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10825a행12장-(역사속의 묵시)-28강-이 근호 목사
대전강의8월25일 사도행전 28강 **강의 전에 질문 내용** 예수 믿는다 하는 나 자신에 대한 허구를 발견해야,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거짓인 것을 발견해야 되니까,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하는 그 거짓말을 거짓말로 받아들여야 그것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게 됩니다. 십자가 속의 상황이거든요. 질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 할 때 예수가 어떤 분인지 모르는 거예요? 답변: 예수가 어떤 분인지 모르는 것은 기본이고 본인이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왜냐, 슈퍼에서 샴푸 고를 때 또는 커피 고를 때 내가 누군지 알아야 라면 고를 필요가 없거든요. 물건 골라서 계산하면 그만이잖아요. 자기 자신이 몰라도 ‘나는 부처 안 고르고 예수 고를 거야.’하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보통 종교는 대상이 있고 물건 고르듯이 물건이 하나의 대상으로 내가 채택하면 그거와 관계에 들어간다 생각하는데 성경에서는 그 반대로 저쪽 분이 살아계셔서, 부활해 계셔서 나를 채택하는 생각을, 내가 그분을 선택하기 전에 그분이 먼저 나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충격이 되는 겁니다. 질문: 창세전에 나를 선택했다는 말은? 그 창세전에 하신 것이 2011년도에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그것이 인간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되는 거죠. 왜냐 하면 인간은 자기 의지가 있고 모든 행동과 선택은 본인이 결정하게 돼 있는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주님이 결정해서 지금까지 은혜로 이끌고 있다는 이 간단한 멘트가 우리가 결정했다는 이거하고 충돌될 수밖에 없거든요. 예를 들면 누구하고 결혼한다든지 음식을 고를 때 중국 음식을 먹을까 뭘 먹을까 하는 것도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조차 나의 선택으로 돌리지 않을 때 마치 우리가 로봇 같기도 하고 기계 같기도 하고 도대체 나의 존재는 뭐냐, 이걸 다시 한 번 의심하게도 되고 그런 충격을 사용하는 거죠. 그 충격 가운데 제일 큰 충격이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그거는 사기였고 거짓말이라는 것이 들통 나는 순간입니다. 내가 주변의 강요, 특히 목사의 요구, 집안의 요구, 모태 신앙, 그런 것이 하나의 분위기로 작용해서, 하나의 구조로 작용해서 거기에 따라줘야 사람다운 것처럼, 사람이 행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오해하고 있는 그것이 무너질 때, 그것이 와해되지 않고 그것을 버티는 게 우리 내부에서 굉장히 강렬해요. 이건 뭐냐, 내 몸은 나의 것으로 남기겠다는 겁니다. 주의 것이 싫다는 거예요. 주님이 오히려 나의 소유가 될 때 나답다 하는 것이 버릇처럼, 습관처럼 버티고 있으니까 이것을 목사 입장에서는 그 손을 비틀어서 뺄 수도 없고 내 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이니까. --------------------------------------------------------- 오늘은 사도행전 12장 20절 할 차례인데 제가 2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그렇게 돼 있죠? 이 헤롯이라는 왕이 죽게 됐는데 그 죽게 된 이유가 회충 먹어서 죽게 되었고 그 회충 먹어 죽게 된 원인이 뭐냐 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환호할 때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한 이유로 죽었다 하는 그것도 맞고 핵심적인 것이 하나 첨가돼요. 뭐냐 하면 주의 사자가 쳐서 회충이 먹어서 충이 먹어 죽게 되었다 이렇게 돼 있어요. 사도행전이라는 것이 이 대목보아도 알 수 있지만 사도행전은 무엇과 무엇이 섞여 있느냐 하면 역사와 묵시가 섞여 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죠. 역사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원인과 결과가 같은 지평선 위에서 나란히 가는 걸 역사라 합니다. 내가 목소리를 내니까 음성이 들렸다. 원인은 나에게 있고 들리는 소리가 있다는 것은 결과는 있죠. 원인과 결과가 같은 선상에서 수평선상에서 원인을 역사적으로 규명할 수도 있고 결과도 역사적으로 규명할 수도 있는 게 역사적 지평이거든요. 지평선, 지평이라 하는 말은 평평하다는 뜻인데. 묵시라 하는 것은 사람에게 나올 수 없고 특히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예상 못한 일, 사람이 예상 못한 일이라는 것은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예상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어떤 일을 결과를 생각할 때 그 원인을 어디서 출발하겠습니까? ‘이 결과는 반드시 뭔가 원인이 조작돼 있어야 그 열매로서 결과가 나온다.‘라는 원인과 결과를 이렇게 묶어 주는 그러한 생각, 그게 인간이 예상할 수 있는 거예요. ’아! 이 일을 했으니까, 아! 이런 결과가 나왔구나.‘ 이미 원인 제공할 때부터 결과도 같이 묶여 있는 겁니다. 그런데 원인이 없는데 결과만 생겼다. 그러면 이것은 그야말로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죠. 이건 말이 안 되죠. 그래서 묵시라 하는 것은 원인을 인간이 의도하지 않는 데서 나온 원인을 묵시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의도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려면 이 세상에 인간만 살아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거예요. 누가 살아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누가 관여한다? 