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13강 마태복음26장 28-31절(포도주 세상)20190723-이 근호 목사
마태복은 26장 28절부터 보겠습니다.
28절,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절,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두 가지의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하겠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피를 흘림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는다 하는데, 이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느냐 하는 그런 문제입니다. 어떻게? 어떤 논리로 그게 가능하냐? 이게 실제냐? 이게 실제로 그러냐? 그냥 위로삼아서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실제로 그랬어요?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이게 현실입니까? 같은 말이에요. 피 흘려서 죄 사함을 얻는다는 이것이 진짜 현실이라면 기존 현실은 이게 성립됩니까? 성립 안 됩니까? 이순신 장군이 피 흘렸다고 내가 용서받아요? 안 되죠. 어디 강감찬 죽었다고 해서 우리가 용서받는 것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주님 보시기에는 그건 현실이 아니고 비현실이죠. 비현실은 뭐냐 하면은 그냥 망상, 상상, 다른 말로 하면 허구, 뭐 그렇게 되겠죠. 허구, 망상, 상상이죠. 왜냐하면 어느 입장에서 볼 때, 그냥 예수님이 피를 흘려서 죄 사함이라는 이 소식이 없다면, 소식이 없는 경우라면 그거는 망상이 아니고 상상이 아니고 허구가 아니고 제대로 잘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돌아가죠.
그런데 피 흘림으로서 죄 사함이 돼버리면, 피 흘려도 죄 사함이 안 되는 이 세상, 누가 죽는다고 해서 수백 년 후에 죄 사함이 안 되는 세상이라면, 그 현실은 실효성이 없고 그거는 쓸데없는 아무 보탬이 안 되는 있으나마나한 그러한 현실이 되겠죠. 실효성이 없으니까. 그러면 이쪽 세계,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피 복음을 모르는 사람한테는 오히려 반대로 어느 쪽을 망상이라고 하겠습니까?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을 극구 밀어내겠죠. 왜? 자기 자신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자기 현실에서 통용되지 않는 이상한 것이 끼어들면 그걸 강력하게 밀치겠죠. 밀치고 싶은 거예요.
그 대표적인 집단이 뭐냐 하면은 교회 아닙니까? 교회가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이 돼버리면 그 순간 그 사람들은 교회 나올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나올 필요가 없잖아요. 아니, 목사가 주일날 아침에 열한 시 오십 분 되어가지고 양쪽에 못을 박아가지고 강대상에다가 지 몸을 떡하니 정육점에 고기 걸어놓듯이 걸어놓고 오는 사람마다 목사 피를 흘리게 되면, 사람은 또 몰라 저 목사의 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게 현실이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게 없다 이 말이죠.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면, 그러면 교회의 덩치, 건물, 부동산이 문제가 아니고 교회에서 뭘 외치느냐가 중요하겠죠. 교회에서 뭘 외쳐야 됩니까? 피 흘려서 죄 사함이 안 되는 현실은 결코 여러분들의 망상에 불과합니다, 라는 것을 외쳐야 되겠죠. 그러면 그 망상 속에 뭐도 포함이 되어야 돼요? 교회 잘 되면 우리 복 받는다는 것도, 그것도 망상이고 잘못된 겁니다, 라고 목사 입에서 나와야 되겠죠. 어떤 사람이 기도해서 병 낫는다는 것도 망상에 속합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야 되겠죠. 왜? 어떤 사람이 기도해서 병 나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저쪽 병 낫는다고 내 애가 병 낫습니까? 그것은 아니라 이 말이죠.
이게 망상이라고 허구라고 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뭐냐 하면은 내가 뭘 해야 그 결과가 나한테 주어지는 거예요. 내가 뭘 해야. 빡세게 기도해야 응답받는다든지, 헌금을 해야 복 받는다든지, 십일조 해야 복 받는다든지, 내 쪽에서 뭘 해야 그 좋은 결과가 누구한테 온다? 나한테 온다고 했잖아요. 근데 이 피 보세요. 이건 뭡니까? 피 누가 흘렸습니까? 내가 흘렸습니까? 우리 목사가 흘렸어요? 우리 장로님이 흘렸어요? 누가 흘렸어요? 보지도 못했어요. 나는 피 흘리는 거 보지도 못했습니다. 봤습니까? 예수님 키가 몇 센티입니까? 우리 태어나기 전에 이야기잖아요. 태어나더라도 이스라엘 이야기라고요. 그때는 비행기도 없고 예수님 한 번 구경하려고 배타고 저 이스라엘까지 가봐야 합니까?
그러면 그 예수님이 있을 때 같이 봤던 제자들이 있고 사람들이 있죠. 그들은 봤으니까 이거 믿었습니까? 그들은 보고도 안 믿었어요. 보고도. 본다고 믿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보여줌으로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경인가를 노출시킬 뿐이죠. 지금 이 본문에 내가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은, 아, 이거는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정말 이것이 감당된다면 우리가 속해 있는 이 현실은 아주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는 그런 자신감이 부쩍 생기는 것이 이 논리에 부합되는 결과입니다. 이 논리에. 이것이 이 정답에 부합되는 결과이어야 되죠. 그까짓 인생 그게 뭔데? 이래 나와야 되죠.
