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14강 마태복음26장 31-35절(현장성)20190827-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강의를 하겠습니다. 마태복은 26장 31절부터 보겠습니다.
31절,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흩어질 것이고 나를 떠날 것이라고 그냥 말만 하면 되는데, ‘기록된바’라고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사전에 아버지하고 약속된 것이다 이 말이죠. 모든 게. 약속된 것을 예수님이 실시한다는 말은, 약속된 것이 직통으로 누구로 실현된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실현된다는 것은 어떤 노선을 다 차단시키는 것입니까? 약속된 것을 인간 우리가 지킨다는, 지켰다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으로 완성되어야지, 그 말씀을 내 행함으로, 선행으로 지켰다고 하는 것을 전부 다 하나님께서는 거절하는 거예요. 예언된 대로 예수님께서만 되죠. 예수님께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모든 예언은 어디를 향하고 있다? 예수님으로 향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글이 바로 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할 때에, 말씀을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의식해서 지키죠. 하나님을 의식해서. “하나님이여, 제가 말씀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을 보시고 계시죠. 풍성하게 넉넉하게 주세요. 오늘 시간 짬 내서 기도합니다. 주여, 기도응답 넉넉하게 주세요.”라고 했죠.
그러면 방향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해서 기도한다. 무시로 기도하라고 해서 기도한다, 라고 할 때 방향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 쪽이 아니고 내 기도가 계속 유효한 가치를 남기면서 하나님 앞에 점점 더 가까이 간다가 돼버리면, 누가 소외돼요? 누가 배제되는 겁니까? 모든 기도는, 기도하라가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완성됐다는 것을 내가 지금 모르고 있든지, 알면서도 일부러 기피하고 있는 거예요.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라고 한 말은 누가 이룬 겁니까?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라.” 이것은 예언이죠. 예언은 누가 이룹니까? 예수님이 이루죠. 근데 그 틈새에 새치기해서 나도 기도할 수 있다고 끼어들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죠. 그러면 기도하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주님의 기도는 기도고 니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고, 우리를 고발하는 용도로 성경말씀이 있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사도바울이 이해한 복음, 예수의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할 때, 바로 이런 취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그런데 우리들은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것도 성실하게 훌륭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성경을 보는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착하니 주님이 나에게 복을 줄 수밖에 없지.’ 이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이 살아있으면 됐지, 왜 내가 살아 있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게 나옵니다. 전에 여러 번 한 것 같은데, 요한복음 1장 3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죠. 여기 “그가” 하나님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이죠. 알파와 오메가가 예수님이에요.
주님이 만물이 있게 했다면, 주님이 생명이라면, 우리의 이 헌 고물을 반납해야하는데, 반납창고가 어딥니까? 주님한테 반납을 해야죠. 주님한테. 나 안 믿고 누구 믿는다? 나 안 믿고 예수 믿어야죠. 내 차가 아니라고 주님 차에 내 차를 폐차시키는 거예요. 내 차 폐차시키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달아나죠. 없어지죠. 사라지는 거예요. 그동안 주님의 것을 내 것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사는 것이 다 억지가 되는 거예요. 짜증나고 억지로 되는 겁니다.
자, 이야기를 계속해보겠습니다. 모든 예언은 예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내가 여기에 있고 나는 만약에 내년에 죽는다면 나는 죽어도 살 수 있다. 부활된다. 이래 되어있죠. 근데 내 옆에 내 아내가 있다. 아내가 있는데, 내가 예수 믿고 죽어도 부활된다면, 아내가 내가 믿는 예수를 같이 믿으면 아내도 죽어도 부활된다. 자, 이런 생각에 무슨 하자나 잘못 같은 것이 나타나지 않죠.
자, 그런데 아내가 먼저 죽었어요. 1년 전에 아내가 죽었는데 예수를 안 믿는다. 근데 지금 내가 예수 믿게 되었다. 그럼 지금 예수 믿는 내가 1년 전에 예수 안 믿고 죽은 아내를 부활시킬 수가 있습니까? 천국갈 수가 있습니까? 안 되죠. 그런데 이게 된다는 거예요. 1년 전에 죽은 불신자 아내를 천국에 보낼 수 있다는 겁니다. 천주교에서 그렇죠.
천주교에서 방법은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여기 하늘나라에 가면 먼저 간 수행원들한테 빽을 쓰는 거예요. 빽을 쓰는데 한 백만 원 정도 듭니다. 그것도 카드로 해도 되고 현찰도 받아줘요. 성당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미사 넣는다고 합니다. 미사 넣는다. 미사 넣으면 여기에 있는 성자계열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한테 빽을 쓰느냐 하면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이걸 못해요.
누구한테 빽을 쓰느냐 하면은 여기에 여성분이 있거든요. 성모마리아한테 빽을 써요. 근데 성모마리아 지가 못해요. 성모마리아와 예수님과는 아들 관계기 때문에, 아들이 효자거든요. 엄마 말을 듣고 빽써서 미사 넣은, 그쪽에 관계된 조상들, 마리아 모르고 예수님 모르는 그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그냥 구원하면 차이가 없잖아요. 평등이 깨진다고요. 균형이 깨지니까 그냥 하면 안 되고 애 좀 먹이고 가야 돼요. 믿음 값을 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천국에 바로 가지를 못하고 연옥에 가서 있는데, 연옥이 뭐냐 하면 연수학원이에요. 거기서 연수를 받아야 해요. 천국생활을 하려면 잘 적응이 안 되잖아요. 일단 여기서 연수과정을 거쳐서, 연수과정에서도 고집이 세다? 그러면 마리아 빽도 안 돼요. “나는 죽어도 예수 못 믿겠다. 마리아 못 믿겠다.” 그러면 뭐 지옥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연수과정에서는 어지간하면 다 가요.
