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53강 사무엘상17장23절(골리앗)20191029-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7장 23절을 제가 읽습니다.
23절,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치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항오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24절,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25절, 더러는 가로되 너희가 이 올라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보통 십계명처럼 글자로 되어 있는 것을 말씀이라고 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글자로 되어 있는 것, 글자로 새겨진, 법률화로 새겨진 십계명과 방금 이 골리앗의 등장, 십계명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골리앗의 등장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그렇죠. 그런데 이 십계명을 글자로 보는데 뭐 필요한 것은 약간 노안 온 사람에겐 안경만 필요하지 뭐 딴 거 필요합니까? 딴 게 필요가 없죠. 십계명 들여다보는데 뭐가 필요하겠어요?
그런데 골리앗의 등장에는 조금 필요한 것이 있죠. 골리앗이 등장했다는 말은 자칫하면 내가 살해당할 가능성이 있죠. 내가 살해당한다. 내 목숨을 잃는다. 근데 십계명 본다고 갑자기 답답하고 가슴이 아프고 그런 것은 없잖아요. 목 졸리고 그런 것 없죠. 사람은 어느 쪽을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는 것이 좋겠어요? 이 십계명 보고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설교 듣고, 어디에서? 교회에서 설교 듣고 이걸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세상에 나가서 이 골리앗이 등장해버리면 우리는 어디로 도망가려고 하냐 하면은 다시 교회로 도망가려는 그런 경향이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피해서 도망쳤다는 말은, 결국 평소에 교회에서 설교 듣는 이것은 진정 하나님의 뜻하고는 상관없다가 되는 겁니다. 상관없다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이야기합니다. 십계명 식으로 공부해라! 공부하라는 잔소리는 들을 수 있어요. 식탁 앞에서. 그런데 실제로 공부하는 것, 공부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지금 공부하는 중입니까? 아니죠. 공부하라는 설교를 듣는다고 해서 지금 공부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공부를 하고 있어야 돼요.
공부하라가 돼버리면 아버지가 의식이 되고 내가 의식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는 나에게 잔소리한다. 의식이 되죠. 근데 진짜 공부하게 되면 누가 의식이 안 되느냐 하면은 본인, 나라는, 내가 의식이 지워져요. 내가 없어진다고요. 아버지가 뒤로 몰래 애가 공부하는지 보러 와도, 아버지가 등장해도 아버지에 대한 의식은 없어요. 공부에 집중하기에 바빠 가지고. 다들 옛날에 공부 이렇게 했지요. 누가 와도 전혀 못 느낄 정도로 공부를 했지요. 근데 여기 보니까 빡세게 공부한 사람 한 사람밖에 없는 것 같은데. 이쪽에는 공부 좀 한 것 같은데 다른 쪽은 뭐 아닌 것 같아요. 잔소리 들은 것으로 공부를 때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정말 공부할 때는 옆에 엄마나 아빠나 동생이 와도 관계가 없어요. 거기에 완전히 빠져버립니다.
다윗은 본인을 의식하지 못해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몰입하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몰입했어요. 지금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설교 펴놓고 성경책 펴놓고 십계명 펴놓고 그거 지금 자기 정당화주장합니까? 골리앗이 여기서 붙을 인간 나오라고 하면 다윗이 “아저씨 가만히 좀 있으세요. 십계명 몇 개나 지켰는지 좀 봅시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아니죠. 십계명을 잘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 하는 자체가 이게 뭐냐 하면은 자기를 지금 의식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자기의식을 해버리면 이거는 몰입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고, 이것은 무엇에 몰입하느냐 하면은 나 잘남에, 내가 여기 있고, 나는 잘났어, 나는 괜찮은 존재야, 라고 평소에 자기 자신에게 있던 욕구와 욕망에 몰입하고 있는 중입니다.
십계명과 골리앗의 등장,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눈 하나님의 뜻은 잔소리만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서 설교 듣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삶의 영역에서 이런 골리앗 앞에 둘러싸임을 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골리앗에게 둘러싸이게 할 때, 십계명이나 교회에 와서 설교 듣는 것을 주의 뜻으로 여긴다면 실제 실습과정에서, 현장에서 우리는 판판이 골리앗한테 자진해서 패배합니다. 무서워서 우리는 알아서 기어버려요. “졌다. 졌습니다. 다시는 하나님 생각 안 할게요. 다시는 내가 성도라고 생각 안 할게요. 그냥 월급만 주시고 밥만 먹여주세요. 고맙게 여기겠습니다.” 거기에 뭐, 돈에 굴복하고 돈의 굴레에 굴복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자기에게 굴복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굴복하는 겁니다.
자기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찬란한 과거, 미래 같은 것이 있거든요. 이것이 흠집이 날까 싶어서. 내가 이만큼 살아오는데 얼마나 공들였는데, 이제 와서 이게 깨져버리면 나는 무슨 보람으로 사나, 인생을 살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지킬 것은 지키겠다는 겁니다. 착실하게.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온 골리앗은 무엇을 공격했겠습니까? 아까 다윗은 무엇에 몰입했다? 자기의식을 생각 안 하죠. 저거는 어른이고 나는 애라는 이런 생각을 안 했어요. 전혀 그런 것 없습니다. 지금 이 현장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 그뿐이지, 지금 오후 몇 시인지, 지금 누구하고 함께 있는지도 생각 안 나요.
