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선물,사단의 구멍 1911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1. 29. 07:08
2019-11-26 21:57:04조회 : 132         
사무엘상 54강(선물), 마태복음 116강( 사단의 구멍) 191126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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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19-11-28 18:16 
대전-54강 사무엘상17장47절(선물)20191126-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7절요.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이게 골리앗과 싸움이야기입니다. 이 싸움이 이상해도 많이 이상해요. 참 많이 이상해요. 왜냐하면 이런 싸움이 이 세상에 없어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 싸움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싸움입니다. 이 세상에.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게 반복이 안 되잖아요. 반복이. 키가 3미터가 넘는 사람과 어린 소년이 싸워서 우연히 이길 수는 있어요. 근데 반복해서 이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반복되지 아니하면 이건 뭐가 아니냐 하면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라는 것은 그게 맞아, 그게 맞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에 그게 또 그렇게 돼야 돼요. 이게 소위 수학공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해서 생긴 거거든요. 이 공식을 누가 만든 거예요? 인간이 만든 거잖아요. 인간이 생각한 진리라고 하는 것은 반복이 가능해야 해요. 동일한 원인을 주게 되면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이럴 때 뭐가 성립이 되느냐 하면은 믿음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싸움이 반복이 되던가요? 그다음부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부 다 칼과 창을 다 버리고 짱돌 들고 설치던가요? 그것도 어른들은 다 쉬고 애들만 골라서 전쟁에 나갔던가요? 아니죠. 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무엇을 치는 싸움인가 하면 다윗이 골리앗을 치는 싸움이 아니고, 그걸 쳐다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세상이 하나님 앞에 수긍될 수 없는,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이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세상에 싸움이라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정당싸움도 있지만, 나라싸움도 있지만, 모든 인간은 아침에 눈만 뜨면 안 싸우고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부부싸움부터 시작해서 자식싸움으로 해서 싸움을 안 하고 지나간 적이 없어요. 그 모든 인간의 싸움을 공식화시킨다면 이렇습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 이 나 사이의 싸움이에요. 나 사이의 싸움.

 

내가 과거에 이렇게 했지만 지금은 더 나아져야 해, 라는 고집이 있잖아요. 나는 무엇이 있어야 되고 자랑거리가 더 많아져야 된다는 싸움입니다. 지금이 과거보다 더 많아져야 된다는 싸움. 미래는 지금의 나보다 더 많아져야 된다는 싸움. 이 싸움에 누굴 희생물로 해서 싸우느냐 하면은 타인들, 식구들이죠. 타인들을 공격해서, 그 공격하는 목적은 과거보다 더 나은 나를 수립하기 위해서. 수립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이런 말로 하면 돼요. 재구성하기 위해서. 인간은 날마다 자기를 재구성합니다. 재구성한다는 것을 수학으로 이야기하면 플러스(+)가 되겠죠. 계속해서 더 좋은 점을 플러스하죠.

 

근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성경이 가는 것은 플러스로 가면 안 되고, 그쪽 노선으로 가면 안 되고, 플러스의 반대가 뭐겠어요? 빼기(-)죠. 빼기로 가야 돼요. 왜냐하면 인간들의 그 결과는 어차피 파멸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결말은 파멸이에요. 제가 이 점을 보완적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죽음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은 숨 끊어진 것, 이걸 죽음으로 봐요. 성경에서는. 이거는 뭐 우리도 마찬가지로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두 번째는 뭐냐 하면은 심판받는 것, 저주받는 것, 이걸 죽음으로 보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한 것에는 이 두 가지가 다 들어있어요. 둘 다. 창세기 5장에 아담이 자식을 낳고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음이 두 가지라는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고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 다음에 질문이 있어서 그래요.

 

생명이 무엇인가? 자, 죽음과 생명은 반대잖아요. 그러면 죽음이 두 가지라고 하면 생명은 뭣 가지겠어요? 마찬가지로 두 가지가 되겠죠. 첫째는 오래 사는 것을 생명으로 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뭡니까?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 저주에서 벗어나서 복을 받는 것. 이게 생명이겠죠. 이 죽음과 생명을 한꺼번에 다 보여주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부활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부활과 둘째부활이 있어요. 그러면 죽음도 뭐가 되겠어요? 첫째죽음이 있고 둘째죽음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지금 내 이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시려거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그리고 성령이 오셨다는 사실을 근거해보면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아까 제가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이 이 세상에 없다고 했죠. 그러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죠.

 

공동묘지에 묻어놓고 며칠 후에, 사흘 후에 살아나는 것을 확인해볼 자식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편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한번 살아나나 보자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거는 신천지 이만희나 그런 소리하지, 딴 데는 그런 소리 안 하거든요. 죽고 난 뒤에 부활한다는 소리를 했던 모양인데.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을, 만약에 그 사람이 성령이 없는 사람, 성령을 안 받은 사람 같으면 두 번째는 생각 못하고 첫 번째 죽음만 생각하기 때문에, 생명도 첫 번째 생명만 이해하는 거예요. 오래살고 싶어 하는 것, 이걸 불멸성이라고 합니다. 불멸성.

 

성경에서 엘리제사장을 들어보신 적이 있죠? 사무엘상 4장에. 홉니와 비느하스의 아버지. 그 사람이 죽을 때 연세가 어떻게 됐느냐 하면은, 그건 나이가 아니에요. 연세에요. 98세였습니다. 두 살만 더 채웠으면 백 살 채우는데. 그 사람이 죽을 때 비참하게 죽죠. 뚱뚱해가지고 엎어져 자빠져서 죽죠. 그러면 그 사람의 말로가, 그 사람의 끝이 그 사람의 본질을 말해주는 거예요. 그 사람의 끝이. 그러니까 중간에 기차의 객차가 길다고 해서 타면 안 돼요. 어디로 가는 기차냐를 봐야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지금 니가 어느 편이냐를 묻는 겁니다. “니 지금 어느 편이야?” 이거 현대인들은 굉장히 기분나빠합니다. “나는 내 편이야.” 이걸로 끝나요. 니가 어느 편이냐를 묻는 것 자체가 니는 니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밑에 깔고 하는 거예요. 니는 어느 편을 먹어야 되지, 홀로 노력하고 몸부림친다고 해서 무슨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깔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 어느 편이야?” 근데 현대 젊은이들부터 해서 사람들에겐 어느 편이 없어요. 누굴 위해서 삽니까? 자기를 위해서 살면 끝나는 거예요. “니 시댁편이야? 친정편이야?” 이것도 옛날이야기에요. “나는 내 편이야. 내가 꼭 누구 편이어야 해? 이거 말도 안 돼! 나는 누구 편먹기 위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야.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가.”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의 의미는 바로 여기서 나오는 거예요. “니 다윗편이야? 골리앗편이야?”라고 묻는데, 문제는 다윗편이고 골리앗편이고 간에 이런 전쟁은 이 세상에서 찾을 길이 없다는 거예요. 마치 십자가를 찾을 길이 없듯이. 다시 이야기할까요? 반복되지 않으면 뭐가 아니다? 진리가 아닌 거예요. 반복되지 아니하면.

 

어떤 목사가 기도했는데 암에서 나았다. 암4기인데 나았다. 개 구충제 안 먹어도 나았다. 또 암인데 그 목사는 또 나았다. 두 번은 뭐 우연히 되겠지. 그런데 세 번 네 번, 한 일곱 번 나았다. 그러면 그 목사 뜨죠. 왜 반복이 되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진리는 반복이 됩니까? 안 됩니까? 반복이 안 됩니다. 반복이 안 돼요. 왜냐하면 이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은 어떤 인간과 엮여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인간과 엮여서는 안 된다는 말은 어떤 인간도 예상 밖이어야 한다 이 말이죠.

 

마치 무엇이 예상 밖인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상 밖인 것처럼. 왜 예수님께서는 예상 밖의, 인간들이 생각 못하는 이런 아이디어를 제공했을까요? 인간들은 이미 믿음도 아닌데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그 인간은 누굴 믿는가? 자기가 예상한 것을 믿죠. 자기가 예상한 것을 믿는 것을 가지고 다윗과 골리앗에서는 누구편이냐 하면은 바로 골리앗편입니다.

 

오늘 본문 다시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무엇과 무엇에 있지 아니합니까?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한다 했죠.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고 그냥 결론을 내리면 되는데, 왜 ‘~가 아니요’라는 것을 선행하느냐 하면은 인간이 평소에 의지하고 있는, 이걸 다른 말로 믿음직하게 여기고 있는, 여기에서 칼과 창이죠. 칼+창, 이걸 한마디로 말하면 힘이죠. 힘. 거기다가 골리앗은 덩치가 크죠. 덩치가 크면 거기서 많은 완력이 나오겠죠. 모든 게 힘이에요.

 

젊은 아가씨한테 키 150되는 남자하고 결혼할래? 키 180되는 남자하고 결혼할래? 라고, 묻는 내가 잘못이죠. 그래도 아무리 못나도 키 180이라는 힘이 있잖아요. 보호해줄 수 있어요. 키 150이 되가지고 깡패만나면 얻어터지기만 하고 어디 마음에 들겠어요. 지가 보호해야 되니까. 지가 보호해야 할 판이니까. 여자는 보호받으려고 결혼하는데. 그렇게 보면 박찬숙이 결혼한 게 참 신기해요. 농구 대표선수. 키가 190이 되는데 누가 오겠어요. 서장훈이나 와야 되지. 그걸 보통 덩치가 크다고 하죠. 사위를 보는데 키가 150이다. 어느 어른도 그걸 듬직하다고 보지 않아요. 뭐 작은 고추가 맵다, 실속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왕 실속 있는 것 커서 실속 있는 것이 더 낫겠죠.