왜냐하면 연수과정이 이렇게 좀 혹독하고 다른 대책이 없으니까. 이미 지옥에 왔으니까. 몰아넣기 식이에요. “니가 지금 뭐 여기까지 와서 천국에 안 가고 지옥 갈 생각하고 있나? 니가 아무리 성질이 고약해도. 한번 대책 내놔봐라. 대책 있나?” “대책 없네요.” “그럼 니 뭘 선택할래? 천당 선택할래? 지옥 선택할래?” “아이고, 뭐 천당 가야죠.” “그래, 천당가거라.” 이래 되는 거예요. 이래 되는 겁니다. 연옥이 천국이 아니니까. 좀 갑갑하고 답답한 동네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뭡니까? 미사 넣어라! 미사 넣으라는 것이 한 마디로 뭡니까? 돈 내거라!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뭐냐 하면은 천당은 없어져도 성당은 커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천주교인들이 성경 전체를 몰라도 쉽게 천주교가 되죠. 입구에 하얀 마리아상이 있잖아요. 들어오면서 꽂으면 돼요. 꽂으면. 성부성자성신 성호를 그으면 돼요. 들어오면서 인사하면 되거든요. 팍팍팍팍팍팍 꽂고 들어가면 돼요. 꽂고 한 몇 달만 들어오면, 학습 받고 영세 받으면 뭘 또 할 수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살과, 딱딱한 비스킷과 포도주를 또 마실 수 있어요. 그거 먹으면 뭐 돼요? 주술적인 효과가 있어가지고 그거 먹으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었기 때문에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천국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절에 다니는 어머니, 딸이 천주교신자다. 어머니는 불교에 빠져가지고 모든 식구 이름을 절에다가 다 집어넣었다. 근데 이제는 엄마를 불쌍해한다고 뭐냐 하면, “그냥 다니고 시키는 대로 하세요.” “야야, 내가 어려워서 모른다.” “몰라도 괜찮습니다. 우리 신부님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그 신부님이 뭘 시키겠어요? 주술적인 모션motion있잖아요. 행위. 여자들 수건 덮어쓰는 것부터 해가지고 모든 게 형식이잖아요.
향 피우면서 어디서 이상한 복장해가지고, 유니폼입고 흔들어댈 때, 거기가가지고 하니까, “어머니는 안 돼요. 1분 참고 영세 받고 해야 해요.” “야야, 영세가 뭐꼬?” “합격통지서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 절에 가는 것 치우고 여기서 1년만 버티면.. 딸의 소원 좀 들어주세요.” “그래, 내가 잘 모르지만 니 소원은 들어줄게.” 그래가지고 떡 하니 천주교신자 된 거죠. 불교에서 천주교로 입적한 거예요.
그게 수법이죠. 그걸 기독교에서 부러워하는 거예요. 언제 성경공부 시켜서 학습 받고 세례 받습니까? 중간에 공부한다고 바쁘다 해서 다 빠져나가고. 주일에 나오기도 바쁘다고 하고. 교인수가 등록은 많이 하는데 출석교인수가 얼마 안 돼. 여기서 목사로서는 기분나빠가지고 총동원전도주일을 해가지고 눈으로나 한번 보자. 우리가 숫자 모아놓았는데 그거나 확인해보자. 총동원전도주일을 자주 하는 게 아니거든요. 1년에 한 번씩 총동원전도주일해가지고,
“여러분들이 마시는 것도 이만 원인데, 커피 값 한 달 모아가지고 여러분 초청한 사람 봉투에 오만 원 넣어주면 온다. 억지로라도 오게 해서,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영혼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데려오면 구원받습니다. 노는 사람들 억지로라도 데려오라고 했잖아요. 혼인잔치에서.” 그 본문을 또 인용해가지고, 사회에 나가서 아무나, 에브리바디, 아무나 데려와 가지고, 장로는 좋아가지고 뒤에서 숫자 세면서 부흥됐다고 흐뭇해하고. 그때는 계산해가지고 목돈 쓰고, 맛있는 것 해주고, 선물도 주고, 비올 때 우산도 주고. 이거는 뭐 난리도 아니에요.
자, 그렇게 총동원전도주일을 해도 한번 들어왔다가는 다 빠져나가죠. 그러면 대안이 뭐냐, 최근에 대안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이거에요. 1. 중보기도. 최근에 등장한 거예요. 10년 전부터. 중보기도. 일종의 연옥이죠. 안 믿지만 내가 기도하게 되면 응답받는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2. 참선. 이것은 불교에서 온 거죠. 대승불교에서.
하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하다보니까 심령이 전부 다 컴컴하고 상했어요. 그럼 교회에서 뭐냐 하면은 마음을 편하게 해줘야 되죠. 편하게 하는 방법은 뭐냐 참선하는 것처럼 영적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불교용어니까 차마 못 쓰고. 대신 영적훈련이라고 해가지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훈련을 해줘서, 이런 서비스를 해줌으로써 우리 교회가 이 동네에 있어야 될 정당성을 이제 알리는 거예요.
