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16강 마태복음26장 47-52절(사단의 구멍)20191126-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26장 47절입니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이래 되어 있죠. 참, 그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일체 세상에 기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철저하게 이용해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끊임없이 이용해요. 그러니까 신자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불신자도 이용하고 다 이용합니다.
이용하는데, 열둘 제자 가운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고 되어 있죠. 유다를 그냥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열둘 중에 포함이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숫자로 봐서는 11+1, 벌써 비중이 이쪽 11로 가잖아요. 문제는 이 1이 11을 이겨요. 숫자로 쳐가지고 그야말로 열배인데 이걸 이긴다 이 말이죠. 1이 문제가 되니까 11도 다 같이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로마서 5장의 이야기인데요. 한 사람으로 들어와 가지고 완전히 다 무너진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이거는 불합리하게 보이지만, 이게 이용한다 이 말은 이러한 원칙, 방식을 모델로 해서 한 사람이 승리하게 되면 죽었던 11명이 다 사는 수가 되는 거예요. 그럼 가룟 유다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예수님 본인이 들어가는 겁니다. 12명 중에서 1명이 빠졌으니까 우리보기에는 구멍이 생기잖아요.
벽돌담이 있는데, 담이 촘촘히 있어가지고 안 보이는데 여기에 구멍이 생겨버렸다. 또는 땜이 있는데 구멍이 나서 애가 손으로 막아서 마을을 구했다. 이 이야기는 사실은 구라거든요. 너무나 교훈적이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다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절대 그런 일이 없어요. 애가 손가락으로 막듯이 구멍을 내놓고, 구멍을 내놓음으로 말미암아 이 장소(한곳)에만 구멍이 났는데 전체가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 가룟 유다를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날 니 인생 소용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인생을. 빵꾸난 인생이라는 겁니다. 통발인생이에요. 그걸 땜질해서 놔두고 딴 곳을 내가 열심히 하면 되지 않느냐, 이게 원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구조 자체가 그런 게 없어요. 이 구조가. 악이 두 개고 선이 열 개면 선하다. 이런 구조가 없다니까요. 이 구조는 악마가 하나님한테 대들 때나 하는 구조에요. 이 구조를 무슨 구조라고 하면 선악구조라고 해요. 선악구조.
선악 중에서 악보다 선이 많으면 죽어서도 괜찮게 산다. 지금 이 구조가 아닙니까? 여기에 모든 인간이 전부 다 중무장이 되어 있어요. 집안에 무슨 문제가 있으면, 그거만 떨어져나가면 나머지기는 건재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문제가 일어났다는 자체가 앞에 건재하다고 여기는 것도 같이 문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 표징이 되는 거예요. 표징이. 아까 주님이 우리를 이용한다는 말은 징후로 사용한다는 이런 뜻이에요. 징후 또는 징조로. 하나의 표시죠. 표시. 어려운 말로 표식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인간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은 너는 무엇의 표현이다. 너는 ~표현이다. 이래 보면 돼요. 이 말은 너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니 지금 뭘 표현해? 라고 묻는 거예요. 뭘 표현해? 결론적으로 말해서 뭐냐 하면은 십자가를 집어넣고 표현하느냐, 아니면 니는 뭐 말을 할 때나 뭘 표현할 때 십자가 없이 하느냐를 묻는 거예요. 내가 무너질 구멍에 십자가가 꽂혔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꽂힌 그것이 모든 말이나 행동에 십자가 표현이 흘러넘쳐 나와야 된다 이 말이죠.
그게 자기 부인이거든요.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할 때 나를 위함은 아닙니다가 반드시 밑에 깔려서 나와야 돼요. 나를 위함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조에 불과합니다. 징조라는 말은 내가 징조의 본체가 아닙니다, 라는 뜻이에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백부장이 나오죠. 그 백부장이 예수님 만나고 자기를 스스로 징조로 여기는 거예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나는 독자적으로 산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라는 게 되죠. 그렇게 되죠. 드라마나 뉴스나 TV의 어떤 채널을 한번 틀어보세요. 이 징후가 나옵니까? 안 나와요.
자, 가룟 유다가 열두 제자에서 빠졌는데, 빠진 이유가 사탄 때문에 빠졌는데, 나 언제까지 예수님 앞에 놀아나기 싫다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의 시다바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는 나이고 싶지 시다바리가 아닌 거예요. 불교경전에 보면, 금강경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소(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무소, 뿔이 하나 있는. 너는 너를 위해서 사는 그것이 자유다. 불교의 교리가 아닙니까? 교리고, 그것이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을 대표하는 거예요. 행복이란 니가 니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는 것이 행복이다. 물론 내가 내하고 싶은 대로 안 돼서 문제지만.