 

여기 하나님께서 키 큰 것하고 꼬마하고 유치한 전쟁을 붙여놨다는 말은 지금 우리의 예상을 뒤집는 거예요. 단순히 뒤집는 정도가 아니고, 니 어느 편이야?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아! 키 큰 골리앗을 겁낸다는 그 자체가 너는 어느 편을 먹었냐는 겁니다. 골리앗과 한패라는 겁니다. 골리앗과 한패. 골리앗과 한패 되었기 때문에 골리앗이 큰소리를 칩니다. 이게 성경에 보면 나와요. “야! 복잡하게 가지 말고 일대일로 붙자! 일대일로 붙어가지고 이긴 쪽이 다 갖자.”라고 큰소리 칠 때, 그 이스라엘 어른들은 왕부터 해서 바들바들 떨었죠.

 

그게 뭐냐 하면은 공포입니다. 공포. 공포에요. 공포는 뭐냐 하면은 힘에 주눅들어있었다. 힘에 주눅들어있었다는 말은 뭐냐, 평소에 힘을 사모했다는 뜻이에요. 아휴, 나도 돈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만약에 아들이 결혼하는데 딸 집안이 한 30억이 된다. 한 50억이 된다. 50억이 되는데 당신 아들을 달라고 하면 갑자기 공손해지고 이 혼인이 파토 날까봐 벌벌 떨고, 상견례 할 때도 있지도 않는 아부나 재롱이 나오고, 그렇게 해서 아들을 여자한테 장가보내는 것이 아니고 50억에 장가보내는 거죠. 그게, 그걸 두려워하고 떨고 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걸 선망했고 원했던 거예요. 이 힘을.

 

제가 문장을 적어볼 테니까, 여러 번 해봅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 이것이 나의 무기다. 내가 의지하는 것이 무기에요. 혹시 자식을 의지하십니까? 자식이 무기가 되죠. 어디에 가도 지 자식 자랑하니까. 근데 여기에 반전이 있어요. 그게 나의 약점이다. 그게 약점이에요. 이거 무너지면 나는 죽으려고 해요. 살 의미가 없어요. 내 무기에다가 몽땅 다 의지했기 때문에. 나무를 의지하다가 나무가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이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인간들은 골리앗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아무리 홀로 서려고 해도 너희들은 어떤 골리앗 같은 존재를 기대하고 있었고 고대하고 있었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 이스라엘은 예상했던 이 골리앗 자리에 뭘 집어넣었었습니까? 하나님을 집어넣었었거든요. 근데 그 하나님이 나중에 보니까 뭐였습니까? 골리앗으로 등장하는 엉터리 하나님이었어요. 이걸 두자로 하면 인간은 거짓입니다. 인간도 거짓이고 인간세상도 거짓이고. 다 거짓된 거예요. 전부 다 거짓된 거예요.

 

이스라엘은 누구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것이죠. 하나님의 것인데, 막상 이스라엘을 조사해보니까 뭐로 가득 차 있었다? 뭐로 집합되어 있었다? 거짓된 것들의 집합이에요. 인간의 힘으로 이스라엘이 운영이 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원래 이스라엘대로 될 수가 없죠. 여기에 무슨 조치가 있어야 되겠죠. 조치가 있어야 하려면 거짓된 인간들이 예상한, 잘못되게 예상한 것들을 엎어야 되겠죠. 그 엎는 계기, 사건이 뭐냐 하면은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입니다.

 

사사기 16장을 한번 봅시다. 사사기 16장 6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컨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들릴라, 영어로 하면 딜라일라가 돼요. 딜라일라. 딜라일라 하면 여러분들도 아는 그 유명한 탐 존스 노래에 나오죠. 창가에 앉아서.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컨대 당신의 큰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그러니까 남자를 남자로 보지 않고 무엇의 대행처로 보느냐 하면은, 그냥 남자가 아니고 힘 있는 여기에 강조점이 있고, 힘 있는 남자니까, 남자를 존재로 바꾸어버리면 남자란 여자에게 있어서 힘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힘 있는 존재.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아요. 힘을 사랑하지. 뭐 딱 나오는 공식이 아닙니까? 뭐 복잡한 거 없죠. 돈의 힘, 권력의 힘, 조국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힘.

 

사사기 16장 9절에 보니까, “이미 사람을 내실에 매복시켰으므로 삼손에게 말하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미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그 칡 끊기를 불탄 삼실을 끊음같이 하였고 그 힘의 근본은 여전히 알지 못하니라” 그 힘의 근본은 그 다음에 뭡니까? 여전히 알지 못했다. 야! 이게 성경이 아닙니까? 들릴라와 블레셋, 이스라엘의 적은 한패에요.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적은 골리앗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 적들의 공통점이 있네요. 똑같이.

 

그건 오늘날 우리들에게 뭘 이야기해요? 너희들은 지금 하나님이 너희들의 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진짜 하나님은 너희들을 적으로 본다는 거예요. 이 성경은. 지금 우리들을 적으로 봐요. 우리는 또 적다운 면모를 또 보이고. 성경 전체가, 인간이 창세기 3장에서 생명나무에서 쫓겨날 때부터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적입니다. 적인데 그걸 누가 모르느냐 하면은 인간들이 몰라요. 정말 이거는 답답한 거예요. 교회 와서 하나님이여! 이러고 있다는 말이죠. 적인데. 적인데 한패인줄 알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 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편이에요. 우리가 뭐 잘났다고 자기편을 삼아요. 우리를. 우리를 사랑한다고요?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요. 주님을 사랑하지. 자기 아들이니까. 예수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사랑의 대상이 될 수가 없어요.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우리를 선택할 때도 그냥 선택하지 않아요. 사랑의 포클레인으로 잡아요. ‘주 안에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주 안에서. 이 말은 주 안에서를 빼면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예수님을 위해서 구원했지 니 구원하려고 주님이 계신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지난주일 낮 설교 생각이 나네요. 우리의 구원은 없고 누구의 구원밖에 없다고 했습니까? 예수님 구원밖에 없어요. 그런데 신천지부터 시작해서 모든 한국교회 구원파들이, 교회가 상품으로 제공한 게 뭡니까? “당신 이렇게 하면 당신 구원 받는다.”라고 하잖아요. 그게 성경에 없다 이 말이죠.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적인데, 내치고 싶어 하지 우리를 거두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디서 이상한 하나님을 들고 와가지고 교회라는 장사를 하고 있어요. 영업을 하고 있다고요.

 

“하나님은 우리의 적입니다.”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들어본 적이 있어요?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 교회 간판부터, 교회입구부터 해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붙어 있잖아요. 이거 뭐, 하나님은 안달 났어요. 그렇게 사랑할 것 같으면 지옥을 만들지 말든지. 여호와증인처럼. 지옥 만들어놓고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지옥을 없애버리면 깔끔하게 사랑이잖아요. “그거는 니가 실수할 수 있지. 선악과 따먹었다고. 아이고, 뭐 인간인데 실수하지. 하나님이면 실수하겠어. 봐줄게.” 이러면 문제가 깔끔하게 끝날 문제가 아닙니까?

 

골리앗의 키가 3미터 같으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하나님 쪽에서는 한 5미터 되는 거인을 내세우면 문제가 깔끔하게 끝날 문제에요. 저기에서 창 들고 왔다면 여기는 기관총 들고 올 수도 있는 문제라 이 말이죠.

힘에는 힘. 이게 우리들이 믿고 있는 무기기 아닙니까?
이게 우리들이 의지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한테 물어봅시다.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 믿습니다.”
“어떤 예수요?” “힘 있는 예수.”
이게 바로 지옥 갈 사람들이에요. 전부 다.
교회라는 자체가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를 살피는 그게 아니고
교회 왔다는 것으로 무슨 힘을 더 축적하는, 플러스가 되는 무슨 일인 줄로 생각했어요.


 

아까 강의에서 뭐라고 했어요? 인간들은 뭘 원한다? 플러스를 원하죠. 플러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플러스가 아니고 빼기(-)에요. 인간은 소멸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어가고 있고, 첫 번째 죽음으로 숨 끊어지고. 두 번째는 뭡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뭐가 있다? 심판이 있다. 죽음이 두 종류가 맞잖아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두 개 다가 처리가 되는 겁니다. 그냥 안 죽으려면 코에 호스 꽂으면 돼요. 그런데 그것은 저주스러운 불멸인데, 그것은 어디서 하느냐 하면은 지옥이 이거 전문담당이에요. 지옥은 일종의 요양병원이거든요. 죽은 시체, 하나님 내가 죽였다는 것을 영원토록 보여주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내가 죽였다.

 

그리고 제가 설교시간에 그랬죠. 이 세상이라는 곳은 지혜라는 포클레인으로 파보면 뭐가 있느냐, 지옥이죠. 근데 지옥 위에 세상이, 지옥의 창문이 다 열려가지고 지옥의 기운이 그대로 세상을 뒤엎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여러분들이 아신다 치고, 자 그다음을 해봅시다. 자,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상대해요. 그 싸움 현장에서 골리앗이 몇 명을 상대합니까? 단 한명이죠. 단 한명. 이 단 한명이 소년 다윗인데, 한명이 나설 때에 여기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부 다 말렸죠. 말렸다 이 말이죠.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거는 단 한명과 다수가 여기서 결별되는 거예요. 끊어지는 거예요. 끊어진다 이 말이죠. 이쪽 골리앗은 블레셋 전부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도 골리앗 단 한명이에요. 단 한명. 결국 전쟁의 승패, 전쟁의 승리, 결말은 여럿이 달려드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몇 명만 필요해요? 단 한명이죠. 단 한명. 사도행전 4장 12절에 나오죠.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다른 이름으로. 여기 다른 이름 가운데 내 이름이 포함이 됩니까? 안 됩니까? 당연히 포함이 되죠. 다른 이름 가운데에는. 당연히 포함이 되죠. 당연히.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한테 발길로 차이는 거예요.
침대가 이렇게 있는데 그 침대에는 딱 한 사람만 누우면 딱 맞는 침대에요.
예수님이 눕고 싶어서 올라오면 어떻게 합니까?
누워있는 한 사람을 발길로 차버리는 거예요. 한 사람만 눕는 거예요.
한 사람만 눕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 옆에 눕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할 때는 그냥 옆에 누우면 안 되고 우리가 죽어야 됩니다.
죽은 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있어요. 죽은 자로서.


