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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의 기능(엡4;11-12) 1908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8. 5. 10:03
2019-08-04 12:44:15조회 : 367         
   그리스도 몸의 기능 190804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그리스도 몸의 기능(에베소서 4:11-1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ehr7YeenYJI, Hit:14
 이근호19-08-04 13:32 
그리스도 몸의 기능 

2019년 8월 4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4:11-12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선물로 주신 것들로 인하여 나타나는 현상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기능들이 각자 일해도 추구하는 바는 한결 같습니다. ‘그리스도 몸’을 세우는 겁니다. 즉 이 현실 세계에 그리스도 몸이 엄연히 현존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현존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선물받은 자만이 알아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는 사람일까요? 다니엘 6장에 보면, 다니엘이 정치적인 적들로 인해 모함을 받아 사자굴로 던져집니다. 적들이나 왕은 생각하기를, 다니엘이 마땅히 사자밥이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멀쩡한 채로 사자굴에서 건짐받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왕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단 6:24) 다니엘을 모함한 자들을 굴에 집어넣으니 사자들이 사정없이 그들의 뼈까지도 부숴뜨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외형으로 누가봐도 같은 인체를 지닌 것으로 여겨지지만 미천한 미물인 사자는 잡아 먹을 자와 먹지 못할 자를 제대로 구분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이 두 종류로 나뉘어져 있음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5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이 모두 한결같이 ‘죽었더라’로 끝났지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해서 데려가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물 받은 자들의 특징은 바로 ‘죽은 자의 영’을 받은 자라는 겁니다. 소위 말해서 ‘빙의’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자신의 육체 임한 겁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 살면서 겪었던 일을 같이 겪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당했던 소모도 같이 체험합니다. 

따라서 이런 선물 받은 사람의 자아성은 자기 중심으로 꾸밀 수가 없습니다. 원래 인간이 꾸며내는 자아성이란 ‘잃어버림이 없는 것들만의 모집된 그 영역’을 말합니다. 자체적인 충족상태를 자신의 자아성으로 삼게 됩니다. 평소에 이런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인간들은 자기를 좋게 하는 대상들을 끌어모은 겁니다. 

예수나 하나님이나 뭐든지 자신을 잃게 하지 않는데 도움 된다고 여기는 것들을 뭐든지 여건되는 대로 다 주워모습니다. 그 이유는 안 잃고, 안 망가지고, 안 다치고, 안 죽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죽은 예수님의 영이 임한 사람은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을 ‘탕자’로 취급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버려진 자’에 해당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체적으로 충족할 자아성이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음도 압니다. 이들이 바로 ‘양’입니다. 목자를 필요로 하고 삶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목자에게 있음을 인정합니다. 자체적으로 이미 죽고, 버려지고, 상실된 자이기에 스스로 힘으로 이런 상태를 극복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즉 자신이 망가지든, 깨어지든, 죽든 상관할 바가 아닌 겁니다. 어차피 상실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이 겪었던 수모와 고난과 오해를 같이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몸다운’ 삶의 모습니다. 고생도 같이 해도 ‘한 몸, 하나된 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들 끼리 나누는 인사 속에는 같이 겪었던 고난이 담겨 있습니다. 같은 취지로 인한 고생을 같이 겪지 아니하면 예수님하고는 아무 할 말이 없어지는 겁니다. “주님 거기 잘 계십니까? 저도 주님 덕분이 이 지상에 잘 지냅니다.” 늘 상호 인사 나눌 수 있는 현상을 이 세상에 나타냅니다. 

바로 이런 기능이 덮친다면 자기 존재는 한시적이고 임시적인 것이 됩니다. 반면에 자기 존재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매니저를 자처해서 예수 덕분에 돈벌이 나서는 짓입니다. 곧 자신의 영역이 안 무너지려고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1:21에 보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압니다. 

용어나 명칭이 어떻게 되었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대신, 신, 혹은 행운의 여신, 혹은 부처, 혹은 대자연, 혹은 우연, 뭐가 되었던 인간들은 은근히 자기 존재 가치를 북돋워줄 절대적 가치를 요청합니다. 곧 자기 존재 영역에 필요한 대상을 본인이 선별해서 끌어당기는 겁니다. 

목사도 그렇게 하고 교인들도 그렇게 합니다. 마치 우수한 재능을 지닌 음악가나 화가나 운동선수나 가수를 데리고 다니면서 자신에게 긍정적인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이런 앵벌이를 하면서 그들은 ‘양육’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교회 목사가 노리는 바가 이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예수’라는 존재가 긍정적인 인물이 된다면 목사 자신의 세계 안에서 자신이 존재가치가 정립되리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목자는 항상 일시적 기능입니다. 목양이 존재적으로 나타난 것은 ‘목사’라는 호칭이 아니라 ‘장로’나 ‘감독’입니다. 감독에 대해서 사도행전 20:28에 잘 나와 있습니다.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체적인 자아성 안에 자기를 절대화 시킬 자기 충족에 정신이 팔려있는 자들은 교회를 선택하고, 예수를 선택하고, 목사를 선택에서 자아성 철저함을 마저 채우려고 합니다. 완벽에 완벽을 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양이 아닙니다. 따라서 참된 양육자를 밀치고, 외면하고 거부합니다. 

