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묵시적 보좌2(이근호)130103

아빠와 함께 2013. 5. 14. 07:47

가락교회-다니엘 7장9(묵시적 보좌)130103-11강b -이 근호 목사

제 11강b

7장 10절에 보면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돼 있죠. 보좌라 하는 것은, 어느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하늘나라 보좌? 그럼 가만히 있겠네.’ 가만히 있는 보좌 없습니다. 에스겔에 보면 바퀴가 있거든요. 천사들도 있고, 스가랴 같은 경우는 네 천사가 나와서 네 방향, 동, 서, 남, 북, 구석까지 다 가버려요. 완전히 세상을 천사가 와서 미리 선점해서 말뚝 박아버립니다. ‘하나님, 여기까지 맞죠?’ 네 천사가 네 모퉁이를 점령한다니까요.

세상이 모퉁이다. 천사 1, 천사 2, 천사 3, 천사 4, 해서 ‘하나님, 여기 말뚝 치면 되죠?’ 말뚝을 쳐놓으면 하나님께서 주어지는 모든 진노와 심판을 요 범위 내에서 다 조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왕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예수님의 영광에서 피할 자가 없게 이미 천사가 자리를 먼저 잡아버린다니까요. 그리고 이 자리에는 바다에 있는 것까지 초청을 해요. 바다의 누구를 초청하는가, 짐승, 짐승 따라 누가 오느냐, 마지막 숨겨 놓은 옛 뱀, 마귀, 악마도 뒤따라와서 여기에 오게 되면 여기에 주어지겠죠. 천사가 쳐놓은 요 범주 안에서 완전히 작살내 버립니다.

그것이 이미 축소 모형이 옛날 모세 언약의 성소에서 매일같이 이루어졌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제사 지내는 것이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 거예요. 그냥 이건 하나의 마술제고 아, 피 뿌리면 용서받는다 하더라. 피 뿌리면 용서한다. ‘그거 쉽네, 피 뿌리지 뭐.’ 이런 짓을 예수님 오실 때까지 유대인들이 계속 했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보니까 자기들은 피 뿌리고 제사 드리니까 이건 잘한 짓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우리는 모세 율법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 잘 하고 있죠?‘ 하니까 예수님이 “날 믿어라” 했거든요. ’그럼 이거는?‘ “그건 소용없고 날 믿어라. 이건 그림자고 이 그림자의 실체는 나다” 했거든요.

성전에 이게 만약 성소라면 성소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다리 발자국이 있는 거예요. 이걸 뒤따라가게 되면 점선부분이 되기 때문에 뒤따라가지 못하고 저들은 여기서 양만 잡고 염소 잡고 소 잡고 난리 났어. 그런데 뒤따라 가보니까 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어요. 이걸 누가 알겠습니까? 사도바울도 처음엔 몰랐었잖아요. 나중에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보니까 옛날 구약까지 소급해서 보니까 ‘아! 우리가 하는 짓은 육에서 와서 육으로 하는 짓거리에 불과한 거예요.’ 교회 다니고 예배 참석하고, 육에서 나온 건 육이예요. 교회 다니고 해봐야 그건 교회 다니는 거죠. 천국 가는 게 아닌데, 천국은 육에서 영으로 가려면 ‘육이 육이다.‘라고 깨닫는 어떤 순간이 와야 돼요. ’나는 무슨 짓을 해도 애 키우고 정으로 해도 이건 육에서 나온 육일뿐이다. 영은 아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돼요. 영이 있는 사람만 육이라고 할 수 있지, 육에 속한 사람은 이걸 육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건 정신적으로 고상한 거다.

육이란 한계가 뭐냐 하면 육에서 기껏해야 정신, 정신에서 숭고로 나가요.(육☞ 정신☞ 숭고) 숭고는 누가 주장했느냐 하면 유명한 임마누엘 칸트가 한 겁니다. 순수이성비판, 실천 이성비판, 그러니까 여기 정신은 윤리 도덕 이예요. 이게 TV에 나오는 유명한 강사들, 정신병에서 이야기하는 의사라든지, 유명한 심리학박사들, 여기까지 나와요. 인간은 고귀함이다. 서로서로 상생하면서 서로 소통하면서 삽시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이런 거. 요기까지 나가요. 여기에 법정스님이라든지, 요새 혜민스님이라든지. 여기서 좀 더 나아가면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숭고에 이릅니다. 숭고는 무소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음으로서 비워내는, 비워내는 노자의 사상에 의해서 비워지면 더욱 더 그 빈 만큼 더욱 충만한 행복이 주어집니다. 하는 이론. 이걸 근거로 해서 육을 근거로 해서 발전된 거예요. 너무 세속에 물들지 말고 돈 찾지 말고 이웃을 돌아봐서 착한 일해서 더 거기서 나아가면 돌봤다는 그 사랑마저 부인하고 그거마저 비워내면 그야말로 신의 경지에 해탈의 경지에 도달된다. 그런데 이건 육에서부터 출발했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 출발은? 영은 예수님이 육이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육인데, 이건 뭐냐 하면 ‘저주받았습니다.’가 출발한, ‘나는 저주받았습니다.‘ 왜, ’나는 죄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니까‘ 그냥 우리가 보는 죄가 아니고, 십자가 언약 때문에 주어진 죄로부터 해서 그 죄를 씻어줌으로서 이룬 나라,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천국 이예요.

