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70이레10강

아빠와 함께 2013. 4. 24. 08:22

 

2011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j

(강의:이근호 목사)



이번 수련회 마지막 강의입니다.


지금까지 한 걸 들어보니까 우리는 매일같이 가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가짜를 숨기려는 그런 시도로써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짜일 수밖에 없는 수련회 끝나고 어디에 들어가느냐 하면, 바로 구조가 기다리고 있죠. 이 구조는 내 것을 주지 아니하면 저쪽이 날 상대하지 않고, 서로가 줄 때는 돌려받을 것을 예상하는 그 구조. 주고 또 주고. 주지 않고는 돌려받을 게 없는 구조가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조 속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이 구조 안에서 하나의 지점으로 교차점으로, 구조란 정육면체 같은 이런 촘촘한 구조에 우리는 지금 어느 지점에 있는지. 이 구석에 있을 수도 있고, 이 구석에 있을 수도 있고. 그러다가 깜빡깜빡 점멸하다가 나이 칠십 되면 어느 병원에서 돌아가신다든지, 영안실에 계시다는 소리 들리고. 그러면 자리를 다른 구조가 차지하겠지요.


인간들끼리 주고받는, 너와 나가 주고받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론이죠. 너와 나의 주고받는 구조 속에서 우리의 육체는 여기 있다가 여기 가면 또 여기 기능을 해야 돼요. 아무 기능도 못하는 구조는 구조에서는 있으나마나 어디서 어떻게 유학하던지 그건 관심 없어요. 이 구조 안에서만 사람 취급받는 이런 자본주의구조 안에 우리가 살게 됩니다. 이 전체구조가 바로 가짜다. 우리가 가야산에서 수련회 하고 다 복음을 알고 해도 다시 산 밑에 내려가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시 위선으로 살아야만 하는 구조가 있고, 그 구조 바깥에 나가버리면 우리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되는 그러한 세계에 있죠.


아무리 은혜 받고 교회 와서 복음 안다 하더라도 이 세상구조는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조차도 이 구조에서 추방된 존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끼리 인간들이 손을 맞잡아서 만들어내는 인류문명 속에서 예수님은 거기서 추방되었으며 추방된 흔적이 바로 십자가였어요. 예수님은 그걸 추방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십자가로 너희들을 공격할 시간, 때가 올 것이라고 엄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날마다 가짜로 만드는, 아무리 은혜 받고,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조라는 상자 속에 우리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거에요. 크게 봐서 상자지만 어릴 때는 작은 상자가 되겠지요. 작은 상자 속에 어떤 구조가 있느냐 하면, 나는 여기 있으면 아빠 여기 계시고, 엄마 여기 계시고, 여기 사촌 누이 있고, 우리 형수님 여기 계시고 또 하나의 가족이란 구조에요.


이 전체를 저는 가짜라고 봤지만 로마서에서는 이걸 육은 육이니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아주 단정지어버리죠. 이 육이 가짜인데, 상장인데 세상은 이걸 세상이라 하고 이 세상 안에 자기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있는 순간 자기를 진리로 보는 거예요. 이 진리를 구축하기 위해서 전문가 의사는 진료해야 되고, 학자들은 공부해야 되고, 교사들은 아이들 가르쳐야 되고, 농사꾼들은 땅을 갈아야 되고, 교회는 사람들 끌어 모으기 위해서 목회란 이름으로 하나님 이야기해서 꼬셔내야 되고.


모든 것이 이 세계 속에 있는데 이 세계 속에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그것이 옛날에는 ‘정’이었죠. 이사 왔으면 떡 하나 놓고, 그 다음에 자기가 큰 일 있으면 옆집에 떡 놓고 이렇게 정으로 살았던 그 정이 모든 인구가 시골을 떠나서 도시에 합류해서 오늘날 서울, 경기 지역 인구수가 49%에요. 서울, 경기 지방에 다 모였어요. 그 좁은 땅에 다 모여 있다고요.


이렇게 되면 정에서 자본주의사회로 들어가는 거예요. 여기에 모든 흐름, 모든 전선과 전력의 흐름은 오직 돈이에요. 수혈할 때 피를 공급받는 것처럼 이 가짜의 세계에서는 돈을 공급받지 아니하면 우리가 살 수가 없습니다. 오랜만에 속 시원한 이야기했네. 내가 아침에 청량스럽네. 돈이에요.