성령받은 자들은 이 수모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극한 상황이 늘 자기와 함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 극한 상황이란 다름 아닌 죽음입니다. 따라서 참된 성도는 늘 죽음과 함께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신 영 안에서 ‘잘 지내는 일’입니다. 자신이 자기를 지키는 식으로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하여 충족한 삶을 지내는 겁니다. 

봉사의 삶이란 이처럼 “나 이것 하다가 망가져 죽을래”에서 오는 기쁨이 동반되어서 나타납니다. 이것이 지금 현존하는 ‘그리스도 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살아계신 주님만 함께 지내는 즐거움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8-05 06:44 
35강-엡 4장 11절-12절(그리스도 몸의 기능)1908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11-12절입니다. 신약성경 313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 나와 있는 사도나 선지자라는 것은 본인의 뜻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8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는 그 선물 때문에 생겨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제가 생겨난 사람이라는 말을 했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생겨난 기능들입니다.”라고 할 수가 있어요. 

기능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냐? 이것이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성질을 갖고 있어요. 존재라 하는 것은 여기 한 번 있으면 계속 있는 것이지만 기능이라 하는 것은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이것은 존재가 붙잡아 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물이라 했으니까 이 선물은 우리 좋으라고, 우리 몸 좋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몸을 위해서 그런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선물을, 에베소서나 성경을 죽 보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두고 이야기하거든요. 기능이라는 것이 선물의 기능이라면 곧 성령님이 하는 기능이라,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은 뭐냐? 죽었던 예수님의 영이 임하는 것을 가지고 성령이라 합니다. 죽었던 자의 영이 그 사람 속에 들어와 버리면 그 사람에게 빙의가 되겠지요. 

죽었던 분의 영, 이 땅에 와서 그냥 늙어 돌아가신 분이 아니고 사건에 의해서 돌아가신 분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주님을 죽게 한 사건이 우리 안에서 계속 기능적으로 살아있게 되는 겁니다. 죽었던 자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 영, 성령이 들어온 사람에게는 더 이상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분의 영이기 때문에.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안 들었다는 말 하지 마세요. 생소하다는 말 하지 마세요. ‘죽었던 자의 영이 너에게 임하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라.’ 하는 로마서 8장 10, 1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도 세상살이에 분주하다 보니 성경을 자꾸 비현실로 밀어내는 경향들이 굉장히 강해요. 여러분은 밀어내더라도 나는 다시 끄집어낼 거예요, 여기에다. 

죽었던 자의 영이……, 복잡하니까 말을 쉽게 하겠습니다. 죽은 귀신이 여러분에 임했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귀신이 어떤 귀신이냐 하면,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귀신인 거예요. 저보고 ‘귀신아 나가라’하지 마세요. 귀신이 나가라고 할 것이 아니라 귀신이 오히려 와야 될 문제입니다. 성령이 와야 될 문제에요. 

이것이 바로 위에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게 되면 그리스도 몸을 형성하는데 그리스도 몸은 보이지 않아요. 그리스도 몸은 다만 사건으로만 나타날 뿐인데 그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 세상 사람에게 밀려 죽으시면서 만들어진 사건을 기능이란 이름으로, 또는 은사란 이름으로, 또는 사도로, 또는 선지자로, 또는 복음 전하는 자로, 또는 목사와 교사로 했다는 그런 기능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런 기능이 십자가사건이기 때문에 이 세상과 하늘나라의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은사 준 사람들, 그리스도 몸이 된 사람과 자기 몸을 지키겠다는 사람들과의 싸움이 계속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교회, 곧 몸을 세운다는데 교회가 그리스도 몸이거든요. 그리스도 몸을 세우려한다는데 같은 몸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인지하는가? 그걸 어떻게 알아채는가? 

보통 인사를 “안녕하세요?” 하게 되면 같은 몸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같은 몸에 해당되는 사람이란 서로 인사를 할 수 있는 사이에요. 인사를 한다는 것은 인사내용이 뭐냐 하면, ‘당신이 겪었던 일과 내가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인사를 하게 되어 있어요. 원래 한 마음, 한 몸을 느끼는 것은 뭐냐? 고생을 같이 할 때 비로소 느껴지는 겁니다. 

온 가족이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자식이 아니고, 부모가 있다고 해서 부모가 아니고, 자식과 부모가 어떤 일에 얽매여서 다 같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수난과 역경과 힘든 일을 다 겪을 때, 그 가족은 결속이 딱 되게 되어 있어요. 아버지가 노끈 공장을 하는데 노끈 공장이 부도가 나서 어려울 때 아내가 옆에서 도와주고 자식들도 옆에서 아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애쓰다 보면, 그렇게 수십 년 생활을 하다보면 그 부도난 노끈 공장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그들은 이미 한 몸이 되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 몸이라는 것이 뭐냐? 그리스도 몸은 어디 있느냐, 자꾸 찾지 마세요. “한 번 보여주세요.” 이렇게 하지 마시고 어떤 일을 겪었느냐? 주님이 겪었던 그 일, 똑같은 일을 겪으신다면 여러분들은 예수님과 인사할 사이가 되는 겁니다. “주님, 이런 고생 하셨군요. 저도 이런 고생 하고 있습니다.”라고 인사할 내용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주님이 복음 때문에, 아버지의 뜻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 심한 고생을 했다면 오늘날도 우리는 주님의 복음 때문에, 십자가복음 때문에 온갖 시련과 고난을 다 당하고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지금 다 뺀질이가 되어서 당하는 고난도 별로 없는데. 하여튼 그런 고난을 당할 때 빙의, 예수님의 죽었던 그 귀신이 들어오는 거예요. 

