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110811요한계시록13장-(묵시의 숫자화)-20강b-(이 근호 목사)
제 20강b 시작하겠습니다. 창조가 기적인가, 죽음이 기적인가, 이 문제, 우리 인간이 있으면 ‘내가 여기 왜 있는가.’ 하면 ‘누가 창조했기에 내가 있겠지.‘라고 여기서 창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창조를 이야기하는 것이 누굴 옹호하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음을 옹호하기 위해서 ’누가 창조했겠지.’ 하는 거예요. 그럼 ‘누가 창조했겠지‘하면 누가 나옵니까? 여기는 사단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사단이 안 나오는 거예요. 여기 나만 있으면 되지 사단은 왜? 나만 있으면 되지, 마귀는 왜 집어넣어요. 마귀 생각 안 해도 내가 예수 믿잖아요. 그럼 됐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 있음과 이단이 차이가 난다고요. 예수님 있음은 사단을 끄집어내게 돼 있는데 인간에서 출발해 버리면 사단이란 매개물이 필요치 않아요. 그저 내 복주고 내 잘되면 뭐가 되든지 관계없어요. 인도에 강이 두 개 있는데 하나 이쪽에는 갠지스 강, 이쪽에는 인더스 강이 있는데, 인더스 강에 보면 여기에 처음에 인도가 제국 할 때 아리아왕국이 있었는데 여기에 있던 민족들이 옮겨가면서 힌두교라는 게 처음 생겼어요. 그때 신은 뭐냐 하면 이렇게 해요. ‘신이시여, 여기 갠지스 강에 물이 많으므로 신께서 오셔서 맘껏 드시고 우리를 축복해 달라.’라는 거예요. 보세요. 매개물이 뭡니까? 지금 여기 물이 가물었거든요. 지금 가물어서 옮겼거든요. 그러면 누가 좋아요? 내가 좋은 거예요. 내가 좋은 것에 거기다 누굴 동참시킵니까? 하나님을 동참시켜서 축복해 달라는 거예요. ‘신께서 오셔서 맘껏 목욕하시고 맘껏 물드시고 축복해 달라’는 거예요. 지금도 갠지스 강에는 힌두교가 뭐 합니까? 거기에 하나의 영혼을 뿌리면 그 물줄기를 타고 어디 가느냐? 천상에 올라갑니다. 왜냐, 하나님께서 처음에 강을 만들 때는 하나님 머리카락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그걸 타고 올라간다는 거예요. 하나님, 신의 머리카락 가지고 강을 만들었다는 아이디어가 어디서 만들어졌어요? 내가 여기 있음, 있는데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좋게 있음, 선하게 있음, 그리고 값어치 있게 있음, 그러면 여기서 뭐가 안 나옵니까? 만약에 사단을 거론한다면 이건 누구를 해롭게 할 때만 사단일까요? 나를 괴롭게 할 때만 사단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사단의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주님께서 악마의 모습으로 오니까 몰라본 거예요. 주님은 ‘니가 니 존재부터 시작해서 거꾸로 소급해서 창조를 이야기하고 그리고 나중에 뭐를 이야기합니까? 구원을 이야기해요. 소급해서 창조를 이야기하고 구원을 이야기하는데 그걸 뭐를 매개체로? 성경책을 매개체로 해서 이야기하니까 전부 다 뭐가 돼요? 전부 다 거짓말이 되죠. 창조가 기적이냐, 죽음이 기적이냐, 창조가 기적이 아닌 구원은 우리는 얼마든지 내가 여기 있음, 있다는 것은 누가 있어서 먼저 있었던 분이 나를 만들었기에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얼마든지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에 이건 기적이 아니에요. 왜, 인간이 매개물로 징검다리를 놓을 수 있는 문제기 때문에, 그런데 뭐를 모르느냐, 하이데거도 몰랐어요.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내가 왜 죽지? 이걸 도대체 모르는 거예요. 내가 왜 죽지? 그리고 죽는 게 왜 무섭지? 사는 것은 안 무서운데 계속 오래 사는 것은 안 무서운데 죽는 것은 무서워요. 병원에 가서 ‘폐암입니다.’하면 무섭고, ‘폐암 정상입니다.’하면 기분 좋고, 왜 그러느냐 말이죠. 누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누가 죽음이 싫어하도록 그렇게 만들었느냐 말이죠. 그것은 바로 영적인 매개물, 사단이 그렇게 만들은 거죠. 성경에서는 사단이 매개물로 만드는 것을 뭐라 그러느냐 하면 ‘사라지는 매개물’로 간주합니다. 매개물인데 사라지는 매개물이니까 일시적으로만 쓰여 졌다가 활용이 끝나버리면 없어져야 되죠. 그러면 누구만 매개물로 영원히 남는 겁니까? 예수님이죠.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데 중간에 영적인 매개물로 잠간 쓰임 받다가 날아가는 존재가 누구다? 사단입니다. 사단!! 그리고 보니 사단도 충실한 일꾼 이예요. 주님이 쓰시는 충실한 일꾼이 되는 겁니다. 사단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역할 이예요. 그래서 사단이 있음으로서 내가 여기 있는 게 기적이 아니고 있는 내가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함을 나타내는 그것이 기적이죠. 세상에 내가 여기 있는데 ‘하나님,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고백이 튀어나온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고백 이예요. ‘저쪽은 다 죽어도 나는 죽으면 안 돼,’ 이게 정상인데 ‘주여, 저 지옥가도 마땅합니다.’ 내 입이 의심스러워요. 나한테 이런 고백이 튀어나오다니, ‘내가 죄인 중에 괴수 맞습니다.’ 사도바울의 이런 고백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런 고백이 안 나와요. 이게 바로 죽음을 근거로 한, 죽음부터 새로 시작한 기적의 흐름이 되는 거죠. 창조의 세계에서 죽음으로 갔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주께서는 십자가 죽음에서 시작해서 죽음에서 창조로 가 버려요. 