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5강 희생물

아빠와 함께 2020. 1. 18. 18:37
2020-01-18 11:44:36조회 : 4         
2020 겨울수련회 에스더 제 5강 : 희생물이름 : 오용익 (IP:61.84.208.92)
2020 겨울수련회 에스더 제 5강(희생물 : 이 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에스더 3장을 했습니다. 3장에 모르드개와 하만이 만나는 대목이 나와요. 아직까지는 에스더가 본격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습니다. 2절에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복이 다 왕의 명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그리고 3절에 “대궐 문에 있는 왕의 신복이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그렇게 되어 있지요.

왕의 명령이라고 되어 있어요.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 항상 이 단어를 놓치면 안됩니다. 희생물이라는 사실. 이스라엘은 희생물에 의해서 만들어졌거든요. 희생물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때에 희생물의 의미가 어떤 뜻이냐 하는 것은 지금껏 이야기한, 나와 환상 속에 끼어드는 물체가 되겠습니다. 내가 뽑아내는 것은 항상 환상의 세계인데 거기에 희생물이 끼어들면 유일하게 그 희생물이 진짜요, 나와 세계는 가짜가 되는 것으로 드러나는 거기에 개입되는 물체가 희생물입니다.

스스로 인간은 자기를 가짜라고 여기고 싶지 않지요. 그리고 자기가 애써서 살아온 이 세상을 가짜이고 싶어 애쓰지 않지요. 그래서 인간은 희생물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애써서 살까요, 아니면 집에다 양의 피를 발라서 살까요? 어느 쪽이 여러분의 이성적 생각에, 합리적인 생각에 어느 것이 더 납득이 돼요? 아침마다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바른다는 것은 보통사람 같으면 이해를 못할 거예요.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를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정상이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희생물은 인간이 요청하지 않았다는 점을 유념하시고 화살표로 하게 되면 나와 이 세상은 희생물로 다가설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상하게도 이 희생물을 계속 잊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그 희생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다윗언약이고 그 안에 하나님의 희생물중심으로 해서 언약이 구성이 되는데 성경 역대하 15장 13절을 보겠습니다.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그 언약이라는 말은 12절에 나오지요.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여기에 언약이 나오지요. 언약을 통해서 여호와께 찾아가는데 이렇게 언약에 관심두지 아니하면 차리라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 원리가 다른 나라에는 없어요. 오직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에게만 있는 특이성이라는 말이지요.

방금 제가 희생물 이야기를 했고 이스라엘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벽을 만들고 오늘날 우리 이야기를 해봅시다. 버스 정류소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주파수의 라디오를 듣고 있습니다. 어떤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계열화라고 해요. 어떤 특정일의 목적을 위해서 그 순간만큼은 일회성으로 또는 자주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이는 이것이 죄입니까?

이게 뭐 문제 있는 거예요? 이 벽을 두고서 버스를 기다렸다, 또는 공무원시험을 치기 위해서, 또는 교사임용시험을 치기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도서관에 일한다는 그것이 나쁜 짓이에요? 어머니 돌아가셔서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모였다는 이것이 나쁜 짓입니까? 제가 지금 묻고 있는 거예요. 이게 나쁜 짓입니까?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될 일이지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마땅히 해야 될 이것을 가지고 현실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현실을 누가 환상이라고 생각하겠어요? 아무도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벽을 잠시 치워보겠습니다. 이 커튼, 이 벽을 치워버리면 여기에 어떤 나라가 있느냐? 역대하 15장 12절에서 13절이 작용하는 나라가 등장하는 거예요.

엄청난 차이가 나지요. 여기는 하나님의 희생을 모르면 이것은 버스에 줄을 서도 나쁜 일이 되고, 극장에서 줄을 서거나 부모가 돌아가셔도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장례를 치르라고 해서 이것이 나쁜 일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버스를 안기다리고 있어도 나쁜 사람이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도 나쁜 사람이에요. 그러면 버스를 타지 말까요? 안타도 나쁜 사람 된다니까요. 십일조를 해도 나쁜 사람이고 안해도 나쁜 사람이에요.