지금 그 사람에 국한해서 사도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경 좀 배워서 천당 가라는 그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에요. 뭔가 먼저 있어야 돼요. 1995년도 일본영화, 요새 일본영화 거론하기도 곤란하다면, 일본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오겡끼데스까?” 오뎅하고는 관계없습니다. “거기 잘 계십니까?” 삿뽀로의 설국, 눈 많이 오는 그곳에서 아가씨가 산을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겡끼데스까?”(거기 잘 계십니까?) 

“와따시와 겡끼데스”(나는 여기 잘 있습니다) 오겡끼데스까. 다시 말해서 “당신은 죽었고 나는 살았지만 우리는 같은 영역에 속했지요. 같은 세계에 놓여 있습니다. 죽었더라도 거기에서 동상 걸리지 말고 잘 계시고 나는 여기에서 당신 만날 때까지 잘 있겠습니다.” 사랑의 그 관계를 놓지 않겠다고 그렇게 외치는 모습이 나타나지요. 

<러브레터>라는 영화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입니다. “오겡끼데스까?”(거기 잘 계십니까? 주님!) 앞에다 자기애인 이름 붙이지 말고 우리 주님을 붙여보자는 말이지요. “주님, 거기 잘 계십니까? 저는 오늘도 주님 덕분에 여기 더운데, 36도 되는데도 잘 있습니다.” 

이런 인사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바로 기능이거든요. 하나님의 성령을 준 사람에게 같이 제공된 기능입니다. 이런 기능이 없이는 사람은 어떤 대상을 고를 때 자기에게 필요한 대상만 자기 임의로 고르려고 해요. 나에게 필요한 대상만. 너무 가까이 오게 되면, “거기 서세요. 거기까지만. 왜? 나는 인간다워야 되니까.” 

그래서 인간들은 대상을 자기가 골라요. 자기에게 필요한 대상을. 예수님을 원하면 예수를 고르고, 부처를 원하면 부처를 고르고. 그러니까 자기존재는 자기가 가꿔나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뭘 원하는가? 내가, 사람이 사람답겠다는 거지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겠다는 이것이 문제에요. 그게 문제입니다. 

극한으로 자기 자신을 내몰지 않는 것 그것이 문제에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극한 상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죽은 자의 귀신을 내가 보이는 기능을 한다면 지금 자꾸 살고자 하는 내 몸을 제거하고 삭제하고 망가뜨리는 그러한 장소를 찾아가야 돼요. 그러한 경우가 찾아오도록 우리는 고대해야 됩니다. 

내가 망가뜨려 질수 있는 어떤 장소가 없을까? 수련회가 아주 적절한 거예요. 수련회 가보세요. 아주 개망신 당하지요. 잘났다 하는데 자기혼자 잘났지 뭐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요 뭐. 인간이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내가 상실한 것이 없는 그 범주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잃어버린 것이 없는, 있는 것들만 있는 그 동그라미, 그 동그라미를 인간은 자아성, 또는 자아정체성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나 주님께서 구원하는 성도는, 너는 하나님 보시기에 잃어버린 자라는 요소가 들어 있는 자가 성도입니다. 너로 인하여 이 예수님이 밉상을 당할 때 너는 주님으로부터 벌써 잃어버린 자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렇다면 죽은 자,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의 귀신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상실한 자가 된다는 겁니다. 

이 관계가 바로 위에서부터 아래, 위아래, 위위아래, 위에서부터 선물을 받을 때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상실이구나.’ 이러한 주님과의 우리 관계는요, 죽음이라는 극한적인 요소를 자꾸 집어넣어야 돼요. 죽음이라는 관계를. 자기가 안 죽기 위해서 자꾸 빼지 마시고, 자기를 더 살리기 위해서 애쓰지 마시고, 이래 사나 저래 사나 나는 주님 보시기에 주님 보기에 살아도 의미 없고 소용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그걸 분명히 해줘야 되는 겁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세균을 배양하는, 그것을 ‘배지’라고 하는데 영어가 아니고 한자인데 세균을 배양하는 동그란 것이 있어요. 그 안에 세균이나 미생물을 배양하게 되면 그들이 꿈틀거리고 있지요. 한두 마리를 배양하게 되면 거기에 꿈틀거리는 군상들이 나타나요. 그런데 그 동그랗고 투명한 그 안에 두게 되면 나중에 보면 조용해요. 다 죽었으니까. 

인간이란 나름대로 뭔가 열심을 내요. 살아보려고 애를 쓴다고요.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 촛불 집회 할 때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하게 되면 뭔가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한 50년 지나보면 다 죽었어요. 조용해요. 김 일성도 죽고, 김 정일도 죽고, 김 정은도 죽을 것이고 트럼프도 죽을 것이고, 다 조용해요. 

