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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속의 사랑21909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9. 30. 13:16
2019-09-29 20:36:35조회 : 11         
20190924 해외가을특강 : 민수기 속의 사랑B -이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 (IP:122.43.170.138)

 20190924 해외가을특강 : 민수기 속의 사랑B -이근호 목사-

 

먼 길을 가는데 떡볶이 먹고 가는 것이 나을까요? 김밥을 먹고 가는 것이 나을까요? 먼 길을 가는데. 질문 자체가 이상하죠. 먼 길을 가는데 떡볶이가 나을까요? 김밥이 나을까요? 자, 먼 길입니다. 먼 길. 먼 길을 가는데 첫 번째는 떡볶이, 두 번째는 김밥, 세 번째는 상관없다. 자, 몇 번째입니까? 세 번째 상관없다죠. 인생을 가는데 있어서 방향이 있어요. 방향이 있는데, 인생이 떡볶이를 먹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나 김밥을 먹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나 아무런 영향이 없어요. 상관이 없어요. 그 가는 방향이 가는 쪽으로 꾸역꾸역 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방향을 바라보게 되면, 지금 내가 어떤 지금이냐, 지금 내가 키가 몇 센티미터냐, 거기에 대해서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요. 그게 짐이 될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짐이 될 이유가. 그렇죠. 그러면 그 방향이, 문제는 떡볶이도 중요하지 않고 김밥도 중요하지 않다면, 그러면 그 먼 길이 중요하겠죠. 성경에서는 이 먼 길을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걸 가지고 비밀이라고 해요. 비밀.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 보기에는 그냥 먼 길이지만, 실제로 거기에 쏙 들어가는, 만약에 최후의 도착지점이 있잖아요. 그 도달지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아무도 모르죠. 모르니까 시크릿secret, 비밀이 되는 겁니다.

 

자, 비밀을 둘로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 아주 모른다. 두 번째, 낌새가 느껴진다. 비밀은 비밀인데 아주 모른다 하고, 낌새가 느껴진다 하고. 낌새는 고상한 말로 징후라고 하는데, 증상, 징후. 머리에 열이 날 때는 감기증상이죠. 감기는 눈에 안 보이지만 증상이 보이죠. 그걸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어요. 이걸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로. 컴퓨터에서는 몸체를 가지고 하드웨어라고 하고 거기에 운영되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소프트웨어라고 하거든요.

 

그럼 여러분들이 이걸 안다면 영화관은 하드웨어일까요? 소프트웨어일까요? 하드웨어죠. 영화관은 건물이 있고 의자가 있으니까. 그럼 거기서 상영되는 영화는 하드웨어일까요? 소프트웨어일까요? 소프트웨어죠. 그럼 또 묻습니다. 인간의 몸은 하드웨어일까요? 소프트웨어일까요? 인간의 몸은 하드웨어죠.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뭘까요? 내 몸을 가지고 무슨 영화를 상영하느냐 하는 것은 소프트웨어에 해당되는 거예요.

 

비밀은 소프트웨어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들은 먼 길을 갈 때 떡볶이를 먹을 것이냐, 김밥을 먹을 것이냐, 둘 다 먹고 배설하니까 그 하드웨어는 중요하지 않아요. 무슨 비밀을 간직하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비밀을 간직한다는 것은 제 말에 의하면 먼 길인데 그 갈 길에 대해서 아주 모르는 것이 아니고 낌새를 어렴풋이 느낄 때, ‘나는 방향이 이쪽 방향이야’라고 증상을 느낄 때, 그것은 비밀을 간직한 사람인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 강의와 두 번째 강의의 제목을 함께 묶어버리면 이렇게 됩니다. 제목을 미리 정했어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비밀의 단말기’ 단말기. 영어로 하면 시크릿 모니터. 모니터에서 반드시 현상이 보이게 되어 있어요. 비밀의 단말기가 뭐냐 하면은 이게 내 인생이죠. 그러면 비밀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과 나 사이는 존재와 존재가 아니고, 존재가 있더라고 두 사이에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 비밀이 나보다 더 중요하다. 이게 바로 성경의 뜻입니다. 비밀이 내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 비밀이.

 

이 비밀이 중요하기 때문에 떡볶이를 먹든지 김밥을 먹든지 그거는 관계가 없어요. 비밀은 먼 길, 다른 말로 하면 갈 길. 그래서 우리나라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둘이 헤어지는데, 헤어지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갈 길이 달랐다. 갈 길이 달랐어요. 갈 길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처음에는 같이 있는데 쭉쭉 갈라지는 거예요. 갈라서는 지점이 있어요. 갈라서는 지점. 갈 길이 다르기 때문에. 갈 길에 가서 갈라지지만 벌써 낌새는 갈라지기 전부터 느끼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낌새를. 그 증상을. 왜? 인간은 단말기기 때문에. 뭔가 현상이 있어요. 갑자기 tv가 잘 안 나올 때는 뭔가 전자파가 있든지, 번개가 쳤든지 뭔가 낌새가 있죠.

