질화되어서 그래요. 어디에 체질화냐 하면, 나도 언젠가 돈 벌면 여윳돈 있으면 국회 나간다. 국회까진 못 나가지만 시의원에 나간다. 일종의 오락이잖아요. 그런 식으로 나가겠다는 게 이미 자기 목표가 지금 돌아가는 사회와 습관이 같이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남편이 돈 못 번다고 그렇게 구박했더니만 누구 보좌관 하다가 갑자기 국회의원 당첨됐다하면 그때부터 아내는 아주 기가 살아요. 우리 남편 최고다. 팍팍 밀어줄게.
사람이 어떤 권력을 쥔다는 것은 폭력을 실제화 시키기 위해서 권력을 쥐는 겁니다. 폭력은 많은 사람을 예속화시켜요. 그럼 폭력을 행한 사람은 한 사람이거든요. 일자라 합니다. 그 일자가 전체 다자를 많은 사람을 하나로 할 때 이 나라는 보편적으로 안정된 나라가 되는 겁니다. 이게 중앙집권이고 지금도 민주주의는 중앙집권체제라 보시면 돼요. 성경의 범위에서 인류는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수의 생각을 대통령이나 왕이 그걸 대신하게 되면 결국 일자성에 포함되는 겁니다. 그럼 이 나라는 안정권에 들어가겠지요. 그게 바로 법에 대한 예외적 존재라는 겁니다. 그게 왕이에요. 그런데 여성은 뭐냐? 원래 이론대로 하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냥 여성, 남성 구분 없이 백성들이죠. 백성들은 왕에게 예속된 겁니다.
왕에게 예속돼있는데 여기에 여성은 갑자기 등장하느냐? 갑자기 여성의 본능이라 할까요, 몸의 본성이라 할까요? 여기에 대해서 남자들은 기존의 체제에 대해서 순응하면서 협조가 돼있는데 여성한테는 아무리 잘해줘도 감정적이어서 한 번 삐졌다하면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예상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맛있는 것에다 모든 다 따먹으라하고 진짜 최적온도에다 최적화된 생활을 보장해도 이 여성이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는 저 나무를 따먹고 싶다하면 여성 지 마음이에요. 다시 말해서 기존 법으로 억누를 수가 없어요.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남편이 자기 아내를 십년, 이십 년 공들여 달래고 처갓집 잘하고 해봤자 한방에 빵꾸납니다. 한 건 한 거고. 왜 그렇게 대드는데? 내 마음이다. 아무리 억눌려도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요.
그게 바로 예외적 존재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남성들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 결 같이 동질성을 유지하지만 여성한테는 동질성 같은 게 없습니다. 예속하는 것은 겉으로 예속하지 본인도 본인 마음을 몰라요. 여성의 희망은 남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고 싶지요. 그러나 속에 잠재돼있는 여성은 그걸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걸 끝까지 억누를 수 있는 능력이 여성한테는 없는 거예요.
에스더를 통해서 와스디라는 여성의 도발적인 상황으로 해서 여성이 있던 자리가 빈자리가 되는 이 모습은 이스라엘 전체 자체가 어떤 나라냐? 여성성 국가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기존 국가가 이스라엘을 아무리 잡고 침략을 해도 기존에 있는 남성형 국가에 없는 요소가 이스라엘에게 있었으니 그게 언약의 자율성이에요. 인간들의 갖고 있던 보편적인 억누름에 절대로 장단 맞춰주지 않는 요소가 이스라엘 내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후예들 가운데 라멕이란 사람이 등장하잖아요. 라멕이란 사람이 아내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23,24절) 아예 노래가사를 적어놔요. 노래를 불러요. 자기에 대한 찬미지요. 이게 남성형 국가가 가인을 통해서 등장한 겁니다. 가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창세기 4장 1절에 보면 성경 상 상당히 구절이 나옵니다. 심오한 구절이 나오는데, “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그 다음에 아담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갑자가 아담은 쏙 뺍니다. 가인이란 자식을 낳는데 있어서 남자가 한 역할은 아무것도 없고 내 신랑은 여호와가 신랑이라는 거예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자식을 낳았지 아담 너로 말미암아 자식을 낳은 게 아니라고 돼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로 말미암는다는 말은, 여호와의 본래 취지가 남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성을 통하여 인류역사상 계속 잠복근무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요. 모든 것을 다 내 손아귀에 쥐어야 만족하는 남성형이 먼저 전제돼있고 거기에 대해서 흠을 내버리는 남들이 일 잘해 놓으면 빵꾸내는 그 역할, 여성이 시작하는 일은 없어요. 남성이 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서의 여성이죠. 여성이 본격적으로 시도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남성에게 일 다 하라 해놓고 뒤에 가서 쑤셔버리는 거예요. 와르르 무너지지요.
