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골리앗,겟세마네기도 19102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1. 3. 17:41
2019-10-29 21:34:11조회 : 204         
사무엘상 53강(골리앗), 마태복음 115강(겟세마네기도), 191029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zmN-b64W69w"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rOCtao7oyu4"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이미아 (IP:122.♡.170.138)19-11-02 13:47 
대전-53강 사무엘상17장23절(골리앗)20191029-이 근호 목사

 

사무엘상 17장 23절을 제가 읽습니다.

 

23절,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치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항오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24절,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25절, 더러는 가로되 너희가 이 올라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보통 십계명처럼 글자로 되어 있는 것을 말씀이라고 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글자로 되어 있는 것, 글자로 새겨진, 법률화로 새겨진 십계명과 방금 이 골리앗의 등장, 십계명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골리앗의 등장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그렇죠. 그런데 이 십계명을 글자로 보는데 뭐 필요한 것은 약간 노안 온 사람에겐 안경만 필요하지 뭐 딴 거 필요합니까? 딴 게 필요가 없죠. 십계명 들여다보는데 뭐가 필요하겠어요?

 

그런데 골리앗의 등장에는 조금 필요한 것이 있죠. 골리앗이 등장했다는 말은 자칫하면 내가 살해당할 가능성이 있죠. 내가 살해당한다. 내 목숨을 잃는다. 근데 십계명 본다고 갑자기 답답하고 가슴이 아프고 그런 것은 없잖아요. 목 졸리고 그런 것 없죠. 사람은 어느 쪽을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는 것이 좋겠어요? 이 십계명 보고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설교 듣고, 어디에서? 교회에서 설교 듣고 이걸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세상에 나가서 이 골리앗이 등장해버리면 우리는 어디로 도망가려고 하냐 하면은 다시 교회로 도망가려는 그런 경향이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피해서 도망쳤다는 말은, 결국 평소에 교회에서 설교 듣는 이것은 진정 하나님의 뜻하고는 상관없다가 되는 겁니다. 상관없다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이야기합니다. 십계명 식으로 공부해라! 공부하라는 잔소리는 들을 수 있어요. 식탁 앞에서. 그런데 실제로 공부하는 것, 공부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지금 공부하는 중입니까? 아니죠. 공부하라는 설교를 듣는다고 해서 지금 공부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공부를 하고 있어야 돼요.

 

공부하라가 돼버리면 아버지가 의식이 되고 내가 의식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는 나에게 잔소리한다. 의식이 되죠. 근데 진짜 공부하게 되면 누가 의식이 안 되느냐 하면은 본인, 나라는, 내가 의식이 지워져요. 내가 없어진다고요. 아버지가 뒤로 몰래 애가 공부하는지 보러 와도, 아버지가 등장해도 아버지에 대한 의식은 없어요. 공부에 집중하기에 바빠 가지고. 다들 옛날에 공부 이렇게 했지요. 누가 와도 전혀 못 느낄 정도로 공부를 했지요. 근데 여기 보니까 빡세게 공부한 사람 한 사람밖에 없는 것 같은데. 이쪽에는 공부 좀 한 것 같은데 다른 쪽은 뭐 아닌 것 같아요. 잔소리 들은 것으로 공부를 때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정말 공부할 때는 옆에 엄마나 아빠나 동생이 와도 관계가 없어요. 거기에 완전히 빠져버립니다.

 

다윗은 본인을 의식하지 못해요.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몰입하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몰입했어요. 지금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설교 펴놓고 성경책 펴놓고 십계명 펴놓고 그거 지금 자기 정당화주장합니까? 골리앗이 여기서 붙을 인간 나오라고 하면 다윗이 “아저씨 가만히 좀 있으세요. 십계명 몇 개나 지켰는지 좀 봅시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아니죠. 십계명을 잘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 하는 자체가 이게 뭐냐 하면은 자기를 지금 의식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자기의식을 해버리면 이거는 몰입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고, 이것은 무엇에 몰입하느냐 하면은 나 잘남에, 내가 여기 있고, 나는 잘났어, 나는 괜찮은 존재야, 라고 평소에 자기 자신에게 있던 욕구와 욕망에 몰입하고 있는 중입니다.

 

십계명과 골리앗의 등장,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눈 하나님의 뜻은 잔소리만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서 설교 듣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삶의 영역에서 이런 골리앗 앞에 둘러싸임을 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골리앗에게 둘러싸이게 할 때, 십계명이나 교회에 와서 설교 듣는 것을 주의 뜻으로 여긴다면 실제 실습과정에서, 현장에서 우리는 판판이 골리앗한테 자진해서 패배합니다. 무서워서 우리는 알아서 기어버려요. “졌다. 졌습니다. 다시는 하나님 생각 안 할게요. 다시는 내가 성도라고 생각 안 할게요. 그냥 월급만 주시고 밥만 먹여주세요. 고맙게 여기겠습니다.” 거기에 뭐, 돈에 굴복하고 돈의 굴레에 굴복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자기에게 굴복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굴복하는 겁니다.

 

자기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찬란한 과거, 미래 같은 것이 있거든요. 이것이 흠집이 날까 싶어서. 내가 이만큼 살아오는데 얼마나 공들였는데, 이제 와서 이게 깨져버리면 나는 무슨 보람으로 사나, 인생을 살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지킬 것은 지키겠다는 겁니다. 착실하게.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온 골리앗은 무엇을 공격했겠습니까? 아까 다윗은 무엇에 몰입했다? 자기의식을 생각 안 하죠. 저거는 어른이고 나는 애라는 이런 생각을 안 했어요. 전혀 그런 것 없습니다. 지금 이 현장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 그뿐이지, 지금 오후 몇 시인지, 지금 누구하고 함께 있는지도 생각 안 나요.

 

자기 앞에 골리앗이 등장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존재로서 등장한 거예요. 오직 다윗은 그거만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적이 누구냐? 그거만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자가 누구냐? 그거만 보이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잘났느냐, 내가 과거에 얼마나 잘났느냐, 그런 것은 생각이 안 듭니다. 지금 내가 뭐 할 거냐? 그것만 생각해요. 지금 내가 뭐 할 거냐?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식을 하다보니까, 자기라는 것을 쪼개보면 이거는 기억뭉치라는 겁니다. 기억뭉치. 기억덩어리거든요. 꿈꿀 때 다 나타나거든요. 꿈은 전부 다 옛날이야기가 다 펼쳐지죠. 지금은 없지만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이 꿈속에서 재현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자기는 뭐 잘나갔든지 아슬아슬했든지 뭐 상당히 난감한 현상도 기억이 나고 그리고 못다 한 욕망도 나오고 그때 이룬 것도 나오고, 온갖 여러 가지 것이 다 편집을 하고 소설을 쓰고 난리도 아니죠. 꿈속에서. 그 모든 것이 찬란한, 찬란하지만 앞에 붙는 것이 있죠. 유치찬란한.

 

유치찬란한 자기의 편애라고 할까요? 자기의 연민, 자기 과거에 위로받는 것, 이런 거요. 아무도 위로 안 해주니까. 위로받을 데가 옛날에 잘나갔던 자기과거사에서 위로를 받아야죠. 어떻게 하겠어요? 남편은 지 맘대로 살고 자식은 다 떠나갔는데 위로받을 것이 뭡니까? 윤복희 맨날 이야기하죠.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내가 나를 위로해주지 누가 나를 위로해줘요. 여러분이 없는데요. 여러분 보세요. 지금 각자에요. 각자. 여러분들을 한데로 모을 수가 없다고요. 니는 니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사는 건데요. 뭐. 뭐 있어요? 나라도 나를 지켜야지, 나의 가치를 지켜야지 누가 지켜주겠어요? 이게 자기충실이죠.

 

자기충실이니까, 자기충실에 매여 있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의 십계명의 뜻은 뭐냐 하면은, 십계명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거는 천국생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천국생활. 죽기 전에 미리 땡겨서 천국생활해보라는 것이죠. 죽기 전에. 죽기 전에 미리 땡겨서 천국생활 못하면 이미 그거는 죽어서도 천국 못 갈 사람이에요. ROTC(예비장교훈련단)를 신청한다고 해서 바로 ROTC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사전에 훈련을 시켜서 ROTC를 견딜 수 있는가를 조사하거든요. 근데 그 훈련하는 것도 빡세요. 그 훈련을 못 견디면 안 되겠죠.

 

그러면 미리 와서 천국생활을 경험케 하는데, 이 천국생활의 반대말이 뭡니까? 지옥생활이죠. 이 천국생활과 지옥생활 가운데 십자가가 있어요. 누구든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아니하면,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천국이 나타나지를 않아요. 십자가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천국이 못 나타나요. 왜냐하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죄에서 의로 바꿀 때 나타나는 것이 십자가의 현상입니다. 죄인으로 갔다가 통과하게 되면 뭐로 나타난다? 의인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죽어서 십자가가 아니거든요. 십자가는 살아있으면서 이것이 유일한 천국의 방식으로 나옵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십자가로 들어간다. 어떻게 하든지. 십자가로 들어가기 위해서 나는 뭐든지 한다. 그리고 자랑할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 이렇게 하죠. 여러분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시겠죠. 잘 이해했는지 한번 봅시다. 천국 가는 방법은 1번 십자가다. 2번 교회다. 몇 번입니까? 십자가죠. 십자가입니다. 이게 같이 겹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십자가가 뭘 발로 아주 차버리느냐 하면은 교회라는 집단생활을 차버려요. 이 생활을 차버립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포함하고 껴안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교회라는 것이 왜 안 되느냐 하면은 이게 조직이거든요. 조직우선이에요.

 

어느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 팔아먹는 장사한다고 어떤 교수가 양심선언을 했거든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만약에 대학총장이라고 한다면 그 교수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대하겠습니까? 잘라버리겠습니까? 잘라야 되죠. 왜냐하면 대학조직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존속에 있으니까요. 얼마나 정의로우냐가 아니에요. 사회적 정의가 아니고, 자칫하면 정의하다가 대학이 문닫아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사회가 대학을 살려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대학이 살기 위해서는 자체적인 방어체제가 있어야 하는데, 그건 뭐냐 하면은 대학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대학의 정의로움이에요. 다른 정의로움은 필요치 않습니다.

