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헛된 묵시(애가2장10-14)이근호120530

아빠와 함께 2013. 5. 14. 07:43

 

4강-애가2장10-14(헛된 묵시)12053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2장 10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45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애가 2:10-14

“처녀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 저희가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혼미하여 그 어미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미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뇨 하도다 처녀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꼬 처녀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 할꼬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칠소냐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것만 보았도다.”

 

선지자가 토해내고 있는 이 감정은 바깥에 있는 참상과 일치 됩니다. 선지자의 몸은 마치 삼투압작용 같아서 바깥에 있는 사정 따로 자기 내부사정 따로가 아닙니다. 그것이 투명한 막처럼 되어 있어서 바깥에 뭐가 일어났다 하면 그것이 그대로 선지자의 내부까지 들어와서 퍼져버립니다. 퍼져버리면 자기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항이 자기 내부사항으로 전달되어서 그들과 같이 울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외부사정에 대해서 일치감을 갖고 있느냐 하면, 11절에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내장이 들어 있어야 할 자리에 타인의 울음소리와 고통소리가 대신 다 차지하고, 이것은 내 간, 내 창자 할 것도 없이 다 땅에 쏟아내 버린 겁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참상이 그대로 내부에 담는 하나의 쇼핑백 같은 처지에 선지자는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우리는 생각하지요. 대체 예루살렘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선지자는 창자가 끓고 간도 끌어내고, 이것은 선지자가 자기의 실패로 인해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니고 바깥상황에 의해서 자기 것이 없을 정도로, 나의 것이라고는 남겨둘 정황이 아니에요, 바깥의 힘든 상황을 그대로 인수인계 해버립니다.

 

선지자는 울지 않아도 되는데 자기는 구원받은 백성인데 왜 이렇게 울고 고통스러워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선지자가 처해있는 위치가 있는데 상황과 말씀과의 연결지점에 선지자가 서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처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 원인이 14절에 이렇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것만 보았도다.”

 

쉽게 말해서 요새말로 하면 목사나 신부 같은 성직자들이 계시가 아닌 것을 계시라고 이야기했고 하나님의 묵시가 아닌 것을 묵시라고 이야기해서 말씀을 잘못 전했고 설교를 잘못했다, 그 말입니다. 설교를 잘못했는데 어떤 점에서 잘못했느냐, 백성들의 죄악을 드러내야 되는데 백성들의 죄를 덮어주는데 급급한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퍼뜩 생각나지요. 에스겔에 ‘죽을 영혼은 살리고 살릴 영혼은 죽인다.’ 이것은 안 되거든요. 입시나 취직 시험에서 불합격 되어야 할 자는 합격시키고 합격시켜야 될 자를 불합격 시킨다면 이런 폐단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 직장, 직업이야 그렇고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 농사라도 지으면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겠지만 이것은 천국 갈 사람을 지옥 간다고 언급했고 지옥 갈 사람을 천국 간다고 사기를 쳤으니 이런 낭패가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에서 어려운 점이 뭐냐 하면, 선지자가 그냥 말만……, 사람들한테 잘 보여서 자기 사람 만들기 위해서, 자기 사람 관리하는 차원에서 ‘나는 훌륭한 목사인데 당신은 내 사람이니 다른데 가지 말라.’고 생계수단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목사나 성직자들이 설교한 그것이 자연현상과 세상변동사항과 연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굉장히 난해하고 이성적으로 따지기가 곤란한 문제입니다. 사람이 헛소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헛소리를 했다고 갑자기 태양이 동에서 뜨지 않고 서에서 뜬다,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 때 얼마나 신기하고 무섭고 놀라운 일입니까? 예레미야가 보는 말씀의 세계라는 것은 그냥 말씀, 내가 욕심 차린다고 한 소리 했다, 미안하다, 이렇게 끝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달하게 되면 그것이 개인적인 낭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온 우주 천지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묵시가.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거예요, 언제부터? 이게 궁금한 거예요. 언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못 전했을 때, 언제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변동 상황과 연결되어 있는가, 그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봐야 됩니다. 말씀을 잘못 전하면 ‘그래 말씀 네 마음대로 해. 나는 나대로 전하면 되지.’라고 할 문제가 아니고 그런 엉터리 말씀, 복음도 아닌 것을 복음이라고 우기는 거짓된 그 말씀들이 누적이 되어서 결국은 이 예루살렘 꼴이 되는 거예요. 처녀들은 머리를 풀고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 땅에 머리를 숙이고 어린애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엄마 품에서 영혼이 떠나면서 하는 말이 ‘엄마, 엄마! 빵 어디 있어?’ 하고 그대로 꽥 죽어버려요. 빵과 음료수가 어디 있느냐고 이야기하면서 죽어가는 그 참상.