자기 앞에 골리앗이 등장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존재로서 등장한 거예요. 오직 다윗은 그거만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적이 누구냐? 그거만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자가 누구냐? 그거만 보이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잘났느냐, 내가 과거에 얼마나 잘났느냐, 그런 것은 생각이 안 듭니다. 지금 내가 뭐 할 거냐? 그것만 생각해요. 지금 내가 뭐 할 거냐?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식을 하다보니까, 자기라는 것을 쪼개보면 이거는 기억뭉치라는 겁니다. 기억뭉치. 기억덩어리거든요. 꿈꿀 때 다 나타나거든요. 꿈은 전부 다 옛날이야기가 다 펼쳐지죠. 지금은 없지만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이 꿈속에서 재현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자기는 뭐 잘나갔든지 아슬아슬했든지 뭐 상당히 난감한 현상도 기억이 나고 그리고 못다 한 욕망도 나오고 그때 이룬 것도 나오고, 온갖 여러 가지 것이 다 편집을 하고 소설을 쓰고 난리도 아니죠. 꿈속에서. 그 모든 것이 찬란한, 찬란하지만 앞에 붙는 것이 있죠. 유치찬란한.
유치찬란한 자기의 편애라고 할까요? 자기의 연민, 자기 과거에 위로받는 것, 이런 거요. 아무도 위로 안 해주니까. 위로받을 데가 옛날에 잘나갔던 자기과거사에서 위로를 받아야죠. 어떻게 하겠어요? 남편은 지 맘대로 살고 자식은 다 떠나갔는데 위로받을 것이 뭡니까? 윤복희 맨날 이야기하죠.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내가 나를 위로해주지 누가 나를 위로해줘요. 여러분이 없는데요. 여러분 보세요. 지금 각자에요. 각자. 여러분들을 한데로 모을 수가 없다고요. 니는 니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사는 건데요. 뭐. 뭐 있어요? 나라도 나를 지켜야지, 나의 가치를 지켜야지 누가 지켜주겠어요? 이게 자기충실이죠.
자기충실이니까, 자기충실에 매여 있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의 십계명의 뜻은 뭐냐 하면은, 십계명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거는 천국생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천국생활. 죽기 전에 미리 땡겨서 천국생활해보라는 것이죠. 죽기 전에. 죽기 전에 미리 땡겨서 천국생활 못하면 이미 그거는 죽어서도 천국 못 갈 사람이에요. ROTC(예비장교훈련단)를 신청한다고 해서 바로 ROTC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사전에 훈련을 시켜서 ROTC를 견딜 수 있는가를 조사하거든요. 근데 그 훈련하는 것도 빡세요. 그 훈련을 못 견디면 안 되겠죠.
그러면 미리 와서 천국생활을 경험케 하는데, 이 천국생활의 반대말이 뭡니까? 지옥생활이죠. 이 천국생활과 지옥생활 가운데 십자가가 있어요. 누구든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아니하면,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천국이 나타나지를 않아요. 십자가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천국이 못 나타나요. 왜냐하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죄에서 의로 바꿀 때 나타나는 것이 십자가의 현상입니다. 죄인으로 갔다가 통과하게 되면 뭐로 나타난다? 의인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죽어서 십자가가 아니거든요. 십자가는 살아있으면서 이것이 유일한 천국의 방식으로 나옵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십자가로 들어간다. 어떻게 하든지. 십자가로 들어가기 위해서 나는 뭐든지 한다. 그리고 자랑할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 이렇게 하죠. 여러분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시겠죠. 잘 이해했는지 한번 봅시다. 천국 가는 방법은 1번 십자가다. 2번 교회다. 몇 번입니까? 십자가죠. 십자가입니다. 이게 같이 겹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십자가가 뭘 발로 아주 차버리느냐 하면은 교회라는 집단생활을 차버려요. 이 생활을 차버립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포함하고 껴안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교회라는 것이 왜 안 되느냐 하면은 이게 조직이거든요. 조직우선이에요.
어느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 팔아먹는 장사한다고 어떤 교수가 양심선언을 했거든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만약에 대학총장이라고 한다면 그 교수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대하겠습니까? 잘라버리겠습니까? 잘라야 되죠. 왜냐하면 대학조직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존속에 있으니까요. 얼마나 정의로우냐가 아니에요. 사회적 정의가 아니고, 자칫하면 정의하다가 대학이 문닫아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사회가 대학을 살려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대학이 살기 위해서는 자체적인 방어체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건 뭐냐 하면은 대학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대학의 정의로움이에요. 다른 정의로움은 필요치 않습니다.