“교회 나와서 여러분들이 심란한 마음을 안정되게 하시면 마귀가 떠나고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이런 훈련을 가지고 끌어 모읍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교회는 유지되어야 되고, 유지되려면 돈이 있어야 됩니다.” 결국 마지막에 돈 문제로 끝나는데, 목회 뭐 있어요. 이게 목회죠. 딴 게 아니에요. 이게 목회에요. 사람들이 아쉬운 그것을 채워주겠다는 거예요. 근데 예수님 방식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함께 있어버리면 나를 위한 예언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예언이 되겠죠. 예수님을 위한 예언이.
내가 죽기 전에 이미 1년 전에 죽은 아내에 대해서, 아내가 지옥에 가고 나는 천국에 간다고 했을 때에 지금 비교를 누가 합니까? 아내라는 몸과 누구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나라는 몸과 비교해서, 죽은 아내가 나처럼 될 수 없을까? 나는 천국에 가니까, 이렇게 비교가 되겠죠. 이게 연옥설이라고 해요. 연옥설. 연옥이 이때 나온 거예요. 불쌍한 아내가 나처럼 됐으면 좋겠다.
자, 중보기도 나왔죠. 개신교에서 하는. 중보기도의 원리가 뭡니까? 저 안 믿는 사람도 나처럼 됐으면 좋겠다. 전부 다 기준이 뭐예요? 나를 모델로 하고 있죠. 나처럼. “하나님이여, 나처럼 되게 하옵소서.” 엘리야가 그런 잘못을 했어요. 엘리야가 수배당하고 난 뒤에 아합이라는 못된 왕의 부인, 아합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이세벨이라고 있어요. 이세벨. 이세벨은 아세라 바알종교에서 시집온 사람이거든요. 시집올 때 그냥 오지 않고 옛날 친정에서 있었을 때의 종교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 말이죠.
가지고 왔는데,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다 죽여 버렸어요. 문제는 이제 누구만 조지면 돼요? 누구만 조지면 다시 바알종교나라가 돼요? 엘리야만 조지면 돼요. 엘리야가 쫓길 때에 하는 말이 나만 남았다고 했어요. 나만 남았다. 엘리야 본인이 자기가 기준이 됐어요. 나만 남았습니다. “나 같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추격하고 나를 현상 숭배했습니다.”라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만 아니고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왕상19:18)
기준을 나와 아내하고 하지 말고, 나를 없애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에 누가 들어갑니까? 예수님이 들어가게 되죠. 예수님이 들어가게 되면, 모든 예언이 예수님에게 이루어졌죠. 그러면 뭐냐 하면은 1년 전, 2년 전이 없어져버려요. 예수님한테는 시간이 멈춰버립니다. 어렵죠. 제가 주일 낮 설교에 설교한 내용이 뭐냐 하면은, 지체와 몸 사이에는 오직 사랑으로 연결되고, 지체와 지체사이도 오직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했고요. 그 사랑과 사랑이 연결될 때 그 사랑은 뭐가 멈추어진다고 했습니까? 시간이 멈추어줘요. 시간이. 시간이 멈추어집니다.
만약에 혹시라도 어떤 부부가 사이가 좋아도 너무 좋아요. 연애할 때보다 사이가 더 좋고, 어느 정도냐 하면 같이 있어도 보고 싶을 정도로. 같이 옆에 있어도 보고 싶을 정도로. 뭐, 다들 이해가 안 되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사랑은 시간이 멈추니까, 이쪽이 44일 때 40이었고 64일 때 60이었고 82일 때 78이었고..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그 사랑은 변함이 없네. 왜? 시간이 완전히 무시당하니까. 시간이 무시당하니까요.
근데 사랑이 없는 가족은, 부부는 자꾸 사랑이 없다보니까 홀로 살고 싶은 거예요. 따라 오지마라. 일주일간 전화하지 마라. 내 앞에서 얼쩡거리지 마라. 80대 할머니가 아침에 문 열어보고서는 아직도 눈 뜨고 있는 남편에게, “니 아직도 눈 뜨고 있나?” 90대 할아버지한테는 “친구들은 다 산에 가서 누워있는데 니는 아직도 방에 누워있나? 아이고, 지긋지긋하다 정말. 지긋지긋해.” 다시 말해서 사랑의 대상도 아닌데 왜 자꾸 내 옆에 둘러붙어 있느냐 이 말이죠. 이물질처럼. “좀 떨어져라! 좀 알아서 가라! 알아서. 눈에 안 띠게. 너하고 엮이는 것 자체가 나한테는 비극이다. 엮이는 것 자체가.”
예언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시간이 멈추어진다는 말은, 시간을 뛰어넘었다 이래 돼요. 그럼 시간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은 시작과 마지막 사이에 시간이 있거든요. 시작도 시간이 없고 마지막도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종결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마감되었으니까. 이 사이에 시간이 흐른다 이 말이죠. 그럼 인간세계에는 시간이 흐르겠어요? 안 흐르겠어요? 흐르죠. 인간세계에는 시간이 흐르죠. 인간세계에 누가 침투했어요? 바로 하나님의 예언이 침투했죠. 그냥 예언만 침투하면 시간이 흘러요.