그래서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게 재미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에 열두 제자의 태도는 이랬어요.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으냐. 전부다 자기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너희들 앞에 그냥 죽는다고 하니까 수제자인 베드로가 가서 말립니다. 뭐,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 우리 병고치고 물위를 걷고 인기 있는 것, 이것으로 쭉 갑시다. 가면, 사람들보세요. 당신을 왕으로 삼습니다. 오병이어로 예수님을 임금 삼겠다고 따라다녔잖아요. 목회 지금 잘 되고 있잖아요. 잘 되는 목회를 왜 파토 내려고 해요. 주님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만큼 추종하는 세력이 많을 것 같으면 자기들은 뭐냐, 장로급이 되죠. 장로급.
예수님은 일을 하시고 자기들은 그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들은 다 수제자들이에요. 수제자들. 아까 차타고 오면서 좋은 이야기 많이 했네. 수제자들이에요. 수제자들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다 도망갔는데 수제자들이에요. 배신하고 도망가는데. 자기는 예수님한테 배울 만큼 배웠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딱 죽으니까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이야기가 도리어 망상이고 헛된 소리였어요. 실효성이 없는, 현실성이 극히 결여된, 이상한 헛소리, 예수님에게서 나온 모든 소리는 헛소리였고 병 고치는 것도 하나의 눈속임이었고 뭐 그런 거죠.
왜냐하면 현실이 달라질 것을 그들이 기대했거든요. 현실이 바꿔지기를, 혁명적으로 바꿔지기를 기대했는데, 혁명은 전혀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고요했습니다. 그리고 승자는 누구냐, 승자는 로마 본디오 빌라도가 승자였습니다. 예수님은 패자로서 무덤에 잡혔습니다. 게임오버. 게임 끝났습니다. 지난 번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죠. 제자들이 예수 믿는 것은 뭐였습니까? 공허함이다. 공허함.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주어진 것은 공허함. 강남강의 들어본 적 있어요? 공허하죠. 세상 주변사람들은 니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실적 내놔보라고 닦달 내죠. 예수 믿고 난 뒤에 병 고친, 복 받은, 수익이 늘어난, 잘된, 이런 증거들을 내놓으라고 난리인데, 사도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공허함이에요.
마치 예수님 따라다니면 뭘 얻을 것이라고 여겼던 그 수많은 추종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에 남는 것은 그들의 공허함만 남죠. 가룟 유다가 그런 사람이 아닙니까? 청춘을 바쳤는데 결국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말이죠. 이 땅에서 맥없이 죽는 사람을 내가 뭐라고 마치 메시야라고 착각해서 거기에 청춘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돈 바치고 미치듯이, 마치 그게 진리인양, 그것이 하나님께서 도와준 것인 양 여겼죠.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천사가 내려와서 구해내실 줄 알았죠. 그냥 침묵이에요. 쉿! 고요했어요. 아무것도 건진 게 없어요. 아무것도.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무슨 말인지를. 병 고칠 때는 신났는데 하는 이야기는 너무나 동떨어져요. 현실감이 떨어져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이. 과대망상증 아닌가? 지 혼자 하는 착각이고 우리가 그냥 말려든 것이 아닌가? 실없이. 이거 병신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고 왜 우리가 예수 말에 말려들었지. 이제 와서 본전 찾자. 그래서 본전 찾은 게 고기 잡으러 갔어요. 아이고, 다 잊어버리고 하던 가락이나 하자 해서 고기 잡으러 간 거예요.
왜? 죽은 사람은 끝났잖아요. 끝났다 이 말이죠. 근데 제자들이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날 줄 몰랐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날 줄 몰랐던 거예요.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라는 것을 말로만 큰소리친 줄 알았지 이게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인줄은 생각도 못한 겁니다. 그 순간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안 거예요. 이제 성령이 오면 더 모든 것을 알겠지만.
아, 내 인생의 자리가, 내 인생의 자리가 아니고 주께서 이용한, 주께서 주님 되기 위해서 우리가 채용되었다는 거예요. 그냥 주님께 참여당한 거예요. 이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고 주의 자리에요.
그래서 강남강의에서 했잖아요.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고. 니가 인생을 백날 계획해봐야 예수님 내 자리지 니하고는 상관없는, 너희하고 상관없는 인생을 사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성도가 가야할 운명입니다. 지난 광주강의에서 이야기했어요. 피로 죄 사함 받는 것, 이걸 두 자로 이야기했어요. 이걸 모순이라고 했어요. 모순. 모순은 인간이 기껏 아는 이성적 체제에서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어느 누구도 납득해서 따져서 믿을 수 있는 내용은 성경에 하나도 없어요. 맞지를 않으니까. 요래하면 저래하고 저래하면 요래하는... 맞지를 않는 거예요. 맞지를 않아요.