이 사실에서는 뭘 놓치면? 희생물이라는 의식을 놓쳐버리면 똑같은 처지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어떤 인간도 나나 이 환상 같은 이 세상을 가지고 희생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 그냥 가만 있으면 이방나라와 똑같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그 언약 때문에 망한 겁니다.

언약의 입장에서, 그 관점에서 볼 때에 너희들은 이 진짜 하나님의 숨겨진 이 현실을 너희들이 외면했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문설주에 피를 바른 그 취지를 놓쳐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귀한 거예요, 그 희생물이 귀한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이 귀한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귀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그려내는 자기가 살고자 하는 삶의 공간이 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챙기고자 하는 것은 뭐밖에 없어요? 이 희생물만 챙기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비밀이며 이 이스라엘의 비밀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책임을 이스라엘이 바사나라에 가서 묻는 겁니다. 그게 포로 잡혀 가는 거예요.

‘한 번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오라. 나갔다가 오면 네가 어디서 문제가 있으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이 강의하면서 좀 더 상세하기 이야기할 것을 누락시킨 것이 있어요. 이 현실이 왜 환상이냐, 하는 그 점이지요. 이 세상이 왜 환상이냐? 지난 시간에도 좀 설명은 했는데 다시 한 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정신구조는 어디서부터 주어지느냐 하면, 부모의 명령에서 주어지지요. 촘스키라는 학자는 어린아이의 내부에도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언어의 구조가 있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에요. 인간이 말을 하는 순간부터 뭐가 생기느냐? 자아가 생긴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말은 반응을 나타내는 것인데 반응을 나타내려면 자기의 통일적인 정신이 구체화될 때, 나는 이런 의사를 전달해야 되겠다는 것이 갖추어질 때 자아가 생기는데 갖추는 그 방식이 말과 문자, 말부터 시작하겠지요, 그 말로서 다듬어가는 거예요. 엄마한테 물 달라 할 때 멍멍, 이래서는 안되잖아요. 주어 서술어 목적어를 분명히 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처음에는 음음음, 하는데 엄마가 가르치잖아요. “엄마, 물 주세요.”라고 해야 존댓말도 되고 말이 된다고 엄마가 말을 하게 되면 인간 속에 언어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는 메커니즘, 기제가 있는데 그 메커니즘이 점차 자아가 된다. 그래서 자아를 뜯어보면 다 주위사람에게 명령을 들은 것들이 가득 모여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그러한 문제를 던져놓고 해결책으로 나온 거예요.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말을 알아듣는데 있다. 그냥 말이 아니고 말에서 상상까지 나아갈 때 이제는 더욱더 인간으로서 동물과 차이가 벌어진다는 겁니다. 흔히 상상한다고 할 때 이제 어린애가 크면서 거울을 보게 되면 거울에 투영이 되겠지요. 튀어나오겠지요.

인간이 거울속의 자기와 일치를 시키는 것, 일체화시키면서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이걸 ‘이상자아’라 하는데 자아가 이상적인 자아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니까 자아라 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요구했던 그것을 자기가 맞춰나가려고 애를 쓴다는 그런 뜻이지요. 어떻게 이게 환상이 되느냐 하면, 인간이 뭔가 본다는 것은 자기가 받은 언어범위 내에서, 언어라 하는 것은 뭘 반드시 전달하느냐 하면, 즉 내포하느냐 하면 의미를 내포하거든요.

인간이 갖고 있는 그 의미라는 것이 사회에 나가면 남의 의미를 어떤 경우에는 많이 공유하고, 또 어떨 때는 조금 공유하고, 그런 식으로 하다 보니까 중심에 있는 내가 보기에는 온전히 현실을 모두 담아낼 수가 없고 일방적인 해석과 일방적인 의미부여를 할 뿐이라는 그 말이지요. 그러니 이게 환상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 문제는 이 화살표입니다. 이렇게 살게 되면 평생토록 70, 80 살아도 한 번도 이스라엘다운 면이 없어요. 왜? 우리는 이방민족이기 때문에. 이방민족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조상들이 가르친 것은 ‘대한민국만세’거든요. ‘아, 대한민국’ 아닙니까? 마지막 목표가 대한민국이 번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만세’ 아닙니까?

