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대구강의 5] - 교회를 넘어서 14 - 묵시와 역사2
05,03,2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묵시는 역사를 미워해 !!
지난 시간에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했는고 하니, 역사적인 증거물을 사람들이 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문제점인데, 즉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따로 분리해서, 바로 그것을 추려 가지고는,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있다고 하는 증거물로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개인적인 경건인데,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렇게 개인적으로 경건한 자들이 모여서 힘을 합쳐서 달성해내는, 즉 국가와 사회적으로 아주 그럴듯한 이상적이고도 유토피아적인 모습들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선량한 대통령이 등장해서 노예제도를 폐지한다든지, 금주법을 통과시킨다든지 말이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독재자에게 인민들이 억압을 받는 것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지도자가 다른 나라에게 간섭해서 인권을 신장시키다든지 말이다.
◈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경우에 !!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아마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었지 싶은데, 그가 감리교 신자이지 싶은데, 맞나요? 침례교 신자라고요? 그가 주장한 것이 바로 도덕적인 정책인데, 즉 인간에게는 신에게 받은 천부적인 인권이 있는데, 즉 인간에는 누가 누구에 의해서 학대받지 않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카터는 바로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선거운동을 해서 대통령으로 선출이 되었고 말이다. 물론 대통령으로 있을 때도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은퇴를 하고 난 다음에도 대북특사로 김일성을 만나서 북한의 억눌린 인권을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이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도 그냥 지어주는 운동에도 동참하고 말이다.
◈ '선'은 반드시 '악'을 전제로 !!
바로 이런 것들이 역사적인 증거물이 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선하다' 라고 할 때는 '악하다' 라는 것이 전제된 상태에서, 즉 그렇게 서로 비교가 되는 가운데서 선함이 나온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조가 그러한데, 그것은 누구를 탓할 문제도 아닌데,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런 놈들을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 '선' 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악을 염두에 두고서 선을 측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악이라는 것이 너무나 일방적으로 간주된 악인데, 그래서 악의 범주에 몸이 아픈 것도 들어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도 들어있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악의 범주에 몸이 아픈 것과 고생하는 것이 들어있게 되면, 어떤 무시무시한 불상사가 생기는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그만 악한 소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됩니까?
◈ 예수님의 공격성 !!
도대체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나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은 복이 있다" 라고 했는데, 그리고 "웃는 자에게는 화가 있고, 우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 라고 했고, 또한 "가진 자는 저주받은 자이고, 가난한 자는 복 받은 자이니 기뻐해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기존의 인간사회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어느 정도 틀이 잡혀있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고 따라와 주면 참 좋겠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 이런 기존의 틀을 공격하고 뒤바꾸어버린다는 것이다.
◈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
예수님의 이러한 설교가 유대인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니, 그들이 예수님에서 대해서 "야, 저거 너무 삐딱이다" 라고 해서, 간음한 여인을 그 현장에서 돌로 쳐서 죽이지 않고 예수님에게 질질 끌고 데리고 와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에게 내동댕이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당신의 모든 사상이 어떤 식으로 율법에 합치가 되는지, 이제 당신이 현장에서 잡힌 이 간음한 여인과,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죽여라' 라는 율법이 서로 어떻게 합치가 되는지,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소문으로 떠도는 당신의 주장이 실제로 어떤 내막을 가지고 있는지를 한번 펼쳐 보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상당히 어려운 사상체제와 법 체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물론 우리는 그 뒤에 예수님이 어떤 조치를 하셨는지 알고 있기에 그렇지만, 하지만 그것을 모른다고 여기고서 이 문제에 한번 접근해보라는 것이다. 상당히 곤란한 문제라는 말이다.
과연 우리가 예수님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간음한 여인을 고생 고생해서 찾아서 예수님에게 데리고 온 것은, 이제 도저히 예수가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고 여기고서 그렇게 조치를 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만약에 이 여인을 용서해주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배한 것이 되는데, 즉 예수님에 의해서 말씀자체가 모독을 받는다는 것이다. 말씀에 의하면, 돌로 치는 폼만 잡고 용서해주라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무지막지하게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돌로 쳐서 죽이게 되면, 평소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자신들이 생각한 것이 일치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자기들을 보고서 "야,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욕한 것이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로가 같은 생각인데 말이다.
(요 8: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요 8: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요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요 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요 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 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요 8: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예수님과 가이사 !!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던진 또 하나의 어려운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가이샤에게 세금을 바칠까요? 말까요?" 라는 문제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가이샤에게 바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악마의 나라에 충성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금을 바치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굳이 자기들이 예수님을 처단할 이유도 없이, 그냥 세금 포탈죄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죄목을 씌어서 당국에서 예수님을 칠 것이니, 자기들은 그야말로 손수건도 없이 코를 푸는 격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틈새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딜레마가 그대로 지금 신학에 다 담겨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마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마 22: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마 22: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마 22:18)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마 22:19)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마 22: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마 22:21)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마 22:22)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 과연 선악의 주체자가 누구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해결책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먼저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인의 경우에, 야고보서를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주체' 문제에 있어서 선악을 아는 자가 주체자가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선악을 모르는 자가 주체가 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생명과 생명에서 나온 율법의 관계에 있어서, 즉 율법을 만드신 분이 생명나무를 만드신 생명을 주신 분이라는 말이다. 생명나무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율법을 제시했다는 말은, 율법에 대한 처단권이 생명나무가 되시는 예수님의 고유권한이라는 것이 먼저 정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제시한 분이 심판주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전혀 율법도 만들지 않았는데, 그냥 듣기만 했지 말이다. 그렇게 율법을 만들지도 않았으면서, 듣는 놈들이 왜 심판을 하고 난리를 피우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율법의 제정자가 따로 있는데, 왜 당신이 율법을 가지고 힐문을 하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약 4:11)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약 4: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 율법을 완벽히 지킨 자만이 !!
예수님은 땅바닥에 글씨를 쓰면서, 율법을 제시할 때 율법에 의해서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만이 오직 율법의 시행자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새로운 원칙을 제시했다는 말이다. 즉 율법을 완벽히 지킨 사람에만 한해서만, 율법을 가지고 들이밀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에 대해서 예수님이 제시한 새로운 원리인데, 예수님이 왜 이런 원리를 제시했는가? 그것은 바로 이 율법은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인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 죄는 생명을 주기 위해서 먼저 다가온다는 것이다. 즉 생명을 주기 위해서 죄에 대한 고발이 있고, 그런 뒤에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율법이 자기 책임을 완수하는, 즉 율법의 완성과 선이 닿는다는 말이다.