맞지를 않는다는 말을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제는 포도주로 난 것을 하늘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에게 날까지 오지를 않는다, 라는 이 말을 제가 요약해드리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의 완성된 사건 때문에 이 세상에서 모든 일들이 거기에 연계되어서 일어났다. 이렇게 설명하면 돼요. 하나의 완성된 사건. 포도주 사건. 포도주 먹는 이 사건. 포도주가 핵심이 되는 그 사건 하나 때문에 그동안 모든 세월들이, 역사들이 그 사건에 전부다 모아졌다. 그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세 자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소실점이에요. 그림 그려서 아시잖아요. 그림 그릴 때 원근법이 있죠. 나무든 건물이든 결국 선으로 연결해보면 하나의 지점으로 모든 것이 다 모아집니다. 이 그림에도 소실점이 다 있어요. 아까 쉬는 시간에 카메라로 찍은 거 보셨죠? 소실점, 중심점이죠. 그 소실점이 꼭 화가의 자기시선에 있는 지점에 있습니다. 내가 본대로 그리기 때문에 그리로 다 빨려서 오죠. 내 자리에서는 이렇게 풍경이 보인다는 것을 화면으로 펼쳐놓은 것이거든요. 그 사물들을 다시 끌어 모으면 하나로 모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십자가 피가 죄 사함을 주는가를, 우리 논리로서는 왜 모순이 되고 성립이 안 되는가 하면은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소실점을 따로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잖아요. 그냥 살아있습니까? 관점이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 나름대로 본다고 여기는 겁니다. 본다. 어디서? 어느 중심에서? 내 중심에서 보지 어디서 보겠어요. 나니까 내 중심으로 보는 거예요. 니는 니 중심으로 보고. 내 중심으로 세상을 보니까, 내가 보는 해석 따로 갖추어져 있으니까, 주님이 최종적으로 주님의 소실점에서 보는 해석과 이 해석이 모순될 수밖에 없죠.
주님이 흘린 피 때문에 내가 죄 사함을 얻는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일방적 주장이에요. 예수님의 일방적 주장이기 때문에, 이런 주님의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때 나에게 의논했습니까? 나하고 의논 안 했잖아요. 그럼 나는 어차피 모순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나하고 협상하지 않고 나하고 의논하지 않은 이야기를 불쑥 내놓아버렸다 이 말이죠. 내 피를 흘리면 너희가 사함을 얻는다. 죄가 없어진다. 이걸 불쑥 내놓았다 이 말이죠.
그럼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은, 니가 이 말에 대해서 니가 모순을 느낀다면, 니는 평소에 죄 사함을 얻는데 니는 어떤 아이디어를 니 몸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가, 니가 내놔봐라. 이러는 거예요. 주님께서 정답을 먼저 제시했어요. 정답을 먼저 제시하고, 내가 예상한 정답하고는 전혀 다른 정답이에요. 그러면 니는 니 나름대로의 니 행함을 통해서 정답을 내놓아봐라 이 말이죠. 니가 내놓는 어떤 질문과 답변, 그리고 주님이 내놓은 정답, 이게 니가 내놓는 예상된 질문과 답변이 같은가 한번 대조해봐라. 대조해보면 같지를 않죠.
그 같지 않은 것 때문에 뭐가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 몸으로 죄 사함도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으로도 죄 사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기적으로도 죄 사함도 아니고, 뭐로 죄 사함입니까? 예수님의 피. 피는 그냥 흘리신 것이 아니고 인간한테 둘러싸여서 인간한테 린치당하고 뭇매당한 증거와 표적이 뭐냐, 피잖아요. 그냥 죽음이 아니고 사람에게 얻어맞은 죽음. 사람에게 밀침 당해서 죽은 죽음. 사람에게 미움당하고 핍박받은 죽음이죠.
그럼 피가 정답이죠. 정답부터 개시한다고 했죠. 펼쳐진다고 했죠. 펼쳐진다면 피에서 나온 것이 뭡니까? 인간은 나를 핍박했다. 그런 사례들, 그런 경우들이 뭐냐, 피를 통해서 쫙 나오겠죠. 그러면 교회에서 목사가 피 이야기한다는 말은 뭡니까? 지금 너희들이 교회 나온 행세자체가 예수님을 피 흘리게 만든 범죄가 된다는 것을 강단에서 이야기할 수 있죠. 강단에서. 너희들이 지금 헌금하고 하는 이유가 교회가 있어야 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는다는 것. 이거는 모순이 아닙니다.
교회가 있어야 교회 제도가 성립이 되고, 교회제도에서 교회가 그냥 가만히 있지 않잖아요. 성만찬이고 의식을 행하겠죠. 성만찬, 세례. 그럼 세례 받는 사람은 뭐 한다? 죄 사함을 받는다 하겠죠. 바로 그것이 무엇에 대한 모독이고 무엇에 대한 공격입니까? 피 흘림에 대한 공격을 교회가 앞장서서 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가. 실상은 이렇습니다. 이것이 알고 싶다. 이제는 말한다. 뭐 이런 거.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내용. 이 실상을 알게 되죠. 왜 교회는 항상 세상과 더불어 영원히 생겨야 되는 이유를.
그거는 이 세상이 연대가 되어 있고 이 세상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그들이 모순이 아니고, 모순되지 않고 납득이 되는, 그들이 하나가 되는 바벨탑 쌓기, 만들기 그런 거죠. 그럼 우리가 하는 그것이 나쁘다는 말입니까? 우리만 나쁜 것이 아니에요. 우리만 나쁜 것이 아니고 누가 있느냐, 이스라엘이 그걸 행하는 겁니다. 뭘 가지고 율법을 가지고 그걸 행한 거예요.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 전입니까? 후입니까? 전이에요. 예수님 십자가 후에는 뭐냐 하면은 모든 사람이 오지를 않아요. 스카우트니까. 자기가 택한 백성만 부활의 영으로 찾아가신 거예요. 성령으로. 직접 몸으로도 찾아가시고. 물론 세 번 밖에 안 나타나셨지만.