그 작업이 무슨 작업이냐? 여호와께서 악마에 사로잡힌 세계에 대한 태도입니다. 에스더의 내용은 남자와 여자의 싸움이에요. 결국 누가 이기느냐 하면, 여자가 이겨요. 그런데 여자가 이겼다고 해서 따로 여성의 세계라는 것이 성립되느냐? 여성의 세계는 없어요. 항상 호작질하는 기능만 하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는 여성한테는 필요치 않습니다. 망가뜨려놓고 다시 한 번 힘을 주지요. 또 해라. 그래놓고 뒤에서 박아놓고 쑤셔버려요. 그게 여자의 할 일이에요. 여호와께서 하실 일이 그겁니다.
남성의 세계, 다시 말해서 인류를 대표하는 남성의 세계가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진행 되는 것을 여호와께서는 못 봐주겠다는 겁니다.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남성으로 철저하게 완벽하게 봉인된 모든 것이 남성의 권력으로 일원화돼있는 그런 세계에 여기서 틈이 발생하고 흠이 발생한다는 것, 이것은 남성의 세계가 완전하다, 불완전하다?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의 국가, 인간 세계에 대해서 하시고자하는 일입니다.
여자가 남성 세계에 시비 거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에요. 어떤 계획이 있는 게 아니에요. 아무 계획 없어요. “여보, 사람들이 당신 예쁜 얼굴 보고 싶어 하는데 좀 나와 줘.”“싫어.” “왜 싫어?” “싫으니까.” 끝. “당신 잘린다.” “잘라라.” 싫다는 내 감정이 그러니까. 아담이 하와에게 “여보, 딴 건 다 먹어도 선악과는 따먹지 마.” “알았어.” “진짜 따먹으면 안 돼. 약속해. 누가 꼬여서 따먹으면 당신도 죽고 다 죽는 거야.” “알았다니까, 알았어.”
무슨 소용 있어요. 먹고 싶다. 끝난 이야기에요. “왜 먹었어?” “먹고 싶어서.” 벌써 말이 이유가 필요합니까. “왜 따먹었는데?” “따먹고 싶어서, 왜? 내 마음 나도 몰라.” 그 마음은 주께서 심어준 마음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마음을 예속할 수 없습니다. 남자는 세상을 지배해도 여자는 절대로 남자한테 예속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쪽에서 일하기 때문에 예속당하지 않아요.
평소에는 예속당하는 척을 하지요. 예속당해주지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그냥 예속당해 주는 거예요. 남편 쪽에 뭘 주게 되면 콜 일단 받고. 일단 받아 챙겨요. 그러든지 말든지 그 다음 생각이에요. 이것을 이렇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분하면 쉬워질 거예요.
