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묵시적 보좌1(이근호)130103

아빠와 함께 2013. 5. 14. 07:46

가락교회-다니엘 7장9(묵시적 보좌)130103-11강a -이 근호 목사

제 11강a

다니엘 7장 9절 할 차례입니다. 7장에 보면 역시 다니엘이 환상을 보죠. 꿈을 꾸고 환상을 보는데 이 환상은 개꿈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통해서 앞으로 세상 스케줄을, 계획을, 세상은 이렇게 설계돼서 진행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좋다고 할 게 아니고, 다니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하나의 지도처럼, 네비게이터처럼 사용한다는 이건 너무나 황공스럽기도 하고 뭐 단적으로 말해서 두렵죠. 천지를 만드신 분이 내가 뭔데, 날 가지고 세상을 드러내는데 날 앞장세운다는 그러한 위치에 있다는 게 얼마나 황송스럽고 영광스러운 동시에 본인은 두렵습니다. 왜 두렵냐. 혹시나 내가, 내 행동이 하나님의 계획을 위반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유튜브 하면서 저는 생각을 했는데 언젠가는 이야기할 거예요. 우리 구원의 방해자는 우리자신이라는 사실을 언젠가 강의를 할 겁니다. 내 구원받는데 가장 방해되는 게 뭐냐, 우리 자신 이예요. 세상을 향한 그 집착, 세상에서 성공해 보겠다는 그 욕망이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내도 우리는 자꾸 하나님 손을 떨치면서 나는 그쪽으로 안갈 거야, 나는 이쪽에서 성공할 거야, 하는 고집이 있잖아요. 남 핑계 댈 필요 없어요. 우리 자신부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모독하죠.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세상에 대해서 불만 있다는 것은 곧 누구한테 불만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에게 불만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서 불만을 갖게 되는 거예요. 세상에 불만이 있다. 따지고 보면,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것에 대해서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그거는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 십자가 졌는데 ‘흥, 그게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느냐?‘ 십자가 자체를 모독하는 사람이 바로 매일같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모독하는 당사자가 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실 때 간단히 보는 방법이 이거예요. 우리 입장에서는 딱 이겁니다. ‘도망쳐라’ 이게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그랬잖아요.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가 와서 롯에게 지시한 게 뭡니까? ‘도망쳐라’ 그것도 ‘무조건 도망쳐라’ 뭘 하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그리고 내가 칠 테니까 무조건 빠져라 이 말이죠. 이게 딴 게 아니고 이게 바로 ‘묵시문학’입니다. 묵시적으로 계시를 설명할 때 그 취지는 이겁니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내빼라.

그러면 이 묵시문학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하나님의 묵시적인 계시를 이해 못하는 사람은 이렇게 나올 겁니다. ‘내빼서 어디로 가는데?’ 이러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여기서 각종 교단들이 생기죠. ‘우리 거룩한 공동체 쪽으로 내빼세요.’ 라든지, 기도원에 가시면 된다든지, 아니면 노아방주를 만들어서 미리 종말에 대비하는 준비물 있잖아요. 손전등, 비상구급약, 1년 치 식량비축, 음용수, 먹을 수 있는 물 준비, 현재 미국에서 유행입니다. 거기다 혹시 이웃이 달라고 쳐들어오기 때문에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자동기관단총, 여러 사람을 빠른 시간에 죽일 수 있는 단발용이 아니고 자동소총 준비해서 ‘어디 내가 준비한 거 빼앗으려 하면’ 쏠 수 있는 그거, 무전기 등을 가지고 버티면 분명히 마지막 종말에는 핵폭탄이 터질 텐데 핵폭탄이 터지고 난 뒤에 전 세계가 멸망하고 난 뒤에 방사능이 없어지는 기간을 최소한 3년 잡고 3년간 땅굴 속에서 버티면 그때는 부동산 등기할 필요 없어요. 다 죽었으니까. 뉴욕의 건물 있잖아요. 그거 전부 다, 자연에서 새 소리 다시 들릴 것이고, 계곡의 물은 흐를 것이고, 로키산맥의 눈은 녹아서 먹을 수 있는 물이 될 것이고, 완전히 인디안 세계처럼 되니까 전 세상이 누구 것이 돼요. 조금만 참으면 되니까. 그렇게 피할 것이냐, 그렇게 되면 하나의 종교단체가 되죠.

기도원으로 갈 것이냐, 어떤 사람은 감람산, 그쪽에 메시아가 재림한다고 하는데, 그쪽은 비좁아요. 왜냐 하면 코란에 보면 마지막 때 예루살렘에 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지금 이슬람 거거든요. 그게 황금 돔으로 입혀져서 지금 유대인이 못 들어가고 기독교인이 못 들어가요. 이슬람 사람만 들어갈 수 있어요. 코란에 의하면 거기에 메시아가 온다고 이슬람 경전에는 메시아가 와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메시아가 오죠. 유대인들은 거룩한 곳 감람산에 선다 하죠. 지금 비좁다니까요.

