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선물의 원천(엡4;8-10) 19072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7. 31. 18:52
2019-07-28 12:47:44조회 : 1189         
   선물의 원천 190728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선물의 원천(에베소서 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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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9-07-28 13:34 
선물의 출처 

2019년 7월 28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4:8-10 

(4: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4: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전쟁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 생소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를 위한 전쟁’에 치열하게 매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나 아무 탈없이 잘 보존되면 그럭저럭 인생 잘 살았다고 자부하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기 정리는 늘 시간적입니다. 과거를 따지고 그것을 현재와 미래로 연결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일은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입니다. ‘위와 아래’를 연결 지으면서 시간을 스톱시켜서 봅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새삼 묻지를 않습니다. 지금 우리 인간의 형편을 수직적 체계로 변형시켜 살펴보십니다. 즉 “너도 너 나름대로 전쟁 중이다”라고 하십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의 전쟁은 뭡니까? 그것은 ‘실존적 전쟁’입니다. 곧 ‘自己(자기)성’을 지키기 위한 전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막판에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기 성’을 견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 것을 지키면서 하나님 믿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성, 곧 실존성을 보통 인간들이 다 하는 일입니다. 

‘보통 인간’이란 이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불신자들의 동기모임’ 같은 겁니다. 그들은 자기들 사이에 대화하는데 하등 지장이 없는 이유는, 각자 자기 것을 지키겠다는데 의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존이란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옆 사람이 아무리 다이어트해도 내가 살이 빠지지 않는 상황입니다. 

또 옆 사람이 아무리 해탈에 이르렀어도 내가 해탈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은 각각 자신의 실존성을 사수한다는 점에서 이 세상의 보통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런 보통 사람들의 잘못은, 자신의 과오를 본인이 치료하겠다고 나서는데 있습니다. 마치 심정지된 환자가 스스로 자기를 인공호흡해서 살려내겠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들의 전쟁양상은 항상 이런 식입니다. 내가 나를 기어이 살려내겠다는 겁니다. 전쟁을 하는 와중에 사람들을 패배자와 승자로 구분되는 최종 마감의 상태를 고대합니다. 사람의 심보는, 자신을 패배자가 아니라 승자로 세상에 나타나고 싶어합니다. 자신은 망해서는 아니되는 존재며, 자신은 잘못되면 안 되는 존재라고 우깁니다. 

그게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왜 그게 마땅할까요? 그럴 근거있습니까? 없습니다. 인간들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얼간이인 줄을 모릅니다. 인간이 좋든 싫든 인간들은 벌써 하나님의 전쟁에 말려들었습니다. 하나님 전쟁의 적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앞세워 설정한 새로운 세상 체계에 의해서 밝혀집니다. 

그 체계라는 것이 바로 ‘수직체계’입니다. 위와 아래로 펼쳐진 상황이 제시됩니다. 인간의 과거는 날마다 유실됩니다. ‘오늘’이 되면 ‘어제’는 벌써 떠났습니다.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이 손짓하면서 빨라 오라고 합니다. 인간의 처지는 진퇴양난입니다. 뒤의 것은 남지 않고 모조리 사라지고, 앞에 것은 죽음 속으로 들어오라고 통보합니다. 

이 둘 사이에 인간은 끼어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유령같습니다. 실체가 날마다 손실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인간은 삭제의 대상이며 제거의 대상입니다. 인생을 두고서 슬프다, 힘들다 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현실운용체계가 자기 몸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의 내부를 꺼집어내어 말씀으로 공개합니다. 

마치 도마 위의 곱창처럼 말입니다. 그 물컹한 덩어리를 상대하는 것은 구약 시편 68:15- 
18입니다. “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이 인용된 말씀 속에 18절의 말씀이 오늘 에베소서 4:8입니다. 

세상에서도 분주하고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 전쟁의 양상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전쟁입니다. 여기에 승자는 패자들로부터 보상과 배상을 받게 됩니다. 이 방식이 세상 사람들이 실존적으로 노리는 바입니다.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되면 패자로부터 그동안 고생도 보상도 다 받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마치 재판하면서 이기게 되면 상대방으로부터 재판비용까지 받아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 이런 식의 전쟁에서 최종 승자는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에베소서 4:8에 보면, 승자가 도리어 패자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시편 68:18과 반대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모든 인간들의 실존적 투쟁의식과 승자가 되려는 모든 시도를 하나님께서 거부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구원시도는 수직적이 아니라 시간 요소를 감안한 수평적입니다. 쉽게 말해서, “과거에 예수 믿고 그 이후에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그것은 구원을 무효화할 수 있는 겁니까?”라는 질문이라든지, 아니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앞으로 어느 한 순간에 복음을 받아들이면 과거는 불문에 붙이고 천국 가는 겁니까?”라는 질문 같은 것들이 바로 수평적 현실 체계에서 나온 겁니다. 

성경의 방식은 위로부터 주시는 겁니다. 햇빛도 위로부터 주시고 단비도 위로부터 주시는 겁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이 말씀 자체가 하나님은 인간의 실존을 비켜 가시는 겁니다. 구원 소지, 혹은 천국 소지는 미끼 상품같은 것이었습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얼마나 개인적으로 자기 것 자기가 지키는 식으로 살아가는 지를 들통내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참새는 주님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참새가 인간보다 먼저 아침을 맞이합니다. 참새나 들풀은 실존적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운용체제가 위에서부터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것은 성도에게 부여한 것은 비록 성도의 몸은 작고 소멸되지만 ‘주님 복음의 전체’입니다. 