 

얼마 전 시리아 정부군이 애를 겨냥해서 하나씩 학살했다는 그 어린애들에 대한 참상, 베들레헴에서 주인공은 빠져나갔는데 그것도 모르고 헤롯왕은 두 살 밑의 애들을 이유도 묻지 않고 다 죽여 버리는 그 참상, 그것이 ‘아, 이것은 이유가 없어. 무조건이야.’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고 이유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바른 말씀을 안전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그러한 참상이 이 세상에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른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말씀이라는 것은 ‘안 믿기면 그만이다.’ 그것이 아니라 세상을 절단 내는 것, 세상을 작살내기 위한 용도로서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자연현상과 하나님의 말씀과 연계해서 처음 나오는 곳이 어디냐 하면,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이 나옵니다. 21절에 “에녹이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오세를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나와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 다른 곳을 보면 에녹이 자꾸 예언을 해요. 세상 멸망에 대해서. 세상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녹은 좋겠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 같으니, 이렇게 단순히 개인적인 일상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에녹 자체가 죽음을 보지 않았다는 말은 뭐냐, 생명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생명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다는 말은, ‘어, 생명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구나.’ 그것이 아니라 생명이 나타났다 사라진 그것만 생명이고 그 나머지는 생명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생명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추후조치가 취해지는데 그그것은 뭐냐 하면 말할 수 없는 저주와 심판이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셔서 부활했다, 그러면 ‘예수님은 좋겠네.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아이고, 나도 부활되고 싶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적인 개인사로 다루는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함으로써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는 생명이 아니었다.’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생명이 아니면 아님에 걸 맞는 처참한 징벌과 저주가 따르게 되어 있다, 그것까지 우리가 수용해야 돼요. 오늘 본문 이야기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라면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구원받는 자리는 처참함이라는 자리가 성립되지 아니하면 구원받을 자리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오늘 본문 핵심입니다.

 