 

뭐, 대학하니까 남의 이야기로 여기지만 더 쉽게 이야기해서 여러분들이 중국집을 운영한다고 합시다. 중국집을 운영하는데, 아르바이트 학생이 짬뽕 안에서 손톱 깎은 것은 것을 보고 그걸 가지고 언론사에 고발한다고 하면 그 아르바이트 학생 어떻게 하겠어요? 잘라내야 되죠. 왜냐하면 그걸 오냐, 오냐 하면 나중에 뭘 또 찾아낼지 모르기 때문에. 한번 버릇이 없어지지 않거든요. 그 다음에 또 찾아낸다 이 말이죠. ‘전에 내가 손톱 나온 것을 고발해서 십만 원을 받았지. 이거 아르바이트보다 훨씬 수입이 많네. 그 다음에 뭘 또 찾아내지.’ 그래가지고 자기 손수건 집어넣어가지고 백만 원을 받아낼지 어떻게 알아요.

 

인간에게 있어서의 정의는 뭐냐, 본인이 존재하는 것이 정의에요. 본인이 살아남는 것이 정의에요. 한국이 복잡하다. 돈만 있으면 미국에 이민가면 돼요. 아르헨티나 그리스에서 돈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갔어요? 이민 다 가버렸어요. 그 나라에서 못 살게 됐으니까, 부자들 세금 때릴 조짐이 있으니까 부자들이 재산을 해외로 도피시켜가지고 별장을 미국에 사놓고, 자기나라에서는 국적만 그렇게 해놓고 활동은 미국 별장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스페인, 그리스, 베네수엘라부터 잘 사는 사람들의 정의는 국가가 잘 사는 것이 아니에요. 본인이 잘 살기 위해서 국가가 있는 겁니다. 지금 북한도 마찬가지고. 그 사람들 전부다 스위스 은행에다가 돈 다 넣어놓고. 주민들이 죽든 말든 관계없죠. 이거는 한국도 마찬가지고요.

 

정의라고 하는 것은 뭐냐, 본인이 살아남는 것이 정의에요. 자기의식에 몰두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시한 천국의 요건은 뭡니까? 나한테 충실하면 천국 보내줄게, 이랬습니까? 아니죠. 누가복음 16장에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나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시죠? 횡령했던 사람들, 직원이면서도 횡령을 해가지고, 여차하면 쫓겨나고 잘릴 판에 그 청지기는 자기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후속조치를 취하죠. 그게 불의한 청지기인데 그 불의한 청지기를 의인이라고 했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야기하기를 뭐냐 하면은, 이 인간들아, 너희가 속해 있는 것이 지옥이냐, 천국이냐 갈림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벌써 뭐다? 벌써 지옥이다. 벌써. 지옥가면 안 되잖아? 라는 말을 하면 안돼요. 이미 지옥에 와있어요. 지옥에 와있기 때문에 뭐가 이상 하느냐 하면은, 지옥가야 되는데 천국 가는 사람이 이상해요. 모두 다 자기만 챙기는데, 자기를 부인한 그 사람이 희한한 사람이에요. 나 죄인 맞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이게 이상한 사람이에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오히려 의심을 해봐야 됩니다.

 

아니, 교회 있고 자기가 목사님이라고 하면서 교회 없애버리자, 나 목사 안 한다, 한다면 이게 이상한 목사가 아닙니까? 그거 없어도 나는 십자가만 있으면 이런 횡재를 봤나! 라고 한다면 이거 이상한 목사 아니에요. 이 교회 내가 세웠다. 너희들 나가라! 이게 정상이지. 이게 정상이지, 교회 없어도 목사 나 그만둬도 나는 십자가만 자랑할 거예요. 십자가만 있으면 나 같은 죄인 땡잡은 거고 다른 행운은 필요치 않습니다. 나는 몸이 아파도 괜찮아요. 나는 암 걸려도 괜찮아요. 이게 좀 특이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게 바로 다윗이에요.

 

자, 강의를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의 뜻은 결국 골리앗을 누구한테 세웠느냐 하면은 이스라엘 집단 앞에 내세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그 뜻을 사람들은 그냥 잔소리로, 귀로만 그냥 듣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뭡니까? 이 십계명의 뜻이 이 현실화될 때에 실제 현장에서는 어떤 구조로서 십계명이,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율법이 여기에 구체화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계명만 뜻이 아니고 뭐도 뜻이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이 대전바닥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태가 어느 것 하나 빈틈없이 전부다 십계명의 이상, 주님의 율법, 주님의 복음의 정신이 매일같이 파도처럼 우리에게 계속 들이닥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상황이, 그런 상태가 주어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의 스케줄 따로 있고, 플러스 일요일에 교회 가줘야지, 해가지고 뭐 하나 괜찮은 거 여기다가 추가하면, 보충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내 일이고 교회 가는 것은 주의 일이고. 그런 것 없습니다.

 

주의 일은 이미 우리의 일상을 다 접수하고 점령하고 장악하고 있습니다. 늘 골리앗을 우리에게 두었지만 우리는 자진해서 골리앗에게 지는 것만 배웠습니다. 알아서 기었습니다. 알아서 기어놓고 교회 와서는 잘못했다고 회개하고 그 다음날 또 지고. “내가 또 양보했습니다. 주여, 용서해주옵소서.” 이러고 있고. 이거 무슨 짓이에요. 이거. 앞으로 교회 없애버리고 늘 졌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데.

 

그러면 이 골리앗이 이스라엘 앞에 등장했을 때, 사실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지 못하다는 겁니다. 골리앗이 등장함으로써 전혀 이스라엘이, 지난번에 했죠. 이스라엘이 골리앗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둘 다 살아가는 방식이 같다(=). 똑같다 이 말이죠. 누가 하나님의 성도가 아니고 사는 방식이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누가 잘나고 못나고 아니고 다 못났어요. 천국 갈 사람을 주께서는 직접 마련합니다. 어떤 사람을 천국가게 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 가는 사람은 없어요.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언약이 오게 되면 천국 가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거죠.

 

그래서 천국 갈 때는, 만들어낸다는 것은 있는 게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있다가도 없어져서 없어진 것으로 가는 거예요. 있음에서 없음, 없음에서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있음. 이 없음이 십자가에요. 죽여 버리는 겁니다. 죽여 버리고 이 죽음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오면 이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새로 사는 거예요. 지나간 인생은 자기의 기억과 자기의 역사 그걸로 꾸준하게 유지하고 가다가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과거의 나의 찬란한, 유치찬란한 나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무의미로 처리되고요. 아무 의미 없어요. 처리되고,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가득 찬 새로운 인간으로 천국에 합류하게 되는 겁니다.

 

거지나사로의 한평생은 거지였죠. 근데 천국 갔을 때도 거지였습니까? 아니죠. 천국 간 거지나사로가 이래 생각했을 겁니다. “내가 언제 거지였던 적이 있는가? 거지였던 적이 있었을까? 근데 거지가 뭐지?” 사람이 어떤 상황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과거의 것을 아무리 그대로 해석하려고 해도 그대로 해석되지 않아요. 지금 상황이 강하게 둘러싸기 때문에 과거의 아픔은 잊어지는 겁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 아프지만은 애기를 낳고 난 뒤에는 아픔을 잊어버린다. 저는 뭐 남자라서 그런 경험이 없지만 이빨 뽑는 것은 경험할 수 있거든요. 이빨 뽑는 것은 아팠지만 이렇게 건강하게 임플란트가 된 상황에서는 이게 왜? 아플 리가 없지. 지금은 안 아프니까 아플 리가 없는 거예요. 아픈 게 뭐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빨 아픈 게 뭔지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보낸 것은 이스라엘과 한통속이다. 이래 보면 돼요. 여기에 소년 다윗이 등장합니다. 소년 다윗이 등장하게 되면 골리앗에게도 낯설지만 누구한테도 낯선가 하면은 이스라엘에게도 낯선 존재가 되는 거예요. 참 낯설어요. 그러면 다윗에게 있어서의 적이 골리앗만 적이겠어요? 이스라엘도 적이겠습니까? 1+1이에요. 한통속으로 다윗의 적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오히려 다윗을 말려요. 애들은 가라. 애들이 여기 노는데 아니다. 애들은 가라고 막 말리죠.

 

말릴 때, 이스라엘이 말리는 이유가 뭐냐, 아까 이야기한 자기의식, 내 힘으로는 골리앗을 못 이긴다는 것을 딱 보면 알겠다는 거예요. 딱 보면. 하나님의 뜻인데, 이 하나님의 뜻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해석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십계명이라는 것이 문자로 늘 있지만 이게 어떤 사건이 터지면 이게 단회성, 일회성이거든요. 한번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또 골리앗이 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골리앗은 이미 죽었으니까.

 

그래서 이 사건을 해석하려면요, 첫 번째 강의에서 중요한 점, 중요하기 때문에 쓰겠습니다. '사건을 해석하려면 그 다음 사건이 들이닥쳐야 한다.' 뭐, 사건이 골리앗 사건이죠. 골리앗 사건을 해석하려면 그 다음 사건이 멀리 보면 십자가 사건이죠. 십자가 사건. 십자가 사건으로 앞에 있는, 멀리 일어난 사건을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사건은 그것으로서 하나님의 뜻의 모든 의미가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사건과 동일한 구조, 동일한 구조의 사건이 계속해서 반복이 되죠. 반복되면서 최종사건까지, 십자가 사건까지 가는 겁니다.

 

자, 예수님의 사건이 주는 의미는 바로 이 죄인을 어떻게 하면 천국에 넣을까, 하는 문제죠. 죄인이 천국 가는 방식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십자가 사건이죠. 골리앗 사건을 이해하려면 십자가 사건을 알고 십자가 사건을 구성한 그 구조를 그대로 여기다가 대입하면 되는 거예요. 이거 수능 나옵니다. 이거 중요한 문제에요. 그냥 대입하면 돼요. 십자가 공식이니까. 십자가 공식이에요.