근데 예언에 예언의 완성이 들어가죠. 예언이 완성돼버리면 이 시작이 마지막이 돼버렸죠. 시작한 예언이 마지막이 되죠. 알파와 오메가요. 마지막이 마지막을 향하여 달리는 그 기차위에 올라타 버렸다 이 말이죠. 이게 성령의 임함입니다. 성령의 임함. 성경에 이런 게 있는지를 몰랐죠.
골로새서 3장 1절부터 3절까지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절,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3절,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이유가 뭐냐,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은 어디에 있어요? 그리스도와 함께 있죠. 시간이 흐르는 곳에서 니가 죽어있고. 공동묘지에 누워있는 시체는 시간을 느낍니까? 못 느낍니까? 못 느끼죠. 몸이 죽었으면 시간의식도 같이 죽은 거예요. 시간이 흘러도 나는 이미 그 시간에서 은퇴한 거예요. 은퇴한 자에게 시간은 해당사항이 없어요. 죽은 자에게는 2019년, 2020년이 의미가 없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게 읽는다고 해서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지만, 자, 에베소서 2장 5-7절을 여러분들 중에서 한번 읽어보세요. 5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세대에 휘말리지 않는 거예요. 세대라는 말은 앞에 기관차가 있고 뒤에 열차가 10량 이상 있죠. 각 열량마다, 각 세대마다 군데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역사를 초월한 사람이 군데군데 나타난다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다고 예수님을 봤죠.
아브라함 자체가 언약 속에 있으니까, 시간을 능가하는 거예요. 시간을 능가한다는 말은 멀리 오는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겁니다. 노아도 그랬고 아벨도 그랬어요. 아벨, 노아, 아브라함, 야곱, 이삭... 그 계열, 그 나열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그 인물들의 나열이 나와요. 다윗도 나오고 이사야도 나오고... 나와요.
그 인물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지금 그 시대에서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에요. 그걸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그들 속에 예수님의 영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들 속에. 성령이 임해버리면 나라는 것이 껍데기에 불과하고 내 안에 누가 살아 있느냐 하면은 완성자가 살아있어요. 하나님의 예언의 완성자가 나를 이용하는 거죠. 그게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피조물다움이죠. 창조주가 주도권을 쥐고 피조물을 마음껏 다루는 거예요.
이 세상의 시간의 흐름이나 기대치에 휘둘리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이 기대와 희망에 휘둘리면 지금 현재가 불행해져요. 도대체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은 얼마나 많은지, 아무리 가져도 미흡함이 남아요. 모자람을 자꾸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을 이번 수련회 제 3강에서 제목을 뭐라고 했습니까? ‘보편적 정신병’이라고 했죠. 모든 정신병은 답답해서 가슴을 치는 거예요. “뭔가 있는데, 아니야, 아니야, 지금 이런 삶은 아니야. 뭔가 있어. 미치겠어. 모자람이 있는데 그 모자람을 마저 안 채우니까 내 마음이 괴로워서 못 견디겠어. 밤에 잠도 안 와. 뭔가 있어.”
앵그리 버드가 뭐냐 하면은 만화의 캐릭터인데, 눈이 올라가서 항상 화가 나 있어요. 뭔가 모자라. 그 모자람이 불편해죽겠어. 불편해서 맛있는 것을 먹어도 이상하다. 미지의 X가 자꾸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요. 옷을 신상을 사 입어도 뭐 한 이틀이나 사흘 지나고 난 뒤에, ‘아니야, 아니야, 이 옷이 아니야. 바꿀까?’ 바꿀까말까 하다가 한나절이 다 지나가는 거예요. 또 확인할까 해서 친구하고 전화 붙들고 1시간 반 동안 하다가, 백화점에서 옷 샀는데, 옷 보여주려고 화상통화해서 “이 옷이 나아?” “왜 맞는데.” “으응~ 그때는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안 맞아.” 이러면서 벌써 30분이 지나가버렸어요. 바꿀까말까 하다가 30분 지나고, 전화통화 하다가 30분 다 지나버리고. 항상 화가 나 있어요.
자식이 와가지고 “엄마! 오늘 시험 잘 쳤어.” “알았어. 시험 잘 쳤다고 건방떨지 말고 공부해. 숙제해.” “엄마! 칭찬 좀 해줘.” “뭐? 백점 맞은 거 너만 맞았나. 나도 옛날에 백점 맞았다.” 이런 식으로. 뭔가 이렇게 불만이 가득한 거예요. 불만이. 이거는 아무리, “당신, 불만이 있어서 안 되겠다. 태국에 가든지 우리 해외여행 한번 갈까? 뭐, 크루즈여행 한번 갈까?” 가도 소용이 없어요. 짐 싸서 갈 때부터 싸워가지고 올 때까지 싸워요. 갈 때부터 앵그리 버드인데 올 때까지 앵그리 버드에요. 괜히 가서 돈만 날리고 몸만 축나고 완전히 몸이 더 젓갈이에요. 젓갈. 몸이 젓갈된 거예요. 쭉 쳐져버렸어요.