 

자, 우리 인생을 단말기라고 해도 되지만, 그걸 다른 쉬운 말로 이야기하면 비밀의 운반체. 비밀을 운반하는 운반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인생을. “당신은 당신의 비밀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저, 당신은 갈 길이 어느 쪽입니까?”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갑니까?” 같은 말이에요.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가고 있습니까?” “몰라”라고 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자기가 인생사는 낌새가 분명히 있는데, 머리가 아프고 증상이 있는데 “몰라”라고 하면 그 자체가 자기가 자기의 병을 모르는 셈이 돼요.

 

특히 이런 증상 같은 것은, 여기 전문가도 있지만, 한의학에서 굉장히 중요시여기잖아요. 한의학은 전례에서 내려오는 온갖 증상을 다 외우잖아요. 그거 다 외울 때 굉장히 골치 아팠죠. 모든 것을 다 외웠고 거기에 처방되는 모든 자연약재를 전부 다 연결시키잖아요. 그걸 습득하고 공부를 해야 되고 하면 힘들잖아요. 이 증상에는 이 약을 쓰는 것이 좋다. 이런 거 있잖아요. 침은 어디에 놓고. 그처럼 인간의 몸은 하드웨어고, 인간에게는 어떤 증상이 있는데, 몸만 있으면 이거는 하드웨어기 때문에 뭐가 빠졌어요? 소프트웨어가 빠졌죠. 그래서 몸+뭐냐 하면은 정신이 같이 겸해서 있는 것이 이게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근데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 전체(몸+정신)를 뭐라고 했습니까? 사건이라고 했고, 사건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관련성, 관계성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관계성은 나로 하여금 현재 여기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갈 길이 있는데, 도대체 내 갈 길이 어딘지? 만약에 이게 비밀의 운반체라면, 우리가 비밀의 모니터, 운반체라면 이 민수기라는 성경 내용이 우리의 몸을 통해서 발산하게 되면 그 사람의 갈 길은 어디입니까? 이 말씀이 있는 세계로 가는 거죠.

 

그런데 그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 말씀이 안 나오는 정도가 아니고 말씀과 대립이 되고 말씀과 마찰을 일으키고 이상하게 말씀에 대해서 역겹다고 할까요? 기분 더럽다고 할까요? 분노를 일으킨다고 할까요? 뭔가 딴 사람에 대해서 욕하는 것은 그냥 있는데, 말씀이야기하면 갑자기 화가 치민다고 할 때는, 그때는 그것도 하나의 낌새고 하나의 증상에요. 말씀에 대해서 대드는 어떤 존재 같은 것이 안에 장착이 되어 있어서, 그 비밀의 반대되는 그것의 운반체로서, 그 하드웨어로서 인간의 몸이 있다고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제가 하면서 성경 전체에 그런 이야기가 나와 있기 때문에 쉬운 예를 한번 들겠어요. 예를 들게 되면 어떤 마을에 홍수가 다 났어요. 그 홍수가 난 사람들 집끼리 서로 친하게 지냈다는 그것이 홍수가 난 것을 변경시킬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서로 사랑한다. 이것으로 변경 됩니까? 안 되죠. 사랑해도 홍수를 취소 못하고, 우정도 취소 못하고, 정성도 취소 못하고, 열심도, 헌신도, 희생도, 이런 것도 홍수를 취소 못하겠죠. 그 사건이 바로 노아홍수사건입니다. 노아홍수사건이에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조리 물에다 다 쓸어버린 거예요.

 

사람이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고 정성을 쏟고 하면 그 정성과 사랑에 대해서 굉장히 집착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이렇게 착한 일했다. 하지만 그게 노아의 심판, 노아의 홍수 앞에서는 그게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죠? 홍수가 나면 그게 다 소용이 없어요.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자, 또 하나는 내가 지금 96살인데 30년 후에 죽습니다. 죽으면 내가 그동안 사랑했고 미워했고 또는 우정을 나누고 자식들에게 희생한 그것이 30년 후에 죽는 죽음을 되돌릴 수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되돌릴 수가 없죠.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내 죽음을 취소 못하는데.

 

그래서 성경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이제부터 본격적입니다. 죽음이란, 바깥에 있는 심판이 개인적으로 스며드는 것을 가지고 죽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바깥에 있는 심판이. 노아홍수 있죠. 노아 때 홍수, 그 심판이 이제는 사적으로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 그것도 하나의 낌새로, 증상으로.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사람이 죽는 것은 죗값이다.