예수님이 세 번 밖에 안 나타나셨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성령이 오기 전에 예수님이 세 번 나타나셨잖아요. 누가복음에 나와요. 그럼 예수님이 세 번 나타나시고 승천하시고 난 뒤에는 누가 오십니까? 시도 때도 없이 성령이 바람 부는 대로 오죠. 바람 부는 것은 바람이 결정하지, 바람 부세요! 우리가, 바람 맞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오후 설교 끝에서 이런 말씀을 했어요. 네거리의 태풍은 신호를 안 지킨다고 했죠. 신호하는 율법은 누가 만든 거예요? 인간의 행동에 맞춰서, “이거는 네거리입니다. 그냥 함부로 무단횡단하지마시고 파란불에 건너가시고 빨간불에 스톱하세요.” 이거 누가 만든 거예요? 인간이 만든 거잖아요.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졌고 그거 지키면 옳은 줄 알고 그거 지키면 죄 사함을 얻는 줄 알았죠. 우리는. 횡단보도 안 지키면 지옥 가더라. 지키는 사람은 천당 가더라. 이게 우리의 인식이에요. 타고난 법의 인식이라고요. 그 타고난 법의 인식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님이 신호위반을 했다고 죽이는 거예요. 지금 사태가 이런 사태입니다. 내가 하는 짓이 예수님을 죽이고 또 죽이는 짓을 하는 거예요.
율법이야기를 하면서 중간에 이걸 집어넣겠습니다. 아까 사무엘상 할 때 인간은 나름대로 현실구성을 하죠. 나름대로의 현실구성. 현실구성에서 보다 큰, 첫째 시간에 28살 먹은 애를 예로 들었죠. 초등학교부터 친구였다고 합시다. 무려 그야말로 20년 친구가 취직자리 하나 놓고 배신해버렸죠. 세상이 그런 거예요. 세상이. 좋다고 결혼해놓고 22개월 만에 이혼했잖아요. 혜교하고 중기. 같은 송씨 집안인데. 결혼할 때는 몰랐죠. 잘 맞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둘이 90까지 살 생각했어요. 우리 한 3개월 살고, 한 2년 살고 헤어지자는 그런 생각을 안 했다고요. 군대생활보다 짧았어요. 몰랐죠.
그러면 이 현실구성에서 새로운 현실구성을 알게 되었잖아요. 갑자기 이혼녀가 되었죠. 이혼남이 돼버리고. 이쪽에서는 난리에요. 돌싱되었다고 환영하고. 돌아온 싱글되었다고 좋아들 하는데. 사적영역에서 공적영역으로 돌아온 거예요. 팬들은 좋죠. 골키퍼가 없어지니까. 새로운 현실구성이 나오면서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이 주입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가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배신했잖아요. 왜 배신했습니까? 그 베드로가 취하고 제자들이 취한 그 현실에서는 도저히 예수님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자기한테 모순이 돼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보고 십자가지지 말라고 하니까, 너무나 모순되니까 반대했잖아요. 인간은 모순되면 반대해요. 그래야 자기의 꾸준히 이어져온 생각이 정당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기 정당을 포기할 생각은 인간에게는 없어요. 일단은 부정하고 본다고요. 니가 잘못됐지. 나는 옳다. 이러고 싶어요.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늙은 아버지 요양원에 보내려고 하면 난리도 아니에요. 집안에. 내가 멀쩡한데 거기 왜 가느냐? 내가 멀쩡한데. 내가 아프나? 거기 왜 가는데? 아파도 집에서 누워있을래. “어머님. 아버지. 제가 지금 돈벌이 한다고 돌볼 사람이 없습니다.” “아이, 내가 알아서 한다. 너는 돈 벌 이 해라. 그래. 내가 애써서 자식 키워도 소용없다!” “아버지만 요양병원에 가시면 자식들이 싸울 필요도 없고 만사 다 됩니다. 돈 모아서 요양비 댈 테니까.” 한 사흘 갔는데, 답답해서 못 살겠다고 해요. 답답해서. 왜? 왜 답답합니까? 낯선 현실이거든요. 낯선 현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저나 여러분이나 남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도 마찬가지고 될 수가 있어요. 내 집에서 내 몸 추스르겠다고 하는데, 왜 이상한데에 똑같이 귀신 돼서 모여 있는, 같이 귀신 되라고 하느냐? 안 된다. 나는 죽어도 못 간다. 개 끌고 가듯이 하는데 버티죠. 이렇게 버티는 가능성이 있을 수가 있어요. 다들 믿음 좋으니까 그것도 감지하겠지만.
성경에 해아래 새것이 없다고 했지 않습니까? 해아래 새것이 없어요. 그 고물이나 이 고물이나 같은 고물이에요. 그쪽 행세, 마음가짐 다 갖고 있어요. 속성 다 갖고 있다고요. 내 집 놔두고 내 자식 놔두고 왜 거기가지고, 고려장도 아니고 왜 그러냐고 하는데, 이거는 자식 생각 안 하고 자기만 생각하는데 익숙해져서 그렇습니다.
현실에서 갈 때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할 때는, “예수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잘 되는데 왜 가십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베드로라고 했습니까? 사탄이라고 했습니까? 사탄이에요. 우리가 사탄의 종이었어요. 자기가 몰랐죠. 내가 마귀인줄 몰랐죠. 마귀생각에 중무장이 되어서 몰랐죠.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인간은 어느새 자기 마음속에 사드방어체제가 되어 있다고요.
