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

묵시와역사1(이근호)050321

아빠와 함께 2013. 5. 14. 07:31

 

[05 대구강의 4] - 교회를 넘어서 13 - 묵시와 역사1
                                                                                
                                                           05,03,2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개혁주의, 그대의 정체는?

저의 강의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수 천년 전부터, 유대신학부터 시작해서, 성경에 대해서 각양각색으로 이야기한 것을, 제가 놓치고 싶지 않아서 모두 다 몰아넣어서 그러한데, 이 짧은 시간에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A' 라는 사람, 'B' 라는 사람, 'C' 라는 사람, 'D' 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의 주장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같은 성화론을 주장해도 각자가 다 다르고 말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수십 수백 가지의 주장이 나오고 말이다. 또 "예수님이 주님이다" 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기에 대한 주장도 다양하고, 또한 무엇을 믿음이라고 하는지, 그것도 엄청나게 다양하고 말이다.

◈ 이미 다양한 모습들이 신학책들을 통해서 !!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그런 수백 가지가 나오는 다양함이 본인에게도 철을 따라서 각양각색의 다양함이 나온다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에 믿던 믿음, 그리고 몇 달이 지나고 나서 믿던 믿음, 자기 아이에게 교통사고가 나고 난 다음에 정신적인 쇼크를 받아서 믿던 믿음, 그리고 그 다음에 다시 자식을 하나 낳고 난 다음에, 그렇게 잃어버린 자식을 다시 얻은 다음에 새롭게 구성된 인생관 아래에서 믿던 믿음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인에게도 믿음이라는 것이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고, 또한 내년에도 다르다는 말이다. 어느 것을 잡아서 믿음이라고 해야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 이미 수 천년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믿음이라고 하면서 주장을 펼쳐놓은 것이 신학책에 가득히 담겨있다는 것이다.

◈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아요 !!

예를 들어서, 사무엘상에서 사람들이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또 사무엘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그런 것들이 이미 책들을 통해서 모두 다 나와있다는 말이다. 저는 그런 것들을 욕심이 많아서 그런지 놓치고 싶지 않고, 그래서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그들 각자의 주장의 맥은 어떻고 또한 문제점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모두 강의시간에 이야기를 하고 펼치다보니, 저의 강의가 상당히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데, 하지만 공부는 어렵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하다가 보면, 나중에 쉬운 것들은 그냥 다가온다는 말이다. 

◈ 어느 목사님의 히스토리 !!

* 목사님, 그런데 저의 경우에는 목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물론 어려웠는데 왜냐하면 기존교회에서 알고 있던 것들을 다 바꾸어야 하니 말입니다. 그래도 저는 저 자신에게 나름대로 판단력은 있다고 여겼는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목사님의 강의가 참으로 좋고 잘 받아들여졌는데, 물론 하나님의 은혜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새로운 주장이라고 하는 것들도 들어보면, 이미 목사님이 다 했던 것들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상당히 고민하던 문제도 저에게는 이미 다 해결된 것들인데, 물론 제가 교만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말입니다.

* 제 아내는 제가 총신으로 가지 않은 것을 상당히 이상하게 여겼는데, 저는 대구신학교를 졸업하고 총신에 가려다가 신학이 너무 썩었다(?)고 여겼으니 말입니다. 그러다가 퓰러신학교에 공부를 하려고 나가려는 마음도 있었고, 물론 여러 가지 사정으로 포기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개척을 하게 되었는데, 안수는 장신 쪽에서 받았고 말입니다.

* 아무튼 제가 신학교를 다니면서 교수님들이나 친구들에게 목사님에게 배운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물론 생각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말입니다. 물론 대부분은 서로 방향성이 다르니 갈라지지만 말입니다. 아내와도 갈등이 있었지만, 아무튼 지금은 어떤 자매와의 만남을 통해서 어느 정도 수긍을 하게 되었는데,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신 줄 아는데 말입니다.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

지금까지 박 목사님의 과거사를 듣고 있었는데, 다음에는 다른 분이 털어놓으시면 좋겠는데 말이다. 아무튼 오늘은 교재 275페이지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하겠는데, 신학을 제법 공부한 사람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 상당히 난색을 표하는데, 너무 어려워서 말이다.

하지만 어려워도 우리가 정면으로 돌파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은 신약성경의 해석문제와 직결이 되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묵시개념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다. 이 '묵시' 라는 단어를 사람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어려워서도 그렇고, 또한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묵시개념 대신에 역사개념을 사용하는데, 여기에 표적인 신학이 바로 유대신학이라는 것이다. 오늘 강의에서 이 유대신학에 대해서도 좀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굳이 진도를 나가기보다는 어렵기 때문에 한번 제대로 파헤쳐 보자는 것이다. 이 유대신학이 역사적 개념을 사용하고, 또한 개혁주의가 이러한 역사개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 먼저 '개혁주의'에 대해서 !!

이 개혁주의에는 두 가지 노선이 있는데, 먼저 화란, 즉 네덜란드의 개혁주의가 있고, 그리고 미국의 청교도 개혁주의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네덜란드의 개혁주의는 도르트 신조와 하이델베르그 신조가 여기에서 나왔고, 그리고 미국의 청교도 개혁주의에는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여기에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같은 개혁주의이지만 성격이 좀 다른데, 웨스트민스터는 경건주의 경향이 강하고 말이다. 네덜란드의 개혁주의는 프랑스와 스위스 등에서 핍박을 받아서 쫓겨 나온 사람들인데, 이들은 그야말로 야심이 대단한데, 아예 국가자체가 하나의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나라의 국민의 되고 안 되고의 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당신이 개신교의 교인이 될래, 안 될래?" 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장로교가 개혁주의 전통에 있으면서, 그들은 어떤 야심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 아예 대한민국 자체가 장로교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포부와 비전을 이미 400년 전에 달성한 사람들이 네덜란드의 개혁주의자들이라는 말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 카이퍼, 바빙크, 워필드, 핫지 !!

이러한 네덜란드의 개혁주의를 발전시킨 사람이 아브라함 '카이퍼'나 헤르만 '바빙크'와 같은 신학자들이고, 또한 미국의 청교도 개혁주의를 발전시킨 사람이 'B.B. 워필드'가 있고, 그 다음이 'A.A. 핫지' 등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핫지의 후손들이 오늘날 한국의 200여개의 장로교 교단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개혁주의를 이야기할 때, "목사님, 개혁주의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을 한다면,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겠는데, 대한민국은 네덜란드보다는 청교도 개혁주의인데, 물론 고신교단은 네덜란드 쪽에서 교인들이 헌금을 해서 신학교를 지어주었다고 하는데 말이다.