◈ 여인아, 너를 정죄할 자가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라도 이 죄에 대해서 정죄할 자가 없다고 했는데, 그래서 간음한 여인을 보고, "여인아, 너를 정죄할 자가 있는가?" 라고 물었는데, 즉 아무도 없는데,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물론 율법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율법을 시행할 수 있는 자는 마귀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주는 주님밖에 없는데, 그런 심판주가 되시는 주님께서 여인을 용서하신 것은, 율법의 완성은 심판주가 생명을 줄 때, 그것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요한복음 8장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율법의 완성을 인간이 지킨다고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우기고 있는데, 하지만 율법은 우리 인간이 지키는 게 아니라, 생명나무를 만드신 예수님만이 완성하실 수가 있는데, 바로 그 율법의 완성이 곧 '사랑' 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바로 지금 그 율법의 완성 속에 우리가 초청을 받아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러니 이 성경말씀에 얼굴을 파묻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모든 말씀을 다 지키신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시니 말이다. 그러니 그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 세금문제는 하나님의 법에 없어 !!
그 다음이 가이사에 바치는 세금문제인데, 과연 그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말이다. 그런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동전을 내밀었는데, 세금에 관해서는 율법에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이 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에 없는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다는 말이다. 즉 세금에 관한 문제는 하늘에 속한 문제이지 땅에 속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전을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그 동전을 누가 제조했는가? 가이사가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제조한 사람에게 그냥 돌려주면 되는데, 그러니 그것하고 하나님의 법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왜 하늘나라와 상관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었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들은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그들은 "예수 당신도 이 땅의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라고 지레짐작을 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곡해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통경찰이 천사를 잡아놓고 속도위반 스티커를 발부하는, 그야말로 바보들이 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아니 천사가 날개로 빨리 날아갔다고 해서 과속이 되는가? 날개가 폼으로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도 6기통(?)인데 말이다.
◈ 서로 노는 동네가 달라 !!
그러니 서로 노는 동네가 다른데, 즉 예수님이 자기 형제들과 함께 노는 하늘나라의 원칙이 다르고, 세상 사람들이 노는 동네가 또 다르고 말이다. 예수님의 것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그 은혜 안에서만 딩굴고 헤엄치면서 논다는 것이다. 주신 능력의 은혜 안에서 말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그 당시가 먹고 마시는 것이 제도화된 분위기에 가깝게 형성이 되어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그렇게 먹고 마시는데 규칙과 세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어떤 곳인가? 로마서 14장 7절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이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의와 평강과 희락은 즐기는 것 !!
그렇다면 우리보고 그런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만들라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을 즐기라는 말인가? 즐기라는 것이다. 왜 즐길 수밖에 없는가? 의와 평강과 희락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유발시키는 요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성령 안에 있으면 곧 의 안에 있는 것이고, 평강 안에 있는 것이고, 희락 안에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것을 희희락락거리면서 헤엄치고 즐기면 되는데, 그러니 하늘나라를 달리 염두에 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통치권 안에 있는 것인데, 그리고 예수님이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은,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것이 즐거운데, 물론 우리도 4월 5일에 먹고 마시려고 가는데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먹고 마시는 즐거움과 하늘나라에서 제공하는 즐거움이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제공하는 출처가 다르니 말이다.
◈ 교회는 자주 모여야 !!
우리가 자주 모이는 것이 좋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교인들이 모일 때는 "야, 오늘은 기쁜 일요일, 즐거운 모임이 되어야지" 라고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기쁘고 즐거운 모임이 되기 위한 방법론은 각자 다듬어서 가지고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자기기 준비하고 기대했던 것은 별로 즐겁지 않고, 자기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기쁨과 즐거움이 만남과 말씀과 교제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찬송을 부르면서 괜히 눈물이 나고 말이다. 또한 설교를 들으면서, 밥을 같이 먹으면서 느껴진다는 것이다. 자기가 인생을 너무 자기 중심으로 보았다고 회개하는 가운데 난데없는 즐거움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도는 모이지 않으면 외로운데, 막상 모이게 되면 "내가 언제 외로웠지?" 라고 하면서, 그만 외로움이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집안에서 모이면 그런 모임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워하는데, 왜냐하면 육적인 모임이기에 말이다. 처음에는 술로 즐거움을 맛보지만, 나중에 인간의 한계가 드러나면 육두문자가 튀어나오면서 서로 싸운다는 것이다.
◈ 이제 본론으로, '묵시란 무엇인가?'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역사 속에서 어떤 증거물을 찾고자 하는 의식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죄를 받아서 마땅한 것임을 살펴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이 시간에는 "그렇다면 묵시가 무엇인가?" 라는 점을, 참으로 어려운 주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하는데, 그런데 "묵시가 언제 생겼습니까?" 라는 물음자체는 묵시에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제' 라는 것은, 이 땅에서는 6가지 요소가 있는데, 즉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라는 것인데, 모든 철학에 여기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 6가지를 두고 '사유의 범주' 라고 하는데, 즉 모든 생각이 미치는 영역(?), 혹은 카테고리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땅에서는 이 6가지가, 즉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라는 요소가 확립이 되어야만, 여기에서 진리가 나오고 의미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 6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빠져버리면 안 되는데, 그래서 이 세상일을 보도하는 신문기사에는 반드시 이러한 6가지 원칙이 필수적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 묵시는 '누가' 라는 것이 중요해 !!
하지만 묵시의 세계에서는 '언제'와 '어디서' 라는 것은 필요가 없고, 그리고 '무엇을, 왜, 어떻게' 라는 것은 '누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묵시의 세계에서는 결국 다른 것은 다 날아가 버리고, '누가' 라는 것만, 즉 "도대체 누가 하셨는가?" 라는 것만 남는다는 말이다. 즉 이 '누가' 라는 것에서 능력이 나오는데, 이러한 점이 바로 창세기 1장부터 해석하기가 제일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빛이 있어라" 라는 것이 우리 인간들을 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즉 그때는 말씀의 어떤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언어에 있어서는, 언어소통, 혹은 의사소통, 즉 이것을 '커뮤니케이션' 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의사가 소통이 되기 위해서는 보통 땅에서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어떤 대상이 있어서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명령자체가 이 땅이 창조되기 위해서 명령을 한다는 것이다.
◈ '하라' 라는 명령이 역사인가? 묵시인가?
물론 이것을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인정하지 않는데, 예를 들어서,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하면 뒤에 '하라' 라는 명령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묵시로 보지 않고 역사로 보아서, 그렇게 역사로 보게 되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라는 6가지 요소가 나온다는 말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라고, 그렇게 '하라' 라고 하셨으니, 분명히 그렇게 명령을 한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바로 성도인데,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을 내려서 시키셨다" 라고 그들은 주장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을 보겠는데, 이전에도 한번 보았지만 말이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 말씀은 그 자체적인 능력의 활동으로 !!