 

자, 십자가 공식을 골리앗에 대입해서 한번 정리해봅시다. 1번, 낯선 타자가 등장한다. 2번, 일단 나보다 강하다. 3번, 그 결과로 나는 못 이긴다. 낯선 남이 등장하고 나보다 강해요. 나는 못 이긴다. 이래 되죠. 나는 못 이긴다는 것을 통해서 뭐가 되느냐, 자기 자신이 노출돼요. 자기 자신이 노출되는데 어떻게 노출되느냐 하면은 “나는 보호받지 못하는구나!” 인간의 자아는 어떤 타인에게, 외부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그러한 욕구가, 욕망이 있다는 것이 노출되는 겁니다. 어떤 교인이 교회에 왔을 때에 교회에 등록을 하고 교회에 다닙니다.

 

자, 이 원리에 의하면 그 사람은 교회에 왜 옵니까? 보호받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내 영혼부터 해가지고, 내 영혼, 내 생명, 내가 가져왔던 위신과 체면, 그것이 사랑받고 보호받고 그리고 지켜줌 되기를 위해서 교회에 가죠. 그런데 교회에 가니까 이 남자, 저 남자, 그리고 심지어 목사까지 다 찝쩍거려서 자기를 괴롭히면, 교회에 갔는데 예쁜 사람이 왔다고 다 건드리면, 심지어 지켜줘야 될 목사까지 건드리면, 이 분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교회에 못 다니겠죠. ‘차라리 교회 안 다니고 그냥 생방송을 들을까’라는 이런 생각 들겠죠. 그렇잖아요.

 

자, 그럴 때 이 분의 잘못은 뭡니까? 이 모습이 현재 구원받은 다윗의 모습과 일치가 됩니까? 일치가 안 됩니까? 자기가 교회에서 보호받기를 원했던 이 모습이 이스라엘과 일치가 됩니까? 안 됩니까? 일치되겠죠. 골리앗과 일치가 되겠죠. 골리앗은 갑옷을 입었으니까. 그러면 다윗과 일치가 됩니까? 일치가 안 됩니까? 다윗은 무장이 안 되어 있어요. 결국은 뭐냐, 다윗은 보호받고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보호하고자 하는 거예요. 이 보호는 뭐냐, 결국은 희생입니다. 희생. “주여, 교회 와서 이 몸 하나 그냥 촛불이 되게 하옵소서. 그냥 나 같은 것은 타버리게 하옵소서.” 이래 돼요.

 

지키겠다는 것은, 뭔가 외부에서 공격을 느낀다는 것은 뭡니까? “나는 귀하다. 나는 여기서 다치면 안 돼. 나는 고이 간직할 게 따로 있어.”라는 의식이 같이 병행해서 강화돼요. 꾸준히 강화된다고요. 계속 계산해보는 거예요. 내가 이 교회 다니는 것이 계속 유리할 것인가? 아니면 이 교회 버리고 다른 교회 다니는 것이 유리할 것인가? 계속 계산하겠죠. 이것이 바로 천국 생활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십자가하고 전혀 상관이 없는, 내 몸 내가 지키는 것밖에 안 돼요.

 

다시 한 번 봅시다. 1번, 낯선 타자. 이게 골리앗이잖아요. 2번, 그는 나보다 강하다. 3번, 나는 못 이긴다. 이래 되죠. 자, 4번째는 뭐냐 하면은 나 자체를 이기지 못하는데 나 자체가 왜 여기에 있는가? 결국은 다윗의 자리에 누가 있는가 하면은 하나님의 십계명, 율법, 언약의 자리가 돼버리죠. 언약의 자리. 다윗의 자리가 다윗의 자리가 아니고 누구의 자리냐 하면은 하나님 자리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붙잡혔죠. 제자들 보기에 예수님이 이깁니까? 바리새인이 이겨요? 바리새인이 이기겠죠. 그러니까 체포되는 것이 아닙니까?

 

근데 예수님은 지되 끝까지 지죠. 끝까지. 사람이 무슨 신체라도 뭐 이렇게 목숨이라도 부지해야 뭐 이기고 지고의 게임이라도 되겠는데 끝까지 지기 때문에 끝까지 어떻게 됩니까? 살해당하죠. 사람이 살해당하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살해당하면 그의 과거가 다 무효가 돼요. 아무리 아름답게 했고 아무리 훌륭했고 아무리 국가에 큰 업적을 해도 그 사람이 죽어버리면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평소에 내가 있기를 원했기 때문에 제일 내가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내가 잊혀진 존재, 내가 나로부터도 잊혀진 존재가 되는 것을 제일 겁을 내요. 내가 죽더라도 내 영혼만큼은 좀 하나님께서 알아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영혼만큼은.

 

결국 골리앗이 등장하는 것이 현재 오늘날의 일상이라면, 결국 일상이라면 골리앗이 한 두 명이 아니죠. 주변이 다 골리앗이죠. 자식까지, 남편, 아내, 모든 것이 다 골리앗이에요. 왜 골리앗을 쫙 깔아두느냐 하면은 현재 너의 자리가 뭐냐, 원래 하나님의 뜻으로서 이런 상황이 왔기 때문에 말씀의 자리에요. 말씀의 자리인데 누가 방해질을 하고 있느냐 하면은 내가, 주의 말씀을 이루는데 내가 훼방꾼이 되고 방해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내가 방해꾼이에요.

 

특히 다윗이 어른입니까? 소년입니까? 소년이기 때문에 자의식이 없어요. 자의식이 희미해요. 자의식이 아직까지 성숙되지 않았던 거예요. 그냥 “내가 뭐하지?” 그것만 생각하지 딴 의식이 없어요. “내가 어른보다 이겨야지. 저 사람 이겨야지.” 그런 것이 없어요. “지금 내가 뭘 하면 되지?” 소년 다윗이 보기에는 할례 받지 않는, 할례 받지 않았다는 것은 언약이 없다는 거예요. 말씀이 없는 민족이 왔다는 말은 우리 민족은 뭡니까? 할례 받은 민족이잖아요. 이스라엘은. 할례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고 뜻이거든요. 하나님의 뜻이 이미 이 자리에 있어요. 이스라엘 자리에 있다고요.

 

그러면 누가 누구를 보호해야 됩니까? 소년 다윗은 뭘 보호해요? 하나님의 말씀의 살아있음, 예수님의 부활하심,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보호하기 위해서 죽는 것조차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교회 가서 내가 보호받기를 원하는 겁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에요. 내게 주신 귀한 것, 복음을 간수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거라 이 말이죠. 그러면 앞에 골리앗이 등장한다면 우리는 찬스를 맞이한 거죠. 찬스 맞이한 거예요. 무슨 찬스? 내가 희생할 수 있는 찬스.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식당에서, 그것도 중국집 식당에서 말합니다. 복음 알고 난 뒤에 아는 사람이 다 떨어져나갔다는 거예요. 복음 알고 난 뒤에 아는 사람이 다 떨어졌다. 가만히 있는데 떨어지지 않았어요. 분명히 그들과 대화가운데서 복음을 전했어요. “기존교회가 이게 문제다. 완전히 교회 장사꾼이다.” 이렇게 했더니만 다 떨어져나간 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골리앗한테 지면되는데 골리앗한테 안 지려고 입을 떼는 순간 다 떨어져나갔어요. 이제 연락도 하지 말라고 이렇게 하고. 이래버렸어요.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할 때 그 분은 지금 자기의 자존심, 체면, 과거에 나는 잘나갔고 복음을 안다고 지 자랑하려고 그렇게 한 거예요? 무엇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까? 바로 세상이 이미 지옥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세상이 곧 지옥이다. 왜 그러냐 하면은 전부 다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보호받는 것만 신경 쓰기 때문에, 내가 나 지키는 것만 신경 쓰기 때문에 이 자체가 지옥이거든요.

 

왜냐하면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가 통과되려면 필히 우리는 예수님이 대신 죄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용으로 우리가 존재하거든요. 우리가 의인 같으면 예수님이 죽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필히 우리는 그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린,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을 스스럼없이 튀어나오는 죄인이어야 되는 거예요. 근데 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죽어 마땅하게 되면 자기가 지키고자했던 찬란했던 과거의 모든 것도 다 실없는 거고 다 무의미한 거예요. 다 무의미한 거라고요.

 

저 부둣가에 보면 다방들이 많지 않습니까? 옛날 다방. 옛날 다방 마담들이 아저씨 하나 꼬셔가지고 비싼 쌍화차 하나 시켜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최백호는 그걸 가지고 실없는 농담이라고 했거든요. “아줌마 이야기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네. 국회에 나가라.” 그런 소리는 안 하죠. 왜냐하면 짙은 화장을 했기 때문에. 배경음악은 색소폰소리가 나오고. 실없는 농담사이로,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실없는 농담이라고요.

 

내가 한평생 60, 70을 살아온 것이 전부 다 실없는 농담이라고 할 때에, 여러분 마음이 무겁습니까? 마음이 편해집니까? 어느 쪽이에요? 마음이 편해지죠. 그러니까 강아지나 키우지. 강아지나 나나 다 똑같으니까. 강아지 팔자나 내 팔자나. 강아지 키우는 사람에게 오는 교훈은 그거잖아요. 니 인생이나 내 인생이나 똑같다. 똑같은 세월에, 부질없는 세월에 그냥 질질 끌려가는 거예요. 부질없는 세월에.

 

과거가 실없는 농담 같으면 오늘도 실없는 농담이에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마찬가지고. 과거를 알고 미래까지 한꺼번에 미리 땡겨서 다 알아버린 거예요. 정답을. 정답은 십자가 앞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도 내놓을 필요는 없어요. 아무것도 내놓지 말라는 거예요. 주님이 만약에 조상님이라면 주님 앞에 제사한다고 배, 사과, 좌청룡, 우백호 내놓으면 주님이 발가지고 확 밀어버려요. 이런 실없는 것을 내놓지 말라니까.

 

제가 십일조를 몇 년 동안 했고 뭐 50명 전도해서 교회 와서 천국가게 만들었고..., 발로 차버려요. 실없는 짓하고 있네! 내가 너한테 그런 것 시켰느냐 이 말이죠. 50명 꼬시라고 시켰느냐 이 말이죠. 구원은 주님이 알아서 택한 백성은 안 놓쳐요. 왜 니가 걱정하고 있어. 니가. 내가 기도해서 자식 목사까지 만들었고..., 또 실없는 짓하고 있네! 목사 됐다고 구원받겠어요? 목사 됐다고. 엄마가 그 모양이면 자식도 그 모양이죠. 똑같이.

