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강-YouTube강의(묵시세계)160315-이 근호 목사
제 146강, 제목은 ‘묵시세계’입니다. 묵시세계라 하는 것은 보통 이 사회에서 잘 쓰지 않는 단어입니다. 묵시세계란 뭘까? 묵시세계의 반대말이 역사세계라고 합니다. 역사세계의 반대말이 있다는 것, 역사 바깥에 뭐가 있다는 것,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바깥에 나갈 수가 없고, 그냥 하루하루 살다보면 과거 있고, 그 다음에 그 과거가 현재가 되도록 밀어내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이게 아주 자연스러운 인간들의 시간 의식이며, 시간이라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누가복음 17장에 보게 되면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와 동일한 입장을 갖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니까, 그들이 정작 궁금했던 것을 언급하는 대목이 누가복음 17장 20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 대목을 읽어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옵니까?” 오늘날 우리도 궁금해 하는 질문과 동일한 질문을 한 겁니다. 언제 오는가를 왜 묻는가? 그때 올쯤 되어서 미리 대비하려고 묻겠죠. 지금은 자기들 보기에도 하늘나라는 분명히 아니라고 여기는 겁니다. 세상에 불의가 많고, 세상에 범죄가 날뛰면서, 그리고 살기 힘든 자연환경, 기근, 가뭄, 태풍, 이런 것이 있는데 ‘아, 여기가 천국이구나!’ 이런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이 예수님한테 한 질문은 우리가 그 당시, 예수님 당시에 함께 있었다면 우리도 동일하게, 아니 제일 먼저 꼭 질문하고 싶은 질문일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예수님께 기대하는 답변은 이런 것일 겁니다. “5년 뒤에 온다. 10년 뒤에 온다. 2개월 뒤에 온다. 1주일 뒤에 온다.” 라는 식의 답변을 우리는 기대하게 돼요.
왜 우리가 그런 답변을 기대하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역사라는 안에 있기 때문에, 역사 바깥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까지 시간적인 쪼갬과 스케줄에 따라서 며칠 지나면 온다고 하는 답변이 우리한테는 이해가 되죠.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을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2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절,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라고 언급을 하셨습니다.
지금 질문은 뭐냐 하면 “언제 옵니까?” 라는 질문을 바리새인들이 했어요.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하는 그 환경을 이렇게 풀이해주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되면 너희들은 너희들 눈으로 아, 하늘나라가 왔다. 또는 안 왔다. 왔다, 안 왔다를 확인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우리한테는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너희들이 그 질문을 나한테 했다고 하시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왔다, 안 왔다 하는 것을 본인들이 이미 파악할 자신이 있기 때문에, 문제는 우리가 기대하는 하늘나라가 언제 옵니까? 라는 식으로 바리새인들이 물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질문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가 왔어도 너희들은 그걸 알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너희들이라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질문을 할 때 자기들은 하늘나라가 오는 정도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질문을 했는데,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가 와도 모르게 되어 있는 그런 인간이라고 되받아 치시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만나면 우리가 하고 싶은 질문인데, 따라서 답변도 그 당시 바리새인들에게만 답변한 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지금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같은 답변을 했다고 했을 때에 도대체 우리는 어떤 면을 수정해야 될까요?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우리가 판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너희 안에 있다고 했을 때에 시간적으로 질문했던 사람들은 “너희 안에” 앞에 뭘 붙여서 이해하느냐 하면 “이미 우리 안에 있다.” 그냥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여기 왔구나! 라고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이런 생각이 옳은 생각인지를 다시 한 번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 해야 돼요. 우리가 하늘나라가 온 것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미’라는 말을 붙여서 하늘나라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알기 쉽게 말해서 예수님 보시기에는 너희들이 하늘나라가 있다 할지라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너희에게, 인간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자,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 나라는 그냥 조용히 곱게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상상하고 생각한 하나님 나라와 전쟁을 하고 투쟁을 하고 분쟁을 일으키면서
현재 우리 속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 시편 110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이것은 뭐냐 다윗이 예언하기를 장차 오실 메시아는 일을 하실 때에 싸움하는 분으로서 이 땅에서 활동하신다는 겁니다. 싸움을 하게 되면 싸움의 대상이 있을 것이고 그 대상은 “주의 원수” 시편 110편 1절에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원수죠.
그러면 예수님의 원수라는 것을, 예수님이 왔을 때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원수를 그들은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인간들은 자신에게 해코지하는 자신의 원수, 자신의 말을 가로막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그런 것을 자신의 적, 자신의 원수로 그렇게 여기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그리고 우리가 이 바리새인이 하는 질문과 생각이 오늘날 우리와 동일한 질문과 생각이라는 것을 이야기해 볼 때, 하나님 나라가 궁금하다고 해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가 궁금한 마음이 들고 거기에 맞게 주님께서 답변을 하셨을 때에, 하늘나라를 궁금해 하는 것과 거기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아울러서 우리가 주님의 원수 노릇을 하면서 천국은 천국대로 가고 싶어 하는 욕구와 욕망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하늘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면, ‘하늘나라가 이미 와버렸네.’ 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이미 와버렸다고 생각할 때에, 마태복음 21장부터 쭉 나오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고 하시면서, 바로 이 세상이 멸망하는 예언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쭉 언급을 합니다.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이게 누가복음 21장 25에서부터 뒤에 계속 나옵니다.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하리라 인자의 날이 올 것이다.” 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아, 예수님께서는 이미 오셨는데 그 실체는 마지막까지 있구나.’ 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많아요. 그래서 신학자들이 이걸 오해하기를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고 아직 마지막은 남아 있다. ‘이미’ ‘아직’이라는 두 단어로 하늘나라를 묘사하느라고 애를 씁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은 약속이라는, 그 속에는 묵시적인 요소가 들어있어서 시간적인 상황에 있는 우리가 그 묵시를 알아챌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스스로 활동을 하게 되면, 시간 속에 있는 우리 자체가 사실은 주님의 원수 안에 사로잡혀 있다는 그런 쪽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오게 되면 시간 속에 매여 있는 우리 자신 때문에 성경 말씀을 전부 다 우리가 오해했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뒤늦게 알게 되는 겁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이야기를, 우리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는 이유가 우리의 지혜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주님의 원수 편에서 함께, 한통속으로 그런 식으로 이 세상을 보고 주님의 생각을 해석하고 신앙생활 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묵시로, 항상 묵시적인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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