◈ 로이드 존스 목사의 경우에 !!

아무튼 이 미국의 청교도는 개인의 경건이 우선인데, 그 다음이 사회개혁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개인이 뭉쳐진 것이 사회이기 때문에, 그러니 개인이 경건하게 되면, 그 사회는 바뀌어질 수가 있다고 하는 희망을 부여하는 신학이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양반이 로이드 존스 목사인데, 그래서 그분은 두 가지 작업을 하는데, 먼저 어떻게 개인을 경건하게 만들어낼 것이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개인경건에도 두 가지 절차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교리적으로 확신을 가지는 것이고, 그리고 두 번째로 그런 교리적 확신 속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는데, 그것을 '영적생활' 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 영적생활을 통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말이다.

그러니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경우에, 먼저 교리적 확신, 즉 예수님의 복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물론 여기서 확신은 아는 것인데, 즉 복음을 알게 되면, 그렇게 확실하게 알게 된 존재자가 되면, 그 존재에서 당위성이 나오는데, 즉 "마땅히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존재에서 영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면, 이러한 두 개의 절차를 통해서 개인의 경건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개인적인 경건이 모였을 때, 어떻게 사회개혁에 나설 것인가?" 라고 하게 되는데, 개혁주의가 이렇게 사회개혁이 나서게 될 때 부르짖는 이슈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기존의 교회만을 위한 거룩은 때려치우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만을 다독거리고, 교인들끼리만 착하고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제는 그 교회가 속한 사회전체가 그 교회로 말미암아서 달라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청교도 - 구원된 자는 거룩한 삶을 살 수밖에 없어 !!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들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성화론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100% 완전하기 위해서 성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생활을 해야하기 때문에, 그것이 거룩한 생활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러니 성화론을 비판하는 자들이, "너희들이 과연 100% 완전한가?" 라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그것은 여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로이드 존스가 이야기를 했듯이, 개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개인적인 경건한 생활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받는가? 그것은 이미 교리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은 여기에서 바로 해결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거룩한 생활을 한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성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이미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거룩한 생활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거룩한 삶이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필연적으로 나온다는 말이다.

◈ 성도의 거룩한 삶이 이제 사회 속으로 !!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삶은, 기존의 교회들끼리 모여서 서로가 착하니 마니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렇게 했던 틀을 부수어 버리고. 이제는 사회의 전체적인 거룩과 성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사회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에 상관없이 말이다. 즉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이렇게 물이 담긴 대야에 푸른 잉크를 풀면 물이 푸르게 되듯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우리 교회에 맡겨준 것이 전도와 선교를 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이 된다는 것이다. 확장이 된다는 것은 퍼진다는 의미인데, 즉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말이다.

◈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 !!

그러니 이제 복음을 알고 교리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각각의 요소요소마다 하나님의 복음과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퍼지게 되어있는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이드 존스가 말하는 청교도식 개혁주의의 주장이라는 말이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결코 어렵지 않지 싶은데, 왜냐하면 이미 수십 년을 반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말이다. 지금 그들은 "이러한 완벽한 교리에 덤빌 자가 누구인가?" 라고 하면서 자신 만만해하는데, 그런데 지금부터 이러한 개혁주의의 정통사상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하나하나 지적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입장에서 이 청교도의 개혁주의를 바라보게 되면, 그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브라함 카이프나 바빙크의 경우에 말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렇게 미국의 청교도식으로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계속해서 악한 영들과 싸워야 한다는 사도바울의 갈라디아서나 에베소서의 내용들과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전투가 얼마나 치열한지 모르는데 말이다.

청교도들에게 의하면 악한 영들은 그야말로 바보들인데, 그들은 깨우치지 못했을 뿐이지 그렇게 나쁜 놈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개혁주의 신학을 모르는 불교신자나 기존의 무신론자들은 영적인 세계를 모르는 무식한 바보등신이지, 왜냐하면 진리를 모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악한 놈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말만 잘해서 깨우치게 되면, 아까 세숫대야에 푸른 잉크를 풀어놓으면 퍼지듯이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하기만 하면 퍼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물이 잉크에게 싸우려고 달려드는가? 그렇지 않고, 잉크가 퍼지면 퍼지는 대로 물은 수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혁주의 신학에 의하면 이미 마귀는 꽁꽁 묶여있기 때문에, 우리가 제대로 전하기만 저쪽은 변화가 된다는 말이다.

◈ 청교도 개혁주의의 약점은?

하지만 네덜란드의 개혁주의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그들이 싸우려고 달려든다는 것이다. 그 차이점을 알아야 하는데, 즉 미국의 청교도 쪽은 변화가 되니 전해야 한다는 것이고, 네덜란드의 개혁주의는, 물론 요즘은 이 네덜란드도 자유주의가 들어와서 개판이 되고 말았는데, 역시 미국도 그렇고 말이다. 과거에 한때 그러했었다는 말이다.

아무튼 과거에 그들이 주장하기를, 이 네덜란드 쪽은 악한 마귀가 강렬하게 저항을 해서, 그 다음이 중요한데, 그렇게 싸워서 누가 이기는고 하니, 복음을 아는 자들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이 승리자가 된다고 하는 그 성경말씀의 진리성이 도대체 청교도들의 개혁주의 그 어디에 들어있느냐는 것이다.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보게 되면, 요한복음이나 에베소서나 갈라디아서 등을 보면, 물론 다른 곳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마지막 때에 과연 성도가 환영을 받는가? 턱도 없는 소리인데, 환영이 아니라 오히려 얻어터지는 일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스펠송에도 보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 당신은 미움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하지만 요한복음 15장을 보라는 것이다. 과연 성도는 어떠한가?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미움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이다.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성도가 미움을 받아야, 그렇게 되어야 상대방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런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악마의 역할을 톡톡히 해야 하고, 즉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핍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정체가 비로소 드러나고 부각되고, 그런 목적으로서 이 세상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다시 말씀드리면,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바보와 같은 그들에게 접근해서 진리를 깨닫게 하고,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이 "아니, 아직도 예수쟁이가 있나?" 라고 할 정도로,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공격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12장 마지막에 나오는데, 16절과 17절을 살펴보자.

(계 12: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계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 잠시 '여자'에 대해서 !!