여기에 보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리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가?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말씀이 자체적인 능력으로 활동을 벌려서 그 결실이 맺어지는 것이 곧 성도라는 말이다.
◈ 사무엘상에 나오는 '언약궤'의 경우에 !!
이러한 대표적인 적인 것이 사무엘상에 나오는데,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데, 엘리 제사장의 아들인 홉니와 비니하스가 언약궤를 가지고 한번 승리를 해보려고, 마치 사무엘처럼 말이다. 자기들도 위대한 사사가 되는 것처럼 남들에게 한번 폼을 잡으려고 하다가, 그런데 그만 그 언약궤가 어떻게 되는가? 블레셋에게 그만 언약궤를 빼앗기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축구시합을 하는데, 붉은 악마를 동원해서 사우디에게 이기려고 하다가, 그런데 사우디가 더 겸손하게 마음을 낮추어서, "야, 저렇게 붉은 악마가 나왔으면 우리가 불리하다. 그러니 정신을 더 바짝 치려"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2:0'으로 이긴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언약궤가 있으면, 이 언약궤에 담긴 원칙이 민수기에 보면, 이 언약궤가 진격하면 적들이 물러가고, 또한 멈추면 적들이 항복하는 그런 언약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언약궤에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계시는가?
◈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 !!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계신다" 라는 것을, 그렇게 이야기하지를 않고,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신다" 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어려운데,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지 않고, 이름이 계신다고 한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데, 그리고 이 땅에 상주하시는 하나님을 두고서 '하나님의 이름'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보다 더 명확하도록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아직까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 분이고, 이 땅에서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하나님을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약에서는 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 이란 분이 시간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왜 달라지는가? 그것은 하나님은 언약에 따라서 일을 하시기 때문에, 그 언약에 따라서 필요한 이름들이 새롭게 추가가 된다는 것이다.
◈ 웬 옥주현 ??
쉬운 예를 들어보자면, '옥주현' 이란 가수가 있는데, 그래서 "옥주현은 노래를 잘한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맞는 말인데, 옥주현은 이름인데, 그 이름은 항상 존재로 대변해준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름 속에는 기능이 들어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앞으로의 운명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는 것은, 그것은 곧 "앞으로 그 이름에 합당한 일을 해내시는 분이 오셨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도 말씀을 전하는 목사라고 하면 이런 것들을 교인들에게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데, 즉"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이름 석 자를 부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 쪽에서 알아서 자기 약속을, 즉 주님의 이름에 걸맞는 합당한 일들을 역사 속에, 즉 인간세계에 한번 슬슬 펼쳐보겠다는 의미라는 말이다.
◈ 이름은, 언약에 따라서 그 기능이 !!
그것이 바로 '이름'의 의미인데, 그런데 그 이름이 왜 바뀌는고 하니까, 언약에 따라서 기능이 바뀌어지니,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옥주현의 경우에 노래를 잘 하는 가수인데, 그런데 사회도 잘 본다는 말이다. 그러면 가수도 되지만, 사회자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드라마에도 나와서 연기도 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노래도 잘하고, 사회도 잘하고, 또 연기도 잘하고, 그러니 만능 엔터테이너가 된다는 것이다.
◈ 구속사 - 죄를 용서하는 은혜의 능력의 놀라움을 !!
지금 제가 구속사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구속사에 있어서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라는 것을 구속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의 구속사는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데, 그래서 어떤 양반들은 '계시사' 라고 하기도 하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구속사(救贖史)' 라는 것은, 하나님 속에 담겨있는 그 풍부하고 다양한 기능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서, 즉 인간이 죄를 지을 때마다 조금씩 그 면모를 드러내는데, 그 은혜의 능력이 참으로 놀랍다는 것이다. 죄를 용서하는 은혜의 능력이 말이다.
◈ 다윗언약에 있어서 '主'의 개념은?
다윗언약에 있어서 '주'의 개념이 무엇인고 하니, 제사와 번제를 원치 않고, 상한 심령을 원하는 주님이라는 것이다. 즉 간통하고 살인한 다윗을 그저 받아주시는 주님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다른 희생 제물로 말미암아 엉뚱하게 구원이 되는, 그런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이 바로 다윗언약의 주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의 모세언약에서는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아직 다윗이 나타나기 이전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에 있어서 새 언약은 무엇인가? 자기 나라를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인데, 에스겔과 예레미야 때의 새 언약의 특징이 비록 자기 나라와 자기 백성이라도 망하게 하시는, 그러한 주님의 기능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 언약은 무엇인가?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 모든 역사를 종결시켜버리는, 끝내버리는 그런 이름이, 그때부터는 그냥 주님이 아니라, '주 예수'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
그래서 사도행전 3장에서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보고서 베드로가 뭐라고 하는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본분에는 '예수 그리스도' 인데, 그리스도는 예수를 설명해준다는 말이다. 바로 그 주 예수의 이름에, 주님의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이 주 예수를 부르는 자에게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 오른손에는 장수가, 왼손에는 부귀가 ??
지금 제가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진보를 너무 많이 나간다고 좋은 것도 아니니 말이다. 시간을 조금 늘이는(?) 의미에서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잠언서 3장 16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라고 말이다.
흔히들 목사들이 심방을 가서는 많이 인용하는데 말이다. 즉 "집사님이 말씀에 순종하면,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왼손에는 부귀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모두를 다 잡는 것이니 말이다.
(잠 3: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 이 말씀이 어떻게 십자가인가?
바로 이 말씀의 완성을 교인들은 바라고 있는데, 그런데 그 완성이 놀랍게도 신약에서는 십자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교인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는데, 그것이 천년만년 살면서 재벌이 되는 것이 전혀 아닌데 말이다. 그러니 목사의 임무가 무엇인고 하니, 잠언서의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완성이 된다는 사실을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을 받아야 알아듣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오래 살고 돈을 많아 버는 것이 어떻게 의미가 변천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것으로 되어지느냐는 것이다. 왜 그러한지, 그것을 지금 설명해보면, 지금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천천히 살펴보자는 말이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왼손에는 부귀가 있는 것의 완성이 곧 십자가이다" 라는 것인데, 지금 이것이 구약에 있는데, 즉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말이다. 물론 율법을 구약과 선지자로 보지만 말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이러한 율법을 주시는 것은, 우리 인간들 속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말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언약에 준해서 !!
아까 하나님의 이름이 뭐라고 했는가? 하늘에 계신 분은 하나님이고, 이 지상에서 활동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이름은 언약에 준해서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약에 준해서 일한다는 것은 어떻게 일하는 것인가?