점점 더 사회가 악화되고 흉흉해지면 너도 나도 보따리 싸서 예루살렘으로 다 기어들어올 거예요. 그러면 땅 값도 오르고 거기 장사하는 사람, 비둘기파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디로 피합니까? 피할 데가 없어요. 분명히 도망치라 했는데 피할 데가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선 피할 데가 있었죠. 왜냐, 그곳은 한정적이니까. 불 심판이 그 지역만 치니까.

그런데 베드로후서에 보면 불 심판이 그 지역만 치는 게 아니고 노아 홍수 물이 잠긴 범위만큼 불이 내려요. 그러면 어딥니까? 다들 피해야 돼요. 옛날에는 물로써 세상을 몽땅 심판했죠. 노아 홍수 할 때 어디로 피했습니까? 피할 자리는 없었고 피할 자리는 하나님 쪽에서 언약으로 만들어 준 그곳에만 피할 수 있어요. 그래서 언약으로 구원입니다.

언약을 한국교회는 모르잖아요. 기도원에 가야 되는 줄 알잖아요. 그게 아니고 언약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심판을 내릴 때는 피할 곳 주시고, 심판을 내려버리거든요. 그래야 심판받을 사람과 구원받을 사람이 차이가 분명히 뚜렷하게 되니까. 구원받을 사람은 방주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방주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노아 같은 경우에.

마지막 때는 뭐냐, 마지막 때 현상이 불로 왔을 때는 구원을 어떻게 받는가? 예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누구든지 누구 이름을 불러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10장 13절인데, 그 뒤의 말씀을 보면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voice, 음성을 내서 ‘주여, jesus christ, 예수,’ 이런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 그 뒷부분에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주 예수 이름을 부르라고 분명히 언급을 해놓고는 그걸 부를 수 있는 믿음은 하늘에서 줘야 된다는 겁니다. 이건 마치 물 홍수 나기 전에 피할 곳은 방주라는 그 아이디어가 하늘에서 제공해줘야 돼요. 도망쳐라, 피하라. 하는 그 장소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다 작살을 내는데, 마지막 때는 공간적으로 도망쳐라 해도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대로 옛날 노아 홍수가 노아언약이라면 지금은 무슨 언약이냐 하면 새 언약으로 빠지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 언약은 어떻게 빠지느냐 말이죠. 그건 간단해요. ‘도망쳐라’ 해놓고는 도망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요? 없어요? 없고 방주도 없고 예배당도 소용없고 아무것도 없죠. 바로 ‘도망쳐라’ 해놓고 ‘갈 데 없네!’라는 그런 마음을 품어야 새 언약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어디 가봐도 대책이 없고, 여기 요한계시록 8장 마지막에 보면,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독수리가 썩은 고기를 보잖아요. 모여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였으니 그게 썩은 고기예요. ‘우리 교회다. 이제 마지막 때는 오신단다. 모이자.’하면 그건 썩은 고기가 모인 거예요. 독수리가 임해서 뜯어 먹혀도 당연합니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그때만 뭐가 귀하다? 십자가, 비로소 십자가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돼요. 이걸 평소에 해야 되는 거예요.

평소에 하려면 우리를 뭐로 보라는 말 이예요? 그냥 고기가 아니고 썩은 고기예요. 어디 도망칠 데 없는 그런 한계를 갖고 있는 고기, 고망치나 안치나 소용없음을 깨닫는 거예요. 더 이상 피해 갈 곳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위엣 것을 바라보라, 그 뒤의 말씀이 뭐냐,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많은 의미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너 자신을 기대하지 마. 이런 뜻도 포함되어 있겠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말은 사실 땅엣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땅엣 것을 생각하는 게 아니고, 땅에서 내가 얼마나 잘 나가는가 그것과 결부해서 생각하잖아요. 자, 땅이다. ‘나 무시하지 마. 땅에서 이만큼 잘 나가.’ 그런 것을 생각할 때 나를 생각하는 것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3장 2절에 보면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만 이야기한다면 교회 오는 교인들 다 봐요. ‘하나님, 오늘 교회 나왔습니다. 위를 보고 있습니다.’라 하는데 그 뒤의 말씀, 뭘 생각하지 말라?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건 미친다니까요. 오늘 유튜브 강의를 했는데 교회 일도 땅의 일 이예요. 주님 생각하러 온 게 아니고, 주님 생각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교회를 어떻게 하면 키워보고 유지해 볼까 하는 쪽으로 결국 돌아서게 돼 있어요. 왜냐 하면 목사 입장에서는 큰 교회 당회장 할 때 나는 이 땅에서 내가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역시 나는 가치 있는 인간이야, 나 없이는 목회가 안 돼.’