인간만 이렇게 자기가 문명과 문화만 일으킨 것이 아니고 인간의 허락도 없이 난데없이 하나님께서 자꾸 쑤시는 거예요. 이걸 두 가지 용어를 써요. 하나는 뭐냐 하면 ‘우연성’이라 하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우발 성’이라 해요. 우연성, 우발 성, 내용이 좀 차이가 납니다. 아는데 그 차이는 어렵기 때문에 같이 봅시다. 우발적이다. 우연성이다. 같이 보게 되면 이것은 바로 결과가 주어질 때 이 결과와 원인을 이 땅에서 찾아야 된다? 찾지 말아야 된다? 찾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만약에 ‘헤롯이 자기에게 돌아온 영광을 하나님께 영광을, (이게 어려워요 잘 들어보세요) 돌리지 않고 자기에게 돌렸다.‘라는 판정을 같이 옆에 있던 신하나 군중이나 다른 사람이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자격 없죠. 그게 어려운 거예요.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목사가 목회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가정에 우환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럴 때 목사가 신방 와서 ’십일조를 제대로 하셨습니까?‘라고 물어본 거예요. ’십일조를 안 했기 때문에 이런 저주를 받습니다.‘라고 판정내릴 자격이 목사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없는데 교인들은 목사가 그런 원인을 판정 내려 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교인들은 목사가 천국 가는 하나의 매개체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기 때문에. 이것은 고대 민족 종교에서의 샤머니즘이나 기독교 이전에 있었던 천주교 신부들의 복장이 유별나죠? 중들이 머리 깎는 이유를 아직까지 저는 모르겠어요. 신부가 로만 카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왜 그 짓을 해야 되는지 왜 향단에 조롱 흔들어서 향을 피워야 되는지 왜 그 짓을 해야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생각하는 그 이유가 그 근거가 어디서 도출된 것인지 사람의 매개체로 원하는 인간들의 종교적인 심리에서 나왔는지 아니면 진짜 하나님의 계시에서 나왔는지 그 원인이 아직도 그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종교 힘을 자극해서 종교 힘을 뭉쳐서 목회 성공을 기대하고 있는 목회 성공의 결과를 내다보기 위해서 원인을 인간들이 조장하고 있는 거예요. 계시도 아닌데 눈에 보이는 계시를 제공할 때 사람들은 믿음 없어도 믿는 사람이 된다는 효과를 줄 수가 있어요. 성경에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어떤 내용이 됩니까? 보이지 않는 것이죠. 로마서 8장에 보면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느냐, 반어법을 쓰죠.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인들 가운데서 눈에 보이는 것 믿고 교회 온 분 안 계시죠?’라고 묻는 게 사도바울의 물음이라 말이죠. ‘그런 분 한 분도 안 계시죠? 어떤 눈에 보이는 실적과 결과를 얻어 내시기 위해 오신 분들을 안 보이시죠?’라고 묻는 거예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며 ‘죽어서 주님을 빨리 만나는 게 소망이 돼서 우리 교회 오셨죠?’라는 말과 같은 말 이예요. 그걸 더 줄여버리면 ‘죽고 싶어서 오셨죠?’라고 묻는 물음 이예요. 그래 가지고 목회 되겠습니까? ㅎ 금요 철야 기도할 때 ‘지금 빨리 못 죽어서 일찍 죽으려고 철야 오신 분들이죠? 오신 분들이 그렇지 않은 분들은 나가 주세요.’라는 것이 진정한 금요 철야가 돼야 되죠. 하나님 말씀대로. 그러면 금요 철야기도에 누가 오겠어요. 살려고 오는데 죽으려고 오라면 누가 오겠어요. 커피 석잔 마셔 가면서. 두 시간 터울로 마셔가면서 기도하는 이유가 뭡니까? 빨리 잘 살기 위해서 보란 듯이 살기 위해서 기죽지 않기 위해서, 기도한 거잖아요. 그런데 금요철야 기도 제목이 ‘좁은 길로 가라.’ 이걸 기도 제목으로 거는 교회가 아마 없을걸요. 넓은 길로 못 가서 환장한 사람들이예요. 멸망의 길로 못 가서 환장한 사람 이예요.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사람이 해서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기본적인 불교적 인식이 포장지만 뭐로 바뀌느냐 하면 기독교로 바뀐 거예요. 왜냐 하면 그게 대중들에게 먹혀가는 상품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상품이란 말은 뭐냐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이것 받으면 우리는 돈으로 값을 치르겠습니다. 교회는 돈 받아서 키우면 되고 우리는 그거 주신 복 받아서 우리가 원했던 것을 챙기면 됩니다.‘라는 거래하고자 하는 의도들이 일종의 뭐냐 하면 지난 설교에 이걸 뭐라 했습니까? 두자로 장터, 장터는 뭐가 되느냐 하면, 물물교환이 가능한 사방이 트여진 장터죠. 내가 할 수 있는 것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내가 할 수 없는 거,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면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할 테니까 약간의 돈이죠. 하나님이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는 채워주시면 우리가 둘 다 만족스러운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습니까? 만족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오늘 분문에서 주의 사자가 하는 일이 뭡니까? 주의 사자는 뭘 쳤다? 헤롯왕을 쳤죠. 주의 사자가 헤롯왕을 칠 때 주의 사자가 주위의 어떤 사람을 보고 사도나 어떤 사람을 보고 사전에 의논한 적 있습니까? 없죠, 야! 이거 무서운 이야기예요. 뭐냐 하면 주의 사자는 사도의 말을 듣습니까? 안 듣습니까? 안 듣죠. 주의 사자는 오직 주의 사자기 때문에 살아계신 주님, 예수님의 말만 듣죠. 