◈ 왜 언약이 여러 개인가? 인간의 죄를 !!
그리고 언약을 굳이 주려고 하면 하나만 주면 되는데, 그런데 왜 여러 개를 주셨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 속에는 우리 자신도 미처 모르는 죄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죄를 드러내는 것이 언약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꼭꼭 숨어있는 죄가 어떻게 드러나는가? 안색이 변하면서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 자기, 나 사랑해?
저는 이 대목을 볼 때마다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는데(?), 왜 그런고 하니,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상대방이 기대에 너무나 어긋나는 말을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방금 5초 전에 헤헤거리면서 손을 잡고 쪽쪽거리던 사이라도 그만 안색이 변해버린다는 것이다. 드라마에도 보면 이런 내용들이 많이 나오는데 말이다.
* 여자 : 자기야, 나를 사랑해?
* 남자 : 물론 사랑하지.
* 여자 : 그러면 왜 사랑하는데?
* 남자 : 그야 물론 당신이 얼굴이 예쁘고, 마음이 고와서 그렇지.
* 여자 : 그리고 또 없어?
* 남자 : 그것은 당신이 돈이 많아서 나는 앞으로 먹고 놀아도 괜찮아서 그렇지.
* 여자 : 뭐라구?
* 남자 : ???
◈ 그러면 가인은 왜 안색이 변했는가?
이렇게 되면 여자가 그만 안색이 변하는데, 아무리 좋아하는 남자라도, 그런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을 듣게 되면 말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그렇게 안색이 변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놀아주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창 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창 4: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다시 말해서, 가인은 자기가 생각했던 그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안색이 그만 변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가인의 경우만이 아니고, 누구가 다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데, 아니 다 그렇다는 말이다. 소위 "배신을 때렸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아니, 목사님이 나를 ??
예를 들어서, 당회장 목사가 부교역자를 자랑하는데, 설교시간에도 자랑을 하고 심방을 가서도 자랑하고 말이다. 그런데 어느날 당회장이 설교를 하는데, 그만 자기를 치는 내용이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부교역자는 그만 안색이 변하는데, 그것은 그 부교역자의 마음속에 안색이 달라질 만한 악한 요소가 이미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런데 자기는 그것을 잘 조절해서 터져 나오지 않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즉 "나 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범사에 감사한다" 라는 말이다.
그것은 교인들도 마찬가지인데, 기도할 때마다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주여, 앞으로 어떤 난관이 와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또한 범사에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너무나도 도발적이고 예상치도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는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아하, 나의 본색을 드러내기 위해서 !!
그러므로 결국 인간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간은 자기 죄가 어느 정도 깊은지를 모르는데, 그래서 그런 자기 죄를 깨닫게 해주는 봉사를 누가 해주는고 하니, 그것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 중에서 하나가 바로,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왼손에는 부귀가 있다" 라는 말씀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그렇게 고마운(?) 말씀을 주니, 인간들은 그만 그 말씀에 혹해서, 즉 그 두 가지를 얻기 위해서 나름대로 말씀을 지켜나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지켜나가는가? 바로 그것은 안색이 변할 수밖에 없는 죄악의 욕망에 의해서 지켜나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니, 결국에는 약한 자를 포기하고 나아가서 약한 자를 핍박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장수와 부귀를 얻었으니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폼을 잡다가, 결국은 많은 주의 종들을 괴롭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잠언서의 말씀은, 그 말씀으로 인해서 잠재되어있던 우리의 욕심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바로 저거다. 저것을 잡으면 행복할 텐데" 라고 하면서, 그렇게 행복의 수단으로 장수와 부귀를 추구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서 말씀을 지키려고 노린다는 것이다.
◈ 사울왕이 사무엘을 기다리면서, 무슨 사고를?
사울왕이 사무엘을 기다리면서 무엇을 했는가?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결국은 자기가 제사를 드리고 말았는데, 그러면 왜 제사를 드리려고 했는가? 그것은 제사를 드려야만 전쟁에 나갈 수가 있는데, 그러니 적들은 코앞에 있고, 어떻게 달리할 도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을 하기에 앞서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이여,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제사가 중요한데, 그런데 사무엘이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먼저 자기가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오고도 남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제사를 드리고 나서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역시 사울왕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
그렇다고 하면, 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제사를 드려라" 라고 하는 법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숨어있는 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란, 자기가 사업을 하든 식당을 하든,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을 하기에 앞서 먼저 예배를 드리고 하면서 반드시 좋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인들은 밥을 먹기 전에도 기도를 하는데, 당연히 기도하는 내용은, "이 밥을 먹고 나서 하는 일들이 되게 하소서" 라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특히 아이들이 하는 식사기도의 내용을 들어보면, 그러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즉 "하나님, 이 밥을 먹고 건강하게 해주시고, 그리고 공부도 잘하게 해주시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을 짓기 전에도 기도하고, 차를 구입하기 전에도 기도하고, 그렇게 기도를 하고 나면 반드시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 선입관이 결국 누구를 핍박하고 모독한다는 말인가? 사무엘을 보내신 하나님을, 즉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법을, 인간들이 안색이 달라지면서 사무엘을 공격하고, 다윗을 공격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 사울의 얼굴 색이 변하는가?
사무엘이 다윗을 왜 공격하는가? 얼굴 색이 변해서 그렇게 공격한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 지금까지 저에게 그렇게 잘 해주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왜 그렇지 않습니까? 이전에 실로암 물가에서 회개할 때는 도와주다가 왜 지금은 외면합니까?" 라고, 그렇게 하면서 안색이 변하면서 그만 하나님이 자기 원수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가롯유다의 경우도 어떠한가? 처음에는 그도 분명히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쳤는데, 그러므로 그도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 맞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가롯유다가 무엇인가? 그가 바로 마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숨어있는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우리의 죄가 터져 나올 때마다 거기에 합당한 더 큰 죄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언약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인간들은 처음부터 아예 죄에 갇혀있음을 밝혀낸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이름은 '말씀=창조' !!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인데, 이 이름은 의사소통의 용도가 아니라, 즉 어떤 상대가 있어서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들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름 자체에서 하는 모든 말씀은 그 자체가 곧 성취인데, 그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말씀=창조' 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 내부에는 죄가 있는데, 그 욕망이 뭐라고 하는가? "내가 범사에 감사해야지"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진짜 감사는 무엇인가? 그 감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가 아님을 깨닫고 회개할 때, 바로 그 회개함 자체가 주님이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하는 그 말씀의 성취적인 열매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감사가 우리에게는 회개하는 모습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하, 내가 죄인 중에 괴수구나. 감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이구나. 그런데 이런 못난 인간을 구원해주시다니,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인간의 모습이고 말이다.