이거(육에서 출발)는 유사 천국, 천국을 흉내 내는 겁니다. 이렇게 육에서 생각하는 천국은 특징이 뭐냐 하면 특정 인간을 섬기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 여기서는 모든 인간이 동등합니다. 모두가 부처니까, 모두가 신이고 모두가 예수니까, 교회에서 요새 장사가 안 되니까 이거 시도합니다. ‘여러분도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 12단계 밟으면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 마저 부인할 수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 경지에 이르게 되면 어떤 경우를 당해도 여러분들은 행복의 극치를 맛볼 수 있습니다. 부인을 통한 긍정의 극치를 맛보세요. 이렇게 나와요. 에카르트의 신비주의입니다. 부정 속에서 긍정을 바라보는. 훅스라는 신학자의 주장대로.

요새 천주교회나 기독교에서 저런 거 많이 합니다. 뭔가 유식해 보이고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고 도트인 것처럼 보이면서 사람들로 그렇게 자유경지에 높아지려 하는, 십자가만이 아니고 십자가를 이용해서 내가 신이 되는 걸 시도하는 거죠.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뿐인 게 되죠. 내 일이요? 아니, 내 일은 없고 오직 우리에게는 주의 이름만 필요하지 내 이름은 필요치 않죠.

그런데 이런 동네에 가면 주의 이름도 없애버리려 해요. ‘예수 믿게 되면 종속되니까 그럼 너는 자유를 누릴 수 없어. 처음에 예수 믿고 난 뒤에 네가 믿은 예수도 버려버려라, 그러면 비로소 너는 신이 될 것이다.’ 오늘 좋은 거 많이 배웁니다. 그쪽에서 몇 년 배우는 거 여러분은 1~2일만에 다 배워요. 그쪽 수법을.

그러니까 성경을 보세요. 성경에 보면 우리만 있는 게 아니고 하늘에 누가 분명히 있고 그분께서 보좌가 가만히 있는 보좌가 아니고 거기서 뭐가 나온다? 불이 강처럼 흘러나와서 다 조져버린다 말이죠. 11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그 큰 말하는 작은 뿔의 목소리로 인하여 주목하여 보는 사이에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가 상한바 되어 붙는 불에 던진바 되었으며 그 남은 모든 짐승은 그 권세를 빼앗겼으나 그 생명은 보존되어 정한 시기가 이르기를 기다리게 되었더라” 이런 이야기, 이런 스토리, 이런 스케줄, 이런 달력에 2013년 한글날은 이미 공휴일이다. 이미 나왔잖아요. 이처럼 이미 결정 된 거예요. 이런 절차로 시행된다. 이건 우리보고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믿든 안 믿든 상관없다니까, 내가 그냥 해치울 테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그 하나님의 진행되는 일에 우리를 참여시킨 거예요.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나서 냉장고나 차가 떠내려가는 것을 구경하란 말이 아니고 우리가 그 떠내려가는 냉장고고, 그 말씀 속에 떠내려가는 자동차가 되라 이 말이죠. 왜, 우리 힘으로 말씀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위에서 떠져야 되지, 밑에서 받혀줘야 되지, 우리가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해서 뭐라 하느냐 하면, 말씀은 우리의 대상화가 되지를 못합니다. 대상이라 하는 것은 멀찍이 떨어져 있고 ‘말씀 지켰습니다. 내가 지킵니다. 하나님 저게 말씀이죠? 이제부터 제가 지킬게요.’ 이게 ‘대상화’라는 거예요. 인간의 실존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어떤 대상을 내가 만들어 놓고 그 간격을 띄움으로써 요거까지는 당신영역, 요까지는 내 영역, 하면서 인간은 주체를 확립하게 돼 있습니다. 반드시 객체를 먼저 만들어놓고 객체와 차이 남을 통해서 ‘나는 나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건 고상한 철학이라 그런 생각하지 말고 어린애를 생각해 보세요. 어린애가 어릴 때는 엄마 품에 있다가 언제부턴가 친구 만난다고 가더니만 그다음부터는 ‘엄마, 내 방에 들어오지 마.’ 문 걸어 잠그고, 좀 컸다고 상담할 것은 친구한테 하고, 저 혼자 컴퓨터 게임하고 스마트 폰 있어서 이제는 아빠, 엄마하고 대화도 안 하고, 그것만 쳐다보고 있고 왜 그럽니까? 여기까지는 엄마가 하고, 그 다음은 엄마가 끼어들 수 없는 나만의 세계를 나만의 영역을 구상하는 그것이 자아 성, identity, 자기 정체성을 그런 식으로 확립하는 겁니다.

제가 오늘 재밌는 현상을 보았는데 아침에 대구에서 나오면서 우리 집에서 팔공산에서 내려오는 직해버스를 탔는데 차 속이 되게 시끄러워요. 등산객 둘이 나이가 70쯤 넘은 두 분이 한사람은 앞에 앉고 한 사람은 뒤에 떨어져 앉아서 뒤 보면서 이야기하니까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그래서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아저씨, 시끄러우니까 옆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하세요.’ 하니까 ‘예’ 하고 말 잘 들어요. 그래서 같이 앉더니만 이야기를 안 해요. 가만히 있고 이야기할 게 없는 거예요. 대상화 되다가 너무 가까워.ㅎ 너무 가까워서 쑥스러워서 이야기를 못하는 거예요. 멀찍이 보면서 이야기를 해야 될 텐데 붙어있으니까 이야기를 못하는 거예요. 계속 이야기를 안 해요. 언제 이야기하나 해도 계속 이야기를 안 해요.