 

열두 사도들이 있는데요. 사도바울까지 포함하면 열 세 사도가 있는데. 이 사도들이 평소에 사도행전에서 일할 때에 본인들이 살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주님이 살았다고 생각합니까? 주님이 살았다고 생각하죠. 이게 하나의 겸손일까요? 아니면 그렇게 억지로 마음을 다잡는 겁니까? 아니면 실제입니까? 이게 실제가 되는 이유가요, 사도바울이나 베드로나 이 사람들이 어디에 주력하느냐 하면은 옥에 가있거든요. 옥에 갔을 때에 옥문을 누가 열어줬습니까? 베드로 옥문을 누가 열어줬습니까? 베드로 지가 맥가이버 칼 들고 열었습니까? 누가 열어줬어요? 천사가 열어줬죠.

 

스데반 집사가 예수님 만나서 구원될 때에 스데반 집사가 이렇게 폴짝폴짝 뛰었습니까? 아니면 누가 구원해줬어요?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에 예수님이 일어서서 스데반을 반겼죠. 결국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일관성이 있는 이야기 한 가지는 뭐냐 하면은 “지금 주님이 살아계시고 우리를 건진다.” 그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사도들이 욕을 얻어먹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골리앗과 다윗의 전쟁은 반복되지 않잖아요.

 

사도들이 하는 이 이야기가 지상에서 과학적으로 수학적으로 증명이 된 적이 없어요. 증명이 안 됐으면 사람들은 뭐가 안 되느냐 하면은 진리로, 진실로 간주가 안 되고, 간주가 안 되면 믿음의 대상에서 이게 빠지는 거예요. 믿지 못할 것을 믿는다는 말은, 이 믿음은 내 믿음이 아니고 주께서 따로 챙겼던 세팅된 믿음이 왔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내가 믿지 못할 것을 믿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믿지 못할 것을 믿는다는 말은 내가 믿을만한 것은 전부 다 하늘나라에서 배제하고 제외시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내가 믿을만하다고 할 때에 그것은 뭘 전제로 하느냐 하면은 여기 내가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 내가 있는데 어떻게 있느냐 튼튼하게 있어줘야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아까 강의한 것을 다시 해보면, 과거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좋아져야 한다고 할 때, 뭘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나는 항상 든든해야 된다. 이거는 첫 번째 죽음을 의식해서, 또 생명에서 첫 번째 생명, 나는 어떤 식으로든 불멸해야 된다. 그런 오기라는 것이 있어요.

 

나이 98세보고 “아이고, 할아버지 참 오래 사셨으니까 돌아가셔도 괜찮죠?” 이러면 귀싸대기, 그것도 힘없는 귀싸대기 맞아요. “니가 나 사는데 보태준 거 있나?” 이래가지고 때린다니까요. 98살 살았다고 죽는 것을 좋아하는 거 봤어요. 98년 동안 내내 반복했던 것, 오늘도 살고 싶다. 내일도 살고 싶다. 더 멋있게 살고 싶다. 98세 때 내가 여자 한번 만나서 결혼하고 싶다. 청춘을 돌려주고 싶다. 이런 식으로.

 

다윗 빼놓고 여기 운집해서 구경하고 있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은 다윗 빼놓고는 생각이 동일하다는 겁니다. 나머지기 사람은. 똑같아요. 똑같으니까 우리가 여고동창생입니다. 똑같으니까 동창회하고 똑같으니까 친목회하는 거예요. 똑같으니까 교회 만드는 겁니다. 사고방식에 타협이 없으니까. 내 평소에 믿는 것 니도 믿으니까 우리 믿음은 통한다. 이래 나오는 거예요. 우리 믿음은 통한다. 통하죠. 각자 서로 이용해가지고 지 잘 되겠다는 그 믿음. 인간치고 그런 믿음이 없는 사람이 없어요. 니는 죽고 나는 살자. 속으로 그런 생각 안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개도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사도가 옥에 갇혔을 때에, 주일학교설교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옥이 호텔이 아니잖아요. 실제로 예루살렘에 가봤거든요. 옥에. 지하 감옥에 가봤다 이 말이죠. 베드로 갇힌 감옥에. 불편해요. 호텔이 아닙니다. 샤워장 있고 뭐 그런 거 없거든요. 그런데 베드로가 얼마나 잠을 깊이 잤는지, 이거 뭐 호텔에 온 거보다 더 깊이 잤어요. 천사가 깨울 정도로, 그것도 흔들어 깨워줄 정도로 깊이 잠이 들었어요. 무슨 배짱이 그런 배짱이 다 있어요.

 

자, 그럴 때 베드로는 뭘 생각하지 않아요. 과거의 나보다 더 진보된 현재의 나. 현재 진보된 미래의 나. 이 고리가 베드로한테 있다? 없다? 이 자체가 없죠.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할 필요가 없죠. 옥에 누가 집어넣었습니까? 주께서 집어넣었잖아요. 이거 참 말은 쉽습니다. 정말 말은 쉬워요. 주께서 베드로를, 베드로는 괄호를 치고, (베드로)를 옥에 집어넣었다.

 

이 괄호에다가 베드로를 빼고 우리 자신을 집어넣읍시다. 주께서 나를 옥에 집어넣었다, 라고 할 때에 잠을 못 이루는 이유는 앞에 주님을 빼버리고 주님 자리에 인간들이 들어서고 말았어요. “인간들이 나를 옥에 집어넣었다. 괘씸한 놈!” 이게 평소의 우리의 믿음체제에요. 현실원칙으로 이걸 잡고 있었던 겁니다. 현실에 작용하는 원칙. 현실의 원칙. 현실의 원칙은 주님은 간 데 없고 인간들과 인간들의 집합이죠. 그래서 이 가운데서 인간들의 싸움, 누구의 싸움? 나의 싸움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은 이게 누구의 전쟁이냐 하면은 나의 전쟁이 아니고 여호와의 전쟁이죠. 아, 이거 참 믿음이 끝내주는 믿음이죠. 내가 존재하는 게 나를 위한 존재가 아니고 주님의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하루하루의 삶입니다. 아, 이거 주일학교 애들한테 시험 치면 이거 시험 백점 맞을 거예요. 백점 맞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음은 안 그러는데. 너무 어렵다고 하는데. 교사부터도 안 그러는데. 이거 보세요. 얼마나 골리앗과 다윗의 전쟁이 십자가처럼 우리를 찌르고 있습니까? 십자가처럼. 십자가를 인간의 능력으로 믿을 없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죠? 십자가는 우리 믿음의 내용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아까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뭐가 된다고요? 적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적입니다. 하나님이 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돌아가셨거든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알아서 죽는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죽음 이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너희에게 나타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꾸 살아있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이 땅에 와서 죽는, 그것도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 때문에 죽는, 우리의 근사함과 우리의 건재함과 내가 나다움을 고집하기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거든요. 하나님이라도 나는 나를 포기 못한다. 나는 미래의 더 나은 나를 포기 못하겠다. 이런 고집스러움 때문에 죽으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적이라면 여기서 뭐냐? 적이 있다는 말은 무슨 중이다? 전쟁 중이다. 전쟁 중.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은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아까 반복이 안 된다고 하지만 영적으로 이미 반복이 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몰라서 그런 거예요.

 

그 전쟁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니는 어느 편에 설래?”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편이 없는데. 나는 내 편인데, 자꾸 묻기를 “니 골리앗편이야? 다윗편이야?”라고 물어요. 우리는 말합니다. “골리앗도 아니고 다윗도 아니고 나는 내편이고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이렇게 하지만 막상 일을 벌여가지고 무대에 올려놓고 보니까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 편이었다? 골리앗 편이었던 거예요. 소년 다윗이 이길 줄을 생각도 못한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용서할 줄을 우리가 사전에 예상도 못한 일이에요.

 

그래서 구원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중요하기 때문에 빨간 것으로 합시다. 선물이에요. 선물. 선물이라고 하는 것은 달라고 해서 받은 것이 아니고요. 그거는 노동이 되기 때문에. 선물은 난데없이 주어진 거예요. 이 선물보다 더 소중한 선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 온 천하를 얻고도 니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하시죠. 하나님의 선물을 준 거예요. 선물을.

 

그러면 다시 묻습니다. 선물이 중요합니까? 내가 중요합니까? 선물이 중요하죠. 선물이. 다윗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기에 계셔서 하나님이 골리앗을 이겼다는 점이 다윗 자기가 이긴 거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선물이죠. 이해가 되시죠. 그럼 이 선물을 다른 말로 제가 바꾸겠습니다. 그래도 이해가 되시는가 한번 보세요. 선물=우연, 선물을 우연으로. 선물하니까 이해가 됐는데 갑자기 우연하니까 좀 난해하게 느껴지잖아요. 우연. 우연히 만난 거예요. 우연히. 기도해서 응답받았다는 이런 거 없어요. 우연히 온 거예요. 우연히.

 

우연히 왔다는 말은 우리는 항상 우연을 생각 안 하고 뭐만 생각했다? 필연. 다시 말하면 내가 이렇게 원인 제공하면 예상되는 결과가 주어질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뭐가 있느냐 하면 주체성이 형성되어 있어요. 주체성이. 우리의 자아성이 형성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나한테 손해 보는 것은 배제하고 이익 되는 것만 챙기고. 타인을 만날 때 내 이익 되는 사람만 만나고. 이게 뭐냐 하면 다 필연이에요. 내 머릿속에서 필연만 나와요. 필연만 나온다는 이게 나의 주체, 나라고 하는 것, 나의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게 필연덩어리입니다. 필연덩어리. 오늘 제목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선물만 우연이 아니고, 선물이 오면서 니가 지금껏 필연으로 살아왔던 모든 것들을 뭐로 전환시키느냐 전부 다 우연으로 전환시켜버립니다. 우연으로. 다윗이 태어날 때부터, 다윗이 7살일 때, 다윗이 10살일 때, 양 키울 때, 다윗이 우연히 곰을 이길 때, 사자를 이길 때, 다윗이 우연히 돌팔매질을 한다는 생각부터, 이게 전부 다 다윗의 노력이나 다윗의 뛰어남, 총명함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우연에서 거꾸로 이렇게 전개된 겁니다. 거꾸로 이렇게 방사된 거예요.