사람이 믿을 구석이 있고 의지할만한 것이 있는데 거기에 무슨 하늘을 쳐다보고 주의 말씀에 관심이 있겠습니까? 믿을 것이 따로 있고 아직까지 여유가 있는데요. 아직까지 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고 아직까지 내가 쓸모 있는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매력 있게 보이는데 그렇게 되면 내가 나를 믿게 되어 있을 뿐이지요. 내가 전적으로 쓸데가 없고 그래서 전적으로 내가 이 땅에서 살 이유가 없다면 우리는 ‘주여, 오시옵소서.’ 하고 주님만 보겠는데 ‘적어도 이 정도 생겼으면, 이 정도 괜찮은 존재라면.’ 하고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정당화 하고 다듬어나간다면 그 괜찮은 자기 다듬는 그 순간만큼은 주님의 어떤 조치에 대해서 우리는 불만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 정도로 괜찮은 사람인데 설마 나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횡포를 부릴 필요는 없겠지요.’ 그렇게 생각한다니까요. 오늘 본문은 그것을 아주 작살을 내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그 주인공이 이미 정해져 있어요.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인 것이 말씀인데 우리는 내가 주인공 되어 있는 입장에서는, 내가 제대로 주인공이라고 여기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제대로 말씀의 주인공을 주님으로 우리가 대우해 줄 수 없는 형편이에요.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를 생각하면 그것만 생각하지 다른 것은 생각을 못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 못하게 되어 있어요. 나의 가치를 생각하는 그 순간은 주님의 가치는 ‘저리가 노세요.’ 하고 내치기 마련이에요. 그럴 때 나오는 설교는 바로 우리가 화를 당해도 마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엉터리 설교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러면 설교를 어떻게 하면 되고 남 전도할 때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런 저주를 좀 더 퍼부어 주셔서 더 이상 나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는 가운데서 설교를 해야 돼요. 그런 것과 유사한 결론 비슷한 것이 교계 내에 많이 유행되고 있습니다. 그런 것 중에 유명한 것이 ‘내일일은 난 몰라요.’ 그런 유명한 멘트 있잖아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한두 번 쓸데나 기분나지 여러 번 쓰면 그것도 기분이 이상해져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저는 오늘 당장 죽어도 거기에 대해서 항거하거나 불만을 품지 않습니다. 주께서 지금 나를 제거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저에게 합당한 조치인줄로 제가 감사함으로 받겠습니다.’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마귀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습니다, 그 말이거든요. 주님이 용서했다는 것을 내가 아는 순간, 나는 이제 죽어도 좋습니다, 라는 희열과 기쁨이 짧은 순간이나마 왔다, 그리고 금 새 가버리지만 하여튼 갈 때는 가더라도 짧은 순간이지만, 내가 내 행함으로 용서받은 것이 아니고 그냥 용서받았구나, 무슨 일을 해도 용서받지 못할 인간인데 그냥 용서하셨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 짧은 순간만큼은 내가 죽어도 좋습니다, 하는 생각이 더불어 거기에 함께 자리하게 됩니다. 이것이 안길어서, 길게 안가서 문제잖아요.

 

지금 그 짧은 순간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저주를 퍼부어 주심으로서 그래서 주께서 퍼부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함을 아는 기쁨을 우리가 깨닫게 하옵소서.’ 왜, 그것이 바로 제대로 구원을 아는 필수적인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기 생각을 하게 되면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자꾸 해결하려고, 원상복귀 하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그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미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니야, 내가 이정도로 망가질 존재는 아니야. 이것은 아니지.’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하거나 전도를 해도 그 순간은 주님께 관심이 없어요. 구원에 관심이 없고 구원받아도 뭐가 중요한가, 내가 지금까지 나라고 우길만한 그것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 그것이 자기한테 기쁨이 되어버린 거예요. 자기가 자기로 인하여, 자기 영광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박국에 나오는 그 말씀과 달라요. ‘외양간에 소가 없고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포도나무도 농사가 안되어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한다.’는 그 말씀과 완전히 배치가 되는 말씀입니다.

 

시편 105편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보게 되면 요셉의 이야기인데요, 17절부터 보면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여기 보게 되면 말씀이 주인공이에요. 우리는 요셉을 주인공으로 보거든요, ‘야, 요셉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서 어떻게 천당 갔을까?’ 이것을 보는데 성경은 뭐냐, 요셉은 말씀이 부리는 종에 불과합니다.

 

“한 사람을 앞서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는데 그게 언제까지인가,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이 ‘~까지’라는 말은 주일 아침에 설교했지요. ‘~까지’라는 말은 그 이후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이 주도적으로 한다는 것을 ‘~까지’라고 한다고 표현했지요. 말씀이 주도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주인공이 누구냐는 거예요, 주인공이!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이 성경전체가 사람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이야기입니까? 이게 하나님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내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을 경유해서 결국은 나 잘되었다, 나 구원받았다는 나의 이야기로 넘겨온다면 이것은 저주받아도 합당한 인간, 저주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인간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 예레미야가 지적합니다.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묵시와 말씀을 자기 맘대로, 엉터리로, 거짓 것으로 전했는데 그 이유가 백성들이 예레미야같은 참 선지자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은 거예요.