배지 통 안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왜 죽느냐 하면, 상실되어서 죽어요. 하나님 앞에서 벌써 관계가 끊어진 존재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 자손을 나열하면서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있어요. 4절에 보면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죽었다고 되어 있거든요. 8절을 보면, 셋은 구백 십 이세를 살았지만 결국은 죽었더라. 살았다와 죽었다, 를 극한대조합니다. 9절에 보면, “에노스는 구십세에 게난을 낳았고 게난을 낳은 후 팔백 십 오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오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그 다음에 12절을 보면 “게난은 칠십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 사십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십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그 뒤를 제가 계속 읽을 필요 없지요. 지루하잖아요. 아무리 해도 결국 죽었더라. 유독 딱 한 사람이 있어요. 에녹은 안 죽었어요.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더라. 이 세상의 인간은 둘 중 하나에요. 죽었더라, 죽었더라. 그 사람의 개성, 키, 몸무게 상관없어요. 모든 인간은 세균배양배지 안에 들어 있는 세균처럼 결국은 왜 죽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관찰할 용으로 인간을 이 세상에 가두어둔 거예요. 우리는 실험대상이고 끝은 죽었더라, 그 말이지요. 

그러면 ‘그 죽었더라.’ 의 그 번데기나 구더기 중에서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가 맞는데 에녹 같은 경우는 ‘하나님이 데려가셨더라.’ 이렇게 한다는 말이에요. 이 성경이라는 것이 기막힌 책이 아닙니까? 어디서 이만한 책을 보겠어요? 어디에서? 토정비결을 보세요. ‘목씨 성을 가진 자를 네가 5월 달에 만나서 귀인이 될 것이다.’ 

그 뒤에는 입을 다물어요. “그렇게 해서 죽었더라.” 아무리 점을 보고 어떻게 해도 죽었더라,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는 그런 내용이 토정비결에 안 나온다 그 말이지요. 사주팔자에 안 나와요. 이 성경에만 들어 있습니다. 데려갔더라는 말이지요. 성경에서 그런 것을 찾아내는 재미로 보시기 바랍니다. 

다니엘 6장 34절. 바벨론 이후의 바사나라 다리오왕 때에 다니엘을 시기해서 정치적으로 왕따 시키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니엘이 창문열고 기도하니까 다른 라이벌들이 시기를 해서 법을 정해서 “이제부터 기도하는 사람은 다 죽이기로 합시다.” 이렇게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해서 다니엘 하나를 노리고 전부 다 그 법을 만들어서 다니엘을 체포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체포되어서 사자 굴에 들어갔는데 그 사자가 혹시 다니엘을 안 뜯어먹을 수도 있다고 해서 사자를 굶겼어요. 사자 굴에 들어오기만 하면 앞뒤 안 가리고 뜯어먹을 자세로 있는데 거기에 다니엘을 집어넣었습니다. 다니엘이 죽었겠지, 해서 가보니 다니엘이 멀쩡해요. 다니엘 6장에 나오지요. 슬픈 체 하면서 이렇게 합니다. “다니엘아 미안하다.”이런 식으로 가보니까 다니엘이 멀쩡하거든요. 

22절에 보니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치 아니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의 앞에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에요. ‘아,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도와줘서 살았구나.’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 대목이 아니고요. 24절의 대목입니다. “왕이 명을 내려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 전에 사자가 곧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도 부숴뜨렸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같은 인간입니다. 외형적으로 같은 인간인데 다니엘을 집어넣으니까 사자들의 입맛이 갔는지 가만히 있다가 다니엘을 해코지하고 모함한 인간들과 그 처자식을 집어넣으니까 사자들이 달려들어서 먹었다는 말이지요. 

그 미천한 미물이 어떻게 사람구원 할 줄을 압니까? 여기서 제가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라고 해서 다 사람이 아니고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눈다 그 말입니다. 우리보기에는 다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이 더운 날에 헉헉거리면서 살아가지만, 하나님 보기에, 그리고 천사보기에, 그리고 하나님의 지도를 받는 이 자연물이 보기에는 사람을 똑같은 인간으로 안 봐요.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사자들이 알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세상이 이런 세상입니다.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데려감을 당하는 작업, 저는 처음에 그걸 기능이라 했는데, 그러한 작업이, 그러한 기능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어요.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몸은 뭡니까? 그런 사건, 그런 기능들이 작용하는 현장이지요. 딴 게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교회 만들려고 모아놓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십자가사건을 현장화시키는 겁니다. 그 기능을. 이것은 지옥 갈 인간이 흉내 낼 수도 없는 겁니다. 지옥 갈 인간이 흉내 낼 수 없지만 그들은 또 흉내 내고 싶어 하겠지요. 성경에 있으니까.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천당 간다고 사기치고 하겠지요. 

그 일에 대표적으로 남용된, 오용된 단어가 나옵니다. 11절에 보면,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여기까지는 좋아요. 그 다음에 보면 “혹은 목사”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오늘날의 목사 같은 이 목사라는 단어는 성경에는 없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목사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 목사가 아닙니다. 그냥 양치는 사람. 목부, 목동, 그런 사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도 제가 이야기했지만 이런 사람은 기능적이라는 말입니다. 존재가 아니고 기능적이에요.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거예요. 하나님이 기능은 복음을 위하여, 복음에 의해서 주어졌기 때문에 그 모든 움직임 자체가 빙의, 죽은 예수님의 영이 임한 사람들을 찾아내고 확인하고 그들에게 사태파악을 알려주는 일들과만 관련되어 있지 교회라는 업체를 만들기 위해서 이러한 기능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기능과 반대되는 것이 뭐냐? 존재인데 그 당시 교회의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기능을 하는 존재자가 없었는가? 있었어요. 그 때는 목사라 하지 않고 장로라 하는 겁니다. 장로와 집사라고 했던 겁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 보면 감독이 나오는데 헬라 쪽에서는 감독이라 하고 유대 쪽에서는 장로라 하고 그런 겁니다. 

