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묵시의효험(겔12;21-25)이근호130403

아빠와 함께 2013. 5. 14. 07:44

34강-에스겔12장 21-25(묵시의 효험)13040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2장 21절에서 2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5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2:21-2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이스라엘 땅에서 이르기를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응험이 없다 하는 너희의 속담이 어찜이뇨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속담을 그치게 하리니 사람이 다시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 속담을 못하리라 하셨다 하고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날과 모든 묵시의 응함이 가까우니 이스라엘 족속 중에 허탄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이 다시 있지 못하리라 하라 나는 여호와라 내가 말하리니 내가 하는 말이 다시는 더디지 아니하고 응하리라 패역한 족속아 내가 너희 생전에 말하고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전해지느냐 하면 패역한 족속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패역한 족속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어떤 특정대상을 향하여 패역한 족속이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발견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패역하다, 나쁘다’라는 평을 받는 사람들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섬겼기에 그런 나쁜 평을 받는가를 캐치해 내야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패역한 족속아.’라는 저주의 말을 듣는 자들이 어떤 사람인가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효과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했으면 빨리 이루어져야지 왜 안 이루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이 신뢰성이 없고 가짜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 아주 패역한 족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그 하나님께서 진짜 말씀대로 일했다는 증거를 손에 쥘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 굉장히 많잖아요. 기도 해 봐야 효과도 없는데 기도를 뭐 하러 하느냐, 이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굉장히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될까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제일 좋습니다. “효과 얻어서 뭐 할 건데요?”

사람들이 자기 장래에 대해서 자꾸 기대를 하고 그것을 미리 알려고 하는데 그것을 알아서 뭐 할 건데요? 사람들이 자기 장래에 대해서 알겠다는 말은 사람들이 지금 알고 있는 현실에 남들은 모르고 자기만 아는 미래의 정보를 여기에 미리 합치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지금의 현실을 자기가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미래까지 장악하게 되면 그 순간만큼은 자기가 전지전능한 신이 되는 겁니다. 어느 주식 값이 빨리 오른다든지 로또 당첨번호가 꿈에 나타나는 것이라든지 신이 미리 그 번호를 알려주면 좋겠다는 것, 하나님이 전능하니 그런 번호를 미리 알려주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는 거예요.

로또 복권을 샀는데 발표하는 금요일 밤에 돼지가 여덟 마리가 나타났는데 그것들이 설쳐가면서 숫자가 배에 쓰인 채로 3, 27, 34, 이런 식으로 쑥 지나가더라는 말이지요. 그것을 얼른 적어서 그대로 했더니 1등 당첨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돼지는 신이 보낸 것이고 신이 보낸 이유는 나보고 로또 1등 당첨되라고 준 것이고 내가 왜 1등에 당첨되어야 하느냐하면 평소에 내가 1등 당첨될만한 착한 존재기 때문이다. 그런 결론들이 나오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 기대를 건다는 말은 뭐냐, 내가 만든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이 동의했다는 거예요. 나는 지금 이런 현실을 생각하는데 하나님도 동의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응한다는 것은 반드시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심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 28장에 보면 거기에 하나냐라는 거짓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하나냐라는 거짓선지자가 누구와 대비가 되느냐 하면, 그 당시 예레미야 선지자와 대비가 됩니다. 예레미야 28장장에서 예레미야가 나무멍에를 매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너희들은 바벨론 왕에게 치욕스럽게 멍에 매는 식으로 포로 잡혀 간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씀에는 반드시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너는 저주받고 심판받고 너희의 죄값을 치러야 된다, 는 부정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거짓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예레미야에 반발하면서 희망적인 내용을 담는 거예요. 듣는 사람들이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그렇지요. 왜, 비록 지금 현실은 절망스럽지만 언젠가는 매끈하게 원상복귀 되면서 내가 뜰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지금의 어려움을 견딜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거짓 선지자들은 절망, 절망, 부정적으로 나간 것이 아니고 ‘조금만 참으세요. 언젠가는 뜹니다.’ 하는 식으로 미래 관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것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당신은 반드시 언젠가는 성공하십니다.’라고 누가 좋은 희망을 안겨줄 때 그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당신 하는 행세를 보니 석 달 후에 반드시 멸망합니다.’ 한다면 이것은 모든 인간이 다 싫어해요. 미가야 선지자가 400대 일로 거짓선지자들하고 붙을 때 미가야 선지자의 말은 간단합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거예요. “이번 전쟁에서 왕은 집니다.” 아주 부정적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왕의 월급을 받고 사는 모든 선지자들은 “왕이여, 반드시 성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기에 우리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동원시켜서 성공한다고 한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함께 하기에 우리가 멸망 받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기에 우리는 저주받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나는 예수 믿어서 구원받고 싶습니다.” 그런 이야기 들으면 아주 혼란이 와요. “당신이 뭔데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야 됩니까?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당신이 구원을 받아야 될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지 이유를 대보세요.” 이것 이유 댈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무조건 구원 되어야 돼, 라는 데서 시작해서 성경 전체를 보고 해석을 하니까 이것은 옳은 해석이 될 수가 없어요. 제가 간단히 했잖아요. 모든 해석은 하나님의 언약부터 해석한다. 그 언약의 중심에 예수님이 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주되기 위해서 일어난 일이다.