이로써 사도는 사도의 매개체 역할에 한계가 있다는 게 드러난 거예요. 목사는 물론 안 되고 사도조차도 사도란 이유 때문에 자기가 중보자 노릇을 할 수 있다? 없다?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사도조차도 심지어 그냥 사도가 아니고 뭘 받은 사도? 성령 받은 사도라 할지라도 중보자 역할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이 사도를 택한 것은 이유는 단 한가지죠. 사도를 통해서 그냥 사도가 아니고 성령 받은 사도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폭로시키기 위해서 한 겁니다. 인간이 성령 받았을 때, 성령 받았다고 여겼던 자가 성령 받았다는 그걸 근거로 해서 어떤 폭력에 나서는가, 어떤 예수님을 대신하고자 하는 어떤 권력적인 행사를 하는가를 한번 보라 이 말입니다. 그건 오늘날 목사들이 잘 보여주니까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고 성령 받았다. 기름 부었다는 이유 때문에 어떤 폭력적인 행사를 예수님의 종이란 이름을 빙자해서 어떤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를 보라고 성령을 주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뭐라 그러느냐 하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유명한 멘트가 나오죠.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나오죠.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 말은 나는 단 한 사람도 누구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5천명을 모일 수 있는 능력은 있어도 그 5천 명 중에서 단 한사람도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능력을 저한테 일체 없습니다. 그냥 모여서 친목회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있죠. 현재 김정일 종교단체는 2800만이예요. 북한은 종교단체입니다. 그걸 유훈 통치, 죽은 귀신이 통치하는 거예요. 김일성은 북한에서 살아있는 부활체예요. 북한하고 이야기할 때는 여호와증인하고 이야기해야 되지 같은 정치적인 이슈 가지고 이야기하면 대화가 안 돼요. 하나의 종교단체, 박태선이라든지 여호와증인이라든지 통일교처럼 그렇게 상대를 해야 대화가 돼요. 종교단체하고 , 여호와증인하고 무슨 대화가 돼요. 안되죠. 정치적인 외교적인 압력, 그러면 스스로 고난 받았다고 결속력이 더 강렬해 져요. 이단을 논리적으로 파헤친다. 말도 안 돼요. 이단은 논리적으로 이단이 해체되지 않습니다. 이단을 결속시키는 것은 돈밖에 없어요. 인간은 돈 때문에 사는 거예요. 항상 이단은 대순진리나 이단이 결속되는 것은 거기에 뭔가 투자한 이상의 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거기 가담하는 겁니다. 거기에 재산 바치는 이만희 집단 같은 경우와 안 상홍 집단, 이런 집단은 그만큼 투자한 만큼 간부가 되어서 자기가 투자한 만큼 폐쇄된 집단 내에서는 권력의 지도자급으로 행세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경험할 수 있는 반대급부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단계처럼 철저하게 사조직 돼 있는 겁니다. 거기에 만인 제사장 되는 그런 거 없어요. 모든 인간 동일하다 그런 거 없어요. 철저하게 어떤 체계 갖추는데 그 체계는 돈의 흐름 따라서 체계가 갖춰져요. 그냥 영적인 신학적인 깊이에 따라 그런 게 아니라 돈의 흐름 따라, 가장 돈을 만지는 자리가 가장 믿음 좋은 사람에게 맡기는 거예요. 돈이 중요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자본주의 사회 본색이 그래요. 거기에 누가 편승하느냐, 교회가 같이 편승하고 있는 거예요. 돈 놓고 돈 먹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의 사자가 여기서 오늘 본문에 중요한 것은 결국 기준이 달랐다. 뭐냐 하면 주의 사자가 내 기준과 그리고 역사 속에서 원인과 결과를 역사 속에서 원인을 찾고 역사 속에서 어떤 예상되는 결과를 소망하는 그걸 뭐라 합니까? 그걸 흔히 유행하는 말로 비전을 갖고자 하는,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꿈을 꿔라, 비전을 기대하는 것은 그만한 원인을 여기다 투자를 할 경우에만 니가 예상한 비전을 얻을 수 있다고 그렇게 가르칠 때, 기준 문제인데 주의 사자라 하는 기준은 그걸 묵시적 기준이라 하고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비전이라 해도 비전이 옆집 아저씨가 만들어 낸 비전이 아니고 같이 잠을 잔 아내가 만들어 낸 비전이 아니고 누가 만들어 낸 비전 이예요? 내가 만들어 낸 비전이잖아요. 내가 만들어 낸 비전을 어디서 긁어모읍니까? 자기 과거의 누적된 경험에서 나온 거예요. ‘아! 이게 아쉽더라. 아! 요게 그리웠더라. 아! 요거 맛보고 싶었는데. 아! 요건 내가 갖고 싶었는데.’ 사적인 여망들을 긁어모아서 그것이 자기의 사적인 비전으로 해놓고 그것을 신에게 달성해 달라고 비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들은 개인적인 그걸 자리, 우리말로 터,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실존의 자리하고 이야기해요. 실존이라 하는 것은 내가 있다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내 삶의 정황,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주변에 섞여 있는 걸 실존이라 합니다. 실존해 있는 내 자리, 실존의 자리는 사람마다 다 다르죠. 과거의 긴 그림자가 다 다르니까, 요 과거에 따라서 실존의 자리는 뭐냐 하면 노선이 주인공이 누굽니까?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내가 드라마 주인공이 돼서 요 노선이 뭐냐 이 노선을 갈라디아서 4장에서 육의 노선이라 해요. 성경에서 육이라 하는 것은 날 쳐다보는 걸 육이라 해요. 특히 날 쳐다볼 때 나의 행함과 나의 믿음을 쳐다보는 것도 육에 해당되는 겁니다. ‘아! 내가 잘 믿을까 모르겠네.’ 이거 쳐다보는 것도 육적인 거예요. 