 

하나의 사건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후대의 사건이 앞에 있는 사건을, 또 하나의 사건이 또 터져야 돼요. 또 터질 때 동일한 구조가 이루어져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은 잔소리밖에 안 돼요. 그러나 우리가 맞닥뜨리는 모든 현실에서는 불가능성입니다. 무엇의 불가능성이냐, 선과 악이 전부 다 모호해요. 선과 악을 따지기가 모호해요. 선이라고 했는데 좀 더 따져보니까 그게 악이 되고. 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다지 나쁘지 않는 악이 되고. 이게 가치평가 불가능성이에요.

 

이 말은 내가 나를 판단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이죠. 판단은 누가 하느냐, 주님이 판단해야 하는데, 왜 그러냐 하면은 다윗의 구조 안에, 다윗을 여기다 설치하고 그 앞에 키 크고 강한 골리앗을 설치하고 뒤에는 겁쟁이 이스라엘을 설치할 때 이런 배치된 모든 설치물들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이 알아서 꽂아놓은 거라는 말이죠. 이 모든 게. 우리 움직임 모든 게.

 

어떤 분이 35번을 이사했는데,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제일 이사를 많이 한 사람이에요. 35번씩 이사를 했는데, 이사할 때마다 뒤돌아보면 주께서 다 꽂아놨어요. 왜냐하면 이사를 했다기보다도 자의식이 날아가 버리면 내가 지금 어느 동네에 있는지, 몇 년 며칠인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꽂아준 이 자리에서 내가 뭐 할 거냐 하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들 가운데서 병원에 입원해서 하루 종일 하얀 시트에 누워있다고 한다면, 그럼 거기서 여러분들의 할 일은 뭡니까? 누워있는 거예요. 누워있는 이것이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언약구조 안에 골리앗과 지금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상대하는 자가 누구였다? 골리앗. 이 골리앗을 이스라엘은 아무도 못 이겼다. 못 이겼어요. 이 골리앗은 다윗과 비교해서 어른들이기 때문에. 어른들. 오늘 제목은 어른들입니다. 이게 어른들이거든요. 어른들이기 때문에 이기지를 못했어요. 어른들이 보기에 소년 다윗의 개입은 낯선 개입이에요. 낯선 타자에요. 따라서 오늘날 골리앗과의 싸움은 나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의 골리앗이에요.

 

이 일은 어떻게 해석이 나오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할 수만 있거든 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자,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하고 이야기하죠. 아버지보고 이야기하면서 그 기도의 주제가 뭐냐 하면은 자기 자신에 관한 거예요. 자기 자신에 관한 것. 자기 자신인데 두 개의 자기 자신을 내세웁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뜻에는 위반이 되는데 지금 나한테는 그냥 편안하게 넘어갈 수 있는 나. 자, 또 한 가지는 나는 되게 괴로운데 그게 아버지의 뜻인 나. 아버지의 뜻으로 밀어붙여야 될 나.

 

그러니까 그 이야기처럼 결국 내가 누구하고 싸웁니까? 나의 적은 나다. 이 말이죠.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나의 적은 내가 되는 거예요. 끊임없이 올라오는 골리앗은 바로 끊임없이 올라오는 나의 정당성, 나는 대단하다, 나는 절대로 지옥가면 안 돼, 라는 자기 개인적인 구원의 열망, 이런 것이 내가 이겨야 될, 내가 없애버려야 될 허위적 나. 허상이죠. 허상의 나, 실재하지 않는 가짜 나를 계속 떠올리는 겁니다.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이 허상을 누가 만드느냐 하면은 바로 악마가 이미 배후에서 우리한테 나의 허상을 계속 만들어내는 거예요. 곧 죽어도 지 잘났대. 나 잘났어. 나는 이 잘난 나를 내가 안 지키면 아무도 못 지켜. 그러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골리앗으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할례 받았으면, 할례라는 것은 창세기 15장, 17장에 나오는 바로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아브라함 백성이 될 수 없거든요. 창세기 17장 11절에 보면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영원한 언약이에요. 이거는 이스라엘이 고안해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지어낸 것이 아니죠. 그냥 하나님이 꽂아준 거죠.

 

그러면 이스라엘이 뭐냐,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아브라함의 언약이 뭐냐 하면은 할례언약이 유지되고, 유지시켜준다는 조건하에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을 지킨 사람이 오늘 본문에 누구입니까? 소년 다윗 딱 한 사람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전쟁은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남겨준 자기 언약을 지킨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소년다윗이었어요. 소년다윗. 그 소년다윗 빼놓고는 골리앗과 이쪽은 전부 다 허깨비고 허수아비고 허상이죠.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내 얼굴이 없으면 누구도 없다? 타인도 없는 거예요. 내 얼굴이 없으면. 내가 없어질 정도로 누구한테 몰두해있다면 그 순간 남이라는 존재는 같이 없는 거예요. 남이 나한테 욕하고 친구가 떠나든 말든 관계없어요. 지금 주님이 나에게 뭐라고 지시하느냐, 그게 오더에요. 오더가 내려지면 끝이에요. 어떤 교회에 복음이 나오지 않으면 거기에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복음이 안 나오는데 왜 다녀요. 복음이 안 나오는데 다닌다는 말은 결국은 최종 지킬 것이 여전히 나에게 유리한 것이 있다는 그런 반증이 되는 겁니다. 반증.

 

큰 교회 같은 데는 그전에 부조금을 많이 내서 이 교회를 나가게 되면 딸 결혼할 때 부조금을 못 받는다든지. 근데 교회에 복음이고 뭐고 없지만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 너무 많아. 친구들이. 그 교회 나오면 나는 놀 자리가 없어. 특히 점점 나이가 많아져 가는데. 그리고 거기도 단골이 많아. 피아노레슨 하는데, 피아노레슨 하는 주로 애들이 우리교회 집사님 애들인데 그 교회 안 나가면 레슨 받는 애들이 다 떨어져서 내가 생활이 안 돼. 이런 거.

 

결국 누가 누구를 지킨다? 내가 나를 지키는 것. 그래놓고 이걸 지킨 것이 아까워서라도 자기부정이 안 되죠. “주여, 어떻게 좀 봐주시면 안 됩니까? 열심히 살았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뭐냐 하면은 십자가를 드러내요. 십자가가 새 언약이거든요. 모든 것이, 언약의 완성은 십자가거든요.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너는 십자가를 드러내는데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 연관성을 묻는 겁니다. 그 구조를 묻는 거예요.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은 언약구조상 배치물이죠. 배치되어 있습니다. 언약이 구조적으로 되어 있으니까. 여기 골리앗이 있고, 여기는 이스라엘이 있고, 이것이 인간이 아는 전부에요. “아, 힘이 있었으면 이길 텐데.” 하는 것. 우리들의 집합된 힘이 저 하나를 못 이기는 거예요. 근데 골리앗은 한사람이죠. 한사람. 한사람이 등장했어요. 이게 중요한 의미인데, 한사람이 등장했을 때 다수가 나올 필요가 없어요.

 

이 다수를 일반적 타자, 타인인데, 일반적 타인은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 대표성이 있어야 돼요. 대표성. 일반적 타인은 대표성, 한 사람을 상대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대표성이 있는 것은 숫자와 전혀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 율법이 준 취지,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취지를 품에 안고 나타난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철없는 소년다윗이죠. 소년다윗이 철없는 것이 맞아요. 소년다윗이 여기에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골리앗이 나의 원수가 되는데, 막상 나의 원수라고 철떡 같이 믿었고, 원수라고 하는 이유가 골리앗이 나의 가진 것을 공격하려고하니까, 내 것이 빼앗기니까, 내 것 빼앗기면 무조건 나의 원수죠. 나 다치게 하고 나 아프게 하고 나 병들게 하고 내 재산 사기쳐먹고, 다 원수잖아요. 나 구원으로 못 가게하고. 다 원수인데, 내 구원을 지키겠다고 하는 이것이 주의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이 구조에서 보여주죠. 이스라엘이 스스로 구원되고자 하는 이 조치로 인하여 구원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내 구원을 지킬 것이 아니고 언약을 지켜야죠. 언약이 귀한 것을 지켜야지 내 구원, 내가 천당 가는 것이 귀한 것이 아니거든요. 진짜 질문하고 싶다. 내가 천당 가는 것이 귀해요? 주님의 십자가가 귀해요? 십자가가 더 귀한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십자가 중심으로 일하지 나 천당 가라고 일 안 하거든요. 어느 게 나한테 유리합니까? 라는 것을 묻는 게 아니에요. 어느 게 유리하냐를 묻는 게 아니고 진리가 무엇이냐를 묻는 거예요. 현실이 뭐냐를 묻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일반적 타자에요. 일반적 타자. 일반적 타자가 개인적으로 취중하면 안 돼요. 일반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머물러있어야지, 저만 특별히 봐달라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는 니가 니 볼 생각을 하지 말고 특별한 타자 한분, 누구?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지금 이걸 원하잖아요. 주님의 뜻은. 주님 앞에 몰입해버리면 나 같은 존재는 주님 앞에서 있으나마나 무의미한 거다 이 말이죠. 실없는 농담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거예요.

 

누가 욕하나 안 하나 그거는 주께서 알아서 욕하게 하신 거니까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 얼굴 앞에 내 얼굴을 잊어버리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주님은 최백호고 나는 화장을 짙게 한 실없는 농담이나 내뱉는 부둣가에 오래된 다방 마담. 돈 많은 아저씨 꼬셔가지고 쌍화차나 팔려고 하는, 그런 식으로 정말 허접스런 존재. 이게 바로 십자가만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0.138)19-11-03 16:54 
대전-115강 마태복음26장 36-46절(겟세마네기도)20191029-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을 해봅시다. 마태복음 26장 36절부터 보겠습니다.