교회에 일종의 책임자를 둔 거예요. 그 책임자를 어떤 사람을 두느냐 하면, 사도행전 20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책임자 되는 조건이 있어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28절에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성령, 죽은 자의 귀신이지요. 죽었던 자의 영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감독자의 특징이 뭐냐? 죽은 예수님의 영이 임한 사람, 빙의된 사람이 감독자에요. 감독자로 삼고 그 사람들의 일이 뭐냐 하면, 복음과 위배되는 것, 복음과 위배되는 것을 위배된다고 이야기하는 기능을 해야 될 사람, 복음을 사수하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교회 감독자에요. 

복음이 우선이지 교회가 우선이 아닌 겁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안보여요. 그냥 기능만 작용할 뿐이에요. 한 25년 동안 교회 복음 있었다. 그 다음 주에 복음이 없다. 그러면 교회 없어진 거예요. 교회 없는 겁니다. 이처럼 죽은 분의 영이 임한 사람에게만 그리스도 몸이 되고 교회가 되니까 그리스도 영이, 성령이 임하지 않았으면서도 천국가고 싶어서 나름대로 천국 가는 여행사, 이런 것을 만들어내서 천국을 보내주면서 자기영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나오겠지요. 

그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옛날에도 있었어요. 에스겔 34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2절에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나는 이 땅의 목자들과 싸우겠다. 목사 아닙니다. 목자들입니다. 8절에 보면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의 무리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먹을 것이 있어야 먹이지요. 

복음을 알아야 먹이지요. 여기 34장 2절에 보면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저주가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들이 천국가려고 시도한다면 이 사회 어떠한 업체들이 등장하는가, 미리 좍 깔아놔요. 

그게 오늘날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를 깔아놓고 성령을 받지 않은 목사와 성령 받지 않은 양들을 모아놓고 천당 간다고 대한예수교장로회 괄호 열고 ‘합동’ 괄호 닫고, 그러고 있는 거예요. 괄호 열고 ‘통합’ 괄호 닫고. 교회 간판에 뭔가 문양 같은 것, 프렌차이즈 있잖아요, 처갓집통닭, 그런 것처럼 붙여놨어요. 우리는 통합측입니다, 우리는 장로교입니다, 감리교입니다, 침례교입니다, 이런 것을 붙여놨어요. 프렌차이즈 하듯이. 

프렌차이즈 하는데 돈이 들어요. 교단에 헌금을 내야 되니까. 그런데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느냐? 오는 교인이나 목사나 자기 자신이라는 정체성의 가치를 안 빼앗기기 위해서, 그걸 더 가치 있게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대상자를 자기가 선택해서 고르다 보니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나는 내게 필요한 예수를 원할 때는 교회 가면 된다. 교회는 나를 구원시킬 것이다. 그 예수라는 분이 있으면 나는 안 깨지고 안 망하고 나는 실패 안 해도 될 거야.’ 라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 갔고, 교회 목사는 ‘당신들이 이 교회 옴으로 말미암아 이 교회는 괜찮은, 소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권위 있는 교회,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에 가장 유리한 교회로 인정받으면 이쪽동네, 우리 교회라는 동네에서 괜찮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 가지고 장사하는 겁니다. 

유진박이라는 사람 있지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4살 때부터 협연하고 줄리아드 나온 그 사람이 아스퍼거 증후군에 걸렸다는 거예요. 그게 자폐증의 일종인데 머리는 천재인데 나머지는 전부 다 망가진 사람. 그 사람이 연주할 때 사람들은 좋아해요. 자기 일에 몰두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사람을 누가 양육하느냐? 

양육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우선 양육의 반대말부터 먼저 알아봅시다. 양육의 반대말은 앵벌이입니다. 또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린다. 그런데 서울미대나 홍대미대를 못나왔지만 그림은 천재적이다. 그러면 여기에 어떤 매니저가 등장하겠지요. 그것은 그림, 음악이라는 것을 하나의 돈벌이의 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그게 매니저지요. 좋은 매니저도 있긴 하지만. 

유진박이라는 사람이 버는 돈을 전부 매니저가 다 가져갔어요. 이게 에스겔 34장에 나오는 그 목자들이에요. 자기 배를 채운다는 말은, 나는 목사 짓을 해서 안 망하려 한다는 강렬한 것이 강렬하게 자기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4장 12절에 봅시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봉사거든요. 

봉사라는 것은 섬긴다는 것이고, 섬기는 자는 자기 이익이나 어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따로 챙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게 봉사잖아요. 섬기는 것. 이미 가질 것 다 가진 자의 여유 아닙니까? 그러면 이런 봉사자는 어떤 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하나님 앞에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는 것, 잃어버린 요소를 집어넣을 때 이것이 바로 양이 되는 겁니다. 