그러니까 육의 노선이라 하는 것은 제가 이 말할 때는 어느 인간도 죽을 때까지 신자든 불신자든 육의 노선을 자기가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걸 제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육의 노선을 벗어나서 따로 영의 노선 같이 사는 것이 아니고 육의 노선 있으면서 이게 육의 노선이라고 날마다 지적해 주는 묵시적인 능력이 성령의 능력이 책망하는 능력 이예요.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죄인의 괴수임을 깨닫게 만드는 그 능력이 바로 영의 노선 이예요. 육의 노선을 비껴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까 이쪽 버리고 저쪽 자리를 잡는 게 아니고 현재 있는 자리에다가 주께서 덮쳐버립니다. 덮치면 우리의 육은 그 영을 그 다음부터 어떻게 하느냐 하면 놀랍게도 우리는 소유를 해버려요. 이게 육적인 본성 이예요. ‘요거 잘됐다.’하고 소유를 해버려요. 소유를 해버리면 ‘나는 2005년 7월 5일에 구원받았다.’ ‘나는 2008년 7월에 병원에서 기도하는데 암 나았다.’ 딱딱 잡아 버리죠. ‘나는 2011년 5월에 7명 전도했다.’ 딱딱 잡아서 이걸 간증집회를 하죠. 이걸 딱딱 잡아버리면 그건 누구 것이 됩니까? 나의 훈장을 탈 수 있는 나의 의를 돋울 수 있는 또 하나의 나의 역사적으로 이미 전환돼 버렸어요. 전환된 겁니다. 그래서 어제 수요일 날 설교 했잖아요. 예배당에 입구 떼버리고 기둥 떼버리고 벽면 떼버리고 바닥 떼버리면 하나님 어디 계시냐고, 하나님 어디 계시겠어요? 허허벌판 돼 버렸는데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이걸 기둥 세우고 정문 세우고 벽면 세우고 강대상 만들어 놓으니까 마치 하나님이 건물 안에 가둬진 것처럼 느끼죠. 그럼 기존 교회에서 말하죠. 하나님은 건물 안에 계시지 않고 그건 예배당이고 하나님은 우리 속에 있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내가 질문하죠. 그러면 우리가 예배 마치고 다 헤어지면 하나님 어디 계시죠? 사실은 똑같은 질문 이예요. 한쪽은 동쪽으로 집이 한쪽은 남쪽이면 하나님이 바쁘게 따라가야 합니까?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주님이 자동적으로 참석하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소집한 곳에만 주의 이름이 계세요. 주의 이름이 소집했으면 그것은 묵시적인 인도함을 받았다는 것을 뭐를 거부해 버립니까? 내가 알아서 오늘 교회 참석했다는 자신의 결정권을 죄로 육으로 차버리는 능력으로 교회 참석할 때 그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소집된 사람입니다. 누가 와서 교회 오라고 꼬여서 온 게 아니고 누가 압력을 넣어서 아버지가 장로로 계시니까 아들이 돼서 마땅히 교회 간다 해서 앞으로 아버지 만날 때 덜 미안스럽게 가 준다는 그런 식이 아니고 주께서 발걸음을 인도하신다는 그 말씀대고 날마다 우리 자신의 결정권을 주께서는 무시하고 모독하시면서 우리가 가고자 하는 넓은 길보다도 우리가 미처 손대지 않은 알지 못한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그 소집이 그럴 때 교회 도착했을 때 그 모임은 오직 주님이 모이게 하신 주님의 영광만을 높이게 되죠. 이것이 바로 주의 사자가 제시하는 묵시적 기준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말의 결론을 내린다면 묵시라 하는 것은 가만히 고요하게 오는 게 아니고 반드시 역사를 때려 치면서 오는데 그 이유가 뭐냐, 바로 묵시 안에 뭐가 들어있기 때문에? 십자가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라 하는 사건은 천주교는 십자가를 지워 버려요. 십자가 자리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부활을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러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부활에 가기 위한 하나의 중간 간이역 같은 역할밖에 안 돼요. 참, 인간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지만 ‘그래 걱정하지 마. 주께서 십자가로 승리했잖아. 부활로 승리했잖아.’ 해서 부활 안에 십자가가 해소돼 버리고 제거시켜 버린 거예요. 이제는 우리가 산 것은 부활의 새 생명으로서 공동체를 이룬 그것이 전부지, 십자가는 흠집 내는 십자가, 우리로 하여금 죄인으로 규정하는 십자가, 이제는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부정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긍정적 사고방식이 사람으로 하여금 기를 살리게 만들지, 부정적 사고방식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주눅 들게 만들고 영혼을 피폐케 만든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도 그렇게 이야기했으면 좋겠는데 사도바울은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해서 악마와 진짜 성령의 기준을 부활로 결정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결정하는 거예요. 그럼 부활은 뭐냐, 부활은 십자가를 오히려 확대시키는, 확산시키는 하나의 스크린 같은 역할, 배경 같은 역할, 환경 같은 역할을 해버려요. 십자가는 안중에 없고 살아있다는 거예요. 십자가 지신 분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게 부활 이예요. 나의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 지신 분의 부활, 부활의 두자만 따오지 말고 앞에 뭐를 붙여야 돼요. 사람 손에 억울하게 죽었던 분이 지금 생생하게 탱탱하게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살아있는 현실보다 더 현실답게 살아계시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것보다 더 현실답게. 우리는 우리가 잠을 잘 때도 우리가 살아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잠을 주무시지도 아니하고 졸지도 아니하시고 살아 계신 분은 돌아가신 주님밖에 없어요. 