창조에서 죽음으로 가고 죽음에서 창조로 가는 이 창조가 아니고, 죽음에서 창조로 가는 창조는 다른 창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 창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한 창조예요. ‘그 따위 식의 창조를 주장하니까 니는 마땅히 지옥 가야 돼,‘라는 거예요. 그래서 현재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라고 여기게 한 모든 보이지 않는 매개물, 여기서 매개물을 짐승, 사단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단에서 나온 것은 비 언약에서 우상이 되는 거예요. 우상의 특징은 기적입니다. 그 기적의 특징은 있는 것을 확대시키고 번창시키고 팽창시키고 양을 많게 하고 오래 살게 하는 기적입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옵니다. 땅에 있는 짐승은, 영적 매개물은 바로 사단 매개물은 바다의 짐승을 숭배하게 만들어서 죽었다가 살아난 자를 찬미하도록 모든 사람들을 거기에 몰아넣는 일을 했다 보는 겁니다. 여기 13장 14절에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이 우상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그건 상당히 위험한 질문이 돼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처음부터 매개물을 만들 때 뭐로 만들었습니까? 내가 나를 파악하는 방식을 그대로 사용해서 뭐도 파악했다? 영적인 존재도 파악에 나서겠다는 그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에 이런 게 있으니까 우리가 납득이 되는 어떤 영적 매개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제시할 때 우리는 성경을 온전히 분석했다 이렇게 간주하고 싶은 거예요. 나에게 납득이 되는 내가 나에게 납득이 되듯이, 이처럼 납득이 되는 다른 우상, 생기 있게 말하는 그런 우상이 뭘까 찾기 시작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주석이 다 그런 거예요. 여기서 여러 가지 후보감들이 등장하죠. 미스 서울, 미스 대구, 쭉 나오듯이 여기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교황, 누가 내세우는 후보감이겠어요? 루터, 칼빈, 로마 황제는 누가 정했겠습니까? 그것은 핍박받고 있던 카타콤 지하 동굴에 갇혀있던 초대 교회 교인들이, 히틀러를 그렇게 본 사람들은 아우슈비츠 유대인들이나 또는, 여러분, 아우슈비츠가 유대인들만 갇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 제일 먼저 갇힌 사람은 독일 노숙자들이었습니다. 독일 노숙자 장애자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여호와 증인들이 아우슈비츠에 많이 들어갔어요. 왜 들어갔겠습니까? 무정부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무정부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자들을 집어넣고 차후에 50년 뒤에 유대인들을 집어넣었어요. 처음에는 독일인, 그 다음에는 소련에 포로 된 사람들, 공산주의들을 그렇게 싫어해요. 그 다음에 유대인을 집어넣죠. 후에는 유대인이 제일 많았죠. 또 들어간 사람이 있는데 집시들, 레갑 족속들을 집어넣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짐승은 누구겠습니까? 히틀러가 되겠죠. 여기서 생기를 되찾은 짐승에게 우상을 달라 하는데 두 가지를 구분해 봅시다. 여기서 우상이라 뭐냐, 본인들은 우상이라 생각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생각하지 않고 신으로 생각하죠. 살아있는 신, 그러니까 손에 잡히는 하나님을 원하는 거예요. 마치 여기 내가 있음이 손에 잡히듯이 내가 가진다는 것이 날마다 확인되는 신, 확인될 수 있는 하나님을 그리워했던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러한 우상을 이야기하면서 짐승을 뭐로 표기했느냐 하면 ‘히틀러다. 교황이다.’ 하지 않고 뭐로 표기했습니까? 666, 숫자로 표기했죠.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만 너무 어려우니까 다시 해 봅시다. 숫자로 표기한다는 것을 ‘숫자化’ 숫자로 변형시키는 거예요. 숫자로 변형시키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떤 점이 편리하냐 하면 여기 숫자化시키게 되면 무엇과 대비시키느냐 하면 이쪽의 숫자化와 연결 지을 수가 있어요. ‘666’이라 숫자를 표현한 것은 사실은 ‘144.000’이라는 숫자로 성도를 대변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에서 배제되는 모든 세력을 ‘666’이라고 표기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의 논리가 어렵다고 하는데 ‘666’이라는 것은 무엇에 기준해서? ‘666‘이라는 것은 미완료성이라 했죠. 7은 뭐라 했습니까? 완료 성, 7인, 7나팔, 7대접이라는 이 모든 것이 완료된 상태에서 내려지는 심판성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완료가 돼 버리면 그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완료되지 않은 것을 자기 세계 안에서 축출해서 뽑아내어서 배제시키는 그런 기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완료에 합하지 않은 모든 것은 분류 작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완료와 미완료와 다른데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걸 해 볼게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은 1, 2, 3, 4, 5, 6, 이걸 다 통합한 이걸 7로 보잖아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룬다 할 때는 여기에 나쁜 것, 악마도 다 포함될 때 예수님의 완성으로 본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렇게 보지 않고 완료되었다 할 때는 완료된 것 외에는 바깥에서 전부 다 뽑아내는 그 작업에서 따로 모아놓은 이것을 완료라고 보는 겁니다. 