백날 은혜 받고 복음이 중요하다 하지만 막상 우리가 산에 내려가서 맞닥뜨리는 세계는 복음이 중요한 게 아니고 돈이 중요한 거예요. 결국은 교회에서 말하는 복음, 십자가, 언약, 하나님 이것도 목사가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돈으로 바뀌는 설교가 되어야 교회가 살아남는 거예요. 그럼 어떻게 복음이 돈으로 바뀔 수 있느냐?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선교와 전도의 말을 하면 돼요. ‘여러분, 이 복음 전해야 됩니다. 안 전하면 우리 주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 전도와 선교를 방해하는 것은 마귀밖에 없습니다. 돈 내세요.’ 간단한 문제에요. 돈 내세요. 이게 바로 가짜입니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말하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항상 남이다.’ 타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항상 남인데 더 절절하고 심각한 것은 나는 한 타인 중의 한 타인이다. 어떤 점에서는 상당히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모습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나는 떠돌아다니는 그냥 타인일 뿐이에요. 타인이란 말은 뭘 포기했다? 나를 포기한 거죠. 이게 오늘날 젊은 사람들의 초상화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이 박스 안에, 세상구조 안에서는 남한테 이야기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합니다. ‘저 이런 사람이거든요.’ 그 말 안 알아줘요. 너는 나에게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 ‘네가 이것 제공하면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생명, 돈을 줄게.’ 그 박스, ‘나는 네가 누군지 관심 없어. 너는 뭘 내놓을 거야. 이걸 내놓는 한 너는 정규직이야. 너는 살 수 있어. 하지만 그것 끊어진 순간 나는 너에게 줄 게 없어.’ ‘결국 너와 나를 전부다 나는 누구며, 너는 누구라는 말을 서로가 하지 말자.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아 챙기고 그것 끝나면 각자 갈 길 가버리자.’라는 세계가 가짜의 구조입니다.


여러분 보기에 상당히 삭막하죠. 그러나 삭막하다는 그런 선입관은 옛날 정으로 살았던 아직도 정 받고 살고, 사랑받고 사는 아직도 자기 자신을 사랑 덩어리로 뭉쳐야 되겠다는 그런 과거의 전통의 보수적인 입장에서 삭막하다고 하지만 오히려 어떤 의미에선 이것이 더 편하지 않습니까? 특히 젊은 사람한테는. 가정이라는 작은 박스에서도 오히려 편하잖아요.


옛날에는 방 하나에 온 식구가 살아서 꿈쩍거리는 것도 다 들통 나지만 지금은 방 하나에 다 집어넣었단 말이죠. 자기가 알아서갔지만. 컴퓨터도 한 대가 아니네요. 동생 한 대, 형 한 대 있으니까 처음부터 어릴 때부터 박스 생활에 친숙한 인간형으로 전부다 변형된 거예요.


옛날에는 가족끼리 소박한 대화가 오고갔는데 이제는 부모 쪽에서 걱정되는 거예요. ‘엄마. 나 꽃이 너무 아름다워서 울었어. 창가에 있는 들풀이 너무 아름다워.’ 엄마 타박을 놓죠. ‘네가 그 따위 사고방식으로 무슨 돈을 벌겠느냐? 현실을 똑바로 봐. 정신 차려. 만날 언제까지 청승떨래. 정신 바짝 차리고. 들풀이 아름답다는 게 수능에 놔와? 안 나오잖아. 언제까지 부모가 니 뒷바라지 못해. 나이가 열아홉이면 네 밥벌이는 네가 알아서 해.’ 그렇게 하면서도 부모의 가슴은 아프죠. ‘내가 또 가짜를 양산했구나. 나만의 가짜로 끝나지 않고 가짜가 가짜를 잉태했구나. 이 더러운 세상.’ 도대체 이 세상은 어찌될꼬?


우리가 70이레에 대해서 공부를 했는데 마지막 시간이니까 핵심이 ‘이거다’라고 잡히는 게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주변에 있는 강대국에게 얼마나 수모를 당하고 핍박을 받았어요.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인간 속에 남아있는 과거의 핍박을 받아서 오늘날 자기 신세 처량하다는 그 순간에서 결핍을 기어이 채우고야 말리라는 것이 그들의 미래상이 되는 겁니다. 억압받는 현재상황 속에서도 언젠가는 나의 욕망이 충족되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그들은 힘주어서 서로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특이하게도 다른 세계는 돈으로 힘을 받는 세계라면, 이스라엘은 종교의 힘으로 결속을 다지고 다졌던 그 단체였습니다. 예수님을 둘러쌓던 그 단체죠. 거기에 여호와를 집어넣고, 여호와 약속을 집어넣은 거예요. 여호와의 약속과 다윗 언약과 모세 율법 이런 것들을 여기다 다 집어넣어서 그 율법과 종교적인 신앙심과 인간의 순수성을 믿는 결국 나는 나를 안 믿을 수 없다.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는 자기의 결심과 결단과 종교심, 양심 최후의 짐승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믿는 인간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주어진 의와 거룩과 신 그런 것들을 집어넣어서 하나의 박스, 하나의 종교적인 신앙 공동체를 만든 겁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들은 이것을 소망이라 했어요. 무슨 소망? 결국은 이러한 정당한 성경해석을 뒷받침하고 그걸 인정해줄 미래의 메시아가 우리와 만나기 위해서 오실 것이라는 그 소망, 그래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소망, 교회가 구성되는 종교결속체와 비슷한 성격이에요. 그런 소망으로 다져진 그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최후로 보여줄 수 있는 악마의 마지막 얼굴이었습니다. 이 종교라는 게 다른 말로 기독교라는 게. 기독교, 종교, 교회라는 게 악마의 극단적인 마지막 양상이 결국은 교회라는 겁니다. 기독교라는 것이고.