그게 환상이라는 거지요. 누구 입장에서? 이스라엘입장에서. 또 누구입장에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했던 희생물, 어린양의 피 입장에서 볼 때 그게 전부 다 환상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문제 심각하지요. 지난 낮설교에 이야기했잖아요. 이스라엘특징이 뭐냐? 율법이 있으면 살고 율법이 없으면 죽는 희한한 나라. 율법 지키면 복을 받고 율법 안지키면 저주를 받는 희한한 나라. 거기에 저주가 나와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희한한 나라라고 해서 내칠 거냐? 아니면 그냥 어떻게 연결시킬 거냐의 그 문제가 있거든요. 문제는 이스라엘이 희생물에 관여함으로서 이스라엘이 통째로 희생물 노릇을 한다는 거예요. 국가라는 이름으로 언약이 구체화되어서 인접국가부터 해서 마지막 때는 온세상에 이스라엘이 품고 있고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그 약속이 전세계에 다가서게 되면 전 세계는 이제 노출되어 있어요.

지옥이냐 아니면 천국이냐, 하는 결단을 해야 될, 이것은 이방민족 본인들이 원했던 운명이 아니고 구차 없이 그냥 다가오는 운명이에요. 사도행전에서 사도가 전했던 그 복음 중에 그게 들어 있어요. 사도행전 17장 30절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회개라는 것은 방향을 트는 거예요. 이쪽에서 올라가지 않는 그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희생물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다른 이쪽으로 내려오지요. 이걸 영어로 pivot이라 하지요. 축구 드리블을 할 때 공 가지고 방향 틀어서 도는 것 있지요. 그 모션 이강인도 할 줄 안다는데 여러분도 할 줄 알겠지요. pivot 모션. 공을 회전축으로 삼아서 방향을 휙 전환시키는 방법, 방향전환이에요. 인식의 전환이 회개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나쁜 사람에게는 저주가 주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선악체계에서 ‘나쁜 사람에게는 저주가 주어지고 지옥가고 좋은 사람은 천국 간다.’ 이걸 우리가 알잖아요. 뭐가 빠졌느냐 하면 희생물의지가 빠졌지요. 희생물 이론에 의하면 누가 저주받느냐 하면, 의로운 자가 저주받아요. pivot 플레이지요.

여러분이 고생 안하려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무엇을 자인하느냐 하면, 나는 의인 안 되려는 그러한 의지와 통하고 있어요. 그 정도만 되어도 진짜 복음 제대로 아는 사람이지요. 왜냐하면, 나는 철석같이 믿는 것이 있다. 그것이 뭐냐? 반드시 의인은 이 땅에서 뭐 받는다? 저주받는다. ‘아이고, 겁나라. 나 의인 안될래.’ 이 정도만 되어도 이미 pivot플레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pivot플레이로 유명한 사람은 호날두정도, 손 흥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희생물은 인간들로 하여금 사고방식을 반대로 가져가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예를 들었지만 반드시 의인에게는 뭐가 온다? 저주가 오고 그러면 악인에게는 뭐가 옵니까? 이 환상의 세계에서는 뭐가 와요? 저주가 안오지요. 저주가 오지를 않아요. 죽을 때도 고난이 없어요. 편안해요. 그냥 버스 정류장에서 줄서고 있고, 극장에서 영화보고 있어요. 세상에 이것이 고난입니까? 이것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세상은 환상 속에서 자기가 속해 있는 계열화만 유지될 뿐이에요. 세상은, 환상의 세계는 마치 매트릭스처럼 계열화될 뿐이에요. 줄 잘 서라, 안 합니까? 내가 알아서 줄 잘 서면 잘 살 수도 있고 줄 잘못 서게 되면, 사다리타기 잘못하면 꼴아 박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나의 선택의 문제고, 이 주체의 선택의 문제고, 언제든지 회복될 가능성이 있지만 희생물이 딱 와버리면 어떻게 줄을 서든, 어떻게 요령을 부리고 인생을 살아보려고 애를 쓰든 몽땅 이것은 희생물에 의하면 저주가 되는 겁니다. 저주 이전에 꿈이 되는 겁니다.

너는 평생을 꿈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도행전 17장 31절에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은 pivot 기축이 돼요. pivot 기점이 되어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예수님이 죽을 때 자살했습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이 그분을 거절했습니까?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는 필요치 않은 인물로 합의를 봐서 내친 분이거든요.