학교에서 유명강사들이 와서 강연한 적이 있죠. 그들의 주제는 딱 하나 있잖아요. 니 인생 살아라! 그거였죠. 남한테 휘둘리지 말고 니 인생 살면 그것이 성공이다. 되게 교훈적으로 이야기하죠. 돈 너무 좋아하지 말고, 세상 권력 좋아하지 말고, 니 하고 싶은 것. 니 취미 있잖아. 개성에 맞는 것. 적성에 맞게. 너는 너를 위해서 살면 돼! 강사들마다, 백 명이면 백 명이 다 그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가룟 유다가 그 학교에 다녀가신 겁니다. 가룟 유다 다녀가신 거예요.
내가 언제까지 예수의 시다바리 노릇을 안 하겠다는 거예요. 주님이 나한테 잘해줘야지 내가 주님한테 잘 해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주님이 나한테 잘해주면 내가 섭섭지 않게 양심이 있으니까 감사드리겠습니다. 이게 가장 인간다움이에요. 가장 악마다움이에요. 악마의 징후거든요. 악마의 징후. 가룟 유다가 행동에 나선 것이 빵을 먹을 때 누가 쑥 들어왔습니까? 사탄이 들어왔잖아요. 그럼 가룟 유다의 움직임은 누구의 움직임이에요? 사탄의 움직임입니다.
신발이 크게 보이는데, 이 큰 신발 안에 쥐가 들어있다. 어! 보니까 신발이 움직여요. 신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쥐가 있어서 쥐가 끌고 가니까 신발이 움직인 거죠. 이 신발은 징후죠. 징후. 징후라고요. 사탄이 우리 존재를 징후로 사용한 거예요. 지금까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면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거는 마귀가 만든 거예요. 마귀가. 인간이라고 말할 때는 항상 독립적, 독자적, 자존적, 자주적, 그 의미가 담긴 것이 인간이라는 의미다 말이죠.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인간은, 인생은, 피조물이죠.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뭘 반영합니까? 창조주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일을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인간이 할 도리고, 그걸로 됐어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그걸로 더 욕심내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은 주인과 종 사이에 중요한 것은 바로 관계입니다. 관계. 관계가 중요하겠죠. 이 관계가. 이걸 바로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게 믿음인데.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위기가 뭐냐 하면은 본인이 믿음이 없을 때 위기가 돼요. 전에 울산강의에서 ‘끈 떨어진 자’라는 제목이 있었어요. 끈 떨어진 자. 끈이 똑 떨어져버렸어요. 이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믿음이 끊어진 거예요. 한 50년, 60년 동안 교회를 다녔는데 믿음이 없어요. 교회 다닌 실적이 있고 뭐 여러 가지 활동도 많이 하는데, 정작 본인은 나를 믿는 것 외에는 전혀 믿음이 없어요. 내 믿음과 내 사랑 그것 외에는 어떤 믿음이 없어요. 끈 떨어진 자에요. 끈이 떨어진 거예요. 탈출불가에요. 탈출이 불가합니다. 끈이 있어야 탈출이 되죠. 끈이 떨어졌는데.
끈이 떨어졌으니까,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이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다면 끈이 떨어졌으니까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뭐가 나오겠습니까? ‘나’가 나오는 거죠. ‘나’가 나오죠. 누구의 소식이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나로부터 해서 나로 가니까. 내 이야기가 나오죠. 내 이야기가 나오니까 상대방에게서는 ‘너’가 나오죠. 나와 너. 물론 그, 그녀가 있지만 내가 그 사람을 부르기 전에는 대기상태에 있지요.
근데 만약에 내가 얼굴을 돌려서 그, 그녀, 그 사람을 부르면 그 사람은 뭐가 됩니까? ‘너’가 되죠. 그러니까 나 중심으로 주변에 보조시녀들처럼 운집해있는 너, 이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사탄의 구조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관계에요. 이 관계에요. 나를 위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 중심으로 방사구조로 펼쳐져 있어요. 이게 인간의 믿음이에요. 인간은 자기를 믿는 믿음 이게 다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있으면 이 사람이 예수를 믿을 거예요. 믿지만, 믿음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내가 믿는 예수죠. 내가 믿는 예수. 나에게서 나온 믿음이죠. 나에게서 나온 믿음.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구멍 뚫리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절대로 구멍은 안 뚫려있어요. 남에게 구멍을 뚫을지언정 본인은 구멍이 안 뚫려있어요. 절대적인 자존, 완벽한 나 구성이에요. 자기구성이에요. 완벽한 자기구성.
만약에 11월 28일에 완벽한 자기구성이 됐잖아요. 이게 29일이 되니까 허점이 생기잖아요. 허겁지겁 자기가 그 구멍을 메워서 또 오늘 저녁이 되면 완벽한 자기가 돼요. 내일이 되면 또 허점이 생겨요. 철저하게 누구의 사인이라든지 누구의 표현이 되기 싫어요. 나는 나 그 자체로 완결돼요. 자주적이고 자족적이다. 스스로 자기 만족에 빠지는 겁니다.