그렇게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전부 고개 끄덕이면서 “믿습니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입니다.” 하거든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구원 받아야 되겠습니다.” 방금 제가 한 말의 취지를 이해를 못하고 있어요. 내가 구원받아야 된다는 내용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왜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꼬깃꼬깃 숨겨놓고 안 들키는 척 하면서 품고 있느냐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주이십니다.” “참 좋은 말이야.” “세상은 주의 뜻대로.” “참 좋은 거야. 내가 저것 가져야지. 저것 믿어야지.” 결국 주님께서 주가 되신다는 그 사실을 내가 가져야 될 이유가 뭡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내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로 하여금 일하게 하십니다.”

출발점이 나 잘되기 위해서 이 말씀 저 말씀 믿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도리어 우리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터뜨리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를 사용해서 언약이 언약대로 그 내용을 터뜨리고 있는 겁니다. 오늘 우리 어머니께서 이사를 했는데 “어머니, 이사했습니다.” “내가? 언제?” 정답은 “주께서 이사케 하셨습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하는 말이 필요치가 않아요.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마을에 글을 올렸지만 정말 구원받은 사람은 “주여,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오히려 반문을 해야 돼요.

“왜 저를 구원하셨습니까? 그것도 저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로만 저를 구원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반문을 해야 돼요. 되물어야 된다고요. 이것은 뭐냐, 내가 알고 있던 현실에서는 내가 주인공이거든요. 우리가 미래를 궁금해 하는 것은 미래에도 내가 주인공이기에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이것저것 챙기려고 미래를 미리 알았으면 좋겠다고 나오는 거예요. 숫자 써진 돼지가 지나갈 때 그것을 받아 적어서 로또 1등 당첨되고 싶은 것은 지금 내가 로또 1등 당첨되고 싶어서 그래요. 남이 아니고 주님이 아니고 바로 지금 내가, 지금 내가 부자 되고 싶은데 미리 알려주시면 그 숫자대로 해서 로또 당첨되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