여기에 나오는 '여자' 라는 것이 참 어려운데, 이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 싶은데 말이다. 김용옥의 '여자란 무엇인가?' 라는 어려운(?) 책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지금 바다에서 올라온 용이 누구와 싸우려고 하고 있는가? 여자의 마지막 남은 자손과 싸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에게서 처음 누가 태어났는가? 예수님이 탄생했는데, 그런데 그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 가버리고, 그러니 이 용이 그만 열을 받아서 같은 여자에게서 생산된 다른 여자의 후손들과 한 바탕 붙어보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17절에 보면,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 12장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고 하니, 마태복음 2장에 요셉의 가장을 헤롯대왕이 침범해서 아기 예수를 빼앗는 것과 관련이 되어있고, 그런데 그 여자는 누구와 관련이 되어있는가? 그것은 라헬의 자손들이 통곡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 때문에 그만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다 죽어서 통곡을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라헬은 어떤 여성인가? 예수님이 도망을 쳤기 때문에 남은 용이 화가 나서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였는데, 바로 그렇게 해서 죽은 아이들의 어머니가 곧 '라헬' 이라는 것이다. (물론 라헬은 야곱의 아내인데, 그녀가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로서, 요셉이 이미 죽은 줄로만 알고 슬퍼하는 것을 모티브로(?), 예레미야 31장에서 마태복음 2장의 상황을 미리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 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마 2: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마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 교회 - 예수님으로 인한 핍박으로 생겨난 집단 !!

이것을 서로 관련을 시켜보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난데없이 큰 고통에 직면하게 된. 그런 아픔을 아는 집단이 바로 라헬인데, 즉 이스라엘의 본처라는 말이다. 그러니 바로 그런 고통을 아는 무리들이 이 마태복음 2장에서는 새로운 이스라엘, 즉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무엇인고 하니까, 전적으로 예수님 때문에 발생되는 그 핍박에 같이 참여하게 되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핍박을 누가 일으키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악마가 예수님의 그 고난에 참여시키는 동기를 제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악마가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좀 어려운가요?

무슨 말인고 하니까, 악마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고통에 참여하게 되는 집단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악마가 그런 교회의 생기게 되는 동기유발을 제공해준다는 말이다. 즉 그 주체자가 악마가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만 말이다.

◈ 그러니 악마는 반드시 있어야 !!

그러니 이 마지막 때에 악마가 있어야 하는가? 없어야 하는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데, 하지만 이런 주장이 여기 미국의 청교도 개혁주의에는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의 출발점이 어디인고 하니, 성령으로 거듭난, 즉 중생을 받은 인간이 중심이 되어서 어떻게 세력을 확장할 것인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중심이 된 것이 아니고 말이다.

저는 이것을 인간의 '정복욕' 이라고 보고 싶은데, 마치 징기스칸이나 나폴레옹처럼 말이다. 이 세상을 어떻게 정복할 것이냐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이 주장하는 것은, 개인이 어떻게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이 마지막 때에 진정으로 누가 그리스도의 남은 백성인지, 바로 그것이 부각되기 위해서 마귀가 필히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 666 -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을 가려내기 위한 세상의 법적 조치 !!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이야기한 그 싸움이 요한계시록 17장, 18장, 19장에 들어가면, 이 땅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이기는고 하니, 놀랍게도 마귀가 이긴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자의 남은 자손들은 비참하게 하나같이 전부가 목 베인 영혼이 되는데, 즉 모두가 다 복이 잘려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것도 마귀가 아주 법적으로 철저하게 솎아내어서 그렇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666'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666'이 무엇인고 하니, 이것을 무엇을 겨냥한 단체인고 하니, 솎아내기 위한, 즉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되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을 가려내기 위한 이 세상의 법적인 조치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666' 근처의 문맥을 살펴보게 되면, 양쪽이 모두 다 인(印)이 박혀있는데, 그 인이 박히지 않은 쪽은 한 쪽도 없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인이 박히든지, 아니면 악마로부터 인이 박히게 되든지 말이다.

그런데 마귀로부터 인이 박힌 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뭔가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과연 우리 가운데 예수를 믿는 자들이 누구인가?" 라고 하면서, 예수를 믿는 자들을 가려내는데 힘을 집결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사상이고 정신이란 말이다.

◈ 이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이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우리의 선교의 대상인가? 그것은 인간들의 정복욕이 만들어낸 말도 안 되는 주장이고, 이 세상이 예수님 이후에도 멸망을 당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렇게 존속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이 세상이 그런 엑스트라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아직도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세상은 복음대로 움직이게 되는데, 그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약속대로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싸움을 하면서 말이다.

◈ 목사님,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여기서 "목사님,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복음을 중심으로, 그렇게 복음의 회오리에 휘말려 들어가도록 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야호, 신난다" 라고 하면 곤란한데, 왜냐하면 그 안에는 주님의 고난이 가득하니 말이다.

이 세상에서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는데,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이고, 하나님과 마귀는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십자가로 끌어당기고, 또한 마귀는 마귀대로 그렇게 하는데, 그러한 엄청난 회오리 속에서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저항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성도는 

여기서 인간들이 몸을 빼려고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예수님도 도와주지않고 마지막에는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되는데, 택함을 받은 자라면 말이다. 

◈ 너는 이제 그만 꺼져 !!않고, 또한 마귀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라고 하면 마귀가 어떻게 하는가? "너는 그냥 예수님만 믿고, 그와 함께 이 땅에서 사라져라" 라는 쪽으로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666'의 경우에, 오른손과 이마에 인을 맞게 해서, 그런 인을 맞지 않는 자들은 경제활동에서 제외를 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아예 국가정책에 그만 반영이 되고 있는데, 즉 이제는 국가적으로 "너는 이 나라의 백성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낱낱이 남김없이 색출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색출' 이라는 표현이 적당한데, 즉 마귀는 예수쟁이를 색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런 취지를 가지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 회사, 교회, 국가 등, 모든 영역에 걸쳐서 다 그러한데, 그러니 당연히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교회를 믿는 사람이 서로 구분된다는 말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즉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청도교 개혁주의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세상 쪽에서 복음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즉 현재 활동하고 있는 마귀의 사역이 배제되어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바보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있고, 그냥 우리가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물론 마음이 교만한 자들은 거부하고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소극적인 거부인데, 하지만 성경은 소극적 거부가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그것을 노리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마치 헤롯이 예수님을 노리듯이 말이다. 사실 헤롯왕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악마가 뒤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지 말이다.

구약의 바로왕의 경우에, 이 바로왕에게 항상 따라나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바로왕을 강퍅케 하셨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강퍅한 행동을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야무지게 얻어맞고 말이다. 그래서 바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런데 또 하나님께서는 강퍅케 하시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왕의 모습이라면, 다니엘서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오는데, 이 왕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니엘아, 내가 잘못했다. 의로운 너를 사자굴에 넣다니, 내가 미쳤나봐. 앞으로 누구라도 다니엘에게 그렇게 하지마"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래놓고는 또 자기가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다.