나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내 안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된 자 외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깥에 내차버리고 배제하는 그 작업을 하는 것이 바로 완료된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의 철학적인 논리에 의하면 선과 악도 아울러서 다 포함할 때 그게 완료고 완성으로 보잖아요. 그렇잖습니까? 흑과 백, 빛과 어둠, 전체를 포함할 때 이것이 선이 되고 이게 완성으로 보잖습니까? 그래야 미진한 게 남지 않기 때문에. ‘지옥과 천국이 있지만 주님은 지옥에서도 주가 되고 천국에서도 주가 된다.’라는 것이 우리 인식이다 이 말이죠.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틀린 게 아닌데, 주님의 관심 점은 이 전체를 합해서 주가 되는 관점이 아니고 천국 간 사람의 주가 되는 쪽으로 이쪽(지옥 가는 자들)을 배제하는 방법으로 기능을 하는 거예요. 일을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666으로 따로 숫자를 표기한다는 것은 달리 완성된 딴 모습이 숫자로 표기되는 모습이 등장하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포함되지 않는, 속하지 않은 배제된 딴 집단을 666이라고 이렇게 표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을 할 때 스가랴서나 에스겔서를 많이 인용해야 되는데 스가랴 내용을 잠간 언급하면 스가랴에 7이라는 숫자가 많이 나오고 천사를 사방으로 내보내서 심판하는 내용으로 돼 있습니다. 스가랴 전체를 내용으로 봐서는 현재 새로운 성전이 건립되면서 여기에 완료된 성전이 나옵니다. 그 성전 때문에 필연적으로 여기에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맹렬한 심판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시작이 되면서 여기 완료에서 심판이 시작되면서 여기 심판에서 나오는 반경. 이 모습이 예전에 세상을 해석했던 것이 해석이 안 되고, 묵시적인 용어가 동원돼야 해석이 될 정도로 그렇게 표현돼 있어요. 그러면 한번 물어 봅시다. 평소에 이렇게 물을 먹잖아요. 그럼 평소에 ‘나는 컵으로 물을 마셨다.’ 라는 표현을 ‘어떤 뿔 달린 짐승이 놀라운 생명수를 마셨다.’ 그걸 사진을 찍어보면 동영상으로 보면 똑같은 물이예요. 예전에 평소에 늘 해왔던 행동인데 새로운 표현이 가미돼 버리면, 묵시적 입장에서 표현해 버리면 마치 전혀 다른 물 마실 때 그냥 마시는 게 아니고 컵을 세 바퀴 돌리면서 마시는 그런 기적이 나타난 것처럼 그렇게 오해될 수밖에 없는 표현이 나와 버려요. 조용하게 해는 뜨고 달은 지는데 별도 뜨고 조용한데 ‘그때는 하늘에서 별들이 떨어지고 강물이 벌겋게 달궈지고’란 표현이 나와 버리면 옛날에 우리가 ‘강물은 푸르다. 푸르다.’ 하다가 ‘이번에 홍수 날 때 보니까 강물이 벌겋잖아요. 요한계시록에도’라고 마치 표현이 일치되는 현상이 따로 만들어져야 말씀이 완성된 것처럼 그렇게 오해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스가랴에 보면 오버도 그런 오버가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데 표현들이 전부 다 난리도 아니에요. 중국 무협소설처럼 휙, 휙 날아다니고 뭐 뒤집어지고 놋을 지고 어떤 여자가 날아다니고...CF영화도 그런 영화가 없어요. 그런데 사실은 보면 그냥 조용해요. 가끔 주식이 떨어지니 문제지...ㅎ 조용해요. 소말리아 해적이 나타나서 문제고 우리나라 축구가 3대 0으로 져서 문제고,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조용히 돌아가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그냥 그대로 돌아가요. 그런데 이쪽에 영적으로 오버가 되니까 마치 큰 괴변이 일어난 것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유명한 바벨론이 무역하는 거 나오죠. 그 무역하는 거 옛날부터 해 왔어요. 이사야에는 시돈이 나와요. 시돈은 지중해 갈릴리 위쪽에 시돈을 시리아라 하는데 그냥 무역 했어요. 옛날부터 했어요.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바벨론, 시돈이 온갖 것 무역해서 망한다고 돼 있어요. 큰 성 바벨론아, 그걸 음녀라고 표현하죠. 자,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음녀라 해서 갑자기 말을 타고 등장하는 게 아니고 그냥 일상으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똑같이 하는데, 관점이 뭐로 바뀝니까? 관점이 평범하게 나 중심으로 직장 생활하는, 그냥 정상으로 농사짓는, 그냥 보통의 관점에서 뭐로 바뀐다? 이게 숫자화 되면 뭐로 바뀌어요? 예수님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폭발하는 그러한 존재로 달라지죠. 그러면 ‘나는 나의 것에서 주의 것’이 되죠. 그런데 이게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주의 것으로 된 나가 매일같이 새롭게 창조되죠. 어디서? 죽음에서. 매일 죽고 매일 사는 거예요. 내 안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 뭐로 삽니까? 매일같이 나의 것으로 죽고 매일같이 주의 것으로 나예요. 