그 내친 분이 pivot 플레이를 해서 죽은지 사흘 만에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그냥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 드러나고 말았어요. 그걸 미리 시범조로 보여준 나라는 이스라엘이고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바사나라에 포로 잡혀간 것은 바사나라의 제국의 비밀과 관련되어 있는 동시에 이스라엘의 비밀, 이스라엘은 왜 잡혀왔는가, 도대체 이스라엘은 어떤 비밀이 있기에 그냥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멸망당하고 포로 잡혀왔는가 하는 그것과 통하고, 오늘날 식으로 한다면 ‘나의 비밀은 무엇인가, 나는 왜 예수 그리스도가 우선이 되지 못하는 삶을 사는가?’ 이거지요.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이미 구원받고 난 뒤에는 하위채굴, 자기죄를 채굴하라 했지요. 채굴하게 되면 그 마지막은 뭐냐? ‘난 왜 그토록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는가? 왜 나는 평생을 주님을 미워하는가?’ 그게 죄로 드러나겠지요. 그런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따라서 여러분이 성도라면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지 마세요. 희생하는 대신에 주님으로 하여금 계속 희생하도록 유도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모르드개에요. 모르드개는 희생하지 않습니다. 계속 자기대신 희생할 자를 몰아세우는데 그게 누구냐 하면, 사촌 여동생 에스더입니다. 비겁한 사람!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인사를 해야 되는데 절을 안해요. 계속해서 절을 안합니다. 에스더를 다시 봅시다. 그러면 하만은 부아가 나겠지요. 우리가 모르드개 편에 서지 마시고 하만의 편에 서세요.

그러면 하만 이 사람은 굉장히 합리적이고 성격이 급한 사람이 아니고, 침착한 사람이고 행동을 해도 그냥 행동하지 않고 생각을 해보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하만에 해당되는 적절한 예의 사람이 추미애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계속 참는 거예요. 계속 참아요. 계속 참는데 윤석열은 계속 공격합니다. 청와대 압수수색하고요. 계속 참아도 계속 공격해 들어와요.

지금 이것은 예를 들어서 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그 사람들 알지도 못합니다. 끝까지, 네가 나를 칠 때까지 계속 깔짝거리는 거예요. 모르드개가. 여러분이 그 현장에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절한다고 하늘이 무너집니까? 절한다고 내 무릎이 닳습니까? 고관절이 나갑니까? 그거 뭐 별거 아니거든요. 절은 그저 절일뿐이라는 말이지요.

절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고개를 지상 쪽으로 각도를 낮추는 것, 그걸로 이해하면 안됩니까? 거기에 커다란 의미를 줘서 너에게 굴복한다는 정치적의미를 빼고 “안녕하세요.”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되느냐는 말이지요. 그런데 기어이 모르드개는 목에 깁스를 했는지 의도적으로 절을 안해요. 네가 화를 낼 때까지. 하만 네가 네 본색의 성질이 날 때까지.

이것이 뭐냐 하면, 바사제국, 이방민족이 품고 있는 그 죄와 이스라엘이 포로 잡혀 왔던 그 죄가 일치된 죄기 때문에 그래요. 바사제국의 죄를 끄집어낼 뿐만 아니라 우리 이스라엘이 무슨 죄 때문에 이렇게 남의 나라에까지 와서 고생하느냐의 그 죄는 일치된 동일한 죄라는 말이지요. 어디에 비해서? 언약에 비해서 그런 겁니다.

그게 다윗언약에도 반영되어 있는데 다윗언약에서 마태복음 1장 6절인가 거기에 남자 이름 하나 나와요. 희생물 이름이에요. 다윗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마태복음 1장 6절에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그 다음에 남자 이름이 나오지요.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다윗은 남자거든요. 우리야도 남자거든요. 그러면 솔로몬은 도대체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맘마미아> 뮤지컬도 아니고, 딸 시집가는데 아버지라고 남자가 세 명이 나타났어요. 그리스 섬에서. 셋 중에 누가 아버지인지를 모르잖아요.