양이라는 것은 목자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스스로 선다는 이것은 곧 망가지는 일이다. 이것은 버림받는 짓이다. 따라서 나는 목자 없이는 못살겠다.’ 이게 목자와 양의 관계거든요. 이런 관계가 바로 하나님 제대로 믿는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를 않아요. 유대교를 믿는다는 이스라엘에서 통계를 내보니까 20퍼센트가 신의 존재를 인정해요. 

그리고 이란은 99.99퍼센트가 신을 인정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둘 다 로마서 1장에 어긋나요. 로마서 1장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다 신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이미 신자에요. 신을 인정합니다. 명칭이 부처가 되었든 우주가 되었든 상관없어요. 모든 인간은 다 신을 알고 있다고 이미 성경에서 확정 내렸습니다. 신이 없는 인간은 없어요. 중도 얼음에 미끄러지면 “아이고, 하나님” 하잖아요. 

명칭이야 상관없어요. 일단 그들은 신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신을 알고 있는 이상은, 진짜 천국 가는 신자는 뭐냐? 불신자가 되어야 돼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될 때만 구원을 받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신을 믿기 때문에. 자기를 위한 신을 인정하기 때문에 신을 믿지 않아야 돼요. 인간들은 신을 믿든 안 믿든 간에, 교회를 나오든 안 나오든 간에 매일 신을 인정하기 때문에 매일 하는 짓거리가 뭐냐? 

용어야 뭘 사용하든 상관없어요. ‘과연 신이 나를 도와줄까, 행운이, 행운의 여신이 나를 찾아올까?’ 하는데 여신이든 뭐든 간에 신입니다. 신이 나를 찾아올까, 매일같이 시험하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신이 오늘도 나에게 행운을 줄까, 신이 오늘도 나에게 행운을 줄까?’ 거기에 대한 참된 신은 무능한 신이에요. 침묵입니다. ‘네가 신인데 내가 도와줄게 뭐가 있나?’ 

좀 도움이라도 받았다 싶으면 호들갑을 떨면서 ‘내가 착하니까 하나님이 나를 도와줬다.’고 유난을 떨고 있지요. 하나님은 입을 다물어요. 왜? 죽은 자기 때문에. 상실한 자기 때문에. 죽었더라, 죽었더라, 그 끝은 노아홍수거든요. 죽었더라, 죽었더라, 가 창세기 5장이라면 6장, 7장에 보면 완전히 하나님께서 진노의 홍수를 다 내려버렸어요. 

그래서 인간은 이미 진노 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내가 신을 인정하기 때문에 신을 결국은 안 믿는 거예요. 왜? 신을 인정하기 때문에. 나는 신에 대해서 아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새로운 일에 대해서 전혀 선택할 의사가 없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사고방식 때문에 예수든,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전부 다 자기가 스스로 살기 위한 앵벌이대상으로 선택해버려요. 

‘예수? 신학교 가서 목사 돼?’ 그거 괜찮은 돈벌이가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어려울 때 다 하나님을 찾는데 하나님에 관련된 직업을 가지게 되면 굶는 일은 없겠다.’ 중요한 것은 말발이거든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발만 날리면 하루 일하고 6일 노니 이만한 직업은 없겠다, 해서 목사 되는 겁니다. 매니저에요. 

목사 자신이 기능인데, 그것도 복음적 기능인데 이걸 존재화 시켜가지고 “에베소서 4장 10절을 봐라. 목사가 나오잖아.” 그렇게 따지는 거예요. “목사라고 거기 나온다. 그러니 나는 주의 종이니까 무조건 내 말에 복종해. 그래야 네가 천국 가. 내가 축도하면 손가락에서 에너지 나와. 어벤저스야. 축도하면 복을 받고 내가 저주하면 저주받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간증 세워봐? 나한테 저주해서, 뒷담화 하다 사업 망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야. 장로 가운데 그런 사람들 많아.” 이런 식으로. 

봉사가 아니라니까요. 네 덕에 내가 좀 살자 그 말이에요. 그러면 교인들은? “목사님 덕에 우리 좀 삽시다.” 둘 다 죽이 맞는 거예요. 안 망가지려고 하고, 안 깨지려고 하고, 안 죽으려고 하고. 왜? 죽은 자의 귀신을 안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을 안 받았기 때문에. 그런 자기 챙기는 것 외에는 신경 쓸 것이 없어요. 

목사 가운데 이런 목사가 있어요. 하나님의 원어를 알아야 주의 뜻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원어 아는 사람은 없지요. “내가 신학교를 나와서 원어, 헬라어 히브리어 했으니 제가 원어 가르쳐 드리면 다른 목사들이 찾아내지 못한 아주 오묘한 비밀을 원어를 통해서 제가 밝혀낼 테니까 원어를 통해서 나오는 진짜배기 생수 같은 말씀을 받아야 여러분은 천당 갑니다.” 

이것은 또 원어의 매니저인가? 무슨 수법의 앵벌이입니까? 원어요? 이제는 두 번 다시 나에게 원어라는 말을 하지 마세요. 모든 인간은 자기만의 원어를 갖고 있어요. 한국어, 영어, 다 그게 원어에요. 헬라어 히브리어만 원어가 아니고 모든 언어가 원어입니다. 나만의 원어를 만들어봅시다. 나만의 원어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일단 구음버전에 맞춰서 점과 선과 간단한 면적으로 구성합니다. 동그라미나 네모나 점, 작대기를 그어가지고. 음성을 실을 수 있는 기호들을 준비해놓고 물체에다 미리 준비된 단어 하나를 옮기면 그것이 명사가 돼요. 그리고 더불어 관사도 덧붙여 보는 겁니다. 그 다음에 나를 지칭해 보는 거예요. 이것이 인칭대명사입니다. 