아! 저게 뭐냐, 인간은 이야기할 때 자기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외치는 입장에서 상대방을 떼어놓고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친구를 사귀는구나, 친구를 좋아하는 게 아니고 자기 말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해서 사귀는구나. 부부도 마찬가지 아닌가, 혼자 이야기할 사람 없으니까 외로워서 부부가 있어야 되는가 생각이 들어요. 아, 인간은 희한한 인간이야.

10절에 봅시다.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제가 하는 이야기는 심판 할 때 뭐가 펴졌습니까? 책들이 펴졌습니다. 왜 심판에 책이 필요하냐 이 말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왜 심판에 책이 필요하냐? 아, 이거 아는데 참 무수한 세월 걸렸습니다. 몰라서 계속해서 머릿속에 답답한 채로 남아있었어요. 왜 생명책이 필요하고 왜 행위 책이 필요하냐? 뻔히 다 아는데,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을 세시는 분이 ‘아이쿠, 너 누구더라? 가만 있어봐, 내가 책 찾아보고.’ 이렇게 심판하시는 분이 아닌데, 왜 행위 책이 필요하고 생명책의 명단 리스트가 왜 필요하냐 이 말입니다. 나중에 알았어요.

그것은 바로 이 생명책과 이 행위 책이라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용도가 아니고, 심판하는 용도도 아니고, 심판주가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한 거예요. 심판 주는 우리의 행동에 따라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고, 심판 주가 심판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게끔 책에 이미 결정돼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다. 이건, 에서 위주도 아니고 야곱 위주도 아니고 누구위주다? 예수님을 위하여 너는 미움 받아야 돼, 너는 사랑 받아야 돼, 너 위해서가 아니고 싫어서가 아니라 누굴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만한 권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요한복음 5장 이야깁니다. 아버지께서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것처럼 나도 내가 심판하는 권세를 가졌노라, 아버지 생각하지 마라, 내가 본 전부가 네가 그렇게 보고 싶은 그 아버지 뜻이 바로 내가 지금 말로 행동으로 보이고 있잖아, 예수님 십자가 기능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말이죠. 다른 하나님을 왜 찾느냐.

그러니까 거기서 그 책을 펴놓고 이 책을 누가 줬습니까? 하니까 13절에 인자 같은 분이 보좌에서 나온 거예요. 이 보좌가 UFO같아, 다 나와. 꼭 흥부전 보면 박 켜면 다 나오잖아요. 박 자르면 거기서 휴대폰 나오고 TV나오고 온갖 보물이 다 나오듯이, 아니면 놀부한테는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나오듯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모든 것이 나왔다는 것은 결국 어디로 소급된다? 모든 것을 이끌어서 회오리바람 쳐서 어디로 전부 다 모은다?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분의 취지와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한 거예요.

요한계시록 22장, 생명수의 물이 흐른다. 어디서 흐른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물이 흘러서 온 천지를 적신다. 주일 낮에 에스겔 인용하면서 했잖아요. 모든 걸 적신다.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한 것은 제가 에덴동산에는 방향성이 있다 했죠.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데 왜 인간들은 밑에서 위로 갖다 바치려고 하느냐, 자꾸 들이대고 바치고 정성 바치고, 그건 자기를 죽이는 것 이예요. 그냥 위에서 내려오는 대로 옴팍 뒤집어쓰면 구원받는데, 온천에서 물이 넘치면 아래층에 행인은 어떻습니까? 이건 옴팍 젖잖아요. 그 식으로 구원받는데, 왜 자기가 밑에서 경건의 티를 내고 왜 그러느냐 말이죠. 그건 부여받는 게 없어서 그래요. 뒤집어 쓴 게 없어서 그래요. ‘죄 용서 받으라.’고 물을 엎었는데 그게 안 오니까 자기가 뭔가 없으니까 자기가 뭔가 만들어내는 거예요.

인자 같은 분이 오는데 여기서 진도 나가봅시다. 인자 같은 분이니까, 인자 같은 분을 알려면 뭐부터 알아야 돼요? 인자부터 알아야 인자 같은 분으로 되죠. 인자가 인자 같은 분의 모델이 되느냐, 그렇게 보이는데 실은 인자 같은 분이 모델이 돼서 미리 앞당겨서 인자가 온 거죠. 다니엘이 미리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온 겁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게 되는데 “그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이렇게 돼 있다 말이죠.