마태복음 1장 6절에 아버지가 둘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야 이게 언약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버지가 둘이 돼야 돼요. 하나는 육의 계통이고, 아담의 계통이고 하나는 예수님 계통, 이 두 명의 아버지에 의해서 우리가 새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우리는 천국의 사람이 아닙니다. 한 아버지는 그냥 육으로 낳아준 아버지지만 한 아버지는 희생물이에요.

우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희생물이 장착되어 있고 희생물이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주께서 우리를 귀하게 보는 이유는 나 때문에 귀하게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자기희생물을 계속 보호하기 위해서,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덩달아 우리를 지켜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의인이고 싶지 않아요. 의인자체가 너무 힘들어요. 바르게 산다는 것이.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이 힘들어요. 그런데 희생물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우리는 전혀 의인될 의사도 없는데 졸지에 뭐가 되느냐 하면, 이 땅에 의인이 된 겁니다. 의인! 하여튼 의인 꼬라지하고는. 전혀 의인답지를 않아요.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냥 버스정류장에서 줄이나 서고 싶어요. 그냥 평범하게, 우리는 조용하게 살고 싶어요.

그저 조용하게 살고 싶고 포부를 가지고 ‘나는 이렇게 살래’ 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냥 남들처럼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평범하지 못하게 우리 속에다가, 우리는 희생물이 되기 싫지만 주님의 희생물이 찾아오니까 그 때부터 우리는 반응을 나타내기를 “저 주님 싫어요.”라는 반응이 나오는 겁니다. 이미 주님이 들어앉아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서로 대조되는, 진짜 육의 계통에서는 주님이 싫어요. 그리고 주님은 “싫어도 할 수 없다. 너는 천국가야 돼.”라는 다른 목소리, 두 개의 목소리가 항상 우리 안에 공존해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 원칙을 실행시켜서 죄를 희생물을 통해서 의로 바꾸는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릴게요. 희생물이라 하는 것은 나와 환상사이에 끼어들어서 실재, 리얼리티, 실재가 들어옴으로서 나와 환상 모두가 환상인 것을 알려주는 요소가 희생물입니다.

그게 희생물인데 그걸 시간적으로 따져보면 과거의 산물, 과거의 기억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래가 미리 마중 나온다고 봐요. 그 미래는 어느 미래냐? 사도행전 17장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심판으로, 양과 염소로, 지옥과 천국으로 나눠졌던 그 시점이 앞당겨서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한테 들어왔다고 보면 되지요.

요한복음 5장처럼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는 그 약속을 우리 안에 집어넣어 놓고 그 말씀이, 약속이 약속대로 실행이 되도록 가동시키는 작업을 주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우리는 어느 쪽이냐 하면, 평범하기 짝이 없으면 지옥 가는 이 지옥 편에 서지요. 그런데 그 나라는 것이 늘 환상임을 알려주시는 이 고마움, 내가 되고 싶은 이것이 기껏해야 새로운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것은 하나의 착각이고 환상임을 소급해서 알려주시는 이러한 사랑,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항상 새로운 사건을 맞닥뜨리면서 깨닫게 해주시는 이 고마운 거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지난날에 대해서 전혀 심적인 부담 느낄 이유가 없지요. 아무것도 아닌데 뭐. 아무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나는 홍 잠언이다, 할 것이 아니에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해야 돼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왜 이렇게 사랑하십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마리아가 임신할 의사가 전혀 없어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 요새 말로 오빠지요. 사랑하는 오빠의 아기를 갖고 싶지 그 누구의 아기도 갖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빠에게 결혼축하의 선물은 임신. 얼마나 황당합니까? 이게 얼마나 상대방에 대한 이런 엉터리, 이런 말도 안되는 배려가 어디 있어요?

“누구 자식이야! 임신한 이 자식이 누구자식이야?” 대번에 하겠지요. “오실 메시아가 내 안에 있다.” 아마 마리아가 천사에게 들은대로 “장차 올 메시아가 내 안에 있다.” 말 하면서도 본인이 얼마나 실없는 여자인지 본인이 알 것 아니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다니.’