거기다 온갖 인간의 의와 거룩,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인식될 수 있는, 이것은 땅에서 더러운 세속적인 품위가 아니라 진짜 품위 있는 거룩하라, 거룩하라 잔소리처럼 들어왔던 거룩에 대한 집착과 집념의 산물, 모든 종교 예술과 고상한 것은 다 집대성했고, 헨델의 메시아부터 해서 고상한 종교화들, 예술이든 미술이든 건축까지. 성베드로 성당 얼마나 화려합니까? 그 모든 것이 집대성해서 모아서 이만하면 하나님 쪽에도 칭찬이 늘어질 것이라고 여겼던 그 공동체가 인간 본인도 알지 못하는 마귀가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결할 수 있는 맞닥뜨리는 최후의 무기로써 작용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았던 겁니다. 그 원인을 추적한 겁니다.


원인은 70이레의 비역사적 해석이 아니고 역사적 해석이었다는 겁니다. 그 역사적 해석의 원인을 추적해보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무조건 자기 몸 중심으로 모든 성경말씀을 해석했는데 그것이 결국에는 그런 몸을 죄라고 지적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는 악마의 힘이 발산되는 몸이었다는 것이 이번 70이레 강의의 포인트에요. 물론 일방적인 제 나름대로의 뭉치이겠지만 여러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 역사적 해석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느냐? 문제는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가? 또렷하게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외면할 수 없는 나는 항상 나를 사랑하고 마지막에 사랑하는 것도 역시 나밖에 없다는 것을 또렷하게 늘 인식하고 있는 가운데서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바로 그러한 너의 고집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게 되었다는 그것마저 또렷하게 들어와서 우리 속에서 나는 죄인이 되고 그 죄인을 용서하시는 주님만이 주가 되시는 그러한 장터, 그러한 공간, 그러한 충돌의 공간이 바로 성전이 되고 하나님이 원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달리 이야기해서 역사적 해석을 고집하는 나 중심의 역사적 해석,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내가 내 인생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데’ 그걸 남한테 자랑하고 싶고, 어떤 의미에서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반대급부로 돈을 챙기는 의도까지 포함하고 있는 우리 이만큼 나는 훌륭하고 믿음 좋다는 것이 돈으로 환산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나의 미래상, 지금 살아가는 것이 지지리 궁상이지만 언젠가 이런 믿음 있으면 대박 터질 때가 있을 것이다. 왜? 인생은 결국 한 방이니까 한 방 터질 때가 있을 것이다.


사실 주님의 한 방은 우리를 대구의료원이나 동산병원 영안실에 보내는 게 한 방입니다. ‘이래도 안 죽어!’ 그러나 우리는 그 한 방 오기 이전에 여전히 ‘역시 나는 훌륭했어.’를 박스 안에서 보란 듯이 과시할 수 있는 마지막 나의 명예와 나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그 한 방을 소망으로 삼고, 비전으로 삼고 사는 겁니다.


이 소망이 주님의 뜻하고는 상관없어요. 우리는 이 소망이 있는 한 아직도 살아갈 이유가 있고, 보람이 있고. 그게 김종환의 [존재의 의미]이라는 겁니다. 전에 강의할 때 이야기했지요. 김춘수가 평소 시시하게 여겼던 아내가 죽고 난 뒤에 시에 보면 나와요. 부엌에서 어성거리면서 고등어 굽던 당신이 지금 어디 있나. 아무리 부엌을 봐도 당신의 그림자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평소에 고등어 굽고 왔다갔다하던 당신은 어디 있어. 나는 왜 사는 거야. 당신과 나는 짝패인데 연결돼있는데 당신이 죽어버리면 나는 도대체 내가 왜 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서 한 삼년 살다가 죽었어요.


어쩌면 이 소망을 마귀가 제공하는 거예요. ‘당신 목사인데 언젠가 큰 목회할 거야.’ 마귀가 이런 소망을 주게 되면 그 소망에 뭔가 희망 없는 이상 그 사람은 자살할 거야. 그래서 십자가마을이란 박스에 발 들여놓다가 ‘아이쿠’ 하고 얼른 뺀 사람, 뭘 놓치기 싫습니까? 언젠가는 목회성공이란 대박, 자신이 돈 좋아하는 것이 들키지 않는 구조 속에서 이제는 서로가 들키지 않고 줄 거만 주고 돈만 챙길 수 있는 이런 구조가 어쩌면 그들에게는 너무나 그것이 사는 보람이 주고 사는데 마음적으로 편안했을 겁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런 게 없기를 바랍니다. 없기를 바란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성령께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네가 스스로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 그것도 네 윤리기준으로 말고, 양심기준으로 따지지 말고 십자가,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를 근거로 해서 도대체 죄는 무엇이냐, 의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기준이 되는가를 늘 되새겨보기를 원한다는 건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만.