지금 우리는 원어 만들기를 하는 거예요. 나를 위한 원어 만들기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나 중심으로 가까운 사람, 먼 사람, he, it, 그렇게 만들어보는 거예요. 그리고 대화를 할 때는 6하 원칙에 의해서 의문대명사를 만들어보는 겁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누구십니까? 이럴 때 필요한 것. 벌써 여러분 머릿속에 만들어가지고 있지요? 

기호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음성을 이렇게 실으면 돼요. 거기에 형용사, 부사를 만들어놓고 물체에 내 마음을 상세히 전달해보는 겁니다. 그 다음에 동사를 손대면 됩니다. 동사를, 지나가는 것은 딱딱한 점으로 여기고요, 미래에 올 추이를 표현하는 동사를 만들 때 과거는 완료, 미래는 미완료로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놓습니다. 

그 다음에 동사에서 파생한 형용사도 만들어 봅니다. 소위 분사라고 하는 겁니다. 번역할 때는 ‘……하는’, 또는 ‘……하는 중’, 그렇게 하면 돼요. 그 다음에 마음을 담을 때 짧게 명령할 때는 명령어를 만들고 다음에 접속사, 전치사를 계속 계발합니다. ‘……위하여’, ‘……안에’, ‘……처럼’, ‘……부터’, ‘……위에’, ‘……향해’, 이런 것은 전치사고, 그리고, 왜냐하면, 하기 전에, 비록 ……일지라도, ……하자마자, ……할 때마다, 이런 것은 접속사에요. 

그 다음에는 그걸 더 어순 따라 연결합니다. 그 다음에 사람에 따라서 어미에 따라서 변형을 줘요. 변형을 주게 되고 동사에 따라 변형을 주게 되면 나만을 위한 원어 만들기 끝. 참 쉽지요, 잉! 이게 언어에요. 이태리어든, 알라스카어든, 아프리카어든, 헬라어든 관계없어요. 전부다 그 중앙에는 누가 있느냐? 내가 있어요. 내가 신이기 때문에. 

내게 필요한 의미만을 위해서, 어떤 성경구절이라도 나에게 필요한 것만 골라서 왜곡되게 해석할 수밖에 없어요. 살아 있는 나를 더 살려보겠다고. 그러니 헬라어 히브리어를 신학교에서 어줍지 않게 배운 그것 가지고 “아마추어들 다 와. 나 프로야. 나 프로페셔날이야. 나 자격증 있어. 나에게 원래 원어에서 나온 진짜 계시를 받아.” 이런 식으로 사람 끌어 모아서 돈벌이하고 앵벌이 하는 짓거리, 매니저역할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오늘날 목사라는 자들입니다. 그게 바로 목사라는 자들이에요. 

목사라는 자들, 이들의 특징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죽음이라는 극한요소를 매일같이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은 가짜들입니다. 매일같이 죽음. 다시 말해서 ‘이거 하고 죽을래.’ 뭐 하다 죽을래. 봉사하다 죽을래. 죽음이라는 극한 요소를 매일같이 뿜어내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사도도 아니고 전도자도 아니고 목자도 아니고, 목사라는 단어를 아예 없애버리고 목자로 합시다, 목양자도 아니고, 그리고 교사도 아닙니다. 

어떠한 수단과 수법도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그 사건, 그 사건이 지금도 반복해서 되풀이되는 것,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 드러나는 현장이 돼요. ‘아, 우리가 이 세상을 그만살고 떠나도 괜찮구나.’ 하는 그러한 감. 그럴 때 “오겡끼데쓰까?(주님, 거기 잘 계시지요?)저는 여기 주님 덕분에 잘 있어요. 죽어야 되는데, 죽어야 되는데, 와따시마 겡끼데쓰, (제가 일본말을 두 개 밖에 몰라요) 죽어야 되는데 주님이 안 죽이시니까 아직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끼리 인사할 수 있는 관계, 주님하고 주고받는 관계,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결국 이 목사를 엉터리 목사로 유발한 것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그렇고 그런 인간들이기 때문에 성경전문가 되어가지고 ‘그 사람에게 설교 들으면 천당 가겠지.’라는, 자기 자신이 안 망가지려는, 괜찮은 인간을 계속 천국까지 집어넣으려는 욕심으로 인하여 생긴 거예요. 

비밀이라는 것은 그 비밀이 그 사람을 삼킵니다. 정말 비밀 가졌습니까? 그러면 그 비밀이 도리어 그 사람을 삼킬 때에 으레, 아주 마땅히, ‘예, 그 비밀이 나를 삼켜서 비밀이 비밀 되게 한다면 저를 삼키옵소서. 잡아먹으소서.’라는 식으로 우리가 이 복음의 비밀 앞에 조금도 나 자신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해야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조금도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아야 돼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골라잡는 대상이 아니고 우리가 골라잡지 않은 대상으로 올 때에 그분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성경에 보면 그런 것이 많이 나와 있어요. 사사기 13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노아 가정에 장차 불임여성인 마노아 부인이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는 나실인이 된다고 천사가 와서 여자에게 먼저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마노아에게 이야기할 때 마노아도 나중에 천사를 드디어 만났습니다. 