이게 ‘충만’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보편성입니다. 이로서 성도에게는 ‘망한다’든지 ‘잘못된다’라는 것은 원천적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본인을 매일 반복해서 제거 대상, 삭제 대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그 나라의 의의 위력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7-30 21:18 

34강-엡 4장 7절(선물의 출처)1907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8-10절입니다. 신약성경 313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4:8-10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바울이 계속해서 편지에서 일반사람들, 보통사람들이 관심 없는 것에 대해서 줄기차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현실이 현실이 아니고 이 성경 안에 있는 이것이 현실이라고 계속해서 강매, 또는 강요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뜻은, 나는 그냥 보통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지요. 그냥 보통 사람, 특별한 사람 말고 그냥 하던 대로 편하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편지 입장에서는 뭐냐? 그 보통사람 되는 것이 불신자그룹이라는 거예요. 불신자동기동창 모임이라는 겁니다. 이 시대가 있는데 같은 시대를 사는 불신자의 집합,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평범한 사람, 보통사람이에요. 보통사람에서 교회 나오는 것은 뭐냐? 소일거리입니다. 바쁘면 안 나와도 되고 안 바쁘면, 그리고 심심하면 나오면 되고. 

그 외 아무것도 아니에요. 교회 나오는 것이 그렇게 다급하고 심각한 문제가 아닌 거예요. 여유 있을 때 사회생활 한 번 해보려고 오는 겁니다. 따라서 교회와도 교회가 에베소서 4장 8절에서 10절, 이 이야기를 해줄 수가 없어요. 고객이 오신 목적과 교회가 외쳐야 될 복음의 목적이 안 맞으니까 그냥 와서 시원한데 잠만 주무시고 그냥 가실 수밖에 없는 결과가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살만하니 교회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 사도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인간을 사형시키는 처형장으로 이미 실시를 해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이 복음의 내용에 의하면 인간의 근원적인 …… 보통사람들은 말합니다. 불신자들이죠. 이 사람들의 잘못은 뭐냐? 자기 평소의 잘못을 자기가 치료해야 된다고 하는 것, 이것이 큰 화근입니다. 이것이 문제지요. 

왜냐하면 종교라 하는 것은 흔해빠진 것이 종교기 때문에. 종교라 하는 것은 내 문제점을 내가 알고 거기에 내 행함으로 채우면 된다는 거예요. “가르쳐만 주옵소서.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래서 치료하겠습니다.” 이런 식이에요. 그런 식으로 교회가 전부다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뜻은 그게 아닌데. 

심정지 환자, 심장이 멈춰진 환자가 자기를 스스로 인공호흡해서 살려낼 수가 있습니까? 말이 안 되지요. 사도바울이 그걸 이미 알고 있어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내 말을 받지 못한다.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 그걸 단정 짓고 나갑니다. 성령 받은 사도바울 입장에서는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시편 68편 15절에서 18절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사로잡힌 자라는 말은 어떤 경우에서 생기는 말이냐 하면, 전쟁하는 전쟁터가 될 때 나오는 단어에요. 사로잡고 사로잡혔다는 단어가. 전쟁 중인 거예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전혀 전쟁 중이 아닙니다. 그냥 여유 있으면 여유 있는 대로 소일거리 하면서 편하게 살면 그만인 거예요. 

전쟁은 옛날에나 했겠지요. 6.25때. 어딜 봐도 전쟁의 징후는 좀 있지만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지 않습니까? 성경말씀이 왜 급작스럽고 시급한 문제냐 하면,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사느냐 죽느냐’에 직면하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어떤 병원에 환자가 왔는데 의사가 “어디 아파서 오셨습니까?” 하면 환자가 말하기를 “저 예쁘지요?” 이렇게 나온다면 지금 잘못 찾아온 거예요. 

병원에 찾아오면 안 되지요. 병원이라 하는 것은 지금 아파서, 급해서 온 거지요. 안 아프면 병원에 올 이유가 없습니다. 치과에 놀러가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이빨이 아파서, 그것도 참다참다 못 참아서 온 사람들이에요. 사도바울이 편지를 쓰는 것은 지금 전쟁 중인데 너희들은 지금 전쟁 중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무슨 전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전쟁은 누가 하고 있느냐 하면, 우리 하나님이 전쟁해요. 하나님은 전쟁 중인데 인간이라는 작자들이 전혀 그걸 감 못 잡고 있습니다. 세상 편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편지, 에베소서뿐만 아니고 여러 편지 내용을 보면, 사도바울이 외칠 때 꼭 이렇게 외쳐요. 인생을 더 이상 이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걸 전제로 합니다. 

“현재 당신이 살아가는 식으로 하루하루 살아봤자 그것은 해결책 없습니다.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단정하는데 그렇게 단정하는 근거중의 하나가 로마서 1장 30-32절에 나옵니다.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여기에 ‘사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뭘 로 보느냐 하면, 사형집행장으로 본다고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의 사형에 비하면 인간교도소에서 하는 이 사형은 사형도 아니에요. 그것은 문제꺼리도 안됩니다. 로마서 1장에 사도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곧 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불감증에 걸려 있어요. 아무 느낌이 없어요, 느낌이! 그것은 관심사가 어디냐 하면, 매일같이 자기 인생을 하루하루 이어가려고 애를 쓰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로마서의 이런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내가 나를 보는 인간, 내가 나를 보는 그런 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어떻게 보느냐 하면, 우리를 삭제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올 때는 자신을 제거해 버려라. 교회 안이고 밖이고 간에 자기를 없애는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보라. 자기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문제가, 우리가 내 인생을 제거대상으로 안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때부터 모든 부질없는 근심걱정이 다 몰려오는 거예요. 왜 세상이 내 뜻대로 안되는가 하는데 정답은 나와 있어요. 