◈ 주여, 제 아내를 데리고 가시니 감사합니다 ??
예를 들어서, 자기 아내가 죽었을 때에, 그런데 인간은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말씀을 알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장례식을 치르고 교회에 와서 감사헌금을 내는데, 속은 마구 뒤집어지는데도 말이다. 물론 가끔은 정말로 감사하는 인간도 있지만 말이다(ㅋㅋ).
그래도 예수님을 믿으니, 그러한 믿음의 모범을 보인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헛된 짓을 하든 말든,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받은 것이지, 자기의 그런 위장된 감사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깨닫는 순간, 즉 "아하, 이런 교활한 놈도 구원을 받는구나" 라고 하면서 감사할 때, 그것이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 설교란, 상대방이 쥐고 있는 패를 까발리는 것 !!
그러므로 목사는 설교를 하면서 이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해주어야 하는데, 일단 말씀을 전한 다음에 교인들이 그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에 이것을 상대방의 화투패를 다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화투패를 설명하다보면 30분은 금방 지나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땅 끝까지 전도하라" 라는 말씀을 설교하려고 하면, 도대체 전도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일일이 다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기존 교회에서 하고 있는 모든 전도방법이 여기 '아님'에 속하는데 말이다.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요것도 아니고" 라는 식으로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왜 아닌지를 말이다.
◈ 전도 - 아하, 나는 전도와 상관없는 인간이구나 !!
그러니 결국은 무엇인가? 오직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전도가 임하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자기의 전도가 되었음을 깨닫는 그 순간, 그것이 전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은 우리가 전혀 지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주님이 다 지키시는데, 그런데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우리가 그런 것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 내가 저것을 안 지키면 벌을 받는데"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가? 아니, 어떻게 '전도하라' 라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가? 오직 십자가로 구원받지 말이다. 그렇게 말하면 우리는 또 어떻게 생각하는가? "전도를 안 하면 구원은 받아도, 그래도 벌은 받지 싶은데" 라고 걱정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 자체가 전도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 그렇다면, 다시 묵시란 무엇인가?
따라서 "묵시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묵시세계에는 역사가 없는데, 묵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있어서, 역사는 바로 묵시를 공격하는 한다는 것이다. 즉 역사에 대한 정죄, 그래서 묵시가 등장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역사를 정죄하기 위해서 나타날 때 비로소 묵시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엘리야의 경우에 !!
예를 들어서, 열왕기상에 보면 선지가 엘리야가 나오는데, 그가 '850:1'로 싸워서 승리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만 이세벨이 죽인다고 하니, 겁은 많아서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갈멜산 깊은 곳에 숨어서 도를 닦고 있었다는 말이다.
아마 거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바랐던 것 같은데, 즉 "하나님이여, 지금 저의 모습을 보고나 있습니까? 어떻게 좀 해주세요" 라고 말이다. 그것을 로마에서는 "하나님이여, 다른 사람은 다 죽고 왜 저만 남았습니까?" 라는 식으로 좌절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처음에 엄청나게 강한 바람이 일어나는데, 그래서 엘리야는 "이런 강풍은 하나님이 아니라면 도저히 만들지 못하지" 라고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지진이 일어나는데, 그래서 엘리야는 "아하, 하나님이 여기 계시는구나" 라고 하는데, 역시나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불이 나타나는데, 거기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인가? 아주 세미한 음성 가운데, 바람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세미한 음성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런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시는가? 강풍과 지진과 불 가운데, 그렇게 아주 요란법석을 떨면서 엘리야가 원하는 식으로 오시지 않고 말이다.
(왕상 19: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왕상 19: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예상을 공격하면서 !!
왜 그런고 하니, 항상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식을 공격하면서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이것을 잊으면 안 되는데, 항상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예상하는지 그것을 아시고, 그것을 공격하면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즉 우리가 수긍하는 쪽으로 등장한다면, 그것은 마귀의 짓이라는 말이다.
우리 인간들은 항상 먼저 예상하고 공상하는 것이 있는데, 환상을 가지고 있고 비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꿈을 다 부수어지고 깨어지고 난 다음에, 전혀 엉뚱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의 얼굴을 내민다는 것이다. 마치 구름 사이에 따뜻한 햇살이 비추어지듯이 말이다.
바로 그렇게 되면, 비로소 우리 인간들은, "아하, 캄캄한 가운데서 내가 그야말로 헛된 꿈을 꾸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하루에도 수천 번을 그런 헛된 꿈들을 꾸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1분에 60번씩을 말이다.
◈ 목사가 꾸는 헛꿈은?
이마 광주에서 그런 강의를 했지 싶은데, 목사들이 꾸는 헛꿈이 무엇인고 하니, 일요일 아침만 되면 누가 오고 누가 오지 않았는지, 그것을 일일이 다 점검한다는 것이다. 즉 "김 집사는 왔는가? 최 집사 저 인간은 또 지각이네. 지난번에도 늦더니만. 한번 손을 좀 봐야겠네. 그런데 박 집사는 어디 갔지? 벌써 3주 째인데, 다른 교회에 간 것은 아닌가?" 라고 말이다.
그렇게 교인들의 출결상황을 일일이 다 체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가 되어서 설교준비에 바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교인들 출석을 관리한다고, 정작 중요한 설교를 다 까먹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교인들이 결석을 많이 하고 얼굴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 화가 나서 그만 설교고 뭐고 간에 예배 자체가 엉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교인이 몇 명밖에 없으면 그런 일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교인이 어느 정도 된다고 싶으면, 그 다음부터는 단도리(단속?)하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전혀 예상치도 않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2년만에 처음 오는 교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인들을 살피고 있는 목사를 부끄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다윗왕이 숫자를 헤아리는 것과 같은데, 하지만 다윗의 그런 짓으로 도대체 몇만 명이나 죽었는가? 7만 명인가 죽었지 싶은데, 지금 한 사람이 아까운 마당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윗의 잘못으로 말이다.
◈ 염려하지 말라 !! - 염려하는 인간을 공격 !!
그래서 예수님의 "왜 염려하는가?"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것은 주님이 그냥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이 다 지킨다는 것이다. 바로 "염려하지 말라" 라는 그 말씀을 성도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염려하는 구석구석을 일일이 다 찾아 다면서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도록 만들어놓고는,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내가 뭐라고 하더노? 염려하지 말라고 했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아하, 맞습니다. 이 세상은 말씀대로 되지, 내 포부대로 되는 것은 전혀 없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새삼스럽게 회개하는 것이 바로 묵시가 접촉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는 항상 묵시와 만나게 되는데, 마치 지평선에서 하늘과 땅이 만나듯이 말이다.