 

36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겟세마네,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필수코스죠. 거기 옆에 큰 예배당이 있고 겟세마네에 뽕나무가 있는 그 동영상을 제가 우리교회에 올려놨으니까 여러분들이 보시면 될 거예요. 겟세마네 거기에 술객들이, 관광객들이 얼마나 많은지. 북적북적, 하도 많이 와서. 그 예배당도 아주 굉장히 복잡한데, 진짜 거기에 많이 와요. 다 오니까. 실제로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서 기도했다는 그러한 사실을 접하니까, 그야말로 타인이 보이지 않아요.

 

수백 명, 수천 명이 오든 무슨 생각만 나는가 하면은 주님이 거기에 계신 것만 생각나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주님의 기도가 필수코스에요. 주님의 코스가 오늘날 죄인이 가는 코스를 미리 보여준 거예요. 내 인생이 어떻게 되는가는 우리가 그렇게 궁금해 할 필요가 없어요. 주님의 코스가 바로 성도가 가는 인생입니다. 주님이 가는 코스와 우리 코스의 차이점이 있다면 주님은 의인이시기 때문에, 의인은 반드시 뭘 추구하게 되느냐 하면은 죄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죄의 모습을.

 

홍해라는 것이 갈라지기 위한 바다라는 것은 모세가 통과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상상도 못했죠. 홍해의 의미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있고, 더 나아가서 그 홍해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모세가 코스를 잡을 때 홍해가 없는 코스로 간 것이 아니고 일부러 홍해로 간 것은 홍해를 갈라지게 함으로서 세상 모든 만사가 하나님의 뜻을 막을 재주는 없다. 세상의 모든 게. 어떤 결정 난 코스대로 그때그때 닥쳐오는 거죠. 우리의 뜻이 아니고 주의 뜻에 의해서 닥쳐오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세상 모든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 들이닥치는데, 만약에 예수님 자리에 우리 개인을 집어넣어버리면 우리는 오해하고 곡해하는 거예요. “이 잘난 나에게 어려움을 왜 주십니까?” 이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두 번째 강의의 제목은 ‘불가능한 시련’입니다. ‘불가능한 시련’ 시련이 오는데 우리로서는 극복이 가능한 것이 오는 게 아니고 불가능한 시련이 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은 우리가 헤쳐서 구원으로 갈 수 있는 그 모든 길은 차단되어 있다.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박태환이가 헤엄을 잘 쳐도 홍해를 건너갈 수 없듯이, 이 세상 자체가 너무나 빡빡해가지고 우리의 가는 길을 계속 거부합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길을. 내가 나의 종교적인 열심과 테크닉을 발휘해서 세상의 순전함과 순결함을 가지고 세상을 헤쳐 나가려고 해보세요. 이거는 불가능한 시련이에요. 고생만 댔다하고 구원받지도 못하고 헛고생만 하고 있는 거예요. 헛고생만.

 

왜 하나님은 내가 하는 일이 이렇게 건전하고 순수하고 순결한데 안 도와주시냐? 이래 되는 거예요. 내 하는 일을 왜 안 도와주시냐? 그것은 이미 주께서 내놓은 길로 안 가고 내 잘났다는 길을 증명해줄 길로, 자꾸 길이 아닌 곳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오는 겁니다. 일부러 못 가게 하는 것을 오히려 감사히 여겨야 돼요.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오히려 고맙게 여겨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끝에 반드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고마움과 감사가 나온다는 거죠.

 

고마움과 감사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시련에 부딪혀야 가능해요. 시련이 있어야 고마움과 감사가 나오지, 시련이 없는 고마움과 감사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가신 코스를 세 사람 정도를 대표로 뽑아서 여기 겟세마네 동산에서 같이 잠시 맛보게 했죠. 맛보게 하면 뭐합니까? 탈락인데요. 자고 있었거든요. 겟세마네 기도할 때 그들은 잠자고 있었어요. 제자들이 잠을 잤다는 말은 그 코스를 인간의 힘으로는 뚫을 코스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주님과 함께 동행 했다는 그러한 생각은 착오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동행할 수도 없는데, 옆에 같이 자고 합숙을 같이하니까 우리 가는 길이 주의 길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서서히 이것은 결별할 시점에 온 거예요. 갈라설 시점에 온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내다보는 것과 인간이 내다보는 것과 너무 엉뚱하게 다르다는, 차이가 나는 거예요. 예수님의 기도에 제자들이 합세함으로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무엇을 요구하느냐, 이것을 따져봐야 해요.

 

자, 제가 묻겠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요구하느냐? 1번, 죄를 요구한다. 2번, 의를 요구한다. 몇 번 이겠습니까? 2번이죠. 그래서 틀린 거예요. 인간의 제대로 된 기도는 “내게 합당한 것을 주시옵소서.” 이게 되어야 돼요. “내게 합당한 것을 주시옵소서.” 그럼 내게, 인간은 죄인이잖아요. 죄인에게 합당한 것은 저주고 지옥입니다. “지옥가게 해주옵소서. 그게 내게 딱 맞는 곳입니다. 내게 딱 맞는 결과입니다. 내게 맞는 것을 허락해주옵소서.”

 

이게 제가 이야기하니까 터무니없어 보이죠. 주님이 그 이야기했거든요. 이 잔은 예수님한테 안 맞아요. 그냥 지나가도 괜찮아요.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하지만 아버지의 뜻은 뭐냐 하면은 너는 너만 구원되게 한 코스가 아니고, 죄인을 구원한 코스기 때문에, 너가 구원한 죄인의 코스를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셔야 되는 거예요. 대신 가셔야 되는 거예요. 대신 가시다보니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원하지 않는 뜻, 죄인에게 합당한 조치가 주어지는 그 뜻을 전부 다 주님이 감당하셔야 되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감당 못합니다. 내빼기 바쁘죠. 원망하기 바쁘고.

 

그러면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를 할 때에, 요새는 관광객들이 많지만, 그때는 제자들과 멀찍이 떨어져서 기도했죠. 그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몇 명 있었습니까? 제로죠. 아무도 없었죠. 세 명 불러다가 그들은 따로 있었고 예수님은 따로 떨어져서 기도했으니까, 없죠. 홀로 기도하신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기도자체가 뭐냐 하면은 이게 언약이 되는 겁니다. ‘기도=언약’ 예수님이 언약을 이루어서 기도한 것도 되지만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 자체도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제가 무슨 취지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은 어떤 인간도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기도가 아닙니다. 뭐, 가족을 위해서 중보기도 한다? 그거 기도가 아니에요. 성령으로 하시는 기도는 우리 기도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기도를 우리기도 속에 집어넣는 일을 하시죠. 성령이 오게 되면 기도를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도 하셨잖아요. 우리기도 개판이고 주님기도 옳다. 이거 아닙니까? 주님의 기도를 여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로마서 8장을 한번 봅시다. 26절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아까 일반화된 타자라고 했죠. 첫째 시간에 배웠잖아요. 일반화된 타자. 대표성이 아니고 일반화된 타자 속에 우리가 하나의 개인이 아닙니까? 아주 일괄적으로 처리해버려요. 우리는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 그러면 누가 기도할 바를 아느냐, 그 뒤에 나오죠.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성령께서.

 

27절,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도가 뜻을 아는 것이 아니에요. 성도는 뜻을 몰라요. 뜻은 누구만 아십니까? 성령이 아시죠. 성령기도 덕분에 우리가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성령의 기도가 응답이 될까요? 안 될까요? 될 수밖에 없죠. 아버지의 뜻대로 하니까. 짜고 치는 고스톱이니까. 서로가 잘 아니까. 아버지의 뜻을 알죠. 아버지 뜻의 응답의 결과가 뭐냐,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인생이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고 결정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오늘 강의의 핵심적인 내용이 뭐냐 하면은, 우리의 기도는 필히 난관에 봉착되어야 한다는 사실. 우리의 기도는 필히 난관에 봉착되어야 해요. 절망으로 나가야 돼요. 우리의 기도가. 역에 가면 철도가 많이 있잖아요. 근데 지금 다니는 철도는 뚫려있어서 역을 벗어나 계속 가고 있지만, 그냥 공사용 철도는 역이 막혀있죠. 둔덕(턱)으로 해서 막혀 있잖아요. 우리의 기도는 막혀있어야 돼요. 그러면 우리의 기도가 막혀있을 때,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인생이 막혀 있을 때, 뭐가 우리 자신으로서 가장 괴롭고 실망스럽고 견디기 힘드냐 하면은 이거에요. 나의 선택이 좌절되었다. 나의 선택이.

 

자, 우리가 선택을 할 때에 그냥 아무거나 선택합니까? 아니면 온 심혈을 기울여서 선택합니까? 내 경험과 체험, 내가 아는 성경지식, 이런 모든 것을 총집합해서 가장 확률이 높은, 가장 응답적인 확률이 높은 그것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그 기도가 좌절되었다는 것은 뭔 말이냐 하면은, 나의 평소의 생각과 의지와 이성과 모든 것이 이게 하나님께 응답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나의 선택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일은, 우리를 좌절시키는 성령의 일은 뭘 묻느냐 하면은 내가 과연 인간일까? 내가 인간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들을 문제 삼는 거예요. 이래서 너는 안 되는 거야, 라는 식으로 전부 다 거기다가 자외선을 쏘아대듯이 성령께서 낱낱이 다 쏘아댑니다. 성령이 주신 기도 안에는. 성령이 주시는 기도는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딱 대상으로 놓고, 실험대에 딱 눕히고 CT촬영하듯이 방사능을 우리의 구석구석 다 쏘아대면서, “이래서 너는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는 거야. 이래서 너는 더 살 수 있는 권리가 없는 거야.”라고, 다 낱낱이 이야기해줘요.

 

성령께서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은 끊임없이 우리의 잘남이 복음의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우리는 죽고 우리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만 사는 이 원리 안에는 겟세마네의 기도도 포함이 되어 있거든요.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예수님은 홀로 기도했다, 라고 했을 때에 그 제자들 세 명의 무리에 누굴 포함시킵니까? 우리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잠자고 있던 제자들 자리가 우리의 자리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어떤 사건이 있으면 언약사건을 그대로 가져다가 우리에게 붙여버리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배치물로 가입이 돼요. 배치물로 거기에 들어가게 된다고요. 우리의 자리가 어디냐 하면은 아까 다윗을 반대했던 이스라엘 자리가 우리 자리고, 골리앗의 자리가 우리 자리고. 또 오늘 본문 같으면 뭐냐 하면은 잠자고 있었던 제자들의 자리다 이 말이죠.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쉽게 말해서 다 약하다 이 말입니다.