뭐냐 하면, 네가 생각하는 네 몸 자체가 네가 생각하는 현실하고 안 맞으니까 근심걱정이 오는 거예요. 지금 우리 몸이 주님께서 움직이는 현실과 안 맞아요. 안 맞을 때는 삭제당하면 되는 거예요. 제거당하면 되는 겁니다. 사는 것이 불편하다. 불편하면 없애면 되지요. 불편하면 없애면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뭐냐? 내가 잘못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망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 내가 망하면 안 되지요? 그게 하나님의 현실인데요. 잘못되게 안하기 위해서 굉장히 애를 쓰고 있는데 그 자체가 평생토록 악마의 족쇄에 묶여져 있는 것이 성경 형편이라는 겁니다. 

악마에게 발목 잡혀 있기 때문에 매일 생각하는 것이 ‘나는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된다. 나는 뭔가 잘 되어야 된다. 잘 풀려야 된다. 나는 망하면 안 된다.’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혼자만의 오기에 불과한 거거든요. 여러분, 이것은 상식인데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과거가 있습니까? 과거는 매일같이 유실당하고 있어요. 떠내려간다고요. 

큰물에 모든 것이 떠내려가듯이, 홍수나면 집이고, 밭이고, 가축이고 다 떠내려가듯이 과거는 매일같이 떠내려가고 우리의 미래는 누가 반기느냐 하면, 죽음이 반깁니다. 우리는 어떤 상태냐 하면, 없어지는 과거와 오라고 요청하는 그 죽음의 요청사이에서 매일같이 끼어 있는 상태에요. 과거는 없어졌으니까 과거는 유령이지요. 

우리가 앞으로 죽으면 유령, 귀신 되지요. 뒤에서 유령한테 쫓기고 앞에서 유령이 맞이하고 우리 자신은 뭡니까? 우리가 유령이에요. 귀신이라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있어도 이미 삭제당한 대상입니다. 인간이 주님 앞에 안 서니까 꼭 얼간이 같아요. 뒤에서 유실당하고 깎여나가고 앞에서는 ‘빨리 들어와’ 하고 죽음이 손짓하고요. 

마치 머리 기른 채로 마지막 입대시간까지 다 받아놓고, 논산훈련소 정문 앞에서 안 들어가려고 알짱거릴 때, 눈이 안보일 정도로 철모 깊이 눌러쓴 조교가 손가락질 하면서 빨리 들어오라고, 시간 다 되어간다고 빨리 들어오라고 하듯이. 아무리 우리가 이 땅에서 괜찮은 존재라고 어기적거려봐야 그것은 억지인생이에요. 이 몸은 삭제될 몸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이유를 에베소서에서 이야기해주고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위에서 아래로, 위아래, ‘위아래’ 꼭 노래 같아.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여기에 ‘위, 아래’가 있잖아요. 위아래, 위위 아래.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그것을 수직적으로 펼치는 거예요. 수직적으로 펼쳐버리면 시간은 순간적으로 응축, 압축이 되어버려요. 인생이 50년이 되든, 90년이 되든, 백년이든 소용이 없습니다. 현재 네 정황은, 네 모습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순간으로 스톱을 시키고 수 엿가락 늘이듯이 잡아당겨서 하나는 위, 하나는 아래로 쫙 잡아당기는 겁니다. 

누가 그렇게 했느냐 하면, 인간이 너무나 얼간이 같아서 너무나 모르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 대신 인생이라 하는 것은 뭐냐, 위에서 잡아당기고 아래에 왔다가 다녀가는 것이 인생이다, 하는 그것을 주님이 먼저 시범조로 모델로 보여준 거예요. 위 아래로. 우리는 자꾸 과거이야기를 하는데 과거는 없어졌어요. 

미래는? 미래에는 죽어요. 그래도 내일 되면? 내일 되면 오늘이 없어져요. 모레 되면 내일이 없어지고. 그것은 누구나 부정 못하는 겁니다. 자꾸 망상 같은 것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은 꿈에 불과하지 실재가 아닙니다. 헝가리에 놀러간 사람들 죽고 싶어서 마지막 이별여행 간 것 아니거든요. 신나게, 재미있게 놀려고 갔잖아요. ‘나에게 재미를 줄 것이다. 헝가리가. 유람선이.’ 

그러나 재미는커녕 자기 코앞에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진짜 바보같이 몰랐지요. 평소에 몸이 좀 힘들면 ‘죽고 싶다. 나 죽고 싶다’ 하지요. 성도가 되어서 또 믿는 척 한다고 “목사님, 죽고 싶어요.” 하지만 막상 진짜 죽을 때가 되면 “살고 싶어라!” 갑자기 역류되어서 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순간적으로 분출되어 버려요. ‘자식 봐서라도 더 살아야지. 나는 안 죽어.’ 