뭐, 대학하니까 남의 이야기로 여기지만 더 쉽게 이야기해서 여러분들이 중국집을 운영한다고 합시다. 중국집을 운영하는데, 아르바이트 학생이 짬뽕 안에서 손톱 깎은 것은 것을 보고 그걸 가지고 언론사에 고발한다고 하면 그 아르바이트 학생 어떻게 하겠어요? 잘라내야 되죠. 왜냐하면 그걸 오냐, 오냐 하면 나중에 뭘 또 찾아낼지 모르기 때문에. 한번 버릇이 없어지지 않거든요. 그 다음에 또 찾아낸다 이 말이죠. ‘전에 내가 손톱 나온 것을 고발해서 십만 원을 받았지. 이거 아르바이트보다 훨씬 수입이 많네. 그 다음에 뭘 또 찾아내지.’ 그래가지고 자기 손수건 집어넣어가지고 백만 원을 받아낼지 어떻게 알아요.
인간에게 있어서의 정의는 뭐냐, 본인이 존재하는 것이 정의에요. 본인이 살아남는 것이 정의에요. 한국이 복잡하다. 돈만 있으면 미국에 이민가면 돼요. 아르헨티나 그리스에서 돈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갔어요? 이민 다 가버렸어요. 그 나라에서 못 살게 됐으니까, 부자들 세금 때릴 조짐이 있으니까 부자들이 재산을 해외로 도피시켜가지고 별장을 미국에 사놓고, 자기나라에서는 국적만 그렇게 해놓고 활동은 미국 별장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스페인, 그리스, 베네수엘라부터 잘 사는 사람들의 정의는 국가가 잘 사는 것이 아니에요. 본인이 잘 살기 위해서 국가가 있는 겁니다. 지금 북한도 마찬가지고. 그 사람들 전부다 스위스 은행에다가 돈 다 넣어놓고. 주민들이 죽든 말든 관계없죠. 이거는 한국도 마찬가지고요.
정의라고 하는 것은 뭐냐, 본인이 살아남는 것이 정의에요. 자기의식에 몰두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시한 천국의 요건은 뭡니까? 나한테 충실하면 천국 보내줄게, 이랬습니까? 아니죠. 누가복음 16장에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나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시죠? 횡령했던 사람들, 직원이면서도 횡령을 해가지고, 여차하면 쫓겨나고 잘릴 판에 그 청지기는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후속조치를 취하죠. 그게 불의한 청지기인데 그 불의한 청지기를 의인이라고 했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야기하기를 뭐냐 하면은, 이 인간들아, 너희가 속해 있는 것이 지옥이냐, 천국이냐 갈림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벌써 뭐다? 벌써 지옥이다. 벌써. 지옥가면 안 되잖아? 라는 말을 하면 안돼요. 이미 지옥에 와있어요. 지옥에 와있기 때문에 뭐가 이상 하느냐 하면은, 지옥가야 되는데 천국 가는 사람이 이상해요. 모두 다 자기만 챙기는데, 자기를 부인한 그 사람이 희한한 사람이에요. 나 죄인 맞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이게 이상한 사람이에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오히려 의심을 해봐야 됩니다.
아니, 교회 있고 자기가 목사님이라고 하면서 교회 없애버리자, 나 목사 안 한다, 한다면 이게 이상한 목사가 아닙니까? 그거 없어도 나는 십자가만 있으면 이런 횡재를 봤나! 라고 한다면 이거 이상한 목사 아니에요. 이 교회 내가 세웠다. 너희들 나가라! 이게 정상이지. 이게 정상이지, 교회 없어도 목사 나 그만둬도 나는 십자가만 자랑할 거예요. 십자가만 있으면 나 같은 죄인 땡잡은 거고 다른 행운은 필요치 않습니다. 나는 몸이 아파도 괜찮아요. 나는 암 걸려도 괜찮아요. 이게 좀 특이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게 바로 다윗이에요.
자, 강의를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의 뜻은 결국 골리앗을 누구한테 세웠느냐 하면은 이스라엘 집단 앞에 내세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그 뜻을 사람들은 그냥 잔소리로, 귀로만 그냥 듣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뭡니까? 이 십계명의 뜻이 이 현실화될 때에 실제 현장에서는 어떤 구조로서 십계명이,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율법이 여기에 구체화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계명만 뜻이 아니고 뭐도 뜻이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이 대전바닥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태가 어느 것 하나 빈틈없이 전부다 십계명의 이상, 주님의 율법, 주님의 복음의 정신이 매일같이 파도처럼 우리에게 계속 들이닥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상황이, 그런 상태가 주어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의 스케줄 따로 있고, 플러스 일요일에 교회 가줘야지, 해가지고 뭐 하나 괜찮은 거 여기다가 추가하면, 보충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내 일이고 교회 가는 것은 주의 일이고. 그런 것 없습니다.
주의 일은 이미 우리의 일상을 다 접수하고 점령하고 장악하고 있습니다. 늘 골리앗을 우리에게 두었지만 우리는 자진해서 골리앗에게 지는 것만 배웠습니다. 알아서 기었습니다. 알아서 기어놓고 교회 와서는 잘못했다고 회개하고 그 다음날 또 지고. “내가 또 양보했습니다. 주여, 용서해주옵소서.” 이러고 있고. 이거 무슨 짓이에요. 이거. 앞으로 교회 없애버리고 늘 졌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데.