그렇게 만나면 묵시가 알아서 일을 하는데, 그런데 역사 속에 있는 우리는 매일같이 하는 짓이 걱정인데,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묵시는, 그것을 약속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즉 약속은 그런 우리들의 걱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일관되게 자기 뜻대로 일을 진행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전혀 허락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적용시키고 말이다.
◈ 요한복음 16장 8절에서 !!
그러므로 묵시는 역사를 고발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16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든든한지, 물론 하나님은 든든하신 분인데, 조금 건방진 표현이지만 그야말로 천재(?)라고나 할까? 아무튼 하나님은 빈틈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떠나가야 보혜사가 오는데, 여기서 '보혜사' 라는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에게 숙제를 내어주는 분이 아니고, 그 누구도 우리는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데, 그런데 보혜사가 우리 대신에 말씀을 다 지켜내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전혀 말씀을 적용시키지 못하는데, 그런데 성령께서 "염려하지 말라" 라는 말씀을 모두 우리에게 일일이 다 적용을 시키는데, 마치 농부가 모심기를 하듯이 말이다. 물론 다른 말씀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성령의 객관적 사역 -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 !!
그렇다면 어떻게 모심기를 하는데, 바로 그 객관적 모습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는데, 즉 묵시와 역사가 만날 때 어떤 모습인지, 그것이 요한복음 16장 8절에 나온다는 것이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여기 8절에 보자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라고 하시는데,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라고 세 가지를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한 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한 가지를 세 가지로 이야기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보자는 말이다.
이것을 성령의 객관적 사역이라고 하는데, 이 성령의 3가지 사역이 바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책망하는 것이 객관적 사역이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염려하지 말라, 술 취하지 말라,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이다" 라는 것도 책망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 말씀을 볼 때는 그 말씀이 분명히 지키는 대상이지만, 하지만 성령이 말씀을 지키게 되면, 그것은 우리를 책망하는 도구가 된다는 말이다. 즉 우리는 자꾸만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쓰고,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렇게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우리 자신을 두고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좀 어려운가요?
◈ 멈출 수 없는 회개 !!
그래서 이번에 출판하는 '지옥의 하나님' 이란 책의 소제목이 '멈출 수 없는 회개' 인데, 그 앞의 제목은 '멈추지 않는 자기 의' 이고 말이다. 그렇게 '멈추지 않는 자기 의'에서 '멈출 수 없는 회개'로 나아가는데, 그것이 결론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책망하는데, 그러니 우리가 말씀을 보면서 책망을 받거든, 그것이 곧 성령의 역사라는 말이다. 성령이 그렇게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들을 관리하고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뭐라고 고백하는가? "오, 주님이시여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항상 감사가 터져 나온다는 것인데, 즉 성령에게 마구 얻어맞으면서도 감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희한한데, 성도는 그렇게 얻어터지면서도 감사를 한다는 말이다. 자기를 마구 때려주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쳐서 자기 주제를 다시 파악하도록 해주었으니 말이다.
◈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 '죄관'이 !!
그렇다면 여기서 이러한 과정이 필요한데, 즉 우리는 말씀을 가지고 "이제 새 생명을 받았으니 말씀을 지키자"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러한 인간을 과연 어떤 경로를 통해서 접근하느냐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말씀을 지킬 때, 이것이 어려운데,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까, 즉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죄관'이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저 말씀을 지키면 '의'이고, 지키지 못하면 '죄'가 된다" 라고 하는데, 그런 나름대로의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을 스스로 하게 되는데, 즉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즉 자기 스스로 심판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 관리에 나선다는 말이다.
◈ 인간과 예수님의 충돌이 곧 십자가 !!
우리 인간들은 말씀을 보면서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말씀을 가지고 대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야, 손을 안 떼나. 어디서 감히 그런 사고방식으로 말씀을 지킨다고 해" 라고 지적하는 것이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지적을 하면서, 우리와 그만 마주치게 하신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식당에서 낙지뽁음을 한창 맛있게 먹고 있는데, 그런데 웬 사람이 "낙지뽁음이 맛있어" 라고 아주 굵은 음성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앉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어제 자기에게 얻어맞아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과연 그 낙지뽁음이 맛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아이쿠, 미안합니다" 라고 하면서 의자를 돌려서 앉는다는 것이다.
◈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가 !!
이와 같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착하고 그렇게 않고 하는 것을 떠나서,
모든 인간이 다 죄인임을 알리기 위해서
피를 흘렸다는 말이다. 그 어떤 인간이든지 간에 말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올 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아도 나올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있었는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그날 밤에 주님의 심판주가 무엇을 보고 그냥 넘어갔는가?
우리는 이 대목에서 도저히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간다는 것이다. 즉 문설주에 피만 발려있으면 그냥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 안에 어떤 흉악한 놈이 있던지, 아니면 착한 놈이 있던지 간에 말이다. 비행기가 그야말로 폭탄을 퍼붓는데, 그런데 피만 발린 집이 있으면 그냥 피해서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도, 다른 집은 다 박살을 내는데, 그런데 창문에 붉은 줄이 달린 집은 무사통과라는 말이다. 노란 리본이 아니라 붉은 리본이 말이다. 그것이 바로 새 언약인데, 이렇게 하나님은 언약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의 처지는 전혀 고려해주지 않고 말이다.
◈ 무조건 피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 !!
아무튼 하나님은 이렇게 피만 있으면 그냥 넘어가는데, 하지만 예수님의 이 피는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하는 그 자체로서 이미 생명나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인간이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 나름대로의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즉 "이것은 선이다. 또한 이것은 악이다" 라는 식으로 시건방을 떨면서, 사실은 인간도 아닌 것들이 인간행세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뭐라고 하는가? "어디 말씀을 한번 지켜봐? 제사를 한번 드려봐? 부활절을 한번 지켜봐" 라고 하면서, 그야말로 인간도 아닌 것이 그렇게 지키겠다고 할 때, 그때 그 앞에서는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분의 피 흘리심을 바라보면서, 우리 인간의 말씀에 대한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당하는 상태가 될 때, 바로 그때가 묵시가 역사와 만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
이것을 요한복음 3장에서는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즉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뭐라고 하는가? "육은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는데, 육은 역사에 속하고, 성령은 묵시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시가 역사를 구원하지 않으면, 그 어떤 사람도 무시의 세계로 돌입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것을 스가랴에 나오는 말씀처럼,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슥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 성령 '보혜사'의 의미는? 오직 예수님만을 드러내 !!