 

지난 며칠 전에 제가 주일에 설교를 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뭐가 있느냐 하면은 나쁜 환경만 있어요. 나쁜 사람은 없어요. 사람 죽여 놓고 교도소에 간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당신 나쁩니까?” “아니요. 여기에 와보니까 나보다 더 나쁜 사람이 있어요.” “왜?” “나는 한명 밖에 안 죽였지만 저 사람은 세 명 죽였으니까. 내가 더 착하죠.”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은 항상 자기 정당화를 하기 때문에 나쁜 사람은 없어요. 이유가 있고 변명이 있어요.

 

그런데 나쁜 환경은, 노아홍수가 내려오면서 모든 인간은 이미 잘나나 못나나 전부 다 똑같은 나쁜 환경 속에 속해져 있습니다. 나쁜 환경이 내 속에 들어와서 나에게 죽음을 유발한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책임질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환경이 나를 그렇게 몰아세운 거예요. 환경이. 그러면 나는 책임지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안 죽는 겁니까?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해서 안 죽는 거예요? 미세먼지가 마음 착한 사람한테는 안 옵니까? 아니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사람이 아무리 착해도 머리가 희어지거든요. 저도 염색했는데 염색한 거 벗겨지면 하얘요. 흰머리는 좋고 나쁘고 관계가 없어요. 그냥 하드웨어가 나쁜 환경의 일부기 때문에, 내가 마음씨를 아무리 곱게 먹어도 몸은 망가지게 되어 있고 치매 걸리게 되어 있고 당뇨 걸리게 되어 있고 쓰러지게 되어 있어요. 이미 우리는 나쁜 환경의 담지자, 담지자라는 말이 어려운데, 나쁜 환경의 요소를 전달하는 운반체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걸 편하게 생각하세요. 편하게. 니가 나보다 더 나쁘다. 아니야, 나보다 니가 더 나쁘다. 이렇게 하지 마시고, 똑같아요. 도화지에다가 크레파스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자, 여기 한번 봅시다. 상당히 사진이 아름답죠. 근데 이걸 잉크 속에 집어넣고 끄집어내보세요. 색깔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다 시커멓겠죠. 그걸 무채색이라고 해요. 이 세상은 무채색의 세계에요. 잘나고 못나고 그런 사람이 없어요. 똑같이 다 검은 사람들이에요. 똑같이.

 

우리가 누구한테 주눅이 든 거예요? 내가 나한테 주눅이 들고 더 나아가서 내가 내 마음에 들지를 않아요. 살아가는 게 내가 내 마음에 성이 안차는 거예요. 우리는 알록달록을 원하는데 세상은 나로 하여금 개무시 하게 하거든요. 세상이 나를 개무시 할 때 내 대처방법은 뭡니까? 간단해요. 내가 나를 개무시 하면 되는 겁니다. 그 쉬운 방법을 놔두고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남이 나를 안 알아주잖아요. 그러면 남한테 화 낼 게 아니고 내가 나를 안 알아주면 돼요. 개코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살면 돼요. 얼마나 사는 게 편합니까?

 

이 편한 것을 놔두고 왜 자기는 대단한 사람인양, 내가 마치 절대로 나를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처럼, 어떤 독보적인 존재처럼, 그렇게 독자적으로 하게 되면 그거는 자꾸 남한테 역성을 내게 되어 있고 화를 내게 되어 있어요. 물론 화를 노골적으로 인상 찌푸리면서 내겠지만, 심지어 웃는 그 속에도 안에 뭐가 담겨있겠어요? 분노를 억제하면서 웃어요. 인간은 뻔해요. 안 봐도 뻔해요. “아이고, 예, 훌륭하십니다.”라고 해놓고는, 속으로는 ‘개코나!’ 모든 인간은 이중성이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어떤 기대를 그다지 하지마세요. 그 사람에게 나올 것은 자기변명 외에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만남은 사기꾼과 사기꾼의 만남이에요. ‘저 사람 참 좋다.’ 좋은 사람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사람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면은, 성경에 좋은 사람을 소개해드릴게요. 그런 사람도 있어요? 있어요. 누구냐 하면은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 철딱서니가 하나도 없어요. 이럴 때만 좋아요. 어린아이에게서 벗어나게 되면 안 좋아요. 안 좋습니다.