자기 자신이 이 땅에서 내 자신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가를 생각하는 그거 중에 하나가 목회자가 자기 교회에 대한 집착과 애착을 갖고 있는 것, 그것도 하늘 위를 보는 게 아니고 땅엣 것을 생각하는 겁니다. 거기서 제가 강의에서 했죠. 목사는 목회하면서 망하고, 백수는 백수하면서 망하고, 의사는 의사 짓하면서 망하고 항상 하나님께서 어떤 직업을 준 것은 주부는 주부로 망하고 그걸 통해서 우리는 결국 마땅히 망해야 된다는 사실, 그럴 때 비로소 묵시라는 이 계시가 우리한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 세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도행전에도 나오고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설교를 할 때 설교내용이 나오거든요. 스데반이 설교할 때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설교내용이 나와요. 이렇게 나옵니다. 간단해요. 어두움에서 죽었다가 부활(십자가)하셨다. 이 이야기예요. 이 세상 전부를 뭐로 봅니까? 어두움으로 봐요. 요한복음에 보면 이 세상을 작심하고 어두움으로 봐요. 그리고 어느 정도로 어두움이냐, 본인은 몰라요. 그런데 빛이 왔는데 빛을 빛으로 못 알아보니까 어두움이다 이 말입니다. 어두움이 빛으로 왔으매 깨닫지 못하더라. 그러니 어두움 맞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세상이 전부 다 어두움이다 말이죠. 여러분, 장독이 있으면 눈 올 때 장독에 눈이 소복이 쌓이잖아요. 제가 우리 옥상에 올라가서 장독에 보니까 눈이 와서 오랜만에 사진 찍으러 올라가 가보니까 장독이 4개 있는데 눈이 소복이 쌓였어요. 그러고 보니까 모든 인간에게는 전부 다 죽음이 소복이 쌓인 것처럼 느꼈어요. 어두움이, 하아, 직업이나 남녀노소 나이와 상관없는 거구나, 모든 인간은 어둠이 소복이 쌓여서 죽음의 무게에 눌려서 사는구나. 눌리면 짜브러지죠. 뭐 그냥. 짜브러지면 나중에 나이 들면 허리 아프다, 관절이 아프다, 쑤신다 하잖아요. 내려앉는 이 중력을 뼈의 분자 구조가 당해내질 못해서 이게 함몰되는 겁니다. 칼슘 때문에 구멍 생긴다 하잖아요. 인간의 뼈는 중력을 지탱하게 돼 있는 거거든요. 그걸 감당 못하니까 짜브러지고 주저앉아버리죠. 촌에 일 많이 한 할머니 보세요. 완전히 허리가 구부러져 있죠. 아침부터 눈 떠서 앉아서 일 하다 보니.

그래서 성경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정을 누구보다도 우리 사정을 더 잘 아셔서 그 다음에 묵시적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이제 묵시가 별로 어렵지 않죠? 묵시라 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눈앞에 코앞에 보이는 걸 가지고 설득하는 게 묵시가 아니고 ‘아예 너는 몰라, 내가 알아, 딴 소리 하지 마, 이거야.‘ 하고 묵시적으로 대규모적으로, 전체적으로 또는 보편적으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해결책, 새 언약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 앞에서 우리가 혼자서 자기 일 한다는 것이 이게 무의미 하다는 것, 그래서 개인적인 일보다도 눈을 전체를 보여줄 때는 전체를 따라가라는, 전체를 같이 보는 게 좋은 거예요.

그 전체 중에 하나가 다니엘 7장 9절 오늘 본문 합시다. “내가 보았는데” 내가 보았는데, 다시 한 번 언급하겠습니다. 잊어버리니까, 역사가 역사계시가 아니고 묵시 계시일 때는 ‘도망쳐라“ 위로 도망쳐라, 어떻게? 네가 도망칠 수 없는 죄인이라 할 때 비로소 그동안 안 보이던 위가 보일 것이다. ’난 역시 잘났어. 난 훌륭해, 난 가능성 있어.‘ 하면 절대로 위를 볼 수 없습니다. 자기 잘난 자기 자신을 보기도 바쁜데 뭘 위를 봐요?
 
그런데 망가져도 너무 망가졌어. 완전히 이제는 자기도 꼴 보기 싫어. 예수님처럼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정도 수준 돼 버리면 뭡니까? 아버지의 그 다음 준비된 약속을 보죠. 나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산다는 그 약속을, 주님을 믿게 되죠. 우리가 이 땅에서 죽었지만, 오늘 강의에서 우리는 죽으면 하나의 씨앗처럼, 종자처럼 사용해서 우리를 부활을 이루는 종자로 우리를 집어넣어 버립니다. 우리는 죽어가면서 죽어가는 그것이 부활의 씨가 되는 쪽으로 사는 거예요. 부활이라는 놀라운 드라마에 우리가 죽음이라는 엑스트라로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죽음은 사실은 무가치한 게 아니에요. 하나의 역할을 맡은 겁니다. ‘아, 세상은 어두움이고 나는 죽음밖에 없어.’라는 대사를 해줘야 부활의 효과, 부활의 능력은 그걸 종자로 삼아서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는 부활을 만방에 증거 하는 계기로 삼는 거예요. ‘너 뭐 믿어?’ 하면 ‘나는 죽었다가 살아난 부활 믿어.’ 되잖아요. ‘너 뭐 믿어?’ 하면 ‘돈 벌어야 되니까 돈 믿어야지 뭘 믿겠노.’ 이러면 돈은 부활이 아니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지금 일을 안 하시는 게 아니고 일을 하셔요. 하시는데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실망과 좌절을 항상 있게 만들어서 위를 보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데 그게 성도에게만 해당되고요. 성도 아닌 사람은 도저히 하나님의 그러한 일에 동참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 화가 나서 뿔따구가 나서 동참을 하지 못합니다. ‘에이 씨, 예수 믿는 거 이제 그만 믿으련다. 이제 교회 믿을래, 역시 나는 교회 하는 게 갑이야.’ 자기 교회가 자기를 대신하고 대체하고 대체물로 자기영광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유대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안 믿으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했죠. “너희들이 날 안 믿는 것은 네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의 영광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예수란 모습으로 등장한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돼 있다. 그럼 예수 영광 보려면 우리 영광은 완전히 짜부러지고 박살나야죠. 그걸 우리가 할 수 없고 묵시의 말씀에 의해서 묵시적으로 그걸 진행시킵니다.