UFO입니다. 비행접시인데 여기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하나님이 앉아 계시는데 여기서는 번쩍번쩍하고 번개치고 불꽃이 떨어지고 책들은 펴있고 심판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안 나오고 어디서 구름타고 인자 같은 분한테 허가 맡아서 이렇게 오시더라 말이죠. 모습은 인자 같아요. 다니엘 같아요. 사람 같다 이 말이죠. 에스겔에 보면 사실 보좌 안에 인자 같은 모습이 들어있어요. 에스겔의 보좌가 이중으로 돼 있거든요. 바퀴가 이중으로 돼 있습니다. 안 쪽 바퀴 하나 있고 바깥 바퀴 있고 시계의 태엽처럼 분침 돌아가는 거 있고 시침 돌아가는 거 있고 시계는 초침까지 삼중이잖아요. 이건 이중이 돼서 있는데, 그 바퀴는 리모콘으로 안에서 지시를 해줘야 돼요. 동쪽 하면 쭉~ 가고, 서쪽 하면 서쪽으로 쭉~ 가도록 돼 있다 말이죠.

그 이야기는 그건 에스겔 이야기고, 이건 성전이 깨졌잖아요. 성전이 깨지면 와장창 다 불타고 다 깨져야 되는데 뭔가 깨지는데 구사일생으로 뭔가 홀연히 빠져나가는 그 무엇이 있어요. 그것도 동쪽으로. 뭔가 성전이 깨졌다 하는데 진짜 알맹이 성전의 비밀정보가 쏙 빠져나가서 이 파괴됨에서 면제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게 성신입니다. 성신이 가서 어디를 가느냐? 그발 강가에 가서 지도가 여기가 지중해고 여기가 이란이고 이라크고 여기가 터키고 시리아고 예루살렘이 여기 있거든요. 그발 강가는 현재 이라크 만 여기에 그발 강이 있어요. 성전에서 성신이 빠져나와서 어디를 가느냐 하면 여기에 들어와요.

 여기 뭐가 있다고 들어오느냐 하면 여기는 포로 잡힌 자의 집단 거주지입니다. 포로 잡힌 자들에게는 어떤 개성은 인정하지 않고 공동점이 있어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옛날에 이곳에서 살았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이룬다는 차원에서 참여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망한다.’는 걸 증거 하는 용도로서 구차 없이 포로 잡혀서 이쪽에 와 있는 자이거든요. 이들에게는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공통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의 집합 이예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내 뜻이 아닙니다.’를 공통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교회 둘레에 홍해를 만들어라. 그리고 사람들보고 교회 오라 했는데 홍해가 있어서 못 오잖아요. ‘에이 씨’ 하고 돌아가더라 말이죠. 그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회 안에서 찬송 소리가 들려요. 그래서 돌아가다 황당한 게 우리는 못 들어갔는데 저 인간들은 무슨 수로 들어갔지? 하는데 여기서 찬송소리가 들이죠. ‘우리가 건너 온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구나, 일부러 홍해 만들어 놓은 이유가 ‘우리는 못 합니다. 그런데 합격은 됐습니다. 우리는 실력은 없는데 이상하게 합격은 됐는데 그것은 누구 실력이다? ’주님의 어린양의 십자가 피 때문에만 여기 들어왔습니다.’ 고백할 때 이 천국은 영원히 찬송소리가 들리는 진짜배기 천국이 되는 거예요. 이건 교회가 아니고 천국이죠.

이걸 그대로 앞당겨서 왜 합니까? 이 동네가 아니고 포로 잡힌 남의 나라에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나라에 뭐가 있다? 성전은 깨져도 성전은 영원하리라, 해서 계속 날아가서 여기 임하면서 바로 ‘이것이 거룩한 나의 성소가 된다.’고 에스겔 36장에 나오죠. 그러면 이 성신은 있지만 그 성신을 보내주는 분은 나타나지 않죠. 그건 예수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야죠. 예수님이 나타나면 예수님이 내 몸 속에서 성신을 주실 때, 예배 하는 곳은 건물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예배드린다는 사실, 사마리아 여인은 알게 됩니다. 아!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바로 그때가 이때다. 지금 예수님하고 이야기할 때 언제 우리가 제대로 예배드립니까? ‘그때가 이때다.’ 그 아줌마가 물동이 버려두고 ‘신 봤다’ 하고 갔죠. 그러니까 오실 메시아가 ‘아! 이런 식으로 오시다니.’ 메시아를 만난 거예요. 메시아를 만났다는 말은 주일날도 이야기했지만 세상의 마지막 남은 진리를 한꺼번에 안 거예요. 이제는 남은 게 없어요. 앞부분도 없고 뒷부분도 없이 완전히 다 알아버렸어요.

예수님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로 세상 모든 걸 결정하고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님과 성전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들이 그동안 회오리바람처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속 회오리바람, 바람들이 불어왔던 거예요. 모든 것이 주를 위하여 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해서 존재했던 악마들이었고 귀신들이었고 이단들이었고 다 배치가 그런 식으로 된 겁니다. 그걸 미리 보여준 거죠. 여기 14절에 보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권세와 영광과 나라 하니까 여러분 많이 들어본 이야기죠? 어디 나오는 이야깁니까?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무슨 기도 나오죠? 주기도문 나오죠. 주기도문 마지막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말은 뭐냐, 이 땅에는 나라도 없고 영광도 없고 권세도 권세 값도 못한다 이 말이거든요. 너희들이 이 세상의 권세도 아니고 영광도 영원하지도 않고 나라도 멸망될 나라인데 왜 거기에 대해서 애착을 갖고 있고 거기서 인생의 승부를 거기다 거느냐 이 말이죠. 그것이 옳다, 그르다. 실패했다, 성공했다, 라는 것조차, 논의하는 것조차 그게 참 육의 모습에 불과합니다. 홍 라희가 여자 쪽에서 제일 돈이 많고 하죠. 그런데 정 주영씨가 한 유명한 명언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돈이 많아도 나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김치찌개 먹는다고, 오늘 아침에 저도 김치찌개 먹었어요. 나 재벌입니까? 정주영이는 김치찌개는 먹었는데 잠은 못 잤잖아요. 북한에 소 갖다 주려고 잠을 못 잤지만 나는 김치찌개 먹어도 된장찌개 먹어도 잠은 잘 잤거든요. 그럼 누가 갑 이예요? 이건 뭐냐 자기도 자기 맘대로 못해요. 홍라희고 뭐고 이건희도 자기도 자기 맘대로 못하는 거예요.