누가 뭐라고 하면 단추 눌러서 미사일 쏠 생각이에요. 뭐든지. 심지어 부부사이라도. 조금만 뭐해도, “양말 좀 제대로 해가지고 하지. 거꾸로 벗어놓으면 안 됩니다.” “내가 왜 양말을 이렇게 하는데? 돈 버느냐 힘들어서 그래. 내가 집에서 놀고 왔나?” 미사일 항상 단추 누를 준비가 되어 있어요. 김정은이하고 똑같아요. 까딱하면 미사일 쏴버리려고 해요. 이게 사람이 나이 들면 좀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나이 들면 더 심해져요. 굉장히 예민해져버려요. 이중인격자들.
십자가지고 난 뒤에 각자도생이에요. 각자 홀로 제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이 말은 각자 다른 현실을 붙들고 가버린 거예요. 이 현실이 완전히 두 동강 났어요. 남남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현실 속에서, 28세 때까지 친구였는데, 친구가 배신당할 때 배신한 사람이 미안은 하지만, 항상 약간만 세월이 지나면 몇 개월이 안 돼서 정당한 것이 돼요. 정당하게 돼요. 항상 인간은 자기 현실을 정당하다고 해줘야 내가 정당하니까. 인간의 본성은 그렇습니다. 내 정당성은 어느 장소에도, 어디에 가도, 어느 날에도 포기한 적이 없어요.
한강에 물에 빠져도 자기 정당성은 양보 안 해요. 물에 빠져가면서도. 나는 정당한 거예요. 안 죽을 자가 죽는다고 여기는 겁니다. 죗값, 로마서 6장이야기는 다 없어져요. 내가 남의 땅에 와서 물에 빠져 죽을 줄을 몰랐다. 분통 터트리면서 죽었을 거예요. 나는 정당하다! 이러면서. 나는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 거저 살려줘도 항상 우리는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은 살만해서, 살 가치가 있어서 살렸다고. 나는 그걸로 무장한 인간입니다.
여기에 뭐가 들어갑니까? 십자가 들어가죠. 예수님의 십자가에 제자들이 들어가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야기하죠.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제는 살고 죽고 사랑이고 뭐고 간에 주님이 결정할 문제이지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갑자기 베드로가 자기 현실의 한계를 알아요. 나는 한계에 부딪혔다. 나는 벽에 부딪힌 거예요. 내 세계 버리고 천국 못 가는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우리가 어떤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이동할 때는 십자가로 개입이 돼야 돼요. 십자가 개입이 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다른 현실이 주어집니다.
제가 말을 어렵게 했지만 흔히 하는 쉬운 말은 이겁니다. 제가 적어볼게요. “어제 나 은혜 받았어.” 간단한 문장이에요. 어제가 아니고 오늘이다 이 말이죠. 오늘 생각해보니까 어제 나한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구원받았다. 이 이야기가 아닙니까? 은혜 받았다. 이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럼 그런 이야기를 오늘 한다 이 말이죠.
오늘 와서 어제 구원받은 것이 오늘의 현실에 긍정적인 작용을 해가지고 이것을, 이 현실을 긍정해버려요. 오늘 나 구원받았다, 라는 것으로. 그러면 내일되면 뭐가 됩니까? 내일이라는 현실로 가려면 오늘이 그대로 이어져가야 돼요? 내일 현실은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십자가가 들어가야 되죠. 사람은 매일 죽으니까. 십자가 들어가잖아요. 들어가면, 어제 은혜 받았다는 것도 결국 오늘 보니까 내 자랑이었다가 자각이 되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성령께서.
이거는 시간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시간적으로 이야기했어요. 여러분, 어려운 이야기하니까 슬슬 더 피곤해지죠. 한국에 살 때 우리가 아는 지평은, 한국 잘 되어야 한다. 한국 무조건 잘 돼야 된다. 왜? 본인이 살고 있으니까. 무조건 잘 돼야 돼요. 그런데 어느 계기가 되어가지고 한국에 안 살고 캐나다에 삽니다. 이건 공간입니다. 그러면 한국이고 뭐고 한국 정치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뭡니까? 이 캐나다가 잘 살아야 돼요. 왜? 캐나다가 잘 살아야 복지가 나한테 더 주어져요. 공간이 다르니까 갑자기 현실이 달라지죠.
전에는 한국 땅에 살면서 주식, 코스닥, 이런 거 있잖아요. 주식 안 해봐서 잘 모르잖아요. 어제 주식시황이 얼마냐, 2095원인가 그래 되어 있어요. 코스피가 그런가. 코스피. 코스닥은 팔백 얼마고. 캐나다에 살면 이거 관심이 없어요. 왜? 캐나다 주식 투자했지 한국 주식 투자 안 했을 거니까. 공간적으로 다른 현실이 돼버리면 현실이 또 다른 현실로 이동해요. 그러면 한국에서 일어난 것이 나하고는 상관이 없이 돼버린다고요.
자, 이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러분들이 수준이 되니까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뭐냐 하면은 지금 예수님이 속한 곳이 유대나라죠. 원래 유대나라 라는 게 없어요. 처음에 출애굽 할 때 이 나라의 이름은 이스라엘이지 유대나라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에서 유대나라로 남았다는 말은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이 말이 아닙니까? 그 많은 일을 겪을 때, 말은 쉬워요. 많은 일을 겪었다고 하는 것을 성경적으로 말하면 언약이 투입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언약이 투입되었다.