중간에 나는 주의 것이라는 이러한 흐름을 거치면서 뭐로 바뀌어야 됩니까? 주의 것이 나다. 이것도 설명해야 되는데, 이건 수련회에서 설명한 건데, ‘나는~~ 행한다. 나는 밥 먹는다. 밥 먹는 행동 주체가 나죠. 뭘 하고 있습니까? 밥 먹고 있죠. 그런데 밥 먹는 것은 나다. 하면 밥 먹는 주체는 누굽니까? 누가 밥 먹게 했습니까? 보이지 않는 주님이 밥 먹게 하신 거예요. 이게 스가랴의 복음입니다. 스가랴는 성전이 완성되고 난 뒤에 왜 완성된 성전만 남고 왜 나머지는 완성된 성전에서 전부 다 심판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보세요. 성전이 완성됐죠? 끝났잖아요. 우리는 끝났잖아요. 그런데 무슨 기능? 배제 기능이 있죠. 그럼 뭘 해야 됩니까? 완성된 성전 빼놓고 나머지 뭐해야 돼요? 발로 다 차버리고 부숴버리고 박살내야 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현상적으로 보면, 그냥 비오고 그냥 해 뜨고 별 아름답고 지금도 남산 공원에 가면 둘이 데이트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스가랴나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게 뭐라고요? 주님에 의해서 맹렬하게 심판받는 모습이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우상은 뭐냐, 그들이 살아가는 모든 게 뭐냐, 바로 생기 있는 살아있는 우상이 되는 거예요. 666, 그걸 포함해서 뭐로 표현한다? 숫자로 표현한다? 666, 그 짐승이 뭐라고요? 666, 사람의 숫자라. 사람=짐승, 짐승=사람, 그것은 우리 인간의 존재적 입장에서는 그게 분간이 됩니까? 분간이 안 됩니다. 언제 임할 때? 주님이 임할 때가 아니라 우리가 주의 것이 될 때, 주의 것으로 쓰여 질 때, 우리가 말씀으로 쓰여 질 때, 우리가 요한계시록이 될 때, 그때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창세전에 명단이 기록된 자라는 말도 안 되는, 내가 창세전에 내 이름이 명단에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때, 세상은 뭡니까? 모든 것이 666이고, 그들 인간들은 살아있는 생기들이고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해를 할 때 나부터 성경말씀대로 말도 안 되는 내가 144.000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예요. 어디 주소가 144.000인가? 144.000을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고자 한다면 여호와 증인처럼 되고 그건 천지도 이런 천지가 없어요. 신천지,ㅎ 들어보셨습니까? 신천지,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나는 뭐가 돼요? 144.000 자신이 돼요. 이건 144.000을 지가 쥐고 있는 셈이 된다니까요. 144.000되기 위해서 나는 144.000으로 돼야 될 사람인데 자기가 144.000이 돼 있으니까 이건 자기가 우상 이예요. 자기가 666이예요.ㅎ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스가랴에 있어서 놀라운 사실은 성전이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이건 사람의 능으로 되지 않아요. 찬찬히 봅시다. 이건 사람의 능으로 되지 아니한다. 무슨 뜻입니까? ‘너는 죽었다.‘라는 거예요. 밥 먹고 있는 너는 죽었다. 직장 생활하는 너는 죽었다. 지금 애 돌보고 있는 너는 죽었다. 항상 죽었다가 사람의 능으로 되지 아니한다. 죽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은 하나님이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사람이 죽은데서, 분명히 죽었는데 죽은 인간이 구원되는 걸 하나님이 원해요. 그런데 죽은 자는 자기 구원을 위해서 뭐든 손을 쓸 수가 있다? 없다? 손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내 이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 바깥의 기적 이예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기적이 아니고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기적을 주신 거예요. 그게 뭐냐, 말씀으로 찾아오는 겁니다. 말씀으로 찾아와 버리면 이 말씀이 되기 위해서 내가 시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주께서 아예 기대를 안 해요. ‘이 말씀대로 니가 해봐라.’ 기대를 안 해요. 왜냐, 우리가 행하지 않더라도 주께서 이미 완료 성 가지고 이미 해주신 거예요.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고 오직 나의 신, 여호와의 신, 주의 신, 성령으로 했다. 그럼 이미 완료된 거죠. 이게 믿어지십니까? 이미 완료된 거죠. 완료됐으면 이제 완료가 된 그 파편이 뭔가, 완료된 것은 하나죠. 거기 1에서 나온 7, 완료된 7에서 뭐가 나오느냐, 나온다 말이죠. 그런데 성도는 그게 7임이 믿어져요. 어떻게? 몰라요. 그건 제가 설명 못합니다. 말씀이 믿어진다니까요. ‘예수님의 피로 죄 용서 받았네.’라는 말씀이 믿어져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믿었습니까? 한다면 우리가 뭐라고 하느냐, ‘나는 죽어 있었는데 주께서 이 말씀으로 ’너는 피로써 살아야 돼.‘라는 말씀에 의해서 내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반대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님 피로 살고 싶어서 믿는 게 아니냐.’고 묻죠. 그러면 우리는 ‘No, 노, 절대로 그게 아니야, 옛날에는 그랬었는데 그게 신앙이 아닌 걸 이제 알았어. 그게 아니고 ’요렇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저러면 천국 갑니까?