그 진행시키는 시작이 9절에 나오는데 봅시다.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가 좌정하셨는데”라고 돼 있죠. 그 다음에 “그 보좌는” 뭐 같고? 불꽃같고,  이건 어디서 많이 나왔던 멘트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에스겔에 나옵니다. 에스겔 성전이 불로 구성된 거예요. 재료가 불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앉아있다? 불 속에 앉아있어요. 그걸 제가 수요일 날 뭐라 했느냐 하면 포항제철 용광로가 했는데 불 속에 아래쪽은 불꽃이고 위쪽은 불에 벌겋게 단 쇠같이 계시다.

그리고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평소에 늘 왔다 갔다 했던 그 장소예요. 늘 성전에 왔던 이사야가 갑자기 어떤 순간에, 이런 걸 설명해야 되는데, 성전이 이렇게 있습니다. 이사야가 평소에 왔다 갔다 해요. 안에 당직하듯이 왔다 갔다 하는데, 공간은 공간 속에 자체적으로 흐르는 시간은 그냥 무심히 흐릅니다. 역사는,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역사고 시간은 흐름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어떤 사건이 터져버리면 역사가 이렇게 가는데 사건이 중심을 떼버리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여기서 카이로스, 어떤 때, 어떤 결정적인 지점 하나가 됩니다. 탁 치면 뭐가 끊어지느냐 하면 요 흐르던 시간과 이 시간이 끊어져 버립니다. 단절돼 버리죠. 단절돼서 이렇게 흐르다가 질이 달라요.

여기서부터 다른 노선으로 시간이 흐르게 되죠. 이건 그대로 이대로 가고. 그러니까 이사야 같은 경우에 이사야가 성전에서 뭘 봤습니까? 늘 평소에 왔다 갔다 했잖아요. 이 사무실 같은 경우에 늘 사무실에 왔다 갔어요. 왔는데 어느 시점에 갑자기 여기에 웬 천사가 와서 난동을 부린다 말이죠. 날개가 6개 가진 천사가 와서 천사가 와서 뭔가 보여주는데 보니까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 보좌에 찬송하는 모습이라 할 때, 도대체 이곳이 사무실입니까? 천국입니까? 천국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 천국을 보여주는 그 밑바탕 된 공간은 여전한 사무실, 그러니까 역사를 버리는 게 아니고 역사를 그대로 사용하시되 역사에서 점선으로 숨어있던 하나님의 진짜 나라가 역사라는 시간과 공간 바탕 위에 사건을 통해서 이걸 발현 된다, 보여준 거예요.

그러면 그 경험을 했다 합시다. 그 다음날 아침에 와서 그 천사를 기다립니까? 없어졌죠. 변화 산에 올라가 봐야 지리산이나 설악산이나 차이가 없어요. 똑같이 흙으로 돼 있다 말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거기서 예수님이 변화되고 엘리야 모세 있다면 그래서 진짜 베드로가 감격해서 뭐라 합니까? 묵시를 역사로 공간으로 붙들려 했습니다. ‘제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자, 초막 셋을 지었다 칩시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초막 셋을 짓게 되면 그 다음날 아침에 출근해서 변화 산에 올라가면 그 초막 셋이 앉아서 예수님하고 베드로하고 전부 다 고스톱치고 있습니까? 그래요?

진정한 교회라는 게 뭘까요? 예배당입니까? 아니죠. 사건의 사슬, 사건의 고리가 교회가 되죠. 진짜 숨겨놓은 사건의 고리! 아내가 밥 해주는 것이 주의 손길일 수도 있고, 언제 경우에? 사건화 될 때, 애가 아침에 학교에 가는 것도, 학원에 가는 것도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임하면 그것도 감사거리가 돼요. 이렇게 눈 오고 겨울이 뜨뜻해지는 것도 은혜를 아는 사람한테는 이것도 범사에 감사거리가 돼요. 모든 경우에.

그러니까 현장이라는 거, 이것을 사도바울은 어려운 말로 이걸 예수 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 안(in)이라 할 때 이걸 철학에서 2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범주론으로 이야기하겠고 실존으로 이야기하는데, 범주라 하는 것은 요 지우개하고 요 매직 사이의 안, 이렇게 두  개가 놓여있다 할 때, 공간으로 이렇게 할 때 범주예요. ~와 ~ 사이에 들어있다. 이럴 때 범주를 말하는데 그건 의미가 없는 거죠. 우리 집은 어느 아파트 몇 동과 몇 동 사이에 있다. 이건 늘 있을 수 있죠.