노아언약이 투입이 되니까 여기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사람들이 다 죽었죠. 다 죽은 거예요. 노아 있는 데는 비가 안 내렸습니까? 비 왔죠. 다 같이 홍수 맞았는데 노아는 왜 살았어요? 노아의 방주가 언약이 되거든요. 방주 안에서 노아는 산거예요. 그럼 이 말은 뭐냐, 노아가 살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뭘 살려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살리기 위해서 노아를 하나의 미끼로 사용하신 거예요. 노아는 언약의 증인이 된 겁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하고 똑같아요.
피 흘림이 있은즉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마지막 언약, 최종 언약, 새 언약을 증거 하라고 집사님이 이 동네에 터 잡고 살게 된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좋은 땅에 왔다고 하지만-공간, 집사님 참 오래 삽니다-시간, 이런 현실을 증거 하라고 온 게 아니에요. 동감하시죠. 에어컨을 19도까지 올리지만. 지금 에어컨 19도가 문제가 아니에요. 추운 게 문제가 아니고. 이런 현실, 주와 천국에서 함께 있는 현실에 와보지 아니하면 어떻게 피가 죄 사함이 되는지를 다른 사람은 모른다고요.
왜냐하면 언약이 계속 투입이 돼야 하니까. 언약이. 우리는 기존현실이 있으면 그걸로 전부에요. 꼭 일곱 살 애들 같아. 받아쓰기 백점 다 맞아요. 그런데 그 부모는 지금 우리 애가 천재인줄 알고 있어요. 받아쓰기 10문제 백점 맞았다고. 아니, 받아쓰기 10개해서 백점 맞으면 서울대에 들어갑니까? 서울대에 들어가면 계속해서 난제들이 투입되는 거예요. 교과서가 계속 추가가 돼요. 교과서가.
하나님이 마지막 언약에 돌입되려면, 그동안 노아언약? 아니에요. 아브라함 언약? 아니에요. 이삭언약? 그게 전부가 아니죠. 야곱 언약? 전부가 아니라니까요. 무슨 언약? 다윗 언약. 끝이에요. 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니까. 다윗 언약의 내용은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은 아버지가 갖고 있는 것 다 내 것이라는 뜻이거든요. 아버지가 갖고 있는 것. 그전에는 뭐였는가 하면은 아들이 아니었어요. 너희들은 내 율법을 지키면 아들이 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고요. 내 율법을 지키면. 그게 무슨 언약입니까? 율법을 주는 언약이 무슨 언약? 모세언약이죠. 모세언약.
오늘 본문 누가 29절을 한 번 읽어보세요.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저 혼자 아멘 하는데,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은 포도주, 피로 죄 사함을 얻죠. 이 원칙은 이제 천국 올 때까지 변치 않는 요지부동의 원칙으로 끝. 굳어졌다 이 말이에요.
공간이 어디든, 캐나다든 관계없고, 시간이 2019년이든 3019년이든 관계없고, 포도주의 그 원리는 계속 이어진다는 뜻이에요. 내가 세운 언약은 세 번째 네 번째.. 더 이상 불필요한 최종 언약을 내가 너희에게 내린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이 새 언약에 속한 우리는 달라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더 이상 달라질 필요가 없죠.
제가 주일 낮에 뭐라고 했습니까? 문간에 피 바르고 다리 꼬고 앉아 있으라 이 말이죠. 뭐 다리 안 올라가요? 다리가 짧아서. 다리 꼬고 우아하게 커피마시고, 홈드레스 입고 앉아있으라 이 말입니다. 이게. 수출규제를 하든 말든, 북한이 핵폭탄을 터트리든 말든 관계없어요. 세종시에 북한 핵이 터져도 관계없어요. 터지든 말든 다리 꼬고 맞자 이 말이죠. 날아와라 내 머리위에. 다리 꼬고 앉아서.
왜? 어떤 추가적인 사항이 이쪽 원리를 흔들어놓지 않기 때문에. 이미 확정된 원리.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는 원리에 의해서 어떤 추가적인 역사 사건도 이제는 더 이상 요지부동 흔들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해주시는 겁니다. 이거 기쁜 소식 아닙니까? 이거 복음 아니에요? “목사님! 큰일 났어요. 우리교회 불났어요.” 불나도 관계없어요. 교회 불나도 의자 다 태우고 전기 누전돼서 다 날아가도, 지금 이 시간에 우리교회 불이 안 났는지 몰라. 말이 씨가 된다는데. 씨가 되도 괜찮아요. 이미 씨가 된 것이 있어요.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는 거요.