그러니까 마태복음 10장에 이런 말씀 나오지요. ‘성도한테는 네가 말한 것이 네가 한 것이 아니고 네 안에 있는 괴짜가 이야기 한 것이다. 네 안의 성령이 이야기할 것이다.’ 정말 이것은 뻔히 욕 얻어먹을 이야기인줄 알면서 이게 하고 싶지도 않아요. 남에게 욕 얻어먹을 이야기를 내가 왜 하고 싶어요? 그런데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서 불쑥 이게 튀어나오게 만들었어요.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악은 이 환상의 세계에서 심판받지 않습니다. 아주 편안하게 삽니다. 심판을 받는 것은 의인이 심판받아요. 이게 pivot 플레이거든요. 반대로 가는 거예요. 회전을 쳐버려요. 그래서 교인들에게 “여러분 심판받읍시다.”라는 교회가 되어야 돼요. 아무도 안오지요. 아무도 안오는 겁니다. 누가 심판받겠어요?

목사님 제발 조용하게 살게 해달라고 하지요. 왜 갑자기 심판 이야기를 해요? 모르드개는 자꾸 뭔가 유도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촌동생이 권력층에 돌입한 것도 뭔가 뜻이 있고 그리고 에스더 2장에, 궁궐에 있을 때 어떤 두 사람이 왕을 죽이기 위해서 모의한 것을 목격해서 신고해서 그 사람을 나무에 달려 죽게 만들고 처리한 이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고요.

그리고 갑자기 왕은 봉사하는 자거든요. 바사왕은 이스라엘을 봉사하는 자인데 갑자기 이스라엘을 봉사하는 자가 권력이 이양이 되어서 잠시 하만이라는 자에게 반지를 줘서 모든 권력을 이양했을 때 그 거들먹거림, 봉사자가 아니라 자기가 주권자로 나서는 이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는 이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밝혀야 되겠다.’ 나는 유대인이다, 라고 밝힌 거예요.

그렇다면 이 계열화중에서, 이 환상 속에서 갑자기 어떤 특이성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바로 유대인, 유대나라에요. 이 유대나라라는 것이 밝혀짐으로서 그 다음부터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이 하만이라는 사람이 유대나라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하는가 한 번 보는 것이 흥미롭지요. 유대나라에 대해서 하만이라는 사람이 어떤 조치를 취하는가?

이게 왜 중요하냐?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희생물이 바깥에서 오는 겁니까, 아니면 창조내부에 이미 들어 있었던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희생물이 바깥에서 주어진다. 아니면 희생물이 창조 내부에 이미 잠복되어 있었다. 어느 쪽입니까? 1번입니까, 2번입니까? 정답을, 이 어려운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2번이에요.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그게 구세주가 아닙니다. 이 땅에 오셔서 이 땅에서 나오는 모양새를 갖춰야 돼요. 마치 고름처럼. 고름은 있는데 짜야 나오잖아요. 이 땅이 이미 희생물을 품고 있었던 거예요. 고난의 형식으로. 유월절에 피 발랐던 그 양은 시장에서 새로 사온 것이 아니고 키우던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바른 거예요.

그들과 함께 희생물이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환상적인 세상, 나의 욕망, 이런 것들을 추구하다 보니까 뭘 놓치느냐 하면,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는 것을 놓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또 성령께서는 애초부터, 처음부터 네 안에 희생물이 있었다, 예수가 있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겁니다. 그걸 소급해서. 그게 창세전에 예정하사 너를 선택했다는 이야기에요.

추가적으로 ‘예수 찾아가자.’ 찾아갈 필요 없어요. 가만있으면 우리는 의인되고 심판받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통째로 그리스도와 같이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 쪽에서 먼저 희생물 되려고 나서지 마세요. 그것은 내 안에 예수님이 없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희생물 안되려고 내빼세요. 내빼게 되면 말씀이 따라오는 겁니다.

지난 낮설교에 했잖아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삼키는 형국이라니까요. “내 다리 내놔라.” 비올 때 그 전설의 고향. 엄마 효도하는 것은 좋은데 돈 주고 고깃집에서 사야지 무덤을 파서 남의 시체를, 남의 다리를 가져오면 됩니까? 그거 들고 부모 효도한다고 오는데 뭔가가 막 따라오는 거예요. 한쪽 발은 날라 갔으니까 이런 이상한 동작으로 막 따라와요.