‘주여, 저는 역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죄인이라는 것에는 벗어날 수 없군요. 죄인 맞습니다.’ ‘죄인 맞습니다.’라는 고백이 바로 하나님의 의의 관계로 맺어진 거예요. 우리를 죄인 되게 하는 그것이 예수님과 우리가 짝패가 되고 연결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 뒤로 사라졌으면 우리가 가는 길이, 김춘수가 자기 아내 가는 곳으로 간 것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지적해주신 그분에게 죄를 지적받으면서 남들이 가지 않는 본의 아니게 원치 않는 길이지만 우리의 짝패가 가신 그 길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빌립보 3장에 보면 나오죠. 내가 다 이루었다함도 아니요 내가 그분 가신 길에 그분이 십자가 능력으로 잡아당기고 있으니까 나는 어쩌든지 주님이 사라져버린 십자가로 가서 나는 부활에 참여한 자라는 거예요. 부활로 가서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로 가서 부활에 가는 것은 바로 우리 인생에 예수님의 산출적 공정, 예수님의 주체가 우리 주체를 덮쳐서 주님께서 장만하신, 주님께서 획득하신 그 복의 기업에 우리를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 인생 따로 있지만 그것보다 주님의 공생애가 우세가 되어서 우리는 주님을 그리워하는 새로운 믿음, 소망, 사랑을 선물로 은사로 받게 되는 인생을 삽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 와중에서 우리는 역사적 해석과 하나님의 비역사적 주님이 가신 비역사적 해석이 얼마나 격차가 나는지를 보여주는 거죠.


그러면 여기서 데리다라는 철학자의 이론을 가져오겠습니다. 그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의 언어에는 특별한 지시체가 있어서 그 지시체로 서로 납득하고 있다는 기존의 언어론에 대해서 반대했습니다. 언어라는 것, 문자라는 것 성경에 나오는 성전, 언약, 십자가 이런 것들이 성전 같으면, 이것이라고 사전에 나오고 신학적으로 풀이해놨으면, ‘성전은 이것이다.’ ‘나도 동의해.’라고 성경에 나오는 문자, 70이레 등 모든 특정 언어가 갖고 있는 고유의 의미를 지니는 게 아니고,


쉽게 말하면, 빨간 것은 빨강색, 푸른 것은 푸른색이라고 정해져있다는 생각하는 것은 옛날 사고방식이지만 데리다는 그게 아니고 빨강색과 파랑색은 두 개가 만나서 생기는 차이에 의해서 이게 빨강색이라면 이건 절대로 빨강색일 수 없어. 이것은 빨강색 아닌 거야. 노랑색과 만나도 노랑색도 아니고. 이걸 파랑색이란 단어를 붙이는 게 좋겠어. 그래서 빨강색, 노랑색, 파랑색은 만나봐야 아는 거죠.


십자가 안다, 복음 안다, 언약 다 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보면 거기서 새로운 십자가 의미가 나온다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주시는 어려운 거예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십자가 피를 믿는다 했어요.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복음은 어디 있느냐? 눈에 보이지 않는 제삼의 분의 두 사람을 만나게 해서 내가 고집한 십자가복음이 복음도 아니고 이 십자가복음도 복음이 아니고 둘이 만나서 차이를 느끼면서 십자가복음은 예수님만 줄 수 있는 거예요. 차이를 통해서 나는 저 사람에 의해서 십자가복음에 수정이 가해지고 저 사람도 수정이 가해지고. 수정 가해질 수도 있고 삐질 수도 있고.


어쨌든 간에 내가 지금 이 순간 2011년 알고 있는 십자가가 모든 십자가의 전부를 아는 게 아니구나를 깨닫게 하시는 그렇게 조정하고 주선해주는 주님이 우리 사이에 함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내가 십자가복음을 안 이것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십자가복음을 날마다 누구와 만남과 어떤 사태와 사건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구원받습니다.’를 신학마저, 우리가 아는 지식마저 예수님의 공로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 될수록 자주 모이라는 거예요. 만약 자주 안 모이게 되면 이 사람은 독자적인 자기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독자적인이라는 게 성립됩니까? 사람은 누굴 만나지 않고는 살 수 없는데. 누구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알 수 없는데. 자기 나름대로의 박스를 만드는 거예요. 큰 박스, 큰 구조 안에 작은 구조를 만드는 거예요.