로또로 예를 드니 이것이 미신처럼 들리십니까? 교인들도 많아요. 예배당 짓고 주차장 넓히고 교육관 지어야 되는데 교인들이 복권을 사서 기도한다고요. 이렇게 해서 자기 기도발의 능력을 시험도 할 수 있고 당첨되면 돈도 되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믿음 좋다는 칭찬도 받고, 이렇게 세 가지 이득을 얻지요. 자기가 노동해서 헌금 하려면 아깝잖아요. 로또 만 원 짜리 사서 10억으로 뻥 튀기 해서 그것 가지고 헌금하면 주의 일도 하고 좋잖아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자신의 지금 현실을 더 확장시키려는 수작으로서 집어넣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말씀의 효험, 효과가 있습니까? 기도발의 능력이 있습니까?” 라고 점쟁이 점치듯이 하는 거예요. 옛날 어떤 마법사가 있었는데 이 마법사가 순진한 아가씨를 꾀어서 어떻게 해보려고 마법사라는 직업을 이용합니다. 이 마법사는 본인이 알아요. 자기의 마법은 전부 눈속임이고 마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신기하다, 신기하다 하니 그런 마법사 직업을 가지고 그동안 밥 먹고 살았던 겁니다. 하루는 순진한 아가씨 꾀어서 결혼이라도 해 볼까 싶어서 아가씨에게 마법으로 사기를 칩니다.

“아가씨, 제가 땅에 원을 그릴게요.” 원을 그렸습니다. 원을 그려놓고는 “이 세상에 어떤 재앙이 오더라도 이 원 안에만 들어오면 아무 재앙이 없습니다.” 벌써 그 순진한 아가씨한테 재앙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이 이것이 엉터리라고 느껴도 뭔가 재앙이니 벌이니 하게 되면 왠지 찝찝해요. 그래서 거짓인지 알면서도 좋은 게 좋은 것이라 싶어서 그 말을 듣게 되어 있어요. 그게 사기꾼들의 특징이거든요. 마법사가 원을 그리면서 “제가 원을 그려 놓을 것이니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질 그 때 당신이 이 원안에 들어오면 살아남습니다.”라고 땅에 원을 그리는데 그 때 진짜로 벼락이 쳐 버렸어요.

자, 이때 누가 놀랐겠습니까? 순진한 아가씨가 놀라겠습니까, 마법사 본인이 놀랐겠습니까? 마법사 본인이 놀라버렸어요. “신이시여, 이것은 아닙니다. 내가 속이고 있는데 왜 진실로 내 말 그대로 하십니까? 주여, 이것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은 눈속임이고 마술에 불과한데 주님께서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하지요.” 그때부터 그 마법사의 마법은 끝났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마법사라는 직업을 유지할 수가 있었어요. 속이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실제로 벼락이 치고 천둥이 쳐서 옆에서 나무가 불이 나고 부러질 때 얼른 둘 다 원 안에 들어가서 다 살았어요.

그게 산 것일까요, 죽은 것일까요? 마법사의 직업은 그 다음부터 끝났습니다. 얼굴이 하얘지면서 “신이시여, 두 번 다시 이런 짓 안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이, 마법사가 그런 짓을 몇 십 년 동안 해 먹은 것은 노림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 노림수란 내가 항상 주인공이 되는 현실이라는 것을 자기가 자작극으로 만든 겁니다. 인간이 보는 현실은 전부 다 자작극이에요. 우리가 드라마를 보고 재미있어 하는 것은 내가 조작한 현실보다 더 멋있어 보이기에 그것을 보는 거예요. “에이, 드라마는 다 거짓말이야.” 하면 작가가 하는 말이 “너는 거짓말 아니야?”

드라마의 내용이 거짓말인 것이 분명한 것처럼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하는 우리도 매일같이 우리의 현실을 조작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누구냐, 항상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세상이 움직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개성공단에 입주했는데 정부에서 반대해서 돈만 털어먹고 못하게 된 사람들, 지금 개성공단이 어렵다고 하니 그 소리 듣고 얼마나 기분 좋아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할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현실을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자기 맘대로 뽑아서 조작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9장 39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이 본문에서 진짜 어려운 이야기는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한다는데 내가 보지 못한다고 이야기할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소경도 나름대로 본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만든 현실은 전부 다 가짜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진짜 현실을 보여주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현실이 현실이라 하는 사람은 너희가 생각도 못한 엉뚱한 현실을 너희에게 안겨줄 것이다, 그런 뜻이거든요. 차이가 이거예요. “선지자야, 왜 네 말에 효험이 없느냐?”라고 하는 것은 내가 보고 있는 현실에 뭔가 더 보태라는 이야기에요.