 

결정적인 이 우연의 사건으로 바꾸어나가기 위한 사전조치로서의 우연의 사슬고리였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생이라는 것은 필연이에요? 우연이에요? 살아가는 것이? 살아가는 것은 우연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을 무서워하지 마세요. 죽는 것도 예상 밖에 우연히 죽기 때문에. 우연히 암 걸렸고 우연히 4기였고 우연히 죽었고. 세상에 우연이 아닌 것이 없죠.

 

그러면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은 무엇과 무엇의 싸움이 되겠어요? 우연이냐? 필연이냐? 어느 것이 진리냐? 우연의 특징은 내가 원인을 제공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우연이에요. 내가 일한만큼 얻어진다는 그것은 골리앗의 세계나 진리로 통하죠.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믿음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믿음이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내가 믿으니까 믿는 나를 넣어달라고 떼쓰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잘 따르고 끝까지 목숨 바쳐서 따르겠다고 장담했죠. 그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 번씩이나 부인했죠. 그때 베드로가 닭이 울 줄로 생각을 했어요? 못 했어요? 예수님의 말은 생각하다가 기억도 못했죠. 자기가 배신하고 난 뒤에 장닭(수탉의 방언)이 울되, 꼬끼오~~ 하고 우는 거예요. 지금 우리 집 밑에 할아버지가 닭을 키우는데, 맞은 편 아파트에서 민원이 들어와요. 암탉은 괜찮아요. 장닭은 이건 뭐 새벽 시도 때도 없이 울거든요. 제가 그 장닭을 보면서 생각한 것이 뭐냐 하면은, 이 장닭은 지는 신나게 우는데, 신나게 우는지 본능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는데, 자기의 명을 재촉한다는 겁니다. 전에 울어서 잡아먹었거든요. 필연, 나는~~이다. 나는 조국이다. 이건 자기 운명을, 자기 저주를 재촉하는 겁니다.

 

내가 아니라, (나)를 집어넣으면 이건 필연이죠. 이 필연자리에 뭘 집어넣습니까? 우연을 집어넣으려면 이건 바로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이 내 자리에 들어온다는 거예요. 필연적인 나와 우연적인 예수님과의 믿음 전쟁. 그걸 운반하는 운반체가 오늘날 우리입니다. 그러니까 골리앗과 다윗 전쟁은 제가 처음에 반복이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러나 성도 안에서 매일같이 반복이 돼요. 매일같이. 이게 내 탓인가? 아니면 주님 탓인가? 정답은 주님 탓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이것을 누구 탓으로 본다? 내 탓으로 본다. 카메라 설치하는데 5분 이상 걸리는 것이 주님 탓인 거예요. 이상하게 애 공부 못하는 것도 자식 탓을 하는데, 그런데 애는 엄마 탓이라 해요. 아빠 탓이라는 거예요. 자식들은 굉장히 비겁해요. 공부하라고 할 때는 공부 안 하다가 나중에 20대 넘어가지고는, “니 봐라 공부하라고 할 때 공부 안 하더니..”라고 하면, “왜 내가 공부 안 한다고 할 때 때려서라도 공부시키지 그랬어?” 이러고 있다고요. 아니 핑계 댈 데가 없어서. 분명히 공부하라고 했는데 안 한 지가 잘못인데 남 탓하잖아요.

 

우리가
내 탓이냐 주님 탓이냐, 라고 할 때는 그냥 주님이 미워서가 아니라
바로 나냐 아니면 선물이냐를 통해서
선물임을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필히 뭘 제켜야 돼요? 나라는 골리앗을 제켜야
그 승리의 성과는 선물이라는 몫으로, 주님 몫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자, 전쟁을 왜 일어나게 하느냐,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믿습니다.”라고 백날 이야기해도 그거 안 받아주고요. 겪어야 돼요. 내가 바로 주님의 승리를 가로챘고 예수님보다도 내 위주로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통해서, 이 골리앗이 나라는 것을 통해서 주님만이 다윗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때, 이것이 전쟁의 의의입니다.


 

아까 사사기를 봤죠. 사사기 16장을 보게 되면 삼손의 힘이 나올 때 힘의 원천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죠. 힘의 원천이 머리카락이 아니었습니다. 힘의 원천은 삼손의 죽음이었습니다. 삼손의 죽음이었어요. 근데 삼손은 힘이 있으니까 죽자고 이렇게 나오겠어요? 안 나오죠. 삼손은 힘으로 뭔가 해보려고 했어요. 이게 필연이에요. 나 힘 있다. 너 한번 당해봐라. 이게 필연이에요.

 

그러나 삼손의 죽음은 우연히 다가온 거예요. 우연히. 왜냐하면 들릴라 라는 여인을 보면서 삼손은 마음의 갈등을 일으킨 거예요. 내가 갖고 싶은 저 여인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내 사명이냐? 그렇게 하다가 누가 이겼어요? 여인이 이긴 거예요. 여인이. 여인이 이겨서 하나님이 사명되는 그 머리카락이 홀라당 완전히 다 날아갔잖아요. 결국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은 삼손의 힘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삼손이 죽는다는 말은 삼손이 뭘 뺄 때에요? 갖고 있는 힘이 다 빠질 때 죽음이잖아요.

 

힘이 빠지고 머리카락이 잘렸을 때 삼손이 살아있을 때 죽인자보다 죽을 때 죽인 자가 삼천 명이나 더 많았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구원입니다. 내 구원은 내가 살아있으면 안 돼요. 내 구원에 내가 끼어들면 안 됩니다. 그거는 때가 끼어든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나를 통해서 다윗이 등장하려면 주께서 계속해서 나를 지적하고 나를 밟아줘야 돼요. 나를 박살내야 됩니다. 유리구슬을 망치로 때려버리면 어떻게 돼요? 아주 박살이 나버리죠. 박살이 나버립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살해했다는 말은 여러 가지 절차가 있고, 뭐 다윗이 칼을 뽑아서 돌을 이마의 빈틈에 던지고, 뭐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여러 가지 절차를 한마디로 말해서 골리앗을 그 현장에서, 그 보는 앞에서 박살낸 거예요. 박살냈다는 이것은 필연의 박살이죠.

 

이거는 뭐냐 하면은 허구가 마치 허구가 아닌 것처럼, 실재인 것처럼 이렇게 행세하다가 박살난 겁니다. 허망한 것이 자꾸 진짜라고 우기면서 등장하는 거예요. 이걸 박살낸 거예요. 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밑에 로마인들이 있고 뭐 바리새인들이 있죠. 예수님은 죽죠. 이 옆에 십자가가 몇 개 있습니까? 두 개 있죠. 여기에 강도가 두 명 달렸죠. 여기서 실재되신 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죠. 나머지기는 다 허망한 거예요.

 

왜?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오게 되면 이게 전부 다 박살날 대상들이라 이 말이죠. 그들은 거짓을 믿어요. 거짓은 없는 거예요. 허무한 거예요. 거짓은. 진실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들이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그들은 승리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그들이 결국 죽는 자가 아니라 그들은 무엇의 대상이다? 저주의 대상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확연하게.

 

이 사실을 누가 알았는가? 옆에 있는 강도 하나가 눈치 챈 거예요. 강도가. 아, 이 죽는 현장이 내가 사는 현장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강도짓 한 이것도 하나님의 뭐가 되느냐,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거예요. 제목이 바뀌어야 됩니다. 필연덩어리에서 선물로. 하나님의 선물이 된 거예요. 자기는 신난다는 거예요.

 

비로소 주님과 나란히 있어보니까, 주님 십자가 앞에 오니까, 그동안 살아온 것이 다 허망이에요. 내가 인생을 필연적으로 여겼다는 것이 환각에 불과하고 진짜 실제로 이 세상을, 나를 태어나게 한 분은 부모님이 아니고 주님께서 관여해서 지금껏 강도질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꾸준하게 빈틈없이 관리해왔다는 사실을 발로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뭐냐,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겁니다. 아주 신났어요. 죽는다고.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거든요.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하고 씨름할 때에 자기가 하나님과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나님 만나고 살려달라고 빌 때에 야곱은 비로소 진짜 영생이라는 것, 진짜 죽음의 반대말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야지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천당하고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내가 노력하게 되면 나의 필연이 돼버리니까, 예수님 믿어줬습니다, 뭐 십일조 했습니다, 뭐 했습니다, 라고 하면 필연이 되니까.

 

그러면 그딴 것 다 개무시 해버리고, 그것을 날마다 박살내버리고, 나의 필연을 박살내는 그 망치가 우연의 망치죠. 모든 사는 게 우연이죠. 개하고 사는 것도 우연이고. 전부 다. 사람이 따지게 되게 되면 자기가 우연이 아니고 필연처럼 돼요. 자기가 주인공이 된다고요. 그러면 뭐가 날아가요? 선물이 날아가죠. 선물이 날아가는 현상이 뭐냐 감사가 작살나요. 감사가 없고 고마움이 없어요. 범사에 감사가 없어져버려요.