그러면서도 올해 나이 60, 70, 90, 이러거든요. 맨 날 평소에는 “내가 죽어야지. 너무 오래 살았어. 얘야. 너한테 짐 되어서 미안하다.” 해놓고 막상 아프다 하면 병원가지요. “누가 내 코에서 호스 뽑았느냐”고 자식보고 닦달내고. 그래서 주께서는 인간의 의견을 안 듣습니다. 인간은 바보기 때문에 듣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예수님가지고 상대를 하지요. 

예수님께서, 인생이라 하는 것은 위, 아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 또는 위에서 먼저 아래로 내려온 것, 그걸 보는 거예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위로부터 주어진 것을 이야기해요. 마태복음 5장 45절에 보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내린다는 말이 뭐냐 하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는 거예요. 원수를 사랑하라. 왜? 하나님의 위의 뜻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항상 위에서 뭔가 공급받고 사는 그런 존재에 불과해요.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것은 개의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햇빛 있지요. 공기 있지요. 그리고 단비, 비도 위에서 내려오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또 있어요.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있는 곳에서 땅 아래 백성들에게 내려줍니다. 모세가 율법을 가지고 내려왔는데 율법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요. 왜? 땅에서는 몰라도 너무 모르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위에서 내려줘야 돼요. 

그 위에서 내려준 것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주시는 구원, 영생이다, 그 말이거든요. 오늘 본문의 내용이. 위에서 내려오려면 우리는 그냥 시간만 계산하지 말고 우리 마음도 스톱을 시켜서 우리 마음자체를 위아래로 편성을, 체제를 그렇게 해야 돼요. 우리 마음을 스톱시키고, 뭐가 위인지 뭐가 아래인지로 스톱시켜야 되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면 그동안 위에서 아래로 공급받는다는 것, 모든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방해하는 요소가 시간요소,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다는 이게 우리 몸 때문에 그렇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각자가 갖고 있는 이 몸을 해부해서 아예 우리 속의 내장을 끄집어내서 그 내장을 도마 위에 펼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선물의 출처”라고 해도 되지만 다른 말로 하면 “도마위의곱창” 이렇게 해도 되겠지요. 우리의 내장을 펼치는 겁니다. 내장을 펼치게 되면 특징이 뭐냐 하면, 어떤 인간이든, a라는 인간이든 b라는 인간이든, c라는 인간이든, 어떤 인간이든 전부 다 공통적인 것을 안에 품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의 편지는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것인가? 모든 보통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공통된 사람. 사람의 겉모습이 있으니까 너하고 나하고 다르다고 우기는 겁니다. 개성이 다르다, 성격이 다르다, 뭐가 다르다, 이렇게 하는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과연 다른지, 사실은 안 다르다. 네 껍데기 몸 빼고 네 안의 몸에 들어 있는 것, 아담의 몸을 물려받은 그것을 손으로 움켜쥐고 도마 위에 펼쳐서 보이도록 해보니까 그것은 개성이 없어지고 보편성만 남는 거예요. 

뭐냐? 죄의 보편성. 그거 펼쳐서 뭐 할 겁니까, 라고 물으면 그것을 펼쳐야, 주님이 하신 전쟁의 대상자가 누구냐가 비로소 펼쳐야 알려지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본문의 주님은 전쟁하신 분이에요. 전쟁할 때는 상대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쓸데없이 전쟁하고 있어. 조용하게 사는데. 주님, 누구하고 상대했어?’ 누구하고 상대해요? 우리하고 상대했지요. 

‘나 괜찮은데?’ 나 안 괜찮아요. 우리 안에 다른 요소가 들어 있어요. 그 다른 요소하고 주님하고 싸웠던 거예요. 그것은 너 나 차이 나지 않습니다. 보통사람은 보통사람들끼리 잘 통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철학적 용어로 한다면 ‘실존’이라고 하는 겁니다. 실존은 개별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뽑을 때 열 두 제자가 자기의 실존,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 자기성, 나다움을 견지하고 유지했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 “주님 나라에 합세하겠습니다.” 합세 안 됩니다. 왜 안 됩니까? 나다움이 있기 때문에. 나의 실존이 있기 때문에. 나의 개별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의 보편성이 뭔지를 몰라요. 겉을 가꾸는 데 지금껏 자기 인생을 다 투자했기 때문에 그래요. 겉을 가꾸는데. 나의 문제점을 내가 알아서 스스로 자기를 치료하는데 평생을 다 바치는 거예요. 이렇게 반성하면 됩니까, 이렇게 개선하면 됩니까, 이렇게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겠어요, 이런 식으로 계속 한 거예요. 이런 식으로. 

실존이란 말이 어려우면 예를 들겠습니다. 실존이란 뭐냐 하면, 옆 사람이 다이어트 하는데 전혀 내 뱃살이 안 빠지는 것, 그것을 실존이라 해요. 옆 사람이 다이어트 하는데 내 배는 그냥 있어요. 달리 이야기할 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것인데 옆 사람이 해탈하는데 내가 해탈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실존성이라 합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에요. 따로 노는 거예요. 

우리는 따로 노는 것을 자랑삼아 여기는 겁니다. 그 따로 노는 인간을 향하여 성경은 전체적으로 이렇게 모순된 설명을 해버립니다. 이 모순을 어떤 인간도, 어떤 신학자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 모순을 여러분이 한 번 속으로 해결하려고 해보세요. 제가 이제부터 시작할 테니까. 