 

영혼은 강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냥 이건 약한 거예요. 약함은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겁니다. 주의 뜻을 달성할 수가 없는 겁니다. 주님의 뜻을 달성하지 못하면 주님의 영광이 안돼요. 주님의 영광이 안 되면 우리는 천국갈 수 없습니다. 이거는 주께서 버릴 패에요. 영광이 안 되는데 받아들일 필요가 없죠.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다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아버지 입장에서. 주님은 그 원칙을 계속 고수하는 겁니다. 주님은 예수님을 선택하신 거예요.

 

근데 예수님을 선택하고 나서 보니까 예수님 안에 누가 들어있다?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이 들어있는 거예요. 예수님을 선택하다보니까 예수님이 뭐가 되었다? 대표자. 대표성을 갖고 있죠. 대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다수를 뒤에 데리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대표를 끌어당기니까 다수가 다 끌려오는 거예요. 그 대표자의 이름이 주의 이름이니까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불러요? 내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만약에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해줄 수 있다면, 서초동에 가서 뭘 합니까? “문재인! 문재인!” 이러죠. “나! 나!” 나를 안 부르죠. 문재인이 대표성을 갖고 있으니까. 지금 예가 적절한 예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대표성을 갖고 있으니까 문재인 이름을 부르잖아요. 근데 성도는 무슨 이름을 불러야 돼요? 성조기 흔들고 태극기 흔들어야 되겠어요? 뭘 흔들어야 돼요? 주의 이름을 불러야 되는데. 십자가인데. 이게 갑자기 성조기, 태극기가 왜 나오고 트럼프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이상해요. 그것은 기독교가 십자가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라는 그 권력을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교회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것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교회 없으면 주의 일이 안 되는 줄로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아까 불가능한 시련이라고 했습니다. 불가능한 시련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런 뜻이에요. 예를 하나 들면 창세기 9장에 보면 하늘에 무지개가 떠있어요.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무지개가 있어요? 무지개가 없어요? 무지개는 있음과 없음을 둘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무지개가 떴다고 애들이 그 앞에 가보세요. 무지개가 있습니까? 없죠. 어! 무지개가 분명히 이 자리에 있었는데? 어디 갔지? 무지개가 없어요. 근데 멀리 다시 돌아오게 되면 무지개가 떠있죠. 분명히 있는데 실제로는 없는 것. 그래서 없다고 돌아섰는데 있고.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성령이에요. 이 성령을 가지고 존재의 초과분이라고 해요. 존재의 초과분. 내가 여기 있다. 우리는 평소에 나만 생각하잖아요. 나만 생각했는데 내가 하는 일이 좌절되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성도 같으면 뭘 생각하겠습니까? 누가 좌절시켰겠어? 아하!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여긴 분이 없는 것이 아니고 계시는구나! 주님은 살아계신 분. 주님은 나보다 더 살아계신 분. 내가 죽더라도 살아계신 분. 이걸 초과분이라고 합니다. 초과분.

 

내가 살아있을 때는 내가 내 인생을 주관합니다. 왜? 내가 내게 살아있기 때문에. 근데 그때는 초과분이 안 나타나요. 없어요. 근데 내가 열심히 살라고 했는데 일이 안 돼. 좌절돼요. 자빠지고 엎어져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니가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살아있다는 증거에요? “거봐. 니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야. 내가 살아 있잖아.” 그런데 왜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못 느끼죠? 내가 너무나 강렬하게 살아있다는 의식을 하다보니까, 눈에 보이는 내가 너무 강렬하다보니까 주님은 이 강렬한 나 살아있음에 없어진 거예요.

 

어떤 아이가 무지개를 봤습니다. 무지개를 봤을 때, 여기 한 백 명의 아이가 산과 산 사이에 걸쳐있는 무지개를 봤다고 합시다. 기분 좋으면 쌍무지개가 떴다고 합시다. 백 명의 아이가, 백 명의 아이는 뭐냐 무지개가 있다고 했습니다. 무지개가 있다. 그런데 그 백 명 중에 한명의 아이가 진짜 무지개가 있는지 가봤어요. 가보니까 없는 거예요. 단 한명의 아이가. 나머지기 아이들은 뭐냐, 내가 있다와 무지개 있다가 동시에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무지개 떠있다는 그 지점에 가보니까, 점점 나는 분명히 있는데 나 있음과 비례해서 무지개가 날아가 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가 그 무지개를 연구해서 물리학자가 됐다면, 이 중에서 계속 무지개에 꽂혀있는 아이는 몇 명이에요? 달랑 한명이겠죠. 한명. 이 애는 무지개가 있음이 나의 있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밥 먹고 사는 것보다 무지개가 어떤 것인지 깨닫는 그거 아니면 나는 밥도 안 먹겠다고 설치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 예수님의 살아계심, 성령의 활동, 다 이런 거예요. 무지개 같은 거예요. 창세기 9장에서 무지개를 왜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피워놓고 언약은 이와 같다고 했거든요. 언약은. 내가 너희에게 언약을 세우리니 무지개를 쫙 펴놓은 거예요.

 

언약은 분명히 있는데 살아보면 없어져요. 언약이 없다니까요. 그 이유가 뭘까요? 언약은 관심이 없고 내가 내 위주로 살아요. 내가 죽어서는 천당 가고 내가 밥 먹고 사는 것. 살아서는 밥 먹고 살고 죽어서는 천당 가는 것. 여기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내가 언약이 아닌데 자꾸만 내가 언약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은 날 위해서 있는 게 아닌데, 언약을 위해서 있는데, 우리는 자꾸 날 위해서 있다 보니까 주님의 살아계심, 주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일한다는 사실을 내가 자꾸 훼방질하고 있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꾸 훼방질 놓는다 이 말이죠.

 

성령이 가만둘 리가 있습니까? 성령께서 그 조치를 취하겠죠. 그래서 어떻게 조치를 취하겠습니까? 왜 언약이 우리에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처럼 하느냐? 보통 은혜 받았다고 하지요. 그 은혜가 며칠가든가요? 그거 없어지죠.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걸 반대로 가져갑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보시기에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을, 관점을 잘못가지고 있어요. 주님의 은혜가 어쩔 때는 있고 어쩔 때는 없네, 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내 관점에서 보니까 그렇게 되는데, 주님의 관점으로 보시기에는 은혜는 원래 계속 있는데, 저 인간이 은혜에 얼굴을 돌렸다 안 돌렸다 하는 거예요. 주님이 이 땅을 내려다보면.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해놓고, 헤헤거리다가 딴 데 세상에 빠지고. 주님에게 얼굴을 돌려야 될 그 인간이 세상유혹에 빠져가지고 계속 그쪽에 있다가 또 한 대 얻어맞으면 다시 “천부여 의지 없어 손들고 옵니다.” 하고 또 돌아오고. 주님보기에 누가 있다가 없다가 합니까? 인간들이 있다가 없다가 해요. 주님은 한결같은데.

 

그래서 그 작업을 누가 하느냐 하면은, 같은 있다 없다에 해당되는 게 성령이라고 했죠. 성령, 주님이라고 했죠. 세상에서는 누가 그래요? 악마가 그래요. 악마는 자신이 없는 존재인 것을 알리면서 나타납니다. 희한하죠. 자기가 없는 존재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나타났으면 없는 게 아니고 있는 게 되잖아요. 그런데 악마라는 것은 나타내요. 악마가 나타내면 인간들은 이걸 도망치든지 피하든지 숨든지 하겠죠. 인간이 악마가 나타났다고 여기는 순간 진짜 악마는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가 있는 겁니다. 너희들이 무서워하는 그게 습기 찬 집, 집값 떨어지는 이런 거. 수맥 흐르는 것 있잖아요.

 

인간은 기분 나쁜 곳에 가면 악마가 있다고 생각하고, 홀로 있으면 악마랑 같이 붙어있다고 생각하고, 밤중에 또는 원한관계에 있다든지, 공동묘지라든지, 비올 때 공동묘지는 개인택시가 안 갑니다. 이런 것. 그리고 자기 몸이 아플 때는 악마가 들어있다고 이야기하고, 집안 꼴이 말이 안 될 때, 갑자기 애가 교통사고 나면 내가 평소에 남한테 들키지 않은 죄가 많은데 주께서 이 죄에 합당한, 상응하는 벌을 내리셨다고 갑자기 깨달을 때, 인간은 거기에서 악마를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든 악마의 일은 가짜입니다. 그건 악마가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악마를 생각하게 되면 인간은 계속 무엇을 추스르겠어요? 자기 근사함을 추스르겠죠. 그게 악마가 원했던 바입니다. 끝까지. 끝까지 무의미하고, 의미 없고 가치가 없는데, 내가 악마를 퇴치하고 악마의 저주가 미치지 않으면 나는 괜찮은 존재가 되지 않겠는가, 이게 바로 곧 인간에게 잘못된 선택이에요. 인간의 선택은 미래에 괜찮은 자아상을 수립하기 위해서 지금 선택에 나서는 겁니다. 지금 내가 선을 찾아 나설 것인가, 악을 택할 것인가, 원래 선악은 언약 안에서 이미 없는 거예요.