 

자, 예를 들고 이번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자, 성경공부를 한다. ‘뭐 가봐야 내가 아는 건데.’ 이게 필연이 되죠. 예상하죠. 가보고 오게 되면 미리 내가 알았던 것이 맞는데, 여기서 뭐냐 주체가 깨어지면서 새로움을 느끼는 거예요. 새로움을 느끼면 여기서 감사가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안 가보고, ‘뭐 아는 이야기인데, 나중에 유튜브 듣지.’ 이렇게 돼버리면, 그 시간에 딴 짓을 해버리면 내가 깨어지지 않아요. 내가. 깨어지지 않으면 애씀이 되지 감사와 고마움이 없어요. 무거운 짐을 더 곱빼기로 짊어지게 된다고요. 유튜브 듣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또 오해하지 마시고. 유튜브 라도 듣는 이것도 선물이니까.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0.138)19-11-29 00:35 

대전-116강 마태복음26장 47-52절(사단의 구멍)20191126-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26장 47절입니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이래 되어 있죠. 참, 그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일체 세상에 기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철저하게 이용해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끊임없이 이용해요. 그러니까 신자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불신자도 이용하고 다 이용합니다.

 

이용하는데, 열둘 제자 가운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고 되어 있죠. 유다를 그냥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열둘 중에 포함이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숫자로 봐서는 11+1, 벌써 비중이 이쪽 11로 가잖아요. 문제는 이 1이 11을 이겨요. 숫자로 쳐가지고 그야말로 열배인데 이걸 이긴다 이 말이죠. 1이 문제가 되니까 11도 다 같이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로마서 5장의 이야기인데요. 한 사람으로 들어와 가지고 완전히 다 무너진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이거는 불합리하게 보이지만, 이게 이용한다 이 말은 이러한 원칙, 방식을 모델로 해서 한 사람이 승리하게 되면 죽었던 11명이 다 사는 수가 되는 거예요. 그럼 가룟 유다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예수님 본인이 들어가는 겁니다. 12명 중에서 1명이 빠졌으니까 우리보기에는 구멍이 생기잖아요.

 

벽돌담이 있는데, 담이 촘촘히 있어가지고 안 보이는데 여기에 구멍이 생겨버렸다. 또는 땜이 있는데 구멍이 나서 애가 손으로 막아서 마을을 구했다. 이 이야기는 사실은 구라거든요. 너무나 교훈적이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다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절대 그런 일이 없어요. 애가 손가락으로 막듯이 구멍을 내놓고, 구멍을 내놓음으로 말미암아 이 장소(한곳)에만 구멍이 났는데 전체가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 가룟 유다를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날 니 인생 소용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인생을. 빵꾸난 인생이라는 겁니다. 통발인생이에요. 그걸 땜질해서 놔두고 딴 곳을 내가 열심히 하면 되지 않느냐, 이게 원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구조 자체가 그런 게 없어요. 이 구조가. 악이 두 개고 선이 열 개면 선하다. 이런 구조가 없다니까요. 이 구조는 악마가 하나님한테 대들 때나 하는 구조에요. 이 구조를 무슨 구조라고 하면 선악구조라고 해요. 선악구조.

 

선악 중에서 악보다 선이 많으면 죽어서도 괜찮게 산다. 지금 이 구조가 아닙니까? 여기에 모든 인간이 전부 다 중무장이 되어 있어요. 집안에 무슨 문제가 있으면, 그거만 떨어져나가면 나머지기는 건재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문제가 일어났다는 자체가 앞에 건재하다고 여기는 것도 같이 문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 표징이 되는 거예요. 표징이. 아까 주님이 우리를 이용한다는 말은 징후로 사용한다는 이런 뜻이에요. 징후 또는 징조로. 하나의 표시죠. 표시. 어려운 말로 표식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은 너는 무엇의 표현이다. 너는 ~표현이다. 이래 보면 돼요. 이 말은 너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니 지금 뭘 표현해? 라고 묻는 거예요. 뭘 표현해? 결론적으로 말해서 뭐냐 하면은 십자가를 집어넣고 표현하느냐, 아니면 니는 뭐 말을 할 때나 뭘 표현할 때 십자가 없이 하느냐를 묻는 거예요. 내가 무너질 구멍에 십자가가 꽂혔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꽂힌 그것이 모든 말이나 행동에 십자가 표현이 흘러넘쳐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그게 자기 부인이거든요.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할 때 나를 위함은 아닙니다가 반드시 밑에 깔려서 나와야 돼요. 나를 위함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조에 불과합니다. 징조라는 말은 내가 징조의 본체가 아닙니다, 라는 뜻이에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이 나오죠. 그 백부장이 예수님 만나고 자기를 스스로 징조로 여기는 거예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나는 독자적으로 산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라는 게 되죠. 그렇게 되죠. 드라마나 뉴스나 TV의 어떤 채널을 한번 틀어보세요. 이 징후가 나옵니까? 안 나와요.

 

자, 가룟 유다가 열두 제자에서 빠졌는데, 빠진 이유가 사탄 때문에 빠졌는데, 나 언제까지 예수님 앞에 놀아나기 싫다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의 시다바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는 나이고 싶지 시다바리가 아닌 거예요. 불교경전에 보면, 금강경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소(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무소, 뿔이 하나 있는. 너는 너를 위해서 사는 그것이 자유다. 불교의 교리가 아닙니까? 교리고, 그것이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을 대표하는 거예요. 행복이란 니가 니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는 것이 행복이다. 물론 내가 내하고 싶은 대로 안 돼서 문제지만.

 

학교에서 유명강사들이 와서 강연한 적이 있죠. 그들의 주제는 딱 하나 있잖아요. 니 인생 살아라! 그거였죠. 남한테 휘둘리지 말고 니 인생 살면 그것이 성공이다. 되게 교훈적으로 이야기하죠. 돈 너무 좋아하지 말고, 세상 권력 좋아하지 말고, 니 하고 싶은 것. 니 취미 있잖아. 개성에 맞는 것. 적성에 맞게. 너는 너를 위해서 살면 돼! 강사들마다, 백 명이면 백 명이 다 그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가룟 유다가 그 학교에 다녀가신 겁니다. 가룟 유다 다녀가신 거예요.

 

내가 언제까지 예수의 시다바리 노릇을 안 하겠다는 거예요. 주님이 나한테 잘해줘야지 내가 주님한테 잘 해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주님이 나한테 잘해주면 내가 섭섭지 않게 양심이 있으니까 감사드리겠습니다. 이게 가장 인간다움이에요. 가장 악마다움이에요. 악마의 징후거든요. 악마의 징후. 가룟 유다가 행동에 나선 것이 빵을 먹을 때 누가 쑥 들어왔습니까? 사탄이 들어왔잖아요. 그럼 가룟 유다의 움직임은 누구의 움직임이에요? 사탄의 움직임입니다.

 

신발이 크게 보이는데, 이 큰 신발 안에 쥐가 들어있다. 어! 보니까 신발이 움직여요. 신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쥐가 있어서 쥐가 끌고 가니까 신발이 움직인 거죠. 이 신발은 징후죠. 징후. 징후라고요. 사탄이 우리 존재를 징후로 사용한 거예요. 지금까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면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거는 마귀가 만든 거예요. 마귀가. 인간이라고 말할 때는 항상 독립적, 독자적, 자존적, 자주적, 그 의미가 담긴 것이 인간이라는 의미다 말이죠.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인간은, 인생은, 피조물이죠.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뭘 반영합니까? 창조주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일을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인간이 할 도리고, 그걸로 됐어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그걸로 더 욕심내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은 주인과 종 사이에 중요한 것은 바로 관계입니다. 관계. 관계가 중요하겠죠. 이 관계가. 이걸 바로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게 믿음인데.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위기가 뭐냐 하면은 본인이 믿음이 없을 때 위기가 돼요. 전에 울산강의에서 ‘끈 떨어진 자’라는 제목이 있었어요. 끈 떨어진 자. 끈이 똑 떨어져버렸어요. 이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믿음이 끊어진 거예요. 한 50년, 60년 동안 교회를 다녔는데 믿음이 없어요. 교회 다닌 실적이 있고 뭐 여러 가지 활동도 많이 하는데, 정작 본인은 나를 믿는 것 외에는 전혀 믿음이 없어요. 내 믿음과 내 사랑 그것 외에는 어떤 믿음이 없어요. 끈 떨어진 자에요. 끈이 떨어진 거예요. 탈출불가에요. 탈출이 불가합니다. 끈이 있어야 탈출이 되죠. 끈이 떨어졌는데.

 

끈이 떨어졌으니까,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이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다면 끈이 떨어졌으니까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뭐가 나오겠습니까? ‘나’가 나오는 거죠. ‘나’가 나오죠. 누구의 소식이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나로부터 해서 나로 가니까. 내 이야기가 나오죠. 내 이야기가 나오니까 상대방에게서는 ‘너’가 나오죠. 나와 너. 물론 그, 그녀가 있지만 내가 그 사람을 부르기 전에는 대기상태에 있지요.

 

근데 만약에 내가 얼굴을 돌려서 그, 그녀, 그 사람을 부르면 그 사람은 뭐가 됩니까? ‘너’가 되죠. 그러니까 나 중심으로 주변에 보조시녀들처럼 운집해있는 너, 이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사탄의 구조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관계에요. 이 관계에요. 나를 위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 중심으로 방사구조로 펼쳐져 있어요. 이게 인간의 믿음이에요. 인간은 자기를 믿는 믿음 이게 다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있으면 이 사람이 예수를 믿을 거예요. 믿지만, 믿음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내가 믿는 예수죠. 내가 믿는 예수. 나에게서 나온 믿음이죠. 나에게서 나온 믿음.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구멍 뚫리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절대로 구멍은 안 뚫려있어요. 남에게 구멍을 뚫을지언정 본인은 구멍이 안 뚫려있어요. 절대적인 자존, 완벽한 나 구성이에요. 자기구성이에요. 완벽한 자기구성.

 

만약에 11월 28일에 완벽한 자기구성이 됐잖아요. 이게 29일이 되니까 허점이 생기잖아요. 허겁지겁 자기가 그 구멍을 메워서 또 오늘 저녁이 되면 완벽한 자기가 돼요. 내일이 되면 또 허점이 생겨요. 철저하게 누구의 사인이라든지 누구의 표현이 되기 싫어요. 나는 나 그 자체로 완결돼요. 자주적이고 자족적이다. 스스로 자기 만족에 빠지는 겁니다.