이걸 이사야 강의에서 했어요. 내 위에 더 높은 사람이 없다. 바벨론이, 계명성이 그런 이야기 했죠. 나는 나 스스로 있다. 누가 나와 비할 데가 있을까? 그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 보면 또 나와요. 우리 음녀가 최고다. 짐승이 말하기를 우리가 최고다. 우리는 그 짐승을 되게 부러워해요. 나도 언제 저런 경지에 올라가느냐. 교회에서 하는 일이 뭐냐 하면은 도 닦는 일을 하죠. 목표를 정해놓아요. 최고의 자리에 누가 올라가느냐, 여기에 필히 계단이 있겠죠. 제자훈련 10단계 이런 게 있겠죠. 공부할 때는 힘들지만 뭐가 있기 때문에 힘든 것을 이긴다? 목표가 있어요. 그 목표의 자리는 뭐냐, 내가 절대존재의 자리의 목표로 올라가는 거예요. 이게 절인지 교회인지 분간이 안 되죠.
진정한 교회는 나 자신이 구멍이 뚫리고 내가 찾는 너도 구멍이 뚫렸어요. 그러면 한번 적어볼게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죄다. 이렇게 되겠죠. 허점투성인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이 구멍사이를 뭔가 뚫고 지나가야 되죠. 이 구멍은 무엇 때문에 생겼습니까? 내 속에 사탄이 있는데, 이 사탄 있음을 지적하고 빼내고 주님이 이 빈자리를 채울 때, 이 교회라는 것은 십자가로서, 이렇게 목걸이 만들 때 구슬 꿰듯이 십자가 고리로 꿰어버리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주 안에서 교제한다는 거예요. 주 안에서. 주 안에서 십자가로.
꿸 때, 이 사람들이 문벌이 좋지 않고 학벌이 좋지 않고 돈이 없는 사람도 있겠죠.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교회가 뭐냐, 너희 가운데 문벌 좋은 사람이 누가 있으며 가진 자가 누가 있느냐, 못난 것들을 택하사 가진 자를 뭐한다? 부끄럽게 하시고. 어리석은 자를 택하사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고린도전서 1장 마지막에 보면 오직 누구만 자랑한다?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하심이라. 이게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까? 지금 구슬을 꿰었죠. 나 없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가 아니고 ’우리가‘에요. 우리가. 나가 아니고 우리가 돼요.
1+1+1+1..=0, 왜 만나느냐, 0이 되기 위해서. 내가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기 위해서 만나는 거예요. 모든 성경모임이나 교회모임은 내가 없다는 것. 왜냐하면 내가 없다는 말은 내가 있죠. 내가 있지만 구멍 난 나는 이게 껍데기, 포장지에 불과하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노트북을 직구로 구입했는데 와보니까 벽돌 두 개. 이게 없는 거죠. 아니, 포장지는 왔죠. 포장지를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포장지는 있는데, 문제는 내가 찾는 것은 노트북을 신청했잖아요. 노트북을 찾으니까 노트북은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없는 거예요.
나에게서 뭐가 없다? 나가 없는 거예요. 내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빼낸 겁니다. 왜? 사탄이라고. 악마 있다고. 악마의 자리에 주님 집어넣은 겁니다. 그러면 이건 뭐냐 내 안에 뭐가 있다? 십자가의 취지가 살아있는 겁니다. 십자가의 취지가. 십자가를 소유한 게 아니고요. 구멍이 났다니까요. 구멍 난 것은 소유라고 하지 않습니다. 구멍 뚫린 것을 뭘 소유해요. 주님의 십자가의 표현형이다. 표현형, 십자가의 표현형이다 이 말입니다. 또는 십자가를 담는 그릇이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그릇밖에 없다. 로마서 9장에 나오죠. 자비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 성도는 뭐냐, 자비가 있는 자비의 그릇이죠. 이 자비라고 하는 것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선물로 받은 겁니다. 구멍 뚫린 데에 예수님이 들어온 것은 그 자체가 이제는 나를 주님이 접수해가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지난 낮 설교 할 때에 우리 외손녀 꿈 이야기를 했죠. 제가 꿈 이야기를 잘 안하는데 너무 실감이 나서 현실인지 잘 모를 정도에요. 애가 우는데, 보니까 이부자리랑 다 있는데 애가 우는 거예요. 단지 누가 없느냐 하면은 엄마가 없어요. 엄마가 없다고 그렇게 우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여러분 밥 먹죠? 밥 왜 먹습니까? 제발 밥값 하라고 했죠. 엄마 찾아줘야죠. 성령을 받았으면 사람들에게 엄마, 아빠 찾아줘야죠. 물론 엄마, 아빠가 없다고 우는 사람에게 줄 필요가 있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줄 필요가 없지만. 그러나 밥을 왜 먹고 우리가 왜 삽니까? 그냥 밥을 먹기 위해서 산다는 것은 그건 마귀의 짓거리고. 주께서 우리에게 공기와 햇빛과 밥을 줄 때는, 우리는 엄마가 필요한 사람에게 엄마를 찾아줘야 한다고 했죠. 엄마를 소유하는 거예요. 본인도 그런 입장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구멍이 뚫리지 아니하면, 구멍이 뚫리지 않았으니까 아랫배 뱃살이 불룩 튀어나왔겠죠. 결국 인간 둘이 만나가지고 무슨 시합을 하느냐 하면은 누가 아랫배가 많이 튀어 나왔는지 이 싸움 한다고요. 누가 돈이 많고 월급이 많고. 구멍이 아니고 이거는 완전히 자기 안에 사탄이, 귀신이 누가 많이 들어있는지 싸움한다고요. 니는 네 마리. 나는 일곱 마리. 오늘날 교회가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 열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들어간 것은 예수님 본인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조건이에요. 인간은 피조물인데도 불구하고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피조물이 아닌척하고 있죠. 자기가 신이라고 여긴다고요. 그러면 주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은 신이라고 우기는 그걸 구멍을 뚫는 방법밖에 없죠. 그러면 구멍을 뚫어야 하면, 그들이 구멍 뚫리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그들이 이미 사탄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죠.