‘라고 시도한 적이 있었었는데 그게 신앙이 아니고 사단의 역사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말씀으로 주께서는 자기 피로 우리로 하여금 피를 믿는 사람 되게 하셨다는 거예요. 미친다. 정말.ㅎ 그러면 거기서 쓰여 지는 게 뭐냐 하면, 이렇게 창세전에 이미 이름이 기록된 것을 믿어지는 순간부터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전에는 사단으로부터 왜곡된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존재 중심이었잖아요. 지금은 무슨 중심이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 중심, 또는 예수님 죽으심 중심으로 보니까 ‘아! 나는 구원받았는데 저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구나.’가 드러나는 거예요. 이 말은 ‘나는 요렇게 해서 구원받았는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안 할까?’라는 식은 절대로 이다? 아니다? 절대로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주께서 주의 다 이루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나를 창세전에 택하여 이제 나타나게 했고 저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구나.’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듣는 사람이 기분 나빠 하면서, ‘나는 그럼 누구란 말인가?’ ‘666이십니다.’이래 되는 거예요. ‘그럼 당신은?’ ‘나는 144.000입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이 144.000이라는 게 성경 어디 있느냐?’라고 묻겠죠. ‘그건 성경 전체가 이야기하기 때문에 내가 어디 있다고 말할 수가 없죠.’ 왜, 나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제일 좋은 예는 이 예입니다. 참, 이런 예까지 꼭 동원돼야 하는가, 문제가 됩니다만, 이런 예까지 그림을 그려 설명합니다. 어느 별장에 휴가 갔습니다. 별장에 창이 크게 있는데 어떤 사람이 마루에 거기에 누워있습니다. 보름달이 떴는데 보름달이 창가를 통해서 마루에 영창이 비칩니다. 달이 이동하면 영창이 같이 이동하면서 누운 자리에 비치죠. 이 영창이 ‘말씀’이죠. 나는 죽어있었는데 뭔가 144.000이 걸치는 거예요. 죽었는데 말씀 때문에 우리는 말씀의 사람이 된 거예요. 이것이 우리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뭐로 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되게 바빠요. 우리는 예수님보다 아무 할 것이 없어요. 녹취 해봐야 끝나고 나면 할 게 없는데...ㅎ 우리는 할 게 없어요. 그냥 돈만 벌면 돼요. 돈만 벌고 주님하고 싸우고 가위질 하다가 손도 자르고.. 아무것도 없는데 주님은 되게 바빠요. 뭘 드러내시기 위해서? 666을 드러내기 위해서, 144,000으로 하여금 감사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분주하게 온 천지를 다 동원시켜서 분주하게 날씨까지 더웠다가 비가 500미리 왔다가 굉장히 바빠요. 축구는 3대0으로 지게 만들었다가 온갖 것으로 분주하게 바빠요. 말씀의 그림자가 이렇게 비취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 능으로 된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신으로 된 거잖아요. 그래서 스가랴에 보면 완성된 성전이 있으면 나머지는 뭘 한다고요? 하나님, 예수님 바깥의 것들, 예수 안에서 예수 속성이 없는 것들은 다 내쫓는 그 작업을 필연적으로 말씀이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 발주하고 선점하고 다 해요. 다 하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이 음란한 바벨론아,’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그 듣는 사람은 황당하죠. 나쁜 짓한 것도 아니고 옛날부터 해온 무역인데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있는 666입장, 144.000입장에서는 그게 뭐라고요? 이건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음란한 바벨론이 되는 거예요. 성경 해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 시대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성경대로만 적용돼야 돼요. 그걸 일치시키려고 우리가 노력하면 이것은 안 돼요. 왜냐 하면 그럼 우리는 죽은 것이 아니고 뭡니까? 살아있는 내가 납득이 되는 해석을 내가 갖고 싶어서 그걸 갖고 마치 구원된 거라고 확인에 나서기 때문에 문제가 돼요. 어떤 특별한 해석을 쥐고 있음으로써 그 쥐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구원받게 되면 이건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나는 팔팔 살아있는 셈이 돼요. 그것은 내가 이해해서 구원받는 식이 돼요. 사람들은 자꾸 이해를 하려고하면 그것도 행함에 속하는 겁니다. 보통 땅에 있는 짐승을 뭐라 하느냐 하면 어린양의 짐승, 종교라고 하잖아요. 그 말이 맞죠. 그 말이 맞는 이유가 현재 입장에서 맞는 게 아니고 구약입장에서 맞아요. 구약에 있는 여호와 믿는 모든 종교는 멸망당했으니까 뭡니까? 바로 여호와를 흉내 내는, 멸망당한 유대와 이스라엘이 땅에서 선지자를 동원시켜서, 바알만 우상이 아닙니다. 여호와 믿는 그것도 우상이었습니다.ㅎ 그래서 우상이라 하는 것은 역사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있어 온 겁니다. 