 

자, 두 번째 강의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인간은 죽음의 운반체. 죽음=비밀. 인간은 비밀을 안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럼 인간이 먼 길을 간다. 그 먼 길이 무슨 길이겠습니까? 먼 길이 바로 내가 심판받는 그 길.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 심판에서 갈라지겠죠. 그 낌새가 보이니까. 종합은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민수기를 왜 줬어요? 민수기를 왜 줬느냐 하면은, 일찍, 죽음의 낌새를 일찍 담아버리자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이제 죽는다는 말입니까? 아니, 너 대신 죽었던 분을 미리 담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민수기 8장 뒤에 보면 절기라고 해요. 절기. 자, 공식을 봅시다. 아까 공식했죠. 백성에서 어디에 모인다고 했습니까? 백성이 어디로 집결한다고 했어요? 레위인. 레위인이 누굴 만난다고 했어요? 레위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만나죠. 레위인이 하는 일이 뭐였습니까? 짐승을 죽이는 일을 하죠.

 

자, 백성에서 레위인, 다시 복습할까요? 백성은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점이라고 한다면, 이 레위인과 점 사이에 뭐가 중요하다? 하나의 사건, 백성도 사건이고 레위인도 사건인데 이 관계가 중요하죠. 이 관계는 무슨 관계냐, 내 죄를 대신 가져가세요, 라는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폐품처리업자, 또는 쓰레기처리업자라고 보면 돼요. 이 레위인이. 오늘 제목을 쓰레기처리업자라고 할까요? 레위인은 사건이죠. 하나님은 또 하나의 사건. 사건과 사건 사이에 누가 등장합니까? 짐승이 등장하죠. 이 짐승은, 백성들에게 인수받은 백성의 죄를 레위인이 다 어디에 집어넣는다? 짐승에게 집어넣어서 이 짐승이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벌을 받는 거예요. 심판을 받는 거예요.

 

자, 거기까지 이야기했죠. 이번 시간에는 절기죠. 이걸, 이 혜택을 분배하는 거예요. 이 혜택을 분배하는 겁니다. 분배하게 되면 각 사람 하나가 사건이라면, 사건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이 비밀, 하나님이 준비한 비밀을 하나하나씩 이걸 담는 거예요. 담는데, 담는다고 하지 않고 절기에 참석한다. 이래 되는 거예요. 절기에 참석한다. 또는 호출당하는 거예요. “절기에 모여!” “뭐, 빵 주나? 떡 주나?” “아니,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분배해줄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도 붕어빵 파는 곳이 있어요? 붕어빵 틀에 밀가루 쭉 붓잖아요. 쭉 부어서 돌리고, 그 다음에 팥을 넣고, 그 위에 밀가루 붓고 또 돌리잖아요. 저도 해봤어요. 한 사람 한 사람, 사건 하나마다가 징후, 낌새, 이미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로 간주한다. 죽은 자로.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사랑이라든지 용서라든지 미움이라든지 이게 의미가 없어요. 내가 하는 희생이라든지 열심이라든지 의미가 없어요.

 

근데 죽음의 반대말이 뭐죠? 그러니까 제가 강의한 대로 한다면 이 말은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죽음이라는 말도 되지만, 정확히 말해서 죽음 사건을 우리가 할당받은 겁니다. 우리가 검사입니다. 검사가 모든 사건을 다 하는 것이 아니고 할당받죠. 우리는 죽음 사건에 할당받은 거예요. 그러면 죽음 사건을 보여주는 낌새로서 우리는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를 우리가 갖고 있는 거예요. 지금 논리 전개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죽잖아요. 죽음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미 성도에게는 미리 죽음의 사건이 있는데, 이 죽음 사건 속에는 뭐가 해결이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죽어도 어디에 간다? 천국에 가고. 우리가 아무리 죽어도 영생에 가고. 아무리 죄를 지어도 어디에 간다? 천국에 간다를 이미 담고 있는 그러한 하드웨어로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이게 민수기에서 이스라엘입니다. 왜? 그들은 절기에 참석하니까.

 

절기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잘 안 들었는데, 절기라는 말은 뭐냐,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그런 것들이 절기에요. 절기가 되면 큰 행사가 벌어지는데 그게 뭐냐, 짐승을 잡는 큰 행사가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가운데 블랙홀로 삼고, 그 주변에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여서 그 죽음을 다 쳐다보는 사건이, 쳐다보는 일이 뭐냐 바로 절기에요. 축제에요. 찜질방이 아니고 뜨거운 것 나오는 그러한 것, 사우나나 불가마 한증막, 불가마 앞에서 주변에서 사람들이 가운입고 있죠. 불가마 앞에 왜 있는 거죠? 중심에 뭐가 있기 때문에? 불길이 나오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오고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인지를 보기 위해서 주변에 모여든 사람,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입니다.