남은 연애해도 아무 소리 없는데 연애 인 돼서 연애한다고 휴가를 많이 썼다고 말이 많은데,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불쌍하죠. 붉은 안경 끼고 나오고, 우리는 안경을 쓰나 안 쓰나 터치하는 사람도 없는데,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소속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묻는 것은 ‘너 어느 정도 대단 하느냐, 를 묻는 게 아니고 ’소속이 어디냐‘ 이걸 묻는 거예요. 주께서 아십니다. ’소속은 주님 소속이잖아요.‘라는 말을 한다는 게 이게 보통 기적이 아니고는 못해요.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던지는 재주가 있더라도 그 고백 안 나옵니다. 산을 던져서 바다에 빠뜨리는 재주가 있더라도 그 고백 안 나와요.

그야말로 아는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다 할지라도 ‘저는 예수님 것입니다.‘ 고백은 이건 어떤 희한한 재주보다 더 희한한 재주고 놀라운 기적 이예요. 이걸 가르친다고 될 일입니까? 이건 권총 가지고 협박한다고 될 일입니까? 성령 가지고 쑤셔 넣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성신이 와서 이 집단 속에 ’이 자리가 내 자리다.‘ 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집단 속에서 자기 자리를 삼기 위해서 성신부터 먼저 왔어요. 성신이 오고 난 뒤에 성신에 관련된 그 실체,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그런 대상화가 아니에요. 삼킴을 당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했죠. 노래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여러분들은 이런 노래 잘 모르지만 저는 한번 들은 적 있어요.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물러나요. 현빈이 나왔던 씨크릿가든이란 드라마에서. 항상 나를 위한 사랑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너무 내 영역에 너무 침범하면 안 돼요. 그러면 뭐도 없어집니까? 내 것이 남지 않아요. 그게 싫어요. 사랑도 나를 빛내고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여기 보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우리는 내가 있는 이상은 내 나라와 내 권세와 영광을 우리는 포기를 못합니다. 사랑, 믿음, 소망, 다 나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나를 빛내는 사랑, 나를 빛내는 소망, 나를 빛내는 믿음, 그래서 인간은 자기 믿음을 포기 못하잖아요. 자기 믿음을 포기 못하니까 이게 불신자 아닙니까? 나 예수 믿는다고 우기잖아요. 이게 전부 자기 영광으로 돼 있다고요.

그런데 사랑은 뭐냐, 사랑은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날라 와 버렸어요. 꼭 피터 팬 같아. 피터 팬이나 슈퍼맨들, 슈퍼맨 영화 보면 노는 게 이게 도로를 안 걷죠. 바지 위에 팬츠 입고 날라 다니잖아요. 이건 교통위반도 필요 없고 날라 다니니까 그냥 침범하죠. 꼭 성령 같아, 바람 같아요. 그래서 어느 가사에 보면 ‘이 거지같은 사랑, 이 바람 같은 사랑’ 그런 노래가 있어요. 잡을 수가 없어요. 내 손에 안 잡히는데 그게 사랑입니까? 그건 고문이죠. 내 손에 잡아줘야 내가 계속 그 사람을 사랑하는데 이건 유명한 단편소설에 보면 왔다가 고기 잡으러 가버리고, 또 기다리고 한참 기다리다 이제는 안 오겠지 하면 또 찾아오고, 10년 뒤에 오고 15년 뒤에 오고.

 옛날에 우리 클 때에 그런 남자들 참 많았습니다. ‘여보 돈 벌어올게.’ 하고는 돈 버는 게 1~2개월이 아니고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몰라, 어디 가서 5년 있다가 오고, 와서는 아내가 열심히 돈 벌어놓으면 그거 가지고 가서 10년 뒤에 오고 이런 사람 많았어요. 그래도 남편구실 다 하고 남편이라 우기고 그래요. 자식 아프면 보상금 타려고 기어들어오고 그래요. 진짜 바람 같은 사랑 이예요. 우리는 그럴 때 그 여인은 한이 맺힙니다. 한이 맺히면 어떻게 하느냐, 그 남자를 잡아야 되겠죠. 인간극장 보면 어부가 있는데 어부가 울릉도로 가니까 아줌마가 울릉도까지 따라가잖아요. 따라가다 비가 와서 배가 끊어져서 못 갔지만. 보세요.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지 않고 남자한테 딱 붙어있는 겁니다. 항상 남자는 자꾸 떼려고 하는데 여자는 딱 붙어있어요. 내가 밥해주고 다 한다는 거예요. 그게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해주는 척 하면서 사실은 이미 삼켜버렸어요. 자기 안경 안에서만 놀아야 돼요. 자기 눈동자 안에서만 놀아야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요. 아이고, 귀신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남편 죽으면 왕이 죽으면 에라, 아내고 후궁이고 다 집어넣었어요. 순장 제라 해서. 잘 먹고 잘 살아라 해서 보름치 음식 줘서 이집트고 중국고전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집어넣었어요. 지금도 인도에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대상화가 아니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침범해서 날 완전히 잡아버렸어요. 잡아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이건 누구 제안입니까? 전혀 우리 아이디어 아닙니다. 바로 성경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그게 나와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 교인들이 교인이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너희끼리만 신자 해라. 하나님도 오지도 않고 예수도 오지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예수님 믿는다 해서 크리스마스트리 만들어 놓고 찬송 부르면서 예수 안에 있다는 거예요.