이 구조 안에 뭔가 통하는 것 같지만 상당히 해방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날이 갈수록 남들에게는 해방됐는데 스스로는 점점 더 폐쇄적이 되겠지요. 얼마나 폐쇄적이면 자기 자신을 안 알아주는 그냥 돈 되는 이야기만 해야 돈이 되어서 그 돈으로 생존하는 이 구조가 얼마나 각박했으면 평소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그 울분을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골프를 치던지, 술을 퍼마시든지, 폭음을 해서 속에 만족스럽지 않은 것을 자기 파괴하는 식으로 울분을 풀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렇게 자폐적이 되면 누굴 만나도 뭘 부인하느냐 하면, 우리 가운데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살아계시고 복음으로 언약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부정하죠. 그래서 어떤 사람이, ‘당신 그러면 안 돼. 우린 예수님 덕분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나중에 ‘예수가 어디 있어? 교회 챙기는 목사들, 권사, 장로만 있지 예수는 없는 거야.’ 처음에는 차마 자기 자존심 때문에 머뭇거리면서 말 못하다가 나중에 더 깊이 사귀면 ‘나는 예수를 안 믿어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 열 시간 동안 강의했잖아요. 이 강의한 것을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희한한 걸 다 가르쳐주죠. 강의한 걸 한꺼번에 부정할 수 있는 방법은, ‘성경을 원본이 아닙니다. 성경은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교훈집이지 성경은 신의 계시가 아닙니다.’ 이 한 마디면 끝나버립니다. 성경은 그냥 전통적으로 내려오면서 이것저것 수집한 겁니다. 그게 바로 신학자들. 한꺼번에 와르르 다 무너지죠.


성경에 근거해서 한다고 하면 그들은 믿는 게 역사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십자가는 확정된 적이 없습니다. 그럼 당신이 확정된 것은 뭐냐고 물으면, 현재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내 몸이 여기 있다는 것. 이런 쪽으로 여러분 안 돌아섰으면 좋겠어요. 역시 믿을 놈은 나밖에 없다, 내 주먹밖에 없다. 내 몸이 여기 있다는 것. 그리고 성경책은 남의 몸이 조작해낸 소설이고, 시나리오에 불과하기 때문에 참고는 하겠지만 얻을 건 있지만 이것에 절대적으로 목을 걸고 성경말씀이 진리라고 여기는 것은 우매한 과거적 보수적인 유산이다. 공개적으로 그런 사람이 많이 있어요.


공개적으로 하는 이유가 그렇게 해야 유식하니까. 네가 아는 범위보다 더 많이 안다는 걸 뽑낼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책을 내면 나는 너보다 책을 많이 냈는데. 그런데 전도서 12장 12절에 보면, 책을 많이 내는 것도 몸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목사님 많이 피곤하시죠.’ 하면, ‘서른 권 책 낸 사람에 비하면 피곤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서른 권, 사십 권 낸 사람도 있는데.’ 전도서 12장에 보면,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오 목사님 많이 피곤해요. 지금.


그러나 결국은 마지막 심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라. 언약을 나타내는 이스라엘 하나님께 경외하라. 왜? 이스라엘만이 진짜 하나님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 전도서 12장 13절에 대해서 아까 그 사람이 뭐라 했습니까? 그것조차도 과거에 한 때 잠깐 반짝했던 인간의 그 정도 수준의 지혜일 뿐. 그러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거고 심판이 있다는 걸 부정하고, 예수님 십자가 진 것도 효과 없고 나대다 죽은 거고. 전부다 이런 식으로 부정하고. 그 사람이 부정하고 싶은 이유가 뭡니까? 내 몸 외는 전혀 믿기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믿음이 없다 하면 욕 얻어먹을까 싶어서 그냥 안다는 거예요. 내가 그것 다 들었다.


끝으로 왜 자기 몸을 마지막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냐? 그걸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릴 때 어떤 아이가(심형래) 영화를 봤어요. 남이장군이란 영화를 봤어요. 모든 영화가 악인과 선인이 대립적으로 나오잖아요. 그런데 악한 측에서 나온 영화배우가 이덕화의 아버지 이예춘이에요. 옛날부터 이예춘은 하여튼 얼마나 미운 역을 잘 하는지. 그래서 남이장군을 하는데 나쁜 이예춘이 자꾸 착한 남이장군을 어릴 때부터 못 살게 구는 거예요. 죽을만하다가 안 죽고, 죽을만하다가 안 죽고. 그래서 어린 심형래와 친구들이 활을 만들었어요. 죽으라고 영화관에서 활을 쐈어요.