내가 보고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동조해야 그것이 좋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냐, 네가 보고 싶은 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네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게 방금 읽은 소경이야기에요.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이 현실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장 핵심적 내용은 그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했고 결국은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를 확보하고 싶은 거예요. 병을 고친다든지 귀신을 쫒아냈다든지 뭔가 모세처럼 하늘에서 만나를 내린다든지.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예수님이 보여주기만 하면 예수님을 믿을 용의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너희들의 현실, 어떤 정황을 자꾸 보라고 하는데 너희들이 고대하는 메시아가 바로 나라는 것, 바로 ‘나’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 말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사람들은 내가 여기 있고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 나를 놀래키는 기적, 예상 못할 엄청난 기적, 그걸 지금 우리는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정작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나다 나! 모르겠어? 내가 왔단 말이다.” 예수님 본인을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들은 예수님이 가지고 온 선물 보따리를 그리워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정작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 내가 바로 하나님이야.” 이렇게 나왔다는 말이지요. “너희들이 그렇게도 고대하는 하나님이 바로 나야.”

이렇게 하니까 어느 인간이 믿습니까? 제자들도 안 믿었는데 누가 믿겠어요? 말씀의 효험은 하나밖에 없어요. “나야 나! 모르겠어? 내가 하나님이야.” 그게 효험입니다. 그게 전부에요. 사도행전 9장 4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먼저 사울에게 대화를 걸어왔어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할 때 사울이 하는 말이 “주여 뉘시오니이까?” 사도바울이 그렇게도 보고팠던 그 하늘나라, 모든 말씀이 마지막 종결된 그 현상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주님 쪽에서 먼저 자기를 찾아와서 “나다, 나!” 이겁니다. 어릴 때 부모와 헤어져서 고아원에서 자란 어떤 아이가 있어요.

그 애는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 아버지가 오면 빌라에 온갖 살림살이에 다 사주실 것이다.’ 이렇게 기대한 거예요. 남들 저렇게 잘 사는 것처럼 아버지가 오시면 나도 잘 살게 해주실 것이다, 라고 할 때 거지꼴이 되어서 나타난 아버지가 하는 말이 “얘야, 내가 네 아버지다.” 그 애가 기대한 것은 좋은 집, 은행의 현금, 이런 것을 원했는데 정작 나타난 것은 아버지 본인이었습니다. 우리가 뭘 더 원하십니까? 사도바울이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어요. 냉장고나 텔레비전, 이런 것들 하나도 없어도 돼요. 모든 것을 가진 거예요.

그동안 자기가 생각했던 현실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실 속에서 내가 어떻게 잘 되는가, 이것이었는데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시간과 공간도 붕괴되어 버렸어요. 시간과 공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님과 함께 있으면 그것이 천국이지요. 그게 영생인데요.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내가 너를 구원했다고 주님께서 먼저 다가오시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부자 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니까 주님께서 “나야 나! 나라니까!” 그것을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풀이합니다. ‘이미 죽었던 분이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해요. 죽었던 분이 우리를 구원하실 분인데 우리가 살아 있다고 여기기에 그 예수님의 어떤 말도 알아먹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왜, 우리가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죽었던 분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살았다고 여겼어요. 사울이 예수님 만났거든요. 사울이 예수님 만난 것이 AD 35년이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난 뒤입니다. 그러면 사울이 예수님을 만났다 하는 것은 이미 죽어버린 분을 만난 거예요. 구원은 그렇게 성사되는 겁니다. 내가 살았다고 여길 때 내가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만날 수 없는 죽음 속에 있는 그분이 죽음을 뚫고 다시 나에게 찾아와서 너 때문에 죽은 내가 바로 나다, 하고 구원자로서 찾아옵니다.