심지어 내가 죽이고 싶은 헤롯왕을 내 손으로 못 죽이게 만들고 주의 사자가 와서 회충 내려서 죽게 하실 정도로 그 정도로 주님께서는 구원에 대해서 그렇게 심오하게 진지하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내 구원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거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욱 더 진지하게 나의 구원에 대해서 나보다 더 심도 있게 생각하시는 분은 십자가 죽으신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도마가 뭘 봤습니까? 못 자국 창 자국이 제거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아니잖아요. 내가 살아있다는 걸로 뭘 보여줬습니까? 십자가 졌던 그 못 자국 봤잖아요. 그때 도마가 뭐라 그랬습니까? ‘아! 이제 보니 믿어지네요.’라고 했습니까? 전에 이야기했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조건이 뭐였습니까? ‘내가 보지 않고서는 못 믿겠다.’는 그 조건을 자기는 예수 만나고 난 뒤에도 유지할 줄 알았죠. 딱 예수를 만나고 나니까 그런 조건을 간직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게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죄악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창조 과학회가 그래서 문제가 돼요. 진화론이 아니고 창조 과학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예수 믿을 줄 알고 하나님 믿을 줄 아는 거예요. 그런 조건 자체가 바로 죄악 세상에서나 통용되는 것이지 십자가 앞에서는 그 조건마저 인간이 납득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마저 십자가 앞에서는 어리석은 것으로 판정 나요. 그것이 천국을 뚫을 수 없다는 걸로 판정 나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인간이 십자가 믿을 수 있는 디딤돌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이것은 사람을 설득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아예 성도에게 전해주신 적이 없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을 성도에게 맡기는 겁니다. 할 수 없는 일을 맡기는 거예요. 할 수 없는 일을 맡겼는데 어떤 사람이 믿게 될 때는 모든 공로와 모든 열심은 누구 몫으로 돌아갑니까? 전도한 본인 몫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겁니다. 교회 올 때마다 봉투에 5만원 준다고 해서 교회 와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원인과 결과, 내가 5만원 넣어서 교회 갈 때마다 일당으로 줘서 예수 믿게 하면 그 원인을 우리한테 찾는 게 아니고 묵시적으로 찾으라 하는 것이 사도행전의 핵심 이예요. 사도행전 주제가 뭐냐 하면 ‘주는 살아계시다.’이겁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 아닙니다. 주님이 살아계시는 거예요. 성령은 오직 살아계신 인간의 매개체에 불과한 것이고 주님은 십자가의 모습으로 살아계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에서의 모든 사도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영광이었습니까? 고난이었습니까? 고난이죠. 왜냐 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셨던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고난의 홈 패임은 그대로 사도를 통해서 긁어야 되니까. 제 방금 비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만약에 강한 강철의 톱날이라면 그게 매끈한 아주 아무 일이 없는 세상, 그야말로 고요하고 정상적이고 사회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나아지는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쭉 긁어놓으셨다 말이죠. 흠집을 냈죠.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쫙 그어버렸잖아요. 두 번째 ‘사람은 인기몰이 한다고 메시야가 아니다.’ 쪽 긁어버렸죠. 기적을 행한다고 해서 메시야가 아니에요. 진짜 메시야는 말씀을 완성했느냐, 다 이루었느냐,‘가 메시야의 기준이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희한한 기적을 베푸는 것은 메시야 적인 흔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세상 모든 권력은 이미 누구 손에 장악돼 있다? 마귀한테 장악돼 있기 때문에 세상 권력을 추구하는 자는 필히 누구한테 고개 숙이고 절하게 돼 있어요? 악마에게 절하면 얻을 걸 얻을 수 있는 거예요. 이 세 가지 흔적을 남겨 버렸다고요. 그렇다면 이 세 가지 흔적을 남겼으면 성령께서 그렇게 했다면 그 다음에 사도에게 성령이 임한다 하면 사도는 본의 아니게 참 죽을 맛 이예요. 본의 아니게 그 흔적을 또 다시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흔적에 의해서 그 결과로 십자가 죽었잖아요. 십자가 고난을 먼저 받아 놓고 주님은 고난 받고 그 다음에 십자가로서 구원받고 십자가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했잖아요. 그런데 사도에게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천국의 영광과 그 부활의 영광을 미리 다 당겨서 받고 이제 남은 생애는 뭡니까? 주님이 가셨던 길을 이 땅에서 자기 인생을 통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야되는 그 업무를 이제 수행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사도바울은 발을 다 들었어요. ‘빨리 이 몸이 떠나서 주와 함께 있고 싶어요.’ 