그들은 창조, 또는 존재 자체를 긍정하고 나선 겁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을 공격하던 누구였습니까? 사울 왕이 이 짓했잖아요. 땅에 있는 여호와 섬긴다고 하다가 여호와께 당했잖아요. 이상하게 그 사람은 다윗을 미워한 것뿐인데 성경은 오버되게 해석을 해 버립니다. 악신이 임해서 사울은 다윗을 창으로 박으려 했다. 그러면 사울 본인한테 물어보세요. ‘왜 던지려 했어요?’ ‘아, 던지고 싶데요.’ 그걸 뭐와 연결시키지 않습니까? 악신과 연결 안 시킨다 말이죠. 지금 안 믿는 사람 대다수를 보면 사단과 연결시키지 않아요. 왜, 사단과 연결시키면 자기가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모두가 사단이기 때문에 연결 안 시켜도 가만 놔둬도 모두가 사단의 일 이예요. 왜, 사단은 영적 매개물이기 때문에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늘 함께 있는 거예요. 평소에 다만 우리가 사단이라 아는 것은 바로 성령이 역사할 때 내가 아무 행한 것도 없이 구원받은 것을 알 때 뭔가 행하려고 시도한 모든 것이 뭐가 돼요? 바로 내 행위를 내가 안 죽는 존재로 내가 펄펄 살아있는 존재로 인정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 순간 그것은 사단의 유혹이 되고 사단의 역사가 되는 거죠. 베드로가 세 번씩 부인했잖아요. 그리고 베드로가 방금 신앙생활 고백해 놓고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죽는다 하니까 베드로가 뭐라 했습니까? ‘주여, 그러시면 안 되죠.’ 그럴 때 누가 오버했습니까? 베드로가 오버했습니까? 예수님이 오버했습니까? 예수님이 오버한 거죠.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누가 놀랐겠어요? 베드로가 놀라서 ‘주여, 왜 이러십니까? 뭐 잘못 잡쉈습니까? 저 보세요. 저 베드로예요. 왜 이러십니까? 갑자기 왜 오버하십니까?’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다 이루어졌기에 주께서는 우리보고 뭘 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보다 더 바빠요. 왜, 우리를 가지고 매개물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 같은 죄인의 괴수도 봐라, 이렇게 구원 되잖아.‘라고 것을 누구 앞에서? 사단의 종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서 우리를 144,000으로 이 땅에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세상의 666없이는 우리는 밥도 못 먹고 살죠.ㅎ 우리는 불신자 아니면 밥도 못 먹습니다. 불신자 아니면 우리는 어디 택시도 못 잡아요. 운영도 안 됩니다. 전부 다 666이 도와줘서 이만큼 밥 먹고 사는 겁니다. 다 마귀가 도와줘서 사는 거예요. 우리는 널름널름 주의 주신 은혜로 알고 늘 받아먹으면 되는 거예요. 그걸 이기려고 한다는 자체가 문제죠. 이미 자체가 완성인데, 죄인 중에 괴수된 자체가 완성이라니까요. 죄인 된 괴수 된 그 자체가 우리 몸을 덮고 있는 영창 이예요. 이것이 하나의 달빛 이예요. 말씀의 그림자라니까요. ‘니는 죄인이야.’ 엑스레이 안 찍어 봐도 알아요. 신나게 죄인 되고 신나게 구원되고 누가 부지런 떨어서? 우리는 모르는데 우리는 게으른데 누가 부지런 떱니까? 주님이 쉬지 않고 죄인 되게 만들어서 저 같은 골 때리는 인간도 내 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면류관을 반납하죠. 그 다음에 14장 봅시다. 제가 강의해도 정말 어려워요. “또 내가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4.000이 있는데” 왜 표현을 예수님이라 안하고 어린양이라 했습니까? 어린양이라는 것이 뭐와 관련돼 있느냐 하면 출애굽기와 관련돼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출애굽기를 뭐로 봤느냐 하면 잡아 당겨서 역사 속에 발생된 묵시 사건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온 사람들이 홍해 건너잖아요. 그걸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걸 건널 수 없는 것을 어린양을 앞장세워서 노래를 부르면서 건넜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홍해에서는 애굽 땅에서 광야로 수평적으로 건너죠?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디로 건넙니까? 지상에서 어디로 건너요? 지상에서 천상으로 건너가죠? 지상은 무슨 세계고? 죽음의 세계죠. 그래서 홍해바다를 죽음의 바다인 것처럼 요한계시록에선 이 세상 자체가 죽음이라는 걸 뭘 보고 압니까? 사람들은 바쁘게 차 몰고 있는데, 죽기는 왜 죽어요? 다 숨 쉬고 있는데, 이게 죽음이라는 걸 어떻게 압니까? 바로 어린양 되시는 분이 죽음을 당한 어린양이 이 땅을 거쳐 지났기 때문에 이 세상은 역사적 세계지만 묵시적 해석 안에 포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냥 역사적 해석으로 방치하지 않고 그걸 놔두지 않고 그걸 뭐로 흡수 통합했다? 묵시적 안목으로 통합시켜 버렸는데 묵시적 안목에 통합된 자를,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뭐다? 성령 받은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144.000할 때는 반드시 뭡니까? 어린양을 앞에 둬야 돼요. 어린양을 따르는 144.000, 그럼 어린양을 따른다는 말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뭐다? 