◈ 악마도 천사이기에,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까, 우리는 악마도 천사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즉 악마도 천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인다는 말이다. 즉 약속대로 말이다.

욥기의 경우에도, 마귀가 처음부터 욥을 노린 것이 아닌데, 일부러 하나님이 악마에게 약을 올린다는 것이다. 먼저 욥에게 믿음을 주고는 그 다음에 악마를 초대한다는 말이다. "마귀야, 혹시 '욥' 이라고 들어봤나? 참 믿음이 좋은데, 모르지?" 라고 하면서 일부러 욥을 자랑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스가랴서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기가 막히는 새 옷으로 갈아 입히시는데, 그런데 그것을 일부러 마귀가 보는 앞에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로마서의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라고 하는 말씀을 이루시는데, 즉 마지막 때에 주님의 말씀이 어떤 형태로 완성이 되는지, 그것을 스가랴서에서 미리 예언을 했다는 말이다.

◈ 구원은 무시험 통과 !!

어제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는데, "구원은 무시험 통과이다" 라고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느 날 하늘나라에서 편지가 왔는데, 자기는 시험도 치지 않았는데, "축, 합격" 이라는 것이다. 시험을 치는 줄로 몰랐는데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대리시험(?)을 쳐서 합격을 해서 합격자 명단에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마귀는 그러한 합격통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는 멸망을 당해야만 돼, 끝!" 라는 통지를 미리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마귀를 무저갱에서 풀어주어서 지금도 활동을 하게 하는데 말이다.

◈ 악마는 적극적으로 믿는 자를 찾아서 !!

그러니 소극적으로 복음에 대해서 "나는 교회에 가지 않을래. 복음이 싫어" 라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예수쟁이를 찾아다니면서 솎아내고 색출을 하는데, 바로 그렇게 믿는 자를 찾아서 박살내려고 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악마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악마가 다스리는 이 세상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강자' 라는 것이다. '약자'가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성도의 특징은 무엇인가? '강자'의 반대인 '약자' 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자기는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약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았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약한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강한 것, 높은 것, 위대한 것, 이런 것들은 바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들인데, 즉 강한 것은 마귀가 주장한다는 말이다.

(고후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 결국 청교도는 강자가 아닌가?

그런데 결국 따지고 보면 청교도적 개혁주의의 전체적 색깔이 어떠한가? 그 뉘앙스가 무엇인가? 결국은 예수님을 믿고 강자가 되자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가? 그야말로 "위 캔 두 잇!" 인데, 즉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 믿고, 하면 된다" 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강자의 뉘앙스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사회에 그대로 적용시키려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단체를 두 개만 들라고 하면, 먼저 하나는 '이랜드' 이고, 또한 저기 포항에 있는 '한동대학' 이라는 것이다. 맞지요? 너무 예리하게 골랐는가? 새로운 강자를 키우려고 한다는 말이다. 철두철미한 관리하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는 기독 청년들에게 달려있다고 하면서, 이들이 앞장서지 않으면 앞으로 21세기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 과연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인가?

그것이 바로 먼저 교리적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런 백성이 되었으면 그건 존재이니, 당연히 거룩한 삶을 살아서,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동의를 해줄 수 있는데, 물론 이것도 문제가 많지만 말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자기들끼리 잘해서 사회개혁에 나서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면, 그 자체가 로마서에 어긋난다는 말이다. 로마서 3장에 의하면(?), 예수님의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곧 우리의 영광이 된다고 하니 말이다. 이미 예수님께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졌는데,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상에서 아무도 부활하지 못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유일하게 영광스러운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중요하니 잘 들어야 하는데, 성도는 악마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그래서 성도는 본인이 원하지 않는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서, 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간단한 논리인가? 물론 따지고 보면 마귀가 개입해서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데, 마귀의 활동으로 말이다.

◈ 유다야, 이제 니가 할 일을 해야지 !!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가롯유다에게 떡을 나누어주시면서 뭐라고 하셨는가? "유다야, 니가 할 일을 속히 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단의 하는 일도 예수님께서 시킨다는 말이다. 그렇게 떡을 줄 때 사단이 들어와서는 "예, 알겠습니다. 얼른 하겠습니다" 라고 하고는 그만 가버린다는 것이다. 즉 사단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제자들은 이 유다가 회계를 맡았으니, 어디 식당에 결제할 것이 남은 정도로 알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가롯유다 사이에, 그러한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두고서 영적인 대화가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요 13: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요 13: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요 13: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요 13: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요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소위 '믿자'와 '하자'에 대해서 !!

그래도 지금까지는 상당히 쉬운 것을 했는데, 이제부터는 조금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신을 좀더 차려야 하는데, 아직 유대교 신학은 들어가지도 않았고, 개혁주의 신학만 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것도 미국의 청교도 개혁주의를 말이다.

미국의 청교도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것이 무슨 내용인고 하니, 먼저 교리적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데, 그 다음에는 그렇게 거듭났기 때문에 경건한 생활을 하자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먼저 교리적으로는 '믿자' 라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하자' 라는 것인데, 그러면 여기서 무슨 문제점이 발생하겠는가?

예를 들어서, 여기에 어떤 인간이 있는데, 그러면 신앙은 어디서 오는가?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말이다. 신앙은 성령으로 오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말이다. 그들도 이것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이 선물로 오는데, 그 반응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이다. 즉 성령을 받은 것을 드러내는 것이 곧 신앙이라는 것이다.

◈ 인간은 믿음이 없어도 '하자' 라는 것이 !!

그렇다면 이제는 '믿자' 라는 것이 '하자' 라는 것으로 변하는데, 명령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신앙이 없을 때라도 인간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생각은 하지 않는데, 물론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인간은 믿음이 없어도 반드시 '하자' 라는 것이 나오는데, 그러니 불교신자라고 해도 자기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믿자' 다음에 '하자' 라는 것은 성령이 오든 오지 않던 간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본성상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믿음이 있는 상태에서의 '하자'와 없는 상태에서의 '하자'가 과연 차이가 있겠는가?

◈ 당신이 하는 것은 마귀 짓 ??