했는데 주님께서 ‘너는 너 구원을 위해서는 떠나는 것이 좋은 줄은 아는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도 역할을 마감하고 와야 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나는 소망이 있는데 그건 내가 빨리 죽는 건데 소망도 포기해야 되는 이유는 너희들한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지금 죽고 싶은 것도 못 죽고 너희들한테 고난을 당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목사가 그렇게 설교해야죠. 교회 손 털고 죽고 싶은데 뭐가 아닙니까? 소유가 아니죠.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법정 스님이 문제가 뭐라 했습니까? 무를 소유한다는 거죠. 무를 소유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소유욕 이예요. 사도바울은 이미 소유한 것이 아니고 소유 당해버렸어요. 소유 당하고 하는 말이 로마서 14장에서 하는 말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 없고 자기를 위해서 죽는 사람 없지요?’라고 되묻고 있어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 없지요?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나가 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 죽는 사람 없지요? 나가 주세요.‘ 성령이 와 버리면 완전히 천장이 내려앉은 것 같아서 이건 본의 아니게 원인을 어디서 제공했습니까? 묵시 세계에서 제공했기 때문에 결과는 뭡니까? 자기가 졸지에 새 사람 되는 결과를 본의 아니게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당해버린 거예요. 저는 그걸 강간당했다 하는데 강간당한 거예요. 성령한테, 이거는 우리 안에 뭐가 살아있습니까? 이미 다 이루었다. 너는 이미 구원받았어.‘가 이루어진 거예요. ’이미 구원 다 됐음‘이 이루어진 거예요. 그 안에 다 됐음을 쪼개보니까 에베소서 1장 4절,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택했다는 내용이 함께 포함돼 있어요. 그렇다면 그때부터 나의 운명은 없어지고 운명으로 다루어지는 얼굴이 되죠. 운명은 내 운명이 아니고 누구 운명? 예수님의 운명을 증거 하기 위해 다루어져야 될 주님에 예속된 존재를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겁니다. 더 이상 소유에 대해서는 소유할 것을 용납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육의 노선을 안 놓치잖아요. 육의 노선이라 하는 것은 항상 원인을 내가 쥐고 있어야 내가 예상한 결과도 거기에 주어진다고 보고 뭔가 날마다 소유하고 있으니까 바로 묵시적인 것이 와서 우리를 어떻게 합니까? 날마다 십자가로 소유 성을 반대를 하죠. ‘니가 널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소유해서 발걸음을, 머리카락도 인도했다는 식으로 바꾸어지는 작업을 일으키게 하는 겁니다. 바뀌어 질 때마다 우리는 그때부터 ’나는 이렇게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구원받았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뭐냐 하면 또 하나의 소유가 돼 버리죠. 나는 이러이러해서 구원받은 사람 맞다.’ 해 버리면 이런 고백을 하는 '나‘가 따로 생겨버립니다. 그래서 이게 문제가 돼요. 그래서 지금 박 옥수 구원 파가 이 딜레마에 빠졌어요. 구원받은 나를 늘 자기가 구원하고 간직해야 된다는 짐을 계속 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날마다 죽여 버리죠. 나는 십자가에서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날마다 나오는 거죠.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내가 날마다 죽음에 넘기움은 ....’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장난감 갖고 노는 거예요. 똑같은 장난감이지만 늘 상 재밌게 하시네. 죽여 놓고 살리고, 죽여 놓고 살리고, 죽이는 것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고 이유가 있어요. 만날 우리는 구원받는 나를 내가 소유해야 되고, 왜, 그걸 남에게 자랑해야 되니까, ‘나 구원받았어, 나 구원 받았어.’ 자랑하다가, 자랑하다가 또 얻어터지고 왜 니 구원을 니가 소유하느냐 말이죠. 딜레마예요. 딜레마, 이게 뭐냐 하면 내가 나의 목적이 돼 버렸어요. 이게 바로 이기주의죠. 이걸 사적 구원론이라 해요. ‘오늘 구원받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라는 것과 똑같은 시스템이거든요. 내가 나를 짊어지고 가니 얼마나 힘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전에 이런 비유를 들었잖아요. 우리 몸이 누구 건지는 모르겠는데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내 그림자 있잖아요. 이 그림자는 주께서 만든 그림자잖아요. 그렇다면 그림자가 내 그림자가 아니라면 몸은 누구 것입니까? 주님 것이죠. 그림자가 어떻습니까? 시커멓죠. 따라서 우리는 주님이 함께 있으면 뭐가 나옵니까? 내가 미처 몰랐던 죄, 특히 소유 성 죄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예수 믿고 은혜 받아서 돈 벌었습니다.‘라는 이런 죄가 계속 나오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 했는데, ’돈을 사랑 안했더니만 돈을 주셨습니다.‘라고 또 돈을 사랑하는 거예요.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나오죠.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해서 19가지 나왔죠? 제일 먼저 뭐가 나오던가요? ‘자기를 사랑하고’ 나오죠. 환장하는 겁니다. 마지막 때는 자기를 사랑한다는 거예요. 우린 어쩌란 말 이예요? 우리는 태어나면서 자기를 사랑하지, 그럼 강아지를 사랑하나?