 

없어졌는데, 악마가 작용하니까 없는 선악을 다시 도입한 거예요. 내가 나쁜 짓을 해서 집안 꼴이 이래됐다. 내가 이참에 기도원에 가서 회개를 많이 해야 된다. 회개하면 할수록 자기의가 더 높아지는데? 본인이 대견스러워서 미쳐요. “세상에! 이렇게 회개할 줄 알다니! 나 진짜 신자 같아.” 스스로 회개하면 선이 되고 회개 안 하면 악이 되겠죠. 그게 말려든 거예요. 그게. 그게 악마에게 말려들었다고요. 말려들고 하는 말이, 내가 악을 행해서 악마가 나한테 찾아왔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면 악마가 우리 집안에서 퇴치가 되어서 떨어져나갈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보세요. 무당집이에요. 제일교회는 제일무당집. 대전교회는 대전무당집. 대전중앙교회는 대전중앙교회무당집. 무당집인 이유가 거기에 오는 전부다가 악마를 퇴치하려고 온 사람들이거든요. 지가 귀신이면서 귀신아! 물러가라고 하고 있어요. 지가 귀신을 부르거든요. 귀신을 부른다는 말은 선악의 체제 자체를 불러오는 거예요. 선악의 체제 자체를.

 

내가 내 나이되어서 이렇게 아픈 것은 과거에 지은 죄가 많아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요? 무슨 죄를 많이 지었습니까? 목사 욕을 해서 그렇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을 안 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 자체가 완전히, 그런 사람 엑스레이 찍어보세요. 악마가 가득 들어있어요. 엑스레이 찍으면 전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다 악마가 도배를 해놨어요. 악마가. 악마를 강단에 세워서 목사 만들고, 악마가 거기서 아멘하고, 악마의 수하들이 은혜 받았다고 난리고.

 

한마디 말씀드릴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아니요’가 아니고 ‘예’에요. 예+ 예+ 예+ 예예예예~~~ 전부다 예스에요. 전부 다 옳은 일만이에요. 아프든지 내가 죽거나 다치거나 관계없어요. 전부 다 필히 그래야만 되는 일이에요. 그래야만. 선악체제가 아닙니다. 마땅함이에요. 마땅함. 그래야 돼요. 도대체 얼마나 더 속아야 됩니까? 얼마나 더 속아 넘어가야 돼요? 남한테 속았다고 하지 마세요. 내가 그런 사기꾼들만 요청한 거예요. 그런 사기꾼들만. 안수해서 병 낫게 해달라고.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박사교회에 있을 때 어떤 교인이 와서 새 차 샀는데 기도한번 해달라고. 1톤 트럭 머리에다가, 꼬리 말고 머리에다가 기도해서 사고 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인간이 태어날 때 그 광경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보통 요양병원에서 그런 일이 많은데, 요양병원에서 노인네들이 죽을 때 의사들이 심장 체크하는 모니터에서 선이 뚝뚝 끊어지게 되면 “어느 어르신 몇 월 며 칠 날로 사망하셨습니다.”라고 고지를 하게 되어있어요. 고지를 딱 하는 거예요. 이게 병원에서 하는데, 병원에서 하지 말고 태어날 때 해야 돼요. 우리가 태어난 것이 아니고 사망이 태어난 거예요. 사망이. 사망이 태어나고 악마의 종이 태어난 거예요. 생일축하가 아니고 사망축하에요. 사망이 출몰한 거예요. 엄마의 뱃속에서 사망이 나와서 사망으로 갔다가 사망으로 죽는 거예요.

 

이게 정상이에요. 오히려 여기에서 벗어나서 천국 가는 것이 이상한 현상이라니까요. 이게 누구의 관점이냐 하면 주님의 관점이에요. 주님 관점. 사망으로 태어나니까 결국 없어져서 죽죠. 죽으면 없어지죠. 그러니까 언약이 소개하는 이 세상은 뭐냐, 있다가도 없는 거고, 놀라운 것은 없는데도 나온다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뭐냐, 세자로 창조성이라고 해요. 창조성. 창조성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지난 오전예배를 다 이야기해야 되는데, 창세기 1장에서 2절을 설명하면서 처음에 창조 전에 흑암이 있다고 했죠. 그 다음에 처음으로 만든 것이 뭡니까? 빛을 만들죠.

 

그러면 흑암은 뭡니까? 창조성이 없는 게, 빛이 없는 게 어두움이에요. 빛이 없는 게.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은 뭐냐 하면은 자기가 만든 자기 창조성을 계속 되가져오는 게, 소환시키는 게 그게 주 업무거든요. 그래서 악마가 와서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은 죽죠. 그러면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이 빠진 것. 하나님의 창조성이 빠진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그다음의 작업은 뭐예요? 언약 작업은 뭡니까? 이 없음을, 하나님의 형상이 없음을 기정사실로, 전제로 깔고 하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있다가도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새로운 형상을 집어넣으면 없는 데서 뭐가 있습니까? 있음이 생기겠죠. 여기서 하는 작업이 뭐냐 하면은 언약작업이고, 언약작업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지금 겟세마네 동산에서 지금 기도하는 겁니다. 언약을 위해서.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죽을 것을 살리시고.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없다가도 나타나고 부활하고 난 뒤에, 이 땅에서 죽으시고 죽었는데 사흘 만에 다시 나타나시고. 결국 있는 것도 없어지고 없는 것도 있다는 그것이 예수님의 존재나 우리 성도의 존재나 공통점입니다.

 

다만 계속 살아있는 것은 뭐가 살아있다? 언약이 계속 살아있죠. 언약이. 언약이 계속 살아있고 예수님은 언약대로 이 땅에서 잠시 없어졌다가 그 다음에 다시 살아나야 될 그러한 절차가 필요하겠죠. 그리고 그 절차의 노선에 뛰어든, 거기에 초청된 사람이 누굽니까? 우리 성도죠. 성도도 바로 이 언약을 위해서, 우리가 아니라 언약을 위해서 그러한 절차를 지금 밟고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점을 여러분들이 일단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나의 기도가 뭐냐? 나의 기도의 내용은? 이것의 정답을 아는데 이걸 왜 이야기합니까? 라고 하는데, 예수님도 여기에 대해서 언급을 한 적이 있어요. 마태복음 6장에서. 마태복음 6장을 여러분들이 아시겠죠? 금식과 그저 구제와, 구제할 때는 어떻게 구제하라고 했습니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금식을 할 때는 금식을 언제 했나? 할 정도로 티가 안 나게 금식을 하라. 그 다음에 그 중간에 뭘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기도이야기 했어요.

 

기도할 때 먼저 누구의 기도를 언급을 했는가 하면은 이방인들의 기도를 언급을 했어요. 주님이 이렇게 기도를 언급한 거예요. 주님이. 있는 것을 없애버려야 있음이 나오기 때문에 있는 것을 먼저 언급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오늘날 성도지만 이 땅에 살아야 될 이유가 있음으로 살거든요. 있음인데 죽으면 없어지잖아요. 없어지고 난 뒤에 우리가 천국 가잖아요.

 

근데 이 절차를 고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힘들더라도 이 땅에서 우리가 힘들게 있어야 돼요.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악마로부터 시련 받고 이렇게 고생고생하면서 살죠. 이 땅에서 아무리 편하게 산다고 해도 산다는 자체가 고생입니다. 뭐 단풍이 좋고 어디 놀러 가면 좋다고 하지만 갔다 오면 또 피곤해요. 박카스 먹어야 되고 차타는 것 멀미나고. 그때뿐이에요. 그때 그 인상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피곤함은 누적이 되지만 그때 아름다운 광경은 뭐 사진 몇 장으로 동영상 몇 장으로, 아픈 몸으로 그거 봐야 기분이 나겠어요? 안 나죠.

 

인간이 있다는 것은 병든 몸만 있는 거예요. 그냥 죽어가는 몸만 있을 뿐이에요. 너무 자조적으로 느끼지 마시고 이게 사실이에요. 젊은 사람들은 철딱서니가 없지만. 그러면 있을 때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있느냐, 이 있음을 없음으로 가기 싫어서 자꾸 있음을 유지하는 기도를 누가 하느냐, 이게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에요.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 그럼 이방인들의 기도 말고, 그럼 예수님이 이방인들의 기도라고 했으니까, 예수님의 염두에 뭡니까? 유대인들의 기도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달라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시겠죠.

 

자, 유대인들의 기도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언약완성을 위해서 기도해야 돼요. 아예 다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게 있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뭐냐 언약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언약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죠. 언약 없이는. 언약의 완성이 메시야니까. 메시야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비어있는 자리에 “메시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 기도를 유대인들이 꾸준히 해왔고 마땅히 이스라엘이 해야 된다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물론 사람들이 와도 못 알아봤지만. 세례 요한이 그렇게 이야기해도 온 메시야를 못 알아봤잖아요.

 

그러나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기 때문에 메시야고 뭐고 없어요. 독자적인 잘난 자기만 있으면 족하다는 겁니다. 이게 이방인들의 특징이에요. 아까도 했지만 나 위주 아닙니까? 나 위주. 나만 있으면 그만이에요. 나만 있으면. 자,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야기를 해보세요. 이방인들의 기도가 어떤 기도라고 알고 있습니까? 중언부언하죠.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너희는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말라. 중언부언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니까 그 뒤에 주께서 설명을 해놨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신께서 주시옵소서.” 이게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라는 거예요.

 

한번 예를 들어볼까요? 교회에서 하는 기도는 뭐겠어요? “이 교회에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을 주시옵소서.” 이게 뭐냐, 주께서 책망하시는 이방인들의 기도에요. 자, 가정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 어느 기도입니까? 이방인들의 기도죠. 자, 내가 있다고 합시다. 내가 오래살고 행복하고 잘 되는 기도는 전부 무슨 기도입니까? 이방인의 기도죠. 그럼 좀 더 심화학습, 약간 수준을 높여서 해봅시다. 내 자식을 위해서 내가 기도하는 것은 무슨 기도입니까? 이방인의 기도죠. 왜? 남의 자식을 위해서 기도 안 했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내 국가와 내 민족과 내 나라, 앞에 내가 다 들어가죠.