그런데 실존이라 하는 것은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부부간의 사랑을 이야기해 봅시다. ‘나는 너를 바라볼 때마다 아름다워.’ 그런 어떤 때가 있죠. 그런데 진짜 바라볼 때마다 늘 아름답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면 전에 아름다운 것은 실수였는가? 착각이었는가? 잘못이었는가? 그럼 안 아름다운 건가? 부부 이야기하지 말고 성경 이야기해봅시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 때 미스 바사 돼서 오디션 봐서 됐잖아요. 왕이 에스더가 처음에 예뻤잖아요. 늘 예쁘겠어요? 늘 예쁘지 않아요. 그런데 어느 날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왕 앞에 나가니까 예뻐도 너~무 예뻐! ‘야, 네 미모 살아있네.’ 홀을 내밀면서 ‘네가 이렇게 예쁜 줄을 미처 몰라보다니 이 나라 반 가져라.’ 그 당시 나라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집트까지. 요거 반 준다하니까 어느 땅 하렵니까?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나라의 반을 줄게. 어떻게 이렇게 예쁠 수가 있느냐.’

그걸 제가 수련회 가서 설교하면서 에스더 설명하면서 인간의 힘보다 하늘이 주신 아름다움이 인간의 힘을 지배 한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선악과 있잖아요? 이건 아담이 그날 안 따먹어도 그 다음날 따먹게 돼 있어요.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이것은 ‘탐내지 말라.’ 하는 것이 지금 탐을 안 내도 ‘탐내지 말라’하는 이것이 울렁울렁 하는 이상 어느 지점, 어느 시점에 가서 타이밍이 맞으면 탐내게 돼 있어요. 지금은 탐 낼 것도 없고 이래 봐도 가져갈 것도 없고 하지만 여기 보니 금송아지 있다 하면 내가 훔쳐가야지, 하는 계기가 아다리가 되게 되면 인간의 잠자고 있던 탐심이 작동해서 우리는 율법을 위반해야 될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역사적 사명으로 태어난 게 아니고 그건 국민교육헌장에 들어간 거고, 우리는 이 땅에 죄 짓는 존재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지금은 마음속으로 간음을 안 하고 탐내지도 않고 하지만 딱 아다리가 올 때가 있어요. 형제를 미워하는 게 살인죄라 하지만 안 미워한다 싶지만 그냥 보기만 해도 미운 걸, 그런 사람 만날 날이 올 겁니다. 손꼽아 기다리세요. 보기만 해도 미운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 이거는 사람이 내가 나라는 것을,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간의 주체를 액체라 했어요. 흐른다 이 말이죠. 어디로 흐를지 몰라요. 액체의 특징은 그릇 따라 모양새가 변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주체는 그 상황을 이기지를 못해요. 그 상황에 적응하려고 여기 만나면 여기 부딪히고 하는데, 한 목사님은 몰라, 북한 가면 북한에서 순교하실지, 북한 가서 김일성, 김정일 찬양하라 하면 안하실 것 같아, 하여튼 모든 인간은 시대가 요구하게 되면 북한 가면 김정일 찬양하기 마련이고, 다시 또 한국에 오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렇게 하기 마련이고, 상대를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때, 그때 처신하고 싶어 하는 우리, 역사적 존재, 이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신약은 다 묵시로 보면 돼요) 이걸 한 자로 ‘육’이라고 한 겁니다.

구약에서는 이 육을 언급을 안 해요. 왜냐 십자가 이전이기 때문에 육과 영, 영과 육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신약의 초반기에 오면 ‘어둠과 빛’ 이러잖아요. 어둠과 빛은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지, 개인이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 안하거든요. 그런데 사도바울을 보면 개인을 육이냐, 영이냐, 둘 중에 하나만 해라, 육적이면 육에 포함되고 육이냐, 영이냐, 육을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영을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 중간지점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직업이 뭐냐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지금 직업이 의미가 없고 내가 육을 위해서 살아가느냐, 영을 위해서 살아가느냐, 둘 코스 중에 한 코스밖에 없어요. 마치 다이하드3나 다이하드4에 형사가 폭탄 자를 때 ‘어이, 빨간색 끊을까? 파란색 끊을까?’ 이거 잘못 끊으면 큰일 나거든요. 뉴욕 시민 다 들어갑니다. ‘형님, 빨간색이랍니다. 그래’ 파란색 끊어버립니다. 그래서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을 묵시적으로 몰아세워버려요. 우리는 항상 육이기 때문에 육은 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찬란한 우리 행함을 모아서 내 위주의 역사를 만듭니다. 그걸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 또는 역사의 주체이고 싶은데, 하나님은 신약에 들어와서는 완전히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는 우리를 묵시로 몰아넣어버려요. ‘묵시 세계에서는 너는 뭐야?’ 이렇게 묻는다니까요. ‘네가 만든 네가 구상한 세계에서 너는 어떤 존재야?’ 그걸 묻는 게 아니고, 네가 구상하고 상상한 세계는 아예 어두움으로 아예 끝나버렸어요. 그런 환경은 우리한테 묻지도 않고, 육이야? 영이야? 어두움이야? 빛이야? 이렇게 묻는다 이 말이죠.