그러면 이 골리앗이 이스라엘 앞에 등장했을 때, 사실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지 못하다는 겁니다. 골리앗이 등장함으로써 전혀 이스라엘이, 지난번에 했죠. 이스라엘이 골리앗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둘 다 살아가는 방식이 같다(=). 똑같다 이 말이죠. 누가 하나님의 성도가 아니고 사는 방식이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누가 잘나고 못나고 아니고 다 못났어요. 천국 갈 사람을 주께서는 직접 마련합니다. 어떤 사람을 천국가게 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 가는 사람은 없어요.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언약이 오게 되면 천국 가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거죠.
그래서 천국 갈 때는, 만들어낸다는 것은 있는 게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있다가도 없어져서 없어진 것으로 가는 거예요. 있음에서 없음, 없음에서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있음. 이 없음이 십자가에요. 죽여 버리는 겁니다. 죽여 버리고 이 죽음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오면 이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새로 사는 거예요. 지나간 인생은 자기의 기억과 자기의 역사 그걸로 꾸준하게 유지하고 가다가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과거의 나의 찬란한, 유치찬란한 나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무의미로 처리되고요. 아무 의미 없어요. 처리되고,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가득 찬 새로운 인간으로 천국에 합류하게 되는 겁니다.
거지나사로의 한평생은 거지였죠. 근데 천국 갔을 때도 거지였습니까? 아니죠. 천국 간 거지나사로가 이래 생각했을 겁니다. “내가 언제 거지였던 적이 있는가? 거지였던 적이 있었을까? 근데 거지가 뭐지?” 사람이 어떤 상황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과거의 것을 아무리 그대로 해석하려고 해도 그대로 해석되지 않아요. 지금 상황이 강하게 둘러싸기 때문에 과거의 아픔은 잊어지는 겁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 아프지만은 애기를 낳고 난 뒤에는 아픔을 잊어버린다. 저는 뭐 남자라서 그런 경험이 없지만 이빨 뽑는 것은 경험할 수 있거든요. 이빨 뽑는 것은 아팠지만 이렇게 건강하게 임플란트가 된 상황에서는 이게 왜? 아플 리가 없지. 지금은 안 아프니까 아플 리가 없는 거예요. 아픈 게 뭐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빨 아픈 게 뭔지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보낸 것은 이스라엘과 한통속이다. 이래 보면 돼요. 여기에 소년 다윗이 등장합니다. 소년 다윗이 등장하게 되면 골리앗에게도 낯설지만 누구한테도 낯선가 하면은 이스라엘에게도 낯선 존재가 되는 거예요. 참 낯설어요. 그러면 다윗에게 있어서의 적이 골리앗만 적이겠어요? 이스라엘도 적이겠습니까? 1+1이에요. 한통속으로 다윗의 적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오히려 다윗을 말려요. 애들은 가라. 애들이 여기 노는데 아니다. 애들은 가라고 막 말리죠.
말릴 때, 이스라엘이 말리는 이유가 뭐냐, 아까 이야기한 자기의식, 내 힘으로는 골리앗을 못 이긴다는 것을 딱 보면 알겠다는 거예요. 딱 보면. 하나님의 뜻인데, 이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해석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십계명이라는 것이 문자로 늘 있지만 이게 어떤 사건이 터지면 이게 단회성, 일회성이거든요. 한번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또 골리앗이 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골리앗은 이미 죽었으니까.
그래서 이 사건을 해석하려면요, 첫 번째 강의에서 중요한 점, 중요하기 때문에 쓰겠습니다. '사건을 해석하려면 그 다음 사건이 들이닥쳐야 한다.' 뭐, 사건이 골리앗 사건이죠. 골리앗 사건을 해석하려면 그 다음 사건이 멀리 보면 십자가 사건이죠.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으로 앞에 있는, 멀리 일어난 사건을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사건은 그것으로서 하나님의 뜻의 모든 의미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사건과 동일한 구조, 동일한 구조의 사건이 계속해서 반복이 되죠. 반복되면서 최종사건까지, 십자가 사건까지 가는 겁니다.
자, 예수님의 사건이 주는 의미는 바로 이 죄인을 어떻게 하면 천국에 넣을까, 하는 문제죠. 죄인이 천국 가는 방식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십자가 사건이죠. 골리앗 사건을 이해하려면 십자가 사건을 알고 십자가 사건을 구성한 그 구조를 그대로 여기다가 대입하면 되는 거예요. 이거 수능 나옵니다. 이거 중요한 문제에요. 그냥 대입하면 돼요. 십자가 공식이니까. 십자가 공식이에요.