실제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매사가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요. 왜, 덩치 큰 분이 엉덩이 가지고 깔고 앉으니 내 인생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거예요. 완전히 삼킴을 당해버렸습니다. 그걸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미쳤어? 오래 참게. 이게 인간적으로서는 그 말씀을 못 지킨다니까요. 온유하고 오래참고, 이것은 저쪽 희망 사항이지, 내 쪽 희망사항이 아니에요. 우리는 ‘사랑은 돈 주고 또 돈 주고 내일도 돈 주고 모래도 돈 주고.’ 맨 날 돈! 돈! 돈! 돈만 주면 사랑 이예요. 빈 손 들고 안 오고 또 주고, 또 주고 이게 우리가 아는 사랑이라니까요. 그게 우리의 이 땅에서 통용되는 영광이요, 나라요, 그게 놀랍게도 권세 아닙니까? 주님께서 광야에서 마귀하고 이 세 가지와 맞닥뜨렸잖아요? ‘줄게, 나한테 절만 하면 다 줄게, 사람들 다 넘어갔어. 네가 마지막이야, 너 밖에 없어, 마지막이야, 다 넘어갔어, 다윗도 넘어가서 죽었어.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다 죽은 거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세상만 찾고 돈만 찾는 이들에게 허락도 없이 노크도 없이 그냥 들어와서 이 거지같은 사랑, 바람 같은 사랑이 우리에게 와버리면 웬 꽃 거지가 서 있다니까요. 누구십니까? 궁금해요? 이걸 이 땅에서 미리 다니엘에게 당겨서 주는 이유가 그걸 받아야 될 사람의 이름이 인자, 바로 내가 오기 전에 앞당겨서 내 것을 담아있는 모습이 인자! 그리고 오실 분은 인자 같은 이! 그래서 모델과 실체와 주인공이 항상 묵시에서는 반대가 됩니다. 역사에서는 과거가 먼저 있고 이렇게 되지만, 묵시에서는 과거란 미래를 위하여 과거가 먼저 밑에 펼쳐져야 돼요.

양탄자를 깔 때 보세요. 대종상 시상식 또는 아시아 영화제 할 때 깔잖아요. 여기 본부가 있고 계단이 있으면 빨간 양탄자를 위에서부터 깔지 않습니까? 그냥 리무진을 타고 가면 자기 집을 가는지 모르는데 양탄자를 깔고 걸어올 때 비로소 본부에 도달된다 말이죠.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이 나를 유지하지만, 양탄자에 접어드는 순간 여기서부터 공격이 들어오기 때문에 내 허락도 없이 결국 진짜 나라는 분에게 이끌려서 나는 없어지면서 진짜 나의 나됨은 예수님 안에서의 나거든요. 이걸 예수님의 것, 예수님의 소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人(인), 人(인)을 떼버리면 이건 사람이 아니무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와 붙을 때만 사람으로 취급해 주는 겁니다.

양탄자를 내리게 되면 여기서부터 시작돼서 그리스도에게 오게 되면 이미 우리가 왔던 것은 우리에게 떨어져 나가버리죠. 나의 이상, 나의 꿈, 내가 좋아하는 사랑, 내 영광과 나라 권세, 이런 것은 다 떨어져 나가죠. 떨어져 나가면서 뭐가 보이느냐, 내 속에 꿈이 있었다는 것을 떨어져 나가면서 우리는 구경이 되는 겁니다. 아! 내일쯤 돼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일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신문을 보면서 누가 입각하고 누가 준비위원이 됐다 하면 ‘아, 내가 그 자리인데. 내가 할 수 있는데.’  이런 생각을 보는 순간 깨닫는 것은 주께서 떨어내는 먼지 중에 그게 포함돼 있다는 겁니다. 거기서 나온 노래가 유명한 ‘먼지가 되어‘ 떼 내는 먼지, 지금 뭐가 떼 낼지 몰라요. 평생 살면서 계속 나올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맘껏 우리가 하는 욕망대로 꿈을 꾸세요. 꿈을 꾸라고 명령할 필요도 없어요. 잠만 자도 꿈에 로또 되고 난리 났어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미 우리 내장돼 있던 겁니다. 이걸 뜯어서 보게 하므로 말미암아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어린양으로서 현대판 노아방주로서, 십자가 새 언약으로서 죽었다. 이런 것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그 둘을 연관을 시키는 거죠.