복음을 전하는 우리교회는 절대 누전되고 불나면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그 현실을 불냄으로써 엎어버린 거예요. 불냄으로써. 우리 예수님만 있으면 천국에 간다. 그래서 예수님은 절대로 잡히거나 체포되거나 고난 받아서는 안 된다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생각이, 체포되고 죽으심으로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원인은 뭐냐, 바로 우리가 일단 살아야 천국에 간다는 그 베드로의 현실관이 깨지고 죽어도 상관없다는 새로운 현실로 바꿔치기 된 겁니다. 참, 새 아파트 얻는데, 90까지 살라고 했는데, 갑자기 창문 흔들려가지고 완전히 빈대떡이 되어서 돌아가시면 30명 되는 주위 70대 된 사람들이 얼마나 애곡하겠습니까? 그런데 괜찮아요. 뭐 그럴 수도 있고. 그런다고 내가 떨어진다고 해서 피 흘림의 죄 사함이 바꿔 질 리도 없고. 아무 일이 없는 거예요. 바퀴벌레 안 나오는가 몰라. 괜찮아요. 뭐. 그야말로 최양락이 했던 개그 있잖아요. 충청도 개그. 괜찮아요~ 뭐~ 죽으면 그만이죠. 뭐. 이런 식으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그 말이거든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자, 이제 진도 나가 봅시다. 예수님께서 있던 세계가 이스라엘이 아니고 유다였습니다. 자, 유다로 오면서 그냥 나라가 바뀐 게 아니에요. 유다 나라에 나름대로의 특성이 있습니다. 우리만 남았다는 특성이 있죠. 왜? 원래 나라가 이스라엘인데 지파가 열두지파잖아요. 열두지파인데 지파가 달랑 뭐만 남아요? 달랑 한 지파 남았어요. 한 지파. 유다지파 남았어요. 그래서 이름이 유다나라에요. 유다지파 중심이라고. 그러면 유다지파인데 그냥 나라만, 땅만 쥐고 있으면 되는가? 아니죠.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율법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을 가지고 그들은 뭘 하느냐 하면은 죄 사함을 얻으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언급하신 거예요. 자, 죄 사함이 율법 지켜서 죄 사함이 되느냐, 아니면 내 피로 되는가, 한번 두고 보라는 겁니다. 너희들 한번 판단해보라고 하는 겁니다. 제자들보고. 어느 것이 하나님의 최종 약속인지. 마지막 골인지점이 천국으로 골인되는지. 어느 쪽이냐 말이죠. 율법 지켜서 되는 것이냐, 내 피로 되는 것이냐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쉽게 생각할 수 있어요. 예수님의 피로 됩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 피를 흘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어야 하느냐 하면은 제 3의 자리에서 피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있어야 구원받는 자리에서 피가 들어오게 된다 이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행함이 없이 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이, 이거는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에요. 제 3의 지역은 없어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자기한테 의미가 주어지니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죠. 현실을 통해서 우리는 옳다, 그르다를 판정한다고요. 이게 내가 만든 법이죠. 법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양심의 법이든지 뭐든지. 하루일과를 돌아보세요. 오늘 내가 잘했나, 못했나, 반드시 법으로 자기를 측정하려고 하고, 측량하려고 하고, 시험 치려고 하죠. 오늘 하루는 제대로 살았다. 체크(✔), 오늘 못 살았다. 잉잉잉(ㅠㅠㅠ) 오늘 못 살았다. 나는 잘 살았다.
이것은 누굴 만나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사람은 밖에서 친구를 만나든 어떤 사람을 만났던 집에 오게 되면 뭘 생각합니까? 오늘 혹시 내가 말실수 한 것이 없는지, 앉았을 때 다리 벌리고 앉았는지, 이런 것. 아주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해가지고 저쪽에서 내가 얼마나 못 배운 인간이라고 욕 했을까? 집사람 내외분 이제 사람들 맞이해놓고 돌아간 다음에 둘이 이제 고민합니다. 혹시 복음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복음 아는 사람이 왔는데 우리가 실수한 게 없을까? 에어컨 너무 내려서 춥다고 감기는 걸리지 않을까? 온갖 것 자기 행동의 측정을 다해요.
이게 법으로 우리는 둘둘 감겨있어요. 법으로. 근데 그 순간 뭐가 날아갑니까? 피 흘림이 있은즉 죄 사함이 있다는, 그 기쁨이 그만 막혀져버리죠. 막혀져. 그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속한 나라가 뭐냐 하면은 율법이라 이 말이죠. 그럼 율법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유월절이 있어요.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자기를 참여시킵니다. 유월절은 율법에서 나왔죠. 그러면 사람들의 분위기가 유월절을 지키자. 율법을 지키자. 그 분위기잖아요. 남의 이야기가 아니죠. 유월절을 지켜야 된다. 왜 지키느냐? 그래야 누가 좋아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원하는 바다.
이렇게 생각할 때 사람들은 이걸 우상이라고 생각했겠어요? 못했겠어요? 생각 못 했죠. 오늘날에 그대로 해봅시다. 교회에 나갔다. 교회에 나가니까 옳은 일이다. 바르게 한다. 교회에 나가면 누가 좋아한다? 우리 주님이 좋아한다. 이게 율법이겠어요? 율법 아니겠어요? 이게 바로 율법이고 이게 바로 우상이에요. 여기에 옛날 바리새인만 욕하지 마세요. 오늘날도 계속 바리새인 못지않아요. 다윗의 전쟁에서 우리가 적이에요. 우리가 주님의 원수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
그러니까 이미 뭐냐, 이미 자리가 구원받아 놓고, 그 다음부터 우리에게 매일같이 나타나는 게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어떤 자리에 있었고 어떤 인간이었는가를 계속해서 발췌하면서 오직 십자가와 피와 그리고 부활의 복음만 우리를 통해서 증거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랑할 게 뭐예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죠. 그냥 문장으로 외워서 자랑하는 것도 있지만, 이거는 실제적으로 경험상 그게 도드라지게 나와서 온몸으로 체험하도록 그러한 일들이 계속 우리 성도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자꾸 우리가 어떤 일을 해치우고 난 뒤에는, 이게 잘했나 못했나를 지울 수가 없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고 저도 마찬가지고요. 설교 해놓고 제대로 했을까? 못했을까? 지금 수련회를 앞두고 바짝 지금 졸아서, 바짝 쫀 거예요. 막 변비 되고요. 첫째 시간 뭐하고 둘째 시간 뭐하고 지금 앞뒤로 다 생각하는데, 그걸 이론상으로 하자. 그거는 주께 맡겨야 된다. 이론은 또 오죽 잘 알아. 주께 맡겨야 된다고. ‘그건 내 일이 되면 안 돼. 주의 일이 되어야 돼.’