 

이걸 이사야 강의에서 했어요. 내 위에 더 높은 사람이 없다. 바벨론이, 계명성이 그런 이야기 했죠. 나는 나 스스로 있다. 누가 나와 비할 데가 있을까? 그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또 나와요. 우리 음녀가 최고다. 짐승이 말하기를 우리가 최고다. 우리는 그 짐승을 되게 부러워해요. 나도 언제 저런 경지에 올라가느냐. 교회에서 하는 일이 뭐냐 하면은 도 닦는 일을 하죠. 목표를 정해놓아요. 최고의 자리에 누가 올라가느냐, 여기에 필히 계단이 있겠죠. 제자훈련 10단계 이런 게 있겠죠. 공부할 때는 힘들지만 뭐가 있기 때문에 힘든 것을 이긴다? 목표가 있어요. 그 목표의 자리는 뭐냐, 내가 절대존재의 자리의 목표로 올라가는 거예요. 이게 절인지 교회인지 분간이 안 되죠.

 

진정한 교회는 나 자신이 구멍이 뚫리고 내가 찾는 너도 구멍이 뚫렸어요. 그러면 한번 적어볼게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죄다. 이렇게 되겠죠. 허점투성인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이 구멍사이를 뭔가 뚫고 지나가야 되죠. 이 구멍은 무엇 때문에 생겼습니까? 내 속에 사탄이 있는데, 이 사탄 있음을 지적하고 빼내고 주님이 이 빈자리를 채울 때, 이 교회라는 것은 십자가로서, 이렇게 목걸이 만들 때 구슬 꿰듯이 십자가 고리로 꿰어버리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주 안에서 교제한다는 거예요. 주 안에서. 주 안에서 십자가로.

 

꿸 때, 이 사람들이 문벌이 좋지 않고 학벌이 좋지 않고 돈이 없는 사람도 있겠죠.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교회가 뭐냐, 너희 가운데 문벌 좋은 사람이 누가 있으며 가진 자가 누가 있느냐, 못난 것들을 택하사 가진 자를 뭐한다? 부끄럽게 하시고. 어리석은 자를 택하사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고린도전서 1장 마지막에 보면 오직 누구만 자랑한다?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하심이라. 이게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까? 지금 구슬을 꿰었죠. 나 없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가 아니고 ’우리가‘에요. 우리가. 나가 아니고 우리가 돼요.

 

1+1+1+1..=0, 왜 만나느냐, 0이 되기 위해서. 내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기 위해서 만나는 거예요. 모든 성경모임이나 교회모임은 내가 없다는 것. 왜냐하면 내가 없다는 말은 내가 있죠. 내가 있지만 구멍 난 나는 이게 껍데기, 포장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노트북을 직구로 구입했는데 와보니까 벽돌 두 개. 이게 없는 거죠. 아니, 포장지는 왔죠. 포장지를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포장지는 있는데, 문제는 내가 찾는 것은 노트북을 신청했잖아요. 노트북을 찾으니까 노트북은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없는 거예요.

 

나에게서 뭐가 없다? 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빼낸 겁니다. 왜? 사탄이라고. 악마 있다고. 악마의 자리에 주님 집어넣은 겁니다. 그러면 이건 뭐냐 내 안에 뭐가 있다? 십자가의 취지가 살아있는 겁니다. 십자가의 취지가. 십자가를 소유한 게 아니고요. 구멍이 났다니까요. 구멍 난 것은 소유라고 하지 않습니다. 구멍 뚫린 것을 뭘 소유해요. 주님의 십자가의 표현형이다. 표현형, 십자가의 표현형이다 이 말입니다. 또는 십자가를 담는 그릇이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그릇밖에 없다. 로마서 9장에 나오죠. 자비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 성도는 뭐냐, 자비가 있는 자비의 그릇이죠. 이 자비라고 하는 것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선물로 받은 겁니다. 구멍 뚫린 데에 예수님이 들어온 것은 그 자체가 이제는 나를 주님이 접수해가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지난 낮 설교 할 때에 우리 외손녀 꿈 이야기를 했죠. 제가 꿈 이야기를 잘 안하는데 너무 실감이 나서 현실인지 잘 모를 정도에요. 애가 우는데, 보니까 이부자리랑 다 있는데 애가 우는 거예요. 단지 누가 없느냐 하면은 엄마가 없어요. 엄마가 없다고 그렇게 우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여러분 밥 먹죠? 밥 왜 먹습니까? 제발 밥값 하라고 했죠. 엄마 찾아줘야죠. 성령을 받았으면 사람들에게 엄마, 아빠 찾아줘야죠. 물론 엄마, 아빠가 없다고 우는 사람에게 줄 필요가 있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줄 필요가 없지만. 그러나 밥을 왜 먹고 우리가 왜 삽니까? 그냥 밥을 먹기 위해서 산다는 것은 그건 마귀의 짓거리고. 주께서 우리에게 공기와 햇빛과 밥을 줄 때는, 우리는 엄마가 필요한 사람에게 엄마를 찾아줘야 한다고 했죠. 엄마를 소유하는 거예요. 본인도 그런 입장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구멍이 뚫리지 아니하면, 구멍이 뚫리지 않았으니까 아랫배 뱃살이 불룩 튀어나왔겠죠. 결국 인간 둘이 만나가지고 무슨 시합을 하느냐 하면은 누가 아랫배가 많이 튀어 나왔는지 이 싸움 한다고요. 누가 돈이 많고 월급이 많고. 구멍이 아니고 이거는 완전히 자기 안에 사탄이, 귀신이 누가 많이 들어있는지 싸움한다고요. 니는 네 마리. 나는 일곱 마리.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 열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들어간 것은 예수님 본인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조건이에요. 인간은 피조물인데도 불구하고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피조물이 아닌척하고 있죠. 자기가 신이라고 여긴다고요. 그러면 주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은 신이라고 우기는 그걸 구멍을 뚫는 방법밖에 없죠. 그러면 구멍을 뚫어야 하면, 그들이 구멍 뚫리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그들이 이미 사탄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죠.

 

이 세상 전부를 큰 원이라고 하면, 이걸 축소하면 열두 제자가 되고, 열두 제자 안에 중요한 문제는 열한 명이 아니라 한명. 11+1, 한 사람이 열한 명의 운명을 결정짓는 겁니다. 이 세상을 악마가 결정짓는 축소판으로 만든 거예요. 요한복음 6장을 한번 봅시다. 6장 70절요.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마귀니라, 주께서는 마귀하고, 마귀가 싸움의 대상이 되지는 않죠. 싸워야 되겠지만. 마귀마저 주님이 사용하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은 사람 좋아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본인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그 중에 하나는 마귀여야 한다. 마귀여야.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의도적으로 택했어요. 세상에서 정치경제문화사회, 그들이 어떤 일을 벌일 때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세상 문명이 지금보다 더 잘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죠. 과거보다 더 발달된 현재,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 그래서 모든 관심사가 발달, 성장, 부흥,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 잘 되는 것, 커지는 것, 번창하는 것. 관심사가 다 거기에 쏠려갑니다.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 그냥 넓은 길로 가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하나가 돼서 넓은 길로 가요. 마음이 하나가 돼서. 좁은 길로 갈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자진해서 망하는 길을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근데 뒤에서 “너 나와!” 하나님께서 딱 선물을 줘가지고, 멕아지(모가지)를 쥔다고 하죠. 딱 붙들어가지고 넓은 길로 가는 그 노선에서 다른 길로 가게 만듭니다. 버스가 좋다고 해서 그거 영생 가는 버스가 아니에요. 버스가 험하다고 해서 그리고 그 길이 비포장도로라고해서 지옥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인생을 연구하고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힘들게 산다고 해서 지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 없는 것이 위기에요. 믿음 없는 것이. 믿음 없이 고난의 길을 가고 믿음 없이 넓은 길로 가는 이것이 둘 다 지옥이에요. 믿음이에요. 믿음. 환란과 곤고와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그걸 내리십니까?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그 믿음.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그 믿음의 우리가 징조죠. 징조. 믿음의 표현형이라니까요. 믿음의 표현형.

 

나는 어떻게 선하고 나는 어떻게 악하냐, 그런 것은 따지지 마라는 말이죠. 니가 가야 될 곳은 바로 나는 착합니까? 악합니까? 라는 자체를 벗어날 세계에요. 그 벗어난 원리가 미리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우리한테 뭐가 구멍이 뚫려야 합니까? 나는 착했으니까 복 받을 거야, 나는 악했으니까 벌 받을 거야, 라는 그 사고방식이 천국의 원리로서 폭파당해야 해요. 북한 미사일을 여기다가 쏘아야 돼요. 바다에 쏠 게 아니라 여기에다가. 여기에다가 한방 쏘아버려야 된다 이 말이죠.

 

배불뚝이해가지고 구멍도 나지 않은 인간은 뭐로 포장이 되어 있느냐 하면은 나는 이렇게 잘 먹고 잘 산다. 고난도 없다. 왜? 나는 선하니까. 나는 의로우니까. 이래 되거든요. 선해서 복 받았는데 내가 뭐 잘못이고? 내가 잘해서 가는데? 이거라는 말이죠. 그러나 선한 일은, 의인은 없다고 했죠. 한명도 없죠. 한명도 없는데, 한명도 없으면 한명도 없는 쪽으로 가야되는데, 우리는 왜 자꾸 나라도 선한 쪽으로 가서 복 받으려고 교회에서 기를 쓰고 새벽제단부터 해가지고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을 때우려고 하는 거예요. 믿음이 없으니까 있는 척을 하기 때문에 이런 거예요. 있는 척을 하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척을 하는 것은 나는 잘났다와 이꼴(=)이 되는 거예요. 잘났으니까 나보고 탓하지 마세요. 이거잖아요. 못나야 되는데 왜 그렇게 잘났는지..., 성경대로 하면 우리가 못나야 정상인데 왜 자꾸 내세울 게 있고 잘 나야 되는 그쪽으로 가느냐 이 말이죠. 그게 넓은 길이고, 파멸의 길이고, 그 선두의 주동자는 누구냐? 악마입니다. 오늘날 악마가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에요. 우리 인간 사회의 위대한 영도자.