자 14절 보게 되면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이 말은 뭣에 기준? 육의 기준이 여기서 소용이 없습니다. 너는 필리핀 사람, 나는 일본 사람, 너는 러시아 사람, 이런 육의 기준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바람 같은 사랑 와 버리면, 성령이 와 버리면 공통점이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맞습니다.‘라는 공통점. 그것만 남고 모든 나라들과 방언하는 자를 섬기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정도 밖에 안 되니까 결코 나는 나의 섬길 대상이 된다? 안 된다? 될 수가 없다.

아까 그 이야기 좀 더 해봅시다. 실존주의 철학에 의하면 인간의 주체라 하는 것은 없고 인간의 몸이 있는데 인간이 몸이 있을 때 나는 나고 저쪽은 내가 아니다. 저 사람은 내가 아닌 무엇이고, 나는 나다. 내가 아닌 무엇을 발견함으로서 나는 나다 할 때 이 간격이 생길 때 이건 대상이 됩니다. 객체가 아니고 비로소 여기서 주체가 발생합니다. 그 예를 들면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 2반 동창인데 길에서 오랜만에 만났어요. 그런데 1개월 지난 뒤에 그 인간이 의도적으로 나한테 접근해서 잡지 1년 치 공짜로 보라고 압력을 가했다고 볼 때에  ‘나는 그 잡지를 구독 안 해.‘ 라고 끊음으로서 나는 2학년 2반 동창생 맞지만 잡지를 좋아하지 않는 2학년 2반 동창으로서 새롭게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된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드니까 쉽죠. 어렵지 않죠. 그러면 그 동창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가 잡지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만나고 난 뒤에는 그게 분명해 지는 거죠.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라내고, 잘라내고, 잘라내고, 잘라내고 하면서 나는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받는 사람으로 주체가 형성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이끄십니다. 철학도 다 쓸데가 있죠? 철학도 이걸 알아냈어요. 철학자들이 이걸 알아냈는데 문제가 생겼어요. 이렇게 하니까 너무 개인주의가 되잖아요. 개인주의가 되니까 윤리가, 이웃사랑이 안 되잖아요. 이걸 또 어떻게 이웃사랑으로 이끌어보려고 애를 써요. 단 방법이 뭐냐 하면 주체라 하는 것은 객체가 되는 건 맞지만 그 객체가 나로 인하여 상처받은 헐벗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식으로 또 레비나스가 걸어서 이야기해서 ‘주체를 너에게서 찾지 말고 헐벗은 사람, 나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을 통해서 이렇게 하자.‘ 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여기다 갖다 대면서 해요. 해봐야 결국 이렇게 사랑하게 되면 남는 것은 나의 영광과 이거만 남죠. 여기 예수님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어요. 십자가를 이웃사랑이라고 이렇게 변질시켜서 적용했기 때문에 진짜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라는, 뭐가 죕니까? 죄라는 걸 느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 14절을 가지고서는 아직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죄라는 것이 나타나지 않게 돼 있어요. 그냥 이런 나라가 생긴다는 그것만 이야기할 뿐입니다.

15절 봅시다. “나 다니엘이 중심에 근심하며 내 뇌 속에 이상이 나로 번민케 한지라” 또 여기 뇌 속에 이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보니까 “그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 이건 지난 시간에 했죠? “세상에 일어날 것이로되” 요점을 이야기하고 강의 마치겠습니다. 네 짐승은 네 왕이라, 그 다음에 세상에 일어날 것이라. 이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세상이 있고 왕이 생긴 겁니까? 아니면 이 말씀이 먼저 있고 세상이 나중에 만들어진 겁니까? 말씀이 먼저 있고 세상이 그대로 만들어지게 돼 있어요. 그걸 내가 설명해드릴게요.

왜 그렇게 되는가? 그건 우리의 상식과 다른데 왜 그런가 하면 역사라 하는 것은 나의 과거가 먼저 있을 때 비로소 역사가 의미 있게 나에게 구성되게 돼 있어요. 여기 역사라 하는 것은 나의 역사도 될 수 있지만, 여기서 역사는 집단의 역사를 말합니다. 우리 인간이란 우리 아는 사람끼리, 우리 가족끼리, 우리 민족끼리. 민족과 역사라 하는 것은 과거에 있던 기억이 역사를 다시 구성하게 돼요. 역사 재구성이라 하고 어떤 철학자는 역사 재생산이라 하는데, 이걸 영향을 준다 해서 영향사라 해서 가다모란 사람이 이야기를 했어요. 가다모 이 사람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주체는 인간의 주체를 주관하는 진리는 없고 역사가 우리에게 영향을 입힌 것이다.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나는 내 것이라고는 아예 없고 전부 다 이리저리 내 앞에 짜깁기 하고 모든 주위 들은 풍월, 또 울고불고 하는 것도 다 씨스타가 노래 부는 것이고 먼지가 되어도 김광석이 노래 부른 것이고, 한 발짝 다가서면도 드라마 ost고  전부 다 들었던 것이 여기 들어있다 이 말이죠.