이 세상 전부를 큰 원이라고 하면, 이걸 축소하면 열두 제자가 되고, 열두 제자 안에 중요한 문제는 열한 명이 아니라 한명. 11+1, 한 사람이 열한 명의 운명을 결정짓는 겁니다. 이 세상을 악마가 결정짓는 축소판으로 만든 거예요. 요한복음 6장을 한번 봅시다. 6장 70절요.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마귀니라, 주께서는 마귀하고, 마귀가 싸움의 대상이 되지는 않죠. 싸워야 되겠지만. 마귀마저 주님이 사용하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은 사람 좋아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 본인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그 중에 하나는 마귀여야 한다. 마귀여야.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의도적으로 택했어요. 세상에서 정치경제문화사회, 그들이 어떤 일을 벌일 때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세상 문명이 지금보다 더 잘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죠. 과거보다 더 발달된 현재,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 그래서 모든 관심사가 발달, 성장, 부흥,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 잘 되는 것, 커지는 것, 번창하는 것. 관심사가 다 거기에 쏠려갑니다.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 그냥 넓은 길로 가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하나가 돼서 넓은 길로 가요. 마음이 하나가 돼서. 좁은 길로 갈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자진해서 망하는 길을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근데 뒤에서 “너 나와!” 하나님께서 딱 선물을 줘가지고, 멕아지(모가지)를 쥔다고 하죠. 딱 붙들어가지고 넓은 길로 가는 그 노선에서 다른 길로 가게 만듭니다. 버스가 좋다고 해서 그거 영생 가는 버스가 아니에요. 버스가 험하다고 해서 그리고 그 길이 비포장도로라고해서 지옥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인생을 연구하고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힘들게 산다고 해서 지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 없는 것이 위기에요. 믿음 없는 것이. 믿음 없이 고난의 길을 가고 믿음 없이 넓은 길로 가는 이것이 둘 다 지옥이에요. 믿음이에요. 믿음. 환란과 곤고와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그걸 내리십니까?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그 믿음.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그 믿음의 우리가 징조죠. 징조. 믿음의 표현형이라니까요. 믿음의 표현형.
나는 어떻게 선하고 나는 어떻게 악하냐, 그런 것은 따지지 마라는 말이죠. 니가 가야 될 곳은 바로 나는 착합니까? 악합니까? 라는 자체를 벗어날 세계에요. 그 벗어난 원리가 미리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우리한테 뭐가 구멍이 뚫려야 합니까? 나는 착했으니까 복 받을 거야, 나는 악했으니까 벌 받을 거야, 라는 그 사고방식이 천국의 원리로서 폭파당해야 해요. 북한 미사일을 여기다가 쏘아야 돼요. 바다에 쏠 게 아니라 여기에다가. 여기에다가 한방 쏘아버려야 된다 이 말이죠.
배불뚝이해가지고 구멍도 나지 않은 인간은 뭐로 포장이 되어 있느냐 하면은 나는 이렇게 잘 먹고 잘 산다. 고난도 없다. 왜? 나는 선하니까. 나는 의로우니까. 이래 되거든요. 선해서 복 받았는데 내가 뭐 잘못이고? 내가 잘해서 가는데? 이거라는 말이죠. 그러나 선한 일은, 의인은 없다고 했죠. 한명도 없죠. 한명도 없는데, 한명도 없으면 한명도 없는 쪽으로 가야되는데, 우리는 왜 자꾸 나라도 선한 쪽으로 가서 복 받으려고 교회에서 기를 쓰고 새벽제단부터 해가지고 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믿음이 없으니까 믿음을 때우려고 하는 거예요. 믿음이 없으니까 있는 척을 하기 때문에 이런 거예요. 있는 척을 하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척을 하는 것은 나는 잘났다와 이꼴(=)이 되는 거예요. 잘났으니까 나보고 탓하지 마세요. 이거잖아요. 못나야 되는데 왜 그렇게 잘났는지..., 성경대로 하면 우리가 못나야 정상인데 왜 자꾸 내세울 게 있고 잘 나야 되는 그쪽으로 가느냐 이 말이죠. 그게 넓은 길이고, 파멸의 길이고, 그 선두의 주동자는 누구냐? 악마입니다. 오늘날 악마가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에요. 우리 인간 사회의 위대한 영도자.