 

집사님 얼굴 좋네요? 라고 하면 내가 착해서라고 해요. 착해서 얼굴 좋대요. 착해서 얼굴 좋은 것이 아니고, 주님이라는 좋으신 분의 징조에요. 징후라니까요. 그게 믿음이 주는 선물이거든요. 누구의 표현형입니다. 단독적으로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다는 모든 것이 차단되고 끊어진 거예요. 자, 중간 결론을 내립니다. 가룟 유다의 의미는 차단입니다. 단절입니다. 끊어짐. 오늘 제목은 끊어짐. 가룟 유다의 의미는 끊어짐입니다. 아무도 이을 자가 없어요. 끊어짐. 하나의 개체가 주님의 개체에 이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주도권은 악마가 쥐고 있기 때문에. 가룟 유다가 설쳐버리니까 열두 제자는 와해가 됐어요.

 

지난 강남강의 첫 번째에서 시작을 이렇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기 공동체, 예수공동체를 부수려고 했다고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스스로 예수 집단에서 스스로 떨어져나가려고 했어요. 왜? 성령이 와야 이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성령이 와야 될 이유를 알아야 되기 때문에. 성령 안에 이으려면 내가 나설 입장이 안 된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아야 돼요. 인간은 본인만 믿는 믿음 때문에, 그 믿음이 결국은 주님하고 결별되게 되어 있어요. 그 믿음 자리에 다른 믿음이 와야 돼요. 나는 꽉 채워져 있다는 그 믿음 말고. 나는 나를 내세울 수 있다는 기본적인 토대와 근거지가 완전히 박살나버렸다. 뻥하고 뚫렸다.

 

도대체 나다움이 어디에 있느냐, 나다움 자체가 나는 구성될 수 없다. 성립될 수 없다. 사탄이 그동안 우리로 하여금 너는 너답다고 자꾸 안겨줬는데, 안겨주고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에요. 계속해서 우리는 욕망에 미흡한 거예요. 욕망에. 욕구에 미흡하고 욕망에 미흡하고. 항상 우물에 물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은 물 길러 와봤자 또 물 길러 와야 돼요. 그 물을 먹는 자는 목마르거니와, 목마르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목마르다는 말이. 결핍을 뜻하는 겁니다.

 

분명히 우리를 붕 띄워 줘놓고는 계속 마귀가 욕망의 결핍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돈 벌만큼 벌었는데 돈 더 벌고 싶고. 호강할 만큼 호강했는데 아직도 배고프다. 이렇게 하고 있고. 월드컵 4강하면 됐잖아요. 뭘 아직도 배고파. 히딩크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매일 가지고 있으면서 배고파해요. 그 배고픈 만큼 감사가 날아가 버리고 고마움도 없어요. 더더더더더~ 계속 이러고 산다고요. 미지의 그 환각적인 발전과 진보를 내다보면서. 진화를 내다보면서. 모든 교육이, 교육내용이나 환경이 사탄이 시키는 대로 다 가고 있어요.

 

혹시 위험을 무릅쓰고 철두철미하게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초등학교 교사가 애들 눈치 안 보게 학부모 눈치 안 띄게 은근슬쩍 가끔 하나님말씀 전하면서, “하나님 지금 전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좀 봐주세요. 나중에 이 사태로 분란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벌벌 떨면서 하나님 말씀 전해봤자, 그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입니까? 애들에게 뭘 요구해요? 발전을 독려하고 격려하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이런 하나님은 없다니까요. 이런 하나님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잘 될 이유가 없잖아요. 내가. 내가 잘 되면 그건 내가 나를 믿는 것이지, 이거는 내가 누구의 징조고 누구의 징후가 될 이유가 없잖아요. 누구의 표현형이 아니다 이 말이죠.

 

가룟 유다는 사탄이고 주님을 위해서 일부러 뽑아 세워놨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정작 상대하는 것은 사탄하고 상대하지 열두 제자하고 상대하는 것은 아니겠죠. 자, 26장 47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그리고 난 뒤에 49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라고 하는데 이거는 하나의 신호에요.

 

어두컴컴해가지고 키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정작 누구를 우리가 체포해야 될 사람인가를 그 경찰관들에게 알려주는 거죠. 잘 분간이 안 되니까 엉뚱한 사람을 잡아가지고 갔다가 또 잡으려면 번거롭다 이 말이죠. 정확하게, 예수와 함께 3년을 살았으니까 딱 집어서, 저 사람, 저 사람들은 아니고 제자들이고, 딱 저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려면 인사하고 키스하고 이래야죠. 신체적 접촉이 되어 있어야죠.

 

결국 여기서 사탄은 누구를 노린다? 예수님만 노리죠. 어려운 말로 한 놈만 잡는다는 식으로 예수님만 노리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의 오늘날의 사탄도, 사탄의 활동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생각에서 뭐만 제거시킵니까? 십자가복음을 제거하는 것이 결사적이에요. 악마가 온 노력과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대화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요.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예수님 빼고는 다 용납해줄게.”

 

가정의 부부이야기나 자식이야기나 뭐만 빼고 이야기해라. 예수님 빼면 뭐가 남겠습니까? 가정의 행복이 남겠죠. 자식 성공이 남겠죠. 교회에서 예수님 빼버리면 교회부흥이 남겠죠. 그걸 마귀가 원하는 거예요. 그걸. 사탄은 주님에 의해서 구멍이 났다는 사실을 사탄이 제일 싫어하는 거예요. 사탄이 무능하다는 사실을 사탄이 제일 싫어해요. 그동안 사탄이 사람들에게 겁을 주고 왔잖아요. 근데 겁주는 대장이 허풍이더라는 소식이 들리게 되면 그거 입맛 없다는 말이죠. 지가 계속 대장질을 했는데, 아직도 대장질을 하고 싶은데, “저거 허수아비야, 저거 허깨비야. 반말해도 아무 문제없어.” 그래 되면 사탄으로서는 파탄 나거든요.

 

아까 첫째시간에 한 것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죽을 때 드러나죠. 인간의 본질은. 그 사람이 목사고 장로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죽을 때 뭐가 나온다? 이게 뭐가 나온다? 교회가 나오면 안 되죠. 믿음 나오면 안 되죠. 나 믿습니다가 나오면 안 됩니다. 뭐가 나와야 돼요? 십자가가 나와야 돼요. 죽을 때 십자가가 나온다면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죠. 그러면 오늘 나와야죠. 오늘. 오늘 저녁 먹다 죽을지 모르니까. 오늘 나온다는 뜻은 평소에 늘 건드리면 나온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십자가의 표현형이니까.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한 거,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십자가 외에는” 그 다음에는 “결코 자랑할 게 없으니” 아, 참, 사도바울이 장가를 안 가서 자기 새끼 자랑할 게 없으니까,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맙시다. 사도바울이 집안이 변변치 못해서 자랑할 게 없으니까, 이러지 맙시다.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상처가 있어요. 그리스도로 구멍 난 사람이에요.

 

구멍 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니는 나를 핍박한다고 했죠. 내가 평소에 자랑하고 싶은 그 자랑거리가 사탄의 앞잡이로서 주님을 핍박한 원인제공자가 되었다 이 말이에요. 내가 나 자랑하는 것이 남들 보기에는 그냥 무심코 그럴 수가 있다고 하지만, 이게 나를 구원한 주님을 욕보이는 짓이에요. 그게.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한 셈이 돼요. 철딱서니가 없이 우리가. “나 적어도 이 정도야.” 그 자체가 욕보이는 짓이에요. “나는 설교도 하고 강의도 하고 훌륭한 목사다.” 이 무식한 이 이야기가 주님을 욕보이는 이야기라고요. 이게요.

 

그러면 욕 안 보이는 일은 뭐가 있습니까? 없죠. 구멍이 났으니까. 욕보여놓고, 욕보였기 때문에, 그걸 알기 때문에 나는 뭐만 자랑한다? 십자가만 자랑한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순서가. 내가 욕 안 보이면 내 자체가 자존자가 되고 내가 대단한 사람이 돼버려요. 구멍이 없는 사람이 돼요. 우리가 육신이 있기 때문에 사탄이 구멍을 계속합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승리했기 때문에 사탄이 낸 구멍을 주님의 십자가로 메우고. 그러면 나는 죄인이었는데 주님의 용서해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 끊임없이 그 실속과 그러한 경험을 평생 동안 하게 되는 겁니다. 평생 동안.

 

그러니까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만남이, 이게 다 사전에 주님께서 계획한 거예요. 계획이 뭐냐 하면은 구원의 구조, 구원의 구조를 위해서 열두 제자와 예수님과의 헤어짐과 다시 만남이 있어줘야 되는 겁니다. 헤어짐과 만남이 나중에 구조로 정착이 되죠. 이게 구멍 뚫림과 구멍을 메워줌. 한 사람이 범죄 해서 죄인된 것처럼 한 사람이 의인되어서 우리가 의인되었으니, 우리의 죄가 더한 곳에, 구멍이 난 곳에 뭐가 넘친다? 은혜가 넘친다. 구멍이 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거예요.