다시 마태복음으로 넘어가봅시다. 소용이 없어요. 인간은 나름대로의 현실을 적응하면서 자기를 주인공 삼아서 뭐합니까? 예언을, 미래의 그 멋진 일이 내게 실현되기를 원하죠. 그러면 내게 실현되기를 원하면 누가 목격해야 되고 누가 그 좋은 날을 누가 친히 눈으로 봐야 됩니까? 바로 내가 죽어야 돼요? 안 죽어야 돼요?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날에 내 희망하는 것이, 나에게 매일 만족시켜 줄 것을 고대하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평소에 아버지가 있을 때 사법고시 공부하다가, 아버지 죽고 난 뒤에 사법고시 합격하고 난 뒤에는 소주 들고 오징어 구워서 어디에 갑니까? 아버지 산소에 가죠. “아버님! 제가 왔습니다.” 여자 친구 데리고 와서는 “니도 인사해라.” 그 여자 친구는 기독교신자인데 그건 무시하고. “니도 인사해라.” “어머, 아버님, 저 왔어요.” 무덤 안에 있는 쥐들이 웃고 있고. 왜 그래요? 왜 그렇습니까?
그걸 가지고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은 절대로 나의 이름으로 산적이 없다.” 뭐로 살았냐?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았다.” 아버지가 늙었건 죽었건 간에 관계없어요. 아버지의 요청이 지금 나를 나 되게 하면서도 미흡점이 있어요. 아버지의 욕망은 너무 세니까. 나는 거기에 못 미치니까. 항상 아버지를 의식하면서 아버지한테 미안하고. 미안한 것을 못 해줘서 아버지한테 분노하고.
이게 양의성, 의미가 두 가지에요. 같은 상황인데,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내게 너무 감당 안 되는 것을 요구했던 그 아버지가 미워요. 미우니까 복수한다 치고 맨날 뭐냐, “애 봐주세요. 대출해주세요. 집 사는데 돈 좀 빌려주세요.” 이거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한테의 복수에요. 아버지에 대한 복수. “저는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대로 했잖아요. 그만한 값을 하세요.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대로 했으니까 이번 아파트 대출 2억은 해주셔야죠.”
이렇게 누구든지 뭔가 붙들고 분풀이를 하는 대상, 이걸 두자로 가족이라고 합니다. 가족. 이게 가족이고, 가족이 충족되지 못할 때는 친구한테 해요. 친구. 친구, 가족. “내 분풀이 좀 들어 도!” 분풀이를 안 하게 되면 정신병에 걸리니까. 분풀이를 하게 되면 정신병이 약간 완화된 것처럼 느껴지죠. 한 시간 반 동안 붙들고 전화하니까 확 풀리는 거예요. 친구 좋은 게 뭡니까?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좋은 친구 아니가! 친구거든요.
근데 복음을 알게 되게 되면 이 세상에 재밌는 드라마도 없고, 재미있는 게 없어요. 다 시시하고 재미가 없어요. 복음을 알게 되면. 기쁨을 주는 게 전혀 없어요. 복음 듣는 기쁨 외에 다른 기쁨이 없으니! 재미 하나도 없어요. 시시해. 시시하니까 친구하고 또 떨어져요. 친구하고 연락 안 하다가 나중에는 뭐하죠. 친구만 떨어집니까? 이제 가족모임에도 가기 싫어요. 백날 들어봐야 한 수가 낮은, 맨날 시시한 수(手), 조국이야기, 정치이야기, 그런 시시한 이야기. 놀기 싫어.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이미 끝을 터치한 거거든요. 터치. 미식축구에서 점수 내는 방법은 마지막 순간에 공을 다운터치하게 되면 점수가 3점, 5점, 7점이 나거든요. 볼 하나 더 터치하게 되면 점수가 더 추가되고. 럭비도 마찬가지고. 터치하면 되는 거예요. 성도가 됐다는 말은 이미 성령이 와가지고 완료가, 완료를 터치한 거예요. 그렇다면 1년 전의 내 아내가 지옥 갔는지 천당 갔는지 죽은 내가 판정할 권한은 없습니다. 내가.