집사님 얼굴 좋네요? 라고 하면 내가 착해서라고 해요. 착해서 얼굴 좋대요. 착해서 얼굴 좋은 것이 아니고, 주님이라는 좋으신 분의 징조에요. 징후라니까요. 그게 믿음이 주는 선물이거든요. 누구의 표현형입니다. 단독적으로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다는 모든 것이 차단되고 끊어진 거예요. 자, 중간 결론을 내립니다. 가룟 유다의 의미는 차단입니다. 단절입니다. 끊어짐. 오늘 제목은 끊어짐. 가룟 유다의 의미는 끊어짐입니다. 아무도 이을 자가 없어요. 끊어짐. 하나의 개체가 주님의 개체에 이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주도권은 악마가 쥐고 있기 때문에. 가룟 유다가 설쳐버리니까 열두 제자는 와해가 됐어요.
지난 강남강의 첫 번째에서 시작을 이렇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기 공동체, 예수공동체를 부수려고 했다고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스스로 예수 집단에서 스스로 떨어져나가려고 했어요. 왜? 성령이 와야 이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성령이 와야 될 이유를 알아야 되기 때문에. 성령 안에 이으려면 내가 나설 입장이 안 된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아야 돼요. 인간은 본인만 믿는 믿음 때문에, 그 믿음이 결국은 주님하고 결별되게 되어 있어요. 그 믿음 자리에 다른 믿음이 와야 돼요. 나는 꽉 채워져 있다는 그 믿음 말고. 나는 나를 내세울 수 있다는 기본적인 토대와 근거지가 완전히 박살나버렸다. 뻥하고 뚫렸다.
도대체 나다움이 어디에 있느냐, 나다움 자체가 나는 구성될 수 없다. 성립될 수 없다. 사탄이 그동안 우리로 하여금 너는 너답다고 자꾸 안겨줬는데, 안겨주고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에요. 계속해서 우리는 욕망에 미흡한 거예요. 욕망에. 욕구에 미흡하고 욕망에 미흡하고. 항상 우물에 물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은 물 길러 와봤자 또 물 길러 와야 돼요. 그 물을 먹는 자는 목마르거니와, 목마르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목마르다는 말이. 결핍을 뜻하는 겁니다.
분명히 우리를 붕 띄워 줘놓고는 계속 마귀가 욕망의 결핍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돈 벌만큼 벌었는데 돈 더 벌고 싶고. 호강할 만큼 호강했는데 아직도 배고프다. 이렇게 하고 있고. 월드컵 4강하면 됐잖아요. 뭘 아직도 배고파. 히딩크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매일 가지고 있으면서 배고파해요. 그 배고픈 만큼 감사가 날아가 버리고 고마움도 없어요. 더더더더더~ 계속 이러고 산다고요. 미지의 그 환각적인 발전과 진보를 내다보면서. 진화를 내다보면서. 모든 교육이, 교육내용이나 환경이 사탄이 시키는 대로 다 가고 있어요.
혹시 위험을 무릅쓰고 철두철미하게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초등학교 교사가 애들 눈치 안 보게 학부모 눈치 안 띄게 은근슬쩍 가끔 하나님말씀 전하면서, “하나님 지금 전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좀 봐주세요. 나중에 이 사태로 분란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벌벌 떨면서 하나님 말씀 전해봤자, 그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입니까? 애들에게 뭘 요구해요? 발전을 독려하고 격려하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이런 하나님은 없다니까요. 이런 하나님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잘 될 이유가 없잖아요. 내가. 내가 잘 되면 그건 내가 나를 믿는 것이지, 이거는 내가 누구의 징조고 누구의 징후가 될 이유가 없잖아요. 누구의 표현형이 아니다 이 말이죠.
가룟 유다는 사탄이고 주님을 위해서 일부러 뽑아 세워놨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정작 상대하는 것은 사탄하고 상대하지 열두 제자하고 상대하는 것은 아니겠죠. 자, 26장 47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그리고 난 뒤에 49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라고 하는데 이거는 하나의 신호에요.
어두컴컴해가지고 키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정작 누구를 우리가 체포해야 될 사람인가를 그 경찰관들에게 알려주는 거죠. 잘 분간이 안 되니까 엉뚱한 사람을 잡아가지고 갔다가 또 잡으려면 번거롭다 이 말이죠. 정확하게, 예수와 함께 3년을 살았으니까 딱 집어서, 저 사람, 저 사람들은 아니고 제자들이고, 딱 저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려면 인사하고 키스하고 이래야죠. 신체적 접촉이 되어 있어야죠.