바로 애굽 땅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평소에 뭔가 인지하는 그 사람이 144.000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쁜 놈이 아니고 666이 되는 거죠. 666은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 그들에게서 빠져 나오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왜, 그거밖에 모르니까. 세상밖에 모르니까. 그래서 666 안에는 종교가 발달돼 있어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 거기서 그들은 ‘내가 죽지 않고 더 살 수 있는 비법들을 교회에서 목사한테 배우고 있는 중이예요. '내가 죽으면 안 돼, 너는 벌 받으면 안 돼, 너는 지옥 가면 안 돼,’ 이것을 교회 와서 배운 자들 이예요. 이건 누구중심? 자기중심이죠.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내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를 가지고 놀고 있어요. 예수님이 나를 앞장 세워서 일하고 있다는 완전히 주객이 전도돼 있어요. 주님의 것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 성경 말씀이 그렇다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어제 축구 하는데 한국 팀이 3대0으로 졌잖아요. 지금 뒤늦게 기도하면 5대 3으로 뒤바뀝니까? 안 달라지죠. 성경 말씀이 그런 거예요. 이미 구원받았는데 기도한다고 내가 지옥 가지는 않잖아요. 사도바울이 믿은 게 뭐예요? 내가 지옥 갈지라도 유대인을 대신 하겠다는 말은 무슨 자신감에서 나온 겁니까? 구원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구원받고 지옥 가는 것이. 주께서 결정한 그것을 우리 유대인들도 우리 같은 동족도 같이 가기를 원해서 뭐라고 옹호하느냐 하면, ‘그래 내 지옥 가 줄게, 내가 지옥 가는 대신 너 천국 가라.’ 그만한 자신감으로 나온 겁니다. 우리도 전도할 때 그렇게 하세요. ‘나 지옥 간다.ㅎ 나 지옥 갈 테니까 너 천국 가라.’ 이런 자신감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천국의 무늬, 팬티에 꽃무늬 팬티 있죠? 우리는 하나의 천이라면 거기에 아롱 새겨진 천국의 무늬예요. 죽은 숫자화 돼서 죽은 어린양을 따르는 144.000으로 말씀으로 무늬가 돼서 숫자화 된. 다시 해 봅시다. 숫자라 하는 것은 뭐라 했습니까? 숫자는 뭐를 인정하지 않는다? 숫자는 그리스도의 기능만 인정하고 숫자화 된 우리를 뭐로 본다? 죽음으로 간주해서 하나의 1로 간주할 때는 0으로 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는 뭐가 됐습니까? 1이 아니고 죽었으니까 없어졌으니까 0으로 보죠. 0이니까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뭐가 돼요? 다 0이 돼요. 0이 되는데 묵시적으로 144.000이라는 기능이 오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144.000으로 살게 되죠. 동시에 세상 사람들은 뭐가 돼요? 그들은 666으로 살 수밖에 없는 거죠. 모든 것은 성경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했던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왜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생명책으로 구원받는데도 불구하고 왜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믿지 않는 자, 간음한 자, 살인한 자, 그런 자들은 유황불에 들어간다고 왜 그렇게 유교적인 면을 언급하는 말이 구태여 들어갔느냐,’ 라고 제가 질문을 했죠? 그것을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는 일치하기가 불가능했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방금 0라는 것으로 설명을 하면 설명이 돼요. 뭐냐 하면 믿지 않는 자들은, 다시 말해서 지옥 가는 사람들은 믿고 싶어도 믿지 않는 자 되게 하시는 그 영창에 달그림자가 거기에 비췰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주께서 그러니까 홍수 나서 물이 벌건 게 아니라 푸른 바다에 가도 물이 벌건 물이 되는 것처럼 그들이 어떤 짓을 해도 집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들은 믿지 않는 자, 두려워하는 자, 간음한 자, 살인한 자가 되게 만들어버리는 주님의 놀라운 솜씨다 이 말이죠. 왜, 모든 것이 그 자체가 완료기 때문에, 그 완료에서 비켜 갈 피조물은 없습니다. ‘너는 마귀 돼’ 하면 마귀 돼야 돼요. ‘너는 구원 받아.’ 하면 구원 돼야 돼요. ‘너는 나에게 물 떠준 소자야.’ 하면 소자인줄 알아야 되고, ‘너는 내가 목마를 때 물 주지 않았다.’ 하시면 물주지 않는 사람 만들어서 그렇게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럼 그것이 감사함으로 받아져야 돼요. 집사님처럼. 이러한 생각이 늘 감사함으로,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믿어집니까? 안 믿어집니까? 안 믿어지죠. 왜, 나한테 행함이 나오기 때문에. 내가 나름대로 선과 악을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이 나한테 있다 이 말이죠. 끝으로 어려운 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자유가 뭐냐 하면 선택한 것을 선택하는 행위가 자유예요. 분명히 이거는 자유가 아니죠? 이건,ㅎ그렇죠? '너 뭐든지 먹어라.‘ 하고 3가지 내놓고 ’뭐든지 먹어라‘ 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결국 3가지 중에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선택된 것을 선택하는 것을 자유라고 주님께서 그렇게 해 버려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면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뭡니까? 