사람들이 뭐라 합니까? 이건 이미지야, 영상이야, 환상이야. 그런데 중요한 것은, ‘네 몸 빼놓고 나머지 모든 것이 환상이야. 인간들이 꾸며내고 만들어낸 것이야.’라면 모든 게 종결된 것 같은데 어린아이의 몸이 아주 냉혹한 사람, 수술하는 외과 의사처럼 이 몸은 60개조의 세포로 돼있다고 이해하고, 실증주의라고 하는데, 자기 물질적인 것이 전부라고 사는데 왜 자꾸 보는가? 이런 영화라든지, 무게도 안 나가고, 부피를 측정할 수 없는 이미지에 불과하고 허구에 불과한 것을 왜 자꾸 생산해내고 그리워하느냐,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자기 현재 몸무게 56 같으면 스스로 그 몸으로 해명해낼 수 없다는 겁니다. 뭔가 인간의 몸 자체가 어떤 생산물이 돼요. 과학적으로 따지면 세포로 돼서 그걸로 끝이지만 아메바 같은 세포의 뭉치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대목이 있어요. 왜 이유 없이 두렵고, 공포스럽고. 세포로 돼있으면 세포 늙어 죽으면 되는데 어떤 인간도 ‘나는 세포가 늙어서 죽는구나. 그래 죽자.’ 이런 인간 없어요. 잠시 그런 마음의 결심은 먹어도 계속해서 그런 결심을 먹는다면 칼로 욱하면 가만있어야 돼요.


왜 난데없는 공포가 있느냐? 그것은 이 몸을 우리 몸이 스스로 자기가 자기 입맛에 맞춘 몸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몸을 만드신 분이 따로 있어서 그분의 창조의 원리원칙에 어긋나면 이 몸은 저주받게 돼있다는 것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우리 조상이 처음 경험했던 경험입니다. 이 대목을 설명해드릴게요.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했느냐 하면, 아무리 십자가복음 이야기해도 ‘그것은 성경 속에 있는 이야기잖아. 그럼 성경 자체가 엉터리라면 어떻게 할래?’라는 반박으로 모든 걸 한꺼번에 무너뜨리려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묻죠.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의 기준은 무엇이 진리냐고 물으면, 그들은 현재 있는 몸이 진리라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 같은 생각을 다른 몸은 어떻게 하는가?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따로 생각하겠지. 그러면 두 사람 모이면 진리가 두 개 되네요. 그렇지요. 나는 타인 중의 타인이니까.


그럼 인생은 왜 삽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갑자기 나는 안다, 안다 하다가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나는 모른다. 다만 아는 것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만 안다.’ 이것뿐인 거예요. 개뿔도 모르면서 성경말씀은 무조건 하나님 계시가 아니래요. 모른다며? 내가 왜 사는지 모르며 어디서 나왔는지 모른다며? 별이 왜 만들어졌으며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욥도 몰랐잖아요. 욥은 황무지에 비 내리는 것도 모르면서, 자기에게 고난이 찾아온 이유도 모르면서 왜 남들은 잘 사는데 나는 지지리 궁상인가? 그 이유를 모르면서 뭐는 안다고 우깁니까? 나는 하나님은 안다. 또는 반대로 나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확신한다. 그러한 되도 않는 똥고집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예요? 그걸 추적하는 겁니다.


그걸 추적해보니까 인간은 세상 신이 지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성경 하나 찾아봅시다. 성경 이렇게 안 찾아보는 수련회도 드물다마는 친절이 너무 심했어. 에베소서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제 이 대목 어렵기 때문에 묻는 식으로 해보겠습니다. 세상 신이 역사하는 가운데서 마귀라는 것을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안 믿겠습니까?? 질문 어렵다.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악마를 믿겠습니까, 안 믿겠습니까? 안 믿지요. 좋은 아버지 밑에서 행복하게 사는 가정이 다른 사람이, ‘네 아버지 굉장히 못 되고 나쁘다.’ 그걸 믿겠어요? 안 믿지요. 왜? 자기한테는 좋은 아버지니까.


그러니까 악마의 세계에 살면서 악마라는 것은 스릴러 영화로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지요. 그런데 언제 악마가 등장합니까? 악마의 지배를 받지 않는 외부인이 침투한 경우에만 비로소 ‘사실은 악마한테 속아서 살아왔다.’ 그래서 3절 끝에 보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요.


그것은 너 하나하나의 행동이 남보다 나빠서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우리 육 자체가 세상 신, 악마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는 진노의 자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거예요. 웃고 즐기고 떡 주고 서로 사랑하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이 모든 걸 자연스럽게 진노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녀였다는 거예요. 그런 너희를 갑자기 외부에서 십자가 진다고 오신 분에 의해서 너희를 건져서 6절에 보면,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앉혔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이 악마를 통해서 우리가 만들어낸 믿음도 가짜다. 따라서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외부에서 주어지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진짜 선물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는 증거는 선물이라고 하는 사람은 받았고, 이걸 기도해서 얻어낸다고 여기는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은 가짜 믿음이고 그 사람은 여전히 진노의 자식 그대로 있다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런 주장을 또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게 하는 것은 이것도 옛날 교훈집이라고 하면 끝나겠지요.