그 순간 우리는 내가 살았다는 것은 내가 조작한 현실에 불과하고 실은 나는 산 것이 아니고 벌써부터 죽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알게 된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갈 2:20) 내가 죽었습니다. 이제 산다는 것은 예수님 알기 전의 그 산다는 용어를 집어넣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죽고 난 뒤에 살았다는 그 용어를 우리에게 적용시키지요. “네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가 죽고 이순신장군이 죽고 강감찬이, 그리고 세종대왕이 죽은 것처럼, 우리 아버지가 죽은 것처럼 예수도 똑같이 죽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죽었다고, 로마의 군병의 창에 죽었다고 여기는 그 모든 자들 가운데서 얼마에게 “내가 안 죽었거든. 난 이렇게 죽었다가 부활했거든.” 하고 찾아오실 때 그동안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서 만든 시간과 공간개념은 잊으셔도 좋습니다. 잃어버려도 좋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 그 말은 나무라는 말이 아니고 “사울아, 너 구원받았다.” 그 이야기입니다. “기뻐해라, 사울아. 내가 너를 찾아왔기에 너는 구원 된 거야.”라는 그 소식이에요. 어떤 책망을 받아도 괜찮아요.

“너는 천하에 나쁜 놈!” 이런 책망을 받아도 괜찮아요. “너는 나쁜 놈, 죽일 놈, 지옥가야 돼.” 어떤 소리도 괜찮아요. 그 자체가 이미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징표가 되는 겁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귀한 것은 없는 것으로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식으로 예수를 알게 되면 예수님이 좋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가져다준다는 것들, 로또 당첨 숫자라든지 미래에 내가 어떻게 된다든지 우리 가정이나 우리 교회가 앞으로 5년 뒤에 어떻게 잘 되는가, 지금 내가 살았다고 여기면서 계산해 나가는 어떤 아름다운 미래상, 그런 것들을 은근히 소유하고자 하는 음흉한 생각이 마귀의 생각이죠.

그것은 전혀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불신자의 티를 팍팍 내고 있는 겁니다. 묵시의 효험, 그것은 심판이었습니다. 에스겔뿐만이 아니고 예레미야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반드시 바벨론에 포로 잡힐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나오면 이 나라가 혼란스러우니까 말좀 가려가면서 좀 조심스럽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 권력자들이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에 대해서, 그들의 경망스러움과 막 쏟아내는 계시에 대해서 조절해 줄 것을 부탁했지요. “당신이 그런 식으로 해버리면 질서가 어지럽혀지고 단결이 되지 않습니다. 말 좀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참된 선지자에게 이야기했지요.

거짓 선지자들이 굉장히 합리적이고 온유하고 윤리 도덕적이고 사리분별이 있는 듯이 보이지요? 하지만 그들이 노리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만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져다주는 것들을 은근히 노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한 조작된 현실을 기어이 놓고 싶지 않는 거예요. 이 현실은 내가 보는 겁니다. 자기가 계속 그 현실을 보고 있기 때문에 정작 보여주시는 낯선 현실에 대해서 그들은 전혀 가려져 있는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만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양과 염소가 나오거든요. 양은 천국가고 염소는 지옥 갑니다. 그럴 때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입니까, 라고 하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면서 “바로 이 소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소자, 얼마나 우리가 쉽게 무시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믿고 난 뒤에 허황된, 깜짝 선물, 너무 이런 것들을 원했기 때문에, 목마르고 헐벗고 옥에 갇히는 쪽으로는 전혀 생각을 안 해봤지요. 우리 자신이 죽어도 마땅한, 그래서 살아야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주님의 소자들이 눈에 띕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 건희 회장보다 더 부요한 사람이라는 것이 눈에 띕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가 가난하나 사실은 부요한 자요 내가 없는 것 같아도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너희 눈에 내가 죽어 보이나 사실은 내가 살았다.”(고후 6:9-10) 사도바울은 모든 것을 이미 말씀의 효험 속에 축축하게 젖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왔으면 다 온 것인데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 무슨 선물 보따리가 있는지 이리 저리 살피면서 만족스럽지 않을 때는 짜증내고 원망만 해 왔습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무너지게 해주시고 그 무너지게 하는 능력, 예수님에 의해서 무너졌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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