역사라는 것은 하나의 역사의 동의하는 것, 이것이 역사의 의미라고 본 거예요. 동의하는 게 역사다. 그런데 이게 왜 새삼스러우냐.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역사라 하는 것은 분명히 실체가 있고, 우리는 역사를 따라 간다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여기 실체 있어요? 없어요? 실체는 없고 내가 역사라고 그냥 인정하면 그게 역사가 되고 인정 안 하면 나의 역사가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살다 미국 이민 간다. 나는 미국이 좋아, 이러면 자연적으로 한국 역사에서 독도는 누구 땅이든 관심 없어요. 미국 알래스카가 일본 땅 안 되면 괜찮아요. 하와이가 일본 땅 안 되면 괜찮아요. 인간은 자기 역사라 하는 것은 분명히 그 사람은 이야기했어요. 역사라 하는 것은 역사 있고 우리는 따라가는 게 아니고. 역사는 내가 만들기 마련이다 이렇게 본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세상 일 때문에 울고불고 하지 말라 이 말이거든요. 네가 만들어놓고 네가 왜 우느냐 이 말이죠. 그러면 슬프다, 그러면 좋은 쪽으로 새로 역사를 만들면 슬픈 것도 뭐할 수 있다? 웃을 수 있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가다모의 주장에 따르면 포도주가 병에 반병 담겨 있으면 ‘오, 포도주가 없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반병이나 남았네.’ 이렇게 긍정적으로 보게 되면 이건 역사에 대해서 기피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에 대해서 좌절해서 자살하고 바위에서 떨어져 죽지 말고 그걸 포용하면, 거기서 새로운 질의 성전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이것이 위대한 인간의 실존적인 능력이라는 거예요. 돌멩이 의자 이런 건 못하고 실존적으로 자기가 자기의 의미가 돼 주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역사의 창조력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거 기업 경영의 산교육에 멋지지 않습니까? 과거는 잊어버려라. 잊고 지금 내가 있다면 내가 스스로 새로 만들면 되잖아. 오늘 아침에 내가 새로운 역사를 만들면 되지, 아휴, 과거에 계약을 못 따서 실수했어.‘ 자꾸 지나간 과거 들먹여서 무슨 도움이 됩니까? 항상 오늘은 오늘의 역사를 새로 쓰고, 그 주인공은 바로 내가 오늘 새로 시작하면 되니까. 오늘의 해는 오늘 뜨고 내일의 해는 또 내일 뜨고, 날마다 전~진, 전~진 해서 계속해서 전진하고 ’새로 하는 거야~‘ 해서 매일 새로 시작하고, 그렇게 계속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진정한 실존적인 인간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냐.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돼지나 소하고 다를 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이게 가다모의 주장입니다.

어떻게 비슷하죠? 짐승이 있다. 짐승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짐승을 가지고 역사를 만들어내시는 분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쥐고 있는 분이예요. 인자 같은 분을 위하여 필히 짐승은 짐승의 역사가 만들어지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걸 보면서 이렇게 보면 됩니다. 네 마리 짐승을 이렇게 벤허에 나오는 마차처럼 고리를 만들어요. ‘물어, 물어’ 해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네 짐승을 연단해서 쟁기로 밭 갈 듯이 ‘갈아, 갈아’ 물어, 물어‘ 해서 죽~ 갈아서 결국은 역사를 끝내버린다 이 말이죠. 그중에 우리도 포함돼서 이러고 있지만.

 다니엘이 이런 식으로 역사를 봤다는 것은, 그걸 자기가 본 게 아니고 자기 꿈에, 자기가 본 것 같으면 ‘나 이렇게 살련다.’ 영웅이겠지만 이게 자기가 본 게 아니고 자기에게 보여 진 거죠. 다니엘이 좋은 점은 우리보다 미리 봤다는 것 뿐 이예요. 다니엘이 봤다고 해서 그 역사가 취소되는 것도, 안 봤다고 해서 취소되는 건 아니고, 그냥 애초부터 예수님 나타날 것을 생각해 보면 반드시 이런 코스를 밟게 돼 있는데 다니엘은 꿈속에서 그걸 잠간 커닝했다. 잠시 그걸 미리 보고 우리는 책으로 지금 다 보고 있고, 그걸 해석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네 짐승은 지난 시간에 한 것처럼, 제일 먼저 바벨론이었고 그 다음에 메대 바사(페르샤)였고 그 다음에 헬라-마케도니아 헬라였고, 그 다음에 네 번째가 로마였고, 그거로서 짐승을 가지고 세상을 한다. 하필 로마로 끝나느냐, 로마가 되면 세상이 종말이 돼 버립니다. ‘에이, 아직도 로마 끝나도 종말은 아니잖아.’ 천만의 말씀, 질적으로 더 이상 새로운 구원의 방주는 없습니다. 새로운 질의 역사는 없어요.

예수를 믿느냐, 아니 믿느냐, 끝!! 그거로 끝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종말인데 예수를 아느냐, 예수를 모르느냐, 그걸로 우리 운명이 결정되니, 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넘쳐서 깨닫게 해 주신 은혜인줄 압니다. 땅엣 것을 늘 쳐다보며  살아가는 이 가련한 우리, 하지만 그때그때마다 위를 바라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니 이 축복을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가락교회-다니엘 7장9(묵시적 보좌)130103-11강b -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