연극을 상연하는 것과 연극내용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지요. 어느 도시에서 연극한데. 그러면 상연 자체가 신문에 나고 방송에 나고 어떤 연극단체가 연극합니다. 보러 가세요. 그러면 이 현실세계 속에서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몇 월 며칠에 연극이 상연됩니다, 라는 요소가 들어가겠지요. 그러나 연극내용은 이 현실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연극은 상연 되고 연극내용은 픽션이죠. 조작된 거죠. 현실이 아니면서도 이미 연극이 상연되면 조작된 내용이 현실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남성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던 백성들이 어떤 행동을 하던 전부 다 왕의 재가 받아서 이 나라에서는 전부 다 예속된 거고 내가 주인공이니까 연극을 하든 말든 내 허락대로 하라, 하면 여성은 허락 받지요. 허락은 받지만 여성 고유의 해야 될 일은 이 현실에서 연극을 상연하면서도 그 현실에 벗어난 예외적인 내용을 따로 펼치게 돼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닮았느냐 하면, 바사 나라에는 유대나라가 없습니다. 이미 포로 잡혔기 때문에 공중분해 돼서 없어요. 없는데 그 틈이 생긴 거예요. 와스디라는 왕후가 비어있단 말이죠. 비어있으면 비어있는 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모르드개가 출세하기 위해서 자기의 사촌 누이동생은 거기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에스더는 어느 자리에 들어가느냐 하면, 반항했던 왕후의 자리, 왕비의 자리, 와스디의 자리에 들어가 버려요.
그러면 남자의 입장에서 아하수에로 입장에서는 또는 아하수에로의 신하, 권력을 인수받은 하만의 입장에서는 에스더를 뭐로 보느냐 하면, 예속된 백성들 중에 그냥 하나에요. 예속이 여전히 정상적으로 유지된다고 본 겁니다. 왜냐하면 건방 떨면서 자기 남편이 왕인데 왕이 오라 했는데 오지 않는 반항을 했으니까 신하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임금이여 이건 방치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크게 벌할 문제입니다. 왕후의 자리에서 폐위시키셔야 됩니다.
왜? 만약의 왕의 아내가 왕의 명령을 안 듣게 되면 왕 자체가 법인데 이 법에 예속된 모든 백성들이 전부 다 자기 집 마누라들이 왕의 아내도 남편 말 안 듣는 것 보니까 그게 법이니까 우리들도 남편에 대들면 되겠네, 라는 것은 모든 바사 나라의 남편들이 걱정이 늘어지는 거예요. 왕비 따라서 자기 아내가 반발할까 싶어서. 남성의 세계에는 권력의 누수가 없어야 되거든요. 저 봐. 왕비라도 자기 남편한테 꼼짝 못하잖아. 그러니까 당신도 가만있어. 이렇게 돼야 안정된 중앙집권체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와스디란 왕비가 반항을 했는데 이게 본이 돼서 온 고을마다 전부 다 아내가 남편한테 반항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문제는 이겁니다. 왜 반항하면 안 되지요? 왜 여자가 남편한테 반항하면 안 되지요? 첩첩산골 강원도 평창의 어느 마을에 부인이 왜 남편한테 반항하면 안 됩니까?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수학에서 공리라고 하는 거예요. 공리는 왜라고 묻지 않기를 다 협의한 거예요. 너무나 마땅하고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묻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공리라는 겁니다.
남자가 가정의 주인이 되고 여자는 보조 역할 하는 것이 인간세계의 공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세계는 공리로 단속이 잘 돼있어요. 단단하게 뭉쳐져 있습니다. 이 인간세계가 하나님이 생각하는 천국일까요? 아니지요. 여기서 빵꾸내는 거예요. 빵꾸낼 때 여기서 와스디가 한 것은 뭐냐 하면, 여기 전체를 빵꾸내는 것이 공백, 빈자리가 생기는 거예요.
빈자리가 생기게 되면 남자들은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허겁지겁 뭔가 조치를 취하겠지요. 조치를 취하면서 등장한 것은 남성세계의 한계와 그 허점이 여성에 의해 드디어 노출되는 지점이 이 지점이에요. 남성세계는 다른 말로 하면 권력입니다. 권력 자체가 뭘 품고 있었다? 이미 허점을 품고 있었다.