 

자, 이해되셨죠? 그럼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죽어있음의 반대말이 뭐죠? 이런 죽음이, 소프트웨어에 정보를 담는데, 죽음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은 살아있음이에요. 그러니까 살아있다면, 죽음과 반대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은 어디에 갑니까? 자기가 살아있음을 증거 하기 때문에 지옥갈 수밖에 없습니다. 먼 길에 햄버거를 먹고 가나 떡볶이를 먹고 가나 김밥을 먹고 가나 백날 가도 그 사람은 지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왜? 멀쩡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소프트웨어가 주장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걸 큰소리칩니다. “날 건드리지 마라. 나는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런데 성도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이미 죽어있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죽어있음을. 살아있기 때문에 더 살기 위해서는 애를 쓰겠죠. 온갖 근심과 걱정과 고민과 후회와 책임감을, 이런 것 다 스스로 짊어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한 짐 다 지고 가는 겁니다. 잘 사는 것을 남한테 밉보이지 않게, 남 못지않게 잘 살기 위해서 노력하다보니까, 이게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고 지옥 보내는 겁니다.

 

자, 살아있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살아있는 사람의 특징은 말이 많다는 겁니다. 저도 말이 많은데. 살아있는 사람은 말이 많은데, 이 말이 뭐냐 자기를 변호하고 변명하는데 말이 그렇게 많아요. 이래서 그랬다. 이거는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 계속 타인에게 말을 쏘아 댑니다. 그런데 이미 죽은 사람은 그냥 싱긋이 웃지요. 왜? 변명할 필요도 없고, 이렇게 기를 쓰고 니한테 지기 싫다고 할 필요도 없지요. 그냥 싱긋이 웃어요. ‘그래, 니는 니 갈 길 가고 나는 내 갈 길 갈란다.’ 그뿐이라고요.

 

그럼 성경에 그런 예가 있는가? 그런 예가 있습니다. 요나입니다. 요나는 자기가 소프트웨어에 신경 쓸 사람이, 선지자가 하드웨어를 신경 쓴 거예요. 하드웨어를 뭐라고 했습니까? 몸이죠. 몸을 신경 썼기 때문에 도망친 거예요. 어느 곳으로? 말씀이 없는 곳으로. 하나님의 비밀이 없는 곳으로. 일반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섞이기 위해서 도망을 쳤어요. 도망치다가 풍랑이 일어가지고 죽음이 찾아왔어요. 그렇게 되면 요나는 존재가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은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요나는 사건에 휘말리게 돼요. 배가 가는데 갑자기 지중해에 풍랑이 일어난 겁니다. 사건이 다시 그 인간을 도로 백back으로 해서 말씀이 있는 곳으로 몰아세웁니다. 자, 공부했습니다. 말씀 안에는 비밀이 있는데 그 비밀이 뭐라고 했습니까? 죽음이죠. 요나는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요나가 물에 빠져서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요나는 죽죠. 심청이처럼 치마 둘러쓰고 물에 빠져서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요나이야기 보니까 요나가 안 죽고 어디에 들어갔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죠. 그걸 요나에서는 죽음 속에, 음부 속에 들어갔다고 해요. 죽음 속에서 살 수가 있다는 거예요.

 

그냥 인간은 살아있는 것 속에서 산다고 하는 것이 인간이 아는 지식의 전부인데, 요나는 죽음이라는 큰 알, 고기뱃속에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신약에 오면 예수 죽음 안에서,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모습이 이 모습이에요. 죽음,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책임이라든지, 내 죄에 대해서 묻지를 않는 거예요. 이미 죽은 사람을 또 죽일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도 감사가 되죠. 내가 살아있다는 이것의 바깥에 뭐가 쳐져 있다? “이미 나는 죽었습니다. 죽었어요. 죽었으니까 나보고 시비 걸지 마세요. 죽은 놈이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이 말을 할 때는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통과해서 말을 해요. “당신 잘났어?” “나는 못났어.” “그런데 못났는데 왜 살아?” “내 대신 죽으신 분 때문에 살아.” 이렇게 죽음을 경유해서 하는 것, 이걸 가지고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성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절기라는 것이 있죠. 절기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그 붕어빵, 나눠주죠. 뭘 나눠줍니까? “니 죄 문제는 이미 해결이 됐다. 걱정하지 마!”