그전에 그러한 신약이 오기 전에 오늘 본문에서는 뭐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보좌로 나타난다. 보좌인데 이건 뭐로 돼 있다? 불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불로 만들었는데 보좌에서 불 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이것이 지상에 역사 속에 올 때는 뭐냐 하면 성전 제단의 밑에서 맹렬한 불이 붙는 걸로 묘사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성전 제단에 불이 붙으면 뭔가 태워야 되는 게 있죠. 태우는 게 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흠 없는 게 태워져요. 흠 없는 것이 이 무서운 불에 의해서 태워지는데 이사야 6장에 보면 이 불이 제단의 불이라고 하면서 다른 말로 하면 진노의 불이예요. 이 진노의 불이 분명히 너희가 바친 흠 없는 제물, 내가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진노의 불 위에 너희 제물을 태웠잖아, 태웠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왜 이 언약 적 의미 모르느냐‘ 이렇게 나옵니다.

어떤 가정에 정원이 있는데 그 할아버지가 아침저녁마다 이상한 짓을 해요. 어떤 이상한 짓이냐 하면 제단을 만들어 놓고 불피워놓고 ‘아휴, 불쌍해라.’ 혼자 울면서 ‘아이고, 불쌍한 내 고양이, 불쌍한 내 강아지.’ 맨날 아침마다 뭘 태워서 냄새가 지독해서 온 동네 빌라 냄새 다 퍼지게 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걸 보면서 ‘저 할아버지가 미쳤나, 저 반복되는 행위의 의미가 뭐지? 할아버지 왜 자꾸 제단을 쌓아놓고 그것도 아주 깨끗하고 고양이가 6마리인데 그 중에서 제일 예쁘고 착한 고양이를 얹어 놓고 제단에서 불을 싸질러서 냄새 온 동네 퍼지게 해서 119 신고하게 만들고 하는 그러한 행위를 그러한 퍼포먼스죠. 행위예술. 행위예술을 하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이건 하나님의 행위예술입니다.

이건 뭘까요? 너희는 진작 죽었어야 되는데, 바로 하나님이 노아 방주 같은 역할을 이렇게 제사로, 노아 언약에서는 노아 방주가 언약이잖아요. 모세 언약에서는 이 제사가 노아 방주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 언약궤, 이 같이 있는 언약궤가 다른 민족과 너희와 차별화 시키고 너희는 거룩한, 그냥 백성이 아니고 언약으로만, 약속으로만 구원돼야 될 백성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언약이 말이냐? No, voice, 음성이냐? No, 몸짓이냐? No, 뭐냐? 요 기능!! 흠 없는 양을 태워 죽이는, 불이 있고 흠 없는 양이 있고, 그걸 불이 홀라당 다 태워버리고, 물론 기름과 피는 뺍니다. 빼서 지성소를 다 발라 나갑니다. 이미 죽은 자의 기름과 피, 흠 없는 것들의 기름과 피는 여기 발리고, 어쨌든 몸체는 홀라당 다 태웁니다. 이게 번제예요. 속죄제도 마찬가지고 번제예요. 나중에 여기서 끝나고 난 뒤에 한 세트로 해서 화목제 드리면 그건 제사장이 먹을 수 있고, 그렇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보기도 싫은 레위기, 골치 아픈 그 지독한 그게 왜 있느냐 하면, 그게 그 시대의 방주, 노아방주였습니다. 그걸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님이 죄 많은 인간을, 인간이 버려놓은 인간을 어떤 식으로, 인간이 자기가 어떻게 처치할 수 없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을, 인간이 안 되는 걸 어떻게 되게 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언약적인 조치였습니다. 그 당시에!

참, 그걸 보면 정말 하나님 참 신기하죠.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간단한 거예요. 우리가 아는 어진 할아버지 같은 분, 치킨 집(KFC) 보면 할아버지 있잖아요. 산타크로스 할아버지 같은 분이 있어서 가인의 제사처럼 우리의 정성을 받아 챙겨놓고 복주는, 우리도 납득이 되는 그런 하나님인데, 이건 뭡니까? 너무 참혹하잖아요? 누가 믿겠어요? 사실 이스라엘 본인도 안 믿었어요. 너무나 이상스러워, 아무도 못 믿게 만들어요.