물론 아내가 말을 안 들으면 대타, 다른 여자로 해서 전처처럼 하면 너도 죽는다고 조심하라고 단도리 해가면서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미 그 과정에서 남성세계의 허점은 드러난 겁니다. 그 자리에 에스더가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에스더 진행에서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다윗언약은 하나님의 성전을 만드는 것이다. 성전은 인간과 하나님이 함께 사는 곳이 성전입니다. 만남의 장소. 그러면 성전의 형태가 비-역사적 성전이 있다고 했지요. 비-성전형 성전. 비-역사적 성전이 계속 미래의 메시아와 연결될 거야, 아니면 역사적 성전에 연결될 것이냐는 것을 지금 에스더를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갈 사람은 가라. 예루살렘으로 보내라. 그러면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이스라엘에 가서 섬길 마음 없어요. 그들은 그냥 이 나라 바사 나라 되고 싶은 거예요. 바사 나라 국민으로 그냥 몸 하나 편하게 예속된 자로 살면 그만입니다. 무슨 웅대한 거대한 계획 같은 것 없어요, 이 사람들은. 물론 언젠가 메시아 나라가 온다고 약속을 했으니까 그 나라 오겠지만 여기서 자기가 반란을 일으킨다든지 계획을 운운하는 그런 건 없어요.
왜냐하면 언약을 연결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인간들이 할 일이 아닌 것은 이미 모드르개나 에스더는 알고 있단 말이죠. 모르드개나 에스더나 그 당시 유대인이 있다는 유대인은 특징이 있고 다른 민족과 섞일 수 없다는 것이 발각되고 난 뒤에 유대인 집단이 결국 나라에 대든 방식이 뭐였습니까? 딴 것 없습니다. 이거였어요. 금식이었습니다.
금식이 무슨 힘이 돼요? 나, 밥 안 먹는다. 어쩌라고? 밥 안 먹으면 누구 겁내요? 아이고, 밥을 안 잡쉈어요. 아이고, 무서워라. 이럽니까? 황교안 대표가 금식할 때 무서워한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걱정만 늘어났지. 저러다 진짜 죽는 게 아닌가, 라고 걱정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나중에 견디다 일어서게 돼있다. 분명히 장담할게. 밥 먹으러 올 거야.
금식은 사적인 것이에요. 사적으로 금식한 게 무슨 힘이 됩니까? 힘이 되지 않지요. 힘이 되지 않는 이게 이스라엘의 여성성이 되는 거예요. 힘없는 것이 힘 있는 나라를 엎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인간도 자진해서 힘 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중에. 오늘부터 금식합시다. 말도 안 되는, 금식해서 예상되는 결과 같은 것 없어요. 단식투쟁하는 것도 아니고 뭘 하는 거예요?
금식의 의미는 나를 위해서 살지 않겠다는 뜻이거든요. 그동안 밥을 먹었다는 것은 누굴 위해서? 내가 나를 살리는 방편으로 밥을 먹었는데 나를 살리는 식으로 내가 존재하지는 않겠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이건 뭐냐 하면, 구멍, 여기에 어떤 공백을 만드는 거예요. 스스로 빈자리를 만드는 거예요.
빈자리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여성성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을 갖고 있고 자기의 빈자리가 없으면 그 사람은 아무리 교회 다녀도 어떤 형이냐? 남성형 사람이 돼버려요. 남성형 사람이란 항상 어떤 힘을 가져야 안심이 되는 그런 형으로 모든 걸 다 가져야 하는데 이런 남성형 사람은 항상 그 안에 허점을 갖고 있고 약점을 지니고 있어요. 왜냐하면 힘의 그 장, 힘의 체계가 나의 소유가 되는 거죠. 그러나 여성은 빈자리기 때문에 자기의 소유가 없어요. 빈자리는 소유가 없습니다. 비어있는 그 자체지 무슨 소유가 있어요. 그래서 여성의 할 일은 움직이는 빈자리에요. 그냥 떠돌아다니는 빈자리가 되는 겁니다.