창세전에 제 아내를 선택했다면, 내 눈에는 마치 구원 안 받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주님 보시기에 택한 자라면 주께서, 연옥까지 갈 것도 없어요. 주께서 그 백성이 내 백성이라고 하면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은 남은 자에게 속하는 거예요. 아까 엘리야이야기 기억나시죠? 엘리야는 자기가 중심이다 보니까, 내 판단이 중심이다 보니까, 아내는 안 믿었다고 하지만, 모르죠. 아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요? 모르죠. 그래서 주께서는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노골적으로 사탄 들었다고 나대는 가정이면 몰라도. 노골적으로 사탄에게 넘겨줬다는 사도바울이 말한 사람이 많이 있어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 성도는 천국과 지옥을 아무도 말하지 못하겠네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복음으로 인하여 천국 갔느냐, 지옥 갔느냐에 대해서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전에는 내 기준이었거든요. 나처럼 믿으면 너는 천국 가고 나처럼 안 믿으면 너는 지옥 간다. 이게 옛날의 내 기준이었잖아요. 그러면 그 나라는 기준하고 예수님의 기준, 십자가 기준하고 비교해보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는 기준은 뭐가 됩니까? 일방적으로 내 기준이 되니까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내린 판단도 죄가 되는 그 판단기준은 뭡니까? 오직 십자가죠. 그러면 성령을 받은 성도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는 1년 전에 죽은 예수 안 믿은 내 아내하고 나하고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데, 내가 죽은 아내하고 똑같이 전혀 구원하고 상관이 없는데,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나는 구원됩니다.”라는 것을 성령이 와서 인식, 알게 하신 거예요. 이게 에베소서 1장에 보면 나옵니다. 골로새서에도 나오고. 하나님의 계시의 영을 주사 그 능력의 풍성함을 알게 하신 거예요. 에베소서 1장 17절로 23절까지 나와요. 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은 내가 이렇게 믿었다는 것을, 나를 증거 하게 되면 이거는 잘못된 판단이고,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을 증거 하게 되어 있어요. 주님을 증거 하는 자를 건드리면 그 사람은 지옥 갑니다. 지옥 안 간다, 안 간다고, 우리가 판단 못한다고 제가 전제했죠. 근데 성령이 오게 되면 판단 못한다가 아니고 필히 판단이 돼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바로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아내는 1년 전에 죽었으니까 그거는 내 소관이 아니고. 죽은 아내는 아내의 세대가 아닙니까? 나는 내가 살아있으면 지금 이 세대에 살아있는 자들의 모임이니까. 이 세대다 이 말이죠. 이 세대가 죽은 세대까지 관여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오는 세대마다 주께서 하니까. 내 세대가 할 필요가 없고. “이 세대, 니나 잘하세요.”라는 거예요. 그럼 나는 뭘 하느냐 하면은, “내 행함과 상관없이 주의 피로 말미암아 나는 구원받았다는 것은 내가 내 능력에서 나올 수 있는 인지가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나는 내가 알아서, 내가 잘 처신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라는 것을 증거 하는 거예요. 증거 하는데, 그 증거에 대해서 대드는 것은 나에 대한 대듦이 아니고, 주님에 대한 대듦이에요.
이렇게 논리로 설명하면 또 어려우니까, 갈라디아서 1장을 한번 봅시다. 사도바울이 말을 함부로 툭툭 던지는 타입이 아니고, 툭툭 던진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보이더라도 굉장히 심오해요. 사실 심오함을 능가하죠. 6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지금 사도바울이 복음과 또 뭘 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알게 되면 필히 복음 외에,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죠. 사도가 인간이지만, 주님이 아니지만, 이미 알잖아요. 어떤 사람이 지옥가고 천당 가는지를 모르는 게 아니고 알고 있어요. 아는 기준이 나처럼 믿으라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죠.
자기는 날마다 죄인의 괴수니까, 나처럼 믿으라고 할 수 없는 게, 내가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그 사람에게 찾아왔잖아요. 찾아오니까 비로소 내가 누군지를 알았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방법은 뭐냐, 주님이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으면, 나에게 주님이 찾아오지 않을 때 나는 지옥 가는 줄을 몰랐는데, 찾아오니까 내가 찾아오지 않았을 때가 지옥 가는 중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주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아올 때 그냥 빈손으로 찾아옵니까? 복음 들고 오십니까? 복음 들고 오시겠죠. 그러면 복음 들고 온 결과가 뭐냐 사도바울 본인이 아닙니까? 본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요. 다른 복음을 언급한다는 자체가 이미 복음을 받았다는 뜻이고요. 갈라디아서 1장 7절,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벌써 이 사람들은 확실하게 지옥에 가는 거죠. 복음 안에 안 들어왔으니까.
그 다음에 8절,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뭘 받는다고 했습니까? 저주를 받는다고 했죠. 참 사도, 멱살 쥘만하죠. “니가 뭔데 판정관이야.” 이렇게 멱살 쥐고 흔들만하죠. 이렇게 도발적인 발언을 하니까.
자, 이 말을 그냥 설명하면 어려우니까,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복음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여기에 다른 비복음도 같이 동반해서 등장하겠죠. 복음 외에 나머지기는 다 비-복음. 복음이 왔는데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너는 복음 알잖아.” 이렇게 하겠죠. 사도바울이 여기서 멀찍이 표현합니다. 복음 안에 너, 사도바울이 포함이 안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 사도바울이 복음을 이야기하니까, 사도바울이 복음 안에 들어있는 것 같지만, 복음 안에는 사도바울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누구만 들어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만 들어있어요. 예수님만 들어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은, “나 아니야.”라는 방법 외에는 없어요. “나 아니야.” 그렇다고 해서 사도바울이 비-복음은 아니고. 나 아니야를 포함해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복음이 돼요.
복음 안의 기준이, 복음만 전하면 여기 우리라는 말이 나오죠. 8절에. 우리라 할지라도 또는 천사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우리나 천사가 뭐가 됩니까? 저주를 받는다는 거예요. 저주를 받는다. 그 말은 진짜 저주가 안 되는 순수한 복음 안에는 나의 공로가 끼어들어야 된다? 안 들어야 된다? 내 공로가 끼어들어서는 안 될뿐더러 나를 증거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복음을 믿게 된 나를 증거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여기에 우리가 증거 되어서는 안 돼요. 복음을 아는 우리가 증거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거는 인간의 힘으로 안 됩니다. 이미 복음을 알았으니까, 복음을 안 내가 복음에 들어왔다는 게 논리적으로 맞는 거니까.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성령께서 복음을 기준으로 하거든요.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행하심이 복음이니까. 행하심만 증거 하니까.