그러면 당신이 이런 말을 거부하는 이유가 뭐냐? 나는 외부에서 우리를 건진다는 것을 못 믿겠다는 거예요.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이 자기에게 처한 난처한 힘든 상황을 처리하는 그들이 사용한 방법은 뭡니까? ①바로 정권이 바뀐다. ②바로 왕의 마음이 하나님에 의해서 누그러뜨려서 그 다음부터 우리에게 우호적으로, 히브리인들 옛날 요셉 덕분에 살았는데 그동안 공로를 몰랐어. 너무 심하게 대했지. 내가 회개할게. 앞으로 너희에게 잘해줄게. 너희들 관리시켜주고 월급도 올려주고 잘 대해줄게. 그렇게 편하게 사는 것. 어느 쪽입니까?


그들이 오히려 성경 안 믿고, 믿는다 해도 그건 가짜고, 오직 자기 몸만 줄창 태어날 때부터 자기 몸 편한 것만 챙기기 때문에 기껏 그들의 아이디어는 두 가지밖에 없어요. 정권이 바뀌어서 착한 왕이 오던지 아니면 현재 왕이 반성해서 자기 몸에게 잘해주던지.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구조에서 자기 몸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데 실제 방법은 뭐였습니까? ①도 아니고 ②도 아니고 양치는 목자 출신의 모세가 와서 그들의 현재 습관적으로 잘 적응된 고향 땅 애굽을 떠나야 되는 거잖아요.


누가 반대했습니까? 바로 왕은 물론 반대했죠. 자기 기계이니까. 노동력이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었으니까. 그 당시 노예는 하나의 기계였어요. 기계 뜯어 가는데 누가 좋아하겠어요? 바로는 물론 싫어했지만 누가 싫어했어요? 바로 구원받는 히브리인들이었지요. 이게 오늘날 교인들의 속성입니다. 교인들에게 아무리 복음 이야기해도 안 먹히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자기가 생각하는 구원방식은 죽어서 천당 가고 살아서 복 받는 것, 부자 되는 것. 현재 이 세상에서 익혀왔던 것, 그동안 교육받아왔던 이 세상구조에서, 돈으로 행세하는 이 구조에서 나도 떵떵거리며 살아보겠다는 인간의 몸의 구조 여기에서 자력으로 악마의 능력을 떼어내고 벗어날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사도 바울도 어떤 사도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이야기가 절대로 취소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 돼야 됩니다. 이 몸의 우리 옛사람은 여전히 살아있고 그걸 이기신 분은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그걸 늘 고백하는 거예요.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교훈집이라고 우기는 이것도 여러 가지 교훈집 중에 하나일 뿐이기에 참고사항뿐이라는 그 사람에게 만약에 그 사람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고 하는데 만약에 그 사람이 그런 소리해서 신문에 나고 인터뷰하고, ‘당신 같은 사람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하고 후원금 들어오고 하면 그 사람이 싫어하겠습니까, 좋아하겠습니까? 좋아하겠지요. 그러면 그게 바로 성경에서는 악마의 모습이란 말이죠.


‘나는 세상을 포기했어. 남이 안 알아줘도 나는 괜찮아. 나는 내 몸만 편하면 좋아.’라고 살다가 주위에서 으샤으쌰 하니까 그만 그것이 굉장히 좋은 거예요. 심지어 받을 땐 좋은 줄 몰라요. 갑자기 그 많던 인터뷰 다 취소되고, 갑자기 후원금 다 떨어지면 졸지에 살맛이 없어버립니다. 왜? 이 몸이라 하는 것은 내 안에 I, 내가 조종하는 것이 아니고 몸이 스스로 환경에 적응하기 때문에 악마가 제공한 것, 돌이 떡 되는 것, 세상에 인기 있는 것, 남이 부러워하는 걸 다 내 차지하는 것 이런 습성에 익숙하게 친화적이기 때문에 우리 몸은 우리 마음대로 조절이 안 됩니다. 기도한다고 이 마음이 고쳐지지 않는 거예요.


그렇지요 송재원 씨? 지금 이렇게 있지만 소녀 팬들 이만 명 모여보세요. 갑자기 붕~ 뜨지. 판 백만 장 이상 나가고, 티비 나가 락락락 제2탄 드라마하고. 난 절망했지만 드디어 하나님이 소망주셨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영광입니다. 소리하고. 꼭 잘될 때만 하나님 영광이래. 무슨 소리인지. 미스코리아 떨어져서 그 소리하는 것 못 봤어. 꼭 진선미 되고 난 뒤에 하나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복음을 알게 된 그것만 영광이고 딴 소리는 입을 다물어야 돼요. 진노의 자녀 꼴로 그리고 그것이 굉장히 좋아집니다. 지금도 역시 세상의 인기가 좋은 나, 그런데 허가 없이 돌입한 난입한 침투인지 갑자기 믿음, 소망, 사랑 주셔서 네 몸 아니거든. 내 몸이거든. 너는 내 지체거든. 너는 내 증인이 돼야 되거든. 갑자기 침투할 때 그것은 바로 이 구조, 박스, 돈과 돈의 흐름으로 흐르는 자본주의세계인 박스에서, 우리가 강의 끝나고 내려가면 또 소속돼야 돼야 될 구조에서 다른 구조, 새로운 구조가 여기에 겹치면서 침투하게 됩니다. 침투할 때 침투의 접점의 현상은 오직 피밖에 없어요. 다른 말로 희생이에요.