여기서 이 묵시를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해보면, 아까 성령을 '보혜사' 라고 했는데,
그 보혜사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안에 내용물은 없고 관리자의 의미인데,
즉 이미 이루어진 것을 후차적으로 관리하는 관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혜사 성령은 자기 고유의 것이 없는데,
즉 예수님이 하신 일이 곧 자기 일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성령 나름대로의 일은 없는데,
다만 예수님이 하신 일을 객관적으로 성도에게 묵시의 전달자로서 적용시키는 일만 묵묵히 하신다는 것이다.
◈ 성령은, 성도에게 십자가를 기준으로 책망을 !!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성령은 성령 자신을 존중하라고 성령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라고 성령은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님은 성도를 책망하는, 그러한 자기 일을 하다가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하는 법은 없는데, 그것은 마치 선생님이 아이들이 숙제를 안 해서 야단을 칠 수는 있지만, 선생님 자신의 숙제를 도와달라고 하지는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사실은 있는데, ㅋㅋ)
다시 말해서, 성령님은 "너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너 자신의 잘못을 파악치 못하는가?" 라고 하면서 우리 자신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시는 일이 바로 성령님의 하시는 일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성령님의 객관적 사역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객관적이라는 말은, 다른 내용은 없고, 이미 확정된 내용물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성령의 일인가? 아닌가?" 라는 기준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의, 우리의 죄, 우리의 심판, 여기서 심판은 판단한다는 의미인데, 아무튼 그 근원자체에 대해서, 그렇게 선악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일이 성령의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도 모르고, "목사님, 방언을 하는 것을 성령의 일이 아닙니까? 또 병을 고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까? 그리고 행운이 찾아오는 것은 어떻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마귀에게 가서 물어보라는 말이다. 성령의 역사는 그렇게 무엇을 더 보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책망하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이 성령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성령이 책망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근거해서 책망을 할 때, 그것을 성령을 역사라고 한다는 말이다.
◈ 떨리고 긴장되는 공중기도, 그러나?
예를 들어서, 같은 교인들끼리 기도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기도를 잘한다는 것이다. 특히 공중기도를 시켜보면 그것이 드러나는데, 그런데 우리교회에서 실제로 어떤 분이 기도를 하다가 그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는 것이 그만 빼먹고 '아멘'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봐도 대중들 앞에서 기도를 잘 해보지 않은 것이 드러나는데, 물론 사람들이 많으면 떨리기는 하지만, 그러나 기도는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도 주님에게 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는 주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닌 대중들을 의식해서 기도가 잘 나오게 되는데, 그러니까 점점 더 교만한 기도가 되는데, 그런데 이분은 아직 덜 교만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냥 '아멘'을 하고 마쳤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분은 기도를 하다가 마무리가 되지 않아서, 그만 36계 줄행랑을 놓았다고도 하는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되었을 때, 이 양반이 교인들에게 얼마나 송구하고 부끄럽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공중기도를 시키는데, 또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 마지막에 큰 실수(?)를 하게 하고,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는 것을 그만 빼먹고 자기 혼자 '아멘'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저도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르는데, 아이도 아닌 어른이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될 때 수치스럽고 부끄럽다는 것이다.
◈ 왜 그것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가?
그런데 왜 그것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운가? 그것은 바로 평소에 우리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저 사람처럼 기도해야 나도 괜찮은 기도가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한 기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분이 자기가 기도를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빼먹어도 그것이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 사람은 정말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기도를 잘 하려고 한 그것 자체가 죄인 것을 알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기도를 잘한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기도에 대한 기준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잘하고 못함이 십자가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인간들끼리 그렇게 모여서 그야말로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것이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앞에 가서 예수님을 이름을 빼먹어도 천국에 간다고 하는 사실을 감사함으로서 받을 때, 그렇게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될 때, 그 순간 그 사람에게는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기도를 하면서 또 다시 빼 먹도 괜찮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당당하고 떳떳한 사람이 바로 성도라는 것이다.
◈ 이혼하고 난 뒤에는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는가?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면, 어떤 사람이 교회에 열심히 잘 다녔는데, 그런데 그만 이혼을 하고 난 다음부터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쪽팔린다는 것이다. 물론 목사가 이혼했다고 야단을 칠 것 같아서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닌데, 다른 교인들의 수군거림이 마냥 신경이 쓰이고 겁이 난다는 것이다.
물론 교인들은 겉으로는 "참 안 됐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이 속으로는 "참 꼬시다(고소하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장가를 갈까봐 은근히 질투도 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한번밖에 가지를 못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교인들의 구설수에 오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심적으로 부담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부끄러워서 교회에 가지를 못하는데, 하지만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래. 나는 지금 6번째 남자를 사귄다" 라고 당당하게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제가 6번씩 결혼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아니고, 즉 성령이 임하면 결혼을 6번이나 한다는 말이 아니라, 아무튼 그런 상황이 와도 부끄럽거나 쪽팔리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 아니, 이런 개지랄 같은 짓이 ??
다시 말해서, 성령의 객관적 사역이 무엇인고 하니, 술과 여자를 끊고 개과천선한다는 말이 아니고, 결혼을 6번을 하더라도 동시 다발적으로 여자를 사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한 사람과만 결혼생활을 나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성령의 객관적 사역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러한 따짐 자체가 십자가 앞에서 무슨 개지랄 같은 짓이냐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것을 깨닫게 될 때, 그 사람이 곧 성령이 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 제가 하는 말은, 그렇게 결혼을 여러 번 한 것이 결코 잘했다는 소리가 아니라, 물론 한번 한 것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렇게 여러 번 결혼을 하는 것이, 결코 잘하고 못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누가' 우리에게 무엇을 베풀었는가?
그런데 목사에게 그런 것을 목격하면서 제일 큰 시험이 무엇인고 하니, 교인수가 줄고 헌금이 적게 나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목사의 정신이 혼미해진다는 말이다. 그게 심하면 언덕에 올라가서 그냥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도 들고 말이다.
바로 그럴 때, 역사적으로 따져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라는 6가지를 따지면, 물론 상대방에서도 그렇게 따지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누가 더 옳은지를 따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묵시 앞에서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이다. 단지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누가' 라는 것인데, 즉 "누가 우리에게 무엇을 베풀었는가?" 라고 말이다. 그것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 성경말씀을 묵시로 보는 안목을 !!
지금 이렇게 우리 강의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묵시와 역사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두 시간에 걸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제발 신약성경에 와서는 묵시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달라는 것인데, 이렇게 묵시를 안다는 것은 역사도 안다는 의미인데, 그러니 거듭난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심보도 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자기 모습이기에 말이다. 그렇게 양쪽을 다 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음시간부터는 신약성경에 들어갈 것인데, 제가 모든 말씀을 다 묵시로 해석을 할 텐데, 그것을 너무 어렵게 여기지 말고, 물론 그때그때 묵시와 역사의 차이점을 설명할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묵시로 하면 우리 교재 이 '교회를 넘어서'가 뒤쪽에 분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진보를 내기가 상당히 힘이 든다는 말이다.