예를 들어서, 자기가 불교신자인데 부처가 착한 일을 하라고 했다고 하면, 그래서 자기는 열심히 착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는 믿음이 있는 기독교 신자 쪽에서 하는 말이, "지금 당신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성령께서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하는 짓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이 세상 신에 짓눌려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니, 나도 이렇게 착한 일을 하는데 왜 그래요?" 라고 하면, 그쪽에서 한다는 말이, "어허, 그것은 착한 일이 아니라니까. 그것은 악마의 열매로서, 가짜 착한 일이야. 그러니 진짜로 착한 일은 우리처럼 이렇게 성령의 열매로 해야 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불교신자 : 부처님이 하라고 했으니, 착한 일을 해야지.
* 기독신자 : 어, 그것은 마귀 짓인데?
* 불교신자 : 당신, 지금 머라카노?
* 기독신자 : 진짜 착한 일은 우리처럼 성령의 열매로 해야 돼.
* 불교신자 : 그러면 우리는 착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 기독신자 : 물론 하기는 하지만, 곧장 악한 일로 바뀌어서 악한 열매가 나오지.
* 불교신자 :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이지?
* 기독신자 : 자기 자랑, 시기, 질투 등등이 있지.

◈ 아직 옛 사람이 남아 있어서 ??

자,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지요?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신자가 맞는데,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이다. 즉 '믿자' 라는 것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하자' 라는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서 '하자'가 나왔는데, 이 '하자'는 과연 완벽한 것인가? 여기에는 시기와 질투가 생기지 않느냐는 말이다. 분명히 여기에 그런 모습들이 있다는 것이다.

청교도 개혁주의는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 '하자' 라는 것은 옛 사람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그것이 튀어나와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분위기 파악도 하지를 못하고 톡톡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즉 옛 사람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물론 전부가 다 옛 사람이 아닐 것인데, 가끔 옛 사람이 섞여서 튀어나와서 그렇지 말이다. 이렇게 일일이 따지는 것이 참 어려운데, 아무튼 착한 일을 하는데 옛 사람이 튀어나와서 그렇게 애를 먹인다는 것이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말이다.

◈ 아니, '하자'가 두 개 ??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신앙인의 경우에 이렇게 '하자' 라는 것 속에서 두 가지가 나오는데, 먼저 하나는 새 사람의 '하자'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옛 사람의 '하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즉 옛 사람의 행동이 나오는 것은 그렇게 옛 사람이 남아있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새 사람의 행동은 옛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들의 이론에 의하면 말이다.

제가 지금 여러분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가고 있는데, 아무튼 이 '하자' 라는 것은 신앙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옛 사람에게서 나온 옛 신앙이 있을 것인데, 헛갈리나요? '믿자'에서 '하자'가 나오는데, 그런데 '나쁜 하자'가 있다는 말은, 그 '나쁜 하자'를 구성하고 있는 '믿자'가 있다는 말이다.

◈ 믿음은 선물인가? 자기 결단력인가?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옛 사람의 '하자'와 새 사람의 '하자'가 있다는 것은, 이미 인간 속에는 신앙에 두 종류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즉 신앙에는 두 종류의 신앙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신앙이라는 것이 자기 결단력으로 '믿습니다' 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 말이 되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과거에 한 남자를 좋아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과거의 그 남자에 대한 미련이, 즉 감정이 남아있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과거의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행위로 나오고, 지금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행위로 나오니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행함이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즉 자기 결단력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신앙이라고 하면 두 종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성령에 의해서 신앙이 오게 되면, 그 신앙은 옛날의 신앙을 허용하는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결단력에 의한 신앙이라고 하면 두 종류의 신앙이 있다는 것이 얼마든지 말이 되고 납득이 되지만, 즉 지금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그런데 가끔 과거에 믿던 부처님도 생각이 난다고 하는 것이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 믿음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아닌가?

그런데 자기가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칼빈주의 5대교리에도 보면,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기가 도저히 막아설 수 없는 주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면, 그 신앙에 대해서는 하등의 하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완벽한 신앙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완벽한 분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기에, 거기에는 티끌 하나라도 섞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 자신의 믿음을 그대로 직수입한 것이기에 말이다. 하늘나라에서 수입한 수입 완제품이기에 말이다.

◈ 예수님이 들어오시면, 좌충우돌 !!

그러니 당연히 그 신앙 속에는 예수님이 들어 계시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그 신앙을 통해서 활동을 하지 않겠는가? 들어와서는 그냥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마냥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활동을 하시는가? 정죄를 하시는데, 즉 "이것은 신앙이 맞고, 저것은 신앙이 아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고 하니, 정말 새롭게 거듭났다고 하면 남 이야기를 할 것도 없이 자기 내부에서 세계 3차대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매일같이 내부에서 싸운다는 말이다. 자기 안에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어디에 눈을 돌린다는 말인가? 외부를 향해서, 도대체 세상이 더럽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더럽고 추악한데 말이다.

◈ 개혁주의자들은 결단력을 !!

그런데 개혁주의는 방금 제가 말한 것과 같이, 그런 식으로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인간의 자기 결단력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 부처를 믿은 것도 조금은 남아있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 결단력이니 예수님을 믿는 것도 남아있고 말이다. 물론 말로는 성령의 선물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신앙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라고 하면, 반드시 나오는 것이 "내가 예수를 믿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아까 제가 청교도들은 교리적으로 확신한다고 언급했는데 말이다. 즉 자기가 믿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속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바깥에 계시는데, 자기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서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믿는 것도 있고, 과거에 부처를 믿는 것도 조금은 남아있는데,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다가도 과거의 그런 옛 사람의 모습이 나온다는 것이다.

◈ 개혁주의자들에게 '하나님의 형상' 이란?

그렇다면 왜 이러한 개혁주의의 믿음이, 즉 신앙관이 문제가 되는고 하니, 신앙이라는 것이 성령께서 선물로 주었다고 하면,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이질적(異質的)인데, 그래서 충돌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낯선 것이 들어왔기에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을 만한 착한 마음가짐이 이미 인간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런 하나님의 형상은 어디에 유용한고 하니, 장차 예수님의 복음을 이야기할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반틸의 접촉점 ??)

◈ '두부와 두부판' 비유 !!

물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맞는데, 완전히 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틀이 깨어지고 없는 것과 틀은 있고, 거기서 나온 물건이 쓰지 못하게 된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두부판이 있다고 하면, 유통기한이 지나서 두부는 썩어서 못쓰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판은 아직도 멀쩡하다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그렇게 이해하는데, 형상은 깨어지지 않았는데, 다만 심하게 오염이 되고 부패되었다는 말이다. 마치 두부가 부패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아직 플라스틱으로 된 판은 그대로이니, 다시 두부가 오게 되면 다시 그 판에 담는다는 것이다. 두부를 다른 어디에 담겠는가? 생선을 담는 상자에 담겠는가? 두부판에 담지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니, 오염되고 썩은 것은 도려내고 다시 담는다는 것이다. 그러게 새로운 두부판에 담겨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새롭게 와버렸다고 하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옛 성품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옛 성품은 옛 신앙에서 나왔기에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옛 사람이 있으니, 그들은 나온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옛 신앙이 그대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신앙을, 눈에 보이는 인간의 반응으로 !!