주님은 우리가 예쁜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자기 것이 예쁜 거예요. 엄마한테 효도하겠다고 가져간 그 죽은 신체가 자기 신체기 때문에, 자기조각이기 때문에 맞추려고 막 따라오는 거예요. 예가 좀 살벌한 예를 들었는데요. 에펠탑 기념물하고 파리의 에펠탑하고 어떤 관계냐 하면 비례의 관계에요.

온 우주를 포함하고 있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것이 외부로 나타난 민족인 이스라엘이 비례관계에요. 이스라엘은 모형물이고 그림자요 안의 모든 창조를 운영하는 그라운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처럼 모든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말미암아 친히 본인이 만드신 거예요. 일종의 잠복된 고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짜면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안짜려고 하지요. 왜? 우리는 이 모형자체가 우리가 환상으로 자각할 수 있기 때문에 모형으로 만족해서, 그냥 모형으로 평범하게 하루 세끼 밥 먹고 잠자고, 남들 하는 것처럼 ‘이게 환상이든 뭐든 좋다. 나는 이게 편해.’ 몸에 이미 체화되어 있으니까 이게 편한 거예요. 내 다리 내놔라, 하면서 뒤 따라 오는 그것은 싫어요.

우리는 그냥 모형, 모조품이에요. 아담에 속한. 파리를 가봐야 알지요. 에펠탑 봤어요? 세느강 쪽으로 보면 잘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약을 올려서 기어이 조치를 하는데 그 조치가 뭐냐? 이게 흥미로워요. 하만이 내린 조치는 유대인이 경제적으로 여건을 힘들게 만드는 겁니다. 이 조치가 왜 중요하냐하면, 그동안 우리가 환상스러운, 내 몸 편한 인생을 살면서 바탕을 이뤘던 것이 뭐냐 하면, 경제논리였습니다.

악마가 알아요. 사람은 떡으로 산다는 거예요. 악마의 입장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 경제논리가 뭐가 나쁘냐고 했을 때 이것은 다 같이 봐야 돼요. 스가랴 5장 7, 8절이요.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는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그가 가로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구리 위에 던져 덮더라.”

여기서 에바라 하는 것은 부피를 측정하는 기구지요. 이 내용이 뭐냐 하면, 온 세상이 이미 전부가 악이라 그 말입니다. 이 세상은 무게를 달아보면 무거운데 전부가 악이에요. 그래서 이 악이라는 것이 어디서 밝혀지는가? 희생물이 같이 공존할 때만 진짜 악이 악답게 드러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최종적인 거예요. 예수님이 최종적인 심판의기준이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인품이 고상하고, 남을 도와주고, 착실하게 살아도 복음을 모르면, 십자가 복음을 모르면 그 사람은 그 자체가 저주받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악이기 때문에. 어디서 그렇게 판정을 내릴 수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튕겨 나갔다는 말은 자기가 만드신 세상에 왔으나, 자기백성에게 왔으나 자기백성이 영접지 아니하는 그러한 상황을 일부러 왜 만들었으냐 하면, 온천지가 악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빼놓고 의인이 없음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희생물의 의미와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하는 거예요.

사적으로 ‘교회 가서 도 닦자’ 불교적으로 말하면 ‘참 나를 발견하자, 평온한 나를 발견하고 싶다.’ 그런 것은 전부 다 환상이에요. 뭐가 빠졌기 때문에? 희생물이 빠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했던 그 희생물자체가 빠졌기 때문에 그런 것은 꿈속을 해매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말씀 듣고 ‘오늘 나는 심판받았습니다.’ 하면 괜찮은데 ‘오늘 내가 은혜 받았습니다.’ 하는 것은 대단히 수상한 거예요.

왜 은혜를 받아야 되지요? 은혜 받을 자격도 못되는데. ‘나는 심판받아야 합당하기에 심판을 이제 알겠습니다.’ 하면 이게 바로 은혜 아닙니까? 왜? 갑자기 모든 것이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새삼 알게 하는 계기를 가졌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어요? 몸이 아프다. 아무것도 아니지요. 감기 들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리아처럼 아기 임신했다. 아무것도 아니지요 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뭐가 잘리느냐 하면 희망 자체가 생길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지요. 아무것도 아닌 속에서 무슨 희망을 가지겠습니까? 희망의 여지를 가질 이유가 없지요. 아무것도 아닌데요. 되돌아보면 예수 그리스도 빼놓고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내 안의 희생물이 중요하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희생물을 간직한 사람이고. 그래서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를 위해서 희생할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되면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주를 위해서 희생한 사람으로 돌변해버립니다. 이것은 죄가 되는 거예요. 있어 보세요. 주께서 진짜 아무것도 아닌 순간 여러분이 그동안 무시했던 여러분 속에 있는 사랑이 빛을 발할 겁니다.