인간의 힘으로는 못 믿게 만들고 이 의미를 우리가 이 제물처럼 죽어야 하듯이 ‘제물이 아니고 내가 죽어야 됩니다.‘ 라고 깨닫는 사람에게만 이것이 깨달아지는 그런 식의 방주의 역할, 기능. 방주는 문 열고 들어가면 되지만, 그것도 어렵긴 어려워요. 비도 안 오는데 방주 들어가라 하면 미친 인간이지, 비가 안 오는데. 비가 오고 나서 떴을 때는 다 기어들어가죠. 그런데 맨 땅인데, 비도 안 오는데, 맨 땅에 배를 만들어놨으니, 현대중공업도 아니고, 울산에 가면 현대중공업에 맨 땅에 만들어놨어요. 물이 차면 뜨게 돼 있거든요. 그건 계약서에 그렇게 돼서 수주 받아서 하는 것이고, 이건 그것도 없는데, 방주를 만들 때 참 인기 없었어요. 아~무도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납득을 피해 가버립니다. 인간이 납득을 한다는 것은 이미 그 손에 죄가 포함돼 있기 때문에 천국에는 죄가 섞이면 안 되거든요. ’아, 이럴 줄 알았어.’ 이렇게 되면 곤란해요. 그렇게 되면 천국 가서 누구 자랑하겠어요? ‘나 눈치 챘지, 눈치 챘지.’ 그건 소꿉놀이할 때 하는 거고, 천국에서 술래놀이 할 장소입니까?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천국에서 찬양하는 게 지겨워서 자기 뜻대로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지금 요 제단을 합쳐서 이걸 성전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에서, 하늘 성전이 있고 지상의 성전이 깨진 이상 성전이 없어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어요. 올라가서 거기는 뭐냐, 불이 나오죠. 성전에서 불이 확~ 쏟아집니다. 불이 쏟아지면 세상 끝납니다. 그 불꽃은 누굴 향하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때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찌른 자도 볼 터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던 사람들한테 다 속합니다. 그럼 예수님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은 없었죠. 백부장은 자기 힘으로 믿는 게 아니죠.

하나님의 능력, 성령이 임한 사람만 예수님이 왜 언약으로 죽어야 되고,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되는가, 그 둘 사이를 엮을 수가 있어요. 양을 잡아서 드리라 하니까 유대인들이 열심히 양을 잡았어요. 할례를 하라 하니까 할례를 행했습니다. 의미가 뭔지 모르고 ‘하라’ 하면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그게 형식이 되었고 반복적인 하나의 시스템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건 인간의 행함이나 역사가 돼 버렸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의 때, 역사를 끝장내는 다시 말하면 ‘내가 이렇게, 이렇게 행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순간이 오니까 그 행한 것이 말짱 소용없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수십 년 믿었습니다. 나 목사입니다. 신학 했습니다. 강의하러 다녔습니다.’라는 그 모든 것이 구원에 전혀 상관없음을 깨닫는 그 순간, 그게 뭐냐 한해를 살아도 쓸데없는 짓으로 한해를 다 보냈다.

십자가마을에 제가 글을 썼잖아요. 아무 쓸데없는 인간이 쓸데없이 한해를 보냈는데 왜 이유도 없이 사는지 모르겠다. 왜 내가 그 떠오르는 해를 봐야 됩니까? 뭐 좋다고, 어떤 사람은 찾아가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떠오르는 해를 왜 올해 또 봐야 되느냐 말이죠. 안 볼 수는 없을까….

성전에서 불이 나와서 세상이 멸망하기 이전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7장 13절 봅시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서” 그러니까 이거는 UFO, 비행접시에서 주어지는 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겠죠. 공중에 뭐가 떠 있느냐, UFO가 떠 있는 거예요. SF영화에 보면 UFO가 떠 있는 게 있어요. 그리고 인디펜던스라는 영화에 봐도 외계인, 뉴욕시 백악관 위에 떠 있는 게 있어요. 비행접시가 떠 있는 거예요. 이건 지구인데 비행접시가 떠 있어서 위에서 문이 열리면서 누가 온다? 인자 같은 이인데 유사 인자, 인자를 닮았잖아요. 인자와 같은 이름이니까 이 같음에 대한 모델이 따로 있어야 되겠죠? 여기 인자가 누굽니까? 다니엘, 다니엘 같은 분이 위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 UFO를 가지고 항상 계시는 분이 계신 곳.