ㅎ사람이 누굴 사랑하는 것도 내가 이렇게 위대한 사람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누구를 사랑하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누굴 사랑한다는 것도 자기가 너무도 소중하고 귀하기 때문에 귀한 자기를 모시기 위해서 주의 말씀대로 사랑하기 위해 인간이 나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죄다 말이죠. 그러니 평생 동안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라 말을 할 수밖에 없어요. 결국은 구원이라 하는 것은 내가 구원의 지식을 확보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간단한 거예요. 예수님이 피로서 성령을 통해서 구원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구원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구원하는 걸 믿는 내가 믿음으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구원하는 거예요. 그 현상을 두자로 믿음이라 하는 겁니다. 바깥에 나오는 표면효과를 가지고 내가 소유하면 안 돼요. 우리 권사님이 가는데 어떤 사람이 ‘ 누군지 모르지만 인물 좋다.’라고 하잖아요. 인물 좋다는 것은 표면적인 효과 아닙니까? 인물이 좋은지 모르지만, ㅎ그걸 표면효과라 해요. 표면효과는 이게 내부에 삽입되면 안 돼요. 이걸 소유로 보면 안 돼요. ‘나는 인물 좋은 남자’라고 소유한 순간 표면효과가 날아가 버려요.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증인, 목격자라 해요. 그래서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을 간단하게 말해서 역사 속에 무엇이 섞여 있다? 묵시가 섞였는데 묵시의 기준은 뭐였다? 묵시의 기준은 사람이 자기가 생각해서 ‘저 헤롯을 내 손으로 죽일 거야.’ 했는데 결심하기 이전에 이미 죽었을 때에 이건 내가 강인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마 내 뜻을 반영해서 어젯밤에 먼저 죽였을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게 얼~마나 우리의 마음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지 몰라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말을 들으신다면 우리는 한 발자국 떼고 계획을 할 때마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이번의 일은 기도를 어떻게 해야 전번처럼 재수 좋은 일이 벌어질까를 기도문 작성에 너무 신경을 쓰게 돼요. 전번에 기도 한번 잘 해서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니까 다음 번에 어떤 계획을 할 때 이번에 애 고 3인데 3개월도 안 남았는데 3개월 남은 애 시험에 대해서 내가 어떤 식으로 교회 생활을 해줘야 잉여, 추가된 행운이 곱으로 올 수 있는 멋진 기도문은 어떻게 작성해야 되는가, 또 하나의 숙제로 남죠. 자기 꾀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는 셈이죠. 한번 물어봅시다. 거북이하고 토끼하고 경주할 때 누가 이겼습니까? 거북이? 그건 역사적인 평가가 돼요. 인간 기준이 그렇죠. 거북이 기준에서는 누가 이겼습니까? 거북이는 인간이 토끼를 옆에 붙여놔도 거북이는 토끼가 있다 할지라도 경쟁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북이는 자기가 거북이로 그냥 살면 그것이 승리자가 되는 거예요. 성도는 돈 못 벌고 거지가 된다 할지라도 거지로 끝까지 남아있는 이것도 은혜인 줄 아는 그 자체가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남하고 비교할 이유가 없어요. 비교한다는 것은 자기 기준의 관찰자로 남는 거예요. 관찰자라 하는 것은 주께서 허용한 적이 없어요. 사도는 자기 길을 가면 되고 주의 천사는 자기 천사 길을 가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통일하고 통합하는 것은 누구 손에 통일됩니까? 쌩쌩하게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알아서 배치를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여기는 포도, 여기는 빵, 배치를 그렇게 하듯이 배치를 모아놓으면 그리스도에게 통일이 되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지체에 불과하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니까 전 세계에 교회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두 개 생기면 비교하고 경쟁해서 안 돼요. 그래서 결국은 인간은 자기 기준에 의해서 육으로 나갈 때 하나님이 여기에 영으로 묵시적 기준으로 마중 나올 때 항상 벌어지는 사건은 십자가 사건이 그 현장에서 항상 되풀이돼서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앞치마와 손수건 가지고 죽은 자가 살아났죠. 그 소리 들었으면 그 앞치마 공장에 생산 들어갑니다. ㅎ이 초석 교단처럼. 물 먹고 병 나으니까 물 대량생산 들어가죠. 간증도 퍼지면 그 다음부터는 대량생산 체제에 들어가죠. 목사의 설교는 자기 죄 고백하면 끝나는 거예요. 목사가 설교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구원받는 것은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자만 구원받게 돼 있어요. 어떤 때는 성경 본문 하나만 외워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성령께서 말씀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후벼 파버리면 목사가 그 본문 가지고 개떡 같은 소리를 해도 구원받은 사람은 성경 본문 하나 듣고 구원받아 버려요. 그러면 목사가 기분 좋아서 ‘내 설교 좋았죠?’ 하면 ‘관계없는데요. 당신 설교 엉터린데요.’ 우리교회서 구원받아 놓고 그게 우리 목사 설교와 상관없이 주님께서 직접 구원한다는 것이 주님의 전도방법 이예요. 고넬료와 베드로는 양쪽에서 다 주께서 알아서 만나게 했지, 베드로가 기도한 가운데 지가 만난 게 아니에요. 그래서 하는 것은 ‘떨어질 사람은 떨어줘라. 하는 거예요. 천국에 못 갈 사람은 자꾸 천국 가는 척하고 오지 말고 좀 떨어져 나가라 말이죠. 