일곱 귀신 들렸다가 귀신이 나간 여자가 있어요. 유명한 막달라. 그 곳을 제가 또 방문했지 않습니까? 갈릴리바다에서. 영어로 막달라 라고 써놨어요. 그 막달라가 아무것도 아님을 표시내기 위해서 자기가 그동안 귀하게 여겼던 향수를 여지없이 버려버리지요. 왜? 향수도 환상이니까. 그리스도 앞에서는 이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상대적으로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 이렇게 할 때에 바리새인들이 무척이나 욕했습니다. “저 여자가 저 귀한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왜 허비하느냐?” 허비로 본 거예요. 환상에서는 허비라는 것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게 중요한 것이 없지요. 막달라 마리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뿐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뭐가 소중한 것이 손실되고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이게 뭐냐 하면, 죄를 의로 바꿔주시는 그 희생 되시는 그리스도만 바라보기 때문에 바리새인 너희들하고 막달라 마리아하고 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겁니다. 보는 관점이. 사랑의 관계로 보는 것과, ‘나 쓸모 있지 않습니까, 나 쓸모 있게 해주세요.’ 하는 관점하고 완전히 다르지요.

지금 우리가 잘못 에스더를 보게 되면 ‘에스더는 한 것도 없이 전부 다 모르드개가 처리했네.’ 그렇게 되지요. 지금 모르드개는 얍삽한 것 까지는 아니지만 자꾸 뭘 로 몰아가느냐 하면, 자기자신의 모든 되어가는 경로가 결코 내가 희생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는 그 말입니다. 결코 희생물이 될 수 없고 희생물다운 요소는 나 말고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이렇게 몰아가는 거예요. 자기 누이동생한테 덤터기를 씌우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런 입장에 있지 않기 때문에. 정말 하만에게 반지를 끼워준 자가 누구에요? 아하수에로 왕이지요. 그러면 왕자리와 대결할 수 있는 구조, 그런 자리는 지금 모르드개는 아니에요. 누구밖에 없습니까? 바로 에스더밖에 없는 거예요.

바사나라의 고레스부터 아하수에로 왕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도와주는 하나의 봉사하는 사람이라면 그 봉사하는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바로 에스더가 이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는 자리에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바사나라는 이스라엘을 돕게 되어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 돕는 자리에 원엔진이 움직이는 그 자리에는 바로 에스더가 들어가야 적합한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이미 왕후가 되게 했기 때문에. 왕의 처가 되게 했기 때문에 올라가는 겁니다. 그리고 이미 왕이 자기 사촌누이동생에게 이미 반해버렸어요. 제일 예쁘다 했고요. 이것은 욕망이 아닙니다. 이것은 충동이지요. 충동은 구멍을 뚫는 거예요. ‘이정도 조건 같으면 너 예쁘다 해줄게’를 능가해버려요. 내가 알고 있는 예쁨의 외곽에, 내가 아는 예쁨을 능가하는 이런 예쁨이 있었는가?

여러분 보고 이야기하는 것 아니니까 여러분은 안심하세요. 여러분은 그런 의인되면 큰일 납니다. 희생물 돼요. 조심하세요. 괜히 예쁜 얼굴로 돌아다니지 말고 가만있는 것이 좋아요. 그냥 버스나 기다리세요. 반한다고 돌아다니지 말고 고개 푹 숙이고 가만있어야 되지요. 왕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 없이 그냥 충동적으로 반한다는 말은 권력을 조종할 수 있는 더 높은, 유한의 권력 말고 무한의 권력에 속한 어떤 계기에 의해서 에스더는 왕후가 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서 현재 에스더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모르지요. 10분후에는 또 알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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