지금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괜히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개혁주의자들이 신앙을 선물로 받았다고 해놓고는, 그런데 그 신앙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신앙은 인간의 몸이 드러내는 반응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신앙은 주어진 선물이고, 몸에서는 그것이 반응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렇게 반응이니, 신앙이라고 하면 그것이 원인제공을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원인은 되지만, 신앙이 무엇이냐고 할 때는 그것을 따지지 말고, 어떻게 해서 반응이 나타나는지, 그것을 따지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말이다.

개혁주의에서 주장하는 것이 전부가 바로 이것인데, 물론 그들은 성령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몸도 아니고 추상적인 것인데, 아무튼 그렇게 원인은 제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일이 터지기는 우리 인간의 몸에서 터지는데, 즉 우리 인간이 "주여,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 몸이 어떤 구조로 되어있기에, 그렇게 '믿습니다' 라고 하는지, 바로 그것을 따진다는 것이다.

◈ 그러니, 믿음은 그 사람의 행동을 봐야 !!

그렇게 따지다 보니까, 그 다음에 나온 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행동이 나올 때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렇게 해서 행위를 가지고 믿음을 설명하는 신학을 전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그 근거가 곧 야고보서 2장 17절에 나오는데,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라고 본다는 것이다.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개혁주의자들은 이렇게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라는 것을 끄집어내어 주어야, 로마서에 편중하지 않고, 또 갈라디아서에 편중하지 않고 성경을 골고루 다 바라볼 수 있는데, 그렇게 야고보서를 제대로 살펴봐야 성경의 균형이 있는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을 설명함에 있어서, 매일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라는 것만 하지 말고, 그것은 원인제공의 수준에서 정리하고 말이다. 그러니 실제로 믿음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그것을 가지고 믿음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자는 말이다. 개혁주의가 그렇게 인간중심으로 신학을 전개하는데, 물론 야고보서도 전혀 그러한 내용이 아니지만 말이다.

◈ 야고서의 행함이 인간의 행함인가?

이 야고보서에서 행함은 당연히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행함인데,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치는 것이 누구 아이디어인가? 아브라함에게서는 죽어도 그런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이디어인데, 그러한 하나님의 지시가 아브라함에게 떨어져서,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쳤다는 것이다. 기생 라합이 정탐군을 숨기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역시 하나님의 행함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의 행함과 하나님의 행함을 나누어서 생각해보면, 인간의 행함은 제 아무리 설명을 해도, 믿음에서 행함으로 다시 갈 수 있는 길이 차단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거룩한 모습을 하더라도, 그것을 아무리 조립을 하고 뭉쳐보아도, 거기에서는 선물로 그냥 주었다는 것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이야기를 해보면, 구원은 무시험 합격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무시험으로 합격된 학생을 찾아가서, "너는 고3때 공부를 어떻게 했지?" 라고 한다면, "저는 그냥 놀았어요" 라고 한다면, 그쪽에서 뭐라고 하겠는가? 노는 학생이 합격했다고 한다는 것이다.

◈ 야, 노는 학생이 합격했다 ??

하지만 놀았다고 해서 합격한 것이 아닌데, 하늘에서 무시험으로 이미 합격을 시켜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앞에 있는, 즉 하늘에 무시험으로 합격을 시켜주었다는 것은 그만 떼 내어버리고, 놀았기 때문에 합격을 했다고, 그렇게 하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이 자꾸만 행함으로 믿음을 설명하는가? 그렇게 행함으로 믿음을 설명해주어야만, 그들이 근본적으로 노리는 것이 바로 사회개혁인데, 최종적인 목적이 말이다. 그렇게 해야 사회개혁이 가능하게 된다는 말이다.

◈ 그러면 사회개혁은 어디로?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렇게 개인적 경건도 인간의 행함으로 된다고 하면, 당연히 사회개혁도 그런 인간들이 뭉치면 된다고 하는, 그러한 가능성이 그 밑에 깔린다는 것이다. 가능성이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만약에 은혜로만 구원이 된다고 하면, 사회개혁은 당연히 하나님께 맡겨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면, 그렇다면 사회개혁은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뭐라고 하겠는가? "이런 무책임한 놈들을 봤나? 그렇게 해서 무슨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겠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그들이 말하는, '교회'란 무엇인가?

사실은 이러한 과정에 중간단계가 하나 빠졌는데, 그것은 바로 개인적으로 경건한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이 되는고 하니, 개혁주의에서는 그것을 '교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천주교에서의 교회는 그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서 내려오는 사도권, 즉 전통에 근거해서 교회가 되었다는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음부의 권세, 즉 죽음의 권세는 아무나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개인은 안 되고 집단이 되어야 이기는데, 그 집단이 바로 교회이고, 그러니 교회가 되어야만 이기는 것이지, 개인이 이길 수는 없다는 말이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그런데 그 교회는 한 곳에 중심체가 있는데, 그것이 곧 '베드로' 라는 것이다. 물론 천주교에서 말이다. 그렇게 베드로에게 뿌리를 두어야 교회가 되고, 그 교회가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데, 즉 교회가 사람을 구원시키고 영생을 준다는 말이다.

◈ 천주교 - 교회가 없으면 구원이 없다 !!

그러므로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교회가 없으면 구원이 없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왜 그런고 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를 만들었고, 그래서 그 교회제도를 통해서 은혜를 베풀고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교회가 만든 은혜가 내려오는 수단이 곧 '성만찬' 인데, 즉 '거룩한 제사' 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계속해서 이 잔과 이 떡을 기념하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성만찬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고전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예수님이 정한 제도와 규칙에 복종하는 것이 곧 '믿음' !!

예수님이 직접 그렇게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을 믿는다" 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들이 인정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오직 예수님이 지시한 대로, 그것에 복종하고 동의할 때, 그것을 두고서 비로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이 정해놓은 그 제도와 규칙에 복종할 때, 그것을 참된 믿음으로서 간주하는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가당착이고, 오히려 마귀의 역사라는 말이다.

◈ 그러면 칼빈의 교회관은?