결국 여기서 사탄은 누구를 노린다? 예수님만 노리죠. 어려운 말로 한 놈만 잡는다는 식으로 예수님만 노리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의 오늘날의 사탄도, 사탄의 활동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생각에서 뭐만 제거시킵니까? 십자가복음을 제거하는 것이 결사적이에요. 악마가 온 노력과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대화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요.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예수님 빼고는 다 용납해줄게.”
가정의 부부이야기나 자식이야기나 뭐만 빼고 이야기해라. 예수님 빼면 뭐가 남겠습니까? 가정의 행복이 남겠죠. 자식 성공이 남겠죠. 교회에서 예수님 빼버리면 교회부흥이 남겠죠. 그걸 마귀가 원하는 거예요. 그걸. 사탄은 주님에 의해서 구멍이 났다는 사실을 사탄이 제일 싫어하는 거예요. 사탄이 무능하다는 사실을 사탄이 제일 싫어해요. 그동안 사탄이 사람들에게 겁을 주고 왔잖아요. 근데 겁주는 대장이 허풍이더라는 소식이 들리게 되면 그거 입맛 없다는 말이죠. 지가 계속 대장질을 했는데, 아직도 대장질을 하고 싶은데, “저거 허수아비야, 저거 허깨비야. 반말해도 아무 문제없어.” 그래 되면 사탄으로서는 파탄 나거든요.
아까 첫째시간에 한 것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죽을 때 드러나죠. 인간의 본질은. 그 사람이 목사고 장로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죽을 때 뭐가 나온다? 이게 뭐가 나온다? 교회가 나오면 안 되죠. 믿음 나오면 안 되죠. 나 믿습니다가 나오면 안 됩니다. 뭐가 나와야 돼요? 십자가가 나와야 돼요. 죽을 때 십자가가 나온다면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죠. 그러면 오늘 나와야죠. 오늘. 오늘 저녁 먹다 죽을지 모르니까. 오늘 나온다는 뜻은 평소에 늘 건드리면 나온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십자가의 표현형이니까.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한 거,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십자가 외에는” 그 다음에는 “결코 자랑할 게 없으니” 아, 참, 사도바울이 장가를 안 가서 자기 새끼 자랑할 게 없으니까,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맙시다. 사도바울이 집안이 변변치 못해서 자랑할 게 없으니까, 이러지 맙시다.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상처가 있어요. 그리스도로 구멍 난 사람이에요.
구멍 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니는 나를 핍박한다고 했죠. 내가 평소에 자랑하고 싶은 그 자랑거리가 사탄의 앞잡이로서 주님을 핍박한 원인제공자가 되었다 이 말이에요. 내가 나 자랑하는 것이 남들 보기에는 그냥 무심코 그럴 수가 있다고 하지만, 이게 나를 구원한 주님을 욕보이는 짓이에요. 그게.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한 셈이 돼요. 철딱서니가 없이 우리가. “나 적어도 이 정도야.” 그 자체가 욕보이는 짓이에요. “나는 설교도 하고 강의도 하고 훌륭한 목사다.” 이 무식한 이 이야기가 주님을 욕보이는 이야기라고요. 이게요.
그러면 욕 안 보이는 일은 뭐가 있습니까? 없죠. 구멍이 났으니까. 욕보여놓고, 욕보였기 때문에, 그걸 알기 때문에 나는 뭐만 자랑한다? 십자가만 자랑한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순서가. 내가 욕 안 보이면 내 자체가 자존자가 되고 내가 대단한 사람이 돼버려요. 구멍이 없는 사람이 돼요. 우리가 육신이 있기 때문에 사탄이 구멍을 계속합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승리했기 때문에 사탄이 낸 구멍을 주님의 십자가로 메우고. 그러면 나는 죄인이었는데 주님의 용서해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 끊임없이 그 실속과 그러한 경험을 평생 동안 하게 되는 겁니다. 평생 동안.
그러니까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만남이, 이게 다 사전에 주님께서 계획한 거예요. 계획이 뭐냐 하면은 구원의 구조, 구원의 구조를 위해서 열두 제자와 예수님과의 헤어짐과 다시 만남이 있어줘야 되는 겁니다. 헤어짐과 만남이 나중에 구조로 정착이 되죠. 이게 구멍 뚫림과 구멍을 메워줌. 한 사람이 범죄 해서 죄인된 것처럼 한 사람이 의인되어서 우리가 의인되었으니, 우리의 죄가 더한 곳에, 구멍이 난 곳에 뭐가 넘친다? 은혜가 넘친다. 구멍이 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거예요.
우리가 구멍이 한 곳에만 났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그걸 아셔요. 니가 오른 눈이 범죄 하면 그걸 빼버려라. 오른 눈도 고장이 났고 왼눈도 고장이 났고. 왼팔, 오른팔 다 고장이 났어요. 온천지가 완전히 스펀지처럼 구멍덩어리에요. 벌집이에요. 전부 다 주님을 모독하는 식으로 사탄으로부터 격려와 독려를 받고 살아온 겁니다. 잘한다! 훌륭하다! 잘한다! 훌륭하다! 제가 말하는 죄라고 하는 것은 선악에서 나온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을 안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거예요.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죄라고 지적하는 자체가 죄라고요. 죄라고 생각한 그 자체가 죄라고요. 왜냐하면 생명나무에서는 죄가 이미 없는 거예요. 죄가 없고 우리는 뭐냐 하면은 의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조로서 죄인이 되는 겁니다. 의인인데, 그 의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 하면 내가 죄인이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이 말입니다.