 노아 홍수 때는 간단했습니다. ‘노아야’ ‘예’ ‘방주 만들어라’ ‘예’ ‘방주 만들고 다 만들었으면 내가 들어가라 할 때 들어가라’ ‘예’ 딱 일주일 전에 들어갔습니다. 일주일 전에 들어갔으니까 우리 같으면 한 10분 전에 들어가면 되는데, 일주일 전에 들어갔으니까 일주일 동안 얼마나 갈등이겠어요? 문 닫고 있으면서. 진짜, 카운트다운 해보세요. 9, 8, 7...해서 비 안 오면 어떡합니까? 아~ 그 웃사, 아구, 아버지의 위신이고 뭐고 다 깨지면‘ ’에이, 아버지 이단한테 속았다. 카운트해도 온다더니 아무소리 없네. 진짜 그런 일 있으면 다음부터 방주 만들라 하면 안만들 거예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무슨 계시나 뜻을 받았다고 하는데 ‘야, 세상에 꿈을 꿨는데 돼지 일곱 마리가 돼지 옆구리에 변을 묻히고 들어오는데 12, 23, 35, 8, 16, 14, 이게 확 지나가는데 이거 뭐 사겠어요? 로또 살 게 아니냐 말이죠. 그런 계시나 은혜로 기도 가운데 돼지를 봤는데 비몽사몽간에 돼지가 나왔다면 번호가 있으면 로또를 사든지 비밀금고 번호든지, 은행 번호라 할 거다 말이죠. 왜 요새는 그런 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왜 간주하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건 아까 이야기했는데, 그런 것들은 뭣을 크게 함이라?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땅엣 것에서 기존의 삶을 영위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들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이 자체가 이야기하는 것은 ‘땅엣 것과 함께 죽으라.’의 원칙에 위반되는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닙니다. 묵시 계시가 아니고 마귀 계시죠. ‘아무개야, 어느 땅을 파라, 믿음도 파라, 어린애 같은 믿음으로 해라, 안 믿는다 하지 말고 믿음으로 해야 영광 돌린다, 파 보면 뭐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파보니까 툭 소리가 나더라, 그래서 보니까 보물 상자가 있더라, 열어보니까 위조지폐가 있더라. 이미 그런 것을 평소에 기도하면서 얼마나 상상했겠어요? 하나님, 기도 끝나고 난 뒤에 갑자기 취직이 된다든지, 갑자기 총각, 처녀 같은 경우 재벌 3세가 나타난다든지, 아니면 감독이 길을 가다가 ‘아유, 배우 안 해보시렵니까? 하든지, 모델 안 해보려는지, 갑자기 공부 못하던 애가 ’엄마, 1등이야‘ 하고 온다든지, 아니면 남편이 비자금이 있는데 당신한테 이제야 알려준다 하고 비자금이 50억 있는데 이제야 말한다고 나오든지, 아니면 모르는 어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너를 양자로 삼았다고 유신 받으라고 200억 부동산 2개 주든지, 안 그러면 옆에 있는 교회가 깨져서 교인 200명 들어오던지, 뭔가 나로 하여금 계속 땅을 쳐다보게 만드는 그런 것들을 누가 만들어낸다? 내가 매일같이 생산해 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러한 UFO를 바라볼 경우에는 뭡니까? 다니엘 같은 지점에 와야 이게 보여요. 다니엘은 지금 뭐가 있습니까? 빽도 없고 돈도 없고 어디 통장 잔고도 아무것도 없어요. 다니엘은 뭐만 황송하고 뭐만 지금 신기하고 놀라우냐 하면, 나 같은 인간을 누가 쓰신다? 하나님이 묵시 전달 매체로 쓴다는 이 자체에 놀라버린 거예요. 여기 인자, 인자 같은 이가 나중에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이 머리 둘 곳도 없고, 예수님이 뭐 있습니까? 예수님이 숨겨놓은 부동산이 있습니까? 뭐 있습니까? 모든 걸 버리고 나를 따르라 했는데, 따라가면 뭘 해주는데? 뭐 물고기 아가리 열면 성전 세 나온다. 그것도 성전 세 줄 때나 했지, 매일같이 ‘돈 없지?’ ‘예’ 하면 매일같이 물고기 아가리 열어서 돈이 나오면 따라다닐 만하지, 매일같이 물고기 아가리 벌려서 돈 나오면 우리는 왜 안 따라다니겠어요? 장사 치우고 주님 따라다니면서 물고기 아가리만 조사하면 되지. 물위를 걷는 것도 재주가 있지, 2번 3번 물만 보면 자꾸 물위를 걸으면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물위 걷는 쇼 하면 돈 법니다.

항상 사건은 단회 적입니다. 한번 이예요. 사도바울이 손수건 가지고 기적 베풀면 이 손수건 대량생산해서 죽으면 손수건으로 살리면 장례식장 장사 안 되도록 만들고…. 하나님이 하는 것은 항상 역사를 집착하고 있는 우리에게 뭐로 오신다? 이걸 잘라버리는 묵시로 오셔서 구원하는 게 오늘날 노아의 방주입니다. 사실 노아한테도 방주는 묵시였어요.

묵시는 뭐냐? 무조건 네 자, “도망쳐라” “노아야, 무조건 도망쳐라” “롯아, 모조건 도망쳐라” 뭘 하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오늘날 이 시대에 인자가 올 때에 사람들이 믿음을 보겠느냐, 사람들 보고 롯의 처를 생각하라, 왜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십자가 이후에 주님은 위로 가버렸잖아요. 위로 간 이상은 이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뜻에 의해서 완전히 무슨 층이 된다? 묵시가 다루는 묵시의 층이 되고 말았다 이 말이죠. “도망쳐라“ 도망치라 하면 우리는 방주 만들고 기어들어갈까요? 그게 아니고 ‘내가 아무데도 도망칠 수 없습니다.‘하는 고백을 하는 그 순간에 그 사람은 이미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졌는가를 비로소 남한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말이죠.

의사는 의사하다 망하고 목사는 목사하다 망하고 망하는 그것을 감사하게 여겨요. 주부는 주부로서 망하고, 왜, 세상 것만 바라보게 만들어요. 그러니 사업 하시면서 항상 뭔가 맘에 안 들고 뜻대로 안 되죠. 항상 맘에 안 들고 ‘허 참, 진짜 때려치울까,‘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 때 ’아하, 또 세상적인 나의 가치를 또 집착을 했구나.‘를 지적하시는 UFO에서 나오는 축복의 능력입니다. 효과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가락교회-다니엘 7장9(묵시적 보좌)130103-11강a -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