 

그런데 왜 죄 문제가 해결이 됐느냐 하면은, 이걸 나눠주게 되면 그 비밀이 있잖아요. 그 비밀이 뭐냐 죽음이죠. 내 대신 죽으신 그 분의 비밀을 운반하는 운반체로서 우리는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머리가 희어져서 염색해도, 떡볶이를 먹으나 김밥을 먹으나 이미 비밀은 비밀이에요. 내가 키가 작으나 크나 기침을 하나 안 하나 상관없이, 그거는 나를 나 되게 하는 것하고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내가 결혼을 하나 안 하나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혼자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목사님, 그렇게 하는 것은 성도한테만 해당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혼자 살잖아요?”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나는 누구한테 구애받기 싫어요. 하나님도 좋지만 하나님 없이 혼자 살고 싶어요.’라는 생각이 들겠죠. 근데 아까 첫째 강의에서 사람은 혼자 살아요? 안 살아요? 사람은 사건이라니까요. 혼자 살아도 혼자 살 수가 없어요. 아이스하키나 필드하키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이스하키를 봅시다. 그 스틱에다가 공을 몰 때 어떻게 몹니까? 공 따로 놀고, 지는 이렇게 춤춥니까? 아니죠. 공만 보고 몰죠.

 

우리 인생은 누구에 의해서 사건으로 몰려가게 되어 있어요. 모든 걸 내가 결정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황, 그 지경에 빠지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후회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후회 안 해야 될 이유가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내가 눈이 삐었지. 미쳤지.’라고 하지만, 삐지고 미쳐도 그 날이 돼보세요. 또 마찬가지의 결정을 해요. 인간은. 벌써 열 번도 넘게 이야기하는데 후회하지 말고 책임지지 말고 과거의 것 걱정하지 말고 미래의 것 미리 걱정하지 말고 지금 후회 없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이 말이죠. 지금. 내일 생각하지 말고 지금.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안 믿는 사람은 말이 많다는 것까지 왔습니다.

 

자, 말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을 뵙고 난 뒤에, 이사야도 그렇지만 욥기 마지막에도 보면 욥이 하나님을 뵙고 난 뒤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이런 문자를 썼어요. 유구무언이라고 했어요. 유구무언. 입이 있으나 할 말이 없습니다. 욥이 다른 사람한테는 말을 되게 잘했어요. 근데 막상 하나님 앞에 딱 섰을 때는 입을 딱 다물고, “제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제가 주님 앞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라고 이야기했어요.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도 같은, 비슷한 이야기를 해요.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나쁜 게 아니고,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쁜 환경에 있죠. “내가 나쁜 사람들 중에, 그중에서 하나의 구성원입니다. 그중의 한사람입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근데 이사야가 누구보고 이야기했어요? 사람보고 이야기했습니까? 하나님보고 이야기했습니까? 하나님보고 이야기했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나를 증거 하기 위해서 누가 갈꼬?”하고서 하나님께서 슬쩍 떠봤어요. 떠보니까, 이사야가 하는 말이 “제가 가겠습니다.” 제가 가겠다고 손을 들었거든요.

 

그럼 제가 가겠다고 하는 것은 이사야가 자기 믿음 좋은 것을 자랑하겠어요? 아니면 자기가 담고 있는 비밀을 이야기하겠어요? 비밀을 이야기하겠죠. 그 비밀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변명할 거리도 안 된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겁니다. 그 이사야가 하는 말 중에서, 40장 6절에서 8절에 보면 세상의 모든 영광은 풀과 꽃같이 다 없어지지만 무엇은 남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이루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이사야가 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안 믿는 사람들 이야기했죠. 안 믿는 사람들은 말이 많다고 했죠. 이 부분이 상당히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여러분이 참아내야 돼요. 현실문제기 때문에 참아내야 됩니다. 수련회 때 잠깐 했는데, 여러분들한테 알리고 싶어요. 자, 안 믿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말이 많다고 했죠. 말이 많다.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를 존재로 봅니까? 사건으로 봅니까? 존재로 보죠. 그럼 존재 여기에 차단망이 쳐져있죠. 자기를 보호하는 성채, 캐슬, 성이 있겠죠. 이거는 자기의 토치카, 방어벽이에요. 방어벽. 여기서 여기까지는 나의 나와바리에요. 영역이에요. 이거 건드리면 죽여 버리는 거예요.

 

자 남자들 봅시다. 남자들이 몸을 건드리면 화내요? 안 내요? 화내죠. 어떤 사람이 자기 자전거를 갖고 있는데, 자기 자전거인데 누가 뒤에서 만지면 화냅니까? 안냅니까? 화납니다. “내 자전거를 왜 건드려? 발로 차버린다. 에잇! 이 옷” 건드리면 화나죠. 이걸 가지고 인간의 자아의 확장이라고 해요. 인간의 자아가 확장이 돼요. 처음에 운전 배울 때는 핸들하고 나하고 분리가 되어 있어가지고 벌벌 떨죠. 그런데 운전을 자주 하게 되면 핸들이 내 몸의 확장, 연장이 돼요. 그래서 누가 내 차를 건드리면 곧 누굴 건드린 게 돼요? 나를 건드린 거예요.