“한순간이라도 불신앙적인 것이 나타난다면 여러분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50년, 60년을 믿더라도 한순간 예수님이 미워지고 예수님이 부정된다면, ‘예수님이 뭐지?’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동안 한 것도 다 가짜고 신앙인이 아닙니다.” 또 다른 문장을 비교해 보세요. “한 순간이라도 여러분이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고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여러분은 신앙인입니다.” 

두 가지 문장이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교회가 2천년 역사동안 이 두 문장의 모순을 합쳐보려고 그렇게 몸부림 쳤어요. 교인들이 목사 붙들고 하는 질문은 전부 다 여기서 나옵니다. 지금 예수 믿으면 앞으로 어떤 짓을 해도 구원받습니까, 그 이야기를 하지요. 또 어떤 질문이냐 하면, “저 사람은 개망나니 짓을 하는데, 물어보면 자기는 신자라고 우기는데 어떡하면 좋아요.” 이 질문이거든요. 

“우리 아들이 어릴 때 분명히 예수 믿고 복음 안다고 해놓고는 15년째 교회 안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 천당 가겠습니까, 지옥 가겠습니까? 부채도사님!” 이거 질문하고요. “우리 아이가 50년 동안 술 먹고 담배피우고 온갖 짓을 해왔는데 지난주에 교회 나가서 복음을 인정했습니다. 우리 아들 구원되는 겁니까, 안 되는 겁니까? 부채도사님!” 이거하고 똑같은 질문이에요. 

성경에 둘 다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둘 다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이 모순을 무슨 수로 해결해요? 그 질문자체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실존에서 나온 거거든요. 실존, 자기성, 자기 자아됨을 어떻게 해서든 한 번 살려보겠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치료해 보겠다는 겁니다. 이거 구원? 미끼상품이에요. 천국, 그거 미끼상품이에요. 

우리 인간이 어떤데 정신 팔려 있는가를 들추기 위해서 구원이란 개념을 던진 겁니다. 주님이 구원개념 던지니까 그걸 덥석 물지요. ‘야, 저거 물면 구원 받겠다’하고.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 옆에 있었던 열 두 제자의 오류에요. ‘저분이 메시아니까 메시아 따라다니면 메시아 나라에 합류할 수 있겠다.’ 주께서는 그들을 기어이 배신자로 만들어 버렸지요. 

구원이 미끼상품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이 성경에 나오는 구원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미 자기의 실존성, 자아성, 자기의 개별성, 그리고 자기의 실익, 이득, 이런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성경의 어떤 개념을 들이대도 그것은 우리의 보편적인 죄성을 노출시키는 미끼에 불과한 겁니다. 어떤 것도, 어떤 개념을 들이대도. 

도마 위에 곱창이라니까요. 주께서 우리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아까 한 질문을 다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지난 2007년도에 은혜 받아서 구원받았으면 2019년도에 내가 죽으면 구원받겠습니까, 지옥 가겠습니까? 천당에 갈 수 있겠습니까?” 하는 그 의심과 그런 질문을 한다는 말은, 이미 시간이라는 것이 사라졌다는 것을 또 잊어버리고 순간으로 멈추지 못하고 과거를 자꾸 파헤치는 거예요.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동안 성경을 보면서 악마와 전쟁하겠다는데 실존성이 우선이 되면 그것은 주님의 전쟁이 아니라 나의 전쟁이 돼요. 나의 전쟁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진짜 구원사이에 회담의제가 안됩니다. 아젠다가 안돼요. 그것을 아젠다로 삼은 적이 없어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의논 내용에 그것이 포함이 안 되어 있습니다. 

나의 구원, 나의 천국, 이런 것은 없어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에베소서 4장 8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에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시편 68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5절에서 18절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우선 18절부터 보게 되면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힌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중에서 받으시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시편 68편의 이 내용을 보고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의도적으로 말바꾸기를 했다는 것을 여러분이 신경 써서 보신 분은 아실 거예요. 

시편 68편 18절에서는 승리자가 받지요. 승리자가 받도록 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 에베소서 4장 8절에서는 오히려 승리한 분이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이것은 반대입니다. 왜 사도바울이 이렇게 반대로 썼겠는가, 하는 거예요. 옛날에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면 패배자한테 보상을 받고 배상을 받습니다. 

배상이라 하는 것은 불법한 경우에 받는 것이 배상이고, 보상이라 하는 것은 적법한 경우에 받는 것을 보상이라고 조국이라는 청와대 수석이 이야기했어요. 배상과보상이 다르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왜 전쟁에서 그렇게 열심히 싸워야 되느냐 하면, 그 모든 비용, 재판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비용을 패자로부터 다 부여받기 때문에 나는 성공자중의 성공자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실존에서, 인간의 자기성, 인간의 개별성에서 출발하게 될 때 인간의 내면에 들어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이 괴물, 도마 위의 곱창이 하는 짓거리가 뭐냐 하면, 나는 루저가 되기 싫고 나는 위너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승자가 되고 싶지 패자가 되기 싫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안에 들어있는 내부의 정신상태가 그런 거예요. 

어릴 때는 부모가 주는 것을 가지고 살아요. 어릴 때는 다 동화 같아요. 백설공주가 어떻고, 신데렐라가 어떻고, 전부 다 아름다워요. 어릴 때 동화의 특징은 뭐냐? 전쟁이 없고 경쟁이 없는 것이 특징이에요. 그러나 그 애가 15세에서 18세로 점점 나아가게 되면 전부다, 모든 것이 하기 싫어도 전쟁, 하기 싫어도 경쟁, 경쟁 때문에 힘들어 못삽니다. 