자, 십자가 공식을 골리앗에 대입해서 한번 정리해봅시다. 1번, 낯선 타자가 등장한다. 2번, 일단 나보다 강하다. 3번, 그 결과로 나는 못 이긴다. 낯선 남이 등장하고 나보다 강해요. 나는 못 이긴다. 이래 되죠. 나는 못 이긴다는 것을 통해서 뭐가 되느냐, 자기 자신이 노출돼요. 자기 자신이 노출되는데 어떻게 노출되느냐 하면은 “나는 보호받지 못하는구나!” 인간의 자아는 어떤 타인에게, 외부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그러한 욕구가, 욕망이 있다는 것이 노출되는 겁니다. 어떤 교인이 교회에 왔을 때에 교회에 등록을 하고 교회에 다닙니다.
자, 이 원리에 의하면 그 사람은 교회에 왜 옵니까? 보호받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내 영혼부터 해가지고, 내 영혼, 내 생명, 내가 가져왔던 위신과 체면, 그것이 사랑받고 보호받고 그리고 지켜줌 되기를 위해서 교회에 가죠. 그런데 교회에 가니까 이 남자, 저 남자, 그리고 심지어 목사까지 다 찝쩍거려서 자기를 괴롭히면, 교회에 갔는데 예쁜 사람이 왔다고 다 건드리면, 심지어 지켜줘야 될 목사까지 건드리면, 이 분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교회에 못 다니겠죠. ‘차라리 교회 안 다니고 그냥 생방송을 들을까’라는 이런 생각 들겠죠. 그렇잖아요.
자, 그럴 때 이 분의 잘못은 뭡니까? 이 모습이 현재 구원받은 다윗의 모습과 일치가 됩니까? 일치가 안 됩니까? 자기가 교회에서 보호받기를 원했던 이 모습이 이스라엘과 일치가 됩니까? 안 됩니까? 일치되겠죠. 골리앗과 일치가 되겠죠. 골리앗은 갑옷을 입었으니까. 그러면 다윗과 일치가 됩니까? 일치가 안 됩니까? 다윗은 무장이 안 되어 있어요. 결국은 뭐냐, 다윗은 보호받고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보호하고자 하는 거예요. 이 보호는 뭐냐, 결국은 희생입니다. 희생. “주여, 교회 와서 이 몸 하나 그냥 촛불이 되게 하옵소서. 그냥 나 같은 것은 타버리게 하옵소서.” 이래 돼요.
지키겠다는 것은, 뭔가 외부에서 공격을 느낀다는 것은 뭡니까? “나는 귀하다. 나는 여기서 다치면 안 돼. 나는 고이 간직할 게 따로 있어.”라는 의식이 같이 병행해서 강화돼요. 꾸준히 강화된다고요. 계속 계산해보는 거예요. 내가 이 교회 다니는 것이 계속 유리할 것인가? 아니면 이 교회 버리고 다른 교회 다니는 것이 유리할 것인가? 계속 계산하겠죠. 이것이 바로 천국 생활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십자가하고 전혀 상관이 없는, 내 몸 내가 지키는 것밖에 안 돼요.
다시 한 번 봅시다. 1번, 낯선 타자. 이게 골리앗이잖아요. 2번, 그는 나보다 강하다. 3번, 나는 못 이긴다. 이래 되죠. 자, 4번째는 뭐냐 하면은 나 자체를 이기지 못하는데 나 자체가 왜 여기에 있는가? 결국은 다윗의 자리에 누가 있는가 하면은 하나님의 십계명, 율법, 언약의 자리가 돼버리죠. 언약의 자리. 다윗의 자리가 다윗의 자리가 아니고 누구의 자리냐 하면은 하나님 자리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붙잡혔죠. 제자들 보기에 예수님이 이깁니까? 바리새인이 이겨요? 바리새인이 이기겠죠. 그러니까 체포되는 것이 아닙니까?
근데 예수님은 지되 끝까지 지죠. 끝까지. 사람이 무슨 신체라도 뭐 이렇게 목숨이라도 부지해야 뭐 이기고 지고의 게임이라도 되겠는데 끝까지 지기 때문에 끝까지 어떻게 됩니까? 살해당하죠. 사람이 살해당하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살해당하면 그의 과거가 다 무효가 돼요. 아무리 아름답게 했고 아무리 훌륭했고 아무리 국가에 큰 업적을 해도 그 사람이 죽어버리면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평소에 내가 있기를 원했기 때문에 제일 내가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내가 잊혀진 존재, 내가 나로부터도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것을 제일 겁을 내요. 내가 죽더라도 내 영혼만큼은 좀 하나님께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영혼만큼은.
결국 골리앗이 등장하는 것이 현재 오늘날의 일상이라면, 결국 일상이라면 골리앗이 한 두 명이 아니죠. 주변이 다 골리앗이죠. 자식까지, 남편, 아내, 모든 것이 다 골리앗이에요. 왜 골리앗을 쫙 깔아두느냐 하면은 현재 너의 자리가 뭐냐, 원래 하나님의 뜻으로서 이런 상황이 왔기 때문에 말씀의 자리에요. 말씀의 자리인데 누가 방해질을 하고 있느냐 하면은 내가, 주의 말씀을 이루는데 내가 훼방꾼이 되고 방해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내가 방해꾼이에요.