그것은 개신교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즉 칼빈에게도 교회가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칼빈에 의하면 그러한 제도와 전통에 의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신앙이 발생된 사람끼리 모인 것만 교회라고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니 마치 '워치만 니'와 비슷해 보이는데, 아무튼 그런 사람들의 집합을 교회라고 본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고 하니, 그것이 교회라고 하면 과연 깨어져야 하는가? 아니면 깨지지 말아야 하는가? 당연히 깨어지지 말아야 하는데, 믿음도 하나이고, 소망도 하나이고, 주도 하나이니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깨어지는데, 그렇게 깨어진다는 말은, 처음 모일 때는 그것이 가짜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여기 여기 모여라 !!

예를 들어서, 1999년도에 20명의 사람들이 자기들은 거듭났다고 하면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런데 2002년도에는 그만 15명만 남고 다 나가버렸는데, 그렇다면 그 남은 15명이 나간 자들을 보고서 뭐라고 하겠는가? 그렇게 해서 나간 5명은 나중에 보니 가짜임이 드러났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2004년도에는 겨우 4명만 남고 11명이 그만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는 말이다. 그러면 남은 5명이 뭐라고 하겠는가? 11명이 가짜였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떠나는 11명은 그 남은 4명을 보고서 뭐라고들 하겠는가? 그들도 역시나 같은 말을 할 것인데, 즉 남은 4명은 가짜였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일단 믿음으로 교회가 되었다고 하고는, 그래서 그들이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가라지 비유를 좋아하는데, 즉 가라지가 있더라도 뽑지 말고 그냥 가만히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들이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바로 신앙고백서인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라는 말이다.

그러니 자기 혼자서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인정할 수가 없고, "당신은 이러 이러한 신앙고백서를 인정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몇 가지 신앙고백서를 언급하는데, 만약에 그것을 인정한다고 하면 같은 형제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고,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와 같은 것들이라는 말이다.

◈ 결국, 신앙고백서가 있던 없던 !!

2002년도에 같은 신앙고백서를 믿는다고 해서, 교회라고 하면서 20명이 수원에 모였다고 하는데, 그런데 2005년도에 그만 10명이 나갔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나가는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남아 있는 자들은 말만 그렇게 했지 행함이 없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말만 그렇게 했지, 사실은 신앙고백서를 믿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신앙고백서를 만들던, 그렇지 않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교리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성령으로 생활을 해서, 그렇게 개인적인 경건을 갖추어서 그것이 교회가 된다고 해도, 그러한 교회조차도 인간은 자기들의 힘으로 구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입맛에 따라서 좍좍 갈라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얼마 안 되는 모임인 교회도 어떻게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사회를 개혁한다고 하니, 그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 !!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교회까지는 그래도 신앙이 위주가 되는데, 그런데 사회개혁을 할 때는 그만 행함이 위주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교회에서는 신앙은 신앙대로 유지하면서, 거기서 행함을 끄집어내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려면 개인적인 경건을, 즉 교리적 확신을 통한 개인적 삶에서 행함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즉 정당한 근거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사회개혁을 할 수 있는 정당성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 아하, 창세기 1장 28절 !!

그렇게 해서 나온 성경구절이 바로 창세기 1장 28절인데, 즉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라는 구절이라는 것이다. 즉 '하라' 라는 명령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된 거듭난 자들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의 '하라' 라는 명령을 순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나온 신학적인 개념이 곧 '하나님 형상' 이라는 말이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개혁주의가 말하는 '하나님 형상론' !!

여기서 잠시 그들이 주장하는 '하나님 형상론'을 살펴보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어서 복을 주었는데, 그 복이 곧 무엇인고 하니,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라는,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는, 마치 두부는 다 썩어서 없어지고 두부판만 남은 것과 같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그 두부판이 바로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라는 것인데, 물론 그것은 남아 있지만, 그런데 그러한 명령을 지켜야 하는 인간들이 그만 모두가 썩어문드러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내용물을 다시 채워야 하는데, 그런 자들이 바로 교리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경건한 생활을 하는 거듭난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이제 남는 것은 무엇인가? 제대로 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즉 이제는 제대로 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개혁은 된다는 말이다. 즉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이렇게 정리가 된다는 것이다.

◈ 그들이 붙잡는 것은, '역사' !!

하지만 제가 처음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묵시와 역사가 어떻게 다른가?" 라고 했는데, 그것과 관련을 시켜서 이야기를 하자면, 그런 사회개혁을 증거해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역사' 라는 것이다. 즉 역사가 말을 해주는데, "과연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 라는 것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이 사회개혁을 한 것을 역사적으로 어떤 효력을 내게 될 때, "아하, 우리가 사회개혁을 참 잘했구나" 라고 후대 사람들이 판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는 계속해서 이어져야 하는데, 후대로 후대로 말이다.

◈ 탈출 에피소드 2개 !!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것을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어떤 목사가 탈북자를 단체로 남한으로 빼돌리는 시도를 하는데, 먼저 중국으로 가는 것을 실패해서 베트남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만 메콩강을 건너다가 물이 갑자기 불어나서 몇 명은 죽고 나머지가 남한으로 무사히 오게 되었는데, 그것이 과한 잘한 일이냐는 말이다. 물론 본인은 잘했다고 여길지 몰라도, 그것은 후대에서 결정한다는 것이다.

더 쉬운 예를 들어보면, 어떤 엄마가 아이들과 함께 홍수에 그만 고립이 되었는데, 지금 당장에 건너지 않으면 다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아서 억지로 강을 건너다가 그만 아이가 한 명 불에 빠져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 엄마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면 비가 그쳐서 물이 불어나지 않아서 모두 살아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엄마의 선택은 어떠했는가? 잘 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후대의 역사가 판정을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엄마의 입장에서는 어떠한가? 그 당시에 자기 판단이 옳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퍼붓던 비가 바로 그칠 줄은 전혀 몰랐기에 말이다.

◈ '빵이냐, 사과냐', 그것이 문제로다 !!

그런 논리를 계속해서 밀고 나가보면, 어떤 사람이 빵과 과일이 있어서, 과연 이 중에서 무엇을 먹을 것인지 2시간 반을(?) 고민하다가 빵을 먹었는데, 옆에 있던 친구는 과일을 먹고 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빵이 좀 상한 것이어서 그만 화장실에서 설사를 만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은 다음날에, 즉 역사적으로 후회가 막급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양반은 자기가 바보짓을 했다고 여기고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까, 과일을 먹은 그 친구는 그만 식중독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을 해있다는 것이다. 과일도 식중독에 걸리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양반은 "역시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야(?)"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즉 이런 판정은 어느 영역에서, 어느 장(場)에서 이야기하는가? 역사라는 필드에서 결정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가 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 그만 자기를 치료하던 여자 의사와 눈이 맞아서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그런데 2년 뒤에 그만 이 여자 의사와 이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 친구는 충격으로 그만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양반은 혼자 그렇게 살다가 로또복권에 당첨이 되어서 떵떵거리면서 살게 되었고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 개혁주의 - 자기 의를 포기 못하는 악마의 신학 !!