홉스의 말대로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에요. 적과 동지가 따로 없어요.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고. 이것은 매일같이 싸우는 것 때문에 피곤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루하루 안 싸우고 경쟁 안하고 지난 일 봤습니까? 그 경쟁이 있을 때 인간이 경쟁에 자극받으면 잠자고 있는 인간의 악마성이 깨어납니다

그 악마성이 뭐냐 하면, 나는 패배자가 되기 싫고 나는 승자가 되고 싶다. 루저가 아니고 나는 위너가 되고 싶다. 그 정신 하나 쑥 올라옵니다. 시편 68편을 보면서 “주여, 나도 승자가 되어서 남에게 내가 이기기 위해서 힘들었던 모든 것을 배상받고 보상받기를 원합니다.” 그 자기가 승자라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면 그 다음에 스포츠, 게임, 도박에 빠져요. 화투에 빠진다고. 

세상적으로 낙오자가 된 것을 가지고 화투판에서 승자가 되려고 하는 거예요. 게임의 승자가 되는 거예요. 호날두 뭐합니까? 호날두 좋아하다가 40만원 루저 되었어요. 축구, 야구, 전부 다 뭐냐 하면, 나대신 나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대상을 찾는데 스트레스가 왜 생깁니까? 패자가 되기 싫어서, 패자의 분류에 속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거예요. 

30대 초반의 어떤 사람이 20대를 보내면서 자기가 승자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했는가를 나열했어요. 어떤 일을 했는지 제가 나열 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일을 했느냐 하면, 신문배달, 주유소, 고깃집, 치킨 집, 횟집주방, 가구매장, 호프집, 화장품판매, 콜센터, 주류창고, 의류창고, 노가다, 택배상하차, 이마트, 롯데마트, 인형탈알바, 전단붙이기, 킨텍스스텝, 킨텍스라는 것은 전시매장이에요, 휴대폰대행, 주차안내, 군고구마 장사, 뷔페서빙, 설문조사, 생동성실험, 임상실험, 이렇게 했다는 겁니다. 

왜? 루저, 패자가 되기 싫어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 그 사람이 이걸 이야기하면서 지금 시대만큼 돈 벌기 좋은 시대가 없다는 거예요. 돈을 못 버는 것은 게을러서 못 번다는 거예요. 자기는 이만큼 알바를 많이 하고 이만큼 애썼는데. 따라서 사람이 왜 일을 하지 않는가? 이제는 일은 하기 싫고 또 패자는 되기 싫고. 나름대로의 승자되기 위한 바깥쪽 상황을 자기 맘대로 조종해요. “이만하면 좋습니다.” 굶어죽으면서도 “이만하면 좋습니다.” 해가지고 기어이 자기가 패자가 아니래. 

자기는 승자이고 싶어요. 시편 68편, 이긴 자는 남들로부터 모든 피해보상을 받는다는 그 정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맞닥뜨릴 때 ‘맞아.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나는 이긴 자, 승리자가 되고 싶어.’ 곱창이 거기에 완전히 매료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진정한 승자는 에베소서 4장 8절에 나옵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되어 있어요. 받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되어 있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 시편 68편에 나오는 그 말씀은, 아무도 이것을 하나님에게 받을만한 승자는 없기에 주님께서 시편 68편을 던져놓고 그 말씀에 맞추기 위해서 메시아를 보냅니다. 예수를 보내셔서 예수님만 홀로 이스라엘을 대표로 해서 얼마든지 이 악마로부터 모든 보상을 받을만한 유일무이의 자격자로 예수님을 갖춰놓고요.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모든 말씀을 다 이뤄서 복 받을 만한 자격을 구비한 사람이 마땅히 받을 보상과 배상을 다 받아놓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시편 68편을 이제는 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하시면서 “나는 너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사용하신 거예요. 

에베소서 편지 안에 이것이 담긴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시편 에베소서 4장의 편지가 우리 안에 들어온다는 말은, 내가 내 인생을 사는 이 운용체제가 바뀌어야 된다는, 보통 사람, 다시 말해서 불신자들의 동기동창생들, 보통사람처럼 그렇게 살면 안 되고 특별한 사람, 성령 받은 특별한 사람들이라면 이 운용체제가 이 에베소서 4장 8절로 바뀌어져야 돼요. 

그렇게 되면, 내 실존을 위한 구원, 실존을 위한 천국이나 영생개념은 애초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적,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에 나왔던 발상인 것을 알게 됩니다. “나 어떻게 구원 받아요? 나 어떻게 하면 천당 가요?” 이 자체가 적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적입니다. 

주께서 나눠줄 때는 이미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치료한다든지, 구원한다든지 하는 운용체제 자체가 이미 심판받고 엉터리라 하는 것이 발각된 거예요. 그것이 마귀장난이라는 것, 마귀의 족쇄에 꿰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 나와서 나를 구원시키려고 하는 발상만, 그런 잘못만 계속 나왔던 겁니다. 