 

왜 귀담아 듣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참 선지자가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백성들은 주님 주신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심장 뛰는 그 생명, 자기 몸뚱아리 생명이 생명인줄 알고 자꾸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식구나 네 명이면 생명이 네 명이라고 알고 있는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 네 명 다 저주받을 것이고 생명은 예수님 몸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마을에 보면 어떤 분이 질문을 해 놓았어요. ‘이 몸이 예수님 몸과 연관되어 있습니까?’ 제가 아주 심사숙고해서 답변을 했어요. ‘그렇습니다.’ 끝.

 

왜냐, 앞에다 언약이 다루어지는 몸이라고 했거든요. 언약이 다루어지는 몸을 풀이하면 생명이 생명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처참하게 다루어지는 몸,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럴 때 그 몸은 그리스도의 몸에 해당되는 몸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올 때 그 몸은 지상에서 온갖 수모와 모멸과 모욕, 뺨을 맞아가면서 치욕을 당하는 그 몸입니다. 그러나 그 몸은 아버지하나님과 연결된 아들의 몸이었거든요. 지금 우리가 그 관계 속에 들어갔습니다.

 

이 땅에서 성도라는 이름으로 온갖 치욕과 모멸과 멸시를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머리되시는 분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하나님 우편에 주님으로 계시다는 말이지요. 주님으로 계시고 우리는 이 땅에서 수모를 당하니까 그 관계를 머리와 지체, 몸의 지체라고 그렇게 성경에서 표현하는 겁니다. 그 연결점은 성령의 세례로서 이야기합니다. 주님만 생명인 것을 잘라버리면 모든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가 아니고 결국 인간들의 자기변명, 자기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다 바뀌어버려요.

 

‘내가 이렇게 고생했지만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서 예수 믿었다.’ 전부 다 자기 이야기가 돼 버려요. ‘내일일은 난 몰라요.’ 그 이야기는 제가 아까 긍정적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두 번 이야기하면 자기긍정이 되어버려요. ‘나는 내일을 난 몰라요, 할 정도로 잘 살고 있다.’ 그래서, 뭔데? 어쩌라고? ‘그러니 난 저주 안 받을 거야.’ 그 이야기밖에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저주받고 심판을 받는데 네가 뭐가 잘났다고 예수님의 지체라고 하면서도 이 땅에서 호사스럽게 살려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그 심보가 아주 더럽잖아요. 수상하지 않습니까? ‘은혜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하던 사업을 걷어치우고 목사를 하겠다.’ 좋아요. 거기까지는 좋다고요.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봉사하는 의미에서, 이 복음을 나만 알기에는 답답하니까 신학공부를 해서 봉사하는 의미에서 전하겠다, 그 때까지는 참 좋았어요. 탈이 없고 정상적인 것 같은데 그 다음부터 문제가 뭐냐, ‘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나는 삐진다.’ 이렇게 나온다면 처음 출발할 때 그 심보에 본인도 모르게 더러운 것이 섞여 있었다는 것, 그 티를 내는 것밖에는 안돼요.

 

‘들어줄 사람도 없는데 화가 난다.’ 이것은 뭐가 이상하고 잘못된 거예요. 사회에서도 하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초심을 잃지 말라고. 목사의 초심이 뭡니까? ‘주여, 용서해주셨으니 제가 아골 골짜기라도 가겠습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간다는 그런 찬송도 있지요, 그게 초심이잖아요. 그런데 교인 없는 그것이 자기에게 화가 나는 이유가 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예수님은 있는 사람도 다 보냈잖아요. 열두 제자도 다 보냈잖아요. 목자를 치니 양이 다 흩어졌지 않습니까? 그럴 때 주님께서 ‘나 십자가 안 질래.’ 하고 삐졌습니까? 머리 되시는 분은 안 그랬다 그 말이지요. 머리되시는 분이 안 그랬다면, 그리고 지체들도 그 머리되시는 분의 성령을 받았으면 안 그러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아, 주님께서 이런 길을 갔구나. 내가 어려움이 없을 때는 몰랐는데 어려움을 겪다보니 주께서 가신 좁은 길이라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 바로 이런 길이었구나. 감사합니다. 내가 그동안 망상 속에 있었습니다.’ 이런 기회로 삼는 거예요. 이런 기회로! 빌립보서에 보세요. 항상 기뻐하라, 이렇게 해놓고 뒤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어떤 일을 당하든지 간에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한다.’ 범사에, 모든 일에 대해서. 이게 뭐냐하면 모든 상황을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로, 전 세계 모든 변화를 다 주님의 이야기로 성령에 의해서 바꾸어서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이것이 결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 그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구원이야기, 자기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의 구원하심의 이야기로 다 바꾸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이 수월하게 바꿔집니까? 내 이야기로 회수하는 이것을 주께서는 아주 잔혹하게, 처참하게, 사정없이 작살내는 겁니다. 전에 민수기 25장 9절을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거기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브올의 기생들에게 미혹되어서 그 당시 이방종교의 행사에 참여를 했어요. 그래서 그날 죽은 사람이 2만 4천명이었어요.