이렇게 정통 개혁주의에서 자기들이 사회개혁을 하고 말고는 누구에게 맡기는가? 역사에게 일방적으로 맡겨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무책임한가? 그리고 그것은 곧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성경말씀이 제일 싫어하는 '자기 의' 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소위 개혁주의는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악마적인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매일같이 하는 말이 "역사가 판단할거야. 내 행동을" 이라고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썩어빠진 정치인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역사가 판단한다" 라는 것과 또 하나는 '사필귀정(事必歸正)' 인데, 즉 모든 것은 다 정의로운 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그 말을 왜 하는가? 뭔가 꿀리는 곳이 있으니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이 개혁주의 신학이 예수님을 살해한 유대신학과 같은 틀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신학이 무엇인고 하니, "언젠가는 역사적으로 메시야가 온다" 라는 것인데, 그렇게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을 천하에 머리가 되는 위대하고 거룩한 국가로 만든다는 말이다. 바로 그러한 소망 하나가 만들어낸 신학이 유대신학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복음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학은 무엇인가? 언젠가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뒤바꾸어서 자기들이 하늘나라의 백성들이 된다는 것인데, 바로 그런 소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혁주의 신학이 예수님의 재림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하지만 복음은 무엇인가? 오직 십자가에서 출발을 하기 때문에, 그런 복음은 결코 이 땅에서 강자가 아니고, 처절하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혁주의 예수님이 승리했기에 자기들도 승리자가 된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역사가 증명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국가 전체가 아예 교회가 된다든지, 아니라면 복음으로 징기스칸처럼 땅 끝까지 정복한다든지 말이다. 혹은 자기 교회가 부흥이 된다든지 말이다. 그렇게 자기 교회에 교인수가 늘어나고 헌금이 늘어나는 것으로, 즉 그러한 것을 역사적 증빙서류로 삼아서, 현재 자기가 목회를 잘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부흥사들의 경우에 !!

특별히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부흥회에 가보면 부흥사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자기가 과거에 일자무식한 사람으로서, 그만 사업을 하다가 다 말아먹고 난 뒤에, 주님께서 불러서 이렇게 주의 종이 되어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증거물로서 뭐라고 하는가? 자기 자식은 유학을 가고, 또한 에쿠스를 타고 다니고, 또한 50평 짜리 아파트에 산다고 자랑을 마구 늘어놓는다는 말이다. 요즘은 노골적으로 그렇게 하는데,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하나님을 잘 믿으면, 그런 놀라운 축복을 받아서 부자로 떵떵거리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척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하면 뭐라고 하는가? 자기도 처음에는 개척교회를 하면서 사례도 없이 참 고생을 많이 했는데, 하지만 자기가 열심히 철야기도를 하고 전도를 하니 주님께서 교회를 부흥시켜주셔서, 지금은 개척교회를 몇 개를 세우고, 또 외국에 선교사를 몇 명을 보내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식으로 자랑을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에 남기는 어떤 물질적인 증거물을 내세워서 그들이 납득이 되도록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역사를 통해서 자기의 정당함을 인정받고 증명하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곧 개혁주의 신학이고, 또한 유대교 신학이라는 말이다.

◈ 예수님, 메시야다운 기적을 보여주세요 !!

마지막으로 이것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유대인 학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은 것이 바로 그러한 점인데, 그들은 아주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묻기를 먼저 "예수여, 분명히 메시야는 구름을 타고 온다고 했는데, 지금 당신은 구름을 타고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두 번째로는, 메시야가 올 때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했는데, 그러니 당신이 메시야라고 하면 기적다운 기적을 보여달라?" 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 음란하고 악한 세대에 보여줄 기적은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요나의 기적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죽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병이 나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떠밀어서 죽는다는 말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메시야를 고대하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마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마 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마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멸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멸할 수 없느냐
(마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다시 말해서, "메시야를 역사적인 증거물로 삼기 위한 인간들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그것이 바로, 지금 너희들이 메시야를 엉터리로 믿고 있다는 증거물로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유일한 기적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가 아닌 '묵시' 라는 말이다.

◈ 묵시는 역사자체를 공격하고 파괴해 !!

그러므로 묵시는 역사자체를 공격하는 것인데,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역사 의식자체를 말이다. 지금 이 묵시에 대해서 한 마디 하려고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묵시라는 것은, 역사의식에 모든 기대를 걸고, 사실 인간은 역사가 빠지면 시체가 되니 말이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희망을 걸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한 가지를 잊지 말라 !!

하지만 사도 베드로는 뭐라고 말했는가? 역사가 아니라, "하루가 천년과 같고, 천년이 하루와 같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를 따진다고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짓인데, 그래서 주님은 도적과 같이 온다는 것이다.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아니, 장로님이 다리를?

어제 장로님과 이야기를 하는데, 그만 책상이 흔들려서 그래서 책상을 눌렀는데,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그만 장로님이 다리를 떠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ㅋㅋ). 그렇다고 다리를 떨리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말이다. 오히려 관절에는 좋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10시 55분에 말이다. 장로님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그 지진을 우리가 불렀는가? 그야말로 도적같이 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묵시는 그렇게 도적같이 오는데, 또한 별똥별과 같이 온다는 말이다. 마구 직선으로 파고 들어오기에 말이다. 그것이 곧 묵시인데, 도적같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왜냐하면 역사자체를 파괴하기 위해서 말이다.

◈ 역사 속에는 악마, 즉 강자들의 화려한 축제가 !!

그러면 역사 속에는 누가 있는가? 악마가 우글거리는데, 즉 역사 속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하기 위해서 강자들의 화려한 축제가 벌어지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역사가 아니라 묵시를 믿는데, 즉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지금 당장 죽어도 오늘밤에 낙원에 가는데, 그러니 이제 그만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살려주시는 분이 아직 이유가 있어서 데리고 가지를 않으니, 그렇게 살아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진짜로 성령을 받은 성도의 모습이고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참 어려운 공부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들이 노린 것은 자기 의이고 자기 정당함인데, 그러니 십자가도 없고 예수님의 고난도 없고, 인간의 성공신화만 가득하게 들어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신학을 당연히 거부하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06,10 오후 3시 10분에 마침.

                                                여보, 지금 식당에 손님이 왔는데 뭐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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