특히 다윗이 어른입니까? 소년입니까? 소년이기 때문에 자의식이 없어요. 자의식이 희미해요. 자의식이 아직까지 성숙되지 않았던 거예요. 그냥 “내가 뭐하지?” 그것만 생각하지 딴 의식이 없어요. “내가 어른보다 이겨야지. 저 사람 이겨야지.” 그런 것이 없어요. “지금 내가 뭘 하면 되지?” 소년 다윗이 보기에는 할례 받지 않는, 할례 받지 않았다는 것은 언약이 없다는 거예요. 말씀이 없는 민족이 왔다는 말은 우리 민족은 뭡니까? 할례 받은 민족이잖아요. 이스라엘은. 할례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고 뜻이거든요. 하나님의 뜻이 이미 이 자리에 있어요. 이스라엘 자리에 있다고요.
그러면 누가 누구를 보호해야 됩니까? 소년 다윗은 뭘 보호해요? 하나님의 말씀의 살아있음, 예수님의 부활하심,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보호하기 위해서 죽는 것조차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교회 가서 내가 보호받기를 원하는 겁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에요. 내게 주신 귀한 것, 복음을 간수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거라 이 말이죠. 그러면 앞에 골리앗이 등장한다면 우리는 찬스를 맞이한 거죠. 찬스 맞이한 거예요. 무슨 찬스? 내가 희생할 수 있는 찬스.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식당에서, 그것도 중국집 식당에서 말합니다. 복음 알고 난 뒤에 아는 사람이 다 떨어져나갔다는 거예요. 복음 알고 난 뒤에 아는 사람이 다 떨어졌다. 가만히 있는데 떨어지지 않았어요. 분명히 그들과 대화가운데서 복음을 전했어요. “기존교회가 이게 문제다. 완전히 교회 장사꾼이다.” 이렇게 했더니만 다 떨어져나간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골리앗한테 지면되는데 골리앗한테 안 지려고 입을 떼는 순간 다 떨어져나갔어요. 이제 연락도 하지 말라고 이렇게 하고. 이래버렸어요.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할 때 그 분은 지금 자기의 자존심, 체면, 과거에 나는 잘나갔고 복음을 안다고 지 자랑하려고 그렇게 한 거예요? 무엇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까? 바로 세상이 이미 지옥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세상이 곧 지옥이다. 왜 그러냐 하면은 전부 다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보호받는 것만 신경 쓰기 때문에, 내가 나 지키는 것만 신경 쓰기 때문에 이 자체가 지옥이거든요.
왜냐하면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가 통과되려면 필히 우리는 예수님이 대신 죄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용으로 우리가 존재하거든요. 우리가 의인 같으면 예수님이 죽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필히 우리는 그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린,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을 스스럼없이 튀어나오는 죄인이어야 되는 거예요. 근데 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죽어 마땅하게 되면 자기가 지키고자했던 찬란했던 과거의 모든 것도 다 실없는 거고 다 무의미한 거예요. 다 무의미한 거라고요.
저 부둣가에 보면 다방들이 많지 않습니까? 옛날 다방. 옛날 다방 마담들이 아저씨 하나 꼬셔가지고 비싼 쌍화차 하나 시켜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최백호는 그걸 가지고 실없는 농담이라고 했거든요. “아줌마 이야기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네. 국회에 나가라.” 그런 소리는 안 하죠. 왜냐하면 짙은 화장을 했기 때문에. 배경음악은 색소폰소리가 나오고. 실없는 농담사이로,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실없는 농담이라고요.
내가 한평생 60, 70을 살아온 것이 전부 다 실없는 농담이라고 할 때에, 여러분 마음이 무겁습니까? 마음이 편해집니까? 어느 쪽이에요? 마음이 편해지죠. 그러니까 강아지나 키우지. 강아지나 나나 다 똑같으니까. 강아지 팔자나 내 팔자나. 강아지 키우는 사람에게 오는 교훈은 그거잖아요. 니 인생이나 내 인생이나 똑같다. 똑같은 세월에, 부질없는 세월에 그냥 질질 끌려가는 거예요. 부질없는 세월에.
과거가 실없는 농담 같으면 오늘도 실없는 농담이에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마찬가지고. 과거를 알고 미래까지 한꺼번에 미리 땡겨서 다 알아버린 거예요. 정답을. 정답은 십자가 앞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도 내놓을 필요는 없어요. 아무것도 내놓지 말라는 거예요. 주님이 만약에 조상님이라면 주님 앞에 제사한다고 배, 사과, 좌청룡, 우백호 내놓으면 주님이 발가지고 확 밀어버려요. 이런 실없는 것을 내놓지 말라니까.