남자들의 볼 때 여자들이 큰소리치는 이유가 남자들은 납득이 안 돼. 너, 나한테 왜 잔소리하느냐 하면, 내가 니 아내거든. 아내가 무슨 벼슬이에요? 아내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큰소리치는 거예요. 사실은 에스더가 왕궁에 들어간 것에 대해 누구한테 감사해야 되느냐 하면, 자기 남편 되는 아하수에로 왕에게 감사해야 돼요. 일단은 심사위원들에게 감사하고요. 아름다운 밤이에요 하면서 오늘 이렇게 진에 뽑혀서 너무 감사해요. 모든 영광을 바사 나라의, 조로아스터교를 믿거든요.
배화교, 아후라 마즈다라는 신이 있어요. 그 신에게 영광을 돌린다 하면서, 그렇게 돼야 한단 말이죠. 유대인이란 말을 하지 말라 했으니까. 여호와란 말 꺼내면 안 돼요. 실수라도. 철저하게 그 바사 나라에 빌붙고 살아가는 것, 왜냐하면 바사 나라는 하나님의 고레스 계통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도와주라고 바사 나라 고레스 왕부터 해서 본인들은 인식 못해도 배후의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이스라엘은 지켜주고 보호하라고 약속으로 유지돼온 나라가 바사 나라다.
바사 나라 끝나게 되면 이스라엘도 박살나는 거예요. 보호기간이 끝나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도 끝나는 겁니다. 바사 나라와 함께 느헤미야도 끝이 나고. 그 다음에 마지막 나오는 선지자가 말라기인데 말라기가 바사 나라와 더불어 끝이 나버려요. 그 다음부터 이제는 지상형, 역사적 성전은 아무 의미 없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언약은 성전인데 하나님과 함께 있음은 어디냐? 여기는 바로 빈자리, 다시 말해서 힘없음, 소유대상이 아님, 이 사실을 에스더에서 보여주는데 이것은 옛날 이스라엘이 진즉에 하나님께서 이런 모습으로 일한다는 것을 몰랐던 겁니다. 이스라엘의 잘못은 이스라엘 국가 자체를 자기 소유화시킨 게 잘못이에요. 하나님 도움으로 이 나라가 잘되기를 바랐던 겁니다.
마치 오늘날 교회 문제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내 교회를 지켜 주리라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십자가마을 지켜 주리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잘못이에요. 십자가마을은 이데올로기거든요. 하나의 허상뿐인데 이름만 갖다 붙인 거란 말이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저한테 전화해서 “십자가마을이 어디 있습니까?” 뭐 고상하게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라고 할까요?
십자가마을은 없음을 이야기하는 유일한 마을입니다. 힘이 없고 소유대상이 되지 않는 유일한 마을이 십자가마을이에요.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심지어 가정도 마찬가지에요. 성도의 가정이라는 것은 가정 없음을 말하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가정생활, 부부생활 하는 게 가정이 되는 겁니다. 영원한 우리의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기 때문에. 그게 바로 여성성 있는 신부로서의 교회 모습이에요.
그러면 이 일을 할 때 어떻게 일을 하느냐? 자, 여성의 역할은 남성에게 종속되는 거예요. 예속된단 말이죠. 그러나 이상하게 에스더에 보면 종속이 됨으로써 여자가 남성을 이겨요. 에스더가 남편을 이긴다고. 종속이 안 되면 남편을 못 이겨요. 종속됐기 때문에 종속된 자를 이겨버립니다.
그래서 아내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로부터 종속된 아내가 있는 반면에 ~를 종속케 하는 아내가 있어요. 다시 말해서 남편을 예수 그리스도한테 종속케 하는 아내의 역할, 이것이 에베소서에 나오는 여자의 역할이에요. 종속케 할 때 자기는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본인이 철저하게 종속되면서 종속케 하는 거예요.
대표적인 예로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이란 허수아비거든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약속을 받았지만 약속에 대해서 오히려 반대쪽으로 나가지요. 그러나 실제적으로 일은 누가 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는 게 아니고 실제적인 일은 모든 본질은 아내 사라가 갖고 있어요. 모자에 프로펠러 달린 모자 쓴 가제트 형사 있지요. 거기서 사건을 누가 처리합니까? 꼬마 여자애하고 개가 다 처리하지요. 그런데 행세는 누가 해요? 어리바리하고 팔만 긴 가제트 형사, 지가 다 처리했다는 거예요.