죄인이기에 주님의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구원이 아니고 자기를 반영하고 자기를 표현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겁니다. 그게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오게 되면 너희는 이렇게, 이렇게 해서 뭐가 돼라? 예수의 증인이 된다. 예수의 증인.
이런 예수의 증인이 되는 절차를 제자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계속 그런 식으로 알아서 척척 빈틈이 없이 일을 했잖아요. 닭이 울 때 세 번 부인한 것이 아니고, 세 번 딱 할 때, 그때 타이밍이 완전 인공지능 같아요. 타이밍이요, 이게 되면 여기에는 이게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가 부인할 때 그 다음에 닭! 사인이 들어가면 꼬끼오~ 하고 우는 거예요. 꼬끼오~ 하고. 그게 뭐냐 하면 구조에요. 이 구조를 오늘날 성도에게 그대로 뒤집어씌운 거예요. 성도에게.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그 타이밍은요, 성도가 예상을 못해요. 어느 타이밍에서 그런 고백이 터져 나올지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아하, 내가 십자가 없이 평소에 꾸준히 살았구나!’라는 그 순간이 십자가만 자랑하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를 빠트린 게 위기에요. 위기.
인생의 가장 큰 위기는 돈이 없을 때가 아니고, 십자가가 없어질 때 그거는 끈 떨어진 자가 되겠죠. 근데 그 십자가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또 다시 니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반증해주는, 그런 믿음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구조가 되는 거예요.
어떤 구조? 가룟 유다의 구조가 있는 반면에 열한 제자의 구조가 있어요. 열한 제자의 구조는 배신 때렸는데 다시 주께서는 배신 때렸음을 토대로 해서 구원하는 구조인 반면에, 가룟 유다는 그냥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방치하는 겁니다. 남의 자식이니까. 자기 자식이 아니거든요.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어떤 분은 제 설교를 듣고 성경을 안 본다 해가지고, 그 소리 듣고 강의 중에 자꾸 성경본문을 적어놓는 경향이 있어요. 이거나 좀 알라고.
히브리서 12장 7절요.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절,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뭐라고요?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내놓은 자식이라 이 말입니다. 그건 내 자식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지 자식 건지지 남의 자식 왜 건드리겠어요. 그냥 니는 니 사는 대로 동성애를 하든지 뭘 하든지 그냥 놔둬버려요. 까불이 짓 하든지 그냥 놔둬버린다고요.
에베소서 6장에 보면 부모들은 자식에게 할 때 주 안에서 훈계하고 순종하라고 가르쳤죠.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은요, 부부에게서 자식이 생기면 부부가 끝나고 부모가 돼요. 부부는 약속이 없지만 부모는 약속이 있어요. 약속된 계명이 있어요. 자식을 약속에게 순종하게 하는 책무가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자식이 누굴 가르친다? 부모로 살 인간을 부모가 되도록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부모가 은혜가 아니고 뭐가 은혜냐, 자식이 도리어 은혜다. 자식 때문에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거예요. 자식이 없었으면 내 행복만 추구했는데,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자식을 줬기 때문에 이건 발로 내다 차버릴 수도 없고. 도대체 나는 그동안 나를 위해서 살았는데 자식을 낳고 보니까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지장이 되는 겁니다.
내가 잠자고 싶을 때 자고 내가 먹고 싶을 때 먹어야 되는데, 애 하나 낳으니까 그 애는 시계도 없어. 그냥 울죠. 젖 달라 하죠. 밥 달라 하죠. 내가 자아 찾는 시간을 다 빼앗아 가버려요. 돌아볼 시간이 없어요. 애 잘 때 자고 애 먹을 때 먹고 하다보니까, 그렇게 몸매 스타일을 관리했던 거 다 도루묵이 되고 살이 퍽퍽 찌죠. 고추장, 참기름 넣어서 비빔밥 한 양푼 만들어서 애한테 받은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풀잖아요. 그것도 또 뺀다고 애쓰고.
그러니까 이 가룟 유다가 있는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사탄이 있는 것을 감사해야 돼요. 나에게서 나를 정떨어지게 하는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안 붙들어도 되는 그런 부담을 덜게 하신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먹든지 마시든지 환란이든 곤고든 나는 주님의 표현형이니까. 주님의 증인되게 하신 것을 감사하세요.