 

이게 자아의 확장이에요. 누가 내가 응원하는 농구팀을 건드렸다, 배틀 일어납니다. 내가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데 누가 방탄소년단한테 디스를 했다, 방탄소년단하고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데 내가 화를 내는 거예요. 특히 소녀들. 전 세계적으로 15억 소녀들은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아주 죽이려고 저주할 거예요. 내가 속해있기 때문에 곧 내가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에 그걸 지키기 위해서 뭐가 동원되느냐 하면은 여기에 바로 언어가 동원되는 거예요. 단어가 동원되고 말이 동원되는 겁니다. 그럼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나를 지키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다? 여기에 언어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말이 많아요. 말이 많아서 이 말로 된 것이 만약에 허물어지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정신병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정신병을 고치려면 뭡니까? 나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로 땜질을 해야 돼요. “나, 의사 선생님이 어디가 아프냐고 했는데 말을 못했어. 등 뒤에 여기가 아프다고 그때 그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근데 집에 와서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의사선생님한테 다시 전화를 걸 때 이미 그 사람은 정신병이 나았어요. 정신병이라는 것은 내 심정을, 내 마음을 제대로 남한테 전달을 못해서 생기는 거예요. 그걸 한 맺힘 또는 답답함. “남자한테 참 좋은 건데 말을 못하겠네. 왜 좋은지 말을 못하겠네.” 답답해서 말을 좀 하라고 하면, “아, 이거 적절한 말이 없네.”

 

집사님! 사랑이 뭐예요? 사랑이란 속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사랑이에요. 자기가 일방적으로 퍼붓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주고받는 거예요. 선을 보는데, “오늘 선 봤나?” “네. 엄마. 선봤어요.” “그래, 선볼 때 아가씨하고 무슨 이야기했노?” “할 이야기가 없었어요.” 무슨 뜻이에요? 그 여자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 아가씨에게도 자기하고 똑같은 방어벽이 있겠죠. 방어벽이 있는데, 아가씨가 자기가 알고 있는 단어들 중에 하나를 골라가지고 날립니다. 날리면, 내가 알고 있는 이 단어 속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휭하고 튕기겠죠. “나는 순대가 참 좋은데..” “나는 순대를 진짜 못 먹습니다.” 벌써 튕겼죠. 그 다음에 한 5분 동안 침묵하다가, “나는 배타고 여행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나는 멀미나요.”

 

그러면 이 두 자아의 확장이, 이 자아의 확장은 언어를 통해서 바깥으로 표현되니까, 이 언어의 토치카가 서로 안 맞죠. 나중에는 뭐 애프터도 없고 짜장면 하나 먹고 헤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가 “나는 영화배우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럼 나도 좋은데요.” 벌써 내가 갖고 있는 언어 중에서 아가씨의 언어와 뭐가 생겼습니까? 공통 요소가 발생되죠. 이걸 가지고 사귄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귈 때의 특징이 뭐다? 말이 통한다. 말이 통하면 뭐한다? 마음이 통하는 거예요. 마음이 통하면 마음에서 공통분모가 있어요. 이 두 개가 얽히는 거예요. 이 두 바퀴가 따로 떨어져 있다가 이렇게 합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결혼이라고 해요. 결혼. 참 쉽죠. 결혼 참 쉽죠.

 

결혼의 특징은 뭐냐, 같이 살아도 서로 이야기할 것이 통한다? 안 통한다? 통하는 겁니다. 많이 통하십니까? 서로 통할 때, 공통분모가 있을 때 결혼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결혼이에요. 만약에 이 남자가 다른 여자하고 더 통한다면 그 다음부터 이쪽 여자하고는 대화가 점점 줄어들게 돼요. 왜냐하면 서로의 자아확장에 있어서 불신자는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행복이 전부거든요. 자기행복이라는 것은 자기가 정신병에 안 걸리면 돼요. 정신병에 안 걸리면 내 미흡함을 채워줄 어떤 단어를 갖고 있는, 나와 공통요소를 갖고 있는 사람을 찾기 마련이에요.