이론이 되지만, 그거는 이론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은 이론만 주고 실천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론과 더불어서 주님이 정답을 갖고 있으니까, 나는 내가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질문한 거거든요. 그럼 답은 누가 갖고 있습니까? 내가 질문하면 주님이 답변합니까? 아니죠. 주님이 답변가지고 니 이론이 얼마나 엉터리 이론인지를 현장에서 실감나게 하는 거예요. 부딪히게 하는 거예요. 나를 죽게 하는 거예요. 나를 현장에서 죽게 하는 겁니다. 니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론이 아니고 실감나게 하는 거예요. 실감나게. 옳고 그름, 잘했다, 못했다 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잘했다. 못했다 에서.
그래서 어떤 요령도 필요가 없어요. 어떤 지식도, 사전에 공부한 것도, 준비한 것도 필요가 없어요. 그냥 그 현장성에 빠져들어 갈 뿐이에요. 그 현장성에. 자칫하면 앞에 뭐 자크 내려가 있을 수도 있고 정신 못 차릴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피가 죄 사함을 얻는다, 라는 이 원천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이 피가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은 어디에 계속 가리어졌습니까? 나는 옳았을까? 법적으로, 율법적으로 바르게 살았을까? 이것을 앞장세우는 바람에 이 피로 말미암은 죄 사함이 가리어지고 있는 겁니다. 주께서는 그걸 용납 안 하죠. 계속해서 자리 바꿉니다. “니는 내가 피를 흘릴 정도로, 이 정도로 엉망이었어.”라고 내세우면서, 죄 사함도 같이 동반되게 큰 은혜로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피 흘리고 죄 사함 받는 그 현장에서 너는 결국 잘난 사람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그게 무슨 나라냐, 이게 바로 유다나라에요. 유다나라가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이스라엘에 그동안 문제 있었다는 겁니다. 문제 있었고, 그 문제의 개입은, 들통 나는 것은 바로 언약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언약 때문에.
한 가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뭡니까? 의롭다함을 얻었죠. 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어디까지 이어집니까? 그 사건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올 때까지 이어지죠.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이게 오늘 본문에서 포도주로 난 것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실력이 되니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언약이 되기 위해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났습니까?
우리 갈라디아서 3장 봅시다. 여기 아브라함으로 이방이 복을 받고 믿음으로 복을 받잖아요. 행함이 아니고 의로움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죠. 3장 8절, 9절에. 그러면 3장 8절, 9절 말고 갈라디아서 17절 보세요. 17절. 사백 삼십 년 후에 율법을 주잖아요. 그럼 아브라함의 언약은 계속 가면서도 거기를 보여주는 율법 주는 사건이 나오죠. 이게 오늘날 성도가 사는 모습이 아닙니까?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의 원칙이 가죠.
가면서 우리는 고요히 갑니까? 스카치테이프로 묶어서 갑니까? 계속 우리 인생에 사건이 벌어지잖아요. 그 사건은 뭐냐, 율법사건인 거예요. 계속 양심의 법이 안 죽고 살아있는 거예요. 나는 바르게 살았을까? 애 교육은 제대로 했을까? 아이고, 내가 일을 잘못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지. 계속 판정하고 내가 나한테 시비를 걸고. 그 다음에 뭡니까? 분발하라는 거예요. 분발. 앞으로 이런 실수를 하지 말고. 앞으로 잘하고. 계속 나한테 분발 시키는 거예요. 분발을.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관심사가 괜찮아진 나에게, 개선시킨 나에게 집중을 하겠죠. 그것이 나의 현실을 괜찮은 현실로 계속 이어나가려고, 남한테 자랑거리하려고, 나 이렇게 살았어. 잘 살았어. 십자가 자랑 대신 내 자랑하고 싶죠.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오직 피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해결되었다는 겁니다. 니가 건전하게 살아서 해결된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하게 하시는 원인이, 내가 이런 엉터리 같은 생각을 하는 것조차도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이게 구원받았기 때문에, 새 언약의 피 능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우리의 본성은 율법주의적이라는 것을 까발리는 겁니다. 돌아서서 또다시 감사하시고. 이걸 우찌! 우찌! 알았을까? 우째도 아니에요. 우찌 알기는? 하나님의 선물 받아서 알게 됐죠. 하나님의 성령 받아서 알게 됐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새 언약에 속한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세상을 그렇게 보게 하옵소서. 세상이 물바다가 된 것을 본 것처럼 불바다 속에 있음을 저희들이 눈으로 똑똑히 보고 거기에서 탈출한 것은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피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