그래서 나는 항상 아랫배가 허해. 왜? 구멍이 뚫렸으니까. 또 돌아서서 아침이 되면 꽉 차있어요. 근데 주께서 또 구멍을 뚫어줘요. 연통을 뚫듯이 바람이 쑥쑥 불어야 돼요. 바람이. “니 누구고?” “나 병신이야. 바보 같아” 괜찮아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잖아요. 정신 차리지 말라고. 바보가 정신 차리는 것이 어디에 있어요. 나 바보같이 살았노라. 그냥 바보같이 쭉 사세요. 등신처럼 사세요. 또 장애인 옆에서 고소하지 말고. 비하 받으면서 사세요. 낮추며 사시라는 말이죠.
근데 이 똑똑이가 나왔어요. 똑똑이 한번 봅시다. 똑똑인지, 안 그러면 동백이에 나오는 까불인지 모르겠다만. 마태복음 26장 51절,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게 뭡니까? 베드로거든요. 베드로가 칼을 빼어서 말고 라는 종의 귀를 쳤잖아요. 이게 지 아랫배에서 나온 힘 가지고 쳤잖아요. “주여, 힘이 있습니다.”라는 그런 뜻이라 이 말이죠. 그 힘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님이 언제 힘 달라고 했어요? 지금 내 편이 돼달라고 했어요? 지금 내편이 모자라서 너 보고 협조를 구하는 거야? 지금 남이 미운 게 아니고 베드로가 미운 거예요. 베드로는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동안 사람들에게 뭘 배웠어요? 뭘 따라다녔어요? 같이 협조하면 뭐 하늘나라가 되는 줄 알고.
교회 망해도 구원받아요. 왜?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니까,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했잖아요. 교회 없어도 주님이 계시면 구원이 된다 이 말이죠. 그분이 아이고, 깜빡 잊었다고 그런 치매현상을 안 보여요. 아이고, 너 빼놓고 왔구나, 이런 거 없어요. 꼼꼼히 다 살펴서 바꾸어줍니다.
뭐냐 하면은 지옥에 물든 우리를 천국에 살도록 합당한 존재로 바꾸어주는데, 거기서 자기의 귀한 본질들을 잃어버려야 되죠. 마귀가 심어준 자긍심 이런 것은 다 날아가야 돼요. 나는 나다가 아니라 나는 누구의 표현형이다. 누구의 증거물이다. 나보고 따지지 마. 멱살 쥐려면 주님의 멱살을 쥐어. 나를 나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니까. 왜 나보고 멱살을 쥐느냐 이 말이죠.
아까 말한 우연이죠. 모든 게 우연이니까 내가 되고 싶은 인생을 못 살아요.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내 재산이고 뭐고 있으면 다 박살난다고요. 진짜 칼 빼고 하는 게 지 성질이거든요. 그 성질이 결국에는 예수님을 배신하는 성질로 이어졌잖아요. 그래서 베드로가 지옥 갔습니까? 아니죠.
그게 천국 가는 절차 중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우리는 매일 이런 절차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가 하겠습니다, 라는 이런 베드로 같은 망나니짓을 계속 하고 있어요.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에게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기도빨, 헌금빨, 전도빨, 그래서 그 결과를 교회부흥과 이어 지는가 확인해보고.
이 세상에 내 것이 없습니다. 없는데 내 것을 챙기겠다는 것. 어느새 마귀가 내 구멍을 메우고 있어요. “니도 자존심이 있어야지. 니도 체면도 있는데 병신같이 살아야 되겠어. 니는 니 것을 챙겨야지.”라고 마귀가 또 구멍을 메워주네요. 우리는 또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서 ‘그래, 나는 살아야 돼.’ 제가 전에도 그런 설교했잖아요. 강남강의에서 제가 몇 번 이야기한다마는, 지겹지만 또 이야기해야겠어요.
부모들이 신을 믿는 이유는 자식 때문이다. 부모들이 교회 다니는 이유는 자식 때문이다. ‘아직 쓰러지면 안 돼. 자식을 봐서라도 내 죽으면 안 돼. 다시 불끈 동여매고 장사해가면서 나는 살아야 되겠어. 내가 쓰러지면 자식도 쓰러지는 거야.’ 자식이 하나님이에요. 그게 마귀 짓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죠. 그게 필연이거든요. 우연이 아니고.
그게 자기의 힘을 모으는 거예요. 착하면 복 받을 거니까 교회 와서 시키는 대로 착한 일 많이 하고 교회 봉사하는 거예요. 이게 점점 마귀가 돼가고, 이건 지옥 가는 거예요. 마귀와 합세하는 거예요. 십자가가 빠져버리니까 오기만 남았지 감사는 날아가 버렸어요. “이렇게 바르게 살았으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복 줘가지고 지금껏 내가 신앙생활 하잖아.” 이거 주장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나 베드로는 누굴 만나야 하느냐, 닭을 만나야 돼요. 만나기 전에 베드로는 실컷 예수님을, 자처해서 솔직하게 내 안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라는 그런 실토. 믿음 전혀 없음의 실토가 나올 때 그게 예수의 증인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피조물인 주제에 어떤 독약을 먹었는지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으로, 그게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저희들 박살내주시고 늘 십자가 앞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표현형으로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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