 

우리가 구멍이 한 곳에만 났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그걸 아셔요. 니가 오른 눈이 범죄 하면 그걸 빼버려라. 오른 눈도 고장이 났고 왼눈도 고장이 났고. 왼팔, 오른팔 다 고장이 났어요. 온천지가 완전히 스펀지처럼 구멍덩어리에요. 벌집이에요. 전부 다 주님을 모독하는 식으로 사탄으로부터 격려와 독려를 받고 살아온 겁니다. 잘한다! 훌륭하다! 잘한다! 훌륭하다! 제가 말하는 죄라고 하는 것은 선악에서 나온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을 안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거예요.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죄라고 지적하는 자체가 죄라고요. 죄라고 생각한 그 자체가 죄라고요. 왜냐하면 생명나무에서는 죄가 이미 없는 거예요. 죄가 없고 우리는 뭐냐 하면은 의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조로서 죄인이 되는 겁니다. 의인인데, 그 의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 하면 내가 죄인이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이 말입니다.

 

죄인이기에 주님의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구원이 아니고 자기를 반영하고 자기를 표현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겁니다. 그게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오게 되면 너희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뭐가 돼라? 예수의 증인이 된다. 예수의 증인.

 

이런 예수의 증인이 되는 절차를 제자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계속 그런 식으로 알아서 척척 빈틈이 없이 일을 했잖아요. 닭이 울 때 세 번 부인한 것이 아니고, 세 번 딱 할 때, 그때 타이밍이 완전 인공지능 같아요. 타이밍이요, 이게 되면 여기에는 이게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가 부인할 때 그 다음에 닭! 사인이 들어가면 꼬끼오~ 하고 우는 거예요. 꼬끼오~ 하고. 그게 뭐냐 하면 구조에요. 이 구조를 오늘날 성도에게 그대로 뒤집어씌운 거예요. 성도에게.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그 타이밍은요, 성도가 예상을 못해요. 어느 타이밍에서 그런 고백이 터져 나올지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아하, 내가 십자가 없이 평소에 꾸준히 살았구나!’라는 그 순간이 십자가만 자랑하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를 빠트린 게 위기에요. 위기.

 

인생의 가장 큰 위기는 돈이 없을 때가 아니고, 십자가가 없어질 때 그거는 끈 떨어진 자가 되겠죠. 근데 그 십자가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또 다시 니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반증해주는, 그런 믿음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구조가 되는 거예요.

 

어떤 구조? 가룟 유다의 구조가 있는 반면에 열한 제자의 구조가 있어요. 열한 제자의 구조는 배신 때렸는데 다시 주께서는 배신 때렸음을 토대로 해서 구원하는 구조인 반면에, 가룟 유다는 그냥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방치하는 겁니다. 남의 자식이니까. 자기 자식이 아니거든요.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어떤 분은 제 설교를 듣고 성경을 안 본다 해가지고, 그 소리 듣고 강의 중에 자꾸 성경본문을 적어놓는 경향이 있어요. 이거나 좀 알라고.

 

히브리서 12장 7절요.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절,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뭐라고요?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내놓은 자식이라 이 말입니다. 그건 내 자식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지 자식 건지지 남의 자식 왜 건드리겠어요. 그냥 니는 니 사는 대로 동성애를 하든지 뭘 하든지 그냥 놔둬버려요. 까불이 짓 하든지 그냥 놔둬버린다고요.

 

에베소서 6장에 보면 부모들은 자식에게 할 때 주 안에서 훈계하고 순종하라고 가르쳤죠.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요, 부부에게서 자식이 생기면 부부가 끝나고 부모가 돼요. 부부는 약속이 없지만 부모는 약속이 있어요. 약속된 계명이 있어요. 자식을 약속에게 순종하게 하는 책무가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자식이 누굴 가르친다? 부모로 살 인간을 부모가 되도록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부모가 은혜가 아니고 뭐가 은혜냐, 자식이 도리어 은혜다. 자식 때문에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거예요. 자식이 없었으면 내 행복만 추구했는데,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자식을 줬기 때문에 이건 발로 내다 차버릴 수도 없고. 도대체 나는 그동안 나를 위해서 살았는데 자식을 낳고 보니까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지장이 되는 겁니다.

 

내가 잠자고 싶을 때 자고 내가 먹고 싶을 때 먹어야 되는데, 애 하나 낳으니까 그 애는 시계도 없어. 그냥 울죠. 젖 달라 하죠. 밥 달라 하죠. 내가 자아 찾는 시간을 다 빼앗아 가버려요. 돌아볼 시간이 없어요. 애 잘 때 자고 애 먹을 때 먹고 하다보니까, 그렇게 몸매 스타일을 관리했던 거 다 도루묵이 되고 살이 퍽퍽 찌죠. 고추장, 참기름 넣어서 비빔밥 한 양푼 만들어서 애한테 받은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풀잖아요. 그것도 또 뺀다고 애쓰고.

 

그러니까 이 가룟 유다가 있는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사탄이 있는 것을 감사해야 돼요. 나에게서 나를 정떨어지게 하는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안 붙들어도 되는 그런 부담을 덜게 하신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먹든지 마시든지 환란이든 곤고든 나는 주님의 표현형이니까. 주님의 증인되게 하신 것을 감사하세요.

 

그래서 나는 항상 아랫배가 허해. 왜? 구멍이 뚫렸으니까. 또 돌아서서 아침이 되면 꽉 차있어요. 근데 주께서 또 구멍을 뚫어줘요. 연통을 뚫듯이 바람이 쑥쑥 불어야 돼요. 바람이. “니 누구고?” “나 병신이야. 바보 같아” 괜찮아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잖아요. 정신 차리지 말라고. 바보가 정신 차리는 것이 어디에 있어요. 나 바보같이 살았노라. 그냥 바보같이 쭉 사세요. 등신처럼 사세요. 또 장애인 옆에서 고소하지 말고. 비하 받으면서 사세요. 낮추며 사시라는 말이죠.

 

근데 이 똑똑이가 나왔어요. 똑똑이 한번 봅시다. 똑똑인지, 안 그러면 동백이에 나오는 까불인지 모르겠다만. 마태복음 26장 51절,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게 뭡니까? 베드로거든요. 베드로가 칼을 빼어서 말고 라는 종의 귀를 쳤잖아요. 이게 지 아랫배에서 나온 힘 가지고 쳤잖아요. “주여, 힘이 있습니다.”라는 그런 뜻이라 이 말이죠. 그 힘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님이 언제 힘 달라고 했어요? 지금 내 편이 돼달라고 했어요? 지금 내편이 모자라서 너 보고 협조를 구하는 거야? 지금 남이 미운 게 아니고 베드로가 미운 거예요. 베드로는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동안 사람들에게 뭘 배웠어요? 뭘 따라다녔어요? 같이 협조하면 뭐 하늘나라가 되는 줄 알고.

 

교회 망해도 구원받아요. 왜?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니까,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했잖아요. 교회 없어도 주님이 계시면 구원이 된다 이 말이죠. 그분이 아이고, 깜빡 잊었다고 그런 치매현상을 안 보여요. 아이고, 너 빼놓고 왔구나, 이런 거 없어요. 꼼꼼히 다 살펴서 바꾸어줍니다.

 

뭐냐 하면은 지옥에 물든 우리를 천국에 살도록 합당한 존재로 바꾸어주는데, 거기서 자기의 귀한 본질들을 잃어버려야 되죠. 마귀가 심어준 자긍심 이런 것은 다 날아가야 돼요. 나는 나다가 아니라 나는 누구의 표현형이다. 누구의 증거물이다. 나보고 따지지 마. 멱살 쥐려면 주님의 멱살을 쥐어. 나를 나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니까. 왜 나보고 멱살을 쥐느냐 이 말이죠.

 

아까 말한 우연이죠. 모든 게 우연이니까 내가 되고 싶은 인생을 못 살아요.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내 재산이고 뭐고 있으면 다 박살난다고요. 진짜 칼 빼고 하는 게 지 성질이거든요. 그 성질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배신하는 성질로 이어졌잖아요. 그래서 베드로가 지옥 갔습니까? 아니죠.

 

그게 천국 가는 절차 중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우리는 매일 이런 절차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가 하겠습니다, 라는 이런 베드로 같은 망나니짓을 계속 하고 있어요.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에게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기도빨, 헌금빨, 전도빨, 그래서 그 결과를 교회부흥과 이어 지는가 확인해보고.

 

이 세상에 내 것이 없습니다. 없는데 내 것을 챙기겠다는 것. 어느새 마귀가 내 구멍을 메우고 있어요. “니도 자존심이 있어야지. 니도 체면도 있는데 병신같이 살아야 되겠어. 니는 니 것을 챙겨야지.”라고 마귀가 또 구멍을 메워주네요. 우리는 또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서 ‘그래, 나는 살아야 돼.’ 제가 전에도 그런 설교했잖아요. 강남강의에서 제가 몇 번 이야기한다마는, 지겹지만 또 이야기해야겠어요.

 

부모들이 신을 믿는 이유는 자식 때문이다. 부모들이 교회 다니는 이유는 자식 때문이다. ‘아직 쓰러지면 안 돼. 자식을 봐서라도 내 죽으면 안 돼. 다시 불끈 동여매고 장사해가면서 나는 살아야 되겠어. 내가 쓰러지면 자식도 쓰러지는 거야.’ 자식이 하나님이에요. 그게 마귀 짓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죠. 그게 필연이거든요. 우연이 아니고.

 

그게 자기의 힘을 모으는 거예요. 착하면 복 받을 거니까 교회 와서 시키는 대로 착한 일 많이 하고 교회 봉사하는 거예요. 이게 점점 마귀가 돼가고, 이건 지옥 가는 거예요. 마귀와 합세하는 거예요. 십자가가 빠져버리니까 오기만 남았지 감사는 날아가 버렸어요. “이렇게 바르게 살았으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복 줘가지고 지금껏 내가 신앙생활 하잖아.” 이거 주장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나 베드로는 누굴 만나야 하느냐, 닭을 만나야 돼요. 만나기 전에 베드로는 실컷 예수님을, 자처해서 솔직하게 내 안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라는 그런 실토. 믿음 전혀 없음의 실토가 나올 때 그게 예수의 증인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피조물인 주제에 
 어떤 독약을 먹었는지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으로, 그게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저희들 박살내주시고 늘 십자가 앞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표현형으로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