자기 자유의지예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죽일 수밖에 없는 성질이 들어있어서 이건 자기가 사단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사단이 들어왔으니까, 예수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성질이 들어와서 결국 선택한 폭이 예수를 죽이는 쪽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한다? 그것은 니가 자유의지를 맘껏 행사한 걸로 본 겁니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죠. 자유의지가 있죠. 선택된 것만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인간이 생각하는 자유하고 이해가 안 되잖아요. 왜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나는 행할 수 있다.’라는 이 전체가 방금 ‘선택된 자만 구원받는다.‘라는 앞에서 이 전체가 뭐가 돼요? 이것이 죄가 되고 죽음이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들은 모든 인간을 뭐로 죽인다? 다 죽음 속에다 집어넣는 거예요. ’죽음 속에다 집어넣으려면 왜 만들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죽음 속에 집어넣어야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처음 이 땅을 시작한 것이 죽음부터 시작했다는 거예요. ‘아니 처음에는 천지 창조가 나오잖아요?’ 아니에요. 묵시적 세계에서는 창세전에 이미 죽기로 작정이 됐어요. 그러니까 그것이 처음 이예요. 천지 창조는 거기서부터 시작 이예요. 죽음에 다 집어넣기 위해서 죽음에다 다 집어넣고 거기서 피어나오는 죄일 수밖에 없는 개념들이 튀어나오게 된 겁니다. 사단의 도움으로. 마귀의 도움으로 튀어나와서 그 모든 것을 다시 뭐로 집어넣는다? 죽음에서 다시 죽음으로 집어넣어버려요. 죽음에서 뭐가 나왔다? 창조가 나와서 그걸 다시 죽음으로 집어넣죠. 그러면 이 노선은 역사적 노선이잖아요. 그러면 묵시 노선은 뭡니까? 죽음에서 창조가 되죠. 요 창조하고 요 창조하고 다르죠. 요 창조는 어디 안에서? 천국을 이야기하고, 죽음에서 죽음이 나오는 이건 뭐가 됩니까? 이건 지옥이 되는 겁니다. 죽은 데서 창조가 되고, 죽은데서 죽음이 되고. 그렇다면 주님께서 모든 무덤에 있는 자를 다 살려내고 그 다음에 악을 행한 자는 악의 심판을 또 선한 자는 천국의 보상을, 생명을 주는 식으로 심판을 해버리는 것은 바로 주님이 생각하는 예수 안에 있지 않은 것은 뭐한다? 전부 다 발로 차버리고 배제하는 식으로 창조를 이뤄내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이 이게 중심이 돼 버려요. 그럼 바깥에 뭐가 있습니까? 예수 바깥에는 따로 있는 거예요. 우리 생각에는 이 둘을 합해서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을 안 해주시면 되겠다는 게 주님의 생각입니다. 왜, 주님의 관심사는 예수 안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제발 예수 바깥에서 따로 모아서 ‘하나 되겠다.’ 하는 것은 우리가 죄인 돼서 나오는 철학적인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주님께 전혀 도움이 안 되고 복음에 도움이 안 돼요. 사도바울이 철학자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증거 한 사람이죠. 제발 고 한계점, 고 한계에서 머물러 줘야 돼요. 자꾸 파고 들어가면 ‘하나님, 예수님은 누가 만들었나,‘ 이런 식이 돼요. 그러니까 여기서 성경 전체 중심은 예수님 중심이지 예수 바깥에까지 다 합쳐서 하나님 중심이라고 마치 통합시켜서 보는 것이 세상을 넓게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뭐냐 하면 마귀가 그 짓을 시켜요. 뭘 희석시키기 위해서, 뭘 삭제하기 위해서 그렇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예수 중심으로 보는 그것을 삭제시켜서 신 중심으로, 처음에 원했던 내가 여기 있음에서의 신, 자꾸 신 중심으로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보다, 예수님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악마의 본성이 또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우리는 거기서 스톱!!! 해서 우리는 예수님 중심으로만 생각하면 되지, 더 이상을 생각하는 것은 그건 안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말씀으로 이렇게 새롭게 창세전에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니 우리는 그냥 놀랄 뿐입니다. 내가 구원 받고 싶어서 구원 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찾아와 주셔서 천지 만물의 모든 것이 주님 중심이라는 걸 알려주셨사오니 이러한 사실만으로 감사하고 어떠한 시련과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주께서 예수님의 피를 흘려주심을 우리는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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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가락교회110811요한계시록13장-(묵시의 숫자화)-20강b-(이 근호목사).hwp (64.0K), Down: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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