제가 십일조를 몇 년 동안 했고 뭐 50명 전도해서 교회 와서 천국가게 만들었고..., 발로 차버려요. 실없는 짓하고 있네! 내가 너한테 그런 것 시켰느냐 이 말이죠. 50명 꼬시라고 시켰느냐 이 말이죠. 구원은 주님이 알아서 택한 백성은 안 놓쳐요. 왜 니가 걱정하고 있어. 니가. 내가 기도해서 자식 목사까지 만들었고..., 또 실없는 짓하고 있네! 목사 됐다고 구원받겠어요? 목사 됐다고. 엄마가 그 모양이면 자식도 그 모양이죠. 똑같이.
하나의 사건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후대의 사건이 앞에 있는 사건을, 또 하나의 사건이 또 터져야 돼요. 또 터질 때 동일한 구조가 이루어져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은 잔소리밖에 안 돼요. 그러나 우리가 맞닥뜨리는 모든 현실에서는 불가능성입니다. 무엇의 불가능성이냐, 선과 악이 전부 다 모호해요. 선과 악을 따지기가 모호해요. 선이라고 했는데 좀 더 따져보니까 그게 악이 되고. 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다지 나쁘지 않는 악이 되고. 이게 가치평가 불가능성이에요.
이 말은 내가 나를 판단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이죠. 판단은 누가 하느냐, 주님이 판단해야 하는데, 왜 그러냐 하면은 다윗의 구조 안에, 다윗을 여기다 설치하고 그 앞에 키 크고 강한 골리앗을 설치하고 뒤에는 겁쟁이 이스라엘을 설치할 때 이런 배치된 모든 설치물들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이 알아서 꽂아놓은 거라는 말이죠. 이 모든 게. 우리 움직임 모든 게.
어떤 분이 35번을 이사했는데,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제일 이사를 많이 한 사람이에요. 35번씩 이사를 했는데, 이사할 때마다 뒤돌아보면 주께서 다 꽂아놨어요. 왜냐하면 이사를 했다기보다도 자의식이 날아가 버리면 내가 지금 어느 동네에 있는지, 몇 년 며칠인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꽂아준 이 자리에서 내가 뭐 할 거냐 하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들 가운데서 병원에 입원해서 하루 종일 하얀 시트에 누워있다고 한다면, 그럼 거기서 여러분들의 할 일은 뭡니까? 누워있는 거예요. 누워있는 이것이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언약구조 안에 골리앗과 지금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상대하는 자가 누구였다? 골리앗. 이 골리앗을 이스라엘은 아무도 못 이겼다. 못 이겼어요. 이 골리앗은 다윗과 비교해서 어른들이기 때문에. 어른들. 오늘 제목은 어른들입니다. 이게 어른들이거든요. 어른들이기 때문에 이기지를 못했어요. 어른들이 보기에 소년 다윗의 개입은 낯선 개입이에요. 낯선 타자에요. 따라서 오늘날 골리앗과의 싸움은 나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의 골리앗이에요.
이 일은 어떻게 해석이 나오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할 수만 있거든 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자,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하고 이야기하죠. 아버지보고 이야기하면서 그 기도의 주제가 뭐냐 하면은 자기 자신에 관한 거예요. 자기 자신에 관한 것. 자기 자신인데 두 개의 자기 자신을 내세웁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뜻에는 위반이 되는데 지금 나한테는 그냥 편안하게 넘어갈 수 있는 나. 자, 또 한 가지는 나는 되게 괴로운데 그게 아버지의 뜻인 나. 아버지의 뜻으로 밀어붙여야 될 나.
그러니까 그 이야기처럼 결국 내가 누구하고 싸웁니까? 나의 적은 나다. 이 말이죠.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나의 적은 내가 되는 거예요. 끊임없이 올라오는 골리앗은 바로 끊임없이 올라오는 나의 정당성, 나는 대단하다, 나는 절대로 지옥가면 안 돼, 라는 자기 개인적인 구원의 열망, 이런 것이 내가 이겨야 될, 내가 없애버려야 될 허위적 나. 허상이죠. 허상의 나, 실재하지 않는 가짜 나를 계속 떠올리는 겁니다.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이 허상을 누가 만드느냐 하면은 바로 악마가 이미 배후에서 우리한테 나의 허상을 계속 만들어내는 거예요. 곧 죽어도 지 잘났대. 나 잘났어. 나는 이 잘난 나를 내가 안 지키면 아무도 못 지켜. 그러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골리앗으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할례 받았으면, 할례라는 것은 창세기 15장, 17장에 나오는 바로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아브라함 백성이 될 수 없거든요. 창세기 17장 11절에 보면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영원한 언약이에요. 이거는 이스라엘이 고안해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지어낸 것이 아니죠. 그냥 하나님이 꽂아준 거죠.