철저하게 아내는 남편한테 딱 붙어있어요. 예속해 있으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여자가 진정 예속돼있는 하나님의 언약과 자기 남편을 예속시키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의 일은 따로 없어요. 남편의 일이 여자의 일인데 남편의 일에 들어붙어서 남편의 모든 것을 정복시켜 뒤집어 엎어버리는 거예요. 찐득이가 따로 없어요. 빼도 박도 못해요. 왜 그러냐 하면 여성은 근원과 관련돼있어요. 이스라엘은 여성성이죠.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근원과 하나님 일의 원칙과 연결돼있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전, 다윗언약의 성취는 인간 역사란 남성의 세계에 빵꾸를 냄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은 죽지 않고 계속해서 잘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빵꾸 냈을 때에 거기에 동원되는 지상에 실제적인 흔적은 바로 힘없는 여성이 다윗언약의 성취의 증후로서 또는 증상으로서 이 땅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에스더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겉으로는 하만과 모르드개라는 두 남성의 다툼으로 보이죠. 의도적으로 하만에 대해서 절을 안 했으니까요. 그 다툼 사이에 에스더가 끼어드는 겁니다. 에스더가 끼어들어서 하만과 관련된 바사 나라 제국의 힘을 모르드개 쪽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고 에스더와 관련돼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살아 있는 성전으로서의 유대인을 드러내고 마는 겁니다.
에스더가 자기 남편과 이혼했습니까? 이혼 안 했지요. 딱 들어붙어있으면서 바사 나라가 원래해야 될 기능, 다시 말해서 고레스의 후손들, 고레스의 제왕들의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그들의 나라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숨어있는 진짜 언약의 나라를 보호하는 것이 본래 그들이 언약을 받은 취지라는 것을 에스더를 통해서 증명해내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보게 되면, 아무리 세대가 우리 눈에 악하고 불신으로 보이고 비복음적으로 행동해도 그걸 걱정할 필요 없어요. 약속의 주특기는 뭐냐 하면, 마지막에 모든 것이 예로 끝나는 점에 약속의 요건이 되는 겁니다. 약속은 절대로 자기의 고집과 자기의 일을 중도에 그만두지 않는다. 왜? 마지막에 소급해서 보게 되면 NO가 하나도 없었고 다 YES 그랬어야 했다는 식으로 줄기차게 이어져왔거든요.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약속이 아니고 어디 있느냐 하면, 기존 세계에 철저하게 예속됐기 때문에 그냥 부들부들 떨기만 했지요. 하나님 나라, 내가 말씀 못 지켜서 지옥 갈 거야, 라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지 중간에 에스더의 자리에 끼어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그것을 와 닿질 않았던 거예요.
그러나 에스더나 모르드개 같은 경우에 그게 메시아 오기 전에 미리 와 닿았다는 것이 그들에게 다행스럽지요. 그래서 그들은 주기적으로 남의 나라인데 바사 나라에서 무슨 절기를 즐기느냐? 유대인 집단에서는 부림절을 즐깁니다. 12월 30일, 또는 12월 13일 여러 가지 있는데 그 부림절을 지키는 거예요. 주기적으로 지키는 거예요.
우리가 이스라엘 간 적이 있는데 간 그때가 부림절 축제기간이었어요. 펭귄복장 하고 시커멓게 돌아다니는데 가관치도 않아요. 역사는 끝났는데 아직도 그들은 역사 안 끝났다고 우기는 유대인들 말이죠. 전통 유대인들 모자 이상한 것 쓰고. 내가 보기에는 붙잡고 묻고 싶어요. 너희들 오락이라는 생각 안 드나? 무슨 효과 있나, 묻고 싶어요. 아무런 효과도 없고 그냥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취미단체 같아. 이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그렇게 해서 눈에 보이는 형식에 예속돼있는 겁니다. 에스더는 금식했지요.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결국 금식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을 앞당겨 보여주는 거죠.
마치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