◈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묵시적 사건이 되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5분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지금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고 했는데, 요한복음 16장 8절 말씀에 근거해서 말이다. 그리고 성령은 본인의 것이 없는데, 모든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역사적인 우리 인간들에게 묵시를 가지고 들이미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이제 이것만 설명하고 오늘 강의는 그만 마치도록 하겠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묵시가 되는가?" 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은 분명히 역사적 사건이 맞는데, 그런데 어떻게 그 역사적 사건이 묵시적 사건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묵시적 사건' 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묵시는 역사를 고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다" 라는 말이다. 즉 그 어떤 날이든 간에 십자가는 천년 이후에도 십자가이고, 또 천년 이전에도 십자가이고, 그렇게 오직 십자가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말이다.
◈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묵시적 인물이기에 !!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묵시적 사건이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바로 무슨 인물이기에 그렇다는 말인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묵시적 인물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이 저의 주장이 아니라 요한복음 8장 23절에 나오는데, 한번 찾아보자.
(요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예수님은 분명히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 달린 인물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묵시적 인물임을 스스로 밝히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7장을 한번 찾아보겠는데, 32절부터 제가 읽습니다.
(요 7:32)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요 7: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요 7: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요 7: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요 7: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 동일한 사건도, 예수님은 묵시적, 인간들은 역사적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여기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라고 하시는데, 즉 자기가 가는 곳에 그들이 따라오지 못한다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역사적으로 해석을 해서, 예수님이 어디 강원도 산골짜기 아주 깊은 곳으로 가는 바람에 자기들이 가지 못한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묵시적으로 보시는데, 그렇게 똑같은 언어를 가지고도 유대인들은 그만 역사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즉 "저 양반이 어디로 가겠다는 말인가? 어디서 은둔생활을 하겠다는 말인가?" 라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세계에, 즉 단절된 세계에 가시겠다는 것이다.
◈ 하나님 살해사건을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는 증거물로서 !!
그런데 바로 그러한 분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묵시적인 마지막 종말의 기능을 이 역사세계에 퍼뜨리겠다는 것인데, 마치 바이러스를 퍼트리듯이 확산을 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대유행의 경고를 내려야하는데, 즉 하나님은 이제 하늘에서 묵시라는 폭탄을 마구 이 세상에 퍼붓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이 땅에 속한 인간들이 과연 누구를 죽었는가? 하늘나라에 속한 분을, 즉 묵시세계에 속한 분을, 그것도 이 땅에 직접 오신 하나님을 그만 살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님은 그것을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는 증거물로서 삼겠다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선언이 성령님의 객관적 사역이라는 것이다.
◈ 저는 아담에 속한 죄인이 정녕 맞습니다 !!
따라서 우리는 그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주여, 저는 아담에 속한 죄인이 정녕 맞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것이다. 다른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자기가 죄인이라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경말씀 그 어느 곳이라도 전혀 제대로 지킬 수가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죄인이라는 근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서 3장 16절에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라고 하면, 그것을 지켜서 두 가지를 다 가지려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얻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날마다 자기 속에서 그런 욕심이 터져 나오는데, 그래서 성공을 바라지만 실패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 자체가 성령님을 만나게 되면, "주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니,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사도바울의 경우에 !!
그래서 사도바울은 묵시적 존재가 되고 난 다음부터는 자기는 이미 그만 고인(故人)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죽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사도바울은 역사적으로 보면 고인이고, 또한 묵시적으로 보면 그의 생명은 하늘에 감추어져 있으니, 그렇게 묵시적 존재로서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사도바울에게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가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묵시적 세력 안에 있기 때문에, 혹은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희한한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이것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그렇다면 목사님, 목회를 함에 있어서 과연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런데 그런 사람만 있어서 그들만 골라 골라서 교회가 되면,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모두가 다 '아멘' 이라고 합창을 하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정말로 하늘나라가 될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사람이 물론 있기는 하겠지만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다.
◈ 그러면 '전도하라' 라는 의미는?
그런데 성경에 보니 이런 말씀이 있는데, 아까 말씀이 곧 창조라고 했는데 말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고 '전도하라' 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백성들이 있기 때문에 찾아가라는 말인데, 그러니 '전도하라' 라고 하신 이유는, 그 말씀이 곧 창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창조는 항상 '무에서 유로' 되는 창조이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누가 뭐라고 해도 저 사람만은 때려죽어도 천당에 가지 못한다" 라고 장담을 했는데, 그런데 우연히(?)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 중간에 누가 개입한 것인가? '전도하라' 라는 말씀의 실행자이신 성령께서 그 순간에 창조의 능력을 발휘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전이 이미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누구는 천국에 가고, 누구는 가지 못하고" 라는 식으로 분류를 다 해놓았는데, 그런데 그러한 분류에 의한 지옥에 가는 자들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성령님의 말씀의 창조능력으로 인해서 말이다.
◈ 성령께서, 누구를 어떻게 새롭게 창조할지 모르니 !!
예를 들어서, 자기 교회 교인이 약 50명 정도가 된다고 했을 때, 20명 정도는 몰라도 나머지 30명은 영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를 다녀도 시간이 나면 오고, 그렇지 않으면 골프나 치러 다니고 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놀랍게도 그만 역전이 되어서 30명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 그런데 그 20명이 그만 엉망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또 역전이 되고 말이다. 그러니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는데, 성령께서 누구를 어떻게 새롭게 창조할지 말이다.
◈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
그렇다고 하면 목사들은 당연히 교인수에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전혀 그런 것 때문에 흥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처럼 그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가 곧 주님이 주신 하나의 상급으로 여기고, 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오직 말씀을 전파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런 부탁을 했는데 말이다.
(딤후 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나머지는 다 하나님께 맡기면 되는데, 자기 교회가 어디에 있고, 자기 교인이 어디에 있는가? 어차피 처음부터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소유였는데 말이다. 주님의 성도이니, 당연히 교인수도 의미가 없고, 단 한 명이 자기 앞에 앉아 있어도 묵묵히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그런 사람이 바로 묵시적 존재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생각하고 사도바울을 생각하면, 우리가 참으로 한심스럽게 살아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나가면 또 사람들에게 기가 죽지 않으려고 자기의 성공이라는 증거물을 내보이려고 하는데, 즉 자기의 잘남을 자랑하기 위해서 역사적 증거물을 찾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항상 인도하셔서 묵시적 존재로서 위만 바라보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6,14 새벽 3시 30분에 마침.
이렇게 열심히 설교준비를 하는 것을 교인들이 좀 알아줄려나,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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