 

그러면 사랑이란 속마음이 서로 소통하는 것. 그럼 사랑이 끊어지는 것이 뭐냐, 소통이 안 되겠죠.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은 서로 대화하는 단어의 공통점이 줄어든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12살까지 엄마, 엄마, 하다가 13살부터 갑자기 그 다음부터 대화를 안 해요. 문 확 닫고 게임만 해요. 자, 왜 그럴까요? 엄마를 볼 때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고자 하는데 엄마가 이 분야에서는 몰라. 수학을 이야기하면 수학을 아나, 영어를 이야기하면 영어를 아나, 생물을 이야기하면 생물을 아나, 모르니까 걔는 뭐냐 하면은 친구한테 전화하고 인터넷을 하다보니까, 엄마하고의 공통요소가 점점 줄어드는 거예요. 결국 엄마는 “밥 먹자. 자나? 친구한테 전화하나?” 기껏 아는 것이 상투적이고 반복적인 그런 대화밖에 안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속마음을, 속언어죠. 속단어를 드러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이게 한때죠. 한때. 한때니까 어떻게 됩니까? 계속 이어지지를 못하는 거예요. 왜? 이 세상은 사건의 더미니까. 또 다른 사건이 와서 나의 자아확장에 보탬이 될지, 아니면 나의 자아를 붕괴시킬지, 이게 계속해서 염려가 되는 거예요. 이 전체이야기를,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네 자로, 살아있는 거예요. 살아있다. 살아있는 인간의 특징은 자기사수밖에 할 수 없는 거예요. 자기 지키는 것 외에는, 자기행복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내놓을 속덩어리가 그거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완벽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이 완벽을 추구하는데 새로운 사건이 오게 되면 자기방어가 현재 자기가 갖고 있는 단어 가지고는 제대로 방어가 안 될 때는 말을 못하죠. 적당한 단어가 없기 때문에. 그러면 뭡니까? 여기에 원한이 쌓이고, 적당한 단어가 없으면 분노가 쌓이고 그냥 가슴을 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니 왜 가슴을 치나?” “엄마는 몰라. 내가 왜 이러는지 엄마는 몰라.” “말을 해라.” “말을 해도 몰라.” 가슴을 칠 수밖에 없어요. 하드웨어 속덩어리가 안 바뀌는 거예요. 해주면 그때뿐이에요. “그래, 스마트 폰 바꿔줄까?” “히히” 바꾸고 난 뒤에 또 가슴을 치고 이러고 있어요. “왜?” “차 사줘.” 그 다음에 친구만나서 음주운전해가지고. 열아홉 살 먹은 애한테 벤츠 사줘가지고 사고 냈잖아요. 자기 아버지가 국회의원인데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위원장 했는데 사표 냈잖아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은 가족끼리 전부 다 각자 다 살아있어요. 그러면 만약에 이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죽었다고 봅시다. 죽었다면 이걸 뭐로 보겠어요? 이걸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거예요. 무슨 사건? 내가 얼마나 내 위주로, 내 죄가 무엇인가, 주님이 가져간 내 죄가, 덩어리진 내 죄를 죽을 때까지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사건들을 만나게 해주는 거예요. 사건과 사건이 만나면 아까 원한이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감사고 또 고마움이라고 했죠. 고마움. 고마움이 생기는 거예요.

 

그리고 걱정한다? 걱정 안 한다? 어제의 내가 그렇게 할 걸. 내일 잘 할 걸. 그렇게 하지 않고, 지금 내가 후회스럽지 않게 지금 내가 할 게 뭐냐 하는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왜? 사건이기 때문에. 그리고 어차피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고 오늘 죽더라도 천국이 왔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손해 볼 것은 있다? 없다? 내가 손해 볼 게 없어요. 죽음의 운반체니까. 이미 내가 죽은 자니까. 아까 죽은 자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말이 없다고 했잖아요. 말이 없다고 해서 그냥 차갑게 있는 것이 아니고 웃고 감사하고 고맙고. 기껏 말하는 것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것 외에는 뭐 마땅히 할 이야기가 없죠.

 

그래서 이 절기에서,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절기에서 마지막 제사가 있는데 이거에요. 화목제. 마지막 제사입니다. 이 제사 외에는 다른 제사가 없어요. 로마서 3장 한번 찾아보세요.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화목제물을 세우셨다고 되어있죠. 화목제물로 세우신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보라는 말은, 지금 떡볶이 먹을까요? 김밥 먹을까요?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먼 길을 가야되니까. 지금 내 삶이 어떠냐고 자꾸 자기를 닦달내지 말고, 자기를 힘들게 하지마세요. 이게 떡볶일 수도 있고 김밥일수도 있어요. 먼 길을 가니까. 먼 길을 가는 사람은 비밀을 담고 있어요. 그 비밀은 니 문제는 내가 이미 해결했다는 거예요. 이게 화목제물이에요.

 

모든 제사의 끝은, 화목의 뜻이 뭐예요? 니하고 내하고는 서로 속마음주고 받는 사랑의 관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율법은 다 뭐로 이룹니까?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다 이루어졌다. “내가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이렇게 사랑해주시고 용서해주시고 보호해주셨는데.”라는 그 고백. 그 고백이 바로 살아있는 성도,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차라리 못난 사람으로서 뭐든지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