 

제가 뭘 놀랬느냐 하면 다른 이방민족들이 이런 짓을 하면 가만 놔둬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겼다고 해서 2만 4천명이 죽었습니다. 이 정도면 요새 면단위 이상의 인구 아닙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렇게 혹독하게 다루십니까? 이스라엘이 구원의 자리,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렇게 주께서 이스라엘을 혹독하게 다루시는 것을 오히려 감사히 여겨야 돼요. 다른 나라야 바알을 섬기든 뭘 섬기든 가만 놔 둬버려요.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바알을 섬겼다고 2만 4천명을 죽였습니다.

 

죽인 그 안에는 자기자식도 있을 수 있고 삼촌도 있을 수 있고, 올케나 형이나 형수가 다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런 것을 주께서 아주 사정없이 다 잘라버린 거예요. 주께서 다루시는 그 방법은 십자가외에는 없습니다. 곱게 다룬다, 봐준다, 없습니다. 주께서는 십자가만이 구원이기 때문에 십자가지신 그 고통에 참여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되는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우리는 그 속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 고통당했는가를 느끼는데 그 고통을 유발시키는 주원인은 주의 원수가 바로 구원받은 당사자라는 것을 느끼면서 우리는 평생 동안 십자가만 바라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세상을 이런 주님의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의 이야기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감히 제가 그녀를 사랑합니다. 어디에 있나요, 주님이여! 제 이야기 지금 듣고 계시나요? 가여운 제 사정을 알고 계신가요?’ 그래놓고는 하는 말이 ‘용서해 주세요. 벌 하시면 제가 벌 받을게요. 그러나 제게 그녀만은 허락하소서.’ 임재범의 고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신을 이야기하고 신에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다 하고 벌하시면 벌 받겠다고 해 놓고 ‘그러나!’ B, U, T, but, 그녀만은 허락해 달라?

 

이게 누구 이야기입니까? 이게 바로 예수님 이야기입니까? 자기 욕구에 대한 정당성,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잖아요. 이게 바로 대중들이고 이게 바로 그 당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기를 위한 하나님으로 여겼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오직 거짓 선지자들만, 그들은 거짓 목사들만 찾아다닌 겁니다. 점쟁이를 찾아다니듯이. 그런데 그런 짓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저주받을 짓인 것을 예레미야를 통해서 지금 미리 그들에게 알려주고 그들의 상황은 그게 생명이 아니라는 것, 그녀만을 허락한다고 해서, 그녀와 산다고 해서 그것이 생명이 아니에요.

 

생명은 누구와 사는 내 이야기가 생명이 아니고 주님 이야기가 우리에게 덮칠 때 그것만이 생명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덤으로 산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마치 마땅히 살아야 될 것처럼 반복적으로 오해를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만 허락해 주신다면 벌까지도 받을 용의가 있을 정도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집착했다는 이 사실을 주께서 아시오니 주께서 무엇 때문에 희생했는지를, 피 흘렸는지를 다시금 늘 되풀이해서 생각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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