그러면 이스라엘이 뭐냐,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아브라함의 언약이 뭐냐 하면은 할례언약이 유지되고, 유지시켜준다는 조건하에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을 지킨 사람이 오늘 본문에 누구입니까? 소년 다윗 딱 한 사람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전쟁은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남겨준 자기 언약을 지킨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소년다윗이었어요. 소년다윗. 그 소년다윗 빼놓고는 골리앗과 이쪽은 전부 다 허깨비고 허수아비고 허상이죠.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내 얼굴이 없으면 누구도 없다? 타인도 없는 거예요. 내 얼굴이 없으면. 내가 없어질 정도로 누구한테 몰두해있다면 그 순간 남이라는 존재는 같이 없는 거예요. 남이 나한테 욕하고 친구가 떠나든 말든 관계없어요. 지금 주님이 나에게 뭐라고 지시하느냐, 그게 오더에요. 오더가 내려지면 끝이에요. 어떤 교회에 복음이 나오지 않으면 거기에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복음이 안 나오는데 왜 다녀요. 복음이 안 나오는데 다닌다는 말은 결국은 최종 지킬 것이 여전히 나에게 유리한 것이 있다는 그런 반증이 되는 겁니다. 반증.
큰 교회 같은 데는 그전에 부조금을 많이 내서 이 교회를 나가게 되면 딸 결혼할 때 부조금을 못 받는다든지. 근데 교회에 복음이고 뭐고 없지만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 너무 많아. 친구들이. 그 교회 나오면 나는 놀 자리가 없어. 특히 점점 나이가 많아져 가는데. 그리고 거기도 단골이 많아. 피아노레슨 하는데, 피아노레슨 하는 주로 애들이 우리교회 집사님 애들인데 그 교회 안 나가면 레슨 받는 애들이 다 떨어져서 내가 생활이 안 돼. 이런 거.
결국 누가 누구를 지킨다? 내가 나를 지키는 것. 그래놓고 이걸 지킨 것이 아까워서라도 자기부정이 안 되죠. “주여, 어떻게 좀 봐주시면 안 됩니까? 열심히 살았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뭐냐 하면은 십자가를 드러내요. 십자가가 새 언약이거든요. 모든 것이, 언약의 완성은 십자가거든요.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너는 십자가를 드러내는데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 연관성을 묻는 겁니다. 그 구조를 묻는 거예요.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은 언약구조상 배치물이죠. 배치되어 있습니다. 언약이 구조적으로 되어 있으니까. 여기 골리앗이 있고, 여기는 이스라엘이 있고, 이것이 인간이 아는 전부에요. “아, 힘이 있었으면 이길 텐데.” 하는 것. 우리들의 집합된 힘이 저 하나를 못 이기는 거예요. 근데 골리앗은 한사람이죠. 한사람. 한사람이 등장했어요. 이게 중요한 의미인데, 한사람이 등장했을 때 다수가 나올 필요가 없어요.
이 다수를 일반적 타자, 타인인데, 일반적 타인은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 대표성이 있어야 돼요. 대표성. 일반적 타인은 대표성, 한 사람을 상대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대표성이 있는 것은 숫자와 전혀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 율법이 준 취지,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취지를 품에 안고 나타난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철없는 소년다윗이죠. 소년다윗이 철없는 것이 맞아요. 소년다윗이 여기에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골리앗이 나의 원수가 되는데, 막상 나의 원수라고 철떡 같이 믿었고, 원수라고 하는 이유가 골리앗이 나의 가진 것을 공격하려고하니까, 내 것이 빼앗기니까, 내 것 빼앗기면 무조건 나의 원수죠. 나 다치게 하고 나 아프게 하고 나 병들게 하고 내 재산 사기쳐먹고, 다 원수잖아요. 나 구원으로 못 가게하고. 다 원수인데, 내 구원을 지키겠다고 하는 이것이 주의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이 구조에서 보여주죠. 이스라엘이 스스로 구원되고자 하는 이 조치로 인하여 구원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내 구원을 지킬 것이 아니고 언약을 지켜야죠. 언약이 귀한 것을 지켜야지 내 구원, 내가 천당 가는 것이 귀한 것이 아니거든요. 진짜 질문하고 싶다. 내가 천당 가는 것이 귀해요? 주님의 십자가가 귀해요? 십자가가 더 귀한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십자가 중심으로 일하지 나 천당 가라고 일 안 하거든요. 어느 게 나한테 유리합니까? 라는 것을 묻는 게 아니에요. 어느 게 유리하냐를 묻는 게 아니고 진리가 무엇이냐를 묻는 거예요. 현실이 뭐냐를 묻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일반적 타자에요. 일반적 타자. 일반적 타자가 개인적으로 취중하면 안 돼요. 일반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머물러있어야지, 저만 특별히 봐달라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는 니가 니 볼 생각을 하지 말고 특별한 타자 한분, 누구?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지금 이걸 원하잖아요. 주님의 뜻은. 주님 앞에 몰입해버리면 나 같은 존재는 주님 앞에서 있으나마나 무의미한 거다 이 말이죠. 실없는 농담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거예요.
누가 욕하나 안 하나 그거는 주께서 알아서 욕하게 하신 거니까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 얼굴 앞에 내 얼굴을 잊어버리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주님은 최백호고 나는 화장을 짙게 한 실없는 농담이나 내뱉는 부둣가에 오래된 다방 마담. 돈 많은 아저씨 꼬셔가지고 쌍화차나 팔려고 하는, 그런 식으로 정말 허접스런 존재. 이게 바로 십자가만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10분 쉽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