17절에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이름을 물었어요. 천사는 기능인데 이름을 물으면 안 되거든요. 기능이거든요. 그런데 마노아 본인이 존재라고 여기고 존재는 이름이 있으니까, 명사가 있으니까 “나는 이런 이름인데 당신은 어떤 이름입니까?” 이름 알아서 뭐하려고? 내가 원하는 대상으로 잡아당기기 위해서 이름을 부르겠다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식으로 내 바운더리 내로 그 사람을 당길 때는 이름을 부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 내가 잘되기 위해서. 그 때 천사가 하는 말이 “내 이름? 이름은 알아서 뭐하려고? 주도권이 너에게 있으면 안 돼. 나한테 있어야 돼.” 내 이름 알 필요 없다는 거예요. 너도 이름이 없고. 너도 이름을 알 필요가 없고 내가 널 가지고 일을 하겠다는데 무슨 이름이 필요합니까? 

그러면서도 이름을 이야기해 줍니다. 기묘자라. 기묘하다. 수련회 참석해서 들으신 분은 알겠지만 마태복음 9장에서 한 아이를 주셨는데 그 아이 이름이 뭐냐? 기묘자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예수의 이름은 우리가 아는 너 나 그런 이름이 아니에요. 존재를 파괴하는 이름이에요. 기존의 이름을 다 없애는 이름이에요. 

우리 존재를 기능으로 바꾸시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기묘자에요. 예수라 하지 마세요. 기묘자에요, 기묘자. 우리 쪽에서 부를 수 없는 이름, 우리 쪽에서 소유할 수 없는 이름, 그 이름, 예수님 붙잡아서 주도권 쥐고 내 영역에서 내 치다꺼리나 하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교회 만들어놓고 예수 이름 불러놓고 예수 멱살 쥐고 와가지고 “우리 교회 부흥시켜 놔.” 그런 대상이 예수님이 아니에요. “나 너 죽일 거야.” “죽여주옵소서.” 죽여도 마땅하지요. 

이미 죽은 자의 귀신이 있는데 죽으면 어때요. 그렇게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기능이에요, 기능. 주께서 매일같이 일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 일을 모를까요? 매일같이 우리가 나 사는 일에 급급하다 보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안 다칠까? 어떻게 하면 손상 안 될까? 어떻게 하면 나는 욕을 안 얻어먹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인기 얻을까?’ 

매일 자기당도리, 자기 지키는데 급급하다 보니까 주님이 주신 은혜 같은 것은 전부 다 날려 보냈어요. 세상사는 것이 전혀 안 기묘해요. 기묘하지를 않습니다. ‘북한에서 핵을 개발해? 그러면 남쪽에서도 핵개발하면 되겠네.’ 이게 기묘한 겁니까? 이성적이지요. ‘일본에서 수출규제를 하고 화이트리스트라 해서 저희들 맘대로 만들어 놓은 것, 그렇다면 우리도 일본 차자.’ 

이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지 뭐가 기묘한 겁니까? 교회 부흥되기 위해서 새로 온 사람들, 봉투에 5만원씩 넣어주게 되면 그 사람들은 ‘야, 교회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구나.’ 해서 교회 나오지 않겠느냐. 바자회도 열까? 이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이지 무슨 기묘한 일이에요? 

교회는 기묘한 자들의 단체입니다. 기묘한 자들이 모여서 기묘한 이야기만 주고받는 거예요. 하도 적절한 언어가 없기 때문에 “오겡끼데쓰까?” 한 거예요. 주님 거기 잘 계시지요? 주님 덕분에 잘 있습니다. 그거 외에 우리가 할 말이 뭐가 있어요? 주님 덕분에 잘 살아 있다는데. 그게 사도의 기능이고, 그게 선지자의 기능이고, 그게 목자의 기능이고, 그게 바로 교사의 기능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목자가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양이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교사가 되는 겁니다. 

처음 나온 교인에게 좀 배우세요. 처음 나오는 교인들 교인 수 몇 명인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복음만 생각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런 때가 있었었었잖아요. 동사 변형시킨 겁니다, 지금. 주님 복음만으로 만족했던 그 시절이 아, 옛날이 되고 말았어요? 날씨가 더워서 그런 거예요? 이젠 알만큼 알았다는 뜻입니까? 

이제는 기묘자가 쳐들어와서 내 인생자체가 주님에 의해서 주님이 주도권을 쥐고 항상 흐릿하게 제거하고 소멸해가는, 점점 더 이제는 주님과 만날 죽음이 가깝도록 처리해주는 그것에 대해서 주 앞에 마음껏 감사하는 그런 사람이 됩시다. 그러한 모임자체가, 그러한 모든 움직임이 바로 봉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 세상 엉터리만 많이 보았습니다. 절 지어놓고 교회라고 우기는 그런 곳을 거쳐 왔습니다. 엉터리인데 그들만 엉터리가 아니고 나도 엉터리인 것을 왜 우리는 진즉 몰랐습니까? 나 자신부터 잃어버린 자였음을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