 

축구할 때 우리나라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이방인의 기도입니다. 일본하고 축구하는데 일본이 한골 넣었다.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특히 요즘 시대에 큰일 나겠죠. 니는 매국노다. 일본에 가라고 돌 던지고 하겠죠. 지금 이 시대에 말입니다. 지금 전부 다 일본 안 간다고 하는데 지 혼자 대마도에 간다고 나발을 불면 그거 욕 얻어먹겠죠. 보세요. 나라는 것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어디 집단화되어 있죠. 집단화되어 있습니다. 자아의 확장입니다. 나라는 범주가 큰 범주에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다섯 살 애한테 사탕을 주면 애는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어요. 최고의 행복이에요. 근데 그 애가 나중에 50년이 지나서 한 55살이 되면, 그 애한테 사탕을 주면 이빨 상한다고 화를 냅니까? 뭐가 확장된 거예요. 자아가 확장된 거예요. 자아가. 자기 욕심이 점점 더 확장 된 겁니다. 보통 남자들이 아내한테 불만이 그거에요. 처음에는 작은 거 하나에도 만족하고 웃고 남편에게 고맙다고 했는데, 이제는 살면 살수록 요구하는 바가 점점 늘어나가지고 나중에는 남편의 능력으로서는 다 수용할 수 없는 요구조건이 나왔을 때, 차라리 집에 들어가지 말고 직장에서 잔업이나 계속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돈이라도 생기니까.

 

직장에서 집에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아내 마음을 달래줘야 하니까. 요구조건은 심하지, 너무 턱없이 요구조건이 많으니까 집구석 들어가기가 싫은 거예요. 빙빙 돌다가 새벽에 들어가서 “아는? 밥 먹었나? 자자!” 이 세 가지로 끝나버리죠. 그런 남편에 대해서 아내가 하는 말은 “당신은 결혼 한지 몇 십 년이 흘렀는데 하나 되기를 자꾸 거부하고, 당신은 당신 일을 왜 자꾸 고수하는 데만 관심이 있느냐? 나는 당신을 도와주려고 했는데 당신은 왜 나를 발로 차버리느냐?”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럼 남편이 하는 말이 “니가 나에 대해서 알아? 니가 해봐야 잔소리밖에 안 돼. 나를 믿어.” 이렇게 하거든요. 그럼 여자가 하는 말이 “믿을 만해야 믿지. 믿으라는 것만 수 백 번 되풀이 하는 멘트만 또 하고 하는데.”

 

이방인들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이게 유대인이 할 기도하고 비교해보세요. 여기는 빈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빈자리가. 그런데 이방인들의 기도는 뭐냐, 나에게 있는 그 빈자리를 채워달라는 거예요. 나를 위한 빈자리. 내 욕망을 위한 빈자리. 욕망의 결핍에서 오는 아쉬움. 뭔가 알 수 없는데, 뭔가 계속 추구하는 게 있는데, 그 추구하는 욕망을 미흡하니까 그걸 채워달라는 거죠. 예를 들어서 자식이, 딸이 좋은 대학 가기를 기도했는데 좋은 대학 갔습니다. 그러면 이방인의 기도를 멈춥니까? 또 합니까? 또 하죠. ‘이왕 좋은 대학 들어간 것, 얼굴도 못생겼는데 취직이나 잘 돼서 끗발로 중매해서 빨리 결혼시켜야 되겠다.’라는, 얼굴 못 생긴 게 자식 탓인가, 지 탓이지. 이런 의도를 가지고 계속 기도할 것을 찾는 거예요. 기도할 꺼리를.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가 기도하라고 하면 그 다음부터 교인들이 바빠요. 기도 할 꺼리를 계속 찾아내는 거예요. 그다음부터 욕심 부리는 시합에 나서는 거예요. 세상에, 금요일 밤에 7시부터 11시까지, 전에는 12시까지 했는데 코피 나서 안 되고. 7시부터 9시까지 하는데 커피 두 잔 마셔가며. 이 시간을 채우려고 하면 계속 욕심을 개발해야 돼요. “우리 애들 둘 군에 갔는데 제발 이제는 영창가지 말고 곱게 있으면서 칭찬받게 해주시고 어떻게 제대하고 나오자마자 취직자리 알아봐주시고..,” 이거 개발하는 것은 인간의 주특기인데 못할 일이 있어요? 이러다보면 방언도 가끔 터지고요. 기도 응답받은 것처럼 착각하잖아요.

 

모든 이방인의 기도는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거고요. 메시야는 인간의 욕망을 죽여 버립니다. 부정해버려요. 이 이방인의 기도로 인하여 내가 죽었다는 겁니다. 니가 하는 기도 때문에 내가 죽은 거예요.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멈출 수가 없어요. 왜? 우리는 지금도 육신의 기도를 할 수밖에 없어요. 기도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기도밖에 없어요. 내 욕망이, 내 욕심이 나를 가만두지를 않아요. 지금은 뭐 딸을 위해서 기도 안하죠. 딸에게 무슨 일이 있어보세요. 대박에 딸을 위해서 기도하죠. 이거 뭐 금방 나오죠.

 

인간의 존재는 자극하면 그다음에 반응을 나타나게 되어 있거든요. 존재라고 하는 것은 내 육체만 존재가 아니에요. 내 딸과 아들이 내 존재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러면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이 들리게 되면 교회 예배드리다가도 뛰쳐나갑니다. 예배시간에 설교 안 들어와요. “어떻게 됐는데? 그래, 내가 가볼게.” “엄마! 교회 아니가?” “지금 교회고 뭐고, 뭐가 중요해? 우리 아들 아픈 게 중요하지.” 이미 아들이 남이라도, 다른 육체라도 내 자아의 확장이기 때문에 자극받으면 바로 나타나고 그 반응은 이방인의 반응이죠. 가면서 그냥 가지 않아요. 운전하면서도 ‘주여, 주여, 내가 회개하오니, 주님도 쫀쫀하지. 그때 십일조 반만 냈더니만 그걸 문제 삼고 주님도 뒤끝이 세다. 그걸 문제 삼아서 내 아들을 조집니까? 이제 회개하라고. 알겠습니다. 회개할 거니까 아들하고 어떻게 빅딜 합시다. 십일조마저 채울 테니까, 작정한 것 마저 채울 테니까 아들 살려주세요.’

 

이게 지금 누구하고 거래하는 거예요? 악마하고 거래한 거잖아요. 모든 게 ‘예’인데, 오늘 제목을 ‘예’라고 할까? 모든 게 ‘예’거든요. ‘아니요’는 누구만 하라 이 말이에요? 예수님만 ‘아니요’라고 하게 하세요. “할 수 있거든 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아니요’는 예수님만 알고 있는 ‘아니요’고 우리는 ‘아니요’가 뭔지도 몰라요. 예수님만 ‘아니요’한 것이 ‘아니요’고, 그 예수님이 그 ‘아니요’를 처리했다면 우리 성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겁니다. 선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져야 돼요. 달라져야 됩니다. 우리 힘으로는 못 고쳐요. 주께서 박살을 내야 돼요.

 

기도해놓고 그 기도가 왜 응답이 안 되고 좌절이 되는지, 더구나 내 선택이, 내가 공들인 선택이 한꺼번에 응답이 되지 않고 무의미하게 날아가 버릴 때, 다시 한 번 나라는 것이 무가치하다는 것. 실없는 농담으로 살아온, 내 일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자체가 시건방진 일이에요. 내 일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것은 반드시 선과 악의 체제가 동원됐기 때문에 고민하거든요. ‘그때 내가 좀 착했으면. 내가 너무 악했나.’ 선과 악이 이미 거기에 말려들었다는 말은 악마의 꼬임에 말려들은 거예요. 주께서는 발목 확 잡아당기죠.

 

선이 어디 있고 악이 어디에 있느냐? 내가 일한 것이 선이고 바로 내가 일하지 않은 것이 악이죠. 새 언약에 있어서는. 이미 십자가로서 저주가 없는데 왜 자꾸 저주를, 저주를 의식한다는 자체가 그동안 엉뚱한 기도를 해왔다는 그 증거잖아요. 결국 주님의 기도의 응답은 뭐냐 하면은 우리가 엉뚱한 기도만 한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그 자체가 주님의 기도의 응답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주께 감사해야 돼요. ‘아, 내가 수준이 이거밖에 안 되는구나! 주님은 고민거리도 아닌데, 내가 알아서 내 문제에 대해서 지레짐작 벌벌 떨면서 고민하고 있구나! 이것 때문에 주께서는 그 잔을 마셔야 되는구나!’

 

우리를 구원 안 하려면요, 그 잔을 안 마셔도 돼요. 주님께서 쓴 잔을 마셨다는 말은 주님 홀로 구원받으려고 한 게 아니고, 바로 내 문제 때문에 벌벌 떨고 있는 나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께서 쓴 잔, 십자가를 졌잖아요. 십자가를 지신 게 쓴 잔을 마신 거잖아요. 이미 마셨어요? 안 마셨어요? 마셨으면 이미 끝났네. 모든 게 예스네요. 제가 주일 낮에 이야기했죠. 분쟁의 소지는 이미 끝났다고요. 내 인생에 대해서 왈가불가할 그걸 자꾸 문제 삼지 마세요. 이 분쟁은 이미 끝났어요. 이미 구원받았는데, 다 이루었는데요. 뭘. 근데 왜 자꾸 분쟁을 내가 일으킵니까?

 

우리가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어요? 십자가에서 눈 돌려버리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남은 잘 사는데 나는 못 산다. 남은 만사가 형통한데 나는 왜 이래되느냐, 타인과 비교하고 눈을 돌려버리니까, 십자가에서 눈이 돌아가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안과에 가든지, 뭐 교정을 받든지. 똑바로 십자가만 증거 하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만. 그 십자가는 믿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다 이루었다는 뜻이고 십자가의 효과로서 내가 어설프게 산다는 것, 없어져야 될 것이 맞구나! 늙어죽는 것이 맞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이 젊을 때는 화장을 해도 살아요. 그러나 늙어버리면 어디부터가 뺨인지 어디부터가 눈인지 몰라요. 왜? 이게 주저앉아버렸으니까. 무너졌으니까. 무너져버렸으니까 이걸 억지로 눈썹을 그려줘야 이게 옛날에 눈썹이 있던 자리인가가 그때 드러나요. 입술을 빨갛게 그려줘야 여기까지는 입술이고 여기는 입술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고요. 전부 다 근육이 하나로 무너져 내린다니까요. 석고 물에 녹듯이. 지금은 그렇지만 나중에는 정신도 무너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 때부터 비참하라고 태어난 인생, 엉뚱한데 마음 두지 말고,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는 것이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기쁨으로 날마다 새롭게 솟아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