성령께서 뭘 하느냐 하면은 우리들에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하는 거예요. 책망의 대상이 되었다는 자체가 뭐냐 하면은 이미 우리는 책망을 받는다는 자체가 복이에요. 다른 사람한테 책망을 받는 줄도 모르고 있어요. 이게 책망인가? 책망을 책망이라고 인식하는 자체가 한패에요. 복음을 증거 하려고 하는 거예요. 복음을 가지라고 준 게 복음이 아니고, 복음을 증거 하라고 한 겁니다. 간만에 고함을 지르니까 또 배가 고프네.
잘 들어보세요. 복음을 가지라고 준 게 아니고, ‘야, 저거 가지면 천당 가겠네.’ 복음을 가지라고 하는 게 아니고, 복음 목걸이 만들어서 달랑달랑 달고 다니라고 준 게 아니고, 복음을 증거 하려는 거예요. 복음을 증거 하는 방법은 뭡니까? 복음을 만들고 복음의 효과에 대해서 내 쪽에서 한 게 있다? 없다? 없다. 이게 믿음이에요. 내가 믿었다가 아니라 복음에 대해서 한 게 없는 게 믿음이에요.
왜냐하면 그래야, 내 쪽에 믿음이 없다 해야 믿음조차도 어디서 나왔다? 복음의 능력에 포함되기 때문에. 주님의 일에 포함된 능력이어야 되지, 내 솜씨가 남아있는 믿음은요, 천국에서 안 받아줍니다. 받아주지 않아요. 벌거벗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돼요. 이 말은 다 벌거벗고 오라는 말입니다. 다 벗고 오라. 세리와 창기처럼 다 벗고 오라. 너한테 더덕더덕 걸치고 있는 것, 그거 다 버려라. 다 버릴 수가 없죠. 주께서 알아서 다 죽게 만들어버립니다.
내가 걸친 것을 소중히 여기면서 거기서 죄가 발생되고, 그 죄로 우리를 죽게 하죠. “주여, 이건 가져가도 이건만큼은 제발 건드리지 말아주세요.” 우린 매일같이 소중한 것을 생산하는데 오늘도 투자하고 있습니다. 뭐, 집사님한테는 개입니까? 진짜 소중한 것. 나는 그걸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그 무엇. 딸내미에요? 손녀에요? 아들이에요? 나보다 더 사랑하고 싶은 것. 그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합니다. 우리가 소중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은 있어요. 있는데, 주께서 건드려주면 “아, 있었네!”라고 발각당하죠.
다리가 아프다 이 말이죠. 예를 들면 민간요법이지만, 다리가 아프긴 아픈데 어디가 아픈지를 몰라요. 그러면 민간요법 하는 사람이 다리가 아픈데 손가락을 자꾸 쑤시는 거예요. 지압. “어디 아픕니까? 여기 아픕니까?” “아니요.” “그럼 여기 아픕니까?” “아!!! 맞아요.” “그 자리가 허벅지 아픈 자리입니다.” 거기다가 침을 딱 놔가지고, “이제는 이 아픔으로 인하여 다리 아픈 것이 상실될 것입니다.” 민간요법이에요. 그거 뭐 돈 안 든다고 그거만 믿고 병원에 안 가면 안 되고. 민간요법이거든요. 그걸 지압이라고 하잖아요. 지압이라고 하죠.
성령은 어딜 지압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나도 몰랐지. 이렇게 소중한 것이 있을 줄이야.” 그 점을 찾아와서 지압을 해줄 때, “아, 내가 평소에 주님에게 입에 발린 소리를 했구나! 주님 좋아한 적도 없으면서 또 매 안 맞기 위해서 주님, 주님 했구나! 실제는 나는 주님 이용해서 이것 지키려고, 이것 살리려고 이 짓했구나!” 그게 명예일수도 있고, 자존심일수도 있고, 나의 가치 또는 의미, 내가 키우는 강아지, 자식, 남편, 아내, 내 부동산, 동산, 내 지나온 신앙생활 50년 한 것, 교회 다니는 것, 그 어떤 것이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한국의 젊은 애들이 그 소중한 것이 누구냐 하면은 10대, 20대는 손흥민, 30대는 류현진, 류현진이 깨지고 난 뒤에는 밥맛이 없어. 손흥민이 한골 못 넣고 토트넘이 누구한테 졌다고 하면 고민이 돼요. 방탄소년단 욕하면 막 악플 달아요. “나에게 얼마나 방탄소년단이 중요한데.” 젊은 사람들은 방탄소년단. 나이 60먹은 사람들은 송가인. 누가 송가인 욕하면 용서가 안 돼. 이 강의 듣는 사람들 중에 송가인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찾아보세요. 찾아보면 트로트의 여왕 송가인이라고 또 나와요. 송가인 집이 성지순례가 됐어요. 막 찾아와요. 그것도 막 버스대절해가지고. 용두산아~~ 막 부르면 수천 명이 막 넘어가요. 용두산아~~ 일백 구십 사 계단을 올라가면~~
왜 그러냐 하면은 믿을 게 없고 아무 기쁨이 없으니까. 결국은 소중한 게 나의 기쁨이 되는 그 무엇, 미지의 X. 이것은 정답이 뭐냐 이거에요. 몸입니다. 몸. 오늘 본문 봅시다. 예수님이 떠나고 오늘 제자들이 어디에 갔는가, 갈릴리로 가죠. “아이고, 뭐 한 때 좋았는데, 뭐, 예수님 이제 시마이(끝)했다. 가자 갈릴리로! 옛날 고기 잡았던 곳으로 가자! 갈릴리 바닷가에 가서 고기나 잡자.” 일곱 제자가 가서 고기 잡았다고 했죠.