그래서 요즘 나온 거 전기로 파리 잡는 채 있잖아요. 찌직~ 찌직~13000짜리 있잖아요. 그거로 해서 ’좀 나가줘.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살려고 하는 사람은 나가줘. 천국은 니가 생각하는 천국이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가 천국이라고 좀 나가라. 예수님이 영광 받은 곳이지. 니 영광 받는 곳 없다. 자기 행함 주장하는 사람은 다 떨어져 나가라.‘ 찌직~ 찌직~ 잘도 떨어져요.ㅎ 그 다음에 13장에 안디옥이라는 곳이 있거든요. 터어키, 구브로라는 섬이 있어요. 구브로 섬에 살라미스, 성경에서는 옛날에는 구브로를 실루기아라 돼 있는데 현대에는 다른 용어로 돼 있어요. 실루기아에서 구브로에서 바보라는 이 지명에서 돌아서 요 동네, 터어키 남쪽 밤빌리아를 쭉 돌아다닙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수련회 때 이야기했죠. 사도바울이 죽었어요. 본인도 죽은 줄 알았어요. 본인도 죽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 깨어나 보니까 자기가 덜 죽은 거예요. 이고니온에서 돌에 맞아 죽었어요. 안디옥에는 바나바를 같이 데려갔거든요. 바나바와 함께 돌면서 사도바울은 뭘 느꼈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자기에게 죽음이 올 이유가 돈을 떼먹은 것도 아니고 누굴 사람 때려죽인 것이 아니고 단지 뭘 전했습니까? 십자가 복음을 전했거든요. 십자가 복음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이게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를 말 되풀이하는 것이 그게 주문 외우는 것이지 그게 무슨 복음입니까? 십자가 복음은 반드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던 원인과 함께 대등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유대인들이 무슨 주의? 율법주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내가 길이요 진리라는 예수 그리스도만 메시야라는 이것과 충동해서 일어난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죠. 그러면 바리새인들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뭐라 하셨죠?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어디에 못 간다? 천국에 못 간다. 그러니까 요새 말로 율법을 가장 인간적인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말씀을 지켰다면 기껏 어느 수준에 들어간다? 바리새인에 도달되고 바리새인이 그 최 정점에 서 있는 거예요. 모든 율법의 행함으로 최 정점에 서 있는 바리새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스스로 살해당하도록 조치를 해서 그런 요소가 같이 겸해서 나온 사건의 뭉치가 뭐냐,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누굽니까? 사도바울이잖아요. 어느 정도로 열심이었는지 그걸 특 심이라 했죠. 어느 정도로 특 심이었느냐 하면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는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올라가는 도중에 거의 다메섹에 다 와서 당하고 다메섹에 내려가서 아나니아를 만나서 눈 떴잖아요. 눈뜰 때 사실 그때 죽었어야 됐는데 안 죽고 눈이 봉사가 됐죠. 눈 감기게 만들고 눈 떴을 때 그때 ‘너는 원치 않는 환란 가운데서 이방인에게 보내는 사도가 돼야 된다.’ 해서 아라비아에 갔다가 다메섹에 갔다가 안디옥에 갔다가 거기서 활동하다가 다소라는 고향에 8년 동안 있다가 안디옥에 3년간 바나바와 같이 한 바퀴 돌잖아요. 한 바퀴 돌 때 예수님께서 자기의 주되심을 이런 식으로 이 지상에다가 펼칩니다. 그냥 주되심이라 해서 구원해서 나는 브라질에 리오데자네이로에 예수 상 있죠? 그것처럼 하늘에서 구름 위에서 ‘나는 주다.’ 이러면 될 텐데 주께서는 이 지상에 주되심을 꼭 십자가 사건으로 남한테 매 맞고 얻어맞고 죽음을 당하는 그런 방식으로만 복음을 전해요. ‘화려하고 아름답고 거창하고 어떤 세상 권력을 다 쥐고 인기가 많고 돈도 많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고 사람은 떡으로 살 수 없고 뭔가 사람이 인기 많다고 메시야가 아니고 세상 권력은 마귀가 쥐고 있다.‘라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자꾸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반복시키는 것은 원래부터 이 세상은 누구 것이란 말입니까? 십자가 사건을 유발하는 그분의 배경, 밑바탕, 바닥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황에서 이걸 증거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쭉 돌면서 사도바울로 하여금 성령을 입고 그 다음부터는 누구한테 이야기합니까? 십자기, 십자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뭐라 합니까? ‘옛날에는 나도 특심하여서 율법으로 구원받는 줄 알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이 말씀은 쉐마, 쉐마, 이 말씀은 들음으로 행함으로 실천에 옮김으로써 구원 받는 줄 알았는데 이거 율법은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를 저주케 하는 저주를 유발시키고 죄를 더 누적시켜서 저주 받아 마땅해서 모든 입을 다 틀어막는 역할이 모든 주의 말씀이었습니다.’라고 전하는 가운데서 십자가 사건을 전파되게 하셔요. 10분 쉬고 마태복음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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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대전110825a행12장-(역사속의 묵시)-28강-(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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