그걸 봅시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30페이지, 관주 5번에 보면, “엘름스레브에 의하면, 기호는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고 기능으로 작용하면서 의미가 발생된다고 보았다.” 중간은 너무 어려운 이야기니까 넘어가고. “성경에서 ‘피’라는 것을 단순히 ‘거룩한 희생’, 혹은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이라는 대체 의미로만 풀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 다음에 내려가서 “엘름슬레브는 전물리적인 자유로운 특이성들을 질료라고 불렀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내려가고요. “이중분절에 의해서 ‘피’의 의미를 탐색하면, 내용의 실체 면에서는 새빨갛고 물컹물컹한 물질의 ‘피’가 되고, 내용의 형식면으로서는 ‘죽어가는 제물’이 된다. 그리고 표현의 실체 면에서는 ‘예수님의 희생’이 되겠고, 표현의 형식면으로서는 복음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언약 안에서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결속 상황’이 된다.”


왜 의미가 하나가 아니고 피라는 의미가 네 가지가 돼야 되느냐 하면, 이게 구조 안에서 그래요. 구조 안에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만약에 여기 있다면 안에 구조가 또 있겠죠. 내가 만약에 옆집에 간다면 옆집에서 보는, 남이 보는 내가 있을 거란 말이에요. 이 모든 의미를 볼 때에 내 중심으로 볼 때 또는 남 중심으로 볼 때, 주님 중심으로 볼 때 전부다 각자가 기능적에 의해서 남이 필요한 기능에 의해서 피의 의미가 어떻게 되느냐 이러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을 성경에서 피라는 걸 집어넣을 때는 주변의 이런 다양한 기능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피가 구원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주님의 희생이 구원하지.’ 그 사람은 뭘 부인하고 싶은 겁니까? 실제로 예수님의 피 흘린 것을 부인하고 싶은 거예요. ‘피로 구원받는 걸 치우고 그냥 우리 서로서로 희생하자.’ 이것만 하면 그게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건 틀린 거예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 피를 흘려야 되는 언약의 피인데, 내 살과 내 피가 실체인데 실체를 버리고 어떤 이미지로 변신하는 것은, 본인이 피라는 물컹물컹한 액체를 믿는 것이 마치 미신을 믿는, 부적을 믿는 기존에 자기가 평소에 세상 속에서 알았던 섬뜩한 잘못된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고 싶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가 얼마나 어렵겠어요.


이런 구조가 오게 되면 여기 접촉점에서 피가 있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오면서 우리는 이쪽 질서에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더 센 예수 그리스도의 질서, 머리가 되고 우리는 지체가 되는 새로운 몸의 구조가 여기에 덮쳐버리면 우리는 여기에 살면서도 이 모든 구조가 바로 죄며,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통과했던 그 구조였음을 날마다 알면서 우리는 주님과 동행함을 새로운 의미에서 습득되는 거예요.


이 가운데서 다른 형제들을 만나고 다른 성도들을 만남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아는 그 사이에서 우리의 만남은 주님께서 주선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차이를 통해서 남을 통해서 내가 오해한 것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또 제공하는 거예요. 성도의 만남에서. 성질내고 따지고 멱살 잡는 데까지 가고 나는 삐졌어. 서로 죽고 못 살다가 남남이 되고 모든 과정을 통해서 나의 옛사람이 주님의 진짜 십자가 복음을 훼방하고 있는가를 녹녹치 않게 계속 느끼면서 살라고 산 밑에 돈으로만 구성되는 새로운 구조에 지금도 우리를 보내십니다. 사명자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이미 십자가를 지셨고 이미 모든 일은 완료가 됐는데 여전히 우리는 세상 것을 충족하지 않았다는 몸의 욕구 때문에 아직까지 탄식하고 주께 원망하고 불평하고 왜 인생 이렇게 꼬이게 하느냐고 주께 대들며 마귀의 습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여 이런 능력을 이렇게 죄를 아는 능력이 곧 하나님의 의인 줄 알았사오니 사랑하는 의미에서 용서하는 의미에서 더욱 더 왜 죄인인가를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1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j.hwp (57.5K), Down:28

'묵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묵시와역사1(이근호)050321  (0) 2013.05.14
역사속의 묵시(이근호)110825  (0) 2013.05.14
70이레9강  (0) 2013.04.24
70이레8강  (0) 2013.04.24
70이레7강  (0) 2013.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