근데 너희보다 누가 먼저 간다? 예수님이 먼저 간다. 올 줄 알고서. 올 줄 안 것도 예언이거든요. 32절,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너희들이 완료를 몰라. 니가 아무리 내빼 봐도 그 현장에서 주님이 “네 수준을 모를까? 니 행세를 모를까 보냐? 이미 뻔할 뻔자 다 알고 있어.” 하지만 그 자리에 이미 용서가 완료된 상태에서 받아줍니다. 이리와! 이리와! 품에 받아줍니다. 시편 131편에서 젖먹이가 젖을 먹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보는 것처럼. “이리와! 이제 너는 망가질 거야. 내 품안에서. 사도바울처럼.” 굶고, 맞고, 강도의 위협이 있더라도 그 품이 무슨 품입니까? 예수 안에 있죠.
그게 아까 봤던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함께 살리심을 받았기에, 이제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품 안에서, 성령께서 “때찌때찌 그거는 소중한 것이 아니야. 주님 십자가가 소중해. 때찌때찌 돈 좀 몇 푼 날렸다고 그거 하지 마. 니가 돈 좀 몇 푼 없어도 내 용서가 더 커.” 깨우쳐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항상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주님 기준에서, 성령은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주님과 우리를 항상 대화가 되게 하고 눈 쳐다보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물어요. 성도가 어떻게 살면 됩니까? 주님한테 물어보면 돼요. 지시받으면서 살면 돼요. 주님한테 지시받고 하면 돼요. 어떻게 하는지 모르잖아요. “주님! 뭐 할까요?” 물어보라 이 말이죠. 물어보면 주께서 이거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현재 나를 가리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니가 하고자 하는 것이 욕심이다. 근데 아니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그것마저 핀트가 잘못된 욕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거 하나하나 의미를 두지 마라. 이미 너는 내 안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우칠 때에, 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자유입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고요. 막 살라고 했잖아요. 자책하지 마시고. 주저할 일도 없고. 누가 와도 그 사람 욕할 이유도 없고. 주의 은혜로 나를 인간 만들기 위해서 주신 거니까. 나를 건드리라고 했으니까. 배후에 주께서 또 그렇게 하게 하신 일입니다. “갈릴리에 먼저 가리라” 항상 이 자리가 갈릴리인 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 돼요.
조그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양떼가 흩어졌죠. 누구만 남고? 예수님만 남고 다 흩어졌죠. 중심이 뭐냐 하면 예수님 중심이에요. 예언은 예수님 중심이에요. 예수님 보기에 흩어졌지만, 흩어진 제자들 입자에서는 뭡니까? 예수님 중심입니까? 아니면 자기 몸이 있는 곳입니까? 내 몸이 중심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예수님이라고 해도 내 몸만 살면 그만이에요. 내 몸만 편하면 예수님이 죽든 말든 관계없어요.
이게 오늘날 우리 실정이에요. 우리가 언제 예수님 걱정했습니까? 내 몸 아픈 것만 생각했죠. 이게 실정이에요. 그러니까 주께서는 그 현장에 주님이 또 다시 작용해버리면, 내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될,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드러내야 될 의도적인 상황인 것을 내가 다시 소급해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내가 어디에 가도. 미국에 가나 캐나다에 가나 어디에 가도. 북한은 가지마세요.
자, 33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어떤 경우라도 버리지 않겠다고 했죠.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35절에 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이렇게 했잖아요.
그런데 34절에 보면 예수께서 뭐라고 합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니가 그런 장담을 할지라도, 벌써 그런 장담조차도 내가 알고 있는 예언의 부록에 불과하다. 부록에. 예언에 불과한 겁니다. 오늘 제목은 예언입니다. 예언에 불과한 거예요. 예언의 완료에요.
그러면 베드로의 배신은 이 예언의 미완료입니까? 완료입니까? 소급해서 보면 완료죠. 열두 살 때 오줌 싼 거 완료라니까요. 주님의 뜻이라니까요. 1년 전에 아내 죽은 것도 주의 뜻이고.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죠. 이거 뻔뻔스러운 건지 무책임한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간에 진리에요. 이것이 기쁘지 않으면 뻔뻔스러운 것이고 기쁘면 성령이 오신 것이죠. “아, 그렇구나. 잘 됐네. 지금 죄 지으면 10년 뒤에 주의 뜻이라고 하면 그만이네.” 이건 기쁜 게 아니고 뻔뻔스러운 것이고.
기쁜 것은 뭐냐,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께서 현장을 일부러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제목을 예언이라고 하지 말고 현장성이라고 해야 되겠어요. 현장성. 이게 적당한 것 같아요. 어디가도 주께서 유발한 예언의 완성상태에서, 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증인이 되라고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행함보다 예언이 우선인 것을 몰랐습니다. 시간이 흐름을 고대할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 안에서, 완료된 상태에서, 어딜 가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랑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