지금 그런 영화도 하고 있지만 훈민정음 서문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를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이런 전차로 어린백성이 니르고저 할빼이셔도 마참내 제 뜻을 능히펴지 못할놈이 하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한글을 만들 때에, “중국은 중국이고 한국은 한국인데, 이 한국 사람의 말이 중국의 다른 나라 말과 서로 맞지 아니하니까, 운용체제가 다르니까 그들이 어떤 뜻을 전하고자 해도 제대로 자기 뜻을 못 전하니 내가 이런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자기 뜻을 전하고 펼칠 수 있도록, 이렇게 해서 문화발전, 또는 국가발전을 위해서 내가 운용체제를 새롭게 만들어준다.” 이게 훈민정음 서문이에요. 

“내이를 어여삐 녀겨 새로 스물여덟자를 맹가노니 사람마다 수비니겨 날로 쓰매 편아케 하고저 할 따라미니라.” 즉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 여덟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마다 이것을 쉽게 익혀 편히 사용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에베소서 4장 8절의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운용체제가 완전히 바뀌면 된다는 겁니다. 나를 보는 운용체제가. 

그러면 그 운용체제가 뭐냐? 우리 자신에게 있는 기존의 운용체제를 계속해서 뽑아내면 되지요.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운용체제를 갖다 내 버리면 되는 겁니다. 자 운용체제가 위에서부터 왔기 때문에 마태복음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 제가 지금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운용체제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요즘같이 여름에 이른 아침에 보게 되면 사람보다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 하면 새들이 먼저 움직여요. 새들이 짹짹거려요. 새는 실존이 있습니까? 실존도 없어요. 새는 개별성, 자기성이 없습니다. 

새들이 살아가는 운용체제하고 죄악 된 악마의 곱창이 들어 있는 인간의 운용체제가 달라요. 새는 주님에 의해서 짹짹거리면서 먼저 움직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자연이라고 하는데 우리도 새처럼 하나의 자연이 되면 돼요. 자연의 특징은 자연 체제를 주께서 일괄해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새보고 형님이라고 해야 돼요. 

오뉴월 개팔자보고 아저씨라고 해야 돼요. 암컷 같으면 “이모님!” 해야 돼요. 오뉴월 개팔자가 고민하지 않습니다.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체면과 위신 때문에 고민한 적이 없어요. 잡아먹든지 말든지 잘 것 다 잡니다. 그게 주님의 운용체제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짐승이나 들풀은 그렇지만 우리가 그렇겠습니까?” 하는데 성경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그 운용체제가 나와 있어요. 

마태복음 10장 9절에 보면,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그냥 살아. 그냥 살게 되면 누구 만날 사람 만날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이 사실을 제자들이 예수님 있을 때 그대로 살면서도 절대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 자기들의 실존이 있고 자기성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함께 있으면서 대자연이 주님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제자들은 착각하기를, 이 대자연이 나라는 이 자기성, 실존을 살리기 위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살리기 위해서 세상이 돌아간다고 착각을 한 거예요. 자기삭제가 안된 거지요. 자기 제거가 안 된 거예요.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습니다. 시편 68편 1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8절의 말씀이 사실은 15절부터 연결되어 있는데요. 15절에 보면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의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원히 거하시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라” 

하나님의 전쟁은 소위 인간이 위에서 주는 것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밑에서 올라가는 것으로 시도하는 운용체제, 컴퓨터 운용체제처럼 그 운용체제가 있었던 거예요. 인간 안에 있는 괴물, 도마 위의 곱창들, 내장들은 자꾸 밑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승자가 되려는 심보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시편 68편은 비교하면서, “너희들이 백날 높은 산들이라고 자랑해도 이 시온, 하나님이 계시는 시온산보다 높은 산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내 앞에서 무릎을 꿇어.” 

이게 오늘 밤부터 하는 수련회의 주제에요. 하나님께서 시온산에 계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온산에 관심이 없습니다. 나를 루저, 패자가 아니고 승자로 만들기 위해서 온통 돈 버는데 모든 투자를 자기에게 하는데 온 신경을 다 쓰고 바쁘기 때문에 저 높은 곳, 올라가는 곳에 신경 쓰기 때문에 내려오는 것, 참새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자기 것 지키는데 급급합니다. 내 것 지키는데. 

아프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아프면 안 되지요? 

내가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잘못된 길로 가면 안 되지요? 

근거 있습니까? 낮은 산인데? 

낮은 산들은 시온산을 돋보이기 위해서 낮은 산이 있는 거예요. 

우리라는 인간은, 우리라는 죄인은 주님의 의인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아담부터 선악과를 따먹게 해서 우리는 이 땅에 죄인들로 살아가는 거예요. 

나의 개별성, 실존성은 뭐냐 하면 “주여, 제거하여 주옵소서.” 

이 고백 하라고 있는 겁니다. “속히 삭제시켜 주옵소서.” 

우리가 삭제당하면 우리의 근심과 걱정과 염려, 건강, 이런 모든 것이 같이 삭제당하잖아요. 

아직도 지킬 것이 남아 있습니까, 아직도! 

그거 지켜서 뭐할 건데요? 승자되려는 겁니다. 살아남았다는 거예요. 


언제까지 살아남을 건데요? 죽기까지. 

언제 죽는데? 모르지요. 

죽으면 살아남았다는 과거도 다 없어지는데, 다 유실되는데요? 

인간들은 운용체제가 없어가지고 안경을 쓰고 보는데 안경 알이 없어. 

성령으로 봐야 되는데 성령으로 보지 못하고 실존가지고 보는 거예요. 

‘오늘도 교회 나왔다. 복 주실 거지요?’ 이러고 있어요. 

복 받아서 뭐할 건데요? 복 받아서 승자가 되는데. 

그 승자되는 그것이 악마의 족쇄에요. 

이제는 탯줄을 끊으세요. 그 악마로부터. 그 탯줄을, 

지긋지긋한 탯줄을 끊어버리라고요. 

방송만 틀면 나오는 것이, 독소해소가 어떻고, 고혈압이 어떻고, 그저 건강문제. 

또 틀면 유산문제, 어떻게 하면 더 받을 수 있다고 하고, 전부 다 그런 문제에요. 

트럼프는 단거리미사일이라 상관치 않는단다. 트럼프 한마디에 다 신경 쓰고. 

호날두 믿다가 부부가 80만원 홀랑 다 날린 사람들도 있어요. 뛰지도 않았어요. 모든 생각이 뭐냐 하면, 그저 패자가 되기 싫다는 거예요. 왜 패자가 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게 뒤에서 악마가 우리의 곱창을 시커멓게 만들어놓았는데. 그러면 주께서 하실 일은 뭐냐? 9절에 보면,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제가 지금 이 설명을 안 하고 그냥 들어버리면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4장 8절에서 10절까지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오늘날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10절에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만물이 충만하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작은 개별자속에 하나님의 진리 전체가 다 들어 있는 것, 부분 속에서 전체를 다 보여주는 거예요. 

깨어진 유리창 파편 하나하나에서 전체를 다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 날씨 덥다고 해를 없애버릴까요? 내가 힘들다고 하나님의 심판을 없애버릴까요? 나를 승자 안 만들어준다고 하나님을 죽여 버릴까요? 인간들이 자기승자 만들어주지 않으면 예수고 하나님이고 다 죽여 버린다는 심성이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음을 알고 주님께서는 “아나 죽여라.” 하고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그래서 인간은 십자가 앞에 나올 때까지 진정 자기를 몰라요. 십자가 앞에 나오지 않으면 인간은 바보 같아요. 악마에게 말려든 거예요. 그러면 이 시편 68편은 왜 기록되었는가? 시편 68편부터 나눠준다고 하지 않고 보상을 받는다고 왜 했는가? 그것은 신약이 먼저 있고 구약이 나중에 있는 거예요. 

그 근거가 요한복음 1장 15절에 나옵니다. “요한이 그에게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지금 모순되는 거예요. 지금 모순되는 이야기를 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늦게 태어나신 분이 나보다 앞서 계신분이다, 그 말입니다. 

이 고백을 이제는 우리가 할 차례에요. 내가 이렇게 이 땅에서 고생고생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보다 앞선 이유입니다. 주님이 먼저 계시고 우리가 나중에 있는 것예요. 에베소서 4장 8절이 먼저 있고 시편 68편이 나중에 있는 겁니다. 

일단은 인간이 악마에 사로잡혀야, 인간이 땅에서 얼마나 위대하게 되려고 하고, 땅에서 천당 가려고 노력하는 그 악마의 짓을 보여줘야 예수님이 나눠주는 그 은혜의 가치가 부각되거든요. 오직 그것만 찬미된다 그 말이지요. 그 내용이 지금 요한복음의 내용이에요. 어떻게 그걸 우리에게 주느냐? 하늘나라는 얼굴이 다 달라요. 그 때 그 때마다 얼굴이 다 다른 얼굴이에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처럼 30배, 60배, 100배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눠주는 거예요. 30배로 나눠주고, 60배로 나눠주고, 백배로 나눠주는 거예요. 네가 그걸 가질 필요가 없어요. 백배 중에 하나 얻어가진 것이고, 60배중에서 하나 얻어걸린 거예요. 하나가 얻어걸려도 그 하나를 펼쳐버리면 그 안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이 하는 일이 다 들어 있어요. 

비록 나는 작으나 내가 비춰 보여줄, 나를 통해서 주께서 거저주시는 은혜 안에는 이 세상의 전부가 다 담겨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주께서 선물 주셔서 이렇게 했다.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 충만이라 합니다, 충만. 자그마한 이 몸뚱이 하나에 만유가 충만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우리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마태복음 6장에서는 “너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참새는 그 일을 못해요. 참새는 그냥 주시는 대로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부여받고, 30배, 60배, 백배 중에서 부여받고 우리는 그것을 마음껏 자랑하는 거예요.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나, 이 꼴통 구원받았다고. 

이 구원은 실존적구원이 아니에요. 실존적 미끼상품이 아닙니다. 

주께서 나를 사용한다는 거예요. 어제도 사용했고 오늘도 사용했고 내일도 사용하실 거예요. 

천국 가서 주님의 피가 우리 죄를 씻어서 구원했다는, 이제는 주님을 증거 하는 용도에요. 

주님의 실존이 실존이지 내 실존은 삭제대상입니다. 

매일같이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주님의 은혜로 이제는 내가 챙기지 않더라도 괜찮은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것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속을 몰랐습니다. 그저 내 본성도 몰래 감추었습니다. 이제는 말씀 앞에 다 들통 나게 해주시고 진즉에 사라져 왔고 또 앞으로 사라져야 될 것을 우리는 영원한 것처럼 붙잡았습니다. 그게 우리의 시험이었고 우리의 잘못이었습니다. 이 시간 